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ART VIDEO AFTER

키스 애프터 키스!
by. 핀


기타리스트의 숙명. 공연, 함성, 그리고 가난.


기타로 부와 명예를 얻고 싶다던 옛꿈은 버린 지 오래라도, 기타가 제 몸만한 철부지 시절부터 원빈이 가진 꿈은 단 하나였다. 마음껏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음악에 머리를 흔드는 삶. 단출하게 그거 하나. 그러나 예술은 향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돈을 택했고 돈이 없으면 음악이나 예술 같은 건 먼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었다. 돈 그딴 거 없으면... 안되지. 마지막까지 제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오는 가난이라는 태그가 원빈의 소박한 꿈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없는 돈으로 기타 줄을 바꾸고 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던 옛날의 낭만과 반짝임은 온데간데없이 오로지 현실만이 짓누르고 있었다.


"원빈, 활동비가 부족해."


지긋지긋하다 저 말. 겨우 얻은 작은 반지하 연습실 대여료를 넷이 나눠 내도 생활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학비야 부모님을 통해 채운다고 해도... 취미생활 할 돈까지 뜯어낼 불효자가 되긴 싫어 파트 타이머로 어떻게든 연명해 오던 밴드가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듯 했다. 뜨거운 기름 앞에서 프렌치프라이를 튀기던 고통을 다 잊게 하던 것이 손에 느껴지던 기타의 진동이었는데. 방음도 안 되는 집에서 기타를 치다간 내쫓길 게 분명해 연습실에서만 치던 그 짧은 두어 시간까지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원빈은 본투비 락스타, 그러니까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는 대한민국 남자 기질을 타고난 기타리스트. 원빈이 목숨처럼 아끼는 기타를 마른 천으로 닦다가 짜증 내듯 타올을 던졌다. 공연 코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해야겠어? 초치는 거야? 짜증을 내니 조지가 어깨를 한번 들썩였다.

 

"그렇지만 그건 사실이잖아. 돈 없어서 길거리 나앉을 거야. 대관을 더 이상 어떻게 해. 그냥 학교 밴드부로 전향하자니까?"

 

조지의 말에 원빈이 절대 안 된다며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어떻게 이 아이를 데리고 그 구닥다리 강당에서 공연을 해? 미친 소리 하지 말라며 윽박질러도 이미 낭만은 버리고 현실만 자각하기 시작한 조지에겐 들릴 리가 만무했다. 원빈의 앞에 쪼그려 앉아 타올을 다시 건네주던 조지의 입에서 잔혹한 현실만 줄줄이 읊어졌다. 그럼, 돈을 무슨 수로 구해. 당장 연말 공연하려면 대관도 해야 한다고. 원빈, 나도 너무 하고 싶지만 이렇게 가다간 우리 돈으로 해체하게 될 거야. 다들 의견차이니 뭐니 하면서 해체하잖아? 그거 다 거짓말일걸. 돈이야 원빈. 돈이 없으면 음악은 죽어.

 

조지가 건넨 타올을 말없이 받아 든 원빈은 괜히 기타 줄을 하나씩 뜯었다. 아무 코드도 없이 순수하게 가지고 있는 음만 내는 기타를 내려다보던 원빈은 틀린 말 하나 없는 것에 그저 씩씩거릴 뿐이었다. 그래 음악은 돈이야. 나도 안다고.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뼈저리게 느껴온 사실을 원빈이 모를 리가 없었다. 돈이 없어 방음 벽지도 듬성듬성하게 붙여놓은 작은 연습실만 봐도 말 다 했다.

 

원빈아, 차라리 요식업을 하는 게 어떻니. 미국에서의 삶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가면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주겠다던 부모님의 말씀을 걷어차 버린 게 생각났다. 차라리 그랬으면... 아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원빈은 현실에 부딪혀 자꾸만 과거를 끄집어내었다. 이러한 원빈의 생각은 현실만 바라보고 사는 원빈에게 지금 현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음을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최근 맥도날드에서 파트 타이머로 일하던 것도 잘렸다. 손을 거칠게 다룰 줄도 모르는 애를 어떻게 요리를 시키냐는 게 이유였다. 기타를 쳐야 할 손이 망가지는 걸 도저히 볼 수 없어 몸 좀 사렸다가 일자리와 당장의 생활비를 잃었다. 이쯤 되면 기타가 원빈의 삶에서 그다지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박원빈에겐 기타와 음악이 전부였다. 정말, 기타가 치고 싶었다. 죽을 때까지. 죽더라도 기타를 안고 죽고 싶을 만큼.

 

당장 앞에 놓인 새해맞이 시티 홀 공연만 보고 살았으나 연말이라 대관료가 더 비싸졌다.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기대에 부풀어있던 원빈을 금세 좌절시킬 만큼의 가격이었다. 일반 플로어 층도 아니고 지하에 위치한 좁아터진 공연장이 1시간에 거의 4,500달러. 한화로 약 600만 원을 요구하는 싸가지없는 가격이었으나 연말이라 납득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사정사정해 크리스마스 자정까지 돈을 반드시 납부하기로 하고 대기만 걸어둔 상태였다. 원빈, 원래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지? 그때까지 돈을 납부하지 않으면 예약 취소라며 압박하는 직원의 말에 원빈은 고개까지 조아렸다. 어떻게든 돈을 충당해야 하는데... 어쩌지. 조급한 마음에 고민이 깊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당장 어디서 구해."

"원빈, 곧 학교 크리스마스 이벤트 하잖아. 그걸 노려야지."

"그거 돈 안 된다던데."

"안되면 키싱부스라도 하는 거지 뭐."

 

어때? 조지의 장난기 어린 제안에 노아가 야유했다. 필립도 거들며 타박했다. 우우. 조지, 너 그냥 여자애들이랑 마음껏 키스하고 싶은 건 아니고? 그럴 리가! 투닥거리는 밴드부원들의 말에도 가만히 기타줄을 튕기던 원빈은 결심한 듯 기타를 안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빤딱빤딱하게 닦아놓은 기타에 비친 얼굴이 다소 비장하다. 이 예쁜 아이에게 함성소리를 들려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원빈이 숨을 크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 하자, 키싱부스."

 

 

 


 

키스 애프터 키스!

w. 핀

 

 

 



Dec 13th, 2024

The Kissing Booth : D - 11

 

 

"조지, 정말 하는 거야? 영화를 너무 본 것 같은데."

 

에이미, 영화에서나 하던 거니까 실제로 하면 얼마나 재밌겠어. 너도 사고 싶잖아. 필립 노리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디엠 줘, 내가 특별히 네 거 하나 빼둘게. 고마워, 조지. 잘 부탁해? 당연하지!

 

원빈은 홀웨이 한복판에서 티켓 하나를 순식간에 판매해 버린 조지의 입담에 혀를 내둘렀다. 와우. 엄지를 치켜세우며 칭찬하자 -놀리는 게 맞다.- 신이 난 조지가 홀웨이를 지나가던 다른 여자애에게 호객 행위를 이어갔다. 결과는 또다시 판매 완료. 키싱부스 이벤트까지 이주는 족히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가다간 티켓을 순식간에 다 팔아버려 돈을 쓸어모을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크리스마스 자선행사로 열리는 키싱부스. 재작년에 처음 실시되어 꽤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고 어렴풋이 들었다. 공연 준비에 여념이 없어 보러 갈 생각조차 않았던 원빈은 이게 곧이어 닥칠 현실이라는 것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로맨스에 미친 인간들이라지만 이딴걸 연다고? 미국은 개방적이라더니 이런 쪽이었던 건가? 게다가 학교 주최라니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돈만 아니었으면 절대 발도 들이지 않았을 만큼 비상식적이다. 반발심이 들 법도 했으나 먼저 제안한 것도 원빈 본인인 데다가 이미 조지가 신청해 버린 이상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Do you want to kiss with your ♡ ?
 The Kissing Booth will be come true!
Dec 24th, 20XX
ticket contact. 904-0913-0302

 


원빈은 게시판에 떡하니 붙어있는 포스터를 읽었다. 너무 구려서 키스하고 싶던 애들도 안 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촌스러운 폰트, 화려하기만 한 컬러, 비율은 신경도 안 쓴 게 분명한 커다란 컨택트 넘버. 뭐든 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하는 박원빈 성정엔 그것마저 고까워 보였다. 이거 괜찮은 건가... 그러나 의심하긴 늦었기에 원빈은 애써 머릿속에서 불안감을 지워버렸다. 그러나 다시금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한 건 2주 후 크리스마스이브에 닥칠 키싱부스에서 눈을 가린 채 50명과 키스할 제 모습이었다.

 

조지가 설명해 준 키싱부스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 참가 인원은 선착순 신청된 6명으로, 3명씩 나누어서 두 타임으로 진행.

* 키싱부스 티켓은 인당 50개, 티켓 하나당 30달러. 키스는 1분간.

* 참가자에게는 크리스마스 자선 기부를 위한 수수료 30%를 제하고 지급.

* 안대를 벗는 즉시 거절의 의미가 되어 참가자가 지불했던 돈은 모두 기부금으로 전환.

 

티켓이 너무 비싼 것도 비싼 건데... 지금 나한테 거절도 하지 말도 50분 동안 키스하라는 거지? 원빈이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조지에게 묻자 습관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 안 버티면 공연을 어떻게 할 거냐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베이스 필립, 신디사이저 노아, 드럼 조지와 저를 포함하면 벌써 넷. 자선행사 수수료를 제하고도 약 4,200달러가량이니 당분간은 못 만져볼 큰돈인 건 맞았다.

 

"그런데, 약간 모자라지 않아?"

"그러니까. 대관료가 4,500달러인데 나머지 300달러는 무슨 수로 채워. 생활비도 빠듯하다고."

 

노아의 물음에 머릿속으로 곰곰이 상금을 계산하던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300달러, 한화로 약 40만 원을 웃도는 돈. 그까짓 거 파트타임 한번 빡세게 뛰면 그만이라고 여길지도 모르나 남은 2주가량의 시간 중 연습을 제외한 시간 안에 마련하긴 큰 금액이다. 월급도 쥐꼬리만 했던 맥도날드에서 잘리기까지 한 원빈 또한 동의하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자 조지의 입에서 터무니없는 말이 이어진다. 그러니까, 우리 중에 한 명이 무조건 1등을 해야 해.

 

조지의 설명에 의하면 크리스마스 시즌 구색을 갖추듯, 키싱부스 참가자 중 가장 로맨틱한 키스를 한 사람에게 수수료 차감 없이 티켓 판매금 전액을 준단다. 남들 앞에서 로맨틱한 키스라니… 공연음란죄를 어떻게든 아름답게 포장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분명하다. 다소 삐뚤어진 생각이었으나 원빈은 어쨌든 돈을 생각하면 사실 그게 가장 빠른 길이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3명은 수수료 차감 후 합산하면 3,150달러. 그리고 1등이 1,500달러를 모두 가져가면 도합 4,650달러. 공연 후 다같이 밥을 먹으러 가도 될 정도의 돈이기 때문이다.

 

"상금을 원하면 싫은 티 내지 말라는 거 아니겠어? 해피 메리 크리스마스니까."

 

심드렁한 조지의 말에 원빈이 벙긋거리던 입을 다물어버렸다.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래 다 좋다 이거야. 우린 돈이 필요하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 하고, 키싱부스가 좋든 싫든 가장 빠른 지름길이지. 그러나 티켓을 모두 판다고 해도 1등을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무슨 수로 1등을 하란 거야? 원빈의 물음에 조지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이처럼 연기를 해야지. 여긴 할리우드의 나라라고."

 

조지가 이곳과 정반대인, 가본 적도 없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사인까지 들먹인다. 상대를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과 키스해서 좋아 죽겠다는 듯이. 그렇게 속이는 거야.

