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고양이
by. 묭
박원빈과 사귄 지 두 달이 되던 무렵, 정성찬은 미처 알지 못 했던 박원빈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된다.
그니까 박원빈은,
"진짜 제발 원빈아....."
"........"
"형 그만 괴롭히고 밥 좀 먹어....."
"먀옹."
고양이다.
그것도 사춘기가 제대로 온.
사춘기 고양이
누군 첫 만남이 제일 어렵다던데, 정성찬은 박원빈과의 시작이 세상 제일 쉬웠다. 11월, 바람이 미쳐 날뛰기 시작하던 늦가을 밤이었다. 다들 옆구리 허전하다고 징징대던 그 계절. 동기 새끼들 모솔 탈출 기념으로 소주를 밤 열한 시까지 빨아댔고 결과는 인사불성의 귀갓길이었다. 애새끼들 개노잼 연애 썰 듣느라 혼자서 소주 두 병을 클리어했더니 시야가 개판이었다. 대가리는 깨질 것 같고, 너갱이는 좆대로 출타하고. 이러다 내장이 반쯤 타겠다는 생각에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라도 하나 사야겠다고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박원빈을 처음 봤다. 처음엔 그냥 취객인 줄 알았다. 편의점 노상 벤치에 얌전히 앉아 있었는데, 테이블엔 아무것도 없고 앞발만 가지런히 모은 채 허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인생에 회의라도 온 사람 같았다. 숙취해소제 사고 나왔을 때도 그대로였다. 발소리에 고개만 홱 돌려 정성찬을 한 번 흘겨보더니 금세 다시 눈을 돌렸다. 원래라면 당연히 무시하고 지나쳤을 거다. 하지만 그때 정성찬은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갑분 외향인 모드가 켜져 쓸데없는 인싸력을 발휘해 냅다 박원빈 앞에 앉아버렸다.
여기서 뭐 해요.
......
왜 혼자 있어요?
갈 데가 없어.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세상이 아무리 선진국 타령을 해도 이 나라는 인구의 팔할이 아직 유교의 혼으로 살아가는 나라다. 초면에 반말부터 까는 인간? 흔치 않다. 개념 어디다 두고 왔나 싶지. 근데 그땐 이상하게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술에 취한 탓인지. 생긴 건 분명 본인보다 어려 보이는데, 면전에 대고 싸가지 없게 굴어도 그냥 ‘헐 왜 갈 데가 없어?’ 하고 공감부터 박았다.
그리고 웃기게도, 그 자조적인 공감 한 방에 박원빈은 경계를 풀었다. 새초롬하게 올려보던 눈엔 힘이 스르르 빠지고, 느릿하게 깜빡이는 속눈썹 사이로 정성찬을 가만히 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나 데려가.
그게 뭔 소린가 싶었다. 데려가라니, 어딜? 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 하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이번엔 정성찬 손등 위에 제 손을 포개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 배고파. 이틀 굶었어.
살아생전 할머니가 그랬다. 돈 달라는 사람은 무시해도 밥 달라는 사람은 잔말 말고 밥 줘라.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처음 보는 사람한테 저렇게 나오나 싶었다. 하긴 나는 한 끼만 굶어도 힘들던데ㅜ. 평소 불굴의 엣팁남으로써 공감 능력도 사회성도 없는 인간이 술만 들어가면 괜히 감성 과다 모드로 전환돼서. 결국 그날 정성찬은 처음 본 그 요상한 박원빈을 제집으로 데려와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제야 술이 깬 정성찬은 눈앞에 낯선 인간 하나 누워 있는 거 보고 김빠진 비명부터 질렀다.
누구세요?
그랬더니 박원빈이 뚱한 얼굴로 이불만 턱 치켜올리며 대꾸했다.
너가 데려왔잖아.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씨발 맞다. 내가 주워 왔지. 편의점 앞에서 술에 취해 배고프다던 인간 하나 덜컥 데려온 기억은 어렴풋이 있었는데, 진짜로 같이 자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근데 걔가 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냉장고 문을 떡 열더니, 정성찬을 집사 취급할 줄은 더더욱 몰랐고.
배고파. 밥 줘.
그 말투가 너무 태연해서 어이가 개털렸다. 저도 모르게 밥솥에 밥 먼저 올릴 정도로.
원래는 적당히 달래서 내쫓을 생각이었다. 술김에 데려온 거니까 밥 한 끼만 먹이고 보내자, 그게 다였다. 혹시라도 부모님도 안 계시는 미성년자면 좆되니까 나이부터 물었다. 다행히 스무 살. 성인 맞았다. 그제야 숨 좀 돌리고 밥 퍼주면서 이것저것 캐물었다.
이름은 박원빈. 나이는 스무 살이고 고향은 울산. 혼자 서울 올라왔다가 지금은 갈 데가 없단다. 그게 뭔 소린가 했더니 전세사기 당했다 그랬다. 요즘에도 그런 게 있나 싶어 헐— 하고 감탄사만 새어 나왔다. 근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제 진짜 좆됐다. 이쯤 되면 대놓고 내쫓기도 애매해진다. 면전에 대고 그래? 전세사기를 당했구나ㅡ. 내가 당한 거 아니니까 이만 나가줄래? 라고 할 사람이 대체 어딨겠는가. 원래 정성찬 성격 같았음 그랬겠지만, 박원빈 얼굴이 문제였다. 애가 일단 존나 말랐잖아. 함부로 대하지도 못 하게.
따로 갈 덴 없어?
없어.
그럼 어쩔 생각인데?
? 여기 있을 거야. 너가 데려왔잖아.
당연지사 쫓아내는 건 실패로 돌아갔다. 이미 눌어붙기로 각 잡은 애를 무슨 수로 내보내겠는가. 게다가 생각해보면, 빈방도 많았다. 굳이 사람 하나 들인다고 불편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말했다시피 박원빈 생긴 게 문제였다. 저 얼굴로 밖에 내놨다간 금세 이상한 놈들한테 낚일 게 뻔했다. 호빠든 뭐든, 밥만 준다 그러면 박원빈 성격상 그냥 좋다고 따라갈걸. 그 꼴은 이상하게 보기 싫었다. 그냥 도의적인 양심? 어쨌든 그렇게 둘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 거다.
