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소의 규칙
by. ceenee
우리는 시소 위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 서로를 마주보면서도 결코 옆에 나란히 앉을 수는 없는, 반드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야만 떨어지지 않는 시소 위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려 애쓰며 그렇게 앉아 있어야만 했다. 가깝지만 절대 곁을 내줄 수 없는, 이쪽과 저쪽에 앉기로 결심한 순간에 언제나 한 쪽으로 비뚤어질 관계임을 감내했다. 그러면서도 또 항상 평행을 이루고 싶다 희망을 버리지도 못해 미련함만 무겁게 끌어안은 채 벗어나지 못하는 시소. 한 번도 박원빈보다 가벼웠던 적 없는 정성찬이 이 시소의 평형을 좌우했다. 정성찬이 내리누르면 박원빈은 허공으로 끌려올라가 발을 동동 굴렀다. 정성찬이 발을 구르면 박원빈은 쿵, 땅으로 처박혔다. 하지만 손잡이 꽉 잡고 버텨 우겼다. 혹시라도 정성찬이 시소에서 일어나 버린다면, 더는 이런 시소 놀이 재미없다 흥미를 잃는다면, 이 아슬아슬한 평형마저 영원히 깨져버릴 테니까. 혼자 남겨진 박원빈은 오래된 시소의 삐걱대는 소리 속에서 빈자리 바라보며 엉엉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니까. 박원빈은 혼자 일어날 수가 없다. 고작 한 살 차이의 정성찬보다 키가 커져본 적도 몸무게가 더 나갔던 적도 없었지만, 한 번도 줄어든 적 없는 마음만은 항상 지나치게 무거웠으니.
“자, 박원빈.”
그러니까 박원빈은 오늘도 정성찬이 건네주는 빠삐코 하나의 꼭지나 입으로 물어뜯으며 얌전히 오래된 아파트 단지 제일 구석에 있는 낡은 시소 한쪽에 앉아있다. 이게 저희의
시소의 규칙
이니까.
“넌 초콜릿은 싫어하면서 빠삐코는 잘도 먹는다.”
조물조물, 비닐 위로 빠삐코를 주물러 녹이며 도톰한 입술 쭉 내밀고 야금야금 삼켜대는 박원빈 얼굴 보면서 정성찬은 아마 천백사십 번 넘게 했던 소리 또 한다. 그러니까 일종의 추임새 같은 거였다. 박원빈이 빠삐코를 먹을 때 덧붙어야 마땅한 응원 같은 거. 그래서 박원빈은 굳이 대꾸도 안 한다. 그저 얼마 전 비가 온 탓에 아직도 눅눅함을 머금은 놀이터 흙바닥 운동화 끝으로 툭툭 차며 건너편에 앉아 고작 세 입 만에 막대 아이스크림 뚝딱 끝내버리곤 남은 나무 막대 질겅이는 정성찬 얼굴이나 본다. 뭘 그렇게 보는지, 띄엄띄엄 불빛 잃은 가로등 아래 어두컴컴한 놀이터에서 폰 액정 불빛 핀 조명마냥 받고 앉은 정성찬은 박원빈 얼굴 대신 폰만 보고 있다. 그런데도 그 얼굴은 늘 그렇듯 10년 동안 참 재수 없게 예뻤다. 아, 짜증나. 왜 예쁘냐고. 대체 누구랑 그렇게 연락하는 거냐고. 불쑥 치미는 불안에 박원빈은 쥐고 있던 빠삐코나 거세게 팍 움켜쥔다. 그새 녹아 반쯤 물이 된 초코 맛이 입안으로 들쩍지근 밀려든다. 보글대는 괜한 심술 소심하게 부시럭대는 비닐 소리로나 대신한다. 그래도 심통 낸 보람 있게 정성찬 시선이 드디어 박원빈에게 돌아온다.
“너 오늘도 렌즈 꼈냐?”
역시 일백여든두 번 들은 소리다. 야, 어린애가 무슨, 벌써부터 렌즈 끼고 다니면 눈에 안 좋다니까, 그냥 안경이나 껴. 뭐하려고 렌즈를 껴, 자꾸? 너 계속 안경 잘 끼고 다녔으면서 왜 갑자기 렌즈 끼는데. 혀 쯧쯧 차며 해대는 반복된 잔소리는 평생 시력 1.5 아래로 떨어져본 적 없는 건강 시력 소유자만이 할 수 있는 멋모르는 유세다. 내가 왜 렌즈 끼고 다니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박원빈은 이번에도 대꾸 대신 비닐이나 주물댄다. 씨, 다 먹었네. 최대한 늦게 먹으려 했는데 정성찬 잔소리에 자꾸 조물대다 보니 오늘따라 좀 더 빨리 끝났다. 진짜 귀신같이 빠삐코의 종말을 알아챈 정성찬이 듣기 싫은 그 말 툭 던진다.
“다 먹었지? 들어가자.”
아무렇지도 않게,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듯. 흔들림 없는 덤덤함이 얄미워 자꾸만 입술이 튀어나온다. 그래도 약속처럼 먼저 엉덩이 드는 건 박원빈이다. 정성찬이 먼저 일어서면 벌어질 참사 둘 다 아는 까닭에 누가 먼저 말한 적은 없지만 자연스레 정해진 저희 규칙이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정성찬이 박원빈 턱 끝을 톡 건드린다.
“들어가서 이 닦고 자라.”
하, 참!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난다.
“형은 진짜 내가 아직도 애인 줄 알아요?”
반걸음쯤 앞선 정성찬이 고개 돌려 박원빈을 본다. 하필 바람이 불었다. 7월, 여름이 시작된 어느 밤 더워진 공기가 가볍게 휙, 정성찬과 박원빈 사이를 스친다. 정성찬 단정한 이마 위에서 머리칼 흔들리는 모양이 박원빈 눈에 새겨질 듯 선명히 들어찬다. 아, 정말로 하필.
“그럼, 원빈이 아직 애지.”
하필, 그러면서 정성찬이 웃었다. 헐렁한 하복 교복 셔츠 안에 받쳐 입은 하얀 티, 그것보다 하얗게 웃었다. 아, 하⋯, 아. 박원빈은 질끈 눈을 감았다. 뒷목덜미가 화끈했다. 아무데서나 그렇게 웃지 좀 마라고 소리치고 싶어 질끈 입술을 깨문다. 그런 말을 내뱉을 순 없다. 그 말 듣고 제 앞에서만 저렇게 웃지 않는다면? 그건 무조건 명백한 박원빈 손해잖아.
영화나 드라마처럼 거기서 딱 장면을 끊어버릴 수도 없다. 옆집이니까 꾸역꾸역 표정 감추며 또 같이 걸으며 마가 뜨는 시간을 감당해야 한다. 뜨끈해진 목덜미 감추려 어깨는 한층 움츠리고 입술은 꾹 다문 채 운동화 앞코만 노려보며 간신히 엘리베이터까지 올랐다. 아니, 거짓말이다. 엘리베이터 옆면 거울 최대한 티 나지 않게 힐끔대느라 눈동자가 바쁘다. 안절부절 못하는 박원빈과 딴판으로 담백하기만 한 정성찬 옆얼굴 훔쳐보려 박원빈 눈동자가 새촘한 눈꼬리를 뚫고 나갈 지경이다. 문이 열리면 정성찬이 먼저 나선다. 박원빈은 언제부턴가 정성찬의 등을 보고 걸었다. 그 등이라도 실컷, 마음껏 보고 싶어서.
