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ART VIDEO AFTER

평행선 정리의 증명
by. 라니

원빈이 성찬을 처음 본 것은 2019년, 그러니까 갓 해를 넘겨 원빈이 열여덟살이고 성찬이 열아홉살이던 때의 일이었다. 회사가 아직 압구정에 있던 바로 그 시절. 그때 성찬의 첫인상을 복기해보자면,

'아니 뭐... 저렇게 생겼어.'

일단 키가 멀대같이 컸다. 저 정도 피지컬이면 무슨 운동을 해도 부상만 안 당하면 해볼 만했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저는 갑자기 운동을 관두고 나선, 목표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나날들 속에서도 어떻게든 새 진로를 찾아보겠다고 스시 칼(깡패x 요리사o)도 잡아볼 뻔했는데... 원빈이는 운동했었대. 성찬이도 운동했었지? 하는 직원분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피지컬이 아깝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 키다리 연습생이 그래요? 하면서 고개를 드는 순간 원빈은 생각했다. 아... 저래서 운동 안 하고 연예인 하는 거구나. 피지컬도 피지컬인데, 가히 살면서 처음 본 수준의 얼굴이었기에. 남들이 원빈을 보며 잘생겼다고 수군거리는 동안 아무 말 없이 말간 얼굴로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이목구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서울... 대단하네. 넓긴 넓은가보다. 울산 시내에서 가장 잘생긴 02년생 하면 제 이름 박원빈 나오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에스엠 연습생 중 제일 잘생긴 사람 하면 자신이 없어질 것 같았다. 뭔, 예쁘게도 생겼네... 그리고 성찬이가 연습생 형 라인이니까 잘 가르쳐줘. 하면서 시범 한번 보여주자! 하는 말씀에 성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니까 저렇게 생겨가 저러고 춤을 춰야 아이돌 하겠다고 할 수 있는 거구나.

저래야 연습생이라도 하는 거구나.

아 나 안될 것 같은데... 집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

나는... 나는 일 분 동안 망치 춤 추고 들어왔는데. 약간의 자괴감을 느꼈지만 일 분 내내 망치 춤 한 시간 내내 열두곡 열창의 다른 꽃말은 그만큼 절실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원빈은 진짜 절실했다. 약간의 설렘과 자신감과 절실함과 독기를 품고 올라온 서울에서, 이번에는 꼭 성공해야지 생각했던 그 다짐의 첫날... 여태껏 살면서 본 제일 잘생기고 키 큰 사람이 제게 가늠할 수 없는 막막함을 안겨줬다. 그게 그였다.

정성찬.

평행선 정리의 증명

정성찬x박원빈

라니

나는 사랑을 느끼는 중이다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너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그것을 증명하는 중이다

황인찬 - You're not alone

이따만한 덩치에 안 어울리는 곱상하고 말간 얼굴이 호흡을 고르는데 그것도 참 예뻤다. 안 그래도 심란했는데 살면서 본 남자 중 제일 잘생기고 키 큰 남자가 숨을 나긋하게 고르는 바람에 심경이 두 배로 복잡해졌다. 주변의 모두가 술렁거리면서 요란을 떠는 동안 아무 말 없이 저를 빤히 바라만 보던 눈빛이 생각나서 더 그랬다. 그리고 그가 원빈과 눈이 마주치더니 다가와 말했다. 원빈은 순간 촌놈고홈 울산은 진짜 고래 타고 다녀? 혹은 이.게.너.와.나.의.수.준.차.이.다. 같은 대사가 튀어나올까 슬쩍 긴장했다. 그런데 성찬은 그냥 그렇게 말했다. 간지러운 서울 말씨로.

"...교복 입었네. 학교 다니는구나."

그럼 뭐 코스프레겠슴까 할 뻔했는데 저도 모르게 네에... 하고 대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찬은 열여섯에 회사로 잡혀 와서(?) 고등학교도 딱 하루 다니고 그만뒀다고 했다. 그러니까 절실한 건 원빈 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절실함 외에 수많은 다른 것들이 필요했다...

1. 원빈은 앞만 보고 달린다

생일은 육개월, 딱 반년 차이. 그런데 십 대의 그 일이 년 차이는 참 크기도 컸다. 성찬은 학교 끝나고 분식집 가다가 붙잡혀서 캐스팅되었다고 한다. 집에 있는 게 제일 좋았던 원빈은 진로를 뒤집고, 한동안 갈피를 못 잡다가, 인스타 스타가 되고 나서 입사를 했다. 그래서 연습생 정성찬과 연습생 박원빈 사이에는 대충 만 삼 년 이상의 시간이 존재했다. 열 몇 해 산 소년들에게 삼 년이란 시간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그 차이를 하루아침에 좁히기란 참 쉽지 않았다.

입사 한지 몇 주 되지 않아서 원빈은 바로 무대를 서게 되었는데, 얄궂게도 성찬과 같은 조가 되었다. 연습생끼리 월말 평가, 전야제 같은 수많은 평가를 진행하는 동안 정말 많은 조합으로 조가 짜인다. 그런 것도 다 합을 보는 거라고 누군가가 귀띔해줬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녀석들보다 눈에 띄어야 하는 와중에 얘네는 꼭 같이 데뷔시켜야겠다 하는 메리트도 보이면 좋다는 것이다. 원빈은 누구보다 더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가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다재다능한 제 능력 중에 고르고 골라 평생 해왔던 거니까.

그런데 이제 갓 시작한 연습생 생활은... 아무래도 계주에서 꼴찌를 하는 그런 악몽 속 끝나지 않는 달리기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많이 답답했지만 괜찮다, 원빈은 중장거리에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스퍼트 잘 유지해서 막판에 다 제쳐버리면 된다. 괜찮다. 그래도 운동을 했던 게 다 영 쓸모없었던 것들은 아니었는지 처음 춤을 따라 춰보는데 각이 예쁘네, 같은 소리를 들었다. 성찬은 축구를 했다고 했던가. 팀에 익숙해 보이는 건 그래서였을까.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주목받는 것까지 익숙해 보였다. 또 누군가가 그랬다. 성찬이형 입사한 지 꽤 됐는데 같이 연습하던 형들은 거의 다 데뷔했거든요. 저 형도 계속 데뷔 조니까 곧 데뷔하겠죠. 원빈이 입사한 날 이래 성찬은 늘 차기 데뷔 조로 픽스되어 있었다. 중심 멤버로. 견습생 연습생 제도까지 있는 회사에서 데뷔 조 픽스 멤버란 이미 반 연예인이었다.

그룹을 런칭하고 나면 연습생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우르르 나갔다가 하는 타이밍이 여럿 존재한다. 운이 좋으면 초고속으로 데뷔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일단 그룹 런칭할 때 데뷔하지 못하면 그다음 기회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까 성찬이 데뷔하고 나면 그보다 육개월 어린 원빈의 거취도 자동으로 정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제가 컨트롤 할 수 없는 부분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열심히 하는 만큼 실력이 부쩍부쩍 는다는 평가가 기뻤다.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찾아서, 꿈이 생겨서 기뻤다. 평가를 할 때 이따금 몇 번씩 성찬과 같은 조에 섞이는 일이 있었다. 성찬이 둥근 눈을 하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원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긋하게 말한다. 박원빈 진짜 엄청 늘었다. 빨리 느네. 그럴 때마다 원빈은 생각했다.

혹시 성찬과 같은 그룹으로 데뷔할 수도 있을까?

쉽지 않은 일임을 원빈도 알고 있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란 있는 힘껏 앞으로 달려 나가는 수밖에.

*

쉽지 않은 일은 그래도 가능의 영역이다. 회사가 본격적으로 뒤숭숭해진 것은 인도네시아 할리우드 이런 이야기가 돌면서부터 였다. 성찬은 스무살이 되었고 원빈은 열아홉살이 되었다. 일반인이었다면 여전히 어린 나이라지만 그들이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이돌의 삶이었다. 나이에 어쩔 수 없이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데뷔 조 소리를 듣던 연습생 몇이 우르르 나갔다. 성찬과 마주치면 그는 또 담담한 얼굴로 연습을 하다가 박원빈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넸다. 친구였다면 임마 성 붙이네… 하고 서운해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니 제 생일이 얼마 전에 지나 만 나이로는 동갑 아닌가 (만 나이를 쓰지 않던 시절이지만 회사는 연습생 평가를 할 때 꼭 만 나이를 썼다) 하다가, 결국엔 네에 안녕하세요. 하고 대답하게 된다. 스무살… 어떤 기분일까 생각했다.