 

흉내 내다 내지는 연기하다. act가 아닌 pretend의 의미는 사뭇 부정적이다. 너무 기만 아닌가... 원빈이 중얼거리자 필립이 격려하듯 툭툭 어깨를 두드렸다. 이런 이벤트에서 진짜 사랑을 찾는 게 더 모순이고 기만이야. 또다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거짓말에 소질 없는 원빈은 정말이지 그 어느 때보다 아무 생각 없이 기타나 치고 싶었다. 어깨에 멘 너 하나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길이 이렇게도 험난하니, 이 또한 수난 많은 기타리스트의 일생인 게 틀림없었다.

 

 

-

 

 

Dec 14th, 2024

The Kissing Booth : D - 10

 

 

"원빈, 네 티켓 다 팔렸대!"

"뭐?"

"심지어 가장 먼저 솔드아웃 됐다고!"

 

런치 브레이크, 입맛이 없어 멍하니 클래스 룸에 앉아 트윙키를 씹던 원빈에게 필립과 조지가 달려와 환호하며 얼싸안았다. 얼떨떨하게 함께 어깨동무하던 원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사람을 바라보았다. 신청한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 많은 게 벌써 다 팔렸다고? 1분에 30달러나 하는 게? 그러자 옆에 있던 노아가 창가에 걸터앉으며 말을 거들었다. 너 인기 많잖아, 이상한 일도 아니야.

 

원빈이 속한 밴드는 지역에선 그래도 알음알음 꽤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물론 음악은 아니고, 외모 때문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인기 덕에 이리저리 불려 다녀 연명한 것도 있으니, 외모로 판가름 나는 인기의 척도를 마냥 무시하긴 힘들었다. 팬들로 먹고사는 셀러브리티들이 필러와 보톡스에 목메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노래는 안 들어주고 셀피만 찍어달라 하던 애들을 기피하던 원빈이었으나 덕분에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싶었다. 이대로 1등도 하는 거 아니야? 노아가 웃으며 하는 말에 원빈이 멋쩍은 듯 머리만 긁적였다.

 

그러나 필립이 노아의 말에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껏 분위기 좋은데 초치는 것도 아니고 어울리지도 않게 무게를 잡는다. 왜 저러는 거야? 원빈이 조용히 조지에게 묻자 고개만 가로저었다. 같이 온 조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필립이 별다른 말 없이 원빈의 앞자리에 앉아 원빈이 먹던 트윙키 박스에서 2개를 꺼내 순식간에 해치웠다. 이목을 집중시켜놓고 뭐하는 짓인가 싶었으나 다소 비장한 표정이라 말리지도 못했다. 노아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그냥 말하라며 재촉했으나 기어코 그 단 걸 가루 한 톨 남기지 않고 다 먹어 치우고 나서야 필립이 입을 열었다.

 

"수잔 말에 의하면... 걔도 참가한다 하더라고."

"걔?"

"사커팀 성찬 말이야."

 

성찬. 성은 정. 백넘버 일레븐. 세리모니 또한 양손으로 검지를 치켜세우며 필드를 가로지르는 윙어. 또 다른 경쟁자의 등장에 조지가 펄쩍 뛰며 망했다고 외치는 것과는 달리 원빈은 이름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얼굴에 단번에 미간을 구겼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정성찬이라는 이름이 언급되기 무섭게 몇 달 전 별로 좋지 않았던 성찬과의 만남이 떠올라서였다.

 

맥도날드의 빨간색 유니폼과 검은색 캡이 지긋지긋하던 어느 날 밤. 원빈이 기다란 금발을 질끈 묶고 파트 타이머의 숙명인 걸레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기름냄새 나는 매장에 혼자 남아있으니 여간 심심한 게 아니어야지. 안 하던 짓을 해도 될 것만 같은 용기가 샘솟는 밤이다. 느릿느릿 걸레질하던 원빈이 적막을 참지 못하고 매장에 노래를 하나 틀었다. 자그마치 저스틴 비버. 노동요로는 이만한 게 없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선곡이다.

 

밴드 연습하면 이런 노래를 들을 일이 거의 없어서 그런가, 오랜만에 들으니 신이 나긴 했다. 유학 오기 전, 꿈에 부푼 박원빈이 질리도록 듣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익숙한 노래를 들려준다. BPM도 딱 130. 좋은데? 원빈이 입꼬리를 슬쩍 올려 웃었다. 제일 단 스트로베리 셰이크를 주문해놓고 왜 이렇게 단 거냐며 짜증 내던 진상손님으로 쌓였던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기분이다.

 

흥이 올라서인지 아니면 혼자 있어서인지. 박자에 맞춰 발을 구를수록 원빈의 행동은 더 대담해졌다. 박자에 맞춰 발을 구르고, 머리를 흔들고, 노래에 심취해 종국엔 대걸레를 마이크 삼아 열창하기까지 했다. Baby baby baby, oh-.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맥도날드 크루 박원빈은 그저 명곡에 맞는 애티튜드로 임할 뿐이었다.

 

딸랑-

 

그때 갑자기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마감 시간이 한참 지났던 터라 예상치 못했던 방문에 고개를 홱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파란색 유니폼, 더플백, 동양인이 맞나 의심스러울 만큼 하얀 피부와 차분한 블랙 헤어. 그리고 한껏 휘어진 눈매와 꾹 다물었지만 올라가려 경련하는 입꼬리. 누가 봐도 웃음을 참는 얼굴을 한 사커팀 윙어 정성찬이었다.

 

"안녕?"

"Shit."

 

성찬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잘 쓰지도 않던 영어로 된 욕이 원빈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며 순식간에 온몸에 피가 돌았다. 귀가 새빨개지고 심장이 저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쪽팔려서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다.

 

원빈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주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심지어 걸레질하느라 축축해진 바닥 때문에 미끄러질 뻔했다. 삐끗하는 자세까지 꼴불견이다. 못 봤겠지? 못 봤어야 하는데. 아 쪽팔리게… 미쳤지 왜 안 하던 짓을 해서는. 원빈의 과거의 자신을 책망하는 사이 야속하게도 넓은 맥도날드 매장에 앳된 저스틴 비버의 목소리가 계속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것도 하필 원빈이 열창하던 하이라이트 파트. … 비행기 표 값이 얼마였더라… 미국에 온 이후 처음으로 한국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원빈이 몰래 나가 끌까 말까 수십번을 고민하는 사이, 성찬이 인기척을 내었다. 저기 원빈아, 난 괜찮으니까 나와. 그게 더 사람을 수치심에 죽이는 줄도 모르고 친절을 베푼다. 하... 몰래 한숨 쉰 원빈이 쭈뼛대며 나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카운터 앞에 섰다. 얼굴이 새빨간 건 안 봐도 훤하겠다 싶어서였다. 원빈이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성찬의 앞에서 유니폼만 만지작거리자 성찬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숨막히는 정적 속 Baby, baby, baby oh-. 또 들리는 그 파트에 원빈이 입 안에서 혀를 악 물었다.

 

제발 그냥 넘어가라, 제발… 속 시끄러울 만큼 비는 원빈을 아는 건지, 원빈의 바람에 응하듯 성찬은 그저 카운터 위에 놓인 메뉴판 중 밀크셰이크를 가리켰다.

 

"시간이 늦었긴 한데... 지금 이거 가능해?"

"어? 어어! 물론이지."

 

그제야 안도한 원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 청소해둔 기계를 다시 쓰면 퇴근 시간이 더 늦어질 게 뻔했으나 모른 척 해준 답례로 몸이 고생하기로 했다. 잠깐 기다려. 그리곤 원빈이 뒤돌아 우유에 얼음, 바닐라 파우더를 타고 셰이커를 돌렸다. 윙-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둘 사이의 적막을 뚫었다.

 

기분 좋은 정적인데 스몰토크라는 문화는 대체 누가 만든 걸까. 결국 끝을 모르고 흐르는 침묵을 견디지 못한 듯 성찬이 저를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았다. 너 여기서 일하는구나, 몰랐어. 나는 웬디스보단 맥도날드 파거든. 자주 와야겠다. 시시콜콜 말을 걸어오는 성찬이 버거워 원빈은 바보같이 대답만 얼버무렸다. 어어. 그렇지. 돈은 버, 벌어야 하니까. 팝, 파이브가이즈가 더 맛있긴 해. 거기 가. 창피함이 다 가시기도 전인데 이번엔 몇 번이나 말을 더듬기까지 한다. 정말 뭘 해도 안 되는 날이라고 느끼며 원빈이 창피함에 붉어진 귀를 벅벅 문질렀다.

 

"이제 끝나는 거야? 같이 갈래?"

"아직 청소가 조금 남아서…"

"이렇게 늦게까지도 하는구나. 신기하다, 난 파트타임 해본 적 없거든."

 

셰이커 앞에서 귀만 만지작거리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다 용돈 받고 사는구나… 말 한마디에서 원하는 거 다 사고, 다 하고, 다 가진 권력 따위가 느껴진다. 원빈이 괜히 아랫입술을 이로 괴롭혔다. 연습실도 겨우 얻어 빠듯하게 한 달을 살아가는 사람 앞에서 의도가 어떻든 은연중에 부유함이 느껴지는 말은 달가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돈이 없으면 음악이 죽어버리는 기타리스트의 삶을 사커팀 윙어 정성찬은 알 리 없는데도, 이상하게 속이 꼬여버린다. 창피해 죽을 것 같던 순간을 모르는 척해준 성찬의 호의까지 순식간에 반감될 정도의 파급력이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거나 돈 없이 쫄쫄 굶는 유학생이라더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대표적으로 전자는 정성찬이고 후자는 박원빈이다. 원빈은 괜히 자신이 입은 새빨갛고 촌스러운 유니폼을 내려다보았다. 내 신세가 이렇게 처량한가 싶을 수 있으나 사실 별로 처량하진 않다. 저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치고 있으니 자격지심 느낄 시간에 돈이나 버는 게 더 낫다.

 

그래도 짜증이 나는 건 별 수 없었다. 생긴 거랑 다르게 재수 없는 타입인가... 곱게 자란 도련님 같네. 그렇게 첫인상부터 박힌 성찬의 이미지는 운동하는 도련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정성찬에 대한 박원빈의 점수. 2 out of 10. 아무리 처음 만난 사람을 경계하는 원빈이라도 그다지 좋은 수준은 아니다.

 

"그래 앞으론 이런 것도 해보면서 살고. 잘 가."

 

쪽팔렸던 건 온데간데없이 원빈은 시큰둥하게 순식간에 만들어진 바닐라 플레이버 밀크셰이크를 소리나게 카운터에 내려놓고는 성찬에게 쭉 내밀었다. 이거나 가지고 가라는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셰이크를 손에 쥐곤 내려두었던 더플백을 어깨에 멨다. 그리곤 피식 웃으며 원빈에게 셰이크를 흔들어 보였다.

 

"충고 고마워."

"그래."

"아, 너 노래 잘하더라."

"뭐?"

"다음엔 저스틴 비버 말고 테일러 스위프트로 해. 그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으니까. 선곡도 베이비 말고 트웬티 투로. 기대할게, 다음에 또 보자."

 

딸랑-

 

다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원빈은 멍하니 카운터에 서 있었다. 그리고 번뜩이며 정신을 차린 건 몇 번이나 성찬의 말을 되뇌고 나서였다. 저거 놀리는 거 맞지? 그렇지?

 

통유리 너머 코너로 성찬이 사라지자 원빈이 소릴 빽 지르곤 꽉 묶었던 머리를 헝클이며 주저앉았다. 아악! 단말마와 함께 성찬이 묻어준 줄만 알았던 수치심이 다시 피어오른다. 그 말 한마디가 뭐라고 괜히 시비 걸어서 본전도 못 찾았다. 원빈은 새빨개진 얼굴로 아직도 저스틴 비버가 흘러나오는 매장 음악을 신경질적으로 꺼버렸다. 저스틴 비버도, 정성찬도 당분간은 상종도 하지 않으리라. 난생처음으로 바닥으로 처박힌 점수. 0 out of 10. 정말이지 최악의 첫 만남이다.

