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 생존 법칙
by. 아바라

 

 

원빈이 뭉툭한 손톱 끝을 습관처럼 입으로 가져가려다 성찬에게 제지당했다. 손끝에 딱딱하게 굳어 검붉게 변해 버린 핏자국을 보던 원빈이 있는 힘껏 주먹을 꽉 쥐었다. ... 고마워. 원빈의 말에 성찬은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썩어 문드러진 시체의 피가 원빈의 입가로 향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빈. 폰 배터리 아껴야지."

"..."

"문자는 왜 자꾸 봐."

"... 그냥."

혹시나 하고. 휴대폰 불빛에 의해 훤히 드러나던 원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칠흙 같은 어둠에 가려졌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피는 색소와 설탕물로 만들어져 달달한 냄새가 나고 고작 모기나 파리 따위가 꼬인다고 했는데, 정작 눈앞에 있는 시쳇더미에서는 구더기만 득실거렸다. 자꾸 보지 말라니까. 원빈의 시선을 파악한 성찬이 큰 손으로 시야를 가렸다. 가려진 시야에서는 축축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 기억나? 내가 예전에 잠 안 온다고 하면 형이 꼭 이렇게 손으로 눈 가리고 재워줬는데. 원빈이 힘을 주어 성찬의 손목을 감싸왔다. 어정쩡하게 허공에 붕 띄워진 성찬의 손을 붙잡고 얼굴 위로 갖다 대려고 하자 성찬이 팔에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이제 마음대로 닿지도 못  하네. 원빈이 마찬가지로 피투성이인 제 손을 성찬과 마주 잡았다. 마주 잡은 손의 온기가 낯설 만큼 따뜻했다.

 

 

 

 

공동 생존 법칙

 

 

 



   ⚠️ 긴급재난문자

2025-09-23 14:35 서울 전역 원인을 알 수 없는 집단 광인병 발생. 현재 감염 경로 및 해당 바이러스 확인 중. 광인병 확산 방지를 위해 외출을 자제하시고 개인위생 수칙을 준수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서울특별시]



  

평화롭기만 했던 어느 가을, 원인을 알 수 없는 집단 광인병 사태가 발발했다. 서울 전역에 퍼진 광인병은 무서운 속도로 전국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도시는 순식간에 색을 잃고 황망한 폐허가 됐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보던 좀비를 실제로 마주했을 때의 기분이란. 고막에 꽂히는 사람들의 비명들이 지금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똑똑히 보여주는 듯해 절망스러웠다.

 

처음 문자를 받았을 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집단 광인병.’ 그 낯선 글자에 그저 코로나처럼 새로운 바이러스겠거니, 좀 소란스럽다가 지나가겠지 싶었다.

 

하지만 그게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엔 단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형, 밖에 무슨 소리야?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아 있던 원빈이 몸을 일으켰다. 원빈의 겁먹은 목소리에 성찬이 장난치지 말라는 듯 웃음기를 머금고 창문 밖을 내다봤다가, 이내 웃음기를 거두고 낯설 만큼 낮은 목소리로 원빈을 불렀다. 원빈아.

 

원빈이 성찬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성찬의 팔을 붙잡았다. , 저게 지금... 누군가 차도 한가운데 쓰러진 사람을 물어뜯고 있었다.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거리는 금세 사람들로 뒤엉켰다.

 

“보지 마.

 

성찬이 원빈의 어깨를 잡고 강제로 몸을 돌리게 했다. 그러고도 안 되겠는지 커튼을 확 잡아당겨 바깥 풍경을 가렸다. 시야가 차단되고, 이내 둘의 귓가로 생생한 비명이 점점 가까이 들렸다. 건물 1층에서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원빈의 어깨를 잡은 성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원빈아. 가방 챙겨.

 

“뭐?

 

“물이랑, 먹을 것, ... 다 챙겨야 돼. 빨리.

 

성찬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원빈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황급히 집 안을 뒤졌다. 가장 큰 가방에 생수, 라면, 참치캔, 에너지 바···. 눈에 보이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쓸어 담았다. 충전기... 보조 배터리는... 원빈이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중얼거리며 서랍을 뒤적이는데 현관문 밖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형!

 

“일로 와.

 

성찬이 단숨에 원빈의 손목을 움켜쥐곤 베란다로 향했다. 조심스레 창문을 열고 옆집을 살피니 다행히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사람이 있어도 성찬은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성찬이 옆집 베란다와의 거리를 재빨리 가늠해 보곤 뒤를 돌아 원빈에게 말했다. 원빈아, 뛸 수 있지? 성찬이 옆집의 동태를 살피는 동안 아래를 내려다 보며 겁에 질려 있던 원빈은 처음 보는 단호한 얼굴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성찬이 먼저 몸에 반동을 주고 튀어 나가자 단번에 발이 옆집 난간에 닿았다. 별 무리 없이 이동한 성찬이 원빈을 향해 팔을 뻗고는 확신의 찬 목소리로 원빈에게 신호를 주었다. 하나, , 셋 하면 형한테 와. 원빈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다리에 힘을 주고 뛰었다.

 

성찬이 원빈의 팔을 낚아채자마자 현관문이 부서지는 듯한 커다란 소리가 났다. 성찬의 집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난장판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성찬이 원빈의 입을 막고 숨소리조차 내지 말라는 듯 신호를 주었다. 원빈은 그저 성찬이 하라는 대로 따르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옆집 베란다에서 몸을 낮춘 채 숨죽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성찬의 집에서 들리던 불편한 소음이 사그라들었다. 뭔가가 집 안을 뒤지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게 분명했다. 성찬이 원빈의 입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원빈이 억지로 참아내던 숨을 천천히 토해냈다. 둘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빈집 곳곳을 살폈다. 원빈아, 더 챙길 거 있는지 일단 보고 최대한 챙기자. 원빈은 대답조차 겁이 나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원빈이 집안 곳곳을 살필 동안,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복도를 확인하던 성찬이 이내 무언가를 보고 놀란 듯 황급히 문을 닫았다.

 

복도 끝에 뭔가가 있었다. 분명했다.

 

성찬의 눈빛이 싸하게 굳어졌다. 지금 저게... 사람이라고 인식조차 못 할 만큼 망가진 형체의 시체 같은 것이, 축 늘어진 몸을 벽에 기댄 채로 기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런 성찬의 행동에 덩달아 놀란 원빈이 현관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성찬이 속삭이듯 말을 내뱉었다. 여긴 안 될 것 같아. 그 말 한마디에 원빈은 성찬이 어떤 것을 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둘은 다시 베란다로 향했다. 이번엔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했다. 마땅히 매달려 올라갈 게 없었기 때문에 내려가는 게 최선이었다. 성찬이 발을 조심스레 딛고 난간에 매달리자 원빈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미 손에 땀이 잔뜩 배어 있어 자꾸 미끄러지는 탓에 어딘가를 지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급한 대로 원빈이 성찬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지만, 손끝이 하얘지도록 힘만 들어가기만 하고 성찬을 지지할 힘은 없었다. 그저 놓지 말아 달라는 듯 애타게 붙잡을 뿐이었다.

 

성찬이 먼저 발을 딛고 난간에 매달리면 원빈도 똑같이 성찬을 따라 움직였다. 둘은 그렇게 한 층, 두 층을 내려가며 베란다 창문 너머를 확인했다. 대부분 집은 비어 있거나,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 간헐적으로 어떤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6층쯤 내려왔을 때, 온통 난장판인 집을 살피던 성찬이 원빈에게 눈짓했다. 이미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뒤라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성찬의 판단이었다.

 

잔뜩 긴장하며 베란다를 통해 들어간 집 내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거실 바닥에는 뭔지 모를 질퍽한 것이 쏟아져 있었고, 공기 중엔 코를 찌르는 악취가 진동했다. 참지 못한 원빈이 헛구역질을 하자 성찬이 재빠르게 손으로 원빈의 코와 입을 막아왔다. 원빈, 소리 내면 안 돼. 힘들어하는 원빈을 보는 게 안쓰럽기만 했다.

