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ART VIDEO AFTER

아주 멋진 신세계
by. 츠바사

암만 살고 싶어 발버둥 쳤다 해도, 이런 식으로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BX01-091342, 정성찬 씨. 여기 앉아주시고."

"네."

"아래 보시면. 계약서 보이시죠."

"네."

"읽어보시고 사인하시면 돼요."

"어... 그게 단가요?"

 

성찬이 고개를 들어 금발의 남성을 쳐다보았다. 둥글고 널따란 유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 맥스라는 남자는 무감하게 눈을 두어번 끔뻑거렸다. 뻑뻑하게 닫혔다 뜨이는 눈꺼풀 안으로 유리알 같이 투명하게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가 미동도 없이 성찬의 저의를 가늠한다.

 

"이게 다라는 게 무슨 뜻이죠?"

"저는 이대로 죽는 줄 알았는데요. 원형체가 죽고도 한참 아무 소식 없길래, 이대로 폐기하는 줄 알았습니다."

"네. 그리고?"

"제가 한 짓이요. 센터에서 나가려고 난동 피우느라 밥 먹듯이 감옥에 들어갔잖아요. 그런 내 성깔 보고 아주 정 떨어져서 멀리한 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날 부르는 이유가 뭐라던가요?"

 

맥스가 창백할 만큼 하얀 안면을 미세하게 구긴다. 앵글로색슨족의 외관이 투명할 만큼 그런 걸 왜 묻냐는 얼굴을 표한다. 

 

"세상에 대한 당신의 호전적인 태도는 이해합니다. 원형체 분과 공통적으로 조금 독특한 천성을 지닌 것도 이해하고. 하지만 성찬 씨는 어디까지나 복제체이자 제품이기 때문에 이 사안에 대해 깊이 알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계약서에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

 

아무 고저도 없이 대답을 늘어두는 태도에 성찬이 고개를 갸웃한다. 딱딱하기는. 시선을 테이블 위로 떨어트리니 유리 탁자의 일부가 불투명 해져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가 쓰인 계약서를 띄우고 있는 게 보였다. 서명란을 보기만 하고 이름 적길 망설이자 맥스가 덧붙여 말했다.

 

"거기에 이름을 적은 순간부터 당신은 제품이 아니라 원형 정성찬으로 살게 됩니다. 유명한 배우였던 건 아시죠? 그 분의 명예나 재산은 모두 당신 것이 됩니다."

"거절하면?"

"거절하면 명령 불복종으로 폐기됩니다."

"이거 순 협박이네."

"싫어요?"

"그냥 한번 해본 소리예요."

"..."

 

성찬이 서명란 위로 손을 올리다 말고 맥스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그가 장난스레 웃으며 밀당하듯 손을 거뒀다 말기를 반복한다. 맥스는 한숨을 푹 쉬고 팔짱을 끼었다. 그제야 성찬이 시원하게 서명을 갈겨 쓰고 두손을 모아 뒤통수에 갖다 댔다. 히히 웃는 그의 고운 얼굴 아래로 다 헤진 레저 재킷의 앞여밈이 시원하게 벌어져 속에 입은 검은 폴라티가 훤히 보였다. 네. 뭐. 잘 하셨어요. 맥스가 떨떠름하게 대답하곤 손을 까딱 움직여 계약서를 제 앞으로 오도록 드래그 한다. 

 

"앞으로 복제체 BX01-091342는 없어요. 배우 정성찬 씨의 영혼이 당신에게 들어갔다고 생각하세요. 앞으로 모든 언행은 원형 정성찬 씨에 맞춰 하셔야 해요."

 

품위 없는 태도 금지입니다. 그런 장난도. 헤픈 웃음도.. 성찬은 그런 경고보단 그의 입에서 나온 영혼이란 낯선 단어에 입꼬리가 경직됐다. 맥스는 제 앞으로 사진 한장을 불러오더니 매끈한 유리판 위로 미끄러지듯 손을 밀었다. 손바닥 만한 사진의 데이터가 유리 내부를 가로질러 성찬 앞을 향한다. 의자 등받이로 젖혔던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 사진을 들여다본다. 사진에 잘생기면서도 귀염성 가득한 남자의 얼굴이 박혀 있었다. 얜 누구? 질문하자 맥스가 곧바로 답한다. 정성찬 씨의 기존 배우자입니다. 

 

"지금부터 그를 만나러 갑니다."

 

성찬이 멈칫 놀라다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가 일어나 맥스에게 다가갔다. 맥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테이블에 펼쳐뒀던 데이터를 손바닥 안으로 흡수시켜 갈무리했다. 성찬은 둥근 테이블을 따라 호선으로 걸으며 에메랄드빛의 방 내부를 천천히 눈에 담는다. 지긋지긋한 복제 센터에서의 삶은 여기서 끝이었다. 그걸 기념해 최첨단 기술로 이루어진 감옥 같은 벽면과 문을 둘러보며 맥스의 등 뒤에 선다. 거기에 서자 과일 모양의 기업 로고가 시야에 들어온다. 색소 옅은 금발의 머리칼 아래로 목덜미에 박힌 그 로고가 메탈릭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와. 역시. 감탄한 성찬이 키가 190은 돼 보이는 맥스의 어깨를 팡팡 치며 깡마른 안드로이드의 몸이 정처 없이 팔랑거렸다.

 

"신제품 비서 안드로이드 맥스, 맞지? 성능 좋네."

"저 출시된 지 5년은 지났는데.."

"가자, 맥스! 어디로 가면 돼?"

 

눈을 반달로 접으며 호쾌하게 웃은 성찬이 문 쪽을 향해 앞서 걸었다. 맥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성찬 씨 짐부터 챙겨야죠."

 

 

 

아주 멋진 신세계
The island in the sky

 

 

 

I.

복제센터가 위치한 인공섬 세아도(世娥島)를 빠져나가는 절차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트렁크 두 개를 채 꽉 채우지 못하는 짐을 들고 몇몇 사람만 통과하니, 바다를 가로지를 항공기 탑승장까지 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에게 빌린 신분과 권리만 있어도 이리도 쉽다니. 성찬은 이 바다 하나를 건너기 위해 고군분투한 지난 몇 년을 씁쓸하게 떠올렸다. 섬을 오가는 교통수단을 몰래 타려 해도, 뗏목을 만들어 빠져나가려 해도, 하물며 무작정 물속에 빠져들어도 번번이 탈출에 실패한 순간들이었다. 그에 반해 맥스에게 에스코트 되는 지금은 너무도 평화롭다. 그저 두 발로 걸어서 햇살이 내리쬐는 해안가로 나가 준비된 항공기에 다가가면 그만이었다. 

 

성찬은 척 봐도 값이 나가 보이는 개인 항공기를 타기 직전 어깨를 한번 털었다. 여기서 살다가 장기가 털려 죽거나 폐기되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느낀 공포감을 잿더미처럼 잊을 작정이었다. 솔직히 저와 똑같은 얼굴, 같은 이름의 원형 인간 정성찬이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소식을 2년 전에 접했을 때 안타깝기는 했으나.. 내 코가 석 자라서. 성찬은 제 장기 한번 털어간 적 없는 그 사내에게 짧게 묵념만 하고 곧바로 이 기회를 또 다른 기회로 만들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돈을 챙기고 다른 나라로 튀어버릴까.

 

"죄송하지만 너무 표정에 다 드러나시네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아무 생각 안 했어..."

 

맥스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성찬이 딴청을 부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이 붕 떠오른 캡슐형 수직 이착륙기 노바(NOVA)는 어느새 바다를 가로지르며 비행하고 있었다.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허공을 나르는 동안 면적이 약 300 제곱킬로미터인 인공섬은 멀어져가고 푸른 바다의 표면이 창밖을 한가득 채웠다. 이토록 광활한 바다를 상공에서 본적 없던 성찬은 허락도 없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파도가 부서지는 장면을 구경했다. 짠내 나는 칼바람에도 꿋꿋이 괭이갈매기를 향해 손을 뻗어보았다. 한참을 날아 육지 위를 날기 시작할 때쯤엔 산과 들, 그리고 빌딩 숲을 지나며 아까보다 더 턱을 떨어뜨렸다. 

 

와, 맥스. 이건 뭐야. 

 

성찬이 빙그르르 떨어지는 노란 잎을 손으로 낚아채며 물으니 맥스가 마주 보는 자리에서 딱딱하게 대답한다. 가을이 되면 황금색으로 물드는 부채꼴 모양의 은행나무 잎입니다. 설명을 들은 성찬의 눈은 인형 같이 동그래졌고 곧 그의 재킷 주머니로 은행잎 열 잎 정도가 담겼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노바에서 내릴 때까지도 그의 고개는 낯선 풍경을 눈에 담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정신을 쏙 빼놓으니 하루아침에 생긴 남편에 대해선 생각할 틈이 없었는데.

 

"..왜 이리 엉망이죠."

 

아. 성찬은 사진으로만 잠깐 보았던 남자를 만나자마자 얼어버렸다. 평수와 층수가 가늠이 되지 않는 저택에 들어와 맞닥뜨린 만남이었다. 동해에서부터 내륙까지 몇시간을 내리 창문을 연 채로 세상을 즐기느라 자유분방해진 갈색의 머리칼. 소금기가 묻은 피부. 흐트러진 옷매무새나 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정체 모를 노란 은행잎까지 성찬의 상태는 가다듬어진 구석이 하나 없었다. 심지어 기다란 사무용 책상에 앉아 이쪽을 건너다보며 눈치를 주듯 묻는 고양이 같은 남성의 말에도 표정이 멍하다. 방으로 뒤따라 들어온 맥스는 그런 성찬을 흘끔대며 트렁크 가방 두 개를 풀썩 내려놓았다. 성찬은 거기서 피어오르는 흙먼지에 기침하며 겨우 정신 차렸다. 저 너무 예쁘고 잘생긴 남자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사고가 정지되자 정적 속에서 맥스가 대신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짐부터 정리하고 용모단정하게 해드려. 저녁에 어머님이랑 식사하기로 했으니까."

"네."

"잠시만. 성찬 씨는 인사부터 한 후에 보낼게."

"네.."

 

보기보다 맷집이 좋은 맥스가 힘든 기색 없이 짐 가방을 번쩍 들고 도로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단둘이 남겨진 방안에 적막이 감돌았다. 성찬은 머쓱한 얼굴로 재킷을 고쳐 입고 빗어지지도 않는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통창을 등져 앉아 있는 남자는 천천히 일어나 성찬을 향해 걸어왔다. 다가올수록 차이 나는 키 때문에 시선이 점차 아래로 떨어진 성찬은 지척에서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A사의 야심작 맥스도 허술한 면이 있네. 그렇게나 실물을 담지 못한 사진을 보여줬다니. 눈앞에 마주 선 남자는 세아도 밖을 나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아름다운 외관을 하고 있었다. 이게 사람인지 밀랍 인형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성찬은 새카만 머리칼 아래로 오밀조밀하게 꽉 들어찬 남자의 이목구비가 가만 저를 향해 있자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머리칼 만큼이나 새카만 눈동자가 관찰하듯 샅샅이 살펴왔다. 압도되어 못 견디겠다 싶을 때쯤에서야 남자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아녜요. 우수한 비서 덕에 편히.."

"제 비서가 저에 대해 말은 하던가요?"

"그... 배우자 분이라고만."

 

성찬이 맞잡은 손을 흔들며 말끝을 흐렸다. 남자의 차가운 손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마주 보는 표정은 놀라울 만큼 평온했음에도 그게 어떤 감정을 내비친다 생각한 성찬이 침을 삼켰다.

 

"남편 일은 유감입니다."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그쪽이 오셨으니까 됐습니다."

"..."

 

남자가 손을 거두어 가는 동안 성찬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남자는 속눈썹이 빽빽한 눈을 감았다 뜨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부터 차차 아시게 되겠지만, 이곳 분위기에 적응하셔야 할 거예요."

"분위기라면 어떤.."

"제 남편이 생전에 유명한 분이었다고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2년의 공백이 있다지만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반길 겁니다. 대중도. 친지와 가족도. 오늘 저녁에 보게 될 남편 어머니도."

"저, 혹시 사망 소식은 모르는 건가요."

"사망."

 

남자가 성찬의 눈을 들여다보며 단어를 따라 중얼거렸다. 성찬은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 같아 다음 말이 나올 때까지 숨을 편히 쉬지 못했다. 남자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기계처럼 대답했다. 맥스가. 설명을 안 했나 보네요.

 

"원형이 죽어도 복제체가 살아있으면 사망으로 치지 않습니다. 정책이 그래요."

"..."

"정책 뿐만이 아니라 여기 사람들은 육신을 빠져나간 영혼이 다른 그릇에 들어간다 생각해요. 그쪽 몸에 정성찬 씨 영혼이 살아 숨 쉬는 거죠. 다들 그렇게 믿는 편이라 주의하셨으면 좋겠는데."

 

남자의 말에 섬뜩해진 성찬이 곧바로 맥스의 말을 떠올렸다. '배우 정성찬 씨의 영혼이 당신에게 들어갔다고 생각하세요.' 그 말이 그런 뜻이었구나. 건네받은 계약서를 자세히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런 부분에서 제대로 따르지 않으면 곧바로 폐기 행이 될 것임을 직감한 성찬이 최대한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아, 이해했습니다. 주의할게요."

"좋아요."

"그럼 제가 그쪽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성찬 씨는 저를 여보, 당신, 아니면 '원빈아'라고 불렀어요. 소개가 늦었는데 제 이름은 박원빈입니다."

"박원빈.."

"네. 그렇게 불러주시면 돼요."

 

원빈. 그가 오로지 사무적인 태도로만 대하듯 간결하게 말하고 성찬을 따라 웃어 보였다. 그 미소를 의아하게 바라본 성찬은 훔쳐보듯 그의 옷차림을 살폈다. 마른 체형의 원빈은 본인의 집안에서도 빳빳하게 풀을 먹인 셔츠를 입고 있었다. 자세도 전혀 흐트러짐 없이 꼿꼿했다. 이 갑갑함은 뭐지. 원빈이라는 남자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밟고 서 있는 대리석 바닥 만큼이나 차갑다고 느껴졌다. 

 

"그럼 맥스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드릴게요."

 

그래서 원빈이 문을 향해 돌아선 순간 성찬이 그의 목덜미를 내려다보았다. 혹시나 했는데 안드로이드 제조 기업의 로고 같은 건 박혀있지 않았다. 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니 소매 아래로 달달 떠는 손끝이 보인다. 아. 그걸 본 성찬은 그제야 원빈의 태도가 어딘가 일반적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상하리 만치 어떤 감정을 내색하고 있지 않았다.

 

*

 

성찬이 오후 동안 때 빼고 광내며 진절머리를 냈다. 자그마치 다섯개의 안드로이드가 제게 달라붙어 있었다. 비서 맥스. 그게 하나여도 비쌀 텐데 똑같이 생긴 놈이 다섯이나 더 있었다. 오늘 본 '맥스'만 총 여섯명이라니. 성찬은 이 집안엔 돈이 썩어 넘치나 보다 생각하며 제 몸을 닦아주고 옷도 입혀주는 안드로이드를 어색하게 쳐다보았다. 그들을 보며 어색한 분위기라도 풀기 위해 이 집에 대해 궁금한 걸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팔을 걷어붙인 맥스들은 지금 '집안일 모드' 중이니 말 걸지 말라며 하던 일을 계속하기나 했다. 성찬은 귀찮은 표정을 하고도 제 말에 잘 대답해주는 맥스가 삽시간에 그리워졌다. 

 

"맥스 1호. 박원빈에 대해 알려줘."

"1호?"

 

때문에 고급스러운 셔츠와 세미 정장 바지를 갖춰 입고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복도로 지나서는 맥스를 붙잡았다. 성찬은 원빈의 전담 비서로 보이는 맥스를 여러 똑같은 안드로이드 중에서도 1호라고 불렀다. 별안간 누군가의 1호가 된 인간형 로봇은 고개를 갸웃대다가 성찬을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았다. 맥스는 모공 하나 없는 안면으로 흥미롭다는 듯이 살풋 웃어 보였다. 

 

"여기 올 때만 해도 딴 생각 하느라 붕 떠 보였었는데 갑자기 얌전해지셨네요."

 

혹시 반하신 건가. 원빈 님한테.. 작게 들려오는 말에 성찬은 헛기침하며 허공으로 눈을 굴렸다. 열심히 딴청 하며 거울을 보는 척 하지만 귀 끝은 붉어져 있었다. 아니, 알려달라니까.. 알아야 내가 걔 남편 역할을 해주지. 대답을 종용하자 맥스는 줄에 연결된 인형이 움직이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맥스가 알려드릴게요. 그는 언젠가 성찬이 세아도에서 몰래 접한 광고 영상에서 그런 것처럼 정해진 멘트를 뱉어냈다.

 

그리하여 알려준 원빈에 대한 정보를 요약하자면, 이름 박원빈. 출생 연도 2101년. 어릴 때부터 피아니스트 영재였으나 현재는 개인 사정으로 피아노를 치지 않음. 정성찬과는 어릴 때부터 약혼 관계였으며 20대 초에 식을 올려 부부관계가 됨. 뭐.. 이게 전부? 듣던 성찬은 정보 하나하나를 곱씹다 의문이 드는 부분에서 떠보듯 질문한다. 어릴 때부터 약혼 관계였으면 남편이랑 서로 많이 좋아했어? 오늘 보니까 그래 보이진 않길래. 그 낮춰 묻는 말엔 맥스는 미간을 확 찌푸려버린다. 

 

"그, 말씀을 조심하셔야... 원빈 님은 남편을 매우 사랑하시는 분이었어요."

 

창백한 손이 성찬의 등을 밀어버렸다. 됐으니까 이제 식사하러 가세요. 어머님 오셨답니다. 그 묵직하게 미는 힘에 성찬의 몸이 드레스룸에서 복도를 지나 1층을 향하는 나선형 계단 난간으로까지 죽 밀렸다. 성찬은 알겠다며 손사래를 치고 구둣발을 내디뎌 한칸 한칸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1층을 향하는 동안 옷매무새를 여러 번 매만졌다. 그리고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개방형 구조의 응접실에 들어섰을 땐

 

"어머, 우리 아들.. 성찬이.. 이걸 정말 어떡하니."

 

성찬의 몸이 얼어붙었다. 한눈에도 원형 정성찬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끌어안았다. 그 중년 여성의 목에 달린 꽃 모양 브로치가 찌그러지도록 세게 결박 당했다. 수 분간 여자의 눈물이 이어지고 성찬이 난처한 기분을 느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냐는 의미로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이쪽을 바라보던 원빈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발견한 건 마냥 완벽하고 빈틈없을 줄 알았던 눈빛이 찰나 동안 허물어지는 모습. 아. 그걸 발견했다 싶을 쯤엔 원빈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버려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성찬은 숨을 삼키며 '어머니'라는 여자의 어깨를 잡고 달래듯이 말했다. 울지마세요.. 진짜 아들이 아닌 성찬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란 그뿐이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성찬은 다이닝룸에 들어가 식탁에 앉으면서도 원빈에게 신경이 쏠렸다. 적어도 12인용은 되는 대리석 식탁에 앉아 누가 다 먹겠나 싶은 호화로운 요리를 앞에 두고 그의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갔다. 옆자리에 앉은 원빈은 맞은 편에 앉은 제 시어머니를 슬쩍 보다 말고 몸을 기울여와 속삭였다. 성찬 씨. 어머님이랑 이야기는 제가 잘.. 알아서 할게요. 대신 어머님 앞이니까 저한테 말 편하게 해주세요. 뭔진 잘 몰라도 간지러워지는 귀에 성찬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식탁에 오른 그의 손이 갖가지 포크와 나이프 사이에서 헛돌자 맞은 편 여자의 눈이 굴러오기 전에 원빈이 재빠르게 대화 주제를 꺼냈다. 

 

나이라 해봤자 성찬과 같은 스물다섯에 불과한 원빈은 대화를 막힘 없이 이끌고 나갔다. 꺼낸 이야기란 정씨 집안의 제약회사 얘기였는데, 아무리 복제센터에서 갇혀 살았다지만 눈치껏 그들 집안끼리 금전적으로 얽힌 관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중년 여자는 언제 서럽게 눈물을 흘렸냐는 것처럼 냉철해진 표정으로 그릇에 담긴 스테이크를 썰어갔다. 아들이 돌아와서 기뻤던 게 맞긴 한 건가. 그저 아들이 죽고 2년 간의 공백이 생겼던 건 잠깐의 헤프닝이었다는 듯 그녀는 별 그늘도 없는 모습으로 원빈과 평범하게 대화를 나눴다. 성찬은 원빈을 몰래 훔쳐보며 생각했다. 원형 인류의 삶이란 본래 이런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원형 정성찬은 어떤 사람이었던 건지. 도대체 왜 죽었는 지. 또 왜 죽어서도 이 사람의 삶이 뭐길래 내가 연극을 하며 이어가 주어야 하는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왜 박원빈 얘는 세상 완벽해 보이고 차가워 보이는 얼굴로 나를 대하면서도 손을 떨고.. 그토록 허물어지는 눈빛을 보였던 걸까. 사실 성찬은 세아도에서 살 때, 자신을 지배하는 원형 인류에 대해 어떠한 관심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저 세상엔 자기 잇속을 챙기는 사람이 저렇게나 많구나 했지. 나 같은 놈을 만들어 놓더니 물건 취급하고. 부유하고. 때깔 좋고. 사는 데 걱정 없고.

 

그런데 찰나 동안 본 원빈의 눈빛은 썩어 넘치는 재력, 복제체쯤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기엔 어쩐지

 

자신처럼 난처해 보였다.

 

원빈 님은 남편을 매우 사랑하시는 분이었어요.

 

굳이 알 필요 있나 했는데. 배우 정성찬이 대체 뭐 어떤 존재였나 궁금하게 만드네. 성찬은 식사를 코로 하는 지 입으로 하는 지 모르게 시간을 보냈다. 가끔 여자가 말을 걸어오면 만들어진 미소를 보였다. 당신이 날 복제센터에서 태어나도록 만든 사람이냐는 말을 꾹 삼키며 생각 없는 인형처럼 짧은 대답도 했다. 중간에 원빈이 그렇죠, 여보? 하고 말을 걸면 움찔 놀라며 응, 뭐.. 그렇지 하며 받아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참으로 기묘한 연극 놀이가 아닐 수 없었다.

 

여자를 돌려보낸 후엔 속이 얹힌 기분으로 쉬는 시간을 가졌다. 맥스는 성찬을 2층에 위치한 넓은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따로 테라스도 있고 책장과 카우치도 있는 방이다. 무슨 짓을 해도 흠집 하나 날 것 같지 않은 단단한 카우치는 길이가 상당히 길어서 마구잡이로 누워도 여유가 한참 남았다. 그 위에 널브러져 누워 반대편을 바라본 성찬은 한숨을 푹 쉬며 여기는 또 뭐길래 이리도 공허해 보이는 공간인가 헤아려보았다. 그러다 카우치의 맞은 편에 있는 벽이 사실은 연락 수단이자 홀로그램 장치인 아이리스(eye-ris)임을 깨닫고 벌떡 일어난다. 언젠가 교도소의 소장 방에서 어깨너머로 접한 적 있는 문명의 이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브랜드 이름을 불러 전원을 켜고는 양손을 허공에 까닥이며 조종해갔다. 맥스.. 이 친구 나 심심하지 말라고 여기에 넣어놨구나. 웃음이 실실 새는 성찬은 메뉴를 둘러보다가 각종 시청각 자료를 찾아볼 수 있는 포털에 접속했다. 그 후 몇시간이 지나도록 영상 몇십개를 내리 보게 되는데.

 

처음엔 저도 신기했으니 이쪽 세계의 뉴스나 예능, 개인 콘텐츠 등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점차 홀린 듯이 박원빈, 피아니스트 박원빈, 영재 박원빈 등을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검색하니 10년 전 영상도 그냥 나와 어려움 없이 원빈의 어릴 적 모습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었다. 성찬은 카우치에 걸터앉아 아이리스가 허공에 빛을 쏴 보여주는 입체적인 홀로그램 영상을 눈에 담았다. 영재라.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성찬은 피아노 앞에 앉아 클래식 곡을 연주하는 원빈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알게 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사람이라지만 정말 낯선 모습. 지금보다 훨씬 앳된 얼굴을 한 원빈은 미간에 힘을 주었다 말기를 반복하며 손끝으로 유려한 선율을 만들었다. 손을 뻗으면 만져질 거 같지만 절대 그 누구도 흐트러지게 만들 수 없을 듯한 완전무결한 홀로그램 영상이 몇십분간 지속된다. 

 

사람맞아? 외계인 같은데.. 

 

쉴틈 없이 영상을 넘겨보던 성찬은 어느새 최신 영상까지 다 봐버린다. 날짜를 보니 8년 전이 가장 최신 영상이었다. 그만뒀다더니 정말 옛날에 그만뒀네. 머리를 긁적인 성찬은 이번엔 배우 정성찬을 검색해본다. 그는 아역 시절부터 뜨는 영상 목록을 훑어보다가 재생해보지도 않고 나가버렸다. 여기에 오기 전에도 배우 정성찬을 입에 올려 기분 나쁜 농담을 건네는 사람들을 몇몇 보았었다. 귀담아들은 적은 없지만 모두 신경을 긁으며 비교하는 말들이었다.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비교당할 만큼 원형체는 평판이 좋은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성실하고. 착하고. 밝고. 능력 좋고... 같은 유전자를 지녔지만 원형체는 빛이고 복제체인 성찬은 그림자라고 알려주듯. 아무리 그 사실을 받아들여 순응한 적 없다고 해도, 남들은 그렇게 둘을 바라보았다.

 

역시 뭔가 내키지 않는다. 성찬은 뒤로 가기를 선택해 메뉴로 돌아가고선 다른 기능을 살폈다. 그리고 뭘 선택해야 할지 몰라 가만 바라보다가 코가 간질이는 느낌에 에취, 크게 재채기를 해버렸다. 상체를 수그려 코를 훌쩍인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앞을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뭐가 우연히 선택된 건지 날짜가 적힌 파일 목록들이 좌르륵 떠 있었다. 이게 뭐야. 녹화 같은 건가? 눈을 깜빡거린 성찬은 손가락을 허공에 휘적여가며 목록을 스크롤 해 아무거나 선택한다. 선택된 건 3년 전쯤의 날짜로 기록된 하나의 파일이었다.

 

"어......"

 

그러더니 아이리스 장치의 불빛이 확 꺼지고, 방 한가운데에 인영이 떴다. 너울거리는 인영이 점진적으로 구체적인 형상이 되어갔다. 그 믿을 수 없이 생경한 홀로그램에 성찬이 입을 벌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인가? 

 

그는 다리를 움직여 수트를 입은 남자의 형상에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속눈썹 하나까지 섬세하게 구현된 남자가 보여 성찬의 숨이 턱 막혔다. 발바닥부터 척추를 지나 머리끝까지 소름이 지나갔다. 살갗에 난 솜털이 모두 쭈뼛 선다. 성찬은 뻣뻣해진 팔을 겨우 움직여 눈앞에 보이는 남자에게로 뻗었다. 남자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찬의 존재도 모르고 우아한 미소를 앞을 향해 지어 보였다.

 

— 국민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의 복제인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잠깐..."

 

— 이제 당신의 또 다른 목숨이 되어줄 존재, 필요할 때 함께하고 원하는 순간에 당신을 대신할 복제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야."

 

— 삶의 한계를 넘어서, 모두가 꿈꿔온 신세계가 펼쳐집니다.

 

이것이 바로 멋진 신세계, 우리의 미래를 위한 혁신입니다. 

 

 

"......"

 

 

또렷한 발성으로 홍보대사 멘트를 뱉은 배우 정성찬이 입을 다물고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성찬은 잡히지도 않은 그 얼굴에 손을 뻗어놓고 넋을 잃었다. 자신과 똑같이 커다란 키. 도자기 인형처럼 희고 매끈한 피부. 사슴 같이 예쁜 눈. 흠 없이 빚은 듯한 코와 입. 넓은 어깨. 근육이 잘 잡힌 자태까지. 거울 보듯 똑같은 원형체의 모습을 가까이 마주하자 성찬의 심장이 쿵쿵 뛰다 못해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것이 나의 원형체. 나를 지구상 유일무이한 존재로 있을 수 없게 한 사람. 나를 태어나게 했지만, 끊임없이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원형 인류들 중의 하나.

 

그런 네가 이런 걸 홍보했어? 이렇게 악의 하나 없어 보이는 얼굴로?

 

— 나 어땠어?

"...!"