 

어우, 재수 없어.

 

기억일 뿐인데도 창피함에 배가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원빈이 기억을 털어버리려 고개를 마구 흔들며 안간힘을 썼다. 왜 이래? 내버려둬. 노아의 물음에 필립이 시니컬하게 대답한 후 겨우 하나 남아있던 트윙키를 까 제 입에 집어넣었다. 입맛이 싹 가셨으니 남을 게 분명하지만 제법 뻔뻔한 행동이었다.

 

"우리 공연 할 수 있을까? 성찬을 무슨 수로 이겨."

 

원빈이 성찬과의 기억에 얼굴을 붉히는 사이, 조지가 필립의 말에 고민에 빠진 듯 미간을 한껏 구기며 인상을 썼다. 사실 1등이 중요한 밴드부원들에겐 성찬의 참가가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아무리 미식축구와 농구가 인기가 많은 나라라 할지라도 스포츠부원들을 우상으로 생각하는 건 만국 공통이라. 제 기억 속의 성찬은 주관적으론 재수 없을지 몰라도 객관적으로 꽤 인기 있을 만한 사람은 맞았다. 넓은 필드 안, 온 사람들의 기대와 환호를 먹고 자라는 플레이어에게 사랑을 느끼는 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꾸며내듯 사랑을 해야 하는 우리와 달리 걔는 입만 맞춰도 사랑이 될 텐데. 시작점부터 다르니 벌써 격차가 벌어진다.

 

그러나 다른 멤버들과 달리 성찬을 같은 눈높이에서 보고 있는 원빈은 거리낄 게 없었다. 지레 겁먹어서 뭐해? 공연 안 할 거야? 해답은 단순하다. 원빈이 창가에 앉은 노아가 마시던 닥터 페퍼를 뺏어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이 따가워 정신이 번쩍 든다. 이미 정성찬이 한차례 꺾어버린 자존심, 그거 다 남 주고 1등을 해서 공연만 할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걸 하고싶은 예술가의 기질이다. 의지를 불태우며 마음을 다잡는다. 성찬이 참가한다는 말을 들으니 도리어 승부욕마저 든다. 뭐든 동기부여가 되니 상관없다.

 

연기 그거 못할 게 뭐야. 여긴 할리우드의 나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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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15th, 20XX

The Kissing Booth : D - 9

 

 

우린 크리스마스이브에 연기자가 되어야 하잖아. 빌드업이야, 원빈. 축구처럼, 차근차근 골대로 향해서 골을 넣을 것만 같은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거지.

 

프리미어리그 골수팬다운 조지의 말에 축구라면 문외한이었던 원빈은 알아듣기 힘든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러자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조지가 드럼 스틱으로 휘적이며 말했다. 애들한테 미리 좀 친절하게 대해주란 거야. 혹시 알아? 그중에 누군가와 키스할지. 원빈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밑밥 깔아두란 말을 이렇게 어렵게 설명할 일인가 싶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실제로 하루아침에 남을 친절하게 대하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백마 탄 왕자님이나 히어로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인사를 조금 더 사근사근하게 건넬 뿐인데 입꼬리에 경련이 일었다. Hi 내지는 Hello. 짧은 인사에도 저절로 인사하던 손가락과 미간이 구겨지며 낯선 사람의 침범을 경계한다. 안 하던 짓에 대한 반발심리처럼, 어색한 인사를 건넨 주제에 상대방의 친절한 답례 인사를 다소 버겁게 느끼기까지 한다. 이래서 키스는 어떻게 해? 수수료를 제한 모든 돈을 들고 와야 하는 입장에선 절대 거절은 불가했기에 더 막막해졌다.

 

못할 게 뭐냐며 없는 자신감마저 끌어 모아 놓고 막상 현실은 녹록지 못하다. 로맨틱하게 키스하기는 무슨... 애초에 그 흔한 친절부터 연기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원빈을 압박했다.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생전 가지도 않던 도서관, 필드 네임 Art. 예술 분야만 잔뜩 모아놓은 책장 앞에 선 원빈은 제게 쏟아질 듯 빼곡하게 꽂힌 책을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게 낯설어 괜히 침을 한번 삼켰다.

 

그러나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이왕 해야 할 거 이론이라도 빠삭해야 한다는 일념 하에 원빈은 까치발을 들고 위에서부터 책을 한칸 한칸 샅샅이 뒤졌다. 곧 까치발을 내리고, 허릴 굽히고, 쪼그려 앉는다. 그리고 원빈이 손을 뻗어 꺼내든 건 뿌옇게 먼지가 쌓인 '연기학 기초'라는 다 낡아빠진 책이었다.

 

원빈은 책을 품에 안고는 바쁘다는 핑계와 함께 밴드부원들 몰래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토스트와 계란 구운 냄새가 한가득인 넓은 카페테리아 구석 한켠, 한겨울 뼈가 시릴 만큼 냉기가 도는 테이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넓은 카페테리아 딱 4개 달린 히터와 동떨어져 난방도 제대로 닿지 않는 구석 자리. 해가 하늘 한가운데 떠 있을 런치 타임임에도 온기라곤 전혀 없어 손끝이 얼어버렸다. 그러나 원빈은 자리를 옮기지 않고 머플러로 얼굴을 가린 채 핫 초콜릿으로 손을 녹여가며 온기만 찾을 뿐이다. 이런 꼴을 누군가에게 보이느니 추운 게 낫지. 반짝이는 무대 위 모습을 진짜로 여기고 살고 싶은 건 기타리스트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원빈이 힐끔거리며 주위를 눈으로 훑었다. 런치 타임 답게 다들 노닥거리기 바빠 구석자리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그제서야 원빈은 안심하고 테이블 위에 책을 얹었다. 그리곤 사라락, 소리와 함께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노래 가사 빼곤 줄글을 가까이할 일이 없던 원빈은 오랜만에 가장 첫 문단에 쓰인 기다란 문장들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연기의 기본>

제1장 모방.

가장 먼저, 연기란 내가 아닌 다른 이를 흉내 냄으로써 가장 쉽게 접해볼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상향을 선정하고 따라 해보면서 나와 다른 행동, 습관, 감정 따위들을 이해하고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는 거죠. 연기는 본능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학습된 행위임을 잊지 마세요.

 

원빈은 아이스 초콜릿이 다 된 듯 찹찹해진 걸 입안에 굴리며 몇 번이고 눈에 박힌 첫 문단을 읽었다. 모방. imitation 혹은 copy. 상대에게 특정 인물을 전달할 수 있게 하는 수단. 그리고 전달된 인물로써 내가 야기할 수 없는 감정들을 유발한다. 설렘, 선망, 사랑, 뭉뚱그려 로맨틱. 그야말로 제가 연기해야 할 키싱부스의 본질이자 목적이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을 따라해 상대에게 사랑을 받는다, 라... 명확한 해결책이 그려지는 것 같아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렇다면 이제 누구를 모방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원빈은 찬찬히 머릿속을 지나가는 주변 인물들을 떠올렸다. 조지는 가볍고 노아는 무관심하며 필립은 계산적이다. 주위가 전부 뭐 하나씩은 모나있다. 다 이 모양인데 누굴 카피해. 원빈은 골몰하느라 다 식은 핫 초콜릿이 손의 온기를 앗아가는 것도, 누군가 옆에 서서 저를 내려다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안그래도 없는 온기를 앗아가듯 테이블에 길게 그늘을 드리우는 인영이 원빈에게 말을 걸었다.

 

"원빈, 트웬티 투는 연습 좀 했어?"

 

갑작스러운 인기척과 트리거 버튼을 눌러버리는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아니나 다를까, 후드를 뒤집어쓴 채 시원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는 성찬이 있었다. 안녕? 제 속은 아는지 모르는지 제게만 익숙한 단어로 살갑게 인사를 건넨다. 이 구석까진 무슨 일이실까. 달갑지 않은 만남에 원빈이 미간을 구기자 성찬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비어 있는 원빈의 앞자리에 앉았다. 끼익, 쇠로 된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와 성찬의 존재 때문에 시선도 잘 닿지 않는 곳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역시 보는 눈이 늘었다. 왜 온 거야... 원빈이 머플러를 더 끌어 올리며 얼굴을 눈 아래까지 가렸다. 그러나 성찬이 입까지 삐죽거리며 서운한 티를 내었다.

 

"나 완전 미움 산 거야?"

"뭐... 그렇지."

"와 반말. 내가 형인데."

"미국에서 그런 거 따지는 사람이 어딨어... 요, 형."

 

원빈은 마지못해 존댓말을 섞어 말하면서도 일전의 물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머플러로 얼굴을 가린 이유가 딱히 성찬은 아니었으나 미움을 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기 때문이었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기억은 정성찬을 탓하라며 노발대발한다. 창피한 기억에 지배된 박원빈은 기억이 내리는 명령을 수용한다. 그리고 결론. 나 완전히 미움샀나보네... 하는 성찬의 말에도 침묵으로 답했다. 긍정의 의미였다.

 

그러자 성찬이 후드를 내리고 머리를 헝클었다. 웅얼거리며 말하는 탓에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그러지 말걸? 하지 말걸? 대충 그렇게만 들렸으나 소란스러운 카페테리아 내부 탓에 원빈이 알아들을 리는 만무했다. 알아들을 수도 없을뿐더러 솔직히 궁금하지도 않아 무시하려 했으나 성찬이 다시 커다란 몸을 일으키는 게 더 빨랐다. 뭐, 뭐예요.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성찬이 자신이 갖고 있던 김이 펄펄 나는 핫 초콜릿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제 쪽으로 밀어주었다. 원빈은 저도 모르게 온기를 찾아 컵을 손에 쥐자 푸스스 웃는 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추워 보여서 이것만 주고 가려고 했어."

"아..."

"나 너무 미워하진 마."

 

원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성찬은 다음에 보자는 말과 함께 후드를 다시 뒤집어쓰고선 더플백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원빈은 그저 카페테리아 밖으로 뒤돌아가는 모습만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보폭도 크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성찬이 사라지자 원빈이 고갤 돌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핫 초콜릿을 내려다보았다. 진한 갈색빛 표면에 얼굴이 비쳤다면 아까완 다른 얼굴일게 분명하다. 다 얼어버린 손끝이 녹아내리고 나서야 성찬이 건넨 온기가 사과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건네던 말이 바람 같다. 상쾌하고 시원한 게 꼭 필드를 박차고 뛰며 세차게 잔디를 가로지르는 것만 같았다. 그게 뭐라고, 창피함에 달아올라 있던 기억들이 성찬으로 식어버렸다. ... 많이 미워하는 건 아니었는데. 적진을 침투하는 윙어답게 성찬은 제 기억이 무색해질 정도로 순식간에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세 골이나 넣은 성찬의 점수. 3 out of 10. 첫 경기에서부터 해트트릭이다.

 

원빈은 책을 덮어버렸다. 더 읽을 것도 없었다. 제가 산 초콜릿은 저 멀리 밀어두곤 입안에 따듯한 초콜릿을 머금었다. 단맛을 입안에서 혀로 굴리며 몇 번이고 읽었던 책의 첫 문단을 떠올렸다. 모방의 상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상향과 상대에게 전달해야만 할 인물. 그리고 다정하고, 세심하고, 배려할 줄 아는 정성찬. 낯섦과 두근거림이 극에 달해있는 키싱부스에서 박원빈이 되어야 할 인물은 누가 봐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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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17th, 20XX

The Kissing Booth : D - 7

 

 

정성찬은 눈에 띈다. 문을 열고 들어오기만 해도 시선을 잡아먹을 정도의 존재감이다.

