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ART VIDEO AFTER

빈자의 바람은 이루어진다
by. eeing

의식이란 것은 어느 순간부터 생겨났다. 정확한 시점도 알 수 없이 아주 은은히. 그건 그런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갉아먹던 건초의 품평을 속으로 읊조리는 것. 아무리 동족이어도 납득할 수 없는 희한한 반응을 해대는 것. 원래는 먹고 싶은 걸 먹고, 배부르면 그만 먹고, 포식자가 쫓아오면 무서워서 도망치기만 했다. 본능이자 다리 네 개 달린 짐승이라면 당연하다. 그렇게 어느 날은 본능을 따라 굴을 파다가 내가 이걸 왜 파고 있지 싶었다. 음... 그냥 파고 싶어서, 파야 할 것 같아서 파는 건데. 이유는 모르겠고 그 안에 얌전히 앉아서 자면 아늑했다.


또 어떤 날은 갑자기 다른 놈들이 멍청한 인형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온몸에 난 털과 처진 귀가 영락없이 저와 똑같은데도 그렇게 보였다. 발정 난 암컷이 제 뒤를 졸졸 따르면 무서워서 겁먹고 도망쳤다. 도저히 번식욕이라는 게 들질 않는다. 나는 토낀데. 그리고 쟤도 토낀데. 왜지? 결국 희한한 짓만 반복하다 왕따 당하고 무리에서 쫓겨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하루종일 새끼 까는 놈들이 은근 힘은 세서 저를 뒷발로 후려팼다. 골골거리다 배가 고파서 산 밑으로 내려왔다. 입맛이 까다로워져서 나무껍질 같은 건 더 이상 못 먹겠다. 산 앞에 누가 정성스럽게 키운 텃밭을 후볐다. 반쯤 판 흙에서 당근이 머리를 내민다. 어차피 무거워서 뽑아 들고 가지도 못하니 그 자리에서 갉아먹었다. 맛있어. 맛있다. 저도 모르게 맛있는 게 너무 많아서 이것저것 조금씩 갉아먹고 다녔다. 그러다 배가 너무 불러서 멈춰 섰다. 산 못 올라가겠어... 이젠 또 졸려서 미치겠다. 여기서 굴 파고 잠들 수도 없고 멧돼지나 삵을 마주칠지도 모르는데. 조금만 잘까? 배가 꺼질 때까지만 말이야. 이 이상하게 생겨먹은 사고방식과 짐승의 본능은 안 좋은 상성이었다. 멀쩡한 토끼라면 이 상황에 편안하게 발 뻗고 못 잔다. 먹이사슬 저 아래 있는 주제에 내가 왜 이렇게 구냔 말이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배부르고 졸리니 잠들어 버렸다.




빈자의 바람은 이루어진다

w. eeing




...


얜가봐.


얘가 당근 다 파먹었나봐요 할머니.


뭐지. 귓구멍에 찬 바람이 술술 들어온다. 마치 열린 것처럼. 토끼는 눈을 떴다. 그리곤 깜짝 놀라서 마구 몸부림쳤다. 무서워서 허덕거릴수록 귀는 더 세게 잡혔다. 아파, 아파. 웬 인간이 제 귀를 한 손에 붙잡고 허공에 들고 있었다. 나, 나 죽나봐. 저번에 어떤 놈이 산 밑에 내려갔다가 인간한테 붙잡혀서 그대로 토끼 고기 됐다는 소식을 분명히 들었는데 배가 고파서 겁을 상실했다. 인간이 저를 높이 들어 올리더니 눈앞에 갖다 댔다. 너무 높아서 무서웠다.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안 나와서 앞발만 어푸어푸 저었다. 살려주세요. 삑삑거리는 토끼 울음소리만 난다. 내가 들어도 시끄러워서 죽이고 싶을 것 같아.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성찬은 허리에 손을 얹고 저 멀리 이어진 밭을 허망하게 응시했다. 박 씨 할머니는 연세도 꽤 지긋하신 걸로 아는데 이걸 다 어떻게 관리하시는 걸까. 공휴일이었던 금요일부터 토요일, 그리고 오늘인 일요일까지 하루종일 돌쇠처럼 살았다. 조부모는 성찬이 고등학생쯤 됐을 때 경기도 외곽으로 이사하더니 깡시골 마을에서 많은 이웃을 만들어버렸다. 그 덕에 할머니 밭 하나 도우러 왔다가 이곳저곳을 순회 돌듯이 다녀야 했다. 잡초를 두 시간이나 뽑았는데도 아직 한참 남았다. 근데 다음 주에 비 오면 또 자란다고요? 잡초 이놈들 진짜 징하네요. 그래도 뽑아야 해, 허리까지 자라버리면 얼마나 뽑기 힘든데. 성찬은 그 말을 들으며 시원한 믹스커피나 한 잔 들이켰다. 면장갑 안으로 열기가 가득하다. 밭 한구석엔 두 시간 동안 뽑은 잡초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한 고랑 한 고랑 돌다가 당근 구역까지 왔다. 저기는 고추, 가지, 토마토. 여기는 당근. 안 키우는 게 없으시다. 집 갈 때 좀 챙겨주신다는데 혼자 살며 야채를 그만큼 먹을 자신이 없다. 해지기 전에 마무리해야 하니 얼른 허리를 숙였다. 성찬은 집중하며 먹을 수 있는 풀떼기 옆 좀비 같은 잡초만 골라내는 데에 몰입했다. 그런데 하다 보니 좀 이상한 것이다. 당근은 원래 이렇게 머리를 다 내밀고 자라나? 흙 안에서 자라는 거 아닌가. 주황색 과채 부분이 죄다 보였다. 게다가 좀 파먹은 자국 같은 게 있다. 성찬은 저 멀리서 잡초를 뽑고 있는 박 씨 할머니께 소리쳐 그 사실을 알렸다. 할머니, 여기 당근이 좀 이상한데요! 할머니의 목소리는 너무 커서 구시렁대는 투여도 여기까지 다 들렸다. 아유, 그거 또 두더지 새끼들이 다 파놨나보다. 성찬은 잠시 두더지도 당근을 먹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먹나보지 뭐.


범인은 곧 찾을 수 있었다. 풀밭 사이에 엎드린 토끼는 쿨쿨 자고 있었다. 얼마나 먹어댔는지 입가에 털이 주황색으로 노랗게 물들었다. 쿡쿡 찔러도 깨지 않았다. 이건 꾸벅꾸벅 조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숙면을 취하고 계신다. 생긴 게 귀엽네. 성찬은 왼손에 꼈던 장갑을 벗고 조심조심 손을 옮겼다. 와, 그림책에서 보던 토끼 같아. 축 처진 귀가 보드라웠다. 성찬은 살금살금 두 짝을 모아서 손으로 쥐고 들었다. 작고 가벼워서 아기 토끼인 것 같다. 너무 귀여워서 할머니께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얜가봐. 얘가 당근 다 파먹었나봐요 할머니!


“밭에서 세상모르고 자는 토끼는 처음 보네.”


“귀엽다.”


토끼는 앞발을 상냥하게 모았다. 인간이 저를 귀엽다고 하자마자 나름의 생존 계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귀엽다는 말을 어떻게 알지. 하여간 얌전히 눈을 뜨고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살려줘. 제발 살려줘. 인형처럼 인간 손에 잡혀 대롱대롱 매달렸다. 곧 저 멀리서 할머니라는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저를 보고선 윽박지른다. 토끼네. 이놈 새끼 밭에 있는 거 다 갉아먹고. 때리는 시늉을 하자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인간은 품에 저를 껴안더니 귀를 놓았다. 이제 좀 편안했지만 머릿속으로는 언제 도망칠까 고민했다. 조, 조금만 있다가. 조금만 안겨 있다가...


“잡아 놨다가 장에 내다 팔까.”

“그건 너무 불쌍한데...”

“배 터지게 먹은 놈이 뭐가 불쌍해, 쯧.”

“제가 데려가면 안 돼요?”

“그거 키워서 뭐 하게.”

“귀엽잖아요.”

“너 알아서 해라. 어차피 아파트에서는 얼마 키우지도 못해.”


지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한다. 이 인간은 저를 키우고 싶나보다.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요즘따라 몸이 둔해져서 온산을 깡충깡충 뛰어다녀야 하는 게 귀찮았다. 품위 없게 배고파하며 텃밭 터는 것도 무서워서 안 하고 싶다. 땅굴에서만 살면 이러다 굶어 죽을지도 모르니 돌아다녀야 했는데 인간이랑 같이 살면 먹을 것도 다 준다는 거였다. 그냥 도망칠 의지를 접고 편하게 안겼다. 마음이 바뀌었다. 살려주세요 말고 키워주세요.


성찬은 토끼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갑자기 왜 이렇게 얌전하지? 사실 키우는 건 좀 오반가 싶어서 키 큰 박스 안에 담아두고 도망가든 말든 신경도 안 썼다. 작업을 다 끝내고 왔더니 그때까지도 토끼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오히려 눈이 초롱초롱한 게 이거 꼭 키워 달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기하네. 귀엽네? 머리를 톡톡 쓰다듬자 코를 움찔움찔거리며 성찬의 손 냄새를 맡았다. 지금 흙냄새 엄청 나는데. 다 컸는데 초등학생처럼 동물이란 걸 키워보고 싶어졌다. 성찬이 할머니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옷을 갈아입을 동안에도 토끼는 여전히 얌전했다. 고개만 갸웃갸웃. 사람 같애.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 운명처럼 토끼를 실을 수밖에 없었다. 토끼는 당근을 좋아하니까 박 씨네 할머니께 당근을 많이 챙겨달라고 했다. 얘가 파먹은 당근부터 실한 당근까지 죄다 트렁크로 들어갔다.


토끼는 박스에 앞발을 얹고 창밖을 쳐다봤다. 나름 평생을 살아왔던 산들이 멀어진다. 놔두고 온 게 없어 아쉽진 않았다. 거기다 대고 그냥 인사나 했다. 잘 있어라, 난 이제 팔자 핀 토끼 할 거니까. 바보 같은 번식 중독 토끼들도 안녕.




차 뒷자석에 싣더니 한참을 달렸다. 또 꿈뻑꿈뻑 졸았다. 정신 차렸더니 박스가 흔들흔들거렸다. 위를 올려다보자 인간이 박스를 들고 걸어가는 중이었다. 도착했나봐. 훌쩍 뛰면 바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럴 의지 따위 없다. 아파트라는 게 이런 건가보다. 산골짝에서만 보던 집들이랑은 생김새가 달랐다. 이게 집이야? 집이 엄청 크다. 안타깝게도 이 큰 집의 모든 공간이 다 이 인간의 것은 아니었다. 현관문을 닫았더니 밖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자그맣고 귀여운 수준이었다. 이게 뭐야. 산보다 좁아. 그래도 이제 당근 배 터지게 먹고 훨훨 나는 토끼 인생이 될 테니 감수할 수 있었다. 토끼굴보다는 크네 뭐.


제 보금자리는 집에서 가장 커다란 공간의 구석에 놓였다. 기분이 좋았다. 인간은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더니 당근을 작게 잘라서 제 앞발에 쥐여줬다. 고작 그거 하나 씹어 먹었을 뿐인데 귀엽다고 난리다. 활짝 웃고 주먹을 꽉 쥐며 부들거렸다. 나한테 완전 빠졌구만. 내가 그렇게 귀엽나. 우쭐해선 당근을 더 열심히 씹었다. 그러다가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폴짝 뛰어서 박스를 넘었다. 그랬더니 인간은 깜짝 놀라선 다시 저를 그 안에 집어넣었다.


“어, 안 돼요. 나오면 안 돼요.”


빨리 집 사야겠다 어쩌고 중얼거린다. ... 나 여기서 나가면 안 돼? 집이 이렇게나 넓은데... 다시 나갈 때마다 또다시 잡혀선 박스 안에 갇혔다. 몇 번 반복되니 힘이 빠져서 그냥 얌전히 앉았다. 좁은 박스가 짜증 나서 뒷발로 퍽퍽 찼더니 구멍이 뚫렸다. 몇 개 더 뚫었더니 풀어주는 게 아니라 박스를 갈아줬다. 진짜 지쳐서 드러누웠다.


밤이 되자 인간은 방에 들어가더니 안 나왔다. 이 큰 곳을 놔두고 왜 저기서 잠을 자지. 굴 모양으로 말아 놓은 담요 사이에서 나왔다. 박스를 뛰어넘었는데 착지를 잘못해서 미끄러졌다. 여기는 바다, 바닥이 엄청 미끄럽네. 풀도 없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구경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갑자기 좀 무서웠다. 방문을 계속 문질렀더니 인간은 문을 열고 나왔다. 무섭냐며 꼬옥 안아주더니 다시 박스 안에 넣어놓고 들어가버렸다. 화가 나서 삑삑 울었다. 그래도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은 아침 댓바람부터 나가더니 하루종일 안 보였다. 당근만 차곡차곡 쌓아 두고선. 그걸 조금씩 갉아먹으며 지루하게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온다. 저도 좀 짐승처럼 먹고 자고 싸고 심심함 없이 살고 싶은데 그게 안 됐다. 이거 학대야. 난 똑똑한 토끼라서 생각할 줄 안다고. 이리저리 뛰다가 소파 위에 올라가서 뭔가 밟았다. 벽에 달려 있던 까만 물체는 갑자기 색깔이 변했다. 네모 안에서 사람이 자꾸 튀어나온다. 뭐지. 다가가서 만졌더니 사람이 아니라 딱딱한 벽 같았다. 여기서 어떻게 사람이 나오지? 소파 위에 기다란 걸 계속 밟았다. 그랬더니 여자도 나오고 남자도 나오고, 어디서는 동물도 나왔다가. 심지어 엄청 무서운 호랑이나 매 같은 것도 나왔다. 너무 무서워서 소파 밑에 숨었다. 고라니가 나오는 순간에 튀어나가서 다시 꾹꾹 누르자 동물이 없어졌다. 이거 신기해. 이거 누르면 호랑이 없어진다.


인간은 해가 지고 나서 돌아왔다. 손에 뭔가 바리바리 싸 들고서. 들어오자마자 그 길쭉한 물건을 들고 꾹 눌렀다. 그랬더니 다시 처음의 까만색으로 돌아왔다. 전부 다 없어졌다. 나 보고 있었는데. 저 인간들 둘이서 머리털 잡고 싸우는 거 재밌었는데... 성찬은 혼자 사는 집안이 시끌벅적한 게 어색했다. 물론 이제 혼자는 아니지만. 집에 들어왔더니 티비가 혼자 켜져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리모컨을 들어 껐다.


“티비를 안 끄고 나갔었나.”


그러다가 소파에 멀뚱히 자리 잡은 토끼를 발견했다. 누가 주워왔는지 참 귀엽네 정말. 박스에서 나오면 안 된다고 했는데도 계속 나온다. 아무래도 박스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다행히 오늘은 주문해놓은 케이지가 배송됐다. 조립식인데 간단해서 금방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토끼가 티비를 켰을 리는 없지만 성찬은 그저 장난으로 말을 뱉었다.


“네가 켰어? 나오면 안 된다니까. 안 그래도 오늘 오빠가 집 사왔지요. 조금만 기다려봐.”


토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집이 있는데 집을 또 샀단 말인가? 굴이야 여러 개 파놓으면 좋긴 하다만. 성찬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스스로 의문을 표했다. 오빠가 맞나. 얘 여자야 남자야?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폰을 들어 검색했다. 토끼 암수 구분법. 열심히 찾아본 후에 토끼를 손에 잡고 뒤집었다. 꼬리 위의 털뭉치 주변을 살피다보니 아이고, 누가 봐도 남자애다. 토끼는 그 행동에 당혹스러움을 견딜 수 없었다. 인간이 손에 뭘 들고 한참 동안 유심히 쳐다보더니 제 몸을 붙잡고 막 마음대로 뒤집었다. 아랫도리를 살핀다. 거, 거기를 왜 봐. 거기 안 돼. 나 번식 안 해. 몸을 이리저리 버둥거려서 벗어났다.


“남자애구나. 그럼 형이네. 이름은 뭐라고 짓지? 토끼니까 토... 토순이는 여자 이름이고. 토돌이? 토토? 내 이름이 성찬이니까 토찬이로 지을까.”


전부 다 구리고 역겹군. 토순이 토돌이 토토 토찬이 전부 다. 유용한 정보는 이 인간의 이름이 정성찬이라는 거였다. 짐승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이제부터 정토찬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지 이름은 잘 지어놓고서 왜 나만 정토찬이지. 나 그거 싫어. 삑삑 울어도 정토찬 울지마. 씁. 형이 집 지어줄게 기다려 봐. 듣지도 않는다. 열심히 뭔가 뚝딱대더니 집이라는 게 완성됐다. 케이지라는데 들어가기 싫어서 인생 최대로 큰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야. 박스보다 작아. 나 여기서 못 살아. 성찬은 저를 꾹 밀어 넣고 문을 잠가버렸다. 울면서 박박 긁어도 안 열어준다. 배가 고파서 우는 거냐며 당근이나 한가득 쌓아줬다. 너무 많아서 일주일을 먹어도 다 못 먹을 양이다. 안 그래도 좁아 죽겠는데 집안의 반쯤을 당근이 차지했다. 바보야. 바보야아... 문 열어달라고오....



***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데 짐승도 마찬가지구나. 정토찬은 2주째 당근을 씹으며 체념했다. 그래도 아예 못 나가는 건 아니고 집에 오면 좀 놀아주고 안아주고 그런다. 당근은 하도 먹어서 질렸다. 다른 것도 먹고 싶어. 좀 맛있다고 먹어줬더니 당근 먹고 배 터져 죽으라는 건지. 체념은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토찬은 싫다. 그냥 고문 같았다. 싫고 좋고 다 구분할 줄 아는데 토끼 몸으로만 평생 산다는 건. 이 처지로 괜히 뭘 좀 알게 돼서는 수치를 느끼는 것도 거지 같다. 인간이 되고 싶다. 손이 생겼으면 좋겠고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고 싶다. 폰, 티비, 리모컨. 나도 쓰고 싶다.


“토찬아 형 왔어.”


그 목소리를 듣고 다시 애교 떠는 짐승처럼 케이지를 벅벅 문질러대는 제가 싫다. 젠장 나도 이거 하기 싫어...


사실은 기도한 지 오늘로 일주일째다. 정토찬은 또 달을 보고 앞발을 모았다. 저 착하게 살게요. 인간 하게 해주세요. 이제 남의 텃밭 털지도 않을게요.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 제발요. 어차피 신인지 뭔지 있는지도 모르겠고 계란으로 바위 치는 수준이니 짧게 마무리하고 누웠다. 자고 일어나면 또 좆같은 토끼 인생이겠지.


응 그래. 내가 뭐라고 기도를 해. 교회인지 성당인지 가본 적도 없고 갈 일도 없는데.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시야는 낮았다. 덜 뜬 눈으로 성찬을 관찰했다. 분주하게 출근 준비를 한다. 알아듣지도 못하겠지만 매번 인사를 했다. 잘 가. 빨리 와. 문 열어줘.


아침 먹고 낮잠 자다가 꿈을 꿨다. 잠자리가 사나운지 아주 맥락 없고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우선 제가 무지 큰 대왕토끼로 나왔고,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쥐콩만 한 감옥에 갇혀 있었다. 어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갑자기 장면이 바뀌더니 모조리 다 부숴버렸다. 그리고 성찬과 싸웠다. 부순 게 성찬의 집이었나보다. 내가 잘못한 게 맞는데 내가 뭘 잘못했냐며 씩씩거렸다. 그리고 당근을 먹다가 맛없다고 뱉었다. 이게 무슨 내용이지.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건물이 기우뚱했다. 내가 다 부쉈는데 갑자기 웬 건물이지. 아무튼 지진 온 것처럼 흔들흔들했다. 안 넘어지려고 용을 썼지만 결국 몸이 넘어가버렸다. 어 그리고...


“아야!”


아이고, 아야... 바닥에 박은 머리가 아파서 마구 비볐다. 무슨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났는지 별일이 다 있네. 고개를 들었더니 케이지 바닥에 고정돼 있던 철사가 전부 뽑혀서 옆에 널브러져 있다. 잠이 덜 깨서 상황 파악이 안 됐다. 집은 멀쩡한데 저게 왜 저러지. 그것만 문제가 아니라 무슨 케이지 전체가 터진 것처럼 물이고 당근이고 다 엎어졌다. 정성찬이 보면 놀라는데. 대충 수습하려고 손을 뻗었다. ... 어?


“손?”


손을 쳐다보다가 말이 나온 게 이상해서 입을 막았다. 말, 말은 왜 나와. 일어났더니 끊임없이 높이가 올라갔다. 티비보다 커졌어. 다리가 길어졌어. 털이 없어. 머리를 문질문질했더니 귀가 없었다. 조금 더 내려왔더니 얼굴 옆에 붙어 있었다. 토끼보다 훨씬 더 짧고 작은 귀가.


“나 지금 인간인가?”


어떡해... 너무 좋아. 신나서 여기저기 걸어다녔다. 성찬이 품에 안고 있을 때만 들어갈 수 있었던 안방도 이젠 제 손으로 열어서 들어갈 수 있었다. 어떡해 어떡해. 내가 손이 있잖아. 좋아서 막 웃음이 자꾸만 난다. 침대 옆을 걷고 옷장을 지나다가 전신거울을 마주쳤다. 항상 반도 채우지 못하고 조그마한 꼬라지만 보이던 거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그냥 다 벗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거울에 한가득 차 있다. 아직도 안 믿겨서 입을 막다가 아랫도리가 부끄러워서 손을 옮겼다. 옷을 입어야 할 것 같은데. 잠옷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뒤적거렸다. 옷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겨우 정성찬이 집에서 입을 법한 티셔츠 한 장을 찾아 입었다. 구멍을 잘못 찾아서 여기저기 얼마나 들쑤셨는지. 바지는 다리를 벌리고 쭉쭉 뻗는 게 적응 안 돼서 입다가 그만뒀다.


그다음은 냉장고를 뒤졌다. 남의 집 텃밭 터는 건 안 하기로 했지만 여긴 내 집이니까 해도 되잖아. 기대가 넘쳤는데 정작 제가 먹을 게 별로 없었다. 물이랑, 이건 뭐지, 단백질 쉐이크? 그리고 고기 조금. 야채칸을 뒤졌더니 당근만 한 바가지다. 나 이제 당근 싫어. 달달한 거 먹고 싶어. 다행히 아랫칸엔 과일이 있어서 그거나 배부를 때까지 먹었다. 나는 왜 이런 거 안 줬지. 식습관이 잘못 잡혀서 그런 거 안다. 풀만 씹다가 당근이라는 특식을 하루종일 먹으며 사니 그것도 싫어져버렸다.


그다음은 티비를 봤다. 몰랐는데 냉장고가 계속 열어놓으면 울음소리를 내더라고. 너무 울어대서 문을 닫아줬더니 안 울었다. 티비 리모컨은 오래 붙잡고 사투하니 대충 사용법을 익혔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드라마를 하루종일 틀어주는 채널이었다. 재밌어서 시간이 금방 간다.


해질 때쯤이 되니 슬슬 걱정됐다. 정성찬이 집에 언제 오더라. 감으로 추측하자면 대충 시곗바늘이 일직선 조금 안 되게 서 있을 때... 눈을 가늘게 뜨고 곰곰이 생각하는데 현관에서 삑삑 소리가 들렸다. 어, 어떡해. 아 어떡해. 일단 아무데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드레스룸에 들어가서 문을 꼭 닫고 숨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키우려고 주워 온 토끼가 갑자기 사람이 되면... 아무래도 그건 좀 무섭지. 만약 제가 정성찬이 사실 토끼였다든가 그런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면 놀라서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성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엉망진창인 집안 꼴을 봤는지 당황한 목소리다. 스스로가 멍청해서 머리를 콩콩 쳤다. 정리 좀 할걸...


“토찬아. 정토찬? 아 얘가 어디 갔지...”


나 이제 정토찬 안 할 건데. 하여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언젠가 그 말은 해야겠다 싶었다. 그 짜증 나는 이름 치우고 새로 좀 지어달라고. 점점 발소리는 가까워졌다. 이곳저곳을 들추더니 곧 드레스룸 문을 열 것 같았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무서운데. 긴장돼서 손발에 땀이 났다. 심장이 마구마구 뛴다. 숨이 잘 안 쉬어질 정도였다. 가려질 리도 없을 텐데 커져버린 몸을 웅크렸다. 깜깜한 드레스룸 안에 빛이 한 줄기 스며들더니 문이 완전히 열렸다.


“웬 티셔츠가 바닥에... 어? 토찬이 여기 있네.”


무슨 소리야. 토끼 이제 없는데. 삑삑 울었다. 삑삑. ... 엥. 고개를 들었더니 늘 보던 것처럼 성찬은 커다랬다. 코앞에 두고서는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여긴 어떻게 들어왔냐며 품에 안는다. 아니 이건 아니지. 떠, 떨리긴 했는데 다시 토끼 시켜 달라는 건 아니었는데. 당황스러워서 울음만 났다. 입에서 거지 같은 삑삑 소리가 자꾸 난다. 정성찬은 눈치 없게 무서웠냐며 쓰다듬고 달랬다. 집에 도둑이 들었는지 아나보다. 어떤 도둑이 집 안에 들어와서 과일이나 훔쳐 먹고 토끼집 부수고 그러는데. 나 토끼 싫어. 정토찬 하기 싫어. 다시 사람 시켜줘. 싫어. 싫어.


“싫어어...”

“뭐... 뭐야 씨발!”

“싫어 사람 할래...”

“너 누구야?”


 성찬은 놀라서 제 몸을 퍽 밀쳤다. 벌거벗은 상태로 바닥에 엎어졌다. 뭐야 나 다시 사람 된 건가. 이 마법 같은 현상의 활용도를 저조차 잘 모르겠다. 토끼였다가 사람이었다가 이게 뭐지. 성찬의 얼굴을 바라봤다. 겁에 질린 사람 같다. 하늘에서 똑 떨어진 것도 아니고 자기 품에 안겨 있던 토끼였는데. 그래서 억울하게 웅얼거렸다. 나, 나 정토찬인데... 자기소개가 정토찬이라니, 그 와중에 수치스러웠다.


그냥 누워서 징징거렸다. 나 버리지 마. 나 키워. 갑자기 사람 됐다고 나 버리면 안 돼. 그거 유기야. 성찬은 저보다 더 울고불고 난리 난 제 꼴을 보고 정신 차렸다.


“야. 네가 토끼라고? 정토찬이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 원래 사람이었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갑자기, 하... 씨발 이게 뭐지.”


모든 대답은 훌쩍거리며 끄덕끄덕, 도리도리로 했다. 굵고 낮아져버린 제 목소리가 아직 적응이 안 됐다. 성찬은 머리를 짚고 쭈그려 앉았다. 중간엔 꿈인지 확인하는 건가 여기저기 꼬집어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자 기가 죽었다. 그렇게 싫나. 바보 같이 묻는다. 그럼 너 이름이 뭔데. 정토찬... 말하기 싫은데 이름이 그거밖에 없는 걸 어떡하냐고. 성찬은 우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또 사색에 잠겼다. 내다 버릴까봐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었다. 성찬의 바지 끝자락이 축축해졌다. 아 알았다고. 안 버린다고. 좀 떨어져. 그 말에 바로 떨어졌다. 진짜지?...


“바닥에 과일 먹고 버린 거 너야? 티비도 네가 봤어?”

“응...”

“집은 왜 부쉈어.”

“부순 거 아니고 몸, 몸이 커져서...”


제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길래 다리를 모아서 가렸다. 한숨을 쉬더니 쥐고 있던 티셔츠를 던져준다. 입어, 아니다. 입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헷갈려서 고개만 갸우뚱하고 있는데 성찬은 저를 일으켜 세웠다.


“사람인데 왜 방금은 토끼였어?”

“몰라. 무서워서 숨, 숨었는데 갑자기 토끼 됐다가. 또 그냥 싫어, 싫어서 싫다고 울었는데, 사람 됐어.”


말해봤자 이해도 못 하겠다는 표정이다. 성찬은 저를 화장실로 이끌었다. 사람 됐으면 씻어야 한다며 갑자기 물을 틀었다. 물! 물이잖아. 물이 싫은 이유는 저도 모른다. 그냥 싫고 무섭고 닿기도 싫다. 난 물이 싫어. 씻기 싫어. 난 맨날 털 빨아서 냄새도 안 나는데. 싫어서 발버둥을 쳤다. 성찬이 자꾸만 저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문짝을 잡고 바닥에 헛발질만 반복했다. 씻고 나서 옷을 입으라며 물을 뿌려댄다. 싫어, 싫어... 격렬한 저항은 이 집에서 살고 싶으면 씻으라는 말에 쏙 들어갔다. 살면서 처음으로 샴푸, 린스, 바디워시의 용도를 알게 됐다. 쫄딱 젖은 채 입을 삐죽 내밀고 그루밍이 아닌 물로 씻는 법을 배웠다. 수건을 내미는 걸 보고 멀뚱멀뚱 서 있자 한숨을 쉬면서 닦아줬다. 머리까지 다 말리고 나서 잠옷이 손에 쥐어졌다.


“속옷은 사야겠네.”

“속옷? 옷 입는데 그 안에 옷을 또 입어?”

“원래 입는 거야.”


몰랐다. 남들은 그냥 겉에 옷 잘 입고 돌아다니길래 그 안에 옷이 또 있는 줄 몰랐다. 그렇구나. 일단 반바지만 입고 돌아다녔다. 그거 안 입어도 편한데 왜 입지? 인간들은 털이 없어서 그런가.


저녁 됐다고 또 배가 고팠다. 나 배고파. 성찬은 아까 과일 많이 먹어 놓고 왜 배가 고프냐고 말했다. 뭔 소리야... 이 정도 시간 지나면 배고픈 게 당연한 건데.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와서 뭐가 이상한 건지 잘 모르겠다. 성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대충격이었다. 인간은 하루에 세 번밖에 안 먹는대. 미친 거 아니야? 난 그런 거 모르겠고 배가 자꾸 울리니까 아무거나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또 당근... 그놈의 당근. 죽을 때까지 당근 먹고 온몸이 노래질지도 모른다. 내 털은 노란색이 아닌데. 짜증 나서 집어던졌더니 화를 낸다. 어이가 없었다. 너야말로 토끼의 주식은 당근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난... 난 그냥. 근데 솔직히 풀은 먹기 싫었다. 과일이 맛있어서 그걸 더 먹고 싶었다.


“당근 싫어.”

“건초 먹을래?”

“인간, 인간이 건초를 어떻게 먹어.”

“그럼 너 인간이니까 고기 먹을래?”

“고기를 어떻게 먹지. 이 야만스러운...”

“토끼 때부터 알아보긴 했는데 엄청 까탈스럽네.”


까다롭다면서 왜 웃는 거지. 성찬은 제 앞에서 구운 소고기를 씹어대고 있었다. 솔직히 맛있는 냄새가 난다. 토끼일 땐 몰랐는데 맛있는 냄새처럼 느껴졌다. 킁킁대다가 아차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도 고기는 좀... 얘 사실은 나도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데려온 거 아니야? 그럴듯한 추측에 눈을 날카롭게 떴다. 고기에 미친 인간. 하루에 한 끼는 무조건 고기를 먹어야 하는 정성찬. 인간이 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 고기는 절대 안 먹어야지.


결국 성찬은 사과 하나를 씻어서 갖다줬다. 사과 좋지. 산에 살 땐 먹어보지도 못했다. 맛있다고 아삭아삭 씹어먹자 성찬은 지나가는 소리로 '토찬이 잘 먹네~'… 토찬이? 갑자기 밥맛이 뚝 떨어졌다. 그래. 행복하다고 사과 씹어먹을 게 아니라 이것부터 얘기했어야 했는데. 저는 누구 말처럼 까탈스러워서 고기도 싫고 토찬이도 싫다. 사과를 쿵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토찬이 싫어, 이름 바꿀래. 성찬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픽 웃었다.


“주인은 난데 왜 토찬이가 이름을 바꿔.”

“아 시, 싫다고. 토찬이 구리다고.”

“그럼 토순이는? 토돌이는? 토토는?”

“웃기지 마라. 인간 이름 내놓으라고.”


어떤 인간이 토순이 토돌이 이 꼬라지 이름을 달고 다녀. 다소 강요하는 듯한 태도였지만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당연했다. 이 얼굴에 이 몸을 가지고 어떻게 토찬이 따위로 살라는 건지. 짐승이 아니라 품위 있고 고고한 인간이 되어버려서 어쩔 수 없다. 멍청하게 역겨운 이름 달고 히히 웃을 지능은 훌쩍 넘어섰다. 성찬은 폰을 들어 검색하더니 참 성의 있는 후보 몇 가지를 내놓았다. 철수. 구려. 현수는? 구려. 너 예쁘게 생겼는데 태희는 어때? 그거 여자 이름이잖아. 지현이는. 아 쫌, 장, 장난치지 마.


