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 지원 자격 요건
by. 찬물
어렸을 때부터 스트레스에 취약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거나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오면 와앙 울어버리기가 일쑤였다. 울다가 지긋지긋해 미치겠다는 표정의 엄마를 보면 또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럴 땐 우는 대신 붙박이장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먼지 냄새, 나프탈렌 냄새를 맡으면서 몸을 웅크리고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한참 죽은 듯이 숨어있었다. 자라면서 눈물을 흘리는 일은 줄었지만 그렇다고 스트레스를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라 여전히 원빈은 스트레스에 취약했고 쉽게 흔들렸다. 어쩔 땐 술을 마시지 않고도 술에 취한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지기도 했다. 가끔은 도망가고 싶고 자주 숨고 싶었는데 인구 밀도가 높은 서울에선 그러기가 어려웠다.
원빈은 쇼핑하듯 핸드폰 액정에 대고 엄지를 굴렸다. 어플에 프로필을 올려놓으면 채팅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지곤 했다. 다 고만고만했지만 작게 붙어있는 프로필을 나름 유심히 보고 골랐다. 심사숙고 끝에 고른 몇 명에게 답장을 남기고 거기서 답장이 빠른 순으로 다시 추린 다음 거리가 가깝고 지금 당장 만날 수 있는 사람으로 또 한 번 추렸다. 그랬더니 겨우 두 명이 남아서 그 둘과 빠르게 채팅을 주고받다가 프로필 사진이 더 마음에 드는 쪽과 약속을 잡았다. 외모를 따져가며 상대를 고르는 타입은 아니지만 걸려있는 사진이 너무 근사했다. 거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굳이 프사 본인이냐고 한 번 더 묻기까지 했는데 상대는 당당하게 본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긴가민가했지만 어차피 만나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날씨가 순식간에 쌀쌀해져서 래더 자켓을 입었는데도 가만히 서있자니 좀 추웠다.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주머니에 양손을 쿡 찔러넣은 채로 발을 좀 동동 굴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바로 모텔에서 보자고 하는 거였다고 약간 후회 중이었는데 그때 좀 늦을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추워 죽겠는데 늦기는 왜 늦어. 짜증이 잔뜩 났다. 프본 아니면 죽여야지. 마음속으로 실행에 옮기지도 못할 생각을 했다. 진정하려고 프로필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 어플 특성상 얼굴이 대놓고 보이는 사진은 아니었지만 슬쩍 보이는 하관이 멋있었다. 전신은 그냥 실루엣만으로도 느낌 있었다. 막 꾸미지도 않아서 일반 같고. 실물이 궁금했다. 원빈은 가만히 서서 상대의 프로필을 꼼꼼히 봤다. 괜히 핸드폰 화면 밝기를 최대로 해보고 이리저리 확대해보고. 사진빨이긴 하겠지. 근데 실물이 사진의 절반만 따라가도 대박이었다.
“어.”
그러다 고개를 든 바로 그 순간에 프로필 속 남자를 찾았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든 순간 프로필 속 남자가 눈앞에 바로 보인 것이다. 남자는 누굴 찾는 듯 핸드폰을 쥐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또렷하게 나오지 않은 사진이었는데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사진과 실물에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얼굴은 가린 게 아까울 정도로 잘생겨서 입이 벌어질 만큼 놀랐다. 어플로 사람을 수십은 만나본 것 같은데 사진보다 실물이 나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늦는다더니 하나도 늦지 않았다. 여기서 남자의 속셈이 빤히 보였다. 약속에 늦는다고 구라치고 몰래 상대방 얼굴 살피는 짓을 하는가 보았다. 그게 좀 짜친다고 생각했지만 본인이 저정도니까 그럴 수도 있는 것 같았다.
원빈은 세네 걸음 정도 성큼성큼 걸어 남자에게 다가갔다. 어깨를 툭툭 치고 쓰고 있던 마스크를 턱밑까지 내려 얼굴을 보였다. 원빈도 어디 가서 얼굴로 부끄러워 본 적은 없었다.
“저요. 알죠?”
남자는 대답 대신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원빈을 위아래로 훑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표정이 없어서 냉기가 돌았다. 스캔을 끝냈는지 남자가 뒷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으며 짧게 대답했다.
“…예.”
“가요, 그럼.”
처음 만났어도 살갑게 인사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번 남자는 그런 타입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원빈도 그냥 일단은 앞장서서 걸었다. 가까운 곳에 원빈이 자주 가는 모텔이 있었고 거기가 오늘의 목적지였으니까.
근데 솔직히, 좀 들떴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진짜 처음이어서.
채팅할 땐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보니 눈빛이나 말투 같은 것도, 음, 많은 대화를 해본 건 아니지만 그리고 어차피 그냥 하룻밤만 자고 치울 상대긴 했지만 그냥 좀 멋있었다. 프사만 보고 예측했던 것보다 키도 컸다. 어깨도 넓었다. 몸도 좋아 보였다. 피부도 진짜 하얗고 깨끗해. 어, 그니까, 멋있어. 멋있으면 좋지. 잘생기면 정말 좋다. 그냥 하룻밤 상대라도 이런 사람은 너무 드무니까. 그래서 일부러 내렸던 마스크를 다시 올렸다. 볼이 빨갛게 익었을까 봐. 기대하고 있는 걸 들킬 것 같았다.
모텔은 꽤 신식이라 사방이 번쩍번쩍 대리석이었다. 짜피 모텔이면서 간판은 호텔이라고 달아놓은 곳이긴 했다. 카운터에 서서 남자를 흘긋 봤더니,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숙박비를 결제하고 카드키를 받았는데 무료로 룸을 업그레이드 해주겠다고 해서 조금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까지 앞장서서 걷다가 다시 남자를 흘긋 올려다봤다. 타이밍이 딱 맞게 눈이 마주쳐서 조금 쑥스러웠다. 분위기를 좀 풀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5층 버튼을 눌러놓고 남자를 흘긋흘긋 올려다보면서 작게 말을 걸었다.
“솔직히 사진 도용, 도용일 줄 알았어요.”
“…도용하는 경우가 많나?”
“네에. 많죠. 진짜 딱 봐도 다른데 자기라고 막, 막, 우길, 우길 때도 있고.”
“음……. 어플에? 프로필 사진?”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고 듬성듬성 끊겼다. 딱히 건질만 한 내용도 없었다. 상대가 원빈보다 한 살 많다기에 멋대로 ‘형?’하고 호칭을 정했더니 대답도 없이 사람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한참 뒤에 “내가 형이니까 반말 쓸게.”라고 말해서 원빈은 대답 대신 고개만 그냥 끄덕거렸다. 잘생겼는데, 잘생겨서인가? 약간 민망했다. 카드키를 받은 방은 복도 맨 끝에 있어서 거기까지 가는 동안은 또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객실 안에 들어와서 누가 먼저 씻을까 물어야 하는 타이밍에 남자는 약간 엉뚱한 걸 질문했다.
“내 이름은 정성찬인데… 너는 이름이 뭐야?”
누가 어플로 만나서 원나잇 하는 사이에 처음부터 냅다 이름을 물어봐. 보통은 “야.”, “너” 하기 일쑤였고 각자 말한 나이에 맞춰 호칭을 정했을 뿐이다. 통성명하는 때도 있지만 그건 몇 번 더 만나서 관계가 약간 다르게 발전했을 경우의 이야기이고. 그래서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어차피 원빈은 남자의 이름도, 나이도 믿지 않았다.
“박재형이요.”
“아. 박재형…….”
어쨌든 원빈은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먼저 씻겠다고 얘기하고 자켓을 얼른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데면데면하게 군 것치고 남자의 시선이 진득했다. 그래서 샤워하는 도중에도 자꾸만 맘이 들떴던 것 같다. 오늘은 정말이지 상대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빈이 따듯한 물을 맞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불렀다. 흠흠흠.
그러나 들뜬 마음은 오래가지 않아 푹 꺼지고야 만다. 원빈이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가운 차림으로 욕실에서 나왔을 때. 남자는―성찬은― 침대 끄트머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발을 까딱대고 있었다. 그리고 씻고 나온 원빈을 또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눈빛이나 표정을 억지로라도 다정하게 혹은 살갑게 꾸며내질 않아서 원빈은 멋대로 성찬과의 섹스를 빠르게 상상했다. 당연히 거친 편이겠지. 힘도 세 보이는데 억지로 눌려가면서 하면 개꼴릴 것 같다. 원빈은 상상을 잠재우려 침 한 번 꼴깍 삼키고 말했다.