 

캐비닛이 놓인 홀웨이 한중간.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이들 사이 중에서도 유독 하얗고 멀끔하니 시선을 끄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원빈도 이끌려 시선이 닿다 보면 어느 순간 성찬과 눈을 마주할 때가 있었다. 배회하던 시선이 닿기만 해도 둘만 남겨진 듯 주위 소음이 아득해진다. 입 모양으로 또 안녕, 짧은 두 마디를 건네며 슬쩍 웃기만 했을 뿐인데 원빈은 순식간에 만인에게 사랑받는 사커팀 윙어 정선찬을 납득했다. 이런 눈짓 하나만으로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왔을 게 분명했다. 성찬을 무슨 수로 이겨. 필립이 했던 말에 이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성찬을 모방해야 할 이유가 더욱 명확해졌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승리하는 법. 원빈은 나름 성찬을 모방하기 위한 목적이랍시고 몰래 성찬의 뒤를 밟기로 마음먹었다. 특징 몇 개 알아차리면 따라 하는 거야 뭐. 어렵겠어? 책이 준 얄팍한 지식임에도 자신감에 찬 원빈은 나름 미행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모자, 머플러, 선글라스, 메모할 노트와 펜. 얼굴만 꽁꽁 싸매 미행이라기엔 애매할 정도의 차림새긴 하지만 영화에서 보듯 선글라스는 꼈으니 구색은 맞추었다. 원빈, 너 진짜 이상해 보여. 걸음 소리를 줄이려 발끝으로 이상하게 걸어 다니는 원빈을 발견한 필립이 한소리 했으나 원빈은 가볍게 무시하고 모자까지 눌러썼다. 물론 모자가 광택이 나는 새틴 재질이라 눈에 띄긴 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미행이라기엔 장소마저 단순하다. 카페테리아에선 성찬이 앉은 자리 대각선 3줄 뒤, 운동장에선 사커부가 훈련하는 필드에서 50미터가량 떨어진 나무나 벤치. 그리고 운동부 샤워장과 가장 가까운 캐비닛이 놓인 홀웨이. 원빈은 성찬의 행동반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에서 성찬을 관찰했다. 그러나 시시할 정도로 정성찬의 하루는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나와서 훈련 후 샤워장에서 씻고 나와 부원들과 함께 런치. 메뉴는 보통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곁들이고 중간에 먹는 간식은 요거트 아이스크림에 초콜릿과 과일. 그리고 또 오후 훈련. 시즌도 아닌데 축구와 먹을 것밖에 없는 일상이 이틀째 이어지니 솔직히 적당히 하고 관둘까도 싶었다.

 

그러나 지지부진한 성과 속에서도 얻은 건 있었다. 저와 분명한 차이점이라고 해야 할까. 성찬은 인사를 잘하고, 다정하고 세심하며, 칭찬에 익숙하다. 낯 가리는 박원빈이 잘하지 못하는 것들을 성찬은 잘했다. 정성찬은... 아래 캐비닛에서 짐을 정리하던 제니에게 눈길 한번 주진 않아도 위에 열린 캐비닛 문 모서리를 손으로 가려줄 줄 알고, 인사는 꼭 헬로우에서 끝내지 않고 날씨가 많이 춥다는 말 대신 그 목도리 잘 어울리니까 꼭 하고 다니라고 일러준다. 제게 핫 초콜릿을 주던 마음만큼 세심하다. 지켜보다 보니 꽤 괜찮은 사람인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걸 잘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의 일환인지 야금야금 조금씩 점수를 주다 보니, 어느새 점수는 5 out of 10. 점점 오르는 점수를 외면하고 싶을 정도였다.

 

심지어 박원빈이 지켜본 정성찬은 웃는 모습이 디폴트였다. 성찬은 가만히 있다가도 피식 웃음이 샜다. 찬 바람이 부는 운동장 벤치에 홀로 앉아 팔짱을 끼고 곁눈질로 성찬을 살피던 원빈은 여전히 웃고 있는 성찬의 모습을 선글라스 너머로 훔쳐보았다. 저것 봐, 또 웃잖아. 웃음이 헤프지만 꽤 근사하게 웃는다. 눈이 둥그렇게 접히고, 솟아있던 눈썹이 내려가더니 앞니가 슬쩍 드러난다. 다소 냉하게 보일 수 있는 얼굴이 금세 둥그러진다. 저런 건 다 어디서 배운 건지. 노트에 성찬의 행동을 느리게 끄적이던 원빈은 저 아래에 조그맣게 속마음을 적었다.

  



캐비닛 날카로운 문 모서리 잡아주기
-> 다정하긴 하지. (ex. hot chocolate) 
인사를 잘 하자!
칭찬... 칭찬을 잘해야 해.
잘 웃기 - 되도록 예쁘게...

내가 할 수 있을까?  




벤치에 앉아 필드에서 성찬을 바라보던 원빈은 성찬의 웃는 모습을 괜히 몰래 따라 해봤다. 선글라스 아래로 눈이 휘어지게 웃고 이빨이 한가득 드러났다. 제가 느끼기에도 얼굴 근육이 뻣뻣하니 얼마나 어색한 웃음일지 안 봐도 훤했다. 나 뭐하냐 지금... 원빈은 금세 포기하곤 오랜만에 선글라스를 벗었다. 눈앞이 색채로 선명해졌다. 갑자기 들이치는 빛에 눈이 아파 눈가를 꾹꾹 누르면서 적어놓은 문장들을 읽었다. 이제 카피할 일만 남았는데 막상 적어놓으니 생각보다 막연하고 두루뭉술하다. 뭐 하나... 빠진 것 같지 않나? 뭘까. 분명 그 '하나'가 정성찬의 아이덴티티가 되어 이런 단순한 행위들에도 사랑에 빠지게 할 텐데.

 

원빈은 이틀의 시간으로도 알지 못한 성찬의 한가지가 궁금해졌다. 형, 형은 누군가가 나한테 사랑에 빠지게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키싱부스가 딱 일주일 남은 지금. 자존심도 없이 5점짜리 정성찬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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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20th, 20XX

The Kissing Booth : D - 4

 

 

키싱부스 디데이가 다섯 손가락 안쪽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성찬을 알면 알수록 1등에서 멀어지는 것 같긴 해도,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그게 남자인가. 칼을 들었으면 무라도 썬다는 심정이다. 모방할 상대가 명백하게 사랑받을 만한 인물이라면 나도 그렇게 되면 될 일, 확실하게 카피해 보자는 마음으로 지난 3일간 원빈은 박원빈이 아닌 것처럼 살았다. Hi, Won Bin. 원빈의 똑같은 반응을 예상하고 대답을 바라지도 않던 애들을 향해 안 하던 짓을 감행했다. 첫째로 웃었고, 둘째로 세심했고, 셋째로 가끔 칭찬을 곁들였다.

 

안녕, 올리비아. 머리 웨이브로 바꿨네. 어울린다.

안녕, 에밀리. 커피 너무 자주 마시는 거 아니야? 몸에 안 좋으니까 조심해.

안녕, 캐시. 내일은 꼭 두꺼운 옷 입어. 확인할 거야. 내일 보자.

 

사람들의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던 게 꽤 도움이 되었던 건지,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성찬이라면 이렇게 했겠지- 하는 것들을 행하니 비교적 수월하다. 원빈 제법인데? 캐시에게 말을 건네는 저를 보고 조지가 호들갑을 떨어 민망하긴 했으나 막상 칭찬을 들어도 기분이 썩 유쾌한 거 아니었다. 내 행동을 칭찬해 봤자지. 원빈이 칭찬받는 것이긴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건 성찬을 카피한 것이니 성찬의 칭찬이 맞았다. 이런 단순한 말 한마디까지 칭찬받는 걸 보면, 성찬은 제가 지켜본 대로 꽤 다정하고 괜찮은 사람이 맞았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내가 별로라는 건 아니고. 정성찬은 세심함의 정도가 훨씬 날카로운 편이라는 것이다.

 

평소의 박원빈이었다면 잘 가 캐시, 에서 끝났을 게 분명함에도 원빈은 성찬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진 다정한 말을 뱉었다. 아무래도 신경을 좀 곤두서야 하는 일이다 보니 쉽게 피로해졌다. 말이 길게 늘어지는 건 사람의 기력을 잡아먹기도 하는구나... 벤딩머신에서 절대 뽑아먹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레드불을 뽑아 마셔도 해결이 안되는 수준이다. 이걸 매일같이 하는 성찬은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이거 고작 3일 했다고 이렇게까지 지칠 일인가 싶다. 그래도 얼마 안 남은 키싱부스 이벤트 1등에 서서히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아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기로 한다. 이거 앞으로 이틀 정도만 더하면 공연장에서 기타를 칠 날이 다가오잖아. 버텨야지. 레드불을 금세 한 캔 다 비운 원빈은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어깨에 멘 기타를 괜히 한번 토닥여줬다.

 

목적을 위한 움직임의 근본이 되는 힘을 원동력이라고 부른다. 그건 꽤 어마어마한 힘인지, 공연에서 기타 줄이 끊어지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연주하는 제 모습을 떠올리면 못 할 짓도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어젠 기어코 키싱부스에서 잘 보여보겠다고 없는 돈을 끌어다 머리까지 다듬었다. 미용사는 그거 뭐 얼마나 잘랐다고 팁 포함해서 30달러나 요구했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돈을 내미는 손이 떨리긴 했지만, 이 또한 공연을 위한 한 걸음이라 치부하며 눈 딱 감고 지폐를 내밀었다. 이 돈 아껴봤자 1등 상금보단 적으니 나름 투자한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머리 자른다고 쓴 돈 때문에 식비를 아껴야 해 오늘도 대충 과자로 런치를 때울 예정이었다. 카페테리아에서 파는 삶은 소시지와 할라피뇨가 들어간 핫도그는 질릴 대로 질렸고, 햄버거는 카피한다고 수도 없이 떠올린 정성찬이 또 생각나서 도저히 넘어가질 않았던 탓이다. 자업자득이다 자업자득… 마음을 다잡으며 원빈이 벤딩머신에 구겨진 1달러짜리를 욱여넣었다. 왜 이렇게 안 들어가? 고장 난 건가? 계속 뱉어내는 탓에 낑낑거리며 몇 번이나 시도했다. 

 

10번 넣었는데 10번 다 뱉어내는 벤딩머신이 짜증이 나 발로 걷어찰까 생각하던 와중, 뒤에서 누군가 스무스하게 빳빳한 5달러 하나를 넣었다. 지이잉. 제 고생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들어가 버리는 지폐에 놀라 원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되는 거였어? 원빈이 놀라 몸을 홱 돌려 지폐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제 눈높이에서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안되는 것 같아서. 내가 사줄게."

"......."

"아, 인사를 못했네. 안녕, 원빈아."

"안녕하세요..."

"머리 잘랐구나. 잘 어울린다."

 

가까이서 보는 건 오랜만인 성찬이 추위에 살짝 붉어진 볼을 하고선 빙글거리며 웃었다. 밥은 먹었어? 원빈은 끼니를 걱정하는 말을 오랜만에 들어본 탓에 조금 멍해져 버렸다. 어, 아니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이상한 대답을 하자 성찬이 눈썹을 축 늘어뜨린다. 잘 챙겨 먹어야지. 5달러로 넣길 잘했다. 남은 돈으로 다른 것도 먹어. 걱정이 연이어져 어쩔 줄 모르고 다정함을 받아먹어 버린다. 순식간에 비어 있던 배가 다 차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원빈이 허겁지겁 제 손에 들려있던 다 구겨진 1달러 지폐를 성찬에게 내밀었다. 꼬깃꼬깃한 걸 양손으로 쫙 피자 1달러에 박힌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모습이 드러났다. 남은 건 나, 나중에 갚을게요. 그러자 성찬이 스포츠 파카를 목 끝까지 잠그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래."

"저번에 핫초코도 받았는데 어떻게..."

"아 그건, 내가 주고 싶었던 거니까."

