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쿵쾅맨
by. candypink


1. 낯선 곳

 

.

삐이이이—.

고막을 관통하는 이명에 뇌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 같다.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매고 끙끙거리며 바닥을 구르던 박원빈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른 몸뚱이가 비틀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그린 것 같은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청명한 하늘. 그 아래 펼쳐진 넓고 깊은 숲. 분명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는데도 엉덩이가 전혀 아프지 않았다. 바닥에 깔린 푸르른 잔디가 마치 벨벳처럼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동화 속 한 장면인 양 평화롭지만 어쩐지 낯선 공간. 덜컥 겁부터 집어먹은 박원빈이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걸음을 뗐다. 발끝이 달달 떨려왔다.

나는 어쩌다 여기에 왔지?

평범한 숲이지만 기억에 없는 공간이다. 혹시 학교에서 길을 잃었나 싶어 고개를 쭉 뻗어 사방을 둘러본다. 익숙하게 보여야 할 회색 건물들 같은 건 하나도 없다. 대신 저 멀리에 뾰족한 시계탑이 보인다……? 내가 혹시 유럽 여행 중이었던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생각해 봐도 비행기를 탔던 기억은 없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본능이었다. 아무튼 박원빈이 원래 있던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방도 핸드폰도 없는 혈혈단신으로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당장이고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꾸욱 참아 누른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후들거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걷기 시작한다.

기묘한 곳이었다.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박원빈이 유일한 것처럼 고요했다. 그 흔한 백색소음도 없이. 도로가 없는 걸까? 귀를 쫑긋 기울여도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댔다. 어떻게든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숲이 깊어질수록 하늘이 점점 가려졌다. 빽빽하게 우거진 키 큰 나무들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금세 주변이 어둑어둑해졌다. 박원빈은 의식적으로 땅바닥만 보며 걸었다. 애초에 앞을 본다 해도 이곳이 어디인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전혀 몰랐으니까. 그리고…… 무서우니까.

그때 박원빈의 정수리에 무언가가 닿았다.

물컹.

박원빈의 고개가 천천히 들리고, 앞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과 눈이 마주치면.

흐아아악!”

으아악. 으악. 으아아. 으아. .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질러댄 비명이 숲속에 메아리치며 울렸다. 박원빈은 그대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단언컨대 그것은 박원빈이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험한 것이었다. 입이 양옆으로 쭉 찢어져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어릴 적 가장 무서워하던 빨간 마스크 괴담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온 것처럼. 땅에 질질 끌리는 기다란 머리카락은 처녀 귀신을 방불케 했다. 박원빈이 절대 공포영화를 보지 않는 이유였다. 귀신은 무서우니까. 박원빈은 무서운 게 싫다. 게다가 그 험한 것은 키가 2미터도 더 되어 보였다. 박원빈 정도는 한입에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몸집이었다.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좋겠다. 자세히 보니 양옆으로 쭉 찢어진 입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피가 아니라 검고 찐득한 액체였다. 그 액체는 입가를 흐르다 못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는데, 바닥에 닿자마자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자연의 물리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대체 여기는 어디길래 저런 험한 게 돌아다니는 거지? 두 발을 빠르게 구르는 와중에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너무 무서워. 저게 끝이 아니면 어떡하지? 대체 나는 어쩌다가 이런 곳으로 오게 된 걸까? 애초에 이곳은 어디일까? 느닷없는 전력 질주 탓인지, 두려움 탓인지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어댔다. 꾹꾹 참았던 공포감은 끝내 눈물방울이 되어 눈꼬리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박원빈이 빠르게 달리던 발걸음을 멈춰 세우며 반동으로 바닥에 넘어졌다. 엎어지며 땅을 짚은 두 손끝에는 낭떠러지가 박원빈을 반겼다.

끔찍하게 생긴 괴물은 온몸을 기괴하게 비틀며 여전히 박원빈을 쫓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땅을 딛지도 않고 공중에 부양해 둥둥 뜬 채 움직였다. 여하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것이었다.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무것도 없다.

뻥 뚫린 새카만 공간은 말로만 들었던 블랙홀 같았다. 떨어지면 영원히 아래로 추락할 것만 같은 심연.

두 다리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풀썩 무릎이 꺾인다. 땅을 짚고 바라본 낭떠러지 아래는 상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깊고 어둡다. 아니, 사실 깊은지도 어두운지도 모르겠다. 그곳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차마 아래로 뛰어내릴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런데 정말, 저 처녀 귀신인지 빨간 마스크인지 모를 괴물이 나를 잡아먹으려 하면 그땐 어떡하지? 이 아래로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나? 아래로 뛰어내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이 거듭되는 와중에도 괴물은 박원빈에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에게 잡아먹히는 것도, 끝이 없어 보이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상상하기 싫었다. 착하게만 살았던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잠깐 하늘을 째려보며 원망하다가.

줄 매달고 뛰어내리는 번지점프도 평생 시도할 생각조차 못 해 본 박원빈이다. 이 낭떠러지를 맨몸으로 떨어질 리가 없다. 차라리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쪽을 선택했다. 사실 더 이상 도망갈 구석이 없으니 그게 유일한 선택지나 마찬가지였다. 겁나 아프겠지…….

괴기스러운 것은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어느새 박원빈의 코 앞까지 다가왔다. 이제 저 징그러운 입을 쩌억 벌려 한입에 박원빈을 삼킬……,

—!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잡아먹힐 준비를 하던 박원빈은 갑작스레 들려온 커다란 총성에 화들짝 놀랐다. 얼떨결에 고개를 들었더니 대가리 한가운데 총을 맞은 험한 것은 기우뚱 쓰러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끝이 없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내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데 방금 들은 게 정말 총소리가 맞나?

박원빈이 조심스럽게 두 손을 들었다. 혹시 총 맞을까 봐.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랗게 뜬 눈으로 박원빈이 마주한 것은, 아니 마주한 사람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목숨을 구해 준 백마 탄 왕자, 가 아니라 하얀 테슬라를 탄 왕자님……?

. 박원빈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왕자님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되는 고고한 작태였다. 남자는 새하얗고 예쁘장한 얼굴로 방금 발사되어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에 대고 입으로 후 바람을 불고 있었다. 무려 뚜껑이 없는 오픈카의 운전석에 앉아서. 한쪽 팔은 문턱에 삐딱하게 걸친 모양새가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런데 테슬라에서 오픈카를 출시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금 전 총 맞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 괴물을 생각한다면 지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 누구……, 누구세요?”

솔직히 너어어어무 무서웠는데 꾹 참고 물어봤다. 사실 무서움보다는 반가움이 먼저였다. 아무것도 없는 미지의 숲에서, 아니,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숲에서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괴상한 것에게 잡아먹힐 뻔했다. 그런 곳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 안도감에 눈물이 절로 났다. 또르륵.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총 맞을세라 여전히 두 손은 위로 뻗쳐 든 상태. 무릎까지 꿇은 모양새가 엄마한테 혼나고 벌서는 초딩과 다름없다. 박원빈의 물음에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는 테슬라 탄 왕자님, 아니, 총을 든 남자. 열기가 식은 권총을 허리춤에 집어넣은 남자가 허탈하다는 듯 물었다.

내가…… 누구냐고?”

, 누구신데요…….”

어찌 나를 모를 수가 있지?”

오늘 처음 봤는데 어떻게 알아요?”

나를 처음 봤다고?”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뱉는다. 미간 구겨진 얼굴마저 잘생겼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심각한 표정을 하더니, 차에서 내려 박원빈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온다. 키가 어찌나 큰지 그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압도될 것만 같았다. 박원빈은 무릎을 살짝 움직여 조금 뒤로 물러섰다. 한참 위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느라 목이 다 꺾일 지경이었다. 말이 통하는 걸 보면 한국인인 게 분명한데,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워낙 덩치가 커서 그런 건지, 옅은 머리 빛깔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수려한 이목구비 때문인지.

그럴 리가 없는데…….”

남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허리춤에 권총이 잘 수납된 것을 발견한 박원빈은 쭉 뻗어서 들고 있던 두 팔을 슬그머니 내렸다. 팔이 슬슬 저리기 시작했거든. 그리고 여전히 후들거리는 다리에 가까스로 힘을 주며 일어났다. 곧게 섰는데도 남자는 박원빈보다 한 뼘 가까이 키가 컸다.

그래서 누구, 누구신데요?”

벌써 세 번째 물음이었다.

?”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에 박원빈은 굳이 삼세번이나 물을 필요가 있었을까, 호기심을 원망했다.

쿵쾅맨.”

또라이다…….

? 이름이 쿵, 쿵쾅맨이라고요?”

그런 건 아닌데, 그렇게 부르는 걸 좋아하길래.”

누가요?”

네가.”

, , 제가, 제가요?”

박원빈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자칭 쿵쾅맨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한한 일이었다. 박원빈은 맹세코 이 사람을 처음 봤다. 기억 속에 없는 사람이었다. 이렇게나 잘생긴 사람은 아주 희귀했으므로 박원빈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박원빈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든가, 진짜 미친놈이든가.

, .”

저를 아세요?”

당연하지. 이름은 박원빈, 으뜸 원에 빛날 빈 자를 쓰지. 2002 3 2일생, 서울특별시 성북구에서 태어났지만, 울산광역시에서 자랐고, 중학교 때까지 육상선수로 활약한 울산의 치타잖아. 그리고 까만 고양이를 닮아서 주로 깜고라고 불리는,”

아니 잠깐만!”

박원빈이 쿵쾅맨의 말을 끊었다. 성북구에서 태어난 건 가족들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고, 중학교 때까지 육상선수였다는 건 중학교 동창들만 아는 사실이다. 이상한 곳에서 마주친 이상한 사람이 그걸 안다는 게 최종 이상한 지점이었다. 그리고 까만 고양이는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저를…… 저를 어떻게 아세요?”

그러는 너는, 나를 어떻게 몰라?”

쿵쾅맨은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대사를 뱉었다. 그런데 그렇게 묻는 얼굴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 그 표정이 너무 슬퍼 보여서 박원빈은 더 이상 무어라 대꾸하지 못했다. 대신 뻘쭘하고 어색한 정적만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그러나 찰나의 정적이 지나가고 쿵쾅맨의 입에서 벼락처럼 튀어나온 말에 박원빈은 눈앞이 그만 아득해지고 말았다.