2. 성찬은 늘 한 발 앞에서 달린다

입사한지 일 년이 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원빈의 생일이 지나 다시 만 나이로는 동갑내기가 되었다. 바깥세상은 성찬을 스무살 원빈을 열아홉살 취급하지만 이제는 학교도 다니지 않는데. 유일하고 작은 듯 전부인 세상인 회사에서는 둘을 열여덟살이라고 부른다. 나이도 따라잡았다. 5월이었나, 이쯤부터 원빈은 거의 괴물로 불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키도 좀 자랐다. 성찬만큼은 아니겠지만.

회사에서는 위험하니까 새벽 전에는 집에 가라고 하지만 다들 몰래 숨어서 연습하곤 한다. 숙소로 가려고 나온 길에 성찬과 마주쳤다. 봄과 여름 사이 늦은 밤공기는 선선한 듯 간질간질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서 있던 사람이 원빈을 보고 안녕 박원빈, 했다. 안녕하세요. 이상하게 성찬의 앞에서는 말을 고르고 고르게 된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말없이 걸었다. 갑자기 박원빈. 하고 성찬이 이름을 부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 간질간질한 서울 말씨로. 너 저번에 봤는데, 엄청 늘었더라.

원빈은 그날 밤 잠을 설쳤다. 아무리 봄과 여름 사이 밤공기가 간질간질하다지만 정말로 온몸이 간질거리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이건, 맨 처음, 제일 넘기 힘든 벽처럼 느꼈던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하는 바람에...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빈은 회사에서 춤 제일 잘 추는 비밀병기 그런 말을 듣게 되었다. 기뻤다. 예전에 했던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혹시라도 성찬과 같이 데뷔할 수도 있을까? 그리고...

성찬의 스물은 불확실성이 적었다.

*

그렇게 혼자 성인이 되어버리더니, 연예인까지 되어버렸다. 혼자서 스무살이 되어버리더니.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데뷔는 축하할 일이었다. 축하를 받으며 말간 얼굴로 웃는 성찬을 먼 발치에서 바라봤다. 데뷔 해야지, 당연하지... 이제 차고 넘치게 사랑받겠구나. 여러 말들이 오가다가 다들 성찬의 얼굴을 보더니 또 난리가 났다. 성찬의 합류로 단체활동이 화제가 되며 새로 팬으로 유입되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연차가 제법 찬 팀에 합류를 했으니... 저 멤버들 위주로 새 팀을 곧 런칭한다는 소리겠지? 미운 소리 싫은 소리 아쉬운 소리가 기대한다는 말과 섞여 성찬의 이름과 함께 오르내렸다.

그렇게 원빈은 그저 계속 뒤에서 그를 지켜보는 수 밖에.

*

관계자 결혼식에 연습생들도 초대를 받았다. 이런데 노출되는 거면 그래도 연습생 자랑이니까 좋은 기회라고 누군가 또 말했다. 정장이랄 것이 없어서 비니를 눌러쓰고, 최대한 얌전한 옷으로 결혼식을 갔다. 그런데 웬 걸, 익숙한 그룹 이름이 보였다. 그러니까... 설마 성찬도 있을까 싶어서 앞을 두리번거렸는데, 익숙하게 훌쩍 큰 키에 갈색 머리를 한 그가 서 있었다. 이제 진짜 연예인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거기다가 진짜 어른처럼, 정장을 입고...

그와 저 사이에 시간의 흐름은 평행으로만 흐르는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달려왔다. 처음부터 성찬은 원빈의 앞에서 있었다. 그 또한 전속력으로 달린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벽 앞에 붙듯이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그와 저의 거리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연예인과 연습생의 세계가 다른 세상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항상 연습생 사이에선 대장 격이었던 그가 막내처럼 인사하는 모습이 생경했다.

그 때였다. 뒷모습만 보이던, 이젠 영원히 뒷모습만 보일 것 같았던 성찬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주칠 줄 몰랐는데. 원빈을 보고 눈인사를 했다. 그리곤 원빈이 미처 안녕하세요, 하기도 전에 다른 곳으로 걸어간다.

며칠 뒤 뮤비가 나왔다.

성찬은 스무살에 연예인이 되었다. 유닛 팀이라지만 화려하게 킬링파트까지 받아서.

원빈이 스무살이 되려면 오십일 정도 남아있었다.

*

울산에서 춤 좀 추는 사람ㅜ을 급하게 수소문해야 할 만큼 아무것도 몰랐던 십 대에서 회사에서 춤 제일 잘 추는 연습생이 되었다. 열여덟에서 열아홉, 열아홉에서 스물, 스무살에서 스물한 살... 매 해가 달랐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기타를 처음 배웠던 날부터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 될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러니까 몸 쓰는 건 늘 자신이 있긴 했지만. 한번 접었던 꿈과 차마 제가 이루기 어려울 것 같았던 꿈이 이런 변주로 새로운 길이 되었다는 것... 그게 조금 감격스러웠고. 초밥을 배우러 일본에 가야 하나 기타리스트가 되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졸업하고 아무 곳에나 취업을 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던 교실에서, 제 얼굴만을 보고 호들갑을 떠는 녀석들 사이에서 홀로 고민이 많던 시절에 비하면 하루하루가 새롭고 즐거웠다. 원빈이는 재능이 있다, 소리가 그 무엇보다 듣기 좋았다. 마음을 다하고 싶은 길이 생겼다는 것, 차분하고 착실하게 쌓아온 노력의 시간들이 헛되지 않다는 게 그 무엇보다 기뻤다.

데뷔라는 꿈만 보고 달린다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하기도 했고. 그게 전부가 아니고 이후에도 또 새로운 고민이 생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원빈은 심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냥 눈앞의 목표만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노력으로 채우는 것에, 성실하게 보내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가끔 성찬을 마주했다. 여전히 말간한 얼굴의 성찬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원빈에게 성찬은 늘 닿을 수 없는 별 같은 그런 존재였는데.

*

다들 말을 아끼지만은 가끔은 연습실에서도 회사가 미는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가 분분했다. 연습생들을 골라서 몇은 다른 현지 팀을 런칭할거라는 말에 회사가 또 들썩였다. 나라 이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와중에 어딘가에서는 시스템에 연관 안 된 신인팀도 런칭할거라는 말이 들려왔다. 지금 그럼 계급 나누겠다는 거야? 하고 누군가 말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제는 제법 대장 격이 된 원빈을 보면서 말했다.

형은 매번 따로 빼놓은 거 보면 누가 봐도 신인팀 센터잖아요.

대꾸하는 대신 앞에 놓여있던 물을 마시며 원빈은 깨달았다.

그러니까... 성찬과 원빈이 같은 팀이 될 확률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0에 수렴하는 것 아닌가.

*

성찬을 보며 스무살은 어떤 기분일까 생각했는데 원빈은 어느덧 스물 한 살이 되었다. 아무리 에스엠 지하에 케이팝을 구원할 업계 30년의 노하우가 축적된 비밀병기가 숨어있다더라 하는 카더라에서 꼭꼭 숨겨놓은 비밀병기를 맡고 있었더라도 원빈은 여전히 연습생이었다. 거의 다 됐다, 거의 다 왔다. 그렇지만 데뷔하려면 팀이 필요하다. 가능성이 보이는 녀석들을 엄하게 봐주곤 했다. 회사 단체 콘서트가 열렸다. 코로나로 대면 공연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회사 플랜은 기약 없이 미루어지고... 그러던 와중에 오랜만에 열린 대면 야외 공연이었다.

연습생 신분으로 견학을 갔다. 그러니까 오늘... 성찬이 무대를 한다고 했다. 2020년도 하반기에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2021년도에는 성찬의 얼굴을 보기가 은근 힘들었다. 그리고 이제 2022년은 그보다도 심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던 계절은 초여름이었나. 몇 번의 해가 지나고 지나 늦여름, 8월... 그가 정말 오랜만에 무대에 서고 있었다. 무대의 중심이 되어서... 코로나 한창 때에 데뷔하는 바람에 대면 무대는 처음이라고 들었다. 경기장이 워낙에 커서, 플로어도 아니고 관객석에서 바라보는 성찬은...

정말 멀리 있었다.

다른 우주에 있는 것처럼...

어쩐지 힘을 다해 좁혀봐도 그와의 거리가 계속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같은 연습실에 있던 시절도 있었는데, 늦은 시간 같이 나란히 걸어본 적도 있었는데. 결혼식장에서 마주친 그는 저 앞에 원빈은 말도 한마디 섞어본 적 없는 연예인 형들 사이에 섞여서 웃고 있었고, 심지어 이제는...

면봉만한 크기로 보이는 저 머나먼 무대 너머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만인의 환호성에 둘러싸여서.

