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ART VIDEO AFTER

삽질의 미학
by. 내가만든홍조

Q. 가장 싫고 두려운 건 무엇인가요?

A. ‘걱정’이요. 제가 좀 겁이 많아서 불안정한 상태를 무서워하거든요. 심장도 막 울렁거리고… 갑자기 모든 게 너무 부담스러워져요

Q. 그럼 ‘걱정’이 밀려올 때면 어떻게 이겨내곤 하시나요?

A. 어… 예전엔 막, 힘들어하다가... 정신 차려보면 지나가 있었어요. 





보통은 여기서,

반면 요즘의 나는 어떻게 성장했는지 센스 있고 조리 있는 답변을 얹어줘야 소녀들 심장에 무리도 줄 수 있고 이미지도 챙길 수 있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갑자기 무언갈 얘기하려 하면 머리 속이 정리가 안되는 성격이라 넘어가겠다는 핑계 또한 댈 수 없다.

왜냐면 3일 전부터 미리 알고 있던 질문이니까.

그리고 이 인터뷰를 시작하기 직전까지 고민했다.

요즘의 나는 걱정을 어떻게 이겨내는가?


원빈은 리포터의 무릎 위에 올려진 손 끝에 박힌 큐빅을 응시하며 멍을 때렸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못 이겨내겠다고. 아예 졌다고…

뱉고 싶은 말은 예쁘게 입꼬리만 살짝 올리는 특유의 미소로 무마한다.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위기에 몰리면, 무대에서 미끄러지면, 무언가 말실수를 한 것 같으면 저절로 향하던 시선의 방향으로.

그러면 박원빈이 진짜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하는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한 정성찬이 시야에 들어온다.




​                                


박원빈은 정말 생각이 많다.

절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뭐가 됐든 다 너무 싫고 피하고 싶고 해결하고 싶은 결벽에 가까운 안정성 추구 인간.

원빈이가 미소년 얼굴과 자비 없는 몸매에 갇힌 극강의 걱정 인형이라는 걸 가족들도 알고 멤버들도 알고 팬들도 다 안다.

그래서 더 미운 거다, 정성찬이.


요즘엔… 그니까 요즘의 나는 어떠냐면,

이게 궁금하면 고개 살짝 돌려서 물어보면 됐었다.


" 형 나 요즘 어, 어때 보여요? "


그럼 그 놈은 웃겨 죽겠다는 듯 위 뺨에 주름 잔뜩 진채로 안심시켜주곤 했다.

와중에도 너무 부둥부둥만 하면 제가 존심 상해 할 거 알고 존나 T답게 이성적인 해결책을 내놓아주어서 디게 안정적이었던 추억이 돼버린 그 기억.

이제 애석하게도 모든 해답은 박원빈 혼자서 찾아야 한다.


왜냐면 어떠한 해프닝을 기점으로 제가 까칠한 펫 자처하며 졸졸 따라다니던 정성찬은 박원빈을 파양했다.

진짜 이건 이런 나쁜 단어로밖에 설명이 안된다.

사람이 이리 한순간에, 아니 생각해보면 한순간이 아닌가.

무튼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스탠스를 바꾸는 건 진짜 비겁한 짓이다.




 삽질의 미학

정성찬 X 박원빈





정성찬의 첫인상은 리터럴리 퍼펙트맨이었다.

어떻게든 교복 끝자락 쥐고 꼼질대지 않으려고 어깨 핀 채 등줄기에 식은 땀 흘리던 18살의 저에게 쌉고인물 같은 표정과 제스쳐와 말투로 성격 좋게 인사를 건네왔던 그 순간부터,

박원빈은 정성찬이 제 밑에 앉아있어도 올려다봤다.

시작부터 그만큼이었다.




1.

바로 가까워진 건 아니다.

1년이 다 되어가도록 나는 정성찬이 계속 어려웠다.

형은 아는 게 너무 많았고, 선배들이랑 대화하는 걸 어쩌다 운 좋게 훔쳐보면 오래 본 티가 났다.

게다가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 지 3-4년은 됐는데도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난 이제 막 시작했는데도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안달이 났지만 형은 안 그랬다.

내가 한 소리 듣고 일주일 내내 거기 매달리느라 다른 걸 삐끗할 때,

정성찬은 뒷짐 지고 '죄송합니다' 한 번 내지르면 그다음 날부턴 똑같은 실수를 절대 안 했다.

머리가 좋아서 그러거나 애초에 타고난 재능인 것 같았다.


한번은 다 같이 밥 먹을 때 누가 찡찡댔다.

형, 연습생 오래 해도 혼나는 건 똑같이 싫죠?

보통 예의상 위로의 한 마디든 나도 죽겠는데 앓는 소리 말라는 핀잔이든 내놓기 마련인데, 정성찬은 딱 두 마디 했다.

싫지. 그래도 해야지 뭐.

그러고 밥 푹푹 퍼먹으면서 한 손으로는 폰겜 하더라.

박원빈은 정성찬의 그런 약간은 엉성한 기개가 좋았다.




2.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고딩이었던 박원빈도 눈치가 있어서 알았다.

나는 아마 데뷔를 하겠구나. 여기서 못하면 다른 데서 또 하겠구나.

물론 안일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본래 성격이 그런 걸 지닐 수가 없다.

한순간 방심하면 대형 연생 경력 하나 겨우 품에 쥐고 중고 신인이 되어 구천을 떠도는 거다.

노래는 침 삼키면 목이 따가울 정도로 했고 춤은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몸이 서늘해질 때까지 했다.

무식하고 오래 못 가는 방법인 거 알아도 오바했던 이유는 눈총이 싫었기 때문에,

바득바득 노력해서 가진 제 모든 것들을 말 한 마디 얹어 운 좋은 잘생긴 애의 달란트 따위로 전락시키는 게 너무너무 속상해서였다.


숙소 생활을 시작하면서는 더 심해졌다.

근데 또 그 애들이 완전히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라 어떤 것도 탓할 수가 없었다.

쌓이고 쌓여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

누가 툭 치면 울 것 같은 거 참느라 에너지를 다 쏟을 정도로 위태로워졌던 어느 날이었다.


" 와, 박원빈 땀 봐. "


정수기 앞에서 멍때리며 물 따르고 있는데 정성찬이 다가왔다.

여느 때랑 다름없는 적당히 먼 사이의 장난을 그날은 받아줄 기운이 없어서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먼저 자리를 피하기도 애매하고 말을 걸고 싶진 않아서 눈알만 굴리는데 팔짱을 끼고 날 내려다보던 형이 방금보다 배는 진지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 불안해? "

" ...네? "


너무 순도 백프로 직설적인 질문이라 난 제대로 답할 생각도 못 하고 삑사리를 냈다.

고개를 숙이고 쥐고 있던 종이컵을 세게 구긴다.

무슨 말을 뱉어도 덕지덕지 차오른 심술이 자꾸만 형에게 달라붙을 것 같아 두려워,

정적이 10초를 넘길 때까지 기다리다가 뒤를 돌았다.


" 너 그러는 거, "

" .... "

" 그게 더 쉬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는. "

" ... "

" 그러다 몸 상해 박원빈. "


정성찬은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연습실 벽에 어깨를 기대고 날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쁠 일도 아니고, 오히려 고맙고 감동받아야 하는 게 맞는데.

그 말을 한 게 정성찬이라서 와닿지 않긴 하더라.

나처럼 세심하고 꼼꼼하게 빚어낸 게 아닌 날 때부터 대차게 완벽했던 인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주제넘어 보이기까지 했다.


근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최악의 하루의 끝자락에,

난 처음으로 진짜 정성찬을 마주했다.




3.

그 날 새벽 난 잠이 안 와 다시 연습실로 향했다.

사실 입사한 이래 새벽에 연습실을 간 건 몇 번 안됐다.

워낙 루틴이 중요해서 다음 날을 망치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평가 때문에 다 같이 밤을 새워야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일찍 숙소에 들어가 잠을 잤다.

조금 자조하며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불빛이 새어 나오던 그 순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연습실 천장에 닿을 것 같은 키로, 늘 적당히 웃는 표정과 적당히 산뜻한 말투로 모두를 대하던 정성찬은 처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캡모자를 쓰고 격한 춤을 추느라 얼굴이 반은 가려졌는데도 그게 다 보였다.

노래 막바지엔 분명 거울로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형은 당황하지 않고 끝까지 춤을 췄다.

땀을 한 번 털고, 저벅저벅 걸어가 음악을 끄고, 다시 내 코앞으로 걸어올 때까지 나는 미동도 하지 못했다.

정성찬이 완벽하게 태어났다고 비웃던 나는 날 고통스럽게 하던 애들과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먼저 입을 떼주길 기다리는 듯했다.

해야할 말을 고르고 고르다가 투박하게 겨우 내뱉었다.


" ...죄송해요. "

" 뭐가. "

" 그냥, "

" 아- 씨. "


머리를 헝클이면서 짜증을 내길래 놀라서 올려다봤는데 형은 그런 날 보고 박장대소했다.

배 누르면 소리 내는 인형 같다고 한참을 웃다가 덜 빠진 웃음기를 띈 얼굴로 그랬다.


" 쪽팔려서 짜증 나네. "

" ...쪽팔릴게 뭐가 있어요. "

" 나도 그냥. "


그러고 손을 들어 이번엔 내 머리를 헝클여주었다.

나한테 한 첫 스킨십이었다. 난 그런 걸 하나하나 따지고 기억했다.

서로 자잘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모든 대화를 해낸 느낌이었다.

사실 아직도 형의 큰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내 것과 똑같은 열기와 시큼한 땀 냄새가 기억이 날 정도.




4.

그게 내가 연습생이 된 지 1년쯤 되었을 때였다.

우린 그날 이후로 언제 그렇게 청춘 드라마 한 편을 찍었냐는 듯 금세 가벼워졌다.

딱히 붙어 다닌 것도 아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형보다 훨씬 더 친해진 다른 연습생들도 생겼다.

그래도 성찬이 형은 여전히 나한테 특별한 존재였다.

나를 아는, 또 나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지금껏 지고 있던 큰 돌덩이를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다.

형과 나는 모든 게 너무나도 달랐지만 가장 중요한 걸 공유했으니까.


그리고 정성찬은 갑자기 데뷔를 했다.

내가 데뷔할 것 같다고 느꼈던 것엔 막연함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정성찬은 너무나도 확실하긴 했다.

솔직히 형 아니면 누가 데뷔하겠냐는 생각을 항상 해왔다.

근데 난 그걸 내심 형이랑 같이 하고 싶었나보다.


나는 축하해주는 애들 사이에 섞여 애써 웃으며 박수를 쳤다.

오래 눈이 마주친 것 같아 정성찬이 걱정 안 하게끔 더 환하게 웃었다.




5.

그때부터 난 이제 남들 때문이 아니라 정말 진짜 독하게 마음을 먹고 말 그대로 몸을 갈았다.

그러면서도 정성찬을 가끔 들여다보는 건 잊지 않았다.

형은 뜬금없이 연락해서 내가 잘 살아있나 확인하곤 했다.

비둘기 모이 주듯 그러는 게 좀 웃기긴 했는데 그래도 내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난 노력하는 만큼 성장하고 있었어서 어쩔 수 없는 불안함을 제외하면 나름대로 잘 해내고 있었다.

근데 제 코가 석 자라지만 솔직히 형이 좀 걱정이 됐다.

얼마나 간절한 사람이었는지 아는데...

정성찬은 생각보다 얼굴을 많이 못 비췄다.

이 모든 것에 형의 의지도 잘못도 없는 걸 알면서도,

'그러게 기다렸다가 나랑 데뷔하지' 따위의 생각이 들 만큼 아쉽고 아까웠다.