 

어딜 가도 안전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현관문은 반쯤 부서져 있었고, 복도에서는 아까 들었던 끽끽 대는 기이한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경각심이 든 성찬이 부엌으로 곧장 가더니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식칼이든 뭐든, 뭔가 날카로운 것. 공격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 원빈은 거실 티비 밑 서랍에서 손전등을 발견하곤 가방에 쑤셔 담았다. 식칼과 과도, 테이프와 끈. 쓸모 있을 만한 것들은 모조리 챙겼다.

 

 

“나가자.

 

....

 

 

반쯤 부서진 현관문을 통해 오피스텔 복도로 나오니 전력이 다 나간 건지 온통 새카만 암흑으로 가득했다. 유일한 불빛인 비상구 표지판의 희미한 불빛에 의존해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위층에서 쿵쿵대는 발소리가 들렸다. 성찬이 본능적으로 원빈의 손을 꽉 잡아챘다.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일정한 간격의 발소리는 심장이 뛰는 속도와도 비슷했다. 성찬이 원빈을 끌어당겨 계단 모퉁이로 몸을 숨기자 발소리는 이내 점점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멀어졌다. 아래층으로 가는 것 같았다.

 

틈을 기다리던 성찬은 발소리가 멀어지자 위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원빈이 다급하게 성찬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형... 하고 입을 떼니 옥상으로 가야 한다며 원빈을 이끌었다. 굳게 닫힌 옥상 문은 성찬이 발로 몇 번 세게 차니 큰 굉음과 함께 열렸다. 원빈이 큰 소리에 불안해하며 성찬의 등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성찬이 팔을 뒤로해 원빈을 안심시키듯 토닥이며 문을 열자 선선한 공기가 코끝으로 훅 끼쳤다.

 

옥상에 들어서자마자 둘은 짠 것처럼 문을 막을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뭔지 모를 공구들과 쇳덩어리들을 얼기설기 교차시켜 문을 막고 나서야 숨을 제대로 내쉬었다. 옥상 위는 물탱크와 여기저기 버려진 화분과 매트리스 따위가 놓여져 있었다. 성찬이 문 앞을 가로막은 것들을 점검하는 동안 원빈은 옥상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 잠깐 사이, 거리는 아수라장이었다.

 

차들은 여기저기 부딪혀 연기가 나고 있었고, 사람들은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니, 뛰어다닌다기보단 비틀거리며 돌아다닌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았다. 어떤 것들은 바닥에 쓰러진 무언가를 뜯어 먹고 있었고, 어떤 것들은 그저 의미 없이 힘없는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형... 우리 어떡해.

 

 

원빈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성찬은 무어라 대답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 이내 원빈의 손만 더 세게 잡아 왔다. 사실 성찬도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저 머릿속엔 살아야 한다는 것, 원빈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 긴급재난문자

2025-09-23 18:13 [긴급] 서울 전역 광인병 비상사태 선포. 확진자 격리 중 집단 탈출 사건 발생. 불필요한 외출을 삼가시고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십시오. 111번 신고 시 구조 지원합니다. [행정안전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자 아래에서 들리던 소음은 더 날카롭게 귓가를 울렸다. 비명 소리, 무언가 부딪히는 파열음 소리, 무언가 목을 긁으며 울어대는 소리. 끔찍한 상황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려면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앉아 있던 둘 사이엔 아무 말이 오가지 않았다. 아마 같은 걸 느끼고 있기 때문이겠지. 원빈이 손을 입가로 가져가려 하자 성찬이 부스럭대며 가방을 뒤졌다. 얼마 만에 깨지는 정적이었다.

 

 

“원빈아, 이거 먹어.

 

... 형은?

 

“난 아까 먹었지. 너 정리할 동안.

 

 

성찬이 원빈에게 준 에너지바의 포장지가 온통 꾸깃꾸깃했다. 이미 먹었다는 성찬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지만 원빈은 더 캐묻지 않았다. 얌전히 받아 들고서 반으로 똑 나눈 원빈이 성찬에게 반쪽을 건넸다. 난 이것만 먹어도 충분해. 망설이던 성찬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반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둘은 물탱크 뒤에 몸을 숨기고 서로 등을 기댄 채 밤을 보냈다. 잠은 올 리 없었다. 이따금 비상계단 쪽에서 수상한 소리가 나면 성찬은 1초 만에 식칼을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형, 괜찮아... 원빈이 그런 성찬을 토닥였고, 성찬은 칼을 내려두고 마른 세수를 했다.

 


   ⚠️ 긴급재난문자

2025-09-24 06:28 강남구·서초구 일대 임시 대피소 운영 중단. 잠실종합운동장, 여의도공원 임시 대피소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단, 감염 의심 증상 시 절대 이동을 금합니다. [서울특별시]


 

끔찍했던 첫 날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왔다. 하늘은 서서히 빛을 찾았지만 도시는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불이 켜진 건물은 거의 없었다.

 

 

“원빈아.

 

“응.

 

“우리 여기서 내려가야 될 것 같지?

 

... 대피소?

 

“응. 문자에, 있었으니까...

 

 

원빈이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배터리는 85퍼센트. 잠실종합운동장이 여기서 얼마나 먼지도 감이 안 왔다. 원빈은 지도 앱을 켜보려다 이내 관뒀다. 최대한 배터리를 아껴야 했다.

 

 

“형, 여기서 잠실까지 걸어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 모르겠어. 근데 가야 돼. 여기 있으면 우리... 더 위험해. 원빈아.

 

 

성찬의 말이 맞았다. 가방에 든 물과 음식은 아무리 아껴 먹는다 한들 이틀을 버티기에도 빠듯한 양이었다. 그렇다고 아래로 내려가 편의점이나 마트에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했고. 차라리 대피소로 가는 게 나았다. 문자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럼 지금 가?

 

“조금만 있다가 가자. 아직 어두워서...

 

 

해가 완전히 뜨길 기다리던 둘은 옥상 문을 열기 전, 루틴처럼 운동화 끈을 다시 묶었다. 원빈의 손엔 쇠 파이프가, 성찬의 허리춤엔 식칼이 꽂혀 있었다. 현실감 없는 상황에 멍해질 때면 성찬은 원빈의 어깨를 잡곤 그렇게 말했다.

 

 

“원빈아, 내 뒤에서 절대 떨어지면 안 돼. 알겠지?

 

... 알겠어, .

 

“뭐가 나와도 소리 지르지 말고, 뛰지도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할 수 있지?

 

 

원빈이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찬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무섭기까지 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옥상 문을 여니 계단은 어제보다 더 어두웠다. 이젠 비상구 불빛마저 꺼진 채였다. 앞장선 성찬이 손전등을 켜고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갈 때마다 원빈의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발소리를 최대한 줄이려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히 걷는데도 운동화 바닥이 마찰해 끼익하는 소리가 울렸다.

 

3층 정도까지 내려왔을 때쯤, 복도에서 뭔가 끌리는 소리가 들려 성찬이 손전등을 끄고 원빈의 손을 잡아 왔다. 비상구 문 뒤로 몸을 숨기자 수상한 소리는 복도를 지나 계단 쪽으로 가까워졌다. 감염자였다. 원빈이 입을 막고 숨을 참았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쿵쿵거렸다.

 

계단 입구에 멈춰 선 감염자는 냄새를 맡는 듯 불규칙적으로 킁킁대며 그르렁대는 소리를 냈다. 어딘가에서 떨어지는 검붉은 액체는 바닥을 적시더니 성찬의 운동화 앞코까지 튀었다. 숨 막히는 대치 상황 속 성찬이 천천히 허리춤에 꽂아 두었던 식칼을 움켜쥐던 순간, 아래층에서 무언가 넘어지는 큰 소리가 울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른 속도로 고개를 휙 돌린 감염자는 목을 긁는 소리와 함께 복도로 사라졌다. 맞잡은 성찬과 원빈의 손이 온통 땀에 젖어 축축했다.

