기대면 추락 위험
by. 메마


"너 이런 데에 있기에 안 어울린다던데."

 

누가요? 정성찬은 대충 대답 하면서 나무 젓가락을 쪼갰다. 럭키마트네 주인 이모가. 젓가락 끝이 짜장면 소스에 물들었다.

 

"뭐 그럼 어디 있어야 한대요."

"그건 말 안 하더라."

"호빠라도 가란 건가."

 

자조적인 농담에 몇 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별 생각 없이 덩달아 웃으면서 젓가락으로 집어 든 면을 입으로 가져갔다. 속도에 맞추다 보니 밥을 거의 마시듯이 먹는 게 습관이 됐다. 정성찬 빼고는 다들 식도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국물도 목구멍에다 냅다 들이붓는 아저씨들 뿐이라서.

 

이런 촌구석 동네에 이런 총각이 왜 있어. 그런 말은 한 달 반 동안 숱하게 들어서 이미 면역이 된 상태였다. 나름 시 단위로 떨어진다지만 멀쩡한 백화점이나 아울렛 하나 없는 곳이었다. 청년 인구조차 드문 이런 소도시에 정성찬 같은 사람이 눈에 띄는 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개중에는 무작정 가게 앞까지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카센터 일하는 총각이지. 우리 딸 안 만나 볼래. 혼기 꽉 찼어. , 저 스무 살인데요. 저 많이 노안인가. 용케 웃는 낯을 유지하면서 대답했다. 고작 한 달만에 터득한 거였다. 이런 동네에서 프라이버시 같은 건 사치라는 점도 덤으로.

 

"다 먹었어?"

 

. 고개를 흔들어서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털었다. , 오늘도 십 분 컷이네. 이제 타이어 좆뺑이 몇 시간만 더 치면 집에 간다. 거기에 플러스로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욕 대판 처먹고 나면 하루 땡. 성찬아. . 뒷정리 하던 것도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초 사회 특유의 군기에서 살아 남으려면 엉덩이가 가벼워야 했다.

 

허우대는 좋은데, 뭔 남자애가 이래 허얘가지고 예쁘게 생겼어. 더러운 것도 잘 못 만지겠구만. 지방 소도시 출신 엑스 세대들은 외모만 보고 서울에서 온 도련님 취급을 했다. 남초 기술 직종에서 살아 남는 데에 그런 이미지는 독이었다. 다행히 그 이미지를 벗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실상은 껍데기만 빼면 도련님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이었으니까. 뭘 시켜도 빼지 않고, 무슨 말을 들어도 웃어 넘겼다. 귀하게 자란 것 같은 얼굴을 달고서 군말 없이 타이어를 갈고, 카센터 바닥을 대걸레질 했다. 예쁘게 정돈된 이목구비와 흰 피부에 기름이 묻어도 내버려 뒀다. 옷은 검은 나시, 검은 티셔츠만 몇 장 사서 돌려 입었다. 퇴근하면 바로 인근 씨유로 직행해서 물류 진열부터 했다. 다들 그 부조화를 좋아했다. 평판이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카센터 매출 올랐네. 성찬이 덕분이지. 점마 보겠다고 요즘 여자 손님들 자주 온다이가. 일도 잘 하고 눈치도 빠르고.

 

"아이스 블라스트요."

 

그 날도 분명 평소랑 다를 바 없었다. 타이어 갈고, 정비 일 배우고, 점심으로는 순대국밥 먹고, 바로 편의점 와서 물류 진열. 평소대로 마무리 될 그 일상이 살짝 틀어졌다. 몇 번 온 적 있는 고등학생 때문에. 늘 고개를 푹 숙이거나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제대로 본 적 없지만 느낌이란 게 있었다. 매번 생활복이나 교복 차림으로 왔으면서 지금은 당당하게 담배 주문 중이고. 3이라서 잠시 미친 거거나, 내 기억력이 좆밥인 줄 알거나.

 

"민증이요."

 

정성찬은 무심한 투로 그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러자 주머니에서 민증을 꺼내서 내민다. 지갑도 아니고 주머니에서 그게 나오는 것부터가 이미 에러인데 아마 그런 디테일은 모르겠지. 받아 든 민증에는 김주원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얼굴 좀 보여주세요."

 

편의점 알바생다운 기계적인 톤으로 말했다. 눈 앞의 고등학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모자를 쓰고 있던 머리통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손에 쥔 민증을 떨어뜨렸다.

 

"."

 

뭐야. 박원빈이잖아.

 

 

 

 

 

 

기대면 추락 위험

정성찬 박원빈

 

 

 

 

 

 

과거를 반추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정성찬에게는 박원빈이 그런 상대.

 

열네 살 때부터 열다섯 살. 친척 손을 떠나 보육원에 맡겨진 시기. 풀어 말하자면 고등학생 신분으로 덜컥 정성찬을 낳았던 부모 탓에 울산의 친척 집에다 맡겨졌었지만 그게 여의치 않았던 시기. 거기서 처음 만났을 때의 박원빈은 열세 살이었다. 고작 한 살 차이인데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간극 때문인지, 박원빈이 또래보다 왜소해서 그런지 한참 어리게 느껴졌다. 당시의 박원빈은 세 가지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었다. 말수도 적고 그마저도 느렸고 친구도 거의 없는 애. 정성찬은 거기다 네 번째 키워드를 달았다. 그래서 신경 쓰임.

 

옆에서 보고 있으면 꼭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또래보다 덩치도 작고 말랐는데 말 없이 방에만 박혀 있는 모습이 그랬다. 마침 같은 방을 썼던 탓에 몇 번 챙겨줬다. 봉사자들이 주고 간 간식을 나눠주거나, 숙제 하다가 엎드려 잠들어 있으면 손에 쥔 연필을 빼서 답을 적어 주거나, 돈이나 물건이 없어지면 되찾아서 걔 책상 위에 두거나. 반면 박원빈은 그래도 쉽게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말을 걸거나 가까이 가면 눈을 피하면서 자리를 떴다. 내가 무섭나. 그래도 정성찬은 굴하지 않고 하던 대로 묵묵히 챙겨 줬다. 학년도 달랐고 그럴 정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이상하게 걔는 유독 신경이 쓰여서.

 

같은 방을 쓰고 깨달은 점이 있었다. 걔가 유독 밤마다 악몽을 자주 꾼다는 거. 하루는 앞머리가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뒤척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잡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뒤척임이 잠잠해졌다. 그 뒤로는 박원빈이 악몽에 시달릴 때마다 매번 손을 잡아 줬다. 나중에는 악몽을 꾸지 않는 날에도 잡았다. 더 나중에는 손을 잡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둘 사이의 불문율이자 일종의 의식이었다. 대부분 정성찬이 먼저 잡았지만 가끔은 박원빈 쪽에서 잡아 올 때도 있었다. 잠결에 잡는 척 하는 게 너무 티가 나는데 아직 초등학생이라서 봐줬다. 아침이 되면 바로 손을 놓고 아무 일도 없는 척 하는데, 이건 귀여워서 봐줬고.

 

"그냥 안 살게요."

 

박원빈은 민증을 도로 후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무의식적으로 그 손목을 붙잡았다. 박원빈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당황한 기색이 서린 그 표정이 어릴 때랑 지나치게 똑같다.

 

"지금 여기서 지내?"

 

육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래도 정성찬은 박원빈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 할 수도 있다는 선택지는 아예 고려하지도 않았다.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자신감.

 

"......"

 

박원빈은 예상 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지. 정성찬은 영수증 프린터의 피드 버튼을 눌렀다. 백지 상태의 영수증이 달려나오자 적당한 길이에서 끊었다. 아까 물류 체크할 때 썼던 볼펜을 꺼내서 전화번호 열한 자리를 적었다. 아이스 블라스트 대신 그 영수증을 계산대 위에 올렸다.

 

"나 한 시간 뒤에 마치거든."

"......"

"밥이나 먹자."

 

-

 

쉽게 적응이 안 됐다. 젖살이 빠져서 얼굴 선이 날카로워졌고 귀에는 피어싱이 있고 담배를 사고 더 잘생겨진 박원빈. 재료나 주제는 동일한데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 같았다. 마지막 기억이 초등학생 때니 사실 당연한 거지만.

 

"오늘이 며칠이지?"

 

정성찬은 불판 위에 삼겹살을 올리면서 태연하게 물었다. 박원빈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도 대답을 해줬다. 12 16일이요.

 

"곧 성인 되겠다."

 

손 안 잡아 주면 제대로 못 자고 뒤척이는 모습이 아직 뇌리에 박혀 있는데 이제 몇 주 뒤면 성인이 되는 박원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고작 한 살 차이인데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박원빈과는 매번 경계선에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6과 중1. 3과 스물.

 

"3이면 학교 안 나가지 않아? 지금."

"아직 방학 아니라서요."

"그래도 수능 끝난 거 아니야?"

"저는 기숙사라."

"."

"기숙사 살 거면 강제로 나오게 해요. 저희 학교는."

"그럼 집에 안 있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 미안. 반사적으로 사과했다. 아직 시설에 있나 보네. 왜 이런 말을 했지. 생각 없는 말을 꺼낸 게 순간 미안해졌다.

 

"너무 말랐다."

 

좀 먹어. 다 익은 고기를 앞접시에다 옮겼다. 낡은 고깃집 내부는 만취한 아저씨들의 고성과 벽에 붙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정치 뉴스로 소란스러웠다. 박원빈은 눈치를 살피면서 젓가락을 만지작거렸다.

 

"형 봤어요."

"? 어디서."

"편의점에서 일하는 거. 학교 근처라."

", 그래서 자주 온 거네. 고개 푹 숙이고."

"......"

"담배는 사지 말고. 몇 주만 참으면 되잖아."

 

, 방금 좀 꼰대 같았다. 정성찬이 바람 빠지듯이 웃었다. 박원빈은 여전히 웃지 않았다. 여기 들어오고부터 단 한 번도.

 

"나 쭉 뭐 하고 살았는지 안 궁금해?"