그리고 2022년 가을이 끝나갈 때, 한 11월 초였나.

정성찬이 갑자기 나를 숙소 앞으로 불러냈다.




6.

날씨가 추운 것도 잊고 대충 아무거나 걸쳐 입고 뛰어나갔다.

단둘이 보자고 따로 불러낸 건 그게 처음이었다.

정성찬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에 마스크까지 끼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혀엉-소리를 내며 앞으로 다가서자마자 나는 깜짝 놀라 한걸음 물러섰다.


형의 코 끝이 엄청 빨개서였다.

위태로운 얼굴로 날 맞이한 정성찬은 울고 있었다.

난 바로 주변을 둘러보고 정성찬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간 다음 울음이 그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유를 모르겠는 것도 아니었고 그날의 일을 인제야 갚는다는 생각도 있었고...

형은 진정되자마자 날 데리고 근처 카페로 가 맛있는 걸 사주었다.

난 아무 말도 안 하고 뭘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 때 들었던 생각은...


아무리 생각해도 난 형이랑 같이 데뷔하고 싶다는 거였다.

망상인 건 알지만 크고 솔직하고 멋있는 정성찬의 어깨를 내 힘으로 다시 쫙 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린 자주 만났다.

남녀였으면 아마 썸이라고 해도 될 만큼,

농담이긴 한데 진짜 그 정도로 틈만 나면 봤다.

물론 둘 다 바빠서 틈만 나면 이라고 해봤자 한 달에 한두 번이긴 했는데.

주로 밤에 만나서 회사 근처에 24시간 영업하는 감자탕집이나 카페를 가거나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며 길을 걸었다.


제일 좋았던 점은 너무 진지하지 않아서였다.

형과 나의 사이는 차분했고, 형 덕분에 약간의 재미도 있었지만,

속에 담긴 얘기는 끄집어내 놓지 않았다.

난 나의 특별한 친구가 너무 좋아서 더 빨리 데뷔가 하고 싶어졌다.




7.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까지 우린 아주 잘 지냈다.

나름의 책임감이 생겨서 난 정성찬 버블도 구독했다.

형은 매달 몇천원씩 벌게 해주는데 뭐라도 보답해야겠다면서 내 생일에 핸드폰 케이스를 사줬다.


그리고 3월이 되면서 자꾸 형과 회사에서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내 데뷔가 다가오고 있다는 건 알았는데,

어리둥절 닥쳐온 것들을 해내며 설마설마 의심만 하던 와중에 그렇게 기적이 일어난 거다.




8.

미친 듯이 정신없고, 미친 듯이 힘들고, 또 미친듯이 행복했다.

내 비밀 친구는 이제 당당한 내 팀원이 되었다.

우린 성격이 잘 맞는 것도 아니고, 말이 잘 통하는 것도 아니고, 취향도 전부 다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형과 닿아있으면 든든함을 느꼈다.

언젠가 이걸 얘기해줬더니 정성찬이 그건 우리 둘이 뉴런을 공유해서 그런 거라고 했었다.


우린 모두 열심히 활동했고 숙소에 다 같이 모일 때면 진지한 대화도 많이 나누었고 힘든 일이 생길 땐 서로가 괜찮은지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가끔은, 형과 나는 따로 밖에 나갔다.

이제는 같은 숙소 건물을 쓰게 되어서 오히려 시도 때도 없이 내 옷소매를 끌고 나가려 하는 형이 귀찮을 정도였다.

물론 싫진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나는 매일매일 형이 가자는 곳을 따라다녔을 거다.

나는 정성찬과 깊은 대화를 너무 안 했던 걸 점차 후회하기 시작했다.




9.

생각해보면 데뷔 준비를 하던 때부터 형이 조금씩 이상해지긴 했었다.

맘대로 내 머리를 헝클이고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놀리곤 했는데 점점 그런 걸 안 했다.

좀 더 뭐라 해야 하지... 조심스러운? 다정하진 않은데.

표현해야 할 방법을 모르겠다.


사실 난 원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미세한 변화도 잘 캐치하는 편이다.

오죽하면 오히려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느 선까지 아는 척을 해야 하고 걱정해줘야 하고 모르는 척 해줘야 하는지까지 다 일일이 계산하며 움직이기 때문이다.


근데 형한텐 그게 잘 안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짐작이 안 갔다.

팬들 사이에서 멤버들끼리 엮는 문화가 있다는 건 아는데 그거 때문에 불편할까 싶다가도 열심히 내 이름을 검색해도 잘 안 나오는 걸 보면 우리 둘을 많이 엮는 것 같진 같은데...

정성찬은 워낙 단순한데 이상한 데에서 섬세하고 엄청 솔직한데 누구보다도 비밀이 많다.

나는 대놓고 예민하고, 대놓고 내성적인 사람이라 이렇게 정반대인 형을 해석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형은 갑자기 퍼즐 맞춰지듯 나랑 마음이 통했었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정성찬은 정성찬이구나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첫 사람이었는데.


그게 내 안일함이었다.




10.

컴백을 두 번 정도 하고, 이런저런 일들도 겪으면서 3달이 3일처럼 지나갔다.

난 아직도 내가 연습생 같은데 말이다.

그때쯤 짚이는 날이 있는데 내 기억에 따르면 분명 문제 될 게 없다.

거의 매일 일하다가, 처음으로 스케줄이 비었다.

다들 밖으로 나도는 성격이 아닌데도 어찌저찌 가족이랑 친구랑 약속을 잡더라.

나는 울산에 갈 수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깨끗이 씻고 향기 나는 이불 속에 파묻힐 생각이었다.

누가 긴장할 일 안 줘도 매번 조금은 경직돼있는 성격이라 간만의 평화 속에 죽은 사람처럼 잠을 잤다.


잠에서 깼을 땐 분명 고요하던 숙소 거실에서 소리가 나서 비척비척 나가보았다.

정성찬이 소파 위에 앉아 핸드폰을 가로로 하고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잠결에 옆에 풀썩 앉아 어깨에 기댄 채로 졸았다, 아니 졸려고 했다.


그렇게까지 밀어낼 일이었나?

정성찬은 내가 기대자마자 바로 영상을 멈추고 큰 손으로 내 턱을 떼어냈다.

순간 좀 서운하긴 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조용히 올려다봤다.

그랬더니 가까이 앉아있는 내 상체까지 두 손바닥으로 신경질적으로 밀곤 잠시 망설이다가 밖으로 나가는 거다.

흐릿한 기억이지만 내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형과 가까워진 이래로 우리 사이에 벽이 생길 거라는 상상 비슷한 것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난 너무 당황스러웠다.

애초에 왜 우리 층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조금 이상한 날이었던 건 맞다.

하지만 정성찬은 자기 기분이 안 좋다고 이런 행동을 할 사람도 아니고 우린 너무 바빠서 트러블이 날 일도 없었다.

난 혼자 소파에 덩그러니 남아서 멍을 때리다가 남아있는 졸음 때문에 그대로 잠들었다.




11.

이후론 급격하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본격적으로 당하는 기분이었다.

정성찬은 연습실에서든 대기실에서든 내가 옆자리에 앉거나 몸이 가까워지면 벌떡 일어났다.

멤버들이 내 얘기를 하거나 나를 놀리면 언제 큰 소리로 웃었냐는 듯 확 조용해졌다.

직후 모두의 침묵은 덤이었다.

숙소에서는 아무리 다른 층이라지만 이상할 만큼 마주치지 못했다.

늘 방에 쳐들어온 건 형이었어서 갑자기 다르게 행동을 하기에도 겁이 났다.




12.

처음엔 마냥 벙쪄있었지만, 난 용기를 내기로 했다.

부담스럽게 군 적이 한 번도 없던 우리 사이에 직접 물어보는 건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계속 정성찬 곁에서 맴돌았다.

숙소에 대기실에 처박혀있는 성격을 최대한 없애려 노력했다.

정성찬이 껴있는 자리는 어디든 함께했다.

형이 고장난 태엽 인형처럼 어색하게 움직여도 뻔뻔하게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내가 멀어지고 싶지 않은 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고 생각해서...


" 너 진짜 원빈이한테 왜 그러냐. "

" 뭐가요. "


대기실에서 여느 때처럼 늘어져 있는데 정성찬이 매니저 형과 유치한 손장난을 쳤다.

원래 같으면 웃기다는듯 조용히 보고 있으면 형이 먼저 그런 날 발견하고 달려와 더 심하게 장난을 쳐댔을 텐데.

갑자기 원망스러움에 심술이 가득 차서 벌떡 일어나 둘에게 합류했다.

내 인기척에 뒤를 돈 정성찬은 깜짝 놀란 표정을 1초 만에 지우곤 장난인 척 나를 뿌리쳤다.

내가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게 이거다.

유치하게, 날 개무시하면서도 남들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끔 처신을 잘한다.


" 자꾸 얘 장난만 안 받아주잖아. "

" 뭐라는 거야. 아니에요. "


농담조였지만 매니저 형에게서 진심이 보였다.

가운데서 민망하게 서 있는데 해명하던 정성찬이 내 머리를 확 쓰다듬었다.

간만이지만 익숙한 감각이라 너무 잘 아는데,

전처럼 부드럽게가 아니라 무슨 미션 수행하듯 대충.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나는 잘못한 게 없다.

그런데도 정성찬을 미워하기는 커녕 간만의 스킨십에 기분이 너무 좋아서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심호흡이나 하고 있는 이 상황이 너무 싫었다.

그간의 쌓인 감정들이 그 순간 폭발했던 것 같다.


나는 무대가 한 시간이 채 안 남았는데도 대기실을 박차고 나갔다.




​                               


정성찬은 평생을 칭찬받으며 살아왔다.

성찬이는 참 잘생겼다. 우리 성찬이는 키도 크네. 성찬이가 어디 연습생이랬지? 쟤는 참 싹싹하니 가정교육도 잘 받았나 봐- 등등.

외모와 가정환경은 기본 세팅 값과도 같다는 걸 누구보다 빨리 깨달은 케이스다.

그래서 사람들 구설수에 오르지 않을 평범한 일을 하고 싶었는데, 지겹게도 또 하필 아이돌이 되고 싶어진 게 참 좆같다는 생각을 몇번을 했는지 모른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내로라하는 회사의 연습생이 되었을 땐 폴짝폴짝 뛸 만큼 좋으면서도 걱정이 산더미였다.

당연한 일이니, 데뷔까지 빨리 해내야 한다는 생각들 때문에.

사실 정말 짜증이 치밀어오를 만큼 모든 게 어려웠다.

어디서든 무엇이든 누구든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남들이 찡찡댈 때, 나는 그 애들이 동경하는 대상이어야 했어서, 아무도 안 보는 데서 더 열심히 연습을 했다.

난 일 년 일 년 지나갈수록 키가 성큼성큼 크는 것도 싫었다.

그 속도만큼 성장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 들어서였다.


모든 건 노력으로 얻은 거여선 안됐다.

잘난 내가 숨 쉬듯 당연하게 하는 것들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난 박원빈이 처음부터 무서웠다.




1.

박원빈은 내가 태어나 본 중 가장 데뷔할 자격을 두루 갖춘 연습생이었다.

얼굴부터 목소리 몸짓 말투 걸음걸이 모든 게 특별했다.

긴장과 두려움이 가득 담긴 까만 눈이 나와 마주쳤을 때 나는 얘가 제발 내 팀이 아니길 빌었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쟤가 갑자기 연습실 한가운데서 나체로 물구나무서지 않는 이상 데뷔할 거라는 걸.

남에 대한 감상 따위 내뱉지 않는 송은석도 나에게 지나가듯 칭찬 한마디를 얹을 정도였다.


박원빈은 정말 무시무시하게 빛났다.




