ㄲㄴㄹㄷㅂㅎㄹ
by. 라니

"박원빈 게임 좋아해?"

"네?"



...모르겠어요. 원빈은 원래 뙤약볕 아래에서 앞으로 쭉쭉 달려 나가기 같은 몸 쓰는 것만 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뭐 화면 보고 조작하고 그러는 건 영 재미 없었다. 펀치 기계 농구공 던지기 이런 거 정도. 총쏘기 레이싱까지는 스포츠의 영역인가. 그래도 보드게임이나 마피아 게임 이런 것보단 낫겠다. 다섯 글자 말에 네줄짜리 생각을 눌러 놨다가 옆을 봤는데 성찬이 그래? 하더니 저기 들렸다 가자 그럼, 하고 말한다. 

싫어요 안 좋아해요 대신 글쎄요 모르겠어요 라는 말은 성찬에겐 그래 그럼 같이 해보자의 의미였다. 그렇게 쉬는 날마다 침대에 파묻혀 있는 원빈을 보면 무작정 끌고 나가는 성찬에게 이끌려 외출한 지도 꽤 됐다. 옆에 선 성찬이 고갯짓을 하는 방향을 보니 쩌어쪽에 빛나는 간판 하나가 보였다. 



"뭐요? 쩌거... 오락실이요?"

"어어. 저기 들렸다 가자."

"형은요. 좋아해요?"



여기서 쩰루 좋아하는데에요? 원빈의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은 성찬이 대답한다.



"제일?은 아니구. 저기 새로 생긴거 같아서. 그리고 나는 롯데월드 더 좋아해."

"롯..."

"나 거기 가면 츄러스 어디서 파는지도 다 알아."



츄러스라고 다 같은 츄러스가 아니거든? 어디에서 먹어야지 더 맛있는지도 난 알아. 줄 서려면 어느 순서로 서야 하는지 모르지? 너 롯데월드 갈 거면 나랑 가야 돼. 맨날 계획 없이 갑자기 야 원빈아 일단 나가자! 하면서 사람 끌고 나오는 사람이 엄청 진지한 얼굴로 기나긴 자기 자랑?을 하더니 또 원빈을 보고는 물었다.



"박원빈 놀이기구 좋아해?"

"타면 타겠죠... 근데 무섭잖아요..."



그리고 놀이기구는 경주월드 거기가 진짜 진짜 무서워요 형 거기 안 와봤죠. 뭐 그런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다가... 결국 나란히 걷던 성찬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면서 원빈, 하고 부르는 바람에 강남 토박이와 울산 소년의 계획 없는 압구정 나들이에 이렇게 장소 하나가 추가됐다.

서울도 오락실은 다 비슷한가보다. 원빈,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성찬이 농구 좋아해? 하고 물어서. 또 그렇게 몇 분 동안 나란히 서서 열심히 골대에 공을 던졌다. 대결하자는 걸까 싶어서 훌쩍 큰 등 뒤에 서 있었는데 성찬이 뭐해? 하더니 옆에 서야지. 하고 제 옆을 가리켜서. 

근데 원래 점수 내려면 이렇게 같이 던지면 안 되는데. 그럼 다 튕기고 그러는데. 막상 올라가는 점수를 보다 보니 승부욕이 조금 돋았는데 중간부터 호들갑을 떠는 성찬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돌렸더니 성찬이 활짝 웃고 있었다. 박원빈 잘하네 하며 웃는 그에게 원빈도 너스레를 떨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성찬의 앞에서는 그게 잘 안된다.



그렇게 총이랑 운전은 잘하냐는 성찬의 말에 미필에 운전면허 없는 청소년 둘은 또 나란히... 달려드는 좀비 비주얼에 움찔하고 펀치 기계만 한두 번씩 때려봤다. 껑충하고 마른 줄만 알았는데 피지컬이 좋아서 그런지 점수가... 그래놓고 성찬은 이야 박원빈 쎄다아. 하고 웃는다. 

원빈은 이제 교복 입고 실내에서 찍은 사진으로 유명해져서 회사도 교복 입고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아직은 사복이 얌전하던 과도기 시절. 형이 맛있는 거 많이 사줘서 그런가 봐요? 저 요새 운동도 열심히 해요? 또 말을 고르다가 타이밍을 놓쳤는데... 손을 툭툭 털던 성찬이 또 어어어. 하더니 그랬다.



"박원빈. 노래는... 좋아하지."



노래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으음. 좋아... 좋아했다. 춤은 아직 어려웠다. 음악을 몸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좀 새롭긴 했는데 원래 원빈은 몸 쓰는 데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노래도 전문적으로 배워보려니까 또 달랐다. 그러니까 좋아 싫어 하면 좋으니까 연예인 되려고 하긴 한 건데. 쉬워 어려워 물어보면, 되게 어렵다... 그리고 사실, 그것보다도... 

제게 생각 많아지는 말을 던져놓은 큰 등은 고전적인 오락실용 코인 노래방 부스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또 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성찬이 대답을 독촉하는 타입보다는 그냥 계속 쉴 새 없이 원빈에게 질문을 던지는 쪽에 가까워서. 입술을 달싹거리는 원빈에게 고개를 까딱하고는.



"너 저번에 3월에 월평 때 불렀던 노래."

"그거요? 아... 3월? 3월 언제였지... 아. 그거."

"그거 불러줘."

"네?"

"불러줘. 다시 듣고 싶어."

"여, 여기서 부르면 밖에 다 들리잖아요."

"시험 기간이라 사람도 없는데. 치즈볼 사줄게. 들려주라."



치즈볼 없어도 서로 춤이랑 노래하는 모습은 질리도록 본다. 학생이라치면 내가 치즈볼 사줄 테니까 너 문제집 푸는 거 보여달라 그런 소리 아닌가? 그런데 성찬이 또 으응. 하고 문을 여는 바람에 또 부스 안에 꾸깃꾸깃 같이 들어갔다. 껑충한 몸을 접고 앉은 성찬이 동전을 와르르 넣는다. 마이크를 내밀고 빤히 쳐다본다. 그래서... 불렀다. 

친구랑 노래방 가도 이렇게 딱 붙어 앉은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노래를 부르는데 워낙 키 큰 사람하고 낑겨앉아서 그랬는지 어깨랑 다리가 닿았다. 노래 시켜놓고 화면만 보던 성찬이 좋다아. 했다. 근데 이거 그 노래 아닌 거 같은데? 엥. 3월... 아니야 너 이거는 4월에 했던 거지. 제목 기억해요? 제목은 몰라 영어 노래. 

성찬은 기억력이 이상하게 좋다. 그러니까 자기 일은 형 이랬잖아요 그랬잖아요 그랬나? 로 흘러가는데 이상하게 원빈과 관련된 건 기억을 잘했다. 원빈이 기억을 못하니까 성찬이 그럼 너 처음 들어왔을 때 나랑 같이 섰던 거 곡 기억해? 네. 근데 그거는... 그거는 댄스곡이잖아요... 뭐 하여튼 치즈볼 사준다면서 (군기잡는 방식인걸까) 자꾸 현금을 꼴깍꼴깍 넣어버리는 바람에 발라드 알앤비같은 가사가 제법 로맨틱한... 노래만 다섯곡 정도 불렀다. 형은 안 불러요? 했더니 잘 들었다아. 하고 웃기만 했다.

시내에서 돈 좀 빌려주라 하던 초면의 나쁜 형들로부터 도망 다닌 적은 있었어도 원래 아는 잘생긴 형에게 노래 좀 들려주라 당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계획에도 없던 노래방에서만 벌써 삼사십분은 훨씬 넘게 쓴 것 같다. 점심 먹은 거 소화 다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이제는 진짜 들어갈 줄 알았는데 성찬이 그랬다.



"인형 뽑기 좋아해? 나 인형 뽑기 잘해."

"저... 저도."

"이거 고양이. 박원빈 닮았다."

"고..."

"이거 뽑아봐."

"제가요?"



원래 원빈은 강아지 좋아한다. 어린 시절 이따만한 개가 어깨에 턱. 하고 앞발파킹하는 바람에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어서 무서워하긴 하지만. 강아지 좋아한다. 그런데 옆에 서 있는 이따만한 형이 갑자기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너 고양이 닮았다. 고양이 뽑아봐. 넌 여기서 뽑아. 해서 (어깨에 그의 손이 얹혀져 있었다) 조금 혼미해진 정신으로... 그와 나란히 서서 인형만 네마리씩 뽑았다. 하나 뽑고 나면 성찬이 어? 뽑았네? 하더니 또 동전을 넣어주는 바람에. 한 놈만... 한 종류만 하나 가득 뽑아서 손에 들고 있던 성찬이 여러 종류 끌어안고 있는 원빈을 빤히 보다가 그랬다. 



"하나 내꺼랑 바꾸자."



이 품에 안고 있는 네마리 중복이긴 하지만 나름 고심해서 뽑은 애들인데. 뽑히는 대로 토끼 고양이 오리에 성찬이 뽑으란 대로 고양이도 한 번 더 뽑았다. 강아지 인형만 네마리 끌어안고 있던 성찬이 자기 강아지를 불쑥 내밀더니 나 너... 고양이 줘. 해서 얼떨결에 고양이 하나 주고 강아지 하나 받아왔다. 강아지 얼굴이 어쩐지 성찬과 쪼금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도 들렀다 가자."



회사 근처는 그랬다. 처음에는 동네 이름이 주는 위압감이 컸지만 좀 시간이 지나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청담동 청담역 하는 동네에서 대로변을 건너 오래된 건물들 사이를 걷다 보면, 여기가 진짜 그렇게 부동산이 비싼 동네가 맞나 생각하게 된다. 어딜가나 여유로운 것 같은 분위기는 있었다. 처음에는 겁을 많이 집어먹고 있었는데 성찬을 따라서 이 골목 저 골목 저쪽 동네 다니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그런 골목길 안에서 성찬이 가리킨 곳은 무슨 빵집이었다. 빵들이 빤짝거린다. 빵 비주얼을 보고 오. 했다가 가격을 보고 잠시 아니 뭔... 꿀을 발랐나. (나중에 알고보니 진짜 꿀바른 빵들이었다) 생각을 하고 있으니 성찬이 넌 뭐 안 먹을래? 하고 물었다. 저... 저는 단 거 괜찮아요. 형 뭐 사게요? 으응. 