 

몇 개월 앞선 성인의 도리로 먼저 말을 붙였다. 시설을 떠난 뒤로 단 한 번도 연락한 적 없는 주제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스스로도 웃겼다. 정성찬은 시설을 나오자마자 박원빈 뿐만 아니라 그 곳과 관련된 모든 이들과 연락을 끊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이 전화번호 바꾸는 거였다. 당시에는 막연히 인생 리셋 같은 게 하고 싶었다. 그 뒤로는 고등학교 자퇴하고 부모님한테 받은 푼돈에 알바비 보태 월세 보증금 모으는 데 바빠서 그 곳에서의 일은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그 중 유일하게 박원빈만 어쩌다 한 번씩 떠올렸다. 악몽 꿀 때. 가방 메고 지나가는 초등학생들 볼 때. , 엘리베이터 탈 때도 가끔.

 

"."

 

박원빈은 몇 번 움직이지도 않은 젓가락을 내려 놓았다.

 

"하고 싶은 말 있는데요."

 

얼굴은 물론 목까지 벌개져 있었다. 우리가 술을 시켰나. 아니, 얘 술 못 시키는 나이인데.

 

"혹시 기억하나 해서."

"."

"형 시설 떠나던 날."

"......"

"제가 형한테 메일로 연락하자고 했던 거요."

 

집게를 움직이던 손이 점점 느려졌다. 묻혀 있던 기억이 고개를 들었다. , 차라리 기억을 못 했으면 좋을 텐데. , 저 지금 핸드폰 고장 났잖아요. 형이 메일 주소 알려주면 꼭 연락할게요. 새 전화번호 생기면 그것도 거기로 보낼게요. 손목을 붙잡아 당겨서 귀에 속삭이던 목소리.

 

"진짜로 메일 보냈었어요."

"......"

"...좀 많이."

"......"

"형은 한 번도 읽은 적 없지만."

 

잠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텔레비전에서는 정치 뉴스에 뒤이어 기상 예보가 방영 중이었다. 작년과 같은 기록적인 한파는 아니지만, 연일 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는 연말입니다. 정성찬은 끝이 까맣게 탄 집게를 내려 놓았다.

 

"...그냥 지우고 싶었던 거죠."

"......"

"거기서 기억 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도 전부."

 

앞접시에 덜어 준 고기 몇 점이 차갑게 식어 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형이 저는 안 지웠으면 했는데."

"......"

"...주제 넘었으면 죄송해요. 형한테 그만큼 각별하진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조용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였다. 그게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 얘 원래 이랬지. 말수도 적고 느리지만 반드시 해야 할 말은 또 하는 거. 정성찬은 왠지 모르게 거기에 말렸다.

 

"메일 원래 잘 안 읽다 보니까."

 

무리수를 두도록.

 

"잊어버렸어. 미안."

"......"

"오늘 집 가서 확인할게."

 

구차한 변명이었다.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지. 박원빈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살짝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지금 왜 봐요.

 

"어차피 다 지워졌을 걸요."

"......"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찾지 마요, ."

"......"

"형이 지금 그거 보면 저 죽을게요."

 

걔가 뱉은 말들이 동그란 은색 테이블 위를 굴러 다녔다. 다시 아까와 같은 침묵이 맴돌았다. 텔레비전 속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내일 서울 아침의 기온은 영하 5도까지 내려 갈 예정이니, 출근길에는 옷차림을 두텁게 하셔야겠습니다. 이상 날씨 정보였습니다.

 

-

 

이제 막 계산을 마치고 영수증을 받아서 가게를 나설 때였다. 박원빈이 갑자기 말도 없이 손에 든 영수증을 빼앗아 갔다.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라 당황해서 멍하니 서 있는데, 백팩을 열어 주섬주섬 펜을 꺼내더니 뭔가를 적었다. 전화번호 열한 자리였다. 그것도 까맣고 굵은 컴퓨터용 싸인펜으로 적은.

 

"저 이제 핸드폰 있어서요."

 

열아홉 살의 박원빈은 열세 살 때와는 다르게 자꾸 예상을 엇나간다. 정성찬은 그 사이에서 시차 적응 중이었다

 

네이버에 로그인 한 다음 메일함에 들어가 봤다. 카센터로 출근하고 편의점에서 퇴근하는 삶에서 메일함 정리는 사치였다. [알바천국] 개인정보 이용 내역 안내. (광고) 버거운 채무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 [네이버페이] 결제하신 내역을 안내해 드립니다. 메일을 오래된 순으로 정리하는 법을 몰라서 계속해서 스크롤을 내리다가 그냥 노트북을 꺼버렸다. 그걸 이제 와서 무슨 수로 찾게.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광역시가 울산이었다. 고속 버스 터미널에 갈 때마다 전광판에 대문짝만하게 적힌 울산이라는 두 글자를 보면 자연히 그 곳이 생각났다. 울산. 보육원. 박원빈. 생각의 흐름은 늘 비슷했다. 걔는 거기에 아직도 지낼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사실 딱히 다시 만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시절 인연이니까. 열세 살 때의 그 모습으로 기억 속에 남겨 놓고 싶으니까.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그 때 귀여웠으니까, .

 

여기 온 이후로 친구를 만난 적이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친구들 대부분은 서울에 있는 터라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가 없었다. 처음 서울을 떠난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너 왜 그런 깡촌까지 가냐. 공장 알바 하다 알게 된 삼촌이 연결 해준댔어. 가서 돈 조금 받고 일하면 정비 일 배울 수 있대. 차라리 여기서 국비를 해. 깔린 게 자동차 학원이야. 국비는 월급 안 주잖아. 그렇게 연고도 없는 외진 곳에 뚝 떨어지게 됐지만 후회는 없었다. 버스 타고 나가면 영화관 정도는 있고, 인근에 맥도날드나 버거킹은 없지만 롯데리아는 있다. 여기 명물인 어탕국수는 입에 안 맞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모은 몇 푼 안 되는 돈으로도 월세 집을 구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래봤자 손바닥만한 창문 하나 붙은 게 다인 낡아빠진 원룸이지만 이 정도도 감지덕지였다. 서울이었으면 이 보증금으로는 쥐구멍도 못 구했을 거니까.

 

"성찬이 오늘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노."

"잠을 좀 못 잤어요."

 

그래 보인다. 몸 챙겨. 카센터 사장이 주먹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무거운 눈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자 영수증 모서리가 만져졌다. 누가 먼저 연락할지 줄다리기라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먼저 줄을 놓으면 누구 하나 쓰러지는 상태. 박원빈은 내가 쓰러지는 꼴 그다지, 보고 싶겠지. 정성찬은 마지막 타이어를 갈 때쯤 결심했다. 내가 먼저 연락 해야겠다. 아무리 그래도 성인이 미성년자한테 먼저 손 내미는 게 역시 맞는 것 같아서. 그 경계란 게 고작 며칠 후면 지워질 경계긴 하지만.

 

원빈아

 

무작정 그 세 글자를 보냈다. 다음에 뭐 보낼지는 이제부터 생각하고.

 

문자로 갚아도 돼?

내가 그동안 메일 못본거

 

멘트 뭐야. 보내놓고도 어이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왠지 머릿속이 안개 낀 것처럼 멍했다. 윈도우 모터를 탈부착 하다가 팔에 생채기가 났다. 집중 안 하나. 다음 달에 실기 안 딸래? 죄송합니다. 흐르는 물에 상처를 씻고 반창고를 꺼내 붙였다. 생각보다 따갑네. 센터에 후시딘 있던가. 카센터 구석에 박힌 구급 상자를 꺼내서 뒤졌다. 때 마침 핸드폰 액정 위로 문자 알림이 떴다. 아니요. , 이게 더 아픈데.

 

죄송해요

버릇 없었죠

사실 돼요

 

일 분도 채 안 돼서 쏟아지는 문자에 헛웃음이 터졌다. 한 살 차이인데 진짜 깍듯해서. 몇 년 간의 공백 때문인가.

 

기숙사야?

나올 수 있어?

있어요

나올래?

그럼

 

한 글자씩 힘을 담아서 눌렀다. 정성찬은 문득 박원빈에게 달았던 키워드가 떠올랐다. 그래서 신경 쓰임. 아직 시차 적응은 실패했어도 이건 그대로였다. 오 년이 지났어도.

 

-

 

손을 잡고 자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벽이 허물어졌다. , 오늘 있잖아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먼저 말을 붙이는 경우도 생겼다. 박원빈은 말이 느리고 두서 없는 편이라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잠이 쏟아졌다. 여기 온 이후로 잠을 설친 적이 많아서 오히려 정성찬한테는 그게 장점이었다. , 중학교 가면 시험 많죠. 초등학생에게 교복 입는 중학생은 한참 선배 같이 느껴졌는지 매번 존댓말이었다. 1학기에는 안 쳐. 근데 2학년 되면 매번 친대. , 진짜요. 처음에는 분명 눈도 잘 안 마주치려 하더니 이제는 꼭 친형처럼 잘 따랐다. 평소에는 주로 같은 학교, 같은 학년들이랑 어울려 다녔지만 박원빈과는 그것과 다른 게 있었다. 단순히 같은 나이와 학교라서 묶이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처음에는 형 중3 정도 되는 줄 알았어요.

?

. 키 커서.

 

바닥에 엎드린 채로 숙제를 끄적이고 있던 박원빈이 문득 꺼낸 말이었다. 아까부터 붙잡고 있던 수학 문제집이 아직도 깨끗했다. 하기 싫나 보네.

 

그럴 수 있지.

 

평소에도 자주 듣는 말이라 익숙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부쩍 커버린 키 때문에 종종 고등학생으로 오해 받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원빈이 너는.

......

4 같아.

 

동그란 뒷통수를 쳐다보고 있으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박원빈은 손에 쥐고 있던 연필을 내려 놓고 뒤돌아 봤다. 4는 좀 아니잖아요, 진짜. 나름대로 화가 났는지 씩씩대는 그 말투랑 짜증 섞인 표정이 귀여워서 한껏 웃음을 참았다.