2.

그래서인지 나는 늘 박원빈을 살피곤 했다.

긴장했던 표정은 예상대로 며칠 만에 정신없는 얼굴로 뒤바뀌었다.

내가 남들 눈을 피해 연습할 때 짓는 표정과 완전히 같은 모습으로 늘 열심이었다.

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남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 뻔히 알 텐데도 박원빈은 남들 다 보는 데서 땀을 눈물처럼 흘려댔다.


게다가 연습을 자주 같이하진 못했지만 마주칠 때마다 걔는 성장해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이건 재능이다.

나는 재능이 아닌 노력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라 그런 박원빈이 날이 갈수록 겁이 났다.


" 솔직히 박원빈은 무조건 들어가겠지? "

" 그거야 모르는 거죠. "


연습생 생활을 좀 오래 한 애들끼리 팀을 꾸려서 같이 연습하곤 했는데, 그 중 유독 박원빈 얘기를 많이 하는 형이 있었다.

걔가 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올라운더에 비주얼 소리까지 듣던 인간이라 박원빈을 싫어했다.

형이 어떻게 걔를 이기겠냐는 말을 누르면서 난 그 역겨운 열등감을 어거지로 계속 들어줬었다.


" 야, 뭘 몰라. 주말에만 쳐 나오는데도 부둥부둥 난린데. "

" 그만큼 열심히 하잖아요. "

" 니가 속 편하게 그딴 얘기할 때냐? "

" 박원빈 욕해서 뭐해요. 그럼 형이 데뷔하는 것도 아닌데. "


난 그렇게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같지도 않은 애들이 헛소리를 지껄이면 한 마디 해줘야 한다.

박원빈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성격이라서 지른 거였다.

이 새끼가,

뻔하게도 주먹을 들어 올리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는 그 못난 새끼를 빤히 올려다보면서 나는 그냥 밥을 씹었다.


형이 가진 질투는 내 열등감의 축에도 안 낀다고. 내가 박원빈에 대해 생각한 시간이 형이 길길이 날뛴 시간보다 만 배는 많을 거라고.

그런 말은 밥이랑 같이 삼켜 넘겼다.




3.

결국 박원빈은 서울에 올라왔다.

숙소 생활을 시작하고선 전보다 볼 일이 많아졌다.

박원빈과 섞여 연습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는 새벽 연습을 더 활발히 했다.

그 애가 예상치 못하게도 날 자꾸 빤히 봐서였다.


박원빈은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머리를 굴릴 때면 눈동자도 같이 굴려서 되게 티가 나는데, 걘 다른 사람들과는 수줍어하면서도 잘만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말을 걸면 바로 머릿속에 제동이 걸리더라.

쟤랑 가까워지는 건 뭐가 됐든 돌이킬 수 없는 일일 것 같아서 부러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박원빈이 나에게 실망하지 않게 죽어라 연습하면서.




4.

박원빈이 서울에 온 이후, 애들의 시기 질투는 나날이 늘어갔다.

솔직히 내가 가진 부러움과 패배감이 아무리 크다 해도 박원빈은 그런 소릴 들을 애가 아니었다.

늘 비니 푹 눌러쓰고 죽어라 연습만 하는 애가 남들에게 이런저런 뒷담을 들으면서 맘고생 해야 할 이유를 이성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게 답답했다.


박원빈이 왜 싫을까?

난 박원빈이 무섭고 부럽고 걜 볼 때면 작아지는 기분이 들지만 한편으론 늘 기특했다.

나는 그때부터 밥을 먹다가, 연습을 하다가, 지나가다가,

그 애에 대한 뒷담이 들리면 다가가 웃으며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아무리 어린 애들이라지만 몇 번 그렇게 하니 눈치를 보며 주춤대더라.


그 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헉헉대며 물을 받아마시는 몸이 그날따라 너무 왜소해 보여서.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지랄 한번 안 하고 묵묵하기만 한 게 조금은 답답해서.

곪아버린 마음이 나한테도 보이는데 약 바를 생각도 못 하고 무식하게 구는 게 안쓰러워서.

쪽팔리게 형인 척 개소리를 지껄여놨는데 하필 운도 지지리도 없게도 그날 박원빈한테 내 은밀하고 찌질한 새벽을 들킨 거다.


나는 애써 날 위로해주려는 눈빛과 미안함이 가득 담긴 할 필요도 없었던 사과와 그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나에 대한 동경이 담긴 눈을 내려다보며,

비로소 그 애를 맘 편히 좋아하게 됐다.

 



5.

뜬금없이 어리숙한 상태로 대중 앞에 서야 했지만,

난 늘 박원빈을 생각했다.

내가 등 떠밀리듯 급하게 데뷔했을 때 모두가 걱정어린 눈빛을 보냈다.

나 역시 부담으로 인해 내 백프로 중 30도 보여주지 못했고, 매일매일이 나에겐 버거웠다.


난 그걸 가끔 박원빈을 괴롭히는 걸로 풀었다.

완전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지라 걘 내가 장난을 치면 그때까지도 어색해했다.

그래서 일부러 박원빈이 곤란해할 말들만 골라서 카톡을 했다.

박원빈 먼저 카톡 절대 안 하네. 박원빈 잘 지내? 설마 살찐 거 아니지? 박원빈 못 본 지 3달이 넘었네. 데뷔는 박원빈이 했나 보네. 박원빈. 박원빈박원빈박원빈.

연락을 하면 항상 1은 금방 지워지는데 답장이 오기까지 꼭 30분 정도가 걸려서 난 그 기다리는 시간이 제일 즐거웠다.

눈동자 굴리면서 손가락을 주저하고 있을 모습이 너무 귀엽지 않나?

박원빈 덕분에 와하하 웃다가도 금세 우울해지긴 했다.


사실 나는 그냥 버티고 있었다.




6.

정말 오랜만에 무대에 선 날이었다.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행복하게 웃던 나는 공연이 끝나고 연습실로 돌아왔다.

다른 선배들은 스케줄을 갔는데. 난 연습실로 돌아왔다.

데뷔를 했는데도 혼자 메아리치며 연습하는 건 나밖에 없었다.

춤을 추고 땀을 털고 털썩 주저앉아 거울을 보는데 박원빈과의 그날이 생각났다.


나는 시간이 늦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전화를 걸었다.

깜짝 놀라 고민을 한 듯 신호음이 5번 정도 들리고서야 전화를 받은 그 애는 조용히 내 음성에 집중했다.

가끔 통화를 할 때면, 얜 이렇게 숨도 못 쉬고 내 안위를 살핀다.


연습생 숙소까지 한달음에 뛰어가면서 나는 계속 울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눈앞에서 안달복달하는 애한테 미안한 줄도 모르고.

박원빈은 헤어질 때까지 한 번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7.

나는 그간 못했던 걸 다 해버리겠다는 듯 박원빈에게 집착했다.

'박원빈'이라는 존재가 그냥 너무 좋았다.

농담이지만, 우리가 남녀였다면 난 원빈이한테 사귀자고 했을 거다.


원빈이는 늘 차분하고 말이 없고 반응이 재밌다.

그 모든 행동들이 귀여워서 놀리고 볼을 꼬집고 쓰다듬어도 순한 양처럼 입술을 일자로 찢은 채 날 올려다보는데,

그럴때면 난 힘들었던 걸 보상받는 느낌이 든다.

얘랑 노는 게 이렇게 재미있을 줄 미리 알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8.

박원빈과 함께 데뷔를 하게 되었다.

이건 내가 그 애를 처음 본 순간부터 예상했던 일이고, 그런데도 한순간에 빼앗겼던 일이고, 기적처럼 다시 돌아온 일이다.

데뷔 준비를 하는 내내 나는 설렘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박원빈과 잘 지냈던 몇 안 되는 멤버들도 우리 팀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팀이 무조건 잘될 것이고, 서로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하루하루 증명받는 기분이었다.

물론 박원빈도 나와 같아 보였다.

우리는 미쳐버린 경주마들처럼 정말 최선을 다했다.




9.

난 꾸며진 박원빈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이 날이 없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수백번도 더 했지만, 그래도 결국 이렇게 좆됐을 거라는 걸 너무 잘 안다.


내가 아는 박원빈은 옷을 좋아하고 멋진 걸 좋아하는 애였다.

가끔 밖에서 만날 때면 앳된 얼굴로 멋지게도 차려입고 나오는 바람에 적어도 30분은 걔의 깔롱을 놀려대는 게 루틴이었을 정도니까.


어리고 순수하고 꼬마 신사 같았던 박원빈은 언제 큰 걸까?

그 애가 준비를 끝내고 촬영장에 들어서는 순간 난 내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한 길로 빠지고 있다는 걸 체감했다.

내가 가끔 스케줄이 끝난 직후에 박원빈을 만나면 박원빈은 신기해하며 내 사진을 찍곤 했다.

그런 가벼운 감정이 아니라.

마침내 빛날 준비를 마친 박원빈이 조명 아래 섰을 때, 매니저 형이 무어라 말을 거는 것도 다 씹고 아주 오랫동안 걜 쳐다보았다.


남녀가 아니어도 난 상관이 없었던 거다.




10.

돌이켜보면 가끔 박원빈을 만지고 싶을 때가 있었다.

뭘 어떻게 만져야 할진 모르겠는데 그냥 손을 대고 싶었다.

내가 이뻐해서라고 생각하고 병신같이 넘겼던 그 감정들 때문에 난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가끔 박원빈이 연습실에서 나시만 입고 헉헉거리는 걸 볼 때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도 잘생겼고 어깨도 넓고 몸은 또 말라서 노출을 하면 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감이 있다.

근데 그런 막막하게 느꼈던 감정은 그냥 죽어버린 것처럼,

나는 고민할 새도 없었다.

정체성에 혼란이 오고 괴로워하는 그런 뻔한 전개는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애초에 박원빈은 처음 봤을 때부터 나에게 특별한 존재였고 늘 나를 겁나게 하다가도 한순간에 또 기대고 싶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감정을 부정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연습실에 처박혀만 있기에 아까운 애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박원빈은 끝을 모르고 야해졌다.

말이 유치하지만 난 혼자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어쩌면 애써 무시해왔던 걸 마주보기 시작한 내 억지일지도 모르겠다.

수도없이 보았던 모습에도 난 속수무책으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티 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다가도 오물오물 무언가를 얘기하는 통통한 입술이 눈에 들어올 때나 은근히 스스럼없는 박원빈이 몸을 붙여올 때면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저를 끼고 살던 내가 다른 애들한텐 해주는 스킨십을 걔한테만 안 해주는 걸 박원빈은 좀 서운해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난 공평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끔 못 참을 만큼 예뻐 보일 땐 턱을 쓸어주었다.

팬들이 나와 박원빈이 붙어있는 걸 유난히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그냥 센터인 박원빈과 전 그룹에서부터 인지도를 쌓아온 나의 조합이라서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난 억지로 그 핑계를 합리화하며 가끔은 합법적으로 박원빈을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댈 수 있는 핑계가 많아서 다행이었다.


한번은 연습실에 둘러앉아 안무 영상을 모니터할 때 걔 땀이 내 손등에 떨어진 적이 있는데 그날 난 변태 새끼처럼 계속 손등을 어루만지다 잠들었다.

종국엔 대화만 해도 밑이 뻐근해질 지경이라 턱이 부서져라 어금니를 깨무는 게 그때부터 내 습관이다.

든든한 형인 척 뒤에선 욕정 하는 이 가식적인 연극을 내가 언제까지 해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결국 나의 이런 노력은 얼마 못 가 실패했다.




11.

혼자만의 유치한 고군분투를 견뎌내는 동안 시간이 꽤 지났다.

