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의 즐거움
by. 머리삔


물고기가 아니면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탈락도 락이다!

유튜브, 넷플릭스, 티빙 등 ott 플랫폼들과 케이블 방송국들에 밀려 공영 방송국이 예능 관련으로는 죽도 못 쓰던 때. 공영 방송국에서 저예산으로 시작한 락밴드 서바이벌이 이토록 큰 화제가 되리라는 것은 후원사며 제작진, 하물며 출연진들도 몰랐다.

‘탈락도 락이다’ 일명 탈락락은 이미 기존에 있는 밴드 서바이벌과는 다른 노선을 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밴드의 인원수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밴드계에는 2인, 3인 밴드도 제법 있었고 심지어 1인 밴드가 해체 발표를 해서 팬들의 맘을 북북 찢어놓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밴드 인원을 최소 4명 이런 식으로 정해둘 필요가 뭐 있는가.

어차피 허구헌날 싸우고 찢어져 탈퇴 공지 올렸다가 인원 딸리면 디엠으로 빌고 인맥으로 들러붙어서 세션이란 이름으로 같이 합주하다가 몇 주, 몇 개월 뒤 은근슬쩍 재결합하는 밴드가 한둘이 아니었다.


인원 제한이 없으니 탈락락에는 사회성 떨어지고 그쪽 바닥에서 소문 안 좋은 원맨, 혹은 2인 밴드맨들이 잔뜩 지원했다. 필요한 악기는 세션으로 지원해줄 테니 일단 지원부터 해라!― 라는 설명은 성격 파탄에 돈은 없고 관심은 받고 싶은 밴드맨들이 혹하기에 딱이었다.

그뿐인가?

어쨌거나 1명이나 2명으로는 대결 구도를 짜기 어려우니까 제작진은 밴드맨들을 뭔 아이돌 서바이벌마냥 지들끼리 대결해서 리더 선출한 뒤 다른 출연진들을 골라서 다음 무대에서 합주하는 식의 합동 무대를 올리게 했다.

근데 애초에 성격 안 좋아서 1인, 2인 밴드로 지원한 건데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 리가 만무.

덕분에 존나 자극적인 장면들이 쭉쭉 뽑혔다. 판이 좁다 보니 지들끼리 얼굴은 알음알음 알고 있었고 추문과 근거 없는 소문도 함께 돌았다. 좁은 밴드판은 다른 밴드, 다른 팀이어도 친분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연습 중에 생긴 일로 뒤에서 험담하고 이간질하고 장난 아니었다. 나는솔로 돌싱 특집 저리 가라. 옥순 영철 저리 비켜! 피디가 이딴 개싸움은 처음 봤다는 인터뷰가 화제가 되기도 핬다.

반대로 의도치 않게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자아 쎄고 끼리끼리 패거리주의 강한 판에서 소외되어 가시를 세우던 고슴도치 독고다이들이 함께 새벽 연습하고 편곡을 완성시키면서 맘을 터놓게 되자 서로 눈물을 터트리며 고생했다, 전에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했다고 얼싸안게 되는, 한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감동 서사!

물론 개싸움하고 그대로 무대 퀄리티 꼬라박고 침몰하는 팀들도 있었으나 그런 팀들이 있어야 감동 서사가 더 빛을 발하는 것 아니겠는가. 편집은 이럴 때 하라고 있는 것이다. 인성 꼬라박은 팀과 감동 서사의 팀을 절묘하게 이어붙이니, 시즌을 거듭할수록 후와후와 말랑말랑해진 아이돌 서바이벌에서 사라진 악마 같은 편집이 되살아나 도파민에 미친 한국 시청자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탈락락은 밴트 탈락ㅋㅋㅋㅋㅋ인간성 탈락ㅋㅋㅋㅋ실력 탈락ㅋㅋㅋㅋ 이것도 락이 맞냐?ㅋㅋㅋㅋ라고 비웃던 사람들을 그대로 프로그램 시청자로 안착시킨 요소 중의 하나는 밴드 생음악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일 것이다. 다만 탈락락의 경우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팬덤 견인 요소가 있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한 명을 꼽았다.

박원빈.


-이 릴스요? 봤죠. 이 사람 박원빈 아니에요?

-틱톡에서 봤어요. 외국인인줄 알았는데 한국인이라서 놀랐어요. 외국 댓글도 진짜 많던데.

-박원빈 짱! 데뷔하자!

홍대, 성수에서 지금 무슨 노래 들으세요?st로 짧게 찍은 영상에서도 젊은 여자들은 박원빈을 알았다.

그럴 만도 했다. 박원빈은 오디션 장면부터 방송을 탔다. 그럴만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1인 밴드맨으로 나와서 그 잘생긴 얼굴로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기타를 요란하게 치면서 노래까지 기깔나게 부르길래 천상천하유아독존, 세상 혼자 사는 재수 없는 타입인 줄 알았더니 오디션 끝나고 나가면서는 엄마한테 전화해서 말 더듬어가면서 찡찡대고, 학교에서 같이 밴드하는 형, 동생들이랑 영상 통화하면서 순하게 웃는데, 분량 없어서 이 장면을 대충 편집해서 넣었다가 탈락락은 1화부터 여초에서 소소하게 바이럴을 탔다. 쟤 뭔가 느좋삘이 온다고.

어쨌거나 박원빈은 밴드 탈락, 인성 탈락, 실력 탈락이라는 우스갯소리와는 모두 비껴가는 육각형 인재였다.


“그렇게 생겼으면서 실력까지 좋은 건 존x 반칙 아니에요?”


원빈의 상대 팀이었던 밴드맨이 억울해 하면서 욕을 한 게 그대로 방송에 탈 정도.

고등학생 때 밴드부를 하고 대학에 와서도 취미로만 남기려고 했지만, 우연히 보게 된 모집 공고에 지원했다가 덜컥 붙었다기엔 박원빈은 너무 준비된 인재였다.


-근데 원빈이는 진짜 진국이에요. 새벽에 연습실 나오는데 옆 연습실에 걔 혼자밖에 없었음. 걘 얼굴만 반반한 애들이랑 다른 찐임.-


탈락락이 뭔 연프도 아니고, 방영 중반부터는 스포 외엔 참가자들의 sns도 막지 않았기에 원빈에 관한 무성한 소문이 많았다. 그것에 대해 몇몇 탈락한 참가자들은 원빈에 대해 해명도 많이 해주었다-해명이 약간 씹스럽긴 했지만-.


“이, 이렇게 우승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이런 큰 무대에 저를 보러 와주신 팬 분들… 시청자님들… 그리고 저, 저를 믿고 응원해준 친구들과 가족들.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탈락락 우승을 손에 거머쥔 박원빈이 울면서 인사하는 장면은 그대로 백만뷰를 탄다. 댓글창에는 무슨 아이돌 프로였는데 이걸 내가 몰랐냐고 하는 댓글도 많았다.


탈락락 성공의 일등 공신. 피디가 원빈의 부모님께 감사 전화까지 했다는 화제의 인물.

그때부터 원빈은 그야말로 얼굴이 안 보이는 곳이 없었다.

공영 방송국 서바이벌 프로그램 출신이기 때문에 그 방송국의 라디오며 예능 프로그램은 다 나간 건 물론이고, 요즘은 방송국에서 자체 유튜브도 많이 하기 때문에 그것도 다 나갔다.

그리고 애초에 밴드맨으로 탈락락에 지원한 것이다 보니 유명한 음악 유튜브에도 얼굴을 비치니, 어지간한 곳엔 다 눈도장을 찍었다고 볼 수 있다.

하도 여기저기 나오다 보니 화제성이 좀 식으려던 타이밍에, 거대 떡밥 하나가 터졌다.

살롱 드립에 탈락락 준우승자와 함께 나갔다가, mc분이 원빈에게 가볍게 던진 질문 덕분이었다.

“원빈 씨는 휴학했다고 했죠? 잘생겨서 원래 학교에서 인기도 많았을 것 같긴 한데, 방송 끝나고는 반응 어때요? 난리 났죠?”

“아, 뭐…. 근데, 저 워, 원래 인기는 별로 없었어요. 매, 맨날 안경 쓰고 체크셔츠 입고 다니고 그래서.”

“에이. 그래도 여자들은 다 알아볼 텐데. 그래서 여자친구 없었다고?”

“어, 없었어요.”

“엥. 진짜요?”

“지지진짜루.”

“원빈이 진짜 여친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은 있지만. 그래서 소개도 안 받던데요? 완전 순애보에요.”

“아, 혀엉.”

곤란해하는 원빈을 포착한 mc가 질문을 마구 던졌다.

“좋아하는 사람이요? 뭐야. 썸? 설마 짝사랑? 에이, 쫌만 말해줘요!”

원빈은 머뭇거리면서 말문을 열었다.

“짝사랑 맞아요. 좋아한 지는 좀 오래됐고….”

“오래된 거면 어느 정도?”

“어…. 3년 정도?”

“와. 그럼 거의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좋아한 거에요?”

“그, 중간에 군대도 다녀와서….”

“원빈 씨 군필자구나.”

“네에. 현역입니다.”

갑자기 각 잡힌 말투에 mc는 까르르 웃으면서 원빈에게 물었다.

“그럼 그 좋아하는 분한테 편지 썼어요? 답장도 받고?”