 

미안. 거짓말이야.

......

사실 3학년 같아.

 

박원빈이 두 눈을 줄인 채로 가만히 노려봤다. 결국 아까부터 참고 있던 웃음이 터졌다. 박원빈이 널부러져 있던 문제집과 필통을 챙겨서 벌떡 일어났다. , 그만해야겠다. 쟤 삐지면 오래 가는데. 아예 방을 나가버릴 생각인지 멀어지는 등을 확 끌어안았다. 미안, 미안. 이건 진짜 장난. 정수리에 턱을 괴면서 중얼거렸다. 품에 안긴 몸이 티가 나게 굳는 게 느껴졌다.

 

화 났어?

 

품에 안고 있던 몸을 돌려서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러자 당황한 기색이 어린 눈으로 올려다 보면서 뒷걸음질을 친다. 왜 그래. 내가 잡아먹냐고. 두 손으로 볼을 감싸쥐면서 살짝 웃었다.

 

원빈아.

 

되게 말랑말랑하네.

 

그래서 처음에 나 그렇게 눈치 보고 피해 다닌 거였어?

......

3 같았다며. 무서워서?

 

박원빈은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맞나 보네.

 

친해지니까 어때.

......

안 무섭지.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있던 볼을 놓아주자마자 얼른 문제집과 필통을 챙겨서 다시 바닥에 엎드린다. 빨개진 귓바퀴와 뒷목이 눈에 들어오자 헛웃음이 나왔다. 진짜 귀엽네. , 쟤랑 계속 같이 방 쓰면 좋겠다. 여기 있는 동안은 계속.

 

-

 

이제 막 편의점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골목길 입구에서 박원빈과 웬 여자애 한 명이 같이 서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게 누가 봐도 대치 상황이었다. 이 추위에 딱 달라붙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볼캡을 쓴 여자애가 못마땅한 듯이 팔짱을 꼈다. 박원빈은 그 앞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등을 돌렸다. 편의점 앞에 서서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 쪽으로 다가오는 박원빈과 마침 맞닥뜨렸다. 그러자 깜짝 놀랐는지 두 눈을 크게 뜨고서 올려다 본다.

 

"여자친구?"

"아니요."

 

인사도 전에 그 한 마디부터 던지자 표정이 굳었다.

 

"쟤가 따라다니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되게 인기남 같은 발언이다."

 

박원빈이 입술을 깨문 채로 노려봤다. 오늘도 편한 차림이었다. 주로 고등학생들이 많이 입는 저지에 발등까지 덮는 청바지 밑으로 살짝 튀어나온 운동화 코.

 

"안 추워?"

 

박원빈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다행이고.

 

"뭐 먹을래? 사줄게."

"저도 돈 있어요."

"그래. 아껴 써."

 

너 뭐 좋아해. 너 뭐 좋아하더라, 라고 물으려다가 질문을 정정했다. 열세 살 때랑 입맛이 같을 확률은 별로 없을 것 같아서. 아무거나요. 박원빈은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대답했다. 정성찬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딱히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때 그 귀여운 모습으로만 기억에 남기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래놓고 막상 눈 앞에 지금의 박원빈이 있으니 생각이 바뀐다. 아니면 고등학생 티를 못 벗은 박원빈이 아직도 귀여워서 그럴 수도 있고.

 

"햄버거로 돼?"

"다른 데 다 문 닫았잖아요."

"미안."

"뭐가요."

"편의점 일 끝나면 이 시간이라 어디 마땅히 갈 데가 없네."

 

편의점 일이 끝나면 이미 밤 열한 시였다. 이 다음에 뭐 하지. 생각해 보니 이 시간에 박원빈을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술집은 애초부터 논외고 피씨방도 미성년자는 열한 시 넘으면 퇴출이고.

 

"형은 어쩌다 여기로 왔어요."

 

그 와중에 먼저 화두를 던진 건 박원빈 쪽이었다. 흐트러진 앞머리가 간지러운지 고개를 한 번 털면서.

 

"일하다가 알게 된 사람이 소개해 줬어. 자동차 일 배울 수 있게 해준대서."

 

햄버거를 쥔 채로 잠자코 듣고 있다. 그게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너는 기숙사 있어서 여기 학교로 온 거야?"

 

박원빈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거기 있기 싫어서요. 이미 예상한 답변이 돌아왔다.

 

"근데 사실 잘 모르겠어요. 시설에 있고 싶은 건지 있기 싫은 건지."

"......"

"곧 스무 살이잖아요. 원칙상 이제 나와야 되는데."

"......"

"근데 나가면 갈 데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또 나오기 싫더라고요."

 

그럼 앞으로 어떡하게. 그런 질문은 속으로만 던졌다. 명절 때만 보는 친척 어른 같은 포지션을 자처하기는 싫었다. 이미 나름대로 최소한의 계획은 세우고 있을 테니까, 굳이. 포털 사이트 화면에 걸린 자립 청년 광고가 떠올랐다. 올해 센터를 퇴소해야 하는 나이가 된 준서는 홀로서기를 준비 중입니다. 거기 계속 있었으면 저기 성찬이라고 적힐 뻔 했네.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형은 자동차 배운다고요."

"."

"안 어울려요."

 

예상 밖의 말이 날아와서 꽂혔다. 덕분에 바로 대답할 말을 못 찾았다. 손에 쥐고 있던 포장지를 구겨서 빨간색 트레이 위에 내려 놓았다.

 

"나랑?"

"."

"?"

 

순전한 의문이 들었다. 럭키마트 이모가 가진 의문을 박원빈도 가지는 데에 대해서.

 

"그거 하면 뭐 기름도 묻고. 손도 지저분해지고 작업복도 입어야 하고 하니까."

"그게 안 어울린다고."

"......"

"근데 맞는 말일 수도 있어. 나 이거 하기에 너무 예쁘게 생겼다는 말 많이 듣긴 해."

 

농담으로 받아치는 쪽을 택했다. 열세 살의 박원빈은 무반응이 곧 긍정이었다. 지금도 그럴까. 같은 주제로 그린 두 가지 그림 속에서 공통점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어울려요."

"......"

"안 어울려서 어울려요."

 

정성찬은 박원빈의 무표정한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방금 들은 말을 굳이 해석하거나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나름대로의 뜻이 있겠지. 감자튀김 안 먹죠. . 박원빈은 물티슈를 찢어서 손가락 끝을 닦았다.

 

"가요. 이제."

"벌써?"

"갈 데 없어요. 저랑 있으면."

 

아까 익히 했던 생각이었다. 박원빈 본인이 더 잘 아는 바였다. 정성찬은 이제 박원빈네 학교가 어디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여기 근처에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는 딱 한 곳 뿐이었다. 정성찬이 아는 바에 따르면 여기서 제법 멀었다. 근데 거기서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온 애를 햄버거 하나 사주고 돌려 보낸다고.

 

"원빈아."

 

혀에 맴돌던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뱉었다. 혹시 우리 집 갈래.

 

-

 

그동안 그 누구도 부른 적 없었다. 확실히 남을 초대할 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왠지 박원빈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치부를 드러내는 데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처음 만난 곳이 거기라서 그런가.

 

"학교에서 뭐라고 안 해?"

"하죠."

 

그래도 딱히 상관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수능 끝난 고3이니 거리낄 게 없겠지. 단 두 명 뿐인데도 방 안이 가득 찼다. 새삼 이 공간이 얼마나 작은 지가 실감이 났다. 현관 문 바로 근처에 붙어 있는 싱크대의 수도꼭지를 돌려서 손을 씻었다. . 조용한 목소리가 좁은 방 안을 울렸다.

 

"대신 자고 가야 해요."

"......"

"새벽에는 문 닫혀 있어서."

 

닫힌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옷 줄까. 형 옷 안 맞을 것 같은데.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럼 그냥 안 맞게 입어. 툭 튀어나온 목덜미 뼈 근처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게 보였다. 손에 집히는 대로 나시랑 티셔츠 몇 개를 꺼낸 다음 내밀었다. 먼저 씻어. 박원빈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 중 흰색 나시를 골라서 집어들었다. 감사합니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였다.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박원빈에 대해서 아는 게 뭐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악몽을 잘 꾸고, 손을 잡아 주면 잘 자고, 말이 느린 편이고, 갇힌 적이 있어서 엘리베이터를 무서워 한다는 것 정도. 그건 다 초등학생 때의 박원빈이다. 지금의 박원빈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업데이트 하지 않고 오래도록 내버려 둔 구버전 소프트웨어나 다름 없다. 앞으로 시설을 벗어나면 어디서 지낼 건지, 무슨 진로를 가지고 싶은지, 담배 살 때 보여 준 민증은 누구 건지, 메일로 뭐라고 보냈는데 보면 죽겠다고 한 건지, 담배 사고 피어싱 좀 뚫었을 뿐 그냥 선량한 학생인 건지, 아니면 보이는 그대로 양아치인지도 궁금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네가 매트릭스에서 자."

 

근데 그건 못 물어볼 것 같네.

 

"제가 바닥에서 잘게요."

 

반면 박원빈은 의심이 없다. 처음 만났을 때 한 살 많은 착한 중학생 형이었으니 지금까지도 그럴 거라고 바로 단정 짓는 점이 그랬다. 만나자는 제안에 바로 응한 것도 그렇고, 곧바로 재워 달라고 하거나, 본인도 돈 있다고 어필하는 점까지, 여전히 순진한 면이 있었다. 결국 매트릭스와 두꺼운 이불은 박원빈 차지가 됐다. 손님용 이불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 장롱에서 얇은 여름용 이불을 꺼내 덮었다. 전기 장판의 온도를 4까지 올렸다. 너무 뜨거우면 말해. 이 모든 과정이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오 년 전 그 때처럼 무의식적으로 손을 잡지는 않을지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이제는 그런 도움은 필요 없겠지. 하얀 나시로 감싸진 날개뼈가 툭 불거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

 

박원빈이 다시 몸을 돌려서 이 쪽으로 누웠다. 얼굴이 가까웠다. 두 명 누우면 가득 차는 좁은 방 탓이었다. 박원빈한테서 어제 마트에서 샀던 샴푸 냄새가 났다. 방금 씻고 나온 멀건 얼굴과 대비 되는 까만색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형은 수능 칠 때 기분 어땠어요."