드림 루틴.

'꿈은 이루어진다.' 하는 멘트와 함께 무대가 끝났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나보다. 그가 그렇게 바라던 게 팀 활동이라는걸 알고 있었으니 정말 축하할 일이었다.

당시 남 말하기 좋아하는 녀석들 중 몇 녀석이, 부러울 것도 없지. 저기 들어가면 뭐... 같은 말을 할 때마다 원빈은 그냥 눈을 내리깔고 심기 불편한 티를 냈다. 그러면 녀석들은 쭈뼛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원빈 형은 그럴 걱정도 없잖아요. 그래, 그렇지만 한 팀처럼 무대를 하는 그들을 보는 원빈의 기분은 참 이상했다. 청청으로 입고 나와 해사하게 웃으며 무대에서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는 성찬을 보면서. 나중에는 스무명이 넘는 사람들 사이에서 단체 무대를 하면서, '그' 킬링파트를 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그를 보면서.

그리고 콘서트의 끝은 빛을 부르면서 다들 단체복을 입고 마무리하는 거라던데, 거기서 제 팬들을 보고 신이 난 강아지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성찬을 보면서.

이 거리감이 '무대'를 향한 것인지 '성찬'이 선 바로 그 무대를 향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도 계속 이렇게 달리다 보면,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그러면 매일은 아니더라도 이렇게 한 번씩 그와 같은 무대에서 인사하는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올까.

그러면 다른 우주만큼은 아니더라도 달하고 지구 정도 거리감은 느낄 수 있을까...

3. 소실점으로: 같은 목표 그러나 나란한 직선은 절대로

까마득한 우주의 끝을 헤매면서 우리는 이곳으로 온 거야

이 마음을 싣고 가줘 사랑스러운 너의 곁으로

상처받아도 울지 못하는 네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올려다 본 밤하늘은 우리를 이어주고 있어 몇 번이고 다시 만나자

꿈을 꿨다. 입사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쇼케이스에 섰던 날의 꿈을. 성찬과 다른 연습생들과 같이 섰었던... 조합은 회사가 짜곤 하는데 생각해보면 성찬과 생각보다 같은 조를 꽤 여러 번 했었더랬지. 다들 무대 잘하고 싶은 욕심이 많으니 밤에 잠 안 자고 연습하다 보면 새벽에 넋이 나가서... 툭 치기만 해도 서로 웃겨 죽는 그런 시간대였다. 그때 누군가 그랬다.

"회사에서 연습생들 조합 이런 거 열심히 본대요."

"그렇겠지."

"근데 형들 아이돌 데뷔하고 나면 막 이상한 거 있는 거 알아요?"

"이상한 게 뭔데?"

"막. 멤버들끼리 사귄다고 하고..."

아. 대충 들어봤더랬다. 인스타 스타였던 원빈은 인터넷에서 정보 찾는 데는 도가 터 있었다. 그리고 방황 끝에 새로운 꿈을 갖게 된 연습생 원빈의 목표는 슈퍼스타였다. 팬분들이 좋아하신다면 그게 무엇이든 사회면에 나오지 않는 한 온 몸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다. 인기의 척도라는 말도 있었기에 더더욱. 굳이 웅변을 하진 않았지만 그런 마음으로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말을 꺼냈던 녀석이 그랬다.

"그런데 성찬이형하고 원빈이형은 둘 다 엄청 잘생겼잖아요."

"하하..."

"데뷔했는데 막 팬들이 둘이 엮고... 우웩. 회사에서 막 은근 시키고. 그러면 참을 수 있어요?"

다들 막 손발을 우그러뜨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웃는데 원빈은 웃을 수가 없었다. 성찬을 보면 살면서 처음 느껴본 여러 감정들이 들었는데 그건 성찬이 살면서 처음 본 수준의 잘생긴 얼굴과 피지컬을 하고 있으니까 하며 생각해오던 시절이었다. 안 웃고 있으면 엄하고 살짝 차가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였는데 살랑살랑 다정한 말씨로 원빈에게 말을 걸고, 저 너머에서 장난을 치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웃는걸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곤 했다.

사춘기 이후로 인기는 늘 많았다. 그런데 제가 누군가를 성찬처럼 이렇게 많이, 자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하면 그게... 처음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천장 위에 둥둥 뜬 성찬의 얼굴을 생각했다가 그만 혹시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이냐 혹시 좋아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던 적이 있었다. 남자를? 그런데 생긴 것만 보면 예쁘게 생겼으니까 사춘기에 뭐. 헷갈릴 수도 있지.

"회사에서 시키면 해야지 어떡해."

반 넘게 진심이었다. 그렇게 대답했는데 생각해보니 귓가에 성찬의 목소리가 들린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이미 비명 한번은 질렀을 텐데. 옆을 봤더니 성찬이 눈이 둥그레져서 입을 막고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으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원래도 흰 얼굴이 유독 더 하얗게 질려 보이기까지 했다. 희한해서 성찬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고개를 든 성찬이 원빈과 눈이 마주치더니 고개를 휙 하고 돌리고는 말했다.

"난... 나는 그런 거 생각 안 해봤는데..."

와 성찬이형 엄청 싫은가 봐요! 녀석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원빈도... 호감과 호기심과 동경을 헷갈린 거라고 생각했다. 제 마음이 어떤 형태이건 무슨 상관이냐. 상대방이 저렇게까지 당황하는데. 바르고 성실한 사람의 다정이 굳이 저를 향한 연애 감정일 필요는 없었다. 그럴 때도 아니었고... 그렇게 이름을 붙이지 못한 감정을 딱지 접듯 꼭꼭 접어서 삼켰다. 그러니까 원빈의 아주 깊은 곳 속에서만 존재해야만 하는 이름 없는 감정이...

그런 날이 있었지. 왜 이런 꿈을 꿨나 싶었는데 서늘하고 큰 손이 제 어깨를 살짝 그러쥔다.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속삭이듯 말한다. 박원빈 일어났어? 밥 먹으러 가자. 연습 가기 전에.

*

그의 옆에서 불렀던 외국어 노랫말이 어떤 의미인 줄 알게 되니 기분이 묘했더랬다. 뭐 원래 대중가요는 반 넘게 다 사랑 노래 아니던가. 그런데 돌고 돌아 그 가사가 현실이 될 줄 열여덟 원빈은 몰랐다. 스물두 살의 원빈을 보고 스물세 살의 성찬이 말한다. 박원빈 생일 축하해. 네에...

갓 열여덟살이 되어 그를 처음 만났는데 다섯 번 생일이 지나갔다. 성찬의 만 나이를 다섯번 따라잡아 봤다는 뜻이다. 한 번도 성찬아, 하고 불러본 적은 없었지만... 신인그룹런칭을 담당하는 신개팀 파일에는 이제 똑같이 만 스물 한살로 나이가 적힌 성찬과 제 프로필 사진이 나란히 붙어있다.

성찬과 같은 팀으로 데뷔할 수 있을까?

가능하지만 어려운 일에서 불가능인 줄 알았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생일이 다섯번이 지나며 이루어진 일이었다. 살다 보니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천 일 동안 세워지고 엎어지고 다시 세워졌던 플랜들이 다시 엎어지고 정예로 데뷔조를 꾸린다고 했다. 1월부터 잠도 거의 안자고 연습에 매진했다. 팀으로. 성찬이 함께하는 팀으로...

금발에 가까운 머리를 한 성찬과 나란히 앉아서 밥을 먹는다. 팀 윤곽이 잡히고 픽스가 얼추 되는 그 시기부터 성찬은 내내 원빈을 끌고 나가서 밥을 먹였다. 처음에는 무슨 연예인이랑 밥 먹는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는데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만 스물한 살이면 이제 어딜가도 성인일 텐데 열아홉 열여덟에 만났더니 이상하게 성찬은 저를 늘 한참 어린 동생처럼 대하고 저는 성찬을 까마득한 선배처럼 대하게 된다. 늘 그랬다.

"3월 시작은 그렇게 설레더라."

생일 축하해. 생일이 좋은 날이네. 하고 웃으며 성찬이 말한다. 3월 1일은 역사적인 날이잖아. 그래서 나는 2일이 진짜 3월 시작인 것 같아. 개학도 그때 하고… 손이 없는 애 대하듯 이것저것 챙겨주는 성찬을 보다가 물었다.

"형은 학교 다닐 때 가끔 생각나요?"

"너무 오래 전인데? 재밌었지. 너는?"

"전 그립진 않아요."

지금이... 좋아요. 하는 원빈의 말에 성찬이 으응. 하고 웃었다. 제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까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가기도 바쁘지 않은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들을 하면서...