“형도 씻고, 씻고 오세요….”
하지만 남자는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꾹 다물고 가운 차림의 원빈을 자꾸만 훑을 뿐이었다. 원빈은 거기에 가만히 서서 멍청한 생각을 했다. 안 씻고 하고 싶어서 그러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네?”
“일단 나는 어플에서 만났다는 그 사람이 아니고.”
“…네?”
“사진 도용 당한 것 같으니까 내 사진 걸려있다는 어플 좀 보여줬으면 좋겠어.”
“네??”
성찬이 원빈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들었더니 곧바로 명령조가 따라붙었다.
“잠금 풀어. 내가 그냥 보려고 했는데 잠겨있더라.”
갑자기 훅 말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성찬과 원빈은 초면이었고 원빈이 성찬에게 자기 핸드폰을 보여줄 의무도 없었는데 성찬은 꼭 그게 당연하다는 듯, 자기가 시키면 원빈은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듯이 당당하게 굴었다. 고압적이라고 느껴졌다. 원빈은 지금 자신이 알몸에 가운 하나를 달랑 걸친 상태이며 이 공간은 사방이 막힌 모텔방이고 자신보다 상대의 키와 덩치가 월등히 크다는 것을 상기하면서도 절대 쫄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다행히 등 뒤에 문이 있었다.
핸드폰 잠금을 풀어 성찬에게 그대로 건네진 않았다. 대신 아까 그 채팅방을 다시 확인했다. 조금 늦는다는 연락 밑으로 자기는 이제 도착했는데 너는 어디냐는 채팅이 주르륵 이어져 있었다. 뜬금없는 연락 두절에 원빈이 일부러 사람을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했는지 마지막에는 욕설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성찬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금 손을 내밀었고 결국 원빈은 맥없이 핸드폰을 건넸다.
그리고 원빈은 그제야 기분이 나빠졌다. 성찬의 말대로라면 성찬과 자신은 어플로 대화조차 해보지 않은 생판 남인데 생판 남의 핸드폰을 가져가서 대화창을 훑어보는 건 월권이었다. 주지 않았어도 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 좀 억울했다. 게다가 따져보니 이상한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원빈이 찾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는 건 처음 말을 걸었을 때부터 알았을 텐데 도용범을 잡으려는 마음이었다면 여기에 따라올 게 아니라 박원빈이 상대를 만날 때까지 기다렸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정성찬은 자기가 채팅 상대방인 척을 해가며 박원빈을 따라왔다. 그러니까 이게 다 이상하다는 거야. 모텔까지 따라온 것도 순순히 결제한 것도 박원빈이 옷을 홀랑 벗고 샤워하고 나올 동안 가만히 앉아있었던 것도 전부 이상했다.
나를 왜 따라왔어. 나랑 섹스할 생각이 아니라면? 순순히 모텔까지 따라와서 결제까지 한 건 또 뭐였는데. 씻고 오겠다는 사람을 왜 말리지도 않고 옷 벗게 뒀냐고.
원빈은 원래 어렸을 때부터 스트레스에 약해서 스트레스만 받으면 자꾸 이상한 행동을 했는데 그게 딱 지금이었다. 머리가 지잉― 울린다. 눈앞이 깜깜해진 원빈이 살짝 비틀대면서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가끔 이렇게 훼까닥 돌아버릴 때가 있었다. 원빈이 성찬의 손에 들려있던 자신의 핸드폰을 다시 빼앗아오면서 입을 열었다.
“근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순순히 핸드폰을 뺏겨준 성찬이 유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원빈을 올려다봤다. 어디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저는 그냥 한 번 잘라고 온 거고… 그게 누구든 상관없는데.”
“……그래서?”
“형도 그럴 생각 있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에요?”
“…….”
스트레스로 빙글 돌아버린 원빈이 입꼬리만 쓰윽 올려가며 웃었다. 여전히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성찬에게 다가가 몸을 붙이며 속삭였다. 둘 사이의 거리는 거의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웠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한 번 하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남자랑 해본 적 있어요? 콘돔 없이 해본 적은요? 진짜 좋을걸요… 저 잘해서. 원빈은 이런 플러팅에 있어서만큼은 백전백승의 명장이다. 상대가 누구든, 게이와 헤테로를 막론했을뿐더러 애인의 유무조차 무의미하게 만들곤 했다. 단 한 번도 거절당한 역사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러나 성찬은 못 이기는 척 원빈의 몸을 만지거나 진짜 콘돔 없이 해도 되냐고 묻는 대신 헛웃음을 뱉었다. 진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는 듯이.
성찬은 생각한다. 야. 니가 나한테 오늘 너랑 잘 거냐고 물어봤어? 너 아냐며. 너 아냐고 물어봤잖아. 그리고 성찬은 원빈을 알았다. 그러니 그저 알아서 안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날씨가 유독 변덕스럽던 가을날이었다. 엊그제는 추웠다가 어제는 덥고 오늘은 비가 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덕분에 다들 옷차림새가 제각각이었다. 김재우가 데이트에 슬리퍼 신고 나갔다가 여친한테 차인 날. 학교 앞 가성비 술집에 성찬을 포함해 네다섯이 모였다. 성찬은 원체 술이 안 받는 체질이라 그딴 술자리엔 잘 나가지 않았지만 김병우한테 여친을 소개시켜줬단 죄로 끌려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해줄 말이라고는 어떤 머저리가 데이트하는데 쓰레빠를 끌고 가냐, 차일만 하다. 뿐이었지만.
남자 다섯이라 성찬을 제외한 모두가 흡연자였다. 처음에는 한 명, 두 명씩 엉덩이를 뗐다가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성찬을 제외한 모두가 한 번에 일어나 성찬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을 때. 성찬은 턱을 괸 채로 의미 없이 핸드폰을 만지다가 자신의 소주잔에 소주 한 방울을 따르고 있었다. 소주 한 방울에 맹물 가득. 술을 원체 못하는 성찬만의 비율이었다. 어쩔 땐 몇 번의 한 방울만으로도 술기운이 오르곤 했다. 어쩌면 그날도 소주 한 방울 들어간 맹물 몇 잔에 취했었던 걸지도 모른다. 맞은편에 털썩 앉는 처음 보는 남자애를 보고도 누구세요 한 마디가 쉽게 나가질 않았다.
“어어, 자작하면, 하면 아, 안 되는데.”
약간 술에 취한 것 같았다. 발음이 뭉개지고 볼이 발그레했다. 일행이라고 착각했나. 주위를 둘러봤는데 바로 옆 테이블도 다 같이 담배 빨러 갔는지 사방이 조용했다. 약간 취했으면 테이블을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작하면 그럼 안대요. 왜냐, 왜냐면 앞에 앉은 사람이 삼 년이 재수, 재수가 없대요.”
그냥 남자애였는데 그냥 남자애라고만 하기에는 인상이 특별했다. 목덜미에 닿는 장발이나 조그만 얼굴,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 웃을 때 휘어지는 눈웃음 같은 게. 성찬은 소주병을 든 상태 그대로 멈춰서 맞은 편의 남자애를 빤히 쳐다봤다. 자기가 그대로 멈춘 줄도 모르고 빤히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로. 앞에 앉은 걔가 취한 게 분명한 얼굴로 으흐흐 소리를 내며 눈동자가 안 보일 정도로 방긋 웃는 얼굴을 보여준 뒤에야 정신이 차려졌고, 이내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반응하지 않으면 가버릴 것 같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냥 미신이잖아. 미신 믿어?”
“에이이, 미신, 미신인 거 알죠오. 미신을 믿는 거가 아니고….”
웃는 얼굴로 말끝을 늘이면서 손을 내젓는 모습에 성찬은 또 한 번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근데 그거 앞에 앉은 사람 외롭, 외롭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생긴 거 아닌가…….”
자기 앞에 있는 사람만큼은 외롭게 방치하지 말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거 아니냐면서 성찬의 앞에 앉아 자꾸 웃었다.
“…그럼 너는 네 앞에 사람을 외롭게 두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야?”
어떻게 그런 걸 물어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방이 조용하게 느껴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성찬은 온전히 눈앞의 남자애한테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온몸의 모든 세포가 쭈뼛 서서 침도 함부로 삼킬 수가 없었다.
“네! 저는, 저능 안 그러죠. 외롭게 두지, 외롭게 하지 않죠….”