화가 나서 소고기를 한 점 바닥에 집어던졌더니 진지한 자세로 임했다. 진지한 자세로 저를 혼내기 시작했다. 먹을 거 가지고 장난치면 돼, 안 돼. 그럼 너는 사, 사람 이름 가지고 장난, 장난쳐도 돼? 말 돌리지 마. 너 한 번만 더 이러면 진짜 혼나. 분해서 주먹이 달달 떨렸다. 먹던 사과도 벽에 집어던지고 싶었는데 진짜 혼날까 봐 참았다. 진짜 혼난다는 건 뭐지. 무서워.


“그럼 잘생긴 이름 가져와. 반짝반짝거리는 거.”

“잘생긴 얼굴은 있어도 잘생긴 이름이라는 건 없어. 이쁜 이름은 있지.”


어쩌라고. 그 단맛 없는 훈수 따위 듣고 싶지가 않다. 성찬은 대한민국 예쁜 여자 하면 김태희, 전지현이고, 잘생긴 남자 하면 강동원, 원빈이란다. 여자 이름은 대충 듣고 걸렀다. 동원?... 동원이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어떻게 잘생겼다는 거야. 정성찬이 먹던 참치캔에 적힌 글씬데. 그것도 하기 싫어서 걸렀다. 그럼 나 원빈으로 해줘. 성찬은 남들이 들으면 처음에 좀 놀릴 수도 있는데 잘 참으라고 했다.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 나 이제부터 원빈이야. 원빈. 원빈은 그 이름의 무게감을 잘 몰랐다. 그저 몇 개 나온 빈약한 후보 중에 마음에 들어서 골랐다.


식사를 하고 나면 양치를 해야 한다. 고 한다. 원빈은 인간의 씻는 방법이 도저히 적응이 안 됐다. 이는 놔두면 자라는데 웬 걱정? 성찬은 네가 상어도 아니고 무슨 소리냐며 치약 짠 칫솔을 입에 물렸다. 입에 넣자마자 고통스러워서 자동으로 눈물이 났다. 민트잎을 씹으면 이런 느낌일까? 풀떼기 주제에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아파. 아파. 혀 아파. 바로 뱉으려고 했는데 성찬이 막았다.


“칫솔로 이를 닦아야지.”

“아프다고! 이거 뱉어야 돼!”

“안 돼. 빨리 여기 보세요.”

“쓰읍, 싫어, 나 아파, 욱, 우우웅...”


성찬의 손을 피해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다가 결국엔 턱이 잡혔다. 까슬까슬한 털 같은 게 치열 여기저기를 제멋대로 횡단했다. 이 해봐, 이~ 이가 뭔데. 원빈은 그게 무슨 소린지 당최 알 수가 없어 양치하는 동안 계속해서 이 소리를 냈다. 이... 이... 이거 언제까지 해야 돼? 숨차서 죽겠는데 자기 혼자 웃겨서 자빠진다. 쓰읍... 아 매워서 눈물 나. 다 닦은 줄 알고 얼른 물로 헹구려 했더니 벌떡 일어나서 아직 안 끝났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혀를 닦아야 된다는데 그건 정말 고문이었다. 아픈 건 둘째치고 자꾸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정성찬 나 토할 것 가타... 우웩, 토, 토 나와. 얼마나 잔인한 고문관인지 그때마다 잠시 쉬어갔다. 결국 이에서 뽀득뽀득 소리가 나고 혀는 수박 색이 될 때까지 박박 닦였다. 이걸 밥 먹을 때마다 해야 한다고? 그럼 나 밥 안 먹을래.


정원빈 될 뻔했는데 제가 당근 훔쳐먹은 밭 주인 할머니가 박 씨라고 한다. 그래서 철저한 족보와 장유유서 어쩌고를 잘 지켜서 그냥 넌 박 씨고, 박원빈이래. 정원빈은 왜 안 돼? 그랬더니 그냥 갑자기 아들 생긴 것 같아서 곤란하단다. 성찬은 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너무 달라서 괴리감이 느껴진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원빈은 그날 밤 잠들지 못했다. 성찬이 소파에서 자라고 던져준 이불 사이에서 새벽까지 환하게 불 켜놓고 거울만 봤다. 예쁘게 생겼으니깐 태희 하라고 했었지. 예쁘다는 건 정확히 뭘까? 티비에선 여자들 보고 예쁘다는 소리 하던데. 아직도 제 얼굴이라곤 믿기지 않는 인간이 거울 속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댄다. 머리털이 엄청 까맣네. 난 귀랑 발만 까만색이었는데. 그리곤 눈을 엄청 크게 떠봤다. 흰자가 있잖아. 까만콩 같은 눈이 아니라 정성찬 같은 눈알이야. 마지막으로는 입을 살짝 벌렸다. 앞니가 작아졌어.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고 잡고 흔들어보기도 했다. 살짝 튀어나오긴 했지만 전혀 토끼로 보이진 않았다. 하루종일 건초 씹으면서 갈 필요가 없어 보인다. 흠, 당연하지. 나는 이제 토끼 아니고 인간이니까. 박원빈이니까. 거울 보며 히히덕거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새벽 중에 성찬이 나와서 불을 꺼버렸다. 정토찬 빨리 자. 미, 미친 거 아니야? 아, 박원빈 빨리 자. 앞으로 이름 실수할 때마다 뒷발차기 해줘야겠다.




성찬은 다음날 출근도 안 하고 아침에 깨자마자 허리 양쪽을 붙잡고 더듬었다. 원빈은 덜 뜬 눈으로 하품을 하며 손가락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오늘 주말이네. 허리는 왜 잡는 거지. 성찬은 오늘따라 혼잣말이 심했다. 95? 아 줄자가 없네... 남의 속옷을 사봤어야 알지. 성가신 얼굴로 뒷목을 박박 긁더니 차키를 챙겨 나갔다. 원빈은 영문도 모른 채 얼굴을 살살 긁으며 소파에 다시 누웠다. 새벽에 늦게 자서 그런지 너무 졸리다.


잘 자고 있었는데 귀찮게 또 깨운다. 싫어... 더 잘래. 눈을 감았더니 끈질기게 굴었다. 일어나야지 원빈아. 아침 아니고 점심인데? 밖에 봐봐 해 떴다. 응? 잠시만 일어나봐. 결국 누구 하나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눈빛으로 일어났다.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이길래 이 인간 사람 박원빈을 깨우는 걸까. 뭔데. 성찬이 제 기준 아침 댓바람부터 외출해 사온 것은 속옷이었다. 손에 쥐여주더니 여기가 앞이고 구멍에 다리 하나씩 넣고 어쩌구 지가 입혀줄 기세다. 누굴 바보로 아는가보다. 화장실에 가서 입고 나왔다. 생각보다 안 입은 것처럼 편하구만. 성찬은 뭔가 이상하다는 눈치로 저를 쳐다봤다. 다가오더니 허리밴드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당겼다. 뭐 하는 거지.


“95가 커?”

“뭔 소리야?”

“살짝 크네... 제일 작은 건데.”

“안 큰데?”

“이건 원래 딱 붙게 입는 거야. 근데 넌 사이즈가 좀 애매해서... 90 입으면 불편하다고 할 것 같은데.”


모르겠다, 살 좀 찌우지 뭐.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여전히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서 가만히 있었다. 95고 90이고 난 그런 거 모르겠고 편하면 장땡인데.


이튿날 성찬이 인터넷으로 주문한 속옷들 사이에는 90 사이즈가 하나 껴 있었다. 입어보자마자 다시는 착용하지 않을 최악의 속옷으로 등극했다. 우선 너무 딱 맞았고, 아니다. 이게 딱 맞는 것일 리가 없다. 분명 작았다. 허리며 허벅지며 뭔가 한 겹 붙은 게 미친 듯이 의식될 정도로 어색했다. 불편하다고 꿍얼거리자 성찬은 그럴 줄 알았다며 벗으라고 했다. 원빈은 당장 그 조그만 천쪼가리를 벗어던졌다. 역시 아무것도 없는 게 제일 편하긴 하다. 성찬은 돌처럼 굳어선 눈을 가리고 있었다.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건가. 너 머, 뭐 하냐? 아니, 갑자기 벗으면 어떡해... 벌써 샤워할 때 다 봐놓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같은 남자끼리 뭐 어때... 라고 생각하다가 성찬의 반응에 괜히 저도 민망해져 얼른 다른 속옷과 반바지를 주워 입었다. 왜 저러지. 이제 신경 쓰여서 성찬 앞에서 훌훌 벗고 지내진 못할 것 같다.


성찬은 호기심이 많았다. 저도 호기심이라면 토끼 출신 중에 1등인데 더 심했다. 눈앞에서 변하는 거 다 봐놓고서는 아직도 못 믿는 사람처럼 네가 진짜 토끼냐며 3시간에 한 번씩 물었다. 다행히 의심하고 갖다버릴 각 재는 인간처럼은 안 보여서 원빈은 이제 장난도 쳤다. 아니, 나 토끼 아니고 귀신인데? 솔직히 토, 토끼가 사람 되는 게 말이 되냐 쯧쯧. 바보야. 멍충이 바보 정성찬. 나 버리면 천벌, 천벌 줄 거니까 진짜 가, 각오해라. 어? 멱살을 잡고 진심 반 장난 반의 협박을 날렸다. 정말 내다 버리면 원빈은 생존력 따위 개나 줘버린 바보 짐승이니 굶어 죽을 것이다. 토끼 모습으로 불쌍한 척 하루종일 하고 있으면 정성찬 같은 누군가가 주워가려나.


“너 근데 몇 살이야?”

“몰라. 정신 차린 지는 한 두 달 됐나...”

“두 달이나? 너 애기 아니었어?”

“뭔 소리야. 짐승 시절에 후, 후리고 다닌 암컷만 몇 마린데.”


뻥이다. 짝짓기 해본 적 없다. 따라다니던 암컷은 몇 마리 있었으니 뭐, 쪼끔, 그래도 괜찮지 않았나... 사고 능력을 갖기 전은 사실 기억이 잘 안 나서 모르겠고, 후리고 다닌다는 말은 드라마에서 배웠다. 성찬은 제 말에 얼척없다는 듯이 웃었다.


“너 토끼일 때도 그냥 귀엽고 작은데 암컷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어... 뭐, 쪼금?”

“오~ 박원빈~”


아이, 뭐, 부끄럽게. 하핫... 원빈은 괜히 어깨를 으쓱거리며 뒷머리를 살살 쓸었다. 성찬은 뒤늦은 실토를 했다. 실은 암컷 한 마리를 더 분양받아서 제 짝으로 지어주려 했단다. 원빈은 기겁했다. 사람으로 변하지 않았다면 다가왔을 생지옥에 이가 딱딱거릴 정도였다. 암컷 토끼는 무섭다. 특히 발정기 온 암컷은 그냥 공포의 존재다. 붙어 있고 싶지도 않았고 전혀 생식 욕구도 들지 않았다. 역시 인간이 돼서 참 다행이었다. 성찬은 늘어진 귀처럼 삐죽삐죽 길어버린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너 몇 살인데, 진짜 애기 아니야? 모른다니까 그러네. 확실한 건 아기는 아니었다. 발정기도 몇 번 오긴 했었던 것 같다. 성찬은 제가 너무 작아서 아기 토낀 줄 알았다고 했다. 뭐가 자꾸 작다는 거야? 이 정도면 보통인데. 사실 좀 작은 이유는 한창 클 시기에 찾아온 인간 사고적 편식 투쟁 때문이고, 여기저기 다른 토끼들 피해 다니다가 제대로 밥 벌어먹지도 못해서 그렇다. 그래도 아기 토끼 정도는 진짜 아니었다.


“성체야. 아니, 아니, 성인이야.”

“하여튼 난 그래서 네가... 털이 너무 없길래 아직 덜 컸나보다 했지.”

“뭔 소리야. 토낀데 털이 왜 없어.”

“아니, 너 지금... 그, 없잖아.”


진짜 뭔 소리야 사람인데 털이 왜 있어! 사람이니 토끼니 너무 헷갈려서 인지부조화가 오겠다 아주. 성찬이 하는 말이 명백한 개소리 같아서 윽박질렀다.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뜬구름 같은 소리만 한다. 난 이제 사람인데 아직도 내가 토끼로 보이나. 사, 사람인데 털이 왜 있냐고. 사람은 머리털만 있는 거 아니야? 원빈은 살면서 다 벗은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시골에 할매 할배들은 쪄죽는 여름에도 긴팔 긴바지만 입는다. 그리고 반팔 반바지 입어도 털... 없던데? 안 보이던데. 성찬은 바보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어디 곤란한 것처럼 정곡을 찌르지 않고 여기저기 빙빙 돌려댔다.


“아니, 너 털이... 털이 없잖아.”

“니, 니 말은 사람이 머리털 말고 다른 털이 있단 거냐?”

“털은 다 있어. 여기 봐, 내 팔에도 있잖아.”

“아 뭐 이 정도는. 멀리서 보면 있는지도 모르겠구만...”

“근데 내가 말한 건 여긴데.”


... 여기? 머쓱하게 웃는 성찬의 손가락 방향을 시선으로 따랐다. 목적지는 바지춤이었다. 여기가 왜... 말을 잇다가 멈춰버렸다. 원빈은 놀라서 입을 막았다가 아래를 가렸다가 별짓을 다 했다. 그냥 충격을 받아서 말을 잇질 못했다. 성찬은 그 지옥의 입으로 쓸데없는 설명을 자꾸만 했다. 다 큰 성인이면 다 있는 거고 자기도 있고 남들도... 그걸 듣는 동안 원빈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익어갔다. 거짓말, 거짓말... 그렇게 아주 당황스럽고 경악한 얼굴로 귓구멍마저 막다가 그냥 도망쳐버렸다. 얼굴이 시뻘게져선 아무데나 틀어박혀 나오고 싶지 않았다. 이불장에 들어가서 문 앞을 죄다 이불로 막아놓은 뒤 벽을 보고 앉았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벽에 쿵쿵 박았다. 부끄러워서 울고 싶었다. 거, 거짓말하지마. 여기에 털이 어떻게 있어. 씨발 난 다 컸는데 왜 조금밖에 없지... 아니 그런 걸 왜 보는 거야. 성찬이 이불장 밖에서 도움 안 되는 위로를 중얼거렸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꺼졌으면 좋겠다.


“하여간 좀 적은... 사람들도 있긴 해. 어, 있어.”

“가.”

“근데 내가 그 말을 왜 꺼냈냐면.”

“가라고.”

“내가 형이니까 형이라고 불러야지.”

“가라고 쫌! 꺼져!”

“꺼지라는 나쁜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내가, 내가 바보냐? 그것도 모르게? 형 너는 진짜 바보 같다. 가, 가라는 말 몇 번, 몇 번 해야 알아 처먹을래?“


성찬은 이불장 문을 긁으며 이러면 이불 정리 다시 해야 된다는 말을 했다. 어떻게 지금 그게 문제지? 사이코패스인가 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진짜 꺼지라고 했다. 너 이불 똑바로 못 개잖아...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다. 이불 대충 반 접고 반 접고 반 접으면 되는데 그걸 내가 왜 못해? 하... 그냥 너무 스트레스 받았다. 지금 상황이 굉장히,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짜증이 난다. 그래서 소리를 질렀더니 성찬은 놀라서 나가버렸다. 진작에 소리 지를걸. 근데 너무 세게 질렀나 목이 아프다.


입맛이 없고 우울해서 밥을 굶었다. 사실 배는 좀 꼬르륵거렸는데 성찬이 이불 사이로 꾸역꾸역 들이미는 당근을 이 악물고 무시했다. 당근이 아니라 과일이었으면 받아줬을 텐데. 예를 들어 사과. 그래, 나한테 사과해. 빨리 미안하다고 해. 사람이 좀 없을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창피를 주다니. 그렇다고 진짜 사과하진 말았으면 한다. 그냥 앞으로 이 얘기는 꺼내지도 말고 계속 모르는 척 살아갔으면 좋겠다.


“원빈아. 배 안 고파?”

“안 고프다고.”

“그래도 굶으면 안 돼...”


성찬이 우는 소리를 내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약해진 것은 대충 제 명예와 인권, 체면 등등. 그놈의 거지 같은 털 얘기 때문이다.


약 3시간 동안 시위하던 원빈은 이불장을 나왔다. 이불을 똑바로 못 개니 하는 소리가 짜증 나서 일부러 더 신경 써서 갰다. 성찬이 도와준다는 것도 꺼지라고 했다. 어엿한 인간처럼 각 맞춰 갠 이불을 척척 쌓아놓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사실 너무 배고팠다. 벌써 시간은 저녁때였다. 한 끼도 안 먹고 있었더니 꼬르륵 소리가 하도 커서 그 소리를 들은 성찬이 문을 똑똑 두드릴 정도였다. 어떻게 세상은 나를 돕지 않는 거지. 창피해서 꺼지라는 말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



스스로 주워오긴 했다만 알고 보니 사기 분양이었던 토끼와 지낸 지 어느덧 두 달째다. 솔직히 처음엔 당황스럽고 이걸 어쩌지 하는 마음만 들었는데 어쩌다 보니 얼렁뚱땅 나름 잘 살아가고 있었다. 가만 보면 예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동물일 때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성찬은 좀 아리송했다. 분명 첫날엔 다시 토끼로 한 번 돌아갔었는데, 원빈은 그 이후 단 한 번도 토끼로 변한 적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먹는 양이나 필요한 생활용품 양이 두 배로 늘어서 등골이 아주 빠지겠다. 그런데도 진짜 인간처럼 바깥에 나돌 수는 없으니 집 안에서 늘 심심한 티를 냈다. 성찬은 평일엔 피곤하다고 일찍 드러누워 원빈과 같이 놀 시간이 부족했다. 회사 꼭 가야 되냐고 묻는 말엔 나도 안 가고 싶다는 말만 했다. 안 가고 싶으면 가지 마. 토찬이 먹여 살리려면 가야 돼. 가끔 성찬이 본인을 어디 다리 밑에 갖다버릴까 노심초사하는 원빈은 그 말을 듣고 시무룩한 얼굴로 아침마다 배웅을 나왔다. 뻥이고 쿨쿨 자느라 나갈 때쯤 나지막한 인사만 했다. 저거 또 밤에 안 자고 거울 봤네. 거울을 너무 봐서 뺏어야 할 것 같다.


원빈은 사람이 돼서 그런지 매일 야채나 과일만 씹어먹으니까 살이 빠졌다. 두 허벅지는 사이가 안 좋다 못해 절교할 것 같았고 95 사이즈 속옷만 주구장창 사놨는데 편하다는 핑계로 입기엔 아슬아슬할 지경이 됐다. 성찬이 안 되겠다며 탄수화물을 먹이기 시작했다. 저녁마다 체중계 위로 올라가서 살이 쪘는지 빠졌는지도 확인했다. 덕분에 빵에, 떡에, 과자에... 간식 귀신이 돼서 살은 좀 쪘는데 의외로 지갑 사정은 전과 비슷했다. 과일이랑 채소 가격이 미친놈처럼 비싼 탓에 그쪽 지출이 줄어서 그런 듯했다. 입에 고기를 가져다 대면 고개를 여기저기 돌리며 거부하던 원빈은 결국 항복했다. 못 이기는 척 삼겹살을 한 입 얻어먹고 완전 반했다. 이게 돼지야? 꾸엑꾸엑 소리 내는 걔들? 대박. 물론 평생을 채식만 해왔어서 그런지 소화는 잘 안됐다. 하지만 거부감이 눈에 띄게 줄어서 종류 안 가리고 잘만 먹는다. 치킨 먹인 걸 후회할 정도로 맨날 먹자고 얼마나 졸라대는지.


육아 지옥 같은 주말이 돌아왔다. 얘랑 평생 살다간 장가도 못 들겠네... 집에서 온종일 놀기만 하는 원빈은 늦잠 자는 성찬의 침대 곁을 어슬렁거렸다. 옆에서 뭐가 자꾸 사부작거리니 애진작 선잠 상태였다. 30분 정도 시간이 흐르면 침대 위로 올라와서 징징거린다. 아침에 못 일어나는 애가 웬일이지. 모르는 척 계속 눈을 감고 있었더니 원빈은 별짓을 다 했다. 성찬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가 볼을 콕콕 찌르고 눈 위로 손을 왔다 갔다... 귀에다 속닥거린다. ... 왜 안 일어나? 안 일어나는 게 아니라 못 일어나는 거였다. 토요일 오전이 너무 달콤해서. 성찬은 옆자리 이불을 들췄다. 이리 와. 웅. 원빈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쏙 들어와서 누웠다. 초롱초롱한 눈빛에 낯가죽이 찔릴 것 같다.


“놀아줄게. 형이랑 시체놀이 하는 거야.”

“웅.”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지는 거야. 설거지 내기. 오키?”

“알겠어. 내가 이길 거야.”


성찬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이걸로 30분은 벌었다, 고 생각했다. 원빈의 앓는 소리가 들렸다. 음... 응... 심심하다는 생각 중이겠지. 5분이 지나자 원빈은 성찬의 멱살을 붙들고 외쳤다. 형 내가 졌어. 내가 설거지할게. 일어나.


결국 일어났다. 시간을 확인하자 용케도 수면 7시간을 채웠다. 세수만 하고 나와서 배고프다는 원빈을 위해 아침을 대충 차렸다. 요새 밥보다 빵을 더 좋아해서 딸기잼 발라주면 맛있다고 순식간에 먹는다. 귀엽네... 볼을 빵빵 채운 모습이 웃겨서 성찬은 잠이 덜 깬 상태로 실실 웃었다. 원빈이 한입만큼 찔끔 남긴 빵조각을 먹다가 슬슬 제 아침 식사도 준비했다. 사실 심심하다고 할 게 있나. 원빈은 오티티 사용법을 알려줬더니 드라마 중독자가 됐다. 솔직히 돈 아까울 때도 살짝 있었는데 마침 원빈이 본전 뽑아줘서 좀 뿌듯했다. 티비에서 나오는 모 드라마의 앞뒤 끊긴 중간 스토리를 감상하며 밥을 먹었다. 궁금하면 질문을 하면 된다. 저 남자가 뭐 했는데? 나쁜 놈이야? 척척박사 박원빈이 대답을 해준다. 저 남자가 사실 범인이거든. 근데 저 사람은 저 남자가 죽였는지 몰라. 그렇구나.


원빈은 한 편 정도 보고 나면 꾸벅꾸벅 졸더니 잠들었다. 낮잠 시간이다. 진짜 애기 아니야? 밥 먹으면 자고 밥 먹으면 자고. 물론 원빈은 마냥 어려 보이진 않았지만 토끼일 때도 작고, 음... 털도 있는 둥 마는 둥 하길래 얼굴만 성숙한 중학생 정도 되는 줄 알았다. 오해가 다 풀리니 성인 남자겠거니 했다. 심지어 수염도 안 난다. 이 정도면 제가 멍청한 탓은 아니었다.


평일 동안 몇 번 미룬 헬스장을 갔다 왔더니 원빈이 깨어 있었다. 심심해 보이길래 냉장고 안을 살폈다. 계란 없고, 우유 없고... 마트 갈까? 원빈은 마트 단어를 듣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왔다. 나갈 일이 없어서 마트 한번 가자고 하면 산책 가는 멍멍이처럼 신났다. 원빈이 형이랑 마트 갈까요? 응. 가고 싶어요? 응. 사람인데도 키우는 맛이 있다. 토끼를 데리고 장을 보러 갈 순 없으니 이럴 땐 안 외롭고 좋은 것 같기도 하다.


“형 이거 사도 돼?”

“그건 왜 사.”

“재밌어 보이는데.”

“먹을 걸로 장난치면 안 돼. 재밌는 게 아니라 용과야.”


하여간 맛있어 보인다며 샀다. 과일코너 과자코너 돌면 그곳이 바로 박원빈의 천국이다. 형 이거 사면 안 돼? 안 돼 4번 그래 1번의 비율로 대답하면 된다. 너무 정신이 팔려서 이러다간 쓸데없는 것만 한 바가지 살 것 같았다. 필요한 것부터 사자며 원빈의 손을 잡고 계란이랑 우유부터 찾았다. 손을 안 잡고 다니면 혼자서 딴짓 하느라 흩어진다.


원빈이 시식코너 앞에 멈춰 섰다. 카트를 끌던 성찬도 덩달아 멈췄다. 먹고 싶으면 하나 먹으면 되지 왜 저만 뚫어지게 쳐다보는지. 성찬은 군만두 하나를 찍어서 원빈에게 건네줬다. 아유 잘 먹네. 저도 따라서 두세 개 집어먹다가 맛있어서 카트에 담았다. 그다음은 삼겹살이다. 원빈이 또 저만 쳐다본다. 이쑤시개로 찍어서 주고, 또 쳐다보면 또 찍어서 준다. 옆에서 저도 먹다가 이만큼 먹었는데 안 사기도 뭐 해서 카트에 담았다. 그렇게 뭘 더 먹었더라. 소시지, 비빔면, 믹스커피... 미치겠다. 자꾸 쳐다보는데 못 먹게 할 수도 없고 이제 마트에 자주 못 올 것 같았다. 믹스커피는 한 번 먹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뒤에서 속닥거렸다. 형 나 하나만 더 주면 안 돼? 성찬은 판촉 직원을 보며 하하 웃다가 한 컵 더 들어서 원빈에게 쥐여주고 300개 묶음 커피믹스는 도저히 다 먹을 자신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다.


장을 본 건지 마트를 턴 건지. 영수증 실환가. 2인가구 장을 봤는데 터질 것 같은 박스가 두 개였다. 박원빈 너 이거 다 먹을 때까지 마트 올 생각 하지마. 웅. 좋아죽겠는지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원빈은 박스를 보물 상자처럼 안고 집에 들어왔다. 은근 힘은 세서 무거운 게 많이 들어 있는데도 씩씩하게 들었다.


동물에게 속세의 맛을 보여주면 좆된다. 장르 불문하고 그냥 전부. 특히 음식. 배달음식.


“저녁에 치킨 먹자.”

“너 때문에 장 봐온 게 몇 갠데 무슨 치킨이야.”

“아 치킨 먹자. 치킨, 치킨.”


치킨 노래를 부른다. 작사 작곡 박원빈에 안무도 박원빈. 아재 개그는 누구한테 배운 건지 로봇춤까지 췄다. 웃겨서 하하 웃다가 정색했다. 안 돼. 진심으로 냉장고며 찬장이며 터질 것 같다. 원빈은 아랑곳없이 계속 치킨 노래를 불렀다. 이번엔 알앤비 버전이다. 소울 넘치네... 겨우 냉장고 정리를 끝내고 소파에 앉았는데 옆에서 끊임없는 애교를 떨었다.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피하다가 눈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정적이 찾아왔다. 2초 정도 참다가 자동으로 웃음이 나왔다. 아 진짜 안 돼, 박원빈 그만 쳐다봐. 애가 참 간사하다고 해야 할지 지 얼굴 예쁜 건 안다고 해야 할지. 곤란한 티를 냈더니 계속 얼굴을 들이댄다. 아 원빈아 진짜 그만... 성찬은 눈을 감아버렸다.


쪽.


“악 씨발 너 뭐해!”


아 욕해버렸다. 성찬은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나머지 한 손으로 볼따구를 잡았다. 원빈의 입술이 들렀다 간 곳이다. 너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말도 안 나왔다. 아니 얘는 뭔 뽀뽀를... 순진하게 묻는다. 이거 하면 안 돼? 얘 미친 거 아니야. 드라마가 애를 다 버려놨다. 이건 주인한테 애교 떨 때 하는 게 아니에요 원빈아 하하...


“형도 나한테 했잖아.”

“내가 언제.”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막 나한테 하고 갔잖아.”

“야, 그건 너 토끼일 때나 그랬지.”


그거랑 이거랑 같니? 그림이 영 이상했다. 애완동물과 주인이 아니라 그냥 남자가 남자한테 뽀뽀한 요상한 상황이었다. 역겹진 않았는데 그렇다고 썩 좋지도 않았다. 그냥 이상하다. 하여간 하지마. 너 이거 아무나한테 하면 큰일 나. 몰라, 치킨 먹자. 듣는 척도 안 하네...


토끼일 때 귀엽다고 너무 만졌나, 원빈은 손을 잘 탔다. 추운 걸 싫어하고 이불 속을 좋아하고 외로우면 안아달라고 난리다. 처음 데려왔을 땐 안 그랬는데 성찬이 너무 쪼물딱댔더니 그렇게 됐다. 그리고 그 업보를 돌려받는 중이다. 토끼가 안아주고 뽀뽀해주면 좋아서 친구들한테 자랑이나 했겠지. 토찬이 천재 같애. 그런데 이건 천재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었고, 이런 스킨십은 존나 곤란했다. 여자면 몰라. 진짜 아기에 키우는 아들내미였으면 그것도 또 몰라. 하지만 박원빈은 뭐지... 동거인?


“형.”

“왜?”

“뽀, 뽀뽀해버린다. 치킨 내놔.”

“아 하지마. 안 돼, 하지마, 하지마, 박원빈!”


통통한 입술을 식겁해서 밀어내다가 결국 대판 싸웠다. 싸운 게 아니라 혼낸 거지만. 싫다는 사람한테 뽀뽀하면 안 돼. 그거 범죄야. 너 범죄가 뭔지 알지? 드라마에서 봐서 알 거 아냐. 너 감옥 간다? 경찰이 잡아간다? 개유치한 거 알지만 박원빈 눈높이에 맞는 교육이었다. 원빈은 벽 앞에서 손을 들고 10분째 있었다. 눈빛 보소, 날 찢어 죽이겠네. 토끼가 아니라 고양잇과 맹수 같았다. 그래도 순해빠져서 물어 죽이긴커녕 손들고 째려보기만 했다. 팔 부들거리는 거 다 보이는데 자존심인가 한마디도 안 한다. 15분이 넘어가자 성찬은 져주기로 했다. 박원빈 손 내려. 1초 만에 절도 있게 내린다. 웃을 뻔했는데 잘 참았다. 너 뭐 잘못했어. 라고 물었는데 대답도 안 하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뭐야 어디 가.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이번엔 성찬이 두 시간째 이불장 앞에서 벌을 섰다. 손을 들진 않았지만 비슷한 내용의 사과문만 열다섯 번째 읊조렸다. 원빈아 제발 좀 나와... 너 거기서 살 거야? 형이 미안해... 잘못했어. 치킨 먹자... 치킨 먹자고... 응? 그걸로도 넘어오지 않았다. 입맛이 너무 고급화돼서 문제다. 전엔 사과로도 넘어올 듯했는데. 하여간 제 육아방식이 뭔가 잘못된 걸까 생각하다가 이미 엎질러버렸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불장을 갖다 버려야 하나. 문을 활짝 열면 원빈은 제게 눈빛 하나 주지 않고 다시 닫았다. 성찬이 100번 열면 원빈이 101번 닫았다.


결국엔 배고프면 나온다는 것을 안다. 굶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얘 독기로 봤을 때 아마 이틀이나 사흘 정도... 아니 씨발 미쳤나. 제 기준에 그건 아사 직전이었다. 겨우 찌워놨는데 빠지면 큰일 난다. 슬슬 저녁 시간이 지나가자 성찬은 그 앞에서 모든 것에 대해 무지성 사과를 했다. 온종일 먹은 건 빵 두 조각에 시식코너 음식이 다인데 배고플 게 뻔하다. 미안해. 혼낸 것도 미안하고 손 들게 한 것도 미안해. 형이 잘못했어... 뽀뽀한다고 감옥 안 가. 경찰이 안 잡아가. 형이 거짓말한 거야. 미안해. 혹시나 잠들었을까 이불장 벽면을 똑똑 두드렸다. 듣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한참 기다렸더니 축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뽀뽀 싫었어?”

“응? 아니야 아니야 안 싫었어.”

“나 형한테 성, 성범죄 저지른 거야?”

“아니라니깐. 안 싫었어.”

“형이 싫다며.”

“놀라서 그런 거지. 안 싫었다니까.”

“경찰한테 나 잡아, 잡아가라 그래...”


아니 진짜 안 싫었다니까 그러네. 싫었냐고 질문해놓고 원빈은 자기 할 말만 했다. 목소리는 무슨 모종의 사연을 겪은 처연한 여주인공 같았다. 덕분에 성찬은 좋지도 싫지도 않고 그저 당황스러웠던 뽀뽀에 환장한 사람처럼 굴어야 했다. 형은 좋았는데? 좋아서 하면 그건 범죄 아닌데? 경찰한테 잡아가라고 떼써도 못 잡아가요. 아 원빈이가 해준 뽀뽀 진짜 좋았는데. 너무너무 좋아서 기분이 날아갈 뻔. 형이 너 왜 혼냈겠어. 형 말고 다른 사람한테 할까봐 그런 거지. 어? 너 절대 그럼 안 돼. 형한테만 할 수 있는 거야. 살면서 아부도 이런 아부를 떨어본 적이 없다. 같이 사는 애완동물한테 별의별 생난리를 떨었다.