 

한참을 숨죽여 기다리다 다시금 내려가 겨우 도착한 1층 로비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유리문은 온통 깨져 여기저기 파편으로 뒤덮여있었고, 바닥엔 온갖 잡동사니와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저 멀리 구석 어딘가에 흐릿하게 무언가 있는 것 같아 성찬이 손전등으로 비췄을 때, 원빈은 입을 막았다. 그건 쓰러진 사람이었다. 목과 팔에선 살점이 뜯겨 나간 흔적이 선명했고, 피는 이미 검게 굳어 있었다. 성찬이 원빈을 황급히 돌려세우곤 밖으로 나갔다.

 

거리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가을바람이 선선히 부는 거리는 이질적일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간간이 날리는 비닐봉지 소리, 저 멀리 들리는 자동차 경보음 소리 같은 그런 게 전부였다. 성찬이 방향을 가늠하며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원빈이 옷자락을 꾹 붙들고 따라 움직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지 않은 곳에 편의점이 보였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안은 온통 뒤죽박죽인 채였지만. 성찬이 고개를 빼곤 안을 살피더니 원빈에게 손짓했다. 들어가자. 둘은 재빨리 매대에 놓인 것들을 쓸어 담았다. 원빈이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을 들고 한참을 고민하자 성찬이 아주 오랜만에 살짝 웃었다. 너 그거 먹고 배탈 나면 어떡해. 그치? 원빈이 따라 웃으며 내려놓았다.

 

생각 외로 얻은 수확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둘은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골목 안쪽에서 감염자가 비틀거리며 나타난 탓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감염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둘을 발견한 순간 입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무섭게 쫓아오기 시작했다.

 

 

“원빈아, 뛰어!

 

 

성찬이 원빈의 손을 잡아끌며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뒤에서는 땅을 질질 끄는 발소리가 계속해서 둘을 따라왔다. 성찬은 골목 여기저기를 돌며 따돌리려 했지만 그 소리에 다른 것들마저 반응하기 시작해 오히려 감염자들을 끌어모은 셈이 됐다.

 

 

“형, ... 저기!

 

 

원빈이 손으로 가리킨 곳은 셔터가 반쯤 열려 있는 한 건물이었다. 성찬이 망설임 없이 원빈을 밀어 넣고 저도 몸을 굴러 안으로 들어갔다. 성찬이 아직 반쯤 열린 셔터를 내리려 했지만 고장이 났는지 꿈쩍도 하지 않자 초조함에 낮게 욕을 짓이겼다. 원빈이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성찬의 옆에 와서 다시금 힘껏 힘을 주자 드르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셔터가 닫혔다. 셔터가 닫히고도 주위를 둘러보던 원빈이 여태 손에 들고 있던 쇠 파이프를 망설임 없이 셔터 아래에 가로로 꽂아 넣자, 주변이 고요해졌다.

 

무작정 들어온 건물은 폐업한 식당인 듯 보였다. 테이블과 의자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고, 주방에선 습기를 잔뜩 머금어 꿉꿉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바닥에 주저앉은 둘은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누구 할 것 없이 숨소리가 거칠었다.

 

 

“괜찮아?

 

 

성찬이 원빈의 얼굴을 살폈다. 원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온몸이 후들거리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난 성찬이 원빈의 손을 감싸자 덜덜 떨리는 손이 이내 진정되는 듯했다. 원빈아, . 물 마시자.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원빈에게 얼른 건네자 원빈이 두 손으로 페트병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이 따가운지 인상을 찌푸리는 원빈을 보던 성찬의 표정이 울상이었다. 형도 마셔 얼른... 그 와중에도 저를 챙기는 원빈이 기특하고 안쓰러워 그새 거칠어진 볼을 쓰다듬었다.

 

가볍게 목을 축인 성찬이 일어나 뒷문을 확인했다. 잠겨 있긴 했으나, 안쪽에서 열 수 있는 구조라 잘만 하면 비상구로 충분히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빈아, 일단 우리 여기서 좀 쉬자. 성찬의 말에 원빈이 고개를 끄덕이고 벽에 등을 기댔다. 원빈의 손이 계속 떨리는 탓에 페트병 속 물이 흔들려 성찬이 대신 받아들곤 가방에 넣어두었다.



   ⚠️ 긴급재난문자

2025-09-24 11:20 [경고] 광인병 감염자는 소음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이동 시 최대한 소음을 줄이고, 불가피한 경우 큰 소리를 내어 다른 방향으로 감염자를 유인하십시오. [질병관리청]


 

짧게 울리는 진동에 원빈이 폰을 확인했다. 무미건조한 눈으로 문자를 읽은 원빈이 성찬에게 보여주니 성찬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소음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아까 계단에서... 성찬이 되짚어보다 떠오른 기억에 고개를 저었다. 폰 꺼 둬도 될 것 같아, 원빈아. 원빈이 성찬의 말에 폰을 끄려다 말고 마지막으로 문자를 확인해 본다. 혹시, 그 사이에 뭔가 더 오지 않았을까. 하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원빈이 폰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식당에서 한두 시간쯤 보냈을까, 밖은 여전히 섬찟하도록 고요했다. 드문드문 비명 소리나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근처에서 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성찬과 원빈은 아주 잠깐, 그게 환청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 정도로 지쳐있었다.

 

 

“형, 우리 이제 가자. 해 지기 전에 최대한 가야 될 것 같아.

 

 

원빈이 씩씩하게 먼저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성찬도 따라 일어서 원빈의 얼굴에 묻은 흙먼지를 손으로 살살 닦아줬다. 너 저번에 캠핑 갔을 때도 얼굴에 막 묻히고 그러더니. 성찬이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듯 미소 지으며 원빈을 바라봤다. 형도 지금 엉망이거든... 원빈이 민망한지 투정을 부린다.

 

둘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셔터를 다시 닫아두고 나왔다. 여기 위치 기억해 두자, 혹시 모르니까···. 성찬의 말끝이 부쩍 짧아졌다. 원빈에게 굳이 겁을 주고 싶지 않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인 뒤 방향을 확인하곤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발바닥이 화끈거리고 다리가 아파지자 원빈이 성찬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형 우리 저기서 잠깐만 쉬고 갈까? 원빈이 가리킨 곳은 빈 버스 정류장이었다. 성찬이 주위를 조금 경계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원빈의 어깨를 감싸안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차가운 의자에 풀썩 앉은 원빈이 종아리를 주무르고 있는데, 성찬이 갑자기 상체를 훅 낮춰왔다. 원빈아, . 원빈이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시선을 맞추자 성찬이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도로 한 가운데 서너 명이 모여 있었다. 뭐지? 생존자인가? 원빈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다 이내 다급히 성찬의 손을 찾아 붙든다. 그건 생존자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둘러싸고 있는 감염자들 사이에서는 척척한 소리가 들렸다. 둘은 어쩔 수 없이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야 했다. 해는 점점 지고 있었고, 또다시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 긴급재난문자

2025-09-25 08:15 잠실종합운동장 임시 대피소 수용 인원 초과로 추가 입소 제한 중. 여의도공원, 올림픽공원 대피소로 이동 바랍니다. [서울특별시]


 

광인병 바이러스가 발발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아침, 둘은 낡은 폐건물 옥상에서 밤을 보냈다. 제대로 잔 건지 그냥 눈만 감은 건지도 모를 몇 시간을 보내니 정신은 멍했고 온 몸이 쑤셨다. 원빈이 눈을 뜨고 옆을 봤을 때, 성찬은 이미 앉은 채로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 안 잤어?

 

“아니야. 조금 잤어.

 

 

또 거짓말. 원빈은 알고 있었다. 성찬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대로 잠든 적이 없었다. 성찬은 원빈이 자는 동안 항상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형도 자야 돼. 그러다 형 쓰러지기라도 하면...

 

“형이 언제 쓰러지는 거 봤어? 괜찮아. 나 체력 좋잖아.