그러나 눈앞의 남자애는 성찬의 속사정 따위야 알 바 아니라는 듯이 강아지처럼 웃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대답도 없는 성찬의 손에서 소주병을 빼앗아 잔이 넘치게 찰랑거릴 정도로 소주를 가득 따라주고선 또 웃었다. 이내 돌아온 일행이 “박원빈 너 남의 테이블에서 뭐하냐. 아이고 죄송함다.” 하며 챙겨서 남자의 이름이 박원빈이라는 걸 알았다.
성찬은 그 이후로 내내 원빈이 따라준 술잔을 매만지면서 옆 테이블에 앉은 원빈을 계속 흘끔댔다. 자기도 모르게 원빈이 가득 따라준 소주를 한 번에 들이키고, 박원빈이라는 이름을 계속 곱씹으면서 방금 이건 뭐였을까 생각했다.
이름 석 자를 알고 보니 그동안 왜 몰랐는지 모르겠을 만큼 유명한 애였다. 성찬은 어렵지 않게 캠퍼스 구석구석에서 원빈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여자애들 앞에서 이름을 슬쩍 꺼냈더니 별의별 정보가 쏟아졌다. 입학년도에는 에타만 가도 박원빈의 동선이 실시간으로 공유됐을 정도라고 했는데 비슷한 관심을 받아본 입장이라 부럽다기보단 불편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성찬은 대체로 활기차고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고 누구와 친해지는 게 어려운 적도 딱히 없었다. 그러나 원빈에게만큼은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건너건너 인맥을 동원하면 자리를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신 원빈에 대해 혼자서 많이 생각했다.
학교를 돌아다니다 보면 원빈을 꽤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신경을 안 써서 몰랐던 것뿐인지도 몰랐다. 원빈은 대체로 혼자 있었고 바쁘게 움직이거나 벤치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봤다. 가끔 그런 원빈에게 말을 거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원빈은 매번 능숙하지 못한 태도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모든 플러팅을―적어도 성찬이 목격한 순간엔― 거절했다.
성찬은 조각모음 하듯 원빈의 순간들을 모았다. 머릿속에 장면 장면을 저장하고 문득 한 번씩 마음대로 조립해보곤 했다. 가끔은 자기가 너무 마음대로 상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성찬은 바삐 돌아다니는 원빈을 보면서 성실한 성격인 것 같다고, 혼자 멍때리고 앉아 휴식하는 원빈을 보면서 낯을 가리고 내성적인 것 같다고, 아웃핏에 신경 쓰는지 매번 다른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는 기본적인 미감이 좋고 센스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혼자 추측하는 것만으로는 ‘진짜’ 원빈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성찬의 안에는 순간 캡쳐 되어 성찬의 개인적 시선으로 왜곡된 원빈만이 계속해서 쌓였다. 그리고 그런 원빈을 모으는 일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일부러 원빈이 자주 앉아있는 벤치가 있는 곳으로 빙 둘러 걷는 일이나, 식사하는 원빈을 곁눈질로라도 보기 위해 메뉴가 딱히 끌리지 않는 날에도 생활관까지 가서 학식을 먹는 일 같은 것들이. 가끔 내가 왜 이렇게 스토커처럼 행동하지? 싶기도 했지만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저요. 알죠?’
어릴 때부터 교류가 잦아 친했던 사촌 누나인 승아가 이직하면서 역삼으로 이사를 왔다. 성찬의 생활 반경과 그다지 가까운 동네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같은 서울이라 성찬은 사촌 누나의 이사 도우미로 차출되었다. 하루종일 정리를 도왔더니 이젠 또 나가서 당근 나눔을 받아오라길래 후줄근한 차림으로 역 앞까지 나온 참이었다. 그런데 기다리던 당근 거래자는 나타나질 않고, 기대한 적도 없던 박원빈이 덜컥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전혀 웃지 않는 얼굴로, 커다란 눈으로 자길 똑바로 올려다보면서, 자길 아냐고 물었다.
그래서 전에 없이 당황했다. 박원빈을 매번 몰래 훔쳐본 건 맞으니까. 박원빈이 자주 출몰하는 스팟을 몇 개 찍어놓고 습관처럼 들러 원빈을 찾기 일쑤였다. 그러니 박원빈도 어쩌면 성찬이 그동안 은근 흘긋거리면서 자길 관찰하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계속 신경은 쓰이지만 증거는 없던 차에, 생활 반경 밖에서까지 같은 얼굴을 마주쳐버려 확신이 들었을지도.
원빈의 뒤를 졸졸 쫓아가는 내내 성찬은 긴장으로 굳은 상태였다. 변명과 해명과 설명이 머릿속에 한 번에 엉겨 뒤죽박죽이었다. 혀로 볼 안쪽을 꾹꾹 누르면서 너무 긴장돼서 뻣뻣하게 걸었다. 처음에는 대화하기 적당한 카페로 들어가려는 줄 알았지만 원빈이 성찬을 데리고 간 곳은 모텔이었다. 거기에서부터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다른 의미로 굳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장소만으로도 대충 짐작 가는 앞뒤 상황이 있었고 원빈이 약간 쑥스러워하며 사진 도용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엔 짐작이 확신으로 변했다. 성찬에게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진 도용 같은 건 이미 숱하게 겪어봤기 때문이다. 틴더에 정성찬 사진을 하도 갖다 써서 이 근방에서 틴더 키면 정성찬이 24시간 대기하고 있다는 소문이 캠퍼스를 두 바퀴는 돌았었다. 도용한 새끼 중 한 명을 잡아 휴학시키는 엔딩으로 대충 소문을 잠재우긴 했지만 누군가는 아직도 그때 그 소문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성찬은 도용 사건으로 세상에 그런 방식으로 원나잇을 즐기는 사람들이 진짜로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까지 해서 섹스를 해야 돼? 징그러워. 당연히 혐오감을 느꼈다. 상종하고 싶지도 않은 기분이었다. 저런 새끼랑은 더러워서 친구로도 안 둔다고 욕을 했었지. 스치기만 해도 성병 걸릴 것 같다고도 했었다.
…그리고 원빈은 이런 만남이 아주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 바로 이름부터 물은 건 성찬이 본능적으로 원빈을 시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수도 있고. 그러나 원빈은 자신의 이름을 박재형이라고 소개했다. 이때부터는 성찬의 기분이 걷잡을 수 없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실 성찬도 알고는 있었다. 방에 들어오기 전에, 방에 들어왔다면 적어도 원빈이 옷을 벗고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엔 뭔가 기묘한 우연이 겹쳐 원빈이 오해하고 있다는 걸 솔직하게 털어놨어야 했었다는 것. 그런데 왜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을까. 원빈이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성찬은 내내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러나 아무리 질문하고 질문해도 혼자만의 고민으로는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성찬은 짝사랑에 서툴렀다. 누군가를 먼저 발견해서 길게 관찰하며 애정을 키우는 행위 자체를 이전에는 해본 일이 없었다. 성찬은 언제나 발견하기보다는 발견되는 존재였고 사랑을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 익숙했다. 상대가 누군지 궁금해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성찬에게 알리고 싶어 안달인 사람들만 만나왔다. 그러나 박원빈은 나서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성찬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보를 쉽게 주지도 않았다. 그게 성찬을 몹시도 답답하게 만들었다.
원빈의 핸드폰을 거의 빼앗다시피 해서 채팅 목록을 훑은 성찬의 안광이 실시간으로 푹푹 꺼졌다. 지금 쥐고 있는 게,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박원빈인데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정성찬이 혼자 마음에 품고 홀로 상상해 온 박원빈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저는 그냥 한 번 잘라고 온 거고, 그게 누구든 상관없는데. 형도 그럴 생각 있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에요?
말문이 막혀서 헛웃음이 터졌다. 어디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그리고 성찬은 그제야 왜 이렇게 자신이 혼란스러운지,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고 좆 같은지 깨닫는다. 지금 정성찬을 지배한 이 감정은 실망이다. 오랫동안 혼자 지켜보면서 좋아했던 박원빈이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다. 맥없이 헛웃음을 뱉던 성찬이 마른세수를 했다. 급격히 피곤해진 사람처럼 왼쪽 눈에 짙은 쌍꺼풀이 생겼다가 툭 풀렸다.
박원빈에게 실망했다. 실망해서 화가 난다.
야. 내가 너랑 왜 자. 네가 이렇게 헤픈데 너한테 무슨 병이 있을 줄 알고 너랑 자.
