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de’s End
by. 데이먼
근 오 년 만의 재회였다. 성찬은 스크린에 띄워진 원빈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곤 사진 옆에 표시된 프로필을 천천히 훑었다. 일 년 남짓의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았어도 알 일 없던 정보들이었다. 순간 본분을 잊은 성찬이 과거를 회상하려던 때 단호한 음성이 두 귀를 덮쳤다. 그 즉시 성찬은 추억하기를 관두었다.
“발견 즉시 사살하라.”
그런데 우리, 이딴 것도 재회라고 할 수 있나.
Parade’s End
1.
인간 병기는 인간인가 병기인가. 일 년 전 정부는 그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D-4 프로젝트를 설계했다. 백여 명의 최초 인간 병기와 그 2세들을 생태계 교란종으로 정의하고 말살한다는 작전이었다. 인간도 병기도 아닌 그저 제거해야 할 대상. 정부는 인간의 필요로 만들어진 존재가 인간에게 위협이자 쓸모 이상의 실체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작전의 명분은 안보요, 결정 원리는 다수결로 간단했다.
정치는 결국 머릿수 싸움이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내기에 그 수가 너무 적었고, 이것이 그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였다.
정부는 단시간에 놀라울 만큼의 성과를 냈다. 안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업은 살육은 죄책감을 남기지 않았다. 사망자 숫자가 오를 때마다 지하 벙커에는 환호성이 터졌다. 그렇게 반년, 정부는 다시 근심에 빠졌다. 그 까닭은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숫자 1, 36-10001 탓이었다.
작전이 길어지자 정부는 다른 수를 모색했다. 36-10001의 행방이 해외에서 발견되자 여러 방법 중 기존의 특수팀을 해체하고 외부 용병을 이용하자는 안이 유력해졌다. 군 소속의 특수팀보다 규정에서 자유롭고, 표적을 제거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외교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처리가 쉬운 까닭이었다. 정부는 그간 암암리에 신뢰를 형성해 온 민간군사기업을 통해 소인원으로 꾸려진 작전팀을 의뢰했다.
얼마 뒤 작전 관계인들이 회의실에 모였다. 한참 브리핑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불만 섞인 목소리가 침투했다. 마이크 앞에 선 국정원 대테러 팀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한국인 용병은 제외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안보실장이 눈짓하자 행정관이 신속히 화면을 넘겼다. 그러자 다음 화면에 한국인 용병에 대한 프로필이 떴다. 다음 반응이 나타날 때까지 회의 참석자 전원은 침묵을 유지했다. 잠시 후, 전보다 차분해진 목소리가 안보실장을 향했다.
“함께 작전을 수행한 이력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오 년 전 일입니다. 작전은 한 차례, 훈련 기간은 약 일 년 정도입니다. 제대 후에 민간군사기업에 들어가 용병 신분으로 주로 아시아인 경호를 맡았고, 보시다시피 친형은 현재 특전사령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조부가 이전 정권에서 국방장관을 지냈고, 부친 또한 육사 출신으로 십오 년 전에 순직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한국인 용병은 표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뿐더러 신분이 확실했다. 집안 배경을 따져볼 때 유사시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기대할 수 있을 거라는 안보실장의 개인적 판단까지 더해졌다. 조금 뒤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안보실장이 안도했고 국정원 팀장은 브리핑을 재개했다.
2.
성찬에게는 이번 생에 자신이 갖게 될 직업으로 군인이 유일할 것이라 믿던 시절이 있었다. 어릴 적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각 잡힌 군복 차림이 멋있어 보였고, 조금 자라서는 총기에 대한 환상이나 잘 싸우는 성인 남성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을 마음에 품었다. 육사 시절에는 매일같이 주입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성찬을 군인의 길로 인도했다. 적성 같은 걸 따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성찬은 자신이 군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다.
중위로 진급한 바로 그 해, 성찬은 특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예멘으로 향했다. 우방국과의 협정에 위반한 협상을 비밀리에 진행하던 정부 실무진들이 현지 무장세력에게 납치된 사건이었다. 맡은 임무는 인질 구출. 부상자는 있었으나 사망자는 없었고, 우방국에 빌미가 될 만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작전은 무사히 끝났다.
그러나 성찬은 무사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작전 이후 모든 일에 무감했다. 조국에 대한 헌신도, 개인의 성취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군복이 족쇄처럼 느껴졌다. 성찬은 결국 평생을 함께할 줄 알았던 신분을 정리했다. 그때가 겨우 이십 대 중반이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여태 배운 총질, 싸움질이 전부라 성찬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전술 컨설팅처럼 머리 쓰는 일과 용병이 되어 몸을 쓰는 일 중에 성찬은 후자를 택했다. 그게 싫어서 도망쳤는데, 결국 다시 그런 일을 골랐다. 대신 성찬은 일말의 자유를 얻었다. 새로운 곳에는 무조건적 복종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헌신 같은 강요가 없었다. 의뢰받은 만큼의 의무만 수행하면 됐다.
성찬은 주로 분쟁지역에 나가 아시아인 기업가나 로비스트경호를 골라 담당했다. 성찬이 속한 민간군사기업에 아시아인 용병이 몇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특수부대 출신의 한국인은 성찬이 유일했다. 성찬은 신기할 정도로 군대가 그립지 않았다. 그래서 후회도 없었다. 용병 생활이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그만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군대에 있었다. 그러나 가끔씩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작전이 끝난 뒤 얼마 후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버린 후임 녀석.