 

성찬이 화들짝 놀라 어깨를 접어들었다. 차원을 건너 현실에 있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줄 알았더니 홀로그램이 바라보는 쪽은 성찬의 등 뒤였다. 누구에게 말을 거는 거야. 으스스한 기분에 뒤로 돌아 허공을 살핀 성찬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다시 몸을 돌려오려고 했다. 그러다 발끝부터 만들어진 형상이 빈 허공에 뜨여 시선이 붙들린다. 그곳으로 뿌연 빛이 모여들더니, 이내 큰 보폭으로 다가오는 남자의 홀로그램으로 바뀌었다.

 

— ...괜찮은데요? 잘 하셨어요.

— 정말? 나 괜찮았어?

— 네, 헤헤.. 근데 여기 머리는 좀 정리해야겠다.

 

박원빈. 그것도 3년 전의 박원빈이 팔을 뻗어 다가오느라 성찬이 뒤로 물러서다 발을 헛디뎠다. 넘어질 뻔한 성찬은 뒤에 있던 원형체 정성찬의 홀로그램과 잠시 몸이 겹친다.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고 중심을 바로 잡고 선 성찬이 크게 뜨인 눈으로 두 뼘 간격으로 다가온 원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 피부 결. 속눈썹. 그 아래에 담긴 안광까지 슬로우모션으로 눈에 들어온다. 심장이 조금 철렁 내려앉은 성찬은 종일 본적 없던 원빈의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아니. 입꼬리를 올린 적은 있긴 한데. 이렇게 예쁘고 자연스럽게 웃은 적은 없었어. 눈까지 접은 적이 없었다고.. 성찬은 목울대가 움직이도록 침을 넘기고는 더 고개를 들이밀어 그 모습을 관찰한다. 호기심으로 만들어진 집요함으로 제 남편을 바라보는 원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사랑하나. 사랑하는 눈빛인가. 그걸 보는 동안 깊은 호수 같은 원빈의 눈이 이상하게 조금 흔들려 보이기도 했다.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와중에도 두 명의 홀로그램 형상은 서로를 바라보느라 가만히 서 있었다. 속삭이는 듯한 몇 마디가 오가는데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성찬은 불청객이 된 기분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내렸다. 그를 축 처지게 만드는 좋지 않은 기분이었다.

 

똑똑똑. 성찬 씨.

 

그때 문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틀림 없이 원빈의 목소리였다. 성찬은 다급하게 아이리스의 본체로 달려가 잔뜩 낮춘 목소리로 종료, 종료! 하고 반복해 말했다. 그에 따라 아이리스의 전원이 꺼지며 모든 건 헛것이었다는 듯 홀로그램이 사라지게 됐다. 가슴을 쓸어내린 성찬이 제 머리를 정리하며 소리 났던 쪽으로 다가가 방문을 열어주었다. 스르륵 열린 문밖으로는 어느새 백색의 실크 파자마로 환복한 원빈이 보였다. 그가 바둑알 같은 눈으로 빤히 올려다보자 성찬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며 용건을 물었다.

 

"네, 왜요?"

"아 그게.. 안 주무시나요? 피곤하실 거 같아서."

"자야죠. 자려고요. 어디서 자면 되나요?"

"음.."

 

원빈이 생각하려 입을 다무는 동안 성찬의 눈동자가 가만있질 못했다. 안 그러려 해도 얄쌍한 턱과 그 밑으로 몸 선을 따라 드레이핑 지며 떨어지는 잠옷을 이리저리 보게 됐다. 설마 이제 내가 남편이면 옆에서 자야 하나. 웃기지도 않는 생각을 떠올리는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원빈이 뜸을 들이다 말한다.

 

"안 그래도 저희 어머니나.. 오늘 뵌 어머님이나.. 성찬 씨 오시면 저희끼리 같은 방에서 자길 바라셔서요. 별 건 아니고, 부부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셔서."

"..."

"각방 쓰는 모습을 못 견뎌 하세요. 혹시 괜찮을까요."

"그러라면 그래야죠. 분위기에 맞춰가야 하는데.."

"아... 그러면 감사하죠."

 

성찬의 흔쾌한 대답에 원빈이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잘 준비 되시면.. 잠옷 드릴 테니 갈아입고 침실에 오시면 돼요. 그는 간결하게 일러주고 자리를 떴다. 성찬은 조금 진땀 나는 기분에 손으로 얼굴을 재차 문질렀다.

 

별 일 없겠지?..

 

이후 침실에 들어섰을 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성찬과 달리 원빈은 그런 모습이 전혀 없었다. 성찬이 방에 들어가 킹사이즈의 침대를 볼 때만 해도 파자마 소매 아래로 손이 말아쥐어질 만큼 제 몸이 제 몸 같지가 않았는데, 원빈은 짧은 인사만 하고 침대 끄트머리에 누워버렸다. 하얗고 보드라운 이불도 제 머리 끝까지 올려버린다. 그러니까, 성찬이 다가가 얼굴을 보기도 전에 잠을 청하기 시작한 거다. 뭐. 계약서 서명부터 바다 건너 이 저택에 들어와 상상도 못한 세상을 접한 성찬도 피곤했지만. 성찬만 피곤하리란 법은 없으니까. 그래서 이해는 하는데.

성찬은 머뭇거리며 침대에 올라서고는 원빈 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도 끝 쪽에 누워있느라 그들 사이의 여백이 컸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그 공간이 눈에 띄어 성찬이 머쓱한 기분을 느낀다. 먼저 와달라 해서 와준 건데 괜히 제 쪽이 못 할 짓 하러 온 사람 같았다. 거기에 머리칼을 두어번 쓸어 넘기고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원빈이 차지한 자리보다 두배는 되는 공간을 쓰며 편히 누워버렸다. 아주 풀썩하고. 와아. 눕는 순간 우습게도 황홀경 같은 감탄이 머릿속에서 터졌다.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침대가 최소 몇억짜리 같이 느껴질 정도로 엄청나게 푹신했다. 흡사 구름 위에 누운 감각에 눈을 감은 성찬은 긍정 모드를 취하려 했다. 아주 긍정적인 사람이 된 듯, 하루아침에 변한 제 인생을 내일은 좀 더 능숙하게 다뤄보자고 다짐하며 잠을 청한다. 양 하나. 양 둘. 그렇게 조금 선잠이 들겠다 싶은 타이밍이 되고. 이불을 끌어올려 미동 없이 누워있던 원빈은 꼼지락대며 이불을 내리더니, 마치 성찬이 아직 잠들지 않았단 사실을 다 안다는 듯 조심히 입을 열었다.

 

"성찬 씨.."

 

성찬이 움찔 놀라며 눈부터 떴다. 자동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두운 시야 속에서 흐릿한 원빈의 뒤통수가 보였다.

 

"죄송합니다.."

"..네?"

"그냥. 좀 고생시키는 거 같아서."

 

원빈이 웅얼대며 들릴 듯 말듯 말했다. 성찬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원빈은 원형체가 죽으면 복제체에게 영혼이 간다고 믿는 미치광이들의 믿음을 직접 소개해줬으면서.. 정작 성찬을 절대 그렇게 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성찬을 죽은 남편과 아주 별개의 존재로 보고 있었다. 그걸 알고는 있었지만. 기분이 이상하다. 묘하다. 그의 목소리가 꿈결 같으면서도 위태롭게 들렸다.

 

"아닙니다.. 저 여기 올 때 돈 들고 튀어서 새 삶 사는 상상 했었는데요. 이렇게 머릿속이 멋대로인데. 고생은요.."

"아..."

 

그래서 그런가. 성찬은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까놓고 틀린 말도 아니고. 그냥 죄송하단 소리를 듣기엔 자기도 지금 여기로 온 게 살아남기 위한 길이라서. 물론 뱉어놓고 오바했다 싶어 아차 싶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너무 미안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원빈은 그냥 사실만을 알려주는 안드로이드처럼 별 동요 없이 받아쳤다.

 

"그런 생각 해봤자 쉽지 않아요. 저 말고도 누군가가 신고하면 바로 경찰 따라붙어요. 복제체 제작 비용만 40억이라. 잡으면 포상이 10억은 해요."

"..."

"성찬 씨 얼굴도 너무 알려져 있어서 도망치기가 정말 어려워요. 가업도 유명하고, 저희 부부끼리도 묶여서 세간에서 많이 주목해요. 곧 기자들이 진 치러 올 수도..."

"알겠, 알겠어요. 도망 안 칩니다. 도망치려다 되려 죽겠네요. 농담이었어요."

"농담 아닌 거 알아요. 아무튼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뭐, 네.."

"..."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나 고생하는 것도 맞고 불쌍한 것도 맞긴 하지. 성찬은 조곤조곤 현실을 알려주는 원빈의 말에 또 섬뜩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할 말이 없어졌다. 사위가 정적에 휩싸이고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성찬은 다시 잠을 청하려다가 못내 신경이 쓰여 실눈을 뜨고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냥 죄송하단 말만 하려고 입을 열었던 건가. 남편의 복제체에게 할 말이란 게 그것뿐..

 

"궁금한 게 있어요."

 

갑자기 성찬의 생각을 잘라먹듯 원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덜컥 놀란 성찬은 실눈으로 뜨던 눈을 크게 떴다.

 

"뭔데요."

"혹시 '노바리아'라고 아세요?"

"노바리아요?"

 

뜬끔 없이 질문한다 싶었더니 그게 뭐지. 성찬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에 눈동자를 둥글게 굴렸다. 

 

"글쎄요.. 처음 듣는데."

"소문이라던가.. 들어본 적 없어요?"

"소문이라 해봤자. 저는 여기 온 지 하루 됐는데.."

"..."

"모르겠어요. 그게 뭔데요."

 

그게 대체 뭐길래. 성찬은 세아도에서 갇혀 사느라 그런 건 들어본 적 없단 말을 에둘러 말했다. 원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수초 후에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에 떠 있는 섬이래요."

"..."

"거기에 가보고 싶은데 어디에 있는 지 몰라서.."

"뭔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맥스에게 물어보면—,"

"세아도에서 그런 얘긴 안 하나 보네요..."

"..."

 

성찬이 몸을 일으켜 원빈이 있는 쪽을 건너다보았다. 색색 숨을 쉬는 소리가 이어졌다. 목소리가 몽롱하게 사그라드는가 싶더니. 그는 이미 꿈나라로 간 상태였다. 성찬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몸을 뉘며 천장을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 방금 뭐였지. 자연스레 그의 입에서 나온 세아도라는 말에 잠이 오지 않는 성찬은 밤이 더 깊어지고 나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

 

그날 밤 이후 성찬은 원빈의 얼굴을 얼마간 보기 힘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미 잠자리가 비어 있었고 낮에는 함께 식사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가 궁금해하고 있으면 원빈의 전담 비서 맥스가 다가와 성찬을 끌고 밖을 나갔다.

 

그때부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생소한 풍경으로 가득 찬 도심 속을 쏘다니며 에이전시니, 방송국이니, 미술관이니 심지어 어디 테일러샵까지 들려야만 했다. 성찬은 당최 무슨 목적인지도 모르는 채로 끌려다니며 며칠을 보내다 테일러샵에서 맞춤 정장을 위해 사이즈를 재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아. 한다. 나 지금 얼굴을 비추고 다니고 있는 거구나. 그놈의 배우 정성찬이 돌아왔다고 알리기 위해. 어디를 가든 맥스가 대신 모든 일을 진행해주느라 힘이 들어갈 일이 아직 없었지만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길거리를 걸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성찬의 얼굴을 보고 턱을 떨어뜨렸다. 택시를 타고 가던 사람도, 음식점 창가에서 식사를 하던 사람도, 엄마 손을 잡던 어린아이들도 성찬을 보고 눈 사이즈를 확장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정성찬이잖아. 미술관에 들려 그곳 관장과 악수를 할 때에도 관장이 세상 반가워하며 어깨를 토닥여왔다. 거긴 또 대체 뭐냐고 물으니 맥스는 무덤덤하게 정씨 집안에서 좋아하는 미술관이라고 했다. 전시장 활성화를 위해 배우 정성찬이 홍보차 자주 출석한 곳이라고 하기도 했고. 예술에 대해 아는 바 없는 성찬은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려 했다. 맥스는 경고의 의미로 그런 성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하는 수 없이 성찬은 얼굴에 경련 날 것 같은 만들어진 미소를 시종일관 지어줘야만 했다.

 

다음은 지인분과의 식사 자리예요. 다음은 CF 광고 모델 계약하러. 다음은 프로필 촬영하러. 다음은 런웨이 관람. 행사 참여. 거의 2주를 그렇게 보내는 동안 성찬은 배우 정성찬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지 그 효용성을 시험 당해야 했다. 갑작스레 수십, 수백명의 눈에 노출이 되며 초 단위로 감시당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고 기존 성찬의 천성이란 조금도 드러낼 수 없었다. 정신 없이 바쁜 거야 좋지. 그거야 좋은데. 성찬은 실감하고 또 실감하고 말았다. 여기에서의 시간이 상상 이상으로 갑갑했다. 그냥 세아도의 복제센터도 아니고 그곳의 교도소 하고도 독방에 갇혀있는 듯한 기분을 또 느꼈다. 거대한 벽이 다가오다 못해 숨도 못 쉬도록 결박해 오는 느낌. 성찬은 원빈과 더 대화라도 하고 싶었는데 한동안 그럴 시간도 없었고 그놈의 노바리아라는 것에 대해 맥스에게 물어볼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잠이 들기 직전 원빈에게서 '주무세요'하는 한마디를 들을 수 있으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바깥 구경이나 사람 구경은 세상 다했다 싶을 때쯤 그러한 스케줄이 뚝 끊겼다. 아침이면 늘 그렇듯 성찬을 깨우러 온 맥스가 그날은 깨우러 오지 않았다. 그 덕에 오전 내내 늘어지게 잠을 잘 수 있었던 성찬은 점심에 비척비척 깨어나 다른 맥스들로부터 몸단장을 당하고 오랜만에 집안 다이닝룸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것도 원빈과 함께. 

 

"잘 하셨어요, 많이 바쁘셨죠."

"아, 뭐.."

"...여보."

"..."

 

오랜만에 마주한 원빈은 '여보'라고 불러왔다. 성찬이 아무 말 못 하고 포크를 내려둔다. 남자치고 화려한 귀걸이를 한 원빈이 앞자리에 앉아 저를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다. 뭐지. 주변을 살펴보는데 음식을 갖다주는 안드로이드들도 없이 그 공간에 둘뿐이다. 눈치 볼 어디 누구의 어머님 같은 사람은 없다. 성찬은 우후죽순 떠오르는 그날 밤 대화에 대한 기억을 꾹 누르고선 최대한 태연하게 반응하려 했다.

 

"많이 바쁘긴 했죠."

"말 편하게 하세요. 평소처럼."

 

이번엔 '평소처럼'에 무게가 실려 원빈의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성찬이 입안을 짓씹는다. 기어코 원빈은 성찬의 눈을 보지 않았다. 표정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차가웠지만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아는 거지 쟤도. 이게 얼마나 웃긴 인형극인지. 성찬은 원빈에게서 뭔가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이러고 있는 상황이 내키지 않은 건 사실이었기에 작게 한숨을 푹 쉬고 식사를 이어 나갔다. 이름 모를 고급스러운 음식을 입에 넣으면서는 사고를 긍정적으로 해보려 했다. 이 정도 대우 받는 게 어디야. 게다가 저렇게 예쁜 애가 그러자는데 장단은 맞춰줘야지. 성찬은 화려한 저택 만큼이나 화려한 원빈의 이목구비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저작운동을 느리게 했다. 원빈은 반복된 행동을 하는 로봇처럼 숟가락과 포크를 입에 넣다 말고 통보하듯 전했다.

 

"당신 어머님이 여는 모임이 있어요."

"..."

"내일 저녁, 당신이랑 저랑 거기에 갈 건데.."

"..."

"모두 당신을 반길 거예요. 그런 후에 한동안 여유롭게 쉬시면 돼요."

"..그래."

 

성찬이 얕게 끄덕이며 답했다. 뭔가 했더니 이제 부부 동반 모임이구나. 성찬은 여태 자신의 효용성 테스트가 끝나 이제 정식으로 집안에 '정성찬의 복귀'를 공표할 셈인가 싶었다. 아무래도 폐기행은 면한 모양이네. 성찬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말 없이 나머지 식사를 했다. 원빈도 식사가 끝날 때까지 말이 없었다.

 

다음 날로 넘어가는 새벽에 원빈은 유난히 뒤척였다. 그날에도 성찬과 멀찍이 떨어져 누운 그는 침대 반대편에 들릴 정도로 어깨를 떨며 훌쩍이는 소리도 냈다. 성찬. 성찬 씨. 몇 번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엔 성찬이 결국 눈을 떴다. 저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란 걸 안다. 원빈은 성찬을 여보라 부르며 남편으로 대하는 척을 시작했지만 전혀 죽은 남편으로 동일시 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꿈속에서 그 정성찬을 그리워하며 잠꼬대하나보다 생각했다. 듣다못해 주먹을 꽉 쥔 성찬은 몸을 뒤척이다 어느새 제 쪽으로 다가와 있는 원빈을 돌아본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물기 어린 속눈썹이 보였다. 네가 찾는 성찬 씨가 내가 아닐 테지만. 성찬은 구부린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괴로운 걸까.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그 정성찬'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왜 너는 혼자. 성찬은 곧 훌쩍임을 멈춘 원빈에게서 다시 등을 돌리려 했다. 그러다 원빈의 잠꼬대가 한 번 더 이어져 덫에 걸린 듯 몸을 굳혔다. 미안, 미안해요. 내가... 뒷말을 들은 성찬의 입매는 더욱 굳을 수밖에 없었다.

 

"맥스,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성찬이 다음 날 치장을 당하며 맥스를 찾았다. 그는 거울 앞에 앉아 다른 맥스가 머릿결을 손질해주는 걸 받다가 지나가는 맥스 1호의 팔을 낚아챘다. 인간의 몸이 아닌지라 심히 무거운 맥스의 상체를 끌어내려 제게 기울이게 한 성찬이 속삭이듯 물었다. 은밀히 물어보는 말에 맥스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대꾸한다.

 

"뭘요?"

"박원빈이랑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않아?"

"저는 그저 원빈 님의 명령에 따르고 있어요. 비서라서.."

"있다는 소리야?"

"모릅니다."

 

제가. 좀. 바빠서. 팔을 빼낸 맥스는 장신의 몸으로 단 몇걸음 만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입안을 씹은 성찬은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간밤에 원빈의 잠꼬대를 목격한 이후로 마음이 묵직한 기분이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냐 싶지만. 설마 싶은 게 좀 있어서. 그는 옆에 있던 안드로이드들이 애써 세팅해준 머리칼을 홧김에 털어버려 원망의 눈초리를 샀다. 

 

저녁을 앞둔 시간, 성찬과 원빈은 저택 앞에 준비된 차를 타고 이동했다. 탑승한 차는 도로 주행과 단거리 비행이 가능한 에어카로 맥스는 함께 타지 않았다. 오로지 둘만 나란히 좌석에 앉아 말 없이 갈 뿐이었다. 성찬은 무어라 질문을 꺼내려다 조금 가라앉은 듯한 얼굴로 창밖을 보는 원빈의 모습에 입을 다물게 되었다. 곧 그들은 복잡한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외곽에 도착하게 되고

 

"와.."

"여기, 당신 본가예요."

 

장엄한 대저택을 올려다보며 성찬이 입을 쩍 벌린다. 원빈과 지내는 집이 세상에서 가장 큰 줄 알았더니. 그보다는 두세배는 커 보이는 외관에 경외감이 들 정도다. 제약회사면 약 만드는 거 아냐? 무슨 약을 만들면 이리도 돈을 벌어. 넋 놓고 구경하고 있으니 원빈은 차에서 내리기 전 성찬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자신을 보게 했다. 그 신호에 그를 바라보자 얇은 손이 내밀어졌다.

 

손.. 잡으세요.

 

얼떨떨하게 손을 맞잡은 성찬이 원빈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땅을 밟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 살갗에 스쳤다. 수트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에도 찬기가 다가오지만 원빈의 손을 잡느라 찌릿한 기운이 더 컸다. 성찬은 처음 느끼는 찌릿함에 눈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사람들이 다가와 반기는지도 몰랐다. 원빈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대하다가 성찬을 돌아보며 몸을 기울였다. 손을 내려다보던 성찬의 시야에 원빈의 얼굴이 훅 들어온다.

 

"제 허리에 팔 감아주세요."

 

어.. 응? 낮추어 부탁하는 어조에 성찬의 바보 같은 반응이 나간다. 우물대는 원빈의 입술을 바라보던 성찬이 겨우내 고개를 끄덕인다. 손에서 원빈의 감촉이 떨어져 나가자 얼얼한 손을 몰래 쫙 펼쳐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천천히 원빈의 허리로 팔을 둘렀다. 아주 어정쩡한 자세로. 감사해요. 몸이 가까이 붙은 원빈이 짧게 속삭이자 성찬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이거 어떡하지. 때아니게 곤란함을 느낀 성찬은 가까워진 원빈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이동했다.

 

아름답고 커다란 정원을 지나 저택 1층 홀에 들어서자 몇십명은 족히 돼 보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곳으로 모인 손님들은 성찬과 원빈 만큼이나 고급스럽게 빼입고 저마다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높다란 천장에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로 그들을 위한 화려한 파티가 펼쳐지고 있었다. 영롱한 색깔의 술과 윤기가 흐르는 음식이 눈길이 닿는 곳마다 즐비했고 들리는 소리마다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성찬은 그 화려함을 둘러보다 원빈에게 감은 팔에 조금 힘을 주었다. 생각해보면 함께 외출하는 일이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성찬 씨, 원빈 씨랑 왔구나."

 

이렇게 남에게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처음이었고. 성찬은 낯선 이가 다가와 인사하는 모습에 원빈만 바라보았다. 원빈은 알아서 하겠다는 눈짓을 보내오고는 오는 이마다 익숙하게 인사하고 안부를 나눴다. 성찬은 원빈이 하라는 대로만 했다. 악수를 건네오면 받아주고, 다시 사람이 떠나면 원빈의 몸에 팔을 둘렀다. 몇 번 사람이 스치는 걸 반복하고선 원빈이 몰래 누구인지 알려주기도 했다. 저분은 어머님 지인분이세요. 저분은 제 사촌이고. 아까 그분은 당신의 형. 방금은 제 어머니. 딱 원빈과 쏙 빼닮은 중년 여인과 인사를 나눈 후엔 적당히 사람들과 떨어져 웨이터가 건네주는 샴페인 잔을 받을 여유가 생겼다. 둘은 홀의 중앙에서 벗어나 한쪽 테이블에 다가가 숨을 돌리며 핑거푸드를 집어먹기도 했다. 

 

그렇게 각자 음식을 집어 먹느라 몸이 떨어져 있는 것도 잠시, 원빈은 커다란 눈을 굴려 어딘가를 흘끔 보더니 성찬의 어깨에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저희 어머니랑 당신 어머니가 보고 계세요. 그가 쳐다봤던 쪽으로 성찬이 곁눈질 하자 발목까지 늘어지는 유광의 드레스를 빼입고 이쪽을 바라보는 중년 여인 두 명이 보였다. 머리를 우아하게 올린 그들은 뭐가 재밌는지 입을 가리고 귀걸이가 흔들리도록 웃었다. 

 

"어떻게 할까?"

"그냥. 다정하게 대해주시면.."

"다정하게?"

 

명령을 듣는 맥스라도 되는 듯 원빈에게 다음 행동을 물은 성찬이 들던 잔을 내려두었다. 테이블 위로 잔을 두고는 원빈의 머리칼에 손을 뻗는다. 성찬의 손이 계산을 거치지도 않고 원빈의 머리칼에 묻은 먼지를 조심히 털어냈다. 그 충동적인 행동을 하고 나서는 빠르게 내리깔아지는 원빈을 보면서 아차 했다. 오바했나. 그래도 이러면 나쁠 것도 없겠지. 그가 샴페인을 마시는 척 잔을 기울이며 아까 본 쪽을 다시 바라보자 원빈의 어머니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끄덕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엔 원빈에게 별다른 고맙다는 말을 들을 틈도 없이 제 친척이라는 사람들이 다가왔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알 수 없는 대화에 성찬은 로봇처럼 네, 그렇군요, 맞아요 하는 추임새만 늘어둔다. 그는 대화 중간중간에 원빈을 살폈다. 원빈의 눈빛, 표정, 말과 행동. 오로지 그의 반응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목이.. 탄다.

 

보면 볼수록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어서 목이 타. 저 만들어진 웃음 뒤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술이 익숙하지 않은 성찬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제게 쏠리는 시선에 화답하듯 입꼬리 양쪽을 끌어올려 눈인사를 하다가도 시선이 다시 원빈에게 돌아갔다. 붙어 다니던 둘은 어느새 멀찍이 떨어지게 되었다. 홀로 서 있는 원빈은 언뜻 보았을 때 이 자리가 괜찮아 보였다. 그는 수줍게 웃기도 하며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성찬의 눈엔 그런 원빈이 예쁘고 아름다워 보이면서도 어딘가 어긋난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간밤에 훌쩍이는 모습을 봐서 그런 건지. 생각도 못 한 말을 들어서 그런 건지. 지켜보던 성찬은 한숨을 푹 쉬고는 화장실을 다녀왔다. 돌아오기 전 거울을 보며 얼굴 상태를 확인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그리고 돌아와선 아까 그 자리에 원빈이 보이지 않길래 홀 한 바퀴를 돌며 찾아다녔다. 원빈아. 발견한 순간 처음으로 이름을 부르려 그가 입을 연다. 하지만 입에서 맴도는 이름이 뱉어지지 않았다.

 

원빈이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블에 앉은 남정네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답게 뻗은 스탠드 화분 너머로 저들끼리 떠들고 있는 남자들을. 왜 저러지. 눈치가 보인 성찬은 웨이터와 부딪칠 뻔한 위기를 면하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원빈은 그런 성찬에게 몸을 돌려왔다. 죄송한데 이것 좀.. 답을 하기도 전에 품에 샴페인 잔을 안겨주고 원빈이 발을 옮겼다. 그가 황급히 자리를 뜨는 모습에 성찬이 당황하며 아까의 테이블 쪽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미친 게 분명하다니까. 내 동생 그렇게 만든 거 보고 걔 어머니가 너 누구냐며 거의 1년 내리 굿만 했잖아. 굿만 했겠어? 교회니 성당이니 다 데려갔지. 피아노 근처도 안 가겠다는 것만으로도 머리 아플 텐데 나 참...

 

"무슨 얘기 하고 계세요?"

 

제 둘째 형이라는 작자가 열을 올려 이야기 하는 모습에 성찬이 끼어들었다. 서너명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눈치 주듯 예쁘게 웃어 보이니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문다. 어.. 성찬아. 머쓱한 표정을 지은 갈색 눈의 남자는 앉으라며 의자 하나를 끌어주었다. 성찬은 올렸던 입꼬리를 천천히 내려 보이고 몸을 돌렸다. 

 

정원으로 빠져나가는 원빈의 뒤를 몰래 따라나섰다. 성찬이 그를 불러세우지도 않고 그가 어디로 가는 지 지켜보았다. 아까 들은 말은 무슨 얘기인지 일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원빈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어 괜히 개인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로 한다. 

 

꽃과 식물이 쌀쌀한 가을에도 아름답게 가꿔져 있는 정원을 지났다. 원빈은 저택의 바깥을 따라 저벅저벅 걸으며 사람들로부터 아주 멀어졌다. 그는 한참 걸어 척 봐도 아무도 없어 보이는 야외수영장을 향했다. 호수처럼 크고 깊어 보이는 야외수영장은 주변으로 안전 펜스가 촘촘히 세워져 있었다. 원빈이 철제 울타리로 이루어져 안쪽이 훤히 보이는 그 안전 펜스를 가만 바라보더니 손을 턱 올려 넘기 시작했다. 뭘 하려는 거야. 성찬은 멀리 몸을 숨기느라 자그마해 보이는 원빈을 불안하게 바라본다. 탁. 안쪽으로 넘어가 바닥을 밟은 원빈은 이번엔 재킷을 벗어 내려두고 수영장 모양을 따라 걸었다. 낙엽이 간간이 떠 있는 물을 들여다보는 그의 뒷모습을 성찬이 집요하게 좇았다. 그리고 곧 보여지는 원빈의 앞모습에 탄식한다. 그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벌게진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또... 우는 구나.

혼자 울기 위해 온 거구나.