그리고 성찬은 이딴 말을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성질도 있었고 성깔도 있었다. 곱상하게 생긴 얼굴 덕분에 적당히 포장됐지만 하고 싶은 말을 삭이며 사는 사람은 아니다. 성질부릴 거 다 부리면서 살아도 괜찮은 인생이었다. 마구잡이로 쏟아내고 싶은 날카로운 말이 목울대를 쿡 찌른다. 하지만 결국 성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혀끝까지 올라왔던 문장을 그대로 꿀꺽 삼켰다. 삼킨 말이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워서 목 안쪽이 죄다 긁혔다. 아팠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성찬은 자기가 말하고 싶은 그대로 원빈에게 뱉을 수 없었다. 원빈에게 실망했다고 해서 마음까지 끝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찬은 원빈에게는 최대치로 날카로워질 수 없고, 일부러 상처 주기 위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박원빈한테 존나 약하구나.
그걸 인정하고 나니 자기 마음이 보였다. 이 지경이 됐는데도 박원빈을 향한 마음에는 아무런 흠집도 없었다. 오히려 더더욱 투명하고 깨끗하게 반짝이기만 했다.
원빈은 원빈대로 맥이 풀렸다. 자기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성찬은 딱히 꼴려하지도 않고 호기심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자기한테 수치심을 주고 싶어 한다거나 폭력적으로 섹스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면 어느 정도 받아줄 수도 있었는데 그냥 한 번 하자는 자기 말에 대답하지도 않는 걸 보면 애초에 섹스 자체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반응이 이러니까 방금까지 훼까닥 돌았던 정신도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았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집에나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정성찬만 나가라고 하고 다른 사람을 이 방으로 부르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냥 날이 아닌 것 같았다. 피곤이 몰려왔다.
“왜 나랑 안 자요?”
자기랑 자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고 나니, 처음 성찬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설렘이나 들뜸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오기로 들끓었던 성욕도 싹 가라앉았다. 원빈은 자기가 언제 헤픈 말을 뱉었냐는 듯이 무감하게 떨어져 가운을 대충 벗어 재꼈다. 어차피 아무것도 안 할 사람이고 이 방을 나가면 다신 만날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제가 남자라서요?”
아까 벗어서 잘 정리해놓은 팬티를 주워 입으며 대충 묻는다. 딱히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태도로 보면 대답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정성찬이 여자랑만 자든 말든 상관할 것도 없었고. 원빈은 그냥 옷만 잘 주워입고 나가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아니.”
정성찬이 대답을 했다. 그것도 꽤 분명한 목소리로. 다리에 바지를 꿰고 있던 원빈이 순간 멈칫하며 성찬을 돌아봤다. 성찬이 창백한 얼굴로 원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니가 함부로 모르는 사람들이랑 자니까. 심지어 콘돔도 안 쓰고.”
타격은 느리게 들어온다. 잠시 움직임을 멈췄던 원빈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옷을 주워입기 시작했지만 사실은 뱃속이 다 얼얼한 지경이었다. 박원빈에게 성질대로 굴 수 없다는 걸 인정한 성찬은 둥글게 돌려 표현했지만 둥글게의 기준이 성찬이었을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문장에 담긴 뜻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원빈은 성찬의 말을 바로 해석할 수 있었다. 걸레 새끼랑은 더러워서 안 잔다는 거네. 물론 원빈은 자신이 무척 헤프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잘 아는 것과 직접적인 비난을 듣는 것은 완전히 달라서 어쨌든 타격이 컸다. 무엇보다 정성찬은 떳떳해 보였다. 너 같이 사는 인간 앞에선 한 점 부끄럼 없다는 듯이 사람을 똑바로 쳐다본다. 박원빈만 할 말이 없어 시선을 피했다.
짜증 났다. 짜증난다고 해서 반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더 짜증이 났다. 외모에 홀려서 들떴던 스스로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걍 처음부터 확실하게 확인할걸. 그러나 후회는 아무것도 바꿔주지 못했다. 옷을 입는 원빈의 손이 더욱 바빠진다. 그냥 빨리 이 악몽 같은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머릿속엔 온통 집에 갈 생각뿐이었다. 얼른 집에 가서 다 잊고 자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정성찬이 박원빈을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야. 번호 찍어.”
굳이 인사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 원빈이 그냥 집에나 가려는데, 성찬이 그런 원빈을 불러세웠다.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선 원빈이 뻣뻣하게 뒤돌아 성찬을 본다. 성찬은 아까 그 창백한 무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밀고 있었다. 원빈은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제가 왜요?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순 없었다.
“박원빈. 번호 찍으라고.”
정성찬이 박원빈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원빈이 그대로 굳자, 성찬이 쐐기를 박았다.
“박재형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너 XX대 박원빈 맞잖아.”
번호를 찍어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부터 내내 벌벌 떨었지만, 그런 원빈을 놀리듯이 성찬에게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왜냐하면 정성찬도 나름대로 바빴기 때문이다. 다음 날엔 사촌 누나의 이사를 마저 도왔다. 어제 정리까지 다 끝낸 거 아니었냐고 반발했더니 이젠 채울 차례라며 성찬을 데리고 코스트코며 이케아를 돌아다녔다. 성찬은 당근 나눔 받으러 나갔다가 말도 없이 증발한 죄로 누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사할 때도 이렇게 개고생 안 했어, 난. 주말의 이케아와 코스트코에 완전히 지친 성찬의 말에 누나가 고생한다며 깔깔 웃었다. 그리고 저녁엔 쿠우쿠우에서 둘이 마주 보고 앉아 광어 지느러미 초밥을 산처럼 쌓아놓고 먹었다. 그리고는 뭐. 사는 얘기, 연예인 얘기, 남 얘기를 했다. 너무 바빠서 박원빈한테 연락할 틈 같은 건 없었다.
“있잖아.”
“있긴 뭐가 있어?”
“어플 같은 걸로 밥 먹듯이 원나잇하는 사람들 말이야. 왜 그러는 거지.”
하지만 연락할 틈이 없었을 뿐이지 생각할 틈은 있었던지라, 성찬은 내내 원빈을 생각했다.
“갑자기? 왜?”
“뭐… 그냥. 누나가 사람 심리를 잘 아니까.”
성찬의 사촌 누나인 승아는 심리학과를 나와서 지금은 스타트업 회사에 개발자로 취직한 상태다. 어릴 적 꿈은 이루지 못했어도 대학에서 배운 게 있긴 할 거 아냐. 성찬이 승아에게 물었고 승아는 황당하다는 듯이 구슬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면서 되물었다.
“남자? 아님 여자?”
“그게 중요해? 둘이 달라?”
“당연하지. 졸라 달라.”
“어…… 뭐가 다른데?”
“일단 그게 남자면, 개씹버러지 섹스 중독자니까 상종도 하지 마.”
“…….”
“방구석에서 폰만 붙들고 앉아서 여자랑 한 번 자보려고 개지랄을 한다? 야이씨, 헌포 갈 정도의 성의도 없지, 관계 지속에 대한 책임감도 없지. 쓰레기밖에 없어. 봐, 어플로 사람 만나는 거. 실제로 만나는 거니까 착각할 수도 있는데 실상 익명 만남이다? 익명으로 일회성 만남만 갖는 사람이 인간관계에 대체 무슨 책임감이 있겠니. 깊은 관계는 못 만들면서 외로움을 참을 줄도 몰라서 그러는 거야. 깊은 관계를 만드는 건 어렵고 무섭고 두려우니까 피하고, 외로움을 참는 건 힘들고 괴로우니까 모르는 사람을 계속 만나. 근데 있잖아. 깊은 관계를 만드는 게 두려우면 외로움을 견뎠어야 하고, 외로움을 견디는 게 어렵다면 사람들 사이에 섞이려고 노력했어야 해. 근데 아무것도 안 하고 성욕이나 풀겠다고 방구석에서 어플만 쳐다보고 있다? 상종할 가치도 없어. 그런 새끼는 친구로도 두는 거 아냐.”
맞는 말이다. 성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스푼으로 구슬 아이스크림을 휘저었다.
“…뭐… 그럼 여자는?”
한참 열 내며 말하던 승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성찬을 훑었다. 그리고는 뭔가 할 말은 많지만 다 말하기는 애매하다는 듯이 입을 꽁 다물었다가 흠, 하고 숨을 내쉬면서 아까와는 달리 아주 간결하게 정리했다.
“애정결핍 걸린 정신병자? 라고 할 수 있지.”
“엥.”
그렇게까지 말할 거 있나. 너무한 거 아니냔 표정으로 승아를 본다. 그러나 승아는 더는 얘기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단호한 태도였다.
