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프로젝트!
by. 아마네

 

이른 아침 작은 새들 노랫소리 하나 안 들려오고 대신 나오는 거라 해봤자 후 불면 슝 하고 나오는 입김이 전부인 12월의 어느 날. 본격적으로 살 에는 추위 찾아오기 딱 직전의 날씨 사이사이를 걷고 있노라면 보이는 것은 연말이라는 단어를 앞장세워 만들어진 내년엔 기필코, 내년엔 드디어 라는 지켜지지 못할 마음가짐과 그 기대감을 고조시켜주는 온갖 반짝이 장식들뿐이다.

벌써 징글징글 해져버린 캐럴을 들으며 누군가는 애인 한정으로 보여줄 섹시 산타 코스튬을 구매하고, 누군가는 애인 한정으로 보여줄 섹시 루돌프 코스튬을 구매하는데… 정작 진짜 루돌프와 산타는 겨우살이 아래서 아주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호텔이 예약으로 미어터진다면 여긴 실시간으로 복장이 터져 나가고 있었다. 촉촉한 목소리가 하나 울려 퍼진다.

"네 납작 엉덩이 누가 알아준다고!"

너 같은 산타 태우고 다닐 루돌프가 어디 나 빼고 또 있을 줄 알아?

", 뭐라고? 형이 아직 코가 덜 빨개진 모양이지?"

더 빨개지게 내가 아주 죽빵을 날려줄까? 또 다른 축축한 목소리가 이어 복도에 울려 퍼진다. 동시에 나오는 건 흥, 삐져 고개가 돌아가는 행위이고 연달아 멀어지는 발걸음만이 대미를 장식해준다. 방금 싸운 것이 무색하게 하나는 코너를 돌자마자 살이 하나도 없는 제 엉덩이를 더듬더듬 만지며 흐잉… 웅얼거렸으며, 또 하나는 복도를 나오자마자 제 하얀 코를 감싸 쥐고 으이잉… 우는 소리를 냈다.

크리스마스 앞두고 산타랑 루돌프가 싸우면 어떻게 되나요?

이제부터 알려주도록 하겠다.

 

 

산타프로젝트!

아마네

 

 

벌써 일곱 번째 퇴짜다.

원빈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전날 선물 창고 물류를 좆빠지게 뛴 것도 아닌데 그늘이 진 것이다. 아무리 박원빈이 일어나자마자 가글을 7번하고, 아침 먹을 때는 꼭 7번을 씹고, 비행 전엔 손가락 기도를 꼭 7번 하며 하다못해 산타 시험마저도 6번 낙방 뒤 7번 만에 겨우 붙은 사람이라지만. 심지어 올라가 본 산타배 최고 랭킹 마저도 7위인 7의 산타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퇴짜까지 일곱 번을 맞다니. 행운의 숫자 7이 이 순간만큼은 불행의 숫자 7로 탈바꿈된다. 원빈은 우울하다.

"나랑 루돌프 바꿔서 타자, ?"

딱 올해만. ? ? 내가 진짜로 부탁할게. , 이렇게 비는 걸로 부족하면 내가 2년 전에 예약해 놓은 말랑말랑 하우스 크리스마스 한정 특선 진저 쿠키 20종 세트 있다. 그거 양도해주겠꾸마. 그러니까 제발…. 지나가던 김마네 붙잡고 바지 벗겨지도록 매달렸지만 이번에도 실패. 자동 새깅된 바지 추켜올려 입으며 야, 너 정성찬이 끄는 썰매 아니면 엉덩이 아프다고 못 타잖아! 마네에게 보란 듯 팩트 폭력까지 당한 원빈은 한없이 찌질해져만 갔다.

그렇게 5년 지기 친구한테도 처참히 버려지고 남은 건 원빈이와 겨우살이 복도뿐. 정처 없이 헤매다 이번엔 벤치에서 낮잠 때리던 김네마 흔들어서 네마야, 네마야아….

"너 이번 크리스마스에만 나 태워주면 안 돼?"

, 나 배달 빨리할 수 있다. 그동안 연습 많이 했다. 내가 우리 네마 빨리 퇴근시켜줄게. 그거 네마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 이 원빈이가 해주꾸마. 극강의 효율충 김네마 루돌프가 제일 좋아하는 조기 퇴근 베이스에 최고급 당근이도 한 박스 보내주겠단 옵션까지 걸어 딜을 요청했으나 또 거절을 당하고야 말았다. 너 우리 집 당근이 맛있는 거 알잖아!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원빈을 제법 안쓰럽게 바라보던 네마는 미안하네, 원빈. 하지만 자네는 조금만 높이 날아도 무섭다며 내려가자고 우는 산타가 아닌가. 나는 그런 산타는… 태우고 싶지 않다네. 그렇다고 원빈 자네가 싫은 것은 절대 아니니 서운해하지 말고. 알다시피 나는 스피드광에, 높은 것을 좋아하는 루돌프이지 않나. 나는 평생에 낮게 날아본 적이 없어. 그러니 원빈을 배려해 낮게 날더라도… 인간들에게 발각당할 위험이 아주 커. 나 말고 다른 루돌프를 찾아보게나… 말을 끝으로 다시 잠에 빠져버렸다.

순식간에 7의 산타에서 9의 산타로 진화해버린 박원빈. 결국 주저앉고야 말다. 산타가 그런 찬 바닥에 앉는 거 아니야!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만 다 꿈이고 환청일 뿐이다. 당장 이번 주말이 크리스마스이건만… 원빈에게 루돌프를 빌려줄 산타도, 원빈의 썰매를 몰 루돌프도 한 명 한 마리가 없었다. 땅땅땅. 박원빈 산타는 이번 크리스마스, 저희와 함께 가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고가 내려지고 박원빈은 절망한다. 정말이지 너무했다. 세상이, 원빈에게.

남들은 루돌프 타고 편하게 집에 올 때 원빈은 사방에서 부는 칼바람 싸대기 다 맞으며 홀로 집에 도착했다. 지친 표정으로 현관 앞 거울을 보는데 산타는커녕 웬 넝마짝 하나가 박원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휴휴. 추위에 굳은 손 주물러가며 똑같이 굳은 발 질질 끌고 들어가면 원빈을 맞이해 주는 건 따뜻한 난로 대신 싸늘히 식어 있는 우편물뿐이다. 내용은 더 싸늘하다. 이건 썰매 대금, 얘는 산타복 대여료. 마구간 리모델링 추가금에… 빵값. 채솟값. …하이씨. 혼자 햄버거를 왜 이렇게 많이 먹었어! 죽었어, 진짜. 이거 엉덩이 맴매 열 대는 맞아야 돼. 아 맞다. 고향에 돈도 보내야 하고…. , 이거 다 내려면 이번 비행 꼭 나가야 하는데. …나 혹시 오늘 산타 별점 12위인가?