 

난감한 기분에 성찬이 고개를 숙였다. 정원의 느티나무 뒤로 몸을 숨긴 그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보면 안되는 모습을 봐버린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해보는데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적당한 모른 척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원빈은 누가 봐도 빈틈없이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는 사람이니까. 성찬은 머뭇거리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구둣발을 옮기기 시작한다.

 

첨벙. 

 

몇 걸음 간 성찬의 뒤로 물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자 원빈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서 있던 자리 근처로 물결이 친다. 곧 수면으로 머리를 올린 원빈이 헤엄을 치기 시작한다. 맑은 물소리를 내며 그가 이동했다. 머리를 식히려는 건가. 걱정.. 더 안 해도 되겠지? 성찬은 손을 말아쥐며 마저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물소리가 잦아지고 작은 물거품이 일었다. 이번엔 수초가 지나도 수면 위로 머리가 올라오지 않았다. 잠수를 하는가 보다 생각한 성찬이 주먹을 꽉 쥐며 숫자를 센다. 십. 십일. 십이.. 오십구. 육십. 젠장. 쟤는 뭐 하는 거야. 

 

신호탄이라도 당겨진 것처럼 성찬이 달렸다. 철제 울타리의 윗부분을 잡고 몸을 넘겼다. 다급한 움직임에 땅을 밟으며 몸이 기우뚱했다. 아랑곳 않고 재킷을 벗어 던지고는 원빈이 있는 곳으로 몸을 던졌다. 숨을 참고 물속으로 풍덩, 빠지면서 온 살갗으로 차가운 물을 느꼈다. 귀가 먹먹해진다. 심장이 팔딱팔딱 뛴다. 팔을 휘적이며 찡그렸던 눈을 떴다. 2미터 남짓의 거리에서 원빈이 눈을 감고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게 보였다. 어디에 봉인된 사람처럼. 그가 너울거리는 머리칼 사이로 눈을 떴다. 눈꺼풀이 천천히 뜨이고 검은 눈동자가 성찬을 향했다. 시선이 얽히자마자 성찬이 흡. 꼬르륵.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더 밑으로 가라앉았다. 마음이 앞서 뛰어들긴 했지만 성찬은 수영을 할 줄 몰랐다. 그 사실이 이제야 생각나 원빈에게 닿지도 못한 채 버둥거렸다. 읍. 으읍. 당황한 쪽은 오히려 원빈 쪽이었다. 그가 눈 크기를 확장하며 성찬에게로 헤엄쳐왔다. 다가와 손을 뻗자마자 엉켜지듯 성찬이 붙잡았다. 몸이 더 엉키며 수면으로 떠오르고 푸하, 숨 쉬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물 바깥으로 나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원빈은 성찬을 먼저 올려보낸 후, 비척비척 뒤따라 올라왔다.

 

"왜 수영도 못하면서 뛰어들어요..!"

 

두 팔과 두 무릎으로 땅을 짚은 둘 사이에서 기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원빈이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친다. 성찬이 그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젖은 머리칼을 넘겨본다. 손바닥 밑으로 원빈의 치켜뜬 눈이 보였다. 멀쩡히 숨 쉬는 걸 확인하고서도 성찬이 눈을 떼지 못한다.

 

"너는 왜 죽으려고 하는데?"

"죽으려고 한 적 없어요."

"죽으려고 한 거 맞잖아!"

"아녜요! 죽으려던 게 아니라, 그냥."

 

원빈이 말하다 말고 입술 깨문다. 검은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흐르는 동안 그의 눈동자로 물기가 차올랐다. 그가 성찬의 어깨를 밀치며 일어났다. 그냥, 내가 살아있는 걸 느껴보려고 그랬어요.. 참견마세요. 시선을 회피하며 그가 성찬을 등지고 앞으로 갔다. 낮은 수온과 차가운 공기 탓에 그의 몸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젖은 셔츠가 마른 몸에 달라붙어 맨살이 비친다. 야, 잠깐. 그, 박원빈. 따라 일어서는 성찬이 그를 부른다.

 

"어디가, 그러고 있으면 안돼."

"신경 쓰지 마요."

"신경을 어떻게 안 써?"

"제발, 아무 일도 아니니까."

 

성찬이 원빈의 어깨에 손을 뻗어 붙잡는다. 힘을 주어 돌리자 다 무너져내린 표정이 보였다. 원빈이 성찬의 눈을 전혀 보지 못했다.

 

"이렇게 우는데 아무 일도 아니라고?"

"..."

"솔직히 말해봐, 네가 나한테 뭔가 숨기는 거 알아."

"그건,"

"뭐가 그렇게 괴로워?"

"..."

"뭐가 그렇게 괴롭길래, 살아있는 걸 느껴보겠다고 이 추운 날에 물속에 들어가는 거냐고. 이렇게 멀쩡히 살아 숨 쉬는데!"

 

성찬이 어깨를 붙잡고 언성을 높였다. 어깨에서 떨림이 다 느껴질 정도로 원빈이 흐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빈틈 없이 꼿꼿하게 행동하던 애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젠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보다 턱을 타고 떨어지는 물이 더 많았다. 원빈이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성찬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구슬 같은 동공에 성찬의 얼굴이 투명하게 비쳤다.

 

"이게 어떻게 살아있는 거예요?"

"뭐,"

"나를 나로 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원빈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히끅거리는 소리를 내는 동안 성찬이 긴장하며 뒷말을 기다렸다. 설마. 설마.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나 진짜 박원빈 아니에요."

"..."

"나도 세아도에서 왔어요."

 

그쪽처럼. 마저 내뱉어진 말엔 성찬의 숨이 막혔다. 뛰던 심장도 멈췄다. 원빈의 두 눈을 바라보며 온 세상의 시간이 멈췄다. 

 

비로소 그의 진짜 모습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II.

안녕 맥스. 노바리아에 가는 법을 알려줘.

 

네. 맥스가 알려드릴게요. 노바리아는 21세기 말 각 도시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한 도시 전설 속 장소로, 하늘에 떠 있는 섬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곳은 어떤 존재든 영혼을 가질 수 있고, 사랑 또한 받을 수 있어 천국 같은 곳이라고도 해요. 노바리아는 현재 존재 여부가 밝혀지지 않아 위치 또한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아요. 하지만 많은 이들이 추측하는 노바리아의 위치는.........

 

 

 

나는 사실 노바리아에 가고 싶었어. 나에게도 나만의 영혼을 달라고. 그렇게 신께 빌고 싶어서.

 

 

 

22세기. 기술력이 정점이지만 윤리의식은 사라져버린 시대. 사람들이 복제인간을 만들어 놓고 영혼이 없는 존재로 여기는 잔인한 세상. 그런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쳐왔던 원빈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버렸다. 그것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사내에게.

 

이름. 박원빈. 다른 이름. AX02-030217. 이름 번호에서 알 수 있듯 X단지의 17번째 인공 자궁에서 2102년 3월 2일에 탄생하고 A 구역에서 길러진 복제체. 실제 나이는 원형체보다 9개월이 어려 2126년도 기준 스물넷. 이곳에 온 나이는 열여섯. 사유는 원형체가 사고로 죽어서. 

 

그 사실들을 일목요연하게 말하고 나서야 원빈은 아차 한다. 이렇게 다 불어버릴 계획은 없었다. 이 모든 건 성찬에게 함구하려 했었다. 그랬는데 왜 이걸 다 말해버렸지. 아무래도 내 가장 나약한 모습을 들켜버려서? 원빈은 이상하게 술술 말하게 만드는 성찬을 앞에 두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낀다. 입을 다물고서 그가 어떤 반응을 할지 기다렸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인형 같이 하얀 얼굴을 들여다보는데.. 참 희한하게도 성찬은 저만큼이나 조심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이란 너무도 간결한 말.

 

"그랬던 거구나."

"..."

"이제 이해가 가네."

 

정신을 차렸을 땐 집으로 돌아가는 차를 타고 있었다. 성찬은 별말 없이 담요를 둘러주고 어디서 구해온 우유 한잔을 손에 쥐여주었다. 모임에 있던 사람들에겐 일찍 귀가하는 이유를 잘 설명한 건지 굳이 그들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원빈은 우유가 담긴 컵의 온기를 느끼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부끄러운 마음이 컸다. 정체를 말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같은 복제인간으로서 그를 여기로 불러들인 이 상황이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다. 혼자 울고 난리 칠 정도로 이곳에서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데. 그 역사를 반복하는 데 가담하는 내가 웃긴 건 맞잖아. 원빈은 얕은 한숨을 쉬고 성찬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는 머리칼이 덜 말려진 채로 창문을 통해 스쳐 지나가는 도시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성찬과 똑같은 얼굴이다. 이름도 똑같고. 시선을 뗀 원빈이 남아있는 우유를 마저 마시려 컵을 들었다. 몇 모금 삼키고 있으니 성찬이 운을 뗀다.

 

"내일 같이 놀러 나갈래?"

 

듣자마자 사레가 들린 원빈이 몸을 수그려 켈록켈록 기침했다. 네? 손등을 닦으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묻자 성찬이 고개를 갸웃댄다. 머쓱한 표정으로 눈을 반쯤 접어 웃는다. 안되나? 그 사슴 같은 눈을 바라보는 원빈이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받아친다.

 

"그게 아니라.. 갑자기요? 저희 지금 너무 어색한데.."

"뭐 어때. 싫어?"

"싫은 게 아니고요.."

"그럼 된 거 아냐?"

"..."

 

원빈이 어깨에서 흘러내린 담요를 당겨 올리며 물었다.

 

"저.. 웃기다고 생각 안 해요?"

"너? 황당하긴 하지."

"..."

"누구보고 남편 행세 해주라 해놓고 익사하려고 하면 어떡해."

"죽. 죽으려던 거 아니라니까."

"그럼 나는 혼자 어떻게 하라고.."

 

말을 흐리는 성찬의 말에 원빈이 눈꺼풀을 까닥 감았다 떴다. 뭘 어떻게 해요? 원빈의 말에 성찬이 쭈뼛대며 자세를 고쳐잡는다. 자율주행으로 도심을 누비는 에어카가 흔들림 하나 없는데 그가 옆 손잡이를 잡았다 말기를 반복한다. 어색한 몸짓을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답이 한참 뒤에나 나왔다. 네가 없으면 여기 세상에 대해 알려줄 사람이 없잖아. 나 나온 지 한 달도 안돼서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내일 같이 나가서 네가 좀 알려줘."

 

성찬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마쳤다. 원빈은 입을 달싹였다. 맥스 보고 알려달라 하면 되지 않냐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이 사람에 대해 저도 책임이 있는 건 맞았으니 입을 다물기로 했다. 둘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말없이 갔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엔 성찬이 속삭이듯 물었다. 근데 나 너한테 계속 말 편하게 해도 괜찮지? 이렇게 하는 게 더 친근하게 느껴져서. 그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슬쩍 웃으며 먼저 내렸다. 따라 내리는 원빈은 그가 참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계획에도 없는 일이다. 분명 사람 숨 막히게 하는 모임 때문에 정신 없이 울었었는데 지금은 더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원빈은 세상 구경을 어떻게 해줘야 할지 고민하다 간단히 레스토랑 프라이빗 룸 예약부터 했다. 그다음엔 근처 쇼핑센터 명품관 VIP 전용 시간 예약을 했다. 이런 식으로 할 생각은 없었는데 전날 성찬에게 뭐 하고 놀 거냐고 물어보니 글쎄, 일단 나가보자고 하여 기겁하고 한 행동이었다. 세상에. 일단 나가보자고 하다니. 원빈은 저나 성찬이 너무 유명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평범하게 다닐 수 없다는 사실쯤은 알았다. 때문에 가장 안전하고도 편안한 코스로 하루를 마련해보았다. 원빈이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일정을 브리핑 해준 뒤로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따뜻하고 안락한 이불은 그들 몸을 노곤하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저만 잘 따라오시면 돼요. 모르는 게 있으면 제가 다 설명해드릴 테니 물어보시면 되구."

"응."

"..뭐예요?"

 

다음 날 나갈 채비를 다 하고 차를 타며 말하니 성찬이 빤히 쳐다보았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른 원빈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자 성찬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여보라고 부르는 건 그만두기로 한 거야?"

"아니 그건.."

"나름 재밌긴 했는데."

"..듣고 싶으세요?"

"듣고 싶다기보단.. 나는 뭐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고."

 

둘 사이 잠깐 정적이 찾아왔다. 실버 색의 유선형 모양 에어카가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원빈은 조금 갈등했다. 성찬을 완벽하게 남편으로 대하려 했던 건 사방에 감시하는 눈이 많아서였다. 심지어 집 안에 있는 안드로이드들 중 하나 쯤은 제 어머니 되는 박 여사의 명령을 받아 그들의 생활을 감시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라서. 박 여사는 정 씨네 제약 회사와 사업적으로 얽혀 있어 어떻게 해서든 사돈 관계를 끈끈하게 맺어두고 싶어 했다. 그런 이유로 '정성찬'과 '박원빈'의 부부 생활에 지독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던 거고. 하지만 자신이 본래 박 씨네 아들이 아닌 것도, 정 씨네 사위가 아닌 것도 다 들통이 났으니 그런 부끄러운 연극은 단 둘이 있는 지금 이쪽에서도 내려두고 싶었다. 그게 재밌었나. 원빈은 전날 시키는 대로 다정하게 잘 대해주던 성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근데 너, 그 사람을 '성찬 씨'라고 부르지 않았어?"

 

정적을 뚫고 해오는 말에 원빈이 고개를 돌렸다. 옆좌석에 앉은 성찬의 입에서 나온 '그 사람'이란 원형 정성찬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았다. 

 

"여보나 당신이란 말이 잘 안 붙어서 그러긴 했는데.. 어떻게 알아요?"

"네가 잠꼬대 하는 걸 들어서 알아."

"잠꼬대요? 제가... 그 사람 부르는 잠꼬대를 했어요?"

"응. 부르면서 미안하다고 하던데? '내가 진짜가 아니라서 죄송해요.' 그렇게도 말했어."

"아......"

 

내가 그랬었다고? 얼굴이 붉어진 원빈이 초조하게 입을 우물댔다. 애먼 머리칼을 살살 쓸며 민망함을 견뎌보려는데 성찬이 쐐기를 박듯이 말한다.

 

"좋아했어?"

"......"

"좋아했구나."

 

원빈의 답이 없는 동안 성찬이 모직 코트를 고쳐 입었다. 드레스룸에 모셔지듯 보관돼 있었으니 필시 원형의 옷이었을 그 코트는 성찬에게 딱 알맞게 어울렸다. 그 모습을 삽시간에 복잡해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성찬은 아까의 말을 꺼낸 적도 없는 사람처럼 덧붙였다. 아무튼 네가 그런 말을 잠꼬대로 하길래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었어. 막상 나 같은 복제인간이란 말을 들었을 땐 많이 놀랐지만. 

원빈도 화제를 바꾸려 고개를 끄덕였다. 놀랄 만 하죠... 수 분간 잡담만 이어진다. 떠듬떠듬 날씨나 오늘 먹을 레스토랑 메뉴 얘기 등이 오갔다. 원빈은 말을 하면서도 조금 멍했다. 지금은 죽고 없는 그 정성찬을 좋아했냐는 말에 심장이 아직도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목적지 도착 후엔 성찬이 먼저 내리며 손을 내밀어 보였다. 멍했던 원빈의 정신이 번쩍 차려진다.

 

"형이라고 부르는 건 어때?"

"네?"

"성찬 씨 이런 거 말고 형이라고 불러주라."

"저 누굴 형이라 불러 본 적이 없는데,"

"그럼 더 좋네."

 

원빈이 머뭇거리며 그 커다란 손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닿자마자 성찬이 꽉 잡아당긴다. 몸이 기울어지며 얼굴끼리 가까워졌다. 원빈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지만 성찬이 배시시 웃기나 했다. 오늘 재밌게 놀자. 눈을 예쁘게 휘어 보인 그가 다른 손으로 원빈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찰나였다. 그 미묘한 기류를 다 느끼기도 전에 원빈의 발이 땅에 닿고 성찬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가. 갈까? 말을 조금 더듬은 성찬이 휙 돌아서며 앞서 걷는다. 원빈은 쓰다듬어졌던 곳을 매만지며 그를 불러세웠다.

 

"저기, 그.. 형."

"어??"

"그쪽 아니고 왼쪽.."

"아아."

 

아하하.. 성찬이 민망하다는 웃음을 흘리며 몸을 반대로 돌렸다. 그 모습에 웃음이 픽 나온 원빈이 그를 뒤따랐다. 헤프게 웃는 게 좀 바보 같은 사람이네. 성찬이 다시 돌아볼 땐 웃은 걸 들키지 않으려 빠르게 입꼬리를 내렸다.

 

성찬과 원빈은 레스토랑 프라이빗룸에 들어가 안드로이드 직원이 내어준 음식을 먹었다. 원빈은 해초 파스타와 캐비어를 곁들인 스테이크 등을 앞에 두고 성찬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창가를 통해 들어온 정오의 햇살이 도자기 같은 피부 위로 우아하게 부서졌다. 그 아름다운 외모로 성찬이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포크로 파스타를 뒤적이기만 하는 원빈은 그 모습을 보는 게 어쩐지 더 흥미로웠다. 어제 성찬에게 물에 빠진 생쥐 꼴을 보여주기 전에만 해도 그러진 않았는데. 여태 분산됐던 정신이 명료해지고 단순해지며 이 사내에게 집중된다. 그 왜. 틀린 그림 찾기 하듯 원형 정성찬 씨와 다른 점들을 발견하고 있으면 재밌어지잖아. 나와 같은 복제인간이라는 존재가 개인만의 고유성을 가진 사람임을 알아가 본다는 게... 그러고 있으면 꼭 저도 고유성을 가진 존재임을 증명 받는 거 같아 조금은 안심 되기도 하고. 근데 그게 왜 꼭 어제 일을 계기로 이루어진 심리변화인가 생각해보자면,

 

"왜 넌 2년이나 텀을 두고 나를 불렀어?"

 

가면을 벗은 내 모습을 보아도 나를 멀리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어서일까. 원빈은 파스타 면을 빙빙 돌리다 말고 시선을 올렸다. 성찬이 질문을 건네놓고 숟가락에 올린 캐비어를 신기하다는 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원래는 부르지 않으려고 했어요."

"..."

"여기 생활을 하게 만드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제가 상황이 좋지 않았어서."

"..."

"근데 유예기간 3년을 꽉 채우면 복제체를 처분한다고 그러니 안 되겠다 싶었어요. 달리 살릴 수 있는 방법도 안 보이고."

 

그게 다예요. 최대한 사실적시 위주로 건조하게 말했다. 성찬은 캐비어를, 그것도 요즘같이 해산물 씨가 마른 세상에서 거의 구경 하나 할 수 없는 고급 재료를 들여다보길 그만두었다. 그의 갈색 눈이 테이블을 가로질러 원빈을 쳐다본다. 

 

"걱정했구나."

"뭐, 조금.."

"그 2년간 내 행적도 알아?"

"세아도에서 탈출하려던 거요?"

"응, 아네."

 

원빈이 슬며시 끄덕였다. 성찬이 갑자기 몸을 뒤로 젖힌다. 커다란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저게 대체 무슨 표정이야. 원빈이 예측불허의 행동을 지켜보는 동안 두꺼운 상체가 다시 테이블 쪽으로 쏠린다. 팔을 접어 테이블에 올린 성찬은 눈을 강아지 같이 뜨고 나지막이 물었다. 

 

"너는 시도해본 적 있어?"

"뭐를요? 도망치는 거요?"

"응."

"없어요."

 

듣자마자 손에 땀이 밸 것만 같은 질문이다. 성찬은 뭐가 좋은 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대화 흐름을 도통 종잡을 수 없었다.

 

"나 사실 네가 어떤 애인지 어려웠는데 좀 알 거 같다."

"..."

"너 되게 착한 애 같애. 착하니까 착한 생각하고. 착하니까 순응하고 살고. 근데 또 착하니까 척하는 삶이 힘들고."

"음... 네...?"

 

제가 착해요..? 원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성찬이 파하하 웃음을 터트린다. 뭐가 그리 웃음이 나오는 지 고개를 수그려 웃다 잔뜩 접은 눈으로 원빈을 바라본다. 아냐 아냐. 밥 먹어 밥. 황당한 말을 꺼내놓고 대화를 마무리 해버리는 그가 원빈에겐 영 엉뚱하다. 원빈은 성찬을 흘끔거리면서 포크에 돌돌 말아둔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바다 향이 퍼지는 요리를 우물대고 있으니 성찬이 또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잘 먹네, 착한 원빈이. 기특하고 귀엽다는 듯이 중얼대는 그의 목소리엔 원빈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지분댔다. 민망하고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근데 넌 수영을 왜 그렇게 잘해?"

 

성찬은 식사를 마치고선 질문이 더욱 많아졌다. 너 귀는 언제 뚫었어, 어떤 음악 좋아해, 평소에 쉴 때는 뭐해 등등. 레스토랑을 나와 바로 옆 건물에 가기만 해도 쇼핑센터가 있었다. 그곳의 명품관으로 이동하기 전 중간층에 마련된 수족관을 들리기 위해 VIP 전용 승강기를 타는 동안에도 질문을 해왔다. 착각인진 몰라도 들떠 보이기도 해 대충 답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원빈은 분 단위로 훅훅 거리감을 좁혀오는 그에게 이상한 곤란함을 느꼈다. 몸이 조금 긴장된다고 해야 하나.

 

"배웠어요."

"여기서?"

"네."

 

그러고보니 그 섬 내부에서는 수영을 안 가르치지. 원칙적으로 수영 수업이 금지인 세아도에서 자란 성찬이 수영을 못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원빈도 그랬으니. 원빈은 수영을 할 줄도 모르는 성찬이 몇 번이고 해안가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감시 보고서를 받은 바 있다. 그때도 무모한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는데.

 

"왜 배우게 됐어?"

"쓸모가 있을 거 같아서요."

 

정말 앞뒤 안 재고 뛰어드는 사람이었다니. 정말 뭐랄까 신기해.

 

"다행히 어제 쓸모가 있었네요. 어제 그 수영장 물이 깊어서 인명 사고 조심해야 하는 곳이에요. 저 아니었으면 형은..."

 

말을 하다 말고 승강기에서 내려 직원이 안내해주는 방향을 따라 이동했다. 성찬이 조용히 따라붙었다. 혹시 몰라 한 시간에 열 팀 이상은 받는 수족관을 몇 시간 통으로 예약해두고 왔는데 그 덕인지 사람이 한산했다. 수족관 입구로 입장하고부터는 내부 관람객이 그들뿐이었다. 여긴 보통 애기들이나 데리고 오는 곳인데. 적당히 구경 시키고 이동해야지. 원빈은 이미 와본 적 있는 그 수족관에 대해 설명하려 성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몸을 가까이 붙인 채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친다. 뭐지. 흠칫 놀라자 성찬이 갑자기 딴청 하며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아. 여기 바닷속 같네.

그..쵸. 그리고 여기 다 만들어진 물고기들이에요. 원빈이 머쓱하게 뒷덜미를 손으로 문지르며 태연한 척 설명했다. 그들의 눈길이 닿는 곳 마다 로봇 물고기가 실제와 같은 움직임으로 공중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성찬은 나비를 잡으려는 강아지처럼 팔을 뻗어 영롱한 빛깔의 지느러미를 건드려보려고 했다. 손바닥 만한 로봇 관상어는 닿기 전에 섬세한 감지 센서로 멀리 달아났다. 신기한 광경에 성찬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그 외에도 해파리 존. 홀로그램 상어 존. 실제 바닷속을 구현한 해저 터널 존. 물고기 쇼 존 등을 지나며 원빈이 열심히 관람 포인트를 조곤조곤 설명해준다. 그런데 성찬은 어린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구경하다가도 꼭.

 

"세상 구경 시켜달라 하더니 왜 저를 보고 계세요..."

 

빤히 원빈을 보고 있었다. 신기한 해파리나 물고기를 볼 때보다 훨씬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발견한 것만 열몇번째라 원빈이 민망함을 무릅쓰고 성찬을 붙잡고 물었다. 성찬은 마침 로봇 피라냐가 담긴 기둥만 한 유리 어항을 앞에 두고 원빈을 보던 참이었다.

 

"내가 그랬어?"

"네.."

"미안."

 

성찬은 자신도 민망한지 동그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주먹을 입에 대고 헛기침도 했다. 

 

"아까 너 웃는 거 보고 신기했어서 그랬나 봐."

 

그리고 생각지 못한 말을 해온다. 원빈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제가 웃었다고요?"

"응. 아까 수영 얘기 하면서 약간 웃던데.."

"그, 그랬나."

"정확히 어제 얘기할 때."

 

원빈은 웃은 기억이 없었다. 때문에 별다른 대꾸는 못하고 어정쩡하게 수족관 관람을 이어갔다. 눈길 닿는 대로 어항 구경에 집중해보려는데 성찬이 꿋꿋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왜 그 얘기를 하면서 웃었을까."

"..."

"어제 내가 물에 뛰어들어준 게 싫진 않았나 봐. 그치?"

"..."

"아니면 수영도 못하는 내가 몸부터 던진 게 내심 신기하고 재밌었나."

"그게 중요해요?"

"중요하지."

"..."

"널 더 웃게 만들면 좋잖아."

 

원빈이 몸을 돌려 성찬에게로 고개를 들었다. 가까워진 얼굴에 서로의 시선이 붙들린다. 원빈은 이해가 안 간단 표정을 했다.

 

"왜요?"

"왜냐니."

 

웃으면... 예쁘니까.

 

그대로 정적. 성찬의 입에서 나온 말에 원빈이 얼어붙었다. 수족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녹음된 파도 소리나 음악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세상 느껴보지 못한 황당함이 스쳤다. 네?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더니 성찬이 입을 달싹이며 원빈의 얼굴을 훑었다. 눈에서 코를 지나 입술로. 

 

"원래도 예쁘긴 한데.. 웃으면 더 예쁠 거 아냐."

 

시선이 입술에 닿자마자 원빈의 귀 끝에 열이 올랐다. 심지어 저런 말을 하다니. 부끄러움도 없나? 웃으라고 한 소린가 싶었는데 성찬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되려 진지했다. 웃음기 없이 저를 지긋이 바라보는 눈빛이 그걸 대변해주었다. 원빈은 시선을 슬금슬금 피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차피 제 얼굴도 아닌데."

"네 얼굴이 아니라니?"

"그니까, 저는 복제된 사람이잖아요..."

"아아. 네 전남편의 전남편 말하는 거야? 네 얼굴이 그 사람 거라고?"

 

그 말을 해놓고 성찬이 푸흡 소리를 냈다. 또 뭐가 웃긴 건지 배를 붙잡고 호쾌하게 웃었다. 그가 웃는 동안 원빈은 그의 보법이 다른 표현법을 곱씹었다. 전남편의 전남편... 제 원형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성찬이 단연코 최초다. 성찬은 입꼬리 양쪽이 당겨진 얼굴로 말한다. 아니. 아. 원빈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 사람은 나랑 모르는 사이인데."

"..."

"그리고 네 얼굴이든 네 몸이든 다 네 거지. 나도 내 얼굴 꽤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왜?"

"아, 뭐, 네.."

 

원빈이 떨떠름하게 대답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뻣뻣해진 발걸음으로 걸어 나가는데 성찬이 보폭을 맞추며 옆으로 다가왔다. 

 

"너도 신경 쓰고 있었구나. 네 원형이란 사람."

 

성찬이 낮게 웃는 목소리가 귀를 간질여 왔다. 원빈은 눈동자를 가만두지 못했다. 성찬이 거침없이 훅훅 들어온다. 또 긴장된다. 긴장돼서 맥박이 미세하게 빨라졌다. 

 

"뭐, 근데 보나 마나 너랑 많이 다른 사람이겠지. 너 피아노도 안 치잖아?"

"..."

"그 사람이 너보다 착하대? 알수록 말랑말랑하고?"

"몰라요.."

"또 그 뭐야.."

 

성찬이 눈동자를 위로 뜨며 음, 고민한다. 원빈이 그 모습을 훔쳐보고 안 본 척 한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나한테 물어본 장소가 뭐였지? 둥둥 떠 있는 땅? 그런 거 있었잖아. 그 사람도 그런 걸 찾을 정도로 낭만적인가?"

"...노바리아요?"

 

원빈이 손으로 제 머리칼을 만지작대며 얼굴을 숨기려 했다. 어딘가 너무 부끄러워서 미칠 거 같았다. 성찬은 아까부터 원빈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있었다. 무엇을 하더라도 원빈의 머릿속엔 원형체의 존재가 자리 잡고 있었건만 성찬은 가감 없이 철저히 분리해준다. 원형체와 복제체. 그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를 아주 철저히. 뭐 성찬의 입장에선 '네 전남편의 전남편'이라고 하니까 평생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사람인 거 같긴 한데...