그대로 그렇게 인형 여러 마리랑 제과점 쇼핑백을 달랑거리면서 나란히 숙소로 돌아왔다. 본가로 간 연습생들도 많아서 그랬는지 숙소는 텅 비어있었다. 뭐야 애들 하나도 없나? 형은 집에 안 가요? 성찬은 또 원빈의 말에 대답은 해주지 않고 쇼핑백을 그대로 원빈에게 쥐여주면서 말했다. 자 이거 너 다아 하고. 저요? 배불러? 어... 그럼 지금 이거 하나 먹어봐. 했다. 내미는 대로 까맣고 동글동글한 걸 한 입 베어 물었더니 달았다. 

원래 원빈은 단 거 그렇게 안 좋아한다. 그런데 혀에 얹히는 단맛이... 생각보다 괜찮아서. 바삭하고 촉촉하고. 저를 뚫어져라 관찰하듯 기대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얼굴에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아서. 괜... 괜찮은데. 했더니 성찬이 그래? 어때? 하고 묻는다. 겉하고 속이 달. 달라요. 맛은 있어? 네... 맛있어요. 성찬이 빙그레 웃었다. 

근데 너. 너무 단데요. 

원래 그래. 쪼끄맣고 달고. 내일 연습하고 당 떨어질 때 먹어. 애들이랑... 아니다 애들 다 주지 말고 이만큼은 너 혼자 먹어. 

엄한 말투인 성찬의 말에 슬쩍 웃었던 것 같다. 웃다가 슬쩍 위를 올려다봤는데 저를 빤히 보고 있던 성찬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방이 더웠나, 귀가 조금 붉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성찬과의 일정을 예상할 수 없는 주말 나들이가 완전히 루틴처럼 자리 잡았을 때. 낯설기만 했던 서울이, 강남 일대가... 성찬이 좋아하는 핫플레이스, 성찬의 가족과 친구들이 원래 좋아한다던 곳, 이번에 새로 알았다는 곳 이런 곳까지 구석구석 다니면서 제법 익숙해졌을 때쯤. 중간에 성찬과 한 방을 써보기도 했고, 다시 룸메이트가 바뀌기도 하고. 밥 많이 먹고 운동 열심히 한 원빈의 몸무게가 입사 초기보다 십키로는 늘었다가 다시 줄었다가. 연습생 전체 팔씨름 대회에서 성찬을 이기고 일등도 해보고. 잘하고 싶지만 어렵기만 했던 춤과 노래가, 잘하고 싶은 것, 어렵지만 재미있고 좋아하는 것이 되어가고. 생각지도 못하게 칭찬을 받아서 하루종일 기분이 좋아보기도 하고, 잘하고 싶은데 뜻대로 안 되어 울어보기도 하고. 갑자기 코로나 때문에 다들 대면 활동이 제한되고, 연습생 여럿이 우르르 나가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하고... 

스무살 성찬의 데뷔가 결정되었다. 대부분 데뷔라고 하면 적어도 네다섯명은 붙여서 팀으로 데뷔하는 줄 알았는데. 오래 연습생 생활 했으니까 축하해야 하는 게 맞는데. 원빈은 입사한 지 이제 겨우 일 년 반... 쪼금 넘어가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완전히 붙어 다니는 또래 그룹은 달랐지만 그래도 꽤 친했어서, 이상하게 월말 평가 하거나 무대 서게 되면 처음부터 늘 저 형이랑 같은 팀이었어서 데뷔도... 팀도... 

성찬의 얼굴 보기가 쉽지가 않았다. 늘 옆에 있었는데. 다른 건물로 불려가는 일이 많았고, 말 건넬 틈 잡기도 쉽지가 않았다. 쉬는 날이 되어서야 사람 얼마 없는 숙소에서 겨우 형 축하해요 하고 말하는 원빈에게 으응, 하고 대답한 성찬이 나갈래? 하고 물었다. 밥 먹자. 네. 그리고 오랜만에 오락실에 들어갔다가, 성찬이 와 여기 오랜만에 와보네 하고 웃었다. 우와. 박원빈이 쩌기서 노래 불러줬는데. 그건 형이 부르, 불러달라고... 그리고 그대로 그 제과점까지 들렸다. 성찬이 또 쇼핑백(이번엔 여러개)을 달랑거리며 돌아왔다. 

숙소 갈래? 하는 성찬의 말에 저는... 연습 좀 더 하고 갈래요. 하자 성찬이 열심히 하네. 했다. 그대로 회사 건물까지 돌아왔는데 성찬이 먼저 가질 않았다. 연습하고 보컬 룸 문을 열다가 성찬을 마주쳤다. 자기도 이제까지 회사에 있었다고 숙소까지 같이 가자고 했다. 선물 돌렸나.

숙소 문을 열기 직전 현관문 앞에서 성찬이 언제 썼는지 카드가 불쑥 튀어나와 있는 제과점 쇼핑백 하나를 불쑥 내밀면서 말했다.



"고마워."

"네?"

"축하해줘서."

"당연히 축하해야죠..."



축하의 말 대신 다른 걸 건넸던 사람도 있었던 걸까? 그런데 성찬이 그냥 웃다가, 다른 애들 다 주지 말고 너만 먹어. 알겠어? 하는 바람에. 너무 단데... 언젠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원빈도 웃었다. 그리고... 그리고 쪼금 이상했다. 어둠 속에서 성찬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낯설어서. 평소랑 다르게 조금 깊어 보여서... 어쩐지 목덜미가 슬쩍 쭈뼛거리고 손 끝이 간지러워질 만큼. 



"박원빈."

"네."

"거기 카드도 있어."

"네? 아. 네..."

"썼는데... 하고 싶은 말."

"감사합니다. 읽어볼게요."



응. 성찬이 끄덕거렸다. 여전히 제 얼굴을 살피듯이 빤히 바라보는 눈빛을 계속 마주하는데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생각, 감각, 감정... 그러니까 정확히 익숙은 한데, 설마 싶어서 결국엔 모르겠다 싶어지는 어떤 간질간질 불안함이. 눈앞의 연습생 형이 하고있는 눈빛이, 꼭 선배나 형이 아니라... 그리고 원빈을 빤히 바라보던 성찬이 또 불쑥 말을 건넨다. 



"원빈아."

"네?"

"잘 자."



현관문이 열리고 성큼성큼 멀어지는 성찬의 등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대충 이날 쯤부터였다. 데뷔 준비로 바빠진 성찬을 보기가 더 더 힘들어지고, 아직 데뷔는 하지 못했지만... 그냥 여러 곳에서 이제 이대로면 원빈이 네가 우리 회사를 넘어서 케이팝 최종병기야 소리를 듣게 되던 때가. 좋아해? 잘 해? 하면 이제 여전히 쉽지만은 않지만 연습한 만큼 노력한 만큼 늘어난 실력만큼 자신감도 붙어서 나도 곧이라고 믿고 달리던 원빈이,

쇼핑백에서 불쑥 튀어나와 있던 카드를 제 방에 돌아와 열어봤다가 마주친 성찬의 글씨에 그만...

그러니까 이날부터.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창사 25년의 노하우가 에밀레종처럼 녹아있다는 케이팝 최종병기에게 주어진 쩨일... 제일 까지는 아니고. 쫌 큰 시련. 2019년 2월 이후로는 제일 클 수도 있긴 해(키도 자꾸 크는 것 같고). 그러니까 최종병기의 최종 보스는.



'ㄲㄴㄹㄷㅂㅎㄹ'







ㄲㄴㄹㄷㅂㅎㄹ

♡ ♡ ♡ ♡ ♡ 정성찬 (Player Select) 박원빈 ♡ ♡ ♡ ♡ ♡

라니











스무살 성찬이 데뷔했다. 연습생 대장에서 연예인이 됐다. 원래도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데 이따만한 사람이 숙소에도 연습실에도 없으니까 휑하다. 주말에 숙소에 뻗어있어도 나가자고 하는 사람이 없다. 저도 모르게 성찬이형, 하고 불렀다가, 아니면 성찬이 서 있던 자리에 시선을 뒀다가 대답 없는 빈 자리에 아. 하곤 했다. 이제는 다른 연습생들이 원빈을 성찬 대하듯 대한다.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야? 팀이야? 멤버야? 언제야? 어디야? 뭐 그런 말들이 웅성거리면서 원빈의 연습생 생활도 조금 하드모드에 가까워졌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마음을 다잡고 성실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일상 속에서 가끔, 그의 키만큼이나 길쭉길쭉 훌훌 써져있던 그의 글씨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해석이 도저히 안되는 초성 카드 하나. 

궁금해서 검색해봐도 도통 나오질 않았다. 보니까 냅다 초성을 궁금해하는 경우는 상대방이 저와 어떠한 연애적 감정을 나누는 사이라던가. 엥. 아니면 초등학생 중학생이 갑자기 저격을 하는... 나 원반쓰 열아홉인디. 헉. 욕인가? 설마. 제가 본 성찬은 그럴 사람은 못됐다. 귀찮았나? 음... 남사스러웠나? 그럴 수도. 데뷔 전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길래. 

하여튼 인터넷에서 찾아본 바.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이지 스릴 넘치게 궁금해하더라도 정작... 햄버거 씨엠송이거나. (그럴 수 있어 햄버거를 좋아하잖아) 어떤 스포츠 구단 응원가거나... (그 형이 축구도 좋아하긴 해) 이런 식으로 맥 풀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굳이? 

글자수도 엇비슷하고 상황도 성찬과 원빈의 현 상태와 비슷할 수 있었지만 달랐던 사연은 썸남이랑 수능 잘 보자고 연락하던 중에 갑자기 상태 메시지가 바뀌었다는 고전 일화였다. 꼭 나만 공부했길 대 끝나면 고백할게. 놀부가 아니라면 후자겠지. 근데 쨌든 그럼 좋아하는 애들이잖아 서로. 아니. 형이랑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목이 말라 거실로 나왔다가 다른 녀석을 마주쳤다. 



"야 너는 이 시간에 게임 안 피곤하냐."

"형은 안 자요?"

"나는 그냥. 이거 뭐야 요새 맨날 하고 있네. 안 어려워?"

"스트레스 푸는 거죠! 재밌어요. 형은 게임 안 하시죠?"