왜 이런 일들은 하필 같은 시기 한꺼번에 밀려오는 건지 모르겠다. 한숨을 내쉰 원빈이 미끄러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요금 고지서들 사이 갓구운 따끈따끈한 애플파이를 먹으러 오라는 외국인 산타의 초대장이 섞여 있었지만 도통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질 않았다. 사실 가고는 싶었는데, 도로 나갈 힘이 없었다. 힘내서 대문 나서봤자 혼자 또 터덜터덜 걸어가서 파이고 뭐고 먹는 둥 마는 둥…. 돌아올 때도 혼자, 돌아와서도 혼자. 그럼 사무치게 느끼고 있는 외로움의 크기만 더, 더 커질 게 눈에 훤했다.

생각이 많을 땐… 마시멜로 동동 띄운 코코아지. 피곤함 잠재우려 탄 코코아를 홀짝이며 원빈은 수면 양말 신은 발을 오랫동안 혼자 꾸물거려보았다. 이러고 있음 박원빈 발 위로 턱, 모양은 같고 색만 다른 수면 양말이 올라와야 하는데. 원래는 그래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있는 건 원빈의 발 두 짝뿐이었다. 시무룩해지니 저도 모르게 입술이 튀어나왔다. 원래라면 웬 집게손가락이 등장해 이 튀어나온 입술을 집어넣으라고 꾹꾹 눌러줬을 텐데… 있는 거라곤 원빈 본인의 거친 손가락뿐이었다.

틈새로 들이닥치는 찬바람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추우니 외로웠고 외로우니 슬퍼졌다. 감정을 감추기 위해 원빈은 베갯속으로 몸을 뉘였다. 몸이 피곤하면 저절로 눈이 감긴다는데, 정신이 메말라도 눈은 감기는구나. 그렇게 눈을 감자마자 깜빡 잠에 들어버렸다.

"…안돼!"

가쁜 숨 뱉으며 꿈에서 현실로 돌아왔을 땐 이미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오잉? 원빈이 자는 와중에도 혼자 침대까지 걸어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몽유병 환자는 아니므로 결론은 누군가 소파에 늘어져 있던 원빈을 침대까지 옮겨준 것이 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자릴 더듬거려봤지만 싸늘한 이불이 전부. 짜증이 치민 원빈은 베고 있던 순록 베개를 들어다 몇 번이고 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며칠째 사나운 꿈자리였다. 내용도 최악이었다. 일곱 번의 시도 끝에 주어진 산타 합격 목걸이를 박탈당하는 지랄 같은 악몽. 그걸 꾸게 만든 장본인을 떠올리니 정말이지 열이 뻗쳤다. 원빈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냉수라도 마실 겸 밖에 나왔는데….

밖이 더 가관이었다. 끝까지 안 닫았던 창문은 어느샌가 꽁꽁 닫혀 있었고, 감기 걸리지 말라 고사라도 지내는 건지 난방은 풀로 돌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박원빈이 밥 굶고 코코아만 반 마신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식탁에 한 상까지 차려져 있었다. 먼지 앉지 말라고 랩까지 씌워둔 것에 원빈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차라리 우렁각시라도 살고 있는 거면 참 좋겠는데 우라질 각시라 어디다 말도 못하고, 화만 더 커지고. 이럴 거면 집에 왜 안 들어오는 건데. 따뜻한 집, 따뜻한 박원빈 다 놔두고 왜 혼자 마구간에서 쳐 자겠다는 건데!

이렇게 머릴 쥐어뜯다간 긴 머리 예쁘단 말에 홀랑 넘어가 자르지 않고 놔두고 있던 꼬랑지가 다 사라질 판이었다. 원빈은 신경질적으로 거실 반대편 문을 열었다. 희미한 불빛이 보였고 거길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가까워질수록 발에 힘이 들어갔다. 목적지에 도달해 꽁꽁 닫혀 있는 문을 벌컥 하고 열면 눈앞에 펼쳐지는 건 토실토실한 엉덩이다. 누가 빗질해준 건지 윤기가 촤르르 흐르는 털 궁둥이를 향해 원빈은 손바닥을 날렸다. 찰싹! 차진 소리를 기폭제 삼아 고함도 질렀다.

"언제까지 시위할 거야."

? 형 언제까지 나랑 마, 말 안 하고 이러고 있을 건데에!

하지만 이렇게 감정 실어 말을 하는데도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빵빵한 엉덩이만 눈앞에 여전했다. 원빈은 안다. 대화도 하기 싫다는 뜻이다. 아무리 이 궁둥짝이 최상급 당근만 먹여 토실토실하게 만들어놓은 최상급 엉덩이라지만 이 순간만큼은 후려갈기고 싶을 정도로 너무 미웠다. …나랑 얘기 좀 해. ? 변신 풀어봐봐. 진짜로 말 안 할 거야? 뭐 때렸다고 간지럽지도 않았겠지만 솔직히 때린 건 좀 미안한 사실이라 날렸던 부위 부러 살살 쓰다듬어주며 달래 봤는데 요지부동이었다. 꾹꾹 눌러왔던 화가 다시 폭발하고야 만다. 원빈은 외쳤다.

"정성찬!"

엉덩이 주인의 이름이었다. 성찬은 며칠 전부터 계속 이런 식으로 나왔다. 밤 되면 마구간에서 자고, 일어나면 홀랑 훈련장으로 내빼버리고. 원래는 박원빈 옆에 꼬옥 붙어 쿨쿨 자다 아침 되면 들러붙어서 더 자자고 떼도 쓰고, 식탁에 나란히 앉아서는 느긋하게 아침도 먹어야 하는데…. 추운 바람 깍지 끼고 함께 맞으며 훈련장까지 데려다 줘야 하는데 못하고 있었다. 어쩌다 본부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엔 서로 들이받을 듯 말싸움하기에 바빴다. …계속 이렇게 나올 거야? 전보다 10도 정도 내려간 말투로 원빈이 물으면 성찬은 푸르릉, 말 같지도 않은 답을 해 박원빈의 신경을 긁었다. 이젠 나도 안 참아. 아니? 못 참아. 원빈은 벌떡 일어섰다.

"거기서 자다 감기나 걸려라, 이 모, 모땐 루돌프야!"

나도 이제 형 신경 안 써. 몰라. 알아서 해!

악 지르며 성찬의 엉덩이를 발로 뻥, 차 날려버렸다. …사실 날려버리진 못했다. 오히려 엉덩이 두툼함에 밀린 원빈만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놀란 성찬이 벌떡 일어났으나 그건 중요치 않았다. 원빈은 필사적으로 제 엉덩이를 문지르며 성찬을 째려봤다. 콧김으로도 컵라면 하나는 거뜬히 끓일 수 있을 정도로 씩씩대다 마구간 문을 정성찬 엉덩이 패듯 뻥, 차버리고 다시 집에 돌아왔다.

아파 눈물이 찔끔 났다. 엉덩이 쓰라린 것도 쓰라린 건데 마음이 더 쓰라렸다. 어디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홧홧해 견딜 수가 없었다. 시선을 돌리니 벽에 걸린 액자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둘 모두 성찬과 찍은 사진이었다. 하나는 볼을 맞대고. 하나는 성찬의 등에 타고. 등에 탄다는 것이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왜냐면 성찬은 하나밖에 없는 원빈의 담당 루돌프니까. 그리고 원빈은, 성찬의 하나밖에 없는 담당 산타니까. 하지만 둘은 싸웠고 냉전이 지속되는 중이었다.

