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ily ever after···.
by. 코스모
˝ 언리얼라이즈(Unreal:ze) 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이곳에서는 당신의 실제 모습을 기반으로 만든 아바타를 통해 모든 환상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
˝ 당신의 얼굴을 반영하기 위해 카메라 사용 접근을 허용해주세요. ˝
˝ 별도의 연결된 카메라가 없을 경우, 아래의 QR코드를 통해 휴대폰 카메라에 쉽게 동기화할 수 있습니다. ˝
˝ 언리얼라이즈(Unreal:ze)의 AI 프로그래밍을 거쳐, 당신의 얼굴을 이곳에서 사용할 아바타로 변경 중입니다. ˝
˝ 실제 모습의 반영 비율을 몇 퍼센트(%)로 설정하시겠습니까? ˝
( 40% / 60% / 80% )
˝ 선택하신 ‘80%’의 반영 비율을 적용하여 아바타를 생성합니다. ˝
˝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Loading···. ˝
˝ 사용하실 닉네임을 설정해주세요. (영문 및 숫자 12자 또는 한글 8자 내외) ˝
˝ ‘Bambi01 님’ 안녕하세요. 언리얼라이즈(Unreal:ze)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이곳에서 앞으로 ‘Bambi01 님’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
˝ 튜토리얼을 시작할까요? ( Yes / No ) ˝
<1장.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하늘이 오로라 빛으로 일렁이는 세계 위에 은색의 작은 금속 날개를 단 아바타 하나가 뚝 떨어졌다. 하얀색 티셔츠와 물빛 진을 입은 캐릭터의 얼굴은 얼핏 보아도 성찬의 얼굴을 그대로 옮긴 모양새였다. 다만 붉은 빛이 도는 머리카락과 발그스름한 두 볼, 그리고 자신의 몸보다 조금 왜소한 팔다리에서 현실로부터 미처 반영되지 않은 20%의 차이가 드러났다.
마우스를 딸깍, 이리저리 방향을 움직이자 언리얼라이즈(Unreal:ze)의 투명한 듯 환상적인 배경이 캐릭터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정교하게 설정된 애니메이션 때문에 성찬은 실제로 자신의 눈앞에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 튜토리얼이 끝났습니다. ˝
˝ ‘Bambi01 님’은 이제 문지기의 안내에 따라 광장으로 나가실 수 있습니다. ˝
˝ 광장에서는 친구를 사귀거나 필요한 아이템을 구매할 수도 있으며, 몬스터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활동에 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습니다. ˝
˝ 한계가 없는 환상의 모험을 즐겨보세요. ˝
마치 신화 속에나 존재할 법한 신비한 오드 아이의 문지기가 광장으로 향하는 거대한 문을 열어주었다. 화면이 일순간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 처음 발을 딛는 이는 구름 위에 지어진 광장에 들어서며 탄성을 금치 못했다.
이쯤 되면 게임의 이름이 왜 언리얼라이즈(Unreal:ze)인지 의문이다. 모든 색채나 그래픽 부분에 비현실적인 천상계의 판타지가 반영된 것과 반대로, 현실에 있는 야외 상점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친근한 광장의 구성은 오히려 리얼(Real)에 가까웠다.
잘 꾸며진 가상의 ‘현실’. 왜 이 게임이 남녀노소 모두가 열광하는 현존하는 최고의 RPG 게임일 수 밖에 없는지 시작과 동시에 납득하고 만다.
도심에서 지친 이들은 광장 왼편으로 향하여 꿈의 버스를 타고 바닷가 또는 산으로 떠나 낚시와 농사, 채집을 통해 현실에서 누리지 못하는 힐링을 한다. 반대로 지루한 현실을 피해 도망친 이들은 광장의 오른쪽 포털을 타고 광야와 화산 계곡으로 향하여 몬스터를 사냥하기 바빴다. 그게 아니어도 광장에는 수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드넓은 광장엔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누군가의 아바타들만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음에도, 실제 도심을 방불케 하는 많은 이들이 현실보다 더 활발하게 교류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성찬의 아바타는 그 많은 이용자 중 유일한 기본 착장의 캐릭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언리얼라이즈(Unreal:ze)는 4년 전 처음 출시한 이래로 단 한 번도 전 세계 RPG 게임 순위에서 1위를 놓쳐본 적 없는 대기록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미 이곳의 아바타 하나쯤은 모두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고민해 본다. 자율성이 가장 우선으로 보장된 게임인 만큼, 여느 다른 게임들처럼 정해진 단계와 미션을 거쳐 자신의 캐릭터를 키워야 한다는 틀이 전혀 없었다.
이곳에선 ‘누구나’ 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가 무엇이 될지는 본인 스스로만이 결정할 수 있었다.
“ 아 어렵네···. ”
머리를 비워보려고 시작한 게임이 되려 자신의 단순한 뇌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아바타가 입고 있는 하얀색 티셔츠만큼이나 아무것도 정해진 바가 없는 게임 속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성찬이 로그아웃을 위해 다시 광장 출구를 향해 몸을 돌리던 참이었다.
현란하고 화려한 아이템을 장착한 다른 이들의 아바타 사이에서 저와 마찬가지로 기본 아이템만 장착한 채 광장으로 들어오고 있던 누군가를 발견했다. 레벨이 오를수록 각양각색으로 화려하게 진화를 거듭하는 날개가 아니라, 정확히 레벨 1에 머무르는 ‘신규 유저‘만이 가진 보급형 은색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그 남자는 제 옆을 스쳐 지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이 남자를 따라 움직였다. 작은 날개를 움직이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총총 걸어가던 남자는 광장의 중심부에 펼쳐진 맵을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 잠시 멈추어 서 있었다.
[ Bambi01 : 저기요 ]
[ WB0302 : 저요? ]
남자를 클릭했을 때 나오는 닉네임이 영문이라 혹시 외국인인가 싶었지만, 성찬이 들어온 서버는 한국인 전용 서버였다. 역시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걸자, 반가운 모국어가 답으로 돌아왔다.
[ Bambi01 : 혹시 신규 유저? ]
[ WB0302 : 네? ]
가까이서 보니 참 잘생긴 얼굴이다. 어차피 실제 본인의 얼굴에서 프로그래밍을 거쳐 40~80% 사이의 반영 비율로 생성되는 아바타겠지만, 그걸 충분히 감안해도 참 묘한 느낌이 드는 페이스였다.
[ Bambi01 : 저도 지금 막 가입해서요. ]
[ WB0302 : 아.. ]
너무 뜬금없었나? 현실감 있게 만든 게임이라 그런지 저를 빤히 바라보는 화면 속 시선에 괜히 얼굴이 홧홧해졌다. 남자의 아바타는 파란 눈이었다. 저보다 조금 긴듯한 까만 머리카락이 가볍게 굽실거렸고, 조그만 얼굴에 자리한 파란 눈동자와 도톰한 붉은 입술 그리고 역시나 탄탄하고 마른 몸의 캐릭터는 저와 같은 하얀색 티를.. 어라?
[ Bambi01 : WB0302님은 왜 옷이 달라요? ]
[ WB0302 : 네? ]
[ Bambi01 : 기본 착장은 이거 아니에요? ]
성찬의 아바타가 팔을 움직여 자신이 입고 있는 하얀 반소매 티셔츠를 가리켰다. 같은 레벨 1 유저이고, 조금 전 튜토리얼을 마치고 들어온 사람인 것 같은데 묘하게 착장이 달랐다. 남자가 입고 있는 상의는 같은 하얀색임에도 자세히 보면 소매가 없었다. 흔히 말해 나시를 입고 있는 차림에 성찬은 궁금증이 일었다.
[ WB0302 : 아마 색깔만 동일하게 하고 AI가 캐릭터를 만들 때 조금씩 변형을 주지 않았을까요? ]
[ Bambi01 : 아 그렇구나. 저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오늘 처음 여기 들어왔거든요. 이 게임 너무 어렵네요. ]
[ WB0302 : 혹시 생일케이크는 먹었어요? ]
[ Bambi01 : 생일케이크요? ]
[ WB0302 : 네. 광장에 숨겨진 아이템이 있어요. 레벨1 유저만을 위한 부스트 아이템. ]
처음 듣는 얘기였다. 연령대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게임이라고 하길래 쉽게 생각하고 사전 조사를 하지 않은 것이 역시나 문제였다.
[ Bambi01 : 그거 먹으면 무슨 기능이 있어요? ]
[ WB0302 : 발이 빨라져요 ]
[ Bambi01 : WB0302님은 먹었어요? ]
[ WB0302 : 아직이요 ]
’부스트‘ 아이템이 있다는 소식을 들자마자, 가입한 지 30분 만에 그만두려던 마음을 잠시 접어본다. 역시 이런 큰 게임에 신규 유저용 보상이 없을 리가. 바깥에서 부리는 넉살을 가상세계에서도 살짝 활용하여 남자에게 부탁을 해본다.
[ Bambi01 : 괜찮으면 같이 가도 돼요? ]
[ WB0302 : 그래요 ]
[ Bambi01 : 감사합니다!ㅎㅎ ]
[ WB0302 : 따라오세요 ]
넓은 광장은 물론이고 앞으로 어느 공간으로 이동하더라도 빠른 발은 필수였다. 이런 건 튜토리얼 끝나면 보상으로 바로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성찬은 남자의 예쁘게 각이 진 어깨 아래에 솟아난 자그마한 금속 날개를 바라보며 혹여나 놓치기라도 할까 잰걸음으로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은 광장 꼭대기에 있는 별이 주렁주렁 열리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토끼굴 입구를 찾았다. 남자가 먼저 굴 입구의 작은 나무문을 똑똑 두드리자 그 안에서 눈이 빨간 흰 토끼 하나가 튀어나와 생크림 케이크 한 조각을 내밀었다. 성찬도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토끼에게서 케이크를 받았다. 한입 크게 베어 물자 순식간에 케이크는 사라졌고 눈앞에 보랏빛 오로라가 잠시 회오리치더니 착용 중인 신발의 모양이 바뀌었다.
[ Bambi01 : 우와 ]
[ WB0302 : 이제 점프도 되네요 ]
[ Bambi01 : 아니 이런 걸 왜 숨겨놨지?ㅋㅋ ]
[ WB0302 : 그러게요. 근데 일반 유저들은 대부분 다 알더라고요. 언리얼라이즈 유저 카페 공지에 써있거든요. ]
[ Bambi01 : 아.. ]
[ WB0302 : 이벤트 퀘스트 소식이나 정기적으로 보상 코드를 주니까 한번 들어가 보세요. ]
발이 가벼워진 남자가 제자리에서 통통 튀어 오르며 허공에서 팽이처럼 휘리릭 돌다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어깨에 솟은 작은 은색 날개와 만나 그 모습이 꼭 장난꾸러기 요정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 Bambi01 : 이제 뭐 하실 거예요? ]
[ WB0302 : 저요? ]
[ Bambi01 : 네. 아까 보니까 뭐가 많던데요? ]
[ WB0302 : 글쎄요. 그냥 순서대로 천천히 다 해볼까 싶은데. ]
돌아서서 떠나려 하는 남자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빠른 발도 얻었으니 이제 무엇이든 시도해보면 되지만 여전히 앞길이 막막했다. 모른 척 남자가 가는 곳을 따라가 자신도 같이 해보려 했는데 역시나 이쪽도 신규 유저라 별 계획이 없는 듯했다.
[ Bambi01 : 그럼 저랑 같이 다니실래요? ]
[ WB0302 : 네? ]
[ Bambi01 : 적응할 때까지만요. 여긴 전부 고인물들이라 레벨 낮은 우린 상대해주지도 않을 것 같아서요. ]
까딱까딱 조금씩 계속해서 움직이던 남자의 아바타는 제안을 듣자마자 가만히 한 자리에 멈추어섰다. 아무래도 무리인가? 하긴, 각자 현실에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러 들어온 것일 텐데 누군가가 계속 따라다니며 방해하는 것이 달가울 리 없지.
[ WB0302 : 좋아요 ]
[ Bambi01 : 괜찮아요? ]
[ WB0302 : 네. 저도 처음이니까 여기 있는 세계를 다 돌아볼 때까지는 같이 해요 ]
남자가 제게 손을 내밀었다. 현실이라면 남자끼리 낯부끄럽게 무슨 짓이냐며 매섭게 쳐냈을 텐데, 모든 것이 흐릿한 환상 속 가상세계라 그런지 성찬 역시 그 손을 잡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자리한 중간 세계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누군가와 이어진 붉은색 인연의 끈이 아주 서서히,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2장. 퀘스트에 도전하세요.>
“ 성찬 씨, 요새 표정이 좋아 보인다. “
“ 제가요? “
” 어. 볼 때마다 맨날 웃고 있어. 혹시 애인이라도 생겼어? “
” 하하···. 아니에요, 그런 거- “
내가 웃고 있다고? 괜히 멋쩍은 느낌에 멀쩡하기만 한 뒷머리를 매만져본다.
바쁜 출근 시간대가 지나고 한산해진 건물 로비를 지키던 이들 사이에 작은 여유가 찾아왔다. 안내 데스크에서 환영 인사를 하던 사람도, 사원증 태그 시스템 앞을 지키던 사람도, 로비 청소를 위해 나온 사람도 모두 다 경비 아저씨가 가져다준 작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 성찬 씨 정도면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설 텐데 왜 아무도 안 만나? ”
“ 에이.. 그렇지 않아요. ”
“ 밖에 나가서 사람도 좀 만나고 그래. 설마 성찬 씨도 이 회사에서 만든 그 뭐냐, 언리얼 어쩌구.. 그거 하느라 퇴근하고 맨날 집에만 있는 거 아니지? ”
정곡을 찔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커피를 도로 뿜을 뻔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딱히 게임만 하는 것도 아니니 애써 부정을 해본다.
“ 아니에요. ”
“ 아이고- 다행이다. 우리 딸내미는 작년부터 저 게임하느라 공부도 안 해. 어차피 공부 안 할 거면 친구들하고 밖에 나가서 놀라고 했는데, 제 친구들도 죄다 저기 들어와 있대! 참나..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
“ 김 주사님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그 게임이 잘 나가는 덕분에 우리도 다 이렇게 월급 받고 사는데. 회사가 잘 돼야 우리도 계속 이 건물에서 일을 하지. ”
“ 그런가? 그치만 내 새끼는 게임 좀 그만했으면 좋겠어! “
걸쭉한 입담의 여사님과 경비 아저씨의 대화에 낀 젊은이들 몇이 장단에 맞춰 적당히 웃음을 지었다. 티를 내지 않아도 아마 여기 있는 사람 중 최소 절반 이상은 언리얼라이즈에 자신을 닮은 아바타를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고작 오전 열 시 반을 넘어선 시각인데도 벌써 마음은 집에 가 있었다. 매일 밤 9시에 광장 느티나무 아래에서 만나기로 한 자신의 비밀스러운 친구를 떠올리며, 성찬은 오늘도 반들반들하게 닦인 구두 끝을 바라보았다.
———
“ 성찬 씨, 오늘도 수고했어. ”
“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수고하세요! ”
건물 출입 보안요원의 일은 별것 없다. 말이 보안요원이지 궂은 일은 경비 아저씨가 다 하시고, 저는 그저 회사에서 맞춰준 정장을 입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원증 태그 시스템 앞에 서 있는 것이 다였다. 게다가 BB게임즈는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게임 회사치고, 출시한 게임은 언리얼라이즈 하나뿐이라 건물이 그렇게 크지도 않았다. 그나마 다른 회사 건물 로비에 흔히 있는 편의시설이나 카페도 전부 직원들이 근무하는 중간층에 있었다. 말 그대로 내 눈앞에서 드나드는 사람만 감시하면 되는 간단한 업무에 적당한 월급을 받은 지도 벌써 거진 반년이 훌쩍 넘어갔다.
오후 다섯 시 정각이 되면 옷을 갈아입고 건물을 나선다. 아직 아홉 시까지는 네 시간이나 남았다. 전에는 느긋하게 산책도 하고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일없이 앉아 폰 화면만 들여다보곤 했는데, 요즘엔 곧장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운동을 마치고 깨끗하게 씻고 나오는 길에 적당한 저녁 메뉴를 고른다. 사내에서 제공하는 점심이 워낙 잘 나오는 덕에, 저녁은 대충 먹어도 크게 부족함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자그마한 자취방을 청소하며 밀린 집안일을 했다. 여덟 시 반에 맞춰둔 알람이 울리기까지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있었다.
[ ‘Bambi01 님’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약속 시각인 9시보다 항상 10분 정도 일찍 들어온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나 자신의 친구가 먼저 접속해있었다.
[ Bambi01 : 나 왔어 ]
[ WB0302 : ㅎㅇ ]
[ Bambi01 : 몇 시에 들어옴? ]
[ WB0302 : 오늘? 여덟시쯤 ]
매번 물어볼 때마다 시간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항상 약속시간인 아홉시보다는 한참 전이었다.
[ Bambi01 : 나도 일찍 들어올까? ]
[ WB0302 :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난 시간 많아서 미리 들어와 있는 거야 ]
[ Bambi01 : 아예 만나는 시간을 당기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
[ WB0302 : 아니야. 아홉 시부터 피버타임인 거 알면서 왜 그래. ]
사실 매일 보기로 약속한 것도 아니지만, 만약 같이 게임을 할 생각이 있다면 서버의 피버타임 시간인 밤 9시에 광장의 느티나무 앞에서 만나는 것으로 정했었다. 그 뒤로 신기하게도 WB0302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9시에 늘 접속해 왔다. 가끔 바깥에 나가는 일이 있어 들어가지 못하는 날엔 그의 소식을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성찬이 시간을 맞춰 들어간 날엔 꼭 먼저 기다리고 있었단 얘기다.
그렇게 매일 같은 시간대에 만나는 인연이 생겼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성찬도 이제 밤 9시엔 오로지 이곳에 머물렀다.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즐겨하지도 않는 술을 채워주는 오랜 친구들보다 더 편안했다. 직장 얘기를 하지도 않았고, 연애 고민을 털어놓지도 않는다. 사회의 불안이나 정치적 견해를 내보이지 않는 것 또한 당연했다.
만나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 공간에서 해본 적 없는 모험을 같이 즐기다가, 같이 얻어낸 아이템이나 재화를 나누고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 WB0302 : 나 아까 이거 주웠는데 너 가져 ]
[ Bambi01 : 엥? 이거 골든 카나리아 깃털 아니야? ]
[ WB0302 : 응. 나중에 날개 강화할 때 쓰라고 ]
[ Bambi01 : 너는? 너도 써야 하잖아 ]
[ WB0302 : 나도 있어 ]
WB는 자신의 가방을 열어 보유 아이템 목록을 보여주었다. 컬러만 다른 블루 카나리아 깃털이 눈에 들어온다. 레벨 20에 도달하면 날개 강화에 커스텀 컬러를 반영할 수 있었다. WB는 언제나 그랬듯이 푸른색 계열을, 그리고 저는 황금색 또는 붉은색 계열을 선호했다.
[ Bambi01 : 고마워 잘 쓸게 ]
[ WB0302 : 오늘은 어디 갈 거? ]
[ Bambi01 : 동쪽 바다정원 어때 ]
[ WB0302 : ㅇㅋ 오늘 수요일이라 펭귄 상점 이벤트도 있을걸 ]
[ Bambi01 : 그럼 더 좋지 ]
별가루가 떨어지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기지개를 한 번 크게 켜는 동안에 WB는 괜히 토끼굴 입구를 노크해 본다. 발간 눈의 토끼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 레벨1의 신규 유저가 아닌 것을 알아채곤 에이프런 주머니에서 당근 하나를 꺼내 홱- 던졌다.
[ Bambi01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WB0302 : 이제 출발하자 ]
[ Bambi01 : ㅇㅇ ]
여느 때와 다름없이 WB가 앞장섰다.
오른 레벨만큼이나 커진 은빛 날개가 이제 꽤 그럴듯한 천사의 그것처럼 보였다.
———
9월을 맞아 광장의 느티나무는 오색빛깔로 찬란하게 물이 들었다. 가을이라고 굳이 시간 내서 단풍놀이를 하러 갈 필요도 없겠네. 언리얼라이즈의 공간 대부분은 언제나 밝고 화사했지만, 이렇게 계절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제때 업데이트를 해준 덕분에 현실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인 WB의 머리 위로 빨간 나뭇잎 하나가 내려앉았다. 그게 꼭 진짜인 것처럼 손으로 자연스럽게 떼어지는 바람에 또 한 번 이 게임의 현실감에 놀라고 말았다.
[ Bambi01 : 너 몇 살이야? ]
[ WB0302 : 엥 ]
오늘 습득한 아이템을 나누기 위해 가방을 뒤적거리던 WB가 난데없는 호구 조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WB는 얼마 전 광장의 상점가에서 커스텀 아이템 몇 개를 샀다. 이상하게도 기본 제공 의상인 하얀색 나시는 그대로 둔 채 잘 보이지도 않는 귀걸이와 목걸이만 주렁주렁 걸치고, 볼 위에 작은 사이즈의 별 모양 타투를 그렸다.
[ Bambi01 : 궁금해서 그래 ]
[ WB0302 : 그게 지금 갑자기 궁금하다고? ]
[ Bambi01 : 그러게 ]
[ WB0302 : 그러는 너는 몇 살인데? ]
WB의 유치함에 헛웃음이 터졌다. 얘 알고 보니 아직 민증도 안 나온 새파란 미성년자인 거 아니야? 하긴, 요즘 중고등학생은 이 시간에 이렇게 한가할 리가 없다. 평소 말투로 봐선 잼민이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 해서 나이가 또 많아 보이진 않는다.
[ Bambi01 : 내가 알려주면 너도 알려줄 거야? ]
[ WB0302 : 생각해보고 ]
[ Bambi01 : 왜? 긁혔어? ]
[ WB0302 : 뭐래 ]
[ Bambi01 : 0302는 생일 맞지? ]
[ WB0302 : 갑자기 왜 이래 진짜 ]
참다못한 WB가 손을 들어 제 머리를 가격했다. 시야가 잠시 휘청한다. 통증이 느껴질 리 없는 가상세계의 펀치였지만 어딘가 얼얼함이 가시지 않았다.
[ Bambi01 : 왜 사람을 패고 그러냐 ]
[ WB0302 : 네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니까 그러지 ]
[ Bambi01 : 우리 석 달 넘게 매일 여기서 보는데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잖아 ]
[ WB0302 : 굳이 알아야 해? ]
[ Bambi01 : 서운하네 ]
[ WB0302 : 뭐가 서운해 랜선 친구가 다 그렇지 ]
와.. ‘랜선 친구’ 막 이러네. 틀린 것 하나 없는 말인데도 마음이 한구석이 씁쓸했다. 처음에는 저도 서로를 몰라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딱 WB가 말한 랜선 인연 그 정도. 그런데 오늘 게임에 접속할 때 뜬 문구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언리얼라이즈(Unreal:ze)와 함께하신 지 100일이 되었습니다.
100일 접속 보상을 수령하실 수 있습니다. ’
현실 세계에서는 100일을 이어간 인연을 축하하는 자리를 흔하게 갖는다. 그게 연인 사이뿐만 아니라 가족, 회사를 비롯해 어느 곳에서든 평범한 숫자는 아니란 얘기다. WB를 만난 것도 오늘로 100일이었다. 중간에 며칠 정도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알고 지낸 지 100일이나 되었는데 우리 둘은 여전히 닉네임, 그리고 서로의 레벨과 아이템 보유함 사정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성찬은 볼 안쪽을 느릿하게 혀로 훑었다. 얼굴만 저와 닮았을 뿐, 이런 사소한 습관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아바타가 오늘따라 조금 아쉬웠다.
[ WB0302 : 삐졌어? ]
한참 동안 말이 없는 제 눈앞에서 WB가 손바닥을 휘휘 저었다.
[ WB0302 : 나이가 왜 궁금한데 ]
[ Bambi01 : 매일 하루에 두 시간씩 꼬박꼬박 만나잖아 ]
[ WB0302 : 꼭 내가 그러라고 시켜서 들어오는 것처럼 말하네 ]
[ Bambi01 : 우리 우정이 그것밖에 안 돼? ]
여차하면 100일 얘기를 꺼낼 뻔했다. 그런데 듣는 사람 기분에서는 조금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 타자를 치다 말고 도로 박박 지웠다. WB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정교하게 움직임이 설정된 아바타가 몸짓 발짓을 다 해 자기감정을 표현하다가 마지막엔 저를 보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저건 또 어떻게 한 거지? 가끔 보면 WB는 저보다 더 많은 기능을 아는 듯했다.
[ WB0302 : 너부터 말해 ]
[ Bambi01 : 응? ]
[ WB0302 : 나이 알려달라며! 너부터 말하라고 ]
와 얘 왜 이렇게 귀엽지. 가상현실의 아바타를 보고 이딴 미친 소리를 하는 자신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귀엽다. 모니터 화면에 가득 찬 WB의 뾰로통한 표정이 꼭 진짜 같아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 Bambi01 : 맞춰봐 ]
[ WB0302 : 장난하냐 ]
[ Bambi01 : 난 이미 오래전에 알려줬는데 ]
[ WB0302 : 뭐? ]
[ Bambi01 : 내 닉에 써있잖아 ]
잠시 뜸을 들이던 WB가 저를 향해 물었다.
[ WB0302 : 01이야? 01년생? 스물다섯? ]
[ Bambi01 : ㅇㅇ. 너는? ]
이제 WB의 나이를 들을 차례였다. 이깟 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지. 괜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몇 번 쓸어내리면서 성찬은 WB의 대답을 기다렸다.
[ WB0302 : 나도 ]
[ Bambi01 : 거짓말 ]
[ WB0302 : 진짠데 ]
[ Bambi01 : 다음에 만나면 민증 확인한다 ]
[ WB0302 : 그래라 ]
어쩐지 거짓말의 냄새가 솔솔 나지만 이번엔 그냥 눈 감아 주기로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이를 알고 나니 다른 것도 궁금해진다. 어디에 사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게임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증은 꼬리를 물고 점점 덩치를 키워나갔다.
결국 매일 하나씩 질문을 던졌다. 맵 이곳저곳을 같이 돌아다니다가 헤어질 시간이 다 되어 아이템을 나누는 순간이 되면 성찬은 잊지 않고 오늘 물어보려고 온종일 고민했던 질문 중 하나를 꺼내 놓았다.
[ Bambi01 : 어디 살아? ]
[ WB0302 : 이번엔 내 주소가 궁금해? ]
[ Bambi01 : 궁금할 수도 있지 ]
[ WB0302 : 넌 궁금한 게 너무 많아 ]
주먹을 쥐고 꿀밤을 쥐어박으려는 WB의 움직임을 요령 좋게 피해 본다. 역시, 레벨이 오르고 강화를 거듭할수록 캐릭터의 몸놀림도 날쌔졌다.
[ Bambi01 : 알려줘 ]
[ WB0302 : 싫어 ]
[ Bambi01 : 아 왜 ]
[ WB0302 : 만날 것도 아니면서 왜 물어봐 ]
[ Bambi01 : 내가 너 만나러 갈 수도 있지 ]
[ WB0302 : 엥 ]
WB가 또 정색했다. 아무래도 저렇게 표정을 다양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이 뭔지 따로 좀 찾아봐야겠다. 같은 레벨로 꾸준히 나아가고 있는데도 WB는 꼭 게임을 잘 아는 사람처럼 능숙하게 자기 아바타를 조종했다.
[ Bambi01 : 진짜야. 가까우면 만나러 갈 수도 있어. 너 해외 사는 거 아니지? ]
[ WB0302 : 아니야 ]
[ Bambi01 : 같은 대한민국이면 뭐 멀어봤자 5시간 아니야? ]
[ WB0302 : 오바하지마 ]
[ Bambi01 : 진심이라니까 ]
[ WB0302 : 나는 좀 부담스러운데 ]
또 사람을 서운하게 한다. 가상세계에서는 보통의 친구보다 더 친근하게 굴면서 막상 만나는 건 부담이라니. 그러고 보면 다들 이렇게 글자로만 대화하지 않고 헤드폰을 연결해 직접 목소리를 듣기도 한다는데... 우리가 백일이 넘도록 여전히 이 채팅창에서만 머무르는 이유 또한 WB가 직접 대화를 반대해서였다. 자긴 말주변도 없고 집에 헤드폰도 없다며 둘러대던 것이 어쩌면 저랑 가까워지는 것이 부담스러워서였을까.
[ Bambi01 : 왜? 뭐가 부담스러워? ]
[ WB0302 : 그냥... 게임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이랑 얼굴 보는 거 좀 이상하잖아 어색하기도 하고 ]
[ Bambi01 : 뭐가 어색해 어차피 지금 이 얼굴이 내 얼굴인데 ]
[ WB0302 : ? ]
[ Bambi01 : 넌 아니야? 아이디 만들 때 카메라로 촬영하지 않았어? ]
[ WB0302 : 너 반영률이 몇인데 ]
반영률? 설마 그 자기 얼굴로 아바타를 생성할 때 실제 반영 비율을 고른 것을 말하는 건가.
[ Bambi01 : 나 80 ]
[ WB0302 : 왜? ]
[ Bambi01 : 왜냐니 ]
[ WB0302 : 대부분 40을 고르잖아. 그게 아니어도 많이 쳐줘봤자 60을 고르는데? ]
[ Bambi01 : 굳이 속일 필요 뭐가 있어. 어차피 20%만 빼도 충분히 현실에서 날 못 알아볼 텐데 ]
[ Bambi01 : 아 왜 때려 ]
[ WB0302 : 재수없어서 ]
[ Bambi01 : 너는? 너는 몇%로 설정했는데 ]
[ WB0302 : 몰라 ]
왜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구나 모르겠다. 어느 부분에서 삐졌는지 감도 안 오는 상황에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춤을 춰본다..
[ WB0302 : 아 그만 웃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Bambi01 : 재밌어? 더 해줘? ]
[ WB0302 : 그 얼굴로 제발 이상한 짓 좀 하지마ㅋㅋㅋㅋㅋ ]
[ Bambi01 : 이 얼굴이 뭐가 어때서 ]
[ WB0302 : 잘생긴 얼굴 막 쓰지 말라고ㅋㅋㅋ ]
[ Bambi01 : 나 잘생겼어? ]
[ WB0302 : 너 거울 안 봐? 80퍼 반영률이라고 한 거 거짓말이지 ]
WB의 장난스러운 주먹질이 또 제 아바타의 몸 이곳저곳을 가격한다. 꽤 오랜 시간 몬스터 사냥을 비롯해 여러 부분에서 WB의 움직임을 지켜보아 온지라 이제 이 패턴도 눈에 훤했다. 툭툭 치고 빠지던 양손을 하나씩 낚아챘다. 졸지에 움직임이 가로막힌 WB의 아바타가 고장 난 기계처럼 어찌할 줄을 몰랐다.