 

나 네 팬이거든. 팬이 주는 선물이니까 다음에도 받아줘. 성찬이 넉살 좋게 말을 이으며 원빈이 취소도 못 하게끔 벤딩머신의 버튼을 꾹 눌렀다. 삑, 소리와 함께 기계가 움직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핸드폰에 줄 이어폰을 연결해 귀에 꽂았다. 나 갈게. 그럼 또 보자! 원빈이 또 뒤돌아 가는 성찬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벤딩머신에서 원래 먹으려던 자극적인 타키스가 아닌, 덜 달고 배가 찰만한 마카다미아 쿠키 번들이 떨어진다.

 

이런 거구나... 정성찬의 인사와 다정함을 받는 기분은. 원빈이 휑해진 목덜미를 괜히 손으로 쓸었다. 열이 올라와 있는 것 같다. 왜 이러지. 정성찬은 10점 만점에 6점밖에 안 되는... 잠깐, 언제 1점이 오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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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22th, 20XX

The Kissing Booth : D - 2

 


간지에 죽고 못 사는 박원빈은 흰색 나시를 고집하는 면이 있었다. 안에 이너가 슬림해야 바깥에 걸친 가죽이 사는 거야. 또 지나가는 애에게 인사하며 웃는 원빈을 보며 이번엔 노아가 한 소리 했다. 하드락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 추운 날 그게 입고 싶어? 지금 겨울인 걸 잊어버린 건 아니지? 걱정이 가미된 잔소리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엄마와 다를 게 없다. 실내에서만 이렇게 다니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물론 노아 몰래 몸을 떨긴 했지만 말이다.

 

거의 5일 동안 성찬을 따라하다보니 이젠 습관이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자연스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원빈은 조금 더 무던하게 인사와 칭찬을 곁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부작용도 하나 따라온다. 기민하게 타인의 변화를 알아차리던 원빈의 기질이 매번 정답이 될 만큼 날카로워져 있었다.

 

"안녕, 원빈? 나 오늘 뭐 바뀐 거 없어?"

"어... 립 컬러? 쿨톤같은데..."

"맞아! 역시 원빈은 알아보는구나!"

 

백발백중. 놀라울 정도로 맞아떨어진다. 변화를 알아봐 주는 게 기뻤던 건지 이젠 여자애들이 까르륵 웃으며 대놓고 물어오기까지 했다. 하하... 성찬도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하진 않았던 것 같았으나, 원빈은 키싱부스 밑밥은 충실히 깔고 있으니 된 게 아닌가 하며 웃어넘겼다. 성찬으로부터 얻은 깨달음 말마따나 나를 알아봐 주고 신경 써줌으로써 생긴 호감은 결국 키싱부스에서 긍정적으로 발휘되어 금방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낼 터였다. 1등으로 향하는 중임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신경이 곤두선 탓에 오늘도 피곤함에 절여졌다. 어김없이 오늘의 음료도 레드불이다. 원빈은 손에 든 차가운 캔을 보며 또 성찬을 떠올렸다. 이걸 보면 성찬이 형은 또 눈썹 떨구면서 걱정하겠지... 오늘은 이 다정함을 써먹어 볼까 하는 생각과 더불어 이상하게 더 마시기 찝찝해졌다. 어디 버리기도 아까워 노아에게 내밀었으나 안 마시겠다며 거절하는 바람에 손 시려 죽겠는데 캔을 들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원빈은 노아와 함께 지친 몸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GYM이라고 정직하게 쓰여있는 체육관 건물이었다. 프리미어 리그 팬인 조지와 달리 NBA를 선호하는 노아가 농구팀 연습경기가 있다며 보러 가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거절하려고 했는데 런치를 사주겠다잖아. 얼마 전 헤어 커트로 거금을 써버린 제가 혹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라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구기 스포츠라면 문외한이라 거의 와본 적도 없는 건물에 발을 들이자 옅은 땀 냄새와 에어 파스 냄새가 진동한다. 부끄러움도 없는지 상의를 벗어 던진 채 샤워장에서 나오는 애들을 보면 제가 다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쟤들이야말로 안 추운가? 연습이 끝난 풋볼팀, 시즌 중인 하키팀이 연이어 빠져나오는 걸 본 원빈은 살색으로 점칠된 곳에 애써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라커 룸 옆을 지나쳤다.

 

나란히 놓인 라커 룸을 따라 걷던 원빈은 캐시를 마주쳤다. 치어리더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이질적이다. 삼총사도 아니고 매일 둘을 끼고 몰려다니더니, 웬일로 혼자지? 원빈이 최근 든 습관대로 가볍게 인사하려 하자 캐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터벅, 터벅. 치어리더용 스니커즈로 바닥을 박차며 순식간에 눈을 세모나게 뜬 채 원빈의 앞에 섰다. 원빈, 너 뭐 했어? 아니? 노아와 원빈이 속삭이며 어리둥절해하자 캐시가 씩씩거리며 팔짱을 꼈다.

 

"원빈, 이야기 좀 해."

"무슨 일인데?"

"너 요즘 왜 그래? 왜 여자애들 들쑤시고 다니는 거야?!"

"내가?"

 

큰 목소리에 이목이 쏠렸다. 뭐야? 뭔데? 가십거리에 흥미를 느낀 스포츠부원들이 모여들었다. 어느새 원빈과 캐시, 그리고 엉겁결에 서 있던 노아를 둥글게 둘러싼다. 부담스러운 시선들이었으나 공연에 다져진 깡은 어디 가지 않는지, 원빈은 저와 엇비슷한 캐시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물음. 내가 누굴 뭐 어떻게 들쑤시고 다녔다는 거야? 얼굴만 봐도 생각이 다 드러났는지 캐시가 고까운 듯 헛웃음 쳤다. 지금 네가 뭘 하고 다닌 건지 정말 모르는구나?

 

"요즘 안 하던 짓 하고 다녀서 다들 착각하잖아! 나는 네가 날 좋아하는 줄 알고..."

 

그제서야 원빈이 아차 하는 표정과 함께 슬쩍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섰다. 또 다른 부작용의 발발. 전에 없던 원빈의 상냥함이 착각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다정함이란 하던 사람이 하면 일상이고, 안 하던 사람이 하면 플러팅이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간과했다. 이,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원빈이 당황한 걸 눈치챈 노아가 다급하게 캐시와 원빈 사이에 섰다. 원빈을 슬쩍 뒤로 더 밀며 노아가 캐시에게 애써 웃어보였다.

 

"워워, 캐시. 진정해. 응?"

"노아. 너라면 진정하게 생겼어?"

 

노아가 점점 더 화를 내는 캐시를 말리려 했으나, 무슨 힘이 난 건지 캐시가 저보다 한 뼘은 더 큰 노아의 몸을 옆으로 밀쳤다. 퍽,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밀려 알몸의 하키부 품에 안긴 노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성큼성큼 원빈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걸음, 또 한걸음. 결국 반걸음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선 캐시가 씩씩거리며 원빈이 손에 들고 있던 레드불을 뺏었다.

 

"나쁜 자식."

 

촥-

 

캐시의 원망과 함께 순식간에 캔에 남아있던 내용물이 원빈을 향해 쏟아졌다. 워우-. 놀라움과 흥미로움으로 가득 찬 웅성거림과 노르스름한 레드불이 원빈의 머리와 흰색 나시를 가득 적신다. 끈적한 액체가 뚝뚝 느리게 머리끝을 따라 떨어지며 단내를 풍긴다. 아... 정말. 원빈이 떨어지는 물방울 때문에 고개도 못 든 채로 가죽 자켓을 벗었다. 얼마나 튄건지 가죽마저 끈적하게 살에 달라붙었다. 겨우 벗어내고 나니 쌀쌀한 홀웨이 한중간에서 레드불로 다 젖은 하얀 민소매만 입고 있는 꼴이다. 으슬으슬하고 춥다.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피곤함과 겹쳐져 머리가 핑 돌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때, 갑자기 누가 스포츠 타올로 원빈의 머리를 감쌌다. 형광 노란색 타올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거린다. 끈적한 음료를 다 흡수시켰는지 무게감이 생긴 타올을 치우고선 타올의 주인이 원빈에게 무언가 입힌다. 아래로 떨어진 시선 탓에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커다란 덩치, 큰 손, 그리고 가슴팍에 보이는 레알 마드리드 패치가 누구인지 짐작게 했다. 커다란 축구 유니폼과 다정함에 파묻혀 제가 쏟아지는 냉기를 차단해 버리는, 그건 아마 분명.

 

"캐시, 무슨 짓이야."

"성찬 넌 빠져!"

 

성찬이 꼼꼼하게 제 축구 유니폼을 원빈에게 입혀주고 나서야 캐시를 나무랐다. 두 사람이 무언가 실랑이하는 듯했으나 원빈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땀내나 섞여 있어야 할 축구 유니폼에서 향기가 스멀스멀 올라와 온몸을 에워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진한 레드불과 에어 파스 냄새는 어디 가고, 낯선 향기가 원빈의 코끝에 머물렀다. 점점 더 그 크기를 키운다. 손톱만 했다가, 축구공만해지고, 정성찬만 해지더니 결국 저를 집어삼켜버릴 크기가 되어 짓누른다.

 

찾았다. 멀리서는 절대 알 수 없었던, 그 한 가지.

 

꼭 알몸으로 묵직하고 검붉은 장미밭을 뒹굴다 허브 한줄기를 만난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끝에 누군가 서있는 것처럼 유니폼의 주인이 가진 본연의 체향이 감돈다. 시원하고, 바람같은… 이상하다. 향을 맡은 것만으로 성찬이 저를 꽉 안았다 놓은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귀 끝이 간지러웠다. 손톱으로 벅벅 긁어도 나아지는 건 없을 만큼 간지럽다. 이번엔 가슴께가 간지러워 원빈이 옷 위로 가슴팍을 긁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귀 끝을, 이번엔 양 뺨을. 온몸이 장미 덩굴로 감긴 듯 따끔거린다. 가시덩굴이다. 정성찬이 순식간에 사람을 옭아맸다. 박원빈도 어느샌가 얽매여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발이 묶여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다.

 

성찬이 원빈의 손을 이끌었다. 둘러싼 인파를 뚫고 달리는 와중에도 원빈의 몸에서 향기가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여전히 발은 덩굴에 묶인 채로, 향기의 주인이 자신을 껴안은 채 달리는 것만 같다. 또다시 숨이 가쁘다. 호흡이 닳고 마모된다. 원빈, 원빈아! 여러 차례 불리는 이름의 주인공이 나인지도 모를 만큼 깎인다. 들숨에 들이치는 장미 향에 잠식되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멍하니 발걸음만 재촉했다. 꽃향기에 매료된 벌이 된 듯 향기의 근원을 따라 움직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발이 멈춘 건 레프리 타임이 지나 아무도 없는 샤워실이었다. 물 냄새와 습기가 머금어져 눅눅하고 싸늘해야만 하는 곳에 정성찬이 있다는 이유로 이상하리만치 뜨겁다. 원빈이 멍하니 서 있자 성찬이 원빈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없는데... 제 이마와 비교하며 또 다정을 건넨다.

 

"많이 놀랐지."

"......."

"감기 걸리겠다. 내 타올이랑 파카도 두고 갈 테니까, 따뜻한 물에 씻고 가."

"......."

"애들한텐 말 해둘게. 아무도 안 들어올 거야. 걱정하지 말고."

 

원빈이 그제야 성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추위 때문인지 얼굴이 빨갛다. 제게 벗어준 파카 때문에 성찬은 얄팍한 스포츠 반팔 차림이다. 내가 춥진 않을까 걱정하면서 자기는 하나도... 순간 울컥한 원빈이 파카를 다시 내밀며 고개를 가로젓자 성찬이 장난스럽게 짐짓 화난 얼굴을 한다.

 

"건강이 우선인 거 알지? 아프면 안 된다."