 

집중하느라 못 들었다. 박원빈이 하는 말 말고, 박원빈한테.

 

"?"

"수능이요."

". 나 수능 안 쳤어."

"......"

"자퇴했어."

 

찬 물을 끼얹는 대답이었다. 이래서 보통 사회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한테는 고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박원빈은 사회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아니니까.

 

"시설에 있었던 거 알게 된 애가 부모 없냐고 해서 팼어."

"......"

"학폭위 참석 하라길래 그 길로 그냥 자퇴했어. 어차피 공부에 뜻도 없었고."

 

박원빈은 표정 변화 없이 잠자코 경청했다. 정성찬은 그 때 받았던 롤링 페이퍼의 내용을 아직도 기억했다. 잘생겼는데 은근 웃기고 은근 착함. 힘들었을 텐데 잘 이겨낸 게 대견하다. 네가 그런 상처가 있는 줄 몰랐어. 뭐가 됐든 당당하게 잘 살아. 나 솔직히 얼굴만 보고 너 잘 사는 앤 줄 알았잖아. 얼굴 썩히지 말고 데뷔 해주라. 갖은 싸구려 위로와 동정이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해가 안 됐다. 딱히 흠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왜 마음대로 동정하지. 동정해도 되는 케이스라고 맨 처음 정한 거 누구지.

 

"너도 혹시 그런 애 생기면 나처럼 패. , 졸업장은 받고 나서."

 

가라앉은 분위기를 풀고자 농담을 건넸다. 그러나 박원빈은 웃지 않았다. 자야 할 타이밍이네. 얇은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 올렸다. . 이제 막 눈을 감으려 할 때 들린 목소리였다.

 

"저 가끔 그런 생각해요."

 

고요한 방 안을 울리는 백색 소음 같은 목소리.

 

"무슨 생각."

"제가 요점 정리 노트 같다는 생각."

 

박원빈은 말을 마친 후 잠시 심호흡을 했다. 마치 이 다음 말을 꺼내기 위한 준비라도 하려는 것처럼.

 

"저 머리 안 좋아요. 그래도 같은 반에 공부 잘 하는 애가 챙겨 준 정리 노트가 있었거든요. 그거 수능 전까지 손에 붙잡고 계속 봤어요. 근데 고사장 딱 나서자마자 바로 잃어버렸어요. 그거."

"......"

"그 뒤로 찾은 적도 없고. 지금도 어디 갔는지 몰라요. 수능 전 날까지는 그거 없어지면 죽는 줄 알았는데. 딱 마지막 교시 종 치자마자 바로 그렇게, 진짜 손바닥 뒤집듯이. 아무 짝에 쓸모 없는 물건이 되더라고요."

"......"

"근데 어느 순간 제가 약간 그렇게 느껴졌어요. 스무 살 되는 날에 제야의 종 딱 치면. 바로 짐 싸서 나가야 하니까."

 

수능 날 되자마자 그 노트 잃어버리고 찾지도 않은 것처럼. 꼭 저도 스무 살 되자마자 바로 버려지는 존재 같아서요.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결국에는 백색 소음만이 남았다. 오 년 전의 일들이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잠자리에 들기 전, 꼭 지금처럼 박원빈이 느린 말투로 꺼내던 얘기들. 듣고 있으면 오지 않던 잠이 쏟아지는 거. 모르는 척 손을 잡아 오는 것까지도.

 

"원빈아."

"."

"시설 나오면 갈 곳 있어?"

"...집안 어른이 수소문 중이긴 해요."

"......"

"먼 친척들까지 다..."

"여기 있을래?"

"......"

"살 곳 구할 때까지."

 

-

 

한 번은 박원빈의 생일에 둘이서만 외출한 적이 있었다. 보육사나 사회복지사의 허락 없이 아동끼리만 외출하는 건 원칙적으로 금지라서 며칠 전부터 미리 허락도 받았다. 어디 갈래. 수족관이요. 갑자기? 그냥 가고 싶어서. 그 무렵의 박원빈은 자주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썼다. 중학교에 입학 하고 나서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그게 꼭 같은 중학생이 됐으니 이제 좀 편해졌다는 것 같아서 귀엽게 느껴졌다. 정성찬은 핸드폰으로 가장 가까운 수족관이 어디인지 찾았다. 원빈아, 부산 나오는데.

 

부산까지 어떻게 가.

못 가지.

 

너무 즉답을 했나. 박원빈이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나니까 왠지 꼭 가야겠다는 오기 같은 게 생겼다. 울산역에서 기차 타고 가면 한 군데 있대. 얼마 걸려요. 15. 그 정도면 갈 수 있지 않나. 될 걸요. 그치. 근데 저 기차 혼자 타본 적 없는데. 지금 혼자 아니잖아. , 그렇긴 하네. 근데 형 수족관 가봤어요? 아니. , 형은 왠지 가봤을 줄 알았는데.

 

외곽에 위치한 곳이라 규모도 작고 사람도 적었다. 그래도 단 돈 천 오백원에 평생 본 것보다 더 많은 물고기를 봤다. 사실 그것보다는 수조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박원빈의 옆모습을 더 자주 봤다. 다 비슷하게 생긴 탓에 나중에는 무슨 물고기가 있었는지 잘 기억도 안 났다. , 아까 그게 제일 큰 줄 알았는데 이게 더 큰 것 같죠. . 뭔지 기억 나요? , 기억 나. 기차를 기다리는동안 편의점에서 각각 밀키스랑 포카리스웨트를 사서 대합실에 앉았다. 바꿔 마실래? . 입 대고 마셔도 돼.

 

돌아오는 길에 박원빈이 갑자기 육교에 올라가자고 했다. 수족관에 이은 뜬금 없는 제안이었지만 순순히 응했다. 쟤 생일이니까. 박원빈은 육교 난간에 팔을 기댄 채로 왕복 8차선 도로를 지나가는 차들을 멍하니 내려다 봤다. , 이제 내려가자. . 내려갈 때는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를 탔다. 투명한 유리 너머 수직으로 움직이던 배경이 갑자기 멈췄다. 뭐지. 사태 파악이 안 돼서 잠시 멍하니 있었다.

 

이거 멈춘 것 같은데.

 

일단 기다려 보자. 잠시 그대로 기다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박원빈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럴 때 어떻게 하더라. , 비상벨. 바로 엘리베이터 버튼 밑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비상벨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 뜯어낸 것처럼 잘린 도선 몇 개가 튀어나와 있는 게 다였다.

 

전화해야겠다.

어디다가?

쌤들한테.

엄청 혼날 텐데.

그렇다고 여기 있을 순 없으니까. 아니면 119 전화해도 되고.

 

아니, 하지 마. 박원빈이 고개를 저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얘는 당황하면 반말이 나오는구나.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박원빈이 119에 신고하기는 무섭다고 해서 결국 시설에 연락해 상황을 설명했다. 전화를 받은 사회복지사의 목소리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엘리베이터에 갇혔다고? 너희 어디야? 대체 거기까지 왜... 아니, 일단 둘 다 거기에 얌전히 있어. 알겠지. 정성찬은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쥔 채로 고개를 돌렸다.

 

들었지?

......

그러래.

 

박원빈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 미안. 눈을 못 맞춘 채로 말 끝을 얼버무렸다. 내가 여기 오자고 해서. 괜찮아. 정성찬 역시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티를 안 내는 중이었다. 그래도 한 살이나마 형이라고 박원빈보다는 침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시설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좁은 공간에 갇힌 채로 얌전히 기다렸다. 앉아 있어. 다리 아프잖아. 박원빈은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무릎을 세운 채로 구석에 앉았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정성찬이 조용히 손을 내밀자 박원빈이 망설임 없이 곧바로 잡았다. 처음으로 깍지를 껴서 잡자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떨군다.

 

.

.

뭔가 추락할 것 같아.

뭔 소리야.

이거 갑자기 멈춰 있다가 추락할 수도 있잖아요.

안 그래.

......

추락하면 내가 밑에 깔아 줄게. 됐지.

 

박원빈은 대답 없이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많이 무서워하네. 진짜 떨어질 것 같아서? 아니면 혼날까봐 그러나. 심리를 헤아려 보다가 관두고 그냥 박원빈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진짜 밑에 깔아 주게요.

 

잡은 손의 떨림이 점점 잦아들었다. 자기 전에 손을 잡아 줄 때처럼. 유리 너머로 멈춰 있는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

 

...안 그래도 돼요.

 

앞을 향하고 있던 고개를 돌려서 가만히 쳐다봤다. 예상치 못한 말이라서. 박원빈은 시선을 바닥에 멍하니 고정한 채로 중얼거렸다.

 

형한테는 뭔가.

......

이 이상 기대기 싫어서.

......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요.

 

-

 

, 맞다. 그 때 분명 그랬지. 기대기 싫다고.

 

-

 

팔뚝에 남은 상처가 제법 오래 갈 것 같았다. 센터에 메디폼은 없어서 결국 어제랑 똑같은 갈색 반창고를 붙였다. 몸에서는 휘발유 냄새가 진동했다. 허브 너클, 캘리퍼, 타이로드 엔드 분조. 손때 묻은 수첩이 빼곡하게 적어 둔 기록들로 가득했다. 손등으로 볼을 문지르자 검은색 기름이 묻어 나왔다. 거울 속의 흰 얼굴을 잠시 멍하니 쳐다봤다. 잘생겼는데, 얼굴에 그늘이 있어. 보고 있으면 사연 있나 싶다니까. 종종 그런 말을 듣던 게 떠올랐다. 진짜 그렇게 안 어울리나. 물티슈 한 장을 뽑아서 볼에 묻은 기름을 닦아냈다.