싸운 이유? 별거 없다. 시작은 아마 원빈이 다른 루돌프를 쓰다듬었던 날이었을 거다. 쓰다듬기만 했다면 그래도 좀 나았을 텐데, 하필 그 해 그달 중 제일 바람 많이 불었던 날이었고, 바람에 종이인형처럼 휘청이는 원빈을 걱정하며 바라보던 선임 루돌프가 자기라도 안고 있으라며 배려를 해준 덕에 원빈은 그 루돌프를 꼬옥 껴안을 수 있었다. 노련한 루돌프들은 혼자서도 털 관리를 잘한다. 정성찬은 맨날 박원빈이 쓰다듬고 빗질해줘야 하는데… 역시 달라. 아우웅, 포근해♡. 포근한 털에 자연스레 마음까지 포근해진 원빈이 루돌프의 털 위로 얼굴을 부볐다. 선생님 털 너무 좋아요. 칭찬도 덤으로 해줬다. 산타 할아버님께 맹세하는데 진짜 딱 한 번 그랬다. 정말 딱 한 번이다. 근데 그 모습을 달려오던 성찬이 직격으로 봐버렸다.

박원빈 주려고 들고 오던 율무차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뭐 귀여우면 다른 루돌프 좀 쓰다듬을 수 있지. 뭐 추우면 다른 루돌프 좀 안아볼 수도 있지. 좋으면 부벼보고, 칭찬도 좀 해줄 수 있지. 산타 박원빈은 그렇게 생각했는데 루돌프 정성찬한텐 아니었던 것 같다. 성찬은 루돌프 한정으로 질투심이 엄청나게 많았다. 상처받은 소동물 같은 깊은 눈을 하고 그렁그렁. 눈물방울 매단 채 달려가는 성찬을 잡아다 원빈은 거진 반나절을 정성찬 달래주는 데에 소비해야 했다. 어린 루돌프 달래기가 참으로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발화점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바로 다음날이었다. 질투에 복수라도 하듯 정성찬이 박원빈 아닌 다른 산타를 태우고 하늘을 날았다. 원빈은 오늘 종일 운동할 거란 성찬의 쪽지만 믿고 스노우 볼 식당에서 마네와 점심을 먹던 중이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네마가 슬그머니 알려주는 게 아닌가. 원빈 자네, 성찬과 싸우기라도 한 건가? 오늘 다른 이를 태우고 비행에 나서는 것을 봤네만…. 듣자마자 컥컥. 입에 물고 있던 걸 도로 식판에 쏟아 부은 원빈은 당장 선착장으로 달려갔다. 거기엔 거짓말처럼 성찬이 있었다.

정성찬이, 박원빈의 루돌프가, 함께 꾸민 소중한 썰매에, 다른 산타를 태운 채 그가 건네주는 당근을 열심히도 먹고 있었다. 원빈은 너무 큰 충격에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고야 말았다. 형 나랑 당근 서약도 했잖아. 평생 내가 주는 당근만 먹겠다고 맹세했잖아. …저, 저 쿠션도 내 거잖아. 나 엉덩이 아프다고 찡찡댈 때 형이 나 닮았다고 가서 직접 사온 냥덕이 쿠션이잖아. 어떻게 남이 저거 만지는 데도 뭐라고 안 해? 내 건데, 다 내 건데에… 흐아아앙. 치미는 배신감에 눈물이 찔끔 흘렀다.

당장 튀어 나가 따지려던 원빈은 마네가 저지했다. …쟤도 사정이 있겠지(마네는 아마 이유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집에 가서 얘기해봐, 원빈아. 아이고, 눈물 뚝 하고. 우리 이제 가야 해. 더 있다간 늦어. 반장님 무서운 거 알잖아. 옳지. 일어나…. 원빈을 다독이며 손을 잡고 반대편으로 이끌었다. 맞다. 당장 성찬을 끌고 집에 돌아가 따지기에는 오후 선물 창고 물류 뺑이가 원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일 끝내고 집에 돌아오니 뭔 말할 힘도 없었던 게 문제다. 바람이고 나발이고 일단 자고 나서 생각할래. 피곤해 죽겠는 몸뚱이 이끌고 걸어가는 원빈의 팔을 성찬이 부여잡았다. 원빈아, . …안 먹고 잘래. 한 숟갈만 먹고 자. …그냥 잘래. 나 너무 힘들어어…. 귀찮다는 듯 잡힌 팔 내팽개치며 방문을 열었다. 근데 뒤에서 정성찬이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너 자꾸 이렇게 밥을 거르니까 엉덩이에 살이 안 붙지. 잘 먹어야 건강해져서 비행도 오래 하고. 그럴 일 없겠지만 형 없을 때 다른 루돌프 썰매도 얼마든지 탈 수 있고. 그 말에 피곤이 꾹 누르고 있던 분노 버튼이 빵 터져버렸다. 형 지금 뭐라고 했어. 형 없을 때 다른 루돌프 썰매를 타? 그니까 지금 나보고 다른 루돌프 썰매를 타라? 형은 나 대신 썰매에 다른 산타 태우겠다 이거고? 참나… 어이가 없어서.

짜증이 아주 부글부글 끓었다. 온몸이 쑤시다 못해 가슴까지 쿡쿡 쑤셔왔다. 그러니 날 선 말이 나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 엉덩이에 살도 없고 맨날 까다롭게 구는 나 같은 산타 태우고 다니느라 형이 고생이 많네. 차가운 말투에 성찬은 어떻게 반응했더라. 황당해하며 내가 언제 너보고 까다롭다고 했냐 그랬던 거 같다. 그게 그 말이랑 뭐가 달라. 형은 나 태우고 다니기 피곤하다 이거 아냐?

"…그러니까 다른 산타랑 바, 바람도 피웠지!"

나 다 봤어! 내가 봤단 말이야…. 말하자마자 눈물이 터져 버렸다. 이럴 때 울면 지는 건데 이미 튀어나온 눈물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찔찔 울며 성찬을 쳐다봤는데 차라리 아니라고 뻔뻔하게라도 나왔으면 좀 나았을 것을. 성찬은 사색이 되어있었다. 당황해 진땀을 빼고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하고 인정하는 얼굴이었다. 사방으로 눈알을 굴리다 눈물로 벌게진 원빈과 시선을 마주하고는 덜커덩. 다음으론 한숨을 푸우우…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말을 했다. 너 그건 또 언제 봤어….

근데 그거 바람 핀 거 아니야. 원빈아, 형 진짜로 믿어줘. 그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 이제 와서 변명 시작해봤자 듣고 싶지도 않았다. 원빈은 소리쳤다. 맞잖아!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 형 왜 남이 주는 당근 덥석덥석 받아먹는데. 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내 쿠션 아무나 만져보게 놔두는데! 내가 그걸 얼마나 아끼는지 알면서… 형 진짜 미워. 미워 죽겠어. 형이 내 루돌프인 거 너무 싫어. 싫다는 말에 돌연 성찬의 얼굴이 굳었다. …야, 박원빈. 평소라면 목소리 듣자마자 무서워져서 미안하다고 바로 덧붙여 사과했을 거다. 근데 지금은 원빈도 아주아주 화가 난 상태였다. , 정성찬! 원빈은 덜덜 떨리는 손을 숨기며 굳세게 반박했다. …너 형한테 말 그렇게 할 거야? 할 거야. 할 거라고!

