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이 많아서
by. 쿠로이
2023년.
그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인생을 바꿀 기회를 마주한다. 그 큰 기회가 고작 몇 년 사이에 연이어 오는 경우는 몇이나 될까?
그 시기의 정성찬은 운명이나 기회라는 게 두 눈에 보이고, 두 손에 잡힐 것처럼 분명하고 뚜렷하게 느껴졌다. 몇 년 동안 느낀 답답함과는 전혀 다른 선명함이었다.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데뷔하는 것. 그런 뒤 또 새로운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다시 데뷔하는 것. 그것도 같은 회사에서.
성찬은 이 기회를 절대로,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성실하게, 진솔하게, 그게 먹히지 않으면 뻔뻔하게, 맹랑하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견뎌낼 작정이었다.
몇 년 만에 선보이는 신인 그룹 때문에 회사 내부도 시끄러웠다. 자연스럽게 신인 그룹 그 자체, 관련된 스태프들, 멤버들에 관한 이야기가 뒤섞여 나돌았다.
그중 