너는 나를 모를 리가 없어. 나는 이 나라의 왕이고 너는……, 내 왕비가 될 사람이기 때문이지.”

아무래도 미친놈이 맞는 것 같다.

그 황당한 발언의 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박원빈은 쿵쾅맨의 품에 안겨 있었다. 기다란 팔이 박원빈의 마른 어깨를 순식간에 당겨 끌어안았다. 꼼짝없이 품 안에 가두어진 박원빈은 이렇다 할 반항도 하지 못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목덜미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맞닿은 가슴팍에서는 상대방의 세찬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기다렸어. 원빈아.”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이곳에 떨어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상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가장 이상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코끝에 스치는 마른 허브 향은 어디에선가 맡아본 것 같았고, 저를 감싸안은 너른 품의 체온은 집처럼 익숙했다. 왜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사람의 품이 이토록 익숙하고 편안한 것인지. 왜 오늘 처음 본 사람이 오래도록 그리워한 사람처럼 느껴지는지.

이곳을 한시 빨리 빠져나가야겠다는 결심이 서는 순간이었다.

 

***

 

뚜껑이 없는 하얀 테슬라를 함께 타고 도착한 곳은, 숲속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시계탑이 있는 웅장한 성이었다.

이곳은 섬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건 확실히 아니었고 박원빈이 괴물에게 쫓기다가 맞닥뜨렸던 깊고 어두운 의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이 섬의 한가운데에는 뾰족한 첨탑이 모여 있는 이 화려한 궁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까지 오는 길에 박원빈은 말 한마디 없이 창밖만 노려보았다. 주변 지형지물을 살피며 심각한 표정으로 탈출 시뮬레이션을 짜고 있었다. 섬이라니……. 대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것이고, 어떻게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단 말이지. 일상에서 완전히 유리된 것 같은 꺼끌꺼끌한 감각에 목이 탔다.

오셨습니까, 전하.”

박원빈은 비명을 내지르려던 입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성문 앞에 당도하자마자 그들을 맞이하러 나온 건……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말티즈들이었다. 이족보행은 차치하고, 말티즈가 사람 말을 했다.

희고 복슬복슬한 털, 그리고 건포도 세 알을 콕콕 박아놓은 것 같은 이목구비가 영락없는 강아지다. 혹시 로봇인가 싶어 자세히 뜯어보았는데 움직임이 너무나도 강아지의 그것이었다. 한 마리도 아니고 족히 열 마리는 되어 보였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을 맞이하는 말티즈들은 일렬종대로 서서 익숙하게 시중을 들었다.

커다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박원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쿵쾅맨이란 남자는 강아지들의 안내를 받아 성안으로 발을 옮겼다.

점점 멀어지는 등을 빤히 쳐다보던 박원빈은 하릴없이 그 너른 등을 따라 쭐레쭐레 걷는다.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믿을 구석은 이 사람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나 돌아갈 수 있을까…….

박원빈은 우울한 상념에 빠진 채 터덜터덜 걸었다.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 궁금해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이 성을, 아니 이 섬을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리해야 했다. 긴 다리를 휘적이며 걷던 쿵쾅맨이 화려하게 장식된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가 몸소 문을 양쪽으로 열었다. 열리기 시작한 문틈 사이로 빛이 쏟아졌다. 어두웠던 복도가 금세 밝아졌다. 박원빈은 얼굴을 찌푸리며 손바닥을 들어 빛을 가렸다. 손바닥에 가려진 광경은 놀라웠다.

내 방이잖아…….”

고풍스러운 문이 열리고 드러난 공간은 박원빈의 방이었다. 본능적으로 그곳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장식장 위에 올려둔 디퓨저의 향, 부들거리는 소파의 패브릭 촉감, 침대 이불의 무늬 같은 것들, 심지어 숨 쉴 때 들이켠 공기마저도. 모든 것이 박원빈이 기억하고 있는 일상이었다.

익숙한 발걸음으로 소파 앞으로 다가간 원빈은 그대로 그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온몸에 푹신하게 감겨오는 쿠션의 감촉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이 섬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기억 속에 없는데, 이 방만큼은 또렷이 기억났다. 늘 같은 자세로 누워 있어서 살짝 패인 소파의 팔걸이까지.

나는 정말 여기에서 살았던 걸까?

이곳이 원래 나의 세계일까?

이 남자의 왕국이?

기억나? 여기 네 방인 거?”

그런데 왜 이 남자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는 걸까?

커다란 남자는 걱정 반 기대 반 섞인 얼굴로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운 박원빈을 내려다보았다. 박원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 빤한 시선을 마주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남자가 옅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남자가 자신의 이름이 쿵쾅맨이라고 한 적은 없다. 박원빈이 그렇게 부르는 걸 좋아한다고 했을 뿐. 사람의 이름이 진짜로 쿵쾅맨일 리가 없다. 세상에 쿵 씨가 어디 있어…….

성찬.”

“…….”

정성찬이야. 내 이름.”

박원빈은 남자의 이름 석 자를 혀끝으로 조용히 굴렸다. 정성찬, ……성찬……. 이곳의 왕이라는, 고고하고 우아한 품위에 걸맞은 반듯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이름이다.

박원빈은 눈썹 끝을 한껏 끌어내렸다.

저 혼자 있고 싶어요…….”

정성찬은 한 손을 들어,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 들어온 말티즈들을 밖으로 물렸다. 강아지들이 종종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박원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가주세요.”

나도?”

. 혼자 있을래요. 머리가 너무 아파요.”

“…….”

나가주세요. 잘래요.”

꼼짝도 하지 않길래, 결국 박원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성찬의 몸을 문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커다랗고 단단한 몸은 잘 밀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박원빈이 밀렸으면 밀렸지. 사람이 딱딱하고 커다래서 쿵쾅맨인 걸까. 박원빈 자신도 어디 가서 힘으로 밀려본 적 없는데, 과연 쿵쾅맨다웠다. 하지만 몇 분간 버티고 서 있던 정성찬은 박원빈의 기세에 마지못해 당해주었다. 끝까지 옆에 있고 싶다며 중얼거리다가, 시무룩하게 튀어나온 입술을 하고선 끝내 문밖으로 밀려났다.

방문을 굳게 닫은 박원빈은 바로 책상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앉았다. 머리가 아프다는 건 진심이었고 잠을 자겠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띵하게 울리는 머리를 붙잡고 박원빈은 탈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2. 탈출

 

복도를 돌아다니는 말티즈 집사들의 총총거리는 발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박원빈은 탈출 타이밍을 가늠하기 위해 문에 바짝 붙어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총총이 아닌 쿵쿵거리는 커다란 발소리가 들리면 잽싸게 침대 위에 누워 잠든 척을 했다. 문 앞에서 노크한 뒤 대답이 없으면 가 버리는 말티즈들과 달리 쿵쾅맨, 아니 정성찬은 노크도 없이 벌컥벌컥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와 잠든 원빈을 굳이 확인했다.

멀리서부터 존재감이 뚜렷한 발소리가 들린다. 쿵쾅쿵쾅. 아마도 저래서 쿵쾅맨인가 보다. 박원빈은 부리나케 침대 위로 뛰어들어 눈을 감았다. 묵직한 발소리는 정확히 문 앞에서 멈추었다. 뚜벅뚜벅. 다가오는 소리가 점차 귓가에 가까워졌다. 박원빈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침대맡에 걸터앉은 정성찬은 한참이나 잠든 (척하는) 박원빈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진득한 시선이 눈을 감고도 느껴질 정도였다.

통 잠을 못 자더니…….”

머리를 정리하지 못하고 누운 탓에 앞머리가 엉망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박원빈의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칼을 손수 정리했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이다. 박원빈은 그 간지러운 손길을 견뎌내느라 이불 속에 숨긴 주먹을 꽉 쥐는 수밖에 없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좋아.”

남자는 혼잣말을 이어갔다.

나는 네 곁에만 있으면 돼.”

팔뚝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지금처럼만…….”

정성찬은 그 이후로도 꽤 긴 시간동안 박원빈의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손길이 어찌나 편안했는지 정말로 깜빡 잠이 들 뻔했다. 정성찬의 말대로 나는 이곳에서 이 남자의 왕비가 될 사람인 걸까? 박원빈에게 이 남자는 오늘 처음 만나 목숨을 구해준 고마운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이 남자는 박원빈을 분에 넘치게 소중히 대하고 있었다.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바늘로 콕콕 찔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잠자코 있을 생각은 없었다.

 

***

 

사위가 고요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박원빈은 침대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더 이상 밖을 돌아다니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창밖의 하늘은 어느덧 보랏빛이었다. 보랏빛 하늘이라니 낯설기가 그지없다. 지금이 노을 지는 저녁 무렵인지, 동틀 녘인지 알 길이 없었다. 몇 시인지조차도 몰랐다. 박원빈이 이 성에서 본 모든 시계가 7 36분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시간이 멈춘 건 아닐까? 그런 터무니 없는 생각도 스쳤다.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텅 빈 복도에 메아리치며 울렸다. 화들짝 놀란 박원빈은 고개만 빼꼼 문밖으로 내민 채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아마도 밤이라고 추측해 본다. 밤하늘이 보라색이라니 하여튼 이상한 곳이다. 까치발을 들어 조심스레 방 밖으로 나온 박원빈이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행여나 발소리가 울릴세라 한 걸음 한 걸음을 신중하게 옮기면서.

어두운 동굴 같은 기다란 복도를 따라 횃불이 늘어서 있었다. 그 횃불들만이 복도의 유일한 빛이었다. 박원빈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올 때까지 멈추지 않고 걸었다. 이윽고 나선형 계단이 시작되는 곳에 도착했다. 이 계단 끝에 성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있을 것이다. 문을 나선 이후에는 전력 질주를 해야 할 수 있으니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들어 맞은편 벽을 바라봤을 땐.

“…….”