 

박원빈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내가 주제 넘었나? 넘었겠지. 오 년동안 단 한 번도 연락한 적 없다. 메일로 연락하자던 약속도 못 지켰다. 분명 그 동안 편의점에 꽤 자주 왔는데도 담배를 내밀 때까지 못 알아봤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담배는 일종의 알아봐 달라는 시위였던 것도 같다. 박원빈 입장에서는 분명 어이 없겠지. 존재하지 않는 사람 취급을 해놓고 이제 와서 우연히 만났다고 오 년의 공백을 채우려 드는 거. , 퇴근길에 메디폼이나 사갈까.

 

메디폼이 든 검은색 비닐봉투를 손목에 끼우고 걸었다. 온 몸이 추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 더럽게 춥다. 감기 걸리겠네. 그냥 먼저 연락해서 사과할까? 생각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아니면 이번엔 그냥 내가 먼저 손절 당한 걸로 칠까. 기대기 싫다고 했던 애한테 갑자기 같이 살자고 급발진 했으면 받아들여야지. 박원빈은 어릴 때부터도 늘 그랬다. 빚지는 일이 생기면 꼭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시설 내의 다른 아이들처럼 보육사나 사회복지사에게 떼를 쓰거나 응석을 부린 적도 없었다. 기댔다가 짐이라도 될까봐, 그러면 버림이라도 받을까봐 무섭기라도 한 것처럼. 원룸 입구로 이어지는 골목길 초입에서 문득 발걸음이 멎었다. 그 앞에 박원빈과 웬 낯선 남자 한 명이 서 있는 모습을 목격해서.

 

"내가 이유도 없이 왜 그러겠어."

 

심지어 목소리도 다 들려서.

 

"뭐가요."

"아니, 아무 이유 없이 너한테 담배를 사다 줬겠냐고."

"말이 틀렸어요."

"?"

"산 건 저잖아요. 형은 민증만 빌려준 거고."

"......"

"형이랑 저랑 안 닮아서 튕긴 게 더 많은데."

", 얘 존나 골 때리네."

"키스까진 해드릴게요. 어차피 그럴 거였어요."

 

분명 정성찬은 대화를 엿들을 생각은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박원빈이 손절하고 싶어 한다면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 중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 대화를 엿들은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어졌다. 끼어들어야 한다는 거.

 

"원빈아."

 

박원빈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고 나서도 딱히 놀란 기색은 없었다. 반면 박원빈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정성찬을 발견하자마자 멈칫하더니 도망이라도 치듯이 자리를 떴다. 미성년자랑 저러는 거 찔렸겠지. 그 날 박원빈이 내민 민증 주인이겠네. 얼굴은 기억이 안 났지만 정황을 봐서 그렇게 판단했다. 그대로 잠시 정적이었다. 박원빈이 먼저 입을 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정성찬이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데.

 

"남자 만나?"

 

말이 곱게는 안 나갔다. 키스까진 해드릴게요.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던 모습이 계속 걸려서. 만나긴 했죠. 박원빈은 별 생각 없다는 듯이 무심한 투로 대답했다.

 

"말장난 칠 기분 아닌데."

"화났어요?"

"......"

"안 된다고 하게요."

". 저런 남자면 안 되지."

"사실 안 만나요. 담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화가 난 기색을 느꼈는지 눈치를 살핀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별 신경 안 쓰는 척 해놓고. 박원빈은 계속 그렇게 정성찬의 표정을 살피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옷깃을 잡아 왔다. 고개를 돌리자 빤히 쳐다보면서 옷깃을 살짝 당긴다.

 

"."

 

옷깃을 쥔 손에 힘이 실렸다. 아까와는 달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형이 먼저 제안한 거예요."

"......"

"지내도 된다고."

 

-

 

걸쇠를 돌려서 문을 잠갔다. 구옥이라서 아직도 열쇠 형식이었다. 들어오자마자 보일러부터 켰다. 기숙사에는 얘기했어? . 좁은데 괜찮아? 난 상관 없어. . 한 가지 대답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박원빈은 나름 준비를 하고 온 건지 백팩에서 뭔가를 이것저것 꺼냈다. 칫솔, 로션, 체육복. 체육복? 이건 왜. 저 원래 이거 입고 자요. 마지막으로는 메디폼이 나왔다. 이건 뭐야. 형 거요. , 다친 거 아니예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비닐봉투를 얼른 등 뒤로 숨겼다. 땡큐.

 

아무 일도 없는 척 했지만 의식 중이었다. 표정 하나 안 바꾸고 키스까지는 해주겠다고 말하던 게 뇌리에 박혔다. 이미 그런 상황이 익숙해 보였다. 내가 쟤에 대해 모르는 게 얼마나 더 있을까. 오늘이 며칠이더라. , 19. 이제 막 씻고 나온 박원빈이 옆에 다가와서 앉자 따뜻한 공기가 확 끼쳤다. 드라이기 써도 돼요? 말간 얼굴이 가까웠다. 까만 머리 끝이 젖어서 흐트러져 있었다. 드라이기 소리가 사라지고 나자 그 공백을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채웠다. 먼저 이불보 위를 차지하자 박원빈은 별 말 없이 매트릭스에 누웠다. 형은 진짜 여전하네요.

 

"아까 그거 보고도 계속 재워 줄 마음 있는 거 맞죠."

 

정성찬은 손등을 들어서 눈을 비볐다. 무슨 질문이야, 그게. 잠시 생각을 하다가 꺼낸 대답이었다. 요란하게 돌아가던 보일러가 잠시 멈췄다.

 

"...형이 거부감 들까 봐."

"안 그래."

 

박원빈은 대답 대신 이불을 뒤집어 썼다. 정성찬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을 뒤척이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럽게 오 년 전의 일상이 떠올랐다. 쟤가 저럴 때마다, 악몽 꿀 때마다, 혹은 그냥 이유 없이 손을 잡아 줬던 거. . 박원빈이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 때 저희 갇혔던 거 기억해요?"

"......"

"엘리베이터."

"기억하지."

"그 때도 손 잡아 줬죠."

"...."

"그 때 깍지 꼈잖아요."

"그랬나."

"왜 꼈어요?"

"왜냐고?"

". 보통 남자애들끼리 안 그러잖아요."

"네가 힘들어 보여서."

 

딱히 대답이 됐을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남자끼리는 손 안 잡고 깍지 안 끼지. 그 사실을 모를 리는 없었다. 그 날의 풍경이 감은 눈 앞에 다시금 펼쳐졌다. 유리 너머로 보이던 강과 세운 무릎이 닿은 것, 깍지 껴서 잡은 손에서 별 온기가 느껴지지 않던 것까지.

 

"."

"."

"알고 있었죠."

 

목적어가 없었다. 그래도 무슨 얘기인지 되묻지 않았다. 사실 알 것도 같았다. 아닐 수도 있지만 아마 맞는 것 같다. 오래도록 물어보지 못 했다. 처음 박원빈을 집에 데려왔을 때도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 했던 거.

 

"저는 형이 다 알아서 연락 안 했다고 생각했어요."

 

나 좋아하지. 원빈아.

 

"저도 그래서 더 연락 안 했어요. 대신 메일은 엄청 보냈지만."

"......"

"뭐 그건 어차피 형이 안 보니까. 그러니까 형이 보면 죽겠다고 한 거예요. 안 본다 생각하고 적은 거고."

 

박원빈은 반듯이 누워 있던 몸을 정성찬 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손 끝끼리 맞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박원빈의 검지 손가락 끝이 정성찬의 손바닥 위를 살짝 간지럽혔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바로 옆에서 느껴졌다. 차분한 호흡이랑, 로션 냄새도.

 

"저 눈치 빨라요."

 

박원빈이 상체를 일으켰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선을 그대로 받았다. 맞닿는 호흡이 아까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거부감 안 든다고 한 거 맞죠. 방금."

"......"

"."

"......"

"혹시 저랑 잘래요."

 

저라서 별로면 말고요. 정성찬은 눈자위에 올리고 있던 손등을 내렸다. 박원빈의 손바닥이 한쪽 어깨 위를 짚었다. 짚은 어깨를 지그시 누르면서 상체 위로 올라온다. 열린 체육복 지퍼 너머로 허연 살이 보였다. 여러가지 감정이 스쳤다. 혹시라도 얘가 이런 걸 재워 주는 대가라고 생각할까 봐. 아까와 같은 상황, 그리고 지금 이런 상황에도 이미 익숙해졌을까 봐. 기대기 싫다는 말은 빚지기 싫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그건 박원빈의 오랜 방어 기제였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면 버림 받을 것 같아서 세운 방어 기제. 박원빈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가까워졌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쏟아졌다. 입술이 닿기 바로 직전의 거리에서 잠시 멈췄다. 이마부터 턱까지를 훑어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정성찬은 손을 들어서 박원빈의 오른쪽 뺨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엄지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너 아직 열아홉 살이잖아."

 

박원빈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맥이 풀린 듯이 허탈하게 웃었다. 짓눌린 입술을 살살 어루만졌다. 윗니가 손톱 위로 살짝 닿는 게 느껴졌다.

 

"그게 왜요."

"나는 스무 살이고."

"그게 문제예요?"

"."

"제 친구들 다 했는데."

"걔들이랑 놀지 말자."

"애 취급하지 마요. 한 살 차이잖아."

"너 하는 행동이 그래."

"어차피 딱 열흘 남았어요."

"딱 열흘 기다리면 되겠네, 그럼."

"열흘 기다리면."

 

박원빈의 말은 거기에서 멈췄다. 어깨를 짚은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잘 것처럼 얘기해요. ."

 

사방이 고요했다. 어두운 가운데 박원빈의 얼굴만 선명하게 보였다. 명치까지 내려 온 체육복 지퍼를 잡고 위로 올려 줬다.

 

"원빈아."

 

박원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요한 호흡이 침묵을 채웠다.

 

"내가 네 메일 안 본 대가라 칠게."

 

마주한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네가 보낸 글자 수 만큼 여기 있어도 돼. 그럼 됐지."

"......"

"그러니까 너 지금 나한테 기대는 거 아니야."