“여자랑 남자랑 관계를 갖는 매커니즘이 다르잖아? 신체적인 차이가 있으니까 리스크도 완전히 다르고. 근데도 원나잇을 반복한다고? 그거 자해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한테 어떤 위해를 끼칠지 생각하지도 않고 폐쇄적인 공간에 둘이 들어가. 첨 보는 사람이랑 옷 다 벗고 섹스해. 쾌락 때문이라고 착각하는데, 쾌락 때문이 아니야. 순간 온기 때문에 그러는 거고 그게 다 애정결핍이라 그러는 거야.”
“…….”
“야. 그런 여자 만나는 거 아니다. 어? 너 만나고서부턴 안 그래 이런 소리도 믿지 말고.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야.”
성찬은 대답 대신 혀로 볼 안쪽을 꾹꾹 눌렀다. 구슬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서 색이 지저분하게 섞인다. 그걸 본 승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한 번 더 강조했다.
“그런 여자 만나지 마. 어?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누나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성찬이 픽 웃었다.
“어. 그런 여자 안 만나.”
……뭐, 박원빈은 남자니까. 그런 여자를 만나겠다는 게 아니긴 하다. 성찬이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방긋 웃었다.
“아, 그냥. 누가 저런 어플에 내 사진 도용했더라고. 그거 때문에 갑자기 궁금해진 거야.”
성찬의 아무렇지 않은 표정에 마음을 놓은 승아가 황당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뭐? 어떤 걸레 새끼가? 고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지 면상으로 당당하게 승부 볼 것이지!” 그 급발진이 웃겨서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웃고는 있었지만 사실 속이 복잡했다. 박원빈이 남자긴 한데 섹스할 땐 여자랑 비슷한 포지션인 것 같았다. 그럼 박원빈은 개씹버러지 섹스 중독자랑 애정결핍 정신병자 둘 중 어디에 해당되는 걸까. 좀 애매했다. 설마 양쪽에 발 하나씩 걸치고 있나. 여기까지 생각한 성찬이 승아 몰래 한숨을 쉬었다.
애정결핍 정신병자라는 누나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정성찬이 처음 보고 반한 박원빈은 분명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을 외롭게 두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런 애가 애정결핍이라면 그건 뭔가가 단단히 잘못된 일 같아서였다.
남은 외롭게 두지 않는다면서. 정작 네가 외로우면 어떡하냐.
원래 성찬은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인 사람이고 깊은 고뇌 같은 건 즐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원빈과 그런 식으로 만난 이후로 자꾸 생각이 많아졌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혼자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면서 짐작했던 박원빈과 실제 알게 된 박원빈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거기에서 오는 인지부조화에 두통이 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은 내내 원빈을 생각했다.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결국 이것도 내가 또 혼자 마음대로 박원빈을 어림짐작하고 있단 사실을 깨닫는다. 혼자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박원빈이 그냥 섹스 중독인지 애정결핍인지 정신병자인지 그런 것도 그냥 다. 그래서 성찬은 그냥 늘 하던 대로, 정성찬의 방식대로 냅다 부딪히기로 했다. 그러다 쓰러지거나 넘어져서 크게 다칠 수도 있었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긴 시간 홀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서 결국 정성찬은 박원빈의 티끌조차 몰랐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그런 건 싫었다.
불안해서 손톱을 죄다 물어뜯었다. 손가락 끝에 맺힌 핏방울을 휴지 조각에 꾹꾹 눌러 닦은 원빈이 이번에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꼭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 같았다.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에 지쳐 차라리 얼른 협박이라도 당하고 싶었다. 그러면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그런 원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찬에게선 월요일 정오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뭐해?
아 나 정성찬
그래서 성찬의 연락이 반갑게까지 느껴졌다. 원빈은 그제야 손톱 물어뜯는 걸 멈추고 심호흡했다. 올 게 왔다는 느낌에 두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살짝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적었다.
아무것도 안해요
그래? 그럼 오늘 볼래?
알겠다고 답장을 보내놓고 원빈은 남몰래 찔끔 울었다. 그냥 다 짜증 났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걸레 소리 들은 것도―걸레라곤 하지 않았다.― 짜증 나고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것도 짜증 나고 정성찬이 자길 아는 바람에 쩔쩔매게 된 것도 짜증 났다. 찔끔 샌 눈물을 옷소매로 꾹꾹 눌러 닦으면서 아 짜증나… 나 안 해… 중얼거린다. 그래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어, 일찍 왔네?”
두 발과 손을 가지런히 모은 원빈이 치켜뜬 눈으로 눈앞의 성찬을 올려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죄지은 건 없는 것 같은데 약점 잡혔단 이유만으로 미친 듯이 쫄렸다.
“…네.”
“가자, 그럼.”
어딜 가는지 얘기해주지도 않고 성찬이 무작정 앞장섰다. 그 뒤를 쫓는 원빈의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서 자꾸만 걸음이 느려졌다. 성찬은 자기 뒤를 쫓아오는 원빈을 몇 번 뒤돌아보며 살피다가 아예 같이 속도를 늦춰 걸음걸이를 맞췄다. 원빈의 시선이 아래로 푹 꺼진다. 솔직히 왜 만나자고 했는지도 모르겠고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대놓고 물을 수 없는 처지라 답답했다. 원빈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다는 듯 성찬은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이게 뭔데, 여기, 여기 뭔, 뭔데요?”
그리고 박원빈은 비뇨기과에 도착했다.
당황한 원빈이 병원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면서 들어가기 싫다는 듯이 몸을 뒤로 뺐는데, 성찬이 한쪽 팔을 붙잡고 힘을 주는 바람에 도망갈 수도 없었다. 결국 원빈은 성찬에게 질질 끌려 병원 카운터에 서게 된다. 성찬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러나 원빈을 잡은 손에는 힘을 꽉 쥔 채로 원빈에게 진료접수증을 내밀었다.
“이거 써.”
힘이 워낙 세서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원빈이 황당하고 당황스럽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진료접수증에 이름을 적고 있으니, 카운터에 앉아있던 간호사가 어디가 아파서 오셨냐고 물었다. 대답은 할 말이 없는 원빈을 대신해 성찬이 했다.
“STD 검사받으러 왔어요. 12종이요.”
원빈은 STD 검사가 뭔지도 몰랐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접수를 마친 원빈이 성찬에게 STD가 뭐냐고 작게 물었다. 그러자 성찬이 그것도 모르다니 참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짧게 대답했다.
“성병 검사.”
“네? 네?? 네???”
“너 모르는 사람들이랑 막 자고 다니잖아. 콘돔도 안 끼고.”
그게 형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큰 목소리로 따지고 싶었지만 병원이라 그럴 수 없었다.
“검사 한 번 받아. 받아서 나쁠 것도 없잖아. 어차피 금방 끝나.”
정성찬이 번호를 왜 받아 갔을까. 왜 만나자고 했을까. 원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게 아니다. 하지만 원빈의 상상력은 빈약해서 비밀 유지를 대가로 돈을 요구하거나, 사진 도용범 잡는 걸 도와달라거나… 이런 평범한 상황만 생각났다. 정성찬이 자길 비뇨기과까지 끌고 와 성병 검사를 시킬 줄은 몰랐다는 뜻이다.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냐만.
박원빈님―. 이름이 불리자 원빈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망한 표정으로 성찬을 바라봤다. 성찬은 뭘 그렇게 보냔 듯 턱짓으로 진료실 문을 가리켰다. 얼굴에 이렇게 적혀있는 것만 같았다. 뭘 봐? 나보고 어쩌라고? 얼른 갔다 와.
검사는 길지 않았다. 일반적인 검사와 딱히 다른 것도 없고 민망할 것도 없었다. 다만 결제할 때 조금 손이 떨렸을 뿐이다….
“어, 얼마라고요?”
“14만 8천원이요. 보험 적용이 안 되셔서 좀 비싸요.”
“아…… 네…….”
이미 뽑은 피를 다시 집어넣을 수도 없는 일이니 어쩔 수 없이 체크카드를 내밀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큰 지출이 당황스럽긴 했다. 아 거의 십오만 원인데 미쳤네…. 검사 결과가 나오면 문자로 안내해 드리니 그때 다시 내원하면 된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원빈의 뒤로 성찬이 슥 다가와 섰다. 다 끝났으면 가자길래 얼떨결에 네네 대답하고 성찬을 따라 나왔다.
“밥 먹자.”
“네?”
밥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병원에서 다 털려서 밥 사 먹을 돈이 없었다. 그래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사줄게. 너 성병 검사하느라 돈 없잖아.”
“아…(씨발)… 네…….”