“이 닦고 자, 알겠지?”
“아! 알겠다고요!!”
1103호와 1104호. 장난스레 박원빈 앞 머리칼 흩어놓은 정성찬 손이 마지막으로 뺨 콕 찌르고 1104호 문을 연다. 한 걸음 뒤 박원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손으로 가리며 작게 발을 쿵 굴렀다. 정성찬 딱 닮은 웃음소리가 1104호 문 너머로 사라진다. 박원빈은 반쯤 얼굴을 숨긴 채 잠시 숨을 고른다. 푸우우, 기다랗게 샌 한숨이 습해지는 여름밤에 몰래 스민다.
꼬박 10년이다.
진이 쪽 빨려 침대 위로 널브러진 박원빈은 잘 자, 메시지 속 단순한 두 글자를 부모님 원수마냥 한껏 흘겨본다. 시간이 지나 사라지면 액정 톡 건드려 도로 불러내 또 째려본다. 불도 다 끈 컴컴한 방에서 글자 두 개만 둥둥 온 사방 떠다니다 끝내 박원빈 곳곳에 들러붙어 가위 눌리듯 손가락 하나 꼼짝도 못하게 만든다. 결국 박원빈은 또 대답 못하고 폰을 베개 밑으로 쑥 밀어 숨긴다. 자꾸만 할 수 있는 말들이 줄어든다. 그러나 기어코 베개를 뚫고 올라온 글자가, 정성찬의 두 글자가 밤새 박원빈의 꿈속을 헤매고 다닌다. 새삼스럽지는 않다. 늘 그래 왔으니까.
꼬박 10년 동안.
열일곱 박원빈은 열여덟 정성찬과 꼬박 10년 동안 시소 위에 올라있다.
물론 누가 억지로 앉힌 건 아니다. 그냥 박원빈이 얌전히 올라타서 내려오지 않는 거다. 높은 거 무서운 거 딱 질색인데 이 시소에서는 내리기 싫어서 버티고 있는 거다.
무려 10년째.
날 때부터 정성찬과 이웃사촌, 그런 건 아니다. 그건 박원빈이 아니라 박원빈 외사촌 형 송은석 역할이다. 울산 사는 박원빈의 서울 이모네 아들 송은석, 의 동갑내기 이웃사촌 정성찬. 박원빈 일곱 살때 식당을 시작한 어머니는 어느 여름날 서울 언니네 집에다 박원빈을 맡겼다. 그리고 그 옆집에 송은석이 날 때부터 친구로 짝지어진 정성찬이 살았다. 나이차 나는 형만 하나 있던 정성찬이 맞닥뜨린, 서울이란 낯선 곳에서 낯도 무지막지 가리는 커다란 눈의 겁먹은 어린애. 매일 갖고 싶다 해달라 조르고 크리스마스마다 우겨도 자연의 힘으로는 받을 수 없었던 (옆집) 동생, 그게 박원빈이었다.
박원빈, 나가자! 그 여름 내내 정성찬은 박원빈 데리고 크지도 않은 동네를 싸돌아다녔다. 서울에 가 있었던 아가 와 이리 시커멓게 타서 왔노? 박원빈이 한여름 볕에 새까맣게 타 울산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혼자만 하얗던 정성찬은 박원빈 끌어안고 내 동생 못 보낸다고 한참 찡찡 울었다. 박원빈도 정성찬 끌어안고 같이 울었다. 간신히 둘을 떼어놓은 어른들은 겨울에 박원빈을 다시 데려왔고 그 겨울 서울광장 앞에서 정성찬과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타봤다. 펑펑 눈이 날리면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고 썰매도 탔다. 그러다 힘들면 아무것도 안 하고 나란히 앉아있기도 했다. 겨울 햇살에도 살은 타더라. 그런데 정성찬은 또 하얗기만 했다. 박원빈에게 정성찬은 눈처럼 하얗고 포슬했다. 봄이 되면 녹는 눈처럼 또 헤어져야 했지만 빈이 니가 엄마 말 잘 들으마 여름에 또 서울 올끼고, 그 말에 박원빈은 제일 착한 여덟 살이 되었다.
드디어 어엿한 (초등)학생 딱지를 단 박원빈은 아직 손가락 열 개 넘어가는 숫자 읽는 건 가끔 헷갈렸지만 매일 달력 날짜에다 엑스 자 그리는 건 빼먹지 않았다. 정성찬도 비슷했다. 그렇게 여름과 겨울은 온통 함께인 추억들이었다. 자라는 사이에 겪어야 할 수많은 기억과 시작이 서로에게서 비롯했다. 박원빈과 정성찬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들이었다. 열 살이 된 정성찬이 축구를 시작했을 때도, 방학 내내 축구부 연습으로 운동장을 돌 때에도, 박원빈은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 한쪽 놀이터 시소에 앉아 정성찬을 구경했다. 저는 사람들 무리에 섞여 공차는 것보다 혼자 달리는 게 더 재밌다는 걸 깨달았을 때, 박원빈이 그 이야기를 제일 먼저 고백했던 사람도 정성찬이었다. 몸을 숙여 달려 나갈 준비를 할 때마다 박원빈은 머릿속으로 자연스레 결승선 너머에 누군가가 서있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트랙 딛는 걸음마다 엑스 자를 그리면서 거리와 시간을 지워나갈 수 있었다. 그러면 어느새 누구보다 빨리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면 마치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그 누군가와.
그러나 결국 모두 변하지 않는 듯 변했다. 보통은 성장이라는 예쁜 말로 포장할 시기이지만 박원빈에게는 그저 겁나는 시간들이었다. 붙잡고 싶은데 도무지 붙잡을 수 없는 간극은 자꾸만 벌어졌다. 어릴 때부터 아역 모델이라도 시켜보란 소리 듣고 살던 정성찬은 나이와 함께 키와 체격을 키웠고 열다섯을 넘길 무렵엔 박원빈과 벌써 한 뼘 가까이 눈높이가 달라졌다.
땡볕 아래서 죽어라 뛰느라 새까맣게 타고 아직 덜 자라 빼빼 마른, 빙글빙글 눈 도는 커다란 안경을 쓴 박원빈.
똑같이 땡볕 운동장에서 구르는데도 여자애들이 찾아와 힐끗댈 정도로 눈에 띄게 크고 하얀 시력 1.8 정성찬.
박원빈은 점점 괴로워졌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랐다. 그걸 알기엔 아직 너무 어렸으니까. 그러나 하나만큼은 알았다. 껍질로 꽁꽁 감싸 무언지 모르게 저 깊은 곳에 묻어놓았던 것이 그 안에서부터 제 마음 마구 헤집어대며 점점 싹틔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걸. 단단하지 못한 어린애 가슴팍은 고작 그것만으로도 갈가리 파헤쳐졌다. 여물지 못해 이리저리 생채기가 났다. 그래도 박원빈은 꿋꿋이 고개 들어 결승선을 바라봤다. 그 너머 어렴풋이 서있는 누군가를 빠짐없이 상상했다. 죽도록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입에 피 맛이 돌도록. 그것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박원빈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형!!!!