좀 전부터 유행인 것 같긴 했다. 무슨 카트 타고 그런 게임도 하던데. 나는 께임... 그런 거는 싫어. 어렵고 복잡하고... 이거 장난 아니에요 그냥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돼요. 스토리도 진짜 대박인데. 진짜 갓겜이에요 갓겜. 뭔데? 원빈은 게임은 잘 몰라도 야악간의 만화? 드라마? 감성은 쪼오끔 관심이 있었다. 마침 회사도 그런 컨셉들로 유명하던 회사 아니던가. 

조금 덧붙이자면 원빈이 (시켜준다면) 하고 싶은 건... 말수 없지만 쎈 나쁜 남자 같은 캐릭터였다. 쫌 미스터리하고 막. 순정만화 같으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잠자는. 막판에 등장하는 최종 보스 같은 거. 아니면 이제 주인공이 뚝딱대는 동안 말없이 지켜보다가 등장해서 조언해주고 (한심하군.) 지 갈길 가는 간지나는 흑발 남자.

눈 앞의 녀석이 신이 나서 설명을 한다. 그니까 얘가 기사? 용사? 그런 건데요. 공주가 있는데... 그리고 백 년이 지나서 눈을 떠서... 그럼 뭐 어떻게 하면 깨는 거야? 뭐 막 시키나 이거저거? 아니요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하면 돼요. 최종 보스 깨기 전까진 아무거나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어요 막 몇백시간 하는 사람도 있던데. 뭐야 뭔 몇백시간을 해? 구하러 안가? 기다릴 거 아냐? 

원래도 화면 조작하고 들여다보고 하는 류의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는데 심적인 거리만 더 멀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뭐 목표도 계획도 없이 모르는 세계 탐험하고 잠긴 문 열어보고 헤매고 그런건... 좀. 원빈은 어떤 기한이 있으면 계획대로 목표 달성하고 이런 게 좋았다. 단순하게 앞으로 쭉쭉 달려 나갈 수 있는 그런 게 좋았다. 하다못해 운동을 해도... 까지 생각했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형은 그럼 약간 렙업하는거? 스테이지형? 이런 게 잘 맞으시려나? 아니 난 그냥 게임에 관심이 없어. 뭐 그런 말을 주고받는데 이상하게 성찬의 생각이 났다. 왜 갑자기 성찬의 말간한 얼굴이 불쑥 떠올랐는지. 그대로 방에 들어왔는데 예전에 성찬이 손에 쥐여주고 갔던 흰 강아지 인형이 보였다. 자다가 건드렸었는지 까만 고양이 인형하고 뽀뽀하고 있길래 이게 뭐꼬 남사스럽게 하면서 후다닥 떼어놨다. 



'박원빈 게임 좋아해?'



성찬이 물어보던 수많은 좋아해? 질문들이 떠올랐다. 원빈의 질문은 그때보다 조금 더 디테일해졌다. 형이 오락실 가자고 하면 갈 수는 있는데. 저런 게임 하자고 하면 안 할래요. 그대로 침대에 쏟아지듯 누웠는데 통 잠이 안 와서... 성찬이 주고 간 초성 일곱글자를 바라봤다. 뭐야? 대체 뭐냐고. 옆에서 인트로 스토리 튜토리얼 어쩌구 저쩌구 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성찬이 생각났나. 그렇게 평소에는 앞만 보고 달리는 원빈은 잠시 제 연습생 생활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래 원래도 복기는 중요하다. 







튜토리얼



원빈의 연습생 생활은 2019년에 시작됐다. 뭐... 많은 일이 있었다. 내내 운동선수가 될 줄 알고 살아왔는데. 어떤 것 하나만 보고 죽어라 달려왔는데 그렇게 전부를 걸었던 게 사라진다는 것은... 한계와 포기라는 단어는 마음이 아픈 말이었다. 그렇게 바라고 원하고 좋아했는데도 안되는 게 있었다. 작은 방 한 칸 안에서 많이 울었다. 실력이란 뭘까. 어디까지가 재능인 거고 어디까지가 노력인 걸까. 어디까지가 운인 걸까. 앞으로는 뭘 해야 하나... 숨죽여서 울기도 하고 엉엉 울기도 하고. 

몇년을 학생이라기보단 선수로 살아왔다. 학생으로 돌아와 섞이려니 그 몇 년이 뭐라고 모든 게 낯설었다. 트랙을 벗어나니 따라잡아야 할 것이 많았다. 그게 제 길인지는 모르겠다. 말 수 없는 애로 보냈다. 

다행히 원빈에게는 아직 많은 것들이 남아있었다. 괜찮다고 늘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가족들, 또 다른 재능, 또 다른 기회... 멋을 조금 부려보니까 이제 원빈은 말수 없고 잘생기고 유명한 애가 되어있었다. 음악 생각을 해봤지만 기회가 이렇게 열릴 줄은 몰랐다. 

그렇게 서울에 가게... 오게 되었다. 빈아. 일본 갈 생각도 했으면서 왜 서울 간다고 겁을 먹는데. 하며 막내 목에 결혼반지를 녹인 목걸이를 걸어주는 부모님의 손이 더 떨리고 있었다. 그까짓 거 가서 딱. 기선제압해버려. 아 뭔데... 괜히 농담을 주고받았다. 

몇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택시도 종류가 있다는 걸 몰라서 서울은 물가가 이 지경인가 생각했다. 길은 또 왜 이상하게 복잡한지. 초등학교 앞에서 내리면 바로라는데 한참을 헤매다가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잔뜩 지쳐버렸다. 들어갔더니 이제 수많은 연습생 앞에서 소개를 받게? 당하게? 하게? 되었다. 저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 앞에 서 있으려니 잠깐 전학 왔던 날이 생각나기도 했다. 하필이면 또 교복을 입고 있었어서.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짤막하게 하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껑충하게 키 큰 남자가 자길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말 그대로 화려했다. 잘생겼다... 살면서 본 사람들 중에 제일 잘생겼다... 질리도록 들었던 말인데 그게 제 입에서 바로 튀어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뭐야 외국인인가? 둥글게 쌍꺼풀 진 눈이 원빈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탈색한 머리에 머리도 길고 옷도 막 화려하고. 

까만 짧은 머리에 교복입은 제 모습이 순간 멋쩍어졌다. 새로운 친구도 들어왔으니까 우리 형들이 또 대표로 춤 한번 보여줄까? 성찬아. 직원분의 말에 그 화려하게 생긴 사람이 네. 하고 일어났다. 한국 사람인가? 키까지 크네. 그리고 그가 춤을 추는 순간...



아.

어디까지가 재능인 거고 어디까지가 노력인 걸까. 어디까지가... 

나 할 수 있을까...



엄마. 나 못할 것 같아. 잘 도착했냐는 엄마에게 냅다 한마디 하자 또 걱정어린 말이 전해져온다. 어떻게 찾은 길인데 물론 그만둘 생각은 없다. 그냥, 마음이... 하교하는 시간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모든 게 낯설고 복잡한 도시. 제가 유독 초라하게 느껴졌다. 자꾸 그 외국인 같이 생겼던 형이 자꾸 아른거렸다. 아... 무서. 무서운데. 그러니까 사람을 보고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을 느낀 게 처음이어서. 누군가를 보면서 긴장되고 떨리는 게 처음이라서. 발걸음 하나씩 내디딜 때마다 빌었다. 아까. 저. 무서운. 형하고. 제. 발. 같은. 숙소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다행히 거실에 모여앉은 녀석들을 보니 거진 저와 동갑이거나 어렸다. 녀석들이 원빈을 보고 신이 나서 말을 건다. 이상하지. 교실에서 마주치는 또래들은 불편했는데 숙소에 같은 거 하고 싶은 애들끼리 모여있으니까 꼭 운동하던 시절 같았다. 이번에 엄청난 애 들어온다고 말이 많았는데 너구나 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원빈은 이따만한 도시에서 처음으로 구경한 연습생의 존재감이 물리적으로도 이따만해서 저 자신이 아주아주 작게 느껴지던 참이었는데. 근데 아까 그 형... 하니까 자연스럽게 성찬의 이야기가 나왔다.   

성찬이형은 중3때부터 연습생했대. 2016년부턴가? 원빈이 괜히 입고 싶지도 않았던 교복과 교실에 저를 맞추어보려고 애써보고, 그럼에도 여긴 제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으로 고민할 때 그는 이미 애저녁부터 자기 길을 찾은 사람이었다. 연도를 듣는 순간 이 길의 불확실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런데 저렇게 생긴 사람이 데뷔를... 못할 리가 있나. 

첫날이라고 한참을 수다를 떨면서 현관문을 힐끗거렸는데 밤이 늦을 때까지 숙소에 성찬은 없었다. 다행이다 여기 안 사나보다. 자꾸 저를 뚫어져라 보던 그 얼굴이 아른거렸다. 저렇게 생긴 사람은 처음 봤는데. 또 저렇게 생긴 사람이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니까. 아니. 무서워... 다시 심장이 조여오는 건지 쿵쿵 뛰는 건지 싶다. 눈을 질끈 감고 잠들었다.  





*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나왔는데 렌즈가 없어서 흐릿한 가운데 부엌 쪽에 서 있는 사람 하나가 보였다. 누구지. 근데 가까이 있으니까 키가 제법 큰. 잠깐만.

아.

아!

그 형. 무서운 형이다.



"안녕."

"...안녕하세요."

"왜 이렇게 놀라요?"

"어제 안 들어오셔서..."

"아아. 연습하다가 왔어요."

"네."



소리없는 아우성이 이런 거였나? 속으로 작게 비명을 지르며 얼어붙... 얼어붙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조금 긴장했는데 제발 티가 안나길 바랐다. 그리고 스윽 지나가려는데 그가 다시 물었다.



"박원빈?"

"네. 넵. 서... 성찬이형. 형 맞으시죠. 말 놓으세요."

"으응."



성찬이 크고 둥근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예쁘더라 너네 교복. 학교 다녀?"

"네."

"재밌었겠네."



교실에 있는 거... 지금이 더 좋아요. 조금 무섭지만 여기 있게 되어서 좋아요. 살면서 형같이 생긴 사람 처음 봤어요. 저 그래서 못할까 봐 무서워요. 지금 형이 제일 무서워요... 할 수 없는 말을 입술만 달싹이고 떨고 있는데 성찬이 그랬다.



"열심히 하자."

"네."