 

박원빈의 표정이 점점 무너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박원빈은 곧 정성찬의 가슴팍에다가 고개를 파묻었다. 검은색 나시가 서서히 젖는 게 느껴졌다. 떨리는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더 이상은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게 정성찬의 위로 방식이라서.

 

-

 

저 알바 구하고 올게요. 찢어진 줄 노트에 컴퓨터용 싸인펜으로 남긴 메모가 있었다. 무슨 알바? 문자를 보내놓고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3이 아침잠도 없나. 눈 뜨자마자 사라져 있네. 멍하니 양치를 하다가 문자 하나를 더 보냈다. 뭐가 됐든 합격하고 와. 이제 막 가방을 챙겨서 나가려는데 어제 박원빈이 건네줬던 메디폼이 눈에 밟혔다. 하나를 꺼내 가위로 네모낳게 잘라 상처 부위에 붙였다.

 

문자 하나가 왔다. 박원빈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정성찬, 요즘 어떻게 지내는데. 나 기억하나. 곽준범. 언제 시간 되면 한 번 얼굴이나 보자. 누구지. 눈에 익은 이름이었다. 한참을 골몰하고 나서야 겨우 기억이 났다. 박원빈과 마찬가지로 시설에서 만났던 인물들 중 한 명이었다. 같은 학교였고 동갑이라 당시에는 꽤 자주 붙어 다녔었다. 바뀐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의문이었다. 답장을 보낼지 말지 고민하다가 그냥 보냈다. 그래, 준범아. 오랜만이네. 나 계속 바빴어.

 

박원빈한테서는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 알바는 붙었나. 잘생겼으니까 어디든 얼굴로 붙겠지. 대학은 어디 갈 생각이지. 과는 뭘로 넣었을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원빈이, 좋지. 귀엽고. 또 착하고. 아닌 척 하는데 자존심도 세고. 양아치처럼 하고 다녀서 변한 줄 알았는데 보니까 여전히 순진하고. 그러니 박원빈이 만날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미성년자한테 민증 주고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 박원빈이 마음껏 기대도 절대 쓰러지지 않을 그런 사람.

 

"저 알바 붙었어요."

 

현관 문을 열자 바로 앞에 박원빈이 서 있었다. 꼭 정성찬이 올 시간에 맞춰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 같이.

 

"어디?"

"학원에서 채점 하는 거."

"잘생겨서 바로 뽑았네."

 

박원빈은 어이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진심인데. 여자애들 다 너 보러 가, 이제. 씻기나 해요. 그러려고. 입고 있던 후드를 벗어서 대충 걸어 둔 다음 욕실 안으로 향했다. 적응하는 데에 아직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이제 막 욕실 문을 열고 나오자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는 박원빈의 정수리가 보였다. 진짜 집에서 체육복 입네. 애 같이.

 

"1 1일 얼마 안 남았잖아."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서 말리고 목에 걸었다. 다음으로 로션을 덜어서 코와 턱에 얹었다. 박원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이랑 약속 없어?"

"술 약속이요."

"."

"오라던데. 모르겠어요. 갈지 말지."

"?"

"가기 귀찮아요. 안 가면 안 가는 거고."

"그럼 우리 집에서 성인 되게?"

 

베개 뒤로 고개를 꺾어서 눈을 맞춰 온다. 앞머리가 뒤집히자 허연 이마가 드러났다. 그게 무슨 질문이예요, 대체. 웃음기가 잔뜩 섞인 얼굴이었다. 그러게. 생각해 보니 어이 없네. 생각 안 해봐도 어이 없어요. 박원빈은 누워 있던 몸을 한 번에 일으킨 다음 양반다리를 한 자세로 앉았다. . 그대로 가만히 정성찬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박원빈이 두 눈을 줄였다.

 

"거기 덜 발렸어요."

 

손이 갑자기 가까워졌다. 무심한 손길이 턱에 묻은 로션을 문질렀다. 땡큐. 박원빈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머리를 대고 누웠다. 어젯밤의 그 일 이후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박원빈이 아무 일도 없는 척 굴고 싶은 것 같아서 맞춰 주기로 했다. 뭐가 됐든, 박원빈이 편한 쪽에 맞추고 싶으니까. 박원빈이 전부 없던 일로 치고 싶다면 제대로 응할 자신이 있으니까.

 

-

 

나 다시 돌아갈 것 같아.

 

잡고 있던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하루종일 이 한 마디를 고민 했는데 잘 때가 되어서야 겨우 꺼낼 용기가 났다. 박원빈은 잡고 있던 손을 바로 놓았다. 이어서 누워 있던 상체를 곧바로 일으키고 눈을 맞춰 왔다. 어디로요.

 

...집으로.

그럼.

......

시설 나가요?

그럴 것 같아.

언제요.

아마 이번 달까지만.

 

더 이상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어서 박원빈은 이불을 걷어내고 가까이 다가와 바로 옆에 누웠다. 그리고 아까 놓았던 손을 다시 잡으면서.

 

.

.

그럼 메일로 연락 할래요.

 

귓가에 숨결이 닿았다. 저 지금 핸드폰 고장 났잖아요. 형이 메일 주소 알려주면 꼭 연락할게요.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도 함께.

 

새 전화번호 생기면 그것도 거기로 보낼게요.

 

맥박을 짚듯이 손목을 쥐었다. 그러니까 꼭 연락해요. 앞으로도. , 알았어. 정성찬은 두 눈을 천천히 감으면서 대답했다. 약속이에요, . 잠결에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

 

이미 그 때부터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박원빈이 나를 좋아한다는 거. 그리고 거기에는 응답해 줄 수 없다는 것도. 왜냐하면, 벅차니까. 나 하나 돌보기도 힘들었으니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조차 버거웠으니까.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이불을 개는 것도, 계절이 바뀌면 새 옷을 꺼내야 하는 것도, 남들한테는 쉬운 그 모든 일들이 다 숙제 같았으니까. 밤에 눈을 감을 때마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자꾸만 바뀌는 거처, 색안경, 어린 나이에 덜컥 생긴 나를 걸림돌처럼 여기는 부모님. 사실 전부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으니까. 그러니 정성찬은 박원빈이 이 이상 기대기 싫다고 했던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대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아서. 늘 누군가의 짐이 될까 봐 노심초사인 걔한테 나는 마음 놓고 기대기에는 너무 불안한 존재라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

 

박원빈은 첫 아르바이트 생활에 잘 적응 중인 눈치였다. 일머리가 있는 편인지 단 며칠만에 꽤 좋은 평판을 받고 있는 듯 했다. 가끔 정성찬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전화를 걸 때도 있었다. 오늘 학원에서요. 답지가 갑자기 안 보여서 제가 직접 풀어 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더라고요. 고등학생 거? 아니요, 3 수학. 원빈아. . 너 진짜 얼굴로 뽑혔구나. 그 날은 자기 직전까지 삐져 있어서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조금씩 익숙해질 것도 같았다. 퇴근하고 나면 집에 누군가 있다는 거. 이렇게 전화를 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도.

 

핸드폰 화면을 눌러서 날짜를 확인했다. 12 24.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였네. 잠시 고민하다가 퇴근길에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하나 샀다. 카센터에서 일하는 총각이지. 이것도 더 가져가. 졸지에 덤으로 빵을 두 개나 더 받았다. 박원빈 먹일까. 말랐던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관 문을 여니 박원빈 역시 똑같이 케이크를 든 채로 서 있었다. 뭐야.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말이었다. ... 학부모가 준 케이크가 몇 개 남았다면서 줬어요. 형은요? 나는 내가 산 건데. 제 거 먹어요, 그럼. 형 건 다음에 먹고. 박원빈은 깨끗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케이크 옆에 붙은 빵칼 포장지를 뜯었다.

 

"형 귀엽다."

 

케이크 박스를 열면서 툭 던진 말이었다. 뭐가? 이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이고.

 

"크리스마스라고 케이크 사서 챙겨 먹는 사람 좀 귀엽지 않아요?"

 

너 없으면 절대 안 샀을 걸. 그 대답은 속으로만 했다. 학부모들이 이런 거 잘 챙겨주나 보다. 케이크를 한 조각 덜어서 내밀었다. 학부모들도 그렇고 원장님도 그렇고, 맨날 커피 사줘요. 애들도 맨날 간식 주고. 여자애들이 너 보러 학원 온다고 안 해? 앞에선 안 해요. 그럼 뒤에서 해? . 박원빈은 늘 필요 이상의 말은 굳이 먼저 꺼내지 않았다. 정성찬이 좋아하는 점 중 하나였다.

 

"형 오티티 써요?"

"아니. ?"

"학교 애들이랑 돈 나눠서 넷플릭스 구독한 게 있어서."

 

볼래요? 같이. 박원빈은 이제 이 생활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그래, 그럼. 로딩이 한참 걸리는 구식 노트북을 꺼내서 열었다. 뭐 볼까요. 넷플릭스의 메인 화면을 유심히 쳐다봤다. 아무거나 틀어. 그럼 눈 감고 고를까요. 그래. 형이 그럼 찝 해요. . 그렇게 당첨된 건 미국의 한 휴먼 드라마 영화였다. 정성찬은 매트릭스를 접이식 테이블 위에 둔 노트북 앞까지 끌고 왔다. 그냥 여기에 같이 누울까. 잠시 망설이다가 꺼낸 그 말에 박원빈은 말 없이 정성찬의 앞에 누웠다. 둘 다 머리는 노트북이 있는 방향에 고정한 채로, 그렇게 나란히.

 

"."

"."

"주인공 불쌍하지 않아요?"

", 생각보다 슬프네."

"근데 좀 지루하다."

"그 말 하려 했는데."

"그냥 끄고 잘까요."

"그럴래?"

 

손등으로 눈을 비비면서 고개를 돌린다. 코가 가슴팍에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형도 잠 오지."

 

숨결이 목덜미에 간지럽게 닿았다. 완전한 반말.

 

"조금."

"잠 온다는 말은 경상도에서만 쓰는 거 알아요."