정성찬은 웃었다. 하얗게. 박원빈이! 어떻게 왔어?? 뭘, 뭘 어떻게 와, 벗, 버스 타고 왔지. 넘치는 울음기 참지 못해 박원빈은 자꾸만 말을 더듬었다. 이렇게 무작정 서울에 온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박원빈이 달려와 정성찬을 만난 곳은 오래도록 저희 둘 말고는 타는 사람 없던 놀이터 시소 위가 아니었다. 칭칭 감겨 깁스로 고정된 다리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비스듬히 기대앉은 정성찬을 만나러 병원에 온 박원빈은 해사하게 웃는 정성찬을 보며 울었다. 정성찬은 7년 동안 해왔던 축구를 그만뒀다.
그리고 박원빈도 달리던 트랙에서 벗어났다. 그제서야 결승선 너머에 선 사람의 윤곽을 또렷이 발견한 탓이었다. 그렇게 빠짐없이 떠올리면서도 애써 못 본 척하려 노력했던 얼굴은 너무나 선명하게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달려가고 있었던, 달려가고 싶었던, 마지막 흰 선을 넘어 닿고 싶었던 곳에 박원빈이 달리던 시간 내내 서있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정성찬의 모습을 하고 웃고 있었다. 정성찬의 그림자. 제가 뛰어가고 싶었던 곳은 울산종합운동장 트랙 결승선에 그어진 하얀 줄이 아니라 서울 놀이터 구석 시소 위 하얀 얼굴이었다. 어쩌면 허무한 결말이었다. 자신의 목표를 처음으로 낱낱이 파헤쳐 본 박원빈 소감은 그랬다. 애초부터 닿을 수가 없는 결승선이었음을 동시에 깨달은 탓이었다. 결코 끝까지 달리지 못할 길이었다. 그래서 박원빈은 트랙에서 내려왔다.
축구를 그만둔 정성찬은 공부를 시작했고 육상을 그만둔 박원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겨울 처음으로 박원빈은 정성찬을 만나지 않고 보냈다. 정성찬은 매일같이 서울에 오라 졸라대는, 아니면 제가 울산으로 가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박원빈은 그 단순한 글자들에 밤새 가위눌리면서도 꿋꿋이 울산에서 버텼다.
그리고 그 다음 봄에 박원빈은 트랙 대신 시소 끝에 앉았다.
“박원빈!!”
같은 모양 교복 가슴팍에 한 학년 아래 색깔 명찰을 단 박원빈을 보고 깜짝 놀라는 정성찬을 제가 앉은 시소 건너편에다 앉히고는 제발 내리지 말아 달라 속으로 싹싹 빌면서.
“안경 쓰라니까.”
열여덟이 된 정성찬은 박원빈이 고작 겨울 한 계절 못 본 사이 더 근사해지고 말았다. 아직도 어린애 같기만 한 박원빈 옆에 나란히 설 때면 더 더욱이나. 그래서 박원빈은 반걸음 슬쩍 뒤로 물러섰다. 속도 모르는 정성찬은 간신히 안경을 탈피한 박원빈더러 자꾸만 다시 안경 쓰라는 이상한 잔소리나 해대서 박원빈은 잠으로 퉁퉁 부운 입술을 비죽대는 걸로 아침 인사를 대신했다.
“형처럼 눈 좋은 사람은 앙, 안경 쓰는 게 얼마나 귀찮은지 몰라서 그러는 거다.”
가끔 작게 투덜댈 때마다 성장기 청소년은 렌즈 끼면 눈 더 나빠진다, 같은 꼰대 소리 늘어놔 아주 대꾸하기를 포기할 수밖에 것이다. 물론? 박원빈도 솔직히는 불편했다. 유전자 때문인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시력이 나빠 자꾸만 두꺼워지기만 하는 안경을 오래도록 껴왔던 박원빈이 이제 와서 덜컥 렌즈란 것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없는 안경 올리려 자꾸만 헛손질하는 것도 어색했고 이물감 드는 눈은 뻑뻑하고. 핏줄이 서 흰자 시뻘게진 채로 코 훌쩍대야만 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어, 성찬 선배다!”
교문 들어서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들려오는 속닥댐은 못 들은 척하기엔 너무 컸다. 그들 중 아는 얼굴이 해오는 인사마다 정성찬은 빠짐없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아줬다. 남자와 여자는 물론이고 후배, 친구, 선배 가리질 않는다. 심지어 선생님들도 정성찬을 예뻐했다. 사람이라면 모조리 다 정성찬을 좋아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처럼 굴었고 정성찬도 그만큼 모두에게 친절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면 무엇에게나, 아니, 가끔은 무생물에게도 다정한 것 같아서 박원빈은 가끔 어이없었다.
“끝나고 기다려.”
2층은 1학년, 3층은 2학년. 계단 앞에서 정성찬은 박원빈 어깨를 두드렸고 박원빈이 반에 들어가는 모습까지 꼭 본 다음에야 발걸음을 뗐다. 그 덕분에 둘이 형제냐는 물음은 한 학기가 지나가는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들어왔다. 정말 피가 섞인 혈육인 송은석과의 관계를 물어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정성찬은, 정성찬이라서, 박원빈은 그 이름에서 떨어질 수가 없다.
정말로 모르는 건 아니다.
그렇게나 다정한 정성찬이 저에게 유독 더 다정하고 약하다는 것을. 잘 웃어주는 사람이지만 모두를 마냥 좋아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정성찬이 이만큼 챙겨주는 사람은 오로지 저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 것을 박원빈이 다 알아서, 그래서 꾸역꾸역 핏발 선 눈에 렌즈라도 끼워 넣는 건데.
“원빈아, 진짜야?”
자리에 앉자마자 렌즈를 빼버리고 수업 시간에만 꺼내 쓰는 안경을, 물론 예전에 쓰던 것처럼 무식하게 테 두껍고 알 무거워 눈 크기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디버프템은 아니지만, 문질러 닦던 박원빈 옆에 앞뒤 다 떼먹고 호기심만 가득한 질문이 불쑥 쳐들어왔다. 물론 저도 땡볕 밑 트랙에서 뒹구는 짓 관두고 안경까지 벗은 뒤에는 어디 두고 보기 나쁘지 않은 생김새란 걸 깨달으며 사춘기를 거치긴 했지만 보통은, 대체로 이런 질문의 주어는.
“성찬 선배 있잖아, 진짜로 여자 친구 생기셨어?”
너는 알잖아, 그치? 성찬 선배 너랑 제일 친하잖아. 정말로 전하지 못한 연정에 안달이 나 캐묻는 게 아니라, 떠다니는 소문들 중 사이에서 앞장서 주도권 잡겠단 야심이 가득한 그런 물음표들 뒤편엔 꼭 정성찬이 끼어 있었다. 처음도 아니고 이젠 이런 말 한두 번 듣는 게 아니라 표정 하나 변할 필요성 못 느낀 박원빈은 그저 오늘도 심드렁하게 매일 하는 대꾸, 나는 모르는데 직접 가서 물어봐, 정도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어, 진짜야!”
이런 확고한 대답이 박원빈 입술 말고 다른 관중 입에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지. 박원빈의 시선도 미끼 콱 물고 바늘에 꿰인 것처럼 홱 딸려 올라갔다. 흐릿한 표정 읽으려 허둥지둥 안경을 쓰자 딱히 친하지 않은, 박원빈과도 정성찬과도, 얼굴이 어쩐지 득의양양한 얼굴로 기다렸다는 듯 종알댄다.
“아니, 저번 토요일에!! 나 스카 갔다가 나오는데 정성찬 선배 어떤 여자랑 지나가던데? 막 다정하게 얘기하면서? 막 웃으면서?”