 

 

성찬이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원빈이 울컥 치미는 감정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배고프지, 얼른 가자. 식량이 떨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무슨 수가 있어도 꼭 잠실까지 가야만 했다. 둘은 다시 길을 나섰다.

 

그래도 적응이 빨랐다. 이제 제법 요령이 생기기도 했다. 큰길은 피하고 되도록 골목으로, 소리가 나지 않게 발끝으로 조용히 걷고, 무언가 기척이 나면 일단 어딘가에 몸을 숨겼다. 둘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 걸었을까, 원빈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성찬이 그 소리에 발걸음을 멈춰 섰다. 원빈이 머쓱한 듯 웃으며 어제 먹은 거 소화되는 건가 봐. 하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다. 먹은 것도 없으면서. 둘 사이에 점점 거짓말이 늘었다.

 

성찬이 그런 원빈을 보다 한참 가방을 뒤지더니 초콜릿을 하나 꺼내 입가로 가져다 댔다. , 해 얼른. 원빈이 미안한 듯 입을 삐죽이다 이내 반을 조금 베어 문다. 이만큼만 먹을래... 성찬이 원빈의 턱을 톡 건들곤 남은 반 조각을 한 입에 쏙 넣었다. 달다, 그치. ...

 

 

“대피소 가면... 거기 사람들도 있을까?

 

“문자에 그렇게 나왔으니까...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

 

“그럼 거기 먹을 것도 있겠지?

 

“그래야지.

 

. 그치. 성찬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햇살이 제법 뜨거워졌을 때, 드디어 한강이 보였다. 다리를 건너 조금만 더 가면 올림픽공원이었다. 하지만 다리 위는 이미 사고가 났는지 차 여러 대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고, 운전석이며 조수석 문이 열린 채로 버려진 차들도 많았다. 성찬이 원빈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차 사이를 지나가기 시작했다.

 

다리 중간쯤 왔을 때, 원빈은 차 안을 무심코 쳐다봤다가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운전석에 누군가 고개를 떨군 채 앉아 있었다. 죽은 건지 그냥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동이 없었다. 성찬은 놀라서 얼어버린 원빈의 손을 황급히 잡아당겨 빨리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성찬의 말에 원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렴풋이 공원의 조명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근데 가까이 갈수록 이상했다. 대피소라면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너무 조용했다. 성찬도 그걸 눈치챈 건지 걸음을 일순 멈췄다.

 

공원 가까이에 다다랐을 때, 둘은 동시에 멈춰 섰다. 푸릇푸릇한 공원은 어느새 생기를 잃고 텅 비어 있었다. 천막은 여기저기 찢겨 있었고, 물건들은 흩어져 있다. 그리고 바닥에 남아있는 붉은 얼룩까지···. 익숙한 풍경이었다.

 

 

....

 

“원빈아, 지금 여기...

 

...

 

“우리 다른 곳으로 가야 될 것 같아.

 

 

원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불안함에 결국 눈물을 글썽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 다녀야 하는 건지, 언제쯤 안전한 곳을 찾을 수 있는 건지. 기약 없는 발걸음이 너무 힘들었다. 원빈아, 울지 마. ? 성찬이 고개를 숙여 다정하게 원빈을 달랬다.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여도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더 짜증 났다. 형도 울고 싶을 텐데.



   ⚠️ 긴급재난문자

2025-09-27 17:52 광인병 감염자 야간 활동 증가 확인. 일몰 후 야외 활동 절대 금지. 안전한 장소에서 대기하십시오. [행정안전부]

 


올림픽공원이 이미 폐허가 된 뒤라면, 잠실은 굳이 가지 않아도 상황이 빤히 보였다. 해가 지고 있는 터라 우선 서둘러 오늘 밤을 보낼 곳부터 찾기 시작한 둘은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아파트 단지를 발견했다. 1층 경비실은 비어 있었고, 단지 안도 조용했다. 성찬이 계단을 오르며 한층씩 확인하던 그때, 5층쯤 문이 살짝 열려 있는 빈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둘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현관에 놓인 스툴을 끌어다 문 앞을 막고, 도어락이 잘 되는 지도 두어 번 확인했다. 집 안은 제법 깔끔했다. 주인이 급하게 나간 모양인지 식탁 위에 컵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엌을 뒤지던 성찬이 라면과 생수, 가스버너를 발견하곤 서둘러 원빈을 불러다 식탁에 마주 앉았다. 며칠 만에 먹는 따뜻한 음식에 궁상맞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맛있다며 오물오물 잘도 먹는 원빈을 보던 성찬의 얼굴에도 드물게 웃음이 번졌다. 허기를 달래고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으니 창밖에는 그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형.

 

....

 

“우리... 계속 이렇게 지내야 되겠지?

 

 

성찬은 대답을 고민했다. 원빈을 안심시켜 주고 싶었는데. 그저 원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꼭 끌어안기만 했다. 원빈이 며칠 만에 성찬의 품을 파고들었다.

 

 

“나 무서워. ...

 

... 나도. 나도 그래, 원빈아.

 

 

성찬이 처음으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놨다. 실은 저도 무서웠단 그 말에 원빈이 성찬의 품에서 훌쩍였다. 둘은 서로를 꼭 안고 밤을 보냈다.



   ⚠️ 긴급재난문자

2025-10-02 10:33 [알림] 광인병 백신 개발 착수. 임상 시험까지 최소 2개월 소요 예상. 그전까지 모두 안전 수칙 준수 바랍니다. [질병관리청]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정확히 며칠이 흘렀는지, 이젠 시간 감각도 날짜 감각도 모두 흐려졌다. 둘은 빈집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비어 있는 곳을 찾으면 하루이틀 묵고, 빗물을 모아서 씻고, 식량을 찾아서 편의점이나 마트를 뒤지고, 위험하다 싶으면 숨고,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이동하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겁게 보냈다.

 

원빈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처음엔 저를 지키느라 혈안이 된 성찬에게 부러 더 말을 걸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성찬이 하라는 대로 따라갔으며, 성찬이 주는 대로 먹고, 성찬이 눈을 감으면 따라서 눈을 감고 휴식을 청했다.

 

그리고 그건 성찬도 마찬가지였다. 성찬은 원빈에게 꼭 필요한 말만 했다. 하지만 원빈의 손만은 절대 놓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이 생기든, 둘의 손은 항상 꼭 맞잡혀 있었다. 그게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양.



   ⚠️ 긴급재난문자

2025-10-07 15:22 [긴급] 서울 서초구·강남구 일대 광인병 감염자 집단 이동 포착. 해당 지역 주민은 즉시 실내로 대피하십시오. 외출 중이신 분들은 가까운 건물로 긴급 대피 바랍니다. [서울특별시]


 

아파트 베란다에서 빗물을 받던 원빈의 손끝이 시렸다. 10월이 되니 날씨가 확연히 추워졌다. 성찬이 창문 너머로 거리를 살피다 원빈을 돌아보며 말을 꺼낸다.

 

 

“원빈아, 물 다 받았어?

 

“응, 거의?

 

“옷 좀 더 껴입어야겠다. 이제 엄청 쌀쌀해.

 

 

성찬이 방 어딘가에서 찾은 카디건을 원빈의 어깨에 걸쳐줬다. 형은? 난 괜찮아. 주저 없이 나오는 거짓말에 원빈이 성찬의 팔뚝을 살살 쓸어내렸다. 형이 더 차가운데 뭘... 원빈이 어깨에 걸쳐진 카디건을 다시 성찬에게 주려 하자 성찬이 뒷걸음질을 쳤다.

 

 

“원빈이 너 입으라니까.

 

“형도 춥잖아.

 

“난 진짜 괜찮아. 너보다 추위 덜 타는 거 알잖아.

 

 

성찬이 원빈의 어깨를 토닥이며 카디건을 입혀줬다. 원빈은 입술을 꾹 깨물기만 할 뿐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성찬과 이런 식으로 실랑이를 벌이는 건 싫었다. 원빈은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빗물을 받아오겠다고 자리를 떴다.