그래서 생각했다.

성찬이 저를 돌아봐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내가 열심히 달려서 따라잡으면 된다고.

원빈은 누구보다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가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불가능한 것 같아도 결국 새로운 출발선에 나란히 같이 서게 되지 않았는가. 이렇게.

가자, 연습하러. 하고 웃으며 성찬이 먼저 일어난다. 시야에 넓은 등이 가득 찬다. 익숙하다. 다만 기억보다 다부져진 덩치를 보며 그도 이젠 완전히 소년티를 벗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성찬의 뒷모습을 보면서 몇 년 동안 제 마음을 다잡아왔다. 열심히 달리면 그의 옆에... 눈앞의 성찬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방금 제게 선물이라며 내민 것과 같은 케이스였다. 아, 싶어서 눈을 크게 떴는데 한두걸음 걷던 성찬이 우뚝 서서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뭐해, 얼른 와. 같이 연습 가야지.

성찬이 저를 향해 웃는다. 그 말간 얼굴이 까르르 웃으며 말하는 바람에, 한참 전 아주 깊은 곳에 묻어놨던 감정이 느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로...

성찬의 옆에 서게 되었다.

그의 옆으로 달려가면서 그만 원빈은 깨달았다.

성찬의 옆에 서면 원빈은 늘 열여덟살 소년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

오월이었다. 지난 다섯 달 동안 성찬과 매일 매일 잠만 자는 시간만 빼고 한 공간에 있었다. 둘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 제 눈앞에서 춤을 추고 연습하는 성찬이 홀로그램 뭐 그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팀이 이제 완전히 픽스가 되었다. 본격적인 프로모가 시작된다고 했다. 성찬의 거취와 데뷔팀에 대한 기사가 떴다. 그때 원빈은 '한국인 연습생'이었다. 칠월에는 뮤비 촬영을 위해 미국에 다녀왔다. 후드로 얼굴을 꽁꽁 가리고. 그 몇 달간 제 이름 세글자도 얼굴도 아무것도 뜨지 않았지만 원빈은 자신 있었다.

설렘과 긴장 가득한 날들이었다. 말수가 부쩍 적어진 원빈을 보면 성찬이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고 가곤 했다. 연습실이나 촬영장에서 비하인드 카메라가 돌아갈 때 성찬을 보면 이상하게 긴장하고 마는 원빈을 보면 성찬이 원빈을 조용히 챙기곤 했다. 그 말간한 얼굴을 하고. 그럴 때마다 왼쪽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해지곤 했다.

그렇게 의젓하게 보내더니 뮤비 촬영이 끝난 날 성찬은 소리도 차마 내지 못하고 휴지를 뚝뚝 잡아 뜯으면서 굵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렇게 한참을 아이 같이 울더니 기쁘다고 했다. 너무, 너무 기뻐서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마음인지 가늠이 가서 더 아무 말도 못 건네겠는 제 말주변이 원망스러웠다. 뜻대로 되지 않는 나날들이 청춘에게 주는 무게감을 잘 안다. 그냥...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스물 두살 박원빈은 이제 열여덟살의 교복 입은 소년하고는 달랐으니까. 혹시라도 성찬이, 어쩔 수 없었던 긴 기다림이 자신이 부족해서였다고 자책한다면 그러지 않길 바랐다. 나는 형하고 같은 자리에 서기 위해서 전속력으로 달려왔어요, 형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8월 첫날 자정이 넘어가면서 첫 프로모가 시작되었다. SNS에 처음으로 사진들이 공개되었다. 제 얼굴과 이름이 인터넷을 뒤덮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유튜브에는 첫 퍼포비디오가 업로드 되었다. 모두 모여서 영상을 재생했다. 간간히 성찬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원빈은 그때 처음으로 울컥했다. 전부 이날을 위해서 달려왔구나, 그 시간을... 말 없이 너머의 화면을 보는데 성찬이 묻는다.

울 것 같아?

계속 눈물이 고일 것 같았지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이제 우리는 팀이구나. 이렇게 팀이구나. 계속 함께구나. 언어로 변환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감상이 빠르게 물밀듯이 몰려와서 그냥 입술만 꼭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몫의 성취감이 조용히 파도처럼 원빈을 뒤덮었다. 그리고 저의 내면을 늘 열여덟살 소년으로 만드는 그 사람의 말간한 옆모습을 바라본다. 그가 이렇게 행복감에 젖어서 환호하는 얼굴을 본 적이 있던가. 이제 앞으로 달려온 시간보다 몇 배나 긴 시간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십년 이십년... 우리는 같은 목표를 보고, 나는 그의 옆자리에서...

그리고 잠시 어떤 책임감과 현실의 무게가 원빈을 지긋이 눌러왔다.

이제까지는 둘의 길이 겹쳐진 직선인 줄 알았다.

열심히 따라잡아 달려왔더니 성찬과 저의 길은 이제 나란한 평행선이었다.

나란한 평행선은 겹치지 않는다.

겹칠 수 없었다. 겹치면 안됐다...

열여덟살 소년이 스물 두살 청년이 되는 법은 간단했다. 이제까지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던 감정을 버리기. 애초에 이름 없이 숨겨뒀던 감정이니까 어렵지 않았다.

4. 우린 닮았으니까요: 평행한 두 선 사이에 선을 그으면 엇각과 동위각의 크기는 같다

입사한 이후로 성찬의 이름을 꾸준히 들어왔다. 줄 세우기의 연속인 연습생의 삶. 평가 상위권 이상의 그룹이 존재한다. 쟤가 데뷔 못할 리가 없다 군에 속하는 연습생들이. 남의손가락에장지지는선언하게만드는 연습생들이...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지만. 정성찬이 그랬고 박원빈이 그랬다.

사실 성찬과 저는 얼굴 생긴 것부터 성향에 춤 스타일까지도 정반대라고 생각했는데 (입맛까지도) 오히려 그래서 그런지 신개팀 직원들로부터 얘네 둘이 붙여놓으면 어떨까 재밌지 않을까 하는 말을 가끔 듣곤 했다. 다만 전체적인 그림 대형 시너지와 합 이런 말에는 고려할 요소가 너무 많아서...

그렇지만 원빈이 성찬이랑 똑같은 말을 하네, 하는 말도 꽤 많이 들었다는 거 그게 좀 신기했다. 원빈의 꿈은 슈퍼스타였다. 데뷔 전부터 다짐했던 일이 있었다. 무조건 겸손하게 죽어라 노력할 것. 팀과 무대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할 것. 팬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으로... 이런 것들. 어렵게 찾은 길이고 죽을힘을 다해서 얻어낸 기회였다. 조금 비장해 보이더라도 성실하고 싶었다. 그리고 제 옆에 서 있는 성찬은... 어째 저를 볼 때마다 조금 조심스러워했지만 (그의 눈에 원빈은 여전히 처음 봤던 날 열여덟살 소년이고 자신은 그 새 근육이 두배로 붙은 청년의 몸이라 잘못 건드리면 멤버 팔이라도 부러질까 걱정되나 싶었다. 어제 떨어뜨린 핸드폰처럼...) 그런 원빈을 볼 때마다 한없이 기특해하는 것이다. 고러취이. 이름도 붙여본 적 없는 마음은 이미 삼켜 없앴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손 끝이 간질간질해졌다.

순정만화에 나올 것 같은 얼굴들이라고 둘을 부르는 조합명이 순정즈가 되었다. 남자 얼굴이 어쩜 저렇게 청순하게 생겼냐는 말은 하루에도 백 번 넘게 들었다. 언젠가 인터뷰 질문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는 청순과 독기 중 어떤 것일까요? 하는 질문이 들어왔었다. 독기 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팬분들은 저를 청순으로 불러주시더라구요... 청순 독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독기파를 추구하는데요 팬분들께서는 청순하다고 많이 해주시는데... 둘 다. 딱히 짠 것도 아닌데 그린 듯이 같은 대답을 했다. 타조가기독산을 절대 거꾸로 말하면 안돼 순정즈가 본업을 대하는 자세 봐라 마음가짐도 가치관도 똑 닮았다. 역시 결혼시키자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팬들의 말을 보면 괜히 마음이 작게 울렁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그의 옆에 서게 되었다. 나이 순으로 묶이다 보니 이제 비행기를 타도 늘 옆자리 짝꿍이 되었다. 성찬이 언젠가 소통어플에서 단 리플을 보았다. '제 옆자린 항상 박원비니'... 성찬은 그냥 물리적인 옆자리를 의미했겠지만 원빈의 마음은 또 조용히 술렁이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시작했던 이 길을 달리고 달려 따라잡아서 옆에 섰다는 게 원빈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마 성찬은 모를 것이다. 몰라도 됐다. 몰라야 했다... 그냥 그렇게 같은 꿈을 꾸고 같은 방향을 보고 달릴 수 있다면, 그가 남몰래 힘들어하는 순간이 올 때 옆에 서 있는 제게 의지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성찬이었는데 오히려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원빈이 꾹꾹 삼켜둔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진다면, 그런 욕심을 내고 싶어진다면 그게 가장 큰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나란한 선 사이에 서로 팔을 내어 맞잡아봤을 때 서로가 닮았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런데,

"우리 가운데 공주님은요?"