“⋯⋯.”
뭐. 별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3.
성찬에게 의뢰가 떨어졌다. 의뢰인은 특수전 경험이 있는 한국 출신의 용병을 요구했다. 마치 성찬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했다. 상관에게 임무 내용을 물었으나 계약 전까지 공개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잘한 일만 골라 맡아 평판이랄 것도, 딱히 경력이라고 내세울 것도 없는 성찬을 특정할 만한 의뢰인이라면. 성찬은 본능적으로 한국 정부를 떠올렸다.
계약서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성찬이 왼손에 펜을 쥐었다. 그 순간 지금껏 외면해 온 불안의 실체와 마주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성찬 앞에서 의문을 내보이지 않았지만, 너는 충성을 맹세한 곳으로부터 도망친 패배자일 뿐이라고 모두가 내심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 같았다. 증명해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미뤄둔 숙제처럼 성찬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래서 결국 이름 석 자를 적고 그 옆에 지장을 찍었다. 그리고 성찬은 직감했다. 훗날 자신은 이 계약서에 서명한 지금의 나를 원망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이었다.
얼마 후 성찬은 의뢰인과 대면했다. 예상이 적중했다. 정부를 대리해 나타난 젊은 남자는 고용된 용병들에게 군 내 쿠데타 모의 세력을 척결 중이라고 설명했다. 용병이 하게 될 일은 간단했다. 쿠데타에 실패한 뒤 무기를 빼돌려 종적을 감춘 20대 남성을 찾아내는 일.
“표적의 신상 정보나 수색 지역은 언제 공유됩니까?”
성찬의 옆에 앉은 동료가 질문을 던졌다. 대리인은 훈련이 끝난 뒤라는 두루뭉술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만큼 이번 작전이 보안 유지에 예민한 사안이라는 뜻이었다. 성찬이 검지로 목을 꾹 눌렀다. 무언가 마음에 내키지 않을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찾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성찬이 대리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대리인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자세한 내용은 지금 말해줄 수 없다는 이전과 같은 답을 내놓았다. 성찬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4.
용병들의 짧은 훈련 기간 사이에 군 특수팀은 표적의 동선을 확인하며 수색 지역의 범위를 좁혀나갔다. 마지막 훈련을 마치고 지휘관은 용병들을 불러 최종 브리핑을 시작했다. 마침내 용병들에게 표적의 정체가 공개되었다. 성찬은 스크린을 가득 채운 표적의 얼굴을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 옆에 적힌 글자들을 차분하게 읽어나갔다.
“이름은 박원빈.”
지휘관이 표적의 상세 정보를 서술하기 시작했다. 화면이 넘어가자 군인 시절의 박원빈 사진들이 나타났다. 성찬에게 익숙한 모습들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게다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름의 기억들이랍시고 지난 추억들이 성찬의 머릿속에 밀려 들려왔다.
“발견 즉시 사살하라.”
그러나 성찬에게 반가워할 틈 같은 건 허락되지 않았다. 살면서 한 번쯤 우연히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재회는 결코 아니었다. 화면에 떠 있는 박원빈의 얼굴. 사살 명령. 도무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이상. 질문 있나?”
지금은 불필요한 감정에 얽매일 때가 아니었다. 성찬은 잡념을 지우고 냉정해지려고 애썼다. 사살 작전에 투입된 팀원은 본인과 한국인 동료 한 명을 포함한 총 다섯. 녀석의 수준이 아무리 월등하다 하더라도 시간은 결국 이쪽 편이 될 것이다.
“생포가 아니라 반드시 죽여야 합니까?”
성찬이 질문했다. 소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성찬을 향했다. 성찬 역시 제 질문이 어리석은 물음이라는 걸 알았다. 명령에 의문을 품지 않는 것. 기본이었다. 잠시 성찬을 응시하던 지휘관이 무언가 수긍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의 임무는 이 자를 발견하는 즉시 사살하는 것이다. 예외는 없다.”
5.
필리핀 바기오. 여행객 차림의 성찬과 팀원들이 이제 막 로아칸 공항에 도착했다. 필리핀 국내선 이용객 중에는 골프를 치러온 한국인들이 몇 섞여 있었다. 그 사이에 섞여 나온 성찬은 공항을 나와 미리 도착해 있던 허름한 소형 승합차에 탑승했다. 이들이 무슨 일을 하러 이곳에 왔는지 알 리 없는 현지인 기사는 모두가 잠들고 성찬만 깨어있던 때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일본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배경이 된 관광지가 있다며 성찬에게 그곳의 방문을 추천했다.
좋은 여행 되세요. 현지인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성찬은 몇 시간 만에 덜거덕거리는 차에서 내려 언덕을 올랐다. 지휘팀에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원빈은 어느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이 근방의 교회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했다. 지휘팀은 임무 수행까지 길어야 일주일 정도로 예상했다. 입수된 정보가 꽤 믿을 만한 듯했다. 성찬을 제외한 팀원들도 이틀, 사흘, 나흘, 각자 기간을 예상했다. 그러다 그중 한 명이 기간을 걸고 내기를 제안했다.
“And you?”
“⋯A week.”
잠시 고민하던 성찬이 일주일이라고 답하자 외국인 용병 셋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없어 그러는 거냐며 성찬의 수행 능력을 조롱했다. 성찬은 개의치 않았다.