 

"응. 거기에 왜 가보고 싶은 거야?"

 

또 대화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가버렸다. 어쩌다 수영 얘기에서 여기까지 온 거지. 원빈은 어느 순간부터 수족관 전시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 관람을 포기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뜸을 들이던 원빈은 눈을 초롱초롱 뜨고 답을 기다리는 성찬의 팔을 낚아챘다. 묵직한 몸을 출구 쪽으로 이끌고 간 원빈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중에 말해줄 테니까. 일단 쇼핑하러 가요. 옷 골라드릴게요.

 

*

 

쇼핑은 생각보다 지지부진 했다. 명품 브랜드 매장 안에서 직원들이 칼각으로 선 채 제품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도 성찬이 곧잘 장난을 쳐오는 바람에 옷 고르는 시간이 지연됐다. 형. 이거 어때요? 직원이 추천해주는 옷마다 집어 들고 성찬에게 어울리는 지 고심해보는데 성찬은 네가 골라주는 옷이면 뭐든 다 괜찮다고만 했다. 그래 놓고 원빈이 직원이랑 소재부터 컬러, 무게까지 꼼꼼하게 따져보고 있으면 어디서 가져온 건지도 모를 인형을 어깨에 올려왔다. 원빈아. 원빈아. 이거 뭐야? 심각한 척 원빈의 어깨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을 걸어오니 원빈은 순진하게 제 어깨를 바라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성찬은 그런 반응을 보고선 꼭 눈을 반달로 접어가며 웃었다. 뿐만 아니라 넓은 매장을 샅샅이 누비며 진열된 선글라스 중 꼭 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제품만 골라 착용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거 다 나 웃으라고 하는 건지. 원빈은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웃기긴 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웃음을 참느라 몇번이나 직원 설명을 놓쳤다. 그렇게 한참 시간을 보내다 추천 받은 제품 중 성찬에게 입혀보고 자동으로 입이 벌려지는 코트와 재킷 등 외투 세 벌을 사기로 결정한다. 어쨌거나 옷걸이가 좋으니 쇼핑하는 재미가 없진 않았다. 결제를 마친 원빈은 성찬에게 새 코트를 착용한 그대로 나가자고 했다. 그의 옷이 아니었던 기존 코트는 곱게 접어 커다란 쇼핑백에 담았다. 

 

"그래서 언제 말해줄 거야?"

"나중에요."

 

쇼핑센터가 있는 건물은 워낙에 커서 할 거리가 많았다. 사람이 많은 곳은 가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원빈은 층수를 다 합치면 거대한 마을이나 마찬가지일 그 건물 한가운데에 서서 다음 행선지를 어디로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성찬은 원빈을 슬쩍 바라보며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오더니 손목을 잡아 왔다. 그가 무거운 쇼핑백도 뺏어간다. 

 

"옥상에 정원이 있다는데? 가봐도 돼?"

"네, 그것도 좋을,"

"가자!"

 

성찬이 배시시 웃으며 원빈을 끌고 갔다. 형, 근데, 잠시만... 거침 없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자 금방 붐비는 인파를 마주했다. 가족 단위의 사람들 눈동자가 이쪽으로 한 번에 쏠린다. 원빈의 등줄기에 땀이 배는 걸 느끼며 눈썹을 팔자로 지었다. 어, 정성찬 아니야? 그 부부 같은데? 어디선가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오며 누군가 턱, 어깨를 잡아 왔다. 박원빈 아니에요? 사인 해주시면 안 돼요? 움찔 놀란 원빈이 머뭇거리며 답을 못하고 있자 성찬이 나서서 딱 한마디 했다. 저희 조용히 데이트 하고 싶어서요. 지나가도 될까요? 그가 당당하게 말하며 애교 있게 고개를 까닥 기울여 보이자 곧 홍해 갈라지듯 사람들이 물러나 주었다. 와. 엄청 여유롭게 대하네. 원빈은 그 모습에 감탄하며 편하게 걷기 시작했다. 성찬은 그런 원빈의 어깨에 팔을 둘러 제게로 잡아 끌었다. 그는 생긋 웃으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나도 원래 이런 거 힘든데. 너랑 있으니까 괜찮아.

 

앞으로 외출은 너랑 해야겠다. 맥스가 좀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거구나. 원빈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에 둘린 팔은 그대로 두었다.

 

이후 성찬이 이끄는 대로 쏘다니는 시간이 이어졌다. 옥상에 올라가 이름 모를 인조 꽃이 가득한 정원을 구경한 그들은 저 멀리 보이는 도시경관도 감상했다. 그다음 정원 사이로 마련된 안드로이드가 커피를 내려주는 카페에서 음료 한잔을 하고 성찬이 궁금하다고 하는 음식점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도시경관을 감상할 때에 건물 아래를 바라보다 발견한 스팟이었다. 바로 두 블록 떨어진 그 음식점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한 둘은 또 성찬이 바로바로 가자는 곳으로 몸을 옮겼다. 원빈은 어느새 끌고 나온 에어카의 존재도 잊고 도심 속을 쏘다니고 있었다. 대형견 산책 시키듯 체력이 팍팍 깎일 일이다. 그런데도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재미가 있었다. 정신 차려보니 이미 밤 10시를 향해가는 시간이었으니. 

 

"우리 나름 친해진 거 같지 않아?"

"그런 거 같네요."

 

성찬과 원빈은 디저트 가게에서 사서 나온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가고 있었다. 사람이 한산한 인근 공원에서 밤길을 걷는 그들의 손등이 간간이 스쳤다. 늘어뜨린 팔을 주춤대며 올린 원빈은 아이스크림을 두손으로 잡고 마저 먹었다. 쌀쌀한 밤공기에도 아이스크림이 달콤하고 맛있었다.

 

"근데 더 친해져야겠어."

"왜요, 지금도 충분한데.."

"아냐, 웃는 모습을 별로 못 봤잖아."

 

함께 웃을 줄 알아야 진짜 친한 사이지. 성찬이 원빈에게 고개를 기울여 웃으며 말했다. 오늘 마주한 그의 표정은 9할이 그 표정이었다. 눈을 반달로 접어 미소 짓는 표정. 비밀 친구라도 생긴 것처럼 기분이 몽글몽글해진 원빈은 괜히 앞서 걸었다.

 

"즐거운 일이 생기면 웃겠죠."

"그래? 즐거운 일 더 만들어줘야겠네."

"..."

"노바리아라는 곳은 왜 가고 싶은 지 언제 말해줘?"

 

...잠시만요. 포기하지 않고 보채는 성찬의 말에 원빈이 행인이 없는 길을 향했다. 그가 지나는 길은 가로등 대신 빛이 나는 로봇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원빈은 나비의 날개를 등불 삼아 누군가가 쓸어모은 낙엽 더미를 향해 다가갔다. 손으로 눌러보며 더미의 푹신함을 가늠한 원빈은 주변에서 낙엽을 한 움큼 씩 더 주워 왔다. 뭐해? 대여섯번 정도 왔다 갔다 하며 더미의 크기를 부풀려가는 원빈을 보고 성찬이 물었다. 원빈은 다시 손으로 푹신함을 확인하고는 그 위로 등을 대고 풀썩 누워버렸다. 다가온 성찬이 원빈을 내려다보며 눈을 빛냈다.

 

"아, 이거 이렇게 하는 거야?"

"형도 해봐요."

"나 네가 애써 골라준 새 옷 입고 있느라.."

"괜찮으니까 해봐요."

 

원빈이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감싸오는 구름 같은 푹신함에 몸을 맡겼다. 곧 옆으로 풀썩 눕는 소리가 들린다. 낙엽 몇 잎이 흩날렸다. 가을 밤공기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눈을 뜨고 옆을 바라보자 자신을 따라 눈을 감고 있는 성찬이 보였다. 로봇 나비가 근처로 날아와 그의 얼굴선을 비추었다. 인형 같은 그의 속눈썹이 움찔대다 눈이 뜨였다. 원빈은 시선을 거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요? 성찬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좋은데?"

"기분 좋아요?"

"응."

 

원빈은 침을 꼴깍 삼키며 손에 닿는 낙엽을 만지작댔다.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감촉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이미 죽은 잎들이 모여서 푹신함을 만드는 게 신기하지 않아요? 생명력을 얻은 것 같이.."

"음. 너 되게 감성 있다."

"..."

"더 말해줘."

 

더 말해달라는 말에도 원빈이 한참이나 입을 달싹였다. 그는 눈을 감고 용기를 내어 말을 이어 나갔다.

 

"저도 생명을 얻으러 가고 싶어요. 노바리아에."

"..."

"정확히 말하자면 영혼을 얻으러요. 거긴 누구나 영혼을 가질 수 있대요."

"영혼?"

"...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난 사실 맥스랑 만났을 때 처음 들어봤어. 영혼이란 말을."

 

중요...해요. 저에게 없는 거니깐. 원빈이 조금 울컥한다. 그는 말끝이 떨리지 않도록 애쓰며 말했다.

 

"게다가 누구나 사랑 받을 수 있는 천국 같은 곳이래요."

"..."

"그래서 가고 싶었어요.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 끝나자 사위가 고요해졌다. 찬 공기가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다. 바스락대며 낙엽 날리는 소리만 귓가를 맴돌길래 원빈이 눈을 떠 성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찬은 원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저를 보고 있길래 속으로 놀란 원빈이 어쩔 줄 몰라 한다. 왜 아무 말이 없지. 역시 괜히 말했나. 그는 성찬의 빛 받은 눈동자를 초조하게 건너다보았다. 성찬은 생각에 잠긴 듯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갑자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나 진짜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어."

 

그가 낙엽을 한 움큼 집어 들어 허공 위로 던졌다. 머리 위로 눈처럼 살랑살랑 떨어지는 낙엽에 원빈이 눈을 찡그리는 동안 성찬이 개구지게 웃었다. 그러더니 아예 일어나 이쪽저쪽으로 뛰어다닌다. 신난 강아지처럼 팔을 벌려 이리저리 뛰어오르는 그의 행동에 원빈이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문을 몰라 그의 들뜬 모습을 눈으로만 좇고 있으니 성찬이 해맑게 웃으며 돌아왔다. 머리에 낙엽 하나를 매달고.

 

"노바리아에 가자!"

"거길요?"

"응! 가면 네가 행복해진다는 소리잖아."

"마. 맞긴 한데."

"내가 데려다줄게!"

 

성찬이 원빈의 두손을 붙잡고 말했다. 심장이 쿵 떨어진다. 원빈이 어버버했다. 들떠서 말하는 성찬의 두 눈에 총기가 가득하여 순간 그럴 수 있는 줄 알았다. 원빈은 놀란 토끼 눈으로 성찬을 진정시키려 했다.

 

"저희 못가요."

"왜?"

"어디 있는 지 모르는데 어떻게 가요."

"아, 그게 문제네."

 

기분이 쉽게 표정으로 드러나는 성찬이 순식간에 입꼬리를 내린다. 좀. 바본가. 원빈은 그 드라마틱한 표정 변화를 신기하게 올려다본다. 하지만 성찬은 다시 미소를 띠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세아도에 갈래?"

"네? 거길 저희가 왜요?"

"가서 물어보자. 네가 찾는 곳이 어디 있는지."

"형, 거기서 노바리아 얘기 들어본 적 없잖아요."

"그렇긴 한데 거기에 뭐든 잘 아는 할아버지 있거든."

 

성찬이 씩 웃으며 원빈의 턱밑을 손으로 살짝 쓸었다. 바바 할아버지라고, 내 친군데 완전 박사야. 나보고 놀러 올 수 있으면 오라 했는데 잘됐네. 성찬은 뭐든 불가능은 없다는 사람처럼 말했다. 원빈은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물음표 수십 개가 떴다. 세아도는 성찬이 감옥 같이 여기던 장소나 다름 없었다. 자신도 마찬가지고. 지금의 신분으로는 명분만 있으면 들락날락 할 수 있다지만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던 그곳을 아무 감정 없이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한두 개가 아닌데, 이를테면..

 

"저희가 어떻게 가죠? 사람들이 배신자라고 생각 안 해요?"

"응? 그런 애들이 있어?"

"..."

"뭐 있을 수도 있는데 같이 안 놀면 되지. 내 친구들만 소개해줄게."

 

성찬은 눈을 깜빡거리며 몸을 더 붙여왔다. 이대로면 몸을 끌어안아 올 것만 같은 기세다. 원빈이 조금씩 몸을 움츠리는 것도 모르고 성찬이 또 말을 이었다. 그리고, 원빈아.

 

"거긴 우리를 우리 자체로만 보는 사람들이 많을 거야."

 

잠깐 놀다 오면 너도 숨통 트이지 않을까. 와.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계획 같아. 놀기도 하고,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숨통도 트이고. 원빈은 성찬이 방금 해온 말에 알 수 없는 떨림을 느껴 움츠리던 몸을 폈다. 여전히 방방 뛰는 성찬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가 머리에 달린 낙엽을 떼어주어 주며 말했다. 알겠어요, 생각해볼게요. 대답 후엔 금세 얌전해진 성찬과 조용히 마주 보았다. 사슴 같은 눈이 원빈을 지긋이 바라본다. 시선이 얽히며 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 분위기가 더 깊어지려는 찰나 성찬은 제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나 근데 쇼핑백 어디 뒀지..?"

 

곧 그가 마지막으로 들린 디저트 가게로 내달렸다. 코트 끝자락이 날리도록 달리는 성찬의 뒷모습에 원빈은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그의 가슴이 이상하게 간질이고 있었다. 엉뚱하고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III.

너도 신경 쓰고 있었구나. 네 원형이란 사람. 신경 쓴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너무나도 부러웠는 걸. 누구에게든 사랑받는 나의 원형이 너무 부러웠어. 그 사람에게도 끝없는 사랑을 받은 나의 원형이.

 

"원빈아, 나한테 돌아왔구나."

 

울먹이는 목소리에 원빈이 눈을 번쩍 떴다. 머리에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몽롱한 감각에 내려다보았더니 희끄무레해 보이는 제 손끝이 보였다. 뭐야. 꿈인가. 판단할 새도 없이 누가 다가와 끌어안았다. 허브향이 확 퍼지고 어깨가 젖어 든다. 울고 있는 남자에게 으스러질 듯이 꽉 안겼다.

 

"네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

 

아. 그 사람이다. 나의 남편이었던 성찬 씨. 너무 순수하게 내 원형을 사랑하여 미쳐버렸던 사람.

 

그렇다면 이날은 정확히 그날이다. 2118년 5월 31일. 내 원형의 생일이자 그가 죽은 지 2개월 째가 되던 어느 초여름의 날. 

 

"네. 제가 왔어요.."

 

그리고 원빈이 제 원형인 척 연기하며 살기 시작한 날.

 

그때를 돌이켜보자면, 원빈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 누군가는 죽어서도 사랑을 받고 누군가는 살아있어도 사랑받지 못할까. 하지만 머지않아 깨닫게 되었지. 자신은 자신으로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걸. 어정쩡한 자세로 남자의 등을 쓸어내린 원빈은 그들을 멀찍이 지켜보고 있는 여자의 눈치를 보았다. 남자의 어머니인 여자는 상황이 아주 옳게 돌아가고 있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아도의 복제센터에서 살다가 죽는 결말만 생각했지 이런 식으로 지내게 될 줄은 몰랐다.

 

남자는 원빈에게 지극 정성이었다.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것처럼 광신도 같은 애정을 주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남자에겐 아픈 사정이 있었다. 그가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약혼자는 단순한 사고사로 죽은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웃으며 뛰어오던 약혼자가 그대로 들이받은 것이다. 하늘에서 추락하다 도로 위에서 20미터 남짓 밀려간 드론 택시에. 순식간에 혼비백산이 된 사고 현장에서 남자는 정신을 놓고 사람이 아닌 구조대원에게 물었다. 원빈이가 살 확률이 어떻게 되냐고. 피범벅이 된 약혼자를 실어 나르는 인공지능은 한 치의 거짓 없이 2 퍼센트라고 대답했다. 기적이 아닌 이상 살기 힘든 수치였다. 아니. 상식적으로 살려낼 수 없는 수치였다.

 

자신을 만나려다 사고를 당한 상황이라면 미쳐버릴 만도 했다. 남자는 제 약혼자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피아노를 더 이상 치지 못하는 것도 사고 후유증이라고 믿었고, 본인과 있었던 일을 기억 못하는 것도 모두 후유증이라고 믿었다. 남자는 약혼자가 제게 돌아온 것이 너무 기쁘면서도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죄책감이 깃든 사랑은 그를 광신도로 만들었다. 그는 유명세와 팬들의 사랑이 생명인 배우임에도 원빈에게 성인이 되자마자 부부가 되자고 했다. 부부가 되어 영원히 같이 살자고, 행복한 일만 만들자고 맹세했다.

 

"네게 어울리는 장미로 정원을 꾸몄어."

 

남자는 사랑을 했고

 

"네게 어울리는 코발트블루 색으로 집을 꾸몄어, 원빈아."

 

또 사랑을 했다. 나는 왜 이렇게 안쓰러운 사람을 좋아하게 돼버렸지. 원빈은 몽롱한 감각으로 저택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건 부부로서 함께 살 집에 처음으로 들어선 어느 날이었다. 원빈이 감탄하며 수많은 방과 나선형의 계단, 블루 색의 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1층 응접실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를 보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낀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마음이 불편해져 숨이 가빠지는 동안 남자는 원빈을 뒤에서 안아왔다. 어때, 마음에 들어? 그 물음에 원빈은 마음과 다른 답을 내놓았다.

 

"네, 마음에 들어요.."

 

아뇨.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나중에 너만 괜찮아진다면 이걸로 피아노 치자."

"좋아요."

 

이제 그를 잊고 나를 사랑해주세요.

 

"사랑해, 원빈아."

"저도 사랑해요."

 

지금 당신 곁에 있는 건 나인데 왜 나는 봐주지 않나요. 왜 나는 이런 식으로 당신 곁에 있을 수밖에 없나요. 저는 정말 당신이 사랑한 박원빈의 영혼이 담긴 그릇인가요. 제 영혼은 어디 있나요. 

 

그것이 있으면 저는 사랑받을 수 있나요.

 

"원빈아. 어릴 때 했던 약속 기억나?"

 

원빈이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환하게 걸리는 남자의 얼굴에 눈이 커졌다. 그의 뒤로 정원의 아름다운 꽃들이 수없이 피어있었다. 아. 이번엔 그 기억이다. 그를 좋아하다 못해 욕심이 커져 버린 날. 제 원형에게 질투가 나다 못해 실언을 해버린 날. 

그 날엔 유독 남자의 얼굴이 환했다. 싱그럽게 미소를 머금고 있는 표정은 햇살을 받아 더 아름다워 보였고 언제나 은은하게 퍼지던 향기는 그날따라 더욱 향긋했다. 좋은 날씨에 야외 테이블에 앉아 원빈과 마주 보던 그 남자는 너무도 다정한 품새로 손을 뻗어 머리에 묻은 꽃잎을 떼어주었다. 따뜻하고 다정한 손길은 다시 닿아와 원빈의 뺨을 쓸어주었다. 아름답고, 다정하고, 그 어떤 때에도 품위가 있던 남자.

 

"무슨 약속이요?"

"그 왜, 우리 어머니 집 정원에서 같이 가족 놀이 했을 때 있잖아. 너는 똑 부러진 남편 연기하고, 나는 다정한 남편 연기하고."

"..."

"그때 네가 이십 대 중반쯤 되면 뭐든 이뤘을 나이 아니냐고, 그때 되면 같이 정원에다 커다란 젤리 가게 만들어두자고 약속 했었잖아."

"..."

"왜에, 여보. 기억 안 나? 너무 귀여웠는데."

 

차라리 내 것이 아님을 알고 미워했으면 좋았을 텐데. 미워할 수도 없는 사람을 좋아해 버려서 나는.

 

"저 그런 약속.."

 

답답함이 터져 나온다.

 

"한 적 없어요."

 

차마 기억이 안 난다고 에둘러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그냥 알아주길 바랐다. 당신이 사랑했던 그 사람은 이미 죽고 없다고. 이제 나의 원형 박원빈은 보내주어야 한다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내가 당신의 아픔을 보듬어 주며 지탱해주겠다고. 사랑하겠다고. 그런 나를 사랑해주라고. 원빈은 점차 굳어가는 남자의 얼굴을 겁이 난 채로 지켜보았다. 남자는 단호한 원빈의 어조에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입을 열었다.

 

"아니야, 기억 해내 봐."

 

진즉 이상함을 감지한 남자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원빈은 한 번 더 말했다.

 

"기억 해낼 수 없어요, 성찬 씨. 저는 약속을 한 적 없으니까."

 

남자의 표정이 완전히 무너진다.

 

"그럼..."

 

생기가 돌던 눈에는 어둠이 짙게 깔린다. 원빈을 바라보는 눈이 흡사 허공을 보는 눈으로 바뀐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원빈이는 어딨어?"

 

그대로 눈앞이 암전.

 

캄캄한 어둠이 주변으로 깔렸다. 길은 잃은 채 앞으로 걸어 나가니 다시 주변이 환해졌다. 상황이 전환되며 제 두손에 찻잔과 다과가 담긴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원빈의 두손이 정도를 모르고 달달 떨리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그는 알았다. 왜냐면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봤으니까. 몸은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 성찬 씨. 부드럽게 호명하는 목소리도 입에서 나왔다. 원빈은 시어머니 집에서 열린 티 파티에 참여한 그날 자리를 비운 남자를 찾으려 집 내부에서 정원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트레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트레이와 찻잔이 땅을 굴렀고 신발 등이 쏟아진 홍차로 젖어 들었다.

 

성찬 씨.

 

멍하니 부르며 아주 고요해진 얼굴을 향해 다가간다. 남자가 정원에 놓인 테이블 옆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옆으로 주사기가 굴렀다. 원빈은 그와 지내며 단 한 번도 용기 내어 쓸어본 적 없는 남자의 뺨을 쓸어보았다. 차갑고. 고요하고. 잔인했다.

남자는 숨을 쉬지 않았고 그의 손엔 쪽지 하나만이 쥐어져 있었다.

 

'미안해.'

 

그가 남기고 간 말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 한마디조차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불확실했다. 원빈은 고개를 숙였고 또 눈앞은 암전 됐다.

 

이제 그만해.

 

다시 눈앞이 환해지자마자 고개가 돌아갔다. 철썩 소리와 함께 뺨이 부어올랐다. 제 어머니라는 박 여사는 원빈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내 아들 어디 있어? 네가 내 아들이 맞다면 이럴 순 없어. 네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해. 널 끔찍하게 사랑하던 네 남편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럴 리 없잖아. 도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거니? 가자. 분명히 뭐가 잘 못 된 거야. 신부님 찾아가서 네 영혼 제대로 네 몸에 담아지게 기도해달라고 하자. 아니면 굿이라도 해줘?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내가 40억 씩 들여서 네 목숨 만들어 둔 게 장난 같니? 어?

 

"죄송해요, 어머니, 안 그럴게요."

 

다들 그만해.

 

"완벽한 아들이 될게요."

 

두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사고 흐름이 모두 정지된다. 그만하라고 하고 싶으면서도 원빈은 순응의 말만이 나갔다.

 

"완벽한 박원빈으로 살게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있을 곳이 없다는 걸, 정말 완벽히 깨달았으니까. 

 

박 여사가 다시 팔을 들었다. 원빈이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아도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보였다. 옥죄어 오는 기분에 숨이 막혔다. 

 

그때 누군가가 원빈을 불렀다. 

 

 

"......원빈 님?"

 

 

원빈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에서 일어나 숨을 헐떡인다. 땀 범벅이 된 얼굴로 그가 흉통을 들썩였다. 이불을 손에 꽉 쥔 원빈이 숨을 고르며 소리 난 쪽을 바라보았다. 개어둔 옷가지를 든 맥스가 침대 앞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맥스...?"

"괜찮아요?"

"나, 뭐... 꿈꿨나?"

"악몽 꾸신 거 같은데요."

"아..."

 

이마의 땀을 닦고 가슴을 쓸어내린 원빈이 맥스가 건네주는 옷을 받아냈다. 여전히 숨을 고르는 원빈이 한숨을 푹 쉬었다. 또 악몽을 꿨다니. 기억이 안 나더라도 너무 괴로워. 그 생각을 하며 비워진 옆자리를 살피는데 눈치가 백단인 맥스가 알아서 필요한 설명을 해주었다. 

 

"수영 교실 등록해뒀다고 새벽부터 나가셨습니다."

"아아, 그, 그래...?"

"네."

"알았어. 아침 먹으러 내려갈게."

"네."

 

방을 나가는 맥스를 바라보며 원빈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성찬의 얘기를 듣자마자 방금까지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편히 진정되어 갔다. 성찬이 누웠던 자리를 쓸어보던 원빈은 자신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 금방 손을 거두었다.

 

*

 

1년 중 가장 마지막 계절이자 한 해의 시작을 함께하기도 하는 계절. 12월 중순, 태양의 남중 고도가 낮아지며 기온이 뚝 떨어진 겨울이 찾아왔다. 원빈은 다이닝룸 바깥으로 이파리 하나 없는 나뭇가지가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보며 그날 아침에도 어김 없이 맥스의 브리핑을 듣고 있었다. 

 

현 정부에서 인당 최대 두 명까지의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는 법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26년간 시행해온 1세대와 2세대의 인간 복제 방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3세대 방식을 이미 개발한 바 있다고 연구기관 측에서 발표 했었는데, 발전한 기술력에 따라 비용을 낮추고 기회를 더 확대하자는 의도로 보입니다. 또한, 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내후년 제 2의 복제센터를 위한 인공섬 착공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전망입니다. 반면 이와 같은 법안에 반기를 드는 현 정부 반대 진영 지지자들의 시위가 이어진 지 닷새 째입니다. 시위를 이끄는 주요 인물은 유전 공학 박사로......

 

걸죽한 수프를 입에 우물 거리는 원빈의 정신은 완전히 딴 곳에 가 있었다. 어려운 이야기가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최근 알 수 없이 흐드러진 감정 상태 때문에 기분이 조금 붕 떠 있었다. 먹다 말고 수프를 뒤적거리기만 하는 원빈의 모습에 맥스는 기계처럼 말하다 말고 브리핑을 그만두었다. 기다란 식탁 앞에 멀거니 서 있던 맥스는 아침을 먹는 원빈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옆에 놓인 화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형이 나보고 노바리아에 가재.."

"형이요?"

"성찬이 형.."

"아."

 

원빈이 숟가락을 내려두고 뒤 머리칼을 만지작댔다. 

 

"거긴 갈 수 없다니까 그럼 세아도에 가보재..."

 

그가 어린 아이처럼 머뭇거리며 중얼댔다. 어조에서 의도가 명확히 묻어나오지 않았지만 맥스는 화병에 꽂힌 생화의 모양새를 바로 잡아주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성찬 씨네 형제분이 물려 받은 제약회사는 30년도 더 전부터 복제체 연구기관에 물자를 지원하거나 투자를 하는 등 유착 관계가 있는 기업입니다. 세아도에 가시는 데에 명분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

"남에게 보일 구실을 그렇게도 만들 수 있다는 얘기인데, 정 그러시면 남편 생일 기념으로 잠시 여행 간다고 하세요."

 

예리한 카메라가 담긴 눈이 뻑뻑하게 감겼다가 뜨였다.

 

"어머니께 며칠간 여행으로 자리를 비웠다고 설명해 드릴게요. 다른 분들께도."

"..."

"이미 성찬 씨로부터 세아도 얘기는 스무번도 더 들었어요. 솔직히 언제 얘기하시나 했습니다.."

 

비서는 철저히 자신의 주인을 위한 말을 해주었다. 똑 부러질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감정 이해력이 높았다. 맥스가 두손을 뒤로 하고 얼차려 자세로 앞을 본다. 허공을 보다가 슬쩍 원빈을 보는데 역시 예상대로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맥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형이 그런 얘기를 너한테 했어?"

"뭐... 네."

"내 얘기도 혹시 해?"

"......음."

 

A사의 혁신 비서 안드로이드 맥스가 답지 않게 뜸을 들인다. 우수한 비서라지만 대답이 어려울 때도 있는 법이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원빈 님 얘기 밖에 안 하는데. 이걸 대답해 말아. 짧은 시간 동안 전력 소모를 꽤 할 정도로 자신이 이에 대한 대답을 했을 때 책임이 어떻게 돌아올 지 계산한다. 그러다 딱 핏기 하나 없는 입을 벌려 답을 내놓으려고 할 때 타이밍 좋게 당사자가 등장한다. 