*





타이밍이란 뭔지 원빈이 입사하자마자 조별 과제에 월말 평가에 뭐 온갖 게 밀어닥쳐왔다. 얄궂게도 최대한 피하고 싶은 이따만한 사람하고 같은 팀이 되었다. 당장 무대에 서야 한단다. 노래는 좋아했지만 춤은 하나도 모르는 채로 입사를 했으니 할 줄 아는 동작이 없었다. 입사는 망치춤으로 들어왔대도 지금 선배 가수들 노래에 맞춰서 3분 넘는 시간 동안 망치춤을 출 수는 없는데... 

온갖 레슨이 다 있다지만 당장 일주일 뒤에 무대를? 그리고 원빈은 알게 되었다. 팀이 좋은 이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연습생 대장 격인 사람이 저를 부르기에 처음엔 혼나려나 싶었는데... 성찬이 차분한 목소리로 손 뻗기 바운스하기 기본기부터 하나하나 다 가르쳐줬다.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따라하고 성찬과 다른 연습생들이 알려주는 대로 어떻게 저떻게 안무를 습득하고.

성찬이 둥근 눈을 깜빡이며 말한다. 원래 처음 들어오면 아무것도 못 해. 근데...

그렇게 처음으로 춤추는 무대를 해봤다. 번쩍이는 조명 때문에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연습한 대로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혼이 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칭찬을 엄청나게 많이 들었다. 너는 춤도 되고 노래도 되겠다. 재능있다. 타고났네 타고났어. 

재능... 오랜만에 들었다. 어디까지가 재능인 거고 어디까지가 노력인 걸까. 어디까지가 운이고 어디까지가 실력인 걸까. 타고났다는 건 뭘까. 언젠가 눈앞에서 저보다 먼저 달려 나가던 수많은 등들을 생각했다. 아주 예전에도 그때도 재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시작했다가 포기했던 길이 있었다. 이번은 어렵게 다시 찾은 기회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간절했다... 얼떨떨해서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이 느껴져 옆을 돌아봤다. 숨을 고르던 성찬이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봤던 날처럼. 눈이 마주쳤는데 그가 갑자기 씩 웃는다.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었던 사람이 제게 말했다.



야 원빈아. 너 잘한다. 







이지모드



나중에 알았다. 첫인상은 그렇게 무서웠는데... 제가 괜한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라는걸.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혹시라도 견제... 견제? 아니 그렇게 잘났으면서 나를? 아님 너무 못해서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뭐 그런 생각들은 다 쓸데없던 것이라는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찬에게 배우고 같이 연습을 하고 칭찬을 듣고 또 배우고... 생각지도 못한 칭찬을 많이 들을 때마다 쑥스러워서 감사합니다 하다 보면 옆에서 성찬이 원빈을 또 빤히 보고 있다가 작게 웃는다. 

성찬과 동전 넣고 해봤던 게임이 있었다. 이거. 이거 뭐고. 이거 못하겠어요 하던 원빈에게 성찬이 괜찮아 튜토리얼에선 안 죽으니까 그냥 해봐. 했었는데... 그렇단다. 콘솔게임이건 동전 넣고 해야 하는 게임이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단계에서는 목숨을 안 센다고. 삐약대던 입사 초 몇달간을 지나고 나서부터는 다행히 이지모드였다. 할 만 한데? 괜찮은데? 그런데 이제부턴 쨌든 목숨을 세긴 세는 단계인 것이다. 연습생들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수인데 생각보다 이 단계에서 회사를 나가는 연습생들이 참 많았다. 그래. 일단 제 실력과 재능은 이지모드에서 살아남을 만큼은 됐다.

그리고 이거 아니면 진짜 안되는 원빈은 절실함으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거기에 오랜만에 쏟아지는 칭찬이 싫지 않았다. 좋아하는걸 할 수 있다는 거 그거 좋은 거구나. 한 번도 안 해본 거 배우는 것도 재능이 있다면 즐거운 거구나. 언제부턴가 몸으로 부딪히는 건, 잘하던 것에서... 잘하고 싶은 것, 해내고 싶은데 어쩐지 속상한 것... 이 되어있었는데. 이런 감각이 오랜만이라 좋았다. 열심히 하는 만큼 는다. 열심히 하는 만큼 수월해진다. 

그리고 늘 원빈의 옆에는 성찬이 있었다. 매번은 아니어도 이상하게 그렇게 같은 팀만 여러 번을 했다. 쇼케이스나 평가회 준비를 하면서 연습하다 보면 또 성찬이 자연스럽게 제 옆에 서 있었다. 헤매고 있으면 또 그가 자연스럽게 원빈을 도와주고 알려주고 그랬다. 벽이 저를 등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제 길잡이가 되어주면 또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형은 그래... 연습생 대장이니까. 그런데 이것 말고도.



"너 왜 숙소에 혼자 있어?"

"네? 아... 저 혼자 있어요?"



따라잡을게 많기도 많아서, 그런데 따라잡는 게 절실하고 재미있어서 또 막 달리다 보면 일정이 없는 날은 그렇게 피곤했다. 어쨌든 미성년자들이 많으니까 레슨 일정은 정해져 있다. 쉬는 날도 준다. 그렇지만 다들 욕심이 많으니까 회사에 결국 다 붙박이처럼 출근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찬이 교복 예쁘다고 했던, 원빈은 아쉽지 않았던 학교도 정리하고... 평상시에 각성 빡 하고 200%로 지내다 보니까 쉬는 시간이면... 누워있고 싶었다. 그리고 원빈은 일단. 내향형이었다. 그런데.



"그냥... 잤어요. 자느라..."

"밥은 먹었어?"

"아직요. 형은 근데 집 안갔어요?"

"집이야 뭐 금방 가는데."



숙소에서 사는 성찬의 본가가 회사에서 가깝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조금 먼 등하교 거리쯤 되지 않으려나 싶었는데 (그냥 등하교 거리였다) 이런 사람도 숙소 살면서 죽어라 연습하는 것이다. 저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끔 엄마 아빠... 호적메이트인 친형도 가끔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보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편도 5시간. 그렇게 왔다 갔다 할 만큼 쓸 시간이 없었다. 통화야 뭐 자주 하니까... 그런데 그런 원빈이 신경 쓰였는지 성찬이 그렇게 원빈을 챙겼다.

평상시에도 숙소에 있다 보면 성찬이 너 밥 안 먹어? 하면서 원빈을 불렀다. 뭐 좋아해? 어... 이거 좋아해? 안 먹어봤어요. 그래? 첫인상이 예민하고 냉해 보였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자꾸 불러서 질문을 던진다. 야 원빈아. 치즈볼 먹을래? 치즈볼이요...? 너 치킨 뭐 좋아해? 저는 지코바... 지코바? 나도 그거 좋아하는데. 스시 좋아해? 조... 좋아해요. 나 고기 구울 건데 너도 먹을래? 네? 네... 성찬과 마주 앉아 숙소에서 밥을 먹다가 쉬는 날에 성찬의 손에 이끌려서 계획도 없이 일단 밖으로 나가게 되기까지는 금방이었다.



야 원빈아 나가자.

네? 나가면 뭐 할건데요...?

어? 몰라? 일단 나가자?



학생이 아니지만 학생 때는 나이 한두살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성찬도 원빈도 평소에는 동갑내기와 같이 다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면 성찬을 따라 여기저기 다니고 있었다. 코인노래방 부스에서 노래하고 인형 뽑기하고 돌아온 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원빈이 SNS에서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춤도 노래도 아니고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사진들이 다 어디서 찍힌 거냐 하면.

집.

집이였다. 실내였단 말이다. 집안에서 교복 입고 찍은 사진들로 유명해진 원빈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생긴 남자가 계획은 없지만 일단 나가서 생각하자는 외출은 쪼금... 쪼금 힘들었다. 아점쯤 나갔다가 저녁까지 먹고 돌아오는 길에 성찬이 물었다. 너 표정이 왜 그래? 힘... 힘들어서 그래요. 저 사람 많은 곳은 기빨려서... 눈치 보면서 한 말에 성찬이 웃었다. 까르르 하고 웃는걸 처음 봐서 신기했다. 

성찬의 박원빈 나가자! 하는 말에 아 이 형은 정해놓지두않구... 하고 투덜대면서도 서로 웃게 되기까지도 또 금방이었다. 어느 날 성찬이 물었다. 

아직도 서울 무서워?

둥그래진 원빈의 눈을 보고 성찬이 씩 웃는다. 언제... 언제 말한 적이 있었나. 

그보다도 원빈은 성찬의 그 한마디에 알게 된 것이다. 이제는 아니요... 무서웠던 형이, 무서웠던 동네가 그 무엇보다 익숙해졌다는 걸. 겁이 많은 원빈은 그래서 다시 조금 무서워졌다. 모든 변화는 익숙할 때 찾아오니까.









하드모드 1/2



목숨 한 다섯개인 게임이 있다고 하자. 이지모드에서 두 개 이상 쓰는 일은 별로 없다. HP가 풀이어도 거기서 죽는 일은 잘 없단 말이다. 원빈은 게임 잘 모른다. 현실의 하루하루가 서바이벌이고 제가 해결해야 하는 퀘스트만 해도 수만개인데 다른 취미를 가질 이유도 여유도 없다. 그래도 굳이 게임으로 치면 장르가 뭘까 생각해봤다. 반복반복하고 점점 어려워지는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단순한 게임인지 공주 찾으러 긴긴 모험을 떠나는 그런 류인지. 

하여튼 장르가 어떻든지 간에... 성찬은 이제 여기 없다. 그래 원래 모험을 떠나도 중하반기부터는 파티 구성원에도 변경이 있고. 서사와 성장은 상실로부터 시작된댔나. 선수에서 연습생이 될 때 그랬다. 이번에는 연습생 생활을 시작할 때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준 성찬일까. 이제 춤 좀 어떻게 추는지 알겠다... 할 때쯤 성찬이 데뷔를 했다. 

칭찬은 늘 받아왔다. 그치만 스스로 만족할 만큼 감이 왔다 싶은 건 입사 만 1년 반을 넘어서... 성찬의 데뷔가 정해지고 나서 딱 몇개월 이후. 성찬이 연습생 신분으로 마지막으로 섰던 무대에도 원빈은 그의 옆에 있었다. 제가 조금 더 일찍 입사했더라면 이번에 같이 데뷔를... 할 수도 있었을까? 그렇지만 제 욕심만큼 준비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성찬의 데뷔 전후로 또 연차가 오래된 연습생들이 우르르 나가게 되었다. 연습실이 조금 낯설어 보였다. 그리고 어느덧 제가 성찬이 하던 역을 맡아서 하고 있었다.