원빈은 이불을 여기저기 펼쳐놓으며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4시간의 시위가 드디어 끝났다. 성찬은 어색하게 웃으며 널브러진 이불을 안에다 곱게 처박았다. 이불장에 자물쇠를 걸어야 하나. 원빈의 표정은 그래도 뚱했다. 아직 덜 풀렸는지 입이 툭 튀어나와선 치킨 먹고 싶다는 소리도 안 했다. 성찬은 동그란 머리를 살살 쓰다듬고 볼을 주물럭거리다가 결국 입술을 덜덜 떨며 원빈의 볼에 뽀뽀했다. 이거 봐 하하. 형도 뽀뽀 좋아한다니까. 원빈의 삐죽 나온 입이 1센티 정도 들어갔다. 동그란 눈으로 눈치를 보는 그때 꼬르륵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치킨 먹을까?”

“...”

“응?”

“... 응.”



냉장고는 배 터져 죽어가는데 성찬과 원빈은 그걸 무시하고 치킨으로 배를 채웠다. 치약도 맵다던 애가 언제 이렇게 매운 걸 좋아하게 됐을까. 역시 한번 먹이기 시작한 게 죄겠지? 원빈이 숯불 양념치킨에 추가된 당면 사리를 씁씁거리면서 야무지게 먹었다. 놀랍게도 젓가락질은 정석이다. 성찬보다 더 사람 같다. 잘 먹으니 보기엔 좋았다. 드라마를 틀어놓고 맥주를 한잔하다 햇반까지 하나 말았다. 맛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먹기만 했는데 이러다 지갑 다 털릴 것 같았다. 원빈은 콜라를 홀짝거리다가 맥주에 관심을 가졌다. 맛있어? 맛은 없는데 시원한 맛에 먹는 거야. 맛없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관심을 가졌다. 이 호기심천국에 떨어진 중생은 뭐든지 겪어봐야 안다. 넌 이거 먹으면 안 돼. 그렇게 말하다가 스스로 좀 의문이긴 했다. 왜 먹으면 안 되지? 성인인데. 하여간 안 된다. 박원빈은 지금 사람이지만 토끼 출신이니까. 애완 동거인이니까.


“나도 한 입만.”

“먹어볼래?”

“웅.”


어차피 많이 먹지도 않을 것 같아서 한 모금 마시게 냅뒀다. 반응은 바로 나왔다. 원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억, 맛없어. 콜라가 더 맛있다. 당연한 소리를 하네... 맥주는 원래 쪼잔하게 홀짝거리면 맛대가리가 없다. 성찬은 반쯤 남은 맥주를 꿀꺽꿀꺽 다 털어 마셨다. 시원하구만. 기분 좋고 배가 부르고 알딸딸했다. 원빈도 배가 부른지 애진작부터 깨작거렸다. 앉아서 한참 동안 티비만 더 보다가 겨우 치웠다.



소파는 원빈의 고정 이부자리였다. 침대에서 둘이 자긴 좁으니 당연했고 원빈도 소파를 마음에 들어 했다. 잘 준비를 마친 성찬은 거실 불을 끄러 나왔다. 원빈은 소파에 앉아 거울을 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맨날 나르시시스트처럼 굴더니 왜 저러지.


“... 형.”

“왜?”

“이게 뭐야?”

“여드름이네.”


요즘 고기도 많이 먹고 배달 음식이나 밀가루를 많이 먹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래도 심각한 표정 지을 정도는 아니고 그냥 자그만 거 하나 난 건데 원빈은 시무룩했다. 이상해, 아파. 너 요즘 자꾸 나쁜 거 먹어서 그런 거 아냐, 엉? 놀렸더니 째려본다. 형도 같이 먹었는데 왜 안 나? 성찬이야 늘 그러고 살았어서 평소보다 나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원빈은 식성 변화가 드라마틱한 수준이었으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풀떼기에서 기름에 밀가루에. 성찬은 작은 여드름 위로 패치를 붙여줬다. 이거 붙이고 일찍 자면 내일 없어진다고 하니 원빈은 당장 이불을 덮고 누웠다. 불 끄고 가 형. 하는 짓이 웃겨 죽겠다.


잘 자는 줄 알았던 원빈은 오밤중에 성찬의 침대로 찾아왔다. 잠이 안 온단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으니 잠들 법도 했는데 못 자는 게 이상했다. 왜지? 낮잠은 두 시간 정도밖에 안 잤는데... 일단 베개를 들고 서성거리는 원빈을 옆에 눕혔다. 그렇게 토닥거리다가 꿈나라로 넘어갈 때쯤 원빈은 조잘조잘 말을 걸었다. 원빈아 너 잠 안 와? 웅. 눈을 감고 속으로 백을 세라고 했다. 정확히 백 초 뒤에 원빈은 잠이 안 온다며 성찬 쪽으로 돌아누웠다. 이 껌딱지 토끼 못살게 구네 정말... 마른 등을 토닥거리면서 원빈의 하루를 복기했다. 아침 먹고, 드라마 보고, 자고, 장 보러 갔다가, 흠...


“아. 너 오늘 커피 먹었지.”

“그거 먹으면 원래 잠 안 와?”

“응. 이제 먹지마.”

“맛있었는데.”


그래도 안 돼. 생애 처음 들이켠 카페인에 몸이 놀란 것 같았다. 제대로 각성빨을 받아서 애가 잠이 들지를 못했다. 덕분에 보호자인 정성찬도 같이 못 자고. 진심으로 이게 육아가 아니면 뭘까.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격이다. 새벽엔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렸다. 당연히 푹 잠들면 듣지도 못한다. 그런데 원빈은 이 새벽 중에도 정신이 말짱하니 무섭다고 난리였다. 성찬은 그런 건 무섭지가 않았다. 자자... 그가 이 순간 무서운 것은 피로 가득한 주말의 말미였다. 자고 일어나도 일요일일 테니 그 점은 천만다행이다. 성찬을 정말 무섭게 만든 것은 원빈의 상상력이었다. 형, 형. 일어나봐. 원빈은 새까만 허공 어딘가를 가리켰다.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귀신 같다고 오바를 떨었다. 야, 그냥 의자잖아. 아 왜 그래. 나 무섭다고. 사람 같이 생겼다고 말하자 진짜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 씨 잠 다 잤네.


“형 나 무서워...”

“아 박원빈 네가 귀신 얘기 해서 그렇잖아.”

“진짜 귀, 귀신 같애. 형 뒤에 뭐야?”

“아 하지마 진짜. 아 무섭다고... 악!”


쾅. 한참 귀신 얘기 하던 도중 타이밍 좋게 천둥이 쳤다. 성찬은 원빈을 끌어안고 소리를 질렀다. 하필이면 뒤에 뭐냐 어쩌고 소리를 해서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겠다. 하, 이 씨발, 무서워... 품 안에서 킥킥 소리가 들렸다. 형 바보야? 정성찬 겁쟁이. 어, 나 겁쟁이 맞으니까 박원빈 쉿, 그마안. 원빈이 시작한 거였지만 얘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혼자 있었으면 뜬 눈으로 밤새 무서워 뒈질 뻔했다.


“형 나보다 먼저 자면 안 돼. 무섭단 말이야.”

“야 너야말로 먼저 자지 마. 나도 무섭단 말이야.”


쫄보들의 쓸데없는 걱정 어린 대화 수준이 웃겼다. 결국 누가 더 먼저 자나 대결하다 직장인 버프 먹은 성찬이 깊게 잠들면서 일단락됐다. 늦게 잠든 원빈이 오후 2시에 일어난 덕에 그날은 푹 잤다.




*** 



원빈은 비장하게 섰다.


손 씻었고.

머리는 한껏 모아서 쥐꼬리만 하게 묶었고.

장갑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안 꼈다.


마지막으로 잘 보이는 곳에 패드를 세워놓으면 요리 시작할 준비 끝이다. 그래. 원빈은 오늘 요리라는 걸 해볼 참이었다. 성찬이 점심때 맞춰 배달시킨 샌드위치가 있지만 어제도, 그저께도 샌드위치만 먹어서 싫었다. 이것저것 검색을 하다가 도착한 종착역은 김치찌개였다. 초보 요리. 간단 요리. 자취생 요리. 계란후라이는 너무 쉬워서 패스했다. 해본 적은 없지만 누워서 식은 죽 먹기의 수준일 것이라고 본다. 이 말이 맞나. 원빈은 우선 재료에 따라 냉장고를 털기 시작했다. 삼겹살, 김치, 파, 두부, 가 없네. 두부가 없어서 김치찌개를 포기했다. 레시피가 지켜지지 않으면 요리가 대차게 망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비슷하지만 두부가 들어가지 않는 김치찜으로 메뉴를 변경했다.


“설탕이 어디 있지.”


“간장은 어디 있지?”


“식초는 어디 있는 거야...”


재료 뒤적거리느라 30분은 걸렸다. 맛술이 뭐지. 결국 원빈은 수화기를 들었다. 성찬이 급한 일 있으면 전화하라고 집 전화를 들여놓았다. 하여튼 이건 아주 급한 일이니까. 전화기 옆에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보면서 버튼을 꾹꾹 눌렀다. 성찬의 전화번호를 적어둔 것이다. 뚜루루, 뚜루루 하는 신호음이 몇 번 지나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형 맛술이 뭐야? 집에 있어?”

- 왜? 없을걸?

“업, 없다고?”

- 왜. 너 지금 뭐 해?

“김치찜...”

- ... 너 혼자서 요리한다고? 안 돼 너 다쳐. 하지마. 형이 집 가서 해줄게. 

“싫어. 내가 할 건데.”

- 씁, 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 바빠서 전화 길게 못 하거든? 너 진짜 하면 안 돼.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뚜뚜뚜 소리가 기분 나쁘다. 원빈은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맛술 같은 거 없어도 되겠지 뭐. 김치로 만든 건 다 맛있잖아.


제멋대로 만든 김치찜이 완성됐다. 칼은 쓸 일도 없었고 전부 가위로만 했다. 유일하게 아주 조금 위험할 뻔했던 것은 뜨거운 냄비 뚜껑을 맨손으로 열려던 것. 다행히 잡기 직전에 생각이 나서 행주로 잘 감싸 잡았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입 떠먹었다. 좀 많이 달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 사실 설탕을 넣다가 살짝 쏟아버렸다. 그래도 첫 요리치고는 훌륭한 수준이었다. 그릇에 예쁘게 덜려고 했는데 고깃덩이가 추락하면서 국물이 여기저기 튀었다. 당황하지 않은 척 슥슥 닦았다. 음 맛있겠다. 요리하느라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것 같았다. 좀 달고 짠 것 같지만 그런대로 밥 한 공기와 맛있게 먹었다. 나 요리에 소질 있을지도 몰라. 다음엔 뭘 해볼까.


성찬은 퇴근길에 맛술을 사 들고 귀가했다. 벌써 혼자 다 만들어 먹었는데 정말로 본인이 해줄 생각이었나보다. 원빈은 식사 후 등따시게 누워 졸다가 도어락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성찬은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너 진짜 혼자 요리했어?”

“응. 심지어 맛있어.”

“신발장에서부터 김치 냄새 장난 아닌데. 부엌은 또 왜 이렇게 엉망이야.”


성찬은 주방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원빈은 눈치를 보면서 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정리 귀찮아... 사실 요리가 재밌어 보여서 했을 뿐 청소는 전혀 재밌지 않았다. 처음 해봐서 그런지 설거짓거리만 한 바가지 나왔고 가스레인지 주변엔 빨간 국물이 여기저기 튀었다. 조금 쓰고 남은 대파도 그대로 나와 있었고 김치통은 넣는 걸 깜빡했다. 식초도, 간장도. 그냥 빨리 먹고 싶어서 먹고 치운다는 게 또 졸려서 그만...


원빈은 정리하는 성찬 주변을 기웃거렸다. 서, 설거지 내가 할게. 미안. 알아서 고무장갑을 척척 끼고 설거지를 했다. 뽀득뽀득 잘 닦이라고 뜨거운 물을 틀고 수세미엔 퐁퐁을 두 번이나 짰다. 아이고, 그, 그릇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네. 성찬은 열심히 애쓰는 제 모습을 보다가 픽 웃어버렸다. 다행히 화 안 났나보다.


“토찬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아 좀.”

“안 다쳤지?”

“가위만 썼어.”


안 다쳤으면 됐다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재밌었어? 응. 원빈은 뿌듯한 웃음을 지으면서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성찬이 방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올 동안 식은 김치찜을 데웠다. 맨날 배달 김치찜만 먹다가 직접 만들어 먹으면 얼마나 건강해. 성찬도 좋아하는 음식이니 저녁으로 무려 박원빈 표 김치찜을 먹여줄 생각이었다. 늘 성찬이 간단하게 요리해준 음식만 받아먹었는데 보답할 때가 왔다. 형도 이런 건 못할걸. 저 형이 할 줄 아는 건 간장계란밥, 샌드위치, 라면, 김치찌개, 된장찌개... 어라, 생각보다 많네.


성찬을 식탁에 앉혀두고 음식을 정성스럽게 그릇에 담았다. 형 맛있는 거 많이. 고기 좋아하니까 고기 많이 담고. 밥은 못하지만 햇반을 돌렸다. 성찬은 그닥 기대는 하지 않는 눈치였다. 분주하게 준비하는 저를 두고선 은근슬쩍 냉장고를 뒤적이는 모습이 그랬다. 맛있다니까 그러네. 원빈은 수저를 든 성찬을 부담스럽게 쳐다봤다. 입안으로 밥과 고기 한 조각이 들어간다. 형, 어때? 맛있지. 맛있지 않아? 성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맛있다 원빈아. 호탕하게 웃어대는 게 묘하게 사람 마음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그냥 좋아하면 될 걸 뭐 저렇게까지... 그렇게 맛있나?


“만들다가 설탕을 쏟았나?”

“... 어떠, 어떻게 알았어?”

“완전 밥도둑이야.”

“... 짜서?”

“응.”

“그냥 맛없다고 해.”

“아니야 맛있어.”


입에 와구와구 밥을 밀어 넣는다. 뭘까 저 알 수 없는 리액션. 짜고 달다고 해놓고선 표정은 싱글벙글했다. 하긴 뭐 맛이 없었으면 안 먹었겠지. 원빈은 그 옆에 얌전히 서서 성찬을 구경했다. 제 표정이 뭐 얼마나 험악했는진 모르겠지만 성찬의 혀는 점점 더 길어졌다. 아니, 원래 김치찜이 짜고 단 맛에 먹는 거지. 근데 진짜 맛있는데? 나 밥 하나 더 먹을래. 원빈이 요리 왜 이렇게 잘해? 어쩌다 보니 히히 웃고 있었다. 잘 먹는 게 보기 좋아서 얼른 햇반 하나를 더 돌려서 갖다줬다. 많이 먹어 형. 냄비에 엄청 많아. 정성찬 입맛이 거지 수준도 아닐 텐데 저 정도로 잘 먹는 걸 보면 다행히 입맛에 맞는 것 같았다. 원빈이 제 소질을 깨닫고 요리에 취미를 두기 시작한 첫날이었다.



***



“형.”

“왜?”

“김치가 다 떨어졌어.”

“아... 하하. 그래?”


아마도 그 이유는 원빈이 이후로 주구장창 김치찜만 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물론 맛은 점점 더 성장했다. 이제 원빈의 김치찜은 짜고 달고 지적할 것도 없이 맛있었다. 문제는 성찬의 리액션이 너무 화려했나, 이러다 평생 김치찜만 먹게 생겼다. 주 5일 김치찜. 배달시켜 먹자고 하면 해 먹는 게 더 건강한데 왜 시켜 먹냐고 한다. 언제는 치킨 먹자고 그렇게 조르더니 인제 와서 건강에 집착하는 척 장난 아니었다. 물론 박원빈의 첫 김치찜은 웬만한 배달음식보다 자극적이었다. 그걸 먹고 건강해질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원빈이 오기 전까지 김치는 냉장고 한 칸을 장식하는 식품이었다. 김치찌개, 볶음밥 정도 하면 먹고. 반찬으로는 하도 안 먹어서 한 달에 한 포기 먹을까 말까. 당연히 원빈도 생김치는 안 먹는다. 편식쟁이라서 2차 가공을 해야만 먹고 요즘은 그게 김치찜이었다. 성찬은 고민했다. 본가에 김치 받으러 갔다 올까 말까. 하지만 받아 온다면 난 당분간 몸의 수분이 죄다 김칫국물로 변할 거야. 일단 며칠 쉬다가 다음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원빈아.”

“응.”

“오늘 저녁에 치킨 먹을래?”

“냄비에 긴, 깅치찜 남아 있는데.”

“아 치킨 먹자아... 우리 치킨 안 먹은 지 좀 오래되지 않았어?”

“웅... 그렇긴 해.”

“시키면 안 돼?”

“음... 그래.”


누가 물주인지 모르겠다. 원빈을 졸라서 겨우 저녁은 치킨으로 합의됐다. 남은 김치찜은 내일의 제게 미뤘다. 내일의 성찬아 힘내. 핸드폰을 들고 원빈과 번갈아 쳐다봤다. 이건 아주 중요한 사안이니까. 뭐 추가해? 우동 사리, 무조건. 떡은? 떡, 떡은 별로. 알았어. 까다로운 토끼 취향 잘 맞춰서 사리 추가를 했다. 떡은 별로시란다. 주문한 뒤 얼른 씻고 나오겠다며 원빈에게 리모컨을 쥐여줬다. 밥친구 잘 골라놓으라고 하고선 씻으러 들어갔다.


다 씻고 나오자 원빈은 영화를 보고 있었다. 재밌어 보이길래 틀었다고 한다. 그렇구나. 배달 완료 알림을 보면서 현관문 앞의 치킨을 들고 들어왔다. 오랜만에 먹는 치킨이 너무 기대돼서 영화 제목 같은 건 별로 신경이 안 쓰였다. 냉장고 한켠에 둔 맥주를 꺼내는데 웬일로 원빈이 자기도 먹고 싶다고 말했다. 너 또 그래놓고 한입 먹고 버릴 거지. 아니, 아닌데. 박원빈 맨날 딱 한입 먹고 아 맛업따 이러잖아. 오늘도 할 짓이 너무나 뻔하다. 성찬은 나눠 먹을 생각으로 한 캔만 꺼냈다. 한 모금 마시게 냅두면 맛없다고 알아서 나가떨어진다.


영화는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먹는 행위에 집중했다. 원빈도 마찬가지였다. 시키자고 했을 땐 시큰둥해 놓고선 막상 먹으니까 맛있다고 야무지게 먹는다. 배에 치킨과 맥주가 들어차서 반쯤 불러갈 때 고개를 들고 영화를 봤다. 분명히 초반엔 참 분위기 평화로웠는데 뭔가 이상했다.


“빈아 이거 제목 뭐야?”

“기억 안 나. 뭐였지.”


콧물을 훌쩍이면서 씁씁거리는 원빈에게 티슈를 뽑아서 건네줬다. 성찬은 리모컨을 들고 영화 정보를 확인했다. 제목은 완전 처음 듣는 영화였고 카테고리는 공포/호러/미스터리... 아 미쳤어? 어쩐지 표지부터 존나 수상하더라. 성찬은 당장 보던 영화를 끄려 했다. 그런데 원빈이 한창 재밌는데 왜 끄냐며 리모컨을 뺏어갔다. 어이가 없었다. 보고 있지도 않았으면서. 아 나 이런 거 진짜 못본단 말이야. 밤에 잠 못 자. 빨리 꺼. 제발.


“별로 안 무서운데?”

“너 귀신 어떻게 생긴지 알아?”

“본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아.”

“너 보면 진짜 깜짝 놀랄걸.”

“뭐래. 귀신 같은 거 세상에 없잖아. 형 쪼, 쫄보야? 겁쟁이야?”

“어 나 쫄보야 겁쟁이야. 그러니까 제발 끄자...”


귀신 같은 거 세상에 없긴. 원빈은 전에 제 침대에 누워서 귀신 얘기를 그렇게나 해놓고 잘도 그런 소릴 했다. 성찬도 딱히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었으나 그냥 귀신 생긴 꼬라지가 무서웠다. 그냥 무섭게 생겼다. 그런 징그러운 생김새는 보기도 싫다. 결국 손으로 시야를 가리고 계속해서 먹방이나 찍기로 했다. 원빈이 무서운지 손을 들어 가리려고 하면 무지 놀렸다. 어, 가리면 안 되지. 너 안 무섭다며. 셀프 쫄보 선언의 이점이다. 여전히 사운드는 험악했지만 열심히 치킨 씹다보면 잘 들리지도 않는다.


배가 불러서 더 먹지는 못하겠고 원빈의 눈치나 봤다. 솔직히 방에 들어가고 싶었다. 원빈은 누가 봐도 겁먹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얘도 싫고 나도 싫은데 우리 이거 왜 보고 있는 거야 원빈아 제발. 센 척하는 건 웃음밖에 안 나왔다. 형 이것도 못 봐? 지, 진짜 심각하네. 으휴. 내가, 내가 쫌 더 낫다. 형 쓰러지면 내가 지켜줄게. 성찬은 응 알겠어 고마워 원빈아 하며 실실 웃었다. 무섭긴 한데 웃기고 귀엽고, 공포영화 틀어놓은 덕에 박원빈 보는 재미가 은근 쏠쏠했다. 세상에 이런 용감한 토끼가... 박원빈 대단하다. 멋있어. 반할 것 같애. 원빈의 광대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렇게 성찬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갑툭튀 장면이 나왔다. 센 척하더니 꼴좋다 너도 무섭지, 완전 쫄았지. 이렇게 얄미울 정도로 놀려주려고 했다. 역시나 원빈은 처음 보는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토끼로 변했다. 


“야 원빈아, 원빈아. 거기 안 돼. 잠시만.”


티비 화면은 몰입감을 높이려는 섬뜩한 음악과 장면으로 점철됐다. 그런데 성찬은 지금 그런 것에 몰입이 하나도 안 됐다. 놀랍게도 무섭지도 않았다. 좀 나와 원빈아... 그다지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원빈은 귀신을 보자마자 꺅 소리를 내지르더니 토끼로 변했다. 바닥으로 흩어진 잠옷 사이에서 다다다 뛰어나오더니 성찬의 고간에 고개를 처박았다. 심지어 파고든다. 무서워서 그런 건 알겠는데 제발 좀 나와주라. 곤란한 표정으로 토끼를 떼어내려다 그대로 티비에서 한 번 더 갑툭튀 한 귀신과 눈이 마주쳤다. 아악! 이번엔 성찬이 소리를 질렀다. 원빈이 깜짝 놀랐는지 몸을 소스라치며 티셔츠 안을 파고든다. 그러니까 정신과 몸이 아주 딴판이었다. 무서워 죽겠는데 간지럼 참느라 강제로 웃었다. 야, 야, 학, 원빈아. 아 좀 나와. 간지러워.


“원빈아 다시 사람 돼 봐 빨리. 형 무서워...”


생애 처음 본 갑툭튀 장면에 과한 충격을 먹은 모양이다. 원빈은 옷 안에서 몸을 움츠렸다. 성찬은 다급하게 리모컨을 찾았다. 하필이면 지금 어디다 놔둔 건지 보이질 않았다. 아이 씨발. 그냥 원빈을 안아 들고 방으로 도망쳤다. 진짜 괜히 봤다. 억지로라도 아까 껐어야 했는데.


귀신 생김새의 여파로 아직 제 심장도 벌렁거렸지만 원빈부터 달래야 했다. 여전히 티셔츠 안에서 벌벌 떠는 작은 토끼를 꺼내서 침대에 올려놨다. 어이고, 울었네. 토끼도 울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새까만 눈에 하찮은 눈물 한 방울이 톡 매달려 있었다. 뭔가 웃기고 귀여워서 사진을 한 장 찍고 싶었는데 참았다. 귀가 뒤로 바짝 넘어갈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아이고 토찬이 놀랐어. 왜 울어. 그러게 형이 보지 말자고 했지. 심장이 빠르게 뛰는지 분홍빛 코에서 색색 내쉬는 숨이 급했다. 아기 안는 것처럼 품에 안고 등을 슥슥 훑어내렸다. 그러니까 빨리 좀 돌아와 보라고. 성찬도 지금 상황이 매우 무서웠다. 말도 못 하는 토끼는 한마디도 안 하고 오직 제 말소리만 적적한 방 안을 채웠다.


결국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방 안에서 버텼다. 휴대폰이고 뭐고 다 거실에 놔두고 온 탓에 할 수 있는 건 원빈이 하루종일 쥐고 사는 패드가 다였다. 그걸로 이 공포감을 떨치려 신나는 노래 플레이리스트를 빵빵하게 틀어놓고 토끼를 안았다. 성찬은 영화가 끝나자 소파 쿠션들 사이에 숨어 있던 리모컨을 찾아 티비를 껐다. 근데 얘 왜 돌아올 생각을 안 하지. 원빈은 여전히 토끼 모습이었다. 충분히 진정된 것 같은데 토끼 꼬라지 그렇게나 혐오하는 애가 사람이 될 낌새도 안 보였다.


“원빈아 너 사람으로 못 돌아오겠어?”


말은 잘 알아듣는지 토끼가 고개를 파닥파닥 끄덕였다. 어쩌지. 얘 이러다 평생 토끼로 살다 가는 거 아니야? 운명이라는 게 참 잔인했다.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 토끼 주제에 고기며 빵이며 잡식 다 됐는데 이젠 또 풀떼기나 씹어야 할지도 모른다. 배달의 흔적을 다 치우고 성찬이 양치까지 하고 나올 동안에도 여전히 박원빈은 없었다. 그저 자그마한 토끼 한 마리가 침대에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이젠 얘를 사람 취급해야 할지 토끼 취급해야 할지도 아리송했다. 전엔 침대에도 못 올라오게 했는데 이 짐승 안에 원빈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불쌍했다. 하필이면 오늘 공포영화를 봐서 혼자 자기도 무서울 텐데. (사실 성찬이 무서웠다)


토끼를 옆에 두고 누웠다. 떨어뜨려 놓았더니 무서운지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토찬아. 형 무서워. 얼굴 보여줘. 침대 밑에서 뭐가 튀어나올까 도저히 바닥을 못 바라보겠다. 징징거리자 원빈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귀여워서 좀 낫다. 실실 웃고 있었는데 배 위를 우다다 뛰어다녔다. 장기 다 털리겠다. 억, 야, 왜 그래. 토찬아 가만히 있어. 그 말에 더 세게 쿵쿵 뛰어다녔다. 토끼의 무게가 명치를 짓누르자 말도 잘 안 나왔다. 헉, 원비나... 그랬더니 갑자기 벌린 팔 사이로 내려와 얌전하게 팔베개를 베고 누웠다. 성찬은 제가 뭘 잘못했나 곰곰이 생각했다. 아.


“토찬이?”


악. 솜뭉치 같은 발이 얼굴을 퍽 때렸다. 토끼 주제에 아파 죽겠네.





다음날이 돼도, 또 그다음 날이 되어도. 원빈의 얼굴은 똑같았다. 털로 뒤덮인 맹하고 귀여운 얼굴. 토끼다. 사람이 아니니 더 이상 나쁜 음식은 먹일 수가 없었다. 원빈의 주식은 다시 건초와 당근으로 바뀌었다. 분명 토끼인데도 식욕 떨어진다는 시무룩한 모습이 선해서 웃기다. 아니, 안 웃기다. 몇 달 동안 시끌벅적하게 살다가 갑자기 혼자 살려니 이상했다. 혼자 산 기간이 훨씬 더 긴데도 그랬다. 밤마다 작은 코와 귀를 쓰다듬어주면서 토찬이, 내일은 꼭 원빈이로 돌아와. 그렇게 속삭여주는데도 안 돌아왔다. 벌써 일주일째인가.


원빈은 활동성이 많이 줄었다. 요즘 많이 우울한 모양이다. 거울 앞에 돌처럼 앉아 있는 게 웃긴데 안쓰러웠다. 안 그래도 집안에서 할 건 드라마 보기밖에 없을 텐데 요즘은 그것도 잘 안 했다. 지켜보는 제가 더 힘 빠진다. 결국 성찬은 심심할 원빈을 위해 본가로 구조요청을 넣었다. 하루 정도만 출근 전에 맡기고 퇴근하면서 김치와 함께 데려올 생각이었다. 완벽하네. 나름 토끼를 위한 유치원 종일반이랄까.


- 토끼? 성찬이 너 동물 키워?

“응. 근데 얘 엄청 똑똑해. 말 잘 듣고 깨끗해서 냄새도 안 나. 아 엄마 제발 하루만.”

- 결혼하라고 집 해줬더니 별걸 다 키우네.


대충 웃어넘겼다. 원빈이 평생 토끼로만 산다면 모르겠지만 왠지 그러진 않을 것 같아서 잘 모르겠다. 결혼은 먼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일시적 보류 상태의 지속이다. 내가 얘 데리고 결혼을 어떻게 하지. 엄마는 집에서 키우면 냄새난다며 당장 갖다 버리라고 난리였다. 아 엄마 동물을 어떻게 갖다 버려 그거 유기야.


- 어휴 나도 모르겠다. 지금 집에 나린이도 있는데.

“나린이가 있어? 나린이 토끼 엄청 좋아할걸. 애들이 또 동물에 환장하잖아.”


나린이가 누구냐면 정나린. 어린이집 입학도 안 한 3살짜리 조카다. 맞벌이 부부니 최근 들어 엄마가 나린이를 자주 맡아주고 있었다. 성찬은 통화를 하며 원빈의 동그란 엉덩이를 관찰했다. 무슨 얘기 나누는 줄도 모르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내일 아침이면 제 조카와 신명 나게 놀고 있을 테니 잘 쉬어둬야 할 것이다.


평소보다 한 시간은 더 일찍 일어난 성찬은 원빈을 깨웠다. 잠이 덜 깨서 동그란 눈을 끔뻑거린다. 똘똘해서 잘 알아듣겠거니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원빈아. 너 집에 하루종일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 본가에 가 있어. 놀고 있으면 형이 퇴근할 때 데리러 갈게. 형이 조카가 있는데 이름이 나린이거든? 정나린. 오늘 가면 나린이도 있을 거야. 원빈이는 다 컸으니까 나린이 잘 돌봐줄 수 있지? 설명을 듣던 원빈은 잽싸게 도망가려 했다. 어허. 꼭 붙잡아서 이동형 케이지에 넣었다. 나린이는 형과 형수님의 좋은 점만 꼭꼭 빼닮아서 무지 귀여웠다. 원빈도 일단 보고 나면 마음이 바뀔지도 몰랐다.


원빈은 차로 이동하는 내내 삑삑 울었다. 아이 거참 시끄럽네. 너무 싫어해서 괜히 데리고 나왔나 싶기도 했다. 그래도 가끔 이런 기분 전환이라는 게 필요하니까. 본가에 도착해서 원빈을 풀어줬다. 케이지 문을 열었는데도 꿍해서 안 나오고 처박혀 있었다. 엄마는 전화로 그렇게 갖다 버리라고 하더니 막상 원빈을 보는 눈빛이 귀여워하는 듯했다. 어머, 진짜 토끼네. 그럼 가짜야?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깬 나린은 현관으로 아장아장 걸어 나왔다. 다 새는 발음으로 삼촌 하고 부른다. 아구 나린이 깼어? 안아 들고 삼촌한테 뽀뽀해달라며 난리를 피웠다. 엄마가 등짝을 때리면서 출근이나 하라고 한다. 나린은 히죽히죽하더니 볼에 자그만 뽀뽀를 해줬다. 예뻐 죽겠다. 성찬은 나린을 내려놓고 챙겨온 것들을 꺼냈다.


“엄마, 이거 원빈이 밥. 그릇에 담아두면 알아서 먹어.”

“넌 무슨 토끼한테 원빈이야? 그냥 네 이름 따서 토찬이 하면 되지.”

“... 엄마 그거 절대 안 돼. 원빈이한테 절대 토찬이라고 부르지 마.”


모전자전인지 작명 센스가 비슷했다. 저는 뒷발차기 몇 번이나 후려 맞아도 상관없지만 나린이나 엄마가 맞으면 큰일이니 단호하게 주의를 줬다. 그래도 원빈은 나름 순해서 아기를 때리진 않겠지만... 온종일 토찬이라고 부르면 스트레스가 더 쌓일지도 모른다. 삐졌는지 죽어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 원빈을 안고 쪽쪽 뽀뽀했다. 원빈아 재밌게 놀고 있어. 형이 퇴근하고 얼른 데리러 올게.