어깨를 스트레칭하던 우스꽝스러운 자세 그대로 박원빈은 얼음이 되었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길게 아래층으로 연결된 벽에는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왕관을 쓰고 있는 정성찬과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손을 잡고 있는…… 박원빈. 박원빈의 입이 쩍 벌어졌다. 사방이 어두웠지만 자기 얼굴만큼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림 속 환하게 웃고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는 박원빈이 맞았다. 진짜, 진짜로 내가 여기에 살던 사람이었다고?

문득 잠든 박원빈을 향해 혼잣말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눈물기를 머금은 달큰한 음성과 울먹거리던 커다란 눈망울이. 하필 이 타이밍에 떠오를 게 뭐야. 박원빈은 고개를 탈탈 털었다.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은 아직 변함이 없었다. 어떤 생존 본능 같은 것이 자꾸만 박원빈을 자극했다. 이곳은 네가 있던 곳이 아니야. 원래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해.  박원빈, 원빈아, 들려?  애써 무시해 온 환청은 여전히 귓가를 맴돌고 있다.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오니 성의 출입문이 보였다. 박원빈은 내내 방 안에서 시뮬레이션했던 탈출을 다시금 머리에 새겼다. 문밖을 나가면 무조건 달린다. 숲속이든 어디든 성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간다. 어딘가에 육지로 이어진 다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깊은 숲속에서 또 다른 괴물을 만날지 몰라 무기도 준비했다. 그래봐야 서랍 안에 있던 커터 칼 따위였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야 나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딱 봐도 5미터는 되어 보이는 문 앞에 선 박원빈이 온몸에 힘을 실어 문을 밀었다. 문은 돌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바깥 풍경이 보였다. 보랏빛 하늘은 이제 핑크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숨을 들이켜자 시원한 공기가 폐부에 가득 들어찼다. 무사히 나왔으니 이제 눈앞에 보이는 저 숲으로……,

산책 가십니까?”

박원빈의 등 뒤에서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비명을 꽥 지를 뻔했다. 비슷한 눈높이가 아니라 한참 아래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필시 이 성에서 일하는 말티즈 중 한 마리일 것이다. 놀란 마음 겨우 가라앉히고 슬그머니 뒤를 돌자, 갑옷을 입은 말티즈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박원빈에게 묻고 있었다. 심지어 손에, 아니 앞발에 창도 들었다. 이 커다란 성에 문지기가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박원빈은 찰나 망설이다, 문지기 말티즈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냅다 달리기를 택했다. 저 강아지가 보기에도 충분히 수상할 광경이다. 좆됐다.

어어? 원빈니이이임!”

등 뒤에서 문지기가 애타게 원빈을 불렀다. 아우우우우우. 뒤따라 하울링이 들렸다. 이제 곧, 말티즈 떼가 자신을 쫓아 달려올 것이다. 박원빈은 눈을 질끈 감고 전력 질주했다. 아우우우—. 강아지들의 하울링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얼마나 달렸을까. 두 다리가 지쳐갈 무렵. 여전히 어두컴컴하기 그지없는 숲속을 달리는 중. 하늘은 여전히 곱게 물든 분홍빛. 눈앞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박원빈이 멈춰 섰다. 갈림길이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숲속 갈림길에는 표지판 대신, 눈에 아주 익숙한 초록색 비상구 표지등이 번쩍이며 켜져 있었다. 마치 원빈에게 저쪽에 탈출구가 있다는 걸 알려주려는 것처럼. 박원빈은 초록색 배경 위의 새하얀 픽토그램이 달리는 방향으로 빠르게 몸을 꺾었다.

이미 겪어본 숲이었지만 겁 많은 박원빈에게 이곳은 단연코 최악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무섭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비빔밥처럼 섞여서 눈앞에 나타났다. 커다란 바퀴벌레, 처녀 귀신, 360도 돌아가는 초고속 롤러코스터 같은 것들이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윗니와 아랫니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숨이 차서가 아니라 순전히 겁에 질려서 온몸이 떨렸다. 어쩌다 이딴 곳에 떨어져서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뛰는 와중에도 억울했다.

으아. 으아아. 으아아아아아. 나 진짜 못 하겠는데.

낮에 봤던 끔찍한 괴형체들이 또다시 박원빈의 뒤를 쫓고 있었다. 역시 박원빈의 생각대로 한 마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저마다 기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고, 디테일한 요소 하나하나가 박원빈이 싫어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대로 쳐다보기도 어려워 박원빈은 땅만 보며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낭떠러지. 발밑에 아득한 어둠이 깔렸다. 박원빈은 또다시 선택해야 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인지, 저 괴물에게 그대로 잡아먹힐 것인지.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자명했지만 그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너무, 너무…… 무서우니깐. 망설이는 찰나, 끔찍한 괴물의 아가리가 쩌억 벌어졌다. 한입에 박원빈을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반쯤 포기한 박원빈이 눈을 감았다.

제발, 아프지만 않게 해 주세요.

이제 와 쓸데없는 소원을 빌어 본다.

괴물의 뾰족한 이빨에 살갗이 닿는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 빛났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아예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뭐지? 박원빈이 꾸욱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당장 박원빈을 집어삼키려 군침을 줄줄 흘리던 괴물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기다렸어, 원빈아.”

청명한 하늘 아래 깊은 숲속, 정성찬의 품에 안겨 있었다. 새하얀 테슬라를 탄 이 나라의 왕이 박원빈을 구해준 때로 되돌아온 것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바로 웹소설에나 나온다는 회귀라는 건가? 그럼 나 지금 어느 소설 속에 갇히기라도 한 걸까? 그렇지만 박원빈은 최근 들어 무언가를 읽은 기억이 없다. 소설이 아니라면 게임? 하지만 박원빈은 게임엔 영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잼민이 시절 한 번쯤 거쳐 간다는 롤이나 배그도 소질이 없어서 몇 번 해본 적 없다.

그러면 여기서 매번 탈출만 시도하다가 굶어서 죽는 운명인 걸까. 다섯 번의 탈출 시도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박원빈은 제가 그동안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탈출을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탈출에 성공하리라 다짐한다.

괴물에게 잡아먹혀 봐야 계속 같은 시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끝내 박원빈은 한 가지 답을 내렸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이 이곳을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아무것도 없는 로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좋아.”

“…….”

나는 네 곁에만 있으면 돼.”

“…….”

지금처럼만…….”

깊이 잠든 척 눈을 감고 있는 박원빈을 향해 다섯 번째, 아니 벌써 여섯 번째 되풀이되는 정성찬의 혼잣말. 그 쓸쓸한 음성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박원빈은 그날 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결심을 하였다.

 

***

 

육중한 성문을 밀면 갑옷을 갖춰 입은 말티즈 문지기가 두 마리 서 있다. 그들이 산책을 가시냐 물으면 대답 대신 숲을 향해 달린다. 벌써 여섯 번째 반복되는 패턴이다. 저들에게는 처음 겪는 상황이겠지만 박원빈은 벌써 다섯 번의 실패를 맛봤다. 이번에는 기필코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내리고 말리라. 비장하게 먹은 마음은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수백 미터 달리다 보면 갈림길과 함께 초록색 비상구 표지등을 마주한다. 갈림길은 매번 다른 위치에서 나타났다. 방향도 매번 달랐다. 박원빈은 표지등을 맞닥뜨릴 때마다 본능적으로 사람 모양 픽토그램이 달리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어느 길에서건 어느 방향에서건 달리다 보면 박원빈을 겁먹게 하는 모든 존재들이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한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극한의 공포. 일상으로 돌아가면, 번지점프도 귀신의 집도 자이로드롭도 더 이상 무섭지 않을 것 같다.

어느새 걸쭉한 타액을 뚝뚝 흘려대는 괴생명체가 박원빈의 코 앞까지 쫓아왔다. 박원빈은 드디어 결심한 것을 실천에 옮기기로 한다. 뛰어내리자. 아무것도 없는 저곳을 향해. 까짓거 눈 꾹 감고 남자답게 몸 한 번 던지면 될 일이다.

낭떠러지 끝에 정지한 박원빈은 발밑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어둠뿐이었다. 이제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이대로 괴물에게 잡아먹혔다간 또 이 짓거리를 반복해야 한다. 피가 배어날 만큼 입술을 꽉 깨문 박원빈은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을 쥐고서 그대로 몸을 던졌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또는 를 향해서.

박원빈이 세상에서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오금이 저리면서 심장을 누가 쥐어 짜는 것 같은 기괴한 감각은 언제나 두려운 것이었다. 중력이 저를 아래로 무한히 잡아 끌어내리는 것 같은 막연한 공포. 그런데 탈출에만 골몰했던 박원빈이 간과했던 사실이 있다. 애초에 이 골 때리는 곳의 물리 법칙은 박원빈의 상식과 달랐다. 박원빈은 아주 천천히, 봄바람에 낙화하는 벚꽃잎처럼 나풀나풀 날고 있었다. 분명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온몸의 장기가 출렁이는 것 같은 아찔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저 두둥실 공중에 떠올랐을 뿐이다.

박원빈은 안도했다. 적어도 추락이 무섭지는 않아서. 박원빈을 쫓던 괴물들은 같은 법칙을 적용받지 않는지 낭떠러지 아래를 향해 족족 빠른 속도로 떨어졌고 이내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박원빈은 여전히 허공에서 나풀거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떨어질 걸 그랬다고 생각하면서. 안도감에 절로 긴 한숨이 나왔다. 온몸에 힘이 풀려 축 늘어지려던 참에, 한쪽 팔이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박원빈!”

절벽 끝에 위태롭게 선 남자의 목소리. 절박한 손끝으로 원빈을 잡아챈 남자는 정성찬이었다. 커다란 손이 박원빈의 팔목을 꽉 붙들어 쥐었다. 손아귀의 힘이 점점 세졌다. 박원빈의 가벼운 몸이 점점 땅을 향해 끌려왔다. 어떻게 반항할 새도 없었다. 어둠 속을 부유하던 몸뚱이가 이내 땅 위로 끌려 올라왔다. 두 발바닥에 부드러운 잔디의 감촉이 닿았다.

정성찬은 적잖이 충격받은 것 같았다. 박원빈이 저에게 누구냐고 물었을 때보다 훨씬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갈했던 얼굴이 금세 얼룩져 갔다. 박원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이 남자는 왜 이리 예쁘게 생겨서는. 사람 마음을 약해지게 만드는 걸까. 고운 얼굴로 우는 게 왜 이렇게 보기 힘들까. 손끝으로 남자의 눈물을 슬며시 훔쳐본다.