 

1층 현관이 자동으로 열리며 무게감 있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기 맥스. 대문 앞에 뭔 기자가 나 붙잡고 무슨 법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냐고 한 말씀 해줬음 하네 마네 나한테 물어보는데 이거 어떻게 해. 벌써 그게 다섯 번 째...

응접실을 지나 다이닝룸까지 들어온 성찬이 멈추어 섰다. 수영 수업 후 씻고 오느라 생으로 축 처져 있는 갈색모를 그가 삭삭 쓸어 넘기며 눈을 굴렸다. 분위기 파악 중. 잘생긴 눈썹뼈와 이마를 훤히 드러낸 그가 고개를 갸웃한다.

 

"응? 왜?"

 

성찬을 빤히 보던 원빈과 맥스는 약속이라고 한 듯 동시에 좌로 우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녜요. 그냥 저희 세아도 얘기 했어요. 원빈의 입에서 어색한 대답이 나오고 정적이 흐른다. 성찬은 맥스를 향해 눈을 두어번 깜빡이더니 원빈을 내려다보며 점차 미소 짓는다. 그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래? 우리 가는 건가?

 

원빈이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하는 그의 모습에 성찬이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원빈의 머리를 확확 쓰다듬다가 자리를 뜬다. 부스스해진 머리칼 아래로 바둑알 같은 눈이 동그랗게 뜨여 눈치 보듯 맥스 쪽으로 굴렀다. 맥스는 아무 것도 못 본 척 하며 헛기침 했다.

 

"그래서 언제 출발 하시죠?"

"글쎄... 내일?"

 

열어젖힌 커다란 트렁크 가방 안으로 옷가지가 꽉꽉 채워진다. 출발은 내일도 아니고 당장 그날 오후였다. 며칠간 스케줄이 어떻게 되냐는 성찬의 물음에 별일 없다고 답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내일 간다 생각하는 것도 엄청난 즉흥성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바로 떠나자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 원빈은 툴툴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입을 옷과 필요한 용품을 챙겨 넣었다. 집을 관리하는 안드로이드 맥스들을 모두 불러 자신이 집을 비울 동안 해야 할 일을 일러주기도 했다. 음식 보관, 청소, 빨래, 침구 교체 같은 집안일과 손님이 찾아올 시 응대법 등등. 말하는 동안 원빈은 불안하면서도 떨렸다. 어디 멀리 가는 건 2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전엔 간간이 여행을 갈 일이 있었지만 최근 2년 동안은 집에 꼼짝없이 묶여있는 신세였다. 멀리 나갈 기회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원빈의 부부생활을 늘 감시하는 박 여사에겐 맥스의 말처럼 남편 생일 기념으로 여행을 떠나는 거라 전하기로 했다. 원형 정성찬의 생일은 12월 15일로 그날로부터 이틀 후였다. 적당히 부부끼리의 오붓한 여행으로 동해 쪽을 다녀온다고 하면 집을 비우는 사유로 문제 없을 터였다. 맥스는 알아서 잘 대처하겠다면서 걱정 말라는 말을 해주었다. 원빈도 맥스가 최고의 비서이니만큼 그 부분에 대해서 안심하기로 했다. 

 

떠날 채비를 모두 끝낸 원빈은 2층 창문의 커튼을 열어젖혀 저택의 대문 밖을 바라보았다. 집 내부와 대문의 거리가 멀었기에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울타리 틈 사이로 사람 실루엣이 보이는 듯했다. 뉴스가 시끄럽더니. 역시 기자가 왔나. 아침에 성찬이 말한 기자는 매년 배우 정성찬의 행보에 관심을 기울이는 언론사 측에서 보낸 기자로 보였다. 복제체 제작의 윤리성이 떠오르는 시점이었으니 복제인간 관련 정책의 홍보대사였던 배우 정성찬의 의견이 궁금한 것이다. 언론사가 원하는 답이야 뭐든 자극성이겠지만 대중이 원하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복제센터에 갇힌 복제인간을 어떻게든 물건 취급하며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것. 자신의 위치가 위협받는 상황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원하지 않았기에 세상은 유명인이 한명이라도 더 나서서 이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주길 원했다. 원빈은 어려운 세상사라면 머리가 아팠지만 모두 전담 비서 맥스가 알려주어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었다. 

 

사람의 욕심도. 그걸 허락하도록 만드는 그럴싸한 합리성도. 그리고 성찬과 원빈이 입을 다물고 있어야 목숨 부지하며 살 수 있단 사실까지.

 

원빈은 한숨을 쉬며 커튼을 도로 닫았다. 먼 길을 떠나려면 개인 항공기 노바를 타고 비행해야 하는데 집 밖을 나가 모습을 보이면서 타고 싶지 않았다. 준비를 다 해놓고 성찬을 부르길 망설이는 원빈은 잠시 후 창밖에서 들리는 똑똑 소리에 화들짝 놀라 두손으로 커튼을 활짝 열었다.

 

성찬이 안을 들여다보며 웃고 있었다. 갈 준비 다 했어? 입 모양으로 말하면서. 그는 노바를 탄 채로 2층 창가에 상체를 내빼고 있었다. 위험하게 노바의 문을 다 열고 몸을 기울이는 모습에 원빈이 기겁한다. 다급하게 창문을 연 그가 성찬을 말렸다.

 

"그러다 떨어져요!"

"에이, 안 떨어져."

 

성찬이 아랑곳 않고 손을 내밀어 보였다. 웅웅 소리를 내며 허공에 떠 있던 노바가 천천히 창가 난간에 높이를 맞춘다. 열린 창을 통해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휘날렸다. 

 

"뭐해? 어서 가자."

 

원빈이 내민 손을 본다. 성찬이 발 한쪽을 창가 난간을 딛으며 팔을 더 뻗어왔다. 원빈은 그의 호기로운 행동에 목덜미를 잡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잠깐 비켜봐요."

"응?"

 

원빈이 묵직한 트렁크를 들어 창밖으로 던졌다. 야야야.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피한 성찬이 노바 안으로 쿵 소리를 내며 안착한 트렁크를 바라본다. 원빈은 성찬이 안 보는 틈을 타 내민 커다란 손을 꽉 잡았다. 창틀과 난간을 밟으며 위로 오른 원빈이 발돋움 하며 성찬을 향해 뛰어든다. 곧 몸이 겹치면서 뒤로 넘어가고 노바의 문이 닫혔다. 원빈은 몸을 일으키며 제 아래를 향해 슬쩍 웃어 보였다. 저 잘했죠, 하고 묻는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멍하니 보던 성찬은 이내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유달리 유난스러운 탑승이었다.

 

"옷 잘 챙겼어요?"

"응."

"잠옷도?"

"응."

"갔다가 저희 다시 잡혀들어가면 어떡하죠?"

"그럴 일은 없지."

"약간 무서운데."

"괜찮을 거야."

 

도심의 빌딩을 내려다볼 만큼 붕 떠오른 항공기는 일정한 속도로 앞을 향했다. 강원도를 지나 동해를 거쳐 섬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걸렸다. 그 여정 속에서 원빈은 여러 걱정을 늘어두다 말고 묵혀둔 질문을 꺼내기도 했다.

 

"원래 그렇게 겁이 없어요?"

"나?"

 

창밖의 구름을 구경하던 성찬이 뜻밖이라는 듯 원빈 쪽을 본다. 그는 잠시 생각에 빠져 허공을 비스듬히 보다가 대답했다.

 

"나 원래 겁 많아. 너무 많아서 오히려 겁 없어 보일 때가 있을 뿐이지."

"겁 많아요?"

"나 완전 겁보야."

 

성찬은 민망한지 손으로 턱을 긁적였다.

 

"섬에 있을 때도 하루하루가 너무 숨 막힐 듯이 무서워서 자꾸 나가려 했던 거야."

"그래요? 그렇다고 무모해져요?"

"가끔?"

 

원빈은 그런 성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 물었다.

 

"헤엄칠 줄 모르는데 수영장에 뛰어들었던 거는요?"

"그건 네가 어떻게 될까 봐 무서워서?"

"그게 왜 무서워요. 그땐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으면서."

"그치만.. 네가 너무 슬퍼 보이고 위태로워 보여서 마음 쓰였던 걸 어떻게 해."

"저한테 마음이 쓰였어요...?"

 

성찬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그의 입이 달싹이다가 도로 다물어지며 대화에 마가 떴다. 원빈도 그가 처음 하는 고백에 손을 꼼질대며 성찬의 발치만 흘끔거렸다. 이게 지금 무슨 분위기지. 어색해진 공기에 목을 가다듬은 원빈은 아까의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아.. 알겠어요. 아무튼 형도 사람이긴 했네요. 생각보다 겁이 있다고 하니."

"..."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여전한 정적에 원빈의 눈이 옆으로 돌아갔다. 뭐야. 왜 아무 말이 없지. 곁눈질 하며 성찬을 보는데 그가 턱을 괴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머쓱해진 원빈은 앞에 달린 스크린을 바라보며 항공기의 경로를 재차 확인해보았다. 삑삑. 목적지 설정을 눌러보는 동안 성찬이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네가 그 사람 부르면서 울었던 것도 마음 쓰여."

 

노바의 스크린을 터치하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원빈의 눈이 커진다. 조심스럽게 전해지는 목소리가 허공에서 흩어지며 노바의 하늘을 가르는 우웅 소리만이 주변을 메웠다. 원빈은 앞으로 뻗던 손을 말아쥐었다. 내가. 울었었구나. 그제야 그날 아침에 꾼 꿈이 생각이 났다. 화사하게 반짝 빛나던 사람이 차갑게 식어있는 꿈. 매번 의연하게 덮어둔 것 같다가도 한 번씩 그 꿈을 꿨다. 아려오는 마음에 숨 쉬던 것도 잊고 가만있으니 성찬이 말을 이었다.

 

"네가 그 사람 많이 좋아했단 것도 알고 그 사람이랑 무슨 일 있었다는 것도 알아."

"..."

"그래서 네가 불편할까 봐 물어보진 않으려고 했는데."

"..."

"생각보다 많이, 신경 쓰여."

 

성찬이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원빈에게 몸을 돌렸다. 제게 가닿는 시선에 원빈도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원형 정성찬과 똑같은 얼굴이 짐짓 진지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괜찮다면 말해줄 수 있어? 무슨 일 있었던 건지."

 

하지만 같은 얼굴에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를 바라보는 원빈의 목뒤가 따끔거렸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물어오는 성찬의 말에 원빈은 고민을 길게 하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그 사람, 제가 죽게 만들었거든요."

 

꺼낸 얘기는 아주 긴긴 이야기였다.

 

*

 

겨울 바다를 건넌 노바가 상공에서 해안가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세아도의 땅에 착륙한 항공기는 천천히 문을 열어 섬의 공기를 밀려들어 오게 했다. 순식간에 바닷바람을 맞은 성찬과 원빈은 짐 한 짝씩 들고 내리며 섬의 관리인부터 대면했다. 안드로이드로 보이는 그 관리인은 손을 내밀어 보이며 개인 항공기를 맡기고 검문을 받으러 가라고 일러주었다. 두터운 외투에서 키를 꺼내 건넨 원빈은 꾸벅 인사하며 성찬과 함께 발을 옮기기 시작한다.

 

성찬이 말이 없었다. 올 때 원빈이 긴 얘기를 하는 동안에도 말이 없었지만 지금은 더 말이 없었다. 원빈은 괜히 분위기를 묵직하게 만든 거 같아 눈치가 보여 소소한 대화라도 쉽사리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2118년 이후 8년 만에 섬에 와보는 거라 그동안 변한 점을 물어보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원빈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해안가 안쪽을 향하는 동안 저 멀리 띄엄띄엄 자리한 건물들이 보였다. 음식점과 숙소로 보이는 그 건물들은 섬의 목적성과는 다르게 굉장히 평범하면서도 평화로워 보였다. 그 너머로는 깊이가 헤아려지지 않는 숲과 높다란 회색 벽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필시 저 벽은 복제체들의 이탈을 막는 벽이겠지.

 

한번도 바깥에서 본 적이 없어 낯설게 느껴지는 원빈은 높이를 가늠하다 조금 탄식했다. 착륙한 섬의 위치는 성찬이 길러지고 가둬졌다던 B 구역 인근의 해안선이었다. 원빈이 열여섯이 될 때까지 지냈던 A 구역과는 다른 위치라지만 같은 수직구조물을 공유하고 있는 곳이다. 때문에 원빈의 기억이 맞다면 그 벽의 높이는 그동안 몇 미터는 더 높아진 것이 맞았다. 아주 더 장엄하게. 숨 막히게.

 

형은 어떻게 매번 바깥으로 뛰쳐나올 수 있었을까.

 

검문 장소에 도착하자 이번엔 사람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작도 전에 그들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본 그는 의외라는 듯 성찬을 쳐다보았다.

 

"관광인가요?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나요?"

 

실물 신분 카드 두 개를 내밀자 양손으로 받아서 든 그 남자가 카드 위에 입체로 뜨는 얼굴과 몸 전신 외관, 생년월일과 거주지역 등의 정보를 확인한다. 모두 원형 인간의 것이었다. 원빈은 축 처져있던 성찬을 대신해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성찬은 의외로 능청스럽게 곧잘 대답을 늘어두었다.

 

"저희가 복제기관에 대한 후원을 고민하고 있는데, 미리 둘러봐야 할 거 같아서요. 센터 내부도 들리고 관광도 할 겁니다."

"아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남자가 카드를 돌려주며 목에 거는 명찰도 하나씩 건네주었다. 센터 내부에 들어갈 때 외부인이 하는 명찰이었다. 자연스레 자리를 이동하며 남자에게서 멀어졌을 때 원빈이 성찬을 향해 속삭였다. 

 

"거짓말이 너무 술술 나오는 거 아니에요?"

"네가 다시 잡혀들어가는 거 아니냐고 걱정 했잖아. 확실하게 거짓말 해두면 좋지."

 

성찬은 원빈에게 씩 웃어 보였다. 미소 짓는 모습을 보니 걱정한 만큼 축 처져 있던 건 아니었나 보았다. 안도의 한숨을 쉰 원빈은 성찬와 함께 주변으로 발품을 팔며 이틀 밤 동안 머물 숙소부터 찾았다. 얼마간 조건을 따져본 후엔 몇 분 더 걸으면 있는 호화로운 호텔보다도 해변과 가까운 수수한 펜션을 택했다. 며칠간 예약이 비어있다던 그 2층짜리 아기자기한 펜션을 결제할 때엔 원빈의 기분이 이상했다. 잠깐 노바리아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성찬의 친구들도 볼 겸 왔다지만 이렇게 정말 평범한 여행 느낌으로 올 줄은 몰랐다. 안에 들어가 짐을 푼 원빈은 제 목에 걸린 명찰을 내려다보았다. 제 원형이 물려준 권리와 혜택이 이렇게 작용할 줄이야.

짐을 풀고 한숨을 돌린 뒤엔 펜션 뒤로 있는 숲 사이를 걸어 복제센터로 들어가는 입구를 향했다. 장엄한 벽 내부로 들어가는 커다란 문이었다.

 

"근데 원빈아. 너 조금 충격 받을 수도 있어."

"네?"

 

명찰을 검사 받으며 그 문이 열리기 직전 원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를 내려다보는 성찬은 자세한 설명 대신 그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

 

센터 내부를 구경하기 위해서는 정장을 입은 안드로이드의 안내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그들의 안내를 맡은 여성형 안드로이드의 이름은 엠마. 엠마는 낭랑한 목소리로 안내 경로에서 이탈할 경우 경비원이 호출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말부터 했다. 단호한 경고를 은은한 미소와 함께 전하는 모습에 섬뜩해지는 것도 잠시, 성찬과 원빈은 눈 앞에 펼쳐지는 넓은 들판과 저 멀리 밀집해 있는 유선형의 커다란 건물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주변으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엠마를 따라 사람들을 향해 다가갔을 땐 어린 아이들이 달려와 배꼽에 손을 대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여."

"..."

 

여섯살 남짓으로 보이는 한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고 배시시 웃어 보인다. 그 아이의 한쪽 손목엔 수갑 같은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성찬은 손을 흔들어 인사해주었지만 원빈은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안면이 굳어버렸다. 어떻게 반응해줘야 할지 몰라 그가 무릎을 짚으며 상체를 숙여주는데 아이들은 꺄르륵 웃으며 도망갔다. 너무 잘생겼어어.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중에도 원빈은 표정을 풀 수 없었다. 그는 몸을 바로 세우면서 성찬의 손부터 살살 잡았다. 닿자마자 움찔 놀란 성찬이 원빈을 쳐다본다. 원빈은 시선을 아래로 하면서 커다란 몸을 향해 가까이 붙었다.

 

"저 좀 무서워요.."

 

성찬의 귓바퀴가 붉게 물드는 것도 모르고 그가 작게 속삭였다. 성찬은 눈을 가만히 두지 못하면서도 손을 꽉 잡아주었다. 괜찮아. 금방 끝날 거야. 무엇이 무섭다는 건지 단박에 이해한 성찬이 온기를 전해주며 나긋하게 말했다. 원빈은 그에게 의지하며 걸으면서도 입을 우물거렸다. 금방 끝난다는 게 무슨 말일까..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세아도의 복제센터는 복제체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각 개체에 알맞은 아침, 점심, 저녁 식사와 간식을 제공하고 있으며 3개월에 한번 시행되는 정기 검진을 통해 주기적으로 식습관 및 생활 습관을 조정하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건강관리센터입니다. 이쪽은 피트니스 센터입니다. 보시면 여기가 키, 몸무게, 시력, 청력, 혈압 등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최고의 의료진이 상시 대기 중입니다. 불시에 상처가 나더라도 흉터 하나 남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치료합니다. 엠마는 호선을 그린 입매를 내리지 않고 차분히 설명해 나갔다. 설명을 듣는 동안 죄수복 같은 옷을 입은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외부인 명찰을 찬 성찬과 원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성찬은 그들에게 한 번씩 눈인사를 보냈지만 원빈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몸만 움츠렸다. 엠마는 건물 두어개를 지나 유난히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높다란 건물을 향했다. 여기는 교육 시설입니다. 설명이 나오자마자 원빈이 침을 꿀꺽 삼키고 두손으로 성찬의 팔을 쥐어 잡는다. 그가 겁을 먹는 건 그런 마음 때문이었다. 복제체들은 자신이 '제품'임을 알고도 현실에 반항하지 못하는 무력함을 배우며 성장해야만 했다. 그 환경 속에서 자랐던 원빈은 외부인의 시선으로 이 광경을 8년 만에 마주하게 되며 숨이 턱 막히게 되는 거다. 

 

이정도로 물건 취급을 당하며 자랐구나. 그 사실을 적나라하게 체감하면서. 

 

게다가 이곳에서 지내는 복제인간들의 미래를 알기에 더욱 속이 미식거렸다. 원빈은 교육 시설의 승강기를 타고 위층으로 이동하며 투명하게 보이는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평범하게 숨 쉬는 인간들이 평범하게 웃으며 뛰어놀고 있었다. 원빈도 세아도에서 마냥 울지만은 않았다. 이곳이 지옥임을 알면서도 소소하게 즐거운 일상 정도야 있었다. 그래서 더 애처로운 것이다. 복제체로서의 삶이.

 

"괜찮아?"

"..."

 

성찬은 갈수록 안색이 안 좋아지는 원빈을 두고 걱정스레 물었다. 원빈은 커다란 눈을 올려 뜨며 고개를 옅게 저었다. 그를 바라보는 성찬이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네가 이 정도로 힘들어할 줄 알았으면 미리 이런 시간을 빼볼 걸. 근데 다 필수로 안내 받아야 하는 거 같더라구. 원빈은 성찬의 손길에 눈을 끔벅끔벅 감았다 뜨며 조금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형 근데 놀자면서요. 여기서 어떻게 형 친구들이랑 놀아요. 이런 식이면 멀리서 인사하는 것 말고는 말 한마디 제대로 붙이는 것도 못하겠구만.. 승강기에서 내려 앞서 걷는 엠마 뒤로 둘끼리만 겨우 들을 수 있도록 잔뜩 낮춘 목소리로 그런다. 성찬은 대꾸 없이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걸었다. 그가 칭얼댐을 귀엽게만 보며 소리 없이 웃는다. 

성찬과 원빈은 하얀 복도를 지나 수많은 교실을 맞닥뜨렸다. 엠마는 그중 한 교실을 가리키며 가르치는 과목이나 교육 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짧게 설명하고 자리를 뜨자 원빈이 교실의 복도 창문으로 다가갔다. 열 명 남짓의 사람이 앉은 채로 선생의 수업을 듣고 있는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선생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복제체로서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해야 하는 거예요. 내 몸을 언제 자신의 원형에게 내어줄 지 모르니까요. 알겠나요?

네. 사람들이 맥 없이 대답한다. 원빈도 이와 같은 가르침을 받았었다. 그건 성찬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언젠가 몸의 일부나 전체를 내어줄 날이 올 것이니 제 몸을 소중히 하며 그날을 얌전히 기다리라는 가르침. 몇 살 때 그 말을 들었던가. 아마 태어났을 때부터 꾸준히? 그러니 점차 가서는 귀찮고 맥없는 대답이 나오는 거지. 저 사람들처럼. 원빈은 세아도 바깥세상에 있는 보편적인 교실과 다를 바 없는 내부를 둘러보다 몇몇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흠칫 놀라 눈을 돌렸을 땐 그게 성찬을 바라보는 시선임을 알았다. 성찬은 제 뒤로 바짝 붙어와서 원빈의 머리 너머로 커다란 손을 휙휙 흔들고 있었다. 이쪽을 보는 젊은 남자와 여자들, 그리고 어떤 할아버지가 피식 웃어 보인다.

 

"아는 사람이에요?"

"응. 저 할아버지가 바바 할아버지. 맨날 듣는 거 또 듣느라 졸았나 보네."

"그래요? 어떡해요. 이렇게 인사만 할 수 있어서.."

"그러게. 네가 궁금하단 거 물어봐야 하는데."

 

엠마가 왜 뒤를 따라오지 않느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경비원이라도 부를까 봐 겁이 난 원빈이 성찬을 잡아 끈다.

 

"근데 A 구역이랑은 많이 다르지 않아? 듣기론 시스템이 다르다던데?"

 

성찬은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허. 이런 잔인한 현실 앞에서도 그럴 수 있는 성찬이 원빈은 그저 신기하다. 

 

"여기가 좀 더 시간적으로 여유로운 거 같긴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잘 웃나."

"그래? 여기 사람들은 살아만 있으면 1분이라도 더 웃자 주의거든."

"형이 잘 웃는 게 다 이유가 있었네요."

"그런가. 그럼 네가 있었던 곳엔 너 같은 애들이 많아?"

"나 같은 게 뭔데요?"

 

원빈이 또 성찬의 한쪽 팔을 두손으로 감싸 잡으며 걷는다. 엠마를 바짝 뒤따른 그들이 보폭을 맞추며 얌전히 걸었다. 원빈은 질문을 해놓고 은근 어떤 답이 나올지 기대했다. 성찬은 제 옆에 있는 원빈의 눈동자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들여다본다.

 

"몰라. 그냥 신기해."

"......네?"

 

원빈의 뺨이 붉어지려는 찰나 엠마가 승강기로 돌아가는 복도를 걷다 말고 별안간 멈추어 섰다. 금발을 높게 올려묶어 드러난 목덜미엔 제조회사 로고가 박혀 있다. 그 로고만 없다면 완벽히 사람 같을 엠마가 뒤돌아 에메랄드빛 눈을 내보인다. 원빈과 키가 엇비슷한 안드로이드의 입이 열리고 음성이 나온다. 기본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추가 안내를 원하시나요?

 

"아뇨, 저희 여기까지만 볼게요."

 

성찬의 말에 엠마는 끄덕였고 원빈은 황당한 눈빛을 했다. 이대로 끝이라고? 아무 것도 못했는데? 도로 승강기를 타고 1층에 내려가는 동안 성찬은 저를 올려다보는 원빈의 이마를 장난스레 톡 쳤다. 이마를 문지른 원빈은 그럴 거면 뭐 하러 세아도까지 온 거냔 얼굴을 했다. 건물을 나가 겨울철에도 건실한 풀밭을 걸으면서도 표정이 못마땅하다. 엠마의 안내로 센터 밖으로 향하는 문을 통과할 땐 성찬의 팔이 원빈의 어깨를 묵직하게 눌렀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원빈을 부른다.

 

"원빈아."

"네?"

"내가 이따가 진짜 재밌는 거 보여줄게."

"그. 그게 뭔데요."

"지금은 비밀."

"..."

 

뭐야. 따로 뭐 계획이라도 있나. 의문만 무성하여 눈을 가늘게 떠 보이자 성찬이 배를 잡고 파하하 웃는다. 호쾌한 모습에 원빈은 눈을 흘겼다. 

 

"이젠 기운을 다 차렸나 봐요. 처음 왔을 땐 말도 없더니."

"아아. 그땐 너 얘기 듣고 생각이 좀 길어졌었나 봐."

"..."

"내가 위로엔 소질이 없거든."

"위로 안 해주셔도 되는데."

"어떻게 그래."

 

네가 왜 잘 안 웃는 지 알게 됐는데. 성찬이 침엽수가 가득한 숲을 지나며 뾰족한 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무심한 듯 깊은 곳을 건드는 말이다. 원빈은 나뭇가지를 주워 애먼 나무줄기를 툭툭 친다.

 

"근데 제가 다 자초한 일인데요, 뭘."

"자초라니. 네가 뭘 했다고?"

"욕심낸 게 잘못이잖아요."

"그러니까 뭘."

"뭣도 없이 사랑받길 원한 거요."

 

성찬이 잠시 숨을 삼킨다.

 

"네가 왜 뭣도 없어."

"..."

"그런 생각 들게 만드는 사람 이제 좋아하지 마."

"..."

"울게 만드는 사람 말고.. 친구 사귀더라도 너 웃게 만드는 사람 사겨."

"얘기가 왜 그렇게 튀어요.."

"왜? 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형이랑 잘 지내라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맞긴 해."

 

슬쩍 웃는 성찬의 얼굴을 원빈이 훔쳐보았다. 세아도의 하늘보다 그의 얼굴이 더 환해 보였다. 

 

"심지어 너는 내가 없으면 아예 안 되겠더라?"

"네?"

"아까 보니까 바들바들 떨면서 나한테 매달리던데?"

"누가 바들바들 떨었다고......"

"그걸 보다 보니까 웃음이 막 나오더라, 내가."

 

성찬이 고개를 기울여 눈높이를 맞춰왔다. 그를 훔쳐보던 원빈이 기를 써서 안 본 척을 한다. 성찬은 쿡쿡 웃으며 원빈의 어깨를 살며시 밀었다. 그 장난에 몸이 밀린 원빈이 저도 픽 웃어버린다. 어. 웃었다. 웃었다. 손으로 가리키며 눈을 접는 얼굴에 원빈은 도리질했다. 안 웃었. 안 웃었어요. 말할수록 웃음이 터진 그는 결국 뛰듯이 앞서 걸었다. 민망함에 손등으로 턱을 문지르며 뒤돌아 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요! 그의 목소리와 바다의 파도 부딪는 소리가 섞여 울렸다.

 

세아도는 복제센터가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섬이었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섬이라지만 석양이 깔린 풍경부터 그림이나 다름 없었다. 너른 바다와 유화 물감으로 정성껏 찍어낸 듯한 노르스름한 구름이 맞닿는 수평선이 꿈결 같다. 그 풍경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음식점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칼국수를 앞에 두고 소소한 이야기가 오간다. 어디서 들어보니까 사람들은 백 년 전 세상을 그리워한대. 그래요? 왜 하필 백 년 전이래요? 몰라, 그때가 낭만적인 시대였대. 입에 면을 한가득 넣느라 한쪽 볼이 볼록해진 원빈이 재밌단 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세상에 낭만적인 시대라는 게 있긴 했네요.

음식점 안에 손님들은 대개 섬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섬의 검문 직원, 센터 관리인, 숙소 운영자 등등. 그들은 이쪽을 흘긋 보다가 말기를 반복했다. 성찬은 신경도 안 쓴단 얼굴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요새는 기술이 너무 발전했다잖아. 그래서 뭐가 나와도 사람들이 아무 감흥이 없대."

"음."

"21세기에는 그래도 신기술이 나오면 사람들이 박수갈채 쳐줬나 봐. 근데 사람들 보면 우리 맥스 같은 애를 봐도 별로 안 신기해하고."