 *





게임으로 치면 이제 하드모드. 스테이지건 모드가 달라졌건 이제 중급자 혹은 고급자와 초심자는 다르다. 좋아하고 즐겁고 잘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게 어려워진다. 실력이 어느 정도 늘어난 만큼 이제는 같은 시간을 쏟아부어도 더디게 는다. 노력하는 만큼 느는 게 즐거웠었는데. 이제는 이만큼이나 했는데 아직도?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회사에서 주는 과제도 더 어려워지고 평가하는 기준도 훨씬 깐깐해진다. 

스무살이 됐다. 이제 원빈과 나이가 비슷한 친구들이 조바심을 내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다니는 나이에는 오히려 학교 안 다니고 연습생하는게 더 즐거워 보이거나 부러움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상황은 또래들이 대학교를 가면서, 성인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달라진다. 아직 연예인이 아닌 연습생과 갓 스무살이 된 일반인 중 자유도나 도파민은 아무래도 후자가 더 높은 그런 시기라. 이십대부턴 한 해 한 계절 한달 한달이 또 다르니까... 연락하고 지내던 고향친구 중 하나가 이르게 군대를 갔을 때는 원빈도 놀랐다. 

연예인이 된 성찬은 이제 숙소도 연습실도 다르게 쓴다. 언젠가 얼굴 비추러 갔던 결혼식에서 잠깐 마주쳤던 이후로는 통 볼 수가 없었는데 또 '얼굴 보기'는 쉬웠다. 연예인이니까. 음악방송이랑 연말 무대에서 성찬의 얼굴을 봤을 땐 반가웠다. 화보도 찍고 광고도 찍고 음악방송 엠씨도 맡게 되었단다. 만 열아홉이 된 스무살 원빈의 생일 근처에 들려온 소식이었다. 

주말에도 이제 회사에 나가서 연습하다가 성찬이 엠씨를 보고 있는 음악방송을 봤다. 그날은 아주 늦게까지 연습을 했다. 밤에 숙소로 들어가다가 잠깐 숙소로 들어왔던 첫날밤 생각을 했다. 그 무서운 형은 숙소에 없겠지, 했다가 아침에 마주치고 헉 하고 놀랐던...



"박원빈?"

"헉!"



마스크를 쓰고 있는 껑충하고 마른 남자가 제 이름을 부른다. 성찬이었다. 아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데 어떻게 알았지. 분명 연습실도 다르고... 연예인들은 여기로 안 온댔는데. 



"...성찬이형?"

"어어. 뭐야 귀신 봤니? 왜 이렇게 놀라."



형.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죠? 보고 싶었어요... 그냥 할 수 있을 말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 어려워서 입술을 달싹였다. 연습생 생활 시작에 정성찬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가 없다. 저도 정말 힘내서 달려야 하는데.



"형... 연예인인데 여기 있으니까."

"으응."



성찬이 작게 웃는다. 그러더니 또 쇼핑백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박원빈 생일이었었지."

"네? 아."



회사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생일파티를 열어줘서 기겁했었던 기억이 났다. 그러고도 성찬이 데뷔하기 전까지 한 번의 생일을 더 보냈다. 그때마다 성찬이 어어. 하더니 원빈에게 자꾸 밥을 사줬다. 남들은 성찬이 기억력이 안 좋고 자꾸 깜빡깜빡 한다는데 글쎄. 이상하게 원빈과 관련된 건 기억을 엄청 잘해서. 



"이거 박원빈 선물."

"아."



저는 형 생일 못 챙겼는데요... 형 생일 지났잖아요. 원빈이 말하자 성찬이 너 생일도 지났는데? 하고 대답했다.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내미는 대로 받아들였다. 



"시간 엄청 늦었네. 너 저녁은 먹었어?"

"연습하느라 어... 안 먹었어요. 형은..."

"뭐라도 먹을래?"



그런데 성찬은 이미 연예인 아니던가. 늦으면 늦은 시간이고 아직 이르다면 이를 수도 있는 시간이라서 걱정이 됐다. 어디 가서 먹기는 좀, 그렇구... 그래 그럼. 너 근데 쪼금 말랐다. 그래요?

한두마디 섞다 보니까 또 이대로 숙소까지 걸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성찬이 그랬다. 야 잠깐만 박원빈 너 점심은 먹은 거지? 어... 네. 아마도? 밥 잘 챙겨 먹어야지. 왜 안 먹어. 저거 쇼핑백 열어봐. 



"...이거 거기 빵집 꺼 아니에요?"

"응."



원빈은 단 거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치만 자기가 좋아하는 거 생기면 꼭 원빈에게도 물어보고 데려가 보려고 먹여보려고 하는 성찬의 다정이... 다정이 오랜만이라 좋았다. 

그런데 성찬이 저를 빤히 보다가 그랬다. 좋아하지 않나? 너 그때 그거 먹을 때 웃더라고. 그래서 어 웃는다 속으로 그랬지. 귓가에 조근조근 얹히는 말이 이상하게 간지러워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케이크가 나았나? 못 만날 수도 있는데 케이크 이런 건. 너 그리고 케이크도 쪼금 먹고 말길래."

"아."

"몰라아. 이거 얼려놨다 먹어도 된대. 근데 오늘 먹는 게 제일 맛있대."

"네."

"남들 주지 말고 너만 먹어."



그때랑 비슷한 말 하는 게 웃겨서 조금 웃었다. 가만히 있다가 물었다. 형도 남이에요? 뭐? 저 지금 먹고 싶은데 하나는 너무 많아요. 달아서... 그래서 그때처럼 반 나눠먹었다. 카드에 하고 싶은 말 썼어 꼭 읽어봐 했던 사람 치고는 그 카드 얘기는 안 한다. 까먹었을까? 그럴 수도. 그리고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성찬이 그랬다.

박원빈. 잘 자. 밥 잘 챙겨 먹어. 

또 보자 같은 말은 어렵다. 그런데 밥 잘 챙겨 먹어 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자꾸 간질간질 맴돌았다. 숙소에 돌아와서 예전에 성찬이 줬던 카드를 다시 꺼내 봤다. 

나중에 쉬는 날... 원래대로면 절대 밖으로 안 나갔을 텐데 궁금해서 찾아봤다. 벌써 세 번째 선물 받은 빵 이름 그거 대체 뭔지. 인기가 엄청 많아졌는지 주말 늦은 오후에는 빵이 남아있질 않았다. 원빈은 진짜 대문자 내향형인데 이제... 용기를 다 끌어모아서 점원분께 여쭤보았다. 저 이거... 이 사진에 있는 이거 안 파나요? 네 저희 빵 나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요. 아... 예. 혹시 빵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이거는 까눌레예요. 네? 까눌레. 

어.







ㄲㄴㄹㄷㅂㅎㄹ



잠깐 생각했다. 성찬이 제게 남기고 싶었다던 일곱글자가 참깨빵 위에 어쩌고저쩌고 씨엠송마냥 빵 (나중에 봤더니 구움과자라고 했다) 이름으로 시작하는 그런 거였던 걸까. 까눌레 대박... 아 설마. 설마 진짜. 아니 장난치는 거 좋아한대도 굳이 리본 달린 카드에 순 쇠고기 패티 두 장. 하고 꾹꾹 눌러 적을 일인가.



아 진짜 뭐지?









하드모드 2/2



시간은 참 빠르게 간다. 원빈이 연습생을 시작했을 때와는 많은 게 바뀌었다. 성찬이 없고, 회사가 이사를 했다. 이제 회사 건물은 더 높은데 그게 어색하지 않다. 연습생을 시작해서 성찬과 친해지고 성찬이 데뷔한 만큼의 시간이 지나갔다. 새로 들어온 녀석들을 봐주는 것도 이제 익숙하다. 성찬이 저를 만난 게 이맘때쯤인가 싶었다. 이런 마음이었을까? 

스무살 마지막 쇼케이스에서 전체 1등을 차지하고 원빈은 스물한살이 되었다. 어디까지가 재능인 거고 어디까지가 노력인 걸까. 어디까지가 운이고 어디까지가 실력인 걸까... 다행히 제 의지와 노력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제 의지와 노력으로 채워 넣어도 안되는 것들도 있었다. 운의 역할이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성찬을 몇 번 마주쳤다. 전야제 평가회에 아티스트 참관 뭐 이런 명목으로 왔다고 한다. 나중에 새로 들어온 녀석들 중 누군가가 연예인 본 거 처음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 잘생기셨더라. 근데 좀 무섭지 않았어? 그 말에 예전의 제가 생각나서 좀 웃었다. 저 형 알고 보면 그냥... 그냥 되게 착한 사람인데. 이제는 데뷔 전 성찬을 아는 사람이 정말 얼마 없다. 원빈은 회사에서 늘 연습생 대표다. 평가회나 쇼케이스 무대를 할 때 일곱개씩 설 만큼. 말없이 있을 땐 원빈을 무서워하는 녀석들도 많았다. 그래서... 그래서 더 생각했다. 성찬을.





*





현실이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뭐 거대한 어드벤처 게임일 수도 있겠다. 뭐가 됐든 똑같은 거 계속 반복하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거. 목표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데뷔는 으레 거쳐야 하는 관문이고 그 이후가 진짜 시작 아닌가. 기다림이 길어지고 길어지면서, 수많은 스테이지를 거쳐오면서, 레벨업을 해오면서 가끔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제가 놓친 것이 있을까? 얼마만큼 남았을까? 

생각이 많아봤자 행동을 안 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잘 아니까 처음부터 결심했었다. 일단은 데뷔까지만 생각하고 달리자고. 그런데 유독 불확실성의 무게가 크고 무겁던 때가 있었다. 이즈음이 딱 그랬다. 나도 저 형처럼 얼른 데뷔해야지.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데뷔를 하고 나서도 쉽지 않다는 걸... 고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플랜이 세워지고 엎어지고... 아이돌은 무대에 서야 하는데. 우리가 늘 평가받는 것도 무대인데. 꼭 마법에 걸린 무엇처럼 무대 위의 성찬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사를 온 건물은 예전하고는 다르게 전체 연습실이 같은 건물에 있다. 늦은 시간 연습실에서 나오는 성찬의 뒷모습을 가끔 마주쳤다. 아는 척을 해볼까, 하기에는 저는 한껏 예민하고 지쳐있던 참이라 잠시 고민했다. 기분 탓일까 성찬의 뒷모습도 생각이 많아 보였다. 

