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ART VIDEO AFTER

진입 전에 이 편지를 먼저 읽어 주세요
by. 프리마


 


안녕하세요. 저는 방문해 주신 청울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3-1반 정성찬입니다.

청울고 축구부 11번이고, 출석 번호는 13번이에요. 신뢰를 주기 위해서는 본인에 대한 정보를 먼저 밝히는 게 좋다고 해서 자기 소개를 조금 해 봤는데 …… 쓰고 보니 민망하네요. 책을 좀 많이 읽어 둘 걸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험난해진 세상에 편지만큼 직관적이고 편리하게 위험을 알릴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아서요. 글씨가 예쁜 건 아니지만 최대한 노력해서 쓰고 있습니다. 기껏 쓴 편지를 못 알아보시는 일이 없도록요. 변명을 조금 하자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은 아주 추운 겨울입니다.

아무튼 뜬금없이 중앙 현관 문짝에 붙어 있는, 이 수상한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하나입니다.

현재 청울고등학교 내부는 이미 좀비에 점거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학교를 수색하시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알리고자 이 편지를 씁니다. 중앙 현관을 포함해서 문을 다 잠궈 내고, 여기만 딱 제외하고 엑스 표시를 치고 다니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생색 내는 건 아니에요. 어쨌거나 멀쩡한 물자나 안락한 거처를 기대하고 오셨을 게 분명한데, 실망스러운 소식을 안겨 드리게 되어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죄송할 건 아니지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청울고등학교 내부는 이미 좀비에 점거된 상태입니다. 학교를 수색하시는 것도, 거처로 삼으시는 것도. 그 어떠한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조속히 다른 안락하고 좋은 거처를 찾으시기를 소망합니다. 살아남으세요. 파이팅입니다.

 

청울고등학교 3-1반 정성찬 드림.

다른 방문자를 위해 이 편지는 모두 읽으신 뒤 다시 제자리에 부착해 주세요!

 


 

 


 


잔뜩 지친 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가 앞선 생존자가 남겨 두었을 다정한 편지의 마지막 문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다른 방문자를 위해. 이미 낡아 버린 건물이었다. 어느 누가 멀리서부터 엑스 표시가 잔뜩 쳐져 있는, 불안함 그득한 이 학교에 올 생각을 할까. 마지막 문장이 참으로 바보 같은 배려라고 생각하며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도 한때는 여러 생존자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이 편지의 도움을 받았던 것인지, 꽤 낡은 편지 봉투에는 여러 사람의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깜빡깜빡. 잠시 봉투 위에 적힌 글씨를 바라보던 남자는 들고 있던 편지를 고이 접어 봉투에 넣었다. 이후 봉투는 남자의 바지 주머니로 향했다.

더 이상 방문객을 위한 편지가 필요하지 않을 이 학교에, 추신을 지켜 봉투를 붙여 둘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이어 남자는 중앙 현관을 잠그고 있던 자물쇠를 여러 번 힘주어 내리쳐 끊어내고 느릿하게 문을 열었다. 어찌나 오래 열리지 않았던 것인지, 문은 뻑뻑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남자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학교 안으로 들어선다.

학교를 거닌다. 그러다 남자는 미술실 앞에 멈춰섰다. 문을 연다.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바닥을 가득 메운 편지와 편지. 그리고, 편지들이었다.

 

 

 

 






진입 전에 이 편지먼저 읽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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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              NO.

 



안녕, 원빈아. 어떻게 해야 내가 너랑 했던 약속을 더 효율적으로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결국에는 이렇게 편지를 써 봐. 아니다. 이게 편지가 맞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앞으로 쓸 건 일기에 가까울 것 같은데.

기억을 남기려고 쓰는 건 보통 일기인 게 맞잖아. 하지만 나중에 네가 볼 거라고 생각하니까 편지인 것 같기도 하고. 꽤 어렵네. 이런 건 원빈이 네가 잘 정해 줬는데. 아무래도 네가 와서 내가 쓴 게 편지인지, 일기인지 정해 줘야 할 것 같아. 나는 그걸 군말 없이 따를 거고.

하지만 일단, 네가 정해 주기 전까지는 나는 이걸 편지라고 부를게.

 

오늘의 나는 꽤 많은 일을 했어. 미술실에서 색색의 스프레이를 훔쳐다 멀리서도 볼 수 있게끔 엑스 표시를 쳤어. 누가 봐도 들어오기 싫게 생겼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바깥으로 통하는 모든 문과 창문을 잠갔어. 마지막으로 중앙 현관을 잠그고 창문으로 건물을 넘어오면서,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도둑 된 기분.

그렇게 들어와서 창문을 하나씩 잠그다가, 마지막 창문을 잠글즈음 눈이 오기 시작하는 거야. 처음에는 조금씩 오다가 아예 펑펑. 그렇게 내리는 눈을 보고 있자니 우리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어. 기억해? 고등학교에서 만난 것 말고. 내 졸업식에서 아주 처음 마주쳤던 날.

나는 살면서 특별하게 누군가랑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그냥, 축구부였으니까. 같은 부원인 애들이랑만 적당히 친하게 지내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런데 진짜 신기했던 게, 너는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되게 특별하게 느껴졌다? 살면서 누군가를 보자마자 그런 마음이 든 건 처음이었어.

그때의 너는 내 친구의 아는 동생이었잖아. 쭈뼛쭈뼛 졸업식 꽃다발을 들고 내 쪽으로 다가오는 순간부터 나는 네 이름이 되게 궁금했어. 이름이 뭘까, 얘도 같이 졸업하는 애인가? 명찰 보니까 한 학년 아래네. 그런데 왜 오지. 아, 내 친구 축하하러 온 거였구나. 하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애가 나를 축하하러 올 리 없지. 괜히 여러 생각을 했어.

 

/

"어, 어어. 야. 원빈아. 나 축하해 주러 온 거지?"

"…… 어, 네. 현보 형, 졸업 축하해요."

"아이, 뭘 이런 걸 또. 야, 성찬아. 너 얘 알아?"

"어? 아니, 처음 보기는 하는데……."

"원빈이야. 박원빈. 우리 엄마 친구 아들임."

/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 친구가 너를 아냐고 묻는 거야. 솔직히 엄청 당황했어. 생각이 복잡한 게 딱 들킨 건가 하고 말이야. 다행히 그런 건 아니더라. 그리고 친구가 네 이름을 소개해 줬어. 듣는 순간 머릿속에 콕 박혔지. 박원빈, 박원빈, 박원빈. 네 이름.

나는 조그마한 물건은 셀 수도 없이 잘 잃어버리고, 친구들 이름 외우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는 편인데. 이상하게 네 이름은 듣자마자 외웠어. 절대 안 잊어버릴 것 같더라.

물론, 뭐…… 네 이름이 내 친구가 오바 떨며 말했던 것처럼 대한민국 대표 미남 배우랑 똑같은 이름이기도 하고. 그런데 솔직히 너도 엄청 잘생겼고. 묘하게 낯가리는 얼굴로 나를 자꾸 보는 게 꽃다발 때문에 미안해서인가? 신경도 쓰였고. 네가 너무 인사를 정중하게 하기도 했고.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내가 네 이름을 유난히 더 잘 기억했을 수도 있겠지. 그렇겠지만 그냥, 다른 이유들은 영 마음에 안 차고 복잡하기만 한 것 같아서.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면. 나는 사실 너를 처음 마주친 그 순간부터.

 

/

"안녕하세요……."

"응? 응, 원빈이 안녕. 아, 그. 혹시 내 이름 아나?"

"……."

"성찬이야. 정성찬."

"아, 넥. 아니, 넵. 네…… 졸업 축하, 드려요."

/

 

첫눈에 반해서. 그래서 맥도 못 추고 꼼짝없이 너를 기억해 버린 것 같아. 하지만 그날 막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 말 그대로 그냥 처음 만나기만 했던 날이잖아.

그냥 본의 아닌 통성명, 시답잖으면서 뚝뚝 끊기는 대화. 꽃을 주지 못해서 마음이 걸리는지 (나는 진짜 이렇게 생각했어) 힐끔거리면서 자꾸 너는 나를 보고.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졸업을 축하하고. 그날, 졸업 축하한다는 말만 너한테서 이백 번은 들은 것 같다.

그렇게 삼십 분 남짓 같이 있다가 졸업식이 끝난 뒤에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남남이 되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지. 돌이켜 보면 이날이 참 아쉬워. 내가 내 감정을 조금 더 신경 썼더라면, 깊게 생각했더라면. 그래서 친하게 지내고 싶은가 보다, 결론을 내고 너한테 다가갔다면.

하물며 집에 가는 길에 친구한테 네 연락처를 물어보기라도 했다면. 우리는 더 빠르게 사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후회해서 뭐 하겠어. 그날의 나는 그러지 않았고,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시 모르는 사이로 살다가 만났을 때 더 반가웠고 운명처럼 느껴졌으니. 더 좋은 방향이었다고 생각할래.

 

그리고 이 편지에서 처음 말하는 건데, 나는 졸업식 이후로 다시 너를 만날 때까지 때때로. 어쩌면 자주, 네 생각을 했어. 가끔 꽃집을 지나거나, 꽃다발을 받는 일이 생기는 날에는 더 선명하게 원빈이 너를 떠올렸지. 고작 삼십 분 마주친 애가 무언가를 볼 때마다 떠오른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파고들지는 않았어.