"…형 오늘 마구간에서 자!"

내 방에 들어오지 마! 그렇게 쾅 소리가 나며 방문이 닫혔고 성찬에 대한 마음도 함께 닫혀버리고야 말았다. 힘든 몸 겨우 침대로 뉘이고 새벽 내내 울다 지쳐 잠들었을 땐 이미 해가 뜰 준비를 완료한 시점이었다. 꼬질한 몰골로 일어나보니 눈이 거의 벌에 물린 수준으로 띵띵 부어 있었다. 에휴휴. 그래도 오늘은 좀 더 침착하게 형이랑 얘기해봐야지. 다짐하고 나갔는데… 성찬이 이미 집을 떠나 있었다. 온기 하나 없는 집만이 원빈을 반겨주고 있었다. 개자식. 아니지, 순록 자식. 원빈은 맘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식탁에 앉아 성찬이 만들어 놓은 간계밥을 꾸역꾸역 삼켰다. 방금 데워놓고 나갔는지 추운 집과는 달리 따끈따끈한 상태였다. 밥에서 눈물 맛이 났다.

 

.

하지만 해가 중천에 뜨고도 떴던 해가 점점 내려가 사라져도 원빈은 성찬과 대화하지 못했다. 어제는 선물 창고 좆뺑이였는데 오늘은 혼자서 굴뚝 몇 개를 타는 좆뺑이를 쳤다. 심지어 두 번이나 잘못 떨어져 크게 엉덩방아를 찧고 엉덩이에 멍마저 생겼다. 다만 아파 죽겠어도 이미 시작한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아픈 엉덩이 부여잡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끝낸 뒤 집에 주춤주춤 겨우 돌아왔는데….

성찬이 먼저 와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원빈은 옴팡 뒤집어쓴 먼지로 몸이 엄청나게 찝찝한 상태였다. 씻고 나와서 밥 먹으면서 얘기하면 되겠지, . 나 씻을래…. 원빈은 멀뚱히 서 있는 성찬을 지나치며 욕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어제처럼 팔이 잡혔다. 올려다보니 무서운 얼굴의 성찬이 원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 설마 혼자 굴뚝 탔어? 말하는 목소리가 엄청나게 낮았다. 원빈도 처음 경험하는 피치였다.

원빈이 아니라고, 그냥 구른 거라고 거짓말이라도 했다면 성찬은 믿어 주었을까? 아마 믿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원빈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했다. 탔다고. 근데 탔으면 왜 탔냐고 물어보기부터 하는 게 정상이잖아. 정성찬은 잡은 박원빈 팔 더 세게 움켜쥐며 …너 지금 나랑 장난해? 하고 인상만 찌푸렸다. 그러니 당연히 박원빈도 예쁜 말이 안 나갔지. …왜. 뭐가 문젠데.

"형이 다른 산타 태운 것처럼, 나도 혼자 굴뚝 좀 탈 수도 있지."

솔직히 모르는 건 아니었다. 산타가 자기 루돌프 놔두고 혼자 굴뚝을 탄다는 건 루돌프의 자존심과 긍지를 긁어버리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너 같은 거 없이도 난 혼자 일할 수 있다는 말과 똑같았으니까. 하지만 원빈은 부러 말을 했고, 성찬은 상처받았다. 그치만 박원빈도 어제 상처받았는걸. 따지고 보면 쌤쌤이었다.

너 이제 형 필요 없어? …왜 말이 그렇게 되는데. 네가 오늘 한 게 그거랑 뭐가 달라, 그럼. …형은 나한테 사과할 생각은 안 하고 나랑 싸울 생각부터 하네? …야, 박원빈! , 정성찬! 어째 흘러가는 상황이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결론도 똑같았다. 성찬은 마구간으로 갔고, 원빈은 방으로 들어왔다. 취소, 화장실로 들어오긴 했는데 아무튼… 서로 떨어졌다. 어디 법정 드라마에서 따지는 것처럼 와다다 말한 뒤 성찬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근데 감정은 안 추슬러지지, 열은 열대로 뻗치지. 입을 열어도 더듬기만 할 것 같아서 원빈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성찬을 째려만 봤다. 눈길을 받던 성찬이 먼저 포기하고 나서야 싸움이 멈췄다. …됐어. 그 말이 원빈에게는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 어디 가! 네가 나 마구간에서 자라며. 그래서 자러 가. 그니까 이제 나한테 상관하지 마. 그 말을 끝으로 성찬과 원빈의 냉전이 시작됐다. 원빈은 성찬 없이 잠에 들었고, 성찬 없이 깨어나 아침을 마주했다. 내내 마구간에서 자는 성찬을 찾아가 말 좀 하자며 다그쳐봐도 성찬은 꿈쩍하지를 않았다. 고집불통인 엉덩이를 때려도 보고 달래도 봤는데 미동이 없었다. 짜증 났다.

그런데 할 거면 하나만 하지. 자꾸 병을 주고 약을 줬다, 못된 놈의 루돌프가. 전날 내동댕이쳐진 대가로 엉덩이에 시퍼렇게 멍들은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일어난 박원빈 앞에 뿌리는 파스, 붙이는 파스, 종합근육통약, 엉덩통에 좋은 약초 샐러드가 종류별로 놓여있었다. 주방에 가보니 아침으로 먹으라고 만들어 놓은 쨈 토스트도 하나 덜렁 놓여있었다. 이래서 더 미웠다. 맘 놓고 미워도 못하게 만드니까.

차라리 일이 없는 시기였다면 시간을 들여 천천히 관계를 풀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었다. 곧 크리스마스가 온다. 산타와 루돌프에게는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이자 최대의 수입원인 날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가다간 비행도 못하고, 돈도 못 벌고, 마음만 불편한 상황이 영영 지속될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원빈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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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간다.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본부에선 크리스마스 대비 단체 회의가 열린다. 참석 대상은 당연히 모든 산타와 루돌프. 회의에선 인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한 주의사항 50가지, 올바른 비행 방법과 사고 대책 방안, 최단시간 비행 루트 짜는 법_초급편 등을 부산타장님과 부루돌프장님께 설명 듣는다.

원빈은 산타이니 당연히 회의에 참석했다. 성찬도 루돌프이니 아마 참석했을 것이다. 확인을 위해 절대로 안 보는 척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루돌프 쪽 좌석을 쳐다보니 맨 뒷줄에 제 친구들과 함께 앉아있었다. 엎드려 있다 부루돌프장님 들어오시자마자 고개를 치켜드는데 순간 심장이 철커덩 내려앉고야 말았다. 변신이 풀린 모습을, 그것도 얼굴을 보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인간 행색을 한 성찬은 루돌프 때와 똑같이 커다랗고, 눈이 반짝이고, 전보다 좀 야위어 보였다. 아니, 야위어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모름지기 루돌프라면 힘을 잘 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통통해야 하는데… 탐스러운 볼살이 다 빠져서는 잠도 못 잤는지 눈 밑은 퀭하질 않나. 감기 기운 있는지 잔기침까지 하지를 않나. 재작년과 작년, 각각 예쁜 루돌프 랭킹 3, 2위를 차지했던 얼굴이 저렇게나 상하다니. 난 진짜 파트너 자격도 없다…. 원빈은 시무룩해졌다.