야, 그냥 아는 사이일 수도 있지. 성찬 선배 원래 잘해주잖아. 아니라니까? 딱 보면 느낌이 오는, 그런 거였다니까? 팔짱 꼈던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딱 봐도 고딩은 아닌 것 같았어, 뭔가 대학생? 성인? 와, 연상이라고? 성찬 선배 역시. 야, 박원빈! 너도 알아? 진짜야?? 어?
“박원빈?”
“아니, 어, 아니⋯, 어.”
몰라. 내가, 내가 뭘, 어떻게 알아.
뭔가 목구멍에 턱 막혀 제대로 목소리가 나질 않았다. 박원빈은 소리 반 공기 반 중얼대다 그대로 책상 위에 팔을 올리고 머리를 처박아 숨었다. 방금 닦은 안경에 살갗이 눌려 뭉개지는 것도 모르고 그냥 자꾸만 무언가 더듬대려는 입술을 꽉 깨문 채로.
매일 박원빈이 참 쉽게도 하던 말이었다. 직접 가서 물어봐. 그러나 오늘에야 쉽게도 해오던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 느낌이었다. 여태껏 아무렇게나 해왔던 말의 무게가 죄다 뭉쳐져 단번에 어깨위로 떨어지는 기분. 못 할 말에 덮인 온몸이 무거웠다. 발걸음 하나 내딛는 것도 끈적한 늪 위를 걷는 것처럼 버거워 자꾸만 어디론가 끌려 들어가 바닥까지 가라앉은 채 다시는 영원히 떠오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너 왜 혼자 오냐?”
정성찬은? 집까지 꾸역꾸역 저를 따라붙은 이름에 박원빈이 또 줏대 없이 고개를 쳐들고 말았다. 당연히 박원빈 뒤에 붙어있어야 할 커다란 그림자 하나 찾는 듯 갸웃 고개 한 번 까닥댄 송은석을 박원빈이 답지 않게 형, 매달리듯 불렀다.
“야, 박원빈, 너 무슨 일 있어?”
지금 제 얼굴이 어떤 낯일지 박원빈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못 볼꼴임은 확실할 것이다. 매사 무던한 송은석이 저런 놀란 목소리로 다가오는 걸 보면 분명 박원빈이 제 발로 빠진 늪에서 멍청하게 허우적대고 있단 걸 온 세상 사람들 다 알아볼 정도쯤이겠지.
“성찬이 형 있잖아.”
목소리가 떨렸을까? 어쩌면.
“여자, 여자 친구 생겼어?”
뭐? 허어, 참. 그러나 절실한 박원빈 미련 알 리 없는 송은석은 고작 그거냐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나 낸다. 박원빈은 그런 송은석 얼굴 쳐다볼 생각도 못했다. 시선은 바닥을 헤맸다. 익숙한 바닥 장판의 얼룩이 뱅글뱅글 돈다. 정성찬 여자 친구? 거참. 솔직히 송은석이 하는 말을 온전히 다 들은 게 맞는지 바들대는 손끝 감추려 교복 셔츠 자락 꽉 붙들고 서있던 박원빈 스스로도 자신할 수가 없는데,
“뭐, 곧 연애는 할 것 같네, 보니까.”
그 중에서도 연애, 라는 말만은 똑똑히 들리더라. 박원빈, 들어오자마자 또 어디가?? 뒤통수 울리던 말도 다 귓바퀴에서 미끄러져 날아갔는데 내내 연애, 라는 말만은 아주 똑똑하게 박원빈에게 매달려 떨어지질 않더라.
연애 두 글자만 주렁주렁 매단 박원빈이 정신없이 뛰는 동안 주머니에서 내내 반짝이는 액정은 꾸준히 한 사람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원빈아, 형 끝났다ㅏㅏ」
「어디야」
「왜없어?ㅠ」
「먼저갔어」
「?」
「박원빈이 전화왜안받아ㅏㅏㅏ」
「박원빈」
「원빈아무슨일있어?」
「무슨일있는거아니지」
「??」
「박원빈」
전화와 메시지가 연달아 뒤섞여 자신을 찾아대는데 박원빈은 물끄러미 저를 부르는 이름을 내려다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성찬이형’. 고작 네 글자로 저장된 이름. 그 네 글자가 왜 이렇게 무겁고 괴롭고 아프고, 또.
저도 모르게 또 시소 위였다. 10년 전부터 항상 여기였다. 변한 적 없는 건지 자라지 못한 것인지 모르게 꼿꼿이 고정된 정물화 같은 장면들 위로 여기 이렇게 앉아 있던 10년 전 찰나가 빈틈없이 겹쳐진다.
여름이었다. 박원빈은 방학을 맞자마자 당연히 (엄마를 졸라) 서울에 왔었다. 하지만 지역이 달라 그랬을까, 이미 방학을 한 박원빈과 다르게 아직 방학이 아니라 학교에 가야했던 정성찬을 박원빈은 이모도 송은석도, 아무도 없는 집에서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때도 박원빈은 무작정 이모 집을 나와 이 시소에 앉아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여기에 앉아 있으면 저쪽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고스란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서 정성찬을 골라내는 일은 아주 쉬웠다. 햇빛 쨍쨍한 여름날 뜨끈하다 못해 뜨거운 시소 위에 올라앉아 땀 뻘뻘 흘리면서도 박원빈은 가만히 거기서 오로지 한 사람만 기다렸다.
“원빈아! 너 왜 여기 있어?!”
그리고 정말로 왁자지껄 몰려오는 고만고만한 아이들 사이에서 정성찬을 제일 먼저 찾아냈을 때, 그리고 정성찬 역시 저를 제일 먼저 알아차렸을 때.
“나, 나 혀, 형 기다렸어.”
눈만 겨우 깜빡대며 더위에 지쳐 온순히 대답하는 박원빈 손잡아 끌고 달려가 아파트 상가 작은 슈퍼에서 정성찬이 사줬던 게 빠삐코였다. 이거 시원해. 이마에 대고 있다가 먹어, 원빈아. 박원빈 얼른 앉혀놓고 갓 꺼낸 빠삐코 하나 이마에 꾸욱 눌러주던 손도 분명 조막만한 어린애 손이었을 텐데. 그런데도 박원빈에겐 언제나 저보다 컸기에 박원빈은 고분고분 그 손에다 온전히 저를 맡겼었다.
그래서였다.
언제나 앉아 기다리는 시소, 정성찬이 사주는 빠삐코, 박원빈이 초콜릿보다는 젤리를 좋아한단 걸 서로 알고 나서도 여전히 바뀐 적 없는 저희만의 규칙 같은 약속.
“박원빈! 너 왜 여기 있어!!”
그러니까 오늘도.
제가 정성찬을 피해 먼저 달아난 건데도 또 꾸역꾸역 여기에 앉아 정성찬 얼굴 보겠다 기다렸던 것처럼, 박원빈이 제 연락 모조리 씹고 잠수를 탄 건데도 또 어김없이 여기에 검정 비닐봉지 하나 덜렁덜렁 흔들고 찾아온 정성찬처럼.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여름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이 오래된 시소 앞에서 둘은 또 마주한다. 아플 정도로 떨어지는 빗줄기 피할 생각도 못하고서 흠뻑 젖어가며.
“원빈이 너 먼저 씻어.”