 *** 



원빈은 요근래 제가 이렇게까지 뛰어다닌 적 있었던가 생각했다. 나린은 작고 귀여웠다. 이 꼬라지인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렇게 작고 귀여운 애가 은근 포악한 기질에 힘이 넘쳤다. 나린은 자꾸만 원빈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어차피 따라잡지도 못하면서 계속 다가와서 결국엔 못살게 굴었다. 처음엔 낯을 가리나 머리 좀 쓰다듬고 말길래 가만히 있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두 시간쯤 지나자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여기저기 껴안고 들고 정성찬이랑 하는 짓이 똑같았다. 차이는 어린애다운 발칙함이 조금 더 섞여 있다는 것. 나린은 손목에 조그만 슈슈를 매달고 있었는데 그걸로 원빈과 공주 놀이를 할 심산이었다. 두 귀가 분홍색 천에 꽁꽁 묶여 앞발을 허우적대던 원빈은 지나가던 성찬의 어머니께 겨우 구출됐다.


“나린아. 이러면 안 돼요. 이렇게 하면 토끼가 아프겠지? 얼른 풀어주고 토끼한테 미안해~ 하고 사과해.”


나린은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원빈은 어린아이의 사과를 아량 넓게 받아줬다. 작은 손에 그것보다 더 작은 제 앞발을 얹었다. 괜찮아. 하여튼 그래서 그 말을 믿었는데 애들의 체력은 끝도 없다. 남자애도 아니고 뭐가 이렇게 활발해? 거실에 카펫이 깔려 있어 다행이었다. 맨바닥이었으면 벌써 미끄러져서 몇 번이나 엎어졌을 게 뻔하다. 돌봐주긴 지랄... 이러다 내가 죽겠어. 한참을 뛰어다니다 지치면 나린에게 붙잡혀 껴안고 쓰다듬고 귀를 잡아당기고... 밥 좀 먹으려고 하면 고사리 같은 손이 다 뺏어가서 자기가 주겠다며 난리를 쳤다. 성찬의 어머니는 원빈과 나린을 눈앞에 두고 밀린 드라마를 시청하느라 바빴다. 심심의 악마인 손녀가 오랜만에 투정 없이 혼자(가 아니라 토끼와) 잘 놀고 있으니 편해 보였다. 그녀가 할 일은 제시간에 맞춰 나린의 끼니를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원빈은 나린이 간식이나 밥을 먹을 시간에 육아 퇴근하고 드러누워 낮잠을 잤다. 나린은 밥을 먹는 중간에도 계속 원빈을 쳐다봤다. 만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지만 할머니의 필사적인 방어에 다 먹을 때까지 식탁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원빈은 그게 참 고마웠다.


늦은 오후, 드디어 에너지가 찔끔 고갈된 나린은 잠들었다. 품 안에 토끼를 껴안고. 어휴 이것도 지 삼촌이랑 똑같네. 원빈은 나린이 깊게 잠들자 그 안에서 나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성찬의 어머니는 주변을 맴도는 원빈을 보자 당근을 작게 잘라주셨다. 아싸 당근. 오늘은 성찬이 건초만 챙겨와서 당근을 하나도 못 먹었다. 그녀는 원빈을 상냥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원빈이 귀엽네. 토낀데 잘생겼다야. 왜 원빈인지 알겠네. 오늘 나린이랑 노느라 고생했어. 혼잣말이 많은 스타일인지 계속 말을 걸었다. 코앞에서 방긋방긋 웃던 성찬의 어머니는 다시 소파에 앉아서 드라마를 시청했다. 원빈은 그 모습을 멀리서 쳐다보다가 소파 위로 뛰어 올라갔다. 옆에 퍼질러 눕자 부드러운 손길이 몸 위로 내려앉았다. 잘 자라고 들려주는 음성은 자장가의 노랫말처럼 들렸다. 묘하게 편안하고 저절로 하품이 나온다. 졸리다. 나도 좀 잘까...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에 깼다. 원빈은 번쩍 일어나서 현관으로 뛰었다. 일어서서 중문을 박박 긁자 신발을 벗던 성찬이 웃었다. 토찬이 잘 있었어? 그놈의 토찬이 소리는 진짜... 자기 엄마한텐 절대 하지 말라고 하더니 정작 본인은 계속 그렇게 부른다. 내가 토찬이 싫다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성찬이 원빈을 품 안에 안아 들자 시야가 높아졌다.


“얘 너 오는 줄 알았나 봐. 갑자기 뛰어나가서 얼마나 놀랐는지.”

“원빈이 똑똑하다니까.”

“다음에 또 데리고 와. 나린이가 엄청 좋아해.”


싫어. 싫어. 원빈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부의 의미로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계속 처박았다. 성찬이 웃는다. 알았어 알았어. 뭐가 알겠다는 건데. 대답 똑바로 해. 다음에 또 오긴 싫었다. 성찬의 어머니나 나린이나 둘 다 좋은 사람들이지만 너무 피곤했다. 빨리 집에 가서 성찬과 쉬고 싶었다.


바로 갈 줄 알았더니 저녁 먹고 가라는 성찬의 어머니께 붙잡혔다. 해가 지자 나린의 부모까지 도착해서 갑자기 분위기는 가족 식사가 됐다. 답 없는 인간들의 손길도 정성찬 포함 무려 네 배. 원빈은 기가 쪽 빨려서 드디어 드러누웠다. 식탁 아래에서 성찬의 발을 툭툭 건드리며 빨리 가자고 졸랐다. 보다 못한 성찬이 저를 다리 사이에 앉혀두었는데 성찬의 형에게 밥 먹는 중엔 오지 말라며 된통 혼났다. 무서워. 저를 변호해주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어서 그리 억울하진 않았다. 아 형 왜 그래. 너 원빈이한테 왜 그렇게 못되게 말하니? 전자는 성찬이고 후자는 성찬의 어머니였다. 오늘 정나린 놀아주느라 뺑이 친 보답이 여기서 돌아오는구나. 당근 조각을 씹어 먹으며 식사가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성찬은 김치를 한 통 가득 챙겼다. 그의 어머니는 의아하다는 어투였다. 너 김치 잘 안 먹는다며. 웬일이래? 원빈이가 김치를 좋아하거든. 웃기고 있네. 결국 김치며 반찬이며 올 때보다 갈 때 짐이 더 많아졌다. 원빈은 이동형 케이지 안에서 무릎을 굽힌 성찬의 어머니와 눈을 마주쳤다. 원빈아 잘 가. 다음에 또 와라. 할머니가 당근 많이 줄게. 원빈에게 그녀는 할머니보단 엄마 또래에 가까웠다. 앞발을 얹고 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세요.


“어머 얘 나한테 인사한다.”


모자가 쌍으로 오바병이 있나보다. 인사 한번 했다고 좋아서 막 웃는다. 눈웃음이 성찬과 쏙 빼닮았다. 초승달처럼 사르르 접힌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마음이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해졌다. 내가 지금 인간이었다면... 따라서 웃는 모습이 다 들켰겠지.


집에 가는 길엔 계속 잤다. 피곤해서 자도 자도 끝이 없었다. 정신 차렸더니 어느새 아늑한 우리집이었다. 우리집. 힘 빠지게 걸어 침대 위에 자리 잡았다. 성찬은 참 말이 많았다. 대답도 못 하는 토끼를 앞에 두고 혼자서 쫑알댄다. 원빈아 오늘 어땠어? 나린이 귀엽지. 피곤해서 듣는 둥 마는 둥 했더니 대놓고 저를 놀렸다. 아 다음에 또 갈까? 앞발로 얄밉게 웃는 얼굴을 퍽퍽 쳤다.


성찬이 오늘 저를 왜 본가에 맡겼는지 안다. 한동안 속상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지냈다. 인간으로 바뀌었던 첫날처럼 금방 다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게 마음대로 안 됐다. 토끼로 변하는 건... 너무 무섭거나, 떨리거나, 놀라거나 하면 변하는 것 같긴 한데. 사람으로 변하는 건 어떻게 해야 하지. 자유자재면 모르겠는데 조절이 불가능하니 문제였다. 앞으로도 이렇게 멋대로 휙휙 바뀌면 곤란하다. 좀 간절함이 부족했나? 저 제에발 다시 사람 시켜주세요. 근데 그럼 앞으로도 사람 되고 싶을 때마다 이렇게 정성 들인 기도를 해야 하는 건가. 원빈은 졸린 눈을 깜빡였다. 아직 잘 시간은 멀었는데 오늘 왜 이러지. 낮잠도 많이 잤는데 이상하다. 성찬은 폰을 하다가 꾸벅꾸벅 조는 원빈을 발견하곤 편하게 눕혔다. 콧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최근 들어 꼬박꼬박 해주는 밤인사를 했다.


“잘 자 토찬이. 내일은 꼭 원빈이로 돌아와.”


또, 또 그놈의 토찬이 소리...



***



원빈은 오래된 이야기 속을 거닐었다. 그저 너무 오래돼서 스스로도 잊을 만큼 까마득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노비 문서는 어지럽게 이곳저곳을 떠돌다 정씨 가문의 손에 들어갔다. 원빈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행랑채의 작은 처소에서 살게 됐다. 행랑채엔 다른 노비들도 많이 살았다. 여자 식솔들은 대부분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아 또래보다 조금 작은 원빈을 귀여워했다. 열다섯이면 사실상 다 컸지만, 그냥 저도 잘 모르겠다. 왜 귀염받는지. 저더러 그 시커먼 남정네들과 어떻게 자냐며 어머니와 같은 방에서 살라 그랬다. 마님도 그냥 넘어갔다. 깔끔하니 원빈이야 좋긴 했다. 온돌이 잘 되어 있어 춥지도 않았다. 원빈이 하는 일은 아주 잡다했다. 나무를 떼러 산에 가기도 했고, 그 집 막내아들과 말동무를 하기도 했고, 또 종놈을 해야 하기도 했고, 매를 대신 맞아주기도 했다. 그래도 집안이 좋아 그런지 얼마나 똘똘한가 몰라. 원빈의 종아리는 늘 멀끔했다. 기껏해야 한두 대 맞은 날도 달콤한 간식들을 챙겨주니 그것도 좋았다. 마을 잔치는 해야 먹을까 말까 한 것들인데 정 도령보다 제 입에 들어간 양이 더 많았다.


“아프겠다. 미안.”

“저 괜찮은데요? 어릴 적부터 여, 여기저기 처맞고 다녀서. 맷집이 세거든요.”


그래도 미안하다며 접시에 쌓인 밀과를 제 쪽으로 밀어주었다. 도련님도 달콤한 거 하면 환장을 하는 걸로 아는데 이런 날은 꼭 대부분 양보했다. 자기는 원할 때마다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니 너나 남들 안 볼 때 많이 먹어두라고 했다. 원빈은 종놈 주제에 포동포동하게 살쪄갔다.


사실 제 이름은 이때 원빈이 아니었다. 지었다 하기도 애매하지만 어머니가 저를 가졌을 당시 주인이 준 이름이 있었다. 빈자. 빈할 빈, 아들 자. 원빈은 얼굴도 기억 안 나는 그를 병신이라고 불렀다. 병신 같은 놈, 사람 이름을 그딴 식으로 지으니까 결국 지가 가난해져서 노비를 팔아치우는 것 아닌가.


원빈은 열여섯 때 정 도령이 지어준 이름이다. 양반집 아들이 열심히 학문을 깨우쳐 지어주는 것이 고작 종놈 이름이었다. 말이 안 되는 것을 아니 둘이 있을 때만 그렇게 불렀다. 빈자야 너는 얼굴은 부해 보이는데 빈할 빈자라니, 아주 안 어울리는구나. 오히려 번쩍번쩍 빛이 나니 빛날 빈자는 어떠냐? 부유하게 생겼다는 칭찬은 살면서 처음 들어봤다. 엄마를 닮아 곱상하게 생겼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여기저기 땡볕에 돌아다니고 일만 하니 제 얼굴은 타서 시커멨다. 그에 비해 정 도령은 고생 한번 해본 적 없을 것 같은 하얀 얼굴에 하얀 손을 가졌다. 정 도령은 눈이 삐었는지 태어나서 본 양갓집 규수들보다도 네가 더 예쁘다며 한 글자를 덧붙였다. 으뜸 원.


“원빈아.”


그렇게 부르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도련님, 바깥에서 그런 말씀은 삼가세요. 정말 큰일 납니다...


몇 해가 지나가니 노비 팔자 상팔자가 따로 없었다. 역시 노비도 대감집 노비가 좋다고 하더니 제 인생에 이런 호사가 다 있었다. 힘들어 죽겠고 살기 싫고 하는 마음이 안 들었다. 양반이라지만 아랫것들 먹고사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 곳간이 넘쳐나서 집안 식솔들을 굶기는 일도 없었고, 행랑채에도 기꺼이 땔감을 아끼지 않아 춥지 않았고, 과하게 일을 시키지도 않았다. 도련님과 있으면 주인이 아니라 편한 친구를 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늘 부엌일을 하느라 바빴다. 손재주가 좋아서 가끔 마님 치장을 돕기도 했다. 밤이면 주인이 춥지 않도록 수시로 나가 아궁이에 장작을 집어넣었다. 원빈은 새벽 중에 요의가 들어 깼다. 뒷간에 가려는데 마침 어머니가 밖에서 들어오셨다. 장작을 보충했나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걸음걸이가 조금 이상했다. 비틀거리는 듯 어정쩡했고 낯은 지나치게 지쳐 보였다. 몸이 편찮으신가. 뒷간에 갔다 오니 죽은 듯 누워 주무시고 계셨다. 걱정됐는데 다행히 다음 날 아침이 되니 멀쩡했다. 어젠 많이 피곤하셨나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두 달쯤 지났나. 그동안 이 집안의 평화를 깰 만한 것은 없었다. 원빈은 정 도령과 늘 그렇듯 몸종답지 않은 농땡이를 쳤을 뿐이고, 여전히 하루하루 즐거웠다. 불행의 불씨는 작은 헛구역질로부터 시작됐다. 주인들이 모두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하인들끼리 작은 상에 꾸역꾸역 모여 앉았을 때. 모퉁이에서 밥 한술을 뜨던 어머니는 헛구역질을 했다. 속이 안 좋나 싶었지만 일단 넘어갔다. 그렇게 억지로 식사하다 결국 못 참은 어머니가 입을 틀어막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원빈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표정이 볼 만했다.


저년이 임신을 한 것 같아. 분명히 입덧인데... 가까이 지내던 종놈도 없으면서 도대체 누구 애지?


다들 그런 눈빛을 주고받았다. 원빈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저만은 그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으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날, 모든 하인들은 자고 있었다. 길고양이 소리 하나 안 들리고 조용했으니 그럴 것이다. 원빈은 변소에 가려 나왔다가 누군가를 마주쳤다. 여기저기 나랏일 하고 다니느라 바빠 얼마 볼 일이 없던 정 대감이었다. 그날 낮에 귀가했었다. 정 대감은 여자들과 제가 지내는 처소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얼굴은 시뻘겠고 땀을 뻘뻘 흘렸으며 어색하게 웃는 낯으로 원빈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곱단이 아들이냐? 이름이 빈자였던가.


네 그렇습니다. 원빈은 어려운 인물에 꿍얼꿍얼대며 서 있다가 볼일이 급해 실례한다며 뒷간으로 도망쳤다. 볼일을 다 보고 왔더니 정 대감은 어디 갔는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모든 단서가 그자만을 가리켰다. 남자들은 웬만해선 그곳까지 오지도 못했다.


소문은 일파만파 커졌다. 집안사람 모두가 알 만큼 커져버렸다. 종놈들은 모두 제가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그럼 누구냔 말이야. 원빈과 어머니는 솔거노비였다. 하루종일 집안일만 하고 사는데 나갈 일이 없었다. 결국 나와선 안 될 이름까지 거론되었다. 설마 대감님 아니야? 노비들 사이에서 돌던 말은 마님 귀에까지 들어갔다. 적당히 무시하기에도 치욕적인 소문이었으니 그녀가 노할 만했다. 마님이 물었다. 누구의 아이냐? 어머니는 종놈 두 명에게 양쪽으로 붙잡혀 사실을 고했다. 원빈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그건 모두 사실이었다. 대감님이 저를 겁탈하였습니다. 저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마님...


정 대감은 길길이 날뛰었다. 처음엔 무슨 소리냐, 난 그런 적 없다. 그다음은 저것이 나를 꼬드겼다. 감히 거짓을 고하는 것이다. 고얀 년. 여우 같은 년.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 어머니가 듣기엔 너무 모진 말들이었다. 자식 뵈기 창피하지 않냐며 원빈을 가리켰다. 어머니는 엉엉 울었다. 원빈은 너무 무서워서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저 역겨운 인간을 도려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제 손에 들린 것은 마당 쓰는 빗자루뿐이다. 마님이 손을 들더니 어머니의 뺨을 잇달아 내려쳤다. 네년이 미쳤구나. 밥 주고 재워 줬더니 감히 내 지아비를 건드리는구나.


원빈은 마당 구석에 서 있다 먹은 것을 죄 토했다. 종놈들이 멍석자리를 가지고 나오자 어디선가 튀어나온 정 도령은 원빈의 눈을 가렸다. 가기 싫다고 손길을 뿌리쳤지만 기어코 대문 밖까지 저를 끌고 갔다.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정 도령은 말없이 원빈을 껴안았다.


“도련님, 엄마. 어머니, 어, 어떡해. 어떡해요 우리 엄마...”

“...”

“거짓말, 한 거 아니야. 내가, 내가 봤어요. 대감님이...”

“쉿...”


 입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원빈은 눈앞의 정 도령조차 미웠다. 그저 이 집안의 모든 것들은 다 역겨웠다. 너도, 너희 부모도, 입 싼 종들도. 


대낮부터 시작된 멍석말이는 해가 질 때쯤이 돼서야 끝났다. 멍석자리에서 나온 것이 어머니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뭇매를 치던 이들은 어머니를 외양간으로 끌고 가 던져놓았다. 사람 사는 곳도 아닌데. 가축들이 하루종일 먹고 자고 싸고 하며 더럽고 냄새나는 곳인데 그런 곳에다 사람을 방치했다. 어머니는 밤새 열이 들끓었다. 온몸은 멍이 가득했고 배를 얻어맞았는지 하혈을 했다. 잘못 친 건지 발을 헛디뎠는지 발목 한쪽은 돌아갔다. 아기가 멀쩡하냐 마냐는 원빈의 중점이 아니었다. 잠도 못 자고 외양간에서 어머니를 간호했다.


사흘 동안 사경을 헤매던 어머니는 끝내 돌아가셨다. 칼에 맞은 것도, 팔다리가 잘려 나간 것도 아니었는데 결과가 불행했다. 심하게 열이 나더니 폐렴으로 번져서 그런 것 같았다. 더 이상 살 이유를 찾으라면 찾을 수가 없었다. 살고 싶은 이유보단 죽고 싶은 이유가 더 많았다. 평생 이 집에서 종놈 노릇이나 해야 한다면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참 묻힐 때도 불행했다. 장례를 치러줄 이유가 없으니 산골짜기에 내다 버렸다. 멍석말이로 죽은 사람이 갈 때도 멍석말이 됐다. 원빈은 열심히 땅을 파서 어머니를 묻고 단단한 돌을 감싸서 돌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집에서 훔쳐 온 술을 뿌렸다. 짐승들이 파면 안 되는데.


“엄마 불쌍하다.”

“나 이제 고아네.”

“괜찮아. 원래 길에 엄마 없는 애들이 더 많아.”


사실은 괜찮지 않아서 돌무덤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복수하고 싶은데 그럴 용기도 없어서 제가 미웠고 바보 같았다. 엄마한테 너무 미안했다. 엄마가 울고 있을 때의 표정이 생각났다. 자식 뵈기 창피하지 않냐고 물었을 때의 그 표정. 억울하고 처참했고 세상이 무너져내린 사람 같았다. 같이 죽든 말든 엄마 편들어줄걸. 엄마가 안 그런 거 알아. 내가 다 봤어. 그놈이 그랬잖아. 이제 와서 무덤에다 대고 말해줘봤자 죽은 이가 들을 리 없었다. 그래도 계속 말했다. 엄마 창피한 사람 아니야. 그 새끼는 지 자식 볼 때마다 찝찝할걸. 그래, 걔 있잖아. 정성찬.


살면서 엄마와 만든 비밀은 하나였다. 사실 난 빈자가 아니라 원빈이로 살고 있거든. 엄마가 알았다면 너 미쳤냐고 그랬을 것이다. 정성찬 앞에 데려가서 아유 도련님 죄송합니다 사과했겠지. 지금은 좀 애매했다. 빈자도 싫고 원빈이도 싫었다. 빈자는 누가 봐도 천한 놈 같아서 싫고, 원빈이는 그 집안 인간이 지어줘서 싫다. 그럼 난 뭐지. 그냥 엄마 없는 고아 종놈이었다. 도망쳐도 오래 못 살 것 같다.


원빈은 집으로 돌아가서 새끼를 꼬았다. 시간이 남을 때마다 마당 구석에 주저앉아서 새끼를 꼬았다. 밧줄 두께만큼 땋으려면 많이 꼬아야 해서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지. 그래도 단순노동이라 저녁쯤 되니 다 만들어졌다. 저녁은 배 찢어질 정도로 많이 먹었다. 그만 좀 먹으라고 등짝을 맞아도 계속 먹었다. 죽으면 아무것도 못 먹는데 이 집 식량이라도 축내려고. 밥주걱을 들고 있던 양순이 말했다. 이놈이 미쳤나... 원빈도 지지 않고 눈을 치켜떴다. 그래. 나 미, 미쳤다. 이 쌍년아. 무서울 게 없다는 걸 알아챘는지 양순은 입을 닫았다. 그렇게 미련한 짓 하며 폭식하다 결국 뒷마당에 가서 전부 토했다. 축내는 덴 성공했으니 상관없다. 원빈은 겨우 밥 네 공기 낭비해놓고 여전히 가득 찬 곳간을 노려봤다. 망해라. 내 이름 빈자처럼 너희도 찢어지게 가난해져 봐야 해. 다 내려놓고 억울한 건 내뱉지도 못할 천민이 돼버렸으면 했다.


캄캄한 새벽이 됐다. 원빈은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을 헤쳤다. 손엔 일과 내내 열심히 꼰 밧줄이 들려 있었다. 앞이 안 보이지만 마당 쓸고 닦은 날이 얼만데 제 눈엔 다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랑채 마당엔 커다란 나무가 하나 있다. 나무 양동이 위로 올라가면 튼튼한 가지가 닿는다. 원빈은 밧줄이 풀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묶었다. 귀신 나올 분위기에 무서워서 그냥 빨리 죽고 싶다. 지체 없이 올가미 틈으로 목을 집어넣었다. 유서도, 작별 인사도 없었다. 건네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속으로 엄마나 찾았다. 엄마, 거기선 행복하게 살자.



*** 



성찬은 침대에 누워 폰을 하다 끙끙 앓는 소리에 옆을 돌아봤다. 토끼가 악몽을 꾸는 모양이다. 톡톡 건드려 깨워주려고 했는데 아무리 깨워도 원빈은 일어나지 못했다. 왜 이러지... 전에 본 귀신이 꿈에 나왔나. 가까이 당겨 품에 안았더니 몸이 뜨끈했다. 귀를 잡았더니 안쪽은 뜨거웠다. 열이 나는 게 분명했다. 어쩌지. 오늘 너무 무리했나. 이 시간에 하는 동물병원이...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나도 아픈가. 골이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일단은 원빈이 아프다는 게 더 문제였다. 성찬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이 침대에 들러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정신은 깨어 있는데 몸이 말을 안 들었다. 토끼가 작은 울음소리를 낸다. 성찬은 눈을 감았다. 감으려는 생각이 없었는데 저절로 감겼다. 이대로 잠들면 큰일이었다. 정성찬 일어나. 일어나라고... 반쯤 나간 의식이 저를 깨워도 도저히 말을 듣질 않았다. 토끼가 몸을 버둥거린다. 이상하게도 토끼 울음소리가 아니라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박원빈의 목소리. 그럴 리가 없는데... 사람으로 돌아왔나. 누군가를 부른다.


도련님...


그 부름에 응답해야 할 것만 같았다. 도련님이란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데 그렇게 느껴졌다. 수백 년을 묵혀온 기억이 문을 두드린다. 그쯤 되자 자아는 한쪽에 삼켜져버렸다. 성찬은 저를 찾는 이에게 응답했다. 원빈아.


언제일까.

당장 어제의 일 같은 기억이 꿈을 타고 흐른다.






열여섯의 봄이었다. 어미 손을 꼭 잡고 인사하던 원빈의 모습이 선하다. 낯을 가리는지 표정이 차가운 승냥이 같았다. ‘오늘부터 도, 도련님을 뫼시게 된 빈자, 빈자라고 하옵니다.’ 같은 신분의 벗들과 커 격식 있는 어투가 입에 달라붙지 않는 듯했다. 어미가 전날부터 무진장 연습시켰을 게 뻔하다. 제 또래라는데 저보다 한참 작았다. 까맣고 긴 머리는 언제나 하나로 질끈 묶고 다녔다. 이목구비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 제일 강렬했다. 원빈이 지게를 지고 저 멀리서 걸어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네들 이름이 꼭 그런 수준인 것은 잘 알지만 빈자는 너무하다 싶었다. 얼굴은 좀 시커메도 빈해 보이진 않았다. 곱단이의 하나뿐인 아들 빈자. 닮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쁜 거 하나는 그 어미에 그 아들이었다.


주전부리를 좋아해서 여러 개 쥐여주면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성찬은 일부러 더 간식을 달고 살았다. 초반엔 원빈이 스승의 매를 대신 맞기도 했는데 그게 참 미안했다. 그래서 과제를 더 열심히 했다. 혼기가 찼을 때부터는 여러 양갓집 규수들을 만났는데 제 기준은 원빈에게 맞춰져 그런지 모두 성에 차지 않았다. 아마 열일곱의 초여름쯤이었을 것이다. 그날도 몰래 데려온 원빈을 옆에 앉혀두고 주전부리를 먹였다. 성찬이 마당에서 잡일 하던 애를 창문 열고 꼬드겼다. 빈자야. 빈자야아. 이거 먹고 싶지 않으냐? 원빈은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다가왔다. 눈이 쥐새끼를 노리는 괭이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성찬은 문을 활짝 열고 신발도 덜 벗은 원빈을 방 안으로 잡아당겼다. 가벼워서 잘 딸려온다. 옆에 앉혀두고 접시를 그쪽으로 밀었다. 양껏 먹어도 상관없는데 밀과 하나를 들고 그렇게나 아껴 먹는다. 성찬은 턱을 괴고 주전부리 먹는 미인을 감상하다가 웃음을 지었다.


“내가 지금까지 봤던 규수들보다 네가 훨씬 더 예쁘구나.”

“... 얼른 장가, 장가나 드세요.”

“아직 이르다. 내 나이가 인제 열일곱 아니더냐.”

“과거에 급제하고픈 마음은 없으십니까?”

“나는 불효자라 학문에 소질이 없구나.”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열댓 년 공부하는 중생들만 전국에 널렸다. 돈이야 평생 먹고 놀아도 될 만큼 쌓여 있는데 왜 그런 걸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정 안 되면 사랑둥이 막내아들이니 음서로라도 하급 관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 외아들이 아니어서 압박이 덜했다. 형님만 해도 저와 넉 살 차이인데 애진작 혼인하여 아직도 과거 공부를 한다. 아마 급제할 때까지 앞으로 열 해쯤은 더 해야 될 성싶다. 성찬은 부모의 말은 잘 들었지만 공부엔 정말 관심이 없었다. 때깔 좋은 한량일 뿐이다. 혼사에도 큰 관심이 없어 어머니의 한숨이 늘어갔다. 열일곱이면 기실 결혼 적령기지만 차남이라는 핑계로 꼭꼭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룰 생각이었다. 정말 하기 싫은 걸 어쩌란 말이냐. 성찬은 빈자만 있으면 됐다. 혼인하더라도 이 아이를 꼭 데리고 다닐 것이다. 


“빈자야.”

“네?”

“너는 얼굴은 부해 보이는데 빈할 빈자라니, 아주 안 어울리는구나. 오히려 번쩍번쩍 빛이 나니 빛날 빈자는 어떠냐?”

“제 얼굴에서 빛이, 빛이 난단 말입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곱단 소리다.”

“......”

“내가 본 이들 중에 제일이니 으뜸 원을 붙여서 원빈. 가장 빛난다는 뜻이다. 맞느냐?”

“......”

“응? 원빈아.”

“도련님은 눈, 눈이 삐셨습니까?”

“어허, 불경하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하 웃었다. 원빈은 얼굴은 석류처럼 붉었다. 바깥에선 절대 그렇게 부르지 말라며 어르신들이 알면 큰일 난다고 쩔쩔맸다. 성찬은 먹으로 원빈의 이름을 썼다. 우리 원빈이는 바보구나, 바보.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렇게 하겠느냐. 후후 잘 말려서 종이를 곱게 접었다. 그리고 원빈의 저고리 깃 사이로 쏙 집어넣었다. 옜다. 잘 간직하려무나. 사실은 오랫동안 고민해 온 이름이었다. 가볍게 생각해 낸 것이 아니었다. 열여섯 살 때부터 원빈을 바라보며 속으로 백 번도 더 불렀다. 다행히 원빈은 마음에 들어 했다. 둘이 있을 때 빈자라 부르면 온종일 삐쳐 있을 정도였다. 귀엽기는.



해가 지날수록 원빈과 더욱 가까워졌다. 벗이라기엔 성찬의 시선이 불순했다. 본래 몸종을 맡던 이가 있었으나 원빈이 열일곱이 되던 해에 제 전담으로 바뀌었다. 그 핑계로 봄이면 원빈과 꽃놀이를 다녔고, 여름엔 계곡에 발 담그러 다녔고, 가을엔 단풍놀이를 다녔으며, 겨울엔 애들처럼 눈싸움을 했다. 하여튼 제 행동거지가 양반집 자제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벗이라면 어릴 적부터 몇 있었지만 죄 장가들고 철들어 이젠 술 한잔 들기도 하늘의 별 따기다. 그동안 성찬은 아직도 혼인하지 않아 대단한 불효를 저지르고 있었다. 어느덧 스무 살 겨울이 되어 스물하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제는 정말 처녀들이 팔려 가듯 혼인해야 할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만난 은석은 벌써 애가 셋이란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둘이었다. 죄다 딸이어서 처가 시댁살이 힘들어한다며 한숨을 푹 쉬었다. 사랑꾼 납셨군. 네놈 양물이 문제 아니냐 이놈아. 갓난쟁이일 적부터 친구여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바깥은 별별 소리가 다 들렸다. 비음 섞인 여자들의 말소리. 술 취한 양반들의 호탕한 웃음소리. 이 공간만 얌전했다. 기방 와놓고선 술 따라주던 기생도 은석이 전부 물렸다. 이놈이 철들다니 별일이 다 있네. 성찬도 관심이 없어 안주나 집어 먹었다. 주막보다 술이나 음식의 질이 좋아서 오는 곳이었다. 출궁한 자가 운영한다더니 맛이 좋았다.


“그래서 아직도 혼인 의사는 없는가, 정 도령?”

“하기 싫다. 말도 꺼내지 마라.”

“설마 문밖에서 정과 얻어먹는 놈 때문은 아니겠지?”

“...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네.”

“완전히 미쳤군. 귀 좀 대봐라.”


담배를 태우던 성찬은 손짓하는 은석에 얌전히 귀를 댔다. 문밖으로 들리지 않게끔 소곤소곤 말한다. 사내놈은 물이 적어 비역질 할 때 향유가 보통 드는 게 아니라 하던데... 성찬은 그 말을 듣고 숨을 들이쉬었다. 매캐한 연기가 속을 채웠다. 콜록, 콜록, 켁! 목이 따가워 절로 눈물이 났다. 은석은 얄밉게 혀를 차며 선심 쓴다는 듯 조언했다. 끊게, 정인에게 입맞춤 거절당하기 싫으면. 본인이 거부당한 적 있는 모양이다. 성찬은 은석의 손등을 아주 세게 꼬집었다. 아프다며 골골대는 소리를 낸다. 어이 애처가 송은석 나리. 닥치고 술이나 마시게. 술잔이 넘치도록 따랐다. 어이가 없어서 골이 울린다. 뭐, 뭐 비역질? 선비가 낯부끄럽게 못 하는 소리가 없었다. 그 짓은커녕 입맞춤 한번 못 해봤는데 당최 무슨 소린지. 돌다리를 건널 때 넘어질까 손을 잡아주긴 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그 이후의 진전은 없었다. 가끔 혼자서... 하긴 했는데. 은석은 술 한잔 마시고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하더니 점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설마... 아직인 것이냐? 씁, 조용히 해라. 애 듣는다.