", 그렇다면서."

"형은 그래서 졸린다고 했잖아요. 중학생 때."

"그치."

"그거 되게 귀여웠는데."

"잠 온다가 더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런가? 졸려. 이게 진짜 애교 부리는 것 같이 들리는데."

 

졸려. 박원빈이 그 말을 혼잣말처럼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녹음해서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박원빈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금방 잠에 들었다. 일정한 호흡이 백색소음 속에 섞였다. 이마 위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해 줬다. 자는 얼굴이 진짜 초등학생 때랑 똑같네. 검지 손가락 하나를 펼쳐서 박원빈의 손바닥 위에다 올렸다. 손금을 따라 빨간 볼펜 자국이 묻어 있었다. 채점 하다 묻었나. 조심스럽게 그 위로 손바닥을 겹쳤다. 요즘은 악몽 안 꾸나. 벌어진 손가락 틈 사이로 천천히 깍지를 끼웠다. 안 꾸나 보네.

 

-

 

이제 막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참이었다. 곽준범한테 문자가 와 있었다. , 우리 시설에서 친했던 애들 겨우 모았다. 권성준이랑 조현민 기억하제. 12 31일에 송년회처럼 얼굴 한 번 보자. 애들이 닌 꼭 오라고 하더라. 인스타도 없고 뭐 하고 사는지 진짜 궁금하다고. 12 31. 그 날짜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럼 우리 집에서 성인 되게? 별 생각 없이 박원빈에게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말은 약속 안 나갈 것처럼 했지만 아마 나가겠지. 잠시 고민을 하다가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그러자, 그럼. 예전 같았으면 절대 응하지 않았을 제안이었다. 나도 좀 변했나. 박원빈에게는 굳이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떤 선이 필요할 것 같다고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또, 괜히.

 

마침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이었다. 그 날은 그냥 영업 안 할 거야. 가족들이랑 해돋이 보러 가기로 했거든. 소도시에 위치한 가맹 편의점 점주의 특권이겠거니 생각했다. 얘들도 얼마만에 보는 거지.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서 한 명씩 얼굴을 떠올려봤다. 그 쪽은 셋인데도 굳이 여기까지 같이 차를 타고 오겠다고 했다. 내가 가면 되잖아. 너네 다 울산이고 나만 여기인데. 차 타면 울산에서 거기 금방이다. 여행 간 셈 치지, .

 

"정성찬."

 

술집 내부는 연말을 맞아 모인 사람들로 북적였다. 곽준범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 이 새끼 진짜 오랜만이네. 도대체 뭐 하면서 살았길래 연락이 안 되노. 예상 대로 그동안 연락이 끊긴 정성찬에게 대부분의 관심이 쏠렸다. 거의 육 년만에 보는 얼굴들이라 그런지 하나 같이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 니 뒤진 줄 알았다이가. 여기저기에 니 번호 캐고 다니느라 진짜 죽는 줄. 그 뒤로는 신변잡기적인 대화들이 이어졌다. 증권사에 고졸로 입사 했다는 친구, 보안 업체에서 파견직으로 근무 중이라는 친구, 인근 전문대 전기과에 재학 중이라는 친구. 별 재미 없는 근황 토크에 대충 장단을 맞춰 줬다. 마지막으로 본 게 중학생 때라 그런지 다들 그 때와는 많이 달라진 게 느껴졌다. 뭐 나도 당연히 똑같진 않으니까.

 

"권성준 닌 군대 언제 가는데."

"내년."

"내가 너네만 부른 이유가 다 있다."

"딴 애들은 다 군대 갔제?"

". 정성찬 니는?"

 

나는 면젠데, 중졸이라. 그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나도 내년에 갈 것 같은데."

", . 다 가노."

 

동시에 탄식이 터져 나왔다. 테이블 위는 싸구려 안주와 초록색 병들로 빼곡했다. 핸드폰을 꺼내서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박원빈은 약속 나갔을까. 다 같이 민증 들고 술집 근처에서 열두 시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설마 진짜 집에 있나. 연락을 해볼까. 솔직히 지금 재미 없는데. 집에 가고 싶고.

 

"정성찬. 카센터 일 할만 하나."

"그냥, ."

 

두 명은 잠시 담배 피우러 나간 참이었다. 기울였던 소주 잔을 내려 놓았다. 곽준범이 자세를 정성찬 쪽으로 고쳐서 앉았다.

 

"교육 명목이라면서. 돈은 별로 못 받겠네."

"아무래도 그렇지."

"혹시 니 주식은 안 하나."

 

정성찬은 작게 헛웃음을 쳤다. 내가 주식할 돈이 어디 있어. , 잘 됐네. 곽준범이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나 증권사 일한다 했다이가. 종목 추천해 줄까? 나 이걸로 지금 당장 일주일만에, 봐라. 얼마인지. 핸드폰 액정이 눈 앞까지 들이밀어졌다. 빨간색 플러스 표시 밑에 일천만원 가량의 숫자가 찍혀 있는 게 보였다. 곽준범은 손에 쥔 핸드폰을 정성찬의 눈 앞에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투자 정보 올라오는 채팅방이 있는데, 월요일마다 급등주 알려 주니까 보고 바로 팔면 된다."

"......"

"권성준이랑 조현민도 이미 이걸로 돈 좀 벌고 너한테도 추천해 줄라고 부른 거야. 새끼야, 타이어 그거 갈아서 돈 언제 버노."

 

아무 대답 없이 테이블 위를 쳐다봤다. 맥이 탁 풀렸다. , 어쩐지. 굳이 울산에서 여기까지 세 명이 움직인다고 할 때 의심해야 했다. 세 명 다 한 패네. 곽준범이 침을 튀겨 가면서 쏟아내는 말들이 한 귀로 빠져 나갔다. 얘 원래 이랬었나. 원래라고 해봤자 중학생 때다. 모두가 박원빈처럼 그대로일 수는 없지. 미약하게 올랐던 술 기운은 가신지 오래였다. 대신 체한 것처럼 가슴 한 구석이 답답했다. 준범아, 나 그렇게 병신 아니야. 그 말이 목구멍 끝에서 걸려서. 정성찬은 이제 어떻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지를 골몰했다. 늘 그랬다. 도망 치고 싶은 것들 투성이었다. 테이블 위를 채운 싸구려 안주. 주먹질 한 번에 날아간 졸업장. 동정으로 가득한 롤링 페이퍼. 투잡. 십 분도 안 돼서 욱여 넣은 짜장면. 아득바득 모은 보증금. 손때가 묻은 수첩. 그리고 지금 이런 상황들.

 

"나 먼저 갈게."

"?"

 

지갑에서 술값으로 만원짜리 몇 장을 꺼내 올렸다. 겉옷을 집어들고 가게를 빠져나오자 황급히 따라 나온 곽준범이 손목을 붙잡았다.

 

", 정성찬."

"준범아."

"네가 뭘 잘 몰라서 그런데."

"계속 모르고 살게."

", 이 새끼 진짜 답답하네. 진짜 왜 그러는데?"

 

정성찬은 손목을 내준 채로 한숨을 쉬었다. , 지긋지긋하다.

 

"성찬아. 내 봤을 때 닌 진짜 이러고 살 게 아니라니까. 내가 니라면 상경해서 어디 호빠 같은 데라도 간다."

"그래. 조언 고맙다."

"얼굴 팔아서 먹고 살 수도 있는데 왜 힘들게 굳이 이러고 사는데, 대체. 그게 싫은 것 같으니까 내가 지금 좋은 방법을 알려 준다이가."

"준범아."

"어떻게 멀쩡한 일만 해서 먹고 사는데. 어느 정도 있는 애들이 그러는 거고. 우리 같은 애들은 그래서 될 그게 아니라고."

"나 그렇게 병신 아니야."

 

아까부터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던 그 말이 튀어나갔다. ? 곽준범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나 병신 아니라고."

"내가 언제,"

"적어도 리딩방 사기나 치고 다니는 너보다는."

"? 이 새끼가 돌았나."

"나한테는 안 먹힐 것 같으니까 다른 애 찾아."

"어디다 대고 뭐, 사기?"

"너한테 대고. 그리고 시설이 아니라 길바닥에 살아도 너처럼 안 사는 애들 많아."

 

뒤에서 곽준범이 악에 받쳐 목청을 높이는 게 들렸다. 가게 앞에 마침 세워져 있던 택시 문을 붙잡고 덜컥 열었다. 집 주소를 댄 다음 핸드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했다. 열한 시 삼십 분. 기사님, 혹시 조금 빨리 가주실 수 있나요. 지친 눈으로 차창 너머를 멍하니 쳐다봤다.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신년 보내세요. 구청장의 이름이 찍힌 현수막이 스쳐 지나갔다. 가로수와 가게 간판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크리스마스 장식들도 함께. 크리스마스 지났는데 아직도 안 치우고 그대로네. 박원빈이 생각났다. 크리스마스가 지났는데도 걸려 있는 트리 장식. 본인이 더 이상 쓸모 없는 요점 정리 노트 같다던 박원빈. 1 1일이 지나면 버려지는 게 두렵다던 박원빈. 삼십 분 뒤면 스무 살이 될 박원빈. 나에게 기대기 싫다던 박원빈. 원빈아. 나 네가 기대면 분명 쓰러질 건데. 근데 왜 자꾸 쓰러지고 싶지. 분명 여태까지 그게 무서웠는데, 이제는 왜 그냥 괜찮을 것 같지.

 

-

 

", ."

 

현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박원빈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덜 마른 머리카락 끝에 물이 맺혀 있었다. 진짜 집에 있었네.

 

"오늘 약속 있었어요?"

 

박원빈이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면서 물었다. 구석에 놓인 텔레비전에서는 제야의 종 행사 뉴스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 곳 종로 보신각에서는 곧 올해의 타종 행사가 열릴 예정입니다. 현재 시각은 열한 시 사십 오분입니다. 조용한 방 안에 뉴스 기자의 사무적인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혼자 이 방에서 뭐 하고 있었지.