원빈아…….”

울먹이는 목소리는 애절했다.

떠나지 마…….”

정성찬이 제 뺨을 훑는 원빈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눈물에 젖어 촉촉해진 손바닥 위로 입술을 묻는다. 부드러운 입술이 손바닥에 닿아 퍽 간지러웠다. 박원빈의 손가락이 몇 번 움찔했다. 하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어쩐지 가슴께가 찌르르 울렸다. 왜 처음 본 남자의 눈물에 이토록 마음이 어지러운지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다.

곧이어 귀를 찢어버릴 듯한 이명이 찾아왔다. 이명은 귀가 아니라 눈앞의 세계를 찢어버릴 것처럼 강렬했다. 박원빈의 몸이 좌우로 휘청였다. 그 틈을 타고 어떤 소리들이 쏟아졌다.

어레스트, 박원빈 씨……, 씨피알……, 제세동…… 알 수 없는 단어들이 고막을 향해 총알처럼 박혔다. 환청인가? 머리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아파왔다. 환각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원빈 씨 원빈아 박원빈 빈아…….

원빈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름이 불렸을 때,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던 박원빈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땅바닥을 향해 몸이 기울어지던 순간, 우습게도 쎄한 직감이 뇌리에 꽂혔다. 박원빈의 탈출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3.

 

박원빈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그 새 익숙해진 벽돌 무늬 천장이었다. 머리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도 없었지만 이마 위에 차가운 물수건이 올려져 있는 감각만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니 어렵지 않게 정성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침대 바로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머리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박원빈은 천근만근 같은 손을 들어 흘러내린 정성찬의 앞머리를 슬며시 쓸어 올렸다. 선잠에서 깬 정성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깼어?”

눈 밑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걸 보니 잠도 안 자고 곁을 지킨 모양이었다. 목소리도 죄다 갈라졌다. 박원빈은 대답 대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작은 움직임에도 눈앞이 핑 돌았다.

천천히, 천천히, 아직 무리하면 안 돼.”

정성찬의 커다란 손이 원빈의 등을 받쳐주었다. 따뜻했다. 박원빈은 그 손길을 구태여 마다하지 않았다. 뿌리칠 기력도 없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정성찬의 다정스러운 손길이 좋았거든.

미앙, 미안해요.”

대뜸 사과하자 정성찬이 의아한 얼굴을 한다.

네가 왜 미안해.”

, 도망가려고 했으니까…….”

정성찬이 쓸쓸하게 웃었다.

다 내 탓이야. 내가 너를……, 너를 너무 오래 잡아두고 있어서.”

쿵쾅맨이라고 자신을 소개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정성찬의 말은 한 번에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무지하게 어렵다. 너무 오래 잡아두고 있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오래 잔 탓인지 아직 안개 낀 듯 멍한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정성찬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평소보다 짙게 드리워진 눈가의 그림자에서 피로가 묻어났다.

도망가지 않을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성찬은 박원빈을 끌어당겨 안았다. 순식간에 품 안에 갇힌 꼴이 된 원빈은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며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안겨 있는 상태라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정성찬은 웃고 있을 것이다. 그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원래의 나는 이곳의 왕비가 맞았던 걸까. 기억에 없어도 이 품이 이렇게 편안한 것을 보면. 생각이 이어지다 말고 멈추었다. 또다시 희한한 소음 같은 것들이 귓가를 괴롭혔다. 이미 지쳐있던 몸뚱이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성찬에게 안긴 채 박원빈은 다시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정성찬은 그 이후로도 수없이 원빈의 방에 들렀다. 원빈이 깨어 있기라도 하면 걱정스러운 얼굴로 몸이 괜찮은지 아픈 데는 없는지 필요한 건 없는지 귀찮을 정도로 물었다. 말티즈 집사들도 총총거리며 드나들었다. 말티즈들은 별말 없이 원빈의 체온을 재거나 작은 앞발로 원빈의 이마 위에 놓인 물수건을 갈아주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갔다. 박원빈은 그들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을 받으며 서서히 회복했다. 기운을 다 차렸을 즈음엔 탈출을 더 이상 시도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보살핌만 받는 사이 이곳에 적응이라도 해버린 것처럼.

박원빈은 총 여섯 번이나 반복했던 탈출 시도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 조금 후회했다. 쿵쾅맨의 성은 너무나도 안락하고 풍요로운 곳이었다. 성 밖을 돌아다니는 무서운 존재들 같은 건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정성찬의 말을 믿어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박원빈이 이곳에서 쭉 살아왔다는 말을. 이 성안에는 박원빈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중세 유럽풍의 다이닝 룸은 매 끼니 원빈이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가득 채워졌다. 이런 곳에서 지코바 순살 양념에 우동사리까지 비벼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정성찬은 박원빈이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기특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우리 엄마도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스럽게 쳐다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잠깐만.

엄마?

그러고 보니 내 가족들은 어디 있지?

문득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너무 당연한 의문인데 이제서야 떠올랐다는 것이 스스로도 이상했다. 다소 부담스럽기까지 한 정성찬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치킨을 씹던 원빈이 입을 열었다.

, 저기, 저기요…….”

정성찬은 아예 양손에 턱을 괴고 원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시선은 박원빈에게 고정한 채로, 더 말해보라는 듯 눈썹을 한 번 위아래로 으쓱였다.

제 가족들은 어디 있어요?”

찰나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박원빈은 분명하게 보았다. 곧게 원빈만을 바라보던 정성찬의 눈동자가 요동치는 것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원빈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이상하잖아요. 내가 여기 계속 살았다고 하는데 왜 우리 엄마도 아빠도 형도…… 아무도 없는, 없는 거예요?”

박원빈은 그 뒤로 덧붙이려던 말은 속으로 삼켰다.

왜 여기에는 당신 혼자밖에 없어요?

이곳에 박원빈을 제외한 유일한 인간은 정성찬 뿐이다. 당연하지만 당연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정성찬은 아주 곤란해 보였다. 믿어보기로 마음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찰나 어두워진 표정을 캐치한 박원빈은 의심의 싹을 틔웠다. 혹시…… , 납치된 건 아니겠지. 언젠가 지나치듯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길을 가다가 뒤통수를 후드려 맞아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이렇게 나를 가둬두고 우리 가족들에게 협박 전화라도 하는 건 아닐까.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보아도 납득되는 지점이 하나도 없었다.

갑작스레 이곳에 떨어진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가늠되지 않았다. 박원빈의 방 안에 있는 모든 시계는 7 36분에서 멈추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하늘의 색깔이 변하는 것으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를 유추했지만, 탈출을 시도하며 돌이켜지는 바람에 며칠이나 지났는지도 셈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곳의 하늘은 평소의 박원빈이 알던 하늘과는 조금 다른 색깔이었다. 대부분은 보라색이었고 가끔은 핑크색으로 물들기도 했으며 초록빛을 띠는 구름이 떠다닐 때도 있었다. 그나마 지금의 색깔이 가장 익숙한 하늘 빛깔이었다. 아주아주 짙은 회색. 당장이라도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어둑한 먹구름이 두껍게 끼어 있었다.

그야 원빈이 너는, 여기서 나랑 같이 살고 있었으니까.”

한참 꾹 닫혀 있던 정성찬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하지만 딱히 의문을 해소해 줄 만한 답변은 아니었다. 구겨진 원빈의 표정을 한참이나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정성찬이 말을 이었다.

네 가족들은 다른 곳에 살고 있어.”

다른 곳 어디요? 저 가족들한테 갈래요.”

박원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커다랗고 흰 손이 만류하듯 원빈의 팔목을 감싸 쥐었다. 금세 정성찬의 손에서 온기가 전해진다. 우습게도, 불안하게 뛰던 맥박이 진정되는 기분이다. 마음 놓을 곳 하나 없는 상황인데도.

지금은 갈 수 없어.”

왜요?”

그건,”

성찬이 말을 멈추었다. 속으로 말을 고르는 듯 굳은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 차차 알게 될 거야.”

또다. 알쏭달쏭한 말. 뭘 차차 알게 된다는 것인지 박원빈은 말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만 지금 말해줄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할 뿐이다. 이곳은 죄다 수상한 것투성이다. 그리고 제일 이상한 것은 바로 이 남자, 쿵쾅맨, 정성찬이고. 박원빈은 제 팔목을 쥐고 있는 손을 쳐 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다이닝 룸을 빠져나갔다. 정성찬은 제자리에 멍하니 앉아 문을 열고 나가는 원빈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넓고 복잡한 성에서 나가는 문 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 박원빈은 망설임 없이 육중한 성문을 밀었다. 예상대로 문지기 두 마리가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어디 가십니까? 마치 앙앙 짖는 강아지처럼 묻는다. 나보다 한참이나 쬐끄만 게 무슨 성을 지킨다고……. 코웃음을 친 원빈이 이번엔 도망가는 대신 대답을 했다.

산책.”

문지기 말티즈 두 마리가 예를 갖추어 원빈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잘 다녀오라는 뜻인 것 같았다. 이번엔 순도 백 퍼센트 진짜 웃음이 샜다. 그러다 문득 첫 번째 탈출을 시도하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문지기가 저더러 산책 가시냐고 물었었다.

혹시, 내가 산책을 자주 했어?”

그럼요! 두 마리 중 미세하게 덩치가 좀 더 큰 말티즈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어디를 자주 갔어?”

그야, 또오꾸마 동산이죠!”

원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문지기 말티즈가 앞발을 들어 성의 오른편을 가리켰다. 다행히 원빈이 왜 그런 것을 묻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 듯했다. 고마움의 표시로 말티즈의 턱 밑을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복슬복슬하고 새하얀 털의 감촉이 좋았다.