“인내가 대단하군. 역시 사대부 집안의 출중한 자식이야.”

“닥쳐라.”

“정 씨 열녀전을 써도 되겠어.”

“너야말로 얼마나 고을을 들쑤시고 다녔는지 아녀자의 목록을 적어 부인께 전해 드려야겠다.”

“내 이제 입 닥치고 있겠네.”


은석이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결론은 둘 다 입 닫고 악수하기였다. 놀림은 받았지만 털어놓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니 속이 시원했다. 은석과는 어릴 때부터 죽이 척척 맞아 시선만 주고받아도 뜻을 알았다. 성찬이 방앞에서 심심할 원빈을 챙기고 지나가던 기생을 불러 정과까지 먹여대자 단번에 알아챈 것 같았다. 어리다 하여도 고작 다섯 달 터울에 종놈을 이렇게까지 챙기는 양반은 저 말고 없다. 꼭꼭 숨겨봤자 티가 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원빈만은 특별한 취급 받으면서도 전혀 몰랐다. 알아채 준다면 당장 한 발걸음은 무슨, 품에 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갈 텐데.


자식 보러 들어가야 한다는 은석에 일찍 일어났다. 문을 열자 마루에 앉아 다리를 흔들던 원빈은 깜짝 놀랐다. 은석과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반갑구나, 네가 빈자냐? 예... 주정뱅이 주제에 예쁜 건 알아가지고 얼굴을 뚫어져라 감상한다. 성찬은 괜히 큰 헛기침 소리를 내다가 은석의 등을 퍽퍽 쳤다. 얼른, 얼르은. 좀 가세. 집에 처자식도 있는 사람이. 제 얼굴을 쳐다보더니 실실 웃는 게 참 얄미웠다. 은석은 도로 방 안에 들어가더니 먹다 남은 안주를 한 젓가락 집어왔다.


“아. 먹어봐라.”

“괜차, 괜찮습니다.”

“먹어보래도.”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지. 원빈은 결국 입을 벌려 안주를 받아먹었다. 은석은 잘했다고 웃고 손까지 잡아가며 벗을 잘 부탁한다고 손등을 팍팍 두드렸다. 에라이 미친 사람아. 취했냐? 죽어라 노려보자 더 크게 웃었다. 일부러 놀리는 게 틀림없다. 사내놈과 주먹다짐 안 해본 지가 오 년이 넘었는데 오늘 그날이 될 것 같다. 은석은 참 얍삽하게도 이제 정말 가봐야겠다며 어깨를 두드리고 튀었다. 드디어 갔네 돌아버린 놈.


홧김에 원빈의 손을 잡고 걸었다. 원빈이 왜 이러시냐며 잡아빼려 했지만 더 세게 잡았다. 자동으로 나오는 볼멘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모른다, 그냥 잡고 싶은 걸 어떡하란 말이냐. 그냥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백번 생각해도 원빈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이게 다 종지만 한 제 속 탓이다. 스무 살이나 먹고서 이런 투정을 부리고 싶진 않았지만 입이 근질근질했다.


“아니, 너는... 준다고 그걸 덥석 받아먹느냐?”

“제가 언제요?”

“게다가 남이 쓰던 수저를 가지고. 어휴, 모르겠다.”

“그럼 거기서 제가 어떻게 합니까?”

“싫다고 주먹으로 쳐야 할 거 아니냐.”

“... 양반, 양반을요?”


그래. 말도 안 되는 거 잘 알아서 눈을 피했다. 왜 이렇게 사랑 앞에서 어린 애가 되는지. 원빈은 성찬이 삐진 이유를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해하는 눈치였다. 바보다. 좋아하는 걸 그리 티 내도 모른다. 성찬은 손을 잡고 걷다가 그냥 웃었다. 바보는 나겠지. 마음을 전할 생각도 없으면서 얘 하나 보느라 장가도 못 드니. 사람이 정색했다 웃었다 이상한 짓을 하자 원빈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많이 취하셨어요? 으응, 취했나보다. 원빈을 끌어당겨 머리를 쓰다듬으며 걸었다. 종놈 주제에 얼마나 깔끔 떠는지 새벽 동틀 때부터 물가에 나가 머리를 감는다. 꼭 고양이나 토끼처럼 볼 때마다 머리를 손으로 빗질하고 있기도 했다. 거울을 좋아해서 제 방에 들어올 땐 항상 경대만 보다가 나갔다. 간식 먹고, 거울 보고. 이게 무슨 종놈이야.


“다음에 나와 저잣거리 구경하러 갈 테냐?”

“갑자기 저자는 왜요?”

“참빗이나 하나 사주게.”

“상투도 안 튼 사내놈이 그런 걸 왜, 왜 씁니까?”

“웃기려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네 태가 일국의 공주보다도 더하지 않느냐. 원한다면 노리개도 하나 사주마. 장난스럽게 웃자 원빈이 팔뚝을 약하게 쳤다. 집 앞에 다다르자 서서히 손깍지를 뺐다. 원빈이 방문을 닫아주며 말했다. 도련님 안녕히 주무세요. 성찬은 코앞에서 원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오냐, 너도 잘 자라. 히죽히죽 웃고 있는데 원빈은 떠나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는 게 할 말이 남은 듯했다. 눈을 깜빡이면서 기다렸다. 원빈은 입을 꾸물대더니 뭔가 아주 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문을 끽 닫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저...


저자, 저잣거리에 가고 싶습니다. 데, 데려가 주세요.


사람을 미치게 한다. 술을 퍼마셨는데 일찍 잠들 수가 없었다. 원빈의 생각만 하느라.




이튿날부터 집안의 분위기가 수상했다. 하인들은 자기들끼리만 아는 소문을 단물 빠질 때까지 하루종일 곱씹었다. 원빈의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장에 나가자는 언질은 하지도 못했다. 성찬은 부엌문 옆에 서서 양순과 경단이 하는 이야기를 훔쳐 들었다. 곱단이 우물에 물 푸러 나갔을 참이었다. 근데 정말 누구지? 곱단이 고거 애 밴 것이 분명한디... 내가 보기에는 대감님이 확실하다니깐. 종놈들은 다 아니라잖어. 그것들이면 숨길 게 뭐가 있어? 성찬은 소문의 정체를 알아챘다. 퍽 난감한 주제 거리였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어머, 그럼 곱단이 그게 대감님을 꼬드긴 거야? 그럴 리가 있냐, 그년 성격 몰라? 꼿꼿해가지고 거짓말은 못 하고 그 나이 먹고도 처녀마냥 수줍잖어. 애는 어찌 낳았나 몰라. 하여간 빈자 고것이랑 성격 똑같애. 양순은 혀 차는 소리를 내며 소쿠리를 들고나오다 성찬을 마주치고 놀라 주저앉았다.


“도련님, 부엌에는 왜... 마님이 보면 큰일 납니다. 얼른 가세요.”

“양순이 네 말은 아버님이 곱단이를 겁탈했단 것이냐?”

“아이고, 절대 아닙니다. 절대!”

“그럼 곱단이가 아버님을 유혹했단 것이냐?”

“아, 그것이...”


안절부절못한다. 오해한 듯한데 이들이나 곱단이를 벌하고자 하는 생각은 일절 없었다. 다만 성찬은 난감한 입장으로서 그 누구의 편을 들기도 어려워 그저 소문의 전파를 막고자 했다. 그게 최선이었다. 이 일이 커져봤자 다치는 것은 누가 봐도 한쪽일 게 뻔했다. 성찬은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아 그저 그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양순아. 예... 본 적이 없으면 말을 말거라. 세 치 혀가 잘리는 수가 있다. 너는 입이 가벼워 물에 던져놓으면 입만 동동 뜨겠구나. 응? 내 밥은 되었으니 준비 말아라. 네년들 침이 튀겼을까 못 먹겠다.


점심상이 차려지긴 했지만 그대로 물렸다. 원빈의 우울한 기분을 달래주려 별짓을 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리 좋아하던 단 것은 입에도 안 대고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했다. 지금으로서는 성찬도 방도를 모르겠다. 소문이 더 커지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아버님께 대체 왜 그랬냐고... 묻고 싶었다.



입이 싼 것은 어째야 하는가. 죄다 장에 내다 팔아야 하나. 사람 두 명 단속해서는 소문의 확장을 막을 수 없었다. 기어코 며칠 뒤 집안은 뒤집혔다. 어머니가 하인들이 수군거리던 것을 모두 들어버렸다. 성찬은 제발 곱단이 거짓을 고하길 빌었다. 아무 이름이나 대도 좋으니 제발 아버님만은 거론하지 않길 바랐다. 그건 아버지를 믿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꼿꼿한 곱단이는 진실을 말했다. 스스로도, 남들 보기에도 부끄럽게 산 적이 없을 것이다. 성찬은 착잡한 심정으로 뒤돌아야만 했다. 그녀는 벌을 받을 것이다. 천민 주제에 정 대감의 추악한 이면을 고발한 죄로. 


사랑채로 돌아가려다 마당 구석에 서 있는 원빈에게 다가갔다. 성찬은 눈물이 흐르는 두 눈을 가렸다. 보지마. 보지마라 원빈아. 자꾸 손을 떼려 하기에 아예 못 보게 몸을 돌려서 껴안았다. 그리곤 대문 밖으로 끌고 갔다. 몸부림을 쳐서 억지로 데려갔다. 원빈은 오열하며 성찬의 멱을 붙잡았다. 성찬은 무작정 괜찮을 거라며 주문을 외우듯 속삭였다. 정말 괜찮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게 눈 앞에 펼쳐진 일들보다 중요한 것은 원빈을 지키는 것이기에, 제 어미를 닮아 자꾸만 진실을 뱉으려는 입을 막아야 했다. 쉿...



곱단이의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아이를 뱄었다 하였는데 아무래도 유산한 것 같았다. 성찬은 아비의 뻔뻔한 작태에 치를 떨었다. 뱃속에 든 게 자기 아이인 것을 알면서도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하다니. 곱단이는 외양간에 버려져 그날 밤을 그곳에서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이 돼서야 소여물 주던 종놈들이 도와 겨우 처소로 옮겼다 들었다. 몸이 많이 약해졌는지 의식이 왔다 갔다 했다. 찢어지는 듯한 기침 소리가 눈 깜빡거릴 때마다 반복됐다. 원빈은 말이 없어졌다. 경계심을 곤두세워 본인 말곤 다른 이가 간호하는 것도 못 하게 했다. 성찬은 낮에 의원을 불러 기침에 좋은 약을 지어달라 했다. 원빈은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올렸다. 말을 안 한 지 오래되어 그런 건지 어디 아픈 건지.


“빈아, 네 몸도 돌봐야지.”

“...”

“한 끼도 안 먹었다 들었는데.”

“...”

“나와 말하기 싫으냐?”


대답을 하지 않는가 싶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성찬은 멍하니 섰다. 사실 그런 대답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와 말하기 싫다고. 원빈은 4년 하고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저를 거부한 적이 없었다. 단순히 천한 신분이라 그런 게 아니라 눈빛만 봐도 잘 따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한순간에 무너질 줄은 몰랐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 저잣거리에 가자고 그리 약속했는데. 원빈은 허리를 꾸벅이더니 처소 문을 닫고 들어갔다. 제가 어찌 해야 할까. 깊은 무력감이 속에 가득 찼다.





성찬은 새벽 중에 깨서 물을 찾았다. 다시 잠들려 해도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아 등불을 켰다. 낮엔 뒤숭숭한 마음으로 주구장창 원빈의 뒤만 밟았다. 곱단이는 그제 저녁에 세상을 떠났다. 원빈이 건드리지 말라며 밤새 꼬옥 껴안고 있던 시체를 일꾼들이 어제 아침에 멍석에 말아 산골짜기로 내다 버렸다. 엉엉 울면서 뒤따른 원빈은 혼자 남아 어미의 무덤을 만들었다. 손끝이 다 부르터 피가 났다. 돌무덤 앞에서 흐느끼는 원빈은 너무 작았다. 한 살 작지만 늘 자기 앞가림을 잘해서 마냥 어리다고는 느끼지 않았었다. 지켜보던 성찬은 죄책감에 따라 울었다. 그날 원빈을 지키기 위해 입을 막았다. 누구도 진실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모르길 원했다. 허나 양순과 경단이 그랬듯, 그리고 성찬이 그랬듯. 모두 알았을 것이다. 곱단이가 그랬을 리 없다는 것을. 땟자국 없이 멀건 원빈은 그걸 몰라서 제게 사실을 털어놓는다고 생각했다. 진실을 밝히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기대했다. 성찬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입을 틀어막고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제 못난 아비가 저 작은 애 앞길을 가시밭길로 물들였다.


원빈은 산에서 돌아온 후 새끼를 꼬았다. 짚신을 만들려나 했는데 그 길이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졌다. 반짝이던 두 눈이 공허하고 넋이 나가 제 하던 일도 까먹고 반복한다 여겼다. 잠에서 깨어 물을 마시다 뜬금없이 그 장면을 떠올린 성찬은 섬뜩했다. 불안감이 넘실거렸다. 차라리 지금 드는 생각이 한참 앞서버린 제 착각이었으면 한다. 저녁을 걸신들린 것처럼 먹다가 전부 토했다고 했었나. 성찬은 원빈이 체했나 싶어 매실청을 한 숟갈 먹였다. 사흘간 굶다시피 하던 애다. 왜 그랬을까. 성찬은 당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처소에 원빈이 있나 확인해야 했다.


행랑채까진 가볼 필요도 없었다. 제 방에서 창문 하나만 열면 보이는 큰 나무가 있다. 고요한 새벽 중인데 그곳에서 끅끅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다가간 성찬은 그만 등불을 놓쳤다. 밟고 있던 나무 양동이를 걷어찬 원빈은 고통스럽게 밧줄 하나에 매달렸다. 한 줌 남은 생존본능이 손을 들어 밧줄을 잡았고, 하체는 발버둥을 쳤다. 성찬은 그 광경에 뒷걸음질 쳤다.


아니다. 이건... 아니야.


무섭다. 사람이 이리도 생경하고 빠르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놀란 심장박동이 미친 듯 빨라졌다. 동공은 갈 곳을 잃어 여기저기 난잡하게 움직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성찬은 돌처럼 굳어 있다 정신 차리고 뛰었다. 살려야 한다. 원빈마저 보낼 수는 없었다. 허공에 들린 무릎을 끌어안고 올릴 수 있는 곳까지 무작정 높였다. 그리고 울면서 빌었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원빈아. 내가 잘못했다.”

“네가 가면 난 어쩌란 말이냐.”

“내가 지켜줄 터이니 가지 말아라, 제발...”


성찬은 꺼져가는 듯한 목소리로 절절하게 애원했다. 그 누구도 원빈의 이런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했다. 제가 내뱉는 흐느낌 새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목이 상한 듯 켁켁거리고 다 갈라진 음성이 성찬을 불렀다. 도련님... 제정신이 아니어서 무슨 대답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제발 내려와 달라고 빌었다. 축 처진 몸이 성찬의 위로 엎어졌다. 얼음장처럼 찼다. 다급하게 원빈을 끌어안아서 제 처소로 데려갔다. 물을 먹이고 온기가 남은 침구 안에 눕혔다. 성찬은 해가 뜰 때까지 한숨도 못 잤다. 눈 감았다 뜨면 원빈이 사라질 것 같았다.


집안 분위기는 연이어 가라앉았다. 성찬은 아비만 떠올리면 껄끄럽고 창피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한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일들은 너무나 컸다. 성찬은 불안한 마음에 원빈을 싸고돌았고 하인들은 그에 대한 불만을 숨겼다. 창을 열었더니 나무는 아무 일 없던 모양새 그대로였다. 바닥을 구르던 나무 양동이는 제자리를 찾아갔고 밧줄은 사라졌다. 아침이 되자 하인들이 발견한 것이다. 짚의 거칠거칠한 표면 때문인지 원빈의 목은 멍이 들고 벌겋게 쓸린 자국이 남았다. 마당쇠는 그걸 보고선 시선을 피했고 성찬더러 찾아와 밧줄은 재수가 없어 태우겠다고 전했다. 그래. 그리 하여라. 이 집 아랫것들은 찝찝해서 그 밧줄을 쓰지 못할 것이다. 성찬은 굳이 들추진 않았지만 구태여 숨기지도 않았다. 저 싼 입을 또 마음껏 놀려 모두가 원빈을 딱하게 여긴다면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빈자의 조반은 죽으로 준비해라. 내 방에서 함께 들 것이다.”

“몸종과 겸상이라니요. 마님이 알면 큰일 납니다.”

“모르게 하면 되잖느냐.”

“빈자는 저희가 돌보겠습니다 도련님.”

“양순아.”

“예...”

“아버님은 한양 별채로 잘 돌아가셨다지?”


잠든 원빈의 가슴팍을 느리게 두드리며 창밖을 응시했다. 뜬금없이 등장한 인물이었지만 양순은 눈치가 없진 않았다. 죽을 준비하겠다며 인사하고 나갔다. 사색이 돼선 도망치는 게 제 아비와 비슷하다. 깨어난 원빈은 말이 잘 안 나오는 듯했다. 죽을 보며 고개를 저어대니 성찬이 떠먹였다. 다 먹고 나선 소화가 잘 안되는 듯해 껴안고 등을 두드렸다. 곧 스무 살 되는 놈이 맞는지 갓난아기 같아졌다.



빈자 고것이 목숨을 끊으려 했다나봐.

아이구 불쌍한 것... 어미 따라가려 했구만. 그러게 마님이 너무 심했잖나. 이 추운 날씨에 매질하고도 외양간에 던져두고 죽고 나선 장례도 안 치러줬잖아.

대감님이 그렇게 경을 치시는데 그럼 어쩌는가? 그냥 넘어가도 문제야. 높으신 나으리 체면에 제대로 먹칠하는 거라구.


성찬이 툇마루로 나오자 마당에 모여 수군거리던 하인들은 우수수 흩어졌다. 사람 줏대는 이렇다 저렇다 할 거 없이 흔들린다. 하나 보내고 또 하나 보낼 뻔하니 그제서야 말을 바꿨다. 목에 남은 자국은 닷새쯤 지나자 연해졌다. 하지만 제 눈엔 여전히 선명할 뿐이다. 함께 식사하면 밥을 먹는 건지 눈물을 삼키는 건지. 마음이 아파 원빈을 안고 울었다. 텅 빈 눈은 감정 없이 조용했다. 인형극에 나오는 꼭두각시 같다. 항상 몇 술 뜨고 마는 원빈의 몸은 자꾸만 말라갔다. 제가 숟가락 들고 아주 간청을 해야 두세 입 더 먹는다. 그래도 더 먹으면 체할 기미가 보여 양껏 못 먹였다.


“빈아. 산책할 겸 오늘 저잣거리에 가자.”

“저잣거리요?”

“그래, 가고 싶다고 했잖느냐.”


하루종일 방에 처박혀 있으니 얹히는지도 몰랐다. 상을 치우자마자 나갈 채비를 했다. 원빈은 옷을 껴입어 평소보다 조금 둔해 보였다. 날씨가 추우니 제가 쓰던 남바위도 씌워줬다. 털신까지 신겨주자 대신 몸종 봐주던 아재가 기겁을 했다. 이레 전까지만 해도 몸종 들던 원빈은 마루에 앉아 하늘만 보고, 정작 시중받던 성찬은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신이나 신겨주고 있으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성찬은 제멋대로 행동했다. 이제 그런 건 상관하고 싶지 않아서. 잘해주기만 해도 모자랐다.


참빗은 원빈이 쓰기 힘들 것 같아 얼레빗을 구경했다. 원빈은 관심이 없었다. 성찬만 빗 장수에게 뭐가 가장 인기가 있느냐 묻고 아주 고심했다. 끄트머리에 달린 장식의 색은 다양했다. 하나하나 원빈의 머리에 대보며 무엇이 어울리나 생각했다. 노랑빛도 괜찮고... 주홍빛도 어울리는 듯하고... 아 정말 못 고르겠네. 빗 장수는 성찬을 꼬드겼다. 그러면 일단 전부 사서 매일 바꿔 쓰시면 되지요. 무얼 쓸까 고르는 맛이 있답니다. 턱을 잡고 듣다 보니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럼 전부...


“자, 잠시만요.”

“왜 그러냐?”

“전 푸른, 푸른색이 마음에 듭니다.”

“으응, 이거?”

“그거 말고, 색이 조금 더 옅은 거요.”


하늘색을 말하는 거구나.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진작 말할 것이지. 원빈이 고른 얼레빗 하나만 구입했다. 하늘빛 장식이 달린 거. 빗 장수가 대놓고 아쉬워하는 게 보였다. 기특해서 남바위 양쪽을 잡고 원빈의 귀를 문질렀다. 우리 원빈이가 내 주머니 사정을 걱정해주니 곧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겠구나. 찬바람에 빨개진 코를 잡고 흔들자 강아지처럼 고개를 푸르르 털었다. 하지 마세요... 성찬은 크게 웃었다. 근래 그렇게 웃은 적이 없었다. 이젠 제 손이 시려서 원빈의 손을 겹쳐 잡았다. 쏙 빠져나가면 우는 소리를 냈다. 너무너무 춥구나. 아아, 손이 잘릴 것 같다. 빈자야. 빈자야아. 남바위 때문에 안 들리느냐?


“저를 부른 게 아니니 대답을 안 했지요.”

“그럼 네 이름은 무어냐?”

“......”

“응?”

“... 미워.”


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원빈아. 종놈 주제에 주인 버리고 터벅터벅 걸어간다. 성찬만 체통 없이 와다다 뛰어 원빈을 따라갔다. 이것 참 누가 상전인지. 돌려세우자 또 무엇에 상처 입었는지 눈가가 빨갰다. 이런 장난으로 운 적은 없었는데... 당황해서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닦아줬다. 울지 말아라, 날이 추워 눈물도 언다. 눈가 다 짓무른다. 울지 마라, 응? 원빈아. 원빈은 뜻을 알 수 없는 말만 하며 훌쩍거렸다.


“난, 나는 이제, 이제 빈자 아닌데. 빈자 안 할 건데.”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럼 전엔 빈자였고 앞으로는 빈자가 아니며 하기도 싫다는 말인가? 빈자라는 이름은 전부터 싫어했다. 하지만 저 빼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원빈을 빈자라 불렀다. 냉정하게 말하긴 싫지만 그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성찬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게 어디 쉬우냐 원빈아. 대신 나만은 너를 꼬옥, 반드시 원빈이라고 불러줄 테니... 어, 어쩌라고. 원빈은 입을 쭉 내밀고 제 말허리를 끊었다. 성찬은 벙쪄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말본새가 제법... 상놈 같구나... 이렇게 구는 애가 아닌데 제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두껍게 입어 뒤뚱뒤뚱 걷는 모양새와 빵빵 부푼 볼이 귀여웠다. 원빈아, 원빈. 빈아. 원빈 낭자. 우리 고을에서 제일 이쁜 처자. 대답 좀 하시게나. 일부러 귀에 가깝게 해서 속삭였다. 남바위 천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아마 푹 익은 홍시처럼 빨갈 것이다. 잘 걷던 원빈은 개장수 앞을 지나 토끼 장수 앞에 멈춰 섰다. 작은 토끼가 색색별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성찬도 따라 멈춰 구경하다 혀를 끌끌 찼다.


“불쌍하구나. 일도 못 하니 키울 가치가 없어 가죽이 벗겨질 텐데.”

“가, 가죽이요?”

“그래. 살은 따로 요리해 먹고.”

“......”

“네가 쓴 남바위 안감도 토끼털이다.”


보들보들한 털을 매만졌다. 흑색털이니 흑토끼 것이겠구나? 원빈은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마치 본인이 토끼인 양... 마음이 이리 약해서야 어디 내놓기가 불안하다. 어미를 잃은 후로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며칠 만에 드디어 제가 아는 원빈의 모습을 봤다. 울고, 삐지고, 토끼처럼 작은 짐승을 불쌍해하고. 뭐 아직 웃진 않았지만... 곧 웃게 만들려고.


원빈은 손을 가만히 못 두고 우물쭈물하더니 성찬을 올려다봤다. 도련님, 저기... 그, 저기, 있잖아요... 기다리는 성찬은 안달 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원빈이 다 말할 때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참겠다. 성찬은 제가 더 흥분해서 속사포처럼 원빈에게 말했다. 사주랴? 얼른 골라봐라. 못 고르겠으면 전부 사주겠다. 이보게, 저기 있는 토끼 전부... 잠시만요! 또 제 주머니 사정 염려해주는 원빈에게 막혔다. 성찬은 값을 지불하고 걸어가는 길에 돈 허투루 쓰면 안 된다며 된통 혼났다. 곳간 터지게 채워놓고 몸종에게 사치하면 안 된다며 혼나는 양반은 성찬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빈이 원하는 게 합리적인 소비라면 그것을 지향할 의사가 생기긴 했다. 근데 방금은 합리적인 소비였잖아. 널 기쁘게 해주려 그런 것인데.


“그리 좋으냐?”

“네... 귀여워요.”


원빈이 자그마한 토끼를 안고 걷는다. 저놈 안아주느라 손은 잡아주지도 않는다. 칫. 원빈은 까만 토끼 중에서도 가장 작은놈으로 골랐다. 남바위 안감이 흑토끼니 뭐니 하는 소리를 신경 쓴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일꾼들에게 외양간 옆에 토끼 울타리를 만들라 했다. 그동안 마당에 풀어두고 원빈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구경했다. 하여간 껑충껑충 지가 더 토끼 같네. 마루에 앉아 있으니 바람이 쌩쌩 불어 너무 추웠다. 원빈도 밖에 오래 있었으니 고뿔 걸릴지도 몰랐다. 방에 들어가자고 하니 끝내 못 잡은 토끼를 미련 철철 흐르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어휴. 성찬은 하인들을 불러 모으고 말했다. 저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서 내 방에 데리고 오너라. 못 잡으면 저녁 없을 줄 알아라.


사람 너다섯 명이 쫓으니 토끼는 금방 붙잡혀 방 안으로 끌려왔다. 건초를 가져오라 해서 조금 먹였고 하다못해 동절기에 귀하디 귀한 채소와 과일까지 먹이고 있었다. 성찬이 하인을 불러 말했다. 내가 먹을 것이니 배를 가져오너라. 코앞에서 토끼가 깡충깡충 뛰어다니는데 뻔뻔하게 못 하는 거짓말이 없었다. 하인이 말했다. 도련님 지금 구할 수 있는 배는 모두 저장물이라 맛이 없습니다. 성찬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대답했다. 상관없다. 정말로 상관이 없었다. 제가 먹을 것이 아니니. 퍼석거리는 배가 처음 보는 모양으로 잘려 나왔다. 길쭉하니 토끼 앞발에 들고 갉아먹기 딱 좋은 모양이다. 아니 글쎄 내가 먹을 거라니까 그러네. 이것들이 눈치만 빨라가지곤 주인 말을 알아서 걸러 들었다.


“운 좋은 놈이구나. 먹을 것도 없는 동절기에 우리 원빈 낭자 눈에 들다니.”

“저는 다음 생에 토끼로 태어날래요.”

“굳이 이런 짐승으로? 그 얼굴을 냅두고 말이냐?”

“저 같은 사람들이 귀엽다고 밥도 그냥 주잖아요.”

“너만 그리한다.”

“흑토끼 말고 눈, 눈처럼 하얀 토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왜? 가죽을 벗겨 의복으로 만들까봐?”

“......”


푸하하. 입이 찢어져라 웃으니 원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놀리지 마세요. 지, 진짜, 진짜 불쌍하다고요. 깨나 진지했다. 사람으로 태어나 굳이 짐승의 삶을 바라며 이젠 그 자세한 미래까지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딱한 처지에 성찬은 금세 가라앉은 눈으로 담뱃재를 털었다. 다음 생에 토끼라는 건 없다. 이번 생을 질리도록 즐기다 나이를 먹어 이승을 떠난다면 우리는 저승에서 다시 만날 테고, 그때도 여전히 이 모습의 인간일 테니까. 다시 태어나도 마찬가지길 바란다. 다만 신분이라는 건 연모의 정에 거슬리니 사라졌으면 했다. 그래도...


“걱정 마라. 네가 토끼든 괭이든 생쥐든, 그리고 네 털이 뭔 색이든 내가 데려가서 키워주마.”

“짐승은 말도 못 하는데 어찌 저인 걸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래 원빈아. 짐승은 우매하다 못해 말도 못 하니 불쌍한 것이다. 귀여운 외모만으로 그 처지를 바란다면 듣는 짐승이 얼마나 불쌍하느냐? 너는 꼿꼿하고, 할 말은 반드시 고해야 하고, 답답함은 참지를 못하니 분명 짐승의 삶이 맞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기어이 바란다면 내 너를 챙기겠다는 말이다.”

“......”

“매일같이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산만큼 쌓아주고, 늘 안아주고, 춥지 않게 해주고, 외롭지 않게 해주겠다.”

“......”

“고백으로 들리느냐?”

“... 예.”


똑똑하구나. 불그스름한 볼을 쥐었다. 언젠가 가슴을 널뛰게 만드는 고백을 하는 것이 오래 묵혀온 제 바람이었다. 뜬금없이 짐승 이야기나 하다가 다다를지는 몰랐다. 내게 너는, 지금도 네가 저 토끼를 대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모습은 다르지만 이미 나는 네게 매일 밥을 떠먹여주지 않느냐. 귀여워서. 어여뻐서. 여러 가지 연유가 있지만...


너를 사랑해서.


“내게 가장 두려운 것은...”

“...”

“원빈이 네가 사라지는 것이다.”


입술을 달싹거리다 볼을 놓았다. 나 원 참, 왜 이리 쑥맥 같아지는지. 방 공기가 뜨끈해 더울 지경이었다. 성찬은 눈을 질끈 감고 할 말이나 계속했다. 크흠, 하여... 큼, 크음! 긴장을 해서 그런지 우스꽝스러운 음이탈이 나고 지랄이다. 어쨌든 제가 바라는 것은 이랬다. 나쁜 마음을 먹고 뜻을 전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원빈을 묶어두고 싶었다. 저를 생각해서라도 다시 활기차게 살아가 줬으면 했다. 제가 다시는, 원빈이 아프지 않도록 지킬 것이니. 속은 자신만만했지만 아무리 상전을 두고서라도 솔직한 말을 참지 않는 원빈이라 성찬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갔다. 내 마음을 받지 않아도 좋다... 다만 나를 딱하게라도 여겨 허튼 생각은 제발 접, 읍?


“여봐라, 으읍, 빈자야.”

“응... 으음......”


기습적으로 당한 입맞춤에 성찬은 저도 모르게 살짝 밀어냈다. 당황하여 나온 빈자 소리에 속이 뜨끔했다. 원빈은 언제 이렇게 간이 커졌는지 성찬을 밀어 눕히더니 그 위로 엎어져 입술을 부딪쳤다. 요 며칠 새 아기처럼 밥만 받아먹더니 하는 짓은 여우가 따로 없었다. 성찬은 혹시 꼬리가 튀어나온 건 아닐까 싶어 원빈의 엉덩이 위쪽을 더듬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없었다. 간 훔쳐먹으려는 속셈은 아닌 듯하다. 몇 초 동안 입술 맞대고 있으니 양심이 사라졌다. 동그란 뒤통수를 잡고 도톰한 입술을 빨아당겼다. 오랜만이라 쉽게 흥분해버렸다. 원빈의 눈에선 물방울이 토독 흘러 성찬의 볼을 타고 흘렀다. 오늘 정말 이랬다저랬다 갑자기 또 왜 우는지... 빨라지던 박자는 도로 느려졌다. 성찬은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떼려 하니 우는 게 들킬까 부끄러운지 칭얼대는 소리를 냈다. 벌써 다 들켰는데. 손을 내려 등을 토닥이고 귀를 만졌다가 턱을 쓰다듬으며 겨우 떼어냈다.


“또 왜 우냐, 응?”

“그냥 주, 죽으려 했는데...”

“...”

“미워하기도 힘들게 왜 이러십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미워서 떠나려 했는데...

왜 소인의 세상을 당신으로 만들려 하십니까.


원빈아,

나는...