"진짜 츄르야 츄우르. 이거 원빈이한테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다 너지이. 토끼 고양이 오리 다."

"오... 청순."

"머리가 여주랑 똑같아..."

"이거 고양이 아니에요 고양이?"

"저는 원빈 원빈. 제가 원빈이가 잘생겼잖아요. 글쎄요 원빈이. 원빈이가 또 속이 말랑말랑한 부분이 있잖아요 성격적으로 그래서 그런 부분을 또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친구는 정말 순두부 같은 친구입니다..."

미. 미친 거 아이가. 일 년 가까이 성찬이 자꾸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사람이 순수하니까... 하고 생각했다. 한번은 얼굴이 아주 가깝게 맞닿았다가 서로 식겁하듯 놀라서 후다닥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어깨동무도 잘 못하고 눈도 잘 못 마주치면서 입만 열면 자꾸 사람 심장 떨어지는 말들을 했다. 처음에는 절 보면서 공주 여주 하는 걸 보고 지금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나 싶어서 빤쓰만 입고(벗고?) 그의 방문을 열어젖힌 다음 형. 저 남좌에요. 해야 하나 생각도 했는데... 범죄 같아서 말았다.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이겠지. 물론 자컨에서도 들켰던 그의 플러팅 기술이 초등학교 오학년 수준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딸기 좋아해? 딸기는 너 안좋아해 근데 나는 너 좋아해애) 그런데 그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성찬이면 그게... 상황이 좀 달랐다.

아주 예전에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차라리 이럴 거면 팬서비스용 노림수로 활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한 번 말을 꺼내 볼까 싶기도 했다. 성찬이형, 형은 팀의 성공을 위해선 어디까지 할 수 있어요? 저는 정말 뭐든 할 수 있어요. 정말로. 그러니까 제가 형한테 사심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요. 아주 예전에... 아주 예전에 우리 연습생 때. 새벽에 연습할 때 다른 애들이랑 했던 말 기억나요? 이런... 그런데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그때 성찬의 백지장 같던 얼굴이 생각나서.

생전 처음으로 겪는 연말 무대는 잘 봐둬라 박원빈이 팀의 센터고 정성찬이 팀의 기둥이다 하는 구성이 꽤 많았다. 이를 갈고 준비했던 첫 연말 무대에서 원빈은 객석 앞에서 화려하게 등장하는 무대 도입을 맡았고 성찬은... 클라이맥스에서 날려질 예정이었다. 아니, 사람을 날리려면 타이밍을 맞춰야지 하는 대화를 들으면서 저도 말을 한 번 붙이고 싶었는데 핑계를 찾다가 형, 여기 뭐 묻었어요. 하고 장갑을 벗자 성찬이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뭐 묻은 게 아니라... 원래 눈꺼풀 위랑 콧잔등에 연하게 점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저를 빤히 바라보는 성찬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 성찬의 둥그런 눈과 고분고분 얌전한 눈빛을 보고 원빈은 처음으로... 충동에 휩싸였다. 침착한 척 떨리는 손을 내리며 생각했다.

지금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면 당장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어봤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대형사고를 칠 뻔했다...

이름을 붙이지도 못한 그 감정은 꾹꾹 눌러 삼켜 없애버렸는데. 혹시라도 그게 저만의 생각이고 남들 눈에도 보일 정도로 흘러넘치면 어떡하나. 원빈은 조금 둔해서 성찬이 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런 시선은 신경 쓸 겨를 조차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혹시?

혹시라도...

5. 사실 성찬은 필드를 누빈다: 그의 궤적은 직선일까

아이돌 그룹은 팀 플레이어여야 했다. 운동선수 시절, 몸 잘 쓰는 어린애들이 그랬듯 성찬도 원빈도 여러 종목들을 경험해봤었지만 원빈은 육상선수 출신이었고 성찬은 (나중에 밝히기를 그도 언젠가 육상대회에 나가봤다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축구선수였다. 남들을 제치고 제 한계마저 뛰어넘어야 하는 기록 경기 선수와 모두를 아우르며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하는 팀 플레이어는 그렇게도 달랐다. 팀을 생각하는 마음-패기, 애틋함...-은 같아도 방식이 다를 수 있었다. 새삼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러니까 원빈은 누구보다 폭발적으로 달려 나갈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고, 그게 제가 팀을 이끌고 기여하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늘 원빈보다 한 발짝 앞에, 다른 우주에 살고 있었던 성찬은 원빈과 같은 궤도에 들어오게 되자 이제 다른 멤버들을 둘러보고 둘러보느라...

원빈은 타고난 천성이 심플한 편이었다. 그래서 육상도 참 잘 맞았다. 앞만 보고 달려 나가는 육상을 해서 단련이 그리 된 건지 아님 그냥 타고난 성격이 육상에 잘 맞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미 일어난 일을 되새기고 되새기면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그게 최선이었다. 제 앞에 놓여있는 달려가야 할 트랙이 구만리였으니까... 데뷔 전까지는 데뷔가 테이프 지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데뷔 이후에는 또 새로운 트랙이 끊임없이 놓여있었다. 제가 전속력으로 달리고 숨을 몰아쉬고 다음 트랙을 준비하다 보면... 나란히 서기 전 성찬은 늘 저 앞에 서 있었다. 준비, 자세를 취하고 달리고 달려봐도 닿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터는 그가 원빈의 눈앞에, 서 있었다. 저를 향해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같은 점에서 출발해서 영영 다른 방향으로 멀어지는 걸까 했던 시기도 있었다.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는 건 일단 방향은 같은 것임을 깨달았을 때는 어떤...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단 말이다. 그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그렇게 달리고 달려 성찬에게 형, 저. 저도 여기 있어요. 하며 숨을 몰아쉬고 있으면 성찬이 다가와 어깨를 가만히 두드린다.

남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참 많다. 그들이 성찬을 보며 쟤는 왜 저렇게 오랫동안 서 있기만 해? 다시 뒤로 오고 있는 거야? 라고 하는 말이 들려올 때마다 괜히 마음 한구석이 쿡쿡 아려왔다. 그러니까 그런 건 다 그의 잘못이 아닌데. 그런 생각이 밀려들어 오면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은 원빈마저도 괜히 울컥하곤 했는데, 성찬은 그냥 담담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리고 첫 활동이 마무리되고 곧바로 컴백 활동을 하던 그 시점부터였다. 멈춰있었던 게 아니라 준비운동을 좀 더 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듯이 그가 원빈 못지않게 폭발적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한 것은...

그 때 원빈은 깨달았다. 그러니까,

원빈이 일직선의 트랙을 폭발적으로 달려 나가는 데 익숙했다면,

성찬은 원래 필드를 자유자재로 누비는 사람이었다. 팀과 함께...

제 마음속에 피어나는 여러 감정들을 갈무리 하면서 앞으로 달려 나가다 보면 주변 전체를 둘러보다가, 분명 저 앞에 있었는데 어느샌가 옆으로 다가와 원빈의 등을 두드려주는 성찬이 있다. 너 얼른 저 지점에 서 있어, 하고 말해서 달려 나가면 분명 제 뒤에 있었던 것 같던 성찬이 필드를 가로질러 제 옆에서 달리고 있다. 이상하지, 그렇게 긴 긴 시간을 그의 등을 보며 달려왔는데 이제는 그가 제 등에 손을 얹고 웃고 있었다. 혹시라도 제가 숨을 몰아쉬면서 뛰는 심장 소리가 뜀박질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미소 때문이라는 걸 들킬까 봐 조심스럽게 옆을 보면, 말간 얼굴을 한 그는 또 어느새 저 너머로 가서 전 방향을 구석구석 누비면서 달리고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원빈의 소원은, 지치지도 않는지 숨 한번 몰아쉬는 일 없이 담담한 얼굴을 한 성찬이 어느 날 만약에 지치게 된다면, 그가 저를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그가 숨을 몰아쉬면서 누군가의 품에 쏟아진다면 그게... 그 누군가가 저이길 바랐다... 어느 날 그런 제 마음을 읽었는지 성찬이 말했다. 앞을 보면서 달려 나가서 누구보다 폭발적으로 빛나는 거, 그게 네가 할 일이라고.