물론 안 보는 척 가자미 눈 뜬 채 산타들 사이 앉아있는 원빈을 관찰하던 성찬도 원빈과 별 차이가 있진 않았다. 박원빈 저거저거 또 이불 안 덮고 그냥 잤지. 코훌쩍이는 거 봐. …엉덩이 아픈가. 하… 어제 넘어진 데 약 바르고 온 거 맞아? 평소보다 길어지는 회의에 엉덩통이 왔는지 꼼지락거리기 시작한 원빈을 지켜보다 답답해 몰래 가슴도 쿵쿵 쳐댔다. 서로에게 향한 짝사랑이 닿지 못하고 또 끝나버렸다.

회의의 마지막은 매년 하는 소원 적기였다. 인간들이 소원을 적어 양말에 매달아 놓는 것처럼, 산타와 루돌프들도 원하는 것을 적어 본부 광장에 있는 거대 크리스마스트리 중앙 양말에 넣어놓는 것이 오래된 전통이었다. 소원 종이를 건네받은 원빈이 펜 뚜껑을 열며 모른 척 성찬 쪽을 흘끔거렸다. . 무슨 소원을 적는 건진 몰라도 집중해 뚱뚱한 입술이 바깥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분명 나보다 덜 까다로운 엉덩이 푸짐이 산타를 새로 배정해달라고 적었을 거야. 상상하며 원빈은 입을 삐죽였다.

그렇게 칭얼거리며 제 소원도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는 원빈을 이번엔 성찬이 흘끔, 쳐다보았다. 뭘 적고 있는 건진 몰라도 퉁퉁이 입술이 잔뜩 튀어나와 있는 게 아마 저보다 더 예쁘고 순하고 귀여운 푸짐이 루돌프를 배정해달라 쓰고 있는 것이 빤했다. . 성찬은 콧방귀 끼며 제가 적었던 글에 몇 번이고 별을 더 그려 넣었다. 중요. 중요. 중요. 제 소원 엄청 중요하니까 꼭 이루어 주세요, 산타 할아버님. 손을 모은 채 온 마음을 다해 열심히 빌었다.

회의가 끝났으니 이어지는 건 파티였다. 올해도 오배달과 썰매사고 없이 크리스마스를 끝내고 세상에 행복지수를 높이게 해주소서… 바람에서 진행되는 크리스마스 직전의 파티는 배달 나가는 이들이라면 거의 무조건 참석하는 행사였다. 원빈은 회장으로 가지 않고 짐을 싸 혼자 집에 돌아왔다. 걸어오는 길엔 양껏 바람 싸대기를 맞았다. 파티에 가봤자 다른 산타들 자기네 루돌프들이랑 딱 붙어 부비는 꼴만 보게 될 게 눈에 훤했다. 그러니 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비행도 못 나갈 텐데, .

생각이 많을 땐 역시 마시멜로 동동 띄운 코코아지. 어제처럼 코코아를 홀짝이며 사람 하나 띨롱있어 서늘한 집을 둘러보는데 빨랫대에 걸린 어글리 스웨터 두 벌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빨간색, 하나는 초록색. 나란히 서면 그려진 산타와 루돌프가 손을 잡고 있는 모양새가 되는 아주 못생긴 스웨터였다. 작년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원빈이 큰 맘 먹고 성찬과 맞춘 옷이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마음이 또 엄청 심란해졌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계속해서 파트너를 할 수 있기는 한 걸까. 문득 성찬과 처음 짝이 되었을 때가 생각이 났다.

7번째 시험을 앞두고 원빈은 거의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번 시험마저 떨어진다면 본가에 돌아가 당근 농사를 짓게 될 운명이었다. 떨어진다고 상상만 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지난번 시험은 최악이었다. 난폭한 루돌프에, 난폭한 비행. 제발 천천히 달려달라는 원빈의 부탁을 깡그리 무시한 채 제멋대로 달린 견습 루돌프는 낙제했고, 제대로 컨트롤도 못하고 썰매 바닥만 쳐다보다 착지한 원빈도 낙제를 면치 못했다. 제 비행 생각은 못하고 원빈 때문에 떨어졌다고 생각한 루돌프가 원빈에게 달려들었으나 지나가던 네마가 죽빵을 날려주어 둘 다 경고 조치만 받고 끝이 났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또 지난번 걔처럼 못된 루돌프와 만나는 건 아닐까. 치미는 걱정에 한숨을 푹푹 내쉬는 원빈에게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안녕. 올려다본 원빈에게 인사를 건넨 건 원빈보다도 훨씬 키가 크고, 그에 반해 얼굴은 동글동글한 아주 예쁜 루돌프였다. 이번 비행 상대임이 확실했다. 루돌프는 자신의 이름을 정성찬이라 소개하며 앉아있는 원빈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원빈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어떻게 해줄까? 원빈에게 물었다. 그런 루돌프는 시험 7번 만에 처음이었다.

원빈은 눈치를 보다 저… 그럼 좀 낮게. 낮게 날 수도 있어요? 부탁했다. 성찬은 조금 고민하더니 음… 최대한 낮게 날아볼게. , 내가 뭐 해줄 거 있어? 맞춰줄 수 있는 건 다 맞춰줄게. 긴장하지 마…라며 원빈의 손을 잡아왔다. 따뜻했다. , 제가 오래 날면 엉덩이가 쪼금 아파가지구…. 이건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던 거 같은데 정성찬은 용케 또 알아듣고 오케이. 안전비행해달라는 거지? 흔들림 없이 편안한 썰매로 어디 한번 잘 모셔볼게. 말하며 문제없다는 듯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런데 우리 산타님 이름은 뭐야? 일단은 임시 파트너인데, 이름도 모르고 목줄 쥐여주는 건 예의가 아닌 듯해서. 원빈은 그렇게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다. 저는 박원빈이에요. 원빈이? 알았어. 원빈아, 잘 부탁해. , 네에…. 어쩐지 마음이 두근거려왔다. 긴장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시험 당일. 성찬과 똑같이 생긴. 누가 봐도 정성찬인 루돌프가 썰매를 끌고 원빈에게 다가왔고 그 썰매 위엔 푹신한 쿠션 여러 개가 깔려 있었다. 너무 고맙고 감동적이라 당장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조금 있으면 비행 시작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니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견습 산타 박원빈. 견습 루돌프 정성찬. 비행 시, 시자악…. 말을 해야 하는데 긴장돼 잘 나오지가 않았다. 고삐를 쥔 손은 달달 떨려오고, 속은 울렁거리다 못해 토할 것 같고.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어떻게든 진정해보려 하는데 갑자기 푸르릉….