성찬은 눈물 자국에 붙어버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원빈의 축축한 속눈썹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한 사람의 세상을 모두 저로 바꾸고 싶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그걸 알아서 그까진 바라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제 마음엔 세찬 바람이 불어 아주 강렬히 원하게 되었다. 이제는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 원빈이 저를 바라보지 않으면, 원하지 않으면. 이 아이가 세상에 미련 남길 것이 있던가. 성찬은 그 존재가 제가 되기를 빌었다. 제가 원빈의 세상이 되어서 봄바람을 살랑살랑 불어주고, 따뜻한 해가 되어 비추고, 어둠을 밝혀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내가 너의 세상이 되어간다는 고백이 기꺼웠다. 성찬은 몸을 일으켜 무릎에 원빈을 앉혔다. 슬프지 않고 기뻐서 활짝 웃었다.


“빈아. 곧 봄이 온다.”

“......”

“나와 꽃구경 가야지. 여름엔 계곡에 발을 담그고, 가을엔 단풍놀이하러 가야 할 것 아니냐.”

“네에...”

“너는 그것만 생각하며 살아라. 다가오는 계절엔 도련님과 무슨 음식을 먹을지, 무슨 놀이를 할지. 그렇게만 살아도 세월은 빠르다. 눈물을 낭비하지 말고 복에 겨워 살자꾸나.”


나만 바라보고, 내 어깨에 기대주련?


거창하고 기다란 고백은 드디어 끝났다. 원빈의 답은 제 어깨에 폭 기대는 것으로 대신 받았다. 성찬은 발그레한 볼로 원빈의 등을 껴안았다. 늘 놀려먹기만 하다 오늘 제대로 한 방 맞았다 싶었다. 저를 이렇게 들었다 놓았다 하는 사람은 원빈뿐이다. 입맞춤을 허락받을지 말지 고민하는 것도 성찬이었고, 고민 없이 들이받는 것은 원빈이었다. 생각보다 사내다운 면모가 있는 아이였다. 성찬은 심술이 나 소리 없이 꾸욱 웃다가 어깨에 기댄 얼굴을 들어 올렸다. 감히 허락도 없이 주인의 입술을 훔치다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말랑한 볼을 양쪽으로 짓누르자 통통한 입술이 마중 나왔다. 눈물로 얼룩진 눈이 멍하게 저를 응시한다. 성찬은 애써 지은 근엄한 표정은 내다 버리고 웃음을 실실 흘렸다. 혼나야겠다아, 응? 제비가 부리를 내밀듯 연달아 쪽쪽거렸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듯 콕콕콕 부딪치기도 했다. 재롱떠는 것처럼 이어지는 입맞춤 행렬에 원빈은 눈 녹아내리듯 웃었다. 그리하여 반하고, 또 반하고, 다시 반하고... 성찬은 바보처럼 벌어진 제 입을 눈치채지 못했다. 원빈은 성찬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치더니 갸웃하며 물었다. 맘, 마음 차는 만큼 하셨습니까? 얼굴을 따라가느라 바빠 그 말뜻은 알아먹지도 못했다. 마음에 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마음에 차지 않았다. 뒤늦게 뜻을 파악해 만 번도 더 남았다는 살벌한 경고를 날렸다. 자주 하면 닳을지도 모르니 그만 입술을 떼고 일어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을 앞에 두고 별짓을 다 했지 싶다. 성찬은 아무나 불러 토끼를 맡겼다. 원빈이 아쉬운 표정이다. 내다 버리는 것도 아니고 울타리 옆에 가면 종일 볼 수 있는데 하여간 짐승한테 온 신경을 다 쏟는다. 성찬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셋이 자기엔 방이 좁다.


“뭐가요?”

“짐승을 방 안에서 재우는 자가 어디 있느냐.”

“도대체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저게 그렇게 좋으냐?”

“아니 셋... 셋이 무슨 말인지.”

“아, 그거? 오늘도 내 방에서 자거라. 물론 토끼는 안 된다.”



하여 셋이 아니라 둘이지, 둘. 손가락 두 개를 펼친 성찬은 자리를 일어났다. 씻으러 가자꾸나. 원빈이 벌게진 얼굴로 대답했다. 왜 씻어, 씻는다고요? 성찬은 또 허허실실 웃었다. 저게 일부러 저러나. 원빈의 코를 꼭 잡았다 놓으며 놀렸다. 변태야, 목욕 시중 들으라는 말이 그렇게 놀랄 일이냐. 문을 열고 나오자 원빈은 일정하지 않은 걸음걸이로 뒤따랐다. 부끄러워서 멈춰 섰다, 뛰었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는 게 뻔하다. 성찬은 덥힌 물과 쌀뜨물을 옮겨 놓으라 시켰다. 낮에 밥하면서 나온 물을 절대 버리지 말고 남겨두라 이른 것이었다. 며칠 사이에 날이 추워 냇가가 다 얼어붙었다. 깔끔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원빈이 머리를 자주 감지 못했다는 뜻이다. 오늘 빗도 샀으니 쌀뜨물에 머리를 감겨서 잘 빗겨줄 생각이었다.



“도련님, 제가 시중들어도 모자랄 판에...”

“씁, 물 식는다. 얼른 들어가라.”

“부, 부끄러워요! 전 머리 감았으면 됐습니다.”

“넌 내 몸을 다 봐놓고 불공평하다.”

“그건 제가 몸종이니 당연, 당연하지요.”


유치한 말씨름을 했다. 원빈은 기쁜 마음으로 머리를 감았다. 감겨준다고 하니 계속 거절을 해 어쩔 수 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다음은 목욕을 가지고 한사코 거부 중이었다. 옷을 벗으라고 하니 그때부터 온갖 핑계를 대며 피한다. 사실은 처음부터 제 목욕은 뒤로하고 원빈을 씻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기는 다 봐놓고 쏙 빼려 한다니. 누구는 안 부끄러운 줄 아나, 어? 성찬도 다 커서 바뀐 몸종에게 맨몸을 보여주려니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양물을 세울까 속으로 논어의 명구절을 백 번도 더 읊었었다. 벌써 몇 해 전이지만. 하여튼 이건 정말 불공평하다, 불공평해. 원빈이 끊임없이 버티니 성찬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했다. 아, 별짓 안 한다니까 그러네. 그럼 내 눈을 감고 있을 테니 얼른 탕 안에 들어가라.


맨 무릎이 수면 위로 둥둥 떴다. 등목을 하는 모습은 종종 봤지만 허리 아래는 처음이었다. 다만 원빈이 굽힌 다리를 끌어안고 꼭꼭 숨기니 그다지 보이는 것도 없었다. 성찬은 내심 아쉬운 마음에 침을 삼켰다. 바가지로 물을 퍼 어깨 위로 끼얹었다. 원빈은 찬물도 아닌데 흠칫 떨었다. 긴장한 듯 굳은 목 근육을 따라서 주근깨가 알알이 박혀 있었다. 일을 많이 해서 그런 건지, 개구쟁이처럼 땡볕에서 뛰어놀기를 좋아해 그런 건지. 성찬은 벌게진 목덜미를 보다 손을 얹었다.


“고개에 힘을 풀거라. 이러면 근육이 뭉쳐 고생한다.”

“어... 예, 예...”


원빈은 처음 받는 시중에 정신을 못 차렸다. 그냥 부끄러워서 그런 건가? 따뜻한 물에 적신 천을 이곳저곳 문지르면 입술을 꼭 물었다. 손목을 들어서 팔뚝을 문지르고 쇄골을 따르다 가슴께까지 내려갔다. 그 아래는 끌어안은 무릎에 막혀 닿지도 못했다. 편안하게 기대어 다리를 뻗어보라 하면 고개를 대차게 저었다. 결국 원빈의 손에 천을 뺏겼다. 이놈이 이젠 주인한테 고집부리며 힘을 쓴다. 


“제가 할래요.”

“같은 사내끼리 부끄러울 게 뭐가 있냐.”

“아 쫌, 좀... 뒤돌아 계세요...”


차암나. 성찬은 볼멘소리를 내다가 얌전히 뒤돌았다. 발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고개를 흔들었다, 뒷짐을 지고 휘파람을 불다 찰박이는 물소리에 멈췄다. 제 상상력이 워낙에 풍부해 소리만 들어도 다 안다. 사실은 상상력이 아니라 너무 많이 떠올려서 그렇다. 원빈이 물 안에서 일어나 다리를 문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끝내고 싶은지 빨리도 문지른다. 그 와중에도 불안감에 떨리는 목소리는 애원을 해댔다. 도련님, 뒤돌지 마세요. 뒤돌면 안 돼요. 아직 안 돼요. 아직. 아직. 그놈의 아직. 오히려 약이 올라 기다려주고픈 마음이 싹 가신다. 흠, 놀래켜줄까. 재빨리 뒤돌아서 가리지도 못하게 팔을 콱 잡아버릴까. 빈자야, 아직 멀었느냐? 짜증 나는 호칭에 심술이 났는지 원빈이 콧방귀를 뀌었다. 예에, 아직이요. 그래,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성찬은 떨어졌던 발걸음을 조금씩 다시 뒤로 물렀다. 원빈과 티 없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다행히 알아채지 못했는지 말리는 언질이 없었다. 아래를 보니 흘러넘친 물이 신에 닿았다. 뒤돌면 지척에 원빈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얌전히... 옷깃 스치는 소리도 안 나도록 조용히...


“잡았다 요놈.”

“뭐, 뭐 하는... 보지마. 보지마세요! 하지마, 손 놔.”

“빼빼 마른 게 다구만 무슨...”


헉. 성찬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원빈의 얼굴과 아랫도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손목을 잡던 힘이 빠졌는지 금세 원빈이 빠져나갔다. 손으로 양물 주변을 가리더니 안절부절못하다 그냥 물 안으로 가라앉았다. 성찬은 제가 원빈이 된 것마냥 말을 더듬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 봐 무어라 해야 할지... 말을 고르다 보니 할 말이 없었다. 크흠, 어... 저기.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하여... 아니 이게 아니라. 내 이런 경우는 난생처음 보는구나... 물론 내가 남의 양물을 볼 일은 없으나... 아니, 원빈이 네 나이는 올해 열아홉 아니더냐? 나를 속였느냐? 정리되지 못한 생각이 뒤죽박죽 섞여 나왔다. 갑자기 묘하게 죄스럽기도 했다. 아래에 털도 덜 난 놈에게 연심 품는 것이 맞는가. 그러다 숨 방울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물에 다급하게 원빈의 머리를 잡아 올렸다. 수치스러워 죽고 싶은가, 그럴 수도 있겠다. 미역 같은 머리를 귀신처럼 덮어쓴 원빈이 억울하게 말했다.


“... 혼자 다듬은 적 없습니다.”

“......”

“도련님을 속인 것도 아닙니다.”

“... 그, 그렇구나.”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적절한 반응이 무엇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찬 공기에 얼어붙던 얼굴이 아궁이의 불 쬔 것마냥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성찬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 투명한 물 위로 조롱박을 띄웠다. 어째 제가 더 민망스러워지는지. 물이 찰박이는 가운데 침 삼키는 소리가 그리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어색해져 이러다 물이 다 식을 때까지 목욕할 지경이다. 이미 많이 식어 뜨겁다기보단 따뜻하게 느껴졌다. 날씨가 추워 공기가 찬 바람에 미지근한 물에 씻으면 큰일 난다. 이제 그만 씻고 몸을 닦자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잘 안 나왔다. 천치처럼 어버버대자 원빈은 눈을 세모로 뜨고 성찬을 노려봤다. 입술은 댓 발 튀어나왔다. ... 이거 완전히 토라졌군.


“쳐도 되겠습니까?”

“뭘 말이냐.”

“도련님의 얼, 얼굴을...”

“양반을 말이냐?”

“놀리지 마세요. 보지 말라고 해, 했잖아요!”


아니, 나라고 그런 게 나올 줄 알았겠냐. 그런 게 뭔데요? 아니다,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저 갈래요. 성찬은 당황한 마음에 횡설수설하며 위로의 말들을 건넸다. 이해한다느니 다른 이들에게 내보이면 놀림 좀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러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는 그런. 원빈은 소리를 지르며 닥치라고 했다. 살다 살다 종놈한테 닥치라는 소리를 다 듣는다. 원빈이 벌떡 일어나 마른 천을 찾았다. 이젠 또 동그란 엉덩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괜히 씻겨주겠다고 했나... 그러다 성찬은 젖은 몸이 부르르 떠는 것을 보고 천을 들어 닦기 시작했다. 두 번 한눈팔면 얼어 죽을 판이다. 원빈을 들어 탕 밖으로 꺼내고 얼른 물기를 닦아냈다. 제가 하겠다며 손길을 말리는 원빈의 볼기짝을 살짝 쳤다. 쓰읍, 가만 좀 있어라. 거, 거기, 거기를 왜... 원빈이 벌게진 귀를 붙잡으며 얌전해졌다. 성찬은 마지막으로 제 두루마기를 포옥 덮은 뒤 원빈을 안아 들었다.


“... 이러고 간다고요?”

“옷은 방에 가서 입어라. 여기서 이러다가 고뿔 들겠다.”

“누, 누가 보면 어떡합니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아니냐.”


쉬잇, 너만 조용히 있으면 된다. 그 말을 끝으로 문을 열고 제 처소까지 단숨에 걸었다. 어차피 사랑채 바로 옆이라 몇 걸음 안 가도 된다. 원빈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몇 초 만에 도착했다. 문 옆은 한기가 드니 방 한가운데 가장 뜨끈한 바닥에 원빈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한겨울이라 난방을 후하게 떼 뜨거운 모양이다. 원빈은 아뜨아뜨 소리를 내며 알궁둥이를 붙잡고 일어나선 옷을 질질 끌고 펴놓은 이부자리 안에 기어들어갔다. 성찬의 두루마기는 번데기 허물처럼 바닥에 홀로 남았다. 이불이 꼬물꼬물대는 게 그 안에서 옷을 입는가보다. 나 참. 


경대 앞에 앉혀두고 낮에 사 온 얼레빗으로 머리를 빗겨줬다. 쌀뜨물로 감아 그런지 부드럽고 윤기가 났다. 아유 우리 빈이. 거울을 하도 좋아해서 닳겠다. 예쁘다 예뻐. 그만 좀 봐라. 일부러 더 뺀질거리자 원빈은 성찬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야...


“담배나 그만 태우세요.”

“응? 갑자기?”

“담배향이 고약해 입 맞추기 싫습니다.”


아... 속이 숙연해졌다. 성찬은 장죽과 재떨이를 올려둔 상을 구석으로 치웠다. 이래서 경험자의 말이 중요하구만. 부인께 입맞춤을 거절당한 은석의 심정이 이랬을까. 성찬은 눈을 깜빡이며 변명했다. 소금물로 헹구면 괜찮다. 원빈이 기가 찬다는 듯 웃으며 반박했다. 그래도 납니다. 빌어먹을... 그대로 원빈과 소지를 걸고 약조했다. 앞으로 담배 태우다 걸리면 사흘은 입맞춤 금지란다. 마음이 통하자마자 그날 바로 하는 게 금연 선언이라니. 상당히 이쪽에서 굽히고 들어가는 게 많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제가 더 좋아하니 문제지.


자고 가라 하니 원빈은 새삼 내외하기 시작했다. 아랫것이 어찌 상전과 동침을... 어이가 없어 황당한 표정이 나왔다. 엿새 동안 여기서 잘만 자지 않았느냐? 그, 그건 도련님이 자꾸, 옆에 두고 어디 못 가게 하시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어서 고개를 흔들며 못 들은 척했다. 아아, 모르겠다. 어디 도망가기 전에 황급히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이부자리로 쏙 들어가 원빈을 끌어당겼다.


“별짓 안 한다. 잠만 잘 것이다.”

“아까 목욕할 때도 또, 똑같은 거짓말을 하셨습니다.”

“나는 둘만 아는 비밀이 생겨 좋구나.”

“하여간 말은 청산유수지...”


성찬은 하하 웃다 원빈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이게 도련님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버석버석 잘 마른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 원빈이 돌아누워 품에 안겼다. 작아서 진짜 토끼처럼 앙증맞다. 팔다리를 그 위로 척 얹고 눈을 감았다. 이번만큼은 별짓 안 한단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물론 원빈이 바란다면 당장이라도 이것저것 할 수 있지만, 이것도 제가 더 좋아하니 참아야 하는 것이다. 강요하긴 싫었다. 그리고 미리 향유를 준비해둔 게 없어... 아 이게 아니고. 잠시 헛생각이 들 뻔했다. 하여튼 때가 언제 올지 모르니 향유를 넉넉히 구비해 두어야겠다.



*** 



속 편한 생각만 하며 살아도 세월이 빠르다는 말은 정말이었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설이 찾아왔다. 사람이 속도 없이 이렇게나 행복하게 살아도 될지 의문이었다. 살이 내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났던 몸은 다시 평상시대로 돌아왔다. 약해졌던 몸도 건강이 많이 좋아지고 활기차지니 원빈은 진작 성찬의 처소를 나와 행랑채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성찬이 내심 아쉬워하는 듯했지만 어차피 일과 중엔 몸종이라는 핑계로 종일 붙어 지내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명절이라 정씨 가문에선 큰 제사를 지냈다. 여자가 하나 부족한 탓에 마님이나 큰며느리나 힘들다고 곡소리를 냈다. 꼭두새벽부터 제를 지내고선 제삿밥을 배부르게 얻어먹고 원빈과 성찬은 외출했다. 손엔 술병이 들려 있었다. 친지 어르신들이 연달아 방문해 집안은 꽤 소란스러웠는데 성찬은 용케도 그사이를 뚫고 나왔다. 원빈은 정말 혼자 다녀와도 괜찮았다.


“정말 괜찮으세요? 오시는 분들마다 도련님을 찾을 텐데.”

“어차피 노인네들 잔소리밖에 안 한다. 그리고 난 이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니깐 그러네.”


성찬이 저고리 깃 사이를 여며주며 말했다. 사실은 고마울 뿐이었다. 고작 노비 묘 하나 따라가 주는 게. 성찬은 원빈의 손에 들린 술병을 뺏어간 뒤 남은 한 손으로는 차가운 손을 잡아주었다. 따뜻하다. 그리고 함께 걸어 산 입구에 도착했다. 쌓인 눈이 녹지 않아 척 보기에도 오르기가 힘들어 보였다. 원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성찬을 쳐다봤다. 워낙 귀하게 크신 도련님이라 안 다치고 오를 수 있을랑가...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원빈만 헉헉거렸다. 추워 죽겠는데 버선이 눈에 다 젖어 발이 시리다. 으으으, 추워. 성찬이 본격적으로 몸을 놀리는 걸 본 적은 없었는데 오늘 하는 걸 보니 꽤 소질이 있다. 설피를 신어서 당연한 건가. 혼자서도 척척 길을 잘 찾아가기에 어딘 줄은 알고 가냐 물었다. 알고 보니 일전에 묻은 날 몰래 따라왔었단다. 그랬구나. 왜 따라왔을까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성찬의 관심사는 온통 저인 것 같았다. 마음을 전해 듣기 전까진 별생각이 없었는데 깨닫고 보면 자나 깨나 제 생각밖에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목을 매달았을 때도 어찌 알고 저지하러 온 걸까 싶었는데 하루 온종일 저만을 살피니 당연한 거였다. 원빈은 가슴께가 간질거려 괜히 벅벅 긁었다.


“어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거기선 남의 집 하인으로 살지 말고 양반가 마님으로 사셔라. 술을 뿌리고 나름 예를 지켜본다고 절을 두 번 했다. 지대가 다 젖어 앉아 있다 가진 못할 것 같았다. 성찬은 아련한 표정으로 돌무덤을 쳐다보더니 주저리주저리 한을 읊어주고 위로했다. 정작 원빈은 그런 이야깃거리는 다 떨어져 가벼운 주제밖엔 할 말이 없었다. 슬픈 말도 하기 싫다. 그때를 더 떠올리기가 싫어 천치 장님처럼 지내다 보니 이젠 잘 기억도 안 났다. 이대로 한 해, 두 해 흐르다 보면 어머니의 얼굴과 목소리도 다 까먹을 것 같았다. 원빈은 빈틈이 생긴 돌무덤을 작은 돌멩이들로 메우며 머릿속으로 고해를 써 내렸다.


어머니. 저는 비록 천한 것으로 태어났지만 과분하게도 도련님과 마음이 통했습니다. 염치없지만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 걸까요? 여전히 이 가문 사람들은 모두 싫습니다. ... 도련님을 빼고요. 어쩌면 도련님과 마음을 나누는 게 이 집안에 대한 복수라고도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는 게 도련님께 죄송스러울 만큼, 저는...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제 세상이 되었고 그리하여 우습지만 뒤늦게 고할 말이 있답니다. 저는 더 이상 빈자가 아닙니다. 당신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듯 아껴주시던 빈자는 당신을 따라 세상을 떴습니다. 제 세상엔 단 한 사람만이 남아 천지를 꽃밭으로 물들여주시고, 그이는 저를...


원빈이라 불러주십니다.


고해라기엔 뉘우침이 없었다. 단순한 일방적 고백이니 허락이고 뭐고 죄스러운 마음도 없었다. 그저 제 선택일 뿐. 원빈은 남은 술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탈탈 털어 부었다. 그리고 이제 됐으니 가자며 성찬의 손을 잡았다. 성찬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가도 되겠느냐? 그에 대한 대답으로 손아귀에 힘을 꽉 줬다. 예. 이제 가고 싶습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성찬은 제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품에 꼭 껴안았다. 가슴께가 조이니 저절로 입에선 김이 뿜어져 나왔다. 원빈은 웃으면서 밀어냈다. 숨이 잘 안 쉬어져요.


태어나서 보낸 설날 중에 가장 마음이 말랑말랑했다. 돌아가선 토끼도 돌보고 곶감이나 간식을 나누어 먹다가 틈만 나면 몰래 껴안고 뽀뽀했다. 저녁에는 목욕 시중을 들다 분위기가 묘해졌다. 사방에 가득 찬 김 사이로 원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성찬의 붉은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오늘 밤에... 도련님 처소에서 자고, 자고 싶습니다...


행랑채에 잠자코 있다 밤에 몰래 들를 생각이었는데 그럴 것도 없었다. 성찬은 원빈을 끌어당겨 탕 안에 풍덩 빠뜨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다 젖어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 안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입맞춤을 나누다 꼭 토끼를 데려온 그날처럼 성찬의 방으로 갔다. 두 눈에서 촛불 일렁이는 모습이 자세하게 보였다. 뜨끈한 방 안에서 향유 냄새가 진동했다. 원빈은 너른 등을 끌어안고 소리를 참았다. 누가 들을까 겁이 나 죽겠는데 성찬은 소리를 듣고 싶다며 귀를 가져다 댔다. 결국 할딱이는 숨소리와 제 몸답지 않게 절로 나오는 비음을 죄다 성찬의 귓가에 뱉어내야 했다. 원빈이 받은 보답은 열 번도 더 넘게 속삭이는 달콤한 고백이었다.


더 쏟아낼 것도 없이 녹아내려 잠들기 직전이었다. 성찬이 초를 끄고 몸 위로 이불을 꼼꼼히 덮어줬다. 어둡지만 이상하게도 선명한 얼굴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원빈은 언제나 성찬의 눈에 찌꺼기처럼 남는 자책감을 안다. 뒤돌아 생각해보니 그게 어찌 성찬의 잘못이겠는가.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행복하다고,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곁에서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성찬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더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답하자 그때 우리가 주고받은 것은 위로, 치유, 사랑이었다.






바람이 불면 쌀쌀하지만 심한 한기는 없었다. 그 미지근한 온기 머금은 바람을 타고 새싹이 돋는다. 새로운 계절이다. 봄이 찾아오니 아무 길거리를 배회해도 달큰한 꽃내음이 맴돌았다. 이맘때쯤이면 연례행사처럼 하는 꽃놀이가 있었다. 실은 꽃이 저물 때까지 주야장천 성찬과 놀러 다니는 거였지만.


대문 앞에서 원빈은 말고삐를 잡고 느릿느릿 끌었다. 성찬은 안장 위에 앉아 원빈의 뒤통수를 구경했다. 그리고 슬 인적이 드물어지면 원빈은 성찬의 앞에 앉아 함께 말을 탔다. 저잣거리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꽃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곳으로 이동했다. 유채꽃밭을 구경하다 매실나무가 그득한 산 아래에 도착하면 그제야 말을 묶어두고 발로 걸었다. 원빈은 매화꽃을 보고 감탄했다. 우와. 매년 보러 오는데도 꽃은 늘 예쁘다. 거센 비 한 번이면 모두 저물어버리니 봄비가 내리기 전에 닳을 만큼 구경해 두어야 했다. 돌아다니며 사방에 펼쳐진 매화를 바라보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싫은데... 원빈은 까치발을 들고 최선을 다해 손을 뻗었다. 나무의 키가 커 그런지 얇은 가지 하나 꺾어보려 해도 손이 닿질 않는다.


“... 어?”

“이거? 아니면 이 옆의 것이 더 예쁘냐?”

“예...”


성찬이 옆으로 와 제 어깨에 손을 얹더니 가지를 아무런 노력 없이 휙 꺾었다. 꽃이 서너 개 달린 작은 가지라 손에 들고 다니긴 적당하겠지만 워낙 높은 곳에 있어 꺾을 생각조차 하지 않던 것이다. 당연히 제 손에 얹어질 줄 알고 손을 내밀었는데 가지는 다른 곳을 향했다. 원빈은 성찬을 올려다보며 활짝 웃는 그의 손을 시선으로 쫓았다. 뭐 하는 거지? 성찬은 머리를 귀 뒤로 넘겨줬다. 그러더니 작은 가지가 쏘옥, 제 귓바퀴 위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다.


“자아, 됐다.”

“아기씨도 아니고 이, 이게 뭔.”

“아주 잘 어울립니다 낭자.”

“꽃 단 사내라니, 누가 보면 광년인 줄 압니다.”

“아무도 안 보니 됐잖느냐.”


 예쁘다 예뻐. 누가 너를 보고 광년이라고 생각하겠느냐. 다 혼내줄 테니 제 앞으로 데려오라며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 저놈의 주책은 진짜... 원빈은 쑥스러워 입만 꾹 다물었다. 괜히 딴 곳을 쳐다보고 있으면 뜨끈한 볼에 무언가 쪽 소리를 내며 닿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찬을 쳐다봤더니 꼭 토끼 같다며 웃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바깥에서 간 크게 못 하는 짓이 없네. 하극상 벌이며 어깨를 퍽퍽 치는 행위도 이젠 일상이다. 성찬이 아프다며 도망갔다. 어휴, 지, 진짜. 누가 양반인지 모르겠네.


곱상하다는 표현도 아니고 예쁘다는 말은 난생처음 성찬에게만 들어봤다. 어머니는 누구 아들인지 참 잘생겼다는 말만 했다. 그 얘기를 성찬에게 했더니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뭔가 기분은 이상했다. 나는 어릴 때 기생오라비 같다는 소리를 들어봤는데 네가 예쁘다는 말을 안 들어본 것이 이해가 안 되는구나. 원빈은 그걸 듣고 조금 화가 났다. 누가 감히 양반에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물론 우리 도련님은 얼굴이 뽀얗고 이목구비에 고움 한 숟갈 정도 들어가 있긴 하다만... 아 그냥 모르겠다. 제가 더 발끈해서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누가 도련님한테 그런 망발을 지껄입니까?


“은석이가 그리 말했었지.”

“아... 그래, 그래요?”

“싸우다가 홧김에 던진 말이니 별로 개의치 않는다. 대신 나도 키를 가지고 유치하게 놀려 먹었지. 그땐 지금보다도 차이가 더 났거든. 해서 복수는 필요 없는데...”


아유, 우리 빈이 화났느냐? 내 가는 길에 그놈 집 앞에 내려줄 테니 주먹으로 한 대 쳐주면 좋겠구나. 성찬이 원빈의 코를 꼬집으며 놀렸다. 풀 죽은 척 훌쩍거리는 모양새는 그냥 짜증 나고 열받았다. 그런 건 미리 얘기를 해줬어야 할 거 아닌가. 하마터면 양반을 제대로 모욕할 뻔했다. 삐져서 반대로 걷는 원빈을 성찬이 넓은 보폭으로 쫓아왔다. 어찌 이리 배우는 게 없는지. 놀리는 것도 하루 이틀 해야 재밌지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그렇게 생각은 해도 백구처럼 졸졸 따라온 성찬이 얼굴 여기저기를 입 맞추자 화가 좀 풀렸다. 사랑이라는 건 이런 건가? 뭔가 묘한 기분 상태로 성찬을 밀어냈다.


“누, 누가 보면 어떡해요.”

“아무도 안 본다니깐.”

“사람 놀리는 게 그렇게 재밌습니까?”

“반응이 너무 귀여운 걸 어쩌란 말이냐.”


아 진짜 뭔 소리야, 흥. ... 흐흐흥. 이상하게 웃음이 나고 지랄이었다. 안 웃고 싶은데 웃음이 난다. 자꾸 들이대는 입술을 막아내야 하는데도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고, 어이없는 내숭처럼 손엔 힘도 안 들어갔다. 말은 그만하라고 하지만 거부의 의지조차 없는 손은 성찬의 가슴팍에 장식처럼 내려앉았다. 결국 사방의 매화꽃 틈에서 뽀뽀만... 대충 칠십 번은 한 것 같은데.




내행랑채는 안채 바깥에 붙어 여자 노비들만 살았다. 원빈만 빼고.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몇 년째 사는 곳이라 어영부영 짐 뺄 시기를 넘기다 보니 계속 이곳에 살고 있다. 하인들과는 전부 사이가 어색해졌지만 그래도 남자들보단 여자가 편한 게 어쩔 수 없었다. 원빈은 조금 길어진 해를 느끼며 이부자리에 누웠다. 혼자가 된 잠자리는 익숙해졌다. 눈을 깜빡이면서 천장을 바라보다 다시 꼭 감고 히히 웃었다. 오늘 너무 재밌었어. 꽃놀이는 매년 봄이면 성찬과 가던 것인데 올해는 특히 더 재밌었다. 어차피 내일 또 나갈 텐데 주책바가지처럼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내일은 어디로 나가지. 목련화를 보러 갈까. 아직 활짝 안 폈을라나.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끼익 하고 문 열리는 소리에 몸을 흠칫 떨었다. 동작이 커 이불 바스락대는 소리가 클 정도였다. 겁을 잔뜩 먹었었는데 어둠 속 목소리를 듣자 성찬이었다. 원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 오시면 어떡해요? 들키면 어쩌려고...”

“밖에서 네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는지 모르겠다. 자고 있나 싶어서 그냥 들어왔지.”

“... 왜 오셔, 오셨어요?”


행복한 상상에 흠뻑 취해 소리도 못 들었다는 사실은 좀 부끄러웠다. 성찬은 변태처럼 웃다가 바닥에 뭘 내려놓고선 이불을 파고들었다. 왜, 왜 이래? 쭉 올라와서 입을 맞추더니 옷을 하나하나 벗겨갔다. 바닥에 내려놓은 작은 병들은 향유인 모양이다. 옆방에서 다 들을지도 모르는데 이 짓 하겠다고 온 것 같았다. 못 말리는 도련님... 냉정하게 쫓아내기엔 저도 어쩔 수 없이 끌린다. 조금 고민하던 원빈은 남은 옷을 스스로 벗어던졌다. 소리야 뭐 참을 수 있겠지, 그런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정말 근거 없는 허세였다. 성찬은 오늘따라 더 짓궂게 예민한 곳을 파고들었다. 그에 원빈은 몇 번의 위기를 겪고서야 입에 저고리를 물었다. 그래도 자꾸만 흥분에 찬 비음이 났다. 성찬의 어깨에 얹은 다리를 덜덜 떨면서 빌었다. 거기 그만... 아! 외줄타기 하는 취미라도 있는지 치사하게 이럴 때 쳐올린다. 원빈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입을 막다가 그냥 베개를 들어 얼굴 위에 얹었다. 겁이 나서 안 되겠다. 성찬이 아무리 소리 듣고 싶다 애교를 떨어도 뗄 생각이 없었다.


새벽 중에 사랑채로 돌아가는 성찬에게 아주 강력한 경고를 했다. 다음부턴 절대 오시면 안 돼요... 입이 닳도록 말을 했더니 성찬은 웃으면서 알았다고 했다. 하여간 대답은 잘해. 꼬집고 싶은데 힘이 빠지고 졸려서 나가는 모습만 봤다.



***



복순은 들뜬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아버지가 정 대감님 댁에 갈 일이 있다 하여 저도 따라가겠다며 짐도 미리 다 싸놓았다. 나름 그 집 노비로 소작농을 하지만 먼 곳에 살아서 갈 기회가 많이 없었다. 굳이 그 먼 길을 따라나서는 이유라 함은, 암, 그렇고 말고... 당연히 성찬 도령 때문 아니겠는가! 제가 사는 고을엔 잘생긴 남자는 씨가 말라 찾기 힘들었다. 가끔 신공 바칠 때만 갈 수 있는데 이번엔 운이 좋았다. 마침 요새 안채 일손도 부족하다며 가서 일을 도우면 되겠다고 아귀가 척척 맞아떨어졌다. 갑자기 왜 부족한가 했더니 여자 노비가 하나 죽었다나 뭐라나.