오늘 아무도 없어. 어디 풍덩 빠졌다 나온 듯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물기 뚝뚝 떨궈내는 똑같은 꼴로 정성찬 집에 나란히 들어왔을 때 정성찬은 당연히 박원빈 먼저 화장실 문 앞으로 밀어준다. 저희만큼이나 물에 젖은 비닐봉지 식탁 위에다 던져놓는 정성찬 흰 손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바닥에 둥그렇게 만든 모양 눈으로 쫓던 박원빈이 한번 멈칫 섰다.
“형, 도 다 젖었잖아요.”
불시에 마주친 시선. 그 뒤로 따라붙는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정적. 아주 잠깐인데도 너무 빠르게, 혹은 완전히 멈춘 듯 사이를 오가는 공기.
“⋯빨리 너부터 씻어.”
무심결에 같이 씻을 수도 있다는 선택지를 떠올렸지만 박원빈은 후다닥 익숙한 구조의 문을 열고 몸을 숨기며 쾅, 그 생각의 꼬리를 끊어버린다. 그 뒤로 줄줄이 이어질 상상 아닌 망상들이 무엇일지 이젠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거 별 일 아니어야 하는데. 10년이나 친하게 지낸 형 동생 사이에서 이런 거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게 보통인데. 박원빈은 빗물 잔뜩 맺힌 안경 벗어놓고도 벌써 희뿌옇게 번져 보이는 거울에 비친 제 얼굴마저 부끄러 시선을 돌린다.
그 모든 것을 별 것으로 만들어버린 저를 탓하면서.
트랙 위에서 달리는 걸 포기하고 서울 가서 공부하겠다 우겼던 겨울, 박원빈은 그동안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공부를 고작 두어 달 만에 따라잡느라 매일을 보냈다. 갑작스런 궤도 이탈 선언에 더해진 박원빈 고집을 보다 못한 엄마가 이모 집에다 박원빈 부탁했을 때까지도 이토록 구체적 결의 욕망 같은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고작 한 계절 건너뛰고 만난 정성찬이, 다른 길로 걷기 시작한 정성찬이, 못 믿기게 달라져 있어서 박원빈은 새삼 모든 것을 다시 정립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와르르 타의로 해체된 감정, 당황한 손으로 겨우 끼워 맞춘 목표, 그 사이에서 발견한 저도 몰랐던, 고작 동경 같은 것으로 퉁치고 뭉개기엔 너무 많은 바람들이 자잘하게 박힌 먼지 같은 욕망들. 그것들을 모조리 모아 조립된 것이 박원빈의 정성찬, 이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정성찬은 절대로 알아선 안 될 박원빈의 정성찬.
“배 안 고파?”
씻고 나온 박원빈 손에 들려준, 정성찬이 쥐어주고 간 그놈의 빠삐코는 벌써 다 녹아 있었다. 수없이 있어왔던 일이다. 정성찬 집에서 씻는 거, 정성찬 옷 빌려 입는 거, 거실에 오도카니 앉아 정성찬 기다리는 거. 그런데 자꾸만 별 것이 되고 만다니까. 젖은 수건 목에 걸고 나온 정성찬 덜 마른 머리칼 끝에 남은 물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박원빈은 느닷없이 저를 향한 물음에 지레 놀라 아무렇게나 고개만 끄덕였다. 뭐 먹고 싶어? 지코바 시킬까? 아니면 그냥 라면 먹을래? 형이 끓여줄게. 수건을 건 채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들어가는 정성찬 등을 본다. 너무나 익숙한 그 등을. 되바라진 스스로를 알아챈 순간부터 도무지 정성찬 얼굴을 떳떳하게 똑바로 마주할 용기가 없어 엇박으로 던지게 된 눈길에 박혀버린 등. 왜 안 기다렸어, 왜 전화 안 받았어, 왜 문자 다 씹었어. 그런 말들 다 무시하고 라면이나 끓이고 있는 등.
형은 대체 ‘왜’ 안 물어봐요.
왜.
박원빈은 다 녹아 연하게 밍밍해져버린 초코 맛 액체를 쭉 빨아 한 글자를 함께 삼켰다. 무릎을 세워 그 사이 또 얼굴을 숨기고 들큰한 숨을 길고 조용히 뱉는다.
“먹자.”
운동부 경력만큼 정성찬은 라면을 기가 막히게 잘 끓였다. 심지어 딱 박원빈이 좋아하는 모양대로 끓여냈다, 항상. 박원빈도 똑같이 운동부 출신이라 라면 질리도록 끓였을 걸 알면서도 둘이 있을 때 라면을 끓이는 건 언제나 정성찬 몫이었다. 뜨겁게 김이 올라오는 냄비 위로 한 젓가락 크게 드는 것도 정성찬이 먼저였고 그걸 앞 접시에다 퍼 나르는 것도 정성찬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먼저 라면을 덜어준 앞 접시가 늘 박원빈 거라는 게 박원빈에게는 늘 커다란 문제였다고.
“우리.”
박원빈은 젓가락 끝만 물고 우물대다가,
“술 마시면 안 돼요?”
못 참고 미친 짓을 한 번 해봤다.
“너, 박원빈 너 술 마셔본 적 있어?”
별안간 끝이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쨍했다. 얼른 절레절레 고개 흔드는데도 정말? 정말 아니야? 몇 번이나 되묻는다. 어차피 이 집도 제 손바닥만큼이나 빤하다. 부엌 베란다 김치 냉장고 몇 번째 칸에 아저씨가 늘 드시는 맥주들 쌓여 있는지 박원빈 다 안단 뜻이다. 정성찬이 자꾸 이러면 저라도 가져올까 싶어 젓가락을 내려놓는데.
“너 진짜, 누구랑 마셨어?”
불쑥 잡힌 손끝에 채인 젓가락이 쨍강 냄비에 가서 부딪혔다. 깜짝 놀란 박원빈 시선이 화들짝 들렸다. 망했다. 결국은 붙들렸다. 속눈썹까지 예쁜 정성찬 눈이 평소보다 진해져 박원빈 눈을 꽉 움켜쥔다. 제 손목을 잡은 손아귀 악력보다 눈빛 한 줌의 힘이 수천 배는 더 세서 도무지 박원빈 스스로는 벗어날 수가 없다. 정성찬 앞에서는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없, 없다니까요. 진짜 처음, 인데⋯.”
⋯어, 웃는다. 왜 웃는 건데. 자존심도 없는 가슴팍은 고작 그것만으로도 팔딱팔딱 좋다고 난리다. 눈도 못 떼고 물밀 듯 웃음 번지는 눈가를 코끝을 입 꼬리를 멍하게 보다 덜 마른 머리칼 부스스 흩어놓는 손에 어깨가 움찔댄다.
“마셔본 적도 없으면서 왜 갑자기 마시자고 그래?”
금세 정성찬 앞에 큰 캔, 박원빈 앞에 작은 캔이 하나씩, 그리고 새 젓가락이 놓인다.
“원래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하는 거니까 뭐, 박원빈이는 나랑 처음 마시는 게 맞긴 하지.”
어른은 무슨, 고작 한 살 차이도 제대로 나지 않으면서 꼬박꼬박 형 노릇을 하려는 게 좋고도 싫었다. 자기도 아직 미자면서, 술을 뭐 얼마나 마셔봤으면 마셔봤다고 저한테 배우라고 그래? 칙, 치이이익. 길게 탄산 빠지는 소리를 내뱉는 박원빈 탭까지 따주는 손을 입술 비죽 흘겨본다.