또오꾸마 동산이라……. 어쩐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박원빈은 말티즈가 가리킨 성의 오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두운 숲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오꾸마 동산이 어디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견고한 성벽을 빙 둘러 돌아가자, 성 뒤편에 작은 언덕이 보였다. 그곳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만개한 벚꽃잎들이 눈처럼 흩날렸다. 또오꾸마 동산이라는 이름처럼 그 풍경 역시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했다. 박원빈의 눈이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커졌다. 분명히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학교. 조각난 기억이 머릿속에 노이즈처럼 치지직 떠올랐다. 학교 후문 근처에 있는 벚꽃 동산이다. 교양 수업을 듣던 건물 근처에 있어 자주 거닐었던 길. 입구에는 걷고 싶은 길이라는 푯말이 붙어있었다. 봄이 되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지역 벚꽃 명소로 소문도 났었다. 박원빈은 그곳을 좋아했다. 자주 거닐었다. 혼자 걸을 때도 있었고, 누군가와 함께 걸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함께 걷던 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그야, 나란히 걸었으니 박원빈의 시야에는 온통 벚꽃만 들어찼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옆에서 걷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차마 쳐다보기가 부끄러웠을 수도 있고…….

기억 조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두개골을 부술 듯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어느 틈에 시커멓게 변한 먹구름은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했다. 원빈의 머리 위에, 어깨 위에, 손등 위에 굵은 빗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삐이이이—. 기분 나쁜 기계음이 귓가에 울렸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박원빈은 양쪽 귀를 틀어막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기억을 떠올리려 할수록 두통은 더 심해졌다. 비는 점점 거세졌다. 빗소리는 점점 커지는데 이상하게 어깨 위는 더 이상 젖지 않았다. 박원빈은 여전히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은 채 고개를 들었다. 시야 끝에 커다랗게 펼쳐진 우산이 걸렸다. 정성찬이었다. 제 몸만큼이나 커다란 우산을 박원빈에게 씌워준 사람은.

박원빈은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우리 만난 적 있죠? 여기 이 벚꽃 동산에서.”

느닷없는 질문에는 대답 대신 손이 내밀어졌다. 잡고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박원빈 역시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 손을 맞잡았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아귀가 박원빈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일어나 마주한 정성찬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 웃는 얼굴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독하게도 외로운 얼굴이다.

우리 여기를 자주 같이 걸었죠? 기억이 났어요. 내 옆에서 나란히 걸었잖아요. 손도 잡았던 것 같아요.”

박원빈이 마주 선 정성찬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했나요?”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면 정성찬이 웃는다. 그것도 아주 환하게. 박원빈은 처음으로 그의 웃는 얼굴을 마주한다. 커다란 덩치에 영 어울리지 않는 토끼 같은 앞니가 귀엽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해, 원빈아.”

뚱딴지같은 말이 되돌아오면 박원빈은 충동적인 짓을 저지른다.

양손으로 정성찬의 얼굴을 붙잡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살짝 입 맞춘 뒤 떨어질 생각이었는데 어느 틈에 정성찬의 손아귀에 뒤통수가 단단히 붙잡혔다. 들고 있던 우산은 내팽개친 지 오래, 박원빈의 허리에 팔을 감은 정성찬은 통통한 입술을 한껏 머금었다. 짧은 입맞춤은 점점 깊어졌다. 박원빈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입안 구석구석을 탐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목마른 나그네처럼 갈급한 움직임이었다. 박원빈은 두 팔을 들어 정성찬의 목에 감으며 그 움직임에 기꺼이 응하였다.

언제나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정성찬은 분명 입꼬리를 웃고 있었지만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슬픈 얼굴이었다. 무엇이 그를 슬프게 만드는지 궁금하다. 아니, 그게 뭐든 그를 슬프게 만드는 게 없었으면 좋겠다. 이 난데없는 키스는 박원빈 방식의 위로였다.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침울해할 땐 언제고, 박원빈은 먼저 위로를 건넸다. 정성찬과 함께 있으면 뭐든 괜찮아질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정성찬의 말대로 가족들은 다른 곳에서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를 속이지는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었다.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마음을 따라가기가 벅차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그래도 될 것 같다. 마음껏, 마음 가는 대로 움직여도. 머리가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마음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한참만에 입술이 떨어졌다. 그제야 박원빈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를 내려다보는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분명 얼굴이 빨개졌을 거다. 집요한 시선을 피하느라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릴 뿐이다. 시선은 여전히 갈피를 못 잡으면서도 원빈은 사과했다.

갑자기 미안해요…….”

정성찬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원빈의 얼굴을 감싸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발그레 열이 오른 작은 얼굴 위 커다랗고 새카만 눈동자가 바쁘게도 돌아다녔다. 어떻게든 눈 맞춤을 피하고 싶은 모양인지. 쪼옥.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진 두 입술 사이에서 민망한 소리가 났다.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것인지 박원빈은 되묻고 싶었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냥…… 그 순간이 좋았으니까.

순식간에 비는 그쳐 있었다. 먹구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핑크빛 하늘만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4. 무너지는 세계

 

박원빈은 자연스럽게 정성찬을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성에서 일하는 말티즈들은 하나같이 정성찬을 전하라고 호칭했지만 그렇게 부르기는 죽어도 오글거렸고. 계속 그쪽, 당신, 하자니 너무 싸가지가 없어 보였고. 정성찬 씨라고 부르자니 너무 매정하게 들리고. 형이라는 호칭이 제일이었다. 원래 그렇게 불러왔던 것처럼 입에 잘 붙기도 했다. 사실 정성찬이 몇 살인지 모른다. 딱 봐도 키도 크고 덩치도 큰 게 당연히 나이도 많겠거니 생각했다. 처음으로 원빈의 입에서 형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정성찬은 큰 눈을 반짝이며 또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하여튼 사람 마음 약해지게 만드는 데 선수다.

한 번 가까워진 몸은 멀어질 줄 몰랐다. 정성찬은 아예 원빈의 방에서 지냈다.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같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박원빈은 항상 잠들기 직전에 가장 심하게 환청에 시달렸는데, 정성찬의 품에 안겨 있으면 괴로움이 잦아들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었다. 잠에서 깼을 때 옆에 아무도 없으면 허전했다. 단단하고, 하얗고, 따끈따끈한 정성찬을 품에 넘치게 껴안는 것. 박원빈은 그게 좋았다.

.”

아직 잠기운이 남은 탓에 입을 쩌억 벌려 하품을 하고 있는 사이, 정성찬이 커다란 접시를 들고 다이닝 룸으로 들어섰다. 접시 위에는 원빈이 지나가듯 먹고 싶다고 말했던 프렌치토스트가 족히 스무 장은 쌓여 있었다. 눈물이 대롱대롱 맺힌 박원빈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걸…… 형이 다 만들었어요?”

. 떵따니 너무너무 힘드러또.”

, 뻥치지 마요. 강아지들이 만들어 줬잖아.”

아냐!”

테이블 위에 접시가 놓이자마자 박원빈은 스무 장가량의 프렌치토스트를 정성찬이 직접 만들었다는 것을 바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군데군데 새카맣게 탄 토스트들이 눈에 띄었고 몇 장은 제대로 익지도 않은 듯했다.

셰프 있잖아요.”

이 성에는 왕의 요리를 담당하는 셰프 말티즈가 분명 있었다. 지코바 순살 양념을 그대로 재현해 준 것도 제 몸만 한 길이의 주방장 모자를 쓴 말티즈였는데…….

, 그렇…… 그렇지.”

건성으로 대답하는 정성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은근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걸 박원빈은 눈치챘다.

셰프는 어디 갔는데요?”

글쎄?”

그걸 형이 모르면 어떡해요. , 바보 같다.”

…… 휴가 갔나 봐.”

말티즈도 휴가를 가나? 박원빈이 고개를 한참 갸웃거렸으나 정성찬은 애써 무시하며 토스트를 입안에 욱여넣기만 했다. 많이 배고팠나. 원빈은 작게 웃으며 희한한 맛이 나는 프렌치토스트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원빈은 평온한 일상을 누렸다. 배불리 먹은 후엔 루틴처럼 또오꾸마 동산을 산책했다. 벚꽃은 영원히 지지 않을 것같이 항상 피어 있었다. 벚꽃 비가 눈이 부시도록 흩날리는 길을 걷고 있노라면 제 옆을 나란히 걷고 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 사실 박원빈은 그걸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종종 혼란스러웠지만, 아무튼 그 비슷한 감정이 절로 샘솟았다. 믿기지 않았다.

벚꽃이 다 시들었어요…….”

그런데,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팝콘처럼 피어 있던 벚꽃이 어두운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비가 내린 적도 없는데 말이다. 박원빈은 금세 풀이 죽어 시무룩해졌다. 원래 벚꽃이 이렇게 볼품없이 졌었던가? 앙상한 벚나무 가지 끝에는 힘을 잃고 축 처진 시든 꽃잎들만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푸릇한 새잎 같은 건 돋아나지 않았다. 벚꽃이 지면 초록색 이파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게 자연의 이치인데,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다른 걸까.

정성찬은 말이 없었다. 대신 잡고 있던 손을 더 꽉 잡아 올 뿐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꽃비를 내려주던 오솔길은 이제 없다. 그 사실을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태연했다. 원빈은 붙들려 있던 손을 비틀어 빼냈다. 그제야 정성찬은 뒤를 돌아 원빈의 눈을 본다.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

꽃이 다 져버렸잖아요. 아쉽지도 않아요?”

“…….”

정성찬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생각을 정리하는지 말을 고르는지. 내리깐 두 눈이 사뭇 진지하다. 두 사람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쌩 지나갔다.

꽃은 또 필 거니까.”

언제 또 피는데요?”

글쎄.”

“…….”

벚꽃 같은 거 없어도 괜찮은데 난. 내 꽃 여기 있잖아.”

심각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낯이다. 정성찬은 앞니를 드러낸 채 씨익 웃으며 원빈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무슨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냐며 박원빈이 작은 목소리로 핀잔했다. 그런데 이미 붉어진 양 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찬 바람이 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조금이라도 빨리 식힐 수 있어서.

박원빈은 정성찬의 품에 반쯤 안긴 채로 엉거주춤 걸었다. 허리에 손을 감을까 말까 짧은 사이 수없이 고민했지만, 두 팔은 앞으로 모으고 얌전히 안겨서 걷기를 택했다. 걷는 내내 몰래 눈을 굴려 정성찬의 옆 모습을 훔쳐보았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옆선은 누가 빚어놓은 것처럼 군더더기가 없다. 어쩌면 이 낯선 곳에 떨어져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그러니까 괴물에게서 박원빈을 구해주던 그 순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박원빈은 이 얼굴에 반했던 것 같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더라도 박원빈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얼굴이다. 너무 속물 같지만 어떡해. 사실인 걸. 그때 갑자기 성찬이 걸음을 멈췄다.