성찬이 데뷔하고 나서 만 2년이 다 되어갈 때쯤 이제 서서히 '성찬의 팀'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원빈은 여전히 베일에 싸인 비공개 연습생이었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녀석들이 떠들어댔다. 데뷔 조합, 비밀병기는 마지막에 공개, 팀이 여럿, 주력 멤버... 거기에 성찬과 제 이름이 나란히 올랐다가 비교됐다가 하는 게 싫어서 그때부터는 일부러 더 무게를 잡고 다녔다. 제 앞에서라도 그런 말은 못하게 하려고. 





*





늦은 여름. 이번에는 원빈이 연습생 신분으로 콘서트 참관을 갔다. 저 너머에서 무대를 하는 성찬을 봤다. 저보다 더 앞 스테이지에서 달리고 있는 성찬을. 그의 팀에, 그의 옆자리에 제가 서 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무대에서 성찬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제 모습을 떠올렸다. 동시에... 성찬과 연말 무대나 회사 콘서트에서 다른 팀으로 마주치는 모습도. 성찬은 어떻게 생각할까? 마냥 기쁜 표정으로 뛰어다니는 성찬을 보는데 그 강아지 인형이 생각나서 또 피식 웃었다. 

가을. 연습생 몇 명과 함께 불려가 프로필 사진을 찍었다. 사진이야 자주 찍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원빈의 데뷔도 곧일까? 제 연습생의 시작을 함께 한 사람... 다음 스테이지에서 성찬을 마주하게 되면 어떤 모습일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게임이건 뭐 만화 드라마건 영화건 원래... 주인공이 처음 만났던 인물은 시작 이후엔 사라진댔나. 그 이후에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그대가 보요... 마법에 빠진 공주와 재회하느냐 동료로 돌려받느냐 혹은... 혹은. 보스전 끝판왕으로 다시 만나느냐. 제가 어쩔 수 없는 불확실함엔 흔들리고 싶지 않아서 매일매일 제가 할 수 있는 최선만 다하기로 했다. 





*





겨울이 시작되면서 이제 프로모가 제법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뭐 이거저거 찾아보다가... 성찬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장면을 봤다. 그거구나. 일본 방송 다녀왔을 때. 방송 내내 방긋방긋 웃으면서 나오던데. 제일 좋아하는 편의점 간식은 뭐냐고 물으니까 야채스틱이요! 하고, 미성으로 노래를 부르던 성찬이 (머나먼 우주의 저편에 아득한 추억을 생각해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 마음을 단지 너에게만 전하고 싶어... 가사를 듣는데 예전에 평가회때 같은 무대 서서 불렀던 노래 가사가 생각나서 또 눈을 깜빡였다) 마지막엔 눈이 새빨개져서 훌쩍이는 장면을. 

왜 저렇게 서럽게 울고 있나 했더니 외국어로 방송하느라 고생했다는 한마디에 저렇게 주먹 꼭 쥐고 울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누가 알아주면 눈물이 터져 나오지. 그렇긴 해. 그런데 제가 보지 못한 모습이라 또 쪼끔 짠했고... 나중에 성찬이 부른 노래 가사를 다시 보는데 그냥 그렇게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 둘은 먼 하늘 끝까지 헤매다가 바라던 이 곳에 온 거야. 예전에 같이 섰던 무대 노래가사는 이런 거였는데. 회사 취향인가 보다 하는 ST 권법과 동시에...

성찬이 주고 갔던 수수께끼의 초성 카드는 아직도 제 서랍 속에 있다. 까눌레... 설마 진짜 이거 너무 맛있다 카드인가. 까눌레 대박. 근데 ㅎㄹ에 들어맞는 감탄사를 도저히 모르겠어서 던져놨었는데. 그리고 저 형은 굳이 따지자면 햄버거를 더...





*





좀 더 추워졌던 날. 연습실에 갔는데 성찬이 있었다. 어... 신개팀 직원 누나들이 사진을 찍고 있어서 뭘까 했는데. 저 너머에 서 있던 성찬이 어 박원빈. 하더니 또 웃었다. 얼떨떨하다. ...벌써 마법의 성을 지났나. 









미션 클리어



새해가 지났다. 오랜만에 집에 다녀왔다. 바다를 봤다. 한참 동안... 연습실로 돌아오니 성찬이 있다. 성찬과 같이 연습하는 게, 다시 연습하는 게 아주 자연스럽다. 숙소도 바뀌었다. 회사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모든 게 정신없이 바뀌고 진행되는 시기였다. 워낙에도 불확실성이 큰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하다 하다 별일을 다 겪는다고 연습생들이 떨기 시작했다. 

연습실 밖은 정신없다. 마법의 성도 실질적 제목은 어둠의 동굴이라는 농담이 있었다. 그래서 그냥... 할 수 있는걸 이 악물고 해보자고 다짐했다. 막판까지도 엎어지고 변경되는 게 데뷔 조라고 했다. 최대한 이것저것 어필하는 게 좋지 않겠냐. 하는 원빈의 말에 성찬이 끄덕이며 덧붙인다. 우리 한 팀으로 분위기를 잘 내보자고. 안무를 짜기도 하고 따오기도 하고 하면서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닿아오는 어깨와 팔, 마주치는 눈빛, 여전히 잘생긴 얼굴에서 이젠 완연하게 청년티가 난다. 원빈도 성인이 된 지 벌써 2년은 지났다. 성찬과 연습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연습실 밖에서도 성찬과 붙어있는 게 정말 오랜만이다. 그러니까... 성찬이 시간 날 때마다 다시 원빈을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사 온 새 동네 골목도 성찬과 함께...





"으응 나 단 거 좋아하지... 근데 요새 보면 다 엄청 달더라구. 그래서 당분 함량 보고 살잖아. 카페인이랑..."



연습실 문을 여는데 성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앉아있던 성찬이 박원빈! 하고 불렀다. 박원빈 얘도 단 거 좋아해. 제가요? 성찬이 호들갑을 떨며 와보라고 하더니 건넨 게 그... 그거였다. 초성 글자 중에 앞에 세글자 그 과자. 원빈의 눈이 둥그레지는걸 봤는지 성찬이 킥킥 웃다가 이거 기억나? 했다. 



"봐. 얘 이거 좋아한다니까."



내가 얘랑 밥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데. 박원빈 맛 없으면 맛 없다고 해. 이건 싫다고 안 했어. 성찬이 말했다. 막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닌데. 진짠데... 생각하는데 꼭 열여덟살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형 여기 다녀왔어요?"

"집 다녀왔는데 지나가다가 보이길래 사 왔어. 생각나서."

"아."

"하나 챙겨놔."



무조건 하나는 니꺼니까, 다른 애들이 니꺼까지 뺏어 먹으려고 하면 당 얼마나 들었는지 아냐고 막 협박해 알겠지? 또 비슷한 말을 하는 성찬을 보고 있으니 예전에 성찬이 축하해줘서 고맙다고 남기고 갔던 카드 그게 생각이 났다. 그 이후로 성찬이 별 말이 없어서 본인도 잊고 있었나 했던. 아 근데.



"형."

"응?"

"까눌레?"

"이거? 으응."

"...당분 함량?"

"십오그램인가 그럴걸? 근데 요새는 음료수가 더 단 것 같아."



순간 원빈을 삼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알쏭달쏭하게 만들어놨던 카드 내용이 설마 그걸까 싶어서. 머리를 갸웃하는데 성찬이 나 아까 네가 안무 땄다는 거 그거 가르쳐줘. 하고 원빈을 올려다봤다. 원빈이 말이 없으니 선생니임 빨리요. 하면서 농담까지 한다. 기분이 이상하다. 제게 손 뻗는 것부터 기본동작 하나하나 가르쳐줬던 사람이 스스럼없이 저런 말을 하는 게. 데뷔라는 최종 보스전을 앞두고 마법에 빠진... 남자부터 미리 돌려받을 수 있나. 돌려받은 건가. 아님 사실 저 사람이 최종 보스는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저기 멀리 있을 때쯤 성찬에게 말했다.



"형. 예전에요. 예전에 저한테... 카드 줬던 거 기억나요?"

"아아. 그럼 당연하지. 명심... 아니 기억해 알아둬 알았지. 그때 막 당부하려고 그랬었는데 이렇게 됐네."

"...네. 명심할게요."



성찬이 갑자기 눈에 힘을 주고 비장하게 말을 하는 바람에 저도 그렇게 대답했다. 아니 근데 뭘 기억하라고 신신당부해. 설마 진짜 까눌레 당분함량을? (검색해보니까 1개 기준 10g 내외였다) 근데 놀랍지도 않다. 지금도 단 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면서 무슨 간식 먹었냐고 물어보면 야채 스틱... 하고 웃던 사람 아닌가. 요새 헬스에 미쳐가지고 지금 몸이. 





*





성찬이 밥 먹으러 가자, 하면서 또 데리고 나온 날이 있었다. 일단 나가자. 뭐 먹을 건데요? 소문난 감자탕. 감자탕 좋아해? 좋아하지? 가게 이름이 뭔데요? 가게 이름이 소문난 감자탕이야. 아아... 

금발머리한 성찬과 나란히 앉아서 감자탕을 먹었다. 성찬이 국자를 쥐고 밥 먹는 내내 신신당부를 했다. 너 밥 잘 챙겨먹어야돼. 체력 관리 잘 해야돼. 네에... 연습생 대장 소리 듣고 지내온 게 근 천일이 다 되어가는데 연습실 밖에서 이런 잔소리 듣는 게 오랜만이라. 눈앞에 있는 성찬이 꼭 그때 그 열여덟살 신입 손 태우던 열아홉살 형 같아서 속으로 조금 웃었다. 머리도 딱 그때 머리여서. 제 머리는 성찬을 처음 보던 날보다는 많이 길었지만. 

신기하게 감자탕집 근처에 오락실만 여러 개였다. 성찬이 또 주변을 빤히 둘러보다가 그랬다. 와. 옛날에 너랑 오락실 갔었는데. 기억나? 맨날 모든 거 깜빡한다고 놀림받는 사람이 그랬다. 