다른 멤버들은 귀중한 이 시기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은데, 난 오로지 박원빈 때문에 시간이 더 빨리 흐르길 바랬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내가 걔한테 욕정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박원빈은 내게 제대로 말을 걸 생각도 못 하고 내 주변만 맴돌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힘들진 않은지 먹고 싶은 건 없는지 쏟아내고 싶은 질문이 몇천개였지만 그랬다간 뭔 일이 나서 박원빈이 영영 날 떠날지도 모르겠다.



3일이나 되는 휴가에도 숙소에 남아있겠다는 걔의 말을 들었을 때 난 분명 어떻게든 바깥으로 나돌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만날 사람들이야 많지만 가고 싶은 자리가 딱히 없어서 뭐할 거냐는 멤버들 질문에 집에 다녀오겠다고 대충 둘러댔다.


전날 새벽까지 스케줄을 뛰었는데도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애들 사이에서 박원빈은 졸린 눈을 하고 앉아있었다.

박원빈은 너무 늦게 잠들면 잠을 잘 못 잔다. 어제도 밤새 뒤척였을 거다.

아마 정신 못 차리도록 자느라 밥을 계속 거를 수도 있다.

그리고 멤버들이 한두명씩 돌아오면 늦은 새벽이 돼서야 배달시켜 먹겠지.

쟨 입맛이 없으면 많이 먹지도 못하는 자극적인 음식을 시켜놓고 고사를 지낸다.

너무 쉴 틈 없이 달려온 터라 몸이 무리해서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간 정말 요절할 수도 있다.


집에 가는 매니저 형을 따라 나가 괜히 징징대면서 뻐기다가 박원빈이 잠들고도 남았을 대낮에 돌아왔다.

그럴 필요 없는 걸 알지만 박원빈네 층에서 자연스럽게 내렸다.

뭐하는 짓인가 싶어 현관문을 열며 헛웃음을 지었다.

박원빈이 자고 있을 방문 틈 사이에선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혼자 있는 게 무서워서 불을 켜고 잔 모양인데,

쟨 저런 식으로 사소하게 사람을 긁는다.

내가 이 지경인 걸 알고 일부러 엿맥이는 건가 싶을 때도 있다.


방문을 살짝만 더 열고 불을 꺼주는데 작은 소음이 들렸다.

이불 사이로 보이는 까만 머리카락 바로 옆에 놓인 핸드폰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난 재생되고 있는 영상을 끄고 폰을 잠가주었다.

벤에서 대기실에서 쪽잠 자는 것만 봤지 이렇게 깊게 자는 박원빈은 초면이라,

입가로 새어 나온 침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주고 관찰했다.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여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푹 내뱉었다.

벌써 못 할 짓이 이렇게도 쌓였는데, 앞으로 이어질 긴긴 시간 동안 내가 박원빈에게 상처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얘 옆에 있을 수나 있을까.

솔직히 오로지 터질 것 같은 내 감정만 생각하면 다 그만두고 박원빈이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다.


푹 자서 그런지 양 볼과 입술이 딱 내가 좋아하는 모양으로 부어있다.

같이 데뷔한 이후로 잠에서 깬 박원빈을 볼 때마다 이걸 붙잡고 꼬집고 놀리고 싶었는데, 이미 내가 비정상이 되어버린 후라 한 번도 못 그랬다.

난 박원빈의 왼쪽 뺨을 손끝으로 죽죽 밀었다.

밀리는대로 눈 밑에 주름이 지는 게 귀여워 조용히 웃으니 한번 뒤척이던 박원빈이 몽롱하게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난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 더 자. "


고개를 살짝 들고 날 응시하던 박원빈이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내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린 후 여전히 볼에 올려진 내 손을 떼어내고 꽉 잡는다.

아마 잠결이니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 따지고 싶고 묻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을지 아득해서 난 잡힌 손을 떼지 않았다.

자유로운 한 손으로 전에 늘 그랬듯 부드럽게 앞머리를 넘겨준다.

박원빈이 다시 무겁게 감긴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웅얼거렸다.


" 혀엉... "

" 응. "

" 밥 먹으러 갈까요... "

" 너 더 자고 이따 나가자. "


거짓말... 앙, 안 머글꺼면서...

심술난다는 듯 중얼거리면서 잔뜩 부은 눈을 또 힘겹게 뜨는데 그 큰 게 다 뜨이지도 않는다.

잠꼬대에 가까운 말을 할 때도 바보같이 말을 더듬고, 발음은 다 흘리고,

당연히 예상했지만 전과 조금 달라진 걸 다 안다는 듯 투정 부리기까지 하고.

난 그런 박원빈의 모든 모습을 마냥 귀여워할 수가 없을 만큼 좋아하게 됐다.


내가 대답 없이 내려다보자 박원빈은 꼼지락거리며 나와 거리를 좁혔다.

피하나 안 피하나 재는 것 같은 모습에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더니 날 엉성하게 와락 껴안았다.

박원빈이 먼저 날 만진 건 처음이었다.


어차피 기억 못할 거라 생각해서인지, 이대로 계속 두었다간 좆될 것 같아서인진 모르겠지만.

난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그 순간이 없었더라면 우리 둘은 시간이 흐르면서, 나이가 들면서 이 답도 없는 연극을 점점 더 잘 해내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난 미친척 박원빈을 같이 껴안고 확 누웠다.

그리곤 까만 정수리에 세 번이나 입을 맞춰주었다.

이렇게 간지럽게 군건 처음인데 박원빈은 놀라지도 않고 기분 좋아 죽겠다는 듯 간지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뭐라뭐라 말하는 것 같은데 얼굴이 내 가슴팍에 꽉 막힌 채라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난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지독하게 시원한 기분을 만끽하며 박원빈의 허리 위로 다리 하나를 턱 올렸다.

아까 얘 볼을 만질 때부터 뻐근했던 아래가 바짝 발기해있었는데 그것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아 수를 썼던 거다.

꿈을 꾸듯 몽롱한 상태인 건 박원빈이지만, 마치 내가 구름 위를 걷는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


인정한다. 난 진작에 박원빈과 이런 걸 하고 싶었다.

얌전히 안겨 쿡쿡대던 박원빈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얼굴을 떼놓고 보니 여전히 잠결이 가득한 표정이라 속으로 안심했다.


" 너 꿈꾸는 거야. " 

" 알거등. "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내뱉던 박원빈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졸음이 가득한 두 눈이 점점 느리게 깜빡이다가 감기는 게 난 너무 아쉬웠다.

안고있던 팔을 떼고 양손으로 얼굴을 쥐고 감상했다.

오늘이 지나면 또다시 박원빈 앞에만 서면 굳는 병신으로 돌아가겠지.

원래 난 지나치게 고심할 일이 생기면 극한까지 몰고 가다가 뭐든 저질러버린다.


졸고있는 애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서툴게 입을 맞췄다.

박원빈이 기억을 하면 한 대 얻어맞고 정색 빨고 사과를 하든 질릴 때까지 구슬려서 품에 안든 하면 된다.

입술이 닿는 순간 뒷목을 부드럽게 주물러줬다.


사실 고대하는 키스를 해서 짜릿하고 흥분되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왜냐면 내 상상이 현실이었다면 박원빈 입술은 이미 닳아 없어졌을 거다.

난 퉁퉁 부어버린 밑 입술이 빨대라도 되는 양 힘을 주어 빨아댔다.

내가 계속 부드럽게 키스를 하자 어느 순간부터 박원빈은 작게 코를 골았다.

뭔 키스가 ASMR도 아니고.

어이가 없었지만 난 걔 허리 뒤에 팔을 감고 변태처럼 혼자 즐겼다.


어차피 내 인생이 좆된건 교복 입은 박원빈과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사를 했던 순간부터이다.




12.

무아지경으로 키스하던 나는 허벅지에 닿는 딱딱한 감촉에 정신을 차렸다.

잠든 와중에도 어쩔 수 없이 발기해버린 아무것도 모르는 박원빈에 대한 죄책감이 순식간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칭얼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깊이 잠든 애를 혼자 물고 빨고...

찌질한 나는 살짝 벌려진 잇새로 혀를 넣지도 못했다.


머리를 거세게 헝클이고 벌떡 일어나 앉자 날 껴안고 있던 마른 팔이 힘없이 매트리스 위로 떨어진다.

혼자 거칠게 숨을 내쉬다 부엌으로 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나는 박원빈이 이 일을 기억하길 바랬을까?

그래서 잠에서 깬 박원빈이 아무렇지 않은 척 내 어깨에 기댈 때 그렇게도 화가 났던 걸까?

얘 성격에 아까 일을 기억했으면 내가 있는 마루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종일 골머리를 썩였을 거다.

마음을 꺼내서 보여줄 용기도 없는 나는 솔직히 그렇게 홧김에 저지른 짓을 박원빈이 먼저 기억하고 얘기를 꺼내고 알아서 나한테 와주길 바랬다.




13.

이후 나는 전보다도 더 모질게 굴었다.

그간 내가 안일했었다는 걸 인정했고 박원빈과 멤버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더욱 차가워진 나 때문에 주춤하고 당황하고 난색이 되는 박원빈을 볼 때면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난 계속해서 박원빈을 피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대책 없이 키스부터 해버린 내가 또 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나조차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물론 이것 또한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아니 사실은 방금 시뻘게진 얼굴을 하고 대기실을 뛰쳐나간 박원빈을 따라나서면서 알게 됐다.


나와 박원빈은 더 이상 이대로 아무렇지 않아질 수가 없다는 걸.




​                               


1.

누가 봐도 상기된 얼굴로 무대 의상을 입고 성큼성큼 걷는 건 모두의 시선을 끌었지만 원빈은 상관하지 않았다.

원래 제 선에서는 이 행위조차도 죽을 만큼 부끄러운 일이 당연한데.

그럴 틈도 없이 서럽고 화가 나서 계속 눈으로 좇던 비상계단 문이 보이자마자 다가가 벌컥 열었다.


정성찬은, 진짜 씨발,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을까?

학생 때 애들 장난처럼 해본 연애가 다지만 만약 정성찬과의 이 모든 해프닝이 연애와 이별이었다면 난 아마 평생 다시 사랑을 하지 못할 거다.

어지러운 생각들을 뇌 속으로 퍼부으며 제자리를 빙빙 돌던 원빈은 계단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동시에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린다.


" 박원빈. "

" 나중에 얘기해요. "


아무리 지금은 미워 죽겠다지만 정성찬은 박원빈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인간이다.

필터링없이 원망을 퍼부을까 두려워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무릎 위에 두 팔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 지금 얘기하자. 내가 미안해. "

" 아니, 대체 뭐가...! "


하,

답답한듯 크게 내쉰 한숨이 메아리쳐 돌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몇초 후 제 옆에 풀썩 앉는 성찬이 느껴졌다.

뭐가 미안한데 같은 찌질한 멘트는 진짜 하고 싶지 않았는데 멋없는 남자들의 애정을 갈구하는 죄 없는 어린 소녀들 또한 다 이런 마음으로 내뱉었겠지.

이건 밈이 되면 안된다. 이 말을 하게 하는 새끼가 개새끼다.


정성찬이 앉자마자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척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장이라도 눈에 고인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입술을 짓씹었다.


" 진짜 미안해 박원빈. "

" ... "

" 내가 병신이라 이러는 거고 너 이거 때문에 힘들어할 필요 없어. "


눈치볼 필요도 없고.

한마디를 더 덧붙이며 성찬이 몸을 가까이했다.

어떻게든 제 고개를 돌리려고 손을 뻗는 게 느껴지자마자 원빈이 벌떡 일어났다.


" 난, 나는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

" ... "

" 이유라도 말해줘야 내가... "


결국 정성찬 앞에서 울고 말았다.