분수에 안 맞는 걸 아니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도 장땡이었다. 성찬 도령은 어릴 적엔 뒤에서 꽤 기생오라비 같다는 모욕을 얻어먹었지만 복순은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그저 외모는 너무나도 수려했고 키는 칠 척쯤 되는 것 같다. 성찬 도련님께 시집가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집안 아씨일까. 부럽다, 부러워.


그렇게 빈 행랑채에 며칠 묵으며 주방일을 돕기도 하고 청소를 기막히게 하기도 했다. 그날은 마님이 봄나물 이야기를 꺼내 산에 나물을 캐러 갔다. 부드럽고 여린 잎만 골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일했다. 땅만 보고 요리조리 기어 다녔더니 어느새 매화나무 밭에 있었다. 와아, 어쩐지 꽃냄새가 진동을 하더라니. 잠시 딴짓하며 꽃구경을 좀 하다가 가득 찬 바구니를 바라봤다. 많이 캤네. 마침 잘 됐다. 꽃 좀 보고 쉬다가 들어가면 될 것 같았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데 주변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누가 있나보다. 복순은 그쪽에 관심이 생겨 귀를 쫑긋거렸다. 어휴우. 듣다 보니 딱 봐도 간통한 자들 같았다. 아니 세상에 어느 부부가 낯간지럽게 대낮부터 저런 대화를 나눈단 말인가. 예쁘다 예쁘다 참 말도 많네. 자기 눈에나 예쁘지. 복순은 재미지게 이야기를 듣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시선을 두리번거렸다. 이상하다... 왜 여인 목소리는 안 들리지.


“... 헉.”


복순은 한 장면을 마주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도로 나무 뒤에 숨어 몇 번이나 더 힐끔거려야 했다.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진정... 진정 그분인가? 너무 놀라서 말도 안 나왔다. 애정 어린 말을 속삭이던 사람은 성찬 도령이었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그 상대가 빈자라는 것이다.


빈자. 그 애라면 예전부터 아주 꼴 보기가 싫었다. 생각만 해도 열받으니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사내놈 주제에 여인처럼 호리호리해선 진짜 여자인 저보다도 덩치가 작았다. 몸종이면서 일머리는 그리 없어서 도대체 왜 성찬 도련님 몸종인지. 빈자는 오히려 일을 벌어대고 시중 받는 성찬의 몸이 더 바쁜 것 같았다. 그런데도 도련님은 빈자를 아껴서 싸고도니 얼마나 거슬리던지. 아마 빈자가 이 집에서 가장 하는 일이 적을 것이다. 아주 상전이 따로 없다. 며칠 전부터 도련님과 꽃놀이에 동행한다더니 당연히 지금 저 작태가 몸종의 역할은 아닐 것이다. 저 불여시 같은 것이 몇 년 동안이나 도련님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꼬셨구나. 얼마나 붙어먹었는진 모르지만 이대로 간다면 정씨 가문에 어마어마한 수치가 따로 없다. 차남이 동성애를 한다니.


복순은 성찬과 빈자의 뒤를 밟다 얼떨결에 댁으로 도착해버렸다. 나물을 다듬고 씻는 중간에도 틈이 생기면 하루종일 훔쳐봤다. 벌써 입맞춤하는 것까지 다 봐서 그런지 모든 행동에 다 사심이 있어 보였다. 얼씨구, 손은 왜 잡아? 안 보이는 줄 아나. 이러다 마당에서 비역질도 하겠네. 빈자 저것을 어떻게 물먹여야 할지 생각하느라 일이 손에 안 잡혔다.


밤이 되자 속에 천불이 나서 잠이 안 왔다. 문지방 앞에 앉아 바람이라도 쐬려는데 빈자의 처소가 신경 쓰였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참 기상천외할 일이다. 아무리 기지배 같다고는 하나 양물 멀쩡히 달린 사내놈일 뿐인데 어찌 여인들과 같은 곳에 산단 말인가. 전부터 이해는 안 됐지만 제가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니어서 가만히 있었다. 어미랑 같이 산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지난해 겨울에 죽은 노비가 저놈 어미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에 대해 아무리 캐물으려고 해도 함께 일하는 양순과 난향 아주머니는 눈치만 보며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이제 어미도 없고 스물이나 처먹은 사내놈이 아직도 여인들과 함께 사는 것이 말이 되냐고.


살금살금 다가가서 문 앞을 기웃거렸다. 이놈을 어떻게 해야 잘 구워삶을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는데 또 무슨 소리가 들렸다. 모두 자느라 고요하니 틀림없이 빈자의 방에서 새어나는 소리였다. 복순은 앉아서 귀를 기울이다 인상을 팍 찌푸렸다. 사람이 앓는 소리가... 궁금해서 침을 삼키다 창호지에 살살 구멍을 냈다. 눈을 갖다 대면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도 묘한 숨소리나 물 질퍽이는 소리가 들렸다. 슬슬 어둠에 적응하자 보였다. 짐승 같은 움직임이. 복순은 놀라서 주저앉을 뻔하다 겨우 고쳐 앉았다. 비역질은 그냥 해본 소리였을 뿐이다. 세상 모르게 숨어 그런 짓을 하는 사내들이 있다는 얘기만 들어봤지, 그게 성찬 도련님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 아래 깔려 낯부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은 무려 그의 몸종이었다. 전혀 상식선의 일이 아니다. 역겨워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복순은 방에 돌아가 밤새 이걸 어째야 할지 고민했다. 날이 밝자 마음을 정했다. 이건 다 도련님을 위한 일이야. 빈자 저놈을 무조건 도련님에게서 떼 내야 했다. 다행히 달에 한 번 내려오는 정 대감은 지금 이곳에 있었다. 내일이면 한양의 별채로 돌아가실 테니 오늘 반드시 말해야 한다.


“대감님께 올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 좀 내어 달라고 해주세요.”

“대감님이 복순이 너 만날 시간이 어디 있냐.”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고요. 가문이 좌지우지될 만한 일이란 말입니다!”

“쉿, 어디서 말을 함부로 해? 알았다, 알았어. 말씀은 드려볼 테니 기다려. 기대는 하지 말고.”


 대감님이 세수할 시간부터 찾아가 남자 하인에게 부탁했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기다렸는데 생각보다 반응은 금방 왔다. 정 대감은 바깥으로 나오더니 복순에게 물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복순은 예를 갖춰 인사하고 눈치를 봤다. 여기서는 말할 수 없다고 하니 결국 아무도 없는 곳에서 독대할 수 있었다.


복순은 제가 본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다 말했다. 중간엔 화가 나서 잠시 울컥할 뻔했다. 그래도 목을 가다듬으며 최대한 논리정연하게 말했다. 정 대감의 반응은 노발대발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관심 없다는 듯 지루한 표정도 아니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수염을 살살 쓸면서 말했다. 흐음, 그래? 복순은 거기서 감정이 올라와 울분을 토했다. 예, 도련님이 어찌... 저는 도련님이 옳은 길을 걸으시길 바라는 충심에 고하는 것입니다. 어찌 몸종과 그 짓을... 한이 맺힌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결국엔 정 대감의 입에서 복순이 바라던 대답이 나왔다.


“빈자 그것에게 큰 벌을 내려야겠구나. 성찬이는 내가 잘 타이를 테니 넌 가봐라.”

“예. 알겠습니다.”


복순은 절을 한 뒤 문을 닫고 나왔다. 뒤돌아서 걸으니 걸음이 참 가볍고 속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웃음이 스멀스멀 나왔고 발걸음은 신나는 박자감이 생겼다. 아이고 고소해라. 빈자 이것아 너는 이제 끝이다.



***



원빈은 자연스레 떠진 눈을 깜빡였다. 늘 일어나던 시간에 일어났을 뿐인데 밤에 그 난리를 쳐서 그런지 피곤하다. 따뜻하게 이불에 꽁꽁 싸매진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일하기 싫다. 어휴 그래도 일어나야지 내가 몸종인데. 도련님은 일하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나. 원빈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허리를 통통 두드리면서 이부자리를 갰다. 피곤한 탓에 대충 했더니 각이 영 안 살았다. 끙...


새벽엔 졸면서 소여물을 챙겨 먹이고 끌고 나와서 산책도 시켰다. 원빈은 코를 씰룩거렸다. 음... 으음... 킁, 에취! 에... 엣취! 재채기가 연달아 나와 멈춰 서야 할 정도였다. 꽃가루가 하도 날려 요새 코가 너무 간지러웠다. 끝을 자주 비비니 빨개져서 성찬이 놀렸다. 원빈이 너는 아직도 한겨울이구나, 하면서. 아침부터 소와 함께 걸으면 잠이 완전히 깼다. 다시 외양간에 밀어 넣고 아침 먹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토끼를 구경했다. 분명히 데려올 땐 엄청 작았는데 지금은 제 팔뚝보다 덩치가 커졌다. 돼지야. 사실 그다지 먹인 게 많지 않아 살이 포동포동하진 않았지만 너무 커지니 귀여운 맛이 없었다. 오히려 한량처럼 할 게 없는 성찬이 토끼를 더 귀여워했다. 원빈에겐 너 때문에 데려왔는데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원빈은 괜히 먼 산을 쳐다보며 딴짓했다. 저는 종놈만 해봐서 그런가 주인 의식은 딱히...


그러고 보니 성찬은 저를 놀려 먹는 게 분명했다. 담배를 끊으니 심심해 죽겠나보다. 토끼에겐 분명히 지어준 이름이 없었는데 저 몰래 토끼에게 원빈이라고 부르는 것을 봤다. 웃길 수도 있지만 그날 그것을 가지고 성찬과 하루종일 입씨름했다.


- 도련님은 개, 개나 소나 다 이름을 지어주시나 봅니다?

- 자세히 보니 네가 토끼를 닮은 것 같아 그렇게 한번 불러본 거다. 

- 뭐, 뭐가 닮았어. 저거 이제 다 커서 하나, 하나도 안 귀여운데. 요.

- 원빈이 네가 더 귀엽긴 해.

-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 요.

- 언제는 토끼가 되고 싶다더니.

- 저렇게 되긴 싫다고요. 애초에 귀여워서 데려왔는데 이젠 하나도 안 귀엽습니다.

- 원래 아기들은 다 귀엽다. 어떻게 평생 아기만 하겠느냐.


그리고 또 뭐 구시렁구시렁...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화만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웃기다. 다 큰 사내놈들이 나누는 대화치고는 수준이 낮았다. 처음에 원빈이 말하고 싶었던 건 귀엽니 마니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냥 저 토끼한테 뭔데 왜 나랑 같은 이름 지어주냐고. 그게 싫었다. 동물에겐 누가 봐도 동물 같은 이름이 붙어야 할 거 아닌가. 그걸 가지고 계속 항의하니 성찬과의 합의하에 토끼의 이름은 토토가 되었다. 하여간 저는 태어나도 징그러운 꼬라지는 싫고 평생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기토끼였으면 한다. 현실적으로 그럴 순 없겠지만 그냥 제 바램이다. 그래야 누군가 주워가서 밥을 챙겨줄 테니까.


날이 다 밝아 아침 해가 쨍쨍했다. 지금쯤이면 성찬과 주인 나리들이 모두 식사를 마쳤을 것이다. 원빈은 보통 하인들과 함께 아침을 먹은 후 성찬에게 간다. 쩌렁쩌렁한 양순의 목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상 다 차렸으니 모이라는 말이었다. 원빈은 익숙하게 주방 쪽으로 가다 누군가 불러세움에 멈췄다. 대감님 몸종이다. 그는 원빈에게 대감님이 찾는다며 손을 잡고 끌었다. 갑작스러워서 어정쩡한 몸짓으로 끌려갔다. 정신 차려보니 방 안으로 밀어 넣어진 직후였다. 갑자기 이 인간이 저를 왜 찾는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불쾌감이 들뜬 낯을 가리기 힘들었다. 차라리 예를 갖춰 엎드려 있는 게 더 나았다.


“저를 왜 찾으셨는지...”

“내 빈자 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요 몇 달간 잘 지내는 것 같더구나.”

“......”

“곱단이가 그리 되니 비록 천한 것이지만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뱀 같은 혀가 내뱉는 말들은 죄다 기가 찼다. 갑자기 저런 말을 왜 하는지도 모르겠다. 위선자 같은 놈. 네가 죽였잖아. 네가 내 어머니를 사지로 끌고 갔어. 원빈은 꽉 깨문 이를 숨기려 얼굴을 더 내렸다. 분한 마음에 이럴 때 해야 하는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죄가 큽니다. 그런데도 저를 내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말은 죽어도 못 할 것 같았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 그냥 이 방을 벗어나고 싶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정 대감은 대답이 없는 원빈을 혼내지 않았다. 오히려 위엄 있는 척 목소리를 내리깔고 혼자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름대로 얼마나 곱던지 신분 하나가 참 아쉬울 정도였지. 큼, 너도 핏줄이라고 곱단이를 닮았구나. 더러운 본심이 슬슬 고개를 내밀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전부 역겨운 문장이 귀에 들린다. 그래서 지금 저와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건지 헷갈렸다. 원빈은 얘기도 나누기 싫었고 더 있다간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 저딴 말들을 더 듣고 있다간 저도 모르게 뛰쳐나간 몸이 정 대감에게 어떤 해를 가할지를 모르겠다.


주절주절 긴 혀를 나불대던 정 대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빈은 몸을 흠칫 떨었다. 발걸음이 쿵쿵대며 제 코앞으로 다가왔다. 거기서부턴 뭔가 분위기가 수상했다. 억센 손이 원빈의 턱을 꽉 쥐더니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쳤고 도대체 그 안에 든 꿍꿍이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몸을 감싼다. 원빈은 대감을 노려보다 침을 한번 삼켰다.


“그래서 내 아들 양물 맛은 어떻더냐?”


정곡을 찌르는 말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 그게 무슨...”

“...”

“무슨 말씀이신지...”

“모른 척하는 것이냐? 그래,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


곱단이 그년은 예쁘긴 했는데 입이 가벼워서 원...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었다. 원빈은 턱을 붙잡은 손을 매섭게 쳐냈다. 어머니를 더 모욕하시면 참지 않을 것입니다. 정 대감은 기분이 상했는지 혀를 찼다. 쯧, 뻣뻣하기는...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려 숨이 찼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성찬이 원빈을 잘 챙긴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었지만 그 관계를 굳이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제가 목을 매달았다는 것이 하인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떠돌아 저를 구박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남들은 성찬이 원빈을 싸고도는 것도 다 그 때문일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못마땅하게 생각할 순 있어도 두 사람을 연인 관계라고 보는 이는 없었다. 남자니까.


“모자가 쌍으로 부자를 유혹하는구나.”

“아닙니다.”

“성찬이 그놈한테 사내 안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아니, 아니라고요.”


일단 잡아뗐다. 증거가 있는지 없는지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절대 아닙니다. 도련님과 그런 적 없습니다. 정 대감은 원빈의 대답에 관심도 없었다. 제 눈빛은 여기저기 사방으로 떨리는 반면 그의 눈빛엔 확신만 가득했다. 원빈은 벌벌 떨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금 상태로는 전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억지로 잡아뗀 뒤 할 말이 없다며 도망칠 생각이었다. 강한 팔 힘이 저를 돌려세우더니 팔뚝을 붙잡았다.


“내 그냥 넘어갈 수 있다.”

“...”

“나도 만족시켜 준다면 말이다.”


불쾌하게 이죽대는 얼굴은 탐욕과 더러움이 맴돌았다. 원빈은 겁먹은 표정을 짓다 몰려오는 토기에 벗어나려 했다. 다만 그 말은 권유가 아니라 강요였다. 정 대감은 거부할 틈도 없이 원빈의 저고리를 벗기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충격이 심해 목이 꽉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벙어리처럼 새된 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하지마. 싫어. 이 파렴치한 새끼.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입에선 자꾸만 천치 같은 소리가 나왔다. 으으... 으으....


“그래, 그래 빈자야. 어여쁜데 사내놈이라고 또 힘은 좋아 안는 맛이 있겠구나.”


바지가 엉덩이까지 끌렸다. 원빈은 발버둥의 동작을 멈추고 손을 들었다. 짜악. 살면서 누구 뺨을 쳐볼 일이 없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양반일 줄도 몰랐다. 반대로 돌아간 정 대감의 볼이 벌겋게 부어오른다. 원빈은 잠자코 멈춰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시선이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뒤늦게 문을 발견했다. 원빈은 그쪽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곧 머리채가 질질 끌려 되돌아갔다. 정 대감의 능글거리던 목소리는 어느새 노기를 띠었다. 이놈이, 감히, 어디라고. 한 대 때렸을 뿐인데 그 대가로 몇 대를 더 얻어맞았는지 모르겠다. 입가가 다 터져 정 대감의 손에 피가 묻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드러눕자 발길질이 날아왔다. 원빈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이젠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섭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부터 몸이 덜덜 떨렸다. 그 신호에 제가 무섭나보다 추측만 할 뿐이다. 정 대감은 원빈의 몸에 올라타 목을 졸랐다. 숨이 계속 막히면 이젠 몸조차 떨리지 않았다. 불투명한 의식 속에 힘이 빠져간다.


“얌전히 있어라.”

“끅... 허억, 흐, 헉. 허억...”


이대로 기절이라도 하나 싶었는데 목에서 손이 떨어졌다. 원빈은 가슴팍을 들썩이며 숨을 갈구했다. 그냥 죽고 싶다. 죽고 싶어서 눈물이 났다. 그런데도 왜 몸은 살고 싶다는 듯 숨을 헐떡거리는지. 공기가 달게 느껴졌다. 그게 진저리 나도록 싫었다.


들숨 날숨이 급박하게 들락대던 입이 틀어막혔다. 더러운 살덩이가 입안 점막에 닿는다. 빈속이지만 무언가 역류하려는 것 같았다. 헛구역질을 반복하자 입안을 채운 액체에 신맛이 났다. 원빈은 그 덕에 잠시 정신을 차렸다. 젖은 두 눈을 뜨니 욕망 가득한 노인네의 얼굴이 보였다. 원빈은 뜨거운 눈물을 삼키다 살덩이를 콰득 씹었다. 아예 잘라버릴 각오였는데 생각보다 질겨 그러진 못했다. 떨어져 나간 정 대감은 바닥을 굴렀다. 이번엔 어리바리할 틈이 없었다. 원빈은 살기 위해 기었다. 문을 열고 마루로 기어나갔고 맨발에 헐벗은 몸으로 마당에 뛰쳐나갔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초점이 나간 눈으로 황망히 둘러봤다. 평생을 노비로 살아 가진 것이 없었다. 먹고 자고 모두 이곳에서 하는데 맨몸으로 나가 무얼 해야 할까. 발가벗겨진 제 꼴이 처절했다. 그러다 온 마당 위로 정 대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미친놈을 잡아라! 또 죽지 못해 사는 몸이 대문을 향해 뛰었다. 모르겠다. 살려면 도망쳐야 하니까. 살고 싶다고 생각하기 싫은데 살고 싶으니까.


원빈의 도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단락을 내렸다. 몇 분도 아니었다. 고작 몇 초 만에 저를 따라 나온 하인들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갔다. 도망칠 땐 아픈 줄도 몰랐는데 양팔이 들려 질질 끌려가니 그제야 욱신욱신했다. 원빈은 마당에 엎어졌다. 바깥이 소란스러워 나와봤는지 성찬은 당황한 낯이었다. 어느새 옷을 추스른 정 대감은 대청으로 나와 노발대발했다. 어정쩡하게 고간을 쥔 손이 우스꽝스러웠다. 그 꼴을 보니 별안간 헛웃음이 나왔다. 역겨운 놈... 더 세게 물걸.


성찬은 제 꼴을 보더니 뛰어왔다. 자기가 더 놀라서 어버버하고 말을 더듬었다. 눈빛에는 다양한 감정이 보였다. 당혹스러움, 가여움, 슬픔, 불안, 두려움, 걱정, 화남… 두루마기를 벗더니 맨몸 위로 덮어줬다. 원빈은 성찬의 행동에 또 다시 눈물이 났다. 나를 그렇게 보니까. 성찬이 평소에도 저를 그렇게 보았다면, 바보도 다 알아챌 게 뻔했으니까. 엉엉 울자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저를 끌어안았다. 꼬라지가 퍽 연인 같았다.


“저놈이랑 붙어먹었다는 게 사실이냐? 내 날이 밝자마자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놀라 넘어갈 뻔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빈자 너는 어미의 잘못도 큰데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네놈이 미친 게 틀림없구나.”


이제 와 태세를 바꾸는 게 속이 참 뻔한 자였다. 성찬은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상황을 파악하다 원빈을 더 세게 감싸 안았다. 하나 마나인 변호를 열심히도 소리쳐 주었다. 제가 먼저 좋아했습니다. 억지로 강요한 것입니다. 빈자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 원빈은 가만히 안겨 체념했다. 그래, 성찬도 알 것이다.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사실을 말하던 제 입을 막은 건 다름 아닌 성찬 아니던가. 물론 성찬이 지금 내뱉는 말이 진실은 아니었지만 그 말로 인해 달라질 것도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기구한 꼬락서니가 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원빈도 그것을 안다. 알 만한 사람이 참 간절하게도 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사랑이라는 것도 잘 알아서, 너무나도 티가 나서. 성찬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알면서도 그 희망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가 한참 멋모르고 했던 짓이라 이해할 수 있었다.


“시끄럽다! 저놈을 매질하고 발가벗겨 대문 밖에 던져놓아라. 날이 어두워지면 방 안에 가둬놓고 물 한 모금 주지 마라.”

“안 됩니다! 여봐라, 빈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건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너는 무기한 외출 금지다. 방에 끌고 가라.”


발악하는 성찬을 사람 세 명이 겨우 붙잡아 끌고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원빈은 제가 참 안일했구나 싶었다. 그 누가 보아도, 연모의 정이 분명할 텐데... 그러다 눈을 감았다. 아픈 건 싫어. 그냥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



성찬은 손끝을 물어뜯었다. 이틀째 아무런 진전 없이 방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하인들이 문밖을 계속 감시하고 있어 간단히 사랑채 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제외하면 원빈을 보러 가는 건 꿈도 못 꿨다. 성찬은 소식이라도 전해 듣기 위해 심부름 핑계로 양순을 불렀다. 양순은 곤란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그게... 빈자 고것이... 당장 보러 갈 수도 없는데 걱정되는 말만 들으니 속이 애타 죽을 것만 같았다. 원빈은 안 그래도 몸이 허약한 상태인데다 물을 한 모금도 먹지 못해 의식이 오락가락한다고 했다. 바깥 행랑채로 처소를 옮겨 양순도 잘 보지 못한다고. 이대로라면 정말 큰일 날 수도 있었다.


진작 어제 한양의 별채로 떠나야 했던 아버지는 아프다는 핑계로 드러누웠다. 빈자가 직접 찾아와 무릎 꿇고 잘못을 빌면 용서하겠다고 큰소리를 떵떵 쳐놓은 상태였다. 원빈은 그 말을 전해 들었을 텐데도 꿋꿋하게 버텼다. 성찬은 머리로는 이해했다. 자존심이 아니라 자긍심의 문제라는 것도 안다. 어찌 제 어미를 그렇게 만든 자에게 무릎 꿇고 빌겠는가. 하지만 성찬에게 그런 것은 우선순위가 아니게 됐다. 원빈을 잃을까 두렵다. 도망을 쳐서 둘이 살든 이후의 일은 제가 어떻게든 도모해 볼 테니 제발 원빈이 한번 굽혀 목숨을 지키길 바랐다. 성찬은 양순에게 진심으로 부탁했다. 너든 다른 하인이든 간에 제발 빈자를 좀 설득해 달라고. 그런데 이미 여러 번 설득하려 해봤다는 말이 돌아왔다. 고집이 하도 세 다른 이의 말을 안 듣는다고 했다. 이젠 양순이 간절한 눈빛으로 성찬에게 부탁했다.


“도련님... 저 그날 이후로 반성 많이 했습니다. 빈자한테 사과는 못 했지만... 상 두 번 치르게 생기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참 못난 짓 많이 했다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이왕이면 살았으니 좀 행복했으면 합니다.”

“......”

“제발 빈자 그놈 좀 살려주세요...”


성찬은 마음을 다잡았다. 원빈에게 얼마나 잔인한 짓인 줄은 잘 알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양순에겐 제게 하는 사과 따위 필요 없다고 했다. 빈자가 목숨을 잃을 일은 없을 테니 그 아이에게 할 사과나 준비하라 일렀다.


성찬은 새벽 중에 몰래 처소를 나왔다. 제 방문 앞을 지키는 하인들은 밤이면 돌아갔지만 원빈의 처소 앞엔 밤새 하인들이 돌아가며 지켰다. 그 몸으로 어디 도망칠 수도 없을 텐데 쓸데없이 사람 낭비다. 꾸벅꾸벅 졸던 하인은 성찬이 다가가자 깼다. 깜짝 놀라서 오면 안 된다고 막았다. 성찬은 난생처음으로 하인에게 사정사정했다. 원빈은 아예 논외로 치고 아랫것에게 이렇게 간절히 부탁한 적이 없었다. 아주 조금만 이야기하고 나올 테니 제발 모른 척해 줄 수 없겠냐고.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짓다 비켜섰다. 그래도 원빈과 나름 오래 살았다고 알게 모르게 생긴 정이 있는 모양이다. 성찬에게 멀쩡한 놈 초상 치르긴 싫다며 빈자를 꼭 설득해 달라고 했다. 이 집 도련님이 그놈과 연정을 나눈다는데 그런 것엔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기분이 썩 괜찮았다. 원빈이 이들 사이에서 귀여움을 받는 존재였구나 싶어서.


뜨끈한 몸이 희미한 숨을 내쉬었다. 원빈은 이마를 쓰다듬자 눈을 떴다. ... 도련님? 일어나려는 몸을 말려 다시 눕게 했다. 다른 이에게 들킬지 모르니 빨리 이야기하고 나가봐야 한다. 원빈아.


“내가 하려는 말이 네게 얼마나 상처일지 안다.”

“...”

“그런데 제발... 그냥 아버지께 한 번만 용서를 빌면 안 되겠느냐.”

“싫어요.”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이대로라면 목숨이 위험하지 않느냐. 물은커녕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그래도 싫습니다.”


원빈이 마른기침을 했다. 성찬은 언성을 높이려다 가슴이 먹먹해 눈물을 흘렸다. 울면서 계속 원빈을 설득했다. 옳든 아니든 어쩔 수 없었다. 제겐 원빈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그런 것밖에 없어서. 원빈은 가만히 듣다 화가 났는지 이젠 거의 빌고 있는 성찬의 어깨를 온 힘을 다해 밀쳤다. 그 힘이 너무나도 나약해서 마음 아팠다. 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뱉는 문장들엔 틀린 말이 단 하나도 없어서 그것도 고통스러웠다. 저한테 미안하다면서요. 아비가 못나서 부끄럽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제게 이러십니까. 모두 맞는 말이었다. 성찬은 원빈에게 미안했고, 아비가 못나서 부끄러웠다. 그런데도 제발 원빈에게 그리 해달라고 비는 것은... 그것도 언제나처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내 너를 지키고 싶어서... 잃기가 두렵다.”

“이게, 이게 지키는 거란 말입니까? 도련님은 아무, 아무런 힘도 없는데. 뭘 어떻게 지킨단 말입니까. 당신은 항상 그랬어. 지킨다는 말로 항상 날 비참하게 만들잖아.”

“......”

“내가 무슨 일을 다, 당할 뻔했는지 알기는 해? 그 새끼가, 네 애비가. 내, 내 옷을 벗기고. 반항하니까 때리고, 목, 목을 조르고, 냄새나는 좆을 입에 처박고...”


원빈이 목덜미를 보이며 옷을 풀어헤쳤다. 당황해서 미처 보지 못한 멍이 목에 선명했다. 제가 밧줄 자국을 없애느라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곳과 같은 위치였다. 성찬은 처음 아는 사실에 충격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옷이 벗겨져 있긴 했지만 원빈이 그런 일을 당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도망치다 벗겨졌나 생각했다. 속이 역해 입을 틀어막았다. 아비가 못난 수준이 아니었다. 사람으로 봐주기도 역겨웠다. 성찬은 더 이상 원빈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이런 말을 듣고도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니까. 미안함밖에 느낄 수 없는 것에 또 미안했다. 원빈은 소리치듯 말하면서도 몸을 떨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두려워했다. 성찬은 원빈을 끌어안고 울었다.


“왜... 왜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냐.”

“말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그건... 난, 나는...”

“도련님은 잘난 부모 하늘에 가려 바, 바른말도 마음대로 못 하지 않습니까. 그냥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넘기셨겠죠. 그런 게 지, 지키는 거라면 전 필요 없습니다. 차라리 그냥 죽겠습니다.”

“원빈아 제발...”

“그 얘기 더 꺼낼 거면 가세요.”


원빈은 성찬을 밀어내고 매정하게 돌아누웠다. 아무리 그 이름을 불러도 성찬의 얼굴 한번 봐주지 않았다. 그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원빈이 제 정곡을 찔렀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미안하다, 잘못했다 그 말밖엔 없었다. 발가벗겨진 실체가 온 세상에 드러난 듯 창피했다. 결국 이뤄낸 것 하나 없이 원빈의 처소를 나와야 했다. 울면서 방을 나오는 성찬에 하인은 눈치만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조용히 얘기를 나누려 했지만 원빈의 언성이 꽤 높아져 다 들었을 것이다. 이제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을 가득 채운 무력감과 허탈감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제가 왜 사는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가진 것은 무엇인지. 그 모든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하찮은 자구나. 제가 원빈을 뭘 어떻게 지킨다는 건지 말도 안 되는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짐승보다 우매할지도 모를 인간은 하룻밤 새에 애통한 현실을 깨달았다. 그건 자신이 아니라 자만이었다는 것을.





외출 금지라는 소식을 들었는지 다음 날 은석이 찾아왔다. 한숨도 자지 못해 퀭한 눈가와 부어오른 눈덩이를 보더니 혀를 찼다. 순순히 들여보내 주더냐 물어봤다. 은석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른 가문 사람인데 저들이 뭐 어쩌겠냐고 대답했다. 그렇긴 했다. 제 죽마고우니 안 들일 수도 없고 대문 앞에서 입씨름하다 일을 키우기도 뭐 하니 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도대체 어떻게 들어왔나 영 찝찝하긴 했는데 생각을 접었다. 화술에는 얄미울 정도로 능한 놈이라 알아서 척척 헛소리하다가 당당하게 들어왔겠지 싶었다.


은석은 그래서 어쩌다 이렇게 됐냐며 일의 경위를 물었다. 성찬은 착잡한 심정으로 그간의 일들을 말했다. 정신이 사나워 말이 꼬이고 횡설수설했지만 은석은 대강 알아들었다. 원빈이 당한 일은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말하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고통스러웠다.


“헌데 원빈이가 설마 빈자냐?”

“그래.”

“오호... 애칭도 있어?”

“애칭이 아니라 그 아이의 자다. 이름이라고.”

“얼씨구. 이름도 새로 지어줄 만큼 애정하는구만.”


은석이 분위기를 풀려 애썼다. 미안하지만 하나도 도움이 안 됐다. 원빈 생각에 저도 모르게 시도 때도 없이 한숨만 나왔다. 나쁜 버릇은 유년 시절에 모두 고쳤는데 갑자기 튀어나왔다. 입술과 손톱을 물어뜯고 정신없게 이마를 쳤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이러다가 왼손잡이 버릇도 나올 판이다. 멍한 눈으로 바보짓만 하고 있으면 은석이 손을 잡아 내렸다. 정신 차리라며 어깨를 팍팍 쳤다. 그리고 웬일인지 진중한 눈으로 물었다. 너 걔를 그렇게 좋아하냐고. 네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성찬은 바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게 없거든. 가진 게 없어서 원빈이를 지킬 수가 없었어. 그래서 어차피 이것저것 챙길 것도 없으니 다 내려놓고 그 아이와 함께 떠나라 하면 당장 맨몸으로 떠날 수 있었다. 은석은 성찬을 보며 깊게 고민했다. 말미엔 턱을 쓸며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했다. 아이 씨...


“완전히 미쳤다는 말은 농이 아니었어.”

“너마저 그럴 거면 가라.”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할 거 아니냐. 그래도 역시 사내라면 우정보단 사랑이겠지?”

“......”

“좀 서운하네. 하여간 벗을 위해 이 형님이 힘 써주마.”