 

그리곤 파카를 다시 품에 안겨준다. 장미와 허브로 꾸며진 커다란 꽃다발을 한 아름 안은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런 난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이렇게 만들어놓고서. 성찬이 먼저 가겠다며 손을 흔들고 또 뒷모습을 보인다. 멀어져 버리고, 아득해진다. 원빈이 유니폼을 벗을 생각조차 못 한 채 파카를 품에 안으며 샤워장 라커에 쪼그려 앉았다. 똑, 또옥. 어디선가 제대로 잠가놓지 않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물이 중력에 이끌려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보다 심장박동이 훨씬 빠르다.

 

성찬의 앞에서 무슨 표정을 했는지, 어떻게 이 안까지 들어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옷은 여전히 성찬이 입혀준 레알 마드리드 긴팔 유니폼이고, 손엔 묵직한 파카가, 옆엔 잘 개어져있는 정성찬의 타올이 놓여있고... 여전히 박원빈은 장미밭에 파묻혀 뒹구는 중이다. 온통 정성찬의 흔적이다. 그것 외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이틀 뒤 키싱부스에서 키스할 정성찬도, 나도. 정말이지 아무것도...

 

정성찬과 키싱부스에서 키스하는 애는 분명 영원히 그곳에 매여 살겠구나. 문득 깨달은 사실에 가슴께가 아릿하다. 원빈이 유니폼을 끌어 올려 폐부 깊숙이 향을 머금었다. 스코어 9 out of 10. 웨엥-. 머릿속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

 


Dec 23th, 20XX

The Kissing Booth : D - 1

 


22일에서 23일로 넘어가는 새벽, 난방도 잘 안되는 지하 연습실. 원빈과 밴드부원들은 솔티드 팝콘을 으적거리며 선명하지도 않은 빔 프로젝터로 3월에 열렸던 레알 마드리드와 파리 생제르맹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다 함께 시청하고 있었다. 킬리안 음바페의 선취점 이후 카림 벤제마의 해트트릭. 결과는 3대 1. 입맛이 없어 제로 코크만 홀짝이며 축구를 보던 원빈이 조지에게 물었다. 빌드업하다가 골에 실패했잖아. 그럼 뒷공간이 빌 텐데, 그 다음엔 어떻게 돼? 원빈의 물음에 조지가 단순하게 답한다.

 

"어떻긴. 역습당하는 거지."

 

그렇구나... 원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방비하게 노출된 뒤를 파고드는 상대에게 점수를 내줄 수밖에 없게 되는 것. 공격에 가담할수록 방어는 허술해지고, 뒤늦게 막으려 해봤자 발 빠른 미드필더나 윙어가 따라붙을 수도 없을 만한 속도로 달리면 속수무책이다. 자그마치 9골이나 준 원빈으로서는 작전에 실패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앞만 보느라 마음 한구석이 침투당하는 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원빈은 심란한 얼굴로 담요 안에 발을 감췄다. 꼬물거리며 온기를 찾아 파고든다. 필립... 나 키싱부스 안 하면 안 되나? 연습실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뉘던 원빈이 묻자 필립이 나무랐다. 그럼 공연 안 하게? 그건 또 안되는데... 사랑하는 음악은 여전히 돈을 요구하는 허망한 현실. 성찬은 아직 만점이 아니기에 원빈은 입고 있던 패딩을 끝까지 잠가 얼굴을 감추며 가장 중요한 현실을 직시했다. 음악은 돈.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조차 없다.

 

패딩에 얼굴을 파묻자 아무렇게나 뿌려두었던 장미 퍼퓸 냄새가 물씬 풍겼다. 하필 또 장미향이다. 향수를 잘 알지 못해서일까, 성찬과 대비되는 훨씬 부드러운 향에 저도 모르게 민망해졌다. 정성찬은 안 그렇던데... 원빈이 뿌려둔 향수는 장미로 장식된 욕조에 몸을 담그는 듯한 향이 났다. 같은 장미 향임에도 너무나도 달라 저번부터 발가벗겨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웨엥-. 또다시 사이렌이 울린다.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 원빈은 날이 밝기 무섭게 축구부 라커 앞에 성찬의 파카와 유니폼이 든 쇼핑백을 몰래 가져다 두었다.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다. 섬유 향수라도 뿌려서 주는 게 예의가 아닌가 싶었으나 다소 민망한 제 향수 냄새를 생각하면 그것 또한 못 할 짓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제가 쓰는 섬유유연제만 잔뜩 넣고 빤 걸 그대로 개어 쇼핑백에 넣었다. 라커 문고리에 거는 순간까지 사이렌이 울려댄다. 정성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외치고 있다.

 

성찬을 카피하는 일은 그만두었다. 뒤숭숭한 마음에 금세 원래대로 돌아와 버렸다. 빌드업이고 뭐고 수비에 전념해야 하는 입장이다. 정석으로 임했으면 이 모양 이 꼴은 아니지 않았을까. 파트타임을 새로 구하고, 잠을 줄이고, 시간 여유가 없어 조용히 혼자 연습했다면... 정성찬이 9점이나 될 일도, 그리고 성찬이 키스하는 모습은 안 봐도 될 일이다. 그 키스는 나도 하는데 마지막 줄이 왜 이렇게까지 마음에 걸리는지는 애써 부정한다. 그저 남은 한 골은 절대 주지 않을 거라고 다짐할 뿐이다.

 

1등이고 뭐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나 말고 누군가 해주리라 믿기로 했다. 6명 중 4명이 밴드부원들이고, 원빈이 빠져도 1등 확률은 절반이나 된다. 혹시 못한다 한들... 열흘만에 저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성찬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늘 단기로 바짝 뛸 파트타임이나 알아보러 가야지. 인형 탈 쓰고 전단지 돌리는 크리스마스 파트 타이머가 돈이 꽤 된다잖아. 가오고 뭐고 가릴 때가 아닌 처지가 된 원빈은 사커팀 라커에서 돌아오는 길, 게시판 아래 놓여있던 지역신문 하나 들었다. 그리곤 파트타이머 공고가 모여있는 맨 뒷장을 찢은 후 곱게 접어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정신 없이 오전을 보냈는데도 아직 11시밖에 되지 않았다. 대체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더라... 정성찬 하나 빠졌다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루를 흘려보내던 원빈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파트 타이머 공고만 훑었다. 가장 페이가 많은 것들 위주로 샛노란 색 형광펜으로 체크까지 해보았으나, 그마저도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후… 한숨을 쉰 원빈은 결국 책상에 턱을 괴고 창 너머 운동장이나 바라보았다. 애석하게도 필드엔 축구부가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연습경기라도 하는 건지 두 팀으로 나뉘어져 몸을 풀고 있었다. 하나같이 장갑에 넥워머로 살갗이 보이지 않게 가려둔 채 필드를 가로지르는 애들을 보며 원빈이 자연스럽게 백넘버를 훑었다. 9번, 4번, 66번... 그리고 11번.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봤자 시선 끝에 닿아버리는 성찬의 존재감은 여전했다. 위력이 대단하다.

 

파란색이어야 할 사커팀 유니폼과는 달리 성찬만 혼자 제가 돌려준 하얀색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성찬이 안에 껴입은 이너가 다 보일 정도로 유니폼 가슴께를 움켜쥐고 끌어올린다. 스읍 후. 끌어올린 옷자락에 코를 묻은 채 심호흡하고선 달린다. 휘슬 소리가 들리지 않았음에도 필드를 달리는 몸짓으로 경기가 시작됨을 알아차렸다.

 

원빈은 저도 모르게 성찬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오른쪽, 중앙, 다시 오른쪽. 우측 터치라인 근처에서 공을 미드필더로부터 넘겨받은 성찬이 오른발로 공을 건들며 전진한다. 그리곤 다시 미드필더에게 넘겨주었다가 돌려받는다. 공을 주고받으며 점점 상대편 골대로 향한다. 아... 빌드업을 하는 거구나. 이젠 저 행위의 의미를 알게 된 원빈은 더 넓어져 가는 성찬의 뒤쪽 공간을 바라보았다. 등 뒤가 텅 비어 있었으나 성찬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발로 공을 밀어낸다. 한 곳만 바라보고 향하는 발걸음에서 앞을 뚫어낼 자신감과 확신 같은 것들이 보였다.

 

성찬이 점점 중앙으로 침투하자 주황색 조끼를 입은 상대편 윙백이 앞을 막아섰다. 툭툭 공을 건들며 가로막힌 앞에 망설이는 듯하더니 오른쪽으로 페이크, 그리고 왼쪽으로 달린다. 센터백이 따라붙는 걸 다시 재치고 어느덧 골문 한중간에 도달한다.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음에도 겁먹긴 커녕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듯 성찬의 몸이 앞으로 쏠린다. 원빈이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릴수록 눈앞의 광경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후, 성찬이 심호흡을 하고선 진자 운동하듯 발을 뒤로 뻗었다. 그리곤 힘차게 앞으로 돌아오며 공과 맞부딪힌다. 발에 감긴 스파이크화가 공에 스치며 자국을 만들어낼 만큼 거세다. 회전도 없이 붕 뜬 공이 센터백의 머리 위를, 그리고 골대 부근을, 곧이어 골키퍼의 손끝 옆을 스치고. 마침내.

 

철썩-

 

골망을 뚫어버릴 듯, 공과 골망이 부딪힌다. 와아-. 창문에 가로막혀 바깥소리 하나 들리지 않음에도 원빈의 귀엔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양쪽 검지를 추켜세우며 필드를 활보하는 성찬에게 팀원들이 달려들어 몸을 부딪친다. 등을 두드리고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손길에도 성찬은 또다시 유니폼을, 이번엔 양손으로 가득 끌어올려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뜻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모두가 염원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어림도 없는 것처럼 이틀이나 남기고 눈이 내려버린다. 필드에 눈이 쌓이고, 스파이크로 쌓인 눈을 밟으며 달리던 성찬이 가슴팍을 꽉 쥐며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땀을 흘리는 게 계절을 역행하듯. 눈이 내려 흐려진 하늘을 밝히듯. 뜨겁고, 밝고, 열정에 찬.

 

그렇구나, 나는 이미...

 

원빈이 책상에 엎드렸다. 원빈, 수업 중에 뭐 하는 거니! 소리치는 선생의 말에도 몰래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10 out of 10. 그렇게 짝사랑 1일 차. 정성찬이 50명과 키스하기 전날 알아버린 마음은 갈 곳 없이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

 


Dec 24th, 20XX

The Kissing Booth : Finally, D - Day!

 

 

5 : 17 P.M.


사랑하는 것이 두 개가 되었다. 상충하는 마음이다.


키싱부스고 뭐고 정성찬이 제 눈앞에서 키스하는 걸 볼 바엔 도망치고 싶은 마음 하나. 그래도 음악을 사랑하는 한 돈은 충당해야 한다는 마음 하나. 설렘, 걱정 등 적어도 원빈에겐 심장 뛸만한 감정들이 아무것도 없는 크리스마스 이브이자 키싱부스 이벤트 디데이. 너무 늦게 알아버린 마음 탓에 취소도 못하고 당일이 되어버린 이벤트 때문에 기분이 저 바닥으로 침몰하느라 우두커니 서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다.

 

일찍 해가 져버리는 미국의 12월. 5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어둠이 드리우며 운동장에 줄지어진 각종 부스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꾸며진 부스들을 비추는 노란색 조명들이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운동장 스피커에선 캐롤이 흘러나오고, 예쁘지도 않은 크리스마스 씰을 파는 부스가 두어 개 생겼다. 하얀색 눈 하나 떨어지지 않았으나 어찌 됐든 해피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 유일하게 해피하지 않은 원빈을 이끄는 건 다름 아닌 밴드부원들이었다.

 

"이 추운 날에 야외 행사? 제정신이 아닌 거지."