우린 왜 이렇게 서로 하나씩 주고받는 건지 모르겠다.

적어도 난 내가 정성찬을 울리진 않았었는데.


곧바로 따라 일어나 심란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형은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자마자 크게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깨끗하고 하얀 얼굴로 또 무슨 비겁한 변명을 내세울지, 난 또 그걸 어떻게 하나하나 따져야 할지 머리를 굴리며 말없이 정성찬을 노려보았다.


" 내가 요즘 이상하게 군거 설명할게. "

"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

" 원빈아. "

" 형이 어떻게, 형이랑 나는- "


니랑 내가 얼마나 재밌었고 얼마나 서로를 위했고 얼마나 서로에 의해 버텼는지 너도 다 알면서.

그런 말들을 조리 있게 내뱉을 능력은 안되니 말 대신 눈물만 계속 울컥울컥 차오른다.


" 내가, 너를... 보는 게 좀 힘들어. "

" 그니까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

" 잘못한 거 없어. "

" 그럼 이유라도 말해줘요. "

" 원빈아. "

" 나 형이랑 멀어지기 싫어... "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데뷔가 확정되었을 때도 우리 팀의 첫 영상이 떴을 때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대를 해낼 때도 이렇게 울진 않았다.

화가 나고 답답하고 억울한 감정에 여기까지 왔지만 솔직한 마음으론 정성찬에게 버려지는 게 무서워서,

내가 뭘 잘못했다면 난 바로잡고 싶다.

형이 나에게 실망했다면 용서받고 싶다.


정성찬은 조금 망설이더니 가까이 다가와 서툴게 날 안았다.

계속해서 뿌리치려는 내 양팔까지 결박한 채 힘을 잔뜩 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 시간 좀만 주라. 니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게. "

" 지금 얘기해. "

" 제발 부탁이야. "

“ 지금 얘기하라고요!! “


마침내 형을 뿌리치며 처음으로 큰소리를 냈다.

이 순간만 어떻게 넘기고, 바쁘다는 핑계로 신경 쓸게 많다는 핑계로 다시 날 내팽개치려는 수작이면?

난 이렇게 겨우 갖게 된 정성찬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날릴 수가 없었다.


" 좀 진정해 박원빈. "

" 형은 나랑 계속 이렇게 지낼 거예요? "

" ... "

" 진짜 형이 나한테 어떻게 이래? "

" 원빈아. "

" 내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형 하라는 대로 오, 오라는 가는 줄 알았어요? "


하, 시발. 말이 꼬였다.

그래도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해낸 기분이라 당당하게 쏘아보았다.

정성찬은 뻔뻔하게도 내 마지막 말에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 뭐. 대체 이 상황에서 정성찬이 기분 나쁘거나 화가 날 일이 뭐가 있길래 저럴 수가 있지?

나는 고삐 풀린 말처럼 굴기로 했다.


" 그렇게 나 놀리고 장난칠 땐 언제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건 좀 아니잖아요. 난 이유도 모르는데! 맨날 정신없어서 죽을 것 같은데... 그럼 난 어디에 기대라고- "

" 내가 너 힘들 때 기대는 사람이야? "

" ...뭐? "

" 좆같을 때 의지하고 서로 응원하고. 뭐 그런 거 기대했어 나한테? "

" ... "

"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보지 말았어야지. "

" 내가 뭘, "

" 멀리서도 나만 보지 말았어야지. 내가 부른다고 맨날 일찍 자는 애가 잠옷 바람으로 뛰어나오면 안됐지. 아냐? "

" 나 무슨 소린지 이해가, 하나도 안 가는데... "


내 착각이 아니라 정성찬은 정말 화가 잔뜩 나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무섭고 쫄렸지만 상황 파악을 단 하나도 해내지 못했다.

늘 단순한 몇 마디로 내 마음을 알아주고 똑똑한 말들을 내어주던 정성찬은 지금 짐승과도 같은 표정으로 무식하게 굴고 있다.


난 정성찬의 어느 모습까지 마주하게 되는 걸까.

벙찐 얼굴로 쳐다보는데 형이 갑자기 손을 올려 내 턱을 쳐 입을 다물게 했다.

난 덕분에 혀 끝을 살짝 깨물어버려서 두 손을 입 주변에 대고 정성찬을 째려보았다.

아파 죽겠다.

시트콤과 다름없는 이런 상황은 우리 사이에 원래 같으면 바람 빠진 웃음으로 승화되었겠지만 둘 다 궁지에 몰린 상태라 그러질 못했다. 


" 그러니까 난 그게 미운 거야 박원빈. "

" 내가 밉다고? 형 그건 내가 할 말이잖아요. "

" 아무것도 모르는 니 문제라고. "

" ... "

" ...아닌 거 알아도 그냥 그렇게 해달라고. " 


마지막 말을 뱉으면서 정성찬은 무섭게 가까워지더니 입 주변에 올려진 내 손을 치웠다.

그러곤 바로 한 팔로 내 어깨를 밀어 벽에 붙여놓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난 이제 본격적인 주먹다짐이라도 하나 싶어 선빵 한 대 맞을 생각으로 눈을 질끈 감았지만,

말도 안되게도 형은 내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자마자 거칠게 몰아붙이는 걸 보면 또라이 같은 화해의 뽀뽀 이런 거 아니고 진짜 키스를, 나한테 한다.

나는 어떻게든 입을 벌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바르작댔지만 정성찬과 벽 사이에 갇혀있어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흥분한듯 숨소리가 거칠어진 형이 하체를 맞붙일 때는 처음 느껴보는 딱딱한 감촉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짧은 시간 버거운 키스를 받아내며 금세 숨이 찬 내가 정성찬의 어깨를 쥔 양손에 힘을 세게 주자 그제야 형은 떨어져 나갔다.


정성찬이 한 걸음 물러서자마자 난 두 손으로 내 입을 막고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빌어먹게도 이 나쁜 새끼와 뉴런을 공유해버린 나는,

한 번에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멋있었고 반전 있게도 간절했고 같이 있기만 해도 재밌던 나의 형은 나는 상상해본 적도 없던 방식으로 날 사랑해왔던 거다.


난 늘 정성찬이 소중하고 너무너무 좋았지만, 정성찬과의 키스를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형과 가로등 불빛 아래서 늘 걷던 거리를 걸으며 수다 떠는 건 너무 행복했지만 그 손을 잡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정성찬이 날 피할 때도 사랑해서가 아니라 미워해서라고만 생각했다.

난 그제야 정성찬이 그렇게까지 화가 난 이유를 납득했다.

언제부터일지 모르겠지만 늘 이렇게 동상이몽이었다면, 정성찬은 세상 누구보다 날 원망하고도 남는다.

난 죽어도 정성찬에게 미움받고 싶진 않다.


" 이제 다 알겠어? "

" ... "

" 맘대로 키스해서 미안 원빈아. 근데 이걸 뭐라고 설명하겠어. "

" 형, "

" 어떻게 말해야 니가 날 안 피할까. 그러니까 키스 한 번쯤은 해봐도 되는 거 아니야? "

" 잠, 잠만. 형 내 말 좀 들어봐요. "

" 안 들어도 뻔한 말을 내가 왜. 지금도 그냥 확 뒤지고 싶은데. "

" ... "

" 내가, 진짜... 미안하다. "

" ... "

" 사랑하기만 하고 좋아하지는 말걸 그랬다. "


형의 말은 투박하지만 섬세했다.

정성찬이 정말 나에게 키스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면 대체할 수 있는 애를 찾거나 내가 힘들어하든 말든 계속 개같이 굴면 되는 거였다.

반대라면, 그건...

그건 정성찬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그걸 이제 나도 알아버렸으니 지금 당장 정성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난 이런 야한 키스를 하는 법도 섹스하는 법도 모르고,

누굴 진정으로 사랑해본 적도 없고,

정성찬처럼 사람들과 잘 대화하지도 못하는데.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내가 정성찬을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걸까.


착잡한 표정의 형이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난 턱이 아릴 정도로 입을 꾹 닫은 채 오열했다.




2.

우리 둘이 나란히 사라진 건 당연히 큰 이슈로 남았다.

멤버들과 스탭들 모두 한동안 눈치를 보았다.

정성찬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날 대했고 이전처럼 티가 나게 피하지도 않았다.

무대에서, 스케줄을 하면서, 멤버들 앞에서 나와 붙거나 대화할 일이 생기면 오히려 내가 흠칫흠칫 놀랄 만큼 거침없이 굴었다.

다른 애들한테 보단 여전히 어색하지만 이 정도면 남들 눈을 속일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다만 정말 그 이상의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몇번이고 대화하려 시도해봤지만 티끌만 한 틈도 주지 않았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4달 가량의 시간 동안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전에는 나에겐 거리를 두면서 찬영이나 소희에겐 애교를 부리는 형을 보면 심통이 났지만 이젠 탈력감에 그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전보다도 거대한 벽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분에 절망했고,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꽃처럼 지냈다.

형에 대한 어떠한 생각이든 날 너무 괴롭게 해서 그저 주어진 일을 묵묵하게 해냈다.

이러다간 한순간 크게 무너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정성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모든 걸 잘 해내다가도 금방 울적해졌다.


난 인내하는 것엔 강하니까...

참을 수 있었다. 정성찬을 위해서.

비겁하게도 난 여전히 내 진짜 마음을 가늠하기가 겁이 난다.


" 야 원빈아. “

“ 네. “

" 내일 한국 가면 둘이 따로 밥 먹을래? "

" 우리 둘이요? "

" 너랑 정성찬. "

" 아... "


은석이 형은 그중에서도 불편한 티를 제일 덜 내준 멤버였다.

난 든든하고 고마우면서도 정성찬과 가까운 송은석에게 일말의 힌트라도 얻고 싶어 괜히 주변을 맴돌았지만,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당연하다.

어쩌면 송은석이 아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그냥 모든 걸 난 이미 알고 있으니까.


" 불편하면 말고. 언제까지 그럴 순 없으니까. "

" 아, 아니야. 내가 형한테 따로 얘기해볼게요. "


난 은석이 형과 헤어져 내 호텔 방으로 돌아오기까지 계속 멍만 때렸다.

송은석이 지펴놓은 불씨는 애써 인내하던 나를 다시 불같이 타오르게 했다.

정성찬과의 키스 이후 나는 한 달이 넘게 밤만 되면 고열이 생겨 고통스러워했었다.

방으로 들어온 난 다시 그 거지 같은 열감을 이기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눈을 꾹 감았다.

자기 전에 간단하게 뭘 먹고 들어오자는 타로 형의 말에 대답도 해주지 않고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도 않았다.


난 정성찬으로 인해 점점 망가지고 있었다.

내가 챙겨야 할 사람들을 못 챙기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상처 주면서.

이것 또한 내가 정성찬을 사랑해서일까?

사랑하지 않았다면, 신경도 안 쓰였을까.




3.

정성찬과 처음 마주한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난 밤을 새웠다.

형이 날 무시하기 시작한 이후엔, 형과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왼쪽 가슴이 아리고 슬픈 기분이 들어 늘 미뤄왔었다.


다행히 입국 일정 말고는 스케줄이 없는 날이었지만, 눈이 너무 심각하게 부어 난 캐리어를 싸는 타로 형 옆에서 머리 위에 수건을 쓰고 이도 저도 못했다. 


" 원빈이 비니 빌려줘? "

" 어? 괜찮은데. "

" 빌려줄게. 내 가방 좀 봐."


형이 일부러 크게 웃으면서 금방이라도 내용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보부상 가방을 보여주자마자 나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코가 시큰해졌다.

밤새 울고도 또 우는 나를 잠시 응시하던 타로 형은 조금 잦아든 미소만 남긴 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티비 탁상 위에 놓인 휴지 곽을 내 쪽으로 밀어주곤 캐리어를 마저 정리한다.