숙소는 퀴리노 힐의 한 가정집이었다. 말이 가정집이지 제대로 된 가구 하나 없는 빈집을 헐값에 통으로 빌렸다. 그 대신 높은 언덕 위에 있어 옥상에 올라가면 주변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표적의 위치를 확인하고 저격하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다만 건물이 밀집되어 있으며 길이 좁고 땅이 고르지 못한 탓에 지휘팀은 근접전을 권고했다.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하면 자칫 외교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회의를 마치고 성찬은 옥상을 찾았다. 성찬은 외국인 용병과 함께 북쪽 언덕 아래의 교회부터 수색을 시작하기로 했다. 캄캄해진 동네에 불빛이라곤 없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나 성찬은 한참 동안 주변을 내려다봤다.
“형.”
적막을 깬 목소리에 성찬이 뒤를 돌았다. 그 녀석의 목소리일 리 없는 걸 알면서 성찬은 기어코 지난날을 떠올렸다. 열지 말았어야 할 판도라 상자를 결국 열고 만 것이었다.
6.
예멘의 어느 중부 도시 외곽 지역. 극비로 석유 관련 협상을 진행하던 실무진들이 소규모 무장 세력에게 노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정부는 특수단과 국정원 요원을 현지에 파견했다. 보안상 국제 협력을 요구할 수 없던 탓에 이들은 극도의 압박감 속에서 작전을 진행해야 했다. 무력 충돌의 위험을 예상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쫄지 마.’
목표 지역에 투입되기 직전, 성찬이 입 모양을 만들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정작 얼굴에는 긴장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야시경에 잡힌 녹색 얼굴의 성찬을 확인한 원빈이 얕게 웃었다. 그러나 막상 건물에 진입하니 성찬의 눈빛이 매섭게 돌변했다.
수색 중 가장 선두에 선 상관이 인질을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발견 신호였다. 동시에 뒤에서 예상치 못한 소음이 발생했다. 둔탁한 소음이 난 위치를 확인하니 경계를 서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 서프레서가 달린 원빈의 총구에서 연기가 새어 나왔다.
찰나 침묵이 이어졌다. 예상보다 빨리 정체가 노출됐다. 한시가 급했다. 무력 충돌이 커지면 불리해질 수 있는 싸움이었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도시 외곽이라도 한밤중의 총성 소리는 잠들어 있는 적들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대원들은 전투태세를 갖추고 남은 두 명의 인질 수색에 속도를 올렸다.
마지막 인질을 발견한 상관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가장 바라지 않았던 최악의 상황. 두 명의 인질이 몸에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한 명은 다리를 다쳐 홀로 걸을 수 없었고, 다른 한 명은 구토한 흔적과 함께 탈수 증상을 보였다. 팀장은 신속하게 인질 구출과 후방 작업으로 팀을 쪼갰다.
후발팀으로 남게 된 인물은 중위 정성찬, 소위 박원빈, 상사 이정주였다. 세 사람은 인질과 선발팀이 탈출할 동안 그들을 보호하며 위협을 가하는 적을 제거하고 충돌을 최소화했다. 건물을 지키고 있던 무장 세력의 인원이 많지 않아 세 사람은 선발팀의 마지막 대원까지 무사히 탈출시킬 수 있었다. 기동력을 갖춘 무장 세력의 투입을 대비해 후발팀은 선발팀이 충분히 거리를 벌릴 수 있도록 건물에 남은 적들을 교란시켰다.
인질과 선발팀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2층 창문 앞에 선 성찬이 원빈과 정주에게 사인을 보냈다. 시선을 거두려던 때 이쪽으로 돌진해 오는 개조 차량 두 대를 목격했다. 성찬은 차량 타이어를 조준해 총성을 연발했다. 총성을 들은 무장 세력은 차에서 내려 양쪽 입구를 향해 제법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탈출을 위해서 가장 가까운 출구를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총격전 역시 불가피해졌다. 세 사람은 신속하게 몸을 움직였다. 두 층을 내려올 동안 제일 앞에 선 성찬의 총구가 상대의 발소리를 따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1층에 도착한 성찬이 벽에 기대 탄창을 갈아 끼웠다. 유리한 상황은 끝났다. 폭이 좁은 실내 계단을 내려올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마지막 고비였다. 현 위치부터 출구까지 어디에 누가 얼마나 숨어있을지 알 수 없었다. 세 사람은 은밀하게 조금씩 몸을 옮겼다.
순간 인기척을 느낀 성찬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따르던 두 사람에게 사인을 보냈다. 남서쪽 기둥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적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전방에 총을 난사했다. 세 사람은 각자 몸을 숨기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그때부터 무자비한 총성이 이어졌다. 이 순간부터 최우선 목표는 탈출이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무사히 탈출하는 것. 부상을 입어서도 안 됐다. 그때부터 이들의 총구는 팀원을 제외한 사람의 형체를 띤 모든 것에 향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허용하지 않았다.
목표했던 출구로 적들이 진입해 오는 장면을 목격한 성찬이 두 사람에게 다시 신호를 보내 계획을 틀었다. 어쩌다 발에 걸려 으득거리는 것이 누군가의 신체인지 바닥에 널브러진 가구의 잔해인지 파악할 여유도 없었다. 오로지 훈련으로 익힌 감각과 생존본능에 의존할 뿐이었다.