뭐가 그렇게 신났어, 박원빈?”

뽕싯 솟아오른 박원빈의 광대를 가리키며 묻는다. 여전히 양 볼이 빨갛게 물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좀 전까지만 해도 벚꽃이 졌다고 시무룩했는데, 광대가 아프도록 웃으며 실없이 웃음소리나 흘리고 있으니 이상해 보이는 게 당연하다. 박원빈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대답했다.

, 비밀이에요.”

“…….”

흐음. 나 따라잡으면 말해줄게요.”

그리고는 어깨를 감싼 손을 밀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경쾌하다. 시원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운다. 느껴본 적 없는 상쾌함이다. 문득 쿵쾅맨의 나라에는 근심이나 걱정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박원빈은 성문 앞까지 달렸다.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달리던 때와는 달랐다. 발밑에 감기는 부드러운 잔디, 풀 냄새, 그리고 제 뒤를 쫓는 이의 애정 가득한 시선. 숲속에 도사리고 있던 무서운 것들은 이제 옛날 일이 되었다. 박원빈은 진심을 다해 웃었다. 어쩌면 이대로, 이 사람과 함께, 영원히 이곳에서 지내도 괜찮을 것 같다……. 아니. 정성찬의 곁에 있고 싶다.

행복에 취한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뒤에서 박원빈을 껴안아 오는 커다란 남자. 등 뒤에서 마른 허브 향이 훅 끼쳤다. , 잡혔다. 하나도 아쉽지 않은 목소리로 박원빈이 중얼거렸다.

따라잡았으니까, 이제 말해줘.”

빠져나가지 못하게 원빈을 단단하게 안은 정성찬이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인다. 동시에 박원빈을 부르는 익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빈아. 또 환청이다. 환청이 찾아오는 빈도가 늘었지만 이제 개의치 않았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언젠가는 다 괜찮아질 것 같아서. 킥킥거리고 웃던 박원빈이 뒤돌아 이야기했다.

나 있잖아요…….”

. 원빈아.”

정성찬의 음성으로 듣는 내 이름이 좋다.

형을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말이 끝맺어지자마자 두 입술이 달라붙었다. 박원빈은 두 팔을 들어 쿵쾅맨의 목을 세게 껴안았다. 성문 앞에는 문지기 말티즈 두 마리가 늘 서 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입술을 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말티즈 두 마리가 이미 사라졌다는 걸 박원빈은 눈치채지 못했다.

 

***

 

휴가를 떠난 건 셰프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성안은 텅 비어 있었다. 늘 산책을 하고 돌아오면 말티즈 집사들이 총총 걸어 나와 시중을 들었는데, 문을 열고 성안으로 들어서도 반겨주는 강아지가 한 마리도 없었다. 원래도 사람은 정성찬과 박원빈 딱 둘 뿐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이 성이 썰렁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한 번에 모든 말티즈들이 휴가를 떠난다고? 의아했다. 종종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녀야 할 말티즈들이 없는 성은 퍽 쓸쓸했지만, 오히려 좁게만 느껴졌다. 마치 성의 크기가 줄어든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것을 안다. 돌로 지어진 이 커다란 성이 어떻게 작아질 리가 있겠는가. 애초에 물음표투성이인 곳이다.

욕실에 들어선 박원빈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매일 봐 온 얼굴은 달리 이상할 점이 없었는데도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당장 거울 속의 남자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생경하다. 가랑비에 옷 젖듯 이곳에 스며든 자신이 낯설다.

어떤 이질감을 인식한 순간. 눈앞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박원빈이 손을 들어 눈 앞을 가렸으나 소용 없었다. 애초에 그 빛은 가린다고 해서 가려질 것이 아니었다. 눈을 감았는데도 새하얗고 밝은 빛이 보였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 불빛 같았다. 그런데 이곳에는 형광등이 없다. 선생님 호출이요. 동시에 알아듣지 못할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에 이어 환시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걸까? 박원빈은 생각을 멈추기 위해 차가운 물로 마구 세수를 했다. 얼굴을 벅벅 씻어내는 중에도 환청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소리는 작아지다가 커지기를 반복했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박원빈은 귓가에서 떠도는 목소리들이 잦아들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만에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땐 복도를 따라 난 창에 비친 하늘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은 여전한 보랏빛이었다. 군데군데 핑크색이 섞인 오묘한 색이었다. 유난히 쨍한 하늘은 마치 유화로 그려놓은 그림 같았다. 그것은 곧 현실감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실낱같은 깨달음이 뇌리에 스쳤다. 창 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박원빈은 자신의 방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해답을 알려줄 장소를, 원빈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시계탑.

이 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뾰족한 시계탑은 박원빈이 성안에서 가보지 못한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시계탑으로 연결되는 통로는 늘 잠겨 있었다. 몇 번 궁금해한 적이 있지만, 그럴 때마다 정성찬은 별 볼 일 없는 곳이라며 능구렁이처럼 넘어갔고 박원빈 또한 더 이상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그 시계탑을 향하고 있을까. 해소되지 않는 의문을 안고 박원빈은 계속 걸었다. 한 번 싹 튼 의심은 한 걸음씩 시계탑에 가까워질수록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시계탑으로 향하는 연결 통로 앞에 다다르자 저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역시나, 커다란 인영이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누군지는 뻔했다. 이 커다란 성에 박원빈을 제외한 인간이라고는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정성찬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모호한 눈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박원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잘 시간인데 여기에 있어, 원빈아.”

고백하건대 처음부터 좋았다. 정성찬의 다정한 음성으로 불리는 나의 이름이. 원빈아, 세 글자에 눌러 담은 애정이.

그러는 형은 내가 여기에 올 줄은 어떻게 알고 여기에 있어요?”

그건…….”

얼굴 위로 난색이 비쳤다.

처음부터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친 박원빈이 말을 이었다.

이곳의 모든 것이 이상하다고 항상 생각했는데 굳이 묻지 않았던 이유는,”

“…….”

형이랑 지내는 게 좋아서였어요.”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득 채워진 쿵쾅맨의 성에서 지내는 동안 박원빈은 진심으로 행복했다.

이대로 여기에서 평생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형이랑.”

그리고 마침내 이 성의 주인을 가장 좋아하게 된 순간, 실마리에 불과하던 의심은 어떤 깨달음이 되었다.

그런데 난 여기에 평생 있을 수 없잖아요.”

정성찬은 입을 굳게 닫고 박원빈을 빤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 눈에 담긴 것은 슬픔이었다. 박원빈은 차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르던 박원빈이 힘겹게 입술을 뗐다.

여기는 현실이 아니니까.”

“…….”

혹시 이게 다, …… 내 꿈이에요?”

“…….”

대답해, 형은 알고 있잖아.”

정성찬은 여전히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형은, 당신은, 그럼 대체 누구야?”

한참을 망설이던 입술이 비로소 열렸다.

나는…….”

그리고 그때,

너의—,”

세계가 무너졌다.

말 그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창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한 보랏빛이던 하늘이 조각조각 부서져 떨어져 내렸다. 단단한 돌벽에는 균열이 생겼다. 두 발을 딛고 선 바닥이 세차게 진동했다. 온 세상이 사라지고 있다. 먼발치에서부터, 박원빈이 언젠가 몸을 던지려고 했던 낭떠러지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숲도, 땅도, 이곳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없는곳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정성찬은 미동도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놀란 기색도 없었다. 마치 이런 순간이 언젠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지키고 서 있던 시계탑 연결 통로의 자물쇠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박원빈을 향해 손을 내민다.

내 손 잡아. 다 얘기해줄게.”

정성찬의 손을 잡고 어두운 통로로 들어서자, 위로 한없이 이어진 계단이 보였다. 정성찬은 앞서서 계단을 올랐고, 박원빈이 뒤를 따랐다. 계단은 하늘을 뚫을 것처럼 높아 보였으나 얼마 안 가 꼭대기에 도착했다. 탑의 꼭대기에 다다르자 처참하게 무너진 세계가 한눈에 들어왔다. 곧 시계탑까지 무너져 사라져 버릴 기세였다.

시계탑의 시계 또한, 이 성의 다른 시계들처럼 7 36분에서 멈춰있었다. 박원빈은 처음부터 궁금했다. 왜 이곳의 시간은 7 36분에서 조금도 흐르지 않는 것인지.

사라지는 풍경을 응시하는 정성찬의 눈이 공허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곳의 시간은 7 36분에서 멈춰 있어.”

“…….”

원빈이 네가 의식을 잃은 시간.”

그럼, 여기는…….”

너의 무의식이야.”

그제야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박원빈의 상식과 어딘가 어긋나 있던 이 세계의 법칙들이.

이 성은요?”

나에 대한 너의 기억이야.”

그러면 형은,”

그 순간 박원빈의 머릿속으로 어떤 장면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정성찬을 처음 만났던, 캠퍼스 후문 근처로 뻗어 있는 걷고 싶은 길.

나란히 서서 벚꽃 비를 맞다가 처음 말을 걸었던 날.

벚꽃 또 같이 볼래? 묻는 카톡 한 통에 설레서 잠 못 이루던 밤.

사실은 그동안 너를 좋아해 왔다고 고백하던 순간.

자취방 골목에서 나눈 첫 키스.

도서관에서 밤새 시험공부를 하다가 시켜 먹었던 지코바 순살 양념.

본가에서 키우는 강아지라며 소개해 준 새하얀 말티즈 겨울이.

하도 덤벙대고 물건을 부수고 다녀서 붙여준 쿵쾅맨이라는 별명.

형은 진짜 나 없이 어떻게 살래?’

애정이 어린 잔소리를 건네면 돌아오는,

이잉. 난 박원빈 없이 절대 못 살아.’

한없이 파묻히고 싶었던, 단단하고, 하얗고, 따끈따끈한 품.