“네에….”

“뭐야. 금방 사귀겠네!”

“글쎄요? 그, 그분이 제가 좋아하는 걸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고백한 적 없어요?”

“없, 없어요. 어새, 어색해지는 거 싫어서….”

대본상의 질문들이 많이 남아있긴 했지만 이런 흥미로운 연애 얘기를 그냥 넘어갈 수가 있나. 요즘 제일 주가 높은 20대 남자애의 짝사랑 얘기라니.

mc는 쑥스러워하는 원빈에게서 요령 좋게 답을 얻어냈고, 질문과 답을 다 모아 보면 이런 결론이 나왔다.


박원빈이 먼저 좋아해서 3년간 주변을 맴돌았고 그쪽도 아마 박원빈이 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을 확률이 높음. 그런데 딱히 이렇다 할 액션은 취하지 않고 있음. 근데 어쩐지 희망을 놓지 못하겠어서 계속 좋아하고 있음.


물어본 mc나 같이 원빈의 말을 듣고 있던 준우승한 형이나 얼굴이 약간 굳어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거 어장 아니냐…?라는 눈빛이었다.

원빈은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수줍게 말했다.

“사실, 어디서 얘기한 적은 없는데 탈락락 첫 미션 때 분위기 안 좋았을 때 제가 열심히 모아서 오해 풀고 그랬잖아요. 그것도… 그분한테 배운 거예요.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물어본 적 있는데, 자기도 같이 깽판 친 적 있었는데 나중에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고. 차라리 이렇게 하는 게 맘이 편하다고, 내 맘 편하자고 이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게 너무 가, 강단 있고 멋져 보였어요.”

“멋진 사람이 많진 않죠.”

“네에. 조, 존경할 수 있는 사람.”

“그럼 원빈 씨는 내면만 봐요? 외모는요?”

원빈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눈엔 제일 예쁜데요…….”

이 대화는 본편에서는 적당히 잘려서 짧게 나갔지만 비하인드에서는 풀로 나왔다. 여자들은 댓글창에 장면마다 타임라인을 박으며 원빈의 대사를 반복했다.


08:47 제눈엔제일예쁜데요제눈엔제일예쁜데요제눈엔제일예쁜데요제눈엔제일예쁜데요제눈엔제일예쁜데요

ㄴ미친; 얼마나 이쁜거임;;;

ㄴ이쁜데 존나 착하기까지한가봄…

ㄴ이쁜데 착하고 멋있어 보인다? 존경할 만한 여자? ㅆㅂ겜 끝ㅆㅂㅆㅂㅆㅂㅆㅂ

쌰갈 3년 좋아했다잖냐 왜 이런것도 존나멋있는건데ㅠ 

멋진언니 제발 박원빈 차주세요 제발 저한테도 기회 한번만ㅠㅠㅠㅠ 제발 나 이미 무릎꿇음

근데 여자가 좀 어장치는 거 같지 않음?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절대 티가 안 날 리가 없는데 저런 애를 3년이나 냅두는 건 쫌;;

ㄴ고백안했대잖아요 뭔 어장이야; 진짜 모를수도 있죠;

ㄴ나같아도 박원빈 같은 남자애가 내 주변 멤돌면 그냥 고양이한테 간택받았다 싶지 고양이가 나랑 사귀고 싶다고 생각 안듦

ㄴ원빈이는 펭귄인데요;

ㄴ뭐래 누가 봐도 깜고ㅗ


이 연애 일화가 일파만파 퍼지면서 환승연애 4의 패널로도 초청이 되어 명언을 쏟아내고 왔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지현 씨가 부, 불안해 하는 것 같은데 간 보지 말고 믿음을 쫌 주면 안 되나?”

“아, 왜 저래, 진짜!”

“드, 들킨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봐도 그냥 대화하나보다 할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모르겠어요. 아. 설마 여자들끼리 친하니까 엑스인 거 때문에? 그럼 자기가 매력 없는 거지. 거기까지인 거지.”

“근데 아무리 새 사람이 좋아도 엑스가 여기까지 같이 나와줬는데 저러는 건 쫌. 예의가 없는 것 같아요. 예의도 예읜데… 의리? 남자가 의리가 있어야지.”


흥분할수록 울산 사투리가 튀어나오고 연애관, 인간관 같은 것이 보이자 사람들은 원빈을 알고 싶어 했다. 알려진 짝사랑에 대해서는 더더욱 궁금해 했다.

잘생겼는데 매력 있고 볼수록 진국인 것 같은 저 박원빈이 3년째 짝사랑한다는 여자는 대체 어떤 여자일까? 얼마나 대단할까? 얼마나 예쁠까?

덕분에 sns에는 ‘박원빈 모교 출신 인플루언서 모음’이라는 글도 제법 돌아다녔다. 하필 상민대는 능력에 비해 학생 수준이 높기로 유명해서 인플루언서도 제법 많았고, 과별 여신들이라 불리는 학생 중엔 원빈과 한두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도 몇 있어서 박원빈 짝녀가 뫄뫄다, 아니다 솨솨다, 근거 없는 소문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이 있지만 대중의 호기심에 죽어나는 것은 원빈의 지인들이었다.


“아, 또 이래!”

소희는 신경질을 내며 자기 휴대폰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친하지도 않은 선배가 무릎 꿇은 사진을 톡으로 보내며 원빈과의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평생 소원이라고 찌질거리고 있었다.

소희는 스냅백을 벗어 모자로 눌러 두었던 숱 많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얼굴에 오른 열을 식혔다.

“진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원빈이 형 좀 보게 해달라고 하면 너무 짜증 나요.”

“야, 그거면 낫지. 나는 놀다가 갑자기 박원빈 부르라고 한다니까? 너랑 친하다며, 왜 못 부르냐고. 거짓말이었어? 이런다?”

“와, 사람을 막 긁네.”

“그런다니까.”

쇼타로와 소희의 푸념을 듣고 있던 은석이 입을 열었다.

“형이나 이소희는 어제도 박원빈 작업실에서 사진 찍고 태그하니까 그런 연락이 오겠지. 뭘 푸념해.”

“아, 그럼 놀았는데 그런 것도 못 올려?”

“그니까! 소달호~ 송은석 좀 혼내 봐. 형이잖아.”

“뭔 소리야. 쇼타로랑 나랑 동갑이야.”

“엥? 진짜?”

“어. 성찬이만 어렸다가… 아, 얘도 이제 생일 지났으니까 셋이 동갑.”

“아, 한국 왜 갑자기 만 나이 됐어. 불공평해!”

쇼타로는 아직 본인의 생일까지 며칠 안 남은 탓에 자신과 은석, 성찬이 나란히 동갑이 된 게 무척 마음에 안 드는지 실컷 투덜거렸다.

“근데 이번 형 생일에 원빈이 형 와요?”

찬영의 물음에 쇼타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찬은 관심 없는 척 고기를 뒤집으면서 저도 모르게 쇼타로 쪽으로 귀를 쫑긋 기울였다.

“모르겠는데? 그때 봐서 말해준대. 내가 보기에도 원빈 요즘 너무 바빠서…. 내 졸업식에는 올 수 있으려나?”

“에이, 졸업식에는 당연히 오겠죠. 형만 졸업하는 게 아니라….”

소희가 성찬 쪽을 흘끔 보자 쇼타로도 성찬 쪽을 보았다. 성찬은 그 시선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쇼타로는 얼굴을 찡그려 가면서 웃었다.

“하긴, 성찬도 졸업하는데 당연히 오겠지!”

다들 그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석은 중간에 한 학기 휴학했기에 이번 졸업자는 쇼타로와 성찬 둘뿐이었다.

휴우,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한 성찬은 흠칫 놀랐다. 내가 왜 안심하지?

“자, 자. 다 익었으니까 빨리 드세요. 이러다 타겠다.”

다 익은 고기들을 앞접시에 놔주면서도 성찬은 계속 딴 생각을 했다.

졸업이 가까워져서인지, 지겨울 정도로 계속 들은 박원빈의 이름을 또 들어서인지는 몰랐다.


*


쇼타로, 은석, 성찬, 원빈, 소희, 앤톤. 이 6명의 모임은 어떤 동아리나 학회 모임도 아니고 정말 어쩌다 보니 엮이게 된, 아무것도 아닌 모임이었다. 물론 같은 상민대를 다니긴 했지만.

성찬과 은석은 같은 고등학교 출신, 쇼타로와 성찬은 외국인 재학생을 도와주는 연결 프로그램 덕에 만났고 오며 가며 자주 본 은석까지 해서 셋이 친해졌다. 소희와 찬영은 같은 실음과 동기-찬영이 재외국민 전형으로 좀 일찍 들어왔다-라서 친하고 은석과 소희는 같은 애니메이션 감상 동아리에서 나루토를 좋아하면서 친해졌다-찐오덕들 사이에서 둘만 머글이라 둘만 친해졌음-.

박원빈은 쇼타로가 데려왔다. 쇼타로가 댄동 친구들과 가볍게 기획한 원데이 댄스 클래스에 원빈이 참석했고 그 기회로 친해진 것이었다.

쇼타로는 원빈이 음악과 춤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듣고 원빈을 소희, 앤톤에게 소개해줬고 그렇게 놀다 보니 어느새 6명이서 같이 한 무리가 된 것이다.