 

페트병에 빗물을 가득 담은 원빈이 거실로 들어오자 성찬은 가스버너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며칠 전, 마트에서 가져온 컵라면이 딱 하나 남아 있었던 터였다. 둘이 나눠 먹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지만.

 

 

“형, 이거 형이 먹어.

 

“아니야, 원빈이 너 먹어.

 

“난 아까 과자 먹었잖아.

 

“그거 뭐 얼마나 먹었다고. 이거 얼른 먹어, 원빈아.

 

 

성찬이 원빈의 손에 꾸역꾸역 컵라면을 쥐여줬다. 원빈이 내키지 않는 듯 굴자 성찬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빈아, 형 말 들어. ? 결국 고개를 끄덕인 원빈이 국물만 홀짝인다.

 

 

“형, 나 진짜 배불러서 더 못 먹겠어.

 

...

 

 

형이 먹어주라, ? 원빈의 성화에 마지못해 컵라면을 받아 든 성찬이 아직 따뜻한 컵라면을 호호 불어가며 먹었다. 원빈은 그 모습을 보다 이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세상이 망가진 이후로, 꼭 우리도 어딘가 망가진 것 같았다.



   ⚠️ 긴급재난문자

2025-10-12 09:43 [경고] 광인병 감염자의 신체 능력 향상 확인. 이동 속도 증가 및 청각 민감도 상승. 대피 시 더욱 신중히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질병관리청]




원빈이 창밖을 바라보니, 서너 명이 도로에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며칠 전보다 확실히 움직임이 빨라진 것 같았다.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는 원빈의 옆에 성큼 다가선 성찬이 블라인드를 내려 시야를 가려버렸다. 보지 말자. .... 무언가가 긁히는 소리, 철컥거리는 소리, 질질 끌리는 소리. 그런 소리가 날 때면 둘은 익숙한 듯 숨을 죽이고 소리가 작아지기만을 기다렸다.

 

식량을 넣어둔 가방을 확인한 원빈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미니 초코바 한 개와 물 한 병. 달랑 그게 전부였다. 식량이 떨어졌고, 물도 없다. 또 다른 곳으로 가야 할 타이밍이었다. 성찬이 눈치를 챈 듯 원빈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왔다. 괜찮아, 형 있잖아. 원빈은 불안함을 뒤로 하고 성찬의 손을 꼭 쥐었다. 성찬의 손은 여전히 따뜻하기만 했다.



   ⚠️ 긴급재난문자

2025-10-13 14:56 광화문·시청 일대 임시 구호 물품 배급 중단. 송파구 문정동 공영주차장에서 15시~17시 한정 배포 예정. 감염 의심 증상 시에는 접근을 통제합니다. [서울특별시]



다음 날 아침, 둘은 조심스레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베이스캠프라고 하기에도 뭣하지만, 원빈은 베이스캠프를 옮길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성찬의 등 뒤에 딱 붙어 바짝 따라가던 원빈은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난데없이 저를 비상계단으로 몰아넣는 성찬의 행동에 숨을 멈췄다. 엘리베이터 근처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곧 시야에서 멀어지는 형체를 보며  원빈은 속으로 조금 더 기민하게 반응해야겠다고 자신을 채근했다. 성찬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송파구 문정동이면... 여기서 얼마나 걸리지?

 

“한 시간? 아니면 두 시간 쯤?

 

... 멀다.

 

“응, 그러게... 그래도, 구호 물품 받아야 되잖아.

 

 

그건 맞긴 해. 원빈이 일부러 예전처럼 장난치듯 대꾸하자 성찬이 웃었다. 그래, 그냥 이렇게라도 지내면 된다. 같이 있기만 하면 된다. 원빈이 성찬의 웃는 얼굴을 보며 그렇게 다짐했다.

 

하염없이 걷던 둘은 우연찮게 비어 있는 편의점을 발견했다. 유리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안을 확인한 성찬이 조심스레 편의점 문을 열자 딸랑- 하는 벨 소리가 울려 퍼져 둘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다행히도 편의점 안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한바탕 난리가 났었던 듯 어수선했지만, 원빈이 구석진 곳을 뒤지다 운 좋게 통조림 몇 개를 발견해 신이 난 목소리로 성찬에게 말했다.

 

 

“형! 여기 참치캔!

 

“쉿.

 

 

참치캔을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진 원빈을 웃으면서 보던 성찬이 빠른 속도로 다가와 원빈의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밖에서 무언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계산대 뒤로 몸을 숨긴 둘은 천천히 호흡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편의점 유리문 너머로 무언가 지나가는 듯 인영이 보였다. 원빈이 성찬의 옷을 꽉 움켜쥐자, 성찬은 허리춤에 꽂아둔 칼을 천천히 빼 들었다. 한참 동안 기다린 끝에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둘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방심하면 안 된다. 둘만의 안전 수칙이 또 하나가 쌓였다.

 

문정동 공영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꽤 멀게 느껴졌다. 거리에 어슬렁대는 감염자들을 피하느라 시간이 배로 걸렸다. 주차창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4시가 훌쩍 넘은 듯 해가 지려고 했다. 원빈이 급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생존자들은 보이지 않았고, 입구에 쳐진 천막은 바람에 펄럭이고 있기만 했다. 바닥에는 찢어진 박스와 비닐봉지. 이건... 성찬과 원빈은 익숙한 감각에 발끝부터 치미는 절망감을 느꼈다.

 

 

“형.

 

....

 

“아무도 없어.

 

 

이미 구호 물품 배급은 끝났다. 또 헛걸음이었다. 성찬이 애써 원빈의 마른 등을 토닥이며 돌아서려는 순간, 천막 안쪽에서 무언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나 둘은 동시에 멈춰 섰다. 거기엔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성찬이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 상자를 열어보니 물 몇 병과 컵라면, 통조림이 들어 있었고, 보아하니 누군가가 미처 못 챙긴 구호 물품인 것 같았다. 둘은 재빨리 물품을 가방에 넣곤 서둘러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 긴급재난문자

2025-10-25 11:03 한강 이북 지역 광인병 감염자 급증. 강북구·노원구·도봉구 주민은 한강 이남으로 대피 권고. 교량 통행 시 각별히 주의하십시오. [서울특별시]

 


구호 물품을 챙긴 둘은 어느 다세대 주택에 머물렀다. 머무르는 동안 식량을 아끼느라 자꾸 아무것도 안 먹겠다는 성찬에게 원빈은 형이 안 먹으면 나도 안 먹겠다며 떼를 썼고, 성찬은 원빈의 고집에 못 이겨 몇 입이라도 챙겨 먹는 시늉을 했다.

 

어느덧 원빈도, 성찬도 많이 야위었고 지쳐있었다. 매일 밤 서로를 지키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식량도 계속 양보했던 탓에 몸이 점점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서로를 갉아먹으며 서로를 챙기고 있던 거였다.

 

 

“형, 오늘은 형이 먼저 자.

 

“괜찮아. 너 먼저 자.

 

“안 돼. 형도 자야 돼.

 

 

원빈이 성찬을 억지로 소파에 눕히곤 담요를 덮어줬다. 성찬이 거부하려 몇 번이고 몸을 일으키자 결국 원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 제발... 성찬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알았어, 조금만 잘게. 많이 피곤했던 건지 눈을 감자마자 까무룩 기절하듯 잠드는 성찬의 머리를 쓰다듬던 원빈이 가만가만, 볼이 쏙 들어간 얼굴을 매만졌다.