당시의 나는 고백을 받고 누군가를 사귀어 본 적은 있어도 먼저 고백한 적은 없었고, 사귀어도 막 오래 만나거나 하지는 못했고. 더군다나 남자를 만나 본 적은 더욱 없고, 내가 남자애를 좋아하게 된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게 반했다는 느낌인지 알 길이 없었거든.

이걸 들었을 때의 네 반응이 궁금하기는 하다. 나한테 사기꾼이라고 하려나? 그래도 제일 궁금한 건, 너는 그 일 년 동안 내 생각을 얼마나 했을까 하는 거야. 나보다 많이 했을까? 나는 뭔가, 내가 너보다 더 많이 했을 거라고 확신해. 그냥 그런 마음. 오늘 편지는 여기까지 써야겠다. 반박은 안 받겠다는 느낌도 있지? 맞을지도…….

 

아, 이것도 써야지. 원빈아, 나 오늘부터는 기도를 조금 많이 해 보려고. 여태 신을 제대로 믿어 본 적은 없지만, 오늘부터는 없던 신앙심이라도 만들어서 신에게 부담을 좀 줄 거야. 기도 내용은 철저히 우리를 위한 거지.

네가 어느 곳 하나도 다치지 않고 무사하기를. 내가 너를 위한 편지를 더 많이 쓸 수 있기를. 펑펑 내리는 궂은 눈으로 네가 고생하지 않기를. 이런 것들. 자기 전에 기도 꼭 하고 잘게. 그러면 진짜 편지 끝.

 

청울고등학교 3-1반 정성찬이, 청울고등학교 2-3반 박원빈에게 씀.

 

 

 


 
 

DATE         .      .              NO.

 



안녕, 원빈아. 

오늘은 강당을 다녀왔어. 이놈의 좀비들은 또 죽지도 않고 여러 명 깨어났더라. 농구공을 죄 쏟아 어지럽혔더니, 알아서들 발 구르며 넘어졌어. 약간 불쌍하기는 했는데……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러다 강당 창고문이 열려 있는 걸 봤어. 유용한 물품이 있을까 싶어서 들어갔는데, 여태 썼던 현수막들이 있더라고.

거기에는 네 입학식이자 내 개학식 때 썼던 현수막도 있었어. 며칠 전에 너랑 제일 처음 만났던 때에 대해서 써서 그런가, 유난히 눈에 잘 들어오더라. 웃기지. 오늘은 그때에 대해서 떠올려 보려고. 더 잘 떠올리려고 강당 창고에서 가져온 현수막을 바닥에 깔아 둔 상태로 편지 쓰는 중이야.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엄청 긴장하고 있던 원빈이 네 얼굴. 너는 내가 말할 때마다 은근히 긍정도 안 하고 부정도 안 하는데, 원빈이 너는 진짜 고양이를 닮았어. 눈이 엄청 큰데, 눈꼬리도 길고. 눈이 진짜 고양이. 완전 고양이.

그래서 긴장하거나 집중하면 뭔가, 되게 신기하게 눈이 동그래진다? 너는 모르지? 이건 내가 좋아하는 네 얼굴들 중 하나야. (사실은 원빈이 네 얼굴이라면 다 좋을지도?)

여튼 내가 딱 너를 발견했을 때, 너는 강당에서 제일 귀엽고 동그란 눈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을까. 그 순간부터 나는 교장 선생님의 재미없는 훈화 말씀이 끝나기만 기다렸어. 지금 생각해 보면 좀 무모했다. 나는 왜 네가 나를 당연히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마 저번에 쓴 편지에 적었던 것처럼, 내가 때때로 너를 자꾸 생각했어서 그랬나 봐. 반가움 반, 나도 모르게 쌓아 버린 내적 친밀감 반. (내적 친밀감이라고 적기는 했는데 뭔가 좀 틀린 단어 같아 뭐가 맞지?) 근데 진짜로 네가 나를 알아보기는 했잖아? 훈화가 끝나자마자 달려가서 내가 딱 너 붙잡고, 별다른 소개도 안 하고 그랬는데.

 

/

"박원빈?"

"…… 안녕하세요?"

"안녕! 너 우리 학교 왔구나."

"네, 네에…… 뭐."

"그런데 나 알아봐 주네? 고맙게."

"네? 당연히 알죠……."

/

 

너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그리고 그때 네가 무슨 소리 하냐는 표정으로 당연히 안다고 대답했었잖아. 나 그 대답 듣고서 기분이 진짜 좋았다? 내 생에 그만큼 기분 좋았던 개학식은 처음이었어. 만약 내가 여러 번 다시 태어나고, 또 엄청나게 많은 개학식을 겪는다고 해도. 솔직히 그날의 개학식보다 기분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아.

나중에 이 이야기 너한테 했을 때, 네가 그게 뭐냐고 바보 같다고 했던 것 생각난다. 하지만 진심이었어. 알지? 모를 리는 없지만 또 써 봐. 그러면 편지는 여기까지.

 

청울고등학교 3-1반 정성찬이, 청울고등학교 2-3반 박원빈에게 씀.

 

 

 


  

DATE         .      .              NO.

 


  

안녕, 원빈아.

이걸 쓰기 직전, 나는 학교에 남아 있던 마지막 딸기 우유를 마셨어. 딱히 목이 마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편지로만 너를 보고 싶어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마셔 봤어. 네가 좋아하는 건데 내가 다 마셔 버려서 나중에 화내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아니다. 네가 화낼 리는 없겠지. 더군다나 이런 이유라면, 더욱. 그런데 원래 맛이 이런가.

네가 보고 싶어서 마신 거였는데, 마시고 나니까 네가 더 보고 싶어. 나는 항상 네가 주는 딸기 우유만 마셨어서. 스스로 딸기 우유를 찾아서 마신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 그런데 웃긴 점. 나 누가 무슨 우유 좋아하냐고 하면 딸기 우유 좋아한다고 말해. 아마 네 덕분인 것 같아.

너한테 처음 딸기 우유를 받았던 게 개학식 직후에 우리 처음 매점에서 만났던 날이잖아. 맞지? 매점에서 딱 마주치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오며가며 얼굴 보고 인사하던 게 전부라서, 나는 그런 식으로 너랑 마주치던 날을 되게 기다렸었어.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샀던 빵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빵을 대뜸 내밀었던 거야.

그때도 너는 또 놀란 고양이 눈. 동그랗게 뜨고 깜빡깜빡.

 

/

"아…… 빵 안 좋아해?"

"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제가 받아도 되는 거예요?"

"응? 당연하지. 받아 줬으면 좋겠는데, 어, 부담이거나 하면 괜찮아."

"아니.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잠깐만요."

"응?"

"잠깐만 기다려요. 진짜 잠깐만요!"

/

 

당연히 네가 당황했을 거라고 생각해야 했는데, 나는 네가 빵을 안 좋아하나? 싶었어. 매번 네가 나한테 형도 참 형이다~ 하는 게 무슨 말인지, 이제서야 이해 중인 것 같기도 해.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을 했어. 빵 안 좋아하는 애한테 괜히 내밀었다. 이거 진짜 어쩌냐. 다행스럽게도 네가 잠깐만 기다리라면서 다시 매점 쪽으로 달려가길래, 어, 아닌가? 했지만.

여기서 웃긴 말 하나. 나 네가 기다리라고 말했을 때부터 다시 나타날 때까지 진짜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어. 나는 그때부터 네 말을 되게 잘 들었나 봐.

어쨌든, 잠깐 기다리라고 한 것치고는 오 분 정도 지나서 돌아왔잖아. 손에는 딸기 우유 하나 들고. 사실 나는 원래 흰 우유만 마시는 편이었는데, 네가 딸기 우유를 내밀면서 그러면 형은 이거 드세요! 하자마자 저항 없이 받았어. 내 최애 우유가 바뀌는 순간이었을 거야, 그게.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우리 꽤 많이 가까워졌지. 매점에서 마주치면 꼭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는 빵을 주고, 너는 딸기 우유를 주고. (가끔 초코 우유 줄 때도 있었고) 그러다 내가 야간 훈련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야자 끝나고 가는 너랑 한번 마주쳐서, 우연히 집 방향 같은 걸 알게 됐잖아.

이때부터는 우리 등하교도 같이 했지? 전화번호도 자연스럽게 교환하고. 메시지 트고. 가끔 같이 못 가는 날에는 전화도 하고. 와…… 이렇게 쓰니까, 우리 진짜 좀 미쳤었네. 사귀는 것 빼고는 다 하는 사이가 이런 거겠구나 싶어.

가랑비에 옷 젖는 줄도 모른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지? 쓰고 생각해 보니까 정말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가까워졌는데, 위화감 하나도 안 들었던 것 같아. 저때의 나는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알아서 하는 말인데. 아마 내가 너한테 첫눈에 반한 상태여서겠지.