박원빈은 가끔가다 좀 이상한 모션을 취하긴 해도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든가, 날파리 한 마리라도 눈에 띄면 그걸 잡겠다고 집안을 미친 듯이 뛰어다닌다든가. 하루의 절반을 잠으로 보내고, 물을 극도로 싫어하며, 어디를 건드려도 가만히 있는데 유독 배만은 만지면 경기를 일으켰다. 근데 이게 다 복선이었다. 박원빈이 ‘고양이’라는 전제하에 보면, 너무 명백한 빌드업이었다.
생각해보면 정성찬을 먼저 꼬신 것도 박원빈이었다. 정성찬은 스물셋 인생 통틀어 자신의 성 정체성을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는 뼛속부터 헤테로였다. 남자에게 설렌 적도, 눈웃음 한 번 쳐본 적도 없었다. 남자 새끼만 보면 오히려 몸이 먼저 식는 타입. 그런데 박원빈은 좀 달랐다. 다 큰 성인 남자가 다정하게 스킨십을 해오면 불편해야 하는 게 정상인데, 이상하게 박원빈과 몸을 붙이면 어떤 안정감 같은 게 들었다. 보통 정성찬이 침대 위에 누워있으면 박원빈은 제멋대로 품속에 파고들어 볼을 비비거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처음엔 황당해서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하고 물었고, 그때마다 박원빈은 “아.” 하고 탄식하듯 한숨을 내쉬고는 붙잡을 틈도 없이 쪼르르 내려가 버렸다.
그래서 그 뒤로는 그냥 가만히 놔뒀다. 그게 이상하게 맞는 행동 같았다. 안 그러면 다시 쪼르르 내려갈 게 뻔했기에. 그 꼴은 또 보기 싫어서 한껏 긴장한 채로 앉아 있으면, 박원빈은 정성찬 몸 위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게 마치 일과처럼 여겨졌었는데. 그 모든 게 다 박원빈이 고양이라서 그랬던 거다. 정성찬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고백했다. 너 나랑 사귈 거야? 그랬더니, 박원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사귀? 사귀가…그래. 사귀거야. 그땐 몰랐다.
그 ‘그래’가,
그냥 단어 뜻을 몰라서 대충 대답한 거였다는 걸.
"아니, 형도 별로 안 가고 싶었는데 가족 모임이라 어쩔 수가 없었어."
"........"
"혼자 있어서 무서웠어?"
"......."
"형이 선물로 연어 캔 사 왔는데 진짜 안 먹어?"
"....먀옹."
그리고 뭣보다, 박원빈은 이상하리만치 생선을 좋아했다. 고기는 줘도 젓가락으로 몇 번 건드리다 말았는데, 생선이라도 한 마리 구워주면 그날은 밥 한 공기를 말끔히 비웠다. 그건 거의 온몸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였다. 자신이 고양이라는 걸.
그래서 그런가. 박원빈은 애초에 정성찬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믿은 모양이었다. 그 믿음은 너무나 단단해서, 냥밍아웃은 진짜 갑작스럽게 벌어졌다. 어느 날, 별다른 생각 없이 귀가했을 뿐인데 소파 위에 처음 보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떡하니 앉아 있었다. 엥? 이게 뭔 고양이야.
처음엔 그냥 길 잃은 고양이가 문이 열린 틈을 통해 들어온 건가 싶었다. 그런데 고양이는 정성찬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조용히 인사를 건네는 듯한 시선만 주었다. 설마 박원빈이 데려왔나? 그럴 리 없었다. 박원빈은 집에 들어온 이후로 단 한 발자국도 문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강한 직감. 원빈이? 어 정답. 그 말에 고양이가 먀옹. 하고 대답했다.
놀랍게도 정성찬은 크게 충격을 받지 않았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박원빈이 고양이 같다는 걸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당황스럽긴 했다. 이 시대에 수인이라니. 그건 이제 전설에나 남은 존재였다. 거의 멸종 직전의 종, 현실에서 마주칠 일 따윈 없을 줄 알았는데.
정성찬은 눈앞의 고양이를 바라보며 믿기지도, 부정하기도 힘든 현실을 그저 조용히 삼켰었다.
"먹을 거야?"
"먀옹.."
"그럼 형 봐줄 거야?"
드디어 풀린 모양이었다. 소파 등받이에 찰싹 붙어 있던 삔냥이가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봐줄 거야?’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성찬의 얼굴 쪽으로 볼부터 들이박는 걸 보니, 결국 고작 연어 캔 하나에 마음이 녹은 게 분명했다.
하....다행이다. 얘는 매번 화가 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단식투쟁을 벌인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가끔은 죽을 때까지 버틸 기세로. 이번에도 그랬다. 가족 모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틀 정도 집을 비웠을 뿐인데, 돌아오니 차려놓은 밥그릇은 그대로였고 사료는 입도 안 댄 상태였다. 정성찬이 돌아왔을 때도 꼬리를 추켜세우고 달려 나오지 않았다. 그저 캣타워 맨 위 칸에 올라가선 정성찬을 내려다보며 새까만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정성찬은 오자마자 대가리 먼저 박았다. 미안해. 화났어? 빨리 오려고 했는데... 주절주절 변명 늘어놓으면서 등을 쓱쓱 쓰다듬자 짧고 앙칼진 앞발이 올라와 손등을 '탁' 쳤다. 그 순간 느꼈다. 얘 진짜 삐쳤구나. 세간에서는 고양이는 외로움을 안 탄다 그러지만 다 뻥이다. 강아지만큼 티를 내진 않아도 확실히 혼자 있는 거에는 서툴다. 아니면… 그냥 밥 줄 인간이 없어져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 어려서 그런 거일 수도 있다.