“건배해야지.”
들이대는 정성찬 캔에다 떨떠름하게 제 캔을 부딪었다. 금속 표면에 송글송글 맺힌 찬 물방울이 박원빈 손바닥을 금세 적신다. 입술에 닿고, 캔을 기울이고, ⋯으! 저도 모르게 눈썹 새가 찌푸려들었다. 이도 저도 모를 미묘한 맛이 탄산과 함께 입안에서 톡톡 터진다. 대체 이걸 무슨 맛으로들 마시는 거야.
“자, 박원빈 군? 처음 맛본 맥주 맛이 어떠세요?”
반면 퍽 자연스럽고 여유만만하게 손목 꺾어대며 캔을 비우며 장난을 거는 정성찬이 밉살맞다. 하지만 박원빈은 정성찬 앞에서 거짓말도 못한다. 박원빈이 거짓말할 때만 눈치가 빠른 정성찬 탓이다.
“⋯사람들은 이게 진짜 맛있는 건가⋯.”
가까스로 혼잣말처럼 중얼댄 대답 아닌 대답에 정성찬 아주 소리 내 웃어대기 시작한다. 중간 중간 쓸데없이 박원빈 귀여워, 같은 말 끼워 넣으면서. 그러다가 제일 못된 말을 한다.
“우리 원빈이 아직 애기네.”
진짜, 진짜 제일 나쁜 말. 정성찬 아무 생각 없이 매일 흘려내고 박원빈만 속절없이 휘청휘청 휩쓸려가게 만드는 말. 나도 내가 덜 자란 거 알아요. 하지만 여기서 더 자라면 진짜 큰일날 것 같단 말이야. 그래서 안 자라는 거라고요. 적어도 형 앞에서는. 변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지만 보여주기 싫어요. 다 자라고 변한 박원빈 알면 정성찬이 기함하고 도망갈까 봐. 시소에서 내려갈까 봐. 그런 말들 껴안고 끝도 없이 떠내려가게 만드는 말.
“박원빈!!”
목구멍이 차고 따가웠다. 단숨에 모조리 삼키는 건 역시 무리였다. 그래도 젖어 축축해진 입술 손등으로 벅벅 문지르며 꾸역꾸역 남은 몇 모금까지 죄다 고집스레 털어 넣었다. 깜빡 깜빡 눈이 한쪽만 자꾸 감겨댄다. 물, 물 마셔, 아니, 이거, 라면 먹어, 박원빈. 저보다 더 난리를 치며 제 입 앞까지 가져다대는 정성찬 숟가락 피해 빈 캔이나 와직 우그러뜨렸다.
“형도 마셔요.”
뭐? ⋯허어? 느닷없는 강요에 정성찬 눈썹을 까닥이더니 혀 쯧 찬다. 형은 박군 이렇게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누구한테 술을 이렇게 더럽게 배웠어? 그러면서도 빼지 않고 캔 비워버리곤 박원빈이 한 것과 똑같이 캔을 찌그러뜨린다.
“나 더 마실래요.”
여전히 들이미는 숟가락은 못 본 척 고집스레 덧붙이는 말에 또 정성찬은 허, 헛웃음 친다.
“까분다.”
이번에야말로, 꿈쩍도 않으려는 정성찬 대신 박원빈이 벌떡 일어서자 단박에 손이 잡혔다. 삐긋, 놀라 흔들리는 몸을 잡아 끌어 도로 앉혀놓더니 결국 정성찬이 휴 한숨 쉬며 일어섰다. 딱 한 캔만 더 마셔. 이번에도 박원빈 앞에 작은 캔이다. 큰 캔은 또 정성찬 앞이다. 치이익, 탁. 정성찬 손끝에서 두 번째 탭 젖혀지기가 무섭게 박원빈이 노린 듯 손을 뻗었다.
“야!!”
놀란 정성찬이 도로 뺏기도 전에 몸까지 옆으로 팩 돌리고서 잡아챈 큰 캔 꼴깍꼴깍 들이 부었다. 멋있게 한 번에 들이키면 좋겠지만 여전히 으으, 빈 말로도 맛있다곤 할 수가 없어서. 중간 중간 입을 떼 숨을 돌리면서도 박원빈은 누가 뺏어갈까 양손으로 아주 캔을 꼭 부여잡고 끝끝내 바닥을 털어도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때까지 그걸 기울였다.
“박원빈.”
정성찬도 박원빈 하는 꼴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박원빈이 빈 캔 다시 와지끈 찌부러뜨린 다음에야 남은 작은 캔 들어 비우고 또 박원빈과 똑같이 캔을 구긴다. 그러면서 고작 이름 한 번 부르고 만다. 우스웠다. 왜 그 부름이, 이름 한 번으로 끝난 목소리가 서글픈지 박원빈도 박원빈 자기 마음을 도통 읽을 수가 없다. 감정을 설명하는 글자들이 모조리 뒤엉켜 멋대로 떠돌아 난독증이라도 걸린 듯 바른 순서대로 읽어내기란 박원빈에겐 불가능한 일이 된다. 제 감정도 못 읽어내는데 정성찬의 감정이 보일 리가 없다. 순식간에 눈가로 확 열이 몰려 욱신댄다. 누구에게 맞은 듯 뺨이 화끈댄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정성찬에 비죽비죽 심술이 나 부은 입술을 이를 세워 잘근댄다. 그렇다고 정성찬이 할 빤한 물음들에 할 수 있는 대답도 없으면서 그렇게 부아가 난다.
나 진짜 완전 또라이 아냐? 목구멍 보글보글 간질이며 내려간 탄산 방울들이 내내 다져질 틈 없어 파헤쳐진 채 방치해온 박원빈 마음 구석구석 들러붙더니 이내 작은 폭탄이 되어 팡팡 터져버린다. 폭격을 맞은 속이 울렁댔다. 목구멍으로 뭐가 올라올 것 같아 자꾸만 침이라도 삼켜 그걸 밀어 넣어야만 했다. 이런 게 취한건가? 취했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이렇게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고 이렇게 갑자기 뭐든 다 토해버리고 싶고 이렇게 갑자기 화도 나고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10년 동안 버텨온 것이 한순간 잠시도 견딜 수가 없어지는 게. 이런 게 취했다는 거야? 느닷없이 저릿대는 가슴팍을 꽉 움켜쥐었다. 사람들은 이런 걸 어떻게 좋아할 수가 있는 거지?
“괜찮아? 지금 너 표정 안 좋아.”
원빈아, 박원빈.
자꾸만 그렇게 부르지 말라 하고 싶었다. 자꾸만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고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성찬, 제발.
“너 취했어?”
이렇게 덥석, 어깨 끌어당겨 품에 가까이 안는 행동 같은 건 진짜 제발 좀 안 할 수 없냐고 울고불고 싶었다.
“왜? 속이 안 좋아? 토할 것 같아?”