형님은 지랄 무슨 소린지. 어쨌든 돕는다는 말이겠지. 힘든 상황에 손 내밀어준 은석이 고마웠다. 그래서 이 답도 없는 상황에 어떤 계책이 있을지 잠자코 들어봤다. 자기만 믿으라며 술술 계획을 읊는 은석은 솔직히 말해 아주 무모했다.


내 말과 몸종을 대문 밖에 세워두었다. 가려는 척 몸종에게 대충 계획을 언질 줄 것이다. 그리고 빈자를 보고 가야겠다며 어떻게든 떼를 써 행랑채까지 가겠다. 방 안에서 빈자와 의복을 바꿔 입고 내가 빈자인 척 누워 있으면 되겠구나. 빈자에겐 말을 타고 나가 오동나무집에 머무르라고 하겠다. 난 어차피 곧 들킬 게 뻔하니 자네는 얼른 빈자를 따라 나갈 준비하고 있어야 해. 응? 자네는 어떻게 빠져나가냐고? 그건 알아서 해야지. 어차피 이 집 하인들이니 적당히 겁박하고 구워삶으면 넘어올 것 아닌가.


군데군데 구멍 난 허술한 계획이었다. 성공할지 알 수 없었다. 실패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은석이 무서우면 접으라며 식은 표정을 지었다. 성찬은 나약한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무모할지라도 이런 데에 희망을 걸어야 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지금과 다를 것이 없다.


은석은 어차피 갈아입으려면 벗어야 한다며 대충 채비하고 일어섰다. 좀 망나니 같은 꼴이지만 얼마나 믿음직하던지. 문을 열기 전 서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영영 헤어진다기엔 생각보다 멀쩡했고 아무렇지 않다기엔 씁쓸한 낯이었다. 성찬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 어안이 벙벙했다. 머릿속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되짚기 바빴다. 은석은 웬일로 말이 길었다.


“일이 잘 풀린다면 지금 자네의 모습이 마지막이겠지.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벗으로 지내는 동안 재밌었어.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난 마음 편하게 먹을 테니 정인과 함께 멀리 떠나 행복하게 사세.”

“고맙다 은석아.”

“그래. 돌아오지 마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은석이 문을 열고 나갔다. 틈새로 보이는 하늘이 우중충했다. 비가 올 모양이다.



한 시진쯤 지났나. 들리지 않는 소식에 성찬은 문을 슬쩍 열었다. 분위기가 뭔가 어수선했다. 문 앞을 지키던 하인 둘 중 하나는 어딘가에 가고 없었다. 성찬은 남은 하인을 살살 불렀다. 말을 한 필 준비하라고 하자 머뭇거리며 안 된다기에 돈을 한 움큼 쥐여줬다. 하인은 속곳 안으로 잘 챙기더니 마구간으로 향했다. 곧 성찬은 때가 참 절묘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라졌던 하인 하나는 식겁한 낯으로 돌아왔다.


“아니, 이 사람이 어디 간 거야...”

“왜? 무슨 일이 있느냐?”

“도련님? 아 그게... 저...”


곤란한 얼굴에 딱 봐도 사정이 뻔했다. 빈자가 사라졌다. 그 대신 등장한 은석에 딱 봐도 성찬의 속셈일 게 분명했지만 주인을 멋대로 의심할 수도 없고 말을 고르는 중일 것이다. 아버지께 고하면 노발대발 경을 칠 테니 그것도 고민하고 있었다. 성찬은 아예 방에서 나왔다. 하인이 당황하여 말리지도 못했다. 그때 마구간에 갔던 하인이 돌아왔다. 다른 이 눈치를 슬 보더니 성찬에게 귓속말로 전했다. 마구간지기가 대문 앞에서 말 한 필을 데리고 있을 것이라 했다. 성찬은 도망칠 틈을 재며 간을 봤다. 하인들끼리도 귓속말을 했다. 코앞이라 다 들렸다.


이 사람아, 빈자가 사라졌다는데...

아무래도 도련님과 은석 나리가 작당해 빼돌린 것 같아.


그제서야 마구간에 갔다 온 하인이 입을 떡 벌리며 성찬을 돌아봤다. 더 훔쳐 들을 시간은 없었다. 성찬은 재빨리 옆으로 빠져나가 마당을 가르고 뛰었다. 그새 소식이 전해졌는지 안채 쪽에서도 하인들이 분주하게 뛰어나왔다. 노비 하나 없어졌다고 집안이 난리 났다. 성찬은 대문 쪽으로 죽어라 뛰었다. 닫히고 빗장이 걸리기 전에 나가야 한다.





원빈은 까끌거리는 목구멍으로 침을 삼켰다. 마치 입안이 녹슨 쇳덩이처럼 삐걱거린다. 가끔 들어와 몸 상태를 살피는 하인들 말로는 열이 난다는데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추워. 원빈은 무거운 몸덩이를 겨우 움직여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귀까지 아파 먹먹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아파본 적이 없어 이제 정말 죽겠구나 싶기도 했다. 생명이 꺼져간다는 게 느껴졌다. 목이 말라 수시로 침을 삼키지만 별달리 효과가 없었다. 침샘마저 말라가 목이 갈라지고 한마디 내뱉으면 기침이 난다.


바깥에서 작은 실랑이 소리가 들렸다. 귀가 멍멍해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건 알겠는데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눈을 뜨고 시선만 옮겨 바라보았는데 뜻밖의 인물에 조금 놀랐다. 은석 나리네. 도련님을 보러 오셨나. 여기는 어쩐 일이시지.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아 인사를 올릴 수 없었다. 반쯤 뜬 눈으로 멍만 때리자 은석은 원빈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대뜸 하는 짓이 두루마기를 벗는 거였다. 은석은 저고리와 바지만 남기더니 나머지 의복은 원빈에게 입혀줬다. 머리에 열이 차 어지러웠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은석이 정신 못 차리는 원빈의 양쪽 뺨을 짝짝 쳤다. 바깥에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빈자야 정신 똑바로 차려라. 너는 지금부터 도망하는 것이다. 내 말을 똑바로 들어라. 대문을 나서면 내가 타고 온 말과 하인이 있다. 너는 그 말을 타고 곧장 오동나무집으로 가서 하룻밤 묵는 것이다. 알았느냐? 성찬이도 곧 따라갈 것이다.”

“그게... 그게, 무슨.”

“내 하인에겐 미리 언질을 주었으니 대문까지만 들키지 않고 나가면 된다. 주막에 도착하면 성찬이를 기다리면서 물도 마시고 끼니도 챙기거라. 시간이 없다. 얼른 일어나.”


얼떨결에 일어났다. 오랜만에 일어나는 것이라 다리가 후들거렸다. 은석은 구겨진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며 조언했다. 문 앞에 선 하인들에게 최대한 얼굴을 보이지 말고 자기는 여기서 시간을 끌 테니 빨리 나가라고 했다. 원빈은 말을 탈 줄 아냐는 물음에 조금이라 답했다. 성찬과 함께 몇 번 타본 적이 있기는 한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잘 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기침 소리를 죽이며 문으로 다가가던 원빈은 번뜩 드는 생각에 이부자리의 베갯잇을 뒤적였다. 종이. 종이를 반드시 챙겨야 한다. 처소를 옮길 때도 이것만은 반드시 챙겨야 한다며 몸에 지니고 있던 것인데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다. 베갯잇을 벗기자 구겨진 곳 없이 멀끔한 종이가 나왔다. 접은 자국을 제외하면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무려 4년이 지났지만. 은석이 그게 뭐냐 보여 달라기에 펼쳐서 딱 한 번 보여줬다. 너무 소중한 것이지만 고마운 마음이 있는 나리니 볼 자격이 있었다. 원빈은 다시 곱게 접어 옷 안쪽으로 숨겼다. 은석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시원하게 웃으며 무언가 말해주었다. 이상하게 그 말을 들으니 순간적으로 몸에 힘이 돌았다. 제 심장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처럼 피를 빠르게 순환시켰다.


젖먹던 힘을 짜내서 대문까지 걸었다. 얼굴을 가리고 걸으면 문 앞에 서 있던 하인들이 방문을 열어보고선 별말을 하지 않았다. 은석이 이불을 덮어쓰고 모로 누워 저인 척하고 있으니 그걸 보고 잠깐 안심한 듯싶었다. 말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하인은 원빈이 말에 올라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오동나무집으로 출발하겠다며 고삐를 잡고 끌었다. 원빈은 그 위로 엎드리듯이 앉아 밭은 숨을 골랐다. 부은 목이 바짝 말라 기침이 끊임없이 나왔다. 그거 조금 걸었을 뿐인데, 하루에 작은 산 세 개도 타던 몸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그 와중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힘이 들어서 그런 건지 힘이 나서 그런 건지. 은석이 제게 남겨준 말을 곱씹었다. 종이를 보고선 시원하게 웃으며 하던 말.


‘네 이름이 원빈이라 들었다.’

 

‘으뜸 원에 빛날 빈. 성찬이가 너를 볼 때 무얼 느끼는지 잘 알겠다.’

 

‘마음이 담긴 이름이구나.’


그놈 몰랐는데 작명에 소질이 있구만. 원빈은 얼마 안 되는 몇 문장을 듣고서 얼굴이 빨개졌다. 아파서, 열이 나서 그런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피가 얼굴에 몰리니 어쩔 수 없었다. 남들이 성찬이 지어준 제 이름을 들을 때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담긴 이름. 열일곱과 열여섯이 웃음기 담긴 대화를 주고받으며 만든 이름인데 고작 두 글자에 그 내용이 모두 담겼다. 원빈은 단지 종잇조각이 너무나 소중해져 어딘가로 흩어질까 저고리를 폭 끌어안았다. 원래도 소중했는데 더, 더 소중해졌다. 성찬과 떨어져 있으니 그것이라도 잘 간직하면 우리는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성찬이 보고 싶어 울었다. 열이 나는데 눈물까지 흘리니 귀가 먹먹하고 찌릿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새벽에 찾아온 성찬에게 모질게 말한 것 같아 미안했다. 저를 지키겠다는 것도. 그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는데 면박 준 것 같아 사과하고 싶었다. 목이 그토록 말랐는데 눈물 한 방울이 달지가 않았다. 너무 쓰다. 아까운 체액이 눈꼬리를 줄줄 타고 흘러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만 울어야 하는데. 그의 말대로 아까울 뿐인데. 모난 제 마음이 미워 도저히 빠져나가는 수분을 붙잡을 수 없었다.


도련님.

빨리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죽어라 뛰었는데 대문 앞까지 다 와선 앞길이 막혔다. 성찬은 하인 둘과 실랑이하다 그들을 어거지로 떼 냈다. 이미 다 엎질러진 물에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이루어 내야만 하는 계획이었다. 그게 가문과 척지는 길이라도.


그새 안채에서 소란을 듣고 나온 어머니가 대문을 막았다. 그녀의 얼굴은 화가 났다기보단 창백했다. 표정은 배신감인지, 두려움인지, 아픔인지.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그 수준에 맞는 가문으로 시집오고 안방마님을 차지한 어머니였다. 그녀가 성찬과 원빈의 연정을 이해할 리 없었다. 성찬은 남들보다 여유롭고 학문의 뜻이 없을 뿐 평생 부모 말을 잘 듣고 살아왔다. 다만 이번 일로 어머니가 머리를 싸매고 앓아누운 것에 반감이 생겼다. 그래서 더 가문을 벗어나야 했다. 이미 다 들통난 판국에 원빈과 여기서 더 살아봤자 평생 행복하긴 글렀다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는 분노에 차다 못해 처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안타깝다 여길 정도일 것이다.


“네가 진정 사내놈 하나 때문에 가문을 돌아서려 하는구나!”

“집안 없이 이룰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으냐.”

“어미 죽는 꼴 보고 싶으면 나가라.”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다.”

“제발... 제발 이 어미 말 좀 들어라. 내가 너를 언제 학문에 뜻이 없다고 하여 꾸짖은 적이라도 있더냐.”


어투는 점점 분노에서 애원으로 바뀌었다. 어머니의 동작과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고 이젠 손을 모아 빌고 있었다. 성찬은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어머니란 무엇이고, 내리사랑이란 무엇이며, 신분과 힘이라는 것은 또 무엇일까. 슬 진절머리가 났다. 성찬도 그 한가운데 서 있었지만 이젠 그것들이 마음을 지치고 회의스럽게 만들었다. 가만 듣다 보니 어느새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미와 아비 중 누가 더 나은가 저울질할 필요도 없었다. 모두, 다, 전부. 똑같았다. 한 묶음으로서 수치도 모르는 양반에 불과하다.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정의감이나 피 칠갑 된 혁명 정신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끼고 싶지 않을 뿐이다. 수치라...


“수치? 말 잘했군. 누가 가문의 수치인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사계절 발정이 나 앞뒤 가리지 않고 겁탈하는 정 대감이 제 가문에 스스로 먹칠하는 꼴 아닙니까?”

“......”

“어머니. 저는 이 가문이 싫어졌습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양반 체면보다도 내 양심, 수치심이 더 강하기에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부로 제 성씨를 버립니다. 호적에서 지우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대로 멍하게 서 있는 몸뚱이를 밀쳤다. 성찬은 얼빠진 얼굴로 주저앉은 어머니를 뒤로하고 대문을 나섰다. 더 이상 이곳에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이다음은 어쩌지, 가문을 떠나선 무얼 하고 살며... 이런 걱정 또한 없었다. 지금 속 시끄럽게 그런 걸 따져봤자 나아질 싹이 보이지 않는 인간일 뿐이다. 성찬은 더 많은 후회를 불러오기 싫었다. 그 애한테는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말할 일을 그만하고 싶었다. 주저해선 안 된다. 뒤돌아보면 제 인생은 언제나 겁과 주저함, 뒷걸음질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젠 그러지 않을 테다. 성찬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던 마구간지기에게서 고삐를 뺏어 쥐고 올라탔다. 그리고 눈 빠지게 저만 기다리고 있을 원빈을 향해 달렸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비로소 부모도 성도 없는, 그 애와 같은 처지의 맨몸이 되어.



오동나무집은 주막 옆에 커다란 오동나무가 있어 그리 불렸다. 돈을 꽤 얹어주면 독방에서 묵을 수도 있었다. 성찬은 말에서 내려 주인에게 맡겼다. 시간은 아직 오후지만 하늘이 점점 더 어둑해져갔다. 공기는 눅눅했다. 언제 비가 올까. 하마터면 이동하는 데 시간이 지체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땅이 말라 있을 때 도착했다.


주인장에게 사람이 하나 묵으러 오지 않았냐 물었다. 몸은 호리호리하고 아픈 듯 창백한 얼굴에... 주인은 단번에 알아듣고 방으로 안내했다. 안 그래도 옷은 양반 나으리 옷인데 얼굴은 죄 죽어가는 꼴에 몸종이 꽤 많은 돈을 얹어줘 독방을 내줬다고 했다. 그 와중에 몸종은 다시 말을 끌고 주인댁에 돌아갔다며 그게 이상하다고. 참 누가 들어도 이상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성찬은 그 말을 들어줄 시간조차 없었다. 그자와 함께 묵으러 온 것이니 돈을 쥐여주고 가보라 했다.


원빈아. 이름을 외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서 이불도 없이 누워 있는 형체가 있었다. 얼굴이 지나치게 요동 없이 고요하다. 성찬은 깜짝 놀라 원빈의 몸을 살폈다. 몸이 뜨거웠지만 그런 걸 알아채고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원빈이 눈을 감고 자는 듯 죽어버렸을까 무서웠다. 몸을 세게 흔들며 깨웠다. 빈아. 원빈아. 일어나보거라. 원빈아. 다행히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빛이 살아 있는 동공을 보였다. 성찬은 놀란 가슴께를 쥐며 숨을 들이쉬었다.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혹시나 제가 늦었을까 간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원빈은 목소리를 내려다 따가운 쇳소리와 함께 침을 삼켰다. 목을 한참 적시더니 말을 꺼냈다.


“... 오셨네요.”

“빨리 오지 못해 미안하구나.”

“새벽에... 심하게 말해, 죄송합니다. 그게, 자꾸 생각, 생각이 나서... 사과드리고 싶었어요.”


그런 사과를 받고 싶은 적이 없었고 받을 자격도 없었다. 보고 싶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성찬은 아니라며 원빈을 안아주려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제야 끓는 듯한 몸을 실감한 것이다. 원빈의 몸은 새벽보다도 훨씬 상태가 나빴다. 몇 마디 하는 동안 마른기침을 수도 없이 했고 몇 번이나 쉬어갔으며 자꾸 마르는 듯한 입안으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몸이 허약해진 채 무리를 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성찬은 원빈에게 물었다. 물은, 물은 마셨느냐? 밥은? 예까지 와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이냐? 원빈은 헉헉거리기만 하고 대답을 안 했다. 성찬은 당장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주인을 불러 물을 좀 달라고 했다. 그녀는 송구스럽다는 낯으로 대답했다.


“요새 가뭄이 심해 우물이 다 말랐습니다. 물장수도 힘든지 자주 오지 않아서 조금 더 떨어진 냇가까지 나가서 물을 길러와야 합니다. 저도 드리고 싶지만 마침 물이 다 떨어져...”


수분기 있는 음식이라도 있을까 싶어 가판대를 둘러봤다. 주막이라 그런지 전부 기름기 있는 음식과 마른안주밖에 없었다. 성찬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가장 빠르게 갔다 올 수 있는 냇가의 위치를 물었다. 출발하기 전 원빈에게 다시 갔다. 물을 구하러 갔다 오겠다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다급하게 나가려는 성찬을 원빈이 붙잡았다. 한시가 급한데 마음을 몰라줬다. 자꾸만 떠나지 못하게 하니 원빈을 달래고 또 달랬다. 무슨 할 말이 그리 있다는 것인지. 1초라도 빨리 물을 마시고 나서라도 하면 늦는 것인지. 원빈이 그렇게 행동할수록 성찬의 마음도 불안해졌다. 그 초조함이 싫어서 더 원빈을 보챘다.

 

“원빈아 내 물을 떠올 테니...”

“아뇨, 아니요. 제가, 할 말이 있어...”

“물부터 마셔야지. 이러다 정말 잘못될 수도 있다 원빈아.”

“전에... 하신 약조가, 있지 않습니까. 제, 제가 짐승이 되어도, 거두어 챙기겠다고...”

“...”

“저를 어찌 알아보시겠습니까? 그건, 대답을 안 하셔서...”

“사람에겐 비단 육체만이 있는 게 아니다. 혼이라는 게 있다. 내 혼은 너를 알지 않느냐. 네가 어떤 모습이든... 내가 네 육신을 알아보지 못해도, 나의 혼은 네 혼을 알아볼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이... 운명이다. 운명이 우리를 만나게 할 게야.”

“운명, 이구나... 그렇구나.”

 

원빈은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찬의 손을 꼭 쥐고 그제서야 목이 마르다고 말했다. 그렇게 목마르다는 애가 어찌 그리 길게 말했던 것인지. 아이가 부모에게 기대는 것처럼 이것저것 전부 고했다. 추워요, 어지러워요, 귀가 아파요. 왜 이제야 아픈 걸 다 말하는 건지 가슴이 시렸다. 성찬은 원빈의 뜨거운 이마 위로 찬 손을 잠시 얹어놓았다. 물을 안 마셔서 그렇다고, 물만 마시면 금방 멀끔히 나을 것이니 제발 잠들면 안 된다고 말했다. 최대한 빨리 물을 구해서 얼굴을 보러 오겠다고 했다. 원빈은 그 와중에 웃었다. 잠을 하도 많이 자 졸리지 않는다고 성찬을 안심시켰다. 뜨거운 손이 제 얼굴 위를 머물렀다.


기다릴게요 도련님.

잠들지 않을게요.


희미한 목소리지만 먹물처럼 선명했다. 새파랗게 젊은 애가 그렇게 믿음직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듣는 성찬도 여전히 젊고 새파래 안정적인 말을 기다려왔다. 나는 불안하다. 아직도 변하지 않은 내 마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네가 사라지는 것이다. 잃기가 두렵다. 그 사이로 다 꺼져가듯 들리는 원빈이 음성은 천금 같았다. 너는 꼿꼿하고, 할 말은 반드시 고해야 하고, 답답함은 참지를 못하니. 그런 네가 거짓말을 할 리 없어서. 반드시 잠들지 않고 저를 기다려줄 것 같았다. 성찬은 그걸 믿기로 했다. 원빈의 볼을 아주 세게 꾸욱 꼬집고 나왔다. 서방님 두고 어디 가지 말거라, 응?  

 

 

냇가는 생각보다 거리가 꽤 있었다. 성찬은 초조함에 길에 보이는 민가를 전부 들락거렸다. 혹시나 가까운 곳에서 물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두 곳은 저들도 물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며 거절당했다. 다행히 세 번째로 들른 곳에서 겨우 물을 한 바가지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이 죽어간다며 제발 물 조금이라도 줄 수 없겠냐고 사정사정했다. 세상이 아직 살 만한지 아기를 안고 있던 여인이 안타까운 얼굴로 물을 퍼주고 얼른 가보라 했다. 성찬은 그릇 밖으로 물이 넘치지 않게 조심조심 뛰었다. 말을 탈 수 없어 길에다 버려두고 혼자 돌아왔다. 시간이 얼마나 걸렸냐 묻는다면 체감상 아주 잠깐이었다. 원빈의 얼굴과 목소리가 선명했고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대화는 방금 전에 나눈 듯했다.


성찬은 거의 온전한 물 한 바가지를 들고 기쁜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우선 이걸 다 마시고 나면 차도를 벌 수 있으니 그다음엔 음식도 먹이고, 부족한 수분을 더 보충해준다면 금세 기력을 회복할 것이다. 저보다 한 살 어리니 아직 한창 아닌가. 요새는 얌전해졌다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산 저 산 뛰어다니던 애다. 약발도 잘 받을 것이다. 위기를 하나 넘겼다고 생각하니 다음의 계획이 이것저것 떠올랐다.


“원빈아. 얼른 일어나서 물 마셔라.”


열이 조금 가라앉았구나. 이마를 만지다 원빈을 다시금 깨웠다. 잠들지 않겠다고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더니 잠들어 있었다.


“원빈아.”


원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깨워도 미동이 없었고 귓가에 대고 크게 소리를 쳐도 잠잠했다. 그러고 보니 주위가 제 목소리를 제외하곤 고요했다. 원빈이 거칠게 색색거리던 숨소리가 꽤 컸는데. 얼굴을 만졌더니 방금 전보다도 열이 더 가라앉았다. 성찬은 마른 입술 위로 물을 부었다. 그토록 목이 마르다 했으니 꼴딱꼴딱 잘 받아먹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물이 넘쳤다. 목구멍을 타고 제 연인의 마른 몸을 채워야 할 물이 더 들어가지 못하고 좁은 입안을 넘쳐흘렀다. 그래도 성찬은 물을 계속 부었다. 믿을 수 없어서. 갈 곳 잃은 액체가 여기저기 퍼졌다. 원빈의 귓가에 고이고 목덜미를 적신다.


“빈아.”


어디 가느냐.


“원빈아.”


한 바가지를 모두 부었는데 원빈은 한 모금도 받아먹지 못했다. 바닥이 흥건해 제 바지 끝도 젖었다. 성찬은 물그릇을 내던지고 원빈을 안았다. 열이 가라앉았다는 것이 착각은 아니었다. 그저 외면하려던 것이다. 열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식어버렸는데. 뜨거움이 아니라 따뜻한 온기마저 사라져버린 것인데. 그런데도 부르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래서 제발 일어나 달라고 원빈의 이름을 불렀다.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꾸짖기도 했다. 장난이 너무 심하지 않으냐. 이런 장난을 칠 만한 애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그래 주길 바랐다.


가장 빛나는 이가 저물어버렸다. 온 힘을 다해 빛내다 빠르게 지쳐버렸을까. 성찬은 원빈의 몸을 껴안고 애걸했다. 그 횟수와 시간을 세아리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그저 계속, 해가 저물 때까지. 제 마음을 인정과 체념으로 채우기 싫었다. 성찬의 세상은 점멸하는 중이었다. 깜빡. 깜빡. 그러다 끝내 암전했다. 이젠 앞이 보이지 않아 깜깜할 뿐이다. 

 

가뭄이라더니 해 질 녘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문밖에선 주인장의 요란한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비가 온다며 나무 양동이 여러 개를 내놓는 듯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 연인은 이미 버석하게 말라 죽었는데. 원빈의 창백한 얼굴 위로 액체가 투둑 떨어졌다. 제 눈물인가 했는데 초가지붕 새로 물이 새고 있었다. 성찬은 가만 보다 엄지로 볼을 문질러 닦아주었다.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한 원빈의 육신은 이제 차가웠다. 아무리 껴안고 제 온기를 나눠주어도 전해지지 않았다. 입을 맞춰도 넘어오는 숨결이 없었다.


밤이 되자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누구 비웃듯이 하늘이 퍼붓는다. 성찬은 원빈이 입고 있던 두루마기를 제 것으로 갈아입혀 주었다. 그리고 그새 딱딱해진 몸을 업었다. 관절이 굳어 팔다리가 나뭇가지처럼 뻣뻣하게 가라앉았다. 목에 팔을 둘러라, 허리에 다리를 감아라. 그리 말해도 듣질 못하니 제 손으로 허벅지를 세게 끌어안고 고정했다. 밤산책을 나가야겠다 싶었다. 비바람이 이리 거세니 오늘 밤이 지나면 원빈이 좋아하는 꽃이 모조리 떨어질 것이다.


주막을 나와 정처 없이 빗길을 떠돌았다. 가고 싶은 곳이 없냐 하면 제 연인은 답이 없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생각하면 갈 곳이 없다. 아무리 되새겨도 마지막엔 같은 말이 맴돌았다. 네가 없는데. 원빈이 너 없이 내가 어딜 가야 하느냐. 내가 어디를 가야 제정신으로 살겠느냐. 캄캄하니 달빛은 비구름에 반쯤 잡아먹혔다. 성찬은 젖은 빗소리 틈으로 건조한 부름을 집어넣어 보았다.


“빈아. 밤이라 무섭구나.”

“귀신이 나올 것 같다.”

“자는 척은 그만하고 일어나주면 안 되겠느냐?”


얼굴을 적신 빗물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원빈이 킥킥 웃으며 깨어나길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그대로라 적적한 혼잣말도 그대로, 봄의 쌀쌀한 날씨도 그대로다. 성찬은 새파란 입술로 어느 나무 아래에 누웠다. 방향 감각이 없어 아무 곳으로 갔더니 목련을 만났다. 그러고 보니 올해 목련은 처음 보는구나. 방금 막 피었을 텐데 비바람을 만나 안타깝게 됐다. 원빈이 꽃을 볼 수 있도록 나무 아래 바르게 눕혀 주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자 하얀 꽃잎이 떨어졌다. 시들시들 상처 나고 숨 죽은 목련잎이 물기 어린 얼굴에 붙는다. 성찬은 정성스럽게 그것을 하나하나 떼어주다가 목덜미 위로 삐져나온 종이를 발견했다. 품에 잘 지니고 있다가 업혀 다니니 밀려 올라온 듯했다. 성찬은 그 종이가 무엇인지 몰랐다. 뭐가 그리 소중해 도망치는 순간까지도 꼭꼭 숨겨 나왔을까. 글씨를 쓸 줄 모를 텐데 무언가 끄적이기라도 했나. 어쩌면 죽음을 예견하고 써둔 편지일지도 몰랐다.


성찬은 종이가 다 젖기 전에 펼쳤다. 넓은 여백 가운데 단 두 글자 쓰인 글씨가 투둑 떨어지는 빗물에 번져간다. 元彬. 제가 쓴 것이지만 서체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명필가 흉내를 내보겠다고 겉멋 잔뜩 들여 쓴 앳된 열일곱의 티가 났다. 성찬은 그제야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제멋대로 일그러지고 꾹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차가운 빗물과 섞여 얼굴을 미지근하게 적셨다.


열일곱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어쩌면 제가 이 아이의 세상이 될 발판을 세웠을지도 모를 초기의 기억. 오랫동안 고민해 온 이름을 써 내리는 제 손은 긴장으로 떨렸다. 말투가 워낙 능글맞아 원빈은 몰랐을 것이다. 앞전에 연습하다 태워버린 종이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한 이유는 단순히 이 아이의 이름을 멋들어지게 써주고 싶어서. 이렇게 예쁜 이름은 살면서 처음 가져볼 테니 최선을 다해 써주고 싶어서. 그러고 종이를 준 것도 까먹고 지냈다. 원빈이 이걸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제 보니 부끄러울 정도로 모자란 실력에 불과한데 이 종이 따위가 얼마나 소중한 의미였단 말인가. 이게 도대체 뭐라고 도망하는 순간에도 소중히 했단 말인가. 성찬은 원빈의 마음을 이것으로 전해 들은 것 같았다. 진하고 애틋한 사랑 고백으로 느껴졌다. 늘 낯간지러워 사랑한다, 연모한다, 좋아한다 말하지 않았어도.


먹글씨가 물에 번져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갔다. 성찬은 원빈의 차가운 몸을 끌어안고 빌었다. 원빈아. 내가 잘못했다 원빈아. 이제 행복해질 수 있는데, 왜 지금 가느냐. 통곡인지 절규인지 저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 사랑한다고 백 번도 더 넘게 속삭이다 탓할 점을 찾았다.


“조금 아껴 부를 걸 그랬다. 네게만 들리게끔 작게 속삭여줄 걸 그랬다.”

“내가...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구나.”


이름을 너무 예쁘게 지어줬다. 그 탓일지도 몰랐다. 하늘이 질투하여 이르게 데려갔을지 모르니. 천하에 해보다 밝은 것이 있냐며 시기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열일곱의 그때로 되돌아가더라도 성찬은 빈자에게 원빈이라는 이름을 지어줄 것이다. 이 애한테 어울리는 이름은 그것밖에 없었다. 제 세상에서 가장 빛이 나는 존재여서. 태양보다 빛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제 하늘엔 태양 대신 원빈만 있었다. 이젠 암전되어 어두컴컴하다. 눈을 감고 뜰 때 보이는 시야가 같았다. 원빈이 없으면 죽으나 사나 그것도 같았다.


그제야 생각해보니 운명이라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원빈에겐 운명이 우릴 다시 만나게 할 거라며 큰소리쳤지만 앞날을 다 아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저 원빈이 안심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내 마음은 이토록 너만을 위하고 너만을 바란다고. 그런데 하늘이 이토록 우리를 갈라놓으니 영영 만날 수 없게 하려는 수작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성찬은 하늘에 대고 간절히 소원했다. 우리 원빈이 예쁘게 봐주십사 얼굴에 젖은 꽃잎도 떼어주고 머리를 귀 뒤로 넘겨줬다. 그리고 곁에 함께 누워 눈을 감았다. 몇 해를 빌어도 끊이지 않을 기도를 의식 속에 채웠다.


목련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비바람이 나무를 어찌나 힘들게 했는지 가지에 남은 것이 얼마 없었다. 더 이상 꽃잎 흩날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자 완전하게 쓸쓸해졌다.


혼자구나.





내 연인의 이름은 원빈입니다.

으뜸 원에 빛날 빈.

가장 빛난다는 뜻입니다.

첫눈에 반해 직접 지어준 이름입니다.


혹여나 내 마음이 너무 깊어,

그 우물 속에서 허우적대다 숨이 막혀버린 것입니까?

그렇다면 조금 덜 예뻐하고, 조금 덜 아끼겠습니다.


하늘이 듣고 있다면

우리를 불쌍케 여겨

부디 다시 만나게 해주십시오.


나는 처음 본 그 순간처럼, 단번에 이 아이를 알아볼 것입니다.






눈을 떴다.

전생의 번뇌를 지나 비로소 현실이었다.


바라던 것은 단 하나였는데 참 늦게도 들어주셨다 싶었다. 여전히 제 귀엔 생생한 비바람과 꽃 흩날리는 소리가 맴돌았다. 당장 방금이라도 겪은 듯 떠오르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잊겠느냐, 난 너와 함께한 순간을 단 하나라도 잊을 수가 없는데. 그게 설령 우리의 이별이라도. 


그가 바라던 대로 자그마한 토끼가 되었던 제 연인은 어느새 제가 알던 어여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살아 있는 듯 온기 가득한 몸으로 저를 껴안고 불렀다. 도련님, 형, 성찬이 형. 그 목소리에 마침내 심장이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한 생명의 평생을 우습게 만들 만큼의 시간이 지나 정말로 다시 만났구나. 너와 내 눈물이 만든 바다의 수면이 기어코 하늘에 닿았구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수도 없이 불렀던 말인데 쉽지가 않았다.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지르르 울리기도 했다. 입술을 뻐끔거리면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기 같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불러보려 했다.


수백 년의 염원을 담은 우리의 아픈 기억을 더해서.


원빈아.






「빈자의 바람은 이루어진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