박원빈은 이제 막 태어난 지 두 해 남짓 된 고양이였다. 성묘로 발현하자마자 부모 품을 박차고 나와 독립을 선언했다는 게 본인 말이었다. 고양이 나이로는 두 살이지만, 인간으로 치면 스무 살쯤. 보통 그 나이면 ‘사회 적응 교육’이니 뭐니 하면서 사람 사는 법을 배우고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런 절차 따윈 전혀 없이 냅다 튀어나온 탓에 박원빈은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그야말로 아직 덜 자란 새끼 고양이였다.
그리고 밤새도록 인터넷을 뒤져본 결과, 딱 그 나이대의 고양이 수인들에게는 ‘냥춘기’ 비슷한 게 온다는 걸 알게 됐다. 생각해보면 초반에는 애교도 많고 골골송도 잘 부르더니 요즘은 그게 싹 사라졌었다. 고양이일 때도, 인간일 때도. 손끝이라도 닿으면 미세하게 몸이 굳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정성찬은 억지로 다가가는 성격은 아니었다. 싫다는데 붙잡아봐야 둘 다 피곤하니까. 그래서 그냥 놔뒀다. 언젠가 또 자기 기분 풀리면 제멋대로 파고들겠지 싶어서.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지금 ‘박원빈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어느새 완전히 잊고 살고 있다는 걸. 애인이라기보다, 그냥 철저한 집사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두고 연애는 무슨... 물론 박원빈은 여전히 귀엽긴 하다만.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요즘의 정성찬은 ‘귀엽다’ 이상의 생각은 애써 접어두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애인이랑 사귄 지 이틀 만에 모텔로 직행했을 인간인데, 이제는 그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 전에 애 밥 먹이는 게 우선이었다.
따끈한 캔을 따서 전용 그릇에 담아주자 냄새를 맡은 박원빈이 바로 달려왔다. 그릇에 코를 거의 박다시피 하며 폭풍 흡입하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머리 위로 한 가닥 삐죽 선 털마저도 귀엽게 느껴진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정성찬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물소리가 천천히 번지는 동안, 거실 쪽에선 여전히 챱챱, 고양이 먹방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이번엔 연어 캔 하나로 냥춘기 고양이의 화를 진정시킬 수 있었으니 나름 다행이었다.
(. . .)
"어디 가?"
"학교 가야 돼."
"학교?"
"응. 저번에 말했잖아. 이제 방학 끝나서 형 등교해야된다고... ㅜㅜ."
"....언제 오는데?"
"한 다섯 시 넘어서? 내일은 오전 강의만 있어서 빨리 올 수 있고...."
"내일도 나간다고?"
"어... 일주일 내내 나가야 되는데."
"........"
"화났어?"
박원빈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화 안 났다면서도 표정은 누가 봐도 뚱해 있었다. 정성찬은 가방을 메던 손을 멈췄다. 저대로 두고 나갔다간 또 종일 밥도 안 먹고 자빠져 있을 게 뻔했다. 한숨을 쉬며 박원빈이 앉아있는 침대 위로 털썩 앉았다. 마음 같아선 나도 안 가고 싶다. 나도 뜨끈한 전기장판 위에서 고양이 안고 티비나 보는 게 제일 좋지. 근데 어떡해. 사람으로써의 도리는 또 해야 하는데.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
"같이 갈래?"
"어딜."
"학교."
"......."
"너 여기 오고 한 번도 밖에 나간 적 없잖아. 궁금하지 않아?"
".....무서워. 바로 나가기엔..."
"무서울 게 뭐가 있어. 형이 있는데."
"......"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대신 혼자 밥 잘 챙겨 먹고,"
"....가.갈래."
아 진짜—.
나가는 건 무섭다더니, 또 혼자 있는 건 싫은 모양이다. 혼자 있으란 말에 냉큼 ‘가겠다고’ 대답해버리는 게 웃겨서, 웃음이 터질 뻔 한 걸 간신히 삼켰다. 여기서 괜히 비웃기라도 하면 ‘너 왜 웃어, 나 안 갈래’ 하며 또 괜히 토라질 게 뻔했다. 냥춘기 고양이 다루듯 조심조심, 우선은 박원빈을 욕실로 데려갔다. 양치도 직접 시켜주고, 세수도 대신 해주고. 드레스룸으로 옮겨서는 며칠 전에 혹시 몰라 왕창 사둔 옷들을 맞춰 입혔다. 부스스하던 머리카락도 빗어 올려 정리해줬더니.
잠깐만.
“아, 이거 좀 위험한데…”
“위험해? 뭐가?”
“……아냐.”
맨날 후줄근한 티셔츠만 걸치고 있던 애를 깔끔하게 꾸며놓으니, 꾀죄죄한 고양이에서 그냥 아이돌 준비생으로 신분이 상승한 느낌이다. 원래 예쁜 얼굴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눈에 띄겠는데.
이대로 데리고 나가면 분명 애들이 몰려들 게 뻔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공포에 질릴 박원빈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건 존나 싫다. 애 스트레스 받을 수도 있고... 나도 스트레스 받을 수도 있고... 하는 수 없이 구석에 처박아뒀던 캡 모자 하나를 꺼냈다. 열심히 정리한 머리가 아깝다는 생각도 잠시, 그대로 고양이 머리 위에 푹 씌워줬다. 모자가 내려앉자마자 박원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뭐해."
"쓰고 가는 게 낫겠다."
"왜? 깝깝해."
"너가 몰라서 그런데, 학교에 무서운 애들 엄청 많아. 이러고 가야 안 건드려."
"너 있는데 뭐가 무섭냐며...."
"어... 그렇긴 한데, 일단 혹시 모르니까 그냥 써."
박원빈은 모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연신 손끝으로 챙을 건드렸다. 그래도 벗어던지진 않았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낯선 세상에 대한 불안함이 아직 있는 듯했다.
문을 여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삼월이라 해도 공기엔 아직 겨울의 이가 박혀 있었다. 워낙 추위를 많이 타는 고양이라 그런지, 문턱을 넘자마자 박원빈의 몸이 움찔 굳었다.
"추워."