돈 없는 게 맞아서 그냥 따라가기로 한다. 성찬은 이미 생각해둔 곳이 있다는 듯 휘적휘적 걸었다. 키가 커서 그런지 걸음이 좀 빠른 것 같았다. 움직임이 빠르다기보단 걸음 폭이 컸다. 그 뒤를 원빈이 종종 뒤쫓는다. 성찬은 설렁탕집에 들어가면서 원빈에게 설렁탕 괜찮냐고 물었다. 이미 식당에 들어와서 직원들한테 인사까지 받았는데 안 괜찮으면 어떡하라고? 그치만 괜찮긴 했다…. 애매하게 식사 때를 피한 시간이라 한산한 식당에 젊은 남자 둘이 앉는다. 설렁탕 두 개를 시켜놓고 성찬이 원빈의 앞에 물잔과 수저를 놔줬다.
사실 성찬은 속으로 원빈을 좀 귀여워하는 중이다. 처음 병원에 끌고 갔을 때는 처음 보는 표정을 봤다. 눈이 크게 뜨고 당황하는 표정이 귀여웠다. 무서운 줄도 모르고 어플로 모르는 사람 만나서 자고 다닌 걸 알았을 땐 그래, 한심해 보였고 실망도 했지만 그래도 귀여웠다. 이건 도무지 어쩔 수가 없었다. 검사 비용을 듣고 놀라 파르르 떠는 뒷모습을 보면서는 몰래 숨죽여 웃었다. 내가 데려왔으니 검사 비용 정도는 내줄까 하다가 스스로 결제하게 둔 이유는 병 무서운 줄 모르겠으면 돈 무서운 거라도 알라고 그런 거였다. 실제로 충격이 컸는지 아까부터 입술이 댓발 나와 있었다.
“전여친이 바람난 적이 있었어.”
“네?”
이야기를 막 시작하자마자 설렁탕이 나와서 잠시 말을 멈췄다. 설렁탕에 소금간까지 한 뒤 다시 이야기가 이어진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곤 있었는데… 바람 나서 다른 남자랑 잤더라고. 나한테도 별로 좋은 추억은 아닌데. 어쨌든 그때 충격이 너무 컸거든?”
희영은 성찬이 스무 살이 되자마자 처음으로 사귄 연상의 여자친구였다. 잘 사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성찬보다 네 살이나 많은 누나 입장에서는 막 성인이 된 성찬이 재미가 없었나 보다. 성찬과 사귀는 도중에 전남자친구와 술 먹고 잔 걸 보면. 심지어 꽤 주기적이었다는 것 같았다. 사실을 알게 된 직후 바로 헤어졌지만 어린 마음에 여친이 바람난 충격이 쉽게 가실리 없었다. 몇 날 며칠을 이별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근데 그 전남친이 여자들 사이에선 유명했더라고. 좀 그런 걸로.”
성찬은 그때 성병 검사를 처음 해봤다.
“걔 땜에 처음 검사해봤는데 솔직히 이게 좀 비싸잖아. 근데 이거 하고 집 가잖아? 돈 생각도 안 나.”
설렁탕 후후 불어먹던 원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찬을 바라봤다. 왜요? 라고 묻는 대신으로.
“집에 가면 그때부터 개무섭거든. 진짜 무슨 병이라도 옮았을까 봐. 나는 성병 종류가 그렇게 많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어.”
“…….”
“그렇게 덜덜 떨다 보니까 전여친도 금방 잊혀지더라. 나중에 잘못했다고 연락 왔는데 걍 씹었어.”
“…….”
이 얘기를 나한테 왜 해주지. 원빈이 통통한 아랫입술을 쭙쭙 빨며 성찬의 눈치를 본다. 성찬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밥을 먹으면서 계속 말했다.
“너도 이제 집 가면 무서워질걸. 진짜 병 걸렸어도 누구 탓을 하겠냐? 니가 모르는 사람이랑 그러고 다닌 건데.”
저주인가? 싶었으나…….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행동 하지 마.”
“…….”
“어차피 돈 생각하고 몸 생각하다 보면 또 그럴 엄두도 안 들겠지만.”
“…….”
“너무 위험하잖아.”
걱정이었던 것 같다. 기분이 이상해져서 그때부터 원빈은 뚝배기에 코를 박고 설렁탕만 와구와구 먹었다.
그리고 실제로 무서웠다. 사실 원빈은 겁이 엄청 많았던 것이다. 성병 증상 찾아보다가 잠도 못 자고 무서워서 멍청이처럼 찔찔 울었다. 정성찬 입에서 박원빈 세 글자가 처음 나왔을 때보다 더 무서웠다.
“아 존나 짜증나…….”
눈가에 축축하게 눈물을 묻힌 채로 이마를 퍽퍽 치다가 이불 속으로 숨었다. 그 멍청한 짓들 전부 자의로 선택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더 괴로웠다. 이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나를 망쳤다는 확신. 도무지 이 밤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괴로운 밤은 지나고 아침이 온다. 원빈은 퉁퉁 부은 얼굴로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지난밤엔 이미 모든 걸 다 망친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자고 일어나니 학교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당연히 수업에 집중할 순 없었다. 강의실에 멍하니 앉아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문득 햇빛을 받고 싶어져서 혼자 캠퍼스를 좀 걸었다. 햇빛 소독이라도 돼라, 하는 생각도 좀 하면서.
여전히 울적했기 때문에 입맛이 없었다. 어차피 돈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정성찬에게서 또 연락이 왔다. 뭐하냐고. 그냥 있다고 했더니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밥맛 없다고 했는데 밥맛 없는 거랑 밥 먹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되물어서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잠깐 답장을 안 했더니 전화가 왔다.
―“야. 배고파. 밥 먹자. 사줄게.”
“왜, 왜요?”
―“너 돈 없으니까?”
“…….”
혼자 쌓아 올린 정보와 추측은 무용하다는 걸 알았으니 진짜 박원빈을 알아갈 차례였다. 근 1년간 홀로 관찰하며 얻은 정보보다 요 며칠 실제로 부딪히고 대화하며 얻은 정보가 훨씬 많았다. 그래서 성찬은 기분이 좋았다. 실제 원빈을 알게 되고 실망했던 기억은 전부 잊은 사람처럼 웃음이 났다. 실망이 사라진 게 아니라 그 실망마저 진짜 박원빈의 일부라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너는 왜 밥을 생활관에서만 먹어?”
“그냥… 별 이유 없는데.”
원빈은 자기가 매번 생활관 학식만 먹는 걸 성찬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까지는 의문을 갖지 못하고 설명을 이어갔다.
“여기는 식판에 반찬 칸이 네 칸이잖아요.”
다른 데는 세 칸이던가? 애초에 식판을 쓰는 학식이 많지도 않아서 그래? 하고 대꾸하면서도 뭐가 좋은 포인트인지 잘 이해가 안 됐다.
“네… 반찬을 네 개 주니까 좋아요.”
“어어… 반찬 많은 게 좋아서? 그런 거 치고 너 많이 먹지도 않는데.”
“아이, 아니이, 많이 먹고 싶은 게 아니고 그냥 뭔가 반찬이 많으면 성의가 있어 보이니까… 한 그릇만 이렇게 나오는 건 뭔가 서운, 서운해요….”
와. 무슨 포인트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근데도 성찬은 그냥 그러냐면서 웃었다. 엉뚱한 면이 있네? 귀엽네. 귀엽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뭔가 대책 없이 굴고 있는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귀여워서 어쩔 수가 없었다.
밥을 다 먹고 커피까지 한 잔 사서 입에 물렸더니 원빈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성찬을 빤히 올려다봤다. 그때까지도 성찬의 머릿속엔 내일도 같이 점심을 먹자고 얘기할 생각뿐이었다.
“저한테 왜 잘해줘요? 잘해주잖아요….”
아직 뭘 제대로 해보지도 않았는데 원빈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원빈의 눈에는 확신이 있었다. 정성찬이 지금 자신에게 무척 잘해주고 있다는 확신이.
“내가 너한테 잘해줘?”
“네.”
“…….”
성찬은 습관적으로 볼 안쪽을 혀로 꾹꾹 눌렀다. 살짝 시선을 틀어 고민하기 시작한다. 박원빈에게 잘해주고 있는 건 맞았다. 왜냐면 관심이 있으니까. 뭐…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근데 이걸 다 말해도 되나. 보통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실상 성찬도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간 적이 없어서 그렇다. 친구든 연인이든 성찬에겐 노력이 필요치 않았다. 성찬은 늘 가장 먼저 관심을 받는 존재였다. 부르기 전에 불림 당했다. 찾기 전에 발견되었다. 자신을 원하는 여럿 중에 고르는 것만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 앞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게 어떤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설마 이제부터 이게 내 약점이 되나. 약점이니까 꼭꼭 숨겨야 하나?