나는 분명 이런 어른스러움과 든든함을 가진 정성찬을 동경했다. 아주 오랫동안.

아니 사실 그냥 내가 정성찬을 그런 사람으로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 타로 형을 보며 안기고 싶고 이런저런 투정을 부리고 싶은 마음과 내가 정성찬을 생각하는 마음은 동일할까?

정성찬은 그렇게 나를 아기 새처럼 키워놓고 데뷔하자마자 모르는 체했다.

이 폭풍 같은 시간 동안 날 잡아준 건 정성찬보다 타로 형을 포함한 다른 멤버들의 공이 압도적으로 크다.


그런데도...

난 사실 유치하게 날 무시하다가, 또 비상계단 전체가 울릴 만큼 화를 내다가, 억지로 키스하곤 매너 없게 자리를 박차고 나서는 이기적인 정성찬도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

형 말대로 좆같을 때 의지하고 위로하는 그냥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걸 깨닫는데 이렇게 오래 걸렸던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미자 딱지를 떼고 어엿한 어른이 되어서 데뷔를 하기까지 내 뒤엔 늘 정성찬이 있었으니까.

사랑이 뭔지 어떻게 하는 건지 어떤 경우를 사랑이라고 하는 건지도 난 정성찬이 알려주지 않으면 알려 할 생각도 못 했을 거다.


근데 그런 나에게, 사랑한 걸 후회한다는 말만 띡 남기고 뒤를 돌아서는 건 책임감이 너무 없는 것 아닌가?




4.

난 공항에 가기까지 남은 자유시간을 알차게 쓰기로 했다.

당장 정성찬을 만나, 따지고 묻고 배워야 했으니까.

찬영이에게 전화를 걸어 내 방으로 와달라 부탁한 후 바로 자리를 박찼다.

난 호텔 방 문을 여는 순간부터 정성찬 눈앞에 닿기까지 단 1초도 쉬지 않고 전력 질주했다.


벨을 누르자 내가 찬영인 줄 알고 실실 쪼개며 문을 열던 정성찬은 날 보자마자 정색했다.

난 그게 화가 나면서도 좋아서 헉헉대며 맘대로 정성찬을 밀치고 들어가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형은 머리를 털고 있던 수건을 괜히 접으며 내 쪽은 보지도 않고 물었다.


" 왜 왔어? "

"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

" ... "

" ...다시 생각해봐도 형은 나한테 이러면 안 돼요. "

" 미안한데, 원빈아. "


정성찬은 4달이나 지난 시점에서 또 저를 찾아와 길길이 날뛰는 눈치 없는 짝사랑 상대를 원망하고도 남을 거다.

난 그때와 같은 말을 하지만 완전히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형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방황했다.

몇번 두리번거리더니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 마시는 형의 등 뒤에다가 그냥 내질렀다.


" 나, 나는 키스도 형이 처음이었어요. "


정성찬이 1초의 정적 후 물을 뿜었다.

난 미친 듯이 기침을 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그 사이로 내 할 말을 이어갔다.


" 서울 와서, 처음 진짜 찐 맛집 데려다준 것도 형이고. 나한테 해줬던 말들도, "

" 켁, 야, 박원빈. "

" 그런 것도 난 다 형이 처음이었고, 형이 친구 많아도 나랑 제일 친하다고 생각했어요. "


형은 계속 콜록대느라 괴로운지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말을 잘 못하는 나에게 유리한 상황이라 다행이다.


" 형이랑 같이 데뷔하게 됐을 때 내가 얼마나... 좋았는데요. "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남아있는데 이 대목에서 난 바보처럼 울컥했다.

정성찬보다 훨씬 더 노래를 잘하고 춤을 잘 추는 애들을 한 트럭을 데려와도 난 무조건 정성찬을 택했을 거다.

이런 내 마음은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침과 함께 울음을 삼키는 동안 진정한 형이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 나도 그랬어. 그래서 내가 미안한 거고. "

" 정신없고 어, 어려워서 모르겠는 거. 다 형이 알려줬잖아. "

" ... "

" 그럼 그냥 이런 것도 형이 알려주면 안 돼요? "


정성찬은 잠시 당황한 듯 말뜻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내가 말을 조리 있게 못하는 편이라 가끔 대화가 길어질 때면 형은 눈치껏 내 말을 해석해주곤 했다.

난 간만의 이 교류가 좋아 또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 나는 니가... 날 싫어하게 될 줄 알았어. "

"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지... "


조금은 풀죽은 표정의 정성찬이 너무 안쓰러워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내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움찔대던 정성찬은 가까워진 내가 거스러미를 뜯고 있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저지했다.


나는 이런 정성찬의 모습도 너무 좋아한다.

그렇게 섬세하진 않지만 눈에 보이면 꼭 챙겨줘야 하는 거,

다른 사람들보다 나한테 특히나 더 해줬던 이런 거친 친절들 말이다.


" 한 번도 형 싫어한 적 없어. "

" ...박원빈. "


난 여전히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로 무턱대고 정성찬에게 안겼다.

좀 더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안기고 싶은데, 그런 건 잘 못해서...

우악스럽게 큰 덩치를 꾸겨 안은 나는 형의 얼굴이 안 보이자 용기가 올라 또 입을 열었다.


" 형은 그럼 나 포기한 거에요? 나 그, 사- "


사랑이라 해야 할지 좋아한다 해야 할지 양 쪽 모두 낯부끄러워서 말을 멈췄더니 정성찬이 대답을 내주었다.


" 난 포기 안 해. 기다린 거야. "

" 그, 그렇구나. "

" 넌 원래 뭐든 좀 오래 걸리잖아. "

" ... "

" ...뭐라 하는 건 아니고. "

" 응... "


계속 겉만 맴도는 대화에 난 다시 결심하고 몸을 뗐다.

그래서 난, 형을 사랑하는 거냐고.

형이랑 다시 키스를 하면 내가 즐길 수 있을 거냐고.

형과 내가 사랑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거냐고.

하나하나 물어야만 했다.


" 알려줘요. 나 진짜 몰라서 그러는 건데... "

" 뭐를. "

" 내 입으로 꼭 말해야 아나... "


말 끝을 늘리자 정성찬이 푸스스 웃으며 볼 안쪽에 혀를 굴렸다.

팬들이 좋아하는 모습인데 내가 보기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할 때가 더 많다.

정성찬과의 키스 이후 나는 그 버릇을 볼 때마다 거칠던 키스가 떠올라 황급히 눈을 돌리곤 했다.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만으로도 나는 떠오르는 추억이 너무 많은데. 


" 한국 가서 제대로 얘기하자. 우리 곧 가야 돼. "

" 응. "

"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진짜로. "

" ...미안하다는 말 쫌, "

" .... "

" 고마해라- "


용기를 내어 손 끝으로 형의 몸을 툭 치며 내뱉자 형은 마침내 안심한 듯 크게 웃었다.

정성찬과 멀어진 이후 단둘이 있을 때 사투리를 쓴 건 거의 처음이었다.

형이 죽어라 웃어대고 귀여워 미치려 하는, 나에겐 조금 부끄러운 이 말투를 나는 이제 이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형에겐 여전히 복잡한 표정이 비쳤지만 애써 숨기며 그제야 캐리어를 싸기 시작했다.

정성찬이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가만히 구경했다.

형이 찾아대는 모든 물건의 위치를 내가 말해주었다.


나는 간만에 가까이서 보는 허둥대는 이 덩치가 너무나 그리웠다.




5.

비니에 안경에 마스크까지 끼고 공항에서 한참을 기가 빨리다 겨우 비행기에 올랐다.

숙소 방에서 나란히 같이 나오는 우리를 캐리어를 챙기러 들어오던 찬영이가 눈을 빛내며 쳐다보았다.

쟤 생각처럼 모든 게 잘 풀리길 나도 바란다.


우린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각자 쉬기로 했다.

당장 내일이면 또 인천에서 무대가 있어 자유시간을 조금만 보내고 저녁에 연습실에서 모이기로 했다.

내가 어느 기회를 틈타 다시 약속을 잡을지 조급해하는 사이, 정성찬에게서 먼저 둘이 밥을 먹자는 카톡이 왔다.


각자 숙소에서 누구는 잠이 들고 누구는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난 너무 오랜만의 형과의 시간에 옷장을 다 들어낼 뻔했다.

결국 뻔하게도 입던 대로 걸치고 나갔는데, 형은 그런 나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자마자 무언갈 참는 표정을 했다.

옛날에 지독히도 내 패션 갖고 놀리던 걸 하고 싶은 모양이다.


정성찬의 풀어진 태도에 대한 무언가 확신을 얻은 나는 회사 근처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사서 돌아오는 내내 싱글벙글 웃었다.

우린 일 얘기나 좀 하면서 조용히 밥을 먹었지만 그건 밖이라서,

다시 숙소에 도착해서 정성찬네 층에 멈춰선 우린 형의 방바닥 한가운데 마주 앉아 잠시 침묵했다.


대화에 마가 뜨면 늘 그걸 채워주는 건 형이었다.

나는 이제 형과 나의 관계를 위해 달라지기로 마음먹었다.


" 난 형을... 그니까.... "

" ... "

" 좋아하는 것 같아요. "


실로 멋없는 고백이거니와 애초에 고백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서 내뱉자마자 눈을 꽉 감았다.

몇초후 슬며시 눈을 뜨자 정성찬의 예쁜 얼굴 옆에 달린 귀가 사과만큼 시뻘게져 있다.


" 무슨 말이라도... "

" 네가 착각하는 건 아닐까 원빈아. "


다시 차가워진 목소리에 순간 놀랐지만 정성찬은 날 돌아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새빨간 두 귀에서 시선을 내리니 손끝이 잩게 떨리고 있다.

난 비로소 정성찬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를 제대로 실감했다.


형의 두 손 위에 한 손을 얹자 그제서야 나를 돌아보았다.

활동하면서 정성찬이 우는 걸 몇번은 봤었는데, 이렇게 가까이는 너무 오랜만이다.

울보. 형은 울 때면 나 울컥해요, 울어요, 다 울었어요 광고하듯 애기 같다.

눈시울이 빨개지길래 우느라 끝없이 우울해지기만 할까 봐 하고 싶던 말을 했다.


" 난 형이 멋있고, 동경했는데... 생각해보면 형보다 타로 형이 더 멋있어. "

" ...어? "

" 비, 비겁하게 나 피하는 형보다 타로 형 은석이형이 더 멋있다고요. "

" 너무하네. "

" 근데 난 그래도 형이 좋아요. "

" ... "

" 우리 옛날에, 그 연습실에서. 그때도. "


형이 아차 싶은 표정을 했다.

실은 내 사랑이 먼저일 수도, 둘이 영화처럼 첫 눈에 반할 걸 수도, 정성찬이 나를 무시하던 시점부터 불안해진 내가 그제야 사랑을 따라 시작한 걸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정성찬을 형으로만 동경했던 거라면 그 새벽의 연습실에서도 형을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 같다.

그때 우리에겐 지금 멤버들과 쌓은 유대감 같은 것도 없었고 늘 불안정한 일상 속 서로가 라이벌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 근데 내가 연애를 안 해봐서요. 형은 해봤지만. "


일부러 퉁명스럽게 얘기하니 형이 눈시울이 벌게진 채로 실실 웃었다.

이미 정성찬의 모든 고민과 뒤틀린 마음은 풀어진 지 오래였다.

나를 바라보는 깊이가 가늠도 안가는 눈빛에 난 또 한 번 사랑의 위대함을 느낀다.