그럴 줄 알고 이미 핫팩까지 챙겼다. 극한의 P 성향도 육아 앞에선 J로 변하는 걸까. 난생 한번 느껴본 적 없는 자신의 계획적인 성향에 감탄했다. 왕창 데워놓은 핫팩을 그대로 박원빈 주머니에 넣어줬다. 그제야 조금 안정을 찾은 듯, 박원빈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박원빈은 예상보다 얌전했다. 가끔 차가 지나가며 내뿜는 소음에 놀라 어깨를 바짝 움츠리긴 했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세상을 구경했다. 두려움 보단 호기심이 앞서 있는 눈빛이었다. 나름 다행이었다. 그러다 문득, 붕어빵 가게를 발견했다. 박원빈의 시선이 자연스레 거기로 박히는 게 보였다. 우와...생선! 그렇다고 갑분 사냥본능이 발동해 뛰어갈 줄은 또 몰랐긴 한데.
결국 이천 원을 주고 붕어빵 세 마리를 매입했다. 팥은 싫어할 게 뻔해서 슈크림으로 골랐다.
“우와.”
하얀 봉투 안에 든 붕어 3마리를 보고 감탄하던 박원빈은 망설임도 없이 한입 깨물었다.
“야, 불어 먹어야지—”
말릴 틈도 없었다. 뜨거운 슈크림이 입안에서 고스란히 터지자, 고양이 얼굴이 금세 일그러졌다.
“아, 뜨거어…”
정성찬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뱉어, 빨리.”
하지만 박원빈은 그 말도 무시한 채 꿀꺽 삼켰다. 그 덕에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걱정이 앞서면서도, 어쩐지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괜찮아?”
조심스레 묻자, 박원빈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 이제 안 먹어. 너 다 먹어."
생선인 줄 알았는데.....
그러곤 남은 붕어 두 마리를 정성찬 손에 떠넘기고, 먼저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성찬은 미소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아, 진짜 저 바보 고양이를 어쩌지.
(. . .)
애새끼들 난리 날 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성찬 옆에 쪼르르 달고 온 성능 좋아 보이는 키링 하나에 건물 하나가 들썩일 정도였다. 동기들은 하나같이 정성찬을 붙잡고 누구냐며 물어봤고, 괜히 시끄럽게 만들기 싫었던 정성찬은 사촌 동생이라고 일괄 처리했다. 박원빈은 별 신경 안 쓰는 듯했다. 하기야, 사귄다는 뜻도 모르는데 본인을 뭐라고 소개하든 신경을 쓰겠냐. 그건 나름대로 다행이었다.
문제는 자꾸만 애들이 박원빈한테 친한 척 말을 걸어온다는 거. 강의가 끝나자마자 앞에 쪼르르 모여들더니, 냅다 자기네들 멋대로 모자를 턱ㅡ 벗겨버렸다. 거기에 놀란 고양이가 평소처럼 앞발 들고 냅다 폭력 먼저 저지를 줄 알았는데, 묘하게 고양이 표정이 흥미로워 보였다.
재밌는 건가? 그게 좀 기분이 묘했다. 하긴 이러고 보면 박원빈도 고양이가 아니라 또래 애들이랑 다를 게 없었다. 초면에 반말 먼저 다이렉트로 꽂아버리는 게 좀 웃기긴 한데, 다행히 애들은 박원빈 얼굴에 홀려 신경 조차 안 쓰는 듯했다. 박원빈은 대답을 거의 응, 아니로 일괄했는데도 애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하하 호호 난리가 났다. 저러고 있으니까 진짜 사람들한테 둘러싸인 고양이 같네. 그 모습 멀리서 지켜보며 혼자 음침하게 킥킥거리고 있는데, 동기인 김수진이 말을 걸어왔다. 야 정성찬.
"왜?"
"너 오늘 갈 거지?"
"어딜 가?"
"어디긴 어디야. 오늘 세연이 생일이잖아. 끝나고 애들이랑 다 모여서 술 먹기로 한 거 까먹었음?"
"아."
까먹었다. 그것도 새까맣게. 요즘 들어 정성찬의 최대 관심사는 박원빈 뿐이었다. 방학 내내 박원빈 케어하느라 애들이랑 연락 한번 안 주고받았다. 카톡은 오는 족족 씹어댔으니 뭔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얼마 전에 한번 김수진한테 연락이 오긴 했었는데 그때도 고양이 밥 챙겨주느라고 대충 대답하고 넘겼던 기억이 있다. 그때 말했던 게, 오늘 약속인가. 아 가기 싫은데...
"세현이 이번에 남친이랑 깨져서 존나 우울하대. 너까지 빠지면 걔 진짜 생일날에 울다가 집 갈 수도."
"........"
"그리고 이미 가기로 해놓고 갑자기 빼는 건 좀 오바지."
근데 그러기엔 키링처럼 달고 온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묻혀 앉아 있으면서도 시선은 정성찬에게만 붙들려 있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길래, 정성찬은 대충 손을 들어 흔들어줬다. 그걸 본 김수진이 덧붙였다.
"오, 그럼 너네 사촌 동생도 데려가자."
"뭐?"
"너 쟤 때문에 갈지 말지 고민하는 거잖아. 그냥 데려가면 될 거 같은데. 어차피 성인 아냐?"
"맞긴 한데."
......절대 싫다. 절대, 절대, 절대.
그 소굴에 박원빈을 데려갔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안 그래도 요즘 외롭다며 주변에 괜찮은 사람 없냐는 애들이 열댓 명은 넘는데, 거기에 며칠 전 이별한 김세현까지 합세했다고 생각해봐라. 젯따이 무리다.
단호한 거절의 의미로 고개를 내저으려고 했다. 근데 한편으론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애들이랑 있는 것도 재밌어하는데, 어쩌면 데려가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뭣보다... 술 취한 박원빈? 꽤 귀여울 지도 모른다... 그 상상만으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혀가 꼬인 채로 먀옹 하고 울 것 같은 얼굴이 떠올라서, 종국엔 혼자 웃음이 터졌다. 갑자기 왜 처웃지? 그 이유를 알지도 못하는 김수진 눈에 꽤 공포로 다가간 듯 싶었지만.