물론 사내놈 6명쯤 되면 더 친하고, 덜 친한 조합이 있기 마련이지만 6명은 특별히 모난 성격이 없는 덕분에 둥글둥글 잘 어울렸다.

그중에서도 성찬과 원빈은 덜 친한 조합이라고 해야 할까. 약간 어색한 조합이었다. 그렇다고 안 친한 건 아니지만.


한때 성찬은 이에 대해서 고민한 적도 있었다.

‘원빈이랑은 왜 좀 어색한 것 같지?’

물론 원빈이랑 단둘이 밥도 먹으러 가고 영화도 본 적 있다. 고민이 있다길래 한강 데려가서 농구하던 사람들 사이에 껴서 농구도 같이 하고 라면을 먹기도 했다.

이 정도면 성찬으로서는 거의 다 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보통 남자애들은 성찬이 이 정도로 해주면, 아니 이거의 반만 해줘도 거의 충성을 바칠 기세로 눈에 존경심을 박고 성찬을 따랐으니까.

근데 박원빈은 좀 달랐다.

“혀, 형이랑 있으면 좀… 맘이 편한 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네에. 근데 너 좀 떠는 거 같은데? 추워?”

“네? 아, 아아. 쫌? 땀이 식어가…. 괘, 괜찮아요.”

“괜찮긴. 그러다 감기 걸린다. 이제 가자.”

“배, 배부른데 쫌만 산책하다 가면… 안 돼요?”

“응?”

성찬은 그때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둑어둑하게 밤이 내려앉기 시작한 한강 둔치의 벤치에 앉아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던 스무 살 박원빈의 어린 얼굴을.

남자치곤 긴 머리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잘생겼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그때는 이상하게… 청순하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찬은 그때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날 원빈과 함께 먹은 라면과 만두를 소화시키자며 한참 뺑뺑 걸었던 건 기억했다. 자신은 후드를 입고 있으니 너 입으라고 덜덜 떨던 원빈에게 자신의 과잠을 입혔던 것도 기억 못 해서 다음날 원빈이 과방으로 과잠을 가져다 줬을 때야 알았다.

21살의 원빈과는 큰 기억이 없었다. 성찬과 은석이 입대하고 얼마 안 있다가 원빈도 입대한 바람에 제대할 때쯤 되어서야 같이 얼굴 한 두 번 본 게 다였다. 차라리 인편을 주고받은 게 더 많을 거다.

게다가 성찬은 제대할 무렵 워낙 소개팅이 쏟아져 들어와서 바빴다. 본인도 사회에서 떨어져 있는 동안 초조했기 때문에 제대하자마자 영어 학원이며 운전 연수며 바쁘게 돌아다녔고 여자친구가 생기니 없는 시간을 더 쪼개기도 힘들었다.

“너 얼굴 보기 힘들다?”

오히려 군인일 때 휴가 맞춰 나와서 더 얼굴을 자주 봤던 은석이 어이없다는 듯이 어깨를 가볍게 때리기도 했었다.

“왜. 보고 싶었냐?”

“아니.”

바로 들어오는 정색에 그럼 그렇지, 하는데 뒷말이 의외였다.

“애들이 섭섭해하잖아. 제대했는데 제대로 얼굴도 못 봤다고.”

“라임 뭐야.”

“훗. 어쨌거나 톡에 답장 좀 따박따박해라. 지만 제대했나.”

은석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고서 여자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주말 약속을 잡았다. 여자친구와 함께 있다가 나간 것이었는데 성찬을 제외한 멤버들은 이미 만나고 있었는지 자리가 왁자지껄했다.

“오, 진수성찬 오셨다.”

“제대했는데 머리가 왜 저렇게 길어. 여기 울산바위는 이렇게 짧은데?”

은석이야 동네에서 보니까 알았지만 원빈의 저렇게 짧은 머리를 본 건 처음이었다. 입대할 때도 그날 당일 밀고 가서 내내 긴 머리밖에 못 봤는데, 열심히 기른 모양이지만 그래도 짧았다.

“와, 원빈. 머리 그렇게 짧은 거 처음 보네?”

“네. 쪼, 쫌 이상해요?”

원빈은 신경이 쓰이는지 계속 머리를 가만히 못 두고 두 손으로 옆머리를 내리려고 애쓰며 낑낑댔다. 성찬은 그런 원빈이 귀여워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리는데? 근데 너는 뭐 군대도 다녀왔는데 얼굴이 스무살 때랑 똑같네. 애기 같다.”

“아…? 네, 네에.”

“고기 안 시켰어? 나 배고픈데.”

오랜만에 보는 자리라서 성찬은 신나서 수다도 많이 떨었고 주량에 비해 술도 좀 마셨다. 기분이 붕붕 들뜨다 보니 여자친구에게 연락하는 걸 잊어서, 기다리다 못한 여자친구에게서 결국 전화가 왔다.

성찬은 얘기하다가 양해를 구하고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어어? 어. 말했잖아, 여기 다 남자밖에 없다고.”

“여자 목소리 들린다고? 그건 옆 테이블…. 어? 영상 통화? 그건 쫌.”

나 못 믿냐고 하고 싶었지만, 뭐 안 지 몇 개월이나 됐다고 믿고 안 믿고 하겠는가.

성찬이 통화하는 동안 어느새 쥐 죽은 듯 대화가 사라진 테이블. 쇼타로가 나서서 성찬에게 말했다.

“우리 괜찮으니까 영상 통화해.”

“아, 형. 내가 미안.”

“저희도 괜찮아요. 영상 통화해서 보여, 보여주세요. 어차피 우리 남자끼리밖에 없는데.”

“진짜 미안. 잠깐만 보여주고 바로 끊을게.”

성찬은 원빈의 말에 미안함에 눈썹을 늘어트리고는 잠시 여자친구와 페이스톡을 해서 테이블의 면면을 보여주었다. 여자친구는 언제 의심했냐는 듯 상냥한 목소리로 다들 잘생겼다고 칭찬을 잔뜩한 뒤 늦지 않게 오라며 성찬에게 당부하고 끊었다.

가만히 있던 찬영이 말했다.

“근데 여자친구분이 되게….”

“응?”

“고양이 같이 생기셨다…….”

“그래? 청순한 스타일이지 않나?”

“청순한 스타일이 저런 호피를 입냐? 넌 참…. 됐다.”

은석은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고 성찬은 그제야 묘하게 테이블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을 눈치챘다.

‘뭐지?’

오랜만에 뭉친 자리의 분위기를 깨버려서―라고 하기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이 모임이 무슨 솔로 모임도 아니었고 다른 멤버의 여자친구가 껴서 만난 적도 있었다.

성찬은 없는 눈치를 박박 긁어모아 분위기를 읽어 보았다. 소희가 눈알을 굴리며 앤톤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고, 쇼타로가 쩔쩔매며 원빈을 챙기고 있었다. 은석은 뭐 속 타는 아버지처럼 먼 곳을 보다가 한숨을 푹푹 쉬고 술을 마시고.

‘그러니까 결국은 원빈이 기분이 상한 것 같은데……. 왜지? 나 때문에?’

그렇다기엔 원빈은 아까와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였다. 조금 기운이 빠져 보이긴 했지만, 좀 피곤한 것처럼 보일 뿐. 기분이 나빠 보이거나 맘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성찬은 약간 본인만 모르는 수수께끼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막내라고 제법 친동생처럼 귀여워하는 앤톤마저 자신을 약간 비난하는 눈으로 보고 있어서 좀 억울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날 술자리는 길지 않게 파했다. 어차피 여자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오래 있을 생각도 아니었던데다가 왠지 자신만 뭔가를 모르는 것 같은 기분이 별로라서 그냥 1차를 계산하고 먼저 일어났다.

“나 간다?”

“그래, 가라 가. 우리 우정이 이것밖에 안 돼? 성짠, 나쁜 놈.”

“타로 형, 취했어?”

“안 치했어, 이놈아!”

짧게 어학 연수 왔다가 한국인들의 정이 마음에 든다고 아예 편입까지 해서 눌러앉은 사람답게 쇼타로는 원래도 이중 약속을 섭섭해하고 ‘우리’를 중시하는 스타일이었다. 쇼타로의 섭섭함은 다음에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가게 뒤 주차장에서 대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나오는 원빈과 마주쳤다.

“어, 원빈. 너 담배 피웠어?”

“아…. 군대에서 배웠어요.”

“나쁜 거 배웠네.”

“많이는 안 피워요. 가끔 한두 개비.”

“그것도 안 좋아. 너 노래하잖아.”

“…들어본 적 있어요?”

“에이, 날 뭘로 보고. 너 사운드클라우드 초창기부터 구독했는데?”

“어… 어떻게요?”

“은석이가 그때 자기 동아리 후배가 노래 잘한다고 들어보라고 해서 들었는데, 그게 소희가 너랑 같이 부른 거였을걸? 그래서 너 사클도 넘어가서 듣다가 구독했었지. 그때는 만든 지 얼마 안 돼서 구독도 몇 명 없던데. 그래서 너랑 알게 된 다음에 자랑하려다가 부끄러워서 안 했어.”

“…뭐야, 진짜. 형은 은근 쫌… 꼬롬하네.”