고민할 시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빨리 결론을 내야 했다. 성찬이 짧은 고민 끝에 대답했다.
“어. 맞아. 너한테… 잘해주고 있지. 내가.”
솔직히 원빈은 성찬이 이렇게 바로 긍정할 줄은 몰랐다. 내가 뭘 잘해주고 있냐고 되물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속으로 성찬이 지금껏 자신에게 잘해준 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작게 놀란 원빈이 그것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그러니까 왜 잘해주는 거냐고 거듭 묻는다. 그러자 어쩐지 성찬은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벅벅 문지르며 대답했다.
“너 좋아하니까.”
“네?”
“애초에… 너를 좋아해서 너를 알고 있었던 거니까…?”
이 고백이 내 약점이 될 수도 있겠다. 인지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먼저 좋아한다고 말해보는 건 처음이다. 떨렸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귀 끝까지 열이 오르는 것도 같고. 자신의 마음이 박원빈의 눈에도 보인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쩐단 말인가? 고백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하면 부딪히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을. 좋아한다고 고백하지 않으면 오늘의 이 질문에는 뭐라고 대답할 것이며, 내일은 또 무슨 핑계로 박원빈을 불러낼 수 있냔 말이다.
“나 너 좋아해. 그러니까 내일도 부르면 나와.”
성찬은 원래가 단순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단순하게 굴기로 한다. 약점은 숨겨야 약점이지, 드러내는 순간 그건 약점이 아니다. 약점을 드러낸 김에 내일도 보자고 했다. 그냥 단순하게 내일도 보고 싶었다.
……나 고백받았나? 이게 뭐지.
고백을 받긴 받았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뭐가 이상한진 모르겠지만.
정말로 성찬은 그다음 날에도 원빈을 불러냈다. 같이 점심을 먹고 그 뒤엔 그대로 헤어지기 싫어서 탁구장에 데리고 갔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것 같던 원빈도 이내 탁구채를 잡고 나름대로 자세를 잡았는데 성찬에게 세 판을 내리 진 뒤부터는 전부 맘에 안 들었는지 입술이 팅팅 부었다. 불퉁한 표정으로 “나, 나 안 해…” 중얼댄다. 그게 성찬의 눈에는 꼭 칭얼거리는 것처럼 보여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성찬이 웃으니까 더 풀이 죽어서 진짜 가려고 하길래 핸디캡을 주겠다고 했더니 다시 약간 의욕을 보였는데 그러다가도 결국 져서 심통 난 표정으로 탁구채를 정리했다.
“나, 나 이거, 절대, 절대 아, 안 해.”
그래서 다음 날에는 볼링장에 데리고 갔는데 종목만 달랐을 뿐 상황은 똑같았다. 자기가 좀 잘 치는 것 같을 땐 반짝 재밌어하다가 점수 차가 벌어지면 눈빛이 흐리멍덩 해지면서 안 하고 집에 가겠다며 칭얼댄다. 성찬은 그런 원빈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었다. 끝까지 져주지 않고 이겨버렸더니 작게 씩씩댄다. 그래서 내일은 져주겠다고 말했는데 그것도 맘에 안 들었는지 원빈은 입술을 댓발 내밀고 절대 안 올 거라고 대답했다.
급기야 다음 날 점심 먹는 도중에 오늘은 탁구도, 볼링도 안 칠 것이고 어차피 점심 먹고 바로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선언해서 성찬은 머리를 좀 굴리다가 원빈이 수업 끝나는 시간에 맞춰 다시 원빈을 불러내야 했다. 공은 치기도 싫고 던지기도 싫다니까 보드게임 카페로 데려갔다. 그리고 난도가 가장 낮은 게임을 몇 개 골랐다. 그거 이기고 좋아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원빈을 보는 게, 이상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었다. 정성찬도 승부욕으로는 어디 가서 뒤지지 않을 정도였는데도.
정성찬은 이걸 데이트라고 정의했고 그건 원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원빈은 성찬이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으면서도 왜 사귀자고는 얘기하지 않았는지 자꾸만 의문이 들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일주일 정도 걸린다더니 나흘 만에 연락이 왔다. 내원하라는 문자를 몇 번 반복해서 읽다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저 멀리에서부터 팔을 휘저으며 다가오고 있는 정성찬이 보였다. 같이 팔을 흔들어주긴 했지만 다시 기분이 울적해지기 시작한다. 검사 결과를 확인하러 가야 할 것 같은데 막상 가서 확인하자니 겁이 났다. 자기도 모르게 다 헐어버린 손톱을 또 잘근잘근 씹는다. 원빈도 알고는 있었다. 확인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는 건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래서 회피하고 싶기도 했다.
원빈은 여전히 밤이 되면 불안감을 느꼈다. 성찬이 계속해서 불러내 준 덕분에 낮에는 괜찮게 지낼 수 있었지만 밤이 되고 혼자 잠자리에 누우면 자꾸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매독은 치료 후에도 항체 검사를 하면 양성으로 나온다는데. 헤르페스는 완치가 없다는데. 원빈이 시달리는 불안증의 근원은 병이 아니라 ‘내가 나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쳐 버렸을까 봐’ 두려운 것에 가까웠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시간은 돌릴 수 없기에 이 불안과 두려움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다.
“일찍 왔네?”
“…네.”
성찬이 와서 일단 잡생각엔 덮개를 덮는다. 평소처럼 당연히 학식으로 가는 줄 알고 방향을 틀었는데 성찬이 오늘은 거기 말고 다른 델 가자며 원빈을 잡아끌었다.
“나 감자탕 먹고 싶어. 감자탕 좋아해?”
고개를 끄덕였더니 다행이라면서 자기가 이 근방에서 제일 좋아하는 맛집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 이 정도로 유명하진 않았는데 요즘 갑자기 유명해져서 아까 미리 웨이팅을 걸어 놨다는 둥, 여긴 밑반찬도 많이 나오고 퀄리티가 꽤 좋다는 둥. 사실 원빈은 식사 메뉴 정도는 뭐가 됐든 아무런 상관도 없었기 때문에 아 진짜요… 영혼 없이 대답을 흐릴 뿐이었다.
정성찬에게서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었다. 달라진 건 없다. 원빈의 시선이 성찬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성찬은 감자탕이 끓자 가장 먼저 원빈의 앞접시에 가장 커다란 뼈를 담아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하고 접시를 받았더니 성찬이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수저로 국물을 먼저 떠먹는다. 맛있다고 했더니 성찬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그제야 자기 몫을 펐다. 이런 걸 보면 나를 진짜 좋아하는 것 같긴 한데. 왜 사귀자고는 안 하지. 젓가락으로 살코기를 발라내는 원빈의 속이 복잡스러웠다.
솔직히, 자신이 성찬의 입장이었다면 박원빈에게 실망했을 것 같았다. 정성찬이 그날 모텔에서 얼마나 차갑고 단호했는지는 정성찬 본인보다 원빈이 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실망을 넘어 화까지 난 사람처럼 보였는데… 그런데도 성찬은 원빈을 병원에 끌고 가주고, 계속 연락해서 밥을 사주고,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자꾸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 했다. 사귀자고 하지는 않으면서. 퍼즐이 들어맞는 듯하면서도 어긋나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밥을 먹고 나왔는데도 꽤나 여유가 있었다. 원빈은 그대로 집에 돌아가면 그만이었지만 성찬이 한 시간만 더 같이 있어 달라고 해서 어영부영 그 뒤를 쫓았다. 커피를 하나씩 사서 물고 거리를 좀 걷다가 인형 뽑기 가게를 한 바퀴 돌았다. 원빈의 눈에는 그냥 다 그저 그랬는데 갑자기 성찬이 무슨 눈이 땡그란 까만 고양이 인형에 꽂혀서 뽑겠다고 난리를 쳤다. 한 오천 원 정도 빨렸을 때 말렸어야 했는데 옆에 멀뚱멀뚱 서 있던 게 잘못이었나. 나중엔 원빈까지 달라붙어서 몇 번 해봤는데 죄다 실패했다.
기분도 별로 안 좋고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성찬이 학교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곧장 집으로 돌아가 누웠을 것이다. 병원에서 온 문자 같은 건 일단 못 본 척해버리고. 하지만 데려다 달라고 하니까……
학교까지 돌아가는 길에는 각자 주말 일정을 브리핑했다. 브리핑… 이라는 표현이 맞겠지. 어쨌든 원래 원빈은 주말만 되면―가끔은 평일에도― 어플 돌려서 사람을 만나고 다녔는데 요즘은 성병 걱정에 밤잠도 설칠 지경이라 어플은 들여다보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방에 틀어박혀서 과제나 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으흠. 난 축구해.”