" 나도 거의 안 해봤어. "

" ...거짓말. "

" 진짜야, 연애할 시간이 어딨었냐. "

" 나 근데 연애하자는 건 아닌데. "

" 뭐야. 박원빈 완전 나쁜 놈이네. "

"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일단 사랑... 을 하자는 건데... "


연애 나 자, 자신 없는데.

기어가는 목소리로 뱉어놓고도 웃긴 말이긴 한데 진심이다.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무언갈 참는 사람처럼 달달 떨며 지켜보던 정성찬이 날 와락 껴안았다.

압박감이 무슨 코끼리한테 밟히는 느낌이라 컥 소리를 내며 나는 버둥거렸다.


" 박원빈. 너 진짜 나 좋아해? "

" 아 이거 좀, 놔바요. " 

" 진짜 박원빈이 나 사랑해? "

" 아, 형 울보 진짜... "


두 번이나 묻는 음성이 갈수록 떨리더니 이젠 본격적으로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형이 울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은 길었고, 찌질했지만,

고백은 참 멋이 없다.

영화나 드라마가 만들어낸 환상에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이 멋없고 허무한 나의 고백과 정성찬의 눈물이 죽는 순간까지 선명하게 기억날 것 같다.




6.

박원빈이 언젠가 날 사랑해줄 거란 일말의 확신이 있었다.

오래 함께할 사이니 언제까지고 기다리면 그게 내 눈에 보일 거라고.

선을 넘어버린 내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나에 대한 고문의 개념으로 더 꼬장꼬장하게 굴었지만, 결론적으로 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비상계단에서의 키스 이후로 별 관심도 없던 자위를 틈만 나면 했고 3일 주기로 박원빈과의 카톡을 훑어보는 게 습관이 됐다.

눈 앞에 두고도 지켜만 봐야 하는 이 좆같은 상황에서 탈피할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다.

언젠가 내가 다시 용기를 냈을 때 평생 나보고 발닦개나 하라고,

가끔 적선하듯 키스만 해준다고 해도 좋다고 헥헥댔을 거다.


그런데 연애를 안 해봤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박원빈은 나에게 고백한 날 이후 며칠 동안 내 앞에만 서면 뻣뻣하게 굳었다.

내가 이래서, 덤비지 좀 말길 바란건데.

난 여전히 이 소중한 박원빈을 다시 처음부터 사랑해주고 싶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데,

박원빈은 내게 무언갈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휩싸인 것 같았다.

애초에 단둘이 있을 기회도 소중해서 그런 곤란함을 느낄 일도 잘 없는데 내가 가까이 가기만 하면 분주해지는 꼴이 그동안 당한 걸 갚아주는 건가 싶기도 하고.

더군다나 우린 '사랑'을 해보기로 한지 아직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

말투부터 하는 행동 뭐 하나 달라진 게 없다.

고로 난 연말이 되기 전에 찾아올 휴가 기간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 원빈. 뭐해? "

" 아, 으...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형 나가!!! "


박원빈이 바보가 된 걸 결정적으로 깨달은 게 해외 스케줄을 끝낸 후 앙콘 준비 기간의 첫날이었다.

난 이제 다시 뜬금없이 박원빈 방문을 벌컥 여는 행위를 다시 할 수 있게 됐다.

멤버들도 무언가 어리둥절해 보이지만 다들 표정이 밝았다.

내 지독한 사랑 때문에 고생한 애들한텐 미안하지만,

난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박원빈을 만날 거고 피해서 신경 쓰이게 할거고 고백을 받아낼 거다.


수백번 추고 불렀던 곡들이라 연습 일정을 빡세지 않게 잡아놨다.

모두가 기다리고 고대하는 공연인지라 우리의 컨디션 조절이 더 중요했다.

다들 내가 있는 층으로 올라와 뭘 시켜 먹었는데, 박원빈 혼자 안 보이길래 직접 데리러 온 것 말고 난 잘못한 게 없다.

그냥 열린 방문 사이로 박원빈이 놀라서 집어던진 핸드폰 화면에 살색이 가득할 때 좀 당황했지만 그럴 수 있다, 해피타임.

아직은 어색한 남자친구- 비슷한 존재니까 예의 바르게 다시 자리를 피해주려 했다.

다만 다시 방문을 닫으려는 순간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 지극히 낮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


" 너... 지금... "

" 나가라고 했잖아............. "


박원빈은 영상을 끌 생각도 안 하고 핸드폰 앞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가서 영상을 꺼주고 앞에 마주 앉아 눈을 마주쳐도 멍때리는 동공에 힘이 없다.


" 혹시, "

" 형 그냥 제발 닥쳐요... "

" 아냐. 이런 건 얘기해야 돼. "

" 하... "


완전히 너갱이가 나간 박원빈이 처음으로 나한테 욕을 했다.

벌떡 일어나 제 머리채를 움켜쥐고 창문을 활짝 연 후 심호흡을 하는 원빈이 등에 대고 집요하게 물었다.


" 나 때문에 이런 거 억지로 보는 건 아니지? "

" ... "


솔직히 나라고 남자랑 해봤을 리가.

수많은 특별한 사랑을 하는 이들의 단골 멘트처럼 박원빈이 남자라서가 아니라 박원빈이라서 좋아하는 거라, 나도 꽤 많이 걱정되고 곤란한 상황이었다.

와중에도 밑은 발딱 설뻔했는데 아까 잠시 봤던 화면 속 게이들을 떠올렸더니 마법처럼 가라앉는다.


" 솔직히 말해줘. 나 벌써부터 이런 거 바라고 그러지 않는데... "

" 그래도... "

" 원빈아, 우리 우선 할거에만 집중하자. 휴가 받으면 그때 맛있는 것도 먹고 놀면 되잖아. "


응?

속사포로 내뱉으며 창문 앞에 망부석처럼 선 박원빈을 데리고 와 침대에 걸터앉혔다.

여전히 심란한 표정이다. 


" 이런 게 뭐가 중요해. "

" 내가... "

" 응응. "

" 형 아프게 하면 어떡해요... "

" 응? "


어? 그게 뭔 개소리야?

근데 이렇게 말했다간 원빈이가 울적해할 것 같아서 빠르게 캐치했다.

아 그래. 그렇구나.

박원빈은 나한테 박으려 하고 있었구나. 


" 원빈아, 있잖아- "

" 형은 날 이렇게 오래 좋아했고, 난 이제 내 마음을 알게 됐는데... "

" 원빈아, "

" 난 경험도 없는데 형 마음도 아프게 해놓고 몸도 아프게 하면 나 진짜 못 살아요. "

" 원빈아 원빈아. "

" 나는 형이랑 키스한 거 좋았어요... 나도 기분 좋게 해주고 싶었어. "


그래 그니까.

내가 너한테 키스를, 막, 벽에 밀어붙이고 했잖아?

...근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을 하지?

이 와중에 말을 늘어놓는 원빈이가 또 울컥하려는 게 보여서 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진심 손을 떨면서. 


" 근데 혹시 왜 나를 아프게 한다고 생각한 거야? "

" 응? 당연히 남자끼리 그걸 하면- "

" 아니 그니까. 원빈아, 이게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고 아프게를 당하는 사람이 있잖아. 그치? "


태어나 젤 병신같이 말했다.

고맙게도 알아들어 준 원빈이가 당연하다는 듯 반문했다.


" 형이 저보다 예쁘게 생겼잖아요. "

" ... "

" 그리고, 형은 나보다 잘 울고... 은근히 마음도 여리고. "

" 그게, 그, "

" 내 앞에서 오열한 것만 벌써 두 번이잖아. 팬콘때까지 하면 세 번. 낭,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는데 형 이제 남자 아니다, "

" 요즘에 그런 말을 누가 해 원빈아. "

" 장난친 건데... "


나름 농담이랍시고 웃으며 말했지만 난 원빈이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박원빈은 이미 포지션을 정해둔 후였다.

그래, 내가 혼자 박원빈을 예쁘다 공주다 칭하고 욕정하느라 잊고 있었다.

저속한 표현을 빌리자면 박원빈은 어디 가서 누구한테 박힐 인재는 아니었다.

장발을 많이했어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나보다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고 이미 인스타 트위터에서 떠돌고 있을 만큼 경상도 출신 남돌 리스트에 제일 많이 언급되는,

박원빈이 날 그렇게 본다고 자존심 상해 할 틈도 없다.


난 이 위기를 타파해야 한다. 지금 당장. 


" 나는 그런 건 좀... 편견이라고 봐. "

" 형 화났어요? "

"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

" ...근데, 저는... 상관없어요. "


생각보다 박원빈 표정이 무덤덤했다.

혼자 심장 쿵쾅대면서 돌파구를 찾던 내가 민망해질 정도였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이게 진짜 할 말이었다는 듯 다시 입을 뗀다.


" 그냥 나는, 그, 이런 거 자체에 적응할 시간이- "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진 원빈이가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 하며 우물쭈물댔다.


난 바로 탄식하며 웃음을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박원빈이 어디로 튈지 모를 어려운 애라는 걸 잊고 있었다.

고요하고 얌전하게 날 따라오다가도 갑자기 벼락 맞은 듯 일을 저지르는 박원빈 때문에 되려 내가 진땀을 뺀 적도 꽤 되니까.


생각해보면 박원빈은 늘 나를 초롱초롱하게 쳐다는 봤어도 무서워한 적은 없다.

위고 아래고 추잡한 것들이 얜 중요하지 않고 그저 여전히 능숙하게 굴고 싶은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난 순간 다 떠나서 얘와의 사랑이 너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놀라 올려다본 박원빈이 곧바로 눈을 짼다.


" 아 놀리는 게 아니라, "

" 하지 마요 진짜. "

" 그냥 너무 귀여워서. "

" 짜증 나. "

" 왜- 박원빈 화났어? "

" 무슨 사람이 손바닥 뒤집듯 바껴요? "

" 웅? "

" 맨날 귀엽다고 이렇게 굴 땐 언제고... "

" ...미안. "

" 형은 나한테 너무 어려워요. "


그리고 이상하게도 어설프지만 완벽하게 각자를 이해했던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어려워하고 있다.


나는 그냥 말없이 원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겹고도 뻔한 스킨십인 데도 이럴 때마다 목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도,

난 알고 있었다.

하릴없이 헛기침만 하는 애 두 볼을 살포시 잡고 물었다.


" 그냥 우리 연애하면 안돼? "

" ...안된다니까요. "

" 왜애. "

" 아, 진짜... "

" 완벽할 필요 없잖아. 우리 계속 그랬어. "


내 말에 박원빈의 눈꼬리가 순해졌다.

박원빈이 걱정하고 있는 게 뭔지도, 준비가 안되면 불안해하는 성격에 이 모든 일이 얼마나 크게 느껴질지도 알고 있지만,

어차피 시간문제인 일은 앞당길수록 좋은 거다.


" 겁나? "

" 음... "

" 나랑 틀어질까 봐? "

" 아니. 그런 건 걱정 안 돼요. "

" 그럼 왜. 왜 나랑 안 사겨주는데? "


칭얼거리며 옷자락을 잡고 입술까지 쭉 내밀어줬다.

괜히 박원빈 앞에서는 안 보여줬던 쉬운 내 모습.

어쩌면 세상 누구한테보다 귀엽게 굴어도 평생 날 무겁게 믿어줄 애한테만 내가 찌질해서 숨겼던 모습을 가감 없이 내비쳤다.


역시나 원빈이는 당황한 듯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쁘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잔뜩 쓰여진 박원빈만의 언어를 내 투박한 사랑에 집중하느라 지금껏 놓쳐왔던 걸 이제야 알았다.


" 그, 그럼 사겨. "

" 진짜? "

" 그거 표정 그만하면... "

" 응. "


더 하면 부담스러울까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미소 지어주니 안심한 듯 숨을 후- 내뱉는다.