박원빈이 손등에 핏줄 서도록 티셔츠 앞자락 움켜쥔 이유 따위 짐작할 수도 짐작해서도 안 되는 정성찬은 자꾸만 자기 품으로 박원빈 어깨 끌어당기며 눈을 맞춰 얼굴 살피려 애쓴다. 제 머리칼 바로 위에서 속삭이는 정성찬 걱정이 박원빈 심장을 도리어 꽉꽉 터뜨릴 듯 쥐어짜대는 것도 모르고. 괜찮, 괜찮다고요, 저리 좀, 가요, 좀. 어떻게든 정성찬 어깨 밀어내보려 바르작은 댔지만 체격으로도 완력으로도 다정으로도 밀려줄 사람이 못 되어 도리어 박원빈 자꾸 더 꽉 안아버리는 바람에. 정성찬 가슴팍쯤에 이마를 쿵 박은 박원빈이 못 참고 고개를 홱 들었다.
눈길이 부딪혔다.
눈이 맞았다.
꼼짝도 못하게.
정성찬 냄새가 너무 짙었다. 더 못 참을 정도로 속이 난동한다.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못생겨 보일 텐데, 그딴 걱정도 못하게 요동을 친다. 뭔가 해버릴 것만 같았다. 자꾸 솟구치는 것을 틀어막으려 입술을 꽉 말아 물었는데.
“박원비이⋯!”
인.
마지막 음절은 정성찬 입술 밖으로 나왔지만 누구의 귓가에도 닿진 못했다.
박원빈 입술 틈으로 삼켜진 탓이다.
아주 단순했다. 아주 짧았다. 아주, 그리고 아주.
퍽, 소리가 나도록 밀쳐진 정성찬이 무방비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밀쳐낸 박원빈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우당탕 달렸고. 도어락 열리는 소리, 쾅! 요란하게 문 젖혀지는 소리, 다시 쾅! 문 닫히는 소리, 삑삑 도어락 다시 잠기는 소리. 그 뒤로 박원빈이 신고 왔던 젖은 운동화, 또 그 뒤에 거실 바닥에 밀쳐져 누운 정성찬이 남아있었고, 박원빈은.
“나 그냥 팍⋯, 죽어야겠다.”
침대에 얼굴 사정없이 틀어박은 채 유언 비슷한 걸 중얼댔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고개 팍 쳐들었다. 얼결에 손등 위로 입술이 문질린 탓이다. 손등에 닿은 제 입술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또렷하게 조건 반사처럼 떠오른 감촉이 그러니까.
너무 부드러웠다. 꼬박 10년을 이 한 번에 다 털어버리기엔 억울하다 싶을 정도로, 너무 짧았는데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악!!”
다시 베개에 얼굴 묻고 꽥 비명 질러보지만 여전히 입술은 잊히지 않는 감각으로 데인 듯 뜨거웠다. 눈도 뺨도 이제는 입술까지도 모조리, 억지로 삼켰던 기포가 온통 너덜대는 마음속에 터뜨린 폭탄들부터 시작돼 번진 활활 타는 불길들로 뜨거워서. 울었다.
하루나 이틀 정도 정성찬을 피하는 건 그닥 어렵지 않았다. 물론 정성찬이 찾아와 이모더러 안에 박원빈 있어요? 물으면 도망칠 구석은 없었지만 정성찬도 집까지 찾아오진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냐면? 또 그건 아니라서 박원빈은 또 어이가 없었고.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어쩐지 후회는 없었다. 어떻게 해도 그 이상으로 박원빈이 할 수 있을 건 없었기 때문이다. 여태 품어온 제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었는지에 대한 후회라면 모를까, 이건 언젠가 무조건 벌어질 일이었음을 이제는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이다. 취기, 가 있었던 건지 그게 정말 취한 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를 빌어 저지른 못난 짓 돌이킬 수 있는 법은 없었고 돌아갈 수 있는 길도 없었다.
“⋯엄마, 나 다시 울산 내리갈까?”
물론 그렇다고 정성찬 얼굴 아무렇지도 않게 볼 수 있단 소리는 아니었다. 마음에 남길 것이 없는 기분이었다. 물론 세월이 쌓아온 더께가 이리저리 더덕더덕 묻어 부스러진 잔해 위 검댕으로 남았지만 뻥, 최종적으로 터뜨렸던 커다란 폭탄은 스스로 주체 못할 만큼 자라났던 것들을 싹 날리고 커다란 구멍만 남겨 버렸다. 더는 미련도 가지면 안 된다는 듯, 네가 한 일에 따르는 책임도 네 것이라는 듯.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이르게 제 방으로 들어와 불까지 다 끈 채 침대에 엎어져 비실비실 울산 집에다 흘린 말에 놀랄 엄마 가슴 제대로 진정시켜드릴 정신머리도 없는 것 보면 아무래도 그 폭발 여파로 얼마 없던 알량한 효심마저 날아가 버린 모양이었는데.
“빠삐코 먹을래?”
하지만 예고는커녕 영문도 모르고 박원빈 폭탄 뒤집어 쓴 정성찬은 당연히 피해보상을 주장하고 나섰으니.
“⋯나 이제 빠삐코 안 먹어요.”
어? 왜?? 고작 제가 빠삐코 안 먹겠단 말에 그렇게 세상 무너지는 얼굴을 할 필요가 있나요. 분명 본인이 피해자인데 자꾸만 박원빈에게 제가 잘못한 것처럼 구는 정성찬 때문에 휑하게 구멍 난 가슴팍이 근질댔다. 올라와선 안 될 새살이 자꾸 기를 쓰고 돋으려 들어서. 가지도 않는 피시방 팟에 끼어 두어 시간 헤매고 와도 꿋꿋하게 시소에 앉아 있는 정성찬이 발견될 때마다 답답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물어보지. 왜 그랬냐고. 차라리 욕해주지. 미친 새끼냐고. 너 대체 날 언제부터 그렇게 본 거냐고. 그것도 아니면 아주 모르는 척을 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면 그냥, 그냥 박원빈은 조용히 꺼질 생각이었다. 정말 울산으로 도망가는 것까진 못 하더라도 다른 애들처럼, 정성찬 동경하는 주변의 그렇고 그런 후배들처럼, 아니면 정성찬에게 차인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 정도로. 그럴 정도의 염치는 있었는데, 정성찬은 대체 왜.
“질렸어요.”
10년 동안 바뀐 적 없고 앞으로도 바뀔 것 같지 않은, 아파트 상가 슈퍼 로고가 선명한 검은색 비닐봉지를 내려다보며 시무룩해진 정성찬 두고 돌아서려는데 그럼 송은석이라도 갖다 줘, 기어코 박원빈 손에 그걸 쥐어준다. 더 대꾸하지 못하고 그냥 재빨리 도망치며 박원빈은 손에 들린 봉지 안에서 물기 젖어 바스락대는 소리가 어이없었다. 저 형은 진짜 모르나? 송은석이 제일 싫어하는 게 빠삐코라는 거. 어린 시절부터 박원빈이 빠삐코만 찾아댄 탓에 도리어 송은석은 쳐다도 안 보게 됐다는 거, 그거 정성찬 진짜 모르나. 그런 생각들이 또 마데카솔 바르려 들어 헤드뱅잉 하듯 고개 미친 듯 탈탈 털었는데.
“오늘은 학교 앞에 할인점 털어 왔어!”
빨리 칭찬해달라는 듯 눈 반짝이면서 그런 말을 하면, 양손에 가득 배가 터질 듯 부른 비닐봉지 두 개 달랑대면서 그런 말을 하면. 더 미룰 수도 없잖아.