   ⚠️ 긴급재난문자

2025-11-02 16:27 급격한 기온 하강으로 감염자 활동 둔화 예상. 실내로 유입 시도 증가가 우려되니 문단속을 철저히 하시기 바랍니다. [행정안전부]



 

기온이 더 내려갔다. 원빈은 밤마다 추위에 잠을 설쳤고 성찬이 그런 원빈을 꼭 안아줬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 추워... 조금만 참자, 곧 해 뜰 거야. 성찬이 원빈의 등을 쓰다듬으며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성찬의 품으로 파고들어 봐도 추위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 긴급재난문자

2025-11-09 08:44 광인병 감염자 동면 현상 확인. 추운 곳에 웅크린 채 활동 정지 상태 발견. 접근 즉시 깨어나 공격할 수 있으니 절대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서울특별시]



성찬이 다쳐왔다. 식량을 구하겠다며 나갔다가 돌아온 성찬의 한쪽 팔에 길게 긁힌 상처가 나 있었다. 성찬이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내려놓자, 피가 스민 옷을 본 원빈이 놀라 다가왔다.

 

 

“형... 다쳤어?

 

“아니야, 그냥 살짝 긁혔어.

 

“살짝 긁힌 게 아니잖아! 피 엄청 나는데...

 

 

원빈이 울상인 얼굴로 성찬의 팔을 붙들곤 살폈다. 성찬이 원빈의 어깨를 잡고 진정시키려 했으나 원빈은 많이 불안한 듯 바닥에 주저앉아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소독약 같은 건 없었다. 상처 연고도, 그 흔한 밴드도. 아무것도. 원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원빈아, 형 괜찮아. 진짜야, ?

 

“안 돼... 소독... 소독해야 돼, 빨리.

 

... 원빈아... 형 봐봐. ?

 

... 약국. , 나 약국 갔다 올게.

 

“박원빈.

 

 

원빈이 가방을 메려 하자 성찬이 원빈의 손목을 힘주어 붙잡았다. 밖에 지금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그래도, 그래도... 형 지금 팔이. 원빈의 얼굴이 곧 축축하게 젖어갔다. 성찬이 숨을 내쉬며 원빈을 품에 안았다. 원빈아, 형 진짜 괜찮아... 여기 있잖아, ?

 

 

... 이거, 흉 생기면, 어떡... 아프잖아, 형 아픈데...

 

“하나도 안 아파. ? 뚝 해야지.

 

......

 

“알았어. 그럼 형이 약국 갔다 올게.

 

“싫어. 형 다쳤잖아.

 

“그러니까 형이 가야지. 원빈이는 여기 있어.

 

“싫어. 안 해. 같이 가. ? 나도 데리고 가.

 

“금방 올게. 약만 구하고 바로 올게. 약속.

 

 

성찬이 원빈의 이마에 연신 입술을 내리며 달랬다. 죽어도 싫다고 우기던 원빈은 성찬이 제가 길을 다 알고 있으니 빨리 갔다 올 수 있단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성찬이 가방을 챙겨 문을 나서려는 순간, 원빈이 성찬을 다급히 불렀다. , 조심해. 성찬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원빈의 머리를 쓰다듬고 문을 나섰다. 원빈이 문을 닫히는 소리를 듣곤 현관에 주저앉았다. 가슴 한편이 꽉 막힌 것같이 답답했다.

 

금방 온다던 성찬은 원빈이 창가를 내내 서성이는 동안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10분이 지난 걸까, 아니면 20분이 지난 걸까. 시간도 확인하지 못해 원빈의 얼굴이 더욱 울상으로 변해갔다. 손톱 거스러미를 뜯다 결국 피를 보고 나서야 원빈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가방을 챙겼다. 언젠가 주웠던 야구배트를 꼭 쥐고 문을 열어 혼자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심장 소리가 너무 커 꼭 머릿속을 울리는 것 같았다. 새삼 성찬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원빈은 성찬이 갔을 만한 방향을 가늠하며 조심스럽게 걸었다. 골목을 두 개쯤 지났을까, 약국이 있었다. 그것도 문이 활짝 열린 채로. 불안감을 느낀 원빈이 단숨에 약국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때, 등 뒤에서 섬찟한 소리가 들려왔다.

 

구웨엑-

 

순식간이었다. 원빈이 돌아보자 골목 끝에 서 있던 감염자가 입을 크게 벌리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원빈이 뒤로 물러설 틈도 없이 달려들어 팔을 움켜쥐려 했고, 야구배트를 있는 힘껏 휘둘렀지만 빗나가기만 했다. 끔찍한 상황에 원빈이 비명을 지르려던 순간, 좀비가 어떤 힘에 못 이겨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성찬이었다.

 

 

“형!

 

 

성찬이 식칼을 꺼내 망설임 없이 좀비의 목과 어깨 사이를 푹 찔렀다. 검붉고 찐득한 피가 솟구쳐 오르며 성찬의 손을 적셔냈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걸 확인한 성찬이 원빈의 손을 잡아채곤 그대로 집까지 삽시간에 도망쳐왔다.

 

 

... 왜 나왔어.

 

... 그게,

 

“형이 뭐라고 했어. 여기 있으라고 했잖아.

 

“금방 온다고 했는데, 형이 안 와서...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원빈아... 제발...

 

 

성찬이 처음으로 크게 소리쳤다. 어깨를 움츠러뜨린 원빈이 고개를 푹 숙이곤 성찬에게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형 미안해... 원빈아, 너 방금 물릴 뻔했어. 알아? 성찬의 목소리가 떨리자 원빈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박원빈... 우는 원빈을 내려다보던 성찬이 이내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성찬이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 화내서 미안해. 형은 그냥... 성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처음 보는 성찬의 모습에 원빈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성찬이 울고 있었다. 어깨가 떨리는 성찬을 보던 원빈이 그제야 깨달았다. 형도 나만큼 힘들었구나. 나만큼 무서웠구나.

 

원빈은 성찬의 옆에 따라 앉아선 성찬을 꼭 끌어안았다. 성찬은 원빈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소리 없이 울었고, 원빈도 그런 성찬을 보며 따라 울었다. , 괜찮아... 괜찮을 거야...

 

 

... 원빈아.

 

“응. 알아... 다 알아 형. 나도 그래.

 

 

원빈이 손을 뻗어 성찬의 얼굴에 가득한 눈물을 닦아주자 강아지처럼 손을 잡곤 얼굴을 비벼왔다. 오랜만에 보는 성찬의 어리광에 원빈의 마음이 이상해졌다.

 

 

... 형 약은, 구했어?

 

“응. 가져왔어.

 

 

성찬이 가방에서 소독약과 밴드를 꺼냈다. 원빈은 피투성이가 된 성찬의 손부터 닦아냈다. 거긴 안 아파. 성찬의 장난에 원빈이 입술을 삐죽였다. 나도 알아. 또다시 울 것 같은 원빈의 얼굴에 성찬이 말을 아꼈다.

 

살짝 긁힌 거라더니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다. 아프냐고 물어봐도 괜찮다는 말만 하는 성찬 때문에 내내 조심히 상처를 치료한 원빈은 밴드를 붙여준 다음 성찬의 손을 꼭 붙잡았다. , 이제 형 혼자 나가지 마. 원빈의 말끝이 흐렸다. 우리 그냥 계속 같이 다니자, . 그 말에 성찬이 한참을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 긴급재난문자

2025-11-17 13:47 구호 물품 배급 일정 축소. 매주 화요일·금요일 14시~16시만 운영. 배급 장소는 추후 공지 예정. [서울특별시]


 

 

성찬의 상처는 다행히 심하게 덧나지 않았다. 약국에서 가져온 소독약과 밴드 덕분이었다. 성찬은 그날 이후 더 이상 원빈 앞에서 강한 척 굴지 않았고, 가끔 원빈의 품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했다.

 

 

“형.

 

“응?

 

“우리 12 15일에 뭐 할까?

 

 

12 15. 둘의 기념일이었다. 성찬이 고개를 들고 원빈과 시선을 맞췄다. 벌써 또 그렇게 됐네에. 원빈이 오랜만에 들뜬 듯 쫑알거렸다. 우리 작년에는 형이 케이크 사 와서 먹었잖아, 그치. 성찬이 기분 좋게 떠오르는 기억에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에는 성찬이 사 온 케이크를 집에서 나눠 먹고 커플링을 주고받았다. 둘은 지금도 그 반지를 약지에 끼고 있었다.