[ Bambi01 : 나랑 만날래? ]
[ WB0302 :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해 ]
[ Bambi01 : 아니 얼굴 보자고ㅋㅋ 여기 말고 진짜로 만나서 밥이나 먹자. 너 사는 데로 내가 갈게 ]
[ WB0302 : 부담스럽다고 했잖아 ]
손을 쉬이 놓아주지 않자 이번엔 아래에서 발길질을 하는지 시야가 꿀렁였다. 안 되겠다. 다른 방법을 써야지. 잡았던 손을 놓아주고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 본다. 정교한 그래픽 때문에 가까이 마주한 WB의 얼굴은 속눈썹 한 올까지 전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 Bambi01 : 진짜 내 얼굴이 궁금하지 않아? 실물 반영 비율을 80%로 선택한 미친놈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너도 궁금할 거 아냐 ]
WB가 보는 화면에도 분명 자신의 아바타 얼굴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어떤 크기의 모니터를 사용하는지 몰라도 지금쯤 퍽 당황스럽겠지. 피하지도 못하고 한동안 가만히 멈추어 있던 WB가 다시 말을 이었다.
[ WB0302 : 직접 만나면 ]
[ Bambi01 : 응 ]
[ WB0302 : 나도 얼굴을 보여줘야 하잖아 ]
[ Bambi01 : 혹시 나한테 나이 속였어? ]
[ WB0302 : 아니 ]
[ Bambi01 : 근데 왜 겁을 먹어 ]
[ WB0302 : 난 네가 상상했던 거랑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어 ]
그러니까 지금 자기 얼굴을 보여주기가 겁이 나서 그러는 건가. 아무리 실물 반영 비율을 최하치인 40%로 골라서 보정 값을 많이 거쳤다 한들 WB의 외모는 이곳에서 최상위권에 속했다. 과한 장식이나 꾸밈이 없어도 잘생긴 이목구비는 선명하기만 했고, 다른 유저들이 다가와 말을 걸며 호감을 표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WB는 그럴 때마다 모든 대화를 차단하고 오로지 귓속말 기능으로 지금처럼 저하고만 대화를 나눴다.
부끄럼이 많은 성격이다. 현실에서는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몰라도 WB는 매우 조심스럽고 예민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밖으로 끌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성찬은 잠시 의자에 기대어 고민을 해본다.
[ Bambi01 : 만약에 내가 약속장소에서 널 한 번에 못 알아보잖아? 그럼 나 버리고 도망가도 돼 ]
[ WB0302 : ??? ]
[ Bambi01 : 근데 난 자신 있어 분명히 한눈에 알아볼 거야 ]
렉에 걸린 것 마냥 WB는 눈만 깜박깜박 감았다 뜨며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매시간 정각이 되면 언리얼라이즈의 세계에서는 반짝이는 비가 내렸다. 게임을 너무 장시간 접속해있는 유저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알람과 같은 비가 두 사람 사이의 긴 정적을 은빛 빗방울로 가득 메웠다. WB는 어느 배경에서도 아름다웠지만 유독 정각에 내리는 은빛 소나기에서 가장 반짝였다.
성찬은 독촉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믿음을 주었는데도 상대방이 거절한다면 더 이상 밀어붙이는 건 그저 이기적인 강요일 뿐이다.
[ WB0302 : 그렇게 내가 궁금해? ]
[ Bambi01 : 응 보고 싶어. 궁금해 ]
[ WB0302 : 보고 실망하지 않을 수 있어? ]
[ Bambi01 : 내가? 절대 실망 안 하지 ]
솔직히 기대하지 않는다면 거짓이지만, 모든 것을 다 떠나 매일같이 이 게임 속에서 같이 보낸 시간만으로도 WB가 좋은 친구가 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 WB0302 : 좋아 ]
[ Bambi01 : 만나주는 거야? ]
[ WB0302 : 응. 넌 어디 살아? 난 판교 쪽에 있는데 ]
[ Bambi01 : 나도 그쪽인데? ]
[ WB0302 : ? ]
알고 보니 우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각자 거주하고 있었다. WB는 제 근무지인 BB게임즈가 있는 판교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지하철로 고작 대여섯 역만 가면 되는 짧은 거리 안에 무려 4개월을 매일같이 두 시간씩 함께 보낸 친구가 있었다.
약속장소를 그 근처로 정했다. 시간은 토요일, 매일 게임에서 만나는 아홉 시 보다 두 시간 앞으로 당긴 저녁 일곱 시. 무슨 음식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WB는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는다고 말했다. 남자 둘이 처음 만나는 건데 분위기 좋은 곳에서 칼질을 하긴 좀 그렇고. 그렇다고 회식 모임으로 정신없는 회사 빌딩 근처의 고깃집에서 기름 냄새 몸에 배어가며 대화도 몇 마디 못 나누고 식사를 하는 것도 영 아닌 듯했다.
결국 저도 처음 가보는 스시집에 예약을 넣었다. 예약금을 미리 입금하면서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살짝 현타가 왔지만 그걸 이겨낼 정도로 WB라는 사람이 궁금했다.
———
“ 성찬 씨, 오늘 약속 있나 봐? ”
“ 어? 어떻게 아셨어요? ”
“ 아까부터 시계를 5분에 한 번씩 보던데. 빨리 퇴근하고 싶은 게 티가 나. ”
건물 청소를 마친 이모님이 저보다 한 시간 먼저 퇴근하면서 예리한 눈썰미를 자랑했다. 역시나 어른들의 눈은 속이기 힘들다. 종일 시간이 더디 가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괜히 애꿎은 시곗바늘을 눈으로 재촉하게 된다.
”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
” 어, 그래. 데이트 잘하고. 내일 보자. “
” 아이.. 데이트 아니라니까요. 그냥... 친구 만나기로 했어요. “
” 어어- 그러를 그러세요- “
같이 근무하는 형이 탈의실에서 바삐 퇴근하는 제 엉덩이를 툭 치며 농을 던졌다. 오늘 운동은 패스. 집에 빨리 들어갔다가 빠르게 씻고 다시 회사 방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과하게 차려입을 일은 아닌듯해서, 산 지 얼마 안 된 짙은 색 후드를 입었다. 근무 시간처럼 가볍게 이마를 드러내는 포멀한 헤어스타일 대신에 방금 감고 나온 머리는 적당히 말려 너무 부스스하지 않을 정도로만 가볍게 끝을 만졌다. 집을 다시 나서기 전 거울에 비춰 확인한 자신의 모습은 영락없는 이십 대 중반의 평범한 대학생 같았다.
운동화를 신고 문밖을 나섰던 성찬이 1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제일 중요한 걸 두고 갈 뻔했다. 가져가는 것을 잊어버릴까 봐 신발장 옆에 걸어 둔 종이 가방을 챙겨 든 성찬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조금 전보다 더 빨리 발걸음을 재촉했다.
<3장. 이벤트가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이건 계획에 ‘전혀’ 없던 일이었는데···.
입고 있는 가죽 재킷의 질감이 영 어색했다. 사 놓고 반년 넘게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 결코 편할 리가 없다. 매일 입는 헐렁한 후드 셋업이 아닌 타이트한 핏의 바지도 적응이 좀처럼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제일 심각한 건 눈이었다. 안경을 벗고 힘겹게 착용한 렌즈는 건조한 가을바람을 몇 번 쐬더니 자길 살려달라며 안구를 인질로 꽉 쥐고 함께 오그라들고 있었다.
‘ 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나온 거지? ’
뒤늦게 후회를 시작했지만 지금에 와서 시간을 되돌릴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차라리 어제 오픈채팅 아이디라도 받을 걸 그랬다. 어차피 이렇게 얼굴을 보겠다고 밖에 나올 거였으면 그까짓 개인정보 조금 오픈하고 마는 건데, 괜히 비싸게 구느라 사서 고생을 택한 자신이 원망스럽다.
휴대폰을 들어 깜깜한 화면에 제 얼굴을 비춰본다. 빌딩풍을 맞아 머리카락이 살짝 헝클어진 것을 제외하곤 집에서 나올 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저 스스로도 무척이나 어색했다. 꼭 다른 사람의 가죽을 그대로 벗겨다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대로 씌워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얼굴과 표정이 어색함 그 자체였다.
‘ 진정해, 박원빈. 너는 지금 네가 만든 게임의 신규 유저 설문 조사를 위해 직접 나온 거야. ’
이맘때 평년 기온보다 뚝 떨어진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곧 만나게 될 밤비가 혹여나 자신을 단번에 찾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인지 몰라도 원빈의 몸은 아주 미세하게 덜덜 떨렸다.
간만에 BB게임즈 사옥 12층이 아닌, 주소도 특정하기 어려운 판교의 어느 커다란 건물 아래에 서 있던 원빈은 저 멀리 건널목을 건너 걸어오는 키가 크고 하얀 얼굴의 남자를 발견했다. 뻑뻑한 눈 때문에 초점이 잘 맞지는 않지만, 왠지 그 남자가 꼭 자신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설마···. 에이, 설마 아니겠지. 괜한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는데 누군가의 발이 제 앞에 다가와 우뚝 멈추어 섰다.
” WB0302? “
” 아... “
” 맞아요? “
” 그럼, 밤비 공일... “
” 응! 나 맞아, 밤비. 하하- ”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건널목을 건너온 거대하고 하얀 남자가 저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다소 유치하다 생각했던 밤비(Bambi)라는 닉 값을 톡톡히 하는 얼굴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와.. 이거 진짜.. 내가 만든 게임이지만 잘생긴 사람을 너무 과하게 너프(Nuff)시킨 것 같은데···.
” 너 진짜 똑같이 생겼다. “
” 에? “
” 너도 캐릭터 생성할 때 80퍼 고른 거지? 와.. 진짜 잘생겼다. 주변에서 인기 되게 많겠어. “
그런데 오히려 밤비가 제가 할 소리를 먼저 꺼냈다. 병우 형을 제외하고는 현실에서 사람을 마주하고 대화를 한 지 오래라 시선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전에 만났던 사람들은 이렇게 자꾸 얼굴로 눈이 가진 않았는데···.
“ 춥다. 어제부터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어. 넌 안 추워? ”
“ 아.. 네.. 조,조금 춥긴 한데... ”
“ 그럼 밥부터 먹으러 갈까? 혹시 스시 좋아해? 저번에 해산물은 안 가리고 다 먹는다고 그래서 내가 찾아놓은 곳 있는데. ”
“ 어.. 넵. 조,좋아해요···.”
고개를 끄덕이자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밤비는 눈꼬리를 접어 예쁘게 웃어 보였다. 하.. 조만간 시스템 조정이 필요할 것 같다. 현실의 외모를 버프(Buff) 시키는 게 목적인 AI 아바타 생성률이 아무래도 오류가 난 것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는 이렇게 예쁘게 잘생긴 사람을 그렇게 못생기게 만들 순 없다.
길을 안내해주겠다며 밤비가 먼저 앞서나갔다.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가는 저를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슬쩍 팔을 잡아 옆으로 당기는 하얀 손이 무척이나 컸다.
저는 와 본 적도 없는 골목 안쪽의 일식집으로 향한 밤비가 예약자를 묻는 데스크 직원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온 신경이 예민해진 박원빈은 뒤에서 밤비의 이름을 엿들었다. 정성찬. 성찬. 2001년생 정성찬. 밤비는 스물 다섯 살 정성찬이다.
묘하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발음이 너무 강하지도, 튀지도 않지만 어딘가 유연하면서도 단정한 뉘앙스를 주는 예쁜 이름이다. 속으로 이름을 되뇌이는 사이에 직원이 예약한 자리를 안내해주었고, 다시 어색하게 1:1로 마주 보는 시간이 돌아왔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공들여 그려 놓은 캐릭터처럼 잘생긴 얼굴을 마주한 나머지 자꾸 흐려지는 정신머리를 다잡고 박원빈은 사흘 전부터 준비한 질문을 천천히 시작했다.
“ 저.. 혹시 이 게,게임은 어떻게 접속을 하게 됐어요? ”
“ 왜 갑자기 존댓말을 해? ”
“ 아... ”
“ 어색해서 그래? 그냥 편하게 하자. 너도 01이라며. 설마 진짜 나이 속인 거 아니지? ”
“ 아,아닝,아닌데.. ”
말 좀 그만 더듬어라, 진짜…! 짧은 한 문장도 온전하게 꺼내 놓지를 못하는 자신의 입이 원망스러웠다. 그 사이에 테이블 위로 녹차와 함께 가볍게 속을 달랠 일식 계란찜과 오리엔탈 소스를 곁들인 두부 샐러드가 놓였다.
“ 먹자. ”
“ 네.. 아니, 응. ”
밤비가 먼저 수저를 들었다. 스시는 병우 형이 일주일에 한 번씩 사다주는 것과, 가끔 집에서 시켜 먹는 것 외에 다른 곳에서는 먹어본 지 오래됐다. 예전에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울산 집에 내려가면 가족들이랑 같이 나가서 밥도 먹고 그랬지만, 게임이 성공하고 난 뒤로는 명절을 비롯해 기념일마다 이벤트네 뭐네 하여간 패치 배포하느라 모니터 앞에서 일어나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먹는 스시는 거의 4년 만에 제대로 먹는, 지금 막 장인의 손에서 따끈따끈하게 만들어진 뒤 제 앞에 바로 놓인 아주 귀한 음식이라는 거다.
차례로 놓인 먹음직스러운 빛깔의 생선 살이 구미를 싹 당겼다. 설문 조사 그런 건 모르겠고, 일단 먹자. 오늘과 같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테니 이 짧고 호사스러운 시간을 누려 보자.
“ 근데 이름이 뭐야? ”
“ 크흡.. ”
“ 어어- 천천히 먹어. ”
입에서 살살 녹는 참치 뱃살에 정신을 못 차리고 음식을 흡입하던 와중 갑작스럽게 맞이한 호구 조사에 사레가 들렸다. 거의 비어 있던 물잔을 채워주며 성찬이 냅킨 몇 장을 뽑아 제게 내밀었다.
“ 이,이름..? ”
“ 응. 밖에서도 WB0302라고 부르긴 좀 그렇잖아. 누가 들으면 진짜 오타쿠 소모임인 줄 알겠어. ”
“ 아.. ”
“ 나부터 말해? ”
이미 아까 들었지만 괜히 알고 있는 티를 내면 음침한 변태처럼 보일 수 있으니 모른 척 고개를 끄덕여 본다.
“ 내 이름은 정성찬. 너는? ”
“ 나는... 박원빈. ”
“ 원빈. 원빈... 아 그래서 WB였네. 난 또 무슨 워너브러더스 그런 건 줄 알았어. “
워너브러더스는 또 뭐야? 사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수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동안에 이 상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름을 물어보면 뭐라고 하지? 가명이라도 대야 할까? 그럴듯한 예명을 찾아 머리를 굴려봤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어차피 저는 일반적인 사회생활이란 걸 하지 않으니 현실 세계에선 유령이나 다름없고, 강박증과 대인기피증(이건 의사가 아니라 병우 형이 내린 진단이다) 비슷한 것에 시달리는 바람에 인터넷 세상에서도 제 흔적이 남지 않게끔 수시로 계정 세탁을 했다.
“ 저기, 서,성찬아.. 그럼 게임은 언제부터, ”
“ 평소에는 무슨 일을 해? ”
“ 어? ”
“ 내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넌 되게 멋있는 일을 할 것 같아서. ”
“ 내가..? ”
“ 지금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전체적인 스타일도 좀 뭐랄까... 예술하는 사람 같아. ”
“ 에..? “
” 아니야? 아니 근데 이건 칭찬이야. 비꼬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 난 그렇게 잘 입고 싶어도 센스가 별로 없어서 못 하거든. “
내가 옷을 잘 입어? 그것도 예술하는 사람같이?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부류의 칭찬이었다. 매번 머리 좋다는 칭찬만 들어봤지 자신의 센스, 그것도 옷을 잘 입는다는 말을 들어볼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사람을 상대하는 부분에 있어 유독 단순한 뇌 구조를 가진 박원빈의 두 볼이 발그르슴하게 물들었다. 칭찬이 부끄러워서 젓가락을 내려놓고 애꿎은 옆머리만 슥슥 눌러보는 제게 성찬은 계속해서 거리낌 없이 대화를 유도했다.
“ 그래서 무슨 일을 하는데? ”
“ 그, 그냥.. 보안 쪽 일..? ”
“ 보안? ”
“ 응.. IT회사에서 서,서버 보안 담당자로 일해. ”
“ 와- 멋있다. 사실 나도 보안 일을 하긴 하는데 너랑은 전혀 달라서. ”
“ 머,뭔데..? ”
“ 건물 보안. 푸흐흐- ”
“ 엥? ”
“ 원빈이 너 지금 되게 실망한 표정인데? ”
“ 아? 아,아니,아닝,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
“ 농담이야, 농담- 근데 건물 보안 담당인 건 맞아. 일한 지는 반년 정도 됐어. 학교 졸업하고 뭐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놀고만 있자니 좀 그래서 시작한 일인데 나름 괜찮더라고. ”
건물 보안이면 경비 아저씨를 말하는 건가? 박원빈은 습관적으로 경비 아저씨가 입는 파란 유니폼과 조끼를 눈앞의 성찬에게 대입해 본다. 옷걸이가 괜찮으면 뭐든 다 좋아 보이는 건지 촌스럽기 그지없는 푸르딩딩한 작업복도 성찬에게서는 왠지 꽤 괜찮을 것만 같다.
그 뒤로도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배가 꽉 찰 때까지 끊임없이 나오던 코스만큼이나 성찬의 이야기 하나하나는 버릴 것도 없고 흥미로웠다. 낯가림이라는 특수성을 엄마 뱃속에서부터 가지고 태어난 저와는 정반대로, 성찬의 주변에는 꼭 최상급 아이템 강화에 성공하는 순간 화려한 특수효과가 반짝이는 것처럼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실거렸다.
“ 식사는 괜찮았어? “
” 냇,내가 사려고 했는데···.“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계산하려고 했는데 이미 성찬이 선결제를 끝냈다는 얘기를 들었다. 역시나 계획에 없던 일이다. 시뮬레이션을 그렇게 다양하게 돌려봤지만 밥값을 성찬이 계산하는 경우의 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꽤 비싼 것 같았는데···.
쿨하게 영수증을 거절하고 카드만 돌려받는 넓고 높은 등짝에 대고 작게 하소연을 하자 성찬은 금세 몸을 돌려 환하게 웃었다.
” 다음에 네가 사면 되지. “
“ 엥? 우리 또 봐..? ”
“ 왜? 싫어? “
잠깐만, 비상. 또 만난다고? 게임 말고 이렇게 밖에서?
“ 아니, 그그그런 게 아니라- ”
“ 차 마시러 가자. 너 커피 좋아해? “
” 커피? 아니 그닥... 아, 근데 성찬ㅇ.. “
” 나도 커피는 별로. 일할 때 동료분들이 챙겨주시는 거 아니면 굳이 내 손으로는 잘 안 사 먹게 되더라. 어차피 시간도 늦었으니까 카페인 있는 커피보단 다른 음료가 괜찮겠지? “
아 식은땀 나. 어째 매운 음식을 먹을 때보다 더 땀이 많이 나는 기분이다. 그것도 모르고 정성찬은 또 성큼성큼 그 긴 다리로 앞장서 나간다.
결국 물 흐르듯 스무스하게 카페까지 안착. 이 빌딩 숲에 이런 느낌의 카페가 숨어있는 줄은 몰라서 한 번 더 놀라고, 성찬이 사 온 딸기 초코케이크가 맛있어서 또 한 번 놀랬다. 다음 크리스마스 업데이트에는 광장 언덕 느티나무 아래에 있는 토끼가 딸기 초코케이크를 주도록 만들어야겠다.
작은 포크를 물고 업데이트 패치나 구상하고 있는 저를 본 성찬이 또 눈을 반달로 접으며 웃었다. 왜지? 왜 자꾸 웃지.. 설마 아까 밥 먹으면서 입가에 뭐가 묻은 건가. 영문을 몰라 눈을 둥그렇게 뜨는 제게 성찬이 ’귀엽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바람에, 그때마다 사레가 들려 한참을 잔기침에 시달렸다.
“ 내일도 게임하러 들어올 거지? ”
“ 응···.”
“ 오늘 재밌었어. ”
“ 나,나도. ”
카페를 나와 아까 처음 만났던 대로변을 향해 걷는 동안에도 끝까지 말을 더듬는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원래 긴장하면 더 심해진다는 것을 잘 알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평소보다 유독 더했다.
성찬이 건너온 횡단보도 앞에서 나란히 멈추었다. 벌써 시간은 열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 아, 참. 이거 너 주려고 가지고 왔는데. ”
“ 어? ”
“ 별거 아니야. 부담 갖지 말고 집에 가면 열어봐. ”
성찬이 아까부터 쭉 들고 있었던 쇼핑 봉투를 내밀었다. 내용물을 알 수 없는 포장에 의심이 들어 차마 받아들지 못하고 방황하는 제 손을 성찬은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답싹 끌어당겼다. 지난 세 시간 동안 오른 심박수만으로도 그간 산송장처럼 살고 있던 제 심장에는 충분히 무리가 컸다. 그러니 지금 이 짧은 스킨십은 거의 크리티컬 데미지에 가까웠다.
“ 원빈. ”
“ 어..? ”
“ 괜찮으면, 우리 가끔 이렇게 밖에서도 만날래? ”
받아 든 선물이 무엇인지 추정하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던 뇌가 조금 전 성찬이 한 제안을 듣고 다시 경고 알람을 보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그것도 처음 들어보는 명령어가 쏟아져 들어온 탓이다.
“ 마,만나면 뭐 하려구.. “
” 글쎄. 그냥 근처이기도 하니까 오늘처럼 밥도 먹고, 얘기도 하고? “
” 그럼 이제 게임은 안 해..? “
오프에서 만나자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성찬이 더 이상 언리얼라이즈에 들어오지 않는 거였다. 그랬다간 개발자 박원빈의 입장에서는 가장 큰 목적을 잃는 셈인데, 아무리 양질의 식사와 디저트를 한 푼도 내지 않고 몽땅 얻어먹었다 한들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찬은 오늘 같이 보낸 시간 내내 지었던 예쁜 미소와 함께 자신의 걱정을 발로 뻥 차서 날려 버렸다.
” 에이- 게임은 게임이고, 이건 또 별개지. 광장에서는 늘 아홉 시에 보는 거야. 대신 주에 한 번 정도만 오늘처럼 만나서 게임 말고 다른 얘기도 하고 밥도 같이 먹으면서 친구처럼 지내자. “
어쩜 사람이 이렇게 자연스럽지? 가상으로 구현한 아바타의 인공적인 한계를 해결하려 실제 인물의 얼굴을 가져와 AI를 사용한 캐릭터 생성을 개발한 사람으로서는 성찬의 모든 부분이 신기하기만 했다. 사람에 대한 경험이 다른 이들의 겨우 절반 값인 박원빈은 그 능수능란함에 벌써 거하게 오류가 난 셈이었다.
“ 그래.. 그럼. ”
결국 그렇게 됐다.
게임은 늘 그렇듯이 오후 9시 광장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리고 주에 한번, 금요일 저녁엔 가볍게 이 근처에서 만나 식사를 하기로 약속을 맺고 나서야 성찬은 저를 집에 보내주었다.
과부하로 열이 올라 뜨끈해진 마른 몸이 침대에 고스란히 파묻혔다. 간만에 회사로 출근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 알아챈 병우 형의 부재중 전화가 벌써 열통을 넘어서고 있지만 오늘은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게 잔소리를 빼면 시체나 다름없는 강병우라면 더더욱.
성찬이 준 선물은 평범한 게임용 헤드셋이었다. 가타부타 설명 따위 필요도 없을 정도로 선물의 의미는 아주 명확했다. 게임을 하는 동안에도 이젠 글자 대신 목소리를 직접 들으며 얘기하고 싶단 뜻이다.
아 나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스피치 학원을 등록해야 하나 고민이다. 아까 너무 바보처럼 보였던 거 아닌가. 온갖 걱정을 다 쏟아내던 그때, 병우의 부재중 전화(13건) 위로 성찬이 보낸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 집에 잘 들어갔지? 푹 쉬고 내일 만나자
금요일의 가을밤이 이렇게 더웠던 적이 있었던가. 조금 전까지 제 눈앞에서 움직이던 예쁜 얼굴과 남산만 한 덩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믿어지지 않았다.
성찬. 성찬이. 정성찬. 성찬이 형.
아무도 없는 깜깜한 집 안에서 성찬의 이름을 조용히 읊조리던 원빈이 마지막 ‘형’이 붙은 호칭을 내뱉자마자 얼굴 위로 이불을 당겨 덮었다.
이건 명백한 사기극이었다. 당사자인 정성찬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될, 아주 작고 사소하지만 동시에 위험하기도 한 거짓말을 박원빈은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내던지고 있었다.
이쯤 되면 쉽게들 추리할 수 있겠지만, 박원빈은 언리얼라이즈(Unreal:ze)의 개발자다. 그리고 박원빈은 BB게임즈의 숨겨진 대표이사면서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대주주이기도 했다.
표면적으로 BB게임즈의 등기 대표이사는 강병우다. 박원빈 휴대폰의 통화목록에서 90%의 지분을 차지하는 [병우 형]이 바로 그 강병우 되시겠다.
강병우가 없었다면 결코 언리얼라이즈(Unreal:ze)를 세상에 내놓지 못했을 것이다. 게임 하나 만들고 런칭하는 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보통 사람의 범주로는 절대 상상조차 못 한다. 강병우는 그걸 해결함으로써, 조기 입학한 대학 생활에 적응 못 하고 기숙사에 처박혀 게임만 만들던 열 여덟 살 천재 박원빈의 꿈을 실현해냈다. 물론 언리얼라이즈(Unreal:ze)에 대한 지분 20%도 함께 얻어냈지만.
강병우가 그만한 자금을 조달해 온 결정적인 임무를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50%의 지분을 확보하지 못한 것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직도 언리얼라이즈(Unreal:ze)는 최초 개발자인 박원빈 원툴로 모든 신규 패치가 배포된다. 밤이나 낮이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박원빈은 모니터 앞에 앉아서 주구장창 자신의 게임에만 매달렸다. 그러니 사람으로 치면 언리얼라이즈(Unreal:ze)는 엄마와 아빠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아니고, 박원빈 혼자 무성생식으로 낳은 복제인간쯤 되는 거다. 그러니 강병우는 양심껏, 그나마 욕심을 쪼-금 부려서 겨우 20%의 지분만 자기가 먹기로 했다.
문제는 그 20%의 지분에 박원빈의 보모와 대리인 노릇도 같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지만... 보모라기엔 좀 우습긴 한데, 연락이 안 되면 직접 집으로 찾아와 모니터 앞에서 쓰러져있는 건 아닌지 일일이 확인하는 일은 아무리 고급스럽게 표현해봤자 ‘집사’를 넘어서지 못했다.
아무튼 박원빈이 스무 살 때 런칭한 게임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덩달아 강병우도 어마어마한 돈방석에 앉았다. 그런데 대표이사이자 원툴 개발자 박원빈은 돈을 그만큼 쥐고도 놀 생각을 안 했다. 그러니까 적당히 직원을 부려서 자기가 하는 일을 나눠줘야 하는데 말 그대로 메인 업무는 본인이 전부 다 끌어안고 있으면서 끽해야 사소한 버그 수정 같은 잡무만 비싼 인력에게 던져주는 꼴이었다. 결국 메인 개발자에게 여유가 없다는 말인 즉, BB게임즈의 신작 게임 출시 또한 감감무소식이란 얘기다.
강병우는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이 부분 때문에 한참 전부터 속이 썩어 문드러진 상태였다. 언리얼라이즈(Unreal:ze)를 출시한 지 벌써 4년이 지났다. 여전히 시중에 존재하는 비슷한 RPG 게임 중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1위를 유지하고 있으나 사람들은 곧 싫증을 느끼고 떠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우려는 지난 1분기 실적 분석 결과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충성도가 높은 고인물들은 남아서 자기들만의 리그를 하고, 신규 가입자들은 그들과의 높은 장벽을 체감한 나머지 일정 레벨에 도달하기도 전에 빠져나가는 단계에 도달한 상황이 빼도 박도 못 하는 수치로 나왔다. 이 자료는 투자자들에게도 똑같이 전달되었다.
강병우는 박원빈 대신에 바지사장(?) 자리에 앉아있던 관계로 투자자들과 주주들이 가득한 회의 석상에서 진땀을 뺐다. 언리얼라이즈(Unreal:ze)는 건재하다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찾아주고 있으며 신규 가입자들을 키우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고. 그리고 때가 되면 놀라운 업데이트 혹은 새로운 게임을 출시할 거라며 정작 박원빈은 동의하지 않은 구라를 뻥뻥 치고 나왔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박원빈도 이 소식을 들었다. 물론 강병우가 내민 1분기 실적 분석 자료와 함께 자신이 만든 게임이 하향 곡선에 진입했다는 얘기를 들으며 흡사 나라 잃은 백성의 표정을 지었다.
이 긴 이야기의 결론을 말하자면, 박원빈은 그날로 언리얼라이즈(Unreal:ze)의 마스터 계정이 아닌 보통의 신규 유저와 동일한 일반 계정을 만들었다. 아이디 생성 단계부터 자신의 얼굴을 끌어다가 아바타를 만드는 과정을 거치고, 거짓말 조금 보태 골백번은 더 들여다본 뻔한 튜토리얼이 끝날 때까지 보통의 신규 유저처럼 모든 단계를 꼼꼼히 직접 체험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자신의 미감에서 조금 어긋나는 아바타의 기본 착장 ‘하얀색 반소매 티셔츠’가 마음에 들지 않아, 마스터 계정의 힘을 조금 빌려 민소매로 수정하긴 했다. 그치만 그거 말고는 정말로 맹세코! 다른 이들과 차별점은 없었다.