성찬은 바깥쪽에 있는 기둥으로 걸음을 옮겨 몸을 숨겼다. 숨을 돌리기 무섭게 뒤편에서 총성이 연달아 이어졌다. 성찬이 몸을 틀어 적들을 향해 사격하는 사이에 몸을 숙이고 이동하는 정주가 시야에 들어왔다. 때마침 정주의 뒤로 무장 세력을 발견하고 빠르게 저격했다. 그러나 정주를 발견한 무장세력도 거의 동시에 총을 난발했고, 성찬이 시야를 옮겼을 때 정주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정주가 몸을 숨기자 성찬이 달려갔다. 한발 늦게 정주의 부상을 발견한 원빈이 두 사람에게 다가와 사주 경계했다.
“부상자 발생.”
성찬이 무전을 통해 비상 상황을 알렸다. 그러나 동료가 이곳에 돌아와 병력을 보충해줄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다. 급하게 응급처치를 마친 정주가 괜찮은 듯 일어나려다 다시 고꾸라졌다. 성찬이 정주를 말렸다.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던 원빈이 집중한 얼굴로 사방을 살폈다. 무언가 파악하는 듯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수를 셌다. 손에 든 돌격 소총의 탄창을 보고, 허리춤에 찬 권총을 손으로 확인했다.
“중위님께서 이 상사 보호하십시오. 제가 전후방 맡겠습니다.”
“혼자?”
“가능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원빈이 확신에 찬 얼굴로 답했다. 성찬은 믿을 수 없었다. 정주도 같은 의견인 듯했다. 그러나 조금씩 선명해지는 발소리나 동료들이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계산하면 다른 수가 없었다. 성찬이 한 손에 권총을 들고 다른 팔로 정주를 부축했다. 앞장선 원빈은 사격 자세로 걸음을 옮겼다.
성찬은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원빈의 사격은 마치 적을 보고 쏘는 게 아니라 적이 나타날 것을 예상하고 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예상이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성찬이 인기척을 느끼고 권총을 들었을 때는 이미 원빈의 총구가 겨눠져 있었다. 속도나 정확도나 무엇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당시 성찬은 상처 입은 자존심과 별개로 원빈의 실력이 자신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건물을 나와 시설물 뒤에 몸을 숨겼다. 그때 위치를 묻는 무전이 도착했다. 무전 세력도 싸움을 포기하는 듯이 보였고, 얼마 후 보충 병력이 현장에 도착했다. 그렇게 작전도 마무리되는 듯했다.
랑데부 포인트로 전원 복귀했다. 작전 본부와 연락을 마친 상관이 대원들에게 마지막 임무를 하달했다. 부상자와 보호 병력은 먼저 보내고, 남은 인력은 내일 새벽에 현장 상황을 확인한 뒤 이동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날 가장 직급이 낮은 성찬과 원빈이 같은 방을 썼다. 방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만큼 비좁은 공간에는 낡은 간이침대가 하나가 겨우 놓여 있었고, 그들에게 한 시간 정도 숨 돌릴 틈이 허락됐다.
“중위님.”
“⋯⋯.”
“괜찮으십니까?”
군모와 야시경을 벗고 총을 내려놓은 뒤 잠시 침대에 앉아 휴식을 취하려던 성찬에게 원빈이 물었다. 상관인 저보다 훨씬 덤덤한 얼굴로 타인의 상태를 묻는 원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그래, 짧게 대답했다. 원빈의 움직임을 빤히 쳐다보던 성찬은 아까 임무를 수행하던 원빈의 모습을 떠올렸다.
“박 소위.”
“네.”
저를 부르는 소리에 원빈이 빠르게 자세를 고치며 반응했다. 원빈은 늘 저렇게 성찬에게 깍듯이 굴었다. 그러니까 그때. 나보다 월등한 실력에도 생색낼 궁리 따위는 하지 않고, 거들먹거리지도 않는, 천생 군인이 되려고 태어난 것 같은 녀석이 내 앞에 정자세로 서 있을 때.
그때 내가 정신이 나갔나. 이 정도로 큰 작전은 처음이라 그랬나. 뒤늦게 사람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이 몰려와 도피하고 싶었나. 아니면 네가 괜히 안부 같은 걸 물어 어리광이라도 피우고 싶었나. 그러면 너는 그런 나를 이해할 거란 이상한 기대가 있었나. 왜 내 마음이 갑자기 동요했는지⋯.
“⋯⋯.”
성찬이 원빈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그 행동이 몹시 거칠고 급했다. 그렇다고 분노는 아니고. 성찬은 제 행동에 원빈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어쩐지 원빈은 가만히 있었다. 닥치는 대로 원빈의 입속을 물고 빨던 성찬이 조금씩 차분해졌다. 그러자 그제야 원빈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원빈이 성찬을 천천히 이끌자 오히려 성찬이 안달하며 흥분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의 제복이 군화 위로 떨어졌다. 벽을 보고 선 원빈이 고개를 들어 입술을 물었다. 등 뒤에 선 성찬이 하체를 움직일 때마다 원빈은 입 안에서 터지는 소리를 힘겹게 삼켰다.
“⋯중위님⋯.”
그날따라 성찬은 자신을 부르는 원빈의 목소리가 묘하게 느껴졌다.
“그거 말고, 형.”