*

그래서 이때부터 원빈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달리는 트랙 옆을 향해 손을 뻗으면 닿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자유롭게 달릴 수 있게 된 성찬의 궤적은 변화무쌍했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증명을 해볼까 하는 마음도 불쑥불쑥 들고 말았다.

팀을 돌아보는 성찬은 항상 굳건하다. 성찬의 눈은 다정하다. 그런데 가끔 그 다정한 눈빛이 저를 볼 때 어떤 불안함 같은 게 서릴 때가 있었단 말이다. 처음에는 그게 어떤 결인가 고민을 했었다. 대체 뭘까 알아내기에 겁이 나기도 했고. 그런데... 원빈은 일대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늘 그랬다. 누군가가 저를 향해 호감을 품는 것 그런 거 캐치하는건 일도 아니었다. 겁은 많았지만 공포체험에 던져져도 처녀귀신이 제 앞에서 수줍어하면... 그 순간부터는 원빈이 이긴 게임이었다. 무슨 소리냐면,

첫사랑의 감정을 응급상황에 빗대어...

이상하게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때마다 성찬이 흠칫흠칫 놀라고 마는 것이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설마. 그때 연말 무대를 준비할 때 성찬의 옷깃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 건 원빈이었는데... 성찬이 언제부터인가 건드리기만 하면 펄쩍 뛰며 내외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제가 뭔가 잘못했나 싶었다. 그런데 약간의 여유를 찾고 나니, 그를 좀 더 잘 알게 되니... 어쩐지 그가 호감 있는 상대에게 도무지 어쩔 줄을 모르고 애꿎게 장난만 치는, 어린 남자애처럼 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분홍색으로 의상을 맞춰 입었던 연말 무대에서 성찬은 그랬다. 무대 위에서 웃는 얼굴로 눈이 마주쳤더니 화들짝 놀랐다. 그래서 떨어져 있었더니 갑자기 저벅저벅 걸어와서 제 주변을 맴돌았다. 비하인드 카메라에서는 원빈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새로운 곡 컨셉 포토나 뮤비 촬영을 할 때 가만히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저번에 유튜브에서 그러던데 3초 이상 눈을 빤히 바라보면 상대방이 의식하게 된다고, 뭐 그런 말을 하던가. 그런데 성찬은 시선을 돌리는 대신 눈을 마주쳐왔다. 이 쯤부터 성찬이 제법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아마 저도 모르게 빙긋 웃었던 것 같다. 그런데 큐 싸인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성찬이,

아아아아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영영 나란할 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새롭게 그리는 궤적은 어쩌면 사실 직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제 감이 맞다면... 성찬의 궤적은 방금 원빈의 것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제게 다가오려다가도 유독 멈칫거리는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더라.

6. 트랙이 평면이 아닌 곡면이 되는 순간 평행이 아닌 직선은 한 점에서 만난다

무더웠던 여름 지나 겨울은 오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내게 온 너

처음 본 순간부터 난 알았어 난 언제나 네 손을 잡아줄 거란 걸

귓가에 맴도는 그 멜로디처럼 다 괜찮아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앞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건너 그 어디든 다시 네 곁으로

It's so natural to love you

이제껏 원빈은 제가 달리는 길과 성찬이 앞서나가는 길이 겹쳐진 직선인 줄로만 알았다. 늘 앞에서 달려 나가는 사람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열심히 따라잡아 달려왔더니 옆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보니 같은 목표를 보고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는 나란한 평행선이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지도 좁아지지도 않은 채 영원한 걸까. 그래도 그를 향해 팔을 뻗으면 가끔 그가 닿는다. 남들도 그들이 가끔 닮은 구석이 있다고 말한다.

이제 필드를 누비듯 달리다 저를 향해 달려오는 성찬을 바라보며 원빈은 생각했다.

우리가 완전히 포개진 하나의 점일 수는 없는 걸까? 그렇게 하나일 순 없는 걸까?


*

원빈은 겁이 많았다. 그래도 누군가가 저를 볼 때 호감 이상의 감정을 품을 때 그걸 알아차릴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가까이서 관찰하니 성찬은 정말로 그가 부르는 노랫말처럼 맘을 숨겨두는 짓은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고민을 하다가 마음을 다잡는다. 데뷔가 쉬운 것도 아니었지만 데뷔 이후가 더 어려운 길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해서. 그리고 그 말이... 그 누구보다도 성찬 본인이 늘 팀에게 하는 말이었기에.

성찬은 팀 플레이어였다. 제 감정 같은 건 충분히 눌러둘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길게 달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원빈은 중장거리 육상선수였다. 한번 뛰면 두 시간을 달려야 하는 성찬만큼은 아니어도 원빈에게도 지구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미 지난 시간 내내 제 마음을 눌러두고 삼켜두었었으니까. 지구 반대편에서 성찬을 처음 봤을 때 첫인상을 성찬이 아닌 동생들 앞에서 이야기하면서도 그냥... 편안했다. 당사자는 아마 한참 후에야 알게 되겠지만. 편집이 되면 아마 모를 수도 있겠지만. 아마 잔뜩 당황해서 또 얼굴이 하얗게 질릴지도 모르겠지만. 알럽잇 너와 맞추는 눈이 데뷔곡 가사였는데 입맞춤도 아니고 눈맞춤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는 사람에게 그 정도는... 그래 봐 줄 수 있었다. 원빈은 더 이상 열여덟살 소년이 아니었으니까. 굳이 그의 감정을 증명하려 들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짧게 휴가가 주어졌다. 복귀 마지막 날 성찬이 올린 노래를 듣다가 잠깐 놀랐다. 우선 목소리가 제 음색하고 닮아있어서, 그리고 두 번째는, 가사가...

원빈의 스물 두 번째 생일이 되었다. 그렇게 다시 성찬과 만 나이 동갑이 되었다. 이제는 회사 말고도 밖에서도 만 나이를 정착을 시키네 마네 하면서 이야기하던 찰나라 주변에서 이제 동갑 아니야? 하는 농담이 있었다. 그런데 롤링 페이퍼에 제가 성찬에게 적었던 내용이 한 줄 한 줄 대구로 답장 되어 있는 것 같은 성찬의 편지를 보고 원빈은 조금 웃었다. 성찬이 너무나도 형처럼 굴고 있어서.

*

연초 활동까지 끝내고 짧은 휴가를 보내고 나니 잡힌 올 한 해 플랜은 아주 빡빡했다. 이제는 신인 티를 벗으며 라이징 그룹으로 입지를 굳히는 플랜이라고 했다. 사월이 오면 싱글 곡으로 선활동을 시작하고 오월에 국내 공연으로 투어를 시작한다. 유월에는 타이틀곡과 미니앨범을 발매한다. 여름에는 일본 싱글 프로모션 겸 일본에서 한 달 동안 홀 투어를 진행한다. 마지막 피날레는 구월 한국 공연으로 마무리하고 이후 기타 공연과 연말 행사들로 마무리.

무대 경험은 많을수록 좋다고 했다. 많이 늘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매일 매일이 실전이고 경험이고... 달리는 데는 익숙했다. 오히려 조금 설레기까지 했다. 매우 고되겠지만... 플랜의 피날레 공연 첫날이 성찬의 생일이었다.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을 보니 괜히 저도 웃음이 나와 웃었다.

그래서 원빈은 정말이지 괜찮았다. 그냥 이대로도 괜찮았다. 그런데...

*

곡이 나와서 프로모션 활동과 행사를 하는 것과 공연을 하는 것은 또 천지 차이의 일이었다. 5월은 설레는 달이었다. 작년에는 첫 프로모를 시작했고 올해는 처음으로 단독공연을 해보게 되었다. 다만 첫날 공연을 하고 다들 느낀 점이 많았다. 많은 게 중요하다고 하지만 결국 아이돌은 무대고 공연이다. 가뜩이나 안무 난이도가 높은 곡들이다. 여기에 라이브를 하고 여러 곡을 연속으로 공연해내는 게 최종 목표니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은 정규 콘서트가 아니라 팬 콘서트였다는 것이다. 조금 더 캐주얼한. 그래서 게임 코너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이번에도 첫인상을 말해달라는 질문이 들어왔다. 사실 파리에서 멤버들과 첫인상을 이야기했던 이후로 자컨에서도 한 번 언급이 있었다. 당사자 앞에서 이야기하게 되니 일부러 조금 덤덤하게 이야기했는데... 여전히 말간 얼굴을 한 성찬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아직도 확실하게 기억나는데... 원빈이는 그때도 스페셜했어. 교복을 입고 있었거든 원빈이가? 친히 소개시켜주셨는데... 그때부터 뭔가 스페셜한 게 있었지.