 

그러고 보니 걔는 잘 살고 있을까? 우리 사귀게 도와줬던 애 있잖아. 나랑 축구부 같이 했던 애. 이름이 뭐더라……. 아. 현보. 걔 정도의 성격이라면 잘 살 것 같기는 한데, 걱정이 되기는 한다. 우리는 현보한테 진짜 고마워해야 하잖아. 오늘부터 우리를 위해 하는 기도에 현보도 간간이 끼워 줄까 싶어. (다시 생각하니까 이건 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딱 거기서 우리가 현보를 만났을까? 중학교 졸업하고 현보는 아예 축구를 안 하기도 했고, 학교도 갈려 버려서. 나랑은 연락도 안 하고 자연스레 멀어졌었거든. 너야 엄마 친구 아들이라고 해도 타이밍이 진짜 신기해. 학교 방향도 완전 반대라서 마주칠 일이 아예 없는 동선이었잖아.

하교하다가 현보를 마주치고, 눈치도 없는 현보가 원빈이 너를 보면서 진짜 눈치 없는 말을 하고.

 

/

"어? 야, 박원빈! 어? 어, 정성찬도 있네?"

"어…… 어? 뭐야, 신현보. 왜 여기 있어?"

"아니, 나 이 근처에 약속 있어서 왔다가. 근데 박원빈, 뭐냐?"

"…… 뭐, 뭐가요."

"성공했어? 한 거야?"

"……."

"뭐를 성공해?"

"어?"

"어?"

"응?"

"어?"

"뭔데, 신현보."

"……."

"어, 원빈아! 어디 가?"

/

 

음, 아니다. 되레 눈치 있는 말이었으려나? 나는 꿈에도 몰랐어. 내가 가랑비에 옷 젖는 줄도 모르는 동안 네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고, 내 마음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준비 중이었던 것. 진짜 하나도 몰랐어.

네가 대뜸 뛰어가 버리니까 나는 너무 당황해서, 현보를 붙잡고 물었던 것 같아. 방금 뭐 말한 거냐고. 뭐 때문에 그러는 거냐고. 원빈아, 그거 알아? 현보 걔, 은근 의리 있더라. 자기가 말실수한 거라고 엄청 뭐라고 하더니. 전전긍긍하던 표정으로 나한테 그랬어. 일단 원빈이 따라가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원빈이가 다 말해 줄 수도 있다고.

네가 해야 할 말인 걸 알고 절대 대신 안 해 주더라. 그런 애였으니까 원빈이 너랑 어렸을 때부터 친했을 거고, 네가 졸업도 축하해 줬을 거고. 남들한테 쉽게 말 못 했던 것도 말했던 거겠지?

 

현보 말 듣고 정신이 딱 들어서. 나는 그때부터 네가 뛰어간 방향으로 달려갔어. 그날 너도 어찌나 빨리 뛰었는지, 오 분 정도 달리고 나서야 네 뒤통수가 겨우 보이더라. 머리는 한껏 복잡했어. 네가 나를 두고 준비 중인 건 여전히 모르는 상태였는데도 복잡했던 이유는, 나한테는 말 안 하고 현보한테만 말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별로였어서.

이쯤 되면 그냥 나도 자각을 했어야 했는데. 진짜 왜 나도 너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을 못 했을까? 나중에 다섯 번 정도는 바보라고 해도 아무 말도 안 하고 넘어갈게. (원래도 넘어가기는 했지만 아예 인정도 할게 이번에는)

그러다 네 어깨를 딱 잡고 몸을 돌렸을 때는 …… 나 엄청 당황해서 머릿속이 하얘졌었어. 대체 무슨 이야기길래 현보한테만 하고 나한테는 안 해? 나도 모르게 따지듯이 말이 나갈까 봐 경계하던 것도 다 까먹고, 시뻘게진 네 얼굴을 보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었지.

 

/

"…… 원빈아?"

"……."

"왜 그래. 괜찮아? 아니, 아니…… 왜 그래?"

"다 망했어요."

"어?"

"다 망했다고요. 신현보, 개자식 때문에 망했어요."

"왜, 왜 그래. 어? 뭐가 망했는데? 형이 도와줄게. 뭔데?"

"형이, 형이 어떻게 도와줘요…… 절대 못 도와줘요."

"어? 아니야. 형 뭐든 잘할 수 있어. 진짜야. 뭔데? 진짜 도와줄게."

"……."

"원빈아……."

"그럼, 그럼 대답해 봐요."

"응. 알겠어. 뭐든 물어봐."

"형은요. 제가 사귀자고 하면."

"……."

"사귈 수 있겠어요?"

"……."

"저요, 형 좋아해요. 예전부터 그랬어요. 졸업식 때, 사실 형은 저 알지도 못 하는데 축하하러 간 거고. 그리고, 또."

/

 

곧 울 것 같은 얼굴처럼 보여서. 어, 이거 뭐지.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는 거야. 경계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목소리는 누그러지고. 괜히 내가 어깨를 너무 아프게 잡았나 싶어서 힘도 빼고. 엄청 어르고 달랬었잖아, 내가. 와중에 현보 탓을 하길래 나중에 그 새끼 한 대 쳐야 하나 생각도 했었어…….

그러면서 어떻게든 너를 달래고 싶어서 진짜 뭘 말하든 다 들어줄 기세로 말하고. 그런데 나, 이거 나중에 진짜 꼭 물어보고 싶어. 다 망했다면서, 평소에는 낯도 가리고 부끄럼도 많이 타는 애가. 어떻게 딱 그 상황에서. 울기 직전인 표정으로 눈 딱 뜨면서 질문을 하고, 고백을 할 수 있어?

네가 그렇게 물어본 덕분에, 그때 나도 헤매지 않고 곧바로 생각하게 된 거야. 원빈이가 나한테 사귀자고 하면, 나 사귈 수 있나? 어, 어…… 있을 것 같은데. 진짜로, 있을 것 같은데? 아니. 사실, 나 얘랑 사귀고 싶었던 것 같은데? 네가 예전부터 날 좋아했다고 말하는 말들을 들으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 아. 쓰다가 생각났다. 묻고 살았는데.

만약 나한테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나는 반드시 이때로 돌아가서 내 바보 같은 반응을 지우고 조금 멋지게, 다시 반응하고 싶어.

 

/

"어……."

"사귈 수 있겠어요, 형?"

"어, 당연하지."

"……."

"생각해 봤는데. 너랑 진짜 사귀고 싶었던 것 같다, 나."

/

 

아……. 그런데 또 웃기기는 하다. 딸기 우유로 시작하고 쓴 편지인데, 여기까지 왔네. 간만에 시원하게 웃었어. 오늘은 기분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아. 오늘의 편지는 여기까지.

 

청울고등학교 3-1반 정성찬이, 청울고등학교 2-3반 박원빈에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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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나 꿈을 꿨어. 정말 너무 나쁜 꿈을 꿔서, 갑자기 너무 불안해. 해소할 수 있는 창구가 이 편지밖에 없다는 게 죽을 것 같아. 다친 곳 하나도 없는 거지? 무사한 거지?

나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정말이야. 하루가 멀다 하고 자기 전에 꼭 손 맞잡고 기도하고 자고 있어. 가끔은 아침에 일나서도 오늘 네가 괜찮은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고 기도. 그런데도 내 기도가 안 먹히지는 않았겠지? 그럴 거야. 그럴 거라고 믿어.

정말로.

……

정말로, 원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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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원빈아.

어제는 정말 별로인 꿈을 꾸고 일어나서, 무슨 정신으로 저런 편지를 쓰고 남겼는지 모르겠다. 쓰면서 울기도 했나 봐. 군데군데 글씨도 번져 있더라고. 말 안 해도 될 테지만 사실, 나중에 네가 읽고 나 울었다고 마음 아파할까 봐 미리 이실직고하는 거야.

나 슬퍼서 운 게 아니라, 무서워서 운 거니까 너무 마음 아파하지는 마. 꿈이 진짜 무서운 꿈이라서 그랬어. 무슨 꿈이었냐면 …… 처음 좀비가 나타났던 날의 꿈. 그날의 감정까지 너무 생생하게 느껴지는 꿈이었어. 사실 나 그날 진짜 무서웠거든. 너랑 마주치자마자 무서운 감정이 내려가서 티를 안 냈었는데, 아무것도 못 할 뻔했어. 그 순간에 네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거야.

그날, 나는 좀비 영화로 치면 시작과 동시에 죽는 엑스트라 43 정도 됐겠지. 만약 오전 훈련이 있었다면 43까지도 아니고 엑스트라 8 정도였을지도 몰라. 그날 훈련이 모두 오후에만 있어서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던 건, 솔직히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겪은 행운일 거야. (첫 번째는 원빈이 너 만난 거)

 

꿈을 꿀 때마다 가장 생생한 건 늘 운동장에서 체육을 하고 있던 애들의 비명이야. 원빈이 네가 있던 교실도 이랬을까? 내가 있던 교실은 그 소리에 놀라서 선생님이고, 학생이고 할 것 없이 창문으로 다닥다닥 붙어 바깥을 봤어. 종말의 시작을 태평하게 목격할 수 있던 것도 복이라면 복일까…… 나는 아닌 것 같아.

살면서 그렇게 많은 피를 본 건 처음이었어. 순식간에 속이 좋지 않더라. 반의 몇몇 애들은 토를 했어. 하마터면 나도 할 뻔했지만, 간신히 입을 틀어막으며 참았던 것 같아. 갑자기 목격하게 된 광경 속에 현실감이 진짜 조금도 없어서. 아주 잠깐 동안은 생생한 꿈일까 싶기도 했어. 알잖아, 나 수업 시간에 보통은 자는 거.