결국 알겠다고 했다. 그 결정엔 박원빈의 의사가 컸다. 혹시나 싶어 물어봤는데, 박원빈은 별생각 없이 그래. 하고 대답했다.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일단 약속은 이미 잡혀 있었으니까, 완전히 안 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정성찬은 박원빈을 옆에 완장처럼 달고, 애들이 자주 가던 포차로 향했다. 방학 내내 안 보다가 모처럼 마주한 얼굴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김세현은 이미 반쯤 취한 상태로 보였다. 들어오자마자 성찬아!! 하고 안겨 오는 꼴에 진심으로 당황했다.
얘 왤케 취했냐. 정성찬은 어색하게 웃으며 재빨리 몸을 떼었다. 괜히 옆에 있는 박원빈 눈치가 보여서 슬쩍 곁눈질을 했다. 다행히 박원빈은 눈을 돌리며 주변 구경에 열중해 있었다. 하, 다행이다…아니지 다행이 맞긴 한가. 애당초 봤어도 박원빈은 별 상관 안 썼을 것 같긴 해.
애당초 우리가 무슨 사이지.
진짜 사귀는 사이는 맞나?
말은 사귀기로 했어도, 박원빈은 그 뜻도 모르고 알겠다고 한 거일 텐데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닌가. 혼자 생각의 알고리즘을 타고 있으면 김세현이 직접 빈자리로 정성찬을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옆자리는 박원빈 차지였다. 김세현은 취한 와중에도 잘생긴 얼굴 만큼은 눈에 또렷이 보인 모양인지, 시선을 빠르게 박원빈에게로 옮겼다. 눈빛엔 묘한 호기심이 서렸다. 이 귀요미는 뭐야?
"아... 사촌 동생인데, 오늘 학교 구경 오고 싶다고 해서."
"미자야?"
"아니 성인이야."
"스무살?"
"어...."
그렇게 대충 대답해주는데, 주변 구경하느라 종일 산만하던 박원빈의 시선이 찰나에 정성찬에게 고정됐다. 갑작스러운 시선에 “응?”하고 고개를 돌리자, 박원빈이 입술을 툭 내밀더니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왜 저러지. 싶어 따라가 보니, 테이블 위엔 기름 냄새 자욱한 튀김과 매운 닭발, 그리고 붉은 소스로 범벅된 떡볶이뿐이었다. 전부 박원빈 입맛이 아닌 것들.
먹을 게 없어서 삐친 건가. 그 뾰로통한 얼굴을 보자 정성찬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래 봬도 셋방살이 3개월째. 저 표정 하나쯤은 기가 막히게 읽을 수 있다. 결국 메뉴판을 들어 올리며 박원빈 취향에 맞을 만한 안주를 찾았다. 마른오징어나 황태구이, 뭐 그런 류라면 환장하니까.
“원빈이는 여친 있어?”
주문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김세현이 느닷없이 말을 걸었다. 초면에 저런 질문을 던지는 걸 보면, 박원빈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정성찬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우리 고양이는 여친이 뭔지도 모를 텐데.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단어를 곱씹는 듯한 그 표정이 딱 그랬다. 분명 “그게 뭐야?" 나 “몰라." 같은 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박원빈은 시선을 옆으로 옮겨 정성찬을 흘깃 쳐다보다가, 아주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여친은 없어."
아… 맞는 말이긴 했다. 그렇지만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얘는 사귀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여친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아는 걸까. 그보다 더 문제는, ‘없어’라는 그 한마디에 사방에서 번뜩이는 눈빛들이 몰려들었다는 거였다. 술기운이 덜 오른 사람들마저도 슬쩍 몸을 기울이며 관심을 보였다. 정성찬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술 취한 박원빈을 보고 싶었던 건 순전히 자기 욕심이었다. 괜히 데려왔다. 이 시간이라면 분명 둘 다 소파에 누워 티비를 틀어놓고, 뜨뜻한 담요 속에서 과자나 까먹고 있었을 거다. 괜히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잔에 술을 따라 연거푸 들이켰다. 쓴맛이 목을 스치며 내려가는데, 묘하게 속이 더 쓰렸다. 생각해보면, 박원빈도 언젠간 제대로 된 연애를 하고 싶지 않을까. 박원빈이 평소에 자신에게 달라붙고, 허물없이 굴었던 건 단지 본능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좋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익숙한 온도라서.
그렇다면 ‘사귄다’는 것도 결국 무효 아닌가. 박원빈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도, 자신은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가 아니었다. 지난 3개월을 돌아보면, 정성찬은 애인이라기보단 보호자에 가까웠으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괜히 가슴이 저릿했다. 자식새끼 사회로 내보내는 부모 심정이 이런 건가. 김세현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박원빈의 옆얼굴을 보며, 정성찬은 알 수 없는 박탈감에 가슴이 졸아들었다. 그때, 옆자리에서 술잔을 내려놓던 김수진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너 왜 아까부터 혼자 마시냐. 같이 마셔."
김수진이 건넨 잔이 정성찬의 잔 끝에 부딪히며, 짧은 ‘짠’ 소리가 탁 울렸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멍하게 들렸다. 혼자 자작 태우는 꼴이 어지간히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다. 괜히 뭐라도 챙겨주려는 듯, 김수진이 웃으며 안주를 권했다. 정성찬은 그저 주는 대로 받아먹으며 또 술을 들이켰다. 왜 이리 우울한지도 모르겠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가, 또 별 이유 없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쯤이면 진짜 조울증 검사라도 받아야 하나 싶었다.
그 와중에, 아무렇지도 않게 애들 틈에 섞여 앉은 박원빈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보통 고양이면 낯가림 심해야 정상인데, 얘는 뭐가 이렇게 편해 보이냐. 그게 이상하게 불편했다. 마치 자기가 없는 세계에서도 박원빈은 충분히 잘 지낼 수 있다는 걸, 그 눈앞에서 증명해 보이는 것 같아서.