성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왠지 할 수 있어. 괜찮아. 나만 믿어. 나는 절대로 너를 떨어트리지 않아. 시험에서도, 바닥으로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얼굴을 들어보면 저를 쳐다보고 있는 성찬의 맑은 눈이 보였다. ,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원빈은 침을 꼴깍 삼키고 드디어의 출발을 외쳤다. 성찬과 함께 날아올랐다. 그날은 유난히 맑았고, 바람이 살랑였고, 기분 좋은 하늘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안정적으로 날다 착지까지 마친 원빈은 멀어지는 성찬을 보며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홀로 생각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다시 만났다, 성찬을. 이번엔 임시가 아닌 진정한 서로의 짝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추억이 쌓여갔다. 첫 배달엔 무려 배송지 착오로 선물을 잘못 전달하는 사고를 쳐 나란히 무릎 꿇고 산타장님, 루돌프장님께 혼이 났다. 집으로부터 최고급 당근이가 배송 올 때마다 원빈은 당근 박스를 들고 성찬에게 달려갔고, 그 덕에 최고급 당근이를 양껏 먹게 된 성찬은 재작년 당근이를 너무 많이 먹은 나머지 살면서 가장 오동통해져 원래도 낮게 날던 썰매를 무게 때문에 더 낮게 날다 하마터면 인간들에게 선물 배달을 들킬 뻔하기도 했다. 그때 또 산타장님, 루돌프장님께 불려 가서 제발 너희 사고 좀 그만 치라며 꾸중을 먹었었는데…. 돌이켜보면 참 좋은 기억들뿐이었다. 산타는 제 루돌프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것 같다. 느끼고 나니 다시 서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도 원래라면 성찬과 함께 파티에 참석해 맛있는 것들 왕창 먹으며 하하 호호 웃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 원빈은 집에서, 그것도 혼자, 칠면조 고기 대신 라면이나 짭짭 먹으며 통탄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필시 얼굴이 붕어처럼 띵띵 부어 있으리라. 마구간에서 원빈과 비슷한 처지에 혼자 당근을 와작와작 먹고 있을 정성찬을 생각하니 무지하게 입이 써졌다. …에라이, 몰라. 미운 루돌프 내가 생각해줘서 뭐해. 마치 정성찬이라도 된 듯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순록 베개에 또 한 번의 펀치를 가하며 원빈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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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들짝 놀라 깨어난 건 별안간의 사이렌 소리 때문이었다.

본부로의 호출이다. , 이렇게 크고 무서운 건 산타 되고 나서 처음 들어봤는데? 놀라 옷 챙겨입는 것도 까먹고 잠옷 차림 머리 뻗친 상태 그대로 집 밖으로 달려나가니 원빈 못지않게 놀란 성찬도 달려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둘이 소리 바락바락 지르며 싸운 사이라지만 지금은 그런 걸 고려할 때가 아니란 걸 성찬도, 원빈도 알고 있었다. 성찬은 곧장 원빈에게로 다가와 몸을 숙였고, 원빈은 바로 성찬의 등 위에 올라타 바람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매서운 바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려왔다. 손은 긴장으로 이미 축축해져 있었다. 곧 크리스마스인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원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모두가 배를 부여잡고 누워 끙끙 앓고 있었다. 심각한 쪽은 아예 기절. 그나마 나은 쪽은 화장실을 들락날락… 아니다, 네 발로 기어서 가고 있거나 지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가쁜 숨만 색색 내쉬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원빈의 바짓단을 누가 잡아당겼다. 내려다보니 마네였다. 입술이 바짝 메말라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느 한 쪽을 가리키는데 사람들 몰려 있는 걸로 봐서 아마 산타장님이 계시는 곳을 알려준 듯했다. 괜찮아? 원빈이 묻자 아니… 대답을 끝으로 마네는 장렬히 기절했다.

성찬과 함께 달려간 곳엔 산타장님. 옆에는 루돌프장님. 그 옆에는 다시 부산타장님. 그 옆옆은 다시 부루돌프장님이 차례로 누워 계셨다. , 무슨 일이에요? 달려들어 물으니 금방이라도 뒤지실 것 같던 산타장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원빈이 혹시 너 안 마셨니? …녜, ? 지금 집에서 온 거지? 녜…. 바로 비행 갈 수 있겠어? …녜? 얼빠진 표정으로 바보 같은 대답만 하고 있는데 옆에 계시던 루돌프장님이 성찬을 발견하시곤 야, 정성찬. 너도 안 마셨지? 다녀와라. 지금 큰일 났다…하고 말을 거드셨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다들 왜, 왜….

파티의 마지막 즈음 가면 모두 한 잔씩 나눠 마시는 차가 있다. 주재료는 또오꾸마 공화국의 겨울특산물 마꾸오또잎. 새콤달콤하고 몸이 따뜻해지는 맛에 모두가 즐기는 이 차엔 한 가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바로 덜 익은 마꾸오또잎엔 독이 존재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올해 겨울이 좀 늦게 찾아온 탓인지 마꾸오또잎 수급에 문제가 생겼고, 파티 준비가 촉박했던 주방이 덜 익은 잎을 그냥 사용해버리는 바람에 이 사단이 난 것이라 했다. 차를 마신 모든 산타와 루돌프가 배를 잡고, 토하고, 뒹굴거리며 괴로워하는 이 사태가 말이다. 당장 얼마 뒤가 크리스마스인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큰일이었다.

다행히 또오꾸마 공화국에 해독제가 있고, 그쪽 산타 지부와 금방 연락이 닿아 갖고 와 복용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다만 그걸 가져올 멀쩡한 산타와 루돌프가 없어 긴급 사이렌을 울린 것이라고 했다. 원빈아, 다녀올 수 있겠어? 묻는 산타장님에 원빈은 네… 대답하려다 말고 성찬의 눈치를 보았다. 평소라면 당연히 다녀온다고 말했겠지만 원빈은 지금 성찬과 싸운 상태였다. , 저희 말고도 다른 애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차 물어봤지만 찾기 힘들 것이고, 빨리 해독 못 하면 이번 크리스마스 배달은 글렀다는 말에 부담감만 가중됐다. 바짓가랑이가 잡히는 기분이었다. 잡혀서, 바지가 내려가서, 빤스까지 보여주고 있는 이 기분…. 으으, 싫어.

"원빈아, 너밖에 없어."

으으으.

"원빈아, 제발."

으으으으.

", 알…겠어요. 얼른 갔다 올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찬이 콧김을 흥 뿜었다. 그러더니 원빈을 놔둔 채 먼저 선착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부탁 좀 하마. 산타장님의 말을 뒤통수로 들으며 원빈은 성찬을 따라 달려나갔다. , 혀엉. 같이 가…. 푸르르릉. 낮게 울리는 루돌프 울음소리가 빨리 오라 원빈을 재촉하는 듯했다.

침묵 속에 비행이 시작되었다. 벌써 몇 년을 한 비행이지만 이게 또 간만에 하다 보니 뭔가 떨리고 묘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원빈은 성찬이 저를 태운 시점에서 이미 화가 풀린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단단히 오해하고 성찬의 고삐를 잡았다. 성찬은 날아올랐다, 원빈과 함께. 그리고 더 날아올랐다, 원빈과 함께. 그리고 더, 더 날아올랐다. 더더더 날아올랐다. 아주 날다 못해 우주 끝까지 날려는 것처럼 세차게 날아올랐다. 두 번째부터 박원빈은 이미 패닉이었다. 평소보다 나는 높이가 너무 높았다! 본부는 까마득해져 이미 보이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원빈은 절규하다시피 울며 외쳤다.