“⋯⋯.”
“형이라고 불러 봐.”
“⋯형.”
성찬의 턱에 근육이 솟았다. 그 순간만큼 성찬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두 사람뿐인 이 작은 공간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한참 현실로부터 달아나 있던 때 바깥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두 사람은 황급히 제복을 갖춰 입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주변을 감시하던 서 중사가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성찬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허공에 붉은빛을 내는 물체가 조금씩 이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건물 앞 차량 위로 올라가 가늠자로 정체를 확인한 서 중사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상관의 지시를 받은 성찬이 총을 챙겨 옥상으로 올라갔다.
“폭탄이 맞습니다. 개조된 형태로 보이며 폭발 반경은 이십 미터 내외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체를 확인한 성찬이 상관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상관이 사격을 명령했다. 성찬은 정확히 폭탄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광활하게 뚫린 땅 위로 폭탄이 터졌다. 그 후로 모든 일은 순조롭게 처리됐다. 폭탄은 무장 세력이 보복을 위해 보낸 것이었고, 상관과 그의 지시를 받은 성찬의 신속한 행동 때문에 팀 내에 추가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현장에는 한국 정부의 소행을 증명할 만한 흔적이 남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고, 작전 수행을 마친 대원들은 전원 무사히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 애는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마라.”
성찬은 폭탄을 안고 있던 물체가 사실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폭탄뿐 아니라 폭탄을 떠안은 정체까지 함께 파악했다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성찬은 그날 이후로 자주 악몽에 시달렸다. 자신이 조금만 더 신중했다면 아이를 살릴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성급하게 명령을 이행한 제 탓 같았다. 제가 그 애를 죽인 것 같았다.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 어린 게 폭탄을 안고 있다는 것부터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던 겁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중위님 덕분에 우리가 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겁니다.”
모두 그런 방식으로 성찬을 위로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 하나같이 어차피 죽게 됐을 애였다고 말했지만, 성찬은 이해가 안 됐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란 게 어디 있냐며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따질 수 없었다. 그 어린 애를 죽인 건 결국 자신이었다.
자책의 끝에 이런 물음이 있었다. 그때 어린아이라는 걸 알았다면 정말로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을 거냐고. 자신이 건넨 물음에 성찬은 쉬이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게 뒤늦게 깨달은 자신의 가치관과 직업 사이의 모순 속에서 조금씩 속이 곪아갔다.
“중위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원빈이 성찬을 불렀다. 성찬의 안색을 확인한 원빈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 일에 너무 오래 얽매여 있지 마십시오. 죄 없는 아이였다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걸 압니다.”
“⋯⋯.”
성찬이 원빈과 눈을 마주했다.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날 일은⋯⋯.”
적당한 인사를 고민하던 사이 원빈이 타이밍을 가로챘다. 그날 성찬은 원빈이 그 때 일을 꺼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실은 작전 이후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데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다고 스스로 변명했다. 돌이켜보니 미친 짓 같기도 했다. 격해진 감정에서 나온 충동적인 행동일 뿐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려 했다.
“그냥 없던 일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
“그땐 중위님도 저도 제정신이 아니었잖아요.”
분명 같은 마음이었는데. 원빈의 말들이 왜 그렇게 섭섭하게 들렸는지. 이후로도 서운한 마음이 계속 사라지지 않아서 이유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 원빈이 예고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성찬은 끝내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없었다.
7.
성찬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시간을 확인한 성찬이 일 층으로 내려가 팀원들과 함께 테이블 위에 놓인 권총을 챙겼다. 언덕 아래 교회를 시작으로 36-10001의 수색을 시작했다. 표적에게 박원빈이라는 멀쩡한 이름이 있는 걸 알면서도 성찬은 굳이 녀석의 군번을 떠올렸다. 작전에 사적인 감정을 싣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언덕 아래부터 수색을 시작한 성찬은 서서히 언덕 위쪽으로 범위를 넓혔다. 경사가 꽤 높고 언덕이 구불구불하게 나 체력 안배가 중요하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성찬은 마음이 복잡했다. 내심 녀석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들킬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성찬에게 발견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래서 뭐? 임무를 버리고 녀석을 살리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ㅡFound.
무전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표적이 선교사로 추정되는 인물 외에 현지인 여럿과 동행 중이라 저격과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인 듯했다. Roger, 성찬의 동료가 무전에 답했다.
ㅡ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본부에 신원 확인 요청하겠습니다.
ㅡ계속 추적하고 있겠습니다.
이번에는 한국인 동료의 목소리였다. 무전 내용을 들은 성찬이 옆에 있던 외국인 동료와 내용을 공유했다. 어린아이⋯. 무전 내용을 곱씹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 그러나 애써 외면하며 동료를 따라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원빈의 위치가 파악되자 팀원들이 다시 숙소에 모였다. 본부에 동선을 보고한 뒤 명령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지시가 떨어졌다. 오늘 밤과 내일 새벽 사이에 원빈을 암살하고 자살로 위장하라는 것이었다. 어린아이의 신원은 확인이 불가하니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들은 여전히 모든 게 간단했다. 누군가를 죽이는 일에도 거리낌 없었다.
성찬은 절실히 후회했다. 왜 그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는지. 어차피 성찬의 안부 따위는 궁금하지 않을 사람들인데. 평생 충성을 맹세한 집단에 겨우 죄책감을 이유로 관둔 것, 그만큼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 그런 것들이 그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텐데. 성찬은 애초에 무엇을 증명하고 싶었는지조차 헷갈렸다.