 

운동장에 옹기종기 모인 학생들이 벌벌 떠는 걸 보며 비싸기만 한 나초 트럭에서 치즈 나초 박스를 8달러나 주고 사 먹은 조지가 투덜거렸다. 제일 즐기고 있는 건 너인 것 같은데, 조지. 필립이 지금 그게 넘어가냐며 타박하자 입에 나초를 한가득 집어넣고 우물거린다.

 

"나 양치 도구랑 리스테린 챙겼어. 이클립스도 두통이나. 왜 그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다 아니꼬워 죽겠는데 정작 다른 애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말로만 투덜거리지 얼마나 긴장했으면 전부 때 빼고 광낸 상태다. 드럼 칠 때 거슬린다며 손목에 아무것도 하지 않던 조지의 손목에는 누구 건지도 모를 은색의 화려한 시계가, 매일 똑같은 노스페이스 패딩만 입고 다니던 노아는 블랙 무스탕을, 스투시 후디를 사랑하던 필립은 셔츠와 랄프로렌 니트를 입고 나타났다. 정작 원빈은 의지라곤 없어 매일 입던 대로 주워 입었다. 어김없이 가죽 자켓. 저번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흰색 나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추위도 추위지만, 옷 하나까지 깃든 성찬의 대한 기억을 견디기 위한 몸부림이다.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남다른 곳답게 운동장부터 본건물까지 전부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위해 장식되어 있었다. 성찬과 마주했던 벤딩머신 옆엔 트리가 놓여있고, 성찬이 제 손을 이끌고 갔던 체육관 건물은 입구가 전구와 오너먼트가 매달려있었다. 카페테리아는 성찬이 준 것과 똑같은 핫 초콜릿에 스노우맨 초콜릿 밤을 띄워줬으며, 성찬이 골망을 흔들던 축구 골대는 크리스마스 리스처럼 꾸며진 채 양말이 걸려있었다. 몸부림쳐봤자 하나같이 모두 정성찬이라 조금 울적해졌다. 키싱부스 스테이지로 가는 길에 소시지를 두 개나 먹는 건 우울함을 달래기 위함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정말로.

 

휘황찬란한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던 조지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이벤트가 정말 코앞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으악 떨려! 이럴 때가 아니야, 원빈! 조지가 원빈이 들고 있던 소시지를 뺏고는 입에 리스테린 필름과 스피어민트 이클립스를 다섯 알이나 먹였다. 너무 매, 매운데.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싸한 입에 손으로 부채질했으나 그것마저 얼른 오라며 닦달하는 손짓에 의해 저지되었다.

 

- 잠시 후, 키싱부스 이벤트가 시작됩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캐롤이 멈추고 안내방송이 이어진다. 원빈이 우두커니 서서 안내방송을 듣고 있자 멀리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멀어진 건지 세 사람이 여섯 걸음은 더 멀어져 있다. 원빈이 세 사람을 따라잡으려 필드를 달린다. 쓰읍, 숨을 들이킬 때마다 상쾌하다 못해 아린 민트 향이 목구멍까지 들이치는 게 느껴진다. 부스가 몰려있는 운동장 필드, 수비수를 피해 움직이던 성찬처럼 원빈이 사람들을 피해 달린다. 스테이지까지 한걸음. 어쩌지도 못하고 현실에 부딪히러 간다.

 

 

/

 

 

5 : 51 P.M.

 

 


The Kissing Booth
Do you want to kiss with your ♡?

 


 

"...이게 다야?"

"그런가본데."

 

미리 도착한 키싱부스 스테이지는 꽤 단순하게 꾸며져 있었다. 붉은색 커튼과 색색깔의 번쩍이는 조명, 간격을 두고 나란히 놓인 3개의 바 체어, 그리고 포스터에서 봤던 문구가 쓰여있는 현수막이 스테이지 위에 붙어있었다. 가성비 좋네. 주위를 둘러보던 필립의 비꼬듯 한 어투에 원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비품으로 자선행사에서 돈을 끌어모을 수 있다면 당장 이걸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지 않을까. 오는 길에 본 부스들이 훨씬 났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무도 없이 의자만 덩그러니 놓인 스테이지가 보이자 문득 바뀐 건 내 마음뿐이고 그 외에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음악을 사랑하는 박원빈, 돈을 충당해야 하는 밴드, 서로가 아닌 50명과 키스할 박원빈과 정성찬. 이미 예상했던 현실은 닥쳐왔고 바뀌어 버린 마음만 안타까울 뿐이다. 원빈이 애써 눈을 아래로 깔았다. 원망할 게 내 마음이라니. 나도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밴드부 멤버들을 뒤따라 커튼과 대비되는 초록색 필드를 밟으며 또 성찬의 생각을 했다.

 

백스테이지 쪽으로 가자 스태프 찰리가 네 사람을 반겼다. 안녕! 메리 크리스마스이브! 인사를 건네기 무섭게 찰리가 대뜸 조지의 눈을 검은 천으로 가려버렸다. 뭐, 뭐야 이거! 조지가 버둥거리는 걸 보며 노아가 이게 뭐냐 묻자 찰리가 남은 5개의 검은 천을 보여주었다.

 

"비밀 유지야, 비밀 유지."

 

대기에서부터 누구와 함께하는지, 어떤 사람과 키스하는지 모르게 할 작정인 듯했다. 환상과 설렘을 가득 안으라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가... 백스테이지 안으로 가는 길조차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발을 옮기는 조지를 보며 내심 안심했다. 대기하면서 성찬이 키스하는 모습을 봤다면 어제 생긴 조그마한 마음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라 외쳤을지 모를 일이니 차라리 잘됐다며 애써 위안을 삼았다.

 

찰리가 순서대로 인사하며 한 명씩 눈을 가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끔 검은 천으로 단단히 묶는 손과는 달리 입으로는 상냥하게 행복을 빌어준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 노아.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 필립. 그리고.

 

"해피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 원빈."

 

찰리의 짧은 인사와 함께 부드러운 검은 천으로 눈앞이 가려진다. 원빈은 눈을 감으며 꾸역꾸역 성찬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나중에 따라 쓸 수 있을 만큼의 흔적을 남친 채 지우개로 지워버린다. 내가 사랑하는 한 가지만 생각하자. 공연장에서 기타 치고 노래하는 나를. 내가 사랑하는 다른 한 가지는 없었던 것처럼. 불가능할 마음을 다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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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48 P.M.

 

시야가 차단되니 청각과 촉각이 곤두섰다. 살갗과 귓가에서 느껴지는 모든 요소가 적나라하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상상만으로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찰리가 마련해준 의자에 원빈이 눈이 가려진 채 귀를 기울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진 걸 보아하니 키싱부스가 시작된 모양이다. 어쩐지 이클립스를 까드득 씹으며 중얼거리던 조지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했더니. 원빈이 보이지도 않으면서 본능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진행자가 음질도 좋지 않은 마이크가 웅웅거릴 정도로 소리치며 호응을 유도한다. 키싱부스의 시작을 알리는 효과음과 찢어지는 듯한 스피커 소리에 원빈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덜컥 어둠과 근원 모를 소음이 무서워졌다.

 

"성찬이 형. 여기 있어요?"

"......."

"없는 모양인데?"

 

공포엔 본능적으로 가장 보고 싶은 상대를 찾는다고 했던가. 저도 모르게 성찬을 불렀으나 필립 빼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오로지 깔린 음악과 정신없이 일하는 스태프들의 목소리가 전부였다. 와아-. 무대 방향인지 함성이 울려 퍼지는 쪽으로 고갤 돌리고 나서야 이미 무대에 올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짐작했다. 키스, 하고 있구나. 원빈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중간중간 삐빅, 삑, 하는 신호음이 들렸다. 신호음과 함께 사람이 바뀌는 듯 오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하이힐 소리일 때도 있고 커다란 운동화일 때도 있다. 성별에 국한되지 않고 눈을 가린 상대를 사랑만 한다면 가능한 키싱부스. 지금이 대충 서른 번째가 조금 넘었으니까... 정성찬은 이미 12월 달력 칸이 부족할 정도의 사람들과 키스를 나눴을 것이다.

 

상상력은 제멋대로라 원빈을 도와주지 않았다. 바 체어에 앉아 키스하는 성찬이 멋대로 눈앞에 그려진다. 정성찬은 어떻게 키스할까? 분명 다정하게 천천히 입 맞춰주면서 긴장을 풀어주겠지? 혹시 불편할까 괜찮냐고 물어보면서 보이지도 않는 상대를 신경 써주겠지? 입술이 찢어질까 우선 침으로 적셔주거나, 다리가 풀릴까 허리를 안아주거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정성찬은 그런 사람이니까...

 

아마 성찬은 제게 줬던 다정을 건네주며 또 상대를 사랑에 빠지게 할 것이다. 예쁘게 웃던 모습으로 저같은 사람을 또 만들어버릴지도 모른다. 직접 보지 않아 다행이라는 마음과 함께, 끝도 없는 상상에 잠식되어 원빈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땅으로 꺼지는 기분은 결코 달갑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키스하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하는 게 짝사랑이라면 이딴거 나도 하고 싶지 않았다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원빈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원빈, 너는 크리스마스 소원 있어?"

 

그런 원빈을 알 턱이 없는 필립이 긴장을 풀기 위함인지 평소라면 궁금해하지도 않을 것을 원빈에게 물었다. 소원... 낯익은 목소리에 원빈이 두 손을 꽉 모아쥐었다. 필립에겐 보이진 않을 제법 간절한 모양새였다.

 

"무사히 공연할 수 있으면 좋겠어."

'나 말고 정성찬이 마음 한켠도 내주지 않았으면 좋겠어.'

 

입과 마음속으로 다른 소원을 읊어본다. 이기적이게도 뭐 하나는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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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05 P.M.

 

"원빈, 나야 찰리. 가자."

 

정각을 알리는 시계 소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찰리가 원빈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고개를 끄덕이자 찰리가 원빈의 팔을 이끌어 몸을 일으켰다. 여기 계단 있어, 조심해. 원빈이 조심스레 한 걸음씩 내디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튼 밖으로 나온 듯, 백스테이지와 다른 쌀쌀한 겨울밤 공기가 느껴졌다. 여기, 다음 참가자들이 들어오네요! 진행자의 말과 함께 박수와 함성이 들린다. 기대감에 찬 웅성거림과 함께 온 시선이 제게 쏠려 살갗이 따갑다.

 

스테이지 중간에 도착한 건지 저를 이끌던 찰리의 발걸음이 멈췄다. 찰리가 원빈의 손에 닿도록 바 체어의 위치를 알려주곤 앉으라 일러주었다. 살며시 다리를 굽혀 앉자 찰리가 행운을 빌어주는 말을 귀에 속삭여줬다. 원빈, 오늘 예상치 못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길 바라! 원빈은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여기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는 게 모순이고 기만이라 했던 필립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곧 시작되는지 함성 소리가 잦아들더니 아까와는 사뭇 다른 음악이 깔리며 분위기를 조성한다. 가려놓은 눈앞에서 조명이 번쩍거리자 긴장감이 엄습했다. 

 

삑-

 

숨을 크게 들이켜기 무섭게 암전된 시야 너머로 발소리가 들린다. 터벅, 터벅. 다가오더니 제 앞에서 멈춘 듯했다. 인기척이 느껴졌으나 아무런 말도 없었다. 왜 인사도 없지? 숨 막히는 정적에 원빈은 둘만 남겨진 기분이 들어 인기척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을 마주하고 있다는 게 천 너머로 느껴졌다. 어떻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까. 돌려받지 못할지도 모르는 마음을 내비친 건 어떤 용기인 걸까. 원빈은 앞에 선 인물이 궁금해졌다.