". , 너무 높따아…!"

흐아아앙! 화가 풀리기는 무슨, 정성찬 이 삐돌이의 화는 놀랍도록 굳건했다. 제발 제발 하고 싹싹 비는 박원빈 말은 귓등으로 쳐 들으며 미친 듯이 가속만 하고 있었다. 성찬은 원빈이 빠르고, 높은 것을 무서워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그걸로 화풀이하고 있는 거였다! 진짜 나빴다…. 원빈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푹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눈발에 바람에 혼돈에 이미 아무것도 안 보이는 시야였지만, 혹 시선을 돌려 바닥이라도 쳐다봤다간 무지개토를 날리며 아래로 추락할 것 같아서. 성찬에게 이어져 있는 고삐만 손이 부르터지도록 세게 쥐고 하늘에 계신 산타 할아버님만 백번 천 번 찾았다. 그 덕에 목 졸린다며 푸르르릉! 부르짖기 시작한 루돌프의 울음은 듣지도 못했다. 으아아앙! 살려달라며 울기에 바빴으니까.

또오꾸마 공화국 산타 지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둘 다 만신창이였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 콧물이 다 얼어붙어 얼굴 곳곳을 점령하고 있었다. , 킁… 클닐, 큰일 나떠요오…. 춥고 서럽고 얼어붙고 힘들어 더듬더듬 말하는 원빈과 풀. 풀흥. 후르르릉. 뿌릉. 푸릉. 똑같이 춥고 서럽고 얼어붙고 힘들어 더듬더듬 우는 성찬. 다 터진 몰골에 둘을 기다리고 있던 산타 지부 사람들만 놀라 허둥지둥 모닥불부터 피웠다.

생각이 많을 때나 없을 때나, 좋은 건 코코아지. 해독제가 실리는 동안 코코아를 홀짝이던 원빈의 눈에 덜덜 떨며 다음 비행을 준비하고 있는 성찬의 몸이 들어왔다. , 형 지금 아무것도 안 걸치고 있구나. …흥. 비행도 제멋대로 하는 못된 루돌프 내가 신경 써줘서 뭐해. 춥거나 말거나, 감기야 걸리든가 말든가. . . 흥….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내가. 옆에 있던 산타 한 명을 붙잡은 원빈이 쫑알쫑알 이야기를 시작했다. , 혹시요오. ……려 주실 수 있을까요?

빨리 가야 하는데 쟨 왜 이렇게 꾸물거리는 거야. 산타 하나와 계속 말하고, 뭘 건네받고, 씽긋 웃으며 인사까지 하는 원빈에 성찬은 단단히 심통이 나 있는 상태였다. 하다 하다 이젠 그 귀여운 얼굴로 다른 지부 산타까지 꼬시겠다? 거친 콧김을 뿜으며 매섭게 원빈쪽을 노려보고 있는데 원빈이 제 몸만 한 것을 들더니 뒤뚱뒤뚱 성찬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혀, 형… 추우니까 이거 하고 가자. 빌려 왔어. 낑낑대며 루돌프용 망토와 목도리를 둘러주기 시작했다. 성찬은 눈을 꾹 감은 채 묵묵히 제 담당 산타의 손길을 받았다. 정성찬이야 털이라도 있지, 박원빈은 사람에 고작 헐렁한 잠옷 하나만 걸친 상태면서. 그러면서 지 루돌프부터 걱정하다니 진짜 웃기지도 않았다. 박원빈은 바보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돌아갈 때에는 어쩐지 비행 높이가 낮았다. 평소와 비슷한 정도였다. 사안이 급하다 보니 속도는 아까와 비슷했지만, 높이가 낮아진 것만으로도 원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슬슬 본부가 보일 즈음이었다. 눈은 그치고, 바람은 솔솔 불고, 그렇게 날이 밝고 있었다. 푸르릉…. 뜨는 해를 마주하고 기분 좋게 우는 성찬과, 그에 맞춰 산타 할아버님은 우는 루돌프에게 주욱빵을 안겨주신대… 캐럴을 부르는 원빈의 그림자가 둥근 해를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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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초가 된 몸으로 집에 돌아왔을 땐 이미 정오가 다 되어있었다. 저를 내려주자마자 도로 마구간으로 향하는 성찬에 원빈은 성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집으로 발을 돌렸다. 조금 뒤, 다시 마구간의 문이 열렸고 그 앞엔 담요를 들고 온 원빈이 있었다. 원빈은 성찬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앉았다. 그리고 성찬을 불렀다. .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자는 척하지 마라. 방금 전까지 당근 먹고 있던 거 다 봤다. 입에 부스러기도 묻어 있고… 바, 바보야. 원빈의 말에 벽 쪽을 바라보고 있던 성찬의 고개가 돌려졌다. 아… 정말로 오랜만에, 이렇게 가까이서 눈이 마주쳤다. 성찬의 눈은 변함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박원빈 하나로도 가득 차는 맑고 예쁜 눈이었다. 원빈은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미웠다. 근데 또 너무 좋았다. 미우나 고우나 산타와 루돌프는 함께였다.

". 내가 미안해…."

나 형이 높게 날아도, 나 바람 싸대기 맞게 놔둬도… 내, 내 엉덩이 아픈 거 상관도 안 하고 마구잡이로 달려도 나 형 아니면 안 되겠다. 나는 내 루돌프 아니면 못타겠꾸마…. 나한테는 형이 제일이다. 나 형 없으면 안 된다…. 그니까 화 풀어라. ? 나랑 다시 밥 먹고, 자고, 산책하고, 이야기하자. 나랑 같이 비행하자… 루돌프야. 형아. 성찬아. 나랑 다시 짝 되자. 내가 형 산타 하게 해주라. ?

말을 끝으로 후두둑 떨어진 눈물이 바닥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

변신이 풀렸다. 옆으로 한번 구르기만 해도 박원빈을 깔아뭉개 죽일 수 있는 크기에서, 이젠 옆으로 구르면 원빈이 숨 막힌다며 제발 살려달라 애원 정도만 할 수 있는 크기로. 원빈과 같은 언어를 할 수 있게 된 정성찬이 박원빈의 품에 안겨들었다. 왜 네가 사과해. 잘못은 내가 다 했는데. 원빈아. 삐나. 내가 다 잘못해떠…. 동그란 얼굴 사이로 더 동그란 눈물방울들을 뚝뚝 흘려대며 원빈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뽀뽀가 너무 강렬했던 걸까. 화해의 입맞춤을 받아내던 원빈이 잠깐만… 웅얼거리며 성찬을 떼어냈다. 당황한 성찬이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자 형 지금 알몸이자네… 샐쭉 웃으며 옆에 있던 담요를 끌고 와 성찬에게 덮어주었다. 일단 형 옷부터 입고 마저 얘기하자. 이러고 있음 가, 감기 걸린다. 슬쩍슬쩍 보이는 허연 살갗은 애써 모른 척. 마구간의 희미한 등으로 괜히 시선을 돌리며 담요를 오므려 주었다. …나중에 입으면 안 돼? 성찬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왔지만 원빈은 단호하게 굴었다. , 안돼. 화해하는 건데… 말로 하고 싶다. …몸으로는 안 된다. , 손 치워라. 안 그럼 화해 안 할 거다! 우웅….