"하긴 그러네요. 맥스 진짜 똑똑하고 신기한데."

 

노바리아라는 것도 맥스가 알려줬거든요, 저는. 

진짜? 지나가듯 말하는 원빈의 말에도 성찬이 반응해준다. 원빈은 면을 다시 집기 전에 맞은 편에 앉은 성찬을 가만히 응시했다.

 

"복제인간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도 사람들이 신기해했을까요?"

"글쎄. 잘 모르겠네."

 

성찬은 눈을 위로 굴리며 기억을 더듬는다. 뭔가를 떠올린 그가 한쪽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아이리스로 내 원형 모습 봤을 땐 되려 내가 신기하긴 했어."

"아이리스요..?"

"응. 3년 전쯤 녹화된 파일 있어서.. 봤는데 기분 이상하더라구."

"아아.."

"미안. 어쩌다 보니 봤거든."

"미안하긴요. 제 불찰이죠."

 

파일 남겨진 지도 몰랐어요. 원빈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면서도 곧 입을 다물었다. 소소한 대화라지만 뭐가 있다 생각하여 좀 전의 대화나 이전의 대화를 한참 곱씹는다. 식사가 끝나가며 둘이 번갈아 물을 마셔대는 동안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많이 신경 쓰여요? 제 전남편."

 

캑캑. 

 

물컵을 기울이던 성찬이 사레들린 소리를 냈다. 몸을 수그려 기침하는 소리가 이어진다. 손등으로 입을 닦은 그가 몸을 일으켜 보이자 얼굴이 조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동자가 비스듬히 허공을 향한다.

 

"아니?"

"..."

"...음."

"..."

"......응."

 

원빈이 물컵을 든 채로 정지했다. 이 사람 왜 이러지? 그렇게 신경 쓰일게 있나.. 더 묻기도 전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성찬이 벗어둔 외투를 허둥대며 입는다. 원빈이 골라줬던 모직 코트를 걸쳐 입고 모양새도 바로잡은 그가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말했다. 다 먹었으면 가자..

 

"뭔가 많이 신경 쓰이면 저한테 말하세요."

"에이, 아니야."

"형도 나한테 좋은 말 많이 해줬잖아요."

"아이.."

"나도 해줄 테니까."

"괜찮다니까, 원빈아."

 

해가 자취를 감춘 하늘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사내 두 명이 어둑해진 해변을 따라 걷다가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를 밟으며 걸었다. 거센 겨울바람에 머리칼과 코트 자락이 나부낀다. 졸졸 따라오며 외치는 원빈의 말에 성찬이 더 큰 보폭으로 앞서 걸었다.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원빈이 뛰듯이 따라붙는다. 애매한 추격전이 이어지다가 성찬이 결국 그를 돌아본다. 이리와. 잡아채듯이 원빈의 두 팔을 붙잡은 성찬이 원을 그리듯 빙 돌린다. 마주 본 채로 돌아가는 원빈이 악 소리를 지른다. 뭐해요! 그를 보며 폭소를 터트리는 성찬이 몇 바퀴 더 돌리다 말고 도망갔다. 그냥 놀자고!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성찬이 모래에 발이 박힌 채 넘어진다. 이번에 웃음을 터트린 건 그걸 본 원빈 쪽이었다. 그러게 왜 장난쳐요! 일어나려는 성찬의 어깨를 뛰어가서 누른다. 뭐가 웃긴 건지 둘이서 모래 위를 구르듯 장난을 친다. 신발이나 외투나 이미 모래 범벅이다. 누구든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놀았다. 그들 뒤로 바닷물이 쏴아 소리를 내며 밀려들어 왔다 나가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재밌는 거 언제 보여줘요?"

"그건 이따가?"

"벌써 너무 늦었는데."

 

추위를 잊고 뛰어놀기만 해도 벌써 달빛이 찬란한 밤이었다. 이대로 밖에만 있다간 감기에 걸릴 거 같아 숙소로 돌아간다. 원빈은 옷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이거 보면 품위 없게 놀았다고 맥스가 뭐라하겠다.. 성찬은 제 옷을 보다 말고 원빈의 머리칼을 조심히 털어주었다.

 

"넌 이미 재밌게 다 논 거 같은데? 여기까지 다 묻히고."

"형이 더 심하거든요?"

 

어이없단 듯이 헛웃음을 친 원빈이 함께 팔을 뻗어주었다. 저보다 키 큰 성찬의 머리칼을 만져주려 하자 갈색의 눈이 반짝 빛난다. 진짜? 많이 묻었어? 놀란 척 묻는 성찬이 머리를 숙여주었다. 원빈은 순진하게 두손을 다 써가며 정성껏 부드러운 머리칼을 슥슥 쓸어준다. 만져지다 말고 고개를 슬그머니 들며 헤헤 웃는 얼굴엔 황급히 손을 뗐다. 저희 들어가서 일단 씻어야겠어요. 펜션 문을 열고 들어간 원빈이 머쓱한 걸음으로 2층까지 올라간다. 저 여기서 씻을 테니까 형 1층에서 씻어요! 2층 난간에서 성찬을 내려다보고 말한 원빈이 숨듯이 들어가 버렸다. 성찬은 뒷머리를 헤집으며 실실 웃었다.

 

대체 그놈의 재밌는 건 언제 보여주겠다는 걸까. 깨끗이 씻고 머리까지 말린 원빈은 2층 침실에 풀썩 몸을 던져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 떴다. 온몸에 피로가 퍼져오는 기분에 눈꺼풀이 천근만근 했다. 형은 다 씻었나? 물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눈을 감으며 깜빡 잠에 빠져버렸다. 잠결에 이불을 덮어주는 손길을 느꼈음에도 곤히 자버린 원빈은 새벽이 올 때까지 단 한번 깨지 않고 색색 소리를 내며 잤다.

 

그리고 새벽 두 시쯤. 누군가 제 곁으로 와 어깨를 흔들었다. 원빈아. 박원빈. 반복해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뜬 원빈이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킨다. 형.. 왜요? 어둑한 침실로 찾아온 성찬을 졸린 눈으로 바라보며 묻자 앞에서 볼을 한번 꼬집어왔다. 

 

"지금 가야 해."

"어디를요?"

"내 친구들 만나러."

"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가 머리를 긁적인 원빈이 맹한 표정만 지었다. 성찬은 그의 부스스한 머리를 쓰다듬어 정리해주고 한 번 더 양 볼을 꼬집었다. 어서 옷 입고 가자. 외출복을 품 안에 안겨준 성찬이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원빈은 역시 꿈인가 보다 생각하면서도 군말 없이 옷을 입고 그를 따라갔다.

 

바깥을 나가자 하늘 위로 별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공기가 맑은 곳에 와있으니 은하수 같은 밤하늘이 선명히 보인다. 원빈이 목을 젖혀 점점이 밝은 빛을 눈에 담는 동안 성찬이 팔을 잡아끌어 주고 있었다. 숲으로 들어가자 나뭇잎으로 하늘이 드문드문 가려졌다. 젖힌 목을 세워 주변을 보니 여기가 어딘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센터 내부로 들어가는 숲속 오솔길이었다. 여기를 왜 다시? 의문이 들 때쯤엔 성찬이 방향을 틀어 길이 없는 곳을 헤치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두운 숲속을 거침없이 들어가는 그의 모습에 원빈이 침을 꿀꺽 삼킨다.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려고. 가면 갈수록 나무들 너머에 있는 거라곤 거대한 회색 벽 밖에 없다. 거기로 가봤자 하늘에 닿을 것만 같은 그 벽을 넘을 방법은 없었다.

 

"여기 어디쯤인데.."

 

그런데 성찬은 뭔가를 자꾸 뒤적거린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두꺼운 벽을 두고 그가 땅을 향해 몸을 숙였다. 발에 채는 풀숲을 손으로 헤쳐보는 그의 행동이 사뭇 진지해 보여 말릴 수도 없었다. 한참 후 문득 뭔가를 발견한 그가 뒤에 있던 원빈을 돌아보았다. 성찬이 검지를 입술에 대며 속삭인다. 놀라더라도 소리 지르면 안돼.. 알았지? 그 말을 하는 얼굴이 희미한 달빛을 받아 도자기처럼 희고 고왔다. 예쁘게 빚은 인형처럼. 동시에 눈빛이 호기롭고 생기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원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웃음을 지어 보인 성찬이 두 팔을 땅으로 쑥 넣어 뭔가를 잡아 뽑았다. 아니. 잡고 열어젖혔다. 흙과 풀에 가려진 어떤 문을. 그러자 원빈의 입이 정도를 모르고 벌어졌다. 

 

"여기로 들어가면 돼."

"..."

 

척봐도 비밀통로로 보이는 구멍이 문 아래로 드러났다. 내부에 사다리가 촘촘히 달려있어 쉽게 이동이 가능해 보이는 구멍이었다. 캄캄한 구멍에 발을 집어 넣은 성찬이 망설임 없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원빈이 들어와도 될 만큼 내려간 그가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아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부탁대로 원빈이 따라 들어가 사다리에 매달린 채 문을 닫았다. 그동안 밑에서 랜턴을 켰다. 어두웠던 내부가 환해지고 까맣게 보이지 않던 바닥이 보였다. 흙이 잔뜩 묻은 그 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동안 원빈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다.. 뭐예요?"

"놀랐지? 여기 누가 몰래 만든 곳이래."

 

사다리에서 내린 원빈이 손을 탈탈 털며 방공호 같은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성찬이 랜턴을 앞으로 비추니 곧게 뻗은 길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이동하자 이번엔 단단한 철문이 보였다.

 

"문 열면 뭐가 있을 거 같아?"

 

성찬의 물음에 원빈이 문에 귀를 대고 생각해본다. 차가운 문 너머로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온기가 느껴진다 생각하여 성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형, 설마..

 

성찬이 문에 달린 고리를 당기며 묵직한 문을 천천히 열었다. 문틈이 벌어질 수록 안에서 사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도 한두명이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리고 성찬부터 앞서 들어가자마자 그 웅성대는 목소리가 사그라든다. 뒤따라 들어간 원빈이 성찬의 옆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야에 스무명 남짓의 사람들이 보인다. 평범하게 사복을 입고 흡사 바깥세상의 지하 바에서 술을 마시고 노는 것처럼 둥그런 테이블에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이. 다 둘러보기도 전에 헉 소리가 나올 뻔한 원빈이 더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를 흘끔 바라본 성찬은 어깨에 팔을 둘러 제 옆에 두고 씩씩하게 말했다.

 

"나왔어, 친구들."

 

그의 쾌활한 목소리에 갑자기 정적. 성찬의 밝은 목소리에도 수십 개의 눈이 이쪽을 보기만 한다. 왜들 그러지? 원빈은 상황 파악이 안돼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낮에 성찬이 인사했던 할아버지가 테이블에 앉은 채로 한손을 슥 들었다.

 

"성찬이, 네 옆에 있는 건 그 피아니스트 도련님 아닌가?"

 

덜컥 놀란 원빈이 아무 말 못 하고 굳어버렸다. 두손으로 제 옷을 잡아 쥐는데 손아귀에 땀이 배는듯했다. 뭐야, 진짜 뭐야 이거.. 이것도 악몽 아냐? 무서운데 너무...... 그렇게 수초간 별 생각이 드는데 성찬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제 목덜미를 긁적였다.

 

"다들 장난 그만해.. 애 놀랬잖아."

 

그말을 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진다. 사람들이 저마다 배를 잡았다. 어리둥절해진 원빈이 놀란 토끼 눈으로 멀거니 서 있기만 한다. 왁자지껄해지며 웃는 반응에 성찬이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동안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자와 여자가 다가오더니 테이블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들의 호탕한 품새에 어버버하는 원빈은 그대로 죽 끌려가 빈자리에 앉게 되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사방으로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다. 성찬과 나란히 앉은 원빈은 별안간 질문 세례와 칭찬 세례를 받기 시작한다. 

진짜 귀엽게 생겼다. 토끼 같아. 아냐 고양이 같은데? 몇살이야? 너도 세아도에서 태어났어? 어느 구역에서 살았어? 성찬이랑 놀러 온 거야? 어머 착한 거봐. 애가 엄청 순하네. 눈만 굴리고 있어. 이거 봐. 성찬이 남자친구 데려왔다고 하더니 어디서 이런 애를 다... 

마지막 말에는 성찬이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이. 다들 왜들 이래. 유난 좀 떨지 마. 그가 원빈에게로 점점 쏠리는 사람들의 몸을 뒤로 밀고는 마실 걸 가져오겠다고 일어섰다. 자리를 뜨는 그의 귀 끝이 붉게 타올라 있었다. 몇몇이 그 모습을 손으로 가리키곤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냥 소문 듣고 한 말인데 반응 좀 봐, 남자친구 맞나봐."

"나가 살면 여기에 절대 발 안 들인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애인 생겼다고 자랑하러 온 게 맞나보네, 아하하하."

 

사람들이 호탕하게 웃는 동안 고개를 수그린 원빈의 얼굴에도 열이 올랐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만 우물댔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가만두지 않고 다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 더 차분히.

 

"그래서 이름이 뭐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여자가 묻자 원빈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낯을 가리느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뻣뻣해진 그가 뒷머리를 만지작댔다.

 

"저... 박원빈이에요."

"응, 이름 번호는?"

"아.. AX02-030217..이요."

 

답하자마자 여러 명의 오디오가 물렸다. 와 02년생이구나? 확실히 1 세대네. 나랑 같아. 어, A 구역이야? 거기 애들이 너처럼 순해?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모습에 원빈이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사람들 얼굴만 번갈아 쳐다보았다. 멋쩍은 얼굴로 바라보니 문득 낮에 복제센터 내부를 탐방하며 보았던 사람들의 얼굴과 매치가 되기 시작한다. 아까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다 내가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그 사람들. 그 생각이 들자 때아니게 목뒤가 까슬거려 눈동자가 지진 나듯 흔들렸다.

 

"잠깐만, 원빈이한테 할아버지 소개 좀 해주게."

 

음료를 가지러 갔던 성찬이 '바바 할아버지'라던 사람과 어깨동무를 하고 나타났다. 한 손에 들고 온 탄산수를 테이블에 올려주기도 한다. 자리를 비켜준 여자가 빈 컵을 끌어와 음료를 졸졸 따라주고 원빈에게 쥐여주었다. 음료를 마시지 않고 들여다보기만 한 원빈이 고개를 들고 맞은 편 자리에 앉는 할아버지를 쳐다본다. 신이 났는 지 애교살이 차오르도록 웃는 성찬이 할아버지의 어깨를 팡팡 치며 말한다. 짠. 이쪽이 바바. 아까는 장난 쳤던 거야. 이 사람이 장난기가 많거든.

 

원빈과 눈이 마주친 낡은 무스탕을 입은 늙은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얼결에 악수를 하는 동안 나이가 팔순은 돼 보이는 그가 제 하얗게 샌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임동우라고 하네. 바바는 그냥 어린 아이들이 부르다 생긴 애칭이야."

 

서양 피가 섞인 듯한 얼굴이 싱긋 웃어 보여 준다. 옆에선 성찬과 여자 한명이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저 할배 또 저러네. 저래 보이지만 2세대라서 우리 보다 나이가 적어. 외형이 80대라 무게 잡는 거야, 그냥."

 

원빈과 똑같이 1세대라고 한 여자가 팔짱을 끼고 헛웃음을 쳤다. 그 얘기에 동우라는 남자가 한마디 한다. 너희도 태어나자마자 칠순이어봐라. 그런 말이 안 나와. 그 말을 모두 이해 못한 원빈이 성찬을 쳐다보았다. 2세대 방식이 나오기도 전에 세아도를 나가 사느라 그 개념을 자세히 모르는 원빈은 성찬에게 짧게 설명을 들었다. 

1세대와 2세대의 차이란 그런 거였다. 신생아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9개월 뒤 똑같이 복제된 신생아가 태어나게 하여 한해 한해 같이 성장하게 하는 방식이 1세대. 그러니까 2100년부터 십여년간 태어난 복제인간은 모두 이 방식이다. 반면 2110년대 후반에 시행되기 시작한 2세대 방식은 성체인 인간이 복제체를 신청해도 복제해 만든 배아 상태의 인간을 인공 자궁 안에서 성체까지 가속 성장시켜 원형 인간의 나이에 맞추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위해 대신 신청하던 1세대와 달리 2세대는 원형 인간 자신이 직접 원해 신청하는 케이스가 대부분이기도 했다.

 

"아무튼 01, 02 이 라인이 진짜 귀족이거나 왕자님, 공주님이지. 제일 비용이 비쌀 때여도 원형 부모들이 칼 같이 신청한 경우니까."

"우리끼리 왕자님, 공주님이라니까 웃기네. 의미가 있나?"

"뭐 어때. 때깔 좋은 경우가 태반인 건 맞잖아?"

 

젊은이들끼리 서로 찰싹찰싹 때리며 웃어댔다. 묵직한 얘기일 수 있는 얘기도 유쾌하게 농담을 치며 말하는 분위기였다. 유일한 노인이자 80대인 동우는 못 말린다는 듯 껄껄 웃고는 본인도 농담에 거들었다.

 

"내 원형 동우 씨는 나이도 나이지만 평생 모은 돈 절반을 내걸어 날 만든 자수성가형이긴 하지. 귀족형은 아냐."

 

동우가 제 앞에 있는 잔을 원빈 쪽으로 들었다. 원빈이 술도 아닌 음료로 멋쩍게 건배 하며 성찬을 흘끔 쳐다보았다. 성찬이 컵을 입가에 기울이며 눈을 맞춰준다.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 원빈이 입술을 감쳐물었다. 어딘지 모르게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음료를 마시려 잔을 들던 원빈이 도로 팔을 내리며 가만 고개를 숙인다. 눈물이 핑 돌아 하는 행동에 사람들이 저마다 의문을 띄운다. 어디 아파? 왜 그러니? 

 

"저... 죄송해요..."

"응??"

 

몇몇이 무슨 일이냐며 어깨를 토닥여온다. 당황한 성찬도 옆으로 붙어와 원빈의 상태를 보려 상체를 숙였다. 원빈아, 왜 그래. 그 소리에 원빈이 참지 못하고 한 손을 들어 제 눈가를 가려버렸다. 그가 목이 메이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하기 시작한다.

 

"사실 오늘 낮에... 너무 제가... 속 없이 구경하러 여기 온 거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들고... 마음이 무겁고 불편해서... 좀 그랬는데... 근데 이렇게 저 반겨주시는 모습이랑 즐거워 하시는 모습 보니까 좀.... 죄송해요, 갑자기 이래서..."

 

누구랄 것 없이 눈을 깜빡깜빡하며 그의 말을 잠자코 듣는다. 입 다물고 끝까지 들은 사람들은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거나 입을 가리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는다. 귀여워 죽겠어서 자연히 나오는 웃음들. 그건 성찬도 예외가 아니었다. 눈을 반달로 접어 웃으며 제 친구들을 한번 쓱 돌아본 성찬이 손으로 원빈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뭐야, 그런 생각을 했어? 당연히 반기지. 내 친구들인데."

"...... 흑, 네..."

"이제 너도 즐겁게 놀자. 우리 시간도 얼마 없다?"

 

옷 소매로 눈물을 꾹꾹 눌러 닦은 원빈이 눈가와 코가 빨개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찬의 말에 동우도 덧붙여 말해주었다.

 

"그래, 여기 공간 만들어준 사람도 생각해서 알차게 놀다 가야지. 아침 되면 출석하러 돌아가야 하니까 그전까지 몰래 열심히 놀아야 해."

 

맞아맞아. 다른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도 몰려와 스무명 남짓의 사람들이 잔을 들어 건배하려고 한다. 엠마, 너도 여기로 와. 남자 한 명이 뒤쪽을 향해 외칠 때쯤엔 원빈이 화들짝 놀라 눈을 들어 보였다. 안 보이는 구석지에서 카드놀이를 하던 엠마가 다른 사람 손에 이끌려 이쪽 테이블에 온다.

 

"음, 반가워요."

"어...."

 

낮에 센터 내부를 안내해주던 안드로이드 엠마가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으로 무표정하게 인사했다. 놀란 원빈이 대답도 제대로 못 했다. 성찬이 원빈에게 어깨를 감싸오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쟤도 여기 놀러 왔다더라. 나도 놀랐어. 이윽고 떠들썩하고 요란한 건배가 이어졌다.

 

*

 

"...아무튼 안내 담당 너무 힘들어요. 웃는 것도 전력 소모 너무 심하고. 나 같은 거 왜 만들었는 지 몰라. S 사 그냥 망했으면. 저 너무 불평 많죠? 아 진짜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새벽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동안 지하실 공간에서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누구는 카드놀이를 했고, 누구는 가벼운 담소를 나눴으며, 누구는 테이블을 팡팡 치며 하소연을 했다. 마지막에 해당하는 경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입가에 점이 두 개나 있는 채희는 다 네 맘 안다는 표정으로 손을 뻗어 토닥였다. 섬사람이 버린 옷을 리폼해 입길 좋아한다는 경서는 별 유난이라는 듯 따분한 표정을 했고. 원빈은 성찬과 동우를 따라 씩 입꼬리를 올리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테이블에선 모두가 제조된 지 1년이 채 안 된 막냇동생 같은 엠마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원빈은 안드로이드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믿기지 않아 흥미로우면서도 너무도 오랜만에 소속감을 느끼는 중이라 자세와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중이었다. 이미 지하실에 모인 사람들과 자기소개를 하고 담소를 나누거나 원카드를 한 원빈은 이런 시간이 더 좋았다. 솔직한 속 얘기를 나누는 거. 바깥에선 거의 가질 수 없는 귀한 시간이었으니.

 

"낮엔 겨우 웃고 울고 하는 사람들도 여기만 오면 자기다워지더라. 바깥이랑 이어진 공간에서 우리끼리만 있으니까 자유를 느끼나 봐."

 

성찬의 말마따나 뭐든 모르는 게 없다는 동우가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확실히 젊은 사람의 말투를 구사했으나 표정이나 말의 내용은 꼭 신선 같았다. 원빈은 죄수복 같은 흰 옷 대신 자유복을 입은 동우의 손목을 힐끗 쳐다보았다. 손목엔 여전히 묵직한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다들 그럼 나가려는 시도를 하신 건가요?"

"나가려는 시도?"

 

원빈의 질문을 듣자마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은 동우가 주름이 가득한 손으로 성찬을 가리켰다. 그건 이놈이 일당백으로 하긴 했지. 다른 애들은 거의 안 했는데 성찬이가 정말. 성찬도 인정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아주 도망치려면 팔찌 끊고 지하실 통해서 바깥으로 전력 질주를 해야 했거든. 그대로 해변으로 뛰어가서 거기서 항공기 하나 몰래 타든가,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치든가 해야 했어."

 

내가 그러다가 다 잡혀들어갔던 거야. 성찬의 말에 원빈이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가 그토록 탈출 시도를 많이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제야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 지하 통로를 기회라 생각하고 끊임없이 시도 했다니. 형 진짜 대단하다. 우러러보는 커다란 눈동자에 성찬은 괜히 부끄러워 못 본 척 했다.

 

"여기 공간을 들킨 적 없어요?"

"없지."

"소리가 바깥에 안 들려요?"

"안 들려."

"레이더에 걸리지 않나요?"

"응. 정말 하나도."

 

성찬뿐만 아니라 채희와 경서도 함께 대답한다. 그 단호한 대답에 원빈은 어떠한 해방감을 느꼈다. 비록 완전히 바다 건너 탈출을 하기에 힘들다지만, 어쨌거나 숨 막히도록 높은 벽을 넘을 방법은 있다는 거니까. 거기에 조약돌 같은 눈을 빛내며 침을 삼키니 경서가 동우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기는 성찬이 같은 방법으로 탈출을 시도하거나 우리처럼 놀으라고 마련된 공간은 아닐 거야."

"왜요?"

"바바 씨, 이 사람, 정말 바깥에서 몇 개월 살다 왔거든. 그것도 원형이랑 몸 바꿔치기 해서."

"네??"

"사실 그 한번을 위해 만들어졌다 해도 무방해."

 

그게 정말이냐며 원빈이 동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동우는 또 무용담을 말할 때가 왔다며 느릿하게 웃었다. 동우의 맞은 편에 앉은 엠마도 처음 듣는 얘기라며 하소연을 멈추고 경청하기 시작한다. 동우는 몇 년 전 시간을 거슬러 자신의 원형 이야기부터 해주었다. 2119년, 2세대 복제체 제작 방식이 허가가 나며 모아둔 돈 중 상당 부분을 쏟아부어 70대라는 나이임에도 자신의 복제체를 신청한 원형의 목적은 단순 호기심. 평생 유전 공학을 공부하고 연구한 그 원형은 한 때 개발에 참여하기도 한 복제인간 기술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우가 탄생하고서 몇 년이 지난 후, 이 지하실에 몰래 부른 원형이 몸을 바꿔치기 해 살아보자고 제안하여 원형은 센터 내에서, 복제체인 동우는 바깥세상에서 몇개월 간 살게 된다.

고작 3개월 만에 경찰에 걸려 원상 복귀 시키게 됐지만.

 

"그때 원형은 무혐의로 풀려나고 나만 교화목적으로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왔지, 나 참. 그건 어이가 없었지만 바깥 구경 할 수 있었던 게 어디야. 교도소에서 성찬이랑 만나 친해진 것도 나름 좋기도 했고."

 

그가 하는 이야기에 원빈의 머릿속엔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동우의 원형이 유전 공학 박사라는 얘기를 들을 때부터 떠오를 듯 말 듯한 기억이 있어 곰곰이 생각해보는데 대화는 이미 깜빵 동기들끼리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성찬과 동우는 그때 함께 나눴던 세상에 관한 얘기에 대해 말해주었다. 동우가 원형의 신분으로 몰래 살며 접했던 복제체를 향한 바깥사람들의 이해되지 않는 사고방식. 세상 만물을 모두 제 아래에 두고 마음대로 부리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이기심. 세계 대전이 종전한 지 몇 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안정한 나라 분위기와 위태로운 정치 방식. 사회 문제로 내용이 흘러가자 동우는 눈에 힘을 주며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갔다. 아마 다시 큰 전쟁이 난다면 그건 나라 간의 전쟁이 아니라 권력의 위치에 있는 인간 대 복제인간 혹은 안드로이드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그때쯤 동우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너무 멀고 어려운 이야기라며 즐거운 이야기나 하자고 한다. 성찬도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자며 근 한 달간 바깥에서 본 신기한 자연 생태계나 문명의 이기 등을 어린 아이처럼 해사한 얼굴로 늘어두었다. 너무 똑똑하고 재밌는 친구라며 맥스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고.

 

"엠마, 혹시 섬 바깥으로 이직하게 되면 우리 맥스랑 친해지는 건 어때?"

"맥스면 A 사 아니에요? 저랑 경쟁사인데."

"왜, 근데 다른 맥스들이랑 뭔가 달라. 가끔 진짜 사람 같아."

"저처럼 실수로 너무 사람 같이 제조된 놈인가 봐요?"

 

오케이 접수. 테이블을 가로지르는 하이파이브가 이어지고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엠마는 만들어진 웃음이 아니라 진짜 즐거워하는 웃음을 내보였다. 우리 맥스도 저렇게 웃을 줄 알면 좋을 텐데. 엠마랑 만나면서 배우면 되겠다. 이쪽을 바라보며 하는 성찬의 말에 원빈이 픽 웃었다. 안드로이드끼리 친구 맺어주자는 제안은 난생처음 들어보았다. 그런 모습이 너무 순수하고 귀여워 보여 원빈이 입꼬리를 올려 보인다. 양쪽으로 동시에 끌어 올라가는 그 입매 모양에 성찬이 볼을 붉히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동우는 성찬과 원빈을 번갈아 쳐다보다 테이블을 툭툭 쳐 이목을 끈다. 이제 원빈이, 네 얘기를 해 봐. 네 얘기가 듣고 싶어.

 

"저요? 무슨 얘기를 하죠.."

 

원빈이 사람들을 둘러보는 동안 옆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몇몇 넘어왔다. 말수는 없지만 들어주길 좋아하는 여래, 공부를 좋아해 우등생이라는 다온, 어린 아이들을 위해 동화구연을 하는 게 취미인 연지, 야외에서 놀길 좋아해 여름에 피부를 바싹 태운 청우 등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원빈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어릴 때 성격이 어땠어? 연지가 고동색의 머리칼을 넘기며 묻는다. 의외로 운동 좋아했을 거 같은데. 청우가 원빈의 단단한 골격을 눈여겨본다. 말하는 거 보면 어릴 때도 얌전했을 거 같아. 채희가 손뼉을 짝짝 친다. 뭐, 원빈이는 어렸을 때도 왜인지... 묻어가듯 한마디 하려는 성찬의 말에 모두가 흥미롭다는 듯 빤히 바라보느라 금방 입이 다물린다. 원빈은 쑥스러워하며 테이블 아래로 둔 손을 꼼지락댔다. 저는 그.. 어릴 때 별로 밝진 않았어요. 시작되는 솔직한 얘기엔 모두가 주의를 기울이며 경청한다. 