귓가로는 왕왕거리며 토하는 소리와 비명이 들리고, 다른 애가 다급한 마음에 팔을 휘적거리다 내 옆구리를 퍽 하고 치고. 가뜩이나 안 좋은 속은 계속 울렁거리고. 머릿속은 새하얗고. 그 모든 게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꿈일 거라고 은연중에 치부해 버리기도 했어. 몇 분 정도는 진짜 정신을 못 차렸다?

그즈음 교실 스피커를 통해서 방송이 나왔지. 너도 들었었지, 원빈아? 진짜 안 하느니만 못한 방송이었어. 취지 자체는 좋았지만, 끝이 안 좋았잖아.

 

창문에서 떨어져 커튼 쳐라. 경찰과 구급차를 불렀다. 곧 수습될 예정이다. 어떤 상황인지 판단 후에 공지할 테니 모두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라. 이런 말을 하면서 안심시키려고 엄청 애쓰시는 게 다 들렸는데. 이어서 비명이랑 엄청 기분 나쁜, 그 질척이고 끊어지는 소리들이 콰지직. 방송을 다 타 버려서.

정신을 다잡다가도 다시 툭, 못 차리겠더라. 듣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어. 심장이 짓눌리는 것 같았고. 여러 생각이 들었어.

이거 우리 학교에만 일어난 일인가. 왜 여기서 일어났지? 이거 진짜 꿈이 아니야? 아니, 진짜인가 봐. 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말도 안 되게 무섭잖아. 그런데 우리 학교에만 일어난 거라면, 그런 거라면……. 이때 정신이 퍼뜩 들더라. 그때 나만 학교에 있는 게 아니었잖아. 원빈이, 너도 있었으니까.

깨달은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던 비명들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어. 네 생각만 났어.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이든 너를 봐야 할 것만 같았어. 네가 무사한지 확인부터 해야 마음이 조금 진정될 것 같더라. 바로 주변을 살폈어. 앞문, 뒷문 할 것 없이 애들이 이미 다 몰려 있길래 창문으로 진로를 틀었지.

몸싸움도 자신 있었고, 인파를 뚫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는데. 나는 너를 빠르게 보는 게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창틀을 짚고 올라가자마자 네 목소리가 딱 귀에 꽂혔어.

 

/

"섭, 성 …… 찬."

"……."

"성찬, 이,"

"……."

"성찬이 형!"

/

 

사랑의 힘이 이래서 위대하다는 건가 봐. 그 넓은 강당 속에서 너만 딱 보였던 것처럼. 그때보다 훨씬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원빈이 네 목소리가 정확하게 들렸어.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지도 바로 찾았어. 계단을 내려오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모습이 보이는데, 조바심이 났어.

지금 너를 놓쳤을 때 다시 찾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까. 오래 걸리면 어떡하지? 위험한 상황에서 한시라도 너랑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든 너랑 같이 있고 싶은데. 너를 내 곁에 두고 싶은데. 그 생각이 드니까 그냥 길이 보이는 느낌으로 눈이 트였어.

그나마 애들이 밟지 않고 있는 바닥에 발을 딛고 네가 있는 곳으로 무작정 달렸어. 몸싸움도, 인파를 뚫는 것도 자신 있다고 했잖아. 나 그때 엄청 빨리 달려갔지, 너한테? 가자마자 손목도 기가 막히게 딱 잡았고. 손안으로 네 손목이 닿자마자 묘하게 안심했었어, 나. 너도 나랑 똑같이 안심했던 걸까. 더 이상 나를 다급하게 부르지 않더라.

 

아마 그 상황도 좀비 영화 속 한 장면이었다면, 아마 우리는 그 인파 속에서 껴안고 난리를 피웠을 텐데. 우리한테는 실제 상황이었으니까. 그런 걸 하는 대신에 도망을 쳤지. 처음 좀비가 나타난 게 운동장이었으니까 거기로 갔다가는 개죽음일 것 같아서. 위로, 위로. 말하지 않아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위층으로 올라간 게 지금 생각해 보니 신기하네.

그러다 5층 복도에 다다랐을 때, 원빈이 네가 비어 있는 미술실을 보자마자 나를 끌고 달렸잖아. 비록 손목을 먼저 붙잡고 달린 건 나였지만, 미술실로 달려가는 네 모습이 나한테는 더 멋있게 느껴졌어. 당연한가?

미술실에 도착하자마자 원빈이 너는 그랬지. 창문부터 다 막아야 한다고. 역시, 박원빈 멋있다니까. 내 남자 친구 멋있다. 나는 또 네 말을 잘 들어서 도화지란 도화지는 죄 모아서 테이프로 붙이고 또 붙였어. 그걸 붙이는 동안에는 정신만 없었지, 주변 상황이 또 실감이 안 났던 것도 같아.

그리고 다 붙이고 나니까 갑자기 무서워졌어. 비명이랑 끔찍한 소리들이 계속 들려와서. 그런데 너도 고개를 푹 숙이고 선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 버린 게 눈에 보이니까. 당장에 내 공포보다 네 무서움을 해소해 주고 싶더라. 급하게 쓰느라 손에 붙어 버린 테이프 같은 건 신경도 안 쓰였어.

그 무서운 상황에서 갑자기 네 손을 꼭 잡았다가 안은 건 그래서야. 네 온기가 품 안에 들어오니까 실감은 났지만 나도 덜 무서웠어. 하지만 인정은 해야 했지. 이 상황은 진짜 꿈이 아니구나. 그래서 너를 껴안은 채로 똑같은 말만 반복했어.

 

/

"원빈아."

"네…… 네, 형."

"괜찮아."

"……."

"괜찮을 거야."

"맞, 마, 맞아요."

"……."

"우리는 괜찮을 거예요."

/

 

괜찮을 거라고. 우리는 정말이지 괜찮을 거라고. 내가 매일 같이 하는 기도처럼 그것도 우리를 위한 말이었지.

그리고 그날 밤, 우리 약속도 했잖아. 불빛 하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갑자기 어두워진 밤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잔뜩 와 있는 정체불명의 괴한떼 등장, 각별히 주의, 좀비 사태 발발. 믿기 힘든 단어로 점철된 재난 문자를 확인하면서. 차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삼키고.

 

/

"형."

"응, 원빈아."

"저희 꼭…… 같이 살아야 돼요."

"응."

"……."

"떨어지지도 말자."

"네. 꼭이요."

"응, 꼭."

/

 

꼭 같이 살자고. 떨어지지 말자고. 그런 약속을 했지. 그날의 약속을 떠올리니까 불안했던 마음이 걷힌다. 나빴던 기분도 많이 나아졌어. 오늘의 편지는 여기까지.

 

청울고등학교 3-1반 정성찬이, 청울고등학교 2-3반 박원빈에게 씀.

 

 

 

 

 

DATE         .      .              NO.

 



안녕.

…….

원빈아.

 

오늘은 잠깐 바람이 쐬고 싶은 마음에 옥상을 다녀왔어. 어느샌가부터는 학교 건물 전체가 내 집처럼 느껴지는 바람에, 옥상까지는 나가 줘야 밖을 나갔다가 들어온 느낌이 들더라. 안에만 있어서 답답하다고 느끼는 걸 보니, 아직은 나 좀 살 만한가 봐.

그런데 내가 옥상에 갔다가 뭘 주웠게. 바로 바로, 긴급재난안전요령 전단지. 처음 전단지가 하늘에서 비처럼 내렸을 당시에는, 이게 참 구원처럼 느껴졌었는데. 지금 다시 보고 있자니 그냥 웃기기만 해. 그래도 반은 맞는 말이니 마냥 웃기지는 않아. 다행인 거지. 이게 아마 좀비 터지고 나서 2주 정도 뒤에 내려온 전단이었던가?

음, 근데 이게 나름의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물건이 된 건 맞는 것 같아. 노트 옆에 전단지를 펼쳐 두고 편지를 쓰고 있으니까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거든.

 

미술부 공동 사물함에 굴러 다니던 초코바로 며칠 연명한 기억. 혹시 누군가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을까, 매일같이 배터리가 줄어드는 휴대 전화를 확인하고, 잠깐씩 연락이 닿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던 기억. 그러다 휴대 전화 배터리도 나가 버리고 사물함의 초코바도 동났을 무렵 …… 미술실 밖을 제대로 돌아다녀 보자고 결심했던 기억 같은 것 말이야.

만약 내가 혼자 살았다면, 나는 아마 밖을 돌아다닐 생각 같은 건 웬만해서 하지 않은 채로 아주 오래도록 미술실에서 머물렀을 거야. 하지만 원빈이 너랑 같이 살아남았으니까. 되도록이면 오래 살고 싶었어. 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두 동원해서, 아주 오래. 가능하다면 최대한 무섭지 않게, 편안하게.

아마 너도 같은 생각이었겠지?