“꼬롬한 게 뭐야? 좋은 거야?”

“대, 됐어요. 그런 게 있다.”

술 한잔 걸친 원빈은 묘하게 나른했고 경계가 풀어져서 말랑말랑해 보였다. 손으로 쿡 찌르면 푸욱 손가락 모양대로 들어가 버릴 것 같은 순두부. 어쩐지 이대로 들여보내긴 아쉬웠다.

성찬은 원빈을 제 차로 데려가서 같이 뒷좌석에 앉아 원빈이 쫑알쫑알거리는 것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가며 경청했다.

성찬 역시 잘하지 못하는 술을 마셔서 조금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웃음이 헤펐다. 성찬이 눈을 접어가며 까르르 박수 치며 웃어대자 원빈은 헤헷 헤헤헷 웃어가며 군대에서 들은 웃긴 얘기들을 총동원했다. 그러면 대결이라도 하듯 성찬이 웃긴 얘기를 해주었다. 둘은 큰 차가 흔들릴 정도로 배를 잡아가며 웃었다. 사실 그 정도로 웃긴 얘기도 아니었는데 그냥 웃겼다. 아니, 어쩌면 그냥 상대의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왔던 건지도.

“대리 부르셨죠?”

그러다 기다리던 대리 기사가 오고, 원빈은 더웠는지 발그레 예쁘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쉽다는 듯 성찬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왜애? 같이 갈래? 집까지 데려다줄까?”

“…괜찮아요. 다음에 봐요, 형.”

원빈은 같이 아무렇게나 얼굴을 구겨가며 웃는 얼굴이 아닌, 약간 현실을 자각한 얼굴로 표정을 가다듬고 깍듯이 인사했다. 성찬은 그런 원빈의 태도가 좀 서운했다. 방금 전까지 울 정도로 같이 배 잡고 웃어놓고.

대리 기사는 능숙한 운전 솜씨로 성찬의 차를 여자친구의 오피스텔 주차장까지 가져다 놨고 성찬은 1층 편의점에서 여자친구가 사 오라고 한 아이스크림을 사 가면서도 계속 원빈을 생각했다.

“뭐야. 콘돔은?”

“아, 맞다.”

“뭐야. 그럼 나 안 해.”

“미안. 깜빡했어.”

어쩐지 굳이 다시 내려가서 사 오고 싶진 않아서, 성찬은 그냥 여자친구와 같이 아이스크림만 먹고 푸지게 잠만 잤다.

‘아, 원빈이도 아이스크림 먹이고 보낼걸.’

뒤늦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뒤로 성찬의 여자친구가 두어 번 바뀔 만큼의 시간이 지났지만 원빈과의 거리감은 정말 묘하게 지속되었다.

가깝다면 가까운데 묘하게 멀고. 보통 성찬과 그쯤 안 남자애들과는 뭔가 다른 거리감. 원빈만큼 몇 년 알고 지낸 소희, 찬영은 정말 편하게 대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원빈에게는 막대할 수 없는 어떤 게 있었다.

성찬은 인간관계에 대해 깊이 고찰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가끔 원빈에 대한 생각은 잘못 누른 팝업창처럼 툭툭, 뜬금없이 머릿 속에서 튀어나오곤 했다. 그게 ‘원빈이랑 나는 왜 그럴까?’가 아니라 ‘박원빈은 참 신기해.’라는 것에 그쳐서 문제였을 뿐.

그러다가 4학년이 되며 4학년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취업과 진로에 대한 고민의 파도가 들이닥치며 원빈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도 줄었다.

그때 원빈이 탈락락에 나갔다.


성찬은 원빈이 당연히 잘될 거라 생각했다.

원빈을 아는 사람들은 다 느끼는 것이겠지만, 박원빈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좋게 말하면 스타성이고 나쁘게 말하면 망신살, 도화살.

말하자면 박원빈은 길을 같이 걷다가도 혼자 넘어져서 바닥을 구르는데 그게 또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 에타에 박제되는 애였다. 근데 그게 좋은 쪽인.

학관 앞에서 넘어지다가 앞구르기 하신 분, 부끄러워하는 거 너무 귀여우시던데 몇 학번이세요? 여자친구 있으신가요? 매번 이런 식이었다.

혼자 가만히만 있어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 연예인을 해야지, 누가 해. 심지어 원빈은 엄청난 노력가였고 착하고 사랑스러웠다. 뭐 잘생긴 건 말해 뭐해.

성찬은 마지막 문자 투표 때 일가친척과 카톡 친구 600명에게 박원빈을 투표해달라고 톡을 돌렸다. 주기적으로 친구를 정리하지만 않았어도 1000명은 넘었을 텐데 아쉬웠다.

진짜 우승까지 가게 된 것은 놀라웠지만, 프로그램을 보면서 원빈 말고 우승할 사람은 없어 보이긴 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원빈아 우승 축하! 네가 많이 고민하고 노력한 거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정말 자랑스러워. 네가 원하는 목표 하나씩 다 이뤄가기를 바라고 우승은 네게 시작일 뿐이고 더 좋은 일만 가득할 거니까 건강이 우선인 거 알지? 아프면 안 된다! 우승 축하하고 화이팅!


성찬은 이 톡을 원빈의 인스타 라방을 보면서 보냈다.

원빈은 마지막 생방송이 끝나고 뒷풀이 장소로 이동하며 라방을 켰고 아직 우승의 감격과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로 쫑알쫑알 팬들에게 뭐라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성찬은 그런 원빈을 보며 기특해서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우는 건 너무 주책인 것 같아서 눈물을 말리기 위해 큰 눈을 꿈뻑꿈뻑거리다가 톡을 썼다. 당연히 나중에 보겠거니, 당장 읽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원빈은 그걸 바로 읽었다.

띵! 톡 알림음이 라방에까지 들렸고 원빈이 놀라서 화면을 두드리는 모습과, 톡을 읽는 듯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 방송에선 보여준 적 없는 얼굴로 작게 웃는 모습까지 모조리 찍혔다.

라방 실시간 댓글은 여자친구냐는 말이 도배되었고 원빈은 뒤늦게 댓글을 읽고 아니라고 했다.

“치, 친한 형이에요.”

성찬은 묘한 기분에 빠졌다. 분명 자신만 축하 메시지를 보냈을 리가 없는데, 왜 자신의 메시지만 알림음이 들린 것인지. 자신의 톡을 읽을 때 왜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인지. 자신을 친한 형이라고 했을 때 왜… 뭔가 불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던 것인지.

어쩐지 가슴 안쪽이 울렁거리고 뭐가 얹힌 것처럼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체했나?’

성찬은 그날 오랜만에 야외 러닝을 했다. 어렸을 때 육상을 했다는 원빈의 말이 생각나서, 그러고 보면 원빈과 같이 러닝한 적도 없다는 생각만 했다.


탈락락에서 우승한 원빈은 학교를 휴학했다. 너무 바쁘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어떻게 들어온 학교인데, 무조건 졸업은 할 거라고 의지를 불태웠지만 일단 물리적인 시간이 없다고 했다.

“소, 소속사가 너무 일을 잘해서…. 잡아 온 스케쥴이 너무 많아요.”

“그거 일 잘하는 거 맞아?”

“일을 많이 잡아오면 일 잘하는 거 맞지 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마, 맞긴 해요.”

휴학계 내러 온 김에 같이 밥이나 먹었는데, 평소에 자주 오던 김치찌개 집이건만 주변에서 흘끔거리고 장난이 아니었다. 사장님은 언제 오나 기다렸다고 사인을 받아서 바로 액자에 걸어버렸고, 원빈은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몰랐지만 같이 셀카 찍자고 하는 같은 학교 학생들과도 착실히 셀카를 찍어주었다.

“근데 카메라 마사지가 있긴 한가 보다. 원빈, 그새 더 잘생겨졌네? 피부도 좋아진 거 같고.”

“에이, 원빈이 피부는 원래 좋았지.”

쇼타로의 말에 성찬이 받자 은석이 오~ 소리를 내며 신기해했다-사실은 놀린 거지만-.

“너가 박원빈 피부를 알아?”

“왜 몰라. 나 원빈이한테 관심 많은데.”

그 말에 은석은 밥맛 떨어졌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내려놓는 시늉을 했다. 쇼타로는 오오오, 박수를 치며 웃었다.

“하긴. 나 성찬이 말해줘서 원빈이 천상중 나온 거 알았어. 천상중 박원빈.”

“네, 네? 성찬이 형이요?”

“어어. 은석이랑 어벤져스 본 것도 기억 못하면서. 웃겨, 그치?”

“아잇…. 그건 내가 그런 액션 영화를 잘 안 좋아해서 그런 거고.”

“천상중은?”

“몰라. 그냥 외워졌는데? 천상중 육상부 박원빈.”

“아, 육상했던 얘기할 때 한 거구나.”

원빈은 내내 갸우뚱거리다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래도 약간 납득이 안 가는 표정이긴 했다.

은석은 휴대폰을 보며 원빈에게 말했다.

“이소희랑 앤톤 수업 끝났대. 카페 가서 커피나 한잔하고 가라.”

카페로 가니 사람이 더욱 몰리는 바람에 아쉽게도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뒤에 수업이 없는 소희와 앤톤, 쇼타로는 원빈을 주차장까지 데려다준다고 함께 사라졌고 성찬은 아쉬움에 괜히 커피에 부글부글 바람이나 넣었다.