첫만남 첫인상을 기억하는 건 저 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찬은 이미 그때부터 반 연예인이었으니까. 그날도 괜히 간질간질해서 머쓱해했는데, 그게 성찬 나름대로 담담하게 말한 표현이었나보다. 그러고 보면 성찬은 늘 웃으며 그랬다. 원빈이는 특별하지. 성찬에게도 특별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욕심을 애써 누르고, 다시 누르고. 그런데 그 수많은 관중들을 앞에 세워놓고 성찬은 제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또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빈. 원빈이... 원빈이는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처음에 왔을 때부터 너무 잘생겼어요. 너무 잘생겼었어서... 아직도 그 기억이 남습니다. 교복을 입고... 되게 모든 여학생들이 좋아했을 법한 모습을 하고 왔어서 아 얘 학교에서 되게 인기 많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지금 본인이 하는 말이 제게는 거의 고백처럼 들린다고 하면 그는 무슨 말을 할까 원빈은 잠시 고민했다.

*

형. 아무리 생각해도 형이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치만! 놀라지 마세요 (오른손으로 엄지척) 저도 형을 좋아하니까요 (왼손으로 엄지척)하고 아니야 아닌데 무슨 소리니 하는 팀 멤버를 거짓말하지 마세요 솔직해져요 하고 짤짤 흔들고 나면 그 이후의 불상사는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 걸까. 가뜩이나 연초에도 사람들은 혹시 성찬과 원빈이 싸우기라도 한 거 아니냐 하는 말들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제발 좀 조용히 하십쇼 저 형이 저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저도 형을 좋아한단 말이에요 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자꾸 형이 저 좋아하는 거라고 우기고 있으니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만 열일곱살이 되기 직전에 그를 만났다. 만 스물 한살에 같이 데뷔를 했다. 이제는 나란히 만 스물 두살이었다. 원빈은 이 긴 긴 기간 동안 어떻게든 제 마음을 누르고 눌러오며 보내왔으니까. 사실 이대로도 나쁘진 않았다. 봄에 그렇게 혼자 내외하던 성찬은 그래도 활동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는지 좀 더 편안해 보였다.

그런데 이제 팬콘 투어에 홀 투어까지 돌다 보니까 음방 활동이나 행사와는 다른 일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말았다. 게임이나 벌칙 이런 것들. 어느 새벽에 어떤 녀석이 했던 질문이 생각났다. 형들은, 데뷔했는데 팬들이 막 엮고 회사가 시키면 참을 수 있어요?

그 때 연습생 원빈의 대답에 아이돌 원빈은 한 줄을 더 추가하게 되었다.

팬분들이 원하신다면 해야지.

사실 원빈은 그게 누구여도 그냥 제 숙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려고 했다. 인기의 척도라면 그래 원래 왕관의 무게는... 그런데 공연에서 바로바로 오는 피드백 같은 함성, 그게 어마무시했다. 귀가 있고 눈이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성찬이 제게 기대거나 손을 갖다 대기만 하면 환호성이 갑자기 두 배가 되었다. 빼빼로 과자를 꺼내기만 해도 (빼빼로 게임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만 난리가 났다. 사실 이런 기세라면 뭐 키스 퍼포먼스라도 해야 하나 싶었는데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성찬은 원빈의 뒤통수에 토끼 귀 만들어 갖다 대기 혹은 어깨동무하고 턱을 톡 건드렸다가 제가 더 수줍어하기 이게 최대치인 것처럼 구는 것이다. 그래도 어쩌다 보니 성찬과 어찌저찌 하트를 만들고 있었다. 정작 성찬에게는 형 좋아해요 말도 형 저 좋아하나요 말 한번을 못 해봤지만 그렇게 팬들 앞에서는 뚝딱거리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이제 파이널 앙콘만을 남겨뒀던 때였다. 연습 또 연습을 하다가 잠을 자고, 운동을 하고. 밥을 먹고... 그래도 그 바쁜 일정동안 발전시켜온 동지애가 끈끈해서. 게임이나 코너 구성은 대애충 대본이 나온다. 디테일은 현장에서 정해지기도 하겠지만 너무 터무니없는 게 나오진 않았다. 대충 각오를 다짐하고 있었다. 이제 주변에서도 성찬과 원빈을 놀리느라... 그래도 뭐 뽀뽀할 일은 없겠지 그런 생각을.

그런데 사고는 항상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난다. 예를 들자면 늦은 밤 연습 끝나고 둘이 밥 먹으러 갈까 하는 그 길. 멤버들은 피곤하다며 먼저 숙소로 들어가고 불이 다 꺼진 연습실에 둘만 남아있었다. 형 그런데요. 으응. 뭐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정리를 하다가 그만 몸이 정면으로 부딪혀서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뭐 몇 번 이렇게 얼굴이 가까이 닿은 적이 있었지.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이는데, 성찬이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그래서 성찬을 나란히 마주 보았다. 그런데,

어어.

방금 입술에...

사태 파악을 하느라 5초 정도 멀뚱멀뚱해있었다.

와우.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아니 이건 키스도 아니지 않나. 이거는... 이거는 뽀뽀뽀잖아.

곧 쿵쾅거리면서 도망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분명 고개를 숙여서 입을 맞춘 것은 본인이면서 갑자기 눈이 둥그레져서는 또 언젠가 들어봤던 것 같은 고라니 소리를 냅다 지르더니 도망가는 것이다. 저... 저 사람 잡아.

*

생일은 반년 차이. 원빈이 만 열일곱이 되기 직전에 처음 만났다. 조금 있으면 성찬은 만 스물 세 살이 된다. 그 긴 기간 동안 원빈은 제가 느끼는 감정을 겨우겨우 받아들이고, 숨겨왔는데. 성찬을 따라잡으려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돌고 돌아와 성찬의 옆에 서게 되고는 그냥... 팔을 뻗으면 싱긋 웃는 그가 옆에 있다는 것, 남들이 보기에 둘의 마음가짐이 닮아 있다는 것 그것 만으로도 좋았다. 그리고 저와 한 팀으로 붙어있게 되자 갑자기 이상하게 구는 성찬도... 그냥 좋았다. 그렇게 어설프게 어쩔 줄 모르면서도 무조건 팀이 우선이니까, 팀 때문에 제 마음을 다잡으려는 것 같아서, 그런 면도 이해가 가서, 저와 닮아 있어서 그래서 좋았다. 그런데 이렇게 도둑 같은, 키스도 아니고 그냥 뽀뽀뽀라고. 겨우 그거 가지고 지금 저렇게 도망간다고!

"형! 성찬이 형!"

"엄마야아아!"

"형네 엄, 어머니는 콘서트 오신다면서요! 거기 서 봐요 쫌!"

복도를 달리고 달려서 성찬을 잡았다. 그러니까 일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계속해온 것이 성찬 옆에 서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는데. 다만 사이렌 2절 댄스 브레이크를 몇 달 내내 도맡아서 춘, 고산지대에서도 제일 지치지 않고 공연한 축구선수 출신 남자의 체력을 이기기가 조금 힘들었다. 팔을 낚아채고 쓰러지듯 주저앉으니 또 성찬이 놀라서 너 넘어졌어? 하고 물었다. 아이고 공연 전에... 공연 전에 다치면 안되는 데에. 하고 엄살을 부렸더니 성찬이 또 놀라서 주저앉으며 다쳤어? 하고 물었다. 이때다 싶어서 다시 불 꺼진 연습실 안으로 성찬을 밀어 넣었다. 카메라의 사각지대로 몸이 포개지듯 쓰러졌다. 제 몸무게가 성찬보다 한참 덜 나간다는 것이 조금 분했다. 마음만 먹으면 성찬은 또 도망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다치면 안되는 데에 소리를 들은 성찬이 또 얌전해져 있어서. 숨을 몰아쉬다가 얘기했다.

"왜... 왜 도망가지. 아... 쿵쾅맨."

"도망간 거 아닌데. 나는 놀라서."

"도망갔잖아. 형, 저한테. 방금 왜 저한테 뽀뽀했어요?"

"..."


성찬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았다. 잠시 고민했다. 괜한 일인가. 앞으로 얼굴을 어떻게 보지, 근데 뭐 못 볼 것 있나.

"말 못해요?"

"...나는."

"말 못해도... 괜찮아요. 실수여도 괜찮아요. 뭐 닳는 것도 아니고."