 

"친구들 만나러 안 갔어?"

"말했잖아요."

"......"

"귀찮았다고. 사람 많은 것도 싫고."

"이 동네에 사람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그래도 술집에는 많아요."

 

그 말투를 듣고 있자 왠지 온 몸의 긴장이 풀렸다. 차분하고 느린 말투.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온 몸이 추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는데. 지칠 대로 지쳤었는데.

 

"그리고 형이 그랬잖아요."

"......"

"형 집에서 성인 될 거냐고.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요. 그것도."

 

씻고 와요. 왜 그러고 있어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 다음 욕실 안으로 향했다. 진짜 이상하지.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면서 생각했다. 분명 방금까지 그랬는데, 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지. 꼭 내가 손을 잡아 주면 잠잠해지던 것처럼.

 

"술 마셨어요?"

"."

"많이?"

"조금. 이제 삼 분 남았네."

 

벽에다 등을 기댄 채로 나란히 앉았다. 사실 별 감흥 없지. 솔직히, . 박원빈은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그 옆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약속 재밌었어요?"

"아니. 재미 없더라."

"진짜요. 저는 애들이 인스타 올리고 난리 났던데. 술집 앞에서 대기 타는 거."

"못 가서 아쉬운 거 아니야?"

"별로요. 형이랑 있어도 재밌는데 굳이."

"...나 없었잖아."

"이제 있잖아요."

 

박원빈은 잠시 시선을 돌려서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한참 눈치를 보다가 정성찬의 어깨에 머리통을 슬쩍 기댔다. 기댔다기보다 기울였다고 보는 게 맞을 정도로 애매한 상태였다. 정성찬은 손바닥을 들어 박원빈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며칠 전에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려 봤다. 박원빈이 만날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 마음껏 기대도 절대 쓰러지지 않을 그런 사람. 근데, 원빈아

 

"이제 카운트 다운 한대요."

 

, .

 

"원빈아."

 

, . 근데 나 사실 쓰러져도 괜찮지 않을까.

 

"."

 

, . 네가 나 일으켜 주면 되잖아.

 

"나는 필요해."

"?"

"노트."

"......"

"그 노트. 나한테는 필요하다고."

 

, . 그 순간 바로 박원빈의 볼을 감싸쥐고 입술을 붙였다. 무겁고 둔탁한 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도 함께. 가만히 붙이고만 있던 입술을 천천히 떼고 시선을 맞췄다. 놀라서 넋이 나간 것 같은 멍한 눈. 그 눈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다급하게 얼굴을 맞댔다. 목에 걸려 있던 젖은 수건이 이불 위로 떨어졌다. 뉴스 기자의 벅찬 목소리와 시민들의 환호성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박원빈이 멍하니 뜨고 있던 두 눈을 서서히 감을 때까지.

 

-

 

"."

"."

 

베개에 머리를 댄 채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박원빈이 이불 위를 더듬어서 손을 찾아 잡았다. 먼저 손을 잡아 오면 못 이기는 척 받아 주던 오 년 전 그 때처럼.

 

"대학 붙을 수 있을까요. ."

"어디 넣었어."

"여기 근방. 대충 맞춰서."

"붙겠지. 무슨 과야?"

"컴퓨터 공학."

"안 어울린다."

"저랑?"

 

박원빈이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평범한 공대생들 사이에 끼어 있을 박원빈을 상상했다. 까맣고 동그란 안경 끼고, 강의 도중 꾸벅꾸벅 조는 거. , 숨만 쉬어도 인기 많겠네.

 

"복수한 거죠. 제가 형 자동차 안 어울린다고 해서."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형도 잘 어울려요."

", 자동차?"

". 반팔 입고 차 고치면 멋있겠다."

"쓸데없이 구체적이네."

 

헛웃음 섞인 투로 대답하자 박원빈도 따라 웃었다. 얼굴에 띤 웃음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얼굴이 가까웠다. 불 꺼진 어두운 방 안인데도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보였다. 이마부터 턱까지를 조심스럽게 훑어보던 박원빈이 시선을 서서히 밑으로 내리면서 고개를 가까이 했다. 민망해졌는지 금방 빼려는 고개를 얼른 붙잡아서 당겼다. 엇갈리게 겹쳐진 입술 사이로 동시에 웃음이 샜다. 잠시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나자 다시 시선이 부딪혔다. ​. 박원빈이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볼을 매만졌다.

 

"내일 일하러 가요?"

"오늘?"

", 오늘."

"아니. 쉬지."

"오늘 뭐 할 거예요."

"뭐 할래."

 

까만 머리카락을 넘겨 주면서 물었다. 뭐 할 거야, 아니고 뭐 할래. 박원빈은 시선을 돌리면서 어색한 듯이 웃었다. 되게 좋아하네. 손가락으로 볼을 장난치듯이 살짝 건드렸다.

 

"그럼 해돋이 보러 가요."

"해돋이?"

"1 1일이니까."

"어디로."

"여기 근처면 어디가 유명하지. 간절곶?"

"가자."

"뭐 타고요."

"버스 타고 한 시간 반? 그 정도 걸릴 걸."

, 그럼 일찍 일어나야겠다. 박원빈이 눈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잘 거야? 자야지 보러 가죠. 빨리 자자, 그럼. 이불 위에 놓인 박원빈의 손을 끌어 와서 잡았다. 그러자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박원빈이 바람 빠지듯이 웃었다. 왜 웃어.

 

"어릴 때 생각 나서요."

". 잔다고 손 잡아 줘서?"

 

박원빈은 눈을 감은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그 무방비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살짝 웃음이 나왔다. 손 잡으면 바로 잠들려 하는 게, 진짜 그 때 그대로라서. 우리 또 뭐 할까요. 돌아오는 길에... 잠꼬대처럼 희미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얼마 못 가서 끊겼다. 그 대신 차분한 숨 소리가 들렸다. 잠에 든 그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떼어 줬다

 

"천천히 생각하자."

 

아직 맞잡고 있는 손에 깍지를 끼우면서 중얼거렸다. 같이 있을 시간은 많으니까. 앞으로.

 

-

 

형 저 원빈이요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0 11 5일 오후 10:15

 

형 저 초5 때 이후로 누구한테 메일 처음 써봐요ㅋㅋㅋ 길게 써서 보내야하나? 사실 잘 모르겠는데 일단 그냥 쓰고싶은대로 쓸게요 형 지금쯤이면 아마 집에 있을거 같은데.. 일년만에 가니까 어때요?? 안어색하면 좋겠다

 

형 메일 보기로 약속했으니까 볼거죠?? 답장 기다릴게요

 

그리고 형은 전학 가서도 적응 잘 할거에요. 이건 그냥 형이 걱정하길래 ㅎㅎ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0 11 6일 오후 05:42

 

이거 일일이 제목 써야되는게 좀 불편하다... 그냥 형 한글자만 적어도 되죠??...ㅋㅋㅋㅋㅋ 오늘 저희 수행평가 했는데 저 완전 망했어요 단어를 한번에 백개나 외우라하고.. 2학기 되니까 시험 생겨서 진짜 너무 시러여

 

근데 메일로 글쓰니까 뭔가 말을 많이 적게 되고 좋은거같아요. 원래 형이랑 말하면 하고 싶은말 많은데 잘 못하게 되거든요.. 뭐라고 대답할지 한참 생각해서 그래요 형이랑 할말이 없는게 아니라. 진짜로 원래는 형한테 할말 엄청 많아요..!! 그니까 생각날 때마다 여기 메일로 보내야겠다 ...ㅎㅎ

 



2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0 11 8일 오후 07:37

 

형 전학 간 학교에서 잘지내고 있어요? 친한 친구는 당연히 생겼죠? 그야 형은 엄청 잘생겼으니까ㅋㅋ 여기니까 적는데 저 처음 형 보고 놀랐어요 그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봐서

 

음 적으니까 좀 민망한데.. 걍 그렇다구요

 

아무튼 저도 잘지내고 있어요.! 시설에서도 학교에서도 쌤들 말 잘듣고 말썽 안 피우고.. 제가 말썽 부린건 진짜 그날 저희 수족관 같이 갔다가 혼난 날이 마지막이에요 진짜로ㅎㅎㅎ 아 형 언젠가 진짜 아쿠아리움도 같이 갈래요? 사진으로 찾아봤는데 거긴 엄청 크던데...다음에 같이가요 언젠가

 



3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0 11 13일 오후 11:37

 

형 사실 근데 저 형이 없으니까 좀.. 재미가없어요 잠도 잘 안오고.. 형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요

 

그래도 적응할거에요 전 강하니까ㅏㅏㅏ

 



4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0 11 16일 오후 10:28

 

형 번호도 연락 안되고.. 바꿨어요? 메일도 안보는거 맞죠? 그냥 보낼게요 그래도 형이 나중에라도 생각나서 혹시 읽을수도 있잖아요. 그때 막 제 메일 쌓인거 보고 소름돋아 하면 안돼요ㅎㅎ.. 형이 안 읽은거니깐

 



5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0 11 23일 오후 05:10

 

형 진짜 이거 안 보는거 맞죠??

 



6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0 11 25일 오전 12:03

 

메일로 연락하자 한거 까먹은거 맞죠.....

 



7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0 11 29일 오후 11:56

 

형 보고싶어요

 



8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0 11 30일 오전 12:00

 

엄마 아빠 보고 싶을때랑 또 달라요 이건

 



9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0 11 30일 오전 12:03

 

형 좋아해요

 



10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0 11 30일 오전 12:05

 

진짜 많이 많이 엄청 많이 좋아해요 형




ㅋㅋㅋㅋㅋㅋ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1 9 13일 오전 12:01

 

저 진짜 많이 보냈네요

 



생일 축하해요 형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1 9 13일 오전 12:02

 



나 까먹지 말구요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1 9 13일 오전 12:03

 



좋아해요 여전히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1 9 13일 오전 12:03





잘지내요 안녕

 

보낸사람 박원빈

받는사람 정성찬

 

2021 9 13일 오전 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