박원빈의 표정이 투명한 건지 내가 그걸 하나하나 다 캐치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연애고 자시고 얘 이렇게 바보같이 구는 것부터 내가 챙겨줘야겠다.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울렸다.

난 전화를 받으며 원빈이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7.

앙콘을 준비하는 기간 내내 우린 말 그대로 역겹게 굴었다.

난 연습실에서 틈만 나면 박원빈 등 뒤에 찰싹 같이 달라붙었다.

넓은 어깨 위로 두 팔을 감고 윽 소리가 날 때까지 매달린 채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걸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상쾌한 성취감이 들어 신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난 어느 때보다 연습을 잘 해냈다.

팬들에게 누구보다 멋진 공연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박원빈은 이제 쉬는 시간마다 자연스레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몇 번 끌고 와 팔다리를 쫙 뻗은 채 품에 가둬놨더니 그새 손을 타서 이런다.

그러다가도 우린 비하인드 카메라가 켜지는 시간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무적으로 돌변했다.

가두지도 못할 마음 눌러가면서 벽을 치는 것보단 유치하기 짝이 없는 비밀연애를 해대는 게 역시 우리에겐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사실 우리의 관계나 사정을 멤버들에게 자세히 말해준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깊은 골이 해결되었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간지러워진 걸 보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그래도 애들은 못 본 꼴을 본 듯 혀를 차면서도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난 드디어 아무 문제 없이 행복할 수 있게 되었다.


다가온 공연을 박원빈과 함께 눈부시게 완성하고 싶어졌다.




8.

올해 큰 공연을 몇차례나 해본 건 맞지만, 앙콘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했다.

무덤덤하게 모든 걸 해내던 멤버들과 나와 박원빈 모두 극도의 긴장감과 설렘으로 말을 잃은 채였으니.

나는 저 위에서 들리는 함성소리를 겨우 잊으려 입술을 다물고 정신에 집중했다.

며칠간 박원빈으로 인해 들떠있던 마음을 지금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 형. "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박원빈이 씩 웃으며 날 보고 있었다.

두려움 가득하던 18살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웃을 줄도 모르고 잔뜩 긴장해서 굳어있던 박원빈은 이제 다 큰 어른처럼 여유롭게 미소 지을 줄도 안다.

얘가 이렇게 단단해지기까지의 시간 사이의 나의 공백을 난 이제 어떻게든 메꿔주고 싶다.

땅을 보며 심호흡하는데 박원빈이 내 손목을 슬쩍 잡아주었다.

갑작스러운 부드런 감촉에 놀라 고개를 들자 마주친 눈은 역시나...

별다른 말 없이도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박원빈은 나를 여전히 동경하고 여전히 아끼고 있으며, 사랑하고 있다.

주변이 분주해지며 스텝이 무언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함성이 무섭도록 커진다.


난 혹여나 날 잃기 싫은 박원빈이 애써 연극을 하고있는 건 아닐까 하던 일말의 걱정까지 벗어던지며 무대로 뛰어올랐다.




+++

앙콘에서의 박원빈은 고삐가 풀린 사람처럼 과감하게 굴었다.

괜히 양심에 찔려서인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을 팬들과 원빈이의 가족과 친구들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다시 몇 달 전처럼 고장 나듯 구는 걸 반복했다.


난 박원빈이 무대 위에서 쩌렁쩌렁 내 생일을 축하해줄 때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진짜 기절할 뻔 했다.

얘가 정말 미쳤나? 어떡하지?

멤버들 표정을 살피고 무대에 내려와선 매니저 형 표정을 살피고 콘서트가 끝나고 연락오는 지인들 메시지에 원빈이에 관한 내용이 있을까 봐 답지 않게 꼼꼼히 정독했다.

어떻게 시작한 사랑인데, 얼마 되지도 않아 현실의 벽에 틀어막혀서 또 박원빈이랑 내외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난 정말 은퇴할 거다.


하필 박원빈과 안대를 쓰고 게임을 할 때도 난 그저 무심코 허리에 손을 올려놨던 것 때문에 우리 사이가 들킬까 노심초사하느라 진땀을 뺐다.

반면에 박원빈은 나한테 박다가 다치게 하는 걸 걱정했던 상남자임을 증명하듯 설레게 굴었다.


실은 첫날 공연이 끝난 후 제 층에서 안 내리고 우리 숙소 방으로 들어오길래 다 같이 물음표를 띄웠었다.


" 나 형이랑 얘기 좀 할게요! "


끄덕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날 무작정 끌고 나오길래 내가 뭘 잘못했나 고심하는데,

삼겹살을 먹는 내내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무대에 대해서 떠들더라.

하긴. 내가 얠 버려두고 무시하는 동안 얼마나 나랑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그래서 난 또 병신처럼 훌찌락댔다.

구석 자리에 앉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눈물이 없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이렇게 틀면 나오는 수도꼭지처럼 우는 사람은 정말 아니다.

박원빈은 어느새 울고 있는 나를 보고 놀라 잠시 멈추더니 피식 웃었다.

난 그런 원빈이의 눈치를 보며 울적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 너한테 미안해서... "

" 에이, " 

" 내가 너무했어, 진짜로. "


콘서트의 여운이 섞여서 더 울음이 났던 것도 솔직히 맞긴 하다.

박원빈은 내 넓은 등을 토닥이며 다정히 바라보다가 잠시 주변 눈치를 보더니 기습적으로 내 볼에 입을 맞췄다.

난 무슨 밥 먹다 들킨 햄스터처럼 흠칫 튀어 올랐다.


" 노, 놀랐나. 미안해요. "

" 아니... "

" 형 우는 거 솔직히 너무, "

" ... "

" …예뻐요. "


박원빈의 옆목이 실시간으로 새빨개졌다.

시발. 박원빈은 내 우는 얼굴이 예뻐서 부끄러워하고 있다.

난 원래 틈이 나면 또 한 번 벽에 가둬두고 짙은 키스를 할 생각에 안달 내고 있었는데 이런 박원빈의 모습을 보자마자 수줍은 소녀로 돌변했다.


그 후로도 공연을 준비하다가, 토크를 하다가, 밥을 먹다가 고개를 돌리면 난 원빈이와 눈이 마주쳤다.

박원빈은 이제 무언갈 더욱 깨달은 사람처럼 나를 예뻐죽겠다는 눈빛으로 보곤 했다.

나한테 사랑을 알려달라고 할 땐 언제고,

지가 혼자 언제 저렇게 앞서가서는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저러는데?

...난 정말 자존심 상하지만 너무 설레고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 연애에서 내가 심장에 무리 안 오고 잘 버텨낼 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다고.




​                               

 

사실 마지막 공연 날 박원빈은 사운드체크 때부터 줄곧 불안해했다.

뭐가 이렇게 안 풀리냐는 궁시렁거리는 소리도 잘 안 하는 애가 혼잣말도 계속하고,

그래도 팬들이 주는 에너지는 엄청 위대해서.

결국 우린 다 함께 마지막까지 감동적인 순간을 공유했다.

오늘만큼은 사고뭉치 초보 애인으로서가 아니라 정말 같은 팀의 멤버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가진 아티스트로써, 모든 것을 멋있게 해냈다. 


각자 숙소에 드러누워 시간을 보내다가 난 또 박원빈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무언갈 고심하던 박원빈이 날 보더니 바로 반갑고 사랑스러운 표정을 한다.


" 뭐 보고 있었어? "

" 글 올린 거요. 이거, "


아까 전에 위버스에 앙콘 후기를 올리곤 팬들과 신나게 떠들더니, 제가 무슨 말실수를 한 건 없나 되짚어보고 있었나보다.

난 옆에 붙어 앉아 원빈이가 넘겨준 폰을 들고 조용히 정독했다.

멤버들 중에서도 유독 팬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원빈이만의 진심이 가득 담긴 문장들.

그 속에 나를 사로잡은 문구가 있었다.

하나 하나 투어를 돌아보니 걱정했던 것들이 나에게 기대감으로 바뀌고, 부담되었던 것들이 도전으로 바뀌더라고요.


난 마냥 귀여워하며 흐뭇하게 읽다가 그걸 보고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 원빈아. "

" 응? "

" 그때 그 인터뷰 있잖아, "

" 언제요? "

" 막 너... 걱정된다고 하던 거. "

" 아... "

" 그때 무슨 일 있었어? "


한창 내가 거리를 둘 때 잡지사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웬만해선 힘든 티를 안 내는 박원빈이 울적한 모습을 보이는 게 무지하게 신경 쓰였었다.

아마 이것 말고도 나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이 꽤 많겠지.

난 아직도 그 나날들을 생각하면 미안함이 앞선다.

혼자 생각에 잠겨있다가 돌아보니 또 그 무서운 표정이다.

사랑해 죽겠다는. 


" 아 박원빈 느끼해. "

" 뭐가요. "

" 자꾸 느끼하게 보잖아 나를. "

" ...그때도 형 때문이었어요. "

" ... "

" 형이 나 버, 버려서 속상해서 그런 거였다고. "

" ....미안해...... "

" 됐어요. 이미 지난 일인데 뭐. "


물어본 내가 병신이다.

난 내 무덤을 파놓고 수습할 생각도 못 한 채 또 입술을 쭉 내밀었다.

이젠 박원빈 앞에서 이런 개 같은 애교를 부리는 게 부끄럽지도 않다.

여전히 말이 없길래 슬금슬금 몸을 가까이하는데 원빈이가 또 입을 연다.


" 그리고 난 원래 이렇게 봤거든요. "

" 웅? "

" 난 원래 형 이렇게 봤다고오... "

" 에이. 아니거든. "


아니거든. 

...아닌가. 맞나?


난 지난날 나를 대하던 박원빈의 모든 모습들을 떠올려보았다.

조용히 올려다보던 눈은 지금의 표정과는 물리적으로 확연히 다르지만 그 안에 담긴 건 그리 다르지 않았었나.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웃을 생각도 못 하고 애를 내려다봤다.


" 형이 나 안 볼 때는, 더 그랬거든요. "

" ... "

" 내가 어떻게 하는지 아, 알려달라고 했지 안 한다고 했냐. "

" 박원빈... "

" 한 번도 형 안 사랑한 적 없었다고요. "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간의 서러움이 밀려온 듯 원빈이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정신없는 고백과 휘몰아치던 스케줄과 썸에 가까운 간질거림에 휩싸여 제 감정을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억울해 죽겠는 표정으로 인상까지 찌푸리며 우는 원빈이를 나는 안아주지도 못했다.

너무 미안해서.

다시 눈시울이 빨개진 나는 달콤하게 흘러가던 시간을 또 신파처럼 바꿔버린 내 방정맞은 입을 탓하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 형 진짜 미워요. "

" 원빈아 내가, 앞으로 진짜- "

" 내가 앞으로 잘해줄게요. "

" ... "

" 형이 이렇게 바보같이 의심 안 하게 다 보여줄 거야. "


심통난 목소리로 말을 잇던 원빈이가 내 품에 폭 안겼다.

난 모든 걸 이겨야만 하고 누가 봐도 멋져야 한다는 부담감에 휩싸여있던 사람이었다.

이젠 늘 조금씩 위태롭던 내 삶의 정착지를 찾은 기분이 든다.

와중에도 난 또 이 사랑을 이겼다. 역시 난 뭐든 해내는 놈이다.


앞으로도 내가 가끔 병신 짓을 하면 인내심 많은 원빈이는 그걸 기다려주겠지만,

그 시간이 헛되다는 생각조차 들 틈이 없을 만큼 퍼부어줄 거다.


내가 처음으로 두려워하고,

처음으로 미워하고,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박원빈은,


의심할 여지 없이 나의 마지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