"닳지. 원빈아. 뽀뽀하면 닳아."


성찬도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았다. 어둑한 연습실에 적응이 되니 그 잘생긴 얼굴이 어슴푸레 보인다. 원빈과 엮이는 것 조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던 소년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 큰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 길게만 이어왔던 평행선을 갑자기 우뚝 멈춰버린 사람이. 그 갸름한 턱을 손으로 한 번 쓸어보는데 성찬이 얌전했다.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러니까 원빈은 진작부터 그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작년 연말 무대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아니 훨씬 예전부터. 그냥 가볍게 입술을 맞대는 그런 뽀뽀 말고...

입술을 몇 번 꾹꾹 누르듯이 맞댔다. 솔직히 이제까지 타이밍이라면 은근 많았다. 혹은 앙콘 이후에 감정이 막... 뭔가 이뤄냈다는 마음으로 고백을 주고 받을 수도 있었겠다. 그런데 정말 아무 것도 아닌 타이밍에 갑자기 쪽 하고 도망간 사람이라 그런지 고집스럽게도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봐요 팬들이 원한다면 저는 형이랑 이 정도까지도 할 수 있어요. 물론 앞에서 뽀뽀하면 다들 기절하겠지만 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다고요 이런 말을 하려고 했다. 이상하게 화가 치밀어 올라서 이제 그만 하려고 했는데, 원빈의 목에 크고 서늘한 손이 와닿더니 저를 당겼다. 고개를 숙인 성찬이 입술을 열더니...

불 다 꺼진 연습실. 정성찬. 알게 된 지 5년 반 만에, 진짜 예상하지도 못한 타이밍에 제게 입 맞추고 도망가놓고는 붙잡히니까 다시 무아지경으로 혀를 섞어오는 정성찬. 지극히 일상적인 요소들이 가장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잠깐씩 젖은 치찰음이 들릴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땀이 식은 몸에 다시 자꾸 열기가 돌아서. 크고 길다란 손가락이 제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으니 자꾸 몽롱해진다. 작게 앓는 소리를 냈더니 그가 원빈을 더욱 다급하게 몰아붙였다. 누가 오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반 그냥 이 어이없는 키스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반. 사실 막 엄청나게 로맨틱하거나 느릿느릿하거나 그런 키스는 못됐다. 마음만 급해서 어떻게든 이겨보려는 팔씨름 같은 그런 멋없는 키스였다고 생각했다. 이기고 질 건 없었는데 하여튼 그랬다. 그래 놓고 성찬의 감은 눈에선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게 정성찬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일 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이상하게 또 화가 났다.

"봐요. 안 닳네."

"..."

"형은 남들이 우리로... 그러는 상상도 한 번도 안해봤어서 많이 놀랐나 봐요."

"남들이?"

"뭐 어차피 앞으로 콘서트 하고 그러면요. 이런 비슷한 게임도 하고 그러지 않겠어요. 화보도 찍었잖아요 우리. 수요 많대요. 형이... 형이 어색해해도 앞으로 엮일 일 많을 것 같은데. 팀 인기 위해서라면 저는 다할 수 있어요. 이런 것까지."

"원빈아. 시켜도 척을 시키지 세상에 남들 앞에서 이렇게 뽀뽀를 하라고 하진 않겠지."

"아니. 이거는. 뽀뽀가 아니지. 키스. 키스지. 지금 혀가. 형이. 혀를."

"박원빈. 원빈아. 화났어?"

"왜 화가 나요? 어차피 조만간 말하려고 했어요. 우리 팀을 위해서 이런 것도 대비하자고. 할 거면 제대로 하자고."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성찬이 조금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둑어둑한 와중에도 귀가 꼭 터질 것처럼 붉었다.

"남들 말고. 너는 어땠는데?"

"갑자기 이렇게 뜬금없이 뽀뽀하고 도망간 형이요? 아님 이러고 갑자기 박치기처럼 한 뽀뽀요? 뽀뽀면 팀 인기를 위해서라면 저는 백번도 할 수 있어요. 안 닳는다니까요."

"안 닳으면 뭐, 또 할래?"

"백번도 한다니까요. 예 해요. 합시다."

왜 이상하게 성찬에게 화를 내는지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성찬의 옆에 서고 싶어서 제 마음은 그렇게 꾹꾹 눌러왔다. 그렇게 옆에 서기까지, 한 팀이 되기까지 수년이란 시간과 기적이 더해졌는데... 욕심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몇 년 만에 다시 만나 저를 대하는 성찬이 예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성찬이 제게 품은 마음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아직, 어쩌면 영원히 그럴 수 없는 걸 알아서, 그래서 나는... 그런데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갑자기... 갑자기 이래서 미안해. 놀랐구나. 그런데 나는 예전부터 이러고 싶었어."

"언제부터요? 그러니까 왜요?"

"아주 옛날부터... 아주 아주 옛날부터. 그런데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래서 계속 참았는데."

"왜. 퍼포먼스라고 하던데 퍼포먼스. 비즈니스 퍼포먼스."

"그리고 나는... 그거 싫어. 비... 그런 거... 그래 할 수는 있어. 그런데 그런 거 때문에 너랑 이러고 싶지 않아."

"형. 세상이 원한다니까요. 세상이."

성찬이 잠시 말없이 원빈을 바라보더니 원빈의 손을 꽉 잡고는 말을 이었다.

"너... 너는 진짜 바보야. 나는. 나는 원빈이 네가 나랑 뽀뽀한다면 팀을 위해서가 아니라 네가 나를... 그니까 너도 나를..."

말을 나긋나긋 잇던 성찬이 잠시 멈췄다. 그의 둥글고 다정한 눈에 두려움이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눈빛이었다. 처음 봤던 열아홉 성찬의 눈빛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저는 다시 열여덟살 아무것도 모르는, 마음을 주체 못하고 어쩔 줄 모르는 그 바보로 돌아가는 건가. 원빈이 이제까지 수년간 제 감정에 차마 붙이지 못했던 그 단어를, 원빈의 손을 제 손에 꽉 겹쳐 잡은 채. 숨을 고른 성찬이 작게 속삭였다.


"...박원빈 네가... 너도... 나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였으면 좋겠어."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처럼.

*

그 말을 듣자마자 어쩐지 화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바람에. 그러니까. 형이. 형이 저를 좋아한다고요. 그래.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요? 콘서트도 안 끝났는데 이렇게? 아니 그게 오늘 네가... 내 첫사랑처럼 하고 있어가지고. 뭐야 또 이상한 소리하네 그게 누군데. 형 저 또 화날 것 같은데... 어... 들어봐봐 그 울산에서 올라와서 직원분이 스페셜하게 소개시켜주셨던 남자애가 하나 있거든. 박원빈이라고... 교복 입고 머리가 짧았는데... 내가... 내가 첫 눈에 반해가지고. 그때부터요?

그래서 저보다 반년 나이가 많은 성찬의 만 스물세 살 생일 축하는 삼천명의 팬분들 앞에서 샤라웃하게 되었다.

성찬아 생일 축하한다!

*


온갖 이벤트가 가득했던(양가 부모님 다 모셔놓고 볼도 맞대봤다) 콘서트가 끝나고 나서도 실감을 못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그럼 우리 사귀는 거냐는 말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지금 저 사슴눈한 거구의 남자에게 사기당한 거냐는 생각이 들 때 쯤 성찬이 너 그런데 아직 대답 안 해준 거 아니? 하고 물었다. 제가 말을 안 했어요? 하자 괜찮아 안 해도 돼. 하고 대답했다. 그럼 형 계획은 뭐였는데요? 그냥 이대로 계속 사는 거? 어어... 박원빈이 나보고 10년 20년 함께 하자고 그래가지고... 우와... 엄청 남사스럽네요... 하고 말았던 원빈이 대답을 하게 된 날은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성찬과 함께 걷는 길이 평탄한 트랙이 아니라 곡면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던 어느 날. 자기 전에 보는 유튜브에서 그랬다. 평면에서는 평행선이더라도 평면을 구부리게 되면 소실점에서 만날 수 있게 된댔나. 무슨 말인지 반 정도는 못 알아들었는데 애초에 성찬은 필드를 누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괜찮다.

아.

성찬의 손이 뜨겁게 맞닿아왔다. 손깍지를 껴오는 그 순간에도 그는 앞을 보고 있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둘만 있을 때 마주 보면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원빈은 그 순간 깨달았다. 이제 그와 굳게 맞잡은 손은 이제껏 그 긴 긴 평행의 온점이라는 것을.

이제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

q.e.d. (평행선 정리의 증명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