그러나 임무를 맡은 용병에게 생각은 사치였다. 적어도 이번 작전에는 명분이 있지 않나. 녀석은 쿠데타에 가담해 국가 안보를 위협했다. 그것만으로 사살 이유는 충분했다.
이유⋯. 그런데 이것 말고도 또 찾아야 할 이유가 있었는데.
성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 앞을 왔다 갔다 서성이자 한국인 동료가 성찬의 곁에 다가왔다.
“형답지 않게 왜 그래요?”
나까지 불안하게,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성찬이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동료가 성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주변을 경계하며 성찬에게마저 들릴락 말락 할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 오기 전에 쿠데타가 일어난 적이 없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확인된 건 아닌데 그게 계속 신경 쓰이는 거 있죠.”
그래놓고 작전 앞두고 괜한 소리를 했다며 팔을 휘휘 저었다. 못 들은 걸로 하세요.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이런 일 하기에 오늘 하늘은 눈치도 없이 더럽게 예쁘네요.”
어느새 하늘에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잘도 흘렀다.
밤이 되자 용병들은 작전을 개시했다. 맞은편 건물에서 대기할 저격수를 제외하고 두 사람은 건물 바깥에 배치, 마지막 두 사람은 표적이 있는 건물 내부 침입을 맡았다. 성찬은 마지막 두 사람에 해당했다.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이 동네에 오직 다섯 명만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성찬은 건물에 잠입할 때까지도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다. 녀석을 살려야 할 명분이 없다는 걸 아는데 마음이 괴로웠다.
‘쿠데타가 일어난 적이 없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건 사실 확인도 안 된 소문일 뿐이다. 그러니 명분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자꾸 동료의 말을 떠올렸다. 그렇게 잡념에 정신이 팔린 사이, 어느새 동료들의 뒤를 따라 건물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을 두고 성찬과 동료는 바깥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발코니 쪽으로 난 창문을 하나씩 확인하다 제일 안쪽에 잠겨있지 않은 창문을 발견했다. 창문을 통해 진입하니 내부는 텅 비어있고 복도에 난 방문들이 전부 열려 있었다. 동료가 당황한 얼굴로 성찬을 봤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계획이 틀어졌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두 사람은 서둘러 내부를 확인했다. 건물 어디에도 원빈은 없었다. 머무른 흔적도 없었다.
“긴급 상황. 표적이 사라졌다.”
작전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작전 직전까지 감시를 담당했던 외국인 용병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임무 수행을 위한 출발 직전까지 2층 가운데 방에 불이 켜져 있었고 건물을 출입한 사람은 없었으며, 그 직전에 임무를 넘긴 외국인 용병은 표적이 건물 내부 복도를 오가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다고 진술했다. 저격수는 넷의 출발 이후에도 표적의 별다른 움직임이 확인되지 않았다며 진술을 더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표적이 감시를 피해 탈출했다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본부에 상황을 공유하자 분노에 찬 목소리가 돌아왔다. 반드시 죽일 것. 그들은 계약 내용을 들먹이며 협박에 가까운 명령을 내렸다. 다섯 명은 구역을 나눠 목표물 수색을 시작했다. 그러나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이라 수색이 쉽지 않았다.
별 소득 없는 수색이 계속 이어졌다. 얼마 후면 해가 뜨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상을 시작할 것이다.
ㅡFound.
그때 무전이 들려왔다.
ㅡAiming.
저격수의 목소리였다. 그는 목표물의 위치를 공유한 뒤 저격 상황을 알리며 무전을 끊었다. 성찬의 위치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녀석이 죽으면 작전은 성공이다. 성찬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여기는 선라이즈 로드. 일출을 보러 사람들이 찾는 곳답게 경사가 상당히 가팔랐다. 오르막을 올라 숨을 헉헉대던 성찬의 귀에 타인의 숨소리가 꽂혔다.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에 어설프게 몸을 숨긴 두 사람이 보였다. 그 두 사람 중 한 명은 성찬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원빈 역시 성찬을 한눈에 알아봤다. 성찬은 인사를 건네며 허리에 찬 권총을 꺼내 손에 쥐었다. 서로의 총구가 서로를 향했다.
“왜 안 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찬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 애초에 대답은 필요 없었다. 시선을 따라 총구의 방향이 틀어지고, 곧이어 탕ㅡ 명쾌한 총성이 동네 전체에 울렸다.
성찬이 원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시간이 없어.”
성찬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원빈이 있어야 할 곳에 없었을 때,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없게 되었을 때 크게 안도했다. 무전을 듣기 전까지 부디 이렇게 계속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고, 사람들이 일상을 시작할 때까지 무탈하게 숨어있기를 바랐다. 성찬은 원빈이 살기를 바랐다. 죽이고 싶지 않았다. 명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침내 제 진심을 인정했다.
‘죄 없는 아이였다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걸 압니다.’
그때 원빈이 건넨 위로는 진심이었다. 그런 위로를 건넨 건 원빈이 유일했다. 그런 원빈이라면 이유 없이 누군가를 해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확신했다.
왜냐하면 방금도 넌 내가 총을 쥘 때까지 나를 쏘지 않았잖아.
8.