 

지금이야 좀비를 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고, 좀비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데에도 도가 텄지만. 처음 미술실 밖을 돌자고 생각했을 때, 우리 좀비에 익숙해지려고 이틀 동안 창문 하나에 붙은 종이를 뗐다 붙였다 하면서 복도를 내다봤었잖아. 좀비가 터지고 참 많은 기억이 있었는데, 나는 참 이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내가 바깥을 볼 때면 네가 내 옆에 붙어서 손을 꼭 잡아 줬고. 원빈이 네가 바깥을 볼 때면 내가 옆에 붙어서 손을 잡아 줬었잖아. 그냥, 정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서로 그러고 있었다는 게 새삼스레 좋더라고. 응, 그래서.

그렇게 훈련 아닌 훈련까지 마치고, 미술실 문 앞에 서서 나눴던 말까지도. 나는 그것까지 진짜 좋았어. 내가 겪게 된 상황은 분명 불행 중의 불행일 텐데. 어쩐지 네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거든.

 

/

"일단은 가방부터 줍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응. 그러면 여기서 가장 가까운 교실부터 갈래?"

"좋아요. 가방 챙긴 이후에는 도움이 되겠다 싶은 건 그냥 다 챙겨요, 우리."

"응."

"그리고 절대, 절대 떨어지지 말기예요."

"응, 약속."

"약속."

/

 

청소 도구함에서 대걸레를 하나씩 꺼내 든 채로 문 앞에서 비장하게 나누는 말과 약속들이, 나는 그 어떤 것보다 든든했던 것 같아.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잘 다닐 수 있었던 건가? 커다란 가방 하나씩 주워다 어깨에 메고 참 많이도 챙겼었지. 물, 음료수, 매점 털어서 채운 빵. 딸기 우유. 여차할 때 바꿔 쓰기 좋은 야구 배트에 붕대 등등.

그런데 나는 그런 물건들을 많이 모을수록 조금 불안했어. 산사람을 마주치는 일이 왜 이렇게 적을까? 분명 어제는 저 복도에서 엎어져 죽어 있던 사람을 봤는데, 왜 오늘은 그 사람이 보이지 않을까. 비명이 울리는 일 같은 건 엄청나게 줄어들었는데, 왜 자꾸 좀비들은 늘어만 날까.

물건이 쌓이는 만큼 주운 담요로 깔아 둔 이부자리 주변을 에워싼 책상도 쌓인 건, 이런 내 불안감 때문이었어. 너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줬던 거지? 알고 있었어. 너는 내가 무언가 불안해할 때면 그 불안을 자극하고 말해 주는 것보다는, 늘 자기 전에 나를 꼭 안고 괜찮다고 말해 주는 일을 하는 애였잖아.

 

/

"형."

"응, 원빈아."

"우리는 내일도 괜찮을 거예요."

"…… 응."

"내일도 살아남을 거고요."

"응, 맞아."

"……."

"맞아, 원빈아."

/

 

그렇게 어느 정도 좀비에도 익숙해지고, 딱딱한 바닥에도 익숙해지고. 네가 해 주는 위로들이 익숙해질지언정 매일 좋기만 한 지 2주 정도 되었을 때.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 나는 그게 처음에는 헬리콥터 소리인 줄도 몰랐어. 살면서 그 정도 거리에서 헬리콥터 소리를 듣게 될 줄도 몰랐고 말이야.

아주 처음에는, 잠이 덜 깨서 그런가……. 세상이 다시 뒤집히는 건 아닌가? 그런 걱정까지 했어. 네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한테 아직 세상은 망한 게 아니었으니까. 물론, 지금도 그래.

우리는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꼭 붙어서 자다가 헐레벌떡 일어났잖아. 아, 휴대 전화 배터리가 조금만 오래 버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나는 그날 네 머리에 진 까치집 사진만 오백 장은 찍었을 것 같아. 그래도 그때는 그런 게 중요하지는 않았으니까. 책상 아래로 기어 나가서 창문을 열었지.

진짜 예전에는 대북 전단? 이런 걸 하늘에서 그렇게 살포했었다며. 그걸 뭐라고 하지. 삐리? 삐라? 뭐, 이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 하늘에서 전단지 수백 장이 내리는 모습은 꼭 인터넷에서 글로만 접하던 그런 상황을 본 기분이었어. 그걸 보자마자 잠이 확 깨는 거야.

전단지를 잡아서 내용을 제대로 읽어야 할 것 같았어. (아직도 이때의 일은 많이 미안해 원빈아) 덕분에 너한테 말도 안 하고 섣부르게 행동했지. 그런데 그거 나름, 다 계산한 행동이었어. 진짜야. 이거 너무 변명인가?

 

/

"형!"

"……."

"지금, 무슨. 뭐 하는 거예,"

"이거, 이거 보려고……."

"말, 말을……."

"미안. 아니, 원빈아. 미안해. 나는,"

"저 진짜 놀랐어요. 안 그럴 것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요…….'

"미안해…… 그래도 나 이거 잡았어."

/

 

창문 옆으로 툭 튀어 나와 있는 벽이 있었잖아. 그걸 잡고 팔을 조금만 뻗으면 될 것 같았어. 나는 키가 크잖아. 그러니까 팔도 길고. 몸을 조금만 앞으로 내밀고 휘적거리면 흩날리는 전단지를 반드시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진짜 확신해서 한 행동이었어. 내가 어떻게 네가 걱정하고 위험할 행동을 하겠어. 어떻게 혼자 두겠어.

그런데 네가 정말 십년 감수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전단지를 잡았다고 내미는 와중에 너무 미안했어. 그때 알았던 것 같아. 우리는 서로에게 안심이 되는 존재임과 동시에, 가장 큰 불안함을 가져다 주는 존재라고.

…….

미안해. 이 편지를 빌어서, 사과하고 또 사과할게.

하지만 그때 짧게 느꼈던 그 기분은 전단지 속에 적혀 있는 내용을 본 순간 싹 잊혀졌어. 긴급재난안전요령. 상황 발생 원인은 현재 규명 중에 있음.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어. 솔직히 평범한 고등학생이 발생 원인 같은 것 알아서 뭐 해. 이제는 예방 가능한 수준의 무언가도 아니었으니까.

이제 그 아래로는 좀비에 대한 이야기들이 줄줄. 좀비의 구강 및 신체를 통해 상처를 입은 자는 좀비가 된다. 이를 바이러스 규정, 전단 배포 시기 이후부터 이들을 감염자라 칭함. 감염 이후, 발현까지의 시기는 정확한 패턴이 없는 것으로 확인. 감염군에 해당되는 자는 반드시 격리 필요.

기억하고 있어야 할 유의 사항으로는 소리에 민감, 빛에 약함. 신체 능력은 보통의 사람보다 살짝 올라간 정도로 추정, 약점은 인간일 때의 형태와 유사. 이후 마지막으로는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내용.

 

본 전단 배포를 시작으로 비감염자 대피소를 준비 중에 있음. 이후의 모든 안내는 라디오를 통해 진행되므로 어렵겠지만, 생존자들은 라디오를 구비하고 항시 준비하고 있을 것.

살 수 있다. 함께 살 수 있다. 좀비가 터진 이후 서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안도감은 그게 처음이었어. 일어나자마자 천둥 같은 헬리콥터 소리에 깨기는 했어도, 전단지를 잡는답시고 너한테 엄청난 걱정을 안겨 주기는 했어도. 그 전단지를 받자마자 꼭 껴안고 우리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거라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나.

울면서도 소리가 샐까 봐 네 목덜미에 얼굴 묻은 채로 꽉 끌어안았는데. 그날 밤에 네가 그랬었지. 사실 아까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고. 그래도,

 

/

"그래도 좋았어요."

"꽉 안기는 게 취향이야?"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응."

"그런 힘으로 안아 준 것 자체가 상황이 실감나고 좋았단 거거든요. 바보."

/

 

좋았다고 말해 주면서 내 품으로 더 파고들던 너에 대한 생각이 나. 매일 너한테 쓰는 편지는 너로 시작해서 너로 끝나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네 생각이 날 때마다 편지를 쓰는 거니까.

오늘의 편지도 이만 줄일게. 주운 전단지로는 음…… 학 접기나 해야겠다. 하루에 꼭 해야 하는 일이 하나 더 생겼네. 편지 쓰기, 너를 위해 기도하기, 전단지를 주우면 학을 접어 장식하기. 일과가 채워지는 것 같아서 기쁘다.

그러면 오늘의 편지는 여기서 진짜 끝.

 

청울고등학교 3-1반 정성찬이, 청울고등학교 2-3반 박원빈에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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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원빈아.

…….

원빈이, 안녕.

 

일주일 정도 편지를 못 썼어. 그럴 만한 상황이 안 됐었거든. 매일 올린다고 했던 기도도 제대로 못 해서. 마음이 조금 안 좋아. 이런 주제에 꿈은 참 많이도 꿨어. 아니, 어쩌면 …… 사실은 이건, 주마등일지도 모르지. 네가 옆에서 내가 쓰는 편지를 보고 있었다면 등짝 한 대 크게 때렸겠다. 하지만 정말,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

원빈이 너랑 보냈던 시간들 중 일부 과거들은 이미 닳아 버렸어. 어떻게 해도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떠오르지 않는 장면들이 조금 생겼거든. 이런 측면에서 너를 보고 싶어 하는 방법으로 글을 쓰기로 한 건, 좀 잘한 일인 것 같아.