화가 풀리니 오해 역시 자연스럽게 풀렸다. 드디어 함께 돌아온 원빈과 성찬의 아늑한 집. 사이좋게 찍은 사진 앞 사이좋게 못생긴 스웨터를 나눠 입은 원빈에게로 성찬이 선물 상자를 건넸다. 진실을 이야기할 시간이었다. 원빈아, 있잖아.

"나 사실… 너 몰래 알바했어."

원빈이 너 말고 다른 산타 태운 거. 그거 너한테 크리스마스 선물 줘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가지구. 올해 생각보다 당근이 햄버거를 많이 먹었더라구…. , 아무튼. 돈은 필요한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고민하다 게시판에서 전단 하나를 봤어. 철수가 자기 하루만 태워주면 알바비 준다길래 바로 하겠다고 찾아갔지. 물어보니까 철수네 루돌프가 지금 다쳤다 하더라고. 회복 중일 동안엔 이렇게 하루 이틀 다른 루돌프들한테 부탁할 건가 봐. , 그리고 당근은… 철수네도 이번에 당근 농사를 시작했대서. 나보고 맛 평가 좀 해달라고 해서 해준 거야. 내가 알아주는 당근 감별사잖아. 그래서 그날 딱 하루, 진짜 딱 하루 그렇게 한 건데…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들켜서 원빈이 네 마음 상하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치만 원빈아. 나는 진짜로 너 아니면 안 태울 거야. 나한테 산타는 너밖에 없어. 그리구 철수네 당근 있지. 당사자가 앞에 있어서 대충 맛있다고는 해줬는데, 사실 원빈이 너희 집 당근이보다 훨씬 훨씬 맛이 없었어. 그러니까 그것도 걱정하지 마. ? 나는 원빈이 네가 주는 당근이만 먹어. 앞으로도 그럴 거구. ……그러니까 나 용서해줘. 나 열심히 돈 모아서 네 선물 샀어….

열어본 선물 상자엔 목도리가 하나 들어있었다. 원빈이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냥덕이 쿠션과 똑같은 무늬의 목도리, 장갑 세트였다. 성찬이 설명이 이어졌다. 철수가 쿠션 보더니 그러더라. 냥덕이 쿠션이랑 똑같은 목도리 파는 데 안다구. 그래서 그거 알려주다 말고 잠시 만져보게 했는데… 원빈이 네가 아끼는 거라는 걸 형이 잠시 까먹었나 봐. …미안해. 앞으로는 아무도 못 건드리게 형이 뒷발 단단히 준비해 놓을게.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나 진짜 잘한 게 하나도 없다. 그냥 미리 말하고 원빈이 너 안심시켜 놓을걸. 그러면 우리 싸우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치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는 주제에 입꼬리 겨우 올려 웃는 모습이 진짜 바보 같았다. 그래서 원빈은 웅얼거렸다. 형은 진짜 바보다….

"사실 나, 나도 똑같은데…."

이번엔 원빈이 숨기고 있던 선물 상자를 성찬에게 건넸다. 나 형 몰래 굴뚝 탄 거 있잖아. 그거 형 선물 사려고 알바 뛴 거다. 나도 도, 돈 부족해가지구… 굴뚝 탔어. 형이 싫어하는 거 아는데, 루돌프들한테는 엄청 짜증 나는 일인 거 알면서도 그랬어. 이미 신청해버린 거 취소도 못 하고, 와중에 형이랑은 싸우고. 원래 말해주려고 했는데 기분이 상해 갖구 못된 말만 나갔네…. 미안해. , 근데 다른 루돌프 안은 거는. 그거는 선생님이 나 휘청이는 거 걱정하셔서 안고 있으라 해주신 거야. 선생님 우리 아빠 친구분이시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털에 얼굴 부벼본 거는… 솔직히 너무 부드러워서 그랬어. 우리 루돌프 털도 그렇게 보들보들 예쁘면 좋으니까 관리템도 물어봤구. 그래서 그거 형 선물로 했다….

말마따나 열린 상자 속엔 루돌프 빨간 코 전용 보습크림과 반짝이 털 관리세럼이 들어있었다. 또륵또륵 굴러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며 성찬은 건조한 날씨. 피부 속 수분까지 채워주는 깊은 보습. 민감한 루돌프도 안심하고 쓸 수 있는 산타청 보장 관리템! 원빈이 제게 선물해 준 것을 코에 둘둘 바르기 시작했다. 형 지금 루돌프 아니자네. 근데도 발라? 원빈이 물어도 …몰라, 바를 거야. 어차피 둘 다 내 코인데 지금 바르나 나중에 바르나 똑같지…라며 코를 문질렀다. 그러다 말고 혼자 갑자기 흠칫. 몸을 떨더니 시선을 피하며 원빈에게 질문했다. …근데 있잖아, 원빈아. ? 우리 화해했으니까 물어보는 건데. .

"…너 진짜로 내 코 때리려고 했어?"

내 루돌프 코…. 조금이라도 덜 빨개지면 다시 되돌리려고 막, 막 때릴 거야? 말한 박원빈은 때릴 생각도 없는데 혼자 눈치를 보며 코를 가렸다. 그 모습이 오히려 장난을 불러일으켰다는 건 성찬은 아마 꿈에도 모르겠지. 원빈은 짐짓 심각해진 말투로 성찬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전보다 색이 좀 연해진 거 같기는 했다. . , 눈 감아봐라. 말 나온 김에 우리 함 해보자. 루돌프 사슴코는 빨개야지 제일 예쁘잖아. 우리 이참에 예쁜 루돌프배 1등까지 한번 먹어보자. ? 그 말에 성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잠깐만. 잠깐만. 원빈아, 너 진짜 형 때리려고? 형 지금 루돌프 아니고 사람이야. 때리더라도 루돌프일 때…. 그냥 눈 좀 감아봐라! 지금 때리나 변신해서 때리나. 어쨌든 둘 다 코는 빨개질 거 아냐! , 응…. 성찬은 말 잘 듣는 루돌프인지라 산타 호통에 눈을 꼭 감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살살 때려줘어…. 성찬은 중얼거렸고, 곧이어

!

을 대신해서 쪽♡. 아주 간질거리는 소리가 났다.

눈을 뜬 성찬의 앞엔 퉁퉁한 입술을 모은 채 눈웃음 짓고 있는 원빈이 있었다. 루돌프는 원래 코만 빨개야 하는 거 아니야? 갑작스러운 원빈의 행동에 성찬은 온몸이 다 빨개지는 기분이 들었다. 메리 크리스마스다, 형아. 속삭이며 다시 입술을 겹쳐오는 원빈에 성찬은 웅, 대답하곤 원빈에 맞춰 입술을 오므렸다.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소원 종이에 원빈은 제 루돌프가 영원히 자신만을 보게 해달라 빌었고, 성찬은 제 산타가 영원히 자신만 사랑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둥근 해 사이로 산타 썰매와 루돌프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소원이 이루어질 징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