“축구… 축구요?”
탁구도 치고 볼링도 치고 축구도 하는구나. 진짜 미쳤다…. 대체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건지 감도 안 온다.
“엉. 축구 동아리 하거든. 이번 주말에 친선 경기해.”
“네에…. 밥ㅂ쁘, 바쁘시네요….”
그 뒤로는 잠깐 아무 대화도 없이 침묵이었다. 원빈의 기분이 별로라는 걸 눈치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굳이 기분 좋은 척할 필요성까진 느끼지 못해서 원빈은 내내 주머니에 양손을 쿡 찔러넣고 길가의 낙엽을 팍팍 차면서 걸었다. 성찬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남의 생각을 추측하는 게 원빈에게는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실시간으로 체력이 닳았다.
“아, 맞다.”
“네?”
“검사 결과 나올 때 되지 않았어? 그거 금방 나올 텐데. 문자 오잖아.”
아. 1초 전까지만 해도 체력이 달려서 어딘가 멍하고 대화에 집중도 못 하다가 입을 꾹 다물기까지 했던 원빈이 성찬의 말 한마디에 눈을 다시 떴다. 멀쩡히 걷던 걸음도 멈추고 성찬을 빤히 올려다본다. 아무리 고민해도 이해되지 않았던 것, 맞는 듯하면서도 자꾸만 어긋났던 퍼즐이 갑자기 한 번에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게 형 애, 애인 지원 자격 요건 같은 거예요?”
“뭐?”
아무래도 정성찬은 내 성병 검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원빈이 마음속에서 결론을 냈다. 좋아한다면서 사귀자는 말은 하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구나. 아직 검사 결과가 안 나왔으니까. ……정성찬이 나를 재보고 있었다. 사귀어줄 정도는 되는지 사귀지도 못할 정도로 더러운지 가늠해보고 있었어. 짐작하고 나니 울컥했다. 말이 날카롭게 나간다.
“검, 검사지 가져다드리면 돼요? 저 병, 병 있는지 없는지 화, 확인, 확인해야 되니까요?”
이쯤에선 성찬도 팔짱을 꼈다.
“일단 계속 말해봐.”
원빈이 날서있는 만큼 성찬도 바로 짝다리를 짚고 눈썹을 꿈틀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나 들어나 보자는 듯이. 갑자기 성찬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표정 역시 차가워져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올려다보다가도 순간 흠칫 떨렸다. 하지만 원빈은 원빈 나름대로 ‘내가 나를 되돌릴 수 없을 지경으로 훼손시켰을까봐’ 무서워서 밤에 잠도 못 자고 서러워 죽겠는 상태였다. 말해보라는데 말 못 할 것도 없었다는 뜻이다. 성찬까지 거들지 않아도 이미 원빈의 인생은 검사 결과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질 예정이었다. 아마 잃을 것들도 많겠지. 그리고 원빈은 자신이 ‘잃게 될 것들’에 제대로 가져본 적도 없는 성찬의 애정까지 얹고 싶지 않았다. 요란스레 빠져나가 빈자리만 더 크게 느껴지게 만들 테니까.
“저 좋아, 좋아한다고 하면서 사사귀자고는 안 하잖아요. 검사 결과 보고 정하려고 가, 가, 간 보는 거죠.”
“그니까… 그게 문제야? 내가 너한테 사귀자고 안 한 게?”
“…….”
솔직한 성찬의 심경은 이랬다. 뭔 지원 자격 요건 같은 소리? 박원빈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성찬은 동시에 또 한 번 자신이 원빈에게 얼마나 약한지, 원빈의 앞에서 얼마나 물러지는지 깨달았다. 별 개소리를 다 한다 싶은데, 너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비장하게 하냐고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피곤해지는 것 같았지만 일단 팔짱부터 푼다.
“왜 사귀자고 안 하냐고? 나는 너를 좋아하는데 너는 나를 안 좋아하니까.”
이걸 설명해줘야 아나? 그래… 설명이 필요할 수도 있지…. 좀 현타가 오긴 했지만 성찬의 눈에는 주먹 꽉 쥐고 자기를 올려다보는 박원빈도 여전히 귀여웠다. 박원빈에게는 도통 성질대로 굴 수가 없다.
“나도 너를 좋아하고 너도 나를 좋아해야 사귀는 거지.”
도대체 혼자 무슨 생각을 했길래. 성찬의 대답에 설움과 악으로 가득 찼던 눈동자가 힘없이 맹하게 풀렸다. 성찬은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원빈의 앞니 두 개를 잠깐 응시하다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의미로 머리칼을 한 번 쓱 쓸어올렸다.
“그러면 검사 결, 결과는 왜 물어봤는데요.”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너 좋아한다고 했잖아. 걱정돼!”
“…….”
원빈은 언제 가시를 세웠냐는 듯 금세 고분고분해졌다.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다가 시선을 내리깔고 벌서듯이 양손을 모아 쥐었다.
“그러면 만약에, 만약에 뭐라도 양성이라고 뜨면 어떡하는데요? 그, 그러면 섹, 섹스도 못 해요. …옮잖아요.”
아. 아무래도 원빈은 진짜로 무서웠던 모양이다. 그동안 티를 안 내서 성찬이 무심하게 지나갔던 부분이었다.
“다 나을 때까지 기다리겠지. 치료하면 되잖아?”
사실 원빈의 검사 결과에 따라 뭘 어떻게 달리 행동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성찬의 사고회로는 또다시 단순하게 굴러간다. 안 아프면 좋은 거고. 아프면 치료하면 되는 거고. 하지만 이 대답이 원빈에게는 좀 다르게 들렸는지, 눈을 내리깔고 있던 원빈이 눈을 크게 뜨고 성찬을 올려다봤다. 아까랑은 확연히 다른 눈빛에 성찬이 움찔할 정도였다. 원빈의 커다란 눈망울이 마구 일렁인다.
“병수발을 들어주겠다고요…?”
그게 병수발까지는 아니지 않나? 하지만 못할 것도 없지.
“……어.”
단순한 성찬이 단순하되 정직하게 대답했다. 성찬은 정말이지 단순하기 때문에 자신의 대답이 원빈에게로 가서 무슨 뜻이 되었는지는 모를 테지만, 원빈에게 성찬의 대답은 ‘박원빈은 박원빈을 망치지 않았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아프면 치료하면 되지. 내가 기다려주면 되지. 뭘 그렇게 걱정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그 무엇도 돌이킬 수 없지 않아. 성찬의 대답과 동시에 벅차오른 원빈의 눈과 입이 동시에 커졌다. 엄청난 감명을 받은 것처럼.
“허어…… 허…….”
원빈의 마음이 둥실둥실 부풀고 있는 것도 모르고 성찬은 그저 반짝거리는 눈망울이 귀여워서 자기도 모르게 볼 안쪽을 꽉 씹었다. 너무 귀여우니까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나도 좀 물어보자. 너는 나를 좋아해? 나 좋아해서 이러는 거야?”
당연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다. 성찬과 다르게 원빈은 성찬을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곧바로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까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나 좀 대책 없는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든다. 맘에 들지 않는 모습도 귀여워 보였다. 진짜 미쳤군.
새삼스레 원빈이 언급한 애인 지원 자격 요건이라는 말이 웃기게 들렸다. 누가 그런 걸 생각해가면서 연애를 시작하지? 그리고 정말 애인 지원 자격 요건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성병 감염 결과지가 아니라 박원빈의 마음일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저쪽에서 지원한다는 전제 자체가 틀렸다. 매일 같이 지원서를 집어넣고 있는 건 박원빈이 아니라 정성찬이었다. 박원빈은 정성찬이 매일 같이 지원서를 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지만.
“원빈아.”
“…네?”
“일요일에 나 축구하는 거 보러 와. 나 잘하거든.”
성찬이 한 번 더 지원서를 넣는다.
“와서 나한테 꼭 반해.”
자꾸 못 알아들어서 이번엔 대놓고 이게 바로 지원서라고 콕 짚었다. 제대로 알아들은 원빈의 볼과 귀가 순식간에 발갛게 달아오른다. 귀 끝까지 빨개진 원빈이 시선을 내리깐 채로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리고 아주 작게, 그러나 성찬에게는 분명히 들릴만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