실상 굳이 버텨 본 유예였다. 박원빈의 멍청한 마지막 발버둥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정말 미련하게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미련 떠는 과정이었다. 한 번은 꼭 짚고 정리해야 할 일임을 알면서도 정성찬에게 내내 미뤄둔 대가. 박원빈은 결국 다시 시소에 앉았다. 자, 뭐 물래, 박원빈! 아직도 저한테 비닐봉지 입구를 벌려 보여주는 정성찬 떨쳐내려 아무거나 집었는데.
“오, 나 이거 처음 봐.”
‘망설임’? 망고 맛인가? 새로 나왔나봐! 자기가 사왔으면서도 신기하다는 듯 박원빈이 골라 든 걸 이리저리 살피더니 저도 하나 골라 들고 남은 건 그대로 모래바닥 위에 던져버린다. 그리고는,
“왜, 왜 거기 앉아요?”
정성찬 저는 철퍼덕, 시소에 앉은 박원빈 바로 앞 모래바닥 위로 주저앉는다. 정성찬 주위로 모래알이 데굴데굴 흩어진다. 여름 볕에 바싹 잘 마른 모래들이 작게 먼지를 낸다. 모래바닥이 무너지지도 하늘이 꺼지지도 않는다.
“저기 앉으면 박원빈 네 얼굴 잘 안 보이잖아.”
손에는 박원빈이 고른 것과 색깔만 다른, 파란색 ‘설레임’을 들고 그렇게 박원빈 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주저앉아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하는 정성찬은,
“⋯왜 울어? 원빈아, 아니, 원빈아, 울지, 네가 울면, 야, 원빈아?”
왜 저렇게 다 쉬운 건지. 박원빈은 한 번도 깨볼 생각도 못한 시소의 규칙 같은 건 아주 간단히 무시하고서, 그래, 그러게. 그냥 이렇게 일어나 버려도 됐던 건데, 박원빈은 왜 먼저 여기서 일어설 생각을 못했을까. 이 균형이 깨어지면 영영 저희 둘 사이도 깨져버릴 거라고 맹목적으로 몰지각하게 믿었던 걸까. 왜 항상 여기에 앉아 정성찬을 기다리기만 했던 걸까.
“형은 어떻게, 왜 다 그르, 그렇게 쉬워요?
이렇게 쉬운 일이었구나. 바싹 곁에 다가서진 못한 채 그저 정성찬 보이는 자리에 혼자 무거운 마음 끌어안고 앉아 정성찬이 하는 대로 허공에서 동동 발을 구르거나 땅에 처박히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만 밍밍한 초코 맛처럼 꿀떡 삼켜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냥 이렇게, 일어서버려도, 다가가 앉아도, 되는 일이구나.
“형은, 다 쉽죠.”
내가 왜 안경을 안 쓰는지, 내가 왜 빠삐코만 먹는지, 내가 왜 서울에 왔는지, 내가, 내가 왜 맨날 시소에 앉는 건지 형은, 형은 모르잖아요. 모르는데 왜 기억해요. 왜 다 알아요. 내 생일 같은 거, 내가 다닌 중학교 이름 같은 거, 내가 산 반지 모양 같은 거, 그런 사소한 것들은 왜 다 아는데요. 다른 사람 생일 같은 건 기억도 못하면서, 왜요? 왜 알아요??
투정 범벅 눈물이 주황색 아이스크림 파우치 위로 뚝뚝 떨어졌다 이내 더 커져 모래바닥으로 뚝뚝 둥그런 자국을 팬다. 원빈아. 목소리보다 먼저 닿은 온기에 짐짓 몸이 떨린다.
“나는, 난 네가 쉬웠던 적 한 번도 없어.”
섬세할 줄은 몰라도 다정한 손길이 박원빈 뺨을 감싼다. 부드럽게 어르는 방법까진 모르지만 놓진 않겠다는 마음은 눌러 담은 것처럼 애타게 감싼다. 박원빈도 그걸 모르는 체는 할 수가 없다.
“원빈아, 그냥 네가 내 옆에 있는 게 제일 좋았어.”
나 일 년 동안 여름이랑 겨울만 기다렸어. 네가 오면 너무 행복하고 갈 때는 너무 슬펐는데, 너무너무 슬펐는데 내가 떼쓰면 네가 다시는 안 올까봐. 내가 못나게 굴면 네가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봐. 그래서 나는 매일 고민했어.
“네가 좋아하는 게 뭔지.”
뭘 좋아할지. 어떻게 해주면 좋아할지. 박원빈, 진짜야. 나는 맨날 그것만 고민했어. 진짜 어려웠는데. 지금도 나는, 원빈이 네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데.
이제야 느껴진다. 아무렇지 않은 듯 제 볼을 만져주는 손에서 사그라들지 않는 작은 떨림과 자신이 보지 못했던 목소리의 출렁이는 파동을. 그랬구나. 형도, 정성찬도 어려웠구나. 나만큼. 시소에 애써 매달려 있었던 건 나만이 아니었구나. 형도. 박원빈의 손바닥이 제 뺨 위에 얹어진 손등을 감쌌다. 덜덜 떨어대는 진동이 두 배가 된다. 뜨거웠다. 비로소 눈을 맞출 결심이 들었다. 긴 속눈썹, 예쁜 눈, 그리고 거기에도 일렁이는 망설임이 있음을 제대로 마주한다.
“그러면 나한테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봤어요?”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 아래에 습기가 진다. 여울진 물방울이 넘친다. 마주친 눈동자들이 서툰 감정을 보듬지 못하고 흘려버린다. 감추지 못한다. 아니, 이제 감추지 않는다.
“네가 갑자기, 안경을 벗었잖아. 나한테 갑자기 존댓말을 하잖아. 네가, 원빈아.”
무서웠어. 겁났어. 모르는 척 해야지, 네가 계속, 있어줄 것 같아서.
푸하, 저도 모르게 웃어버린 박원빈 볼로 뭉쳐진 눈물이 한 번 더 흐르다 정성찬 손을 적신다. 그랬구나. 우리가 똑같이 바보였던 거구나 깨닫게 된 순간 찾아온 동질감과 안도감. 같이 내렸으면 됐는데. 이 시소 같은 거, 처음부터 그런 규칙 같은 거 만들 필요도 없었는데. 아니, 그런 규칙은 애초에 없었는데. 우리는 서로 이렇게 붙잡을 수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우리는 그저 똑같이.
“낭, 나 이거 안 먹을래요.”
꽉 움켜쥐고 있던 ‘망설임’을 정성찬에게 도로 내밀었다. 정성찬은 기다렸다는 듯 ‘망설임’ 대신 자기 손에 쥐고 있던 ‘설레임’을 건네준다. 그럼 이거 먹을래? 박원빈이 힘차게 눈을 깜빡여 남은 물기를 털어내고 고개도 끄덕였다.
“형은요?”
정성찬 냉큼 던져놨던 비닐봉지를 끌어다 똑같은 파란색 파우치를 하나 더 골라낸다.
“또 있어.”
얼마든지 있어.
그리고 뚜껑을 열어 다시 박원빈 손에 쥐어준 것과 제 것을 바꾼다. 드디어 서로의 손에 똑같이 ‘설레임’이 들린다. 달고 사각대는 차가운 알갱이가 입안에서 조금씩 녹는다. 똑같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서로를 보며 웃는다. 7월, 완연한 여름의 어느 낮 더운 공기가 가볍게 휙, 정성찬과 박원빈 사이를 스친다. 마침 비워낸 마음 속 구멍으로 새로운 것이 돋는다. 이제는 감출 필요 없이,
아주 달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