 

……

………..

 

있잖아, 원빈아. 사실 좀비가 터지기 전의 기억이 이제 잘 안 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의 이야기를 조금 더 써 놨어야 했는데. 과거부터 차차 혀지는 줄 알았다면, 가만히 앉아서 이전 일들을 떠올리고 적으려 애썼을 건데. 피 몇 번 토했다고 좋았던 기억이 날아가는 줄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삼켰을 건데.

이제 아무리 애써도 가장 먼 기억이랍시고 떠오르는 건 내가 렸을 때의 기억밖에 없어, 원빈아.

나는 날을 떠올리면 늘 후회해.

 

좀비 중에 같은 축구부였던 놈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왜 진작 생각하지 않았을까. 얼굴이 짓뭉개져 있지 않은 좀비를 언젠가는 마주칠 거라고 왜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는 얼굴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대비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 자리에서 아는 얼굴이라고 한들 야구 배트를 던져 얼굴을 뭉갰어야지. 뒤도 안 돌아보고 네 손목을 잡고 달렸어야지. 왜 그러지 않아서, 왜 넋을 놓고 그 애 얼굴을 보고 가만히 서 있어서.

이제 원빈이 너랑 잘 버틸 일만 남았던 건데, 바보처럼 좀비가 되어 버린 걸까 하고. 정말이지, 떠올릴 때마다 빠짐없이 후회하고 또 후회해.

 

미안해, 원빈아. 정말 미안해. 그랬으면 너랑 한 약속이라도 잘 지켜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

…….

미안해.

 

 

 

 

 


DATE         .      .              NO.

 



원빈아.

음…… 지난 번에 쓴 편지는 너무, 좀. 아니, 그냥 진짜 많이 감정적이었던 것 같아. 다시 읽으니까 와, 엄청 부끄럽더라? 그래서 폐기할까 싶었지만, 너를 보고 싶어 하면서 쓴 그 어떤 것도 없애지 않기로 했어. 솔직한 게 좋잖아.

문득 무언가를 제어하지 못하는 것도 발현 증상 중 하나일까 생각해 봤는데, 나는 네 앞에서는 항상 솔직하기만 했던 것 같아서. 평소처럼 너를 너무 좋아하는 마음에 슬픔까지도 마구 쏟아낸 거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어.

그러고 나니까 그날 네가 해 줬던 말, 네가 지었던 표정. 자기 전에도 아침에도 해 줬던 게 전부 떠오르는 거야. 응. 이 편지는 네 생각에 마음이 편해지자마자 펜을 잡고 쓰는 편지야.

 

나는 궁금해, 원빈아. 너는 좀비에 물린 나를 맞닥뜨리자마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생각을 했길래 대뜸 달려와 야구 배트를 휘둘러 그 애를 눈앞에서 치워 줬을까. 얼 타고 있는 나한테 별말도 안 하고 바로 내 손목을 붙잡고 미술실로 직행하는 용기는 어디서 났을까.

미술실에 도착하고서야 정신을 차린 내가 손목을 잡아빼고 바깥으로 나가려고 할 때, 망설이는 기색 하나 없이 뒤에서 껴안으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

"어디, 어디 가려고요."

"원빈아. 나, 지금 물린 거야. 물린 거라고, 원빈아."

"알아요. 아는데, 그게 왜요."

"…… 언제 좀비 될지 몰라. 나 너랑 있으면 안 돼."

"있어요."

"박원빈, 말도 안 되는 고집,"

"고집인 것 알아요. 그래도 있어요."

"……."

"절대 떨어지지 말자고 했잖아요. 약속했잖아요."

"……."

"왜, 약속 깨려고 해요? 있어요. 그냥, 있으라고요."

"원빈아, 이거,"

"안 놓는다고요. 있으라고. 있으라고, 정성찬."

"……."

"제발, 제발 있어요…… 괜찮으니까. 제발요."

"……."

"입장 바꿔 생각해 봐요. 형, 제가 만약에 물렸으면 어떻게 할 건데요? 나 격리시킬 거예요? 떨어질 거예요?"

"…… 아니."

"나도요. 나도 못 그래요. 형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나가지 말라고요."

/

 

당시의 나는 머릿속에 너랑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 언제 좀비가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내가 네 곁에 있을 수 있겠어. 그런데 너는 내가 물리는 걸 눈앞에서 보고도 어떻게든 나를 곁에 두려고 했잖아. 내가 너랑 한 약속 어기는 걸 죽기보다 싫어한다는 것까지 영악하게 이용하고 말이야.

게다가 입장 바꿔 생각해 보라는 말까지 하고. 이거는 진짜 너무했어. 알아? 그 말 듣는 순간, 미안한 감정이 밀려들면서 눈물이 터지더라. 그리고 혼날까 봐 여지껏 혼자만 간직했던 말인데 …… (편지 쓰면서 깨달았어 나 너한테 비밀이 좀 많았네 사과할게) 내가 물려서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좀비가 터진 이후로 세상은 망한 걸까? 이대로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걸까. 혼자 생각해 보고는 했어. 그런데 그때마다 항상 네가 옆에 있어서, 그래도 세상은 망하지 않았다고 늘 자신했었거든.

만약 네가 물렸다면 그 순간, 나는 그제서야 세상은 진짜 망해 버렸다고 생각했을 거야. 우와, 나 지금 원빈이 네가 내 세상이라고 말하는 건가? 틀린 말은 아니지. 네가 아니었으면 느끼지 못할 감정들을 느끼고, 하지 않을 생각을 하고. 그러니까 너로 인해서 내 세상이 넓어진 것도 맞고, 네가 내 세상이 된 것도 맞지. 응.

 

그래서 나는 미술실 밖으로 나갈 수 없었어. 논리적으로는 내가 나가는 게 맞고,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아야 되는 것도 맞지만. 네가 물렸다면 나는 절대 너를 내게서 분리하지 않을 테니까. 또…… 내가 물린 순간, 잠깐 스쳤던 내 상상 속에서처럼. 너도 나만큼 괴로웠을 텐데, 그런 말 하나 없이 나를 안고 가지 말라고 말하는 너를 두고 내가 어떻게 나갈 수 있겠어.

그날, 우리는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고 미술실 한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한참 실랑이를 했지. 나는 정말 불안했단 말이야. 내가 자다가 좀비로 변해서 너를 알아보지 못하고 물면 어떡하나. 네가 위험에 처하면 어떡하나. 그러니까 잘 때는 떨어져서, 미술실 한 켠의 교사 책상에 손목을 묶고 자겠다고. 엄청 그랬는데.

그럴 수는 없다고. 그냥 평소랑 똑같이 자도 괜찮다고 고집을 부렸잖아. 응. 이번에도 나는 졌지. 내가 너를 어떻게 이기겠어? 나는 평생 너라면 지고 살아도 좋다고 생각해.

그리고 밤이었어. 평소처럼 나는 미술실 한가운데에 누워 너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고 있었어. 머릿속은 복잡했어. 내가 좀비로 변하면 어떡하지. 정말 너를 물어 버리면 어떡하지. 그런 말은 없었지만, 내가 물리는 바람에 체온이 예전같지 않으면, 그래서 원빈이가 추우면? 너랑 관련되면 나는 도무지 단순할 수가 없어져서.

아침까지 이어질 정도로 생각은 끝없이 가지를 쳤어. 다행히도 네가 중간에 툭, 말을 걸어서. 그 생각이 끊어졌지만.

 

/

"형."

"응, 원빈아."

"제가 고집 부린 거 알아요. 그래도 들어줘서 고마워요."

"어떻게 안 들어."

"…… 형."

"응, 원빈아."

"성찬이 형."

"응."

"형은 정성찬이에요."

"……."

"좀비 그런 것 아니고, 정성찬. 청울고등학교 3-1반 정성찬."

"……."

"축구부 11번이고, 출석 번호는. 뭐예요?"

"13번."

"응. 그러니까 괜찮아요."

"……."

"형은 늘 정성찬이에요. 나는 늘 박원빈이고."

"……."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

 

그때 했던 말 기억해?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나는 늘 정성찬, 너는 박원빈이라고 했던 말.

변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이 참 좋았어. 너는 네가 고집을 부린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말이지. 이건 고집이 아니라 단단함이라고 생각해. 나는 네 단단함이 참 좋아, 원빈아. 네가 가지고 있는 많은 부분을 아끼고 좋아해서. 결국에는 너란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거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네 이런 부분이 좋아.

확실해. 희뿌얘진 기억 속에서도 너를 떠올리면. 이런 문장을 적으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틀릴 리가 없어. 역시 불안할 때는 네 생각을 하면 모든 게 다 나아진다. 편지를 다 적고 나니까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편안해졌어. 나는 이제 혼자 있어도 너를 좋아하고, 너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게 됐네. 좋아해. 고마워, 원빈아.

아…… 오늘은 밀린 기도까지 합쳐서 꽤 긴 기도를 해야겠어. 약간 바쁠지도. 그래서 편지는 여기까지.

 

청울고등학교 3- 3학년 정성찬이, 청울고등학교 2-3반 박원빈에게 씀.

 

 


 

 

DATE         .      .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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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              NO.