 

한동안은 세상이 흑백으로 보였거든요. 너무 통제적인 시스템 안에서 밥 메뉴 하나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하느라 즐거움이란 게 뭐인 지 이해를 잘하지 못하고 살았어서. 그러다 보니 내가 뭐가 싫고 좋은 지도 모르겠고, 센터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냥 이렇게 살다가 마는가보다 했어요. 근데 또 막상 저도 좋아하는 건 있긴 하더라구요. 

 

원빈이 얘기하는 중간에 고개를 들어 수많은 사람들 중 오직 성찬만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함께 덫에 걸린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뭐였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입 모양으로만 묻는 성찬에 원빈이 그를 응시하며 말을 잇는 척 대답했다. 음악..이요. 

 

어느 날 직원이 일을 그만두며 통기타 하나를 두고 갔는데, 그걸 주워다가 어린 애들끼리 돌아가며 쳐봤어요. 그걸 반복하다 보니 제가 제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됐고.. 동생들이 좋아하길래 노래를 만들어서 기타 반주에 맞춰 몰래 불러줬어요.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사실 나가 살 때도 몰래 기타랑 노래 연습을 한 적이 있어요. 지금은 안 하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채희와 다온, 청우가 동시에 일어나 문을 향했다. 그 문은 센터 내부 쪽을 향하는 통로였다. 말릴 틈도 없이 나가는 그들의 모습에 원빈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성찬은 그들이 뭘 하러 간 건지 알겠다는 듯 태연하게 원빈의 옆자리로 오기나 했다. 다른 사람들도 일단 기다려보라며 다른 이야기를 해나갔다. 원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찬에게 속삭였다. 

 

"혹시 제 얘기가 지루했던 건 아니었겠죠..?"

 

성찬은 그렇게 묻는 원빈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전혀 아닐 걸? 나부터 너무 재미있는데? 가까이 말하는 그의 두 눈에 반짝임이 가득했다. 원빈은 그 눈을 바라보는 찰나 동안 쿵쿵 뛰는 심장을 느꼈다. 그걸 더 느낄 새도 없이 밖으로 나갔던 채희, 다온, 청우가 숨을 고르며 다시 나타났다.

 

그들의 손엔 커다란 통기타가 들려있었다.

 

"우린 기타 수업이 있거든. 그래서 음악실에서 훔쳐 왔어."

 

놀랄 틈도 없이 원빈의 손에 기타가 쥐어졌다. 원빈이 멍한 얼굴로 기타 몸통을 내려다본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좋아하는 악기가 들이밀어진 경우는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와, 이렇게 보니까 엄청 잘 어울려. 진짜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같아. 벌써 연주 잘 할 거 같은데? 사람들이 더 북적북적 모여들고 주변으로 웅성대는 목소리가 들어찼다. 그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성찬이 한쪽 팔로 턱을 괴고 원빈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귀로 주변 소리가 먹먹해진다. 두 눈에 원빈의 모습만이 담겼다. 

 

"지금은 왜 안 하는데?"

 

성찬이 묻자 원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기타를 쥔 원빈의 눈빛이 부드럽게 누그러져 있었다. 

 

"하면 안 되는 줄 알았어요. 좋아해 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아냐. 너 지금 되게 멋있어."

"..."

"다들 좋아할 수밖에 없을 걸."

 

단호하게 말하는 성찬의 말에 원빈이 입을 우물댔다. 눈빛에 쑥스러움이 가득하다. 성찬의 말을 들은 사람들도 줄지어 동감했다. 그냥 그렇게만 있어도 그림이야. 어떻게 이걸 보고 안 좋아하지? 음악 좋아한다는데 왜. 듣다못해 고개를 푹 숙인 원빈은 귀가 새빨개진 채로 목덜미를 연신 문질렀다. 그는 성찬과 사람들을 향해 눈을 흘끔거리며 조심히 물었다.

 

"하.. 한곡 불러드릴까요? 제가 좋아한 곡이 있어서.."

 

거기엔 당연하게도 거절할 사람이 없었다. 성찬은 아예 푹 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눈빛이었다.

 

*

 

센터의 눈길이 닿지 않는 지하실. 그들만의 비밀공간. 거기서 펼쳐진 작은 공연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원빈은 그토록 쑥스러움이 많은 성격이면서 생각보다 무대 체질인 사람이었다. 처음엔 좋아하는 곡이라며 딱 한 곡만 하겠다던 그가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록 자신감을 가지고 한 곡 더, 한 곡 더, 늘려가면서 공연 시간을 늘렸다. 심지어 중간부터 팔짱을 낀 엠마가 끼어들어 인공지식을 가미한 설명을 덧붙이느라 더 재미가 무르익어갔다. 올드팝 좋아하신다구요? 이건 올드팝이라기에도 백년도 더 넘은 엄청 오래된 곡인데요? 그렇게 한마디 하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관심을 보이며 더 주의 깊게 들었다. 이게 백년도 더 된 곡이구나. 노래 진짜 좋다. 그 시대 사람이 된 거 같아... 그동안엔 성찬은 감상평 하나 제대로 입 밖에 내놓지 못한 채로 원빈만 뚫어져라 보았다. 아무래도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여 감회가 새롭기 때문에. 또, 새로운 모습을 눈에 오래 담고 싶기 때문에.

 

원빈은 한 곡 씩 끝낼 때마다 그렇게 저를 빤히 보는 성찬을 함께 바라봐주었다. 너무도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봐주니 특별해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 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자신의 원형 때문에 음악을 좋아한단 정체성을 잘 드러내지 못했다. 드러내고 말하다 보면 이런 모든 정체성이 원형에게 흡수될 것 같아서였다. 심지어 원형은 피아노 영재였으니 음악을 좋아한다 한들 그만큼 천재성을 발휘 못하면 비교를 당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 사귄 친구들도, 그리고 성찬도 저만을 바라봐주고 있다. 그게 얼마나 큰 기쁨이자 해방감인 지.

 

기타 줄을 뜯고 노래를 부를 수록 웃음이 샜다. 잘 부른다며 칭찬 받을 수록 기분이 들떠 올랐다. 좋아하는 걸 나눌 수록 더 나누고 싶었다. 그런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원빈은 말로 형용 못 할 무한한 세계를 느꼈다. 저를 보는 성찬을 마주 보며 그 세계를 느낄 수록 그곳에 잠식되는 순간이 영원 같다고도 느꼈다.

 

가슴 벅차도록.

 

"노래 너무 잘 들었어."

"연습한다고 그 정도로 할 수가 있는 거야? 너무 잘하던데."

 

빌린 기타를 돌려주자 사람들이 저마다 칭찬을 늘어두며 원빈의 어깨를 두드리고 지나간다. 동우는 들려줘서 고맙다며 엄지까지 들어 보였다. 시간이 벌써 새벽 6시를 향하고 있어 나갈 채비를 해야 했다. 사람들은 이 새벽의 해방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기 위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서로와 정을 나눴다. 엠마는 이제 자신이 노래 실력을 보일 차례라며 한 곡조를 뽑으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지칠 줄 모르는 외향적 성격의 사람들이 지지 않고 엠마 옆에서 따라 몸을 흔든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조화롭게 쌓여간다. 그런 모습이 신기한 원빈이 배시시 웃었다. 아직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성찬도 함께 웃었다. 웃음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서로가 마주 본다. 말 없이 마주 보고는 멋쩍은 얼굴로 옷매무새를 다듬거나 컵에 남은 음료를 마저 마신다. 부끄럽고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이제 갈까? 그럴까요? 짧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한명씩 파하기 시작하는 지하 파티장을 떠난다. 한 겨울밤의 꿈 같은 파티장을.

 

"내일도 형 친구들 볼 수 있어요?"

"음, 다른 애들은 모르겠는데 바바 할아버지는 또 여기 올 걸."

"진짜요? 근데 바바 씨는 왜 바바라고 불리게 됐어요?"

"아, 몰래 바깥으로 떠나기 전에 어린 애들한테 바이바이, 하고 인사했는데 다시 돌아왔더니 애들이 그렇게 불렀대."

"하하, 바이바이라서 바바라니.."

"세현이가 처음 그렇게 불렀던 거 같은데."

"세현이?"

 

응. 낮에 너한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던 어린 여자애. 밖으로 나가기 위해 지하 통로를 지나는 동안 원빈이 머릿속으로 어린 여자애가 누구인지 떠올렸다. 흰 옷을 입고도 세상 순수하게 웃던 여자아이가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걔가 세현이구나. 성찬의 주변인들을 한명 한명 알아갈 때마다 원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성찬과 함께 어울리던 사람이라 그런지 모두 그와 닮은 점이 어느 한부분씩 있었다. 다.. 좋은 사람 같아요. 다들 따뜻하구.. 말도 잘 들어주시구... 들릴 듯 말듯 하는 말에 성찬이 짧게 원빈의 손을 잡아주었다. 잡힌 손이 움찔 놀라기도 전에 주춤대며 떨어진다. 이제 다 너 친구야, 원빈아. 어두운 통로 내부에서 랜턴을 앞으로만 비추고 있어 성찬의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딘가 부드러워져 있음은 확실했다. 

 

새벽이 다 지나 지상에 오른 둘은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자마자 감탄 섞인 숨을 뱉었다. 세아도의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와, 첫눈이에요. 밖으로 나온 원빈이 환하게 웃으며 입을 뻐끔거렸다. 모든 것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얼굴에 맑은 호선을 그리는 그의 모습에 성찬의 눈길이 오래도록 머문다. 응. 예쁘다. 눈송이를 보고 말하는 척 그가 작게 속삭였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웃는 얼굴에 마음이 사르르 녹은 성찬은 원빈이 사박사박 걷는 중에도 그의 옆에 가까이 붙었다. 필시, 그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원빈아."

"네?"

"즐거워?"

"네."

"얼마큼?"

"말로 표현 못할 만큼 즐거워요."

 

푸른 빛이 깔린 이른 아침의 숲속을 걸으며 손등끼리 스쳤다. 아릿한 감촉에도 누구도 거리를 띄우지 않는다. 원빈은 앞을 보다 말고 고개를 떨궜다.

 

"왜 자꾸 저만 쳐다봐요. 앞 보세요, 앞."

 

성찬이 살풋 웃고는 답을 하지 않는다. 얕게 쌓인 눈을 밟는 것만큼이나 마음이 간지러웠다. 원빈은 흐드러지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형 아까 하려던 말은 뭐예요?"

"어떤 거?"

"제 어린 시절이 어떨 거 같다고 다들 한마디씩 할 때요. 형이 '뭐, 원빈이는 어렸을 때도 왜인지...'라고 말하고 뒤에는 말 안 해줬잖아요."

"..."

"말해줘요.."

 

성찬은 신발 앞코로 눈송이 묻은 조약돌을 살살 찼다. 대답 전에 그가 한참 뜸을 들였다.

 

"그냥, 착했을 거 같다고 말하려 했지.."

"..."

"그리고 지금처럼 신기했을 거 같다고도."

 

원빈이 숨을 꿀꺽 삼켰다. 다시 내쉬는 숨에 따뜻한 입김이 일었다. 제 어디가 신기한데요? 조심히 묻는 말에 성찬의 입이 또 천천히 열린다.

 

"너는 자꾸 들여다보고 싶게 만들어."

"..."

"너라는 사람을 알아가고 더 깊이 발견하고 싶게 만들어."

"..."

"그러다 발견하면 또, 그런 네 모습을 오래오래 보고 싶게 만들어."

 

그런 신기한 사람이야. 그 말을 듣는 동안 원빈의 손에 성찬의 손끝이 조심스레 닿아왔다. 온기가 닿자마자 원빈의 심장이 쿵쿵 뛴다. 천천히 겹치던 손이 맞잡은 순간엔 마주 보며 멈추어 섰다. 성찬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자 원빈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또.. 왜 그렇게 봐요."

"나 그냥 너 웃는 거 보려고."

"..."

"답해주면 아까처럼 웃어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쳐다보면 못 웃죠. 그렇게 저 웃는 거 보는 게 중요해요?"

"응."

"..."

"마음처럼 안 돼, 미안."

 

성찬이 겹친 손을 살며시 잡아 끌었다. 마주 본 거리가 입김이 섞일 만큼 가까워진다. 성찬이 원빈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입을 달싹거렸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내뱉는 그의 태도에 비해 사슴 같은 예쁜 눈 속엔 망설임이 가득해 보였다. 원빈이 그 흔들리는 눈빛을 바라보는 동안 달싹이던 입이 열린다.

 

"너는 그 사람 왜 좋아했어?"

 

너무도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원빈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의 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저도 마음처럼 안 돼서요."

"..."

"이유 없이 그냥 좋아했어요."

 

원빈이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이제야 이해가 갔다. 성찬이 제 원형을 신경 쓴 이유. 그건 아마도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라서.

 

"좋아하는 건 어떤 기분인데?"

 

그리고 그 옛사랑에 관해 묻는 성찬의 얼굴 속에서 어려움 없이 발견한다. 이미 원빈이 누군가에게 품었던 애절한 감정을.

 

"그거야.. 눈만 봐도 호수에 빠지는 것 같고, 닿기만 하면 심장 뛰어서 죽을 거 같고,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가슴 속에 수십 마리의 나비가 나는 것처럼 마음이 간지러운 그런 기......"

 

이제 그 사람 대신에 내가 옆에 있어도 되냐고 묻는 그런 마음을 말이다.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성찬이 고개를 붙여왔다. 어깨가 잡힌다. 입술이 부드러움에 잠식된다. 호흡이 집어삼켜진다. 세상의 모든 감각이 입술에 몰려 열이 퍼진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기 위해 원빈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다가온 성찬이 눈을 감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박원빈의 심장이...

 

"지금 내가 그래."

 

터질 듯이 뛰고 있어.

 

성찬이 입을 떼고 나지막이 말했다. 내려다보는 눈에 긴장이 가득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숨결이 적도만큼 뜨거웠다. 그를 느끼는 원빈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다 못해 귓가에도 쿵쿵 소리가 들려왔다. 안돼. 잠깐만. 못 쳐다봐. 심장이 녹아내릴 거 같아. 손을 꽉 말아쥐는 동안 성찬이 다시 고개를 기울여왔다. 시선이 가까워지며 호수에 빠지는 듯 익사하는 기분이 든다. 원빈이 눈을 꼭 감아버리고 두 팔을 들어 성찬의 가슴께를 밀었다. 밀어낸 몸이 얼어붙는다. 원빈아, 부르는 목소리에도 눈이 내리는 풍경 속으로 몸을 돌려 도망쳐버린다. 그가 다리를 큼직하게 벌리며 저벅저벅 빠르게 걸었다. 빠르게 걷다가 달렸다. 신발 뒷굽에서 흙과 눈이 잔뜩 튀었다. 그는 펜션에 들어가 2층 방으로 오를 때까지도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했다.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나서야 물에서 금방 건져 올려진 사람처럼 급박하게 흉통을 들썩였다. 숨이 매섭게 드나든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아까의 성찬의 것처럼 뜨거운 숨이. 원빈이 손을 가슴에 대고 한참 호흡을 고른다. 뛰는 심장이 진정할 생각을 못하고 팔딱팔딱 뛰었다. 

 

얼굴이 상기된 채로 눈이 풀린 원빈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제발 진정하라며 가슴을 토닥여보지만 변함이 없었다. 침을 몇번이나 목뒤로 넘기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렇게 살아있는 감각을 느낀 게 얼마 만이지. 원빈은 한참이나 겁을 먹은 사람처럼 두손을 모으고 앉아있었다. 숙소 1층으로 성찬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릴 때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죽였다. 2층에 올라온 발걸음은 한참 앞에서 서성이다가 다시 내려갔다. 그 소리에 원빈이 문만 쓰다듬듯 매만졌다. 

 

창밖으로 조금씩 동이 트고 있었다.

 

숙소는 점심이 가까워지는 시간까지도 고요했다. 1층 침실에서 몸을 뉘다가 몸을 일으킨 성찬이 머리칼을 반복해 쓸어 넘기며 2층에 다시 올라가 보았다. 긴장하느라 입안을 짓씹은 그가 머뭇거리다 원빈이 있는 방에 노크했다. 똑똑 두드리고 목을 가다듬어 입을 연다. 원빈아. 자? 주저하며 건넨 말엔 답이 없었다. 그가 문에서 떨어지며 초조하게 마른세수를 했다. 어제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자책하며 자리를 뜨려는데 굳게 닫혀있던 문이 조심히 열렸다.

 

"형.."

 

덜컥 놀란 성찬이 문으로 다가와 몸을 가까이 붙였다. 원빈이 몸을 내보이지 않고 문틈을 아주 조금만 열고 있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성찬이 속삭이듯 말했다.

 

"잤어? 배고프지 않아?"

"조금 잤는데.. 더 자려구요.."

"음, 그렇구나.."

"..."

"그, 어제는 미안."

"..."

"내가 그..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녜요. 제가 미안해요."

"...어?"

"저 그냥 놀라서 그랬던 것뿐이에요."

 

형 사과할 필요 없어요. 원빈의 말에 성찬이 눈을 빠르게 깜빡인다. 얼굴이 뜨거워진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래..? 한동안 오가는 말은 없이 조용히 숨소리만 났다. 성찬이 입술을 한번 축이고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여기 돌아와서 생각했던 건데.."

"..."

"어제 물어봤어야 했던 걸 깜빡했더라구."

"..."

"우리 오늘은 바바 할아버지 만나서 물어보자. 원빈이 네가 찾는 곳."

"..알겠어요."

"응... 이따가 봐."

 

성찬이 자리를 뜨고 계단 내려가는 소리를 냈다. 그가 떠나서도 곧바로 닫히지 않던 문이 바깥으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쯤 닫혔다. 문을 닫은 원빈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잠깐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진땀이 났다. 그는 방 안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 다니다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팔을 벌리고 누운 원빈이 옆으로 돌아누우며 뒤척이기 시작한다. 그가 눈을 감고 간밤에 자지 못한 잠을 청했다. 

 

*

 

오후가 되어서까지 눈을 감고 있던 원빈이 돌연 울리는 전자음 소리에 눈을 찡그렸다. 고막을 파고드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 머리 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린 그가 한참 후에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맥스?

 

울리는 소리는 연락 수단인 휴대형 아이리스의 벨소리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전화를 받기 위해 트렁크를 뒤져 기기를 꺼낸다. 연락을 받은 원빈은 다급하게 대답했다.

 

"응, 맥스, 왜?"

— 음, 원빈 님. 시간 잘 보내고 계시나요?

"어, 응.. 나야 잘 보내고 있지."

— 근데 목소리가 왜 그러시죠?

 

어.. 내 목소리가 왜? 이마를 긁적이며 묻자 맥스가 고저 없이 답했다.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한 목소리로 들립니다. 그 정확한 분석에 원빈이 지레 찔리며 황급히 용건을 물었다.

 

"나는 왜 찾아?"

— 별 건 아니고 집 앞에 찾아오는 기자가 다섯으로 늘었습니다. 알려드려야 할 거 같아 말씀드려요.

"그래? 다 법안 관련으로 취재하러 온 거지?"

— 그런 거 같아요.

"그럼.. 적당히 주인분 안 계신다고만 해줘. 그 이상 상대하진 말고.

— 네.

 

원빈은 짧은 대화를 끝내고도 연락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맥스의 딱딱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전날 보았던 엠마의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성찬과 즐겁게 하이파이브 하는 모습도. 더 하실 말씀이 있나요? 맥스의 또렷한 음성이 들리자 원빈이 트렁크 손잡이 부근을 만지작댔다. 

 

"맥스."

— 네.

"너 그냥 자유롭게 살래?"

 

생각을 거치지 않고 뱉은 말에 저쪽에서 답이 없었다. 아 역시.. 해선 안 되는 말을 했나. 원빈이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기다린 후엔 감정 동요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답이 나왔다.

 

— 주인분이 자유롭지가 않은데 어떻게 제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

— 성찬 씨는 잘 있나요?

"어, 응.."

— 그럼 됐습니다. 들어가세요.

 

원빈이 통화가 끝난 휴대형 아이리스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맥스가 빠르게 말을 돌렸지만 그의 말에 뼈가 있음은 확실했다. 그래. 내 자유부터 챙기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남의 자유를 논해. 맥스의 단호한 음성을 곱씹어보던 원빈은 곧 허기짐이 몰려오는 배를 움켜잡았다. 종일 먹은 게 없어 배가 고플 만한 시간이었다. 그는 방을 간단히 정리하고 아래층에 내려가 보기로 한다. 부끄럽다고 종일 성찬의 얼굴을 안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1층에 내려가 보아도 성찬은 보이지 않았다. 펜션 곳곳을 살펴보지만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멀뚱한 얼굴로 두리번대던 원빈은 부엌 식탁 위에 놓인 메모를 하나 발견한다. 그 메모를 읽자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원빈아, 이거 먹어. 맛있어 보이길래 네 것도 하나 샀어. 나는 잠깐 나갔다 올게. — 성찬

 

메모지 옆에 예쁘게 포장된 바게트가 놓여 있었다. 집어 들어 확인하니 아직 따뜻했다. 평범한 바게트 샌드위치인 줄 알았는데 속을 열어보니 고기로 버무려진 스파게티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속을 먼저 먹고 빵을 먹는 음식인지 스파게티에 포크가 꽂혀 있기도 했다. 원빈은 의자에 앉아 성찬이 사다 준 그걸 먹기 시작했다. 입안에 넣자마자 풍미 가 가득한 향이 퍼지며 미소가 번졌다. 형이 맛을 좀 아네. 먹는 내내 입꼬리를 내리지 못한 원빈이 마지막 바게트 한입까지 깔끔히 마무리했다.

 

원빈은 성찬이 돌아오는 시간을 몰라 혼자서라도 외출을 하기로 한다. 두꺼운 외투에 울 목도리까지 걸치고 밖을 나선 그에겐 목적지는 없었다. 대신 하고 싶은 게 떠올라 섬 외곽을 샅샅이 뒤지며 다녔다. 여기에 그런 거 하나 쯤은. 그 생각에 열심히 쏘다니는 그의 머리 위로 소복소복 눈이 내렸다. 어디를 가도 뽀득뽀득 눈이 밟혔고 귓가엔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세아도의 모든 풍경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시간이었다. 나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면 이곳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아름다운 고향이었겠지. 그렇게 아이러니한 섬을 부지런히 걸어 다닌 끝에 원빈의 품엔 짐이 한가득해졌다. 그 모습을 하고 마지막으로 가게 하나를 더 들려보려는데

 

"어..."

 

마주쳤다. 저처럼 짐이 불어나 있는 성찬을.

 

"너도 뭐 사러 왔어?"

"네.. 선물을 좀.."

"진짜? 나돈데.."

 

그들이 들린 가게는 인근에 유일하게 있는 옷 가게였다. 원빈은 새로 사귄 B 구역 친구들에게 주기 위해 선물을 하나씩 사다가 고를 것이 없어 옷 가게까지 들린 참이었다. 성찬도 마찬가지인지 그는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 사이즈의 옷을 보고 있었다. 

 

"혹시 경서 주려고요?"

"응, 어떻게 알았어?"

"척하면 척이죠."

 

눈이 마주쳤을 때 낯을 들고 대하기 부끄러웠던 그들은 대화 몇 마디만에 분위기가 풀어졌다. 이런 식이면 선물이 겹쳐서 어떡하냐는 원빈의 말에 곧바로 서로의 짐을 번갈아 꺼내 보이며 열심히 의논을 나누기도 했다. 바바 할아버지한테는? 작은 서점 있길래 책이요. 형은 여래 누나 거 골랐어요? 여래 누나랑 채희 거는 작은 인형 샀는데. 아, 이거 호텔 쪽에 있는 소품샵에서 산 거 아니에요? 응, 맞아 맞아. 즐겁게 선물 얘기로 열을 올린 성찬과 원빈이 옷 가게에서 마지막 선물을 고른 후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 펜션에 돌아가서도 물건들을 늘어두며 깜빡한 사람은 없나 함께 확인했다. 아이러니한 섬에서의 아이러니한 시간이다. 복제인간끼리 아직 갇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 얘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여기가 지옥인 적이 없는 것처럼. 

 

"근데 이거.. 다 들고 가도 돼요..?"

"음... 그러게. 일단 다 가져가 보자."

 

심지어 둘은 친구들이 자유롭게 선물을 쓸 수 있을 까 고려 하지도 못하고 선물을 골라버렸다. 그 생각이 야밤이 되어서야 들어 황망해진 얼굴로 부엌 식탁에 늘어둔 물건들을 본다. 원빈은 걱정스레 수북이 쌓인 그걸 둘러보다가 하나씩 쇼핑백에 눌러 담았다. 번거롭게 쓰레기를 버려야 할 일이 없도록 포장지를 제거하여 부피를 확 줄여보기도 한다. 시간을 확인하니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원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성찬을 바라보았다. 성찬도 조용히 원빈을 바라보았다.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먼저 눈길을 돌린 사람은 성찬이었다. 그는 어색한 몸짓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내가 사다둔 건 잘 먹었어?"

"네, 덕분에요. 맛있던데요."

"..."

"남긴 메모도 귀여웠어요."

 

그 별거 없는 말에도 성찬이 웃음을 머금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원빈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물었다. 왜, 왜 웃어요. 아냐, 아냐.. 성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원빈을 흘끔거렸다. 그의 표정에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원빈도 얼굴이 달아오를 것만 같아 턱을 긁적였다. 몸 속이 간지러워 자꾸 가만히 앉아있질 못했다. 그 간지러운 시간을 더 보내기 전에 성찬은 시간을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치 언제나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된 사람처럼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제 갈까?"

"벌써요?"

"응, 이미 센터 직원들 잠들 시간이라 괜찮을 거야."

 

성찬이 옷을 챙겨입고 선물이 담긴 쇼핑백 입구를 꽉 동여맸다. 

 

"사실 빨리 물어보고 싶거든. 네가 찾는 곳."

 

그가 하는 말에 원빈이 나갈 채비를 하며 농담을 건네듯 말했다. 나 생각해줘서 그러는 거구나. 그 스치듯 하는 말에도 성찬은 정확하게 대답한다. 응, 하고. 그의 대답에 원빈은 몰래 성찬의 옆모습을 빤히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바리아부터 물으러 갔다 해도.

 

"어라...? 다른 애들은?"

 

부피가 큰 쇼핑백을 드느라 우여곡절 끝에 지하실에 도착한 성찬과 원빈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텅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내부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은 오로지 한명, 동우뿐이었다. 동우는 태연하게 손을 들어 인사하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머리가 산발에다 꼴이 엉망인 성찬과 원빈의 손에선 쇼핑백 손잡이가 스륵 미끄러지며 통조림 캔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그들은 문 위로 쌓인 눈을 헤치고 들어온 것부터 시작해 사다리를 타며 쇼핑백을 떨군 통에 쏟아진 물건을 주워 담느라 그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성찬은 묻은 눈이 녹아내려 척척해진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동우는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와 바닥을 구르는 캔을 주워준다.

 

"오늘은 보안이 빡센 날이라 나만 왔어."

 

성찬은 같이 먹으려 가져온 거라며 다시 통조림을 건네주었다. 동우의 말에는 원빈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갸웃댔다. 의미를 알아챈 동우가 덧붙여 말했다.

 

"나는 늙었잖아. 걸려도 잃을 건 없어."

"..."

"보여주고 싶은 게 있기도 하고."

 

보여주고 싶은 거요? 동우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원빈과 성찬이 차례로 뒤를 따랐다. 원빈은 전날 새벽부터 떠오르는 희미한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동우를 볼 때마다 뭔가 기억이 날듯한데, 여전히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셋은 성찬이 사온 황도 캔부터 따서 먹기 시작했다. 챙겨온 일회용 포크로 집어먹는 동안 동우가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한참 먹어도 그가 말이 없길래 원빈이 먼저 나서서 재촉했다. 그래서 보여주고 싶은 게 뭔가요? 그 말에 동우는 콧수염에 묻은 달콤한 과일즙을 손으로 문질러 닦고는 어제와 똑같은 낡은 무스탕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어 안을 뒤적거렸다. 잠시 후 테니스공 만한 묵직한 쇳덩어리를 꺼내 보이더니 허공을 향해 내던졌다. 성찬과 원빈이 놀라기도 전에 그 공은 바닥에 닿기 직전 세 조각으로 갈라진다. 