그저 술잔만 비우며 박원빈을 안주 삼았다. 김수진은 옆에서 연애 상담을 해왔다. 전남친이랑 싸웠다느니, 썸남이 답이 없다느니— 뭐 그런 얘기들.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어, 대충 호응만 흘리면서 시선은 줄곧 한 방향에 고정돼 있었다. 박원빈 앞에 앉은 김세현이, 장난스럽게 소주를 따라주고 있었다. 잔을 든 박원빈이 그걸 멀뚱히 바라보자, 정성찬이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야, 걔 술 먹이지 마.”
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일이 벌어졌다. 박원빈이 손을 뻗더니, 김세현이 건넨 잔을 낚아채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목울대가 꿀꺽 하고 움직였다. 어, 원빈아ㅡ.
정성찬이 박원빈을 부르려는 순간, 옆에서 김수진이 정성찬의 볼을 홱 붙잡았다. 술기운이 오른 손끝이 얼굴을 확 잡아 돌렸다. 그리고,
“야, 내 말 듣고 있냐고오—!”
동시에 바로 옆 의자가 밀려 나가는 소리가 났다.
드르륵.
박원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눈빛이 확 가라앉아있었다. 순식간이었다. 누가 뭐라 말릴 틈도 없이, 박원빈은 그대로 포차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바람이 쌩 들이쳤다. 문짝이 덜컥거릴 만큼 세게 닫혔다. 자리엔 술잔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야, 너 동생 왜 저래 갑자기?”
김세현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정성찬은 대답도 못 하고 그대로 뛰쳐나왔다. 가게 문을 박차고 나가자, 찬 공기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바깥은 이미 밤이었고, 네온사인이 깜빡이며 골목을 물들이고 있었다.
박원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 .)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베어냈다. 겉옷조차 제대로 걸치지 못한 탓이었지만, 체온 따위는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박원빈이 우선이었다. 분명 바로 뒤따라 나왔는데, 이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에 어디로 사라진 걸까. 불안이 목을 죄었다. 심장이 조급하게 박동을 쳤다. 갑자기 왜 그렇게 나간 건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건, 멋대로 들이켰던 술 한 모금. 평생 입에도 대지 않던 술이었다. 주량이 약한 건 불 보듯 뻔했다. 그 한 모금에 금세 취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상태로 어둡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헤매고 있다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정성찬은 그 생각만으로 다리가 절로 움직였다. 처음 박원빈을 길에서 주워 왔던 기억이 자꾸 겹쳤다. 또다시 누군가, 아니 뭔가가 박원빈을 데려가 버릴까 봐. 그 불안이 두려움으로 번졌다. 원빈아––. 소리 내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숨을 몰아쉬며 사방을 훑었다. 혹시 집으로 돌아갔나 싶어 허겁지겁 되돌아가 봤지만, 방 안은 고요했다. 머리가 쑤셨다. 찰나의 일인데, 모든 게 자기 탓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밖으로 데리고 나오지 말았어야 했나. 그냥 집에 조용히 두었어야 했나. 후회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짓이겼다.
그때–– 등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도로 위에 새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정성찬은 전력으로 달려가 손을 뻗었다. 냉랭한 밤공기를 가르며 고양이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강하게 낚아채는 순간, 허공에서 짧은 울음소리가 흩어졌다. 다행히 차는 잘 피해갔고, 불상사는 없었다. 그러나 정성찬의 심장은 이미 쿵 하고 떨어져 있었다. 아드레날린이 가라앉기도 전에 분노와 자책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자신의 어리석음이, 그 한순간의 방심이, 박원빈을 잃게 만들 뻔했다는 생각이.
정성찬은 고양이를 손에 든 채, 숨을 몰아쉬며 채근하듯 물었다.
“너 미쳤어? 치였으면 어쩔 뻔했어.”
“………”
박원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묘하게 또렷한 눈빛으로 정성찬을 올려다봤다. 그 눈에는 미안함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히려 어딘가 기묘한 자존심이 비쳐 있었다. 그 태도에 정성찬은 허탈하게 숨을 내쉬었다. 하…… 한숨이 절로 터졌다.
벌써 두 시간이 넘게 박원빈을 찾아 헤맸다. 발끝은 저려 있었고, 손끝은 식어 있었다. 긴장으로 곤두서 있던 신경이 한순간에 풀리자, 피로가 밀물처럼 몰려왔다. 박원빈이 도대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그걸 짐작이나 할까.
“일단 집에 가자.”
정성찬은 그렇게 말하며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박원빈의 체온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도망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잘못한 건 아는 모양인지 돌아오는 길 내내, 의외로 조용히 있었다. 그 침묵 덕분에 정성찬도 겨우 감정을 추슬렀다. 고함을 질러봤자 무슨 소용인가. 애초에 박원빈한테 화를 낼 줄도 몰랐다. 그리고 괜히 지금 같은 상황에 화를 내며 몰아붙였다간 진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정성찬은 이를 악물고 입을 다물었다. 억눌린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어떻게든 삼켰다. 그렇게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품에 안긴 박원빈의 체온이 조금은 따뜻하게 변한 듯했다. 그런 고양이를 허공에서 안아 들며 물었다.
“갑자기 왜 나간 거야?”
“…….”
“형이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내가 너 못 찾았으면 어쩔 뻔했어.”
박원빈은 그 쉬운 야옹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대답 대신 눈만 반짝였다. 그 눈빛엔 미묘한 불만이 고여 있었다. 불안이나 공포는커녕, 어딘가 억울하고 짜증스러운 기색이었다. 정성찬은 본능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말 안 할 거야?”
애써 목소리를 낮췄지만, 신경질적인 기색이 섞여 나왔다. 두 시간 가까이 골목을 헤집으며 박원빈을 찾았던 기억이 머릿속에 생생했다. 그렇게 찾아냈더니 돌아오는 건 냉담한 표정뿐이라니. 사람 마음이 헛헛하지 않을 수 있나.
그러자 박원빈이, 천천히 입술을 들었다. 그리고는 이빨을 드러내더니—
콱.
날카로운 통증이 손등을 뚫고 지나갔다.
아야......