물밀듯이 밀려오는 모든 기억의 한가운데에는 정성찬이 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게 무색할 만큼 선명하게 떠오른다.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린 눈물로 박원빈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정성찬은 양손으로 원빈의 얼굴을 붙들고,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정성 어린 손길로 훔쳐냈다. 하지만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박원빈은 제 얼굴을 연신 어루만지고 있는 손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그 손을 꽉 마주 잡았다.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미안해, .”

“…….”

이제야 기억해서 미안해. 몰라봐서 미안해. 많이 섭섭했지.”

정성찬은 그제야 미소 지었다. 온 세상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견고하던 시계탑마저 진동하기 시작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무너지고 있는 세계 한가운데에서 빛났다.

정성찬이 박원빈의 손을 잡아끌었다. 시계탑의 맨 꼭대기에 숨겨진 문이 드러났다. 낡은 철문 위에는, 박원빈이 이곳에서 탈출하려고 할 때마다 맞닥뜨렸던 초록색 비상구 표지등이 번쩍이고 있었다. 여전히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박원빈과 달리 정성찬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원빈이 네가 의식을 찾으면, 여기는 사라져 영영 없어질 거야.”

박원빈이 표지등을 올려다보았다. 묻지 않아도 이곳이 유일한 출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손으로 눈물을 벅벅 비벼 닦은 박원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같이 여기를 나가자. 나가서, 원래대로, 일상으로, 돌아가자, …….”

희망을 이야기하는 박원빈에게 돌아온 것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굳은 얼굴. 정성찬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낯으로 거절을 이야기했다. 무너진 세계의 잔해가 먼지처럼 떠다녔다. 그 풍경을 등진 남자는 어느 때보다 쓸쓸해 보였다.

얼른 이 문을 열고 여기를 나가, 원빈아.”

같이 가야지 무슨 소리야.”

박원빈이 손을 꽉 붙들었다. 놓지 않겠다는 의지로 힘을 주어 틀어쥔 손아귀가 벌벌 떨렸다. 정성찬이 손을 비틀어 빼냈다. 박원빈이 다시 붙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몇 번의 실랑이가 오고 갔다. 붙잡고 떼어내는 손놀림에서는 미련이 뚝뚝 흘러내렸다.

나만 나가면, 형을 여기에, 여기에 두고 가라고?”

.”

내가 어떻게 그래…….”

“…….”

내가 어떻게 형만 두고 가…….”

박원빈은 거의 애원했다. 떠나지 말라며 눈물지을 땐 언제고, 이제 와 어느 때보다 어른스럽게 웃는 정성찬이 밉다. , , 두 주먹으로 가슴팍을 때린다. 정성찬은 여전히 단단하고, 하얗고, 따끈따끈하다. 박원빈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던 너른 품이. 지금만큼은 죽도록 야속하다.

얼른, 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바들바들 떨리는 박원빈의 손에 친절하게도 문고리를 쥐여 준다. 이곳을 나가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데? 내가 의식을 찾으면, 형은? 형은 어떻게 되는데? 정제되지 않은 의문들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다정하고 차분한 음성이 어린아이를 달래듯, 오열하는 원빈을 달랜다.

네가 여기서 나가면 이 세계도, 나도 모두 사라질 거야.”

안 돼, 싫어. 안 갈래.”

박원빈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못해, 싫어, 안 해. 떼쓰는 어린애처럼. 막무가내였다. 그 와중에도 세상은 사라지고 있었다. 심지어 눈앞에 선 정성찬마저,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려진 것인지, 정말로 형이 사라지고 있는 것인지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다. 커다란 손아귀가 원빈의 어깨를 쥐어 몸을 돌려세웠다. 문 앞을 마주 보고 서자 낡은 철문 위에 붙은 경고 문구가 눈에 띄었다.

문밖으로 나가는 순간 이곳의 모든 것을 잊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야 형, 이곳의 모든 것을 잊는다니. 이제야 막 다 기억났는데, 내가 또 형을 잊는다는 소리야? 이러면 안 되잖아. 형을 어떻게 내가 잊어. 나는 안 나가. 차라리 형이랑 같이…… 사라질래. 세차게 고개를 젓는 박원빈을, 단단하고, 하얗고, 따끈따끈한 남자가 뒤에서 껴안았다. 오른쪽 귓가에 전해지는 속삭임은 달콤하고 또 쌉쌀했다.

이곳의 나는, 너의 기억일 뿐이야.”

“…….”

현실로 돌아가면, 네 기억도, 나도 사라질 거야.”

싫어. 잊기 싫어. 형을 내가 어떻게 또 잊어…….”

너는 여기에서도 나를 사랑했잖아.”

“…….”

내가 너를 다시 만나러 갈게.”

삐그덕. 정성찬의 손이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낡은 철문이 힘겨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 너머에서 새하얗고 강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눈부신 광명이었다. 박원빈이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쿵쾅맨의 세계가 아무것도 없는 로 돌아가고 있었다. 정성찬의 실루엣이 점점 더 흐려진다. 가장자리부터 조각조각 부서져,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이내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제발, 깨어나, 원빈아.”

그 말을 끝으로 정성찬은 있는 힘껏 박원빈을 문밖으로 밀어냈다. 눈부신 빛 무덤으로 낭창한 몸이 파묻혔다. 새하얀 빛이 시야 가득 번져갔다. 밝게 웃고 있는 정성찬의 얼굴이 멀어졌다.

이상한 나라가,

무서운 숲이,

뾰족한 시계탑이,

친절한 말티즈 집사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벚꽃잎들이,

그리고 쿵쾅맨이……,

아득한 어둠 너머로 삼키어졌다.

.

.

.

—.

박원빈이 눈을 떴다. 꼬박 2주 만이었다.

 

5. 개화

 

환자분, 박원빈 씨, 들리세요? 제 말 들리시면 손가락 움직여보세요.”

서울의 한 대학병원 집중치료실. 죽은 듯 힘없이 늘어져 있던 원빈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방금 뜨인 눈에는 아직 초점이 없었다. 현실로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 의식이 공중에서 정처 없이 부유했다. 눈꼬리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흰 가운을 입은 의료진들이 양옆으로 달라붙었다. 눈앞이 안개가 잔뜩 낀 것처럼 뿌옜다. 간신히 병원에 누워있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그 외에는 무언가를 생각할 기력이 없었다. 원빈은 점점 아득해지는 기계음을 자장가 삼아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몇 시간이 지나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온몸을 갑갑하게 둘러싸고 있던 기계 중 상당수가 제거된 다음이었다. 박원빈의 상태가 안정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의식을 찾은 이후로는 회복에도 속도가 붙었다. 담당 의료진 외에는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이동하기까지 딱 일주일이 걸렸다. 점점 의식이 또렷해졌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던 몸에도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자고 일어났더니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 방에 해소된 기분이었다. 아직 군데군데 아프긴 했지만, 몸도 가뿐했고 머리도 어느 때보다 맑았다.

이렇게 의식을 되찾고 회복하신 건 환자분의 의지가 컸기 때문이에요.”

애써주신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일반 병실로 내려오고 첫 회진이었다. 박원빈의 담당 주치의가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

, 무지무지요. 엄청 괜찮아요.”

박원빈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거짓은 하나도 없는, 백 퍼센트 진심이었다. 당장이라도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언제쯤 퇴원할 수 있어요?”

지금 경과 보면, 일이 주 안에도 퇴원은 가능합니다. 다만, 환자분이 머리를 가장 심하게 다치셨기 때문에 인지능력이나 기억력에 손상이 없는지 추가 검사가 필요해요.”

인지…… 능력이요?”

본인이 체감하지 못해도, 종종 손상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혹은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는다거나.”

, 에이, 그런데 저, 기억도 다 나고, 머리도 잘……, 잘 굴러가는데요?”

덜컥 겁부터 집어먹은 박원빈이 변명하듯 말을 줄줄 덧붙였다. 인지능력 손상이라니 너무 무서운 말이었다. 게다가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기억상실증 뭐 그런 건가. 하지만, 엄마도 아빠도 형도, 내가 다니던 학교도 친구들도 모두 다 멀쩡하게 기억이 난다. 심지어 사고를 당하던 순간까지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다. 미리 주문해 둔 케이크를 픽업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생일을 축하하려고 박원빈이 직접 주문한 케이크였다.

그런데,

그 케이크는 누구의 생일 케이크였지?

나는 누구의 생일을 축하해주려고 했었지?

순간 박원빈의 얼굴 위로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래도 검사는 받으셔야 해요. 검사 통과하시면 퇴원시켜 드릴게요.”

“…….”

온전하다고 믿었던 기억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박원빈은 텅 빈 공간을 떠올려내기 위해 부단히 머리를 쥐어 짜냈지만 별다른 차도는 없었다. 여전히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사고가 나던 날, 박원빈과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 누군지. 사고와 함께 핸드폰까지 박살 난 덕분에 힌트를 얻을 구석도 없었다.

하루는 뒤늦게 원빈의 사고 소식을 접한 학교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다. 조용한 병실에 들이닥친 친구들은, 한 달 넘게 연락이 끊어진 박원빈을 둘러싸고 얼마나 무시무시한 유언비어가 자연 발생했는지 생생히 전해주었다. 조용하기만 하던 병실이 오랜만에 왁자지껄했다. 막 중간고사가 끝났을 시기였다. 갑작스레 휴학하게 된 박원빈은 친구들로부터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억 속의 커다란 구멍은 메워질 기미가 없었다. 친구들이 들려준 것은 일상적인 학교 생활 이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엇이든 묻고 싶었지만, 도무지 기억나는 것이 없어 무엇을 물어야 할 지 몰랐다. 가슴 한구석이 헛헛했다.

엄마.”

친구들이 모두 돌아가고 다시 고요해진 병실 안. 박원빈이 조용히 엄마를 불렀다.

혹시 나 누워 있는 동안 찾아온 사람은 없었어?”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있었지.”

누군데?”

너 사고 났을 때 가장 먼저 병원으로 와 준 친구가 있었어. 급하게 연락받고 올라오느라 경황이 없어서 이름도 못 물어봤네, 내가.”

“…….”

면회도 안 되는 중환자실 앞에서 며칠 동안 밤을 새우더라. 안쓰러워서……. 말로는 네 선배라고 하던데, 많이 친한 사람이야?”