은석은 그런 성찬을 보다가 낮게 읊조렸다.

“너는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응?”

“…모르는 것도 죄라고 본다.”

“뭐가.”

“됐다.”

“아, 뭐가!”

터벅터벅 걸어가는 송은석에게 헤드락을 걸었다가 놔준 뒤 성찬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잡힐 듯 말 듯, 알 듯 말 듯 한 이 감각은, 언젠가부터 계속 성찬의 머리 한 켠을 차지하고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원빈을 생각할 때면 잠깐씩 기지개를 켜며 존재감을 드러냈다가 평상시에는 구석으로 숨어버렸다.

다만 요즘은 그 존재감이 커져서,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도 무심코 원빈을 생각하며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게 대체 뭘까 답답하고 궁금하면서도 알게 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에 조금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굳이 바뀔 필요가 있을까? 지금도 좋은데.

성찬은 현실에 안주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무의식적으로 더 깊이 파고들지 않으려고 했다.


박원빈이 성공한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어딜 가나 박원빈의 얼굴이 보이는 것은 퍽 곤란한 일이다.

성찬의 인스타 추천 탭에는 원빈이 도배되어 있고 유튜브 알고리즘조차 그랬다. 성찬이 탈락락 방영 당시 방송국 유튭 클립에 열심히 응원 댓글을 달며 좋아요를 누르고 다닌 덕이 컸다.

본인의 마음이 복잡한 것뿐이지 원빈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라서, 성찬은 추천에 뜨는 원빈이 출연한 유튭 예능이며 보이는 라디오 다시 보기, 라디오 스타 클립들을 열심히 봤다.

그러다가 살롱 드립 본편을 보고 그 다음주 평일에 뜬 비하인드 영상까지 보게 됐다.

그리고서야 마침내 이런 의문에 다다른다.

‘…혹시 원빈이가 말하는 사람, 난가?’


성찬과 원빈은 과가 다르지만 제대 후 둘이 대형 예술 교양 강의를 하나 맞춰서 들은 적이 있었다.

대형 예술 교양 강의였던 만큼 전시 다녀와서 보고서 쓰기, 전시 주제 관련으로 레포트 작성 및 발표를 하는 것으로 1학기가 끝나는 단순한 커리큘럼이었다.

성찬과 원빈은 다른 조였으나 수업은 같이 들었기 때문에 서로의 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원빈은 다행히 좋은 조원들을 만나서 적당한 역할만 해도 됐지만 성찬은 아니었다.

중간에 휴학하겠다고 강의를 드랍한 사람, 자기가 레포트를 쓸 테니까 전시 안 가겠다, ppt도 안 만들겠다고 조별 모임에서 다 빠지더니 결국 잠수탄 사람, 작년에 남친이 이 수업 들었다고 엉망진창 만든 ppt를 던져주고서는 제 할 일 다 했다고 손 털어버린 사람까지, 정말 최악의 빌런들을 모아놓은 듯한 조였다.

원빈은 그런 성찬을 걱정하며 그냥 들이받는 게 어떠냐고 했지만 성찬은 고개를 저었다.

“1학년 때 그래봤는데… 그냥 내 맘만 안 좋더라. 결국 다른 데서 또 만나게 되고,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도 내 맘속에 미안함이 남아서 찝찝하더라고. 그래서 그 뒤로는 내가 좀 더 고생해도 내 맘이 편한 쪽으로 하고 있어.”

성찬은 안타까워하는 원빈을 설득한 뒤 그냥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했다. 원빈과 시간을 맞춰서 중도에서 같이 과제를 하기도 해서 원빈이 오히려 같은 조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발표 날 ppt 마지막 장에서 이름 빼는 퍼포먼스야 뭐 할 것도 없었다. 요즘은 조별 과제 기여도를 산출하는 방식이 나름 공정하게 되어 있었다. 조장에게 보내진 중간보고 구글 폼에는 성찬 혼자 찍은 사진을 냈고 팀 리포트 역시 성찬의 이름으로 냈다. 잠수탄 사람에겐 쪽지 시험 일정을 알려주지 않았으니 쪽지 시험 망했을 거고, 그래도 ppt 포맷이라도 던져준 사람은 적당한 점수를 받았겠지.

하여튼 성찬은 자신의 기준 안에서 일들을 처리했다. 다른 사람들의 그러다 너 호구된다, 약게 굴어라 하는 조언 한 마디보다 내 마음이 편한 것이 더 중요했다.

‘꼭 내가 아닐 수도 있는데…….’

물론 원빈이 이야기한 사람이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 자의식 과잉일 수도.

그렇지만 이 조별 과제 이야기 말고도 다른 것도 있다.

성찬이 아직 발언권이 약하던 2학년 때 축제 준비 위원회에 차출되어서 생고생을 하고 있을 때 동아리 주점 위치로 싸움이 크게 났었다.

두 동아리 모두 졸업생 OB들이 후원을 해주며 꽤 규모 있게 진행하는 부스여서 양쪽 모두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동아리 회장의 성별이 달라서 남자 회장이 여자 회장을 무시하고 더 세게 지랄하는 바람에 그 태도 때문에 문제가 더 커진 것도 있었다.

성찬은 이리저리 다른 동아리의 양해를 구하여 겨우 타협점을 찾아 중재할 수 있었다. 하필 그 맞은편에 있던 동아리가 쇼타로가 속한 동아리여서, 원빈은 쇼타로에게 놀러 왔다가 성찬이 개고생하는 걸 다 보고서 위로주를 사주었다. 그러다가 축제 끝나고 같이 한강도 간 거고.

이때도 원빈에게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말에 내 맘 편하자고 이러는 거라는 말을.

‘그러고 보니 원빈이랑 은근히 접점이 많았네….’

이제 졸업이 가까워서 그런가, 새삼스럽게 학교에서 있던 일들을 떠올리게 된다.

학교를 다니며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좋은 추억들도 많이 쌓았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어렴풋한 이미지로만 머릿속에 남아있고, 유독 선명하게 남은 기억들에는 언제나 박원빈이 있다.

어쩌면 박원빈이 있었기에 선명하게 기억이 남은 것인 지도 모르지만… 성찬은 인과관계를 뒤집지 못한 채로 그저 유독 기억나는 일들에 원빈이 있다고만 생각했다.

다만 반대는…….

‘나는 그런데, 원빈이도 그렇게 생각하려나.’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모르겠다.

딱히 자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성찬이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특별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서. 그런데 박원빈은 되게 특별하잖아. 신입생 때 원빈은 ‘그 사람’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너 그 사람 알아? 아, 그 사람?하면 박원빈이었다.

그래서 성찬은 긴가민가했다. 내가 박원빈에게 특별한 사람일까?

‘진짜 박원빈이 나를 좋아한다고?’

일단 드는 생각은… 난 남잔데? 라는 생각.

근데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패스했다. 정성찬 보고 누가 남자인 걸 모르겠냐고.

그렇지만 만약, 박원빈에게 성별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요소라면, 만약 정말 박원빈이 나를 좋아한다면.

‘그러면 나는…….’

성찬의 흰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너무 어려웠다. 어려운 문제다. 한 번도 내가 풀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난제.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평생 생각해본 적도 없는 난제를 맞닥뜨렸는데도 머릿속이 하얘지기는커녕 가슴 속 어딘가에서 명쾌한 깨달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숨겨져 있던 문이 열린 것처럼, 마음속에 새로운 방이 열렸다. 그리고 그 방 너머에 있던 새로운 세계가 성찬에게 쏟아졌다.

아, 이거였구나.

매번… 매번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그 묘한 감각의 정답이, 바로 이거였구나.

어쩐지 더 깊이 알고 싶지 않고,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숨고 싶었던 마음이 바로 이것이었다.

성찬은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온몸이 심장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자신에게 이런 마음이 숨어 있는 것을 모른 채로 태연히 지내왔을까 싶으면서도, 이 마음을 자각했더라면 절대로 그애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자신을 알았다.

그래서 더 원빈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너는 어떻게…….’

성찬은 참을 수가 없었다. 몰랐다면 모를까, 이제 알게 됐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성찬은 일단 원빈에게 전화를 걸며 겉옷부터 찾았다. 촬영 중일까? 촬영 중이라면 근처로 갈 테니까 5분만이라도 만나달라고 빌고 싶었다. 몇 시간을 기다려도 좋으니 잠깐 얼굴 보고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몇 번 신호음이 가고, 전화가 연결되었다.

-성찬이 형? 갑자기 전화했네. 무슨 일 있어요?

“원빈아, 그게…….”

순간 성찬은 목구멍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유튜브를 봤는데, 혹시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인 것 같던데 그게 맞느냐고?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원빈의 사이에 있던 그 묘한 기류가 그것 때문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원빈의 목소리를 들으니 자신감이 물에 빠트린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버렸다.

어버버거리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원빈이 심각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형?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충동적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만약 아니라면 원빈의 입장에선 얼마나 황당할까. 갑자기 대뜸 친한 형이 3년간 좋아한 사람이 나냐고 전화를 하면.

‘이렇게 물어보면 안 돼.’