 

 

“올해는... 뭐 할까 우리.

 

 

원빈의 목소리가 금세 조심스러워진다. 잠시 생각하던 성찬은 원빈의 손을 잡았다.

 

 

... 케이크는 못 먹더라도.

 

“응.

 

“그래도 뭔가... 해보자. 우리.

 

 

성찬의 긍정적인 대답에 원빈의 눈이 예쁘게 반짝였다. 진짜? 성찬이 미소 지으며 제법 길어진 원빈의 머리카락을 넘겨줬다. 그럼, 우리 기념일인데.

 

 

   ⚠️ 긴급재난문자

2025-11-24 11:43 한파 특보 발효. 동상 및 저체온증에 주의하고 실내 온도 유지 및 보온에 만전을 기하시기 바랍니다. [질병관리청]


 

한파가 오자 원빈은 밤마다 추위에 떨었다. 성찬이 그런 원빈을 꼭 안아줬지만 역부족이었다. 추워하는 원빈에게 할 수 있는 게 없어 성찬은 그저 덮을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끌고 와 원빈의 몸 위로 덮어주기만 했다. 미안해, 형이 따뜻하게 해줘야 되는데... 성찬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원빈은 성찬의 품에 부러 더 파고들며 형이 있어서 따뜻하다며 애교를 부렸다. 성찬의 일정한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 그 순간만큼은 추위고 뭐고 다 잊혀지는 것 같았다. 여전히 우린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며칠 뒤, 둘은 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 집은 10층이었다. 높은 곳이라 그나마 안전할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성찬은 현관문과 베란다를 더욱 튼튼하게 봉쇄시켰다. 안방 옷장에는 옷가지가 몇 개 남아 있었고, 성찬은 개중 가장 두꺼운 점퍼를 꺼내 원빈에게 입혔다. 성찬은 이미 옷을 많이 껴입은 원빈의 움직임이 둔해지니 꼭 아기 오리 같다며 장난을 쳤다.

 

 

“형도 얼른 뭐라도 입어.

 

“난 이거 입으면 돼.

 

“안 돼. 그럼 형이 이거 입어.

 

“원빈아, 괜찮아.

 

“안 괜찮다니까아...

 

 

성찬이 걸친 얇은 점퍼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원빈이 제 점퍼를 벗어 성찬에게 건네려 하자 성찬이 원빈을 제지했다. 그럼 둘이 같이 입을까아. 눈을 동그랗게 뜬 원빈은 이내 성찬의 행동에 웃음이 터졌다. 성찬이 점퍼 안으로 원빈을 끌어안아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 나 숨 막혀. 그래도 따뜻하잖아. ... 원빈이 성찬의 체온을 느끼며 더욱 꽉 끌어안았다. 원빈은 요즘 성찬의 심장 소리를 들으려는 버릇이 생겼다.

 


   ⚠️ 긴급재난문자

2025-12-01 09:26 [알림] 광인병 백신 임상 1차 시험 완료. 효과 확인 중. 2차 시험 후 배포 일정 공지 예정. 조금만 더 버텨주시기 바랍니다. [질병관리청]



조금만 더 버텨달라는 게 언제까지일까. 식량은 거의 바닥났고, 물도 마찬가지였다. 성찬은 매일 밤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원빈과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가방을 뒤적거려봐도 이젠 간단히 요기할 거리도 없었다. 먹은 게 없어 힘이 없는 원빈을 보던 성찬이 몰래 한숨을 쉬었다. 구호 물품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는데. 성찬은 원빈에게 다가가 담요를 목 끝까지 올려 주며 안심하라는 듯 태연한 척 웃음을 지어 보였다.

 


   ⚠️ 긴급재난문자

2025-12-03 07:39 구호 물품 배급 장소 안내. 강동구 천호대교 남단. 시간은 14시~16시로 동일. [서울특별시]

 


아침 일찍 문자를 본 둘은 천호대교로 향했다. 눈이 소복이 쌓인 거리는 기분 탓인지 더욱 조용한 듯 느껴졌다. 뽀득거리는 발자국만 눈 위에 찍히고, 성찬의 발자국을 그대로 원빈이 따랐다. 도착했을 땐 천막이 쳐져 있었고, 몇 명이 줄을 서 있었다. 바이러스가 퍼진 이후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은 생존자들이었다. , 우리 제대로 찾아왔나 봐. 원빈은 추위에 입이 꽁꽁 얼어버렸음에도 반가운 마음에 기분이 좋은 듯 성찬에게 매달려 말을 건넸다.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자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둘을 보고 질문을 했다. 증상 없으신가요? 성찬과 원빈이 동시에 없다고 대답하자 구호물품에 관해서 설명해 줬다. 물 두 병, 컵라면 네 개입니다. 통조림은 떨어졌어요.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인 성찬이 물품을 받아 들었고, 원빈이 그걸 가방에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원빈이 돌아보니 저 멀리 다리 끝에 무언가 서 있었다. 여러 명의 감염자였다. 성찬이 주춤거리며 원빈의 팔을 잡고 제 쪽으로 이끌었다.

 

원빈아, 뛰어야 돼. 둘은 제일 먼저 천막을 빠져나와 뛰기 시작했다. 성찬과 원빈이 속도를 가해 뛰자 천막에 있던 사람들도 아비규환이 되어 뒤따라 뛰쳐나왔다. 눈 위를 밟아가며 뛰는 게 쉽지 않아 원빈이 자꾸 삐끗하자, 성찬은 원빈까지 지탱하려는 듯 몸에 더욱 힘을 주었다.

 

무섭게 쫓아오는 감염자들을 피해 한참을 뛰다 보니 낯선 동네였다. 성찬도, 원빈도 처음 보는 듯한 분위기에 긴장하며 숨을 헐떡였다. 오피스텔 건물과 사무실이 즐비한 그곳은 대부분 문이 닫혀 있었지만, 한 건물의 1층 유리문이 깨져 있는 걸 발견한 성찬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덕에 둘은 무사히 빈 집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 긴급재난문자

2025-12-08 11:26 폭설 예보. 최대 30cm 적설량 예상. 외출을 자제하시고 대피소 이동 시 동선 확보에 유의하십시오. [기상청]

 


창문 너머로 끊임없이 눈이 쏟아졌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하니 검붉은 핏자국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아 속이 안 좋았다. 차라리 더 쏟아져서 다 가려졌으면. 원빈은 창밖을 멍하니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형.

 

“응?

 

... 15일까지 며칠 남았어?

 

“일주일... 정도.

 

“우리 그때까지 같이 있을 수 있겠지?

 

“그럼. 당연하지.

 

 

성찬의 확신에 찬 대답에 원빈은 안심한 듯 웃었지만, 성찬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식량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일주일을 버티는 건 힘들 것 같았다. 시간 문제였다.

 


   ⚠️ 긴급재난문자

2025-12-10 15:34 구호 물품 배급 중단. 폭설로 인한 도로 통제. 재개 일정은 추후 공지. [서울특별시]


 

문자를 확인한 성찬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구호물품 배급이 중단됐다. 이제 식량을 받을 방법이 없었다. 원빈이 이상함을 느끼곤 성찬에게 다가왔으나 성찬은 원빈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말을 흐리며 대화를 피했다.

 

그날 밤 성찬은 밤새 고민했다. 식량이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다. 제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불편하게 자는 원빈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성찬은 속으로 결단을 내렸다.

 

 

“그럼 나도 같이 갈게.

 

“원빈아 그건 위험해.

 

“왜? 우리 같이 다니기로 했잖아. 약속했잖아...

 

... 너 지금 몸 상태 안 좋아. 예전처럼... 밖에 돌아다닐 순 없어. 너도 알잖아.

 

“형도 똑같아.

 

“난 괜찮아.

 

“괜찮다는 소리 좀... 그만해.