 



사라지는 기억이 많아지는 만큼, 울컥거리며 피를 토하는 일이 잦아졌어. 저번에는 아예 종이 한 장을 못 쓰게 됐더라.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편지는 계속 쓰고 싶어.

한 가지 약속을 못 지키게 됐으면, 다른 한 가지 약속은 꼭 지키고 싶거든. 너는 나를 미련하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약속을 지켜 줘서 고맙다고 말해 줄까. 음…… 내 생각에는 둘 다일 것 같다. 원빈아, 나는 네가 해 준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이제 많이 울어. 고마워서 울기도 하고, 미안해서 울기도 하고.

아니다. 무슨 감정이지? 잘 모르겠어. 그래도 미안한 감정이 더 큰 것 같기도 해. 말에 두서가 조금 없지. 이해해 달라는 건 아니야. 그냥 …… 아, 진짜 모르겠다. 편지를 쓰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말문이 턱턱 막혀. 사실 이 편지도 무언가 떠오른 게 있어서 적으려고 펜을 잡은 건데. 기억이 잘 안 나.

아.

……

아! 생각났다. 응.

원빈아, 근래에 자꾸만 피를 토하게 되면서 네 생각을 많이 했어. 내 피인 걸 알면서도 종이 한 장을 다 적셔 버린 걸 봤을 때. 나는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하면서 덜컥 겁이 났거든. (그래도 차분히 준비는 하고 있어 걱정 마)

그러면서 내가 처음 피를 토했던 날이 생각났어. 점점 편지가 아니라 고해성사가 되는 것 같기도 해.

너는 내가 물렸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해 줬지만, 사실 딱 너 하나만 빼고 많은 게 변했어. 물린 이후부터 더 이상 좀비들은 나를 향해 달려들지 않았고, 나는 더 이상 예전만큼 배가 고프지도 않았어. 덕분에 위험한 곳은 내가 도맡게 되고, 가져온 모든 식량들을 너한테 몰아줄 수 있었던 것 조금 좋았던 것 같기도 해.

묘하게 이질적인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나는 늘 애썼어. 문득문득 내가 더 이상 보통의 사람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마다 네 손을 더 꽉 잡기도 했어. 물린 이후부터는 네 손이 많이 아팠겠다 싶어. 나중에 내 손바닥 주먹으로 쳐도 괜찮아…… 진짜로. 여하튼, 그렇게 살다 보면 정말 괜찮아질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해서 더 그렇게 느꼈기도 했고. 그러다 어느 날 밤이었지. 자기 직전에 내가 원빈이 네 앞에서 숨도 못 쉬고 기침만 하면서 피를 토했잖아. 딱 여기까지만 기억이 나. 정신이 잘 안 차려졌고, 다시 기억이 존재하는 시점부터는 네가 나를 무릎에 눕혀 두고 눈물만 뚝뚝 떨구고 있었어.

정신이 드냐고, 괜찮냐고 물어보는 너를 보자마자 나는 헐레벌떡 일어나 미술실을 나가려고 했어. 당연해. 아무리 사람처럼 살려고 노력해도,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은 막연한 거잖아. 내가 네 눈앞에서 좀비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현실성이 높아졌으니 이제는 어떤 말을 들어도 나가야 했어.

정신이 들자마자 너를 떠날 생각을 한 건 어떻게 보면 괘씸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일이었어. 그런데 그때의 너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어. 그냥, 행동을 했지. 엄청 무모한 행동.

세상에 감염자한테 키스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너뿐일 거야, 원빈아. 그리고 피 맛 가득한 첫 키스는 음…… 최악인 것 같아. 다음에 할 키스는 피 맛이 나지 않도록 하자. 뭐가 좋을까? 영화 같은 데에서 보면 달달하다던데. 아. 딸기 우유 맛 첫 키스가 좋겠다. 우리한테는 그게 제일일 것 같아.

 

/

"그냥, 그냥 피 좀 토하고 일어난 거예요."

"……."

"다시 일어났으니까 됐어요. 그리고 형, 설령 좀비가 된다고 해도."

"……."

"내 옆에 있어요. 다른 사람 손에 죽는 꼴 못 봐요."

"……"

"내가 무슨 논리로 말하는지 이제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기적으로 말할래요. 형, 내 생각 좀 해 줘요."

"……."

"부탁할게요……."

/

 

눈앞에서 피까지 토한 감염자를 두고 키스하는 것만큼 완벽한 믿음을 보여 주는 행동은 없겠지. 이미 행동만으로도 어쩌지도 못하게 된 나한테 네 생각 좀 해 달라며 울던 네 말에 나는 또, 늘 그렇듯, 입장을 바꿔 생각하게 되고.

원빈아, 가끔 네가 이기적으로 굴었다고 생각이 든 날들이 혹시 있었을까? 나한테 미안한 마음을 가진 날도 있었으려나. 그런 건 다 괜찮아. 너는 한 번도 이기적이었던 적 없고, 나한테 미안하지 않아도 됐어. 지금 떠오른 김에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도 못 할 것 같아서 적어 봐.

 

결국 나는 너한테 또 졌고, 다시금 미술실에서 밤을 보냈지. 그날 잠든 네 얼굴을 보면서 나는 결심했어. 나는 감염자씩이나 돼서 너를 죽어도 떠날 수 없으니, 네가 나를 떠날 수 있게끔 해야 하는 거라고, 결론이자 결심.

봤지? 너는 이기적이지 않았고, 나한테 미안하지 않아도 돼. 진짜 이기적이고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나니까. 비록 첫 번째 키스는 피 맛이 났고, 네가 나를 떠나게 만들자고 결심하는 못된 키스였지만. 아까 말했지. 나중에는 딸기 우유 맛 키스를 하자고. 그렇게 키스를 한 다음에는, 꼭 평생을 결심해 볼게. 정말이야.

이만 쓸게.

 

청울고등학교 정성찬이, 청울고등학교 2-3반 박원빈에게 씀.

청울고등학교 3학년 정성찬이, 청울고등학교 2-3반 박원빈에게 씀.

 

 

 

 

 

DATE         .      .              NO.

 



나는

정성찬. 청울고등학교 3-1반. 출석번호 13번. 축구부 11번.

 

박원빈. 청울고등학교 2-3반. 내 남자 친구. 내가 좋아하는 애. 고양이를 닮음. 검은색 머리. 뒷머리가 목 뒤를 살짝 덮고 있음. 긴장할 때는 눈이 동그래져서 더 고양이 같다. 딸기 우유를 좋아함. 눈꼬리가 길다. 부끄러운 말을 할 때는 이마로 나를 퍽퍽 치는 버릇. 말을 더듬을 때가 있는데, 이것도 귀엽다.

우는 모습도 예쁘고 귀엽기는 해도. 이거는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니까. 목소리는, 목소리가 ……

 

박원빈. 박원빈. 박원빈.

청울고등학교 2-3반. 내 남자 친구. 내가 좋아하는 애. 고양이를 닮음. 검은색 머리. 뒷머리가 목 뒤를 살짝 덮고 있음. 긴장할 때는 눈이 동그래져서 더 고양이 같다. 딸기 우유를 좋아함. 눈꼬리가 길다. 부끄러운 말을 할 때 이마로 나를 퍽퍽 치는 버릇. 말 더듬는 것도 귀여운 애.

 

잊으면 안 돼

박원빈

박원빈

박원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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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              NO.

 



안녕.

……

………..

원빈아.

 

/

"내가 형을, 어떻게 두고 가요…… 어떻게."

"네가 여기 남는 게 더 안 될 일이야, 원빈아. 나랑 같이 가는 건 당연히 안 되는 거고."

"……."

"그렇게 기다리던 대피소야. 당연히 가야지. 이건 고민할 문제가 아니야."

"……."

"좀비들은 나 공격 안 해. 하지만 너는 공격해. 나는 물자가 넉넉하지 않아도 살 수 있고, 너는 그렇지 않아. 그럼에도 솔직히…… 여기서 네가 더 고집 부리면, 나는 꼼짝없이 질 거야."

"……."

"그런데 원빈아. 원빈아……."

"……."

"한 번만 너도 입장 바꿔서 생각해 줘. 네 말 빌려서 미안한데, 한 번만 내 생각 좀 해 줘."

"……."

"내가 물린 것도 너무 괴로운데, 죽겠는데. 애써 아닌 척하고는 있는데. 진짜 죽을 것 같은데…… 네가 내 옆에 있다가 물리면, 나는…… 나는, 너를 좋아하는 내가 너무 미워질 것 같아."

/


오늘 내가 거울을 봤는데, 양쪽 눈이 모두 다 빨개진 거야. 근래에 피도 많이 쏟고 기억도 드문드문해지고. 눈앞도 약간은 침침해진다 싶더니 기어이 이런 날이 오네.

거울을 보자마자 내 눈을 보고 이제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펜을 잡았어. 이제 내가 지켜야 할 약속, 아니지. 기다려야 할 약속은 하나가 됐네…… 대피소 방송이 들려왔던날 말이야.

네 말을 빌려서 조금 공격하듯이 말했던 건 죽기 전까지 쭉 후회할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나는 너만큼 올곧은 고집을 부리고 설득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해서, 그런 식으로 호소해야 먹힐 것 같아서 그랬어. 내 말을 듣고 너는 한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만 뚝뚝 흘렸었지.