그래서 성찬은 하려던 말을 바꾸기로 했다. 사실, 생각해보니 원빈이 좋아하는 상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바로 이것.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는데, 혹시 얼굴 보면서 얘기할 수 있을까 싶어서. 촬영 중이야? 어디서 해? 내가 근처 가서 기다릴게.”

정성찬이 박원빈을 좋아한다는 것.

이걸 깨달은 게 중요했다. 박원빈이 정성찬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상관없이 정성찬은 박원빈을 좋아한다. 성찬은 이 사실을 원빈에게 말하고 싶었다.

-…….

휴대폰 너머의 정적이 길어지자 성찬은 안절부절못했다. 뭔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고 냅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으니까 만나자고 질러버리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웃기긴 했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백이 다 있지.

성찬은 얼른 누덕누덕 변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네 입장에서는 별로 듣고 싶은 얘기는 아닐 수 있겠다……. 그래도 혹시―.”

-어떻게 알게 됐어요?

“어?”

-날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면서요. 어쩌다 깨달았는데요?

“어, 그게…….”

말하려고 하니 민망했다. 사실 내가 너 나오는 프로그램을 다 챙겨보고 있었는데, 살롱 드립 비하인드를 봤거든? 거기서 니가 말하는 사람이 나 같아서…….

‘이거 완전 자의식 과잉 왕자병 같은데.’

성찬이 머뭇거리며 말을 못 하자 원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찬은 저도 모르게 쫄아붙어서 손을 앞으로 모았다.

-하아…….

“미, 미안.”

-미안할 건 아니고. 지금 집이에요? 이따가 내가 근처로 가면 나올 수 있어요?

“내가 가도 되는데.”

-여기 지금 강원도라서요.

“우, 우웅. 그럼 기다릴게.”

-네. 늦게 끝날 거 같진 않은데… 출발할 때 톡할게요.

“응. 이따 봐.”

-주, 준비 잘해놔요.

“응?”

-아까 내가 물어본 거. 준비 잘해놓으라고. 나 그거 들으러 가는 거니까.

뚝.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성찬은 멍하니 통화가 끊어진 화면을 보다가,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의 망상 같았던 이야기가 사실일 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이 샘솟는 걸 느꼈다.

어쩌다 좋아하는 마음을 깨달았는지, 그걸 들으러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오겠다니. 그 말만으로도 성찬은 원빈의 대답을 반쯤 들은 기분이었다.

‘역시, 박원빈이 3년간 좋아한 사람이 내가 맞는 것 같지…?’


*


그걸 이제야 알았냐, 등신아?

성찬이 나머지 4명에게 물었다면 이런 비난의 말과 한심하단 눈빛을 받았겠지만, 다행히 성찬은 좋아하는 사람과의 일을 바로 친한 친구에게 말하는 타입의 남자가 아니었다. 사실 그런 타입의 남자였기에 이 삽질이 3년이 넘게 지속된 것이기도 했다.

정성찬이 박원빈을 볼 때마다 묘하게 가슴이 울렁거린다, 박원빈이랑 있을 때는 뭔가 긴장된다, 다른 애들이랑은 다르다, 이런 얘기를 털어 놓았더라면 진작 어떻게든 이어줬을 텐데.

하여튼 성찬은 갑자기 옷장을 들어 엎고서 원빈과 만날 때 입을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거저거 입었다가 벗었다가 하니까 땀도 나고, 머리를 만져보다가 좀 떡 진 것 같아서 샤워도 두 번이나 더 했다. 샤워하는 중에 원빈의 연락이 올까 봐 방수 기능을 믿으며 휴대폰을 샤워부스 안으로 들고 들어가기까지 했다.

깜빡 휴대폰을 샤워부스 안에 놓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다가 욕실에서 지이잉, 울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뛰어들어가다가 문에 쾅! 무릎을 박기도 했다.

코디는 엄청나게 고민했지만 기억을 더듬어 예전에 원빈이 “혀, 형 진짜 멋있네요….”라고 말해주었던 착장을 떠올린 뒤 그 코디와 비슷하게 입었다. 안타깝게도 그때 입었던 코트를 버려서 비슷한 다른 코트밖에 없었다.

검은 목폴라에 쥐색 롱코트를 입고 다리를 달달달 떨면서 기다리는데, 원빈의 연락이 왔다.


[내려와요]


자취방 빼지 말걸. 막 학기라고 일찍 자취방을 빼고 본가에서 통학 중이었는데 이럴 거면 괜히 뺐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빈이가 강원도 다녀와서 피곤할 텐데, 집에서 좀 쉬다가 가면 좋을 텐데.

성찬은 부모님께 대충 둘러대고-부모님은 이미 성찬이 샤워 몇 번씩하고 염병 떨 때부터 알았지만- 차를 몰고 아파트 정문 앞으로 나갔다. 옆 도로에 누가 봐도 연예인이 탈 것처럼 시커멓게 태닝된 승합차가 세워져 있었다. 성찬이 그 뒤로 차를 대고 원빈에게 연락하려 하자 승합차에서 문이 열리고 후드를 푹 뒤집어 쓴 마른 실루엣이 나왔다.

성찬이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원빈이 먼저 차 창문을 두드렸다. 성찬은 몸을 뻗어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풀썩, 원빈이 차에 타서 후드를 벗었다. 씻고 왔는지 청량한 샴푸 냄새와 끝이 달콤한 바디워시 냄새가 났다. 유튜브 화면으로 보던 잘 정돈되었지만 약간은 낯선 얼굴이 아니라 말랑말랑 정성찬이 좋아하는 말간 민낯이었고.

“……뭐, 뭘 그렇게 봐요.”

원빈은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성찬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서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성찬은 허둥거리며 원빈의 후드를 벗기려다가, 억지로 벗기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서 손을 떼느라고 그냥 원빈의 후드를 살짝 쓰다듬은 사람이 됐다.

“아니, 그냥. 맨날 유튜브로만 보다가 실물 보니까 신기해서….”

“뭐, 뭘 맨날 봐….”

“진짜야. 맨날 너 나오는 유튜브만 봤는데.”

“거짓말.”

“진짜라니까? 나 댓글도 달아. 좋아요도 누르고. 너가 좋댓구알해달라고 하면 구독도 다 했어.”

성찬은 바로 유튜브를 켜서 화면을 보여주었다. 딱히 구독탭을 들어가지 않아도 알고리즘이 원빈으로 가득했다. 원빈은 아직 미디어 속 제 모습이 낯설고 민망해서 성찬의 손을 밀어냈다.

“아, 알겠으니까 보여주지 마요.”

“진짠데….”

입술을 삐죽이며 휴대폰을 거둬가던 성찬을 흘깃거리던 원빈은 작게 한숨을 쉬고 물었다.

“어디 다녀왔어요?”

“응?”

“그냥 옷이… 야, 약속 있었나 해서.”

밤 11시에 집에서 나왔다기엔 과한 모양새였다. 코트야 그렇다 쳐도 얼마 전에 씻은 것 같은 물기 어린 피부도 그렇고, 뿌린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향수 냄새도 그렇고.

성찬은 사슴처럼 큰 눈을 꿈뻑거리다가 대답했다.

“너… 만나려고 입었지? 이렇게 입은 거, 너가 전에 멋있다고 했으니까.”

“내가요?”

“예전에. 너 스무 살 때.”

“아아.”

박원빈은 자신의 스무 살을 떠올렸다.

서울 상경으로 잔뜩 들뜨고 잔뜩 긴장한 주제에 티내지 않으려고 한껏 가시를 세우고 다니던 어설프고 부끄러웠던 시절.

그때 며칠간 고민하다가 겨우 용기 내서 나갔던 댄스 원데이 클래스가 자신과 성찬을 만나게 해주었다.

당시 원빈이 보기에 성찬은 그야말로 완벽한 서울 도련님이었다. 모든 것이 제 것처럼 익숙해 보이는 너무너무 멋진 형. 차마 반했다고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동경하게 됐던 형.

사실 3년간 좋아했다는 것도 부끄러워서 줄인 거였다. 첫눈에 반한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아마 그때 자신은 성찬이 뭘 입든 다 멋있다고 했었을 텐데, 성찬이 새삼스럽게 자신이 멋있다고 했던 걸 기억하는 게 신기했다.

‘진짜 나 좋아하나…….’

아직도 믿기지는 않았다.

사실 전화로 성찬의 고백을 들은 원빈은, 이 형이 날 놀리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는데, 혹시 얼굴 보면서 얘기할 수 있을까 싶어서.-


이게 뭔 소리야. 이게 대체 뭔 소리냐고.

원빈은 정말 정성찬의 멱살을 잡고 묻고 싶은 기분이었다.

짝사랑이라는 건 참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처음엔 분명히 혼자 좋아하는 것, 그것뿐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상대방에게 내 감정을 떠맡기고 싶고, 네가 다 책임지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특히나 정성찬이라는 남자는 짝사랑을 하기엔 너무너무너무 나쁜 남자다.

애초에 남남이면 모를까, 한 무리로 엮여 그의 어설프고 특별한 애정을 받고 있으면…….

‘혹시 성찬이 형도 날 좋아하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정성찬은 쇼타로나 송은석, 이소희와 앤톤에게 주는 것과는 다른 방식의 애정과 배려를 박원빈에게 건넸다.