총소리에 동네가 어수선해진 틈을 타 성찬과 원빈은 아이를 데리고 퀴리노 힐을 빠르게 벗어났다. 도착한 곳은 밸리 오브 컬러스. 첫날 운전기사가 언급한 바기오의 관광지였다. 함부로 총기나 카메라를 꺼낼 수 없는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으나 마침 입구로 들어서는 열 명 남짓의 한국인 관광객을 발견했다. 운이 좋았다.
“야 너 이름이 뭐야?”
“은호요.”
성찬이 은호의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그리곤 아이에게 등을 내밀었다. 성찬은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은호를 등에 업고 관광객 사이로 섞여들었다. 마을로 향하는 다리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으려 잠시 멈춘 사이에 그들은 마을 안쪽으로 깊숙이 이동했다.
“여기를 이렇게 오게 될 줄 몰랐는데.”
성찬이 읊조렸다. 원빈은 대꾸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마을 끝에서 도로로 연결된 다리를 건넜다. 성찬은 막 출발하려는 아무 차를 붙잡아 세우고 합승을 부탁했다. 아픈 아이를 본 외국인 관광객들이 흔쾌히 수락했다. 성찬은 빈자리에 원빈과 은호를 태우고 말없이 두 사람을 쳐다봤다.
“잘 가. 조심하고.”
짧은 인사와 함께 성찬이 차 문을 닫았다. 방금 건넨 인사가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렇다고 다른 할 말이 또 있었나. 뒤돌아선 성찬의 입가에 어떤 말이 맴돌았지만, 이미 꺼내기엔 늦었다는 걸 알았다. 두 사람이 탄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던 성찬은 방금 방향을 틀었다. 원빈과 한 약속과는 다른 행동이었다.
저격수를 쏘고 배신을 결심했을 때 원빈은 애꿎은 희생을 감당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원하지 않는다고. 지금이라도 돌아가라고. 그런데 성찬에게는 그게 마치 살려달라는 부탁처럼 들렸다. 생각해 둔 방법이 있다는 허접한 변명을 내놓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은호를 챙겼다. 그럼에도 원빈의 비협조에 두 사람 때문에 절대 다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
성찬은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자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저들이 도망갈 방법이 없다.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건 유감이지만, 애초에 지킬 마음이 없던 약속이었다. 성찬은 오후 늦게까지 시간을 끌다 저녁 즈음에 한국인 동료에게 일부러 붙잡혔다. 왜 그랬냐고 묻지 않는 걸 보니 제가 건넨 말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게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외국인 용병들은 성찬의 단독 행동을 탓하며 욕했고, 소식을 접한 의뢰인은 격노했다.
귀국하자마자 성찬은 계약에 명시된 대로 국가보안법 위반에 따라 구치소에 구금됐다. 소식을 접한 성찬의 본가에서 급히 변호사를 선임했다. 집안의 명예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찬은 입을 굳게 닫았다. 아무리 유능한 변호사라도 자신을 도울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다. 굳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변호사는 그런 성찬에게 괜한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라며 다그쳤다. 그럼에도 성찬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변호사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별 소득 없던 접견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성찬이 입을 열었다.
“목표물의 도주를 도운 건 명백한 사실이고, 군 내 쿠데타를 모의한 범인을 사살하라는 게 임무 내용이었습니다. 참고로 이건 작전이 끝난 뒤에도 제삼자에게 절대로 발설해선 안 된다고 했고요. 그쪽 덕분에 난 지금 계약 사항을 하나 더 위반했네요.”
“이봐요.”
“애초에 이 정도는 각오하고 시작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변호 필요 없습니다.”
“⋯⋯.”
손목에 찬 시계를 본 변호사가 답답한 얼굴로 수첩을 정리했다.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성찬이 변호사를 붙잡았다.
“왜요. 그새 마음이 바뀌기라도 했습니까?”
“미리 유언장 같은 거 남겨도 됩니까?”
9.
여러 혐의에 대한 수사로 구금이 길어지던 성찬이 석 달 만에 갑자기 풀려났다. 재판은 없었다. 처벌도 없었다. 대신 정부와의 거래가 있었던 듯했다. 그들은 조부의 명예를 언급했다. 설명이라곤 그게 전부였다.
성찬이 멋대로 군인을 관두었을 때 조부는 절연을 선언했다. 그날 이후로 성찬은 한 번도 본가를 찾지 않았는데, 그런 집을 몇 년 만에 연락도 없이 방문했다. 왜 그러셨냐는 성찬의 확신에 찬 물음에 조부는 대답 대신 두꺼운 서류 봉투 하나를 던졌다.
“⋯⋯.”
서류를 확인한 성찬은 좌절했다. 사람이 울분으로 가득 차더라도 화가 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성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아니. 도무지 믿기지 않아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도통 정신이 없었다. 성찬이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아까보다 조금 침착해진 것 같아 손에 쥔 서류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어째서 그 녀석이 나를 비롯한 용병들에게 쫓기고 있었는지, 정부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녀석을 죽이려 들었는지, 그 기막힌 진실이 겨우 이깟 종이 몇 장에 담겨 있었다.