매일 쓰고 있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벗고 80%의 적용률을 거친 자신의 아바타는 꼭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박원빈은 마이너스 한참 아래를 맴도는 시력을 가진 지 오래라 안경을 안 쓴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까먹은 상태였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봐도 꽤 잘생긴 얼굴의 캐릭터를 마주하고도 그게 전부 AI가 설정해준 보정 값 덕분인 줄 알았다. 오프에서 마주한 정성찬이 자기 얼굴을 보고 ‘똑같이 생겼다’라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정성찬은 박원빈에게 있어 [신규 유저의 게임 적응 단계 분석]이라는 어마어마한 과제의 ‘표본’이었다.
우연히 마주한 Bambi01 이라는 신규 유저는 때마침 생일 케이크라는 히든 아이템을 찾지 못하고 서버를 빠져나가는 중이었고, 박원빈은 한 사람이라도 더 붙잡아보려는 욕심에 매우 친절하게 느티나무 아래의 토끼굴까지 직접 안내했다. 그 끝에 Bambi01은 자신에게 게임 메이트가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솔직히 박원빈은 거절하고 싶었다. 언리얼라이즈에는 길드 기능이 없다. 모든 하위 개발자들이 꼭 필요한 기능이라고 제안서를 수십 수백 번 올렸지만 박원빈 선에서 족족 잘려나갔다.
‘길드? 그런 걸 만들어 놓으면 나같은 애들은 아무 데도 못 끼잖아. 그냥 솔플해. 바깥에서도 쌓는 친목을 귀찮게 뭣 하러 게임에서도 쌓아?’
마지막으로 길드 제안서가 올라왔을 때 반려하던 박원빈의 말을 듣던 강병우는 그날부터 자기 휴대폰 저장명에 박원빈을 [히키코모리]로 바꾸었다.
여튼, 길드 기능도 거부한 히키코모리로서 Bambi01의 제안은 썩 유쾌하지 아니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강병우가 던지고 간 1분기 분석 자료가 떠올랐다. 레벨 20도 못 채우고 우수수 빠져나가던 신규 유저의 절벽 곡선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자신이 그려지는 순간, 박원빈은 Bambi01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Bambi01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캘 수 있었다. 개인정보 보호법? 그딴 거 개나 주라지. 메인 개발자이자 마스터 계정을 가진 언리얼라이즈의 군주 박원빈이 이곳에서 못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환상을 깨고 싶진 않았다. 예상외로 Bambi01은 다정한 면이 있었으며 흔히 남자 유저들이 하는 무지성 몬스터 때려잡기식 플레잉을 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매일 저녁 9시’라는 약속시간에 칼같이 들어와 자신을 찾아냈다.
박원빈은 사실 그 시간에 늘 회사에 출근해 있었다. 오후 두세 시는 되어야 겨우 자다가 눈을 뜨는 야행성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2년 전 강병우가 집에서 쓰러진 박원빈을 발견한 이후로 평일에는 몇 시든 좋으니 무조건 회사에 나와서 일을 하라고 강요했다. 그나마 회사에 출퇴근하는 시간만이라도 몸을 움직여서 이른 나이에 혈전으로 뒤지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냐는 기적의 논리에 박원빈은 조용히 설득당했다.
그래서 대부분 퇴근을 한 저녁 7시가 되면 매일 같이 BB게임즈 사옥에 후드 셋업을 입은 남자 하나가 걸어와 사진이 없는 사원증을 태그하고 꼭대기인 12층으로 가는 임원용 엘리베이터를 탄다.
12층에는 강병우와 박원빈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출입이 불가능했다. 대표이사실과 비서실이 나란히 있지만 비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 6시 반까지 퇴근을 완료하는 것이 계약 조건이었고, 모두 다 떠난 7시가 되면 그때는 온전히 박원빈만이 존재하는 공간이 된다.
병우가 쓰는 대표이사실 안쪽에는 숨겨진 문이 있었다. 원빈은 조금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곳은 또 하나의 집이었다. 커다란 모니터 여러 개와 쌩쌩 돌아가는 고성능의 컴퓨터들, 현란하게 빛나는 키보드까지 모든 부분에 박원빈의 취향이 온전히 담겨있었다.
이 공간은 동업자이자 보모인 강병우조차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그리고 매일 9시가 되면 선명하고 큰 화면에 Bambi01의 예쁘장한 아바타의 얼굴이 가득 찼다. 100일이 넘는 기간 동안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은 것은 정말 조금이라도 Bambi01에게 못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익숙지 않은 자신을 들키는 것만큼 박원빈에게 수치스러운 일은 없다.
그러나 Bambi01은 마치 능숙한 헌터가 드래곤의 비늘이 사라진 부분을 찾아 불화살을 쏘듯이, 기어이 박원빈의 말랑말랑한 구석을 찾아내 게임 바깥의 현실로 끌어내고 말았다.
———
‘ 내일모레 약속 안 잊어버렸지? ’
‘ 어엉.. ‘
난 너처럼 그렇게 약속이 많지 않은데... 아직도 헤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성찬의 목소리가 어색하기만 하다. 성찬이 선물로 준 헤드폰은 정작 아까워서 쓰지도 못했다. 그 대신 서랍에 대충 처박아 뒀던 한참 비싼 헤드폰을 아무렇게나 머리 위에 얹었다.
‘ 먹고 싶은 거 진짜 없어? ’
‘ 웅···. 없어. ’
‘ 이번엔 조금 멀리 갈래? ’
‘ 엥? 어,어디로? ’
‘ 그냥 판교만 아니면 아무 데나? 매번 똑같은 동네는 지겹잖아. ’
당황스럽다. ‘멀리’라는 기준이 보통 사람보다 무척이나 짧은 저로서는 성찬의 제안을 무작정 받아들이기가 좀 힘겨웠다.
‘ 어디 갈건데에···. ’
‘ 뭐.. 강남이나 논현도 가까우니까 일단 밥부터 먹고 나서 천천히 생각해도 되지 않나? ‘
’ 아, 정해놓지두 않고오- ‘
제 투정 섞인 목소리에 성찬이 반대편에서 호탕하게 웃었다. 그에 맞춰 화면 속 성찬의 아바타도 같이 따라 웃는다. 아무리 봐도 실물보다 한참 못하단 말이지. 만약 성찬이 자신의 아바타가 못생겼다고 클레임을 건다고 해도 회사에선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 너만 괜찮으면 이번엔 같이 쇼핑도 좀 했으면 좋겠어. ‘
’ 쇼핑..? ‘
’ 응. 겨울 코트를 좀 사고 싶은데- 너도 알잖아. 나 그렇게 센스가 좋은 편은 아닌 거. ‘
세 번째 만났을 때였나? 성찬이 식당에서 입고 있던 후드를 벗었는데, 티셔츠에 웬 괴상망측하게 눈이 툭 튀어나온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방망이를 들고 저를 바라보고 있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물어보니 그 비슷한 뉘앙스의 티가 집에 여러 장 더 있단다. 솔직히 지금 제 옷도 후드 셋업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포인트도 살아있는 디자이너 브랜드인데...
’ 그럼 그렇게 해. ‘
’ 와- 드디어 판교를 벗어나네. ‘
그동안 성찬이 끌고 다니는 대로 판교 곳곳을 다 돌아다녔다. 그러니 이제 질릴 만도 하지. 게다가 입고 나갈 일은 없지만 쇼핑을 좋아하는 저라서 나름 옷을 보는 눈도 괜찮다고 자부한다.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의 약 80%는 정성찬의 칭찬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지만, 어쨌든 도와달라고 말한 사람이 인정하는 정도면 된 거 아닌가?
‘ 아, 그리고 있잖아. ’
‘ 어? ’
‘ 너 크리스마스에 뭐해? 혹시 약속 있어? ’
박원빈은 이 질문을 듣자마자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 게임 개발자로서 크리스마스 시즌이란 이벤트 패치를 하는 날이다. 뇌를 거치지 않고 당당하게 ‘ 크리스마스 이벤트 업데이트 ’ 라고 대답하려다가 황급히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 크리스마스는 왜..? ’
‘ 바빠? ’
‘ 아,아니,먼저 이유를 좀, ’
‘ 금요일은 아니긴 한데 아무래도 너도 그날은 쉴 것 같아서. 시간 되면 만날래? ’
엥? 바쁘게 폰을 들어 캘린더 앱을 열었다. 성찬의 말대로 금요일은 아니다. 대신 24일이 금요일이고 25일이 토요일이었다. 어.. 그럼 금요일에 만나지 말고 토요일에 보자는 건가?
‘ 그럼 금요일엔 안 만나? ’
‘ 아니? 금요일에도 당연히 봐야지. ’
‘ 에엥? ’
‘ 내 말은 이틀 내내 시간 되냐는 거야. ’
이틀이나 보자는 성찬의 말에 과연 어떤 의미가 담긴 건지 잠시 추론을 해본다. 금요일은 금요일이고 토요일은 토요일이라 생각하기에는 너무 두 날짜가 붙어있는 데다가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라니! 이건 좀 불미스럽지 않나 싶어 대답을 섣불리 하지 못했다.
‘ 왜 대답이 없어? ’
‘ 모.. 뭐 할 건데에···. ’
‘ 또 계획이 필요해? ’
‘ 이, 이틀이나 만나려면 나도 준비를 좀 해야지···. ’
이틀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확연히 달라진다. 아직 한 달이나 남았지만 그래도 나 같은 파워 내향형 방구석 히키코모리한테는 마음의 여유라는 게 필요하다고.
‘ 일단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명동에 가자. ’
‘ 뭐? 명동? 왜..? ’
‘ 거기 조명이 예쁘잖아. 백화점 건물 전면에 화려한 조명이 들어오는데 꽤 볼만하더라구. ’
왠지 작년에 짧은 인터넷 동영상으로 떠도는 것을 본 것 같다. 물론 그때도 실제로는 볼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성찬은 이미 여러 번 본 것처럼 말하면서도 굳이 또 그곳에 가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에 명동이면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은데...
‘ 크리스마스엔 밖에 사람 너무 많지 않을까···.‘
’ 그 재미로 다니는 거지. ‘
’ 아 그래.. 그럼 크리스마스에는 뭐 할 건데? ‘
’ 음···. ‘
제 질문에 고민하는 듯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더니만 갑자기 화면 속 성찬의 아바타가 눈부시게 찰랑이는 민트빛 바다로 뛰어들었다. 쟤 갑자기 왜 저래? 돌고래 이벤트 시간이던가? 시계를 확인해봤지만 이미 돌고래 출몰 시간으로 설정된 시각은 지난 지 오래였다.
이제 레벨이 꽤 높아진 성찬의 등엔 금빛으로 빛나는 화려한 날개가 돋아 있었다. 그리고 제 등에는 푸른색으로 빛나는 그와 동일한 모양의 날개가 있다. 현실감을 강조하기 위해서 언리얼라이즈의 모든 공간에서는 물에 빠지면 캐릭터들이 입고 있는 옷이 투명하게 젖고 이동 속도가 절반으로 뚝 떨어진다. 그래서 유저들은 낚시를 하더라도 뗏목이나 배를 만들어 이용했고, 꼭 물에 들어가야만 하는 경우는 돌고래의 등에 히치하이킹해서 용궁 이벤트에 참여하거나 펭귄 상인과 물물교환을 할 때 뿐이었다.
그러니 성찬은 지금 기행을 하고 있었다.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만든 게임이라지만, 개발자의 관점에서 저런 유저는 정말 당혹스럽다.
’ 박원빈, 너도 들어와 봐. ‘
’ 시러어.. 속도 느려져. ‘
’ 어차피 곧장 사냥하러 갈 것도 아니잖아. ‘
’ 아 왜애- ‘
아예 바다에 벌러덩 누웠다가 일어난 성찬의 아바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어 미끄덩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픽 팀이 그래도 이런 부분에는 꽤 공을 들인 티가 난다. 젖은 머리를 털자 물방울 하나하나가 현실과 다름없어 보일 정도로 섬세하게 흩날리는 것이 제 눈에도 보였다.
성찬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터벅터벅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 본다. 발이 젖고 무릎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점점 아바타의 이동속도가 늦어지는 것이 체감된다.
’ 여름엔 우리 바다 보러 가자. ‘
’ 크리스마스 얘기하다 말고 가,갑자기 무슨 여름이야- ‘
’ 그냥 진짜 바다에 가고 싶어져서 그래. 너랑 같이. ‘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당황한 나머지 옆에 놓아둔 텀블러를 찾다가 하마터면 키보드 위로 음료를 죄다 엎어버릴 뻔했다. 텀블러 안에는 성찬이 지난주에 사준 이름 모를 티백을 우린 차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달짝지근한 캐러멜 향이 나는 부드러운 홍차는 생각보다 제 취향이었다.
난장판이 될 뻔한 테이블을 치우느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게임 속 아바타는 멀뚱히 서 있었고 성찬은 가만히 제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 싫어? ‘
’ 어..어? 뭐가? 왜? ‘
’ 바다 말야. ‘
’ 아···. ‘
다시금 붉어지는 얼굴을 마른 손으로 벅벅 쓸어내렸다. 현실에서 얼굴이 빨개진다고 해서 게임 속 아바타마저 똑같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오늘따라 고맙고 또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고민하는 사이에 화면에 담긴 성찬의 아바타는 붉은 빛깔이 감도는 머리카락에서 투명한 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성찬의 얼굴을 닮아서 그런지 젖은 모습도 촉촉하니 투명하기 그지없다. 본체보다 못한 가상현실의 캐릭터지만 제가 본 어느 유저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결국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무리 덥고 뜨거운 뙤약볕이라 해도, 설령 거기에 습하고 비릿한 바닷가의 바람까지 더해진다 해도 지금 제가 넋을 놓고 바라보는 화면처럼 아름다운 모습의 성찬이 있다면 충분히 인내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 ... 같이 가. ‘
’ 응? ‘
’ 바다 보러 가자구. 근데 너무 더,덥고 사람 많을 때는 싫어···. ‘
갑자기 크리스마스 계획을 세우다 말고 내년 여름부터 기약하게 되었다. 박원빈 인생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오늘도 또 한 건 기록된다. 정성찬과 시간을 오래 보낼수록 항상 이런 식으로 일이 흘러갔다. 게임 속에서도 엉뚱한 행동을 종종 하던 성찬은 현실에서는 정말 예측이 불가능한 거대한 랜덤 뽑기 기계 같았다. 오락실의 인형 뽑기도 아니고 불투명한 볼 안에 상품이 갇힌 뽑기 기계. 박원빈은 이상하게 그 불확실한 충동에 이끌려 자꾸만 동전을 집어넣었다.
헤드폰 너머에서 성찬의 웃음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온다. 굳이 글자로 표현하면 (와하학-) 이 되려나. 그리고 그 웃음소리 끝에 게임 속 제 아바타를 끌어안은 성찬의 아바타가 풍덩 민트빛 바닷속으로 잠겨 들었다.
———
큰마음 먹고 강남까지 진출한 보람도 없이 만족스러운 쇼핑을 하지 못했다. 저녁까지는 성찬이 미리 알아봐 둔 맛집에서 어떻게 잘 먹었는데, 제가 고른 쇼핑 장소 선택이 미스였다. 괜찮은 해외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만 취급하는 편집숍을 고른 것이 화근이었다. 그러니까 디자인은 절대 문제가 아니고 주로 가격이 마지막에 구매욕을 확 떨어뜨렸다.
성찬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코트는 너무도 많았다. 사람의 기본 틀이 워낙 출중한지라 편집숍의 코디네이터도 바짝 따라붙어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양한 옷을 추천했지만, 여러 벌의 시착 끝에 가격 태그를 확인한 성찬이 조용히 옷을 벗어두면서 끝내 구매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성찬은 애써 아쉬운 기색을 감추었다. 분명 마음에 드는 스타일이 있는 것 같았는데 날이 더 추워지면 사도 될 것 같다며 긍정적인 마인드로 그 아쉬움을 가렸다.
그런데 이제는 박원빈이 문제였다. 그날 쇼핑을 다녀온 이후로 자꾸만 샵에 그냥 벗어두고 온 롱코트가 눈에 밟혔다. 물론 제가 입고 싶어서는 아니고 성찬이 입은 모습이 아른거렸다. 급기야 가격이 얼마인지 확인하려고 간만에 인터넷에서 의류 브랜드 사이트를 이곳저곳 헤매고 다녔다.
“ 히이익... 왤케 비싸···. ”
그리고 그 끝에 성찬이 입어봤던 제품을 찾아낸 순간, 저 역시도 가격을 보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 빈티지라 그런가? 심지어 단종된 모델이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사지 못한 것이 아쉬워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차라리 비슷한 디자인으로 이번 시즌에 새로 나온 코트가 더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산다. 게임 속에서는 부족하면 얼마든지 더 만들어 낼 수 있으니 그토록 비쌀 의미가 없는데, 현실에서는 더 이상 생산해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오래된 것이 더 비싸게 팔리는 이상한 광경을 자주 목도하게 된다.
두고 온 코트(정확히 말하면 사지 않고 내려 두고 온 코트)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며 침대 위에서 뜬 눈으로 가만히 누워있던 원빈이 알람에 맞춰 슬슬 회사로 나갈 채비를 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기모가 짱짱하게 든 후드 셋업을 꺼내 입었다. 강병우가 조금이라도 나와서 움직이라는 의미로 출근을 하라고 했지만 어차피 얼마 되지도 않는 짧은 거리라 과연 출근에 큰 의미가 있나 싶었다. 가죽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으며 또다시 코트 생각이 났다.
아.. 이 신발이 얼마였지. 그리고 이 셋업은 얼마였더라. 생각해보니 지금 착장만 합쳐도 코트 하나 가격이 충분히 나왔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회사에 출근하면 바로 인터넷으로 주문을 넣어야지. 성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코트를 떡하니 안겨줄 생각에 들뜬 BB게임즈 공동 대표 박원빈은 짧은 출근길 내내 답지 않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근데 왜 쟤가 저기에 있어?
그러나 출근길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오후 6시 45분. 오늘따라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각에 회사에 도착한 원빈의 새까만 뿔테 안경 프레임 속에, 피부는 허여멀건 하고 몸은 대문짝만한 남자가 가득 들어찼다.
성찬이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정장 차림에 자세를 꼿꼿이 펴고 있지만 분명히 저건 정성찬이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 건물 보안 ‘
처음 얼굴을 본 날, IT 쪽에서 보안 일에 종사한다는 거짓말을 하던 제게 성찬이 우스갯소리로 자신은 건물 보안을 한다고 가볍게 대꾸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근데 그 건물이 우리 회사라고는 말 안 했잖아...!
원빈이 급하게 머리 위로 후드를 뒤집어썼다. 자, 이제 선택해야만 한다. 모른 척 시선을 피해 사진이 박혀있지 않은 사원증을 찍고 성찬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할 것이냐, 그게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등을 돌려 집으로 돌아갈 것이냐.
히키코모리 박 대표는 지금 일생일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4장.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를 진행해주세요.>
“ 자, 해명을 좀 해보시지. 지난 2주간 우리 박 대표님은 왜 출근을 안 하셨을까? ”
보모가 집으로 들이닥쳤다. 여기서 말하는 보모는 역시나 BB게임즈의 대표이사 강병우다. 박원빈은 대답을 하기 이전에 시계를 한번 쳐다봤다. 이제 막 저녁 8시. 조금 있으면 성찬이 접속할 시간이다. 요즘 성찬은 정각 9시가 아니라 그보다 5분 더 일찍 들어오기 때문에 아무리 늦어도 8시 50분까지는 병우를 쫓아내야만 한다.
“ 왜 대답을 안 하지? ”
“ 아.. 그냥 쫌···. ”
“ 그냥? 그냐앙?! ”
강병우는 이번 달 내내 해외 출장 예정이었다. 물론 한 달 내내 일만 하는 건 아니고 박원빈 대신 두 배로 일하느라 연말까지 못 쓴 휴가도 좀 섞어서? 아무튼,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지구 반대편의 어딘가에서 한가로이 휴양을 즐기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강병우는 한국에 헐레벌떡 돌아왔다. 왜냐고? 박원빈의 출근 기록이 장장 14일을 꽉 채워서 전무했기 때문에.
“ 내가 말했지. 너 그렇게 집에만 있다가는 혈전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뒤지는 수가 있다고. ”
“ 나 운동해, 한다고.. 봐봐- 저기. 저기 풀업바도 있고, 러닝머신하고.. 어! 나 팔굽혀펴기랑 윗몸일으키기도 매일 해- 보,보,복근 보여 줄까? ”
“ 하.. 내가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
혈전을 핑계로 대긴 했지만 사실 그것보다 중요한 출근의 의미는 조금이라도 밖에 나와서 사람들과 부대끼는 법을 배우라는 거였다. 물론 박원빈도 그걸 모르진 않았다. 평생 이렇게 집안에서 게임 화면만 쳐다보고 살 수 없고, 병우도 계속해서 자신의 보모 노릇을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치만 지난 2주간 출근하지 못한 이유를 털어놓자니 혹시나 병우가 성찬을 찾아내 뻘짓이라도 할까 봐 무서웠다.
“ 아악-! 답답해 죽겠네!! 너 진짜 아직도 히키코모리라는 말이 멋있게 들리냐? ”
“ 그런 거 아니야아- ”
“ 그럼 왜! 왜 출근을 안 해? 혹시 누가 12층에 올라왔어? 너 때문에 일부러 비서도 빨리 퇴근하라고 했는데 뭐가 또 문제야? “
2주간 아팠다고 할까? 아니다. 그랬다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병원에 끌려가서 종합검진을 받을 때까지 꼼짝도 못 할 것이 분명하다. 울산에 다녀왔다는 핑계도 통하지 않을 테고, 여행? 그런 건 믿어줄 리가 없지. 제가 입을 다물고 버티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다. 성찬을 만날 시간이 가까워지자 초조한 마음에 다리가 달달 떨렸다. 남은 시간은 30분. 그 안에 병우를 문밖으로 쫓아내지 않으면 성찬에게서 분명 전화가 올 것이다.
“ 형, ”
“ 어. 나 듣고 있어. ”
“ 있잖아.. 내가 사람을 하나 사귀었는데.. ”
“ 뭐?! 사람? 자,자자잠깐만. 네가? 누구를?!! ”
결국 정면돌파를 택한다. 어차피 병우가 아니면 지금의 고민을 들어줄 사람도 없고 마땅한 조언을 해줄 사람도 없다.
“ 어.. 그러니까 그 사람이 누구냐면···. ”
“ 빨리 좀 말해봐. 답답해 죽겠네. ”
“ 문지기야. ”
“ 어? 뭔 소리야 그게. 너 혹시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어떻게 됐어? 아니면 뭐, 지금 광장 진입하는 구름다리 문지기 캐릭터에 업데이트 패치 들어간다는 얘길 하는 거야? ”
“ 아니이- 진짜 문지기라고···.”
아 그.. 뭐라고 하더라. 경비는 아니고 그...
“ 아! 보안요원! ”
“ 보,보안..? 설마 건물 입구에 서 있는 정장 입은 그거? ”
“ 응! 그거! 키 크고 막 까만 정장 입고 이렇게 서서 ‘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 라고 말하는 사람! ”
손바닥을 보여주며 보안요원의 낮은 목소리를 흉내 내는 저를 바라보는 병우의 눈빛이 싸늘했다. 왜...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 진짜야? 근데 보안요원하고 뭐.. 인사라도 했어? ”
“ 아니- 사귄다니까.. ”
“ 야이씨.. 제대로 처음부터 설명 안 해? 사람을 사귄다는 정의가 로맨스인지 프렌드십인지 그것부터 명확하게 구분하라고. 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제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좀 하라고 누누이 얘기했지. ”
대화 주제가 바뀌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은 박원빈과 강병우 사이에 종종 벌어지곤 했다. 박원빈은 자기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마법사의 언어로 신나게 게임 설명을 하고, 강병우는 못 알아듣는 그런 상황.
“ 자, 천천히 하나씩 물을게. 대답해 봐. ”
“ 웅. 아니 근데 빠,빨리 물어봐.. 나 시간 없어 형. ”
“ 어디서 만났어? ”
“ 게임에서. ”
“ 하... 그럴 줄 알았다. ”
“ 근데 밖에서도 만났어. 일주일에 여섯 번은 게임! 하루는 오프! ”
“ 네가 밖에 스스로 나갔다고? 그것도 사람을 만나러? ”
“ 응. 우리 벌써 여덟 번이나 만났는데? 만나면 밥 먹고 쇼핑도 해! “
이 대목에서 강병우의 시름이 깊어졌다. 사람 감정을 읽는 데는 영 소질이 없는 박원빈 눈에도 강병우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일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거 아닌가?
‘ 얘를 어떡하면 좋지···. ’
강병우는 얼마 전 뉴스에서 본 로맨스 스캠 범죄를 떠올려 본다. 강박증에 대인기피증이 있는 박원빈이 어쩌다가 사람을 만나러 밖에 나가게 된 걸까. 대부분 로맨스 스캠 피해자들은 외로움에 사무쳐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거나, 그게 아니라면 상대방의 외모가 지나치게 잘난 경우가 많다던데···.
“ 예뻐? ”
“ 엥? ”
“ 보안요원. 그 사람 예쁘냐고. ”
“ 어... 예뻐. 되게 예뻐. 근데 커. ”
“ 크다고? 뭐가? 얼굴이? ”
“ 아니. 얼굴은 작은데 얼굴 말고는 전부 다 커. ”
강병우는 조금 전 얻어낸 단서로 인해 지금까지 박원빈이 설명한 ‘보안요원’이란 사람에 대한 정의를 새로 내릴 필요성을 느꼈다. 예쁜데, 크다. 이게 보통의 여자한테 해당하는 말이 맞아? 아니 애초에 보안요원이란 직업군에 여성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던가? 심지어 박원빈이 보안요원이라고 하기 전에 문지기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낸 강병우는 설마 하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 설마 남자는 아니지? ”
“ 남자 맞는데...? ”
“ 야, 박원빈-! ”
강병우는 매일 아침마다 처방약으로 눌러둔 자신의 혈압이 치솟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고 두야- 결국 이 히키코모리가 사고를 치는구나. 이건 신종 로맨스 스캠인가? 대체 얼마나 잘났으면 같은 사내새끼를 후릴 정도지? 머릿속에 온갖 험한 상상이 다 드는 와중에 게임 빼고는 세상 물정에 깜깜한 눈앞의 바보 천치는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헤실 웃고 있다.
“ 형이 뭘 걱정하는지 나도 잘 알아, 아는데.. 성찬이 착해. 형이 생각하는 그런 나쁜 사람 절대 아니야. ”
“ 성찬이? ”
“ 응. 이름이 성찬이야. 정성찬. 근데 사실 나보다 한 살 나이 많아. 나름 IT 보안 쪽에서 일한다고 둘러댔는데 나이가 너무 어리면 이상하잖아.. 그래서 그냥 같은 나이라고 둘러댔어. “
” 가지가지 했네. 하- “
박원빈은 거짓말을 했다는 얘기를 하며 뭐가 잡힐 것도 없는 비쩍 마른 가슴을 손으로 슥슥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쫄릴 짓을 애초에 왜 하냐고! 왜!
” 아무튼 형, 근데 성찬이가 우리 건물에서 일을 해.. 나,나는 진짜 맹세코 몰랐어! 출근할 때도 퇴근할 때도 본 적이 없었다니까? 근데 2주 전부터 갑자기 성찬이가 문 앞에 서 있는 거야. 그럼 내가 어떻게 출근을 해! 막···. 이,이 꼬라지를 해가지구- “
” 너 얼굴 봤다며? 벌써 여덟 번이나 만났다고 했잖아. “
” 아니 그건.. 이 모습이 아니었지...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 나는 그냥 평범한 IT 보안 담당자라고 했는데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줄 알면 분명히 하나하나 물어볼 거고. 그게 아니더라도 데스크에 내 이름을 물어볼 수도 있는 건데 그럼 나는 또 유령이라 직원 명단 조회해도 안 나오잖아. 나와도 문제긴 하지만···.”
원빈이 출근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다.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온 그 날 게임에 접속한 성찬에게 바로 물었다.
‘ 너 판교 어디서 일해? ‘
그리고 돌아온 답은 역시나 였다.
’ 나? 어... 이 게임 만든 회사인데, BB게임즈라고 혹시 너도 알아? ‘
알지, 왜 모르겠어. 내가 그 회사의 유일한 게임인 언리얼라이즈(Unreal:ze)의 개발자이자 대표이사인데.
‘ 왜? 아니 이게 아니지... 어,어어언제부터..? ‘
’ 올해 초..? 1월 말이었나… ‘
올해 초부터 근무했다고? 난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제가 아무리 주변 사람에 관심이 없다 해도 그렇지 성찬과 매주 꾸준히 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못 알아볼 정도의 꽉 막힌 눈썰미는 아니다. 어쩌면 서로의 생활 시간대가 갑자기 겹쳐질 만한 어떤 이벤트가 생긴 걸지도.
그리고 그 답은 결국 직접 묻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 혹시 근무 시간은 어떻게 돼? ’
‘ 아, 원래 8시에서 5시 근무였는데 이번에 근무 시간을 전체적으로 조정하는 바람에 11시에서 8시로 바뀌었어. 그래서 요즘엔 퇴근하자마자 바로 노트북부터 켠다니까- ‘
으악... 이게 문제였구나. 조용히 머리를 쥐어뜯는 제 속도 모르고 성찬은 그래도 금요일에 만나기로 한 거에는 지장이 없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애매한 시간에 일하게 된 만큼, 금요일 하루만큼은 항상 아침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유연 근무를 하는 거로 고정해뒀다고 하는데... 사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금요일은 어차피 나도 너 만나야 해서 출근을 안 한단 말이야..!
“ 그래서 계속 회사를 안 나오시겠다? 그럼 여덟 시 이후에 나와. 어차피 야행성인 너한테는 7시나 8시나 그게 그거 아니야? ”
“ 혹시 모르잖아. 성찬이 퇴근길에 마주칠 수도 있구, 사람 일은 또 모르는 거니까 조심해야지. 그리고 9시에 서버에서 만나기로 한 것 때문에 더 늦게 회사에 출근하면 너무 빠듯해. 나 같은 애들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서버에 들어갈 순 없다고.. ”
“ 아니.. 하- 너 그 친구한테 평생 네가 BB게임즈 대표인 걸 속일 생각이야? ”
핵심을 찌르는 병우의 말에 원빈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자기도 여기까지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한 거다. 처음에는 그저 신규 유저의 게임 적응 단계를 파악하기 위한 접근이었는데, 그 목적은 어느새 사라지고 우정이라 보기에도 모호한 감정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사이에 가볍게 뱉었던 사소한 거짓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몸집을 부풀린다. 용기를 내어 성찬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도 이제 자기 몸보다 훨씬 커진 거짓 덩어리가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 잘 모르겠어 나도···.”