 

"아마 여길 누가 만들었는 지 아는 사람은 없지? 성찬이 너도."

"..."

 

갈라진 덩어리는 각각 거미 같은 로봇 다리를 만들어 아래로 착지했다. 그 로봇들은 다리를 움직여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하며 공간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 문물을 보자마자 성찬이 놀라 턱을 떨어뜨렸고 원빈은 입을 살며시 벌리다가 도로 다물었다. 원빈이 차분히 물었다.

 

"여기 지하를 파낸 로봇인가요?"

"응, 맞아."

"..."

"여러 놈 있긴 한데, 구멍 파는 것만 1년 반은 걸렸다고 해."

"그럼..."

 

동우는 황도 조각을 하나 더 집어먹으며 껄껄 웃었다. 그가 손뼉을 치자 로봇들이 발치에 다가와 하나로 모여 다시 공 모양이 되었다. 그가 공을 주워 도로 주머니에 넣고는 말했다. 나 하나를 만나려고 2년을 할애했대. 그 정성이 대단한 거야. 절대 한 사회에서 양립할 수 없는 자신의 복제체와 만나려고 한 그 시도와 정성이. 원빈은 동우의 말을 이해하자마자 흐릿하던 기억이 떠올라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설마 동우 씨 원형이 뉴스에 나왔던..."

"아, 봤어?"

"네.. 제 비서가 아침마다 뉴스를 브리핑해주거든요.."

 

원빈의 말에 성찬이 그게 무슨 얘기냐는 얼굴로 동우를 쳐다보았다. 동우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까딱 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나라에서 인당 최대 두 명까지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게 허용하는 법안을 논의 중이라는 뉴스 안 봤나?"

"아, 봤던 거 같기도 하고.."

"3세대 방식 적용하면 제작 비용이나 시간이 절약 돼서 기회를 더 확대해주자는 내용인데.."

 

그 3세대라는 게 원형 인간이 침만 뱉으면 단 한 달 만에 복제체를 만들 수 있는 방식이더라고. 동우가 손에 침을 뱉는 시늉을 하며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그대로 법이 통과했다간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파리목숨이 되는 거나 다름 없어. 법이 한 번만 통과하겠어? 앞으로 두 명이든 세 명이든 네명이든 자신들에게 목숨을 바쳐주는 복제체를 만들려고 할 거야."


숙연해지는 분위기에 성찬이 두손을 모아 머리 뒤로 갖다 댄다. 외투 앞여밈이 벌어져 안에 입은 목폴라를 다 내보인 성찬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뒷말을 묻는다. 그래서? 동우는 아직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냐는 얼굴로 주머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둔다. 명함 위로 두 얼굴이 가까이 모이며 글씨를 들여다본다. 임 동 우. 이름 석글자가 쓰인 명함에 연락처와 개인 연구실 주소지가 쓰여있다.

 

"그런 세상이 된다면 당연히 나나 너희나 사는 게 즐겁지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하다만."

"..."

"내 원형은 그거에 적극 반대 하는 사람이거든. 무려 사람들을 모아 시위까지 하면서."

"..."

"너희가 정글 같은 바깥에서 살고 있으니까 알려주는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이 사람을 찾아가. 내 친구라고 하면 다 도와줄 거야. 자기 명예와 목숨을 걸고 지금 여기 이곳을 만든 걸 넘어 우리 권리에 대해 외치는 사람이니까. 그 말에 원빈이 명함을 들여다보던 고개를 들어 동우의 얼굴을 보았다. 뉴스 자료화면에서 스치듯 보았던 사람들의 뒤틀린 윤리관에 관해 소리치던 사람. 그 유전공학 박사 임동우라는 인물을 접했을 때도 너무 와닿지 않은 인물로만 느꼈었는데 이렇게 그의 복제체가 눈앞에 있다니. 심지어 복제체인 동우와 직접 만나보고 몸을 바꿔 살아보자고 했다던 그 무용담이 단순 호기심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 원형은 철저히 무언갈 확인한 것이다.

 

"그 원형 분이 동우 씨를 보고 많은 걸 느끼셨나 보군요.."

"맞아. 그 사람이랑 처음 여기서 밀회를 했었는데, 마주 보고 대화한 지 단 1분 만에도 느꼈다 했어."

"..."

"나는 그 누구도 함부로 할 권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나의 원형인 본인까지도."


복제인간은 물건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몇개월간 센터 내에서 나 대신 살아보며 많이 충격을 받았다고도 했어. 흔히 우리가 받는 사상교육 같은 거 있잖아. 죽을 날을 얌전히 기다리라고 하는 거."

"..."

"그런 걸 보고 확실히 뭔가 잘못됐구나를 느꼈대."

 

원빈은 명함을 만지작대던 손을 말아쥐어 주먹을 꽉 쥐었다. 원형을 대신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면 철저히 물건 취급을 받던 지난 세월이 스치느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도 누군가는 저희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네요. 원빈은 작게 말하곤 명함을 챙겨 제 코트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성찬은 옆에서 원빈을 바라보다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지긋이 바라보던 성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동우의 어깨를 툭툭 치고 챙겨온 선물 가방 쪽으로 갔다. 그런 거라면 여기를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겠네. 나는 선물 좀 꺼내서 정리하고 있을게. 그는 원빈과 함께 사 온 책이며 인형이며 옷가지 등등을 꺼내 친구들 이름순으로 빈 테이블에 올리기 시작했다. 절망과 희망을 오가는 동우의 이야기에도 전혀 풀이 죽은 적 없는 성찬은 금방 선물 정리에 집중했다. 원빈은 그런 성찬의 모습을 멀리 건너다보다가 동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시 바라본 동우도 언제 진지한 이야기를 했냐는 듯 아이 같은 표정으로 남은 황도를 마저 먹고 있었다. 원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동우 씨."

"응?"

"아까랑은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요. 사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세아도를 찾아왔거든요. 성찬이 형이 바바 할아버지는 뭐든 잘 아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했어서요."

"오, 그래? 뭐든 물어봐도 돼."

"..."

 

흔쾌한 동우의 태도에도 원빈은 눈을 초조하게 굴리다 질문을 꺼냈다.

 

"혹시 노바리아라고 아세요?"

"..."

"하늘에 떠 있는 섬이라는 곳."

"음."


동우가 포크로 통조림 안을 뒤적거렸다. 그는 원빈의 말을 듣고도 수초간 통조림을 비우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몇 입 먹고서 포크를 내려둔 후에야 그가 눈을 맞춰준다.

 

"거기를 왜 찾지?"


흐릿한 회색의 눈으로 응시해오며 동우가 단호하게 물었다. 원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누구나 영혼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 들었어요. 게다가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는 곳이라고도."

"영혼을 얻고 싶어서 가고 싶은 거야?"

"네."

"..."

"혹시 어디 있는 지 아실까요..?"

"노바리아라.."

 

주름이 자글한 손이 들리며 수염을 살살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동우는 기억을 떠올리는 듯 눈을 위로 치켜뜨며 중얼거렸다. 노바리아.. 노바리아.. 반복해 중얼대길래 원빈은 역시 들어본 적 있나 보다며 까만 동공을 빛내고 있었다. 

 

"전혀 모르겠는데?"

"네..?"

 

원빈의 눈썹이 팔자로 휘어지고 동우가 목을 뒤로 꺾으며 웃었다. 하하하. 미안하네. 하하. 지하실을 가득 메우는 호탕한 웃음소리에 성찬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왜 이래, 저 할배? 다가온 성찬이 동우와 원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원빈은 장난에 넘어간 기분이 들어 두손에 얼굴을 푹 파묻는다.

 

"하하, 미안, 너무 순진한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장난을,"

"아 진짜, 원빈이 놀리지 말라니까.."

"정말 미안, 혹시 이거 통조림 한 개 더 없어? 더 먹고 싶은데."


동우의 부탁에 성찬이 툴툴거리며 다시 자리를 떴다. 그가 캔 하나를 더 가지러 가는 동안 원빈이 땀이 삐질삐질 나는 얼굴을 내보였다. 동우는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리며 귀를 가까이 대보라는 손짓을 한다.

 

"그래도 영혼에 관해서는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게 있어."


비밀 친구에게 기밀 사항을 전해주는 사람처럼 동우가 속삭였다. 성찬에게는 알려주지 말고 우리끼리만 알자는 듯한 그 목소리에 원빈이 다시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건 어딜 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마 아주 가까이 있을 거야."

"...정말요?"

"그럼."

 

원빈은 집중하느라 손까지 모아 테이블에 올렸다.

 

"가까이 있다면 어떻게 알아볼 수 있어요?"

"그거야 뭐. 반짝반짝 빛나니까 알아볼 수 밖에 없지."

"반짝반짝..?"

"응, 그리고 그걸 발견한 곳이 어디든, 거기가 네가 찾는 곳이 될 거야. 하늘에 뜬 섬."

"......"

 

다 듣고 난 원빈이 미간을 좁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자기가 아무리 순진해도 그건 아니라는 눈빛이다. 동우는 참지 못하고 또 흐흐 소리를 냈다. 테이블 위로는 새 통조림이 탁 소리를 내며 올라왔다. 바바, 뭐가 그렇게 즐거워. 한마디 한 성찬이 통조림을 까주기 시작하자 동우가 포크를 들어 황도 향이 확 퍼지는 통조림 입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봐, 난 이 찰나도 여기가 노바리아라고 느껴. 그 말에 성찬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며 고개를 저었고 원빈은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또다시 둘러 앉은 셋은 담소를 나누며 그 새벽을 보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만 헤어질까?"

"뭐야, 벌써?"

"응, 노인인 나는 이틀 연속 밤새는 건 무리라서."

 

그리고 새벽 두 시를 향할 때쯤 동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허리에 손을 대고 몸을 젖히면서 뚜두둑 소리를 냈다. 성찬은 위로의 의미로 그의 등을 두어번 쓸어주곤 마지막으로 아까 그 로봇 좀 보여주면 안되냐고 부탁했다. 동우로부터 공을 건네받은 후엔 한쪽 구석지로 달려가 다리 달린 로봇이 움직이는 걸 구경한다. 와, 얘네 생각보다 귀여운데? 내가 쳐다보니까 자꾸 갸웃해. 원빈은 성찬이 로봇을 구경하는 동안 동우에게 말했다.

 

"혹시 임동우 박사 님은 시위가 잘 이루어진다고 하던가요?"

"글쎄.. 나도 엠마한테만 대충 듣긴 했는데 쉽지 않나 보더라고."

"괜찮을까요?"

 

동우는 빈 통조림 캔을 손으로 집어 들다 말고 원빈의 말에 멈칫했다. 다시 캔을 내려둔 동우는 원빈의 두손을 잡아주며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뜻을 함께해줄 사람들이 더 목소리를 내주면 좀 더 괜찮긴 하겠지. 더 많은 연구자나, 더 많은 정치가나, 그냥 유명인이라고 할지.. 원빈이 잠자코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치만 괜찮냐 아니냐를 따져보자면 어떻게 되든 내 원형은 이미 괜찮은 것일 수도 있어."

"..."

"그 사람이 내게 한 말이 있는데,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지 못한다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한다면 죽어 있어도 산 것이라고 했으니까."

"죽어 있어도 산 것.."

"좀 거창한 얘기지?"

"아녜요,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동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성찬 쪽으로 눈짓을 하며 덧붙였다. 나가서도 잘 지내고, 또 올 수 있으면 놀러 와. 성찬이가 좀 바보 같은 구석이 있어도 친하게 지내고.

 

"쟤가 저래 보여도 굉장히 든든한 친구거든. 아마 자기 애인 하나쯤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킬 그럴 애야."

 

그가 '애인'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원빈에게로 턱짓을 해 보였다. 듣자마자 원빈의 얼굴이 붉게 타올라 동우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다. 마지막까지도 장난기가 가득하시다니. 동우는 다음에 볼 땐 말을 편히 놓아달라며 성찬에게로 몸을 돌렸다. 성찬은 다시 공 모양으로 만든 로봇을 동우에게 돌려주었다. 이제 정말 돌아갈 시간이다. 동우는 손을 흔들며 나가는 문을 향했고 성찬과 원빈은 그 반대편 문을 향했다. 철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엔 원빈이 주춤대다 말고 다시 뒤를 돌았다. 잠깐만. 양해를 구한 그가 친구들을 위한 선물이 놓인 테이블에 다가갔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원빈은 실물 카드 사이에 끼워져 있던 말린 은행잎을 꺼내 테이블 위에 두었다. 성찬이 처음 만난 날 방에 잔뜩 흘리고 나간 노란 은행잎. 그 마지막 선물을 두고는 다시 문을 잡고 있는 성찬에게로 향했다.

"아까 바바 할아버지가 뭐라고 했어?"

"그냥 형에 대해서 좋은 말해 주던데요."

"정말?"

"네, 형이랑 친하게 지내라고 했어요."

 

눈이 펑펑 내리는 하늘 아래에서 사내 둘이 조심히 발을 내디디며 걸었다. 이제는 발이 푹 빠질 정도로 눈이 쌓여 세상 모든 풍경이 새하얬다. 12월 15일의 새벽. 다설지(多雪地)로 유명한 섬답게 세아도 위로 내리는 눈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원빈은 신발 틈으로 들어오는 눈의 찬기를 느끼며 땅을 보았다가 하늘을 보았다가를 반복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부츠 신고 올 걸. 성찬은 옆에서 보폭을 맞춰 걸으며 말했다. 이렇게 넓은 세상 속에서 지척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성찬의 목소리 하나뿐이었다. 원빈이 아무 말 없이 앞을 보고만 걸었다. 성찬은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히 말을 건다. 

 

"그래서, 물어보니깐 할아버지가 뭐래?"

"노바리아요?"

"응."

 

원빈이 코트 겉주머니에 두손을 찔러넣고 숨을 천천히 쉬었다. 그의 입술 틈으로 허연 입김이 나왔다.

 

"모르시겠대요."

"어, 정말..?"

 

당황한 성찬이 잠깐 멈추어 섰다가 다시 뒤따라 걸어왔다. 몇걸음 뒤처진 성찬은 원빈의 기분을 살피며 쩔쩔매기 시작했다.

 

"아, 아이.. 그 할배도 참. 다 아는 줄 알았더니 모르는 것도 있구나."

"뭐 그럴 수 있죠. 그냥 전설인데."

"아니, 그래도.. 괜히 전설이 생겼겠어? 비슷한 거라도 있겠지. 안 그래?"

"..."

"저기, 그, 원빈아... 괜찮아?"

"괜찮은데요?"

 

안 괜찮아보이는데..? 성찬이 뒤에서 머리를 헤집는 소리를 낸다. 원빈은 앞서 걸으며 몰래 웃음을 참았다. 사실 그는 기분이 정말 괜찮았음에도 축 처진 척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성찬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었기 때문에. 그런데 정말 이렇게까지 쩔쩔매다니. 

 

"좀 안 괜찮은 거 같긴 하네요.."

 

한술 더 뜨는 말엔 성찬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원빈은 여기 사람들처럼 장난기를 발휘해본 단 몇초 만에 취소 선언을 속으로 내린다. 저렇게 슬프게 만들고 싶진 않은데. 노바리아가 뭐라고. 나는 형이랑 보내는 지금 이 시간도 즐거운 걸. 그래서 뒤로 돌아 바로 거짓말이라고 실토하려 하는데..

 

뒤도는 순간 성찬의 걱정스러워 하는 얼굴이 보였다. 어둠이 깔린 새벽의 공기 속에서도 뚜렷이 보이는 성찬의 얼굴이. 그는 원빈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오며 다급하게 말했다.

 

"내가, 내가 같이 계속 찾아줄게."

"..."

"어디 있는 진 몰라도, 계속 찾다 보면 될 거야."

"..."

"내가 찾아줄 테니까 걱정 하지 마, 원빈아."

 

근데 왜 그 얼굴을 보는데 숨이 턱 막히고 눈물이 나올 거 같지. 원빈은 어깨를 붙잡아오며 달래는 성찬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성찬의 눈빛 속에 속상함, 걱정스러움, 그리고 원빈을 향한 마음이 그득했다. 말도 안 되잖아. 어떻게 그렇게 나를. 말 없이 성찬을 바라본 원빈은 그에게 이끌려 한 걸음 다가갔다. 그 눈빛을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성찬이 형.."

"어..?"

 

그리고 신발 뒷굽을 들어 고개를 맞붙인다. 입술끼리 닿도록. 원빈은 눈을 감으며 살며시 그에게 온기를 전했다. 부드러움이 닿은 건 입술뿐인데 순식간에 온몸이 환희에 잠식된다. 원빈은 감은 눈을 파르르 떨다가 입술을 떼고 뒷굽을 내렸다. 한 뼘의 거리를 두고 성찬을 올려다보는데 그가 숨만 내뱉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서야 원빈이 화들짝 놀라 어버버한다. 

 

"그, 이건 그냥 고마워서 한 거예요. 형한테 고마운 게 많으니까.."

 

그 말을 하고 뒤돌아 발을 내디뎠다. 부끄러움이 올라와 미칠 거 같았다. 원빈이 허둥대며 앞으로 걸어가려는데 손이 잡혔다. 

 

"원빈아."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다시 돌려세워진다. 원빈의 뒤통수로 손이 들어왔다. 끌어당겨진 원빈에게로 성찬이 고개를 숙여왔다. 심장이 마구잡이로 조여든다. 숨결이 삼켜지며 입술끼리 맞물렸다. 원빈은 눈을 감아온 성찬을 따라 함께 눈을 감았다. 입술을 무는 그의 온기와 촉감과 떨림에 모든 걸 맡겼다. 애틋한 움직임이 입을 파고들었다. 턱을 움직이며 키스를 하는 성찬이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온다. 커다란 두손은 머리칼을 쓸었다가, 뺨을 매만졌다가, 목을 잡아 오길 반복했다. 박원빈을 어떻게든 느끼려는 듯.

 

"좋아해."

 

입술을 떼고 속삭인 성찬이 다시 입술을 삼켜왔다. 원빈의 손이 그의 가슴께로 올라갔다. 매달리듯 그의 옷을 쥐어 잡은 원빈이 함께 입술을 더 깊이 맞붙였다. 심장이 환희로 가득 차 터질 거 같았다. 호흡이 딸려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그런데도 입맞춤을 멈출 수 없었다. 성찬은 뜨거운 숨을 뱉으며 한 번 더 말했다. 

 

"내가 너를 좋아해."

 

잠시라도 입이 떨어지는 시간이 아까워 원빈이 그에게 더 매달렸다. 입술이 섞이고 또 섞였다. 온기를 나누고 또 나눴다. 심장 박동을 나누고 서로를 느꼈다. 눈앞엔 그의 마음 밖에 보이지 않았고 귓가엔 심장 뛰는 소리만 무성했다. 원빈은 처음으로 누군가와 하나가 되는 감각을 느꼈다. 맞닿은 마음과 어떠한 간극도 느껴지지 않았다.

 

계속. 계속. 끝없이.

 

그토록 무한한 새벽을 원빈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

 

새벽을 지나 오전의 햇살을 맞이한 원빈이 잠들어 있는 성찬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옆자리에 엎드려 누워 곤히 잠든 그의 허연 얼굴 위로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아름답게 부서지고 있었다. 침대 속에서 맨몸을 이불로 둘둘 감은 원빈은 손을 뻗어 성찬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살살 쓸어보기도 하고 길게 뻗은 속눈썹을 조심히 만져보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예쁘지. 그가 턱을 괴고 또 예쁜 눈코입을 뚫어져라 본다. 너무도 푹 빠진 눈빛으로. 원빈은 성찬을 닳도록 보았을 때쯤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어쩐지 그를 보고 있으니 눈에서 방울진 눈물이 나왔다. 수십 수백마리의 나비가 가슴속에서 날갯짓하는 듯했지만 동시에 저릿해지는 기분 때문에.

 

너무 행복하면 가슴이 저릿해지기도 하는구나.

 

이불 속에서 꾸물대던 원빈은 침대 밑으로 팔을 뻗어 옷가지를 끌어왔다. 하나하나 끌어온 그는 최대한 부스럭대는 소리를 내지 않으며 옷을 입었다. 침대 밖으로 나갈 수 있을 정도의 차림이 된 후엔 바닥에 널브러진 외투를 주워들어 살금살금 방 밖을 나갔다. 문까지 살며시 닫고선 펜션 밖을 나가 화창한 하늘을 쳐다본다. 눈이 그치고 햇살만 구름 사이로 보이는 맑은 날씨였다. 기지개를 한 번 켠 원빈은 발목까지 쌓인 눈 위를 저벅저벅 걸으며 길을 나섰다. 그는 성찬이 자는 동안 몰래 브런치로 먹을 음식을 사 올 생각이었다.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맛있는 음식을. 뭐가 좋지. 역시 어제 먹은 그거인가. 고민을 빠르게 끝낸 원빈은 제설 작업을 하는 섬 주민에게 다가가 그 바게트 스파게티가 어디서 파는 건지 물어가며 가게를 찾았다. 찾는 데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날 하도 돌아다니느라 주변 지리를 다 꿰차게 되어 간단히 설명을 들어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간판도 생각보다 요란하게 통통 튀는 간판이라 멀리서도 잘 보였다.

형 이런 곳이 취향이구나. 잘 기억해둬야겠다.

 

전날 먹은 걸로 똑같이 두 개를 포장한 원빈은 숙소로 돌아가 부엌 식탁 위에 그 브런치를 올려두었다. 그런 다음 2층 빈 침실 방에 올라간다. 전날과 똑같이 덩그러니 열려있는 트렁크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앉은 원빈은 코트 주머니에서 동우가 준 명함을 꺼내 마치 조각상이 된 것처럼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친다. 비로소 생각을 끝냈을 땐 트렁크 안으로 손을 깊숙이 집어 넣어 휴대용 아이리스를 꺼내 몇 년간 신용해온 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락이 닿는 데엔 평소처럼 단 2초가 걸리며 바로 맥스의 음성이 들렸다.

 

— 네, 원빈 님.

"응, 맥스. 미안한데 아직 집 앞에 기자 님들 있어?"

— 네, 아직 있어요.

"그럼 그 기자들한테 전해줘. 나 기자 회견 열 테니까 거기로 와달라고."

— 네?

"그리고 장소 선정해서 기자석이랑 다과도 준비해줘. 일시는 빠르면 빠를 수록 좋아. 메시지 작성해서 기자 초대 진행 해주고."

— 잠시만요. 어떤 목적으로요?

 

원빈은 손끝을 달달 떨었다. 입술을 잔뜩 깨물고 나서야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번 복제인간 관련 법에 대해서 내 생각 말할 거야. 왜 피아니스트 활동을 하지 않는 지도 말할 거고."

— ......

"맥스, 내가 명함 하나 찍어 보낼 테니까 이분에게도 메시지 드려줘. 박원빈, AX02-030217, 내 신분 명확히 밝히면서.

— 저...

"무슨 말 할지 알아. 그런데 괜찮아.. 괜찮으니까 그렇게 해주라."

— ...알겠어요. 말씀대로 할게요.


응, 고마워. 연락을 마치고 임동우의 명함을 찍어 보낸 원빈이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심호흡을 하고 머리를 헝클이기도 한다. 아. 저질렀다. 살면서 순응만 해봤지 반항을 해본 적 없는 원빈은 이 결심의 순간이 생소하면서도 두려웠다. 그는 수 분간 마음을 추스르고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가 성찬의 침실을 찾았다. 외출복 그대로 침대를 파고 들어간 원빈이 아직 세상모르고 자는 성찬의 어깨를 흔들었다. 형. 형. 우리 곧 퇴실 시간이에요. 밥 먹어요, 나랑. 작게 속삭이며 깨우니 성찬이 눈을 감은 채로 원빈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이내 원빈의 볼이 붉게 물든다. 성찬이 품을 파고들어 와 머리를 비비적대고 있었다.

 

으응, 원빈아.. 어리광 짙은 목소리로 원빈의 가슴팍에서 웅얼댄 성찬은 부끄러움으로 굳은 원빈의 손을 찾아 잡아끌었다. 잡힌 손이 딸려가 도착한 곳은 성찬의 머리칼. 거기로 잡아끈 성찬이 조르듯이 말했다. 쓰다듬어주면, 일어날게. 그 소리에 원빈이 망설이다가 제 품속에 있는 둥근 머리통을 천천히 쓰다듬어주기 시작한다. 뭐야. 강아지도 아니고..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갈색 모가 몇번이고 스쳤을 땐 성찬이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와, 원빈이 너... 심장 소리 엄청나."


성찬의 말에 얼굴이 홧홧해진 원빈이 품에서 묵직한 몸을 황급히 떼어냈다. 어, 어서 일어나요. 말까지 더듬은 그가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방을 나가 부엌을 향했다. 식탁에 앉아 성찬을 기다리면서도 원빈의 심장은 쿵쿵대며 뛰고 있었다.

 

*

 

퇴실을 마친 성찬과 원빈은 트렁크 가방을 들고 해안가를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항공기 탑승장을 찾은 그들은 세아도 위로 발자국을 길게 남기며 이동했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 겨울 바다를 배경으로 걷는 동안 원빈은 브런치를 먹으면서도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고백했다. 형, 저 사실 사고 쳤어요. 긴장한 목소리로 운을 뗀 원빈이 걷는 속도를 맞춰주는 성찬을 눈치 보듯 흘끔 바라보았다.

 

"무슨 사고?"

 

성찬은 벌써 기대가 된다는 얼굴로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원빈은 사고를 쳤다는 말에 그런 표정을 짓는 사람은 세상 처음 봤기에 목소리에 더 힘을 주고 말했다.

 

"진짜, 진짜, 큰 사고예요."

"에이, 네가 사고를 쳐봤자 얼마나 클 거라고."

"정말이에요. 들으면 뭐라 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말해놓고도 원빈이 노바가 주차되어 있는 탑승장에 갈 때까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둘은 섬의 관리인을 만나 키를 건네받고 외부인 명찰을 반납했다. 공터 같은 곳에 세워진 노바를 향해 거의 도착했을 땐 원빈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저.. 말하려구요. 그동안 사람들에게 말 못했던 걸."

 

몇 걸음 앞서나간 성찬이 원빈을 뒤돌아보았다. 원빈은 트렁크 손잡이를 꼭 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성찬이 그에게 다가가는 동안 원빈이 말끝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아, 아주 위험할 수도 있어요. 형한테 해가 갈 수도 있고.. 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받거나 심하면 공격을 받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어디 멀리 가버려야 할 수도 있고......"

 

성찬은 그런 원빈의 뺨에 손을 뻗어 자신을 보게 했다. 원빈아, 나 봐봐. 차분히 말하는 목소리에 원빈은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역광으로 눈이 부셔 잘 보이지 않는 성찬이 보였다.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손길이 닿았다.

 

"걱정 마. 내가 지켜줄게."

"..."

"네 뜻이 내 뜻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말을 마친 그가 몸을 돌려 노바를 향했다. 지켜준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한 원빈이 눈을 끔벅 뜨다가 뒤늦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노바의 문이 열림에 따라 성찬이 먼저 제 짐을 집어 넣고 원빈의 짐을 건네받아 또 밀어 넣었다. 원빈에게 고개를 돌린 성찬은 다시 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때 예기치 않게 노바가 땅에서 붕 떠오르기 시작한다. 노바, 잠깐, 나 아직 안 탔어! 원빈이 급박한 목소리로 말하는 동안 성찬은 상체를 숙여주며 손을 더 길게 뻗는다. 잡아, 원빈아! 그 말에 커다란 손을 덥석 잡은 원빈이 있는 힘껏 뛰어올라 문 밑 발판을 밟았다. 그러자 성찬의 얼굴이 가까워지며 선명히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저를 보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원빈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 성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바람결에 머리칼이 나부끼는 성찬이 물었다. 노바는 끝없이 상공을 오르고 있었다.

 

그 시간 속에서 원빈은 무한히 반짝이는 성찬의 눈을 보며 말했다.

 

"형, 신기하다. 나 노바리아가 어디 있는 지 알 거 같아요."

 

원빈이 환하게 웃었다. 아주 맑고 투명하게. 그렇게 웃으며 성찬의 눈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그는 마주친 시선 속에서 어떠한 세계를 발견하고 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깨닫는다.


형과 가는 곳이 어디든

그곳이 바로 나의 노바리아. 나의 천국. 

그리고 아마도

 

 

 

 

아주 멋진 신세계

The island in the sky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