닦아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도 않았네. 못되게 굴어야 한다고 최면이라도 걸고 있었나 봐…… 후회할 짓을 왜 그렇게 많이 했지. 너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눈물도 제대로 닦지 않고 몸을 돌렸어. 나는 그 시간을 벌어 주겠답시고 미술실 밖에 나가 꽤 오래도록 서 있었는데, 그때도 몇몇 좀비가 지나가면서 나는 신경도 쓰지 않는 걸 보고 내 마음은 조금 굳어졌어.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번에는 절대 넘어가지 말자고. 어떠한 고집을 부려도 방금 했던 것처럼 네 말을 빌려 너에게 호소해 보자고. 골백번은 넘게 다짐했어. 하지만 너는 언제나 내 예상을 빗나가서……. 대피소에 가는 대신 약속을 해 달라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

"알았어요. 대피소 갈게요. 갈 건데, 대신 약속 세 개만 해 줘요."

"…… 일단 들어 보고."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요."

"응, 또?"

"그리고 나 없이도, 잘 살아요. 좀비 되지 말고 버텨요. 혹시 알아요? 내가, 대피소 가서 형 고칠 약을 발견해서 올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니까 나 없다고 막 살지 말고. 누워만 있지 말고. 최대한 버티면서 오래오래 잘 살아요."

"…… 응, 그리고?"

"허락해 줘요."

"어떤 걸?"

"내가 죽을 때가 돼서 형 곁으로 돌아오면, 그때는 나 내치면 안 돼요."

"……."

"열심히 살 거예요. 죽으려고 굴지도 않을 거고! 진짜 열심히 살 거니까, 그러니까요……."

"응."

"……."

"알았어, 그럴게. 그럴게, 원빈아."

/

 

고집 아닌 고집. 바보처럼 착하고 올곧은, 우리 원빈이.

원빈아, 나 말이야 정말 노력했어. 너랑 한 약속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 편지들만 읽어도 내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 잘 버티고 있었는지. 알 수 있지? 여기서 벗어나지도 않았어. 마지막 약속을 위해서 네가 시키지도 않은 짓까지 했지만. 나중에 와서 원빈이 네가 보면 바보 같다고 웃을 것 같지만,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그래도 최대한 오래도록 지키고 싶었는데. 이것보다 더 버텨 보고 싶었는데. 이 이상은 아무래도 무리인가 봐. 그래도 나 노력했어. 정말 노력했으니까 ……. 나중에 오면 머리 좀 쓰다듬어 줘. 잘했다고 말이야.

오늘의 편지는 여기까지. 나 한동안은 바쁠 거야. 응.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어.

이제는 그래야 할 것 같거든. 미안해.

 

……

정성찬이.

청울고등학교 2-3반 박원빈에게 씀.

 

 




DATE         .      .              NO.

 


 

박원빈

청울고등학교 2-3반 박원빈

 

 

 

 

  

DATE         .      .              NO.

 



안녕, 원빈아.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상태가 좋아.

이 편지가 마지막인 걸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일까? 한동안은 정말 바빴어. 이제 옥상에 올라갈 일이 없을 테니까 옥상 문도 다 잠갔고, 튼튼한 붕대를 고르기 위해 애썼고. 혼자서 준비하려니까 감안해야 할 것도 많고. 엄청 그렇더라. 붕대만으로는 또 안심이 안 돼서 다른 교실에서까지 책상을 가져와서 쌓고 또 쌓았어.

아, 옥상을 잠그기 전에는 거기서 꽤 오래 시간을 보냈어. 언젠가부터 잿빛처럼 보였던 하늘이 간간이 맑게 보이던 날이 며칠 있었는데. 그때마다 네가 대피소 헬기를 타고 가던 마지막 순간을 추억하고 또 추억했어.

…….

사실 그것 말고는 너에 대한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다른 것들도 잘…… 기억은 안 나. 그런 와중에 아직도 너랑 했던 약속은 선명하게 기억이 나서. 오늘은 예전 기억을 떠올려 적기보다는 나중에 올 너를 위해 편지를 쓰려 해. 참 마지막다운 편지다. 그렇지?

 

원빈아.

원빈아, 박원빈.

다친 곳 없이 잘 지냈어? 그동안 크게 아팠던 일은 없었지? 네가 너무 많이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우리가 이번에 다시 만나기까지는 얼마나 걸렸어? 너무 오래 돌아오느라 네가 지쳤을까? 그래도 다시 왔다면, 이제는 내 옆에서 편하게 쉬어도 돼. 괜찮아.

나는 오늘부터 얌전히 너만 기다릴 거야. 네가 너무 빨리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못 온다거나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항상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 될 수 있는 한 잘 지내다 내 곁으로 오는 거면 좋겠어. 아주 조금은 기적이 일어나서 네가 약을 구하고 내게 오는 일이 생기면 좋겠다고는 생각하지만,

너무 나를 구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약을 구하려면 위험한 일들만 해야 할 것 같거든.

 

원빈아.

박원빈.

나는 내가 어떤 모습이 되든지 너를 좋아해. 아니,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편지에 적어야 하는 건 슬픈 일이지만……. 글로 적어 남겨 놓는 한 영원할 테니까. 조금은 만족하며 적어 봐.

사랑해. 정말 사랑해, 원빈아. 내 남자 친구. 내가 좋아하는 원빈이. 내가 사랑하는 원빈이. 청울고등학교 2-3반 박원빈. 응. 우리 원빈이.

오느라 고생했어. 너무 수고했어. 이제 나랑 같이 쉬자. 잘 왔어, 원빈아.

 

……

청울고등학교 2-3반,

내가 사랑하는 박원빈에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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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어마어마한 양의 편지들 중 알아볼 수 있는 편지들을 모두 주워 읽었다. 한동안 미동도 없이 한 자리에 붙박힌 채 눈을 깜빡이다 미술실의 문을 닫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책상 너머로 덜걱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조용히 숨을 내쉰 남자는 납작하게 엎드린다. 책상 다리 사이를 지나쳐 요새 같은 안쪽으로 들어가면.

헐렁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로 눈과 입을 붕대로 가린 채 여러 겹의 붕대 뭉치로 책상 다리와 제 왼쪽 손목을 묶어 둔, 감염자가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 감염자를 보고 싶어 한 사람처럼 조심스레 다가가 눈과 입을 해방시켜 주었다.

눈물로 인해 짓눌렸으나 여전히 기다란 속눈썹을 가진 그 감염자의 다 터져 버린 입술 위로 남자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 많이 추웠겠다, 형……. 슬픔이 서려 있지만 어쩐지 벅찬 감정을 한 목소리는 다정한 말을 내뱉더니 입고 왔던 검은색 재킷을 벗어 감염자의 위로 덮어 준다. 가벼워진 옷차림에 왼쪽 팔목, 좀비에게 당한 듯한 상처가 드러난다.

남자는 웃으며 그 상처를 매만졌다. 만족스러운 상처라는 듯이. 이어 남자는 꾸물거리며 감염자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남자의 뒤척임에 재킷 위에 수놓아져 있던 하얀 글씨가 움직거리며 잠시간 떠다녔다.

……

좀비대책본부 제2연구지원대대 박원빈 대위

……

남자는 자리를 잡은 듯 크게 숨을 쉬며 감염자를 끌어안았다. 형, 성찬이 형. 오래도록 불리지 않았을 감염자의 이름을 부른다. 그 감염자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품을 파고든 남자를 내치지도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움직거리며 책상 다리를 덜걱거리던 것도 멈추고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 남자는 손을 뻗어 감염자의 머리통을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고생했어요, 잘했어요. 약속 지키느라 수고했어요. 고마워요 …… 사랑해요, 저도. 눈물이 차오르는 통에 남자는 이마를 감염자의 가슴팍에 쿡 처박은 채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저도 약속 지키려고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형. 하고서는 오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청 돌고 돌아왔어요.

중간에 그냥 물려 버릴까 생각했지만 형이랑 한 약속이 있어서 참았어요.

너무 오래 걸려서 형 심심했겠다.

그런데 형한테 혼날 만한 일 하나 있어요.

물린 순간 저는 그냥 좀 기뻤던 것 같아요.

…… 안 웃긴가?

몇십 년이 지났어도 웃기는 데에는 재능 없는 것 같아요, 역시.

 

아주 오래 묵혀졌을 이야기는 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긴 시간 계속되었다. 방해하는 사람 없이 되는 대로 흐르며, 매우 오래오래. 계속. 그즈음 바깥 세상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싸락눈으로 시작되더니 점차 눈발이 굵어지고 거세지며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세상이 망한 뒤 처음으로 발생한 폭설이었다. 덕분에 세상은 둘도 없이 고요해졌다. 몇몇 건물의 출입구가 눈에 의하여 틀어막히고 내려앉았다. 개중에는 색색의 엑스 표시로 이미 폐건물 취급당하던 고등학교 하나도 포함이었다. 꼭 이제는 정말 출입구가 필요하지 않다는 듯, 미련도 없이 폭삭.

세상은 그즈음에도 아주 조용했다. 새하얀 눈이 세상을 가득 메워서일까, 그 고요는 꽤나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주 오래도록 기다려온 안식을 행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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