 

삐빅-

 

1분을 카운트하는 알림음이 울린다. 제 자리가 중간인지 양옆으로 질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소 민망한 소리가 연이어지는 와중, 눈앞의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 음... 키스해야 하는데. 원빈이 천 아래 가려진 눈을 굴렸다. 부끄러운 건가? 시간은 가고, 이건 한 번에 30달러짜리고, 용기내서 온 마음이고... 그냥 보내도 무방한 일인데 일방적인 사랑을 알게 된 원빈은 차마 모질지 못했다. 그래서 성찬으로부터 모방했던, 사실 성찬을 마음에 들어와 버리게 했던 것들을 조금 내비쳤다. 첫째로 다정했고, 둘째로 세심했고, 셋째로 웃었다. 성찬이 제게 주었던 것 중 일부였다.

 

"안녕.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 첫 번째 순서네."

"......."

"괜찮아, 나도 어, 엄청나게 떨려. 후… 널 실망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앞이 아무, 아무것도 안 보여서... 조금 무서워서 그런데."

"......."

"먼저 키스해 줄래?"

 

원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가 위로 아플만큼 꺾였다. 그리곤 잡아먹을 듯 입을 맞춰왔다. 저도 모르게 가죽 자켓 끝을 꽉 쥘 만큼 다급하다. 상대는 아랫입술을 살짝 물더니 살짝 벌어진 공간에 혀를 가르고 들어왔다. 1분이 이렇게 길었던가? 입 전체에 두툼한 혀가 굴러다닐 동안에도 신호음은 울리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흘러내린 타액이 제게 넘어와 목울대를 움직였다.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적나라하다.

 

삑-

 

신호음과 함께 입이 떼어졌다. 파하-. 원빈이 막혔던 숨을 크게 내뱉고서 입가에 번들거린 침을 소매로 훔쳤다.

 

"자, 흐읍, 잘 가..."

 

원빈이 숨을 헐떡이며 손을 흔들기 무섭게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 신호음이 울렸던가? 언제 다음 사람으로 바뀐 거지? 원빈이 천 아래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채로 혀를 받아들였다. 이번 상대는 입천장을 혀끝으로 간질였다. 여린입천장 깊숙이 혀가 파고들어 물컹한 점막을 집요하게 어루만진다. 웁, 흐으... 이상한 느낌에 원빈이 다리를 베베 꼬자 상대가 더 다가와 원빈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꽤 하체에 부피감이 있는 상대 탓에 허벅지가 쩍 벌어졌다. 원빈이 다리를 오므리려 했으나 그럴수록 상대에게 매달려 키스를 조르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게 싫지 않은 듯, 상대는 원빈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리고선 상체가 뒤로 밀릴 만큼 입술로 꾹 눌렀다.

 

삐빅-

 

또다시 1분. 길게 붙었던 입술이 떼어졌다. 하아, 하아. 원빈이 숨을 몰아쉬자 볼에 쵹, 하고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으응... 간지러워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자 이번엔 버드 키스로 말캉한 위아래 입술을 머금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이상하다. 바뀌어야 하는데... 앞에 선 상대가 여전히 제게 애틋하게 입술을 내렸다. 가만히 입술을 받아내던 원빈이 어리둥절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상대가 작게 웃었다.

 

삑-

 

이번엔 작별 인사조차 못하고 또 입술이 맞물렸다. 입술을 한입에 감쳐물고 놓더니 혓바닥으로 입술을 쓸었다. 와우-. 관객석으로부터 오는 원인 모를 감탄사에 볼이 달아오를 만큼 부끄러워졌다. 그런 저를 눈치챈 건지 상대가 귀를 양손으로 막아주었다. 시뻘겋게 변한 귀보다 더 뜨거운 체온이다. 외부 소음이 차단되었으나 오히려 혀를 섞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츕, 웁, 우웁. 야하다 못해 외설스러울 정도의 소리가 머릿속에 울린다. 원빈이 버둥거리며 제 귀를 막은 손을 내리려 애썼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양쪽 귀와 뺨 언저리를 그러쥔 커다란 손을 맞잡은 채 고개가 반대로 꺾였다. 코가 스칠 만큼 격하게 움직이는 틈을 비집고 거친 숨이 훅, 파고들었다.

 

삐빅-

 

신호음을 듣긴 하는 건지, 이번엔 상대가 원빈의 뒤통수를 눌러 혀를 깊숙이 빨았다. 쪼옵, 쪽. 원빈의 혀와 제 입술을 마찰시키며 혀를 뽑아먹을 기세로 빨아들였다. 아아... 약한 고통에 신음하자 상대가 목덜미를 쓸어주었다. 손길만 다정하지 입 속은 거칠다. 상대는 그래도 부족한지 뾰족하게 세운 혀끝으로 아래 침샘을 자극했다. 침이 고이기 시작한 원빈의 고개가 서서히 내려가 정면을 보았다. 상대가 허릴 굽혀 제 타액을 받아먹으려 하는 게 눈 감고도 훤히 보였다. 미, 미친 거 아니가. 자켓을 꽉 쥔 원빈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삑-, 삐빅-, 삑-

 

분명히 바뀌는 신호음은 계속되는데 앞의 인물은 바뀌긴커녕 계속해서 원빈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이젠 입꼬리와 턱 점, 관자놀이, 코끝까지 입술이 닿았다. 달래는 것처럼 턱을 긁는 손길이 꼭 고양이라도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달콤했다가 저돌적이었다가. 분위기만 사뭇 달라질 뿐 모두 똑같은 각도로, 똑같이 아랫입술부터 옭아매는 습관대로 키스한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당황한 원빈이 밀어내지도 못한 채 오래토록 바뀌지 않는 상대로부터 입술을 받아들였다. 신호음이 몇번이나 울렸는지 짐작도 안되는 시간이다. 얼마나 오래 머물렀으면, 겨울 바람을 타고 흘러가야 할 상대의 향수 냄새가 코끝에 머물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선명해진다. 입술과 타액을 받아내던 원빈이 코를 찡긋거리며 향을 더 들이마셨다. 이거 분명히 어디선가 맡아본… 원빈이 검은 천 아래로 눈을 번뜩이며 실마리를 찾아 기억 조각을 끄집어낸다.

 

카페테리아에서 마시던 핫 초콜릿, 런치 대신 먹었던 마카다미아 쿠키, 끈적하고 차가운 레드불, 입안을 시리게 만들던 이클립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

 

"자, 잠깐만..."

 

원빈이 다급히 안대를 벗으려 하자 단단한 손이 원빈의 손을 저지했다. 꽉 쥐었다 놓으며 온기를 전해주곤 뺨에 입을 맞추는 척, 귓가에 조용히 읊조린다.

 

"벗지마."

"어...?"

 

귀에 익은 목소리. 바뀌지 않는 상대. 그리고 진한 장미 향과 함께 퍼지는 옅은 허브 향. 알몸으로 장미밭을 뒹굴고 있던 그때로 회귀시키는, 그 향기는 분명…

 

"미안해."

"......."

"이렇게라도 너랑 키스하고 싶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원빈이 귀 끝을 붉히며 벌떡 일어서 눈앞에 선 상대의 목을 감싸안아 매달렸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 체어가 넘어지든 말든, 얼굴이 어딨는지도 모르면서 입술부터 들이밀었다. 쪼옥. 눈앞이 가려져 있어 원빈의 입술이 제대로 안착하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상대의 입가에 머물렀다. 그러나 원빈은 다시 떼어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원빈의 입술이 옆으로 밀릴 만큼 상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입술을 통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 웃는다. 어쩌면 내가 아는 것보다 더 환하게.

 

매달려오는 원빈을 버티고 선 상대가 커다란 손으로 자연스레 원빈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제대로 입술을 내려주었다. 앞선 키스들과는 달리 제 상상에서만큼 다정한 키스였다. 꾸욱, 말랑한 입술끼리 서로를 짓이긴다. 여전히 고개는 아플만큼 위로 꺾여있고, 입술은 퉁퉁 불어버렸고, 보는 시선들이 따갑지만, 상관없었다. 목을 감싸안은 원빈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펑-

 

와아-. 환호성과 함께 어디선가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원빈은 보이지 않아도 알았다. 까만 하늘 위로 폭죽이 터지며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땅에 닿기도 전에 공중에서 사그라질 것만 같던 불빛들이 연달아 새로이 터져 한겨울에 내리는 함박눈을 연상케 할지도 모른다. 눈이 펑펑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보다 더 로맨틱하고 아름답게. 무대 위 조명이 어울리는 박원빈과 가장 잘 어울리는 형태로 반짝이며 내릴 것이다.

 

원빈의 머릿속에서도 폭죽이 연이어 터진다. 펑, 퍼엉. 까만 눈 앞이 화려하게 빛날 정도로 색색깔의 폭죽이 수 놓인다. 눈물로 일렁거리는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상대의 모습이 선명히 그려진다. 있잖아, 꼭 눈물이 날 것만 같은데. 이건 무슨 느낌이야? 원빈이 묻자 맞닿은 온기가 답해준다.

 

굳이 형용하자면 사랑일 거고 정의하자면 해피 메리 크리스마스인 거지. 왜냐하면, 정성찬이니까.

 

 

 

 

 

 

 

+

 


Epilogue

 

"공연에 와주신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어... 이 자리에 서는 데까지 많은 일이 있었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무래도 키싱부스 아닐까요?"

"우우. 자랑하지 마, 원빈."

"맞아. 1등 한 거 다 성찬 덕분이면서."

"조, 조용히 해라. 아무튼! 한사람이랑 50분 넘게 키스한 건 처음이었는데... 아마 살면서 다신 느끼지 못할 감정들을 느꼈던 것 같아서, 그 기분을 그대로 여러분께 전해드려 보려고요."

 

킥킥거리며 웃는 조지를 뒤로한 채 원빈이 달아오른 뺨을 식히곤 자리를 잡았다. 후. 숨을 크게 한번 뱉더니 앰프를 확인하고 기타를 고쳐 맨다.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무게감이 한쪽 어깨에 치우치는 걸 느끼며 기대에 찬 관객석을 훑는다. 플래시가 번쩍거리는 핸드폰,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린 손, 그리고 기대에 찬 눈빛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모여있는 이곳. 원빈은 다시 한번 상기한다. 마음껏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음악에 머리를 흔드는, 단출하게 그거 하나 원했던 삶을. 그리고 하나 더 욕심내게 되었다고 정정한다. 그건 사랑이고, 꼭 정성찬이었으면 한다고.

 

원빈이 피크를 꽉 쥔다. 팔이 굽었다 펴지며 피크와 줄이 마찰한다.

 

지이잉-

 

와아!

 

드디어 환호 소리와 함께 공연장에 기타 선율이 울려 퍼진다. 염원해 왔던 소리가 공연장 저 끝까지 닿아, 장미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성찬에게까지 닿는다. 성찬이 은은하게 퍼지는 장미 생화 향을 느끼며 원빈이 연주하는 선율에 따라 고개를 까딱인다. 작년 축구 정규시즌 축하공연 때부터 사랑하던 모습이다.

 

'성찬, 정말 이걸 전부 다 사게?'

'응. 대신 꼭 비밀로 해줘.'

 

건네는 소리가 파도 같다. 순식간에 모든 사람을 덮쳐버릴 듯 커다란 존재감으로 이곳에 서 있는 나까지 집어삼킬 만큼 사랑스럽다. 그게 뭐라고, 이제껏 가지고 있던 마음을 감추지 못해 네 앞에 놓였던 모든 티켓을 사버리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티켓을 솔드아웃시킨 원빈의 점수. 10 out of 10. 박원빈, 넌 첫 공연에서부터 내게 그런 사람이야.

 

성찬이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3, 2, 1. 성찬이 중얼거리며 원빈을 따라 웃었다. 조촐한 시티 홀 반지하 공연장. 추운 겨울 눈 내리는 타임스퀘어에서 외치는 것보다 더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랑하는 네게 외친다.

 

Happy new year!

 

 

 

 

 

 

 

키스 애프터 키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