다음은 용병 고용 계약서. 성찬이 구금된 석 달 동안 조부는 사설 용병 둘을 고용했다. 일부러 국정원 또는 정보기관 출신만 골랐다. 누군가를 죽일 목적이 아니라 죽도록 설득할 목적이었다. 그들은 계약 내용을 완벽히 이행했다. 찾아야 할 사람을 찾았고, 그를 설득했고, 계약서 내 상기 목적을 달성해 이틀 전 조부로부터 성공 보수를 받아 갔다. 입이 무거운 이들을 선별해 뽑았으니 계약 내용이 그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밝혀지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말들은 결국 원빈이 죽었다는 뜻이다.
계약서 뒤에는 성찬이 남긴 유언장이 있었다. 변호사는 본인의 동의 없이 유언장을 함부로 타인에게 공개할 수 없다. 그러나 성찬은 법을 어긴 변호사를 처벌받게 할 수 없다. 조부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감히 조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성찬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넘겼다. 다음 장은 원빈의 유전자 검사지였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성찬은 사살 임무 수행 시 표적의 시신 전체를 옮길 수 없는 경우, 완수의 증거로 표적의 신체 일부를 수거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제야 눈물이 터졌다.
“왜 그러셨어요.”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왜 이런 짓까지 하신 거예요. 성찬이 굳게 닫힌 서재 앞에서 서럽게 울부짖었다. 괜히 유언 따위를 남기는 게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어쭙잖은 정의감은 버리고 함께 도망쳐야 했다. 공정한 처벌을 기대할 곳이 못 된다는 걸 알면서 일말의 기대를 품은 내 잘못이다. 나 때문에 녀석이 죽었다. 나 때문에 박원빈이 죽었다.
자책하는 성찬 앞에 조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식이 아무리 미워도 사지로 내몰린 자식까지 외면할 부모는 없다고, 조부가 말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놈이었다.”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조부를 원망 섞인 눈으로 올려다보던 성찬이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망한 얼굴로 손에서 떨어진 서류들을 내려다봤다. 고작 저것들을 불태운다고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를 살리겠다고 박원빈이 죽었다. 이것은 바뀌지 않을 현실이었다.
10.
일 년 후, 성찬은 원빈이 데리고 있던 은호를 찾겠다고 결심했다. 막연히 원빈과 함께 죽었을 거라 단정했었다. 그러나 조부가 보여준 서류 어디에도 은호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작전 당시 아이의 신분을 확인할 수 없었던 걸 보면 어딘가에 살아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성찬은 베트남 후에로 가는 가장 빠른 항공권을 예약했다. 현지 흥신소를 수소문해 은호를 찾아달란 의뢰를 넣었다. 출발 하루 전, 예상보다 은호를 빨리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원빈이 죽은 곳을 제 발로 찾아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후에에 도착한 지 사흘째, 흥신소로부터 ‘12.15. 14:00, Phu Cam Cathedral’ 문자를 받았다. 약속된 날짜에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성당에 도착한 성찬은 맨 뒤 의자에 앉아 예수상을 응시했다. 시선을 돌리니 기도하는 몇몇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성찬은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성호를 긋는 순서는 엉망에 평소 절실히 믿는 신도 없지만, 이왕 이런 곳에 온 김에 성찬은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불신자치곤 꽤 긴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성찬의 등을 콕콕 찔렀다. 뒤를 돌아보니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은호가 있었다. 성찬이 반가운 얼굴을 하니 은호가 서둘러 검지를 제 입에 가져다 댔다. 이곳에서 괜한 소란을 피우지 말란 사전 경고였다.
무국적이었던 은호는 현지인 부부의 도움으로 베트남 국적을 얻어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은호의 밝은 얼굴을 보니 그들은 다행히 따뜻한 사람들인 듯했다. 성찬은 은호의 안부와 이곳 생활, 꿈이나 목표 같은 것들까지 물었다. 성찬의 끊임없는 질문에 은호는 정성껏 대답했다. 한참 후에 성찬의 질문이 멈추자 마침내 고요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마저도 은호의 물음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왜 안 물어보세요?”
“응?”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있잖아요.”
“⋯⋯.”
“⋯⋯.”
“나랑 같이 한국 갈래? 삼촌이 잘 키워줄게.”
성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호가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는 여기가 안전해요. 성찬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빈 형은 아저씨가 저를 찾아올 걸 알고 있었나 봐요.”
은호의 말에 성찬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은호가 원빈 이야기를 꺼낼 걸 충분히 예상했는데도 감정을 다스리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됐다. 성찬이 젓가락으로 샐러드 야채를 들었다 놨다 반복했다. 은호는 그런 행동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전해달라는 말이 있어요.”
“⋯⋯.”
“너무 오래 얽매여 있지 말래요. 원빈 형은 후회하거나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고요.”
그 녀석다운 말이었다. 성찬의 젓가락질이 점점 느려졌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제정신이었고, 없던 일로 하잔다고 없던 일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지 않느냐고. 이렇게 말하면 아저씨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거래요.”
힘없이 샐러드를 휘젓던 성찬의 젓가락질이 멈추었다.
“제 앞에서 우셔도 돼요.”
“쪼끄만 게 못 하는 말이 없어.”
“아, 참.”
“⋯⋯.”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이건 제 인사예요.”
은호를 보고 있으니 당장 원빈이 사무치게 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후회할 줄 알았으면 그때라도 말할 걸 그랬다. 내가 너를 좋아했던 것 같다고. 지금도 좋아한다고. 너를 이렇게나 좋아하고 있다고.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아 미안하다고.
힘주어 참던 눈물이 끝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