순간 살결이 얼얼해졌다. 피가 한 방울, 두 방울 흘러내렸다. 그새 박원빈은 정성찬의 품을 벗어나 휙 몸을 돌려버렸다. 금세 그 작고 가벼운 몸이 어둑한 복도를 지나 방으로 사라졌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정성찬은 멍하니 피 묻은 손을 내려다봤다. 따갑게 욱신거리는 상처보다 더 아픈 건, 이유 모를 서운함이었다. 하… 진짜 왜 저러지…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사춘기여도, 입질까지 하는 건 처음이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국 정성찬은 방문 앞으로 가서 손잡이를 돌렸다. 잠금쇠가 딸깍, 손끝에서 짧게 울렸다. 열리지 않았다. 원빈아, 문 좀 열어봐. 대답은 없었다. 침묵이 벽처럼 되받아쳤다.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성찬의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은 욱신거리고, 체력은 한계에 다다랐는데, 이유조차 모른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못 해줬다고.....
서운함이 뱃속 깊은 데서부터 서서히 차올랐다.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였다. 답지 않게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오늘만큼은 더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결국 정성찬은 문 앞에서 그렇게 중얼거리고, 힘없이 소파로 걸어갔다. 몸이 툭— 주저앉았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피의 끈적함이 현실감을 더했다. 그 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가라앉지 않는 감정을 겨우 다독이는 사이,
철컥ㅡ.
잠겨 있던 방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정성찬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들렸다. 그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박원빈이 서 있었다. 표정은 굳어 있었고,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현관 쪽으로 향했다.
쟤가 또 어딜 가. 정성찬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대로 하라곤 했지만, 이 시간에 나간다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박원빈의 발이 현관에 닿기도 전에 거칠게 팔을 부여잡았다. 힘 조절을 못한 탓에 마른 몸이 홱 돌아왔다.
“어디 가?"
“놔. 집 나갈 거야.”
“뭐?”
“이제 필요 없어. 갈 거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이유를 말해줘야 내가 이해라도 할 거 아냐.”
그때, 박원빈이 고개를 들었다. 정성찬은 그 눈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매섭게 추켜뜬 눈매, 그러나 금세 눈물에 젖어 드는 속눈썹. 그 붉은 언저리가 시야를 잡아끌었다.
울었나. 언제부터. 왜.
심장이 서늘하게 덜컥 내려앉았다. 정성찬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렸다. 거칠게 붙잡고 있던 손을 풀고, 그 자리에 박원빈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내가 뭐 잘못했어?”
"......"
"그런 거면 형이 사과할게."
달래듯 낮게 깔린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번졌다. 그제야 박원빈은 추켜들고 있던 눈을 서서히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 사이로 시선이 흘러내렸다. 그 끝이 닿은 곳은 정성찬의 손등이었다. 피가 번진 자국, 옅게 마른 피딱지, 붉게 부어오른 살결. 그걸 한참 들여다보던 박원빈이 조심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아주 낮고, 울음기가 비친 목소리로—
"나...형 애인 아니야?"
"......어?"
"우리 사귀기로 했었잖아...."
이런 소리를 뱉을 줄은 또 몰랐는데.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그 한 문장이 칼끝처럼 명료하게 꽂혔다. 박원빈 입에서 형 소리가 나올 줄도 몰랐는데, 애인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리고 박원빈이 화난 이유가, 그니까...........
"나는 형 사촌 동생이 아니라, 애인인데...."
"........"
"왜 형은 자꾸 다른 사람이랑 놀아. 왜 형 만지게 놔둬? 형은 내꺼 아니야?"
잠깐만. 진지하게 누가 뒤통수를 후려갈겨도 이 정도로 정신이 멍해지진 않을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라, 졸지에 할 말을 잃었다.
당연지사 박원빈은 그런 거 신경도 안 쓰는 줄 알았다. 애당초 정성찬이랑 사귄다는 것 조차 모르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는지. 박원빈한테 상처를 준 것 같아 심장이 아픈 와중에도 한편으론 심장이 개같이 벌벌 뛰어댔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박원빈을 끌어안고 싶었으나, 잊지 말자. 상대는 사춘기 고양이다.
"미안해... 형이 잘못했어."
"진짜 짜증 나고 싫어...."
그것도 잉잉 울고 있는.
그 말끝에 묻어드는 울음은 참기에도, 듣기에도 미묘하게 가슴을 찔렀다. 눈물 자국이 뺨 위로 미끄러져 내렸고, 정성찬은 그걸 닦아주듯 손을 뻗었다. 촉촉하게 젖은 살결이 손끝에 스며들자, 그제야 조금 가라앉은 숨이 느껴졌다.기분도 좀 전 보단 풀린 모양인지 다행히 손을 물지도, 밀쳐내지도 않았다.
"형은 네가 그런 거 신경도 안 쓰는 줄 알고.....,"
"내가 왜 신경을 안 쓰는데."
말끝이 서늘하게 부딪혔다. 정성찬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굳었다. 말실수였단 걸 깨닫기도 전에, 입술에선 변명 같은 말들이 튀어나왔다.
"아니, 너 사귀는 게 뭔지 모르잖...."
궁상맞은 대답에 박원빈이 어이없다는 듯, 짧게 코웃음을 쳤다. 앙칼진 목소리가 단번에 귓가를 때렸다.
"형은 나를 뭐로 생각한 거야?"
".........."
"나도 아무한테나 나 데려가라고 그러지 않아."
분명 타박하는 말투인데도 그 한마디에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 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감정이 엉망으로 뒤섞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박원빈의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긴장이 싹 가라앉았다.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정성찬은 재빠르게 입가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지금 이 타이밍에 웃었다간, 고양이가 다시 발톱부터 세울 게 뻔했으니까. 애써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숨을 고른다. 그랬구나.
아무한테나 데려가 달라는 말은 안 하는 거구나––. 그 말인즉슨, 처음부터 정성찬을 간택했다는 뜻이었다. 박원빈이 초면부터 경계도 풀고, 순순히 따라온 이유. 그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정성찬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는 거다.
…아, 진짜.
이러니까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있나.
"그리고 사귀는 거 무슨 말인지 알아."
"....진짜?"
"티비에서 봤어."
"........"