어딘가 간질거리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애정과, 이상할 정도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믿음을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뒤섞어서 건넸다.

정성찬의 시선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박원빈은 정성찬이 자신을 굉장히 특별한 사람으로 대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고, 그만큼 자신을 조심스럽고 약간 거리감 있게 대하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심장을 구둣발로 밟힌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성찬의 태도는 종잡을 수 없었다. 어떨 때는 친한 동생 대하듯 원빈을 놀리다가 어떨 때는 낯선 이성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굴었다. 평소에는 모두에게 약간 거리감을 두나 싶을 정도로 무심하고 완벽을 추구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형이었다.

나를 의식하나? 라고 생각하면 편하게 굴고, 내가 편한가? 라고 생각하면 거리를 벌렸다. 지칠 때쯤엔 반할 수밖에 없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제 마음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정말 정신병에 거리는 줄 알았을 때 정성찬의 입대 소식을 들었다. 원빈은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정성찬을 욕하면서 그딴 새끼 얼굴도 안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밤톨처럼 머리 빡빡 깎은 허연 낯짝을 보니까 눈물부터 나올 뻔했다.

그래서 박원빈도 입대했다.

군대 가서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니까 정성찬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삐쩍 곯아 뼈말라되어가던 몸이 제법 그럴듯해졌다.

역시 몸이 바쁘면 정신병도 안 걸리는 게 맞나 보다. 요즘 현대인들은 직장 때문에 정신병 걸려서 약 먹어가며 회사 다닌다는데, 고작 사랑 때문에 정신병 걸리기엔 너무 아깝지.

박원빈은 구경하러 다니던 쇼타로네 댄스 동아리의 명예 부원이 되어 남는 시간의 반은 춤추고 반은 기타 치고 작곡했다. 이소희랑 앤톤 네 과에서 세션 필요하다고 하면 가서 쳐주고 기프티콘이랑 학식 쿠폰을 왕창 받았다.

그렇게 녹음한 거 싸클에 올리고 춤춘 거 틱톡이랑 인스타에 올리고, 예의상 과 공부 좀 하다 보면 하루가 뚝딱 사라졌다. 

“박원빈!”

그래도 자신을 부르면서 사르르 웃는 정성찬 하나면 그 모든 노력은 물거품처럼 사라져서.

속절없이 심장이 뛰는 바람에, 박원빈은 그냥 짝사랑에 허우적거리면서 갓생 사는 미친 갓반인이 되었다.


“그 사람이 연락했다고? 너 유명해져서 받아주려는 거 아니야?”

촬영 중에 웬 전화 한 통 받더니 너갱이가 나가버린 원빈을 다독이다가 전말을 알게 된 매니저는 원빈에게 이런 말을 했다.

원빈은 한숨을 푹 쉬었다.

“차,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다.”

“뭐? 야, 원빈아. 너 그런 거 조심해야 돼. 너 혹시 선물 퍼주고 그랬냐? 너 그래도 아직 어리니까 돈 좀 모아야 돼. 요즘 번 돈 대충 얼만 줄은 알지?”

“몰라…. 근데 유명해져서 받아준 거면… 그냥 내가 더 일해서 더 유명해지면 되는 거잖아.”

“얘가 미쳤나 봐, 진짜.”

매니저는 혀를 차며 원빈이 알려준 인스타그램 아이디 비번을 치고 들어가 비밀번호부터 바꿨다. 얘 이러다 연애 때문에 sns에 이상한 거 올릴까 봐 걱정됐다.


강원도 촬영은 지역 시장을 방문하고 특색 있는 먹거리를 맛있게 먹어서 홍보하자는 공익성 촬영이라서 머리를 쓰고 그럴 게 없었다. 원빈은 열심히 웃어가며 대게 다리에서 살을 발라 먹고, 껍데기의 내장 볶음밥을 먹은 뒤 다른 가게로 넘어가 사장님이 쭉쭉 짜주시는 간장게장을 작은 입을 한껏 벌려가며 오물오물 열심히 먹었다. 매니저는 옆에서 소화제와 위장 보호겔을 들고 있다가 컷 소리가 끝나면 바로 먹였다. 오늘 먹은 양이면 원빈은 아마 내일까지 밥을 안 먹어도 문제없을 거였다.

원빈은 촬영 중간중간 복잡한 얼굴로 휴대폰을 보다가 집에 갈 때 영 다른 주소를 댔다.

“여기가 어딘데?”

“…….”

“너 걔 만나러 가? 걔 괜찮은 애 맞지?”

“…걔, 걔, 하지 마. 나보다 형이야….”

“어? 알겠… 뭐? 형????”

“어. 한 살 형.”

“어, 어어어…….”

매니저는 그제야 어딘가 미심쩍던 퍼즐이 딱 맞춰지는 기분을 느꼈다. 맡은 지 몇 개월 안 된 자신도 이렇게 원빈을 친동생처럼 아끼게 되었는데 몇 년을 알고 지냈다는 여자가 원빈의 애정을 모른 척하는 게 말이 안 됐다.

‘남자면 말이 되지.’

그러면 모른 척한 게 아니라 진짜 모른 걸 수도 있었다. 원빈은 또래 남자애들치고는 생활 애교가 있고 귀여운데다가 손이 가는 스타일이어서 이런 원빈에게 익숙해 지면 저도 모르게 아빠처럼 챙겨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매니저는 언제 놀랐냐는 듯 아까와는 다른 걱정을 했다.

“이상한 놈 아니지? 건실한 놈 맞지?”

“그, 그런 놈이면 몇 년 안 좋아했지….”

“짝사랑이 니 맘대로 되면 그게 짝사랑이야?”

“…….”

논리적인 매니저의 말에 제대로 공격당한 원빈은 고개를 돌리고 귀에 헤드폰을 써버렸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데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정성찬이 나를 좋아해? 진짜?’

계속 그 생각만 했다. 믿지 못하겠으면 믿지 않으면 되지. 계속 생각한다는 건 결국 믿고 싶다는 뜻이었다.

제발 정성찬이 날 좋아했으면.

내내 이 생각만 했다가, 그 바램을 구깃구깃 접어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다시 쓰레기통을 뒤져 그 바램을 다시 꺼내서 소중히 끌어안다가 울고. 그러다가 또 정성찬이 불러주면 웃으며 뛰어나가고.

이제는 그나마 좀 괜찮아졌는데. 속으로 끙끙 앓던 이야기들을 남들에게 얘기도 하고 풀어내니까 좀 무겁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아서, 이젠 정말 그 형과 편한 형 동생 사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대했었는데.

이 공든 탑을 정성찬의 한 마디가 와르르 무너트렸다.

너무 밉고, 좋았다. 그래서 너무너무 미웠다.


원빈은 운전석에 바짝 긴장한 채로 앉아 있는 성찬을 훑어보다가 그의 하얀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았다. 볼도 좀 붉고.

‘근데 그게 뭐.’

정성찬은 지금껏 이런 몸짓 언어로 박원빈을 뒤흔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성찬은 이렇게 제 앞에서 소녀처럼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하다가도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분히 기다렸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별거 아닌 말과 행동에 하나하나 의미 부여하지 말고, 정성찬이 말하는 것만 믿자고.

일부러 담담한 마음을 가지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착각이었다고, 미안하다고 하면… 어쩌지?’

짝사랑은 착각과 망상, 그 후의 추락까지를 한 세트로 뇌에 강매한다. 박원빈은 이 세트 구성을 얼마나 많이 샀던지, 뇌와 심장이 거지 지갑처럼 너덜너덜 파산 직전까지 왔다.

‘그리고 진짜 좋아하는 게 맞아도… 사귀고 싶은 마음이랑은 또 다르잖아.’

울산에서 자신이 무성애자인 줄 알고 살아오던 박원빈은 정성찬을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게이인 걸 알았다.

정체성을 파악한 뒤 자신과 같은 케이스를 찾기 위해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글을 읽은 결과, 박원빈은 대한민국이 딱히 진보되지 않았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아직도 한국에선 남자가 같은 남자에게 고백하려면 주먹질을 각오해야 한다. 정말 운 좋게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해 주는 기적이 생겨도, 그 사람이 안락한 헤테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내 손을 잡아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스타렉스 타고 강원도에서 서울을 올 때만 해도 그저 정성찬의 말이 진짜였을까, 그것에만 매몰됐던 박원빈이지만 지금 생생하게 움직이는 정성찬을 보고 있으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점점 어둡게 가라앉는 원빈의 눈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성찬이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제 깨달음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너는 좀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이상하게 특별했어. 절대로 싫은 건 아닌데, 어쩐지 편하게 대하기가 힘들어서…. 가끔은 조금 피한 적도 있고, 가끔은 과하게 다가간 적도 있는 것 같아. 근데 그걸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왜 그런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거든.”

“…….”

“아마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나 봐. 내가 왜 그런지 알게 되면… 내 세상이 변할 테니까.”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이면서 성찬은 조심히 말을 이어갔다.

“아까 내가 널 좋아하는 걸 어떻게 깨닫게 됐냐고 물어봤잖아. 그거 들으러 오는 거라고. 좀 바보 같은 이야기인데, 네가 살롱 드립에서 한 얘기 덕분에 알았어. 네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데 ‘혹시 난가?’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좀 웃기지?”