“ 원빈아, 박원빈. ”
“ 형. 근데 나.. 저기 있는 옷들 성찬이 만나면서 처음으로 입어봤어. 예쁘다고 욕심내서 사 놓고도 솔직히 평생 밖에서 입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
원빈이 손가락 끝으로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옷장을 가리켰다. 병우가 집에 찾아올 때마다 열어보며 농담조로 ‘히키코모리가 무슨 옷이 이렇게 많냐’며 비꼬던 바로 그 옷장이었다.
“ 성찬이가 나보고 잘 어울린대. 센스 있다고, 예술하는 사람 같다고 말했어. 그러고는 나한테 같이 옷 좀 골라 달라고 부탁하더라···. ”
“ 야, 그건 그냥 빈말로, ”
“ 빈말이어도 고맙잖아. 나한테 잘생겼다, 귀엽다, 센스 있다 그런 말해 주는 거 들어본 지 너무 오래돼서 이젠 기억도 안 나는데... 걔는 그냥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 내가 아무리 밥을 깨작거려도 빨리 먹으라는 독촉 대신에 밥 잘 먹는다고 오히려 칭찬하는 애야. “
“ ... ”
“ 나 걔가 좋아, 형. 성찬이가.. 그냥 좋아. ”
박원빈을 알고 지낸 이래로 처음 듣는 말이었다. 게임 말고 다른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줄을 서서 사와야 하는 유명 일식집의 스시를 포장해다 바쳐도 맛있다는 말을 할 뿐, 결코 무언가를 특정해서 좋아한다는 말은 한 적은 없었다.
게임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는 아이. 강병우가 처음 만났던 열 여덟 살 언저리의 소년 박원빈은 어느새 훌쩍 자라 애달픈 첫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떡해. 어리숙한 녀석이 첫사랑에 설레하고 한편으로는 가슴 졸이는 모습을 보모의 심정으로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 형, 나 이제 서버 들어가야 해. 성찬이가 기다려. ”
“ 잠깐만 하나만 더. 1분만! ”
“ 뭔데 또- ”
8시 50분이 되자 칼같이 모니터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는 원빈을 다시 붙잡았다.
“ 형이 말했지, 누가 너한테 돈 빌려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랬어? ”
“ 아아- 진짜- ”
“ 대답. ”
“ 연락 차단하고 도망가라고···.”
“ 어, 잘했어. 그것만 기억해. 그리고 돈 있는 척 절대 하지 말고. 네가 먼저 어디 가서 계산하려고 들지도 말고. ”
“ 내가 먼저 안 사! 오히려 맨날 성찬이한테 얻어먹고 다니는데···.”
“ 그 친구가 산다고? ”
“ 응. 열 번중에 여덟 번은 성찬이가 산다구..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미안해 죽겠는데... 씨잉- ”
순간 강병우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박원빈의 첫사랑이 실패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
같은 남자라고 해서 비관적으로 바라봤던 미래를 잠시 조정해본다. 아주 작은 가능성일지 몰라도 만약에 정성찬도 박원빈과 같은 마음이라면? 그렇다면 앞으로 박원빈의 인생은 물론이고 언리얼라이즈(Unreal:ze)와 BB게임즈의 미래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 형, 이제 좀 가. 나 바쁘다고! ”
“ ... 알았어. 알았다고. ”
“ 나 마중 안 나간다. 잘 가- ”
매정한 새끼. 기껏 금이야 옥이야 키워놨더니 사랑에 눈이 멀어서 동업으로 맺어진 두터운 의리도 내팽겨쳤다. 강병우는 옆에 던져두었던 폰과 차키를 챙겨 들었다. 지금 와서 둘러보니 집안이 몹시 깨끗하고 전보다 꽤 사람 사는 느낌이 났다. 아까도 말했듯이 요즘 운동을 열심히 하는지 한쪽에는 체질량까지 측정해주는 체중계까지 가져다 둔 것으로 보아 박원빈은 아주 본격적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었네. 알아서 잘살고 있었구먼.
씁쓸한 기분을 삼키던 병우는 문을 나서다 말고 도로 돌아와 원빈의 귀를 막은 헤드셋을 열어젖혔다.
“ 으악- 형 미쳤어?! “
” 야, 너 크리스마스에 뭐하냐. “
“ 뭐... 패치 말하는 거야? 더블 보상 이벤트? ”
“ 아니 그거 말고. 너 뭐하냐고 너. ”
그 말에 잠시 렉 걸린 로봇처럼 눈만 꿈벅거리던 박원빈이 갑자기 두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옹알거리는 발음으로 예상했던 이름을 꺼냈다.
“ ... 성찬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
“ 하... ”
“ 왜에- 어차피 이벤트 패치는 23일에서 24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돌려 놓을 거라고! 그럼 나 그때 쉬어도 되잖아! ”
누가 일 시키려고 그러는 줄 아나.. 이 멍청이가.
도대체 이 천지 분간 못하는 바보를 데려다가 인내심 좋게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정성찬이란 인물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갈수록 궁금해졌다.
“ 아니다. 하던 거 해라. 아무튼 크리스마스 연휴에는 쭉 그 친구랑 같이 있는다는 거지? ”
“ 웅. 그러니까 나 출근 안 하더라도 찾으면 안 돼. 알았지? “
“ 어어- 그래. 절대 연락 안 할게. 혹시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크리스마스 끝나고 연락하마. “
다소 소름 끼치는 농을 던졌음에도 박원빈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헤드폰을 고쳐 쓰고 서버 접속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강병우는 차마 자식(?)의 연애놀음을 볼 자신이 없어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시간에 박원빈의 집으로 발길을 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5장. 강화에 도전해보세요. (성공 확률은? 비밀입니다 > ᴗ•)>
[Web발신] 안녕하세요. 신세계백화점 본점 더 리저브 XXXX 매장입니다. 고객님께서 픽업 요청하신 제품이 매장에 도착했음을 안내드립니다. 언제든 편하신 시간대에 방문해주세요. 궁금한 점은 아래의 매장 전화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남은 하루 편안한 시간 되세요. 02-310-0000
성찬에게 선물하려고 산 코트가 매장에 도착했다는 연락이었다. 택배로 받아 집에서 부터 들고 나갈까 고민해봤지만 큰 부피의 쇼핑백을 들고 인파가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은 없을 것 같아 매장 수령으로 주문을 넣었다. 어차피 크리스마스이브엔 백화점 외벽에 들어오는 조명 점등을 같이 구경하기로 했으니 겸사겸사 찾으러 간다면 동선이 맞을 것이다.
아마 잘 어울리겠지...?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르겠지만 제 기준에서 고작 이 정도의 금액만으로 그동안 성찬에게 받은 것들을 갚기엔 아직 많이 부족했다.
“ 에취- ”
씨잉- 하필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추워... 이렇게 사람이 많은 날 나오는 것도 긴장돼서 죽겠는데 밤에 눈이 온다는 기상 예보가 기어이 맞아떨어질 모양인지 바깥 날씨도 야박하게 굴었다. 성찬이 가능하면 같이 이동하자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둘 다 차가 없어서 명동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하는데 오늘 같은 날 솔직히 그 인파 속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결국 근처에서 보기로 약속하고 일찍 나가서 택시를 탔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인터넷에 쌓인 사람들의 크리스마스 점등식 후기와 금요일 저녁의 교통체증 시간까지 고려한 박원빈의 시뮬레이션은 결코 틀린 법이 없었다.
나름 크리스마스 TPO에 맞춰 입은 화이트톤의 부슬부슬한 집업 후리스 사이로 한기가 새어 들어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멋이고 뭐고 롱패딩 입을걸 그랬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작 박원빈 옷장의 그 많은 옷 중엔 롱패딩처럼 못생긴 옷은 하나도 없었다.
잔뜩 오그라드는 몸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빡빡하게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성찬을 찾아본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만큼 체력과 정신력의 소모가 컸다. 괜히 나온다고 했나? 뒤늦은 후회를 하려던 찰나, 저 멀리 인파를 뚫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장신의 남자가 보였다.
성찬이다. 길이가 짧은 검은색 패딩점퍼에 진으로 매치한 성찬이 저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왜 이렇게 일찍 왔어- ”
“ 태,택시가 좀 빨리 도착해서···. ”
“ 택시 탔어? ”
“ 우웅... 엣취- ”
찬 바람이 불면서 공들여 정리하고 나왔던 제 머리카락 사이를 죄다 헝클여 놓았다. 오늘 성찬은 일이 끝나고 바로 온 상황이라 출근하면서 살짝 만져둔 머리 스타일 그대로였다. 웬만한 바람에는 가볍게 흔들리기만 하는 정돈된 앞 머리카락 사이로 매끈한 이마와 짙은 눈썹이 드러났다. 평소 세팅되지 않은 모습으로만 만나다가 근무 시간에나 볼법한 멀끔하고 정갈한 스타일로 나타난 것 때문인지, 오늘따라 성찬을 바라보는 원빈의 심장이 제멋대로 쿵닥쿵닥 비트를 요란하게 찍어댔다.
“ 많이 추워? 보기에 예쁘기는 한데 너무 춥게 입은 거 아니야? ”
“ 괘,괜찮아. ”
“ 아무래도 너무 추울 것 같은데···. ”
코를 훌쩍이는 저를 빤히 보던 성찬이 시간을 한번 확인하곤 갑자기 손목을 덥석 잡았다.
“ 머,머뭐뭐야- ”
“ 잠깐만. 저기 잠시만 들렀다 가자. ”
“ 으엥? ”
망설임 없이 손목을 잡은 채로 앞서나가던 성찬이 의류 소품을 파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박원빈은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정성찬에게 각종 디자인의 겨울 모자로 인형 놀이를 당하다가, 끝내 입고 나온 옷과 가장 비슷한 색상의 아이보리색 비니 하나를 쓰고 나왔다.
“ 좀 덜 춥지? ”
“ 웅.. ”
“ 그거 쓰니까 너 되게 어려 보인다. 누가 보면 나보다 어린 줄 알겠어. ”
본래 나이를 걸린 줄 알고 하마터면 딸꾹질이 튀어나올 뻔했다. 쇼윈도에 스치듯 비친 제 모습은 동그란 비니와 입고 있는 옷의 복실한 소재 때문에 정말 평소보다 한참 어려 보이긴 했다. 그에 비해서 성찬은 꼭 자신의 보호자처럼 크고 듬직한 모습이었다.
본의 아니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먼저 받아 버렸다. 성찬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를 감싸는 따뜻한 모자의 감촉에 원빈의 마음도 덩달아 몽글몽글하게 데워졌다.
조명 점등식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거리에는 사람이 더 늘어났다. 가장 명당이라고 말하던 자리는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차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대신 성찬이 이끄는 대로 조금 안쪽 모서리에 자리를 잡은 뒤, 아직은 보통의 연말과 별반 다르지 않은 건너편 대로를 멍하니 바라보던 참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비와 눈의 어설픈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함박눈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소복한 눈송이가 마법이라도 부린 듯 하늘에서 퐁퐁 쏟아져 내렸다.
“ 와... 화이트 크리스마스네. ”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성찬의 얼굴에서 순수한 기쁨이 비쳤다. 제가 다른 것은 잘 알아보지 못해도 지금 성찬의 저 표정은 분명히 그 어떤 거짓과 과장도 없는 행복이라는 것만큼은 무엇보다 확신할 수 있었다.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눈 소식에 시큰둥하던 박원빈은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흩날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는 성찬의 순수함을 직접 마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이렇게 나온 의미를 충분히 충족하고도 남았다.
“ 이제 1분 남았어. ”
“ 아.. ”
이제 드디어 켜지는구나. 제 귓가에 대고 카운트다운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알리던 성찬이 뒤에서 밀어오는 사람들을 방어하며 조금 더 몸을 붙여왔다. 그리고,
“ 원빈아, 너랑 오늘 여기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너무 좋다- ”
혼잡하고 시끄러운 주변 소음을 뚫고 성찬이 살짝 웃으며 건넨 귓속말이 아주 간지럽게 살랑이며 고막을 지나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찌르르 전기처럼 흘러 들어간 감각은 이내 홧홧한 열감이 되어 온몸의 세포를 깨우고, 주체할 수 없이 거세게 뛰는 심장 박동으로 되돌아 나온다.
원빈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옆에 굳건히 버티고 선 성찬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잠시 거리가 암전되는가 싶더니, 곧 화려하고 반짝이는 조명이 동시에 켜지면서 서늘하기만 하던 왼쪽 손에 뜨겁고 단단한 체온이 맞닿아왔다.
“ 시작한다. ”
성찬의 시선은 현란하게 움직이는 미디어아트 스크린과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트리의 조명에 머물러 있었지만, 커다랗고 따뜻한 손은 어느새 자신의 딱딱하고 차가운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성찬의 얼굴 위로 무지갯빛 조명이 어른거렸다. 고운 선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조명과 눈이 내리는 배경이 더해져 성찬의 얼굴은 오늘따라 더욱 감성적이고 또 아름다웠다.
박원빈은 그 짧은 3분의 시간 동안 정작 누군가가 1년 내내 공을 들여 만든 아름다운 그래픽과 조명의 향연은 전혀 보지 못했다. 대신, 자신의 손을 잡은 성찬의 귀 끝이 그 어느 때보다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바라보며 설렘에 파닥이는 심장을 몰래 진정하느라 바빴다.
완벽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처음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약 한 달 전, ‘우정’인지 ‘사랑’인지부터 분간을 하라고 당부하던 강병우의 질문에 이젠 답을 내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 번 잡은 손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점등식이 한차례 끝나고도 한동안 그 자리에서 서 있던 두 사람은 예약해둔 근처의 식당까지 걸어가는 내내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의 손을 잡고 걸었다.
매번 성찬이 골라둔 식당은 늘 맛이나 서비스 부분에서 모두 만족스러웠다. 날이 날인지라 양식 메뉴를 고른 것도 꽤 센스있는 선택이었다. 잘 구워진 화덕 피자 한 쪽을 먼저 덜어주는 성찬의 배려는 몇 달이 지나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오늘로 벌써 열세 번째 만남이었다. 명절을 맞아 성찬이 본가에 갔던 주간을 제외하곤 한 주도 이 약속을 거른 적이 없다. 그 사이에 박원빈은 단순히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조금 더 잘 보이고 싶어서 운동을 시작했고, 바깥에 나가기 위해 미리 날씨를 검색하는 습관이 들었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식사를 마치기 전에 원빈이 먼저 빌지를 챙겨 품 안에 감추었다. 오늘만큼은 성찬이 전부 계산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결국 정성찬이 박원빈 고집에 백기를 들었다. 애초에 정성찬은 박원빈을 이겨 먹을 수가 없다. 백 명 가까이 되는 직원들이 수시로 길드 기능을 넣자는 제안을 넣어도 매번 족족 잘라내던 BB게임즈 개발 리더의 옹고집은 아마 그 누구도 쉽게 꺾지 못할 터였다.
뿌듯하게 계산을 마치고 자신의 카드를 집어넣는 저를 보던 성찬이 도저히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환하게 웃었다.
“ 따뜻한 차라도 마시러 갈까? ”
“ 아니, 나 자,잠깐 들릴 데가 있어. ”
“ 응? 어디? ”
“ 아까 그 배뱁백화점 있잖아.. 거기에서 찾을 게 좀 있어. ”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싶은데 입이 말을 안 들었다. 다행히도 성찬은 제가 말을 더듬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 성찬의 선물을 찾으러 간다. 이것만 성공하면 그야말로 완벽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였다.
“ 손. ”
잠시 손이 떨어져 있기가 무섭게 성찬이 먼저 제 쪽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가볍게 저를 향해 던진 말이 꼭 애완동물한테나 할법한 말 같아서 살짝 헛웃음이 나왔지만 손은 그보다 빠르게 성찬을 향하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길을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걷는 일이 내 인생에도 있을 거라 생각 못 했는데... 횡단보도에 서서 빨간 불을 바라보며 괜한 감상에 젖어가던 즈음이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폰에서 짧지 않은 긴 진동이 여러 번 반복해서 울렸다. 발신자는 [병우 형]. 내일까지는 죽어도 연락을 안 하겠다고 하던 사람이 대체 왜? 고민하던 중에 횡단보도의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 뭐해? 가자. “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움직이지 않는 저를 보던 성찬이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끊어졌던 강병우의 전화는 곧장 다시 제 손바닥 위에서 울리고 있었다.
” 전화 때문이야? 그런데 왜 안 받고 있어. “
” 어.. 그러니까 그게···. “
결국 건너지도 못하고 신호가 다시 빨간 불로 바뀌었다. 이걸 받아야 하나? 괜히 또 일부러 나 놀리려고 전화한 거 아니야? 평소에 장난기 넘치는 병우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그런데 부재중이 벌써 세 통을 기록하고도 곧장 다시 전화를 걸어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 원빈아, 급한 전화면 나 신경 쓰지 말고 받아도 돼. “
” 미안.. 나 잠깐 통화 좀 할게. “
성찬의 배려로 잠시 거리를 떨어뜨려 본다. 매서운 속도로 부재중 전화 다섯 통을 연달아 기록한 병우의 전화가 이제 막 여섯 번째가 되던 참이었다.
” 형? 왜 전화했어어..! “
- 원빈아. 야, 큰일 났다. 미안한데 너 지금 회사로 좀 와, 당장.
” 뭐?! 가,가가,갑자기? 왜! “
제 큰 목소리에 놀란 성찬이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다가 가까이 오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저지해보려 했지만 그 사이에 귀를 파고든 병우의 말 때문에 원빈은 그만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 서버가 터졌어! 아예 우리 게임이 접속이 안 된다고!!
” 아니 그,그게 무슨 말이야? 형..! 혀혀,형이야 말로 알아듣게 천천히 설명을 좀 해줘야지..!!! “
- 뭘 더 얼마나 설명을 해! 안 열린다니까!! 안 열려! 아무것도 안 열린다고!!
———
“ 원빈. 원빈아, 일단 진정하고. 지금 바로 판교로 가면 되는 거야? ”
“ 어어.. 어 나 빨리 가,가야 해. 자자잠깐만 택시.. 택시가..! ”
“ 내가 잡아줄게. 같이 가. ”
멘탈이 단숨에 무너져내렸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몰라도 언리얼라이즈(Unreal:ze)의 접속단계부터 모든 것이 먹통이라는 얘기에 박원빈은 정제된 말을 내뱉지도 못하고 고장 난 로봇처럼 버벅거리기만 했다.
복잡한 크리스마스의 대로 한복판에서 택시를 잡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홀로 여기 있었다면 패닉상태에 빠져 분명 이대로 기절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지금 제 옆엔 성찬이 있었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어렵게 택시를 잡아낸 성찬이 저를 뒷좌석으로 힘껏 밀어 넣었다.
“ 오,왜왜왜 같이 타?! ”
“ 같이 가. 데려다줄게. ”
당연히 여기서부턴 혼자 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옆을 비집고 차에 올라타는 성찬으로 인해 오히려 당황스러움이 배가 되었다. 기사님이 정확히 판교 어디로 가면 되냐는 질문에 얼버무리는 저 대신 성찬은 항상 우리가 만나던 회사 근처를 말했다.
- 너 어디야! 오고 있어??
” 나 태,택시타고 가는 중이야 형···. “
- 얼마나 걸리는데! 야 그냥 마스터 계정 알려줘. 여기서 일단 할 수 있는 걸 먼저 하고 있을 테니까,
” 그그그거 아무데서나 못 들어가..! 내,냇,내가 설정한 컴퓨터에서만 들어갈 수 있다고..! “
- 아오···. 알았어. 알았으니까 빨리 튀어 와.
마음이 급한 병우가 언리얼라이즈의 마스터 권한을 오픈해달라고 연락했지만 그렇게 쉽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제집에 있는 컴퓨터 아니면, 대표이사실 옆 백룸에 자리한 컴퓨터로만 접속할 수 있도록 설정해놓은지라 무조건 자신이 건드려야만 했다.
대체 뭐지.. 뭐 때문에 갑자기 서버가 멈춘 거지? 내가 이벤트 패치를 잘못 업데이트한 건가? 아니면 외부 클라우드 장애인가? 요 며칠 크리스마스 약속과 이벤트 패치 두 가지를 한꺼번에 신경 쓰느라 자신이 매우 산만했던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바였다.
꽉 막힌 도로 위, 거북이걸음으로 나아가는 택시 안에서 원빈은 다리를 떠는 동시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불안함에 잠식되어가던 찰나 성찬이 손을 다시 잡아 왔다.
“ 너무 초조해하지 마. 금방 도착할 거야. ”
“ 으응.. ”
겨우 손바닥을 통해 전해오는 체온일 뿐인데도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시의 평화였을 뿐이었다.
눈이 오는 바람에 나올 때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려서 판교로 되돌아왔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회사 방향으로 몸을 돌리는데 뒤에서 저를 부르는 성찬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박원빈! ”
마음이 급하면 저렇게 큰 사람도 눈에 안 보일 수도 있구나. 인사도 하지 않고 다급하게 먼저 떠나려 한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것만 같았다. 성찬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정신없던 사이에 택시에 두고 내린 모자를 조심스레 씌워주었다.
“ 뛰지 말고, 조심해서 천천히 가. 너 그러다 넘어져. ”
” 아.. 미안. 정신이 없어서 두고 내렸나 봐. “
“ 괜찮아, 너 지금 정신없잖아. 회사는? 회사는 어디야? ”
주변을 둘러보며 회사를 묻는 성찬의 모습에 원빈은 비로소 지금 이 상황이 커다란 실수임을 깨닫는다. 미쳤다.. 미쳤어, 박원빈.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얘랑 여기까지 같이 왔어? 성찬이 보는 데서 BB게임즈 건물로 들어가는 일은 그간의 거짓말을 모두 털어놓는 것과 같은 자살 행위였다.
어떡하지?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해? 벌써 열 번째로 울리는 병우 형의 전화와 주변의 건물을 두리번거리는 성찬의 모습까지 겹쳐 걷잡을 수 없는 패닉 상태에 돌입하고 말았다.
“ 나.. 나는... 저기..! SP소프트..! 저기, 저기에 다녀. ”
“ 여기서 너무 멀진 않아서 다행이다. 우리 회사 옆이네. ”
“ 어어.. 그래? ”
“ 얼른 들어가 봐. 일 끝날 때까지 근처에서 기다릴까? ”
“ 아니! 아니야! 지금 들어가면 언제 나올지 몰라! 그,그러니까 먼저 집에 가.. 냇,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미안···. ”
성찬에게는 BB게임즈 옆 건물의 다른 회사명으로 둘러댔다. 아직은 아니야. 지금은 모든 것을 털어놓기에 결코 적당한 타이밍이 아니다.
게다가 문제가 간단한 수준이라면 두어 시간 안에 서버 점검까지 마무리할 수 있겠지만 그조차도 지금은 확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추운 겨울임에도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타고 흘렀다. 역시나 같이 축축해진 손바닥에선 여전히 저를 찾는 강병우의 전화가 계속해서 울렸다.
“ 나 갈게···. ”
“ 응. 잘 될 거야, 원빈아. ”
잠시 저를 품에 안고 귓가에 행운을 빌어주던 성찬의 입술이 아주 짧게나마 제 볼 위로 닿았다 떨어졌다. 너는 내가 지금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 이렇게나 다정한 거겠지. 씁쓸하다 못해 아릿하기까지 한 기분에 가슴 한쪽이 쿡쿡 쑤셨다.
다행히도 SP소프트의 사옥 입구는 열려 있었다. 어느 IT회사나 마찬가지로 비상 근무자 1명 정도는 크리스마스이브인 오늘도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로비로 진입하면 분명 경비원에게 가로막히겠지만 일단 성찬의 의심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가 본다. 두근두근 뛰다 못해 목구멍으로 튀어 나오려 드는 심장을 꾹 눌러가며 박원빈은 그렇게 팔자에도 없던 연기를 했다.
예상대로 무슨 일로 방문했냐는 묻는 보안요원에게 화장실 핑계를 대고 남의 건물에 조금 더 머물렀다. 강병우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었다. 정확히 10분을 카운트하고 난 뒤에야 SP소프트 건물을 빠져나왔다.
사원증, 내가 사원증을 챙겼던가? 얼마 떨어져 있지도 않은 옆 건물 BB게임즈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박원빈은 뒤늦게 들고나온 가방을 뒤적거렸다.
“ 차..찾았다! ”
크지도 않은 로비 한 가운데에서 가방을 뒤적거리던 저를 이상하게 생각한 보안팀 직원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사원증을 손에 든 채, 마치 보물을 찾은 것 마냥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고 나서야 다가오던 발걸음은 멈추었다. 이제 저 출입구만 통과하면 금방이다. 병우 형이 컴퓨터는 미리 켜놨다고 말했으니 비밀번호만 입력하면 바로 복구 작업을...
“ 박원빈..? ”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 너를 다시 여기서 만나면 안 되는 건데...
조금 전 인사를 마치고 지금쯤 집으로 향하고 있어야 할 성찬이 제 등 뒤에 서 있었다. 제가 들고 있던 출입 카드는 순식간에 성찬의 손으로 이동했다. 보통의 직원들과는 확연히 다른 사원증. 사진도 없고 이름도, 사번도 없으나 그것이 BB게임즈의 출입 카드라는 것은 우측 하단에 박힌 선명한 로고가 증명하고 있었다.
“ 서,성찬아···. ”
“ 너 왜 여기에 있어? ”
성찬의 왼쪽 볼이 살짝 솟았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끝이 위로 향하는 짙은 눈썹은 그 각이 조금 더 기울어져 처음 보는 서늘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눈치도 없이 원빈의 휴대폰에서 다시 진동이 일었다.
아무래도 산타 할아버지는 거짓말을 한 소년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절대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6장.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 내,내내가 다 서,설명할게···. ”
원빈이 눈에 띄게 벌벌 떨었다. 무려 열 세 번을 만나는 동안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알아 온 193일 중에도 처음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분명히 10여 분 전에 원빈은 바로 옆 건물인 SP소프트 사옥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린 자신이기에 지금 이 상황이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왜? 설마 일부러 속인 건가? 같은 회사라는 걸 알면서도 왜 말을 안 했지? 도대체 언제부터 숨긴 거야?
도저히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지금을 이해시켜줄 사람은 역시나 딱 한 사람, 박원빈뿐이었다.
“ SP소프트에 다닌다며. ”
“ 아니,아니.. 그러니까- ”
어쩌다 보니 낚아챈 사원증이 이제야 자세히 보인다. BB게임즈 로고는 분명한데 제가 매일 지겹게 보는 직원들의 그것과는 너무 많이 달랐다. 이름도 사진도 없는 밋밋한 카드. 뒷면에 당연히 쓰여 있어야 할 사원번호는 온데간데없고 [B-0] 라는 알 수 없는 두 글자만 남아있었다. 이런 게 있었다고? 거의 1년 가까이 일하면서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사원증 양식이었다.
“ 있잖아, 내가 다 설명, 아니, 해,해명할게.. 근데 지금은 안 되구 이따가, 아니! 내일..! 내일 다시 시간을 잡아서, “
“ 야! 박원빈! 너는 도착했으면 빨리 올라올 것이지 왜 아직도 거기서 그러고 있어..!! ”
평소보다 말을 더듬으면서도 어떻게든 뭐라도 해명하려는 기색이 역력한 원빈을 멈추게 만든 건 성찬이 아니었다.
출입구 안쪽 엘리베이터 통로에서 나온 이는 이미 성찬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강병우 대표이사. BB게임즈의 수장인 사람이 크리스마스이브의 늦은 저녁 시간에 회사에 나와 박원빈의 이름을 부르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 너 대표이사님하고 아는 사이야? “
” 으응.. 성찬아- 진짜 미안해애, 근데 정말로 지금은 시,시간이 없어.. “
미안하다는 말과 지금은 아니라는 말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는 원빈의 손끝이 애처롭게 성찬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오해할 수도 있지만 이건 누군가를 붙잡는 의미를 담은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옷 소매 끝, 자신의 손에 들린 사원증을 어서 되돌려달라는 의미였다. 이제 원빈의 표정은 곧 울 것 같이 보였다. 택시에서 오는 내내 불안함에 잘근잘근 씹어댄 입술에는 핏기가 맺혔고, 발갛게 변한 눈매엔 축축한 물방울이 어룽지고 있었다.
끝내 손에 든 플라스틱 카드를 내어준다. 제 궁금증을 해결하는 일이 급하단 이유로 원빈을 울리고 싶진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이 급한 대표이사는 원빈의 이름을 부르며 출입구 옆에 서 있던 자신의 동료에게 어서 문을 열어주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 가 봐. “
” 미안해..! 내,내가 일단 급한 것만 끝내고.. “
” 얼른 가. 대표님이 기다리시잖아. “
가라는 말을 했는데도 원빈은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느라 쉽게 돌아서지 못했다. 내가 먼저 가야 하는 거네. 그렇지 않으면 넌 가고 싶어도 마음이 불편해서 못 갈 테니까. 결국 성찬은 스스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특별한 출입 카드를 쥔 원빈의 손이 그제야 자신을 붙잡으려 다시 앞으로 튀어나왔지만, 일부러 못 본 척 등을 돌리고 멀어졌다. 매일 같이 저 뒤편에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던 BB게임즈의 출입구를 향해, 정성찬은 그렇게 성큼성큼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서부터였을까?
대부분의 짐작과 달리 지금의 이 질문은 박원빈을 향한 것이 아니라 정성찬 스스로를 향한 질문이다.
언제부터 제 마음이 이렇게 된 거지? 크리스마스이브자 금요일 밤의 혼잡한 지하철 안에서 홀로 외로이 자문자답 인터뷰를 하던 성찬이 한숨을 허공에 푹- 내쉬었다.
박원빈에 대한 기억을 거꾸로 되짚어 첫인상을 떠올려 본다. 처음에는 같은 게임을 하는 유저, 그다음엔 조금 더 알고 싶어 지는 대화 상대, 그리고 그다음은 저와는 많이 다르지만 취향을 공유하고 싶은 친구였다.