"이런 거 하는 거잖아."
그리고 순식간에 눈물 젖은 짭조름한 입술이 쪽ㅡ. 입을 막고 있는 정성찬 손등 위에 짧게 포개지고 떨어졌다.
???
어 씨발 잠깐만.
정성찬은 한동안 멍하니 굳었다. 대체 금방 뭔 짓을... 방금 고양이가, 아니 박원빈이 나한테 뽀뽀를? 그건 분명 뽀뽀였다. 위치는 손등이지만, 의미는 그게 아니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데, 심장은 이미 제멋대로 뛰고 있었다.
피가 확 솟구치더니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와중에도 박원빈은 진지했다. 우물우물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말했다. 좋아하면 핥아주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하는 거라고 그랬는데... 아니야?
아....맞지. 맞는데.
"맞아."
"....."
"근데 손에 하는 거 아니고."
천천히 손을 들어, 박원빈의 얼굴을 감싸 올렸다. 살짝 젖은 뺨이 손바닥에 닿았다. 정성찬은 그 위에 고개를 숙였다. 짧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도톰한 입술이 부드럽게 겹치는 찰나, 척추를 타고 오르는 전율이 몸을 세게 훑고 지나갔다. 머리가 하얘지고 생각이 녹았다.
“여기에 해야지.”
"......아."
그럼 이번엔 박원빈이 따라 움직였다. 정성찬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볼을 살짝 기울여 그대로 다시 입을 맞춰왔다. 처음보다 길고 느렸다. 단순한 스침이 아니라, 닿은 자리를 천천히 탐색하는 듯한 키스였다. 입술이 떨어질 때조차 미련이 길게 늘어졌다.
"이렇게?"
짧고도 부드러운 음절이 공기를 흔들었다. 정성찬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숨이 턱 막혔다. 머릿속은 백지처럼 하얘지고 가슴은 제멋대로 박동을 쳤다.
하… 오늘 진짜 무슨 인내력 테스트라도 하는 날인가.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입을 열면 그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그건 박원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왼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 위를 꾹 누르며 숨을 고르더니, 눈을 들어 정성찬을 올려본다. 눈동자가 묘하게 흔들렸다.
"나 여기 이상해."
"........."
"형도 그래?"
존나 응...
그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지만, 정성찬은 그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목소리 한 줄 새면 이성까지 터질 것 같아서. 그러자 박원빈이 제 손을 들어 정성찬의 왼쪽 가슴팍 위에 가져다 댔다.
피가 미친 듯이 솟구쳤다. 박동이 손바닥으로 생생히 느껴지는 게 눈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 뜨거운 고동을 느낀 박원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매번 뚱한 표정만 보다가 이렇게 웃는 건 또 처음 봐서. 정성찬은 순간 속에 담고 있던 말들을 본능처럼 토해냈다.
"좋아해 원빈아."
"......."
"진짜 많이..."
"....응. 나도."
"울려서 미안해."
"나도 물어서 미안..."
"괜찮아. 더 물어도 돼."
"나는 안 괜찮아. 다른 사람이 형 만지는 거 싫어."
"알겠어. 이제 누가 나 만지면 원빈이가 아까처럼 물어줘."
".....응. 형은 내꺼니까 특별히 그렇게 해줄게."
아 귀여워....
냉큼 허리를 끌어안고 환히 웃자, 박원빈이 꾀죄죄한 몰골로 따라 웃는다. 서로 오해 아닌 오해로 꼬여있었지만, 결국엔 이 작은 세계 안엔 서로밖에 없었다. 그걸 지금에서야 확신하게 된 기분이었다.
근데 너 요즘 나한테 얼굴도 안 비비고, 골골송도 안 부르고... 그랬잖아. 진짜 사춘기야?
오해도 풀렸겠다, 투정부리듯 물은 소리에 박원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 머뭇거리더니, 곧 고개를 툭 떨군다. 입술 끝이 미세하게 떨리며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그건 형이 만져주면 기분이 좀 이상해서...
짧은 대답 하나에 공기가 잠시 멎었다. 정성찬은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사춘기라서가 아니라 좋아서. 스킨십을 피했던 것도, 정성찬이 나갔다 오면 단식투쟁하듯 밥을 거부했던 것도, 결국 다 ‘좋아해서’ 부린 투정이었다는 거다. 그 단순한 이유 하나에 정성찬은 어이없게 감동받았다. 눈물이라도 쏟아질 듯 코끝이 시큰해졌다.
감동의 눈물을 쭐쭐 짜내기 직전에, 박원빈이 먼저 정성찬을 떼어냈다. 새까만 눈망울이 왠지 모르게 탁해져있었다. 묘하게 긴장감이 흐르는 사이, 박원빈이 입꼬리를 얄궂게 올렸다.
"근데 나 아까 다쳤나 봐."
"뭐? 어디? 어디 아파?"
"여기."
짧고도 무심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박원빈이 정성찬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티셔츠 밑단을 스치며, 아무렇지 않게 그 손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순간 공기가 먹먹해졌다. 정성찬의 숨이 거칠게 엇나갔다. 손끝이 닿자마자, 온몸으로 전기가 번졌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이상할 만큼 생생한 감촉이었다. 그 체온이 맥박을 타고 손끝까지 흘러들었다.
…미쳤네.
진짜, 이건 좀 위험하다.
평소엔 배에 손만 대도 발톱부터 세우던 애가, 지금은 스스로 그 손을 끌어안고 있었다. 박원빈의 손끝이 정성찬의 손등을 덮더니, 자신의 피부 위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감각이 미친 듯이 예민했다. 살결이 닿을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정성찬은 본능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 그걸 본 박원빈이 눈꼬리를 아주 천천히 올리며, 어쩐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형이 확인해 줘.”
“……”
“진짜 다쳤는지.”
아––
그제야 정성찬은 숨을 내쉬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가 폐를 찔렀다. 머리로는 온갖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지만,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정신을 붙들어야 한다. 지금 무너지면 끝이다.
잊지 말자. 상대는 사춘기 온 고양이,
......근데 이제 좀 잊어도 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