 

 

원빈이 울컥한 듯 씩씩거리며 성찬을 올려다봤다. 두려움, 슬픔, 안쓰러움, 고마움···. 원빈의 눈빛에서 그런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계속된 한파로 원빈은 하루가 다르게 컨디션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본인은 괜찮았다. 아직까지는 참을 만했다. 원빈을 위해서라면 뭐든 상관없었다.

 

나 또 바보같이 여기서 형만 기다리라고? 원빈의 원망 섞인 투정에 성찬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구호 물품 배급만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같이 나갔다가 저번처럼 원빈이 위험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그건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냥 저 하나 갔다 오는 게 낫다. 조금 다치더라도 그게 나았다.

 

성찬이 몇 번이고 꼭 돌아오겠다 일러도 원빈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구호 물품 줄 수도 있잖아, . 우리 그냥 기다리면... 극심한 두려움에 발까지 동동거리는 원빈에 성찬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바깥 상황이 어떨지 모르기에, 해가 지기 전 최대한 빨리 나가야 했다. 이럴 시간이 없었다. 원빈을 달래던 성찬이 손에 끼고 있던 커플링을 빼서 원빈의 별 목걸이에 조심스레 걸었다.

 

 

“원빈아. 이거, 너 갖고 있어.

 

... .

 

“나 그거 엄청 소중하게 여기는 거 알지. 네가 그때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엄청 그랬었잖아. 기억나지.

 

...

 

“그니까 나 그거 찾으러 꼭 올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

 

 

반지를 건네받은 원빈이 차마 성찬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글썽이는 눈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계속 고집부리면 형이 더 힘들겠지. 잠시 생각하던 원빈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곤 성찬에게 말했다.

 

 

... 조심해야 돼.

 

“응.

 

“다쳐도 되고 먹을 거 못 구해도 돼. 상관없어.

 

... .

 

... 물려도 되고 변해도 되니까... ... 꼭 다시 와. 알겠지.

 

 

성찬이 원빈의 볼을 감싸 따뜻한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원빈이 입술 다 텄네, 형이 립밤도 가져와야겠다. 그 말에 원빈이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성찬은 항상 그랬다. 심각한 상황일 때도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와야 돼. 원빈은 성찬의 귀가 따갑도록 그런 말을 하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성찬이 가방을 챙겨 나간 지 한 시간쯤 지난 것 같았다. 원빈이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밖을 내다봤다. 눈은 여전히 펑펑 내리고 있었고, 성찬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불안했다. 지난번, 약국에 갔던 성찬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보다 더. 아무래도 예감이 안 좋았다.

 

 

... ... 어디 있어. 제발, 제발...

 

 

성찬이 남기고 간 반지만 매만지던 원빈이 애타는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해가 지기 시작했고, 성찬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해가 지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원빈은 문 앞에 앉아서 성찬을 기다렸다. 혹시 무슨 소리가 났는데 못 들었을까 봐.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리도록 고요하기만 했다.

 

 

“정성찬...

 

 

원빈의 볼 위로 눈물이 쏟아졌다. 원빈은 성찬의 반지를 꼭 쥐고 소리 없이 울음을 토해냈다.

 

 

   ⚠️ 긴급재난문자

2025-12-11 09:13 생존자 구조 시작. 모든 생존자는 감염자를 피해 안전한 곳에 대피 후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특별시]



거짓말. 원빈이 문자를 보곤 헛웃음을 터트렸다. 끝내 성찬은 돌아오지 않았고, 원빈은 그런 성찬을 기다리며 현관문 앞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근데 지금 생존자 구조를 시작했다고. 원빈이 공허한 눈으로 성찬을 찾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거리는 여전히 정적만이 가득했다.

 

원빈은 가방도 챙기지 않곤 밖으로 나갔다. 성찬을 찾아야 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다리에 힘이 없어 자꾸 풀썩 주저앉았다. 픽픽 쓰러지려는 다리를 질질 끌고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원빈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바닥에 피 묻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성찬의 운동화 사이즈였다. 원빈과 똑같은.

 

그대로 홀린 듯 발자국을 따라갔다. 건물 밖에서 뚝 끊긴 발자국은 이미 새벽 내내 쌓인 눈으로 인해 자취를 감춘 뒤였다. 원빈이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삼켰다. 바보같이 기다리기만 하지 말고 나가 볼 걸.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도 계속 보고 있을걸.

 

원빈은 하염없이 거리를 걸으며 성찬을 찾았다. 편의점도, 마트도, 약국도, 식당도. 성찬이 들어갈 만한 곳은 모조리 다 들어가 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성찬은 없었다.

 

 

“형... 어딨어, ? , 나 보러 와야지...

 

 

원빈의 목소리가 울음에 묻혀 점점 작아졌다.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뛰쳐나온 탓에 이미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숨이 차 더 이상 걸을 수 없던 원빈은 눈 위에 그대로 쓰러졌다.

 

 

“생존자 발견!

 

 

그때 희미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빈의 눈이 감기려던 순간이었다. 원빈의 주위로 거센 바람이 불더니 소음과 함께 헬기가 점점 가까워졌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괜찮으십니까?

 

... . 형 찾아야 돼요... 정성찬...

 

“우선 대피소로 이송하겠습니다.

 

“형, 성찬이 형...

 

 

원빈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대피소에 마련된 간이침대에서 눈을 뜬 원빈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소독약 냄새와 팔에 꽂힌 링거가 낯설었다. ... 형은 어디 갔지. 원빈이 관성처럼 형을 부르며 주위를 둘러봐도 성찬은 없었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같이 있던 사람은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원빈을 이상한 사람처럼 취급했다. 혼자 구조됐어요, 다른 사람은 없었어요. 원빈은 그 말에 고개를 떨궜다. ... 이 아니었구나. 원빈이 여전히 제 목에 걸린 반지를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성찬의 체온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당장이라도 저를 찾으러 올 것만 같은데 제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게 절망적이었다.

 

다음 날부터 원빈은 대피소 관리자들을 붙들고 성찬을 찾아달라 애원했다. 구조자 명단은 저기에 가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기계 같은 말에도 원빈은 성찬의 인상착의만 내내 읊었다. 제발요, 제발... 매일 바뀌는 생존자 명단 어디를 살펴봐도 정성찬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래도 원빈은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매일 대피소 입구 쪽을 서성일 뿐이었다. 쇄골께에 달랑거리는 성찬의 반지가 원빈의 목을 옥죄어오는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고, 대피소에는 점점 더 많은 생존자들이 모여들었다. 백신 개발 소식도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 들어왔다. 다들 조금씩 희망을 가지는 가운데, 원빈만 혼자 멍했다. 백신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형은 없는데. 창가 쪽 침대를 배정받은 원빈이 하릴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눈은 그쳤지만, 거리는 여전히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저기 어딘가에 형이 있을까, 아니면···. 원빈이 이내 고개를 젓곤 뻑뻑한 눈가를 문질렀다.

 

목에 걸린 반지를 꼭 쥐고 있던 원빈이 이내 반지를 빼곤 제 손가락에 끼웠다. 성찬의 반지는 원빈의 것보다 조금 더 컸다. 거짓말에는 영 소질이 없어 내내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티를 냈던 성찬이 생각나 원빈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 모르는 척하느라 진짜 힘들었는데. 아직 생생한 성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나 그거 찾으러 꼭 올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원빈이 반지를 다시 목걸이에 걸며 중얼거렸다. 형이 어디에 있든... 내가 꼭 찾을게, 그러니까 제발···. 원빈은 차마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손끝이 하얘지도록 주먹을 꽉 쥐기만 했다. 대피소의 임시 조명이 세차게 깜빡였고,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세상은 조금씩 생기를 되찾고 있었지만, 원빈의 시간만은 여전히 그날 성찬의 품에서 멈춰 있었다.

 


   ⚠️ 긴급재난문자

2025-12-15 00:00 [알림] 광인병 발생 이후 83일째. 1차 백신 효과 확인되어 2차 시험 진행 중. 곧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부디 힘내주십시오. [서울특별시]


 

 

 

 

 

 

 

 

 

 

공동 생존 법칙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