누구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의식 없이 누워있지도 않고, 출입이 어려운 중환자실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는 걸까. 어떠한 연결고리처럼 불현듯 사고 전 마지막 기억이 떠오른다. 생일 축하한다고 쓰여 있던 레터링 케이크. 사고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케이크처럼 혹시 내가 잊어버린 게……. 여러 의문들이 머릿속에 피어올랐지만 뭐 하나 뾰족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너 일어난 거 알면 참 좋아할 텐데. 엄마의 중얼거림에 박원빈이 저도 모르게 수긍했다.

? 어어…….”

아무 의미도, 성의도 없는 대답이 입술 새를 비집고 나왔다.

얼마 뒤 원빈은 마지막 인지능력 검사를 통과했다. 기억력에도 큰 문제가 없어 퇴원할 수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검사를 담당하는 간호사는 아직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수 있다고 일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격려와 함께. 무리해서 괜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그동안의 병원 생활을 정리하고 퇴원하던 날이었다. 수납을 위해 잠시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병원복을 새 옷으로 갈아입은 박원빈이 병실 한쪽에 걸린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 사이 피부처럼 익숙해진 환자복이 아닌 일상복을 걸친 제 모습이 다른 사람처럼 낯설기만 했다.

똑똑.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엄마야? 나 준비 다 했어!”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엄마가 아니었다.

…….”

박원빈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만지던 그대로 굳었다.

키가 크고 새하얀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남자 또한 박원빈을 보고 얼음이 된 것처럼 멈춰 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박원빈은 순간 고민했다. 나를 찾아온 사람인가? 아니면, 병실을 잘못 알았나? 여기는 1인실인데……. 무언가 말하려 입을 떼려는 순간 정적을 가르고 엄마가 등장했다.

어머.”

키가 큰 남자는 원빈의 엄마를 보자마자 허리를 구십 도로 접어 공손하게 인사했다. 엄마가 금세 화색을 띠었다.

빈아, 이 친구야. 내가 말했던.”

부연 설명 없이도 박원빈은 한 번에 알아들었다. 가족보다도 먼저 병원으로 달려와 준, 중환자실 앞에서 몇 날 며칠 동안 밤을 새웠다던.

…….”

남자가 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원빈도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남자는 원빈의 눈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 빤한 시선 뒤에 숨겨진 마음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깊이였다. 결국 박원빈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깨어나서 다행이야.”

“…….”

퇴원 축하해.”

원빈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한참을 속으로 말을 골랐다. 성큼 눈앞으로 밀려온 다정에, 박원빈은 당황했다.

“…….”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가장 간결한 대답을 택하고 만다. 남자는 다행이라는 말과 달리 구겨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쿡 찌르면 눈물을 줄줄 흘릴 것처럼 슬픔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하지만 남자는 미련 없이, 산뜻하게 뒤를 돌았다. 마치 깨어난 박원빈을 확인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던 것마냥. 돌아선 남자의 뒷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하게 재생된다. 천천히 멀어지는 넓은 등이 박원빈의 가슴 한구석을 쿡쿡 쑤셨다.

원빈아, 왜 그래? 괜찮아?”

엄마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박원빈은 울고 있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는 모르겠다. 남자의 뒷모습은 이미 사라진 다음이었다.

 

***

 

어김없이 찾아온 이듬해 봄, 박원빈은 복학했다.

바쁜 연말을 보냈다. 아직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은 몸 때문에 주기적으로 재활 치료를 받아야 했고, 가족들의 염려를 덜기 위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예방하기 위한 심리 상담도 받았다. 동시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도 해야 했다.

어느 가을밤 들이닥친 사고는 박원빈의 한 해를 통째로 도려냈다. 무너져 내린 일상을 다시 쌓아 올리는 중이었지만 그해 가을과 함께 사라진 어떤 기억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박원빈은 한동안 기억을 찾는 데 골몰했다. 기억해 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답답했지만, 이미 잃어버렸기에 그리워할 대상이 없었다. 다만 의식 없이 누워 있는 동안 꽤 행복했다는 감상만이 남았다.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어둠 속에서 잠만 잤지만, 그동안은 무지 행복했던 것 같다고.

복학을 앞두고는 눈코 뜰 새 없었다. 새 자취방을 구하고 시간표를 짜 수강 신청을 했다. 통으로 날아간 지난 학기를 복구해야 했기에 졸업도 자연스레 한 학기 밀렸다. 이미 복학생이었는데 더 낡아버린 복학생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됐다.

그리고 3 2.

개강과 동시에 맞은 생일날이었다.

수강 신청 대실패한 결과로 다섯 시간이라는 우주 공강을 개강 첫날부터 맞이한 박원빈은 처량하게 길바닥을 헤메었다. 그나마 친한 동기들은 모두 수업을 들으러 가 버리고 홀로 남았다. 과방에서 시간을 죽일까 고민을 시작하다 이내 관둔다. 그곳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새내기들이 이미 점령했을 게 불 보듯 뻔했으므로. 상상만으로도 기가 쪽 빨린 박원빈은 오랜만에 찾은 캠퍼스를 산책하기로 마음먹었다.

수업 듣느라 답장하지 못한 메시지에도 차례대로 답장을 한다. 의례적인 생일 축하 메시지들이었다. 개중에는 엄마에게 온 연락도 있다. 사고 이후로 가족들은 박원빈을 더 끔찍이도 걱정했다. 아침에도 통화했는데, 점심은 잘 챙겨 먹었는지 또 묻는다.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현 상태를 보고하듯 읊었다. 걱정할 일 같은 건 하나도 없고, 아주 건강하고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통화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후문 근처에 있는 캠퍼스 벚꽃 동산에 발길이 닿았다. 3월의 캠퍼스는 아직 봄이라 하기엔 이르다. 매년 인스타에서 벚꽃 명소로 바이럴 타는 곳이지만, 지금은 앙상하게 마른 가지만이 볼품없이 늘어서 있다. 벚꽃은커녕 꽃망울도 찾아보기 힘들다. 박원빈은 저도 모르게 그 길로 들어섰다. ‘걷고 싶은 길이라고 써 붙인 표지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 그 길을 걷고 싶어졌으니까.

어어, 저녁도 잘 챙겨묵으께. 걱정하지 말고.”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걱정 어린 잔소리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걷다가,

.

그만 시야를 놓치고 말았다. 마주 오던 사람과 부딪쳤다.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박원빈이 고개 숙이며 습관처럼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방금 박원빈과 충돌한 남자는 친절하게도 손수 박원빈의 핸드폰을 주워 건넨다.

,

엄마, 나 지금 수업, 수업 들어왔어. 이따 끝나고 전화할게.”

박원빈은 건네받은 폰에 대고 다급하게 거짓말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니까 방금 박원빈이 박치기한 가슴팍이,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준 새하얗고 커다란 손이, 시선을 조금 올리면 시야에 들어차는 예쁘장한 눈망울이……,

“…….”

박원빈이 아는 얼굴이다. 퇴원하던 날 병실에 찾아온 키가 큰 사람. 병원에 실려 온 박원빈을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 중환자실 앞에서 몇 날 며칠 밤을 새웠다던 사람. 하지만 박원빈의 기억에는 없는 사람. 어쩌면 박원빈에게도 소중한 사람.

남자는 어색하게 웃어 보인 후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냥 지나치려는 남자를 붙잡은 건 박원빈이었다.

……, 왜 저 모른 척해요?”

방금 내뱉은 대사가 퍽 뻔뻔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붙잡고 늘어져야 했다.

저 알잖아요.”

“…….”

모른 척할 거면 연기라도 잘하든가…….”

당장 눈물 쏟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돌아서면 내가 그대로 보내줄 줄 알고?

하지만 정작 울고 있는 건 박원빈이다.

눈을 휘둥그레 뜬 남자가 어쩔 줄 모르는 손으로 박원빈의 뺨 위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박원빈은 자신이 지금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몰랐다. 제멋대로 구겨진 얼굴이 엄청나게 못생겨 보일 거라고 짐작만 할 뿐.

왜 울어…….”

단 세 음절에, 꾹꾹 눌러 담다 못 한 다정함이 흘러넘쳤다. 고작 말 한마디에도 과분한 애정이 묻어 있다. 내가 그 깊은 마음을 헤아리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박원빈은 이왕 뻔뻔해진 거 조금 더 뻔뻔해지기로 한다.

보고 싶었어요.”

이상한 일이었다. 기억에도 없는 남자가 보고 싶었다. 입술 한 번 떼지 못하고 돌아서던 뒷모습이 내내 사무쳤다. 박원빈은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가 잃어버린 시간의 주인공이 그 사람이라는 것을.

남자의 소맷단을 꽉 붙든 박원빈이 울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고백한다.

그런데 제가 기억을 잃어버렸어요. 언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어쩌면 영영 못 찾을지도 몰라요.”

남자는 살포시 미소를 띤 채 잠자코 원빈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래도 괜찮으면,”

“…….”

기다려줄래요?”

남자는 자연스럽게 원빈의 손을 잡았다. 익숙하고 편안하게 감기는 손바닥이 단단하고, 하얗고, 따끈따끈하다.

나 기다리는 거 잘해, 원빈아.”

끝내 그가 박원빈의 이름을 부르면, 하염없이 차오르는 눈물이 뿌옇게 시야를 가린다. 엉망이 된 얼굴을 갈무리해 주는 건 커다랗지만 조심스러운 손길이다.

울지마.”

그리고는 몸을 틀어, 박원빈이 걷던 방향으로 걸음을 뗀다. 박원빈은 하릴없이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남자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내 이름은 기억나?”

박원빈이 힘겹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

나는,”

“…….”

쿵쾅맨이야.”

눈물 젖은 얼굴이 금세 황당함으로 물든다. 무슨, 무슨 사람 이름이 그래요? 네가 지어준 건데? . 뻥치지 마요. 진짜야. 장난기 어린 대화가 오고 가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손을 놓지 않았다. 천천히 걷는 발걸음이 어느 새 나란했다.

이제 곧 새봄이 온다. 머지않아 앙상한 나뭇가지가 팝콘 같은 꽃망울을 틔울 것이다.

오랜 연인은, 이렇게 처음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