기억나요... 형 저한테 노래 불러보라고. 

오. 맞아.

괜히 말했다. 이번엔 그대로 보컬 룸으로 돌아가서 또 세네곡을 불렀다. 너 전체 일등했었다며. 그때 노래 불러줘. 작년에 맨날 부르던 노래 있었다며 불러줘. 처음 들어왔을 때 그 노래 그거 불러줘...





*





데뷔조 윤곽이 잡히면서 (근 이삼년간 구성 변동은 많았는데 이번에는 진짜 달랐다) 저희 이대로 무사 데뷔시켜주세요 어필하느라 이제 연습생들도 바빴다. 성찬은 연예인이었지만. 춤 레슨이 끝이 없었고 프로필 사진만 체감상 열 번은 넘게 찍었던 것 같다. 자 모두 잠은 죽어서 자자 죽어도 무대에서 죽자 하면서 지내온 게 벌써 몇 달째. 3월이 되자마자 성찬이 박원빈. 생일. 하면서 내민 게 하나 있었다. 쇼핑백 안에 작은 상자가 하나 들어있어서 뭐에요? 했더니 열어봐. 한다. 까만색에 분홍색 글자로 브랜드명이 적혀있는 핸드폰 케이스였는데 또 작게 쪽지가 붙어있었다.



박원빈 생일 축하해

ㄲㄴㄹㄷㅂㅎㄹ



지금 천일 가까이 이 수수께끼 같은 말 도저히 감을 못 잡고 있다고 하면 성찬은 뭐라고 할까. 진짜로 명심해 까눌레 당분함량 그런 걸까. 삼사년째 알뜰살뜰 손태우면서 옆에 있다 사라졌다 돌아왔다 하면서 특별한 소스 양상추 치즈 피클 양파까지 이러고 있는 거냐고. 



"아... 뭐에요."

"왜. 남사스러워?"

"엥. 아니 그건 아니고. 사실 쪼금."

"얼마 전에 얘기하니까 나도 생각나서."

"아..."

"알았지. 진짜 얼마 안 남았다."



진지해지는 성찬의 얼굴을 보는데, 연습생 대장이던 그 열아홉살 얼굴이 겹쳐 보여서 그냥... 잠깐 생각했다. 그래 당류 조심해 같은 내용이더라도. 이 형의 이상한 다정은 늘 달다고. 달... 달다고. 그런데 이 생각을 하자마자 성찬을 처음 봤던 날처럼 또 심장이 쿵 하는 바람에. ...무서워. 그런데 뭐가 무서운 건지는 잘 모르겠다. 





*





남들은 원빈을 보고 당연히 데뷔는 맡아놨다 그랬지만 정작 원빈의 마음은 달랐다. 하루아침에도 뺐다가 더했다가 재배치했다가 할 수 있는 게 그게 데뷔조다. 천일 가까운 시간 동안 보고 경험하지 않았나. 항상 원빈이 중심이라고 사람들이 수근거리긴 했지만. 그게... 그게. 

연습실 저 너머에서 웃고 있는 성찬을 본다. 우리 이대로 데뷔하면 진짜 좋겠다. 그럼 진짜 최고다. 하면서 웃는 성찬을. 제 연습생 생활의 시작에 가장 큰 벽인 줄 알았던... 그런데 늘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을. 마무리가 가까워져 온 지금도 앞으로도 제 팀에 기둥 같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사람을. 그러니까 원빈은, 원빈의 욕심은...





*





욕심을 너무 부렸나. 데뷔가 코 앞인데 마지막 라스트팡 라스트전을 앞두고 이럴 수가 있나.

성찬이 몸 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운이란 뭘까... 실력이란 뭘까. 건강 관리도 실력 아닐까. 선수로 살 때도 계속 생각했던 거였는데 왜 마지막 판 거의 다 와서. 힘든 거 다 지나와서 왜. 나한테 목숨 몇 개 남았나... 

카메라 앞에 서서 오늘은 목요일 저 원빈이가 춤과 노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는 것도 무대 위에 오르는 것도 다. 이제 곧 졸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는데... 이마가 뜨겁다. 몸이 끝없이 가라앉는다. 분명 허리만 좀... 안 좋다고 생각했는데 왜 쇼케이스 끝나자마자 갑자기 병이라도 난 것처럼 몸이 안 좋아진 건지. 

무섭다. 평소 같으면 컨디션 안 좋았던 건 적당히 관리하고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렇게 이만큼 아픈 거는 그때... 그때 예전에... 한참 전에... 



"와. 잠자는 숙소의 원빈."

"..."



꿈일까. 눈을 감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찬이형? 설마. 꿈이겠지...

속상하다. 마지막 쇼케이스일텐데. 한참 때는 춤 노래 개인 단체 조합별로 일곱개까지도 한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컨디션이 훅 안 좋아지는 바람에 서기로 했던 무대는 거의 취소되고 딱 하나도 겨우겨우 섰다.

...이러다 데뷔를 못해서 마지막 쇼케이스가 되면 어떡하지.

같은 조합으로 사진을 찍어보고 연습한 것도 몇 달 됐으니까 그냥... 그래 남들은 다 원빈이 데뷔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거 다 네 자리라고 네 그룹이라고 그랬다. 원빈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이번 쇼케이스도 평가보다는 그냥 졸업식 같은 통과 의례 그런 거라지만 원빈에겐 그 이상이었다. 마지막이라면. 마지막이니까 진짜 잘하고 싶었다. 제 만 4년이 넘는 연습생 생활의 마무리는 제가 만족할 만큼 그렇게 후련하게. 진짜 잘. 끝내고 싶었다. 전설의 연습생 그런 거 말만 그런 게 아니고 진짜로... 

직원들과 연습생들과 얘기하고 오면 원빈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던 성찬의 말간한 얼굴이 눈에 어른거린다. 왜 또 그 성찬이형 생각하고 있나... 만약에 팀 나뉘게 되면. 그럼 형한테 그거 글자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알려달라고 할까. 앓는 소리가 나왔는데 시원하고 큰 손이 이마에 살짝 덮였다. 그리고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박원빈. 이마가 불덩이네."



정말 성찬인가? 



"...성찬이형."

"밥 잘 챙겨 먹으라고 했잖아."

"밥..."

"허리 많이 안 좋았어? 심해?"

"그냥... 그냥 원래 그래요. 그냥 계속 관리하면 돼요."

"아프면 안돼. 너."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제법 엄했다. 당분함량 0g. 무대 끝내고... 박수도 받았다. 칭찬도 받았다. 나름... 또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제까지 고생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사람이 원래 아프면 마음이 약해진다고. 무서웠다. 이제까지 고생 많았어 이제는 안 와도 돼... 소리 들었던 연습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그래서. 허리 아픈 거는... 이제까지 잘 관리해왔는데. 



"...저 이제 목숨 하나도 안 남았으면 어떡하죠."

"무슨 소리야? 너 큰 병 걸렸어?"

"아니 보스전 같은건데... 망친 거 같아서."

"...게임했어?"

"아니 그냥. 연습생 생활이 게임이라면."

"아 그 소리야? 그럼 그건 예전에 지났지. 아니 한참 남았지. 데뷔가 끝이야? 너어. 데뷔 하고 나면 어어. 십년. 요새는 막 이십년."

"..."



이게 꿈일까 아니면 진짤까. 옆에 누군가 몸을 꾸깃꾸깃하며 앉는 것이 느껴졌다. 종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원빈의 열 오른 얼굴에 높은 어깨가, 뜨거운 팔에 맞물리듯 팔이 맞닿는 감각이... 성찬이다. 



"속상해서 그래? 해온 게 있잖아."

"기회는 정해져있잖아요."

"너 솔로 아니잖아. 너 게임 잘 안 하지. 게임도 팀전하면 죽기 전에 힐하고 부활시켜주고 다 해줘. 그게 팀이야."

"..."

"그 뭐지 엄청 오래된 게임들도. 둘이 같이 하면 하나 살 때까지 나머지가 열심히 뛰는 거야."



총게임 이런 것도 죽으면 동전 넣을 시간 5초는 준다고. 당분함량... 한 구쩜일삼그램. 목소리는 분명 엄했는데 농담같이 하는 말에 조금 웃었다. 형. 저 아파요... 웃으... 웃을 힘이 없어요... 원빈이 눈을 감은 채 끙끙거리자 성찬이 뭐를 슬쩍 건넨다. 이온음료였다. 형. 엉. 저 지금 팔이 안 올라가요. 어... 근데 너 나 요새 힘 조절 안 되는 거 알지. 잘못하면 그... 물고문 돼. 받아마시는데 성찬이 제 어깨를 들썩여 조금 낮추더니 (좁다) 몸을 더 붙여왔다. 기댈래? 네. 이거는 연습생 선배 치고는... 좀 간지럽다. 목 가눌 힘이 없어서 그냥 기댔다. 기대라고 하니까. 머리는 몽롱하고 몸은 무겁고... 맞닿은 몸이 서늘하고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는 손길이 조심스러워서 기분이 좋았다.



"형 이거 꿈이에요?"

"몰라."

"저 데뷔 못하면 어떡해요?"

"무슨... 진짜 무섭고 걱정되면 이런 말도 못해. 이런 말을 할 정신이 있으면 너도 아는 거야."

"성찬이형."

"응."



그렇게 긴긴 시간 동안 말해보지 못했는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는 은은하게 향기가 나는 품에 기대보고 싶었던 걸까. 그도 내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걸까. 



"저는... 저는 그게 좋았어요. 형이 저한테는 늘 엄청 큰 사람이었는데."

"나 줄어들었어? 나 건강검진 해보니까 키 컸던데."

"지금도 커요... 더 커진거같애 더..."

"너 엄청 늘었더라."

"...좋았어요. 좋아요. 형하고 다시 같이 연습하는 거. 그리고 우리 이번에 안무 연습 할 때에는."

"아하. 늘 반란을 꿈꿔오셨다?"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요 그러니까..."

"알아. 잘 알지."

"...힘든 기간 있었으면. 지났으니까. 앞으로는. 데뷔하고 나면 팀이니까. 서로 의지하고... 그러고 싶다고. 계속..."

"으응."

"근데 이렇게 아파서 아무것도 못 하니까 내가 너무 한심해서..."