“하나도 안 웃겨요.”

“아, 미안.”

바로 정색하고 나온 대답에 성찬은 머쓱해 하다가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엔 나라고 생각했다가, 다른 생각이 또 드는 거야. 사실 내가 아닌데, 그냥 나였으면 좋겠으니까 끼워 맞춰서 생각하는 거 아닌가? 근데 아무 감정 없는 상대한테 그런 생각할 리가 없잖아.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이기를 바라고, 혹시 정말 나는 아닌지 너한테 물어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거든.”

“…….”

“그리고 믿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사실 내가 너를 오래전부터 좋아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네가 언제나 어렵고… 근데 멀어지는 건 싫고… 너무 가까워지면 무서웠거든. 네가 생각하는 멋진 형이 아닌 걸 들키는 게 무서웠어.”

“…하.”

원빈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싸늘하기까지 한 웃음의 온도에 성찬은 조금 움츠러들었다. 면접 스터디에서 스터디원들이 아무리 싸늘한 면접관 흉내를 내도 움츠러들지 않았던 정성찬은 박원빈의 코웃음 하나에도 작아졌다.

박원빈은 성찬이 집 냉장고에서 빼온 음료수와 생수병 중 생수를 골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300ml짜리 생수병이 그대로 빈 통이 되어 원빈의 남자다운 손안에서 우그럭, 찌그러졌다. 성찬은 어쩐지 찌그러지는 생수병이 제 모습인 것만 같았다.

“……형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응….”

“나는 형이 멋있어서 좋아한 게 아니에요.”

“…그럼?”

“형이 바보처럼 축구 영상만 보다가 벽에 머리 박고, 돼지처럼 마파두부 왜 안 시켰냐고 막 콧구멍 커지고, 철딱서니 없이 릴스 찍다가 젠틀 몬스터 선글라스 막 날려서 부숴 먹는 걸 다 봐도.”

“…….”

성찬은 차라리 욕을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원빈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래도… 형이 마냥 귀엽고… 좋아요. 더 알고 싶고, 내 앞에서만 바보같이 굴면 좋겠어요. 내가 형의 모르는 모습이 없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렇게 형을 좋아해요…….”

원빈은 그렇게 말하며 새삼 제 짝사랑이 제법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각 없는 정성찬을 박원빈을 정신병 걸리기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동시에 자각 없는 정성찬은 자각 없이 박원빈을 좋아해서. 그래서 박원빈은 정성찬의 닫힌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애정을 받으며 버틸 수 있었던 거다.

이 문 너머에 자신만을 바라보는 태양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고작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만으로도, 그 애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으니까.

성찬은 원빈이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하자 절절매며 원빈을 어설프게 끌어안으며 보듬었다.

“미안, 미안해. 원빈아, 형이 잘못했어. 응? 형이 바보야. 내가 더 빨리 알았어야 했는데…….”

“흐윽…. 흑! 흡!”

“좋아해. 원빈아, 너무 좋아해. 울지 마. 응? 내가 더 많이 좋아해. 진짜야.”

추한 소리를 낼까 봐 원빈이 이를 악물고 끅끅거리며 울자 성찬은 제가 더 아픈 표정으로 눈물을 꾹 참았다. 긴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여자 주인공처럼 청순하고 가련한 모양새가 되었다.

원빈은 그런 성찬을 보니 제 마음이 더 아픈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려 애를 썼다. 그랬더니 성찬이 기겁하며 더 달라붙어 왔다.

“왜 피해. 피하지 마. 응? 내가 잘못했어…. 원빈아, 용서해줘. 좋아해…….”

“흐윽…. 윽.”

왜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데 눈물이 나는 걸까.

원빈은 성찬의 품에서 한참을 울다가, 성찬의 눈물이 제 머리칼을 축축하게 적시는 것을 깨닫고 만족감을 느꼈다.




*Epilogue*


[“삔덕 덕분입니다!” 탈락락 우승 박원빈, 자작곡으로 공중파 3관왕까지.]



가수이자 원맨 밴드의 밴드맨 박원빈이 지상파 음악방송에서 삼관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박원빈은 KSB에서 방영된 ‘탈락도 락이다’ 밴드맨 서바이벌에서 우승한 뒤 4개월 만에 낸 미니 1집 ‘겟 어 기타(Get A Guitar)’의 타이틀곡이자 자작곡 ‘겟 어 기타’로 지상파 음악방송 3관왕을 차지했다.


이날 박원빈은 자신이 음악을 하게 된 계기와 다짐을 담은 타이틀곡인 ‘겟 어 기타’와 앨범 수록곡 ‘바보 같아’의 무대를 선보였다.


이날 박원빈은 3관왕의 소감으로 “이게 다 항상 응원해주는 삔덕(박원빈 팬들을 일컫는 이름) 덕분”이라고 팬들과 관계자들에게 감사함을 전한 뒤 완벽한 라이브를 선보였다.


미니 1집 ‘겟 어 기타(Get A Guitar)’는 타이틀 곡 ‘겟 어 기타(Get A Guitar)’와 ‘메모리즈(Memories)’, ‘바보 같아’ 총 3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박원빈이 작사·작곡에 참여했다.


이전 음악방송에서는 ‘겟 어 기타’와 함께 ‘메모리즈’의 무대를 선보였으나 오늘 무대에선 처음으로 ‘바보 같아’ 무대를 공개하여 팬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


“그런데 원빈아.”

“응?”

“생각해 봤는데, ‘바보 같아’는 무대 안 하면 안 돼?”

“어? 왜?”

“내 노래잖아. 내 노래 왜 팬들한테 불러줘.”

“아이… 그래도 콘서튼데 해야지.”

“치….”

“혀, 형 버전 따로 있자너. 그게 진짜 형 거다. 형 외엔 아무한테 안 들려준 진짜.”

“……치, 봐줬다.”

“헤헤, 고맙다.”

“나랑 헤어지고도 부르면 고소할 거야, 진짜.”

“아, 정성찬. 왜 헤어진다는 얘기를 그렇게 쉽게 하는데?”

“못 헤어지게 하려고 그러는 건데? 너 고소 당하는 거 무섭지? 나랑 절대 헤어질 생각하지 마.”

“차, 참나. 형이야말로 나랑 헤어질 생각하지 마라. 나랑 헤어지면 환승연애 나가자고 할 거다.”

“뭐? 너 사랑했던 사람한테 어떻게 환승연애 나가자는 소릴 하냐며. 거짓말이었어?”

“헤헤헤. 웅.”

“야, 박원빈!”

“정성찬 바보.”

“니가 더 바보야.”

“내가 왜 바보야. 니가 바보야.”

“니가 더 바보라니까?”

불경하게도 운전석 뒤에서 염병 천병을 떠는 커플의 소음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며, 매니저는 동태눈으로 인천 공항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15분. 15분만 있으면 이 커플을 공항에 떨궈주고 자유의 몸이 된다.

‘콘서트 준비 전에 좀 쉬다 오는 게 좋긴 하겠지.’

매니저는 룸미러를 통해 원빈의 얼굴을 살폈다. 헤헤헤, 광대가 봉긋하게 올라와서 빵실빵실 웃는 게 애기처럼 순하고 귀여웠다.

어쨌거나 짝사랑할 때보다야 얼굴이 훨씬 폈지 않은가. 담당 아티스트가 행복해야 담당 매니저도 웃는 날이 더 많은 것이다.

매니저는 공항에 도착해서 두 사람의 캐리어를 내려주며 잘 다녀오고 sns 실수하면 가만 안 둘 거라고 신신당부했다.

“거, 걱정 마라. 잘 다녀오께.”

“감사합니다. 원빈이 없는 동안 푹 쉬세요.”

‘원빈이 없다고 내가 쉬나.’

물론 좀 편해지는 건 맞지만 대신 회사에 출근을 해야 했기에 매니저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서 두 사람을 배웅했다.

‘첫 여행이랬지? 엄청 싸우겠군. 헤어지지나 마라.’

삼 일 뒤, 매니저는 갑자기 업로드 알림이 뜬 원빈의 사운드 클라우드를 누르고 그대로 정지한다.

-Honestly-

간단한 기타 코드에 멜로디만 부른 노래지만 이건 팔린다!는 느낌이 빡 왔다. 이거 다듬어서 콘서트 때 서프라이즈로 공개하고 음원 내면 되겠다. 머리로 착착 계획이 세워졌지만 동시에….

‘근데… 애인이랑 첫 여행 간 애가 이 가사가 맞아?’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 없어 난

내 우선순위 속 넌 없어 더 이상

Honestly all I need is me

난 너 없이 더 자유로워 Free

Honestly I know you didn't see

Now I can be what I just wanna be…….


‘왜, 왜 이러는 거야…….’

어차피 금방 화해할 것 같은데, 음악하는 놈들이 다 도라이라는 건 익히 격어왔지만 요즘 애들다운 너무 빠른 행보에 조금 버거워진 매니저였다.





+++++


장자(莊子)가 혜자(惠子)와 함께 호수의 돌다리 위에서 노닐고 있었는데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나와서 한가로이 놀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물고기의 즐거움일세.”

혜자가 말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겠는가?”

장자가 말했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지 알 수 있겠는가?”

[출처] 장자(외편) 秋水(추수) 물고기의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