정성찬은 언제나 꾸준한 사람을 동경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한 가지 일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매일 꾸준한 자세로 변함없이 대하는 사람. 그게 일이 되었든, 취미가 되었든, 하물며 어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되었든 간에 변덕을 부리지 않고 일관적인 자세로 꾸준함을 보이는 사람을 매우 대단하게 평가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건 자신에게는 없는 점이었으니까.
원래 타고난 성격이 그러했다. 한 가지 일에 깊이 몰두하더라도 그 길이의 영속성만큼은 결코 길게 유지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한 달, 반년, 일 년, 나아가 십 년 뒤까지 계획을 세운다고 하는데 저는 그저 작심삼일을 백 번 반복하는 것으로 일 년을 채우는 사람이었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그 또한 꾸준함의 범주에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그건 ‘부지런함’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나마 살면서 제일 오랜 시간 해 온 운동은 고작 5년을 채우지 못했고, 그걸 그만두고 부랴부랴 입시 준비를 한 끝에 사회체육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닥쳐보니 이것도 적성이 아닌 것 같아 빠르게 군에 입대했다. 학교로 다시 복학한 뒤로는 어차피 해야 하는 거 빨리 끝내자는 마음으로 졸업을 서둘렀고, 그 끝에 졸업장 받을 즈음엔 막상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도 모르는 상황과 맞닥뜨렸다. 그러면서도 몸까지 놀게 뒀다가는 정말 본인 스스로의 한심함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 여기저기 되는 대로 일을 구하러 다니던 와중 한 건물의 보안요원으로 취직했다.
여기까지 제 인생의 최근 이야기는 대부분 충동적인 선택의 결과로 벌어진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자신이 한 선택을 원망하지 않고 어쨌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자신의 성실함은 ‘부지런함’의 일종이고 그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충동성을 보완하기 위한 불가항력으로 자라난 특성이었다.
정성찬은 그렇게 스물다섯이 되어서야 ‘부지런함’과 ‘꾸준함’이 다른 말임을 깨달았다.
박원빈은 꾸준한 사람이었다. 그건 박원빈이기 이전, ‘WB0302’이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만난 날, 겨우 게임 튜토리얼만 마쳐놓고서 이번에도 쉽게 싫증을 느끼고 돌아서는 저를 붙잡아 준 것도 원빈이었다. 매일 둘이 같이 게임을 하자는 제안을 한 것은 제 쪽이긴 했으나, 원빈이 만약 그 시간에 매일 들어오지 않았다면 금세 흐지부지되고 그만두었을 것이다.
원빈에게는 늘 계획과 루틴이 있었다. 닥치는 대로 움직이는 스타일인 저와는 다르게 매 시기마다 열리는 이벤트를 미리 알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언리얼라이즈의 다양한 체험 요소들을 아주 훤하게 꿰뚫었다. 정의를 내리자면 무언가에 대한 접근 방식과 사고가 저와는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원빈이 불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이어서 더 함께하고 싶고 또 알고 싶어지는 경우는 맹세코 정성찬 인생에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에도 충동이 강하게 작용했다. 실제로 대면하는 것은 좀 불편하다고 말하는 상대에게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졸라서 겨우 모니터 바깥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그 끝에 직접 마주한 원빈은 예상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게임에서 똑쟁이같이 굴던 모습과 다르게, 까맣고 커다란 눈을 도르르 굴려 가며 도톰한 입술을 연신 쫑알거리는 태도는 얼마 전 유튜브 숏츠로 본 까만 새끼 고양이의 집사 간택 영상을 떠오르게 만들 정도였다.
‘ 귀엽다. ‘
같은 나이의 남자애한테 할 소리는 아닌데 차마 그것 말고는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결국 성찬은 그날 원빈에게 귀엽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내뱉었다. 그리고 소개팅도 아니면서 애프터 신청을 했다. 다음에도 보자고. 아니, 매주 이렇게 한 번씩 요일을 정해놓고 얼굴을 보자며, 정성찬은 기어이 매주 꾸준히 해야 하는 일 하나를 더 만들어 냈다.
어느 순간부터 매일과 매주로 이어지는 모든 루틴에 원빈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성찬은 원빈이 말을 더듬는 것도 무려 다섯 번이나 얼굴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것도 박원빈이 직접 말을 꺼내고 나서야 눈치챘다. 그때 알려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상대방에게 무관심한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정도 말더듬은 원빈에게 전혀 흠이 되지 않는다고 이미 자신의 뇌가 무의식중에 굳게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스타일도 조금씩 바꾸어 나갔다. 만날 때마다 다른 스타일을 선보이는 원빈의 취향에 맞추어, 편리함에 대부분 초점이 맞춰져 있던 성찬의 옷장은 눈에 띄게 다른 무드로 바뀌어 나갔다.
당장 내일의 계획조차 세우지 않던 사람이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어서 크리스마스에 가장 예쁜 조명을 볼 수 있는 곳을 찾고, 분위기가 좋은 식당에 예약을 하면서, 내년 여름에 같이 가기로 한 바다를 지금부터 떠올려 본다.
그러니까 어쩌면... 처음 게임에서 만났던 그 날부터 정성찬은 조금씩 박원빈에게 스며들고 있던 걸지도. 그리고 그 감정은 지난 시간 동안 맺어온 우정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임을 깨닫는 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원빈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아직도 아까 눈을 맞으며 잡고 있던 손의 온기가 남아있는 듯한데 지금 제 옆엔 아무도 없었다. 게임에 들어가 볼까 고민해봤지만 아까 BB게임즈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원빈이 자꾸만 떠올라서 컴퓨터 전원을 누르려던 손을 거둬들였다.
잠시 머리를 비우는 시간을 갖자. 지끈거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려던 성찬은 손가락 끝에 뻑뻑하게 걸려드는 세팅 헤어의 이질적인 촉감에 몸을 벌떡 일으키곤 이내 욕실로 사라졌다.
———
[ 24일(금) , 언리얼라이즈(Unreal:ze) 긴급 서버 접속 오류 발생. 전 세계 사용자 불만 폭주 ]
[ 잘 나가던 언리얼라이즈(Unreal:ze)의 추락? 서버 복구 작업에 난항 ]
[ (게임)언리얼라이즈 25일(토) 오전 10시 기점으로 서버 정상 복구 완료- 점검을 이유로 서비스는 일시 중단 ]
[ 전 세계 1위 RPG 게임, 언리얼라이즈(Unreal:ze) 24일(금) 랜섬웨어 공격받은 것으로 알려져 ]
[ AI+실물 기반으로 한 캐릭터 생성 문제는 없나?- 언리얼라이즈 해킹 사태로 초상권을 포함한 개인정보 보호법 적용 확대 필요성 대두 ]
[ BB게임즈 측, 이번 랜섬웨어 공격 관련하여 사용자 초상권을 포함한 개인정보 유출은 없었다고 공식 입장 발표 ]
해가 중천이 되어서야 느지막이 잠에서 깬 성찬은 혹시나 간밤에 도착한 연락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휴대폰을 열었다. 그러나 자신을 반기는 거라곤 인터넷 포털 사이트 전면을 차지한 BB게임즈와 언리얼라이즈(Unreal:ze)의 추락 소식뿐이었다.
간밤에 세상과 거리를 둔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저에게도 세상의 일부나 다름없는 언리얼라이즈의 서버에 문제가 생겼다. 1시간 이내의 가벼운 접속 오류도 아닌 완전한 셧다운 상태가 12시간에 걸쳐 발생했고, 문제는 지금 겨우 해결됐지만 게임은 여전히 점검 중이라는 오류 메시지가 걸린 상태였다. 눈을 뜨자마자 로그인 창이 닫힌 게임 화면을 마주한 성찬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았다.
‘ 내가 다 설명, 아니, 해,해명할게.. 근데 지금은 안 되구 이따가, 아니! 내일..! 내일 다시 시간을 잡아서, ’
‘ 성찬아- 진짜 미안해애, 근데 정말로 지금은 시,시간이 없어.. ’
‘ 미안해..! 내,내가 일단 급한 것만 끝내고.. ’
어젯밤 내내 부쩍 당황하던 원빈의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BB게임즈에 근무하는 것이 맞다면 서버 오류 사태 때문에 어제 긴급 호출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원빈은 처음 만났던 날 IT 보안 담당자로 근무한다고 말했다. 물론 그 또한 거짓말의 일부일지도 모르나, 지금 일어난 언리얼라이즈의 모든 사태와 대조해본다면 딱히 의심할만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왜 숨겼지..? 한 달 전 제게 어디서 근무하냐고 물었을 때 알려줬어도 되는 거 아닌가?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는 성찬의 손 틈 사이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여전히 원빈에게선 어떤 연락도 없고, 차마 일일이 열어보기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인터넷의 기사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곰곰이 떠올려 본다.
그리고 그 끝에 휴대폰을 다시 손에 쥔 성찬은 저장해두었던 근무 일정표를 확인하고 곧장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형, 오늘 오후 근무죠? 그거 제가 대신해도 돼요? “
———
크리스마스 당일에 근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기에 지난 한 달 내내 다른 사람 대신 주말 근무를 자처하여 겨우 얻어낸 오늘 하루가 결국 무용지물이 되었다.
” 왜 갑자기 근무를 바꿔준다고 그래- “
” 형도 오후엔 가족이랑 시간 보내셔야죠. 지금이라도 아기랑 근처 스케이트장이라도 놀러 가세요. 사람 너무 많을 것 같으면 동네 놀이터에서 눈사람이라도 같이 만드시던가요. “
” 하여간 기특한 놈.. 여튼 고맙다. 덕분에 한동안 와이프 눈치 보는 일은 없겠네. 어! 그리고 뉴스 봤지? 어제 서버 문제 때문에 기자들이 자꾸 내부로 몰래 들어오려 하니까 신경 바짝 써야 한다- “
같이 일하는 동료 형은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온 저를 보고 어느 때보다 활짝 웃었다. 건물 바깥에는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특종 소식에 뭐라도 건져보려 서성이는 기자들 몇몇이 보였다. 쉬는 날에 터진 일이라 수습은 좀 오래 걸릴지 모르나, 한편으로는 평일이었다면 드나드는 직원들 사이에 섞여서 저들 중 누군가는 내부까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로비는 비교적 고요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경비를 보는 김 주사님도, 데스크를 지키는 다른 동료도 전부 다 호들갑을 떨진 않았다. 전쟁터는 아마 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나오는 사무실이겠지. 아직 퇴근을 하지 못했다던 대표님과 아직도 그와 함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원빈이 가장 고통스러울 것이다.
“ 나 가볼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
“ 아! 용하 형, 저 잠깐만요.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
옷을 갈아입고 나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던 동료를 성찬이 다급히 불러 세웠다.
“ 혹시 사원증에 사진이나 이름이 없고, 사번 대신에 ‘B-0’ 라고 쓰인 걸 본 적 있어요? ”
용하는 보안팀 직원 중 이 건물을 BB게임즈가 매입하기 전부터 근무해 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어제 제가 본 원빈의 사원증이 의미하는 것을 알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 비.. 뭐? ”
“ B-0. 비-제로요. ”
“ 어... 모르겠는데? 그게 뭐야? 아니, 사원증에 사진이랑 이름이 없어? 손님용 임시 카드 아니고? ”
“ 아니요. 그건 아니었어요. 뒷면에 확실히 B-0 라고만 쓰여있었는데.. ”
고개를 갸웃하는 용하의 얼굴엔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용하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데스크 안으로 들어가 사내의 직원 조회 시스템을 열었다. 로비에는 사원증을 분실하거나 집에 두고 온 직원의 신원 조회가 가능하게끔 간단한 설비가 되어 있었다. 성찬도 잠시 태그 시스템 앞에서 벗어나 데스크로 향했다.
“ 자, 봐. 일반 직원들은 사번이 G로 시작하잖아. 입사년도에 따라서 G22-0001, G23-0001 뭐 이런 식으로? “
” 그러네요. “
” 근데 네가 말한 B? 그건 일반 사원 중엔 없어. “
” 음... “
” 그런데 만약에, 아주 만-약의 경우에 BB게임즈의 약자 B를 뜻하는 거라면? “
” 에? “
용하는 도통 답을 찾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다가 갑자기 사견을 곁들인 추리를 시작했다. 뜬금없이 BB게임즈의 B가 무엇을 뜻하는 걸지 생각해보자고 하더니 인사 검색 시스템에 누군가의 이름을 검색했다.
” 강병우. “
” 대표이사요…?“
” 강.병.우. 가운데에 B가 있잖아. “
” 에이.. 형 이름도 백용하잖아요. 그럼 형도 B여야지. “
” 우리가 사번이 어딨어? 이 회사 직원도 아니고 외주업체 소속인데. 그리고 난 B대신 P를 써. “
” 그건 그렇긴 하지만... “
” 이 가정을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야. 대표이사 사번을 확인하면 돼.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짠-! 모든 직원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사번을 조회할 수 있지. “
용하가 강 대표의 이름을 클릭했다. 그리고 곧이어 화면에 띄워진 사진과 사번을 확인한 순간 성찬은 더 이상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 이름 : 강병우
* 소속/직급 : 대표이사
* 사번 : B-1
다른 직원들과 달리 보란 듯이 B 코드로 시작하는 사번을 가진 대표의 얼굴은 어젯밤 로비에 원빈을 데리고 온 사람과 동일했다.
” 원빈.. 박원빈... “
조용히 읊조려보는 원빈의 이름엔 공교롭게도 B가 있다. 애써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해보고 싶어도 이미 제 머릿속엔 원빈의 게임 아이디 WB0302가 너무도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박원빈의 B, 그리고 대표이사 강병우보다 앞선 숫자가 붙은 'B-0'. 곳곳에 떨어진 단서는 무언가를 열심히 말해주고 있지만 여전히 확신을 하기엔 2% 부족했다.
“ 형. ”
“ 응? ”
“ 우리 사번으로도 직원 조회가 되죠? ”
“ 그렇지. 네가 봤던 코드가 B-0라고 했던가? ”
“ 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찾아주세요. ”
이번엔 사번으로 설정을 바꾼 용하가 ‘B-0’를 입력하고 조회 버튼을 눌렀다.
“ 어 뭐야. 아무것도 안 뜨는데? ”
“ 네? 아,안 떠요..? ”
“ 아니 B-0에 해당하는 사람은 있어. 아예 발급되지 않은 사원번호는 아니야. 근데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 “
성찬은 아예 모니터를 자신의 방향으로 돌려세웠다.
* 이름 : unknown
* 소속/직급 : unknown
* 사번 : B-0
조금 전의 대표이사 강병우 때와는 달리 텅 빈 화면만이 자신을 맞이했다. 사진이 있어야 하는 공간에는 까만색 네모 칸만이 남아있었고, 오히려 그곳에는 성찬의 얼굴이 불빛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추리한다 해도 끝끝내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원빈이 오랜 시간에 걸쳐 차곡차곡 세워놓은 성벽은 생각보다 훨씬 더 견고했고 드높았다.
결국 저는 그 성벽 앞을 지키는 문지기였을 뿐이다. 그리고 동화 속에서는 성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미천한 문지기에게까지 다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자신이 공주를 구하러 온 용감한 기사쯤으로 착각한 문지기는 이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아니 처음부터 자신이 사랑에 빠졌던 이는 공주가 아니라 안개 속에 꼭꼭 숨겨둔 탑에 사는 마법사였는지도 모른다.
정성찬의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하염없는 기다림 속에 차가운 로비에서 막을 내려가고 있었다.
<7장. 시스템을 점검 중입니다.>
“ 원빈아, 됐어. 유저 정보 털린 게 없는 건 확인했으니까 일단 이거 먹고 해. ”
“ ... ”
“ 야, 잠깐 그 렌즈 좀 빼고 안경으로 바꿔 끼기라도 하던가. ”
“ ... ”
“ 박원빈! ”
원빈의 지금 모습은 마치 언리얼라이즈 광장 언덕의 느티나무 아래에 사는 고집 센 하얀 토끼의 현신 같았다. 하얀 털이 보송한 집업을 벗지도 않고 두 눈은 발갛게 충혈된 채 몇 시간 동안 모니터 앞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 박원빈은 귀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강 대표는 이쯤 되니 슬슬 걱정되었다. 원빈이 입에 넣은 거라곤 깡 생수만 한 병 반. 그나마도 걸리적거리니 치우라며 대충 옆으로 밀어둔 상태였다.
“ 야, 원빈아. ”
“ 형. 그거 건드리지 마. ”
“ 어? ”
“ 모자. 손대지 말라고. ”
책상 위 원빈의 손 바로 옆에 놓인 하얀 니트모자를 치우고 그 자리에 걸터앉아 대화를 하려던 병우는 갑자기 날 선 반응을 보이는 동료의 모습에 당황하고 말았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 박원빈은 강병우를 비롯한 모든 사물을 철저히 투명화했다. 오로지 이 세상에 자신이 만든 게임과 자기만 존재하는 것처럼 굴던 아이가 고작 그 흔한 모자 하나를 가지고 성질을 내는 모습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서버 장애는 랜섬웨어 때문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근본 없는 해커 놈들인지 모르나 간 크게 언리얼라이즈의 핵심 접속 코드를 볼모로 잡고 거액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띄웠고, 그건 요즘 들어 연애 시뮬레이션(?)에 집중하느라 매우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만을 보이던 박원빈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고 말았다.
원빈의 성격은 딱히 모난 편이라고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알면 알수록 생긴 거에 비해 어리숙하고 맹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부분에서는 예외였다. 원빈은 누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건드린다면 바짝 가시를 세우고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예민함으로 상대를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그리고 박원빈이 사랑하는 것 중에 가장 으뜸은 역시나 ‘언리얼라이즈(Unreal:ze)’였다.
랜섬웨어 메시지를 확인한 원빈이 처음으로 한 것은 게임 가입자들의 정보가 담긴 클라우드의 보안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과연 박원빈이 게임을 만들 줄만 알았을까? 해커 놈들은 안타깝게도 이 게임의 개발자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원빈이 고작 열여덟에 과학고 조기 졸업을 하고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이미 학교에는 어린 천재 화이트 해커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소년은 전국은 물론 전 세계를 통틀어 손에 꼽는 해킹 실력을 뽐냈고, 그래서 대부분의 이들은 원빈이 게임을 만들고 있을 거라곤 감히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박원빈이 몰래 만들던 게임을 강병우가 운 좋게 발견했다. 솜씨 좋은 그래픽 디자이너 몇몇을 섭외해 게임에 색을 입히는 동안, 약간의 여유가 생긴 메인 개발자는 그 틈에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단단하게 잠글 수 있는 보안 클라우드를 개발했다. 그리고 그 견고한 금고에는 다름 아닌 게임 유저들의 개인정보가 담겼다. 가입할 때 사용하는 이름과 휴대폰 번호, 거기에 캐릭터를 생성하기 위해 수집했던 얼굴 정보까지, 원빈은 사용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그곳에 아주 철저하게 봉인시켰다.
결국 언리얼라이즈를 해킹한 작자들은 메인 서버 접속 코드를 손에 넣었을지언정, 가장 돈이 되는 사용자들의 개인정보는 단 하나도 빼내지 못했다. 강병우는 일단 가장 큰 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한 시름을 놓았다. 안 그래도 요즘 초상권을 포함한 개인정보의 취급과 AI 기술의 적용 문제가 날카롭게 자신들을 겨냥하고 있는 마당에, 유저들의 정보까지 빠져나갔다면 회사는 그야말로 거액의 손해배상과 함께 셔터를 내려야만 했을 것이다.
“ 서버 복구는 천천히 해도 돼. 야, 어차피 크리스마스라 게임 접속률도 반토막일텐데 이참에 인간들도 좀 밖에 나가서 놀라고 하지 뭐-! 그리고 그거 네가 다 할 필요도 없어. 그 정도는 밑에 있는 애들 시켜도 충분하잖아. ”
모자 때문에 잠시 날을 세웠던 원빈이 다시 병우의 말을 못 들은 척 씹었다. 저 히키코모리가 한동안 사람같이 산다 했더니 이리도 쉽게 예전 사회 부적응자의 모습으로 돌아갈 줄이야···. 긴급 호출을 받고 달려온 서버 복구 인력들이 아래층에서 가만히 손가락만 빨며 노닥거리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자면 강병우는 없던 홧병도 도질 것 같았다.
이 모든 건 게임 출시 후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본인 원툴 개발을 고집하는 숨겨진 대표이사 박원빈의 고집 때문이었다.
“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네 손으로 다 해결할래?!! ”
“ ... ”
“ 이제야 일 좀 내려놓고 사람도 만나고 연애도 하는 줄 알았더니 왜 또 병신같이 굴어..! ”
어차피 제대로 듣지도 않을 테고 대꾸도 없을 거, 그냥 나 혼자 성질이라도 내자 싶어 원빈의 주변을 맴돌며 되는대로 지껄이고 소리치던 병우가 돌연 말을 멈추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 야... 박원빈.. 원빈아, 너... ”
“ ... ”
“ 너 울어...? ”
원빈의 눈코입이 전부 발갰다. 애써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있지만, 키보드와 손등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까지 못 본 척 할 수는 없었다. 병우는 그제야 아까 로비에서 원빈을 끌고 들어올 당시 그 옆에 벽처럼 서 있던 한 남자가 떠올랐다. 그 언젠가 원빈은 자신이 좋아하는 이가 예쁘게 생긴 동시에 매우 크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어제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남자는 그 설명에 조금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외형이었다.
한참을 눈물만 뚝뚝 흘리며 키보드를 두드리던 원빈이 결국 큰 소리를 내며 엉엉 울었다. 의자 위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채 서럽게 우는 아이에게 병우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마른 등을 토닥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
장장 열 두 시간에 걸친 서버 복구 작업이 끝났다. 그러고도 원빈은 만족하지 못했는지 추가로 반나절에 더 걸쳐서 게임 내부를 일일이 마스터 계정으로 훑었다. 그렇게 언리얼라이즈의 해킹 사태 수습은 무사히 마무리되는 듯했다.
“ ... 나 이제 집에 가도 돼? ”
직원용 수면룸에 붙은 샤워실에서 간단하게 몸을 씻고 나온 원빈이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병우에게 물었다. 강병우 역시도 박원빈 옆에서 뜬눈으로 꼬박 날을 지새운지라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었다.
“ 야.. 원빈아 미안한데, 오늘은 너나 나나 집에 못 들어갈 것 같다. ”
“ 왜? 서버 복구했잖아. 이,이제 오,오오류 날 일 없어. 내가 처음부터 싹 다 코드 수정하고 새,새로 보안 걸어놨는데.. ”
병우는 벌써 녹아버린 얼음만 가득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을 휘휘 흔들다가 한숨과 함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고작 하루도 안 되는 시간에 사람의 낯빛이 이리도 안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두 사람 다 오늘 처음 알았다.
“ 몇 시간 뒤에 KISA에서 파견을 나올 거야. ”
“ KISA?! 거,거기서 왜?! ”
“ 오늘처럼 서버 해킹을 당하면 24시간 이내에 KISA에 자진 신고를 하는 게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그래. 법무팀에서 오늘 일로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늦지 않게 신고하라길래 조금 전에 연락했어. 거기도 휴일이라 대응이 좀 늦는 것 같지만.. 어쨌든 오늘 안에는 조금 있으면 여기로 사람이 나올 거야. ”
KISA는 한국인터넷진흥원을 말한다. 인터넷 서버를 이용하여 다수의 사용자 정보를 수집하는 기업의 경우 오늘처럼 해킹 문제를 겪게 될 경우 KISA에 무조건 사실을 알리게 되어있었다. 물론 해킹으로 인한 피해 복구 지원을 위해 인원 파견을 내보내는 거지만, 그와 동시에 의도적으로 은폐될 수도 있는 정보 유출 사실을 조사하기 위한 제도이기도 했다. 원빈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문제 될 소지가 있는 유저들의 개인정보는 모두 그대로 안전하게 보관 중인 데다가, 남의 손을 빌릴 것도 없이 서버도 완벽히 정상화했는데 굳이 다른 이들의 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됐다.
“ 형, 나,나나나는 집에 가야 해. ”
“ 많이 피곤하냐? 수면실 가서 좀 쉬고 있어. 아니면 대표실에 있는 소파에라도 누워서 잠깐 눈 붙일래? 사람들 오면 깨워줄게. ”
“ 아니이- 그게 아니라..! ”
“ 그게 아니면? 아 참.. 너 모르는 사람들하고 얘기하는 거 불편해하는 건 알겠는데, 어차피 내가 계속 옆에 같이 있을 거니까 너는 그냥 기술적인 것만 답해주면, ”
“ 성찬이..! ”
“ 어? ”
“ 나 성찬이 오늘 꼭 보기로 했다고..!! ”
울망울망한 커다란 눈으로 원빈은 결국 성찬의 이름을 꺼내어 입에 올렸다. 크리스마스가 끝나기 전에 해명을 해야만 한다. 어제 분명 ‘내일 꼭 해명을 하겠다’는 말을 했는데 그 약속을 또 깰 수는 없었다.
벌써 시간은 한참 지나 오후 다섯 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서버 복구에 정신이 쏠려서 방전되는 줄도 모르고 있던 휴대폰에 급히 충전기를 꽂아뒀던 원빈은 전원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메시지 함부터 확인했다. 그러나 성찬에게서 온 연락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제가 먼저 연락하기를 기다리는 걸까? 그게 아니면 정말 나한테 실망한 걸까? 어젯밤 회사 로비에서의 기억이라고는 처음 보는 싸늘한 얼굴로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던 성찬의 모습밖에 없었기에 더 불안하기만 했다.
그러니 오늘 안에 어떻게든 성찬을 만나야만 했다. 어리석었던 자신의 거짓말들을 전부 털어놓고, 그걸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를 빠짐없이 성찬에게 말해야 한다.
“ 꼭 지금 그 친구를 만날 필요 없잖아. 오늘이 크리스마스인 건 알겠어, 나도 네가 얼마나 오늘만 기다렸을지 충분히 이해해. 근데 지금 상황은 네가 봐도 그게 우선이 아니잖아. ”
입장이 난처한 건 병우도 마찬가지다. 원빈이 애초에 조금이라도 다른 직원들에게 메인 소스를 오픈했다면 오늘의 복구도 그렇고 앞으로 닥칠 KISA 대응도 다른 사람에게 충분히 맡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완강한 고집으로 혼자 모든 걸 해결하겠다고 버텨온 것이 정작 오늘처럼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박원빈이 아니면 이 회사에 언리얼라이즈에 대해 A-Z까지 모두 대응할만한 사람은 없다. 그 점에 대해서는 두 사람 다 이견이 없었다.
“ 나도 알아, 형. 근데 진짜로 오늘 꼭 성찬이 만나야 해. “
“ 하아... 너 잠깐 여기 좀 앉아 봐. ”
평소라면 알겠다며 이쯤에서 고집을 꺾었을 원빈이 오늘따라 뻗대고 나왔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게임을 앞에 두고 도박을 벌이는 모습이 낯설어서 강병우는 모른 척 눈감아주려 했던 박원빈의 현재 진행형 첫사랑을 기어이 들추기로 마음먹었다.
“ 어제 어떻게 된 거야? 로비에 너랑 얘기하고 있던 사람이 그 친구 맞지? ”
“ ... 응. ”
“ 설마 해서 묻는 건데.. 너 아직도 네가 그 친구랑 같은 회사에 다니는 거 말 안 했어? ”
BB게임즈의 숨겨진 대표이사라는 것까지는 아직 말을 못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굳이 같은 회사인 것까지 숨길 필요는 없을 텐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던진 질문에 원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 왜?! 왜 아직도 말 안 했어!? ”
원빈은 성찬이 제가 세운 것과 다름없는 회사 건물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마음의 짐이 부쩍 무거워졌다. 처음부터 자신이 게임의 개발자란 사실을 속인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지만, 그건 그나마 대표이사도 겸임하고 있다는 특수성을 감안했을 때 그건 어느 정도 성찬이 이해해줄 가능성이 있는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뻔히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근무 시간까지 물어봐 놓고 모른 척 입을 다문 채 피해 다닌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왜 숨겼냐고? 그렇게 물으면 박원빈은 할 말이 없었다. 성찬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저조차도 감당하기도 벅찰 만큼 마음이 커져 버린 지금의 상황에, 그동안 숨겨왔던 사실을 모두 알게 된 성찬이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제게서 멀어지기라도 한다면 어떡하지? 원빈은 그저 성찬이 자신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떠날까 봐 두려웠다.
누군가를 혼자 좋아하는 일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의 마음이 저와 비슷한 걸 알게 된 순간부터는 모든 것이 급변한다. 거절을 당할까 두렵고, 나에게 실망을 하지 않을까 걱정되고, 그 끝에 자신을 여기에 두고 돌아서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불안감이 몽글몽글하고 행복한 감정 사이를 끊임없이 뾰족하게 찌르며 침투한다.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 봐 끝없이 스스로 자존감을 깎아내는 그릇된 고통을 감당하기엔 원빈의 마음은 아직 너무 어렸다.
“ 좋아서 그랬어. 내가 걔를 너무 좋아해서.. 나한테 실망하는 모습을 차마 볼 자신이 없어서 그랬어. ”
원빈의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지금은 울고 있지 않지만 그게 꼭 몇 시간 전 원빈이 하염없이 떨구던 눈물 같아서 병우의 마음은 심란해졌다.
눈앞에 있는 이 천재 히키코모리는 사랑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서로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살면 좋겠지만, 사람은 원래 자기 예상과 다른 상대방의 모습에 가끔 실망도 하면서 그렇게 앞으로 함께 나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서로를 향한 애정과 단단한 믿음이었다.
강병우는 박원빈이 이런 식으로 첫사랑에 실패하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실패할 때 하더라도 이런 사유로는 절대 안 된다. 그건 수년간 박원빈의 친구이자 보모로 살아온 자신을 모욕하는 일과 다름없다.
“ 원빈아, 박원빈. ”
“ 응.. ”
“ 사람 사이에 제일 중요한 건 말야, 다른 게 아니야. 신뢰가 제일 중요해. 이 사람이 나를 믿고, 나도 이 사람을 믿는다는 신뢰. 그건 약속이나 다름없어. “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를 훈육하듯 무릎이 맞닿을 거리로 바짝 의자를 당겨 앉은 병우가 원빈의 시선을 정면으로 붙들었다. 네 미감에 부합하지 않는 얼굴인 건 아는데 지금은 좀 참아라, 박원빈. 참고 내 말 똑똑히 들어.
” 그런데 넌 그 친구한테 어떻게 했어? 그 친구가 실망할지 아닐지 알지도 못하면서 가까워지는 내내 너를 감추는 데만 급급했잖아. 네가 뭐 중범죄자라도 돼? 아니잖아. 그냥 너도 평범한 사람이고, 게임 만드는 직업을 가진 일개 개발자일 뿐인데 왜 자꾸 속이려고 그래? “
” 그건.. 그건 내가 처음에 성찬이랑 친하게 지내려 했던 의도부터 너무 솔직하지 못했으니까... “
형, 나는 그게 너무 후회돼. 게임에서 나와서 처음 우리가 밖에서 만난 날, 성찬이한테 솔직하게 다 털어놓지 못한 게 제일 마음에 걸려. 어제까지만 해도 걔가 나랑 있는 게 너무 좋다면서 내 손을 먼저 잡아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내가 너무 늦은 거야. 차라리 일찍 털어놨더라면 어제처럼 나한테 실망하는 얼굴을 볼 일은 없었을 텐데.
이제야 원빈이 줄줄 꺼내 놓은 속마음엔 거짓이 한 톨도 없었다. 진작에 정성찬한테도 이렇게 말했어야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박원빈이나 강병우나 같은 생각이었다.
강병우는 작년에 자그마치 3천모를 끌어다 빡빡하게 메운 앞머리를 손으로 거칠게 쓸어올렸다. 음- 어떻게 할까. 융통성 없는 KISA 새끼들은 곧 있으면 회사로 쳐들어올 것이고, 그러면 박원빈이 꼭 필요한데... 그렇다고 해서 게임 밖에선 바보 천치나 다름없는 모지리를 무작정 붙들고 있자니 이 아이의 향후 10년간의 인생이 몹시 걱정되었다.
원빈의 첫사랑이 일방이 아닌 쌍방임을 확인한 이상 보모 조기퇴직 찬스를 놓칠 수 없다. 거기에 더해 원빈의 연애사업이 성황을 이룰 경우, BB게임즈에서 몇 년째 월급만 꼬박꼬박 받아가고 있는 개발자 직책의 베짱이들에게도 드디어 일감이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
강병우 넌 BB게임즈의 대표잖아. 박원빈은 개발자지만 넌 경영자의 마인드로 어떻게 할래?
———
또 다른 타임 어택이 시작되었다. 지금 강병우의 잘 빠진 파란색 포르쉐는 눈이 막 내리기 시작한 깜깜한 도로 위를 거침없이 내달리는 중이었다.
“ 형, 처,처천천히 좀 가.. 나 무서워..!! ”
“ 야 지금 무서운 거 따질 때야? 오늘 안에 그 친구 만나야 한다며! ”
하여간 융통성 없는 공무원 놈들. 걔들은 공무원이 아닌가? 아무튼 정부 산하의 기관 소속이라 그런지 느긋하게 사람 말꼬리를 계속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시간이 지연되고 말았다.
KISA에서 파견 나왔던 조사관들이 떠나기 무섭게 강병우는 박원빈을 끌고 나왔다. 몇 시간 전 자신이 어떻게든 해결해주겠다고 떵떵거린 것이 있으니 이제 그 말을 책임질 차례였다.
포르쉐 뒷좌석에는 원래 어제 원빈이 직접 수령했어야 하는 성찬의 코트가 담긴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강병우는 KISA를 상대하면서 비서에게 박원빈이 정성찬에게 주려 했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대신 찾아오라고 지시했고, 동시에 건물 보안을 담당하는 외주업체에 연락해 여기서 근무하는 정성찬 보안요원에 대한 신상정보를 내놓으라고 뒷돈까지 슬쩍 찔러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에 제일 지친 사람은 강병우고, 그 과정에서 돈을 쓴 사람도 강병우, 이걸 빨리 마무리하고 싶은 사람도 강병우 본인이다.
아슬아슬하게 골목을 드리프트 해서 들어가는 차체에 박원빈은 손잡이를 꼭 잡고 비명을 꽥꽥 질렀다. 시간은 벌써 밤 11시. 이제 크리스마스는 고작 한 시간 남아있었다.
“ 빨리 들어가. ”
“ 혀엉···. ”
“ 아 왜 또-! 데려다줬잖아! ”
병우는 뒷좌석에 있는 쇼핑백을 끌어다가 원빈의 품으로 던지듯이 안겨주었다. 목적지로 설정한 정성찬의 자취방 오피스텔 앞에 정차한 포르쉐는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녹이고 있었다.
“ 나 무서워···.”
“ 야 박원빈,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
아까부터 오늘 안에 정성찬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생 난리 부르스를 다 떨어놓고 막상 집 앞에 곱게 모셔다드렸더니 무섭댄다. 강병우의 인내심에도 결국 한계가 찾아왔다. 역시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시간도 아닌 바로 인내심이다.
“ 내려. ”
“ 혀엉- ”
“ 내리라고 이 새끼야! 가서 울던, 빌던, 해명을 하던 정성찬 얼굴 보고 담판을 지어! “
” 시,싫어하면 어떡해!! 갑자기 말도 없이 집에 찾아왔다고 성찬이가 나한테 더 실망하면 어떡해! “
” 그럼 고백이라도 하던가! 좋아한다고, 전부 다 너랑 잘해보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고 그 녀석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매달려, 이 쪼다 등신아! “
참다못한 병우는 원빈의 팔을 떠밀었다. 손수 안전벨트의 버클을 풀어주고 각이 진 어깨를 퍽퍽 떠밀자 원빈은 도저히 혼자 못 나가겠다며 문고리를 당긴 채 안간힘을 썼다. 제발- 언제까지 히키코모리로 살 거야! 형 휴대폰에 히키코모리라고 저장해둔 네 이름 좀 이제는 바꾸고 싶다, 박원빈아-!
“ 지금 당장 안 나가면 내가 월요일에 바로 주주 회의 소집해서 너 잘라버리자고 안건 올릴 거야. 다시는 언리얼라이즈에 손도 못 대게 마스터 계정도, 네 클라우드도 다 압류 소송 걸 거라고! ”
“ 그..그런 게 어딨어!! ”
“ 왜 없어? 내가 대표이사인데 다 할 수 있지. 네가 아무리 최대 지분을 가진 숨겨진 대표라 해도, 정작 BB게임즈를 위해서 앞에 나서서 일한 건 나야! ”
“ 씨잉.. 치사하게 굴지마라, 강병우! ”
“ 어쭈? 이제 열 살이나 많은 형한테 말을 막 까네? 야, 지금 그 패기로 저기 올라가서 정성찬이나 상대하라고! ”
안 되겠다. 이 상태로 계속 대치하다가는 열 두 시가 되기 전에 박원빈을 저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병우가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차체를 반 바퀴 빙 돌아 조수석 문을 힘껏 열어젖힌 그는 원빈의 품에 안겨있던 쇼핑백을 뺏어서 바깥으로 최대한 멀리 던져버렸다.
“ 안 돼!! ”
바닥을 나뒹구는 쇼핑백을 본 원빈이 잽싸게 차에서 뛰어나왔다. 이때다 싶어 재빠르게 조수석에 올라탄 병우가 문을 잠그고 다리를 뻗어 유연하게 운전석으로 타고 넘어갔다. 바보 같은 녀석. 박원빈은 원래 예전부터 뭐 한 가지에 정신이 팔리면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신경도 못 쓰는 애였다.
코트가 상하지는 않았는지 길바닥에 쪼그려 앉아 열심히 살펴보던 원빈의 뒤로 시끄러운 스포츠카의 배기음이 울렸다. 그리고 이내 굉음과 함께 병우의 포르쉐는 바퀴 자국만 눈 위에 남긴 채 골목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눈 내리는 골목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다. 어제와 오늘, 크리스마스랍시고 요란하게 반짝이던 조명과 거리를 빼곡하게 채우던 캐럴은 지금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원빈은 아까 병우가 말했던 성찬의 호수를 되뇌어보았다. 1215호. 아득하게 위로 뻗은 오피스텔의 층수를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세어 올라갔다. 그 끝에 열두 번째 층에 도달했을 때, 수많은 창문 중 유일하게 환하게 불이 켜진 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성찬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일까? 들숨을 타고 제 안으로 들어온 차가운 겨울밤의 공기는 폐부를 날카롭게 훑고 하얀 연기가 되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원빈은 성찬이 제게 선물로 준 모자가 내리는 눈에 젖을까 봐 얼른 그것을 벗어들었다. 따뜻하게 머리와 귀를 감싸던 촉감이 사라지고 나서야 겨울이 얼마나 시리고 차가운지 비로소 실감이 되었다.
손을 잡아 오던 따뜻한 체온이 그리웠다.
성찬이 몹시도 보고 싶었다.
<8장. HP를 회복하세요.>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무의미하게 천장을 향해 쏘아 둔 빔프로젝터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올라온 넷플릭스의 신작 영화가 재생되고 있었지만 좀처럼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외국 배우들의 웃음기 넘치는 대화는 백색 소음이 되고, 창문 밖에서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마지막을 알리는 눈송이가 다시 날리기 시작했다.
이만 자야겠지. 여전히 아무에게서도 연락이 없는 휴대폰 화면을 괜히 한번 열어본 성찬이 이제 약 10분 정도 남은 12월 25일을 홀로 마무리하고 있을 때였다.
“ 누구세요..? ”
좀처럼 누가 찾아오지 않는 자취방의 초인종이 울렸다. 그러나 현관문 밖을 비추는 카메라에는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뭐지? 누가 배달음식을 잘못시킨 건가? 아주 드물게 배달 기사의 실수로 자신의 문 앞에 음식을 두고 가는 일이 있어 성찬은 이번에도 같은 상황일 거라 생각했다. 이런 경우엔 그냥 모른 척 하는 게 최선이었다. 괜히 건드렸다가 불미스러운 상황에 엮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무심히 현관 앞에서 몸을 돌리던 순간,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 누구···.”
“ 아, 안녕···. ”
반 뼘 정도 열린 문틈 사이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빈이다. 눈을 잔뜩 맞은 건지 머리에 축축한 물기가 가득한 상태로 코끝과 귀 끝이 죄다 발개진 원빈이 자신의 집 현관 앞에 서 있었다.
“ 어떻게 여기에...? ”
“ ... 미안, 마,말도 없이 찾아와서.. ”
조금 더 넓게 연 문 사이로 드러난 원빈의 모습을 가볍게 훑는 것만으로도 성찬은 그의 지난 24시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어제와 같은 옷. 하얀 플리스 집업 카디건과 작은 크로스백, 그 아래 까만색 부츠컷의 바지는 어제 사옥 로비에서 헤어지던 그때의 모습과 동일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원빈의 옆에는 커다란 쇼핑백 하나가 놓여 있었고, 얼굴과 마찬가지로 발갛게 얼어버린 두 손에는 제가 사준 모자를 꽉 쥔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는 점 정도였다.
원빈은 지금 막 회사에서 나온 거였다. 무려 24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BB게임즈에서 나온 박원빈이 곧장 자신에게 달려왔다.
“ 일단 추우니까 안으로 들어와. ”
안쓰러운 마음에 얼른 원빈을 안으로 들였다. 제 옆을 바짝 스쳐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에 원빈의 근처에서는 차가운 겨울의 냉기만이 느껴졌다. 도대체 얼마나 밖에 있었던 거야? 젖은 머리카락 때문에 혹여나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까 싶어 성찬은 마른 수건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보일러 온도를 최대치로 높였다.
“ 집에 뭐가 없긴 한데... 우유라도 데워줄까? ”
“ 아,아니야.. 안 줘도 돼. ”
“ 그래도 좀, ”
“ 진짜야. 나 진짜 괜찮아···. ”
원빈은 발개진 코를 연신 훌쩍이면서도 제 제안을 듣자마자 양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거절한다고 해서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직도 떨리는 마른 몸이 안타까워서 성찬은 결국 급하게 우유 한 잔을 데워 내밀었다.
빔프로젝터를 끄자 고요해진 방 안에는 간헐적으로 훌쩍이는 소리와 일정하게 똑딱이는 작은 시계 초침 소리만 남았다. 천천히 우유 한 잔을 다 마신 원빈이 컵을 내려놓았다. 살아있는 사람처럼 얼굴에 혈색이 균일하게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대체 무슨 말부터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교착한 두 사람은 하염없이 시간만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 늦어서 미안해.. ”
끝내 원빈이 먼저 첫 마디를 꺼냈다. 그리고 뒤이어 두 번째 역시 원빈이 차지했다.
“ 그리고 속인 것도... 미안해. ”
여전히 제가 사준 니트 모자를 꼭 쥐고 있는 원빈의 손이 조금 전 추운 바깥에서 서 있었던 그때와 같이 달달 떨렸다. 그런 원빈은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자신을 ‘속였다’고 표현했고, 그 말에 성찬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속았구나. 그런데 대체 뭘 속였다는 거야? 단순히 속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화가 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애써 부정하고 싶은 무언가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 그런데 뭘 속였어? ”
“ 그.. 그러니까, 내가 너랑 같은 회사에 다니는데, ”
“ 아- BB게임즈가 아니라 SP소프트에 다닌다고 말한 거? ”
“ 어? 어.. 그,그리고 또, ”
” 또? 또 있어? “
” 응.. 나 언리얼라이즈도 처음 아니었어. “
솔직히 이건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원래 원빈이 꼼꼼한 성격이긴 하지만 게임에서 움직이는 것만 봐도 같은 초보자인 저보다 한참 더 몸놀림이 빨랐고 아바타를 비롯해 다양한 기능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줄 알았으니까. 그치만 다음에 꺼낸 말은 조금 놀랍긴 했다.
” 사실 언리얼라이즈는 내가 만든 게임이야. “
” 뭐?! “
” 미안해. 처음에는 너한테 말해도 안 믿을 것 같기도 했고, 그때 나는 신규 유저들이 어떻게 적응하는지 정보가 필요했어. 접근 의도가 불순했던 것도 사과할게.. “
신규 유저가 어떻게 게임에 적응하는지 궁금해서 새로운 계정을 만들어 접속한 그 날, 원빈은 자신을 우연히 만났다고 말했다. 로그아웃을 위해 광장을 되돌아 나가는 저를 자기도 모르게 붙잡아버렸고, 그저 초반에만 조금 도와주려고 했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어느새 둘이 함께하는 게임을 즐기는 단계에 접어들고 말았다. 평소 습관대로 웅얼거리는 발음 대신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 애를 쓰는 모습엔 원빈의 진심이 담겨있었다.
” 정말 이 게임을 네가 만들었다고? 진짜? “
” 웅. 내가 만들었지이.. “
“ 그럼 개발팀에서 일해? ”
“ .... 그건 또 아닌데···.”
원빈의 커다란 눈동자가 옆으로 데구루루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두 손을 모아 모자를 꼭 쥐고 깜박깜박 연달아 눈을 감았다 뜨는 모습은 꼭 게임 속에서 튀어나온 도토리 비밀상점의 다람쥐처럼 보였다. 원빈이 이런 맹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자꾸만 정신을 놓고 바보처럼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동갑내기 남자애한테서 느껴본 적 없는 야릇한 감정이 자꾸만 치솟아서 매번 진정할 시간이 좀 필요했다.
“ 성찬아. ”
“ 어어- ”
엄한 생각을 하는 것이 티가 났나 보다. 방황하던 원빈의 까만 눈이 저를 향했고, 괜히 머쓱한 기분에 애꿎은 머리카락만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내리던 참이었다.
“ 나.. BB게임즈 대표야. ”
말의 뜻을 이해하는 데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결국 눈에 띄게 당황하는 제 모습에 원빈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씩 천천히 털어놓았다.
어릴 때부터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소질이 없었고, 컴퓨터랑 대화하는 일이 훨씬 많았다던 아이는 남들 몰래 자신만의 성을 조용히 쌓아나갔다.
아무도 모르는 깊은 숲속에 자리를 잡고 땅을 고르는 일부터 벽돌을 만들어 쌓는 것까지 하나하나 손수 성을 짓던 어린 마법사는 끝내 그 성으로 들어가는 문까지 걸어 잠그고 자기 자신을 그 안에 가두었다.
마법사가 지은 성안에는 사람을 흉내 내는 동물들이 함께 살았다. 마법사는 그 동물들과 함께 살면서 꼭대기 탑에 올라 저 멀리 산 아래의 마을을 구경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랬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꽉 닫힌 성의 문을 두드렸다. 나그네는 강병우였다. 어린 마법사 박원빈이 만든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을 발견한 이는 금세 그곳에 매료되어 급기야 새로운 제안을 건네었다. 원하는 만큼 성을 더 크고 높이 만들 수 있는 재료를 구해다 줄 테니, 이 성에서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것들을 자신에게도 나누어 달라고. 마법사는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더 멀리 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그네는 성안의 진귀한 물건들을 좋은 값에 내다 팔고 싶었다. 그렇게 둘 사이엔 작은 계약이 성립했다.
나그네만 드나드는 마법사의 성은 점점 탑이 높아졌다. 마침내 가장 낮은 구름에 손이 닿을 수 있을 만큼 탑의 꼭대기가 높아졌을 때, 마법사는 나그네가 아닌 다른 이가 성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이가 홀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말을 타지도 않고, 주변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도 없었지만 마법사는 그가 기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그네만 아는 숲속 오솔길 대신에 험난하고 가파른 절벽을 아슬아슬하게 돌아서, 발을 헛디디면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캄캄한 이끼 동굴을 지나 그렇게 기사는 어린 마법사의 성에 도달했다.
어린 마법사는 바짝 긴장을 했다. 나그네가 아닌 다른 이의 방문은 또 처음이었기에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성의 닫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기다렸다. 그러나 기사의 태도는 마법사를 당황하게 했다. 기사는 나그네처럼 성안에 들어오려 하지도 않았으며, 그 안에서 무언가를 내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성벽 주변을 일정하게 맴돌고 닫힌 문 앞에 서서 가만히 누군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호기심 많은 마법사는 그런 기사가 궁금했다. 결국 마법사는 꽉 닫힌 문의 작은 틈새로 다가가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 무슨 일로 이 숲속까지 오셨나요? ’
‘ 공주를 찾고 있습니다. ’
‘ 공주요? ’
‘ 네. 저는 공주를 구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니까요. ‘
공주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기사의 이야기는 나그네조차 말해준 적 없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동했다. 그리고 기사의 이야기도 퍽 궁금했다. 어린 마법사는 기사를 붙들었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밤을 새워 기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날이 밝고 기사는 이제 자신은 길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 저는 이만 떠나야 합니다. 공주를 찾아야 하거든요. ’
마법사는 기사를 보내기 싫었다. 그가 밤을 새워 자신에게 전해준 이야기는 나그네가 밖에서 구해다 준 진귀한 재료보다 더 탐이 나고, 성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다. 심지어 기사에겐 성안이 보이지 않았지만, 마법사는 마법을 이용하여 기사를 마주 볼 수 있었다.
기사는 아름다웠다. 자신이 탑 꼭대기에서 하염없이 살피던 저 머나먼 마을 어디에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마법사는 기사를 제 곁에 더 머무르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살며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게 얼마 가지 않아 들통날 것을 알면서도 기사를 붙들기 위해 어린 마법사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 공주가… 여기에 있어요. ’
원빈이 이야기를 마친 뒤 집안은 다시 적막해졌다. BB게임즈의 숨겨진 대표이사이자 메인 개발자. 그래픽 부분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인 코드 하나부터 게임 내 캐릭터, 공간별 스토리 하나하나까지 원빈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없는 언리얼라이즈는 어린 마법사가 만든 견고한 성이었다.
기억을 되짚어 본다. 어제 본 사원증의 ‘B-0’ 코드와 ‘Unknown’으로 기재된 사원 정보는 결국 강병우 대표이사와 마찬가지로 BB게임즈의 가장 높은 임원을 뜻하는 거였다. 핏한 명품 브랜드의 정장을 입고 구두를 또각거리며 로비를 가로지르던 강병우를 떠올려 본다. 그 역시도 매우 젊은 축에 속하지만, ‘대표이사’라는 직함에 평균적으로 부합하는 모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제 눈앞에 앉아있는 박원빈은..?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대표이사’ 보다는 ‘대학생’에 가까운, 아주 어리고 자유분방한 소년 그 자체였다.
원빈은 이제 더는 할 말이 없는 듯했다. 그저 어떤 처분이든 내려지길 기다리는 죄인처럼 가만히 손을 모으고 앉아 자신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그게 다야? ”
“ ... 응. ”
“ 다른 건 더 없어? ”
망설임 없이 위아래로 끄덕이는 동그란 까만 머리통을 확인한 성찬은 이제 그동안 자신이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내기로 했다.
“ 왜 그랬어? ”
“ ... ”
“ 왜 그동안 나한테... 물론 게임에서 만난 나한테 이 게임을 만든 사람이 나고, 내가 그 회사의 대표라는 사실까지 말하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이해는 해. 그치만 우린 게임에서만 만난 사이가 아니잖아. ”
매주 같은 요일에 얼굴을 보고 같이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지가 벌써 석 달이 넘었다. 그 시간만으로도 벌써 100일이 다 되어간다. 그럼 나는 그 시간 동안 믿음을 주지 못한 건가? 아니면 내가 여전히 불편했을까? 처음 만난 날을 제외하고는 원빈은 매주 금요일 자신을 보는 것에 크게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날엔 다음 주엔 뭘 할 거냐고 미리 묻기도 했고, 넌지시 먹고 싶은 것을 먼저 제안하기도 했다.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상을 공유하면서 저를 보고 환하게 웃던 표정에서 어쩌면 이 사람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는데...
‘왜?’라는 질문을 받아 든 원빈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끝내 답을 듣지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조바심을 내려던 순간, 떨리는 음성이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 조, 좋아해서 그랬어. ”
“ ... ”
“ 내가.. 너를 좋아해서, 그래서 네가 나한테 실망할까 봐 무서워서 그랬어. “
“ 박원빈, ”
“ 미안해, 성찬아. 내가 너를... 친구가 아닌 다른 의미로 좋아하는 것 같아. ”
꽉 닫혀있던 성의 문을 열고 드디어 마법사가 걸어 나왔다. 성의 단단한 문을 등지고 서 있던 문지기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아름다운 소년을 확인한 순간, 자신의 두 팔을 열어 너른 품에 소년을 꽉 안아주었다.
성찬은 지금껏 이 이야기에서 본인은 그저 성곽을 지키는 문지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걸어 나온 원빈은 자신을 기사라고 부르며 하나뿐인 소중한 마음을 꺼내 제 손에 쥐여주었다.
서로가 다르게 부르고 있던 노래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였던 셈이다. 숲속의 외로운 마법사와 그의 성을 지키던 문지기는 그렇게 서로에게 공주와 기사가 되어 'Happily Ever After···.' 를 꿈꾸었다.
“ 원빈. 정말 나를 좋아해? ”
“ 응. 너한테 마음 강요하려고 말하는 건 절대 아니야. 이 말을 하면 네가 불편할 거라는 것도 잘 알고.. 나한테 실망할 거라는 것도 알아. ”
“ 내가 왜 실망을 해? ”
“ 엥..? ”
“ 불편한 건 또 뭐야? 나 너한테 실망한 적도 없고 불편한 것도 없어. 그리고 네가 어제부터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렸나 본데, 좋아한다는 고백도 내가 너한테 먼저 했어. ”
원빈의 커다란 눈이 동그래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힘없이 울망울망하던 눈매가 단숨에 원형으로 바뀌는 드라마틱한 변화에 하마터면 성찬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
“ 고..고백? 어,어언제? ”
“ 진짜 기억 안 나? ”
“ 에에? ”
자기는 사람 상대하는 데엔 재주가 없다고 하더니만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앞으로 옆에서 가르쳐야 할 게 많겠네. 아니, 가르치기보다는 둘이 같이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면 된다. 일단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자신의 고백부터 다시 찾아와야만 한다.
“ 남자들은 보통의 경우엔, 친구끼리 크리스마스이브에 손을 잡고 거리를 걷지 않아. ”
“ 아... ”
“ 사람이 많은 명동 한복판의 화려한 점등식을 보면서 너랑 그걸 같이 보게 되어서 좋다는 말은 더더욱 하지 않고. ”
“ 그럼 어제.. “
” 내가 박원빈을 좋아하는 마음을 그렇게 전한 거야. “
겁이 많고 조심스러운 아이가 제 고백에 놀라지 않도록 마음을 전할 방법을 수십 번 고민해봤다. 직접적으로 좋아한다고 말을 꺼냈다가는 분명히 도망갈 것 같아서 최대한 은근하게 표현한 건데 그걸 못 알아들을 줄이야.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나서야 제가 보낸 마음을 받아 든 원빈의 두 볼이 분홍빛으로 옅게 물들었다. 입을 헤에- 벌리고 눈만 깜박거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말랑한 볼을 손으로 콕 찔렀더니, 그제야 부끄러움을 감추려 모자를 들고 달아오른 얼굴을 가린다.
이제야 웃음이 나왔다. 조용한 방안을 성찬의 웃음소리가 가득 메우자 원빈은 그만 웃으라며 작은 테이블 아래로 발을 툭툭 찼다.
” 우,웃지 마로... “
” 아-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서- “
” 귀엽다고도 하지 마로.. “
저를 향해 꿍얼대는 원빈의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살짝 담겨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가까스로 다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는 벌써 지나버리고 평범한 12월 26일의 눈 내리는 밤이었다.
“ 그,그럼 나한테 실망한 거 아니야..? ”
“ 왜 아까부터 내가 너한테 실망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
“ 그야... 내가 거짓말을 했으니까. ”
박원빈은 정말 살면서 거짓말이란 걸 안 해본 티가 났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사소한 거짓말 하나에 이토록 자신의 눈치를 볼 리가 없다. 얘는 진짜 순수하구나. 언리얼라이즈가 폭력성을 최대한 배제한 전체 이용가 등급으로도 전 세계 1위를 차지한 것의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 게임을 만든 제작자 박원빈의 순수함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 고작 그런 거로 실망해서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 같으면 그건 진짜가 아니잖아. ”
“ 아... ”
“ 근데 조금 서운하긴 했어. 실망은 오히려 나 자신한테 했고. “
” 왜? 왜 너한테, “
” 내가 너한테 조금 더 잘했으면 나한테 숨기지 않았을 것 같았거든. 그냥 그랬다구.. 지금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
원빈이 아까 내려둔 컵을 치우느라 일어난 성찬은 시계를 한번 확인하고 뒤이어 바로 창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시간은 벌써 새벽 1시. 아까부터 날리던 눈은 지금 눈송이가 더 굵어져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는 중이었다.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원빈은 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자신이 메고 온 작은 가방을 챙기려 들었다.
“ 원빈아. ”
“ 웅? ”
많이 쳐줘봤자 손바닥만 한 미니 크로스백을 멘 채, 여전히 손에는 제가 사준 모자를 꼭 쥐고 있는 폼이 꼭 유치원생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쟤를 어떻게 지금 밖에 내보내. 절대 안 돼.
정작 집이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정성찬의 과도한 보호 본능에 먼저 불이 붙어버렸다.
“ 자고 갈래? ”
“ 어..? ”
“ 우리 집에서 자고 가. ”
———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민폐를 끼치기 싫어 어떻게든 집에 가겠다고 우기는 박원빈과 바깥 날씨와 길 상황을 보여주며 지금은 절대 못 보낸다고 떼를 쓰는 정성찬 사이에 처음 벌어진 작은 다툼이었다. 결국 내기를 했다. 콜택시를 불러서 20분 안에 택시가 오면 가는 거고, 그게 아니면 자고 가기로. 그리고 결과는 보나 마나 정성찬의 승리였다.
- 성찬아-
욕실 안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원빈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에 아까 못다 치운 집을 정리하고 이불과 베개를 깨끗하게 정리하던 성찬이 파드득 놀라 욕실 문 앞으로 달려갔다.
“ 왜? 필요한 거 있어? 수건은 그 안에 있는데. ”
- 아,아니..
씻으러 들어간 지 벌써 거의 30분이 다 되어갔다. 불편해서 저러나? 이쯤 되면 다 씻었을 법도 한데 도통 나오지 않는 원빈을 걱정하던 성찬의 불안한 마음이 안절부절못하는 발걸음에 묻어 나왔다.
- 나.. 안경 써도 돼?
“ 어? ”
- 잘 때도 렌즈를 끼면 눈이 아파서..
“ 어어- 당연하지! 안경 써! 써도 돼! 네 마음대로 해! ”
- 나 못생겼다고 놀리면 안 돼-
제게 별걸 다 허락을 받으려 드는 것이 좀 신기하다. 사람이 안경 좀 썼다고 못생겨질 수가 있나? 애초에 박원빈 얼굴로 태어나서 그런 걱정을 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이다.
욕실 문이 열리며 원빈의 발이 먼저 나왔다. 제가 입었을 때는 발목 위로 살짝 올라오던 바지가 밑단이 살짝 끌릴 정도로 헐렁했다. 상의도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딱 맞는 티셔츠를 줬는데도 소매 끝이 손가락을 덮을 정도로 널널한 품에 원빈의 마른 몸이 흔적도 없이 가려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경은... 아, 미치겠다.
“ 나 이,이이상하지.. ”
“ 귀여운데? ”
“ 에엥? ”
“ 귀여워, 진짜 귀여워. 와.. ”
과장을 한 스푼 보태어 작은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까만 뿔테 안경인데도 제 눈엔 귀엽기만 했다. 눈 크기도 작아져야 하는데 워낙 평소에 큰 눈을 자랑하다 보니 별반 차이도 없고... 성찬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제 옷을 빌려 입고 쭈뼛대는 원빈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천천히 훑다가, 그만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를 자신의 품에 당겨 안았다. 제가 쓰는 샤워 용품의 향이 다른 이의 몸에서도 똑같이 난다는 게 이토록 묘한 자극을 불러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원빈의 살 냄새와 살짝 뒤엉켜 포근한 느낌이 배가 되었고 그 때문에 심장은 더 주체할 수 없이 빠르게 뛰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잠시 당황하는 것 같던 원빈은 이윽고 팔을 들어 성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겨우 손바닥의 작은 면적으로만 주고받던 서로의 체온은 이제 맞닿은 몸 전체에서 아주 천천히, 더 뜨겁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 잘까? “
” 여,여기서 같이 자? “
” 응. 조금 좁긴 한데 그래도 둘이 누울 만 하지 않을까? “
성찬은 남들보다 몸이 큰 편이라 비좁은 싱글 침대가 싫어 그나마 그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침대를 사용 중이었다. 집에 찾아온 손님을 배려하려면 제가 바닥으로 내려가서 누우면 쉽게 해결될 일인데 오늘은 괜히 그러기 싫었다. 남자 둘이 누우면 분명 어깨가 꽉 끼겠지만 그건 나름의 해결책을 찾으면 그만이다.
” 내가 바닥에 누워도 되는데... “
” 아니야. 손님을 어떻게 바닥에서 재워. 내 방바닥 차가워. 보일러 최대로 돌려도 이 모양이야. “
둘러대는 말과 다르게 원빈이 들어온 순간부터 보일러를 풀가동중인 바닥은 불가마 찜질방 수준으로 지글지글 끓었다.
” 불편하지 않을까.. “
” 불편해? “
” 아니, 나 말고 성찬이 너 말이야. 네가 나보다 한참 더 크잖아. “
” 난 괜찮아. 그런 거라면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너 먼저 안쪽으로 들어갈래? ”
실랑이 끝에 원빈이 침대와 벽 사이로 꾸물꾸물 몸을 밀고 들어갔다. 포근한 솜이불을 들어주고 있던 성찬은 그 옆에 몸을 뉘이며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이불 위를 토닥토닥 가볍게 두드렸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비좁았다. 아무리 마른 편이라 해도 기본적으로 얘도 남자인지라 어깨가 한 어깨 했다. 원빈이 눈치껏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부쩍 좁아진 침대에서 두 사람 다 최대한의 용적을 확보하기 위한 현명한 대책이었다. 그러나 성찬은 그렇게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 잠깐만, 베개 좀. “
” 웅? “
” 자, 이렇게···.“
원빈이 베고 있던 베개를 들어 올린 성찬이 그 사이로 자신의 팔을 끼워 넣었다. 단단하고 두꺼운 팔 위로 별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작은 머리통이 내려앉았다. 졸지에 성찬에게 안겨 팔베개를 당한 원빈의 귀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잘 자. ”
제게 뭐라고 하기 전에 얼른 반대쪽 팔을 둘러 원빈을 끌어안았다. 거의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몸이 맞닿았다. 성찬이 내뱉는 숨이 원빈의 머리카락과 귓가를 간지럽힐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창밖에는 여전히 하얀 눈이 내렸다.
두 사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9장. 새로운 맵이 열렸습니다.>
[ 언리얼라이즈(Unreal:ze) 서버 복구 지연은 BB게임즈 내 치명적 인사 결함 때문? ]
지난 크리스마스의 언리얼라이즈(Unreal:ze) 서버 해킹의 여파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좀처럼 아침에 일어나는 법이 없던 박원빈은 거의 몇 년 만에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것을 고스란히 맞으며 젖은 머리를 말리는 중이었다. 욕실 앞 파우더룸의 커다란 거울 옆에는 이 집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수트 한 벌이 잘 다려진 상태로 걸려 있었다. 파우더룸의 테이블에 올려둔 휴대폰에 작은 진동이 일었다.
: 나 지금 집에서 출발해.
발신자는 성찬이었다. 성찬의 집에서 여기까진 빠르면 15분, 늦어야 20분이었다. 서둘러야 한다. 혹여나 닳기라도 할까 봐 만지기는커녕 보는 것도 아까운 연인을 시린 칼바람이 부는 겨울의 바깥에서 기다리게 만들 수는 없었다.
“ 오,오래 기다렸지..미안- ”
“ 금방 왔는데?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 더는 안 하기로 했잖아. ”
“ 아.. 미안, ”
습관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제 입술을 성찬의 손가락 끝이 아주 살짝, 아프지 않을 정도로 꼬집고는 다시 멀어졌다.
“ 다음부터는 이렇게 안 하고 그냥 뽀뽀해버린다. ”
“ 으엥? ”
“ 진짜야. 누가 보든지 말든지 미안하다고 말하면 확- ”
일부러 제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는 성찬을 피해 버둥거리다 발이 살짝 미끄러졌다. 다행히도 그보다 빨리 제 허리를 잡아주는 단단한 팔 덕분에 길에서 민망하게 슬라이딩하는 창피는 면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샀던 회색의 롱코트를 입은 성찬은 꼭 유명한 쇼에 오르는 모델 같았다. 다른 이들이라면 마치 옷에 파묻힌 것처럼 보일 법도 한데 워낙 사람이 길고 틀이 빼어나다 보니 어디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원빈을 똑바로 세워준 성찬은 팔을 거두고 이번엔 손을 잡아 왔다. 날이 이렇게 추워도 장갑은 필요치 않았다. 성찬의 코트 주머니 안으로 쏙 들어간 원빈의 손엔 따뜻한 열기만이 감돌았다.
———
“ BB게임즈 긴급 주주총회를 시작합니다. ”
저는 마주친 적도 없는 회사 직원 중 하나가 주주총회의 시작을 알렸다. 아마 또 다른 대표인 병우의 밑에서 일하는 직원 중 한 명이겠지.
원빈이 긴장감에 다리를 떨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과 닫힌 공간에 있어 본 게 마지막으로 언제였던지 기억이 까마득했다. 가만있지 못하고 건조한 손톱의 거스러미를 뜯던 중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에 진동이 일었다.
: 손
성찬이다. 회장 내부가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저 모서리 끝쪽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성찬이 제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 긴장하지 마.
이윽고 도착한 두 번째 메시지에 천천히 숨을 크게 한 번 내쉬어 본다. 타이트하게 맞아떨어지는 정장이 영 불편했다. 웅웅 울리는 마이크 소리도 어지럽고, 히터가 빵빵하게 가동되는 회장의 공기도 메스꺼웠다.
좀처럼 바깥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환한 대낮에 스스로 나온 이유는 자신의 세계인 ‘언리얼라이즈(Unreal:ze)’와 BB게임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총회장을 찾아온 이들은 생각보다 다양한 모습이었다. 주주총회라고 하길래 나이가 좀 있고 배가 나온 아저씨들만 참석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건만, 의외로 게임 회사라 그런지 젊은 연령층의 사람이 많았다.
오늘 주주총회는 지난 서버 해킹 사태와 수습과정에 대한 주주들의 해명 요구에 따라 급하게 마련한 자리였다.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BB게임즈의 대응에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 없었다는 것은 KISA측에서 증명해줬지만, 아무래도 그 복구 과정에 꽤 오랜 시간을 소요한 것과 더불어 여러 가지 회사 내부의 소문이 밖으로 빠져나간 것이 결국 문제가 되었다.
강병우는 박원빈의 총회 참석을 바라지 않았다.
솔직히 혼자 이 큰 자리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으면서 그놈의 얼어 죽을 의리를 지키느라, 대인기피증이 있는 자신의 동업자를 적극 만류했다. 그러나 이번엔 원빈이 거절했다. 병우가 둘러댈 수 있는 부분에는 한계가 있었다. 언리얼라이즈는 그날 다른 부분도 아닌 기술적인 문제에 직면했던 거고, 그 부분을 설명하는 데에 자신만큼 적합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박원빈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서 이 큰 세계를 나 혼자 다 감당할 수 있을까? ’
그날 장장 24시간에 걸쳐 서버 복구와 KISA 대응을 진행하면서 원빈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무리 견고하게 성을 세운다 한들 분명 어느 누군가는 빈틈을 찾아내 화살을 쏘고 문을 두드릴 것이다.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저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다. 그 일이 터진 날이 하필 성찬에게 고백을 받은 크리스마스이브였던 것처럼 어쩌면 다음번에는 더 먼 곳에서, 더 중요한 일을 겪는 순간에 갑자기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이 부려온 고집 때문에 사랑을 잃을 뻔했다. 박원빈에게 그건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결국 ‘혼자서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주변 사람의 말을 수용하기로 했다. 여기서 ‘주변 사람’은 정성찬과 강병우였다.
“ 해킹이 발생했을 당시에 서버 복구 인력이 한 명이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최근 기사에 따르면 언리얼라이즈의 대부분 운영 시스템에 대한 접근 권한은 단 한 사람에게만 오픈되어 있다던데요. ”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 들어왔다. 아침에 저도 보았던 인터넷 기사에서 말한 대로, 주주 중에 누군가가 마이크를 잡고 해당 내용의 진위를 추궁했다. 지금껏 단상 위에 올라 홀로 대응을 하던 병우가 올 게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빈은 긴장을 가라앉히려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세계를 떠올려 본다.
언리얼라이즈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인 민트색 해변 위로 주홍빛 노을이 내려앉았다. 반짝이는 윤슬과 함께 낮게 찰랑이는 물결을 배경으로 성찬을 쏙 빼다 박은 아바타가 저 먼 해변 끝에서부터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어느덧 성찬의 날개는 황금빛 별가루가 흩날리는 최종 단계로 진화를 마친 상태였다. 눈앞에 다가온 성찬이 눈꼬리를 반달로 접어 화사하게 웃었다. 비현실적인 해변의 노을과 만나 찬란하게 빛나는 연인은 스스럼없이 자신을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였다.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떠올리며 나름의 평화를 찾은 원빈은 조용히 눈을 뜨고 병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 BB게임즈의 운영과 개발 총괄 리더이자 또 다른 대표이사 박원빈 님께서 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병우가 마이크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회장을 원빈이 천천히 가로질렀다. 또 다른 대표이사 박원빈이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데, 사람들은 운영과 개발 분야를 동시에 관장하는 총괄 리더라는 사람이 이토록 어리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듯 일제히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원빈은 조심스럽게 마이크 앞에 섰다. 떨리는 손을 감추려 마이크를 고정 거치대에 꽂아두고 살짝 자신에게 맞는 위치로 조정한 뒤, 심호흡 후 첫인사를 건네었다.
“ 안녕하세요.. BB게임즈 대표, 박원빈입니다. ”
고작 인사 한번에 수십 명의 눈이 일제히 자신을 향했다. 그건 저에게 있어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였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올라왔는데도 이 자리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도로 내려가고 싶어도 이미 자리에 올라온 이상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때였다. 회장의 가장 끝이자 자신과 마주 보는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성찬이 보였다. 선물로 주었던 코트를 벗어 한쪽 팔에 들고 저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성찬은 그렇게 조용한 응원을 보내주고 있었다.
“ 머,먼저.. 지난번 발생한 해킹 관련하여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던가. 아마 죽는 날까지 이런 자리를 즐기는 일은 없겠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상황에 도망치는 것 또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원빈은 천천히 지난 사건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병우가 당부했던 대로 저만 아는 세계의 언어가 아니라 모든 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풀어서, 아주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언리얼라이즈 속 세계를 잠시 위태롭게 만들었던 암흑의 시간을 털어놓았다.
“ 그러니까, 지금 그 복구를 본인이 혼자 했다는 겁니까? ”
“ ... 네. 언리얼라이즈의 핵심 소스에 대한 접근 권한은 저한테만 있습니다. ”
장내가 술렁였다. 지금도 수만 명이 접속 중인 게임의 대부분을 한 사람이 오롯이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 아니, 왜 그런 식으로 운영을 합니까? 만약에 더 큰 문제가 발생했으면 감당할 수 있었겠어?! ”
화가 난 몇몇 주주들이 발언권이 없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진행을 돕기 위해 곳곳에 자리하고 있던 직원들이 만류했지만 항의를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 죄송합니다.. 언리얼라이즈는 제 모든 걸 바쳐서 만든 게임이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관성 있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결국 저 혼자 운영에 관여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었습니다. ”
원빈이 단상에서 한 발자국 옆으로 나와 90도로 허리를 숙여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간 독단적으로 운영을 지속한 것은 맞지만, 사실 이렇게 어린 사람이 혼자 그 많은 일을 초창기부터 계속 감당해 온 것 또한 대단한 일이었다. 잠시 술렁이던 주주들은 진행 도우미들의 만류와 원빈의 진심 어린 사과로 차차 안정을 되찾았다.
장내가 잠잠해지자 원빈은 다시 한번 발언권을 얻었다. 오늘 이곳에 참석한 이유는 주주들을 비롯해 언리얼라이즈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불만과 불안을 잠식시키기 위한 향후 계획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지나친 긴장이 지속되면서 수백 번 되뇌며 외웠던 말들이 전부 기억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재킷 안쪽에 넣어두었던 예비용 대본을 꺼내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재킷 안 주머니를 배회하는 손가락 끝 어디에서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바깥의 포켓도 마찬가지였다. 휴대폰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원빈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사고다. 이 상황이면 오늘 꼭 하려고 했던 모든 말들을 전하지 못하고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무책임하게 내려와야만 했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강병우는 안타깝게도 패닉에 빠져 사정없이 흔들리는 박원빈의 눈동자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단상에 우두커니 서 있는 동료의 모습을 초조한 눈으로 보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 대표님. ’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함만 남았던 그때, 어느새 회장을 빙 돌아서 단상 위까지 올라온 성찬이 자신의 소매 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귓속말을 걸어왔다. 얼핏 보면 수행비서나 경호원쯤으로 보이는 커다란 남자가 갑자기 단상 위로 올라오자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놀란 것은 원빈도 마찬가지였다. 성찬은 이 주주총회에서 제삼자였다. 오늘도 그저 자신에게 힘을 주려고 자리를 지켜준 것일 뿐, 이렇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서는 절대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찬은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넓은 등으로 모두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가려주었다.
‘ 이거 받아. ’
‘ 이..이게 뭐야? ’
성찬이 내민 것은 아까 총회가 시작하기 전 제가 맡겨둔 무선 이어폰이었다. 직접 한쪽을 꺼내 제 귀에 끼워준 성찬은 살짝 긴 옆 머리카락을 매만져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지 확인까지 야무지게 마쳤다.
‘ 나 갈게. ’
어??? 이러고 간다고??? 영문도 모르는 제게 이어폰 하나만 달랑 꽂아주고 다시 단상에서 내려가는 성찬의 뒷모습에 원빈은 금방이라도 딱 기절하고만 싶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대체..! 당황해 마지않는 원빈을 뒤로하고 성찬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예 회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혼자서 운영할 겁니까?! 무슨 대책이 있으니까 오늘도 이렇게 올라온 거 아니냐고!! ”
참다 참다 폭발한 누군가가 또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주주들의 인내심이 줄어들수록 원빈의 긴장감 또한 빠르게 치솟았다. 괜히 왔어, 차라리 강병우 말대로 공문으로 띄울걸.. 무슨 책임을 얼마나 거창하게 지겠다고, 너 같이 사람 상대하는 거에 소질도 없는 인간이 이 사람 많은 곳까지 참석해서는...!
멍청하고 부족한 자신을 책망하던 원빈은 병우를 향해 S.O.S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 그 S.O.S에 대한 응답은 전혀 다른 곳에서 도착했다.
귀에 꽂은 것도 금세 잊어버렸던 이어폰에서 갑자기 작은 벨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하필 지금 제게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원빈은 전화를 끊으려 이어폰을 두 번 빠르게 누르려던 것을 그만 길게 한 번 누르고 말았다.
- 원빈. 들려?
전화를 다시 끊으려 귀를 만지작거리는데 갑자기 성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안다는 듯이 성찬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 네가 준비했던 말은 지금부터 내가 천천히 읊어줄 테니까, 너는 그걸 듣고 따라서 말하면 돼. 어차피 지금 대답 못 하는 거 아니까 바로 시작할게.
이제야 성찬이 제 귀에 굳이 이어폰을 꽂아주고 사라진 이유를 알겠다. 지금 성찬은 회장 바깥의 어느 구석에서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하려고 준비했던 말을 전화를 통해 몰래 불러줄 계획이었다.
긴급 주주총회 일정이 잡히고 난 그때부터 원빈은 매일 밤낮 없이 고민해서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전해야 할 말을 정리해 써 내려갔다. 세상에는 저만큼이나 자신의 게임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조금 더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저 혼자서 모든 걸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번 경험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수십 번을 고쳐 쓴 한 뼘짜리 대본이 완성되고 난 뒤엔, 그걸 자다가도 읊을 수 있을 때까지 내용을 달달 외웠다. 밥을 먹는 중에도, 정기 서버 테스트를 하던 중에도, 심지어 성찬의 무릎을 베고 누워 쉬던 순간에도 원빈의 손에서 그 메모가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성찬은 자신의 옆에서 같은 내용을 듣고 또 반복해서 들으며 거의 환청이 들릴 때까지 꼬박 일주일 내내 고문을 당했다.
그러니 결국 그 대본을 외우고 있는 사람은 둘인 셈이다. 안타깝게도 지나친 긴장으로 오류를 일으킨 박원빈의 뇌가 셧다운 상태에 돌입해버렸으니 이제 믿을 구석은 정성찬뿐이었다.
- 제가 이렇게 오늘 이 자리에 나오게 된 이유는...
“ ... 지난 12월 24일과 25일에 걸쳐 발생했던 끔찍한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
- 매일 같이 언리얼라이즈를 찾아주시는 유저 분들 만큼이나 ...
“ ... 저 또한 세상 그 누구보다 이 게임을 사랑합니다. ”
귓가에 들려오는 성찬의 음성을 가이드 삼아, 원빈은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나갔다.
“ 지금부터 언리얼라이즈는 저 혼자만의 힘으로 운영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BB게임즈에는 유능하고 미래가 밝은 개발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일손을 나누어 앞으로 더 나은 BB게임즈의 미래를 그리고자 합니다. 언리얼라이즈는 더 다양하고 무한한 방향으로 세계가 확장될 것이며, 유저들의 정보는 지금보다 더 강화된 보안 체계 아래에서 철저하게 다루어질 것입니다. “
원빈은 4년, 아니 그 이전부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꽉 걸어 잠그고 있던 성을 모두에게 오픈하기로 마음먹었다. 같이 성을 돌봐주는 이들이 있다면,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사랑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역할은 다 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 언리얼라이즈가 단순히 찰나의 쾌락을 제공하는 게임이 아닌, 누군가에게 또 다른 세계로서 행복을 나누어 주는 공간이기를 바랍니다. 그 가치에 부합할 수 있게 BB게임즈의 대표로써, 그리고 언리얼라이즈를 사랑하는 유저 중 한 명으로써 앞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진심을 전한 어린 대표이사를 향해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작은 박수를 보냈다. 다들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을 정도로 베일 속에 감춰져 있던 사람이 이만큼 용기를 낸 것만으로 박수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그런 것까지 이해해주지는 않겠지만 진심은 어쨌든 통하는 법이다.
이어폰 너머로 들리던 성찬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하려고 계획한 말을 다 마친 상황이라 지금부터는 제 음성을 오롯이 듣겠다는 듯, 성찬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회장 밖 어딘가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원빈이 답할 만한 질문은 더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가장 큰 문제에 대한 답을 들은 이상 주주들은 BB게임즈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앉아있던 강병우가 눈치껏 바통 터치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던 참이었다. 원빈이 다시 마이크를 톡, 건드리며 수음을 확인했다.
“ 한 가지만 더 말씀드려도 될까요..? ”
원빈의 돌발 행동에 병우를 비롯해 회장 내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크게 한 번 숨을 고른 원빈은 회장 뒷문을 통해 다시 안으로 들어온 성찬을 발견하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 연내에 BB게임즈의 신작에 대한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발표에 장내가 술렁였다. 원빈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의 표정은 놀란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고, 그중에 몇몇은 자신들이 가진 주식이 오를 거란 희망 때문에 벌써부터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리고 저 끝에 서서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서서히 내려놓는 성찬의 얼굴에서도 희미한 행복이 비쳤다.
“ 아직은.. 말씀드릴 단계는 아니지만, 언리얼라이즈와는 다른 새로운 게임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추가적인 내용 알려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어정쩡하게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한 자세로 머물러 있던 병우와 눈이 마주쳤다. 새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렇게나 자신을 독촉하던 강 대표는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달고 있었다. 아···. 창피해. 얼른 도망가야지.
그렇게 BB게임즈 박원빈 대표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큰 박수를 받으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 잘했어- ”
“ 후에엥... ”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곧장 회장 바깥으로 빠져나온 저를 맞이해 준 건 성찬이었다. 긴장이 풀리며 주저앉을 뻔한 몸을 꽉 안아주는 단단함에 원빈의 입에서는 저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 너 아,아니었으면 나 진짜.. ”
“ 그래도 나중에는 내가 불러주기도 전에 먼저 말하던데? 그냥 긴장해서 잠깐 기억이 안 났던 거잖아. ”
회장 복도를 오가던 직원들이 보기 드물게 남자 둘이 얽혀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눈빛을 보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내 회사잖아. 감히 대표한테 대들 수 있는 배짱 있으면 나와보라 해-
일반적인 근무 시간에 회사로 나온 적은 오늘이 처음이면서 박 대표는 출근 첫날부터 꼰대 기질이 아주 낭랑했다.
“ 근데 대체 언제 새 게임 준비를 했어? “
” 아 그거는···.“
저를 품에 안은 그대로 고개만 살짝 꺾어 눈을 맞추던 성찬이 조금 전 마지막으로 알렸던 신규 게임 소식에 관해 물었다. 사실 작년 11월부터 꾸준히 조금씩 작업 중이던 것이 있었다. 언리얼라이즈 말고는 다른 것은 전혀 볼 생각도 없고 볼 줄도 몰랐던 제 세상에 성찬이 아주 단단하게 자리 잡았음을 깨달은 이후,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아직은 가벼운 구상과 기획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이렇게 공표를 했으니 회사의 주요 인력들과 논의해 제대로 된 착수 단계에 돌입하면 올해 안에는 어느 정도 초안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 이제 일을 좀 내려놓게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더 바빠지겠네. ”
성찬은 제 계획을 듣고 갑자기 시무룩해지더니 입술을 뿌우- 하고 내밀며 투정을 부렸다. 혼자만 처리하던 일을 내려놓고 앞으로는 직원들에게 모든 걸 공유하겠다는 의견을 꺼냈을 때 그 누구보다 성찬이 반가워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이 투정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성찬은 그만큼 자신의 불규칙하고 모니터 앞에만 앉아있는 생활을 걱정하고 있었다.
” 아, 아니야아.. 이제 나 혼자 일 안 해.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만들 거야. 절대, 절대로 예전처럼 안 해. “
이렇게 예쁜 얼굴로 제 걱정을 하는데 어떻게 모른 척 외면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게임을 같이 하기로 결정했던 이유 중에 Bambi01의 예쁜 얼굴도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부정할 수 없었다.
” 아이고, 박 대표니이임-!! “
회장 안이 살짝 소란스러워지는 것 같더니만 강병우가 제일 먼저 문을 열고 나오며 호들갑스럽게 자신을 높여 불렀다. 언제부터 자기가 저를 대표이사 대접을 해줬다고? 왠지 모를 거부감에 성찬의 품으로 더 깊이 숨으려 드는 원빈을 억지로 끌어낸 병우는 아예 자기가 직접 끌어안고 등과 머리를 마음껏 쓰다듬었다.
” 아, 왜 이래- “
” 아유 이 기특한 녀석. 새 게임을 준비하고 있었으면 형한테 진작 말을 했어야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어? 우리는 이렇게 원 히트 원더로 끝나는 회사가 되는구나- 혼자서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
성찬과 달리 텁텁한 담배 냄새가 섞여 나는 병우의 향수 냄새에 원빈이 작게 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깜짝 놀라서 떨어져 나가는 병우는 그 옆에 서 있던 커다란 장신의 미남을 보고 먼저 인사를 건네었다.
” 어어- 참, 이제야 제대로 얼굴을 보네. 안녕하세요, 성찬 씨. 반갑습니다. 강병우입니다. “
” 안녕하세요, 대표님. “
” 에이, 대표는 무슨. 원빈이도 나한테 형이라고 하는데 그냥 편하게 성찬 씨도 형이라고 불러요. 하하- “
괜히 쿨한 척하려고 팔을 툭 치며 너스레를 떨던 병우는 도톰한 겨울용 정장을 가운데 두고도 충분히 느껴지는 성찬의 두껍고 단단한 팔의 촉감에 흠칫 놀라는 듯했다. 그러고는 자기도 민망했는지 운동을 많이 한 것 같다며 성찬을 향해 쌍 엄지를 치켜세웠다.
” 형, 나 오늘부터 일해야 하는 건 아니지? “
” 어? 왜? 여기서 일하게? 왜지? “
” 아니, 나 이제 다른 사람처럼 아침에 회사 나와서 일할 거야. 언리얼라이즈 인수인계도 진행해야 하고, 새 게임 관련 프로젝트도 시작해야 하잖아. 혹시 오늘부터 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그리고 기왕이면 대표실 백룸 말고 개발팀이랑 운영팀에 가까운 곳에 내 자리를 만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
대표이사실 안쪽의 백룸은 아늑하고 편안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업무를 공유하며 일을 하기에 적합한 곳은 절대 아니었다. 매번 저한테 보고하고 논의할 일이 생기면 직원들은 12층 비서실 입구를 통과해야 하고 대표이사실을 가로질러서 들어와야 하는데, 아마 그것만큼 여러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일은 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제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직함은 대표이사 겸 개발 운영 총괄 리더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전자보다 후자에 훨씬 가까웠으니 그에 맞는 공간이 새로 필요했다.
” 어어, 새 방. 새 사무실! 8층이 개발팀이고 7층이 운영팀이거든? 어디가 나을까? 아! 원빈이 네가 숫자 7을 좋아하니까 7층으로 하는 게 낫겠네. 그치? “
” 그건 형이 알아서 하구···.“
” 좋아. 내가 7층에 창 넓은 쪽으로 해서 블라인드랑 같이 공사 싹 들어가라고 바로 얘기할게. 너 언제부터 나올래? 일주일? 열흘? “
대략적인 공사 기간을 제시하는 병우의 말에 원빈은 제 옆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성찬을 바라보았다.
“ 성찬아, 너 휴가 며칠 정도 더 쓸 수 있어? ”
“ 나? 어.. 그건 회사랑 얘기를 해봐야지? ”
성찬은 오늘도 휴가 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1층 로비에 서 있어야 하는 사람인데 오늘 주주총회에 참석하는 저를 응원한답시고 1년 만근도 아직 채우지 못한 사람이 금쪽같은 연차를 잘라 썼다. 너무 갑자기 얘기한 건가? 오래 쓰는 건 역시 힘들겠지···.
성찬이 휴가를 여유 있게 더 낼 수 있으면 가까운 곳으로 여행이라도 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 휴가? 왜? 둘이 여행이라도 가게? ”
“ 웅.. 어차피 출근하게 되면 여유가 없으니까.. 이럴 때 성찬이랑 둘이 가까운 데라도 여행 가서 놀고 싶어. ”
난처해하는 당사자 대신에 여행 계획을 들은 병우가 오히려 더 반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강병우는 박원빈 입에서 ‘여행’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처음 들었다. 마지막으로 여행을 갔던 건, 중학교 입학 직전에 가족들과 떠난 일본 여행이 끝이었다. 아.. 해외는 좀 힘들어도 제주도 정도는 주말 끼워서 이틀만 휴가받아도 충분할 것 같은데? 최대한 절충안을 찾아 제시하려던 그때, 병우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이 대표님. 예예- 안녕하세요. 강병우입니다. 혹시 우리 건물에 그.. 정성찬 님이라고 보안 쪽, 네네, 그분이요. 전에 제가 한번 말했던... 기억나시죠? ”
지금 뭐 하는 거지, 강병우..
주주들이 빠져나가느라 소란스러운 회장의 복도 구석 한켠에서 갑자기 전화 너머의 누군가에게 성찬의 얘기를 꺼내는 병우의 생각을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 오늘은 다른 게 아니고, 정성찬 씨를 제가 일주일 정도 개인 경호로 좀 쓰려고 하는데- 아, 아니다. 열흘. 열흘이요. 날짜..? 어.. 1월 말까지로 봐주시면 될 것 같네요. 네. 그래서 혹시 가능하면 그 기간에는 우리 건물 입구 보안은 다른 분으로 업무 대체를 좀 부탁드리려고요. 개인 경호 기간에 추가 수당 나오는 거는 넉넉하게 산정해드릴 테니까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성찬 씨한테는 제가 따로 얘기 하겠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이 대표님은 근무 조정만 좀 해주세요. 네네- 들어가세요- ”
살가운 태도로 일관하며 전화를 이어가던 병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아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정작 1월 말까지 대표이사 강병우의 개인 경호원이 되어버린 정성찬과 그의 짝 박원빈은 아직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떫은 얼굴로 일관했다.
“ 왜 안 웃지..? 박수라도 쳐! 내가 지금 이번 달 내내 돈 받고 휴가 다녀올 수 있도록 만들어 줬잖아! ”
“ 엥? 휴가...? ”
“ 그래! 지금까지 뭐 들었어? 여기 성찬 씨 내 개인 경호로 빼돌리는 거 못 들었어? ”
“ 그거는 형이 필요해서, ”
“ 아, 뭔 소리야- 일개 게임사 대표가 경호원이 왜 필요해? 그냥 원빈이 너 여행 가고 싶다길래 같이 가라고 업무 빼준 거잖아! ”
에엥?? 그게 그렇게 되는 거야..? 강병우 대표의 큰 뜻을 이제야 헤아린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렇게 되면 열흘도 아니고 약 2주 정도의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언리얼라이즈에는 1월 말까지 특별한 이벤트 패치 계획이 없다. 물론 2월 중에 새로 오픈하는 작은 이벤트 맵이 있긴 하지만 그건 이미 2차 작업까지 끝내놔서 조금만 손을 더 보면 되니 배포 전까지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웬만한 일에 대응할 수 있게끔 얼마 전부터 만들어 둔 매뉴얼도 있다. 병우가 저 대신 업무를 수행할 직원을 지정해주기만 하면 그 파일을 넘겨놓고 얼마든지 휴가를 갈 수 있다. 결국 남은 건 어디로 여행을 갈 건지 목적지를 정해서 빠르게 떠나는 것뿐이다.
“ 고마워, 형···.“
” 감사합니다. “
” 다녀오면 열심히 일해. 네가 회사에서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나도 최대한 배려할 테니까, 너도 이참에 못다 쓴 휴가 이번에 몰아서 다 쓰고 와. 그리고 돌아올 때는 머리는 가볍게, 두 손은 무겁게. 알지? 형은 관광지 기념품보다 면세점 선물 좋아해. “
간만에 대표다운 배포를 쓴 강병우는 한껏 멋진 척을 하며 사라졌다. 가끔 날을 세우고 쓴소리도 하지만, 어쨌든 병우는 저를 열 여덟 살 때부터 보아 왔고 지금은 피를 나눈 혈육보다 자신을 더 끔찍하게 아꼈다. 좋은 동업자이자, 친구. 그런 사람이 옆에 있었기에 박원빈은 오늘날 자신의 게임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지켜낼 수 있었다.
병우가 사라진 복도 끝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제게 성찬이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제 이 행동의 의미를 잘 알았다.
원빈은 크고 따뜻한 그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퍼즐이 딱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성찬은 깍지를 끼며 제 손등 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 갈까? ”
“ 응. ”
BB게임즈 박원빈 대표의 오늘 근무는 끝이 났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정성찬의 연인 박원빈으로서 새로운 시작을 할 차례였다.
<10장. 즐거운 시간 되세요!>
[ SC♥WB0302 :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화 풀어어어ㅓㅓ ]
화면 속 성찬의 아바타가 자꾸만 등을 돌렸다. 아, 이쁜 얼굴 좀 보자. 제발-
[ SC♥WB0302 : 나도 깜빡하고 잊어버리고 있었다구 ]
[ SC♥WB0302 : 화 풀어라 ]
[ SC♥WB0302 : 웅? ]
[ SC♥WB0302 : 내가 우리 닉네임도 바꿔놨자나ㅏㅏ ]
이 닉네임 바꾸는 게 되게 쉬운 줄 아나 본데, 특수기호는 억만금을 줘도 시스템에 안 먹힌다니까? 내가 언리얼라이즈 개발 운영팀 리더 박원빈이니까 가능한 거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잔뜩 토라진 애인은 평소처럼 게임 중 헤드셋을 통한 직접 대화도 거부하고 1:1 채팅창에서도 대답을 전혀 안 했다.
[ SC♥WB0302 : 나 진짜 안 볼 거야? ]
[ SC♥WB0302 : 언제까지 모른 척 할 건데에 ]
[ SC♥WB0302 : 나 배고파 치킨 먹자 ]
[ SC♥WB0302 : 정성찬 ]
[ SC♥WB0302 : 야 ]
[ WB♥Bambi01 : 야라니. 형이라고 해. ]
하 씨···.
[ SC♥WB0302 : 형 ]
[ SC♥WB0302 : 형아 ]
[ SC♥WB0302 : 성찬이 형 ]
[ WB♥Bambi01 : 웅 ]
이...이익, ‘형’무새 같으니...! 원빈은 옆에 던져둔 이어폰을 찾아 끼고 곧장 성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 성찬아. ”
- 나 끊을게에...
“ 형! ”
습관적으로 또 ‘성찬아’라고 부르다가 전화를 끊겠다는 협박을 아주 깜찍하게 하는 애인 때문에 정신이 확 들었다.
- 왜..
“ 미안해. 미안하다구.. ”
- 너 이제 나한테 속이는 거 없다며. 숨기는 것도 없다며어-
“ 아니이.. 그거는 나도 까먹었다니까? 진짜야! 너무 오래 익숙해져서 나도 내가 너보다 어리다는 생각을 못했구, ”
- 너 아니고 형.
“ (하...) 형보다 내가 어린 걸 잊어버렸어. 미안해애- ”
미안하다는 말을 할 때마다 앞으로 뽀뽀를 하겠다고 깜찍한 으름장을 놓던 사람은 어디 가고, 어린 애처럼 ‘형’이라는 단어에 무섭도록 집착하는 고집쟁이만 남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전부 내가 불러온 업보인 것을.
박원빈은 홍콩에서 오는 길에 자신이 저지른 마지막 거짓말을 들켰다. 지난 크리스마스 사건 이후로 그간 했던 거짓말을 모두 청산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 줄 알았건만, 정작 제일 중요한 것 하나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둘만의 첫 여행을 끝나고 홍콩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홍콩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홍콩’이 아니라 대륙에 붙은 도시인 ‘진짜 홍콩’이다.) 홍콩 여행은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짜릿했던 첫 키스와, 저는 모르지만 성찬은 본 적 있는 어느 홍콩 영화의 명소 투어까지 어느 하나 부족한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같이 여행을 다니는 동안 24시간을 내리 붙어있다 보니 서로에 대해 훨씬 많은 걸 알게 됐다. 성찬은 생각보다 단 음식을 좋아했고, 제 예상보다 훨씬 더 몸이 컸다. 호텔에서 같은 사이즈의 욕실 가운을 입어도 저와는 달리 끝단이 전부 짤막하게 올라가는 폼을 본 솔직한 소감은 부러움 반 신기함 반이었다. 물론 몸만 신기한 건 아니었다.
정성찬은 그렇게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해외여행이라고는 아주 까마득히 오래전 부모님과 같이 가본 게 다인 저로서는 오로지 성찬만 믿고 따라나선 건데, 숙소와 항공편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란인 계획을 들고 오는 바람에 이번에 제대로 ‘즉흥 여행’의 끝을 봤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엄청 좋았다. 정해놓은 계획은 없어도 어떻게든 그 끝에 저를 가장 좋은 곳으로 이끄는 성찬의 능수능란함이 오히려 마음을 더 설레게 했다.
그렇게 비현실적일 정도로 좋았던 첫 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성찬은 갑자기 제 여권 사진이 궁금하다고 했다. 제 손에서 여권을 뺏어가는 성찬에게 눈을 흘길 때까지만 해도 박원빈은 지금 이 사태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여권 사진 규정대로 귀를 훤하게 드러내느라 옆머리 숱이 적어진 얼굴이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만 했을 뿐 자신이 했던 거짓말의 존재는 새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고 귀엽다며 연신 함박웃음을 짓던 성찬의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돈으로 처바른 덕에 아늑하기만 한 퍼스트 클래스의 시트에 편안히 파묻혀있던 원빈이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뒤늦게 눈치를 살폈지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갔다.
결론은, 정성찬이 삐졌다. 그것도 아주 거-하게.
알고 보니까 뭐 생일이 그렇게 빠르지도 않더만. 고작 6개월 빨리 태어났으면서, 저한테 200일이 넘도록 ‘형’ 소리를 못 들은게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 길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 전화도 안 받고 하물며 게임에서도 아는 척을 안 했다.
아니 이게 그렇게 억울할 일이야? 요샌 만 나이다 뭐다, 다들 귀찮아서 제대로 된 나이도 잊어버리고 대충 사는데, 굳이 ‘형’ 소리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 너 나한테 어떻게 그래 진짜...
“ 아아- 미안해애애- ”
- 이런 건 빨리 말해줬어야지...
“ 나,나도 나쁜 의도는 없었구.. 응? 성찬, 아 아니지.. 형. 혀엉- 화 풀어라아- 화 풀어요오- “
옛다.. 받아라, 존댓말. 박원빈은 이제 반은 포기하는 심정으로 애교를 바닥에서부터 쥐어 짜냈다. 이 정도면 사과 좀 받아주면 안 되나? 다른 건 다 괜찮다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던 사람이 고작 호칭 하나에 이토록 집착할 줄은 몰랐다. 꼰대야, 꼰대. 사체과 나왔다고 했을 때 서열 위주 꼰대 기질이 있는 걸 진작 알아봤어야 했다.
“ 형, 내가 뭐 해주면 화 풀 거야? ”
- 너는 날 뭐로 보고 그래···.
“ 미안하니까 그러지.. 최신형 폰으로 바꿔줄까? 아니, 형 노트북으로는 게임할 때 발열 너무 심하니까 이참에 게임용 컴 하나 사줄까? ”
- 내가 넌 줄 알아? 난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우씨.. 이건 좀 나한테 상처 되는 말인데? ‘(구)히키코모리’였던 박원빈 입장에서 조금 전 성찬의 말은 조금 기분이 나빴다. 누구는 뭐 최신형 폰이랑 게임용 컴퓨터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인줄 아나...
정작 자신이 먼저 그 이상한 잣대를 성찬에게 들이댔다는 사실은 벌써 잊어버린 원빈이다.
“ 나 진짜 배고파.. 치킨 같이 먹자. 응? ”
- 치킨은 너 혼자 시켜 먹어도 되잖아.
“ 나 혼자 무슨 맛으로 먹어.. 아아- 형아아- ”
- 치이...
반응은 저래 보여도 ‘형아’ 소리에 조금 기분이 풀려서 지금쯤 분명 옷을 갈아입을 채비를 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역시나 제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 어떤 치킨으로 먹을래? 나 옷 입고 나서면 너희 집까지 아마 30분 정도 걸릴 텐데 나가기 전에 미리 시켜놓게.
“ 나? 아무거나 괜찮아. 오늘은 너 먹고 싶은 거로 먹자. ”
드디어 성찬의 화가 풀렸다는 생각에 아무거나 다 괜찮다고 웃으며 답을 했는데... 이상하게 또 반대편에서 답이 없었다. 왜..? 왜 또 그러는데-
- ... 나 안 갈래.
“ 아, 왜에-! ”
- 방금 나한테 또 ‘너’라고 했잖아!
하이씽.. 진짜 짜증 나서 못 해 먹겠네. 휴가는 고작 이틀이 남았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이렇게 여유 있게 붙어있을 시간도 부족해질 텐데 성찬은 자꾸만 미운 일곱 살처럼 투정을 부렸다.
든든해 보였던 첫인상은 취소다. 덩칫값 못하고 나이와 호칭에 집착하는 꼰대 남친인 줄 알았으면 절대! 절대로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 진짜 안 와? ”
- ... 웅.
“ 후회 안 하지? ”
- 박원빈 너 지금 나 협박해?
“ 협박은 지금 형이 하고 있잖아! 200일 넘게 만나는 동안에 한 번도 형이라고 한 적이 없는데 그,그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쉽게 입에 붙겠냐구! ”
따지고 보니까 좀 억울하다. 대체 이 인간은 나랑 연애를 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단순히 호형호제를 하고 싶은 거야? 홍길동이 살아 돌아와도 이렇게 ‘형’ 호칭에 집착은 안 하겠네..!
“ 형은 그게 그렇게 서운해? 막, 어,얼굴도 안 보고싶구.. 냇,내가 배고프다는데 밥도 같이 먹기 싫을 정도로 서운하냐고…! 그,그리고 6개월이면 그냥 친구 할 수도 있는 거지..! ”
- 하, 그런 식으로 한다면 난 우리 할아버지랑도 친구 할 수 있어.
“ 이익...오지 마! 나도 너랑 안 놀아! 치사하구로.. ”
제가 좀 나이를 오래 속인 건 맞긴 한데 그래도 이건 아니다. 최선을 다해서 이틀을 내리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는데도 어떻게 아직도 꽁하게 굴어? 원빈은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아직까지 켜두었던 언리얼라이즈에서도 로그아웃했다. 그와 동시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아- 나 진짜 배고팠단 말이야!!
곧장 전화를 걸거나 집으로 찾아올 줄 알았던 성찬은 다음날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원빈은 성찬이 아는 ‘WB0302' 계정 대신에 간만에 마스터 계정으로 들어가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서버에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저 대신 관리를 맡아준 직원들이 괜한 버그를 불러일으킨 건 아닌지 꼼꼼하게 살피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물론 그것만 한 건 아니고 다른 작업도 조금 곁들여서 하긴 했다. 아무튼 일을 마무리하는 동안에 잔뜩 쪼그라든 배는 위장은 집에 있던 컵라면 하나로 대충 때웠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하고 빛을 가리려 침대 옆 암막 커튼을 쳤을 땐 시간이 벌써 오전 6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엊그제 동반 여행을 다녀온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원빈의 생활은 아주 오래전, 혼자 외로이 언리얼라이즈에만 미쳐있던 그 시기와 같은 패턴으로 돌아갔다. 동이 틀 때가 되어서야 잠들고 느지막이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겨우 눈을 뜬 원빈이 잠시 절전모드로 돌려 둔 모니터 화면을 다시 가동했다.
기지개를 켜는 뼈마디 곳곳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최대한 몸을 죽죽 늘려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 몇몇 부위의 뻐근함에 갑자기 성찬의 손이 그리워졌다. 마사지 하나는 그래도 끝내주게 잘했는데... 장시간 모니터를 보느라 자신도 모르던 사이에 어깨가 구부정해지면 성찬이 어김없이 다가와 주물러 주던 것이 근래의 일상 중 하나였다.
아휴, 모르겠다. 일단 어제 하다가 접어둔 마지막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원빈은 다시 마스터 계정으로 언리얼라이즈를 열었다.
언리얼라이즈는 2월 중에 새로운 패치를 앞두고 있었다. 대대적인 개편은 아니지만 유우니 소금사막을 모티브로 해서 거울 사막이란 이름의 HP 급속 회복 및 게임 내 재화 획득 이벤트 페이지가 생성될 예정이었다. 과금 유저들과 무과금 유저들의 밸런스 조정 페이지기도 한 이 공간은, 아마 원빈의 의견으로만 진행되는 마지막 언리얼라이즈의 맵이 될 것이다. 그 후로는 아마 저보다 유능한 직원들의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이곳을 채워나가겠지. 일선에서 한 발자국 멀어진다는 사실에 마냥 아쉬울 것만 같았는데 오히려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워커홀릭 자질 어디 안 간다고 가볍게 씻고 나온 뒤로는 계속해서 모니터만 봤다. 사비 들여서 휴가를 보내준 강병우가 알면 기함할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제 연인이란 작자가 저를 계속 밀어내는데 나라고 이러고 싶겠냐구. 하여튼 일을 잘 하다가도 성찬의 생각이 날 때마다 한숨이 폭- 나왔다.
패치 관련 3차 작업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의자에 힘을 빼고 추우욱- 늘어지는데 갑자기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엥? 누구야..? 강병우라면 매너 없이 벌써 비번을 치고 들어왔을 텐데? 벨을 누르는 것도 아니고 현관문을 두드리는 것은 또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 누구..세요...? ”
현관 바깥을 비추는 인터폰 화면을 켰는데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뭐야, 무서워... 그러고도 두 세 번 더 누구냐고, 누가 있냐고 물어봤는데 여전히 답은 없었다. 씨잉- 나 이런 거 무서워한단 말이야- 인터폰 화면을 두고 홀로 집안에서 대치 중이던 원빈은 후다닥 뛰어가 휴대폰을 찾아 들고 다시 돌아왔다. 다급히 성찬의 연락처를 찾는다. 지금 이럴 때 제일 기댈 곳은 누가 뭐래도 제 애인밖에 없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휴대폰 너머로 신호음이 가는 것과 동시에 문밖에서도 어렴풋이 벨소리가 들렸다. 인터폰을 들어 수화기를 귀에 바짝 가까이 대어보니 그 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려온다.
이제야 알겠다. 지금 문밖에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정성찬이었다.
“ 베,벨을 누르지.. 왜 문을 두들겨? ”
“ ... 고장났던데? ”
“ 으엥? 그럼 내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대답이라도 했어야지. ”
“ ... 몰라. ”
차가운 겨울 공기를 달고 안으로 들어오는 성찬의 손엔 치킨 상자가 들려 있었다. 아직 따끈한 온기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근처 치킨집에서 직접 받아서 곧장 걸어온 듯했다. 머리에 눌러쓴 후드와 칭칭 감은 목도리를 벗어내는 성찬의 얼굴을 흘깃 살폈다. 여전히 살짝 부루퉁하게 튀어나온 입술이 삐돌이 청산은 아직 안 끝났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저 역시도 조금 꽁해진 상태라 별말 없이 그냥 하던 일이나 하려 했는데, 치킨을 보자마자 눈치 없는 뱃속 시계가 꼬르륵- 알람을 울렸다.
치킨을 가운데에 둔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 시,식는다.. 따뜻할 때 묵자. ”
“ ... 웅. ”
뼈 발라 먹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저를 위해 순살로 맞춰서 사 온 성찬은 제가 건네는 포크를 들고 빤히 음식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건 먼저 먹으라는 얘기다. 자세히 보면 식탐도 있고, 저보다 훨씬 더 많이 먹는데 매번 이렇게 음식을 양보했다.
제 입에 음식이 들어가고 맛있다는 얘기가 나오면 그제야 성찬은 편하게 식사를 시작한다. 어릴 때 같이 크던 친형도 맛있는 게 있으면 뺏어 먹기가 일수였는데 이런 배려를 받아 보는 건 엄마 아빠 이후에 성찬이 처음이었다.
“ ... 맛있넹. ”
“ 치즈볼도 먹어. ”
“ 웅. 형도 많이 먹어.. ”
형 소리를 듣고 수줍게 웃는 얼굴이 며칠 전보다 수척해 보였다. 아무래도 어제 제가 성질을 내며 먼저 전화를 끊어버리고 난 후에 마음고생을 좀 한 것 같다. 모질지도 못한 사람이다. 덩치만 컸지 사실 공격력은 제로에 가까운 순한 성격의 애인은 지금 자기를 좀 봐달라고 온몸으로 어필 중이었다. 바보야.. 이렇게 순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래?
(구)히키코모리 박원빈은 아직도 밖에서 키오스크가 없으면 음료 한잔을 제대로 시키지도 못하는 주제에, 덩치 큰 순둥이 애인을 걱정했다.
“ 형. 다 먹었으면 이,이리 쫌 와 봐.. ”
“ 왜? ”
“ 보,보보여줄 거 있어서 그래.. ”
시무룩해진 애인을 달랠 겸, 제 거짓말도 사과할 겸, 원빈은 나중에 서프라이즈로 보여주려 했던 선물을 미리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시기가 좀 이른 감은 있지만 어쨌든 지금도 타이밍이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성찬을 데리고 모니터가 즐비한 거실 한켠으로 데려가는 원빈의 등이 꽤 즐거워 보였다.
“ 게임하게? ”
“ 아,아니- 일단 여기 로그인이나 좀 해봐. ”
절대 아무나 앉히지 않는 자리다. 목숨처럼 아끼는 데이터들을 담아둔 고사양 컴퓨터와 최고급 화질을 자랑하는 커다란 모니터가 빙 둘러싸고 있는 원빈의 작업 테이블 앞에 성찬이 앉았다. 여기는 진짜 나 말고는 형이 처음 앉아보는 거야. ‘처음’이라는 말에 성찬의 광대가 또 볼록 귀엽게 위로 솟았다.
“ 너도 같이 들어가는 거 아니야? 왜 나만 접속해? ”
“ 게,게임 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라구... 일단 광장 느티나무로 가. ”
“ 응.. ”
옆에 서서 손가락으로 지시하는데 자기만 로그인 한 게 어색한지 성찬이 자꾸만 질문을 해댔다. 아잇 그냥 쫌 시키는 대로 하라구-
“ 여기서 나 뭐 해? ”
“ 이제 나무에 올라가 봐. ”
“ 어? ”
“ 다들 안 해봐서 그렇지 나무에 매달릴 수 있는 거 알잖아. ”
“ 느티나무를 타라고...? ”
“ 웅. 쪼금만 올라가면 돼. shift키 누르고 방향키 위로 챱. 어어- 그거그거. “
언리얼라이즈에서는 안 되는 게 없다. 걷는 거 뛰는 거 나는 거 수영하는 거 전부 다 되는데 나무를 오르는 게 안 될 리가. 기본적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신체적 움직임은 전부 반영해 둔 것이 언리얼라이즈의 특장점이었다.
성찬은 제가 시키는 대로 느티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토끼에게 히든 아이템인 생일 케이크를 받으려고 찾아온 신규 유저가 이 꼴을 마주한다면 별 미친놈이 다 있다고 욕을 할지 모르겠으나, 일단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시야에 나무 기둥이 가득찼다. 실감 나게 움직이는 아바타의 행동에 그걸 보고 있는 저조차도 살짝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때, 거칠거칠한 느티나무 표면이 바뀌는 지점이 나타났다.
” 이게 뭐야..? “
“ 마,마음에 들어? ”
나무를 오르지 않는 이상 보이지 않는 느티나무의 위쪽에 꼭 기둥 표면을 칼로 긁어 새긴 것처럼 보이는 [SC♥WB]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 나중에 천천히 보여주려고 했었는데... ”
“ 이거 네가 넣은 거야? ”
“ 웅. 그래픽 팀한테 부탁 안 하고 내가 직접 그렸어. 이거는 너무 반듯하면 오히려 별로니까 글씨가 조금 삐뚤빼뚤해도 예쁘게 봐 줘.. ”
현실에 있는 느티나무에 이렇게 칼로 새겼다간 나무도 아파하고 나무 주인한테도 혼날 짓이지만, 여기 언리얼라이즈는 오롯이 제 세상이니까 뭐든지 다 할 수 있었다.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는 성찬을 위해서 이 정도 히든 페이지는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다.
“ 형이 원하면 날개에도 새겨줄 거고, 필요하다면 이 안에 있는 내 세상 전부 다 줄 수도 있어.. ”
“ 박원빈.. ”
“ 그러니까 인제 그만 화,화 풀어라아.. 웅? ”
괜히 머쓱해서 앉아있는 성찬의 어깨를 짧은 손톱 끝으로 살짝 간지럽혔다. 그러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성찬이 곧장 저를 품에 꽉 안아 가두었다.
포근한 체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크고 단단한 몸이 기분 좋을 정도의 압박감으로 저를 더없이 편안하게 만들었다.
“ 내 선물 마음에 들어..? ”
“ 응. 너무 좋아. 너무 마음에 들어. ”
“ 헤헤.. ”
고작 글자 다섯 개 그리는데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던 어젯밤이 떠올랐다. 현실감 넘치는 나뭇결 위에 옴폭 패인 ‘ SC♥WB ’이 커다란 고화질 모니터 화면을 여전히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행이다. 이렇게 사소한 이벤트에도 감동해주는 좋은 사람이어서.
“ 나 키스해도 돼? ”
“ 극,그그런거는 묻지 말고 그냥 해... ”
홍콩에서 한 첫 키스는 묻지도 않고 알아서 잘만 하더니, 그다음부터는 매번 꼬박꼬박 해도 되냐고 물어오는 성찬이 귀여웠다.
말랑한 입술이 닿는다. 비교적 온도가 낮은 코끝에 비해 입술 만큼은 붉은 빛깔을 그대로 담아 언제나 따뜻하고 또 촉촉했다. 부드럽게 갈라진 틈새를 밀고 들어오는 뜨거운 살덩이가 치열을 가볍게 간지럽히고는 자신의 혀와 얽혔다. 간지러웠다. 간지러워서인지 아니면 지금 이 행위가 좋아서인지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 허리를 감싼 성찬의 손이 좋아서 원빈은 팔을 들어 성찬의 목을 둘러앉았다.
서로의 몸이 조금 더 가까워진다. 태초에 하나로 만들어진 몸이었던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애틋해지는 이 감정은 이제 세상 어떤 귀한 것과도 맞바꾸기 싫었다.
———
물이 얕게 고인 하얀 모래사막 위에 성찬과 원빈의 아바타가 나란히 드러누워 있었다. 아무리 요즘 기술이 좋아졌다지만 이렇게까지 리얼하게 하늘이 구현될 줄은 몰랐다.
현실 속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지던 노을은 이제 어스름한 붉은빛만을 남긴 채, 깜깜한 밤하늘로 변화하는 중이었다.
[ WB♥Bambi01 : 빈아 언제까지 누워있어야 해? ]
[ SC♥WB0302 : 이제 시간 다 됐다 쫌만 기두리. ]
[ WB♥Bambi01 : 웅 ]
게임 속에서도 가만히 있는 것을 못 참는 성찬이 자꾸만 원빈을 재촉했다. 이제 얼추 시간이 다 되었다. 밤 9시 정각이 되면 아무도 없는 이 거울 사막에는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이벤트가 시작될 것이다.
원빈이 바라보는 메인 모니터 우측의 서브 모니터에 사내 메신저 창이 반짝였다. 발신자는 운영점검팀 김 팀장이었다.
: 대표님 혹시 거울 사막 맵 점검 중이세요?
: 지금 일반 유저 계정도 그렇고 저희 계정도 접속이 안 되는데 혹시 점검 중이신가 해서요.
정작 박원빈은 그 메시지를 쳐다도 안 봤다. 그저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메인 모니터 속 천천히 변화하는 하늘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9시 정각이 찾아왔다.
순식간에 깜깜한 밤하늘로 변한 화면은 정각이 되면 쏟아져 내리는 반짝이는 소나기와 함께 아주 작고 촘촘한 별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푸른색의 오로라까지 더해 매우 섬세하게 짜여진 그래픽은 마치 초고화질의 카메라로 아이슬란드의 밤하늘을 고스란히 옮겨온 것처럼 보였다.
[ WB♥Bambi01 : 와 이거 너무 예쁜데? ]
지금 성찬도 집에서 같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냥 제집에 와서 큰 모니터로 같이 보면 안 되냐고 우기던 사람을 억지로 떼어놓은 이유는 솔직히 조금 민망해서였다.
오늘은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한 사람만을 위한 이벤트를 기획한 박 대표는 마스터 계정을 이용해 엊그제 오픈한 거울 사막의 문을 잠시 걸어 잠그고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 SC♥WB0302 : 형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
[ SC♥WB0302 : 눈 크게 뜨고 잘 봐 ]
9시 3분에 접어들면 다른 화면이 열릴 것이다. 여기까지는 거울 사막의 평범한 밤 9시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3분이 지나자마자 하늘 위 빼곡한 별 사이에 몇 개가 유독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혜성이 간헐적으로 그 사이를 지나갔고 마침내 선명하리만큼 그 명암이 구분되자 숨겨진 문장이 드러났다.
‘ 사랑해, 자기야♥ - WB ’
쏟아질 듯 빼곡한 별들 사이에 수놓은 고백이 찬란하게 빛났다. 지금 옆에 성찬이 없는데도 원빈은 괜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마른 손으로 벅벅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 위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가느다란 은색 반지는 화면 속 별 만큼이나 반짝반짝 빛이 났다.
[ SC♥WB0302 : 마음에 들어? ]
성찬은 대답이 없었다. 어라? 설마 오류 나서 튕겼나? 일부러 30분간 아무도 못 들어오게 맵을 잠가두기까지 했는데 성찬이 만약 튕겨버렸다면 정말 큰 문제였다. 아바타는 여전히 제 옆에 그대로 있는데 정말 움직임도 대답도 없다.
결국 원빈이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초 가지도 않아 연결된 통화 너머에서는 난데없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 형..? 튕겼어? ”
- 흐잉..
“ 왜,왜왜 그래.. 무슨 일인데- ”
- 아- 박원비인-
갑자기 떼를 쓰듯이 제 이름을 크게 부르고는 성찬은 전화 너머에서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원빈은 당황스러워서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화기를 든 채로 외투를 찾아 입었다. 왜 울지? 어디 다쳤나? 성찬을 만나고 처음 있는 일에 당황한 나머지 자기가 트레이닝복 바지 앞뒤를 반대로 입었다는 사실조차 새까맣게 몰랐다.
“ 혀,형.. 내가 지금 갈게. 형 집으로 갈게. ”
- 원빈아, “ 어? ”
- 나도 사랑해..
물기가 축축한 성찬의 목소리가 저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원빈은 그제야 지금 성찬이 우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런 사소한 이벤트에도 감동해서 울다니. 전에 이미 이런 걸 좋아한다는 것을 한 차례 봐서 알고는 있었지만 눈물까지 보이며 감동할 줄은 몰랐다.
“ 왜 울고 그래애.. 아까 나한테 반지 줄 때도 안 울어 놓고. ”
-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이..
“ 형, 내가 진짜 많이 사랑해.. ”
부끄럽지만 조심스럽게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자 다시 건너편에서 물기 어린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 난다던데... 민망함에 생각나는 대로 던진 다소 낯부끄러운 오랜 농담에도 성찬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웃었다.
- ‘자기’라고도 해 줘.
“ 엥? ”
- 저기 써있는 것처럼 자기라고 불러줘어-
울다 웃기를 반복하던 성찬은 이젠 갑자기 떼를 썼다. 아니이.. 그건 좀 민망한데 왜 그래-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형’무새 였던 성찬이 ‘자기’무새로 진화하는 순간이었다. 큰일이다. 이번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또 제 무덤을 판 것 같다.
“ 형. ”
- 자기라고 해-
“ 형아- ”
- 아아, 박원빈-
“ 나 지금 형 집으로 갈게. ”
- 응? 올 거야? 내가 이따가 가면 되는데 왜 너가 와.
“ 아니야. 내가 갈래. 지금 보고 싶어. ”
주머니를 더듬다가 조금 전 바지를 뒤집어 입은 꼴을 확인한 원빈이 급하게 매무새를 다시 단장했다. 성찬이 오는 것보다 느리겠지만 지금은 왠지 자신이 직접 찾아가고 싶었다. 울어서 팅팅 부은 예쁜 얼굴 구경하러 가야지. 가서 예쁘다고 귀엽다고 오만 번 말해주고 그 위에 뽀뽀해야지.
여전히 휴대폰을 한쪽 어깨와 귀 사이에 끼고 양말까지 챙겨 신은 원빈은 마지막으로 지난 크리스마스에 성찬이 사줬던 하얀 니트모자를 집어 들었다.
“ 형. ”
- 조심해서 와.
“ 집에 가서 얼굴 보고 ‘자기’라고 불러줄게. ”
- 야아···.
“ 그러니까 꼼짝 말구 기다리고 있어. ”
정성찬 한정으로 히키코모리를 청산하고 불도저가 된 박원빈은 여전히 서브 모니터를 빼곡히 채우는 중인 운영점검팀 김 팀장의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 대표님ㅜㅜ 이러다가 유저들 버그 신고 들어옵니다.
: 대표님 제발요ㅠㅠㅠㅠ
: 이제 그만 나오셔야 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얼마 전 박원빈이 느티나무에 숨겨둔 사랑 놀음 흔적을 찾아낸 BB게임즈 직원들은 지금 발생한 맵 접속 장애도 대표님의 연애사업의 일부라는 것을 금세 눈치챘다.
원빈이 언리얼라이즈 계정에서 로그아웃했다. 그와 동시에 다른 한쪽에 켜둔 마스터 계정에서도 빠져나왔다. 그렇게 언리얼라이즈의 세계는 정상화되고, 박원빈은 현실로 접속하여 자신의 연인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외로운 숲속의 마법사에게 듬직한 문지기라는 짝이 생겼다.
처음 서로가 꿈꾸던 모습은 아니었을지라도, 두 사람의 엔딩은 여전히 'Happily ever after···.’ 였다.
-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