"왜 한심해? 뭘 아무것도 못 해? 무대 섰다며?"

"해야 하는 건데 못했으니까... 그리고 쪼끔 무서워요. 중요한 건데. 잘해야 하는데..."



원빈의 말에 성찬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역시 꿈인가? 하고 싶었던 말들 숨겨놨던 말들이 속에서 흘러나오고 말았는데. 성찬이 나긋나긋 대답하는 바람에 더 몽롱해져서. 그대로 깜빡 잠들었던 것 같다. 너 좀 더 자. 하는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





꿈 속에서 성찬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아니 꿈이 아니었네. 꿈. 꿈이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꿈이 더 나았다. 성찬의 다리를 베고 누워있었으니까. 이. 이게뭐꼬. 이 형이 왜 여기에 있지. 차렷자세로 곱게 앉아서 끄덕끄덕 졸던 성찬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눈을 깜빡였다. 눈이 마주쳤다. 둥글고 큰 눈이 원빈을 빤히 바라본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을까? 그리고 성찬이 말했다. 박원빈.



"데뷔 축하해."





*





여전히 머리가 무겁... 뒤늦게 놀라 눈을 깜빡였다. 네? 원빈의 말에 성찬이 눈에 익숙한 작은 쇼핑백 하나를 달랑달랑 흔들어 보였다. 축하선물. 잠깐만 근데 형 숙소 여기 아니잖아요. 아니지. 너 아파서 연습실 못 나왔대서 온 거야. 형이요? 어. 멤버니까. 몸 좋아지면 가서 제대로 축하 받아.



형. 

응.

우리 둘이 팀이에요?

그렇지.

성찬이형.

응.

...왜 스포해요?



원빈의 말에 성찬이 어? 하더니 큭큭 웃었다. 아 박원빈. 고양이처럼 눈을 떴네. 너 아직 말 못 들었구나. 계속 같이 연습했잖아 근데. ...형 저거 그 빵이죠. 그거. 응. 서로 앞만 보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네살짜리들처럼 독백하듯 말하다가 성찬이 그랬다. 

나는 너 축하해주고 싶어서. 제일 먼저... 

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원빈은 알았다. 그러니까... 달다고. 달게 안 느껴지는 맛일 때도 늘 달았다고. 



저는… 같은 팀이라 좋아요. 형도 그래요?

야 원빈아. 내가 카드에 뭐라고 썼었는지 기억하지?

네?

내가 그랬잖아. 꼭 너랑 데뷔할래 하고. 너 네 명심할게요 이래 놓고 까먹은 거 아니지?

까... 아. 그쵸 그랬죠. 



...천일 가까이 대체 무슨 소리인가 했던 초성 퀴즈의 답을 알게 되었다. 까나리 대박 할렘 뭐 온갖 단어를 생각해봐도 말이 들어맞지 않아서 대체 이 초성 사이에 햄버거 이름 숨어있을 수 있나 고민했던 날들과... 빵집 홍보대사인가 생각했던 날들과... 어이없다 진짜. 



...근데 언제부터?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처음이면 저 입사한 날 그때부터요?

어. 보자마자 와 쟤랑은 꼭 같이 데뷔해야겠다. 그리고 너 노래 부르고 춤 배울 때 그랬지... 절대 아무한테도 못 준다. 꼭 내 팀. 내꺼 해야지. 이랬다고. 



열은 조금 내렸지만 노곤한 몸으로 나긋나긋한 성찬의 말을 듣는다. 웃기다. 뭐야 남사스럽다 쪼끔… 무슨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어. 잠깐만 맞나? 에이. 아 잠깐만. 아. 아 설마. 아니 잠깐만.



고개를 돌려 성찬의 눈을 마주쳤다. 처음 봤던 날처럼 저를 빤히 바라보는 눈이 둥글고 크다. 그리고...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짙었다. 축하해줘서 고마워, 하던 스무살 눈보다 더. 순간 성찬을 처음 본 날처럼 가슴이 쿵쿵 뛰는 바람에 또... 무서워졌다. 그러니까. 성찬은 더 이상 무서운 형이 아닌데도, 어려운 형이 아닌데도 그랬다. 아. 그러니까. 처음부터... 아주 처음부터.

순간 원빈의 머리속에 다소 불운한 조언을 구하는 제 모습이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제가 모종의 이유로 직업은 밝힐 수 없지만. 오래 알던 사이에서 직장동료가 된 사람이 있거든요. 방금 알았는데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남자가 저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제 몸을. 그러니까 저의 능력을... 아니 근데.



박원빈 왜 또 이상한 표정 하고 있지.

저 쪼금. 쪼금 무서워서요. 아니 형이 무섭다는 건 아니고.

왜 무서워? 귀신 봤니?

...아니. 형. 쫌 이상하게 들려요.

이상해? 왜 이상해? 그럼 이상하게 들어.

무슨 뜻이에요?

일단 같이 데뷔하자는 뜻.



다소 불운한 조언을 구하는 글을 다섯번쯤 쓰게 되는 저 자신을 상상할 뻔했는데... 말은 차분하게 하는 성찬의 흰 얼굴이 더 이상 흰색이 아니었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도 느껴질 만큼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흔들리지 않는 차렷자세인 줄 알았는데 어쩔 줄 모르고 꼼지락거리는 손이 보였다. 그래서... 원빈도 알았다. 마법에 빠진 공주 튜토리얼 멘토 돌아온 동료 파이널 보스. 뭐든 좋았다. 성찬이 던지던 수많은 질문들을 생각했다. 이거 좋아해? 저거 좋아해? 이건 별루. 모르겠어요. 나쁘지 않아요. 그런데 이제... 그가 아직 묻지 않은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었다. 좋아요. 돌고 돌아와서 형이랑 같이 데뷔할 수 있어서 좋아요. 같은 팀이라 좋아요. 이제 계속 같이 있어요. 형이... 

시야에 자꾸 성찬의 흰 손이 들어온다. 그래서 이번엔 원빈이 물었다.



형. 손 잡아도 돼요?

엉.



그렇게 이제 일단은 십년 이십년 함께 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쪼금 미묘한. 초여름부터 여름이 끝나가는 그 기간 동안 성찬은 계속 제 옆에서 달리고 있었다. 첫 퍼포 영상이 공개되던 순간 성찬은 원빈을 돌아보더니 물었다. 울 것 같아? 엘에이 작은 식당에서 소리도 못 내고 행복하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사람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꼭 너랑 데뷔하기 미션 클리어.













보너스 스테이지 1+

야 원빈아. 

네? 

저기 인형 두 마리 서로 뽀뽀하고 있는데. 

엑. 

아 저거 혹시 그건가 예전에 뽑았던 거. 그거네! 와 저게 아직도 있어?

...형 기억력 왤케 좋아요?



그리고 나중에 숙소 이사하는 날 구경 갔다가 알았다. 아직도 있어? 하던 사람 머리맡에 고양이 인형 놓여있는 거.





보너스 스테이지 2++

남자 둘도 뽀뽀하고 나서 성찬이 그랬다. 

근데 박원빈. 

넹. 

너 혹시 그거 내가 준 카드 무슨 뜻인 줄 몰랐던 거 아냐?

아닌데. 왜. 왜 그런 생각을 하지.

혹시 이제까지 나 보면서 한살 많은 선배의 공갈. 협박. 그런 거로 생각했던 걸까...

아아아!





보너스 스테이지 3+++

나. 나는 데뷔해도 애교 절대 안 한다 절대 못하겠다는 원빈에게 저 애교 좋아해요 하면서 데뷔했다던 남자가 그랬다. 

나중에 막 동물. 그. 전문어로 모에화. 이런 거 뭐할지 생각해봐. 팬분들이 정해주시겠지만.

저요. 저 그럼 오리...

오리?

네. 원래 별명이라.

왜? 네가 왜 오리야?

입. 입쭐...

밥을 먹으면서 대답하다가 발음이 쪼금 샜다. 바보같겠다... 어쩐지 성찬이 대답이 없어서 고개를 들어보니 저를 빤히 바라보던 성찬이 또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귀가 새빨갰다.

너... 너 빨리 이거 하나 더 먹어. 



보너스 스테이지 4++++

성찬의 스무살부턴 제대로 챙겨본 적 없었던 성찬의 생일을 처음으로 챙기게 됐다. 팀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최대한 다듬어서 꾹꾹 눌러썼다. 나중에 성찬이 보고 어. 하트. 하트 뭐야? 하고 묻는 바람에 조금 진땀을 빼게 되긴 했지만. 반년 뒤 제 생일에 돌려받은 롤링 페이퍼에 하나하나 대답하듯 쓰여 있는 말이 꼭 열아홉 연습생 형 같아서 조금 웃었다. 

아프면 어떻게 되는데? 물으니 원빈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성찬이 그랬다. 병원 가봤나? 일단은... 병원에 가야지.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물어봤다.

그렇긴 해. 근데 막 무대에 못 선다고 하면요? 노래는 할 수 있는데.

그거느은... 의사 선생님의 판단에 따라야겠지...

내가 막 죽어도 무대에서 죽겠다 이러면?

무대 위에서 둘이 같이 죽자 이런 게 아니면 그건 좀 곤란한데. 나아. 더 수절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렇군. 납득하고 흡족해하다가 형. 근데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다고 할 것 같아. 했더니 성찬이 괜찮아. 원래 이상했어. 너랑 내 사이는. 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무대를 가로질러 제게 제일 먼저 달려오는 성찬을 보고 조금 울고 싶어졌던 건 쪼금 비밀.



보너스 스테이지 5+++++

사랑한다는 말이 세상에서 없어지면?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럼... 보고 싶어. 할래요. 성찬도 비슷한 질문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의 대답을 찾아봤다가 원빈은 그냥 한참을 웃었다. 



보너스 스테이지 6

나중에 성찬이 무려. 자컨. 촬영을. 할 때 대뜸 제게 거기 중간 공주님은요? 하고 부른 적이 있었다. 남들이 놀랐(놀렸)는데 원빈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까지 온 사람이 저만은 아니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제 우주를 건너 함께하게 되었다는 것 아닌가. 언젠가 불렀던 노랫말들처럼. 그리고 이제는 둘이 손을 잡고 날아오르게 될 거니까. 앞으로 부르게 될 노래 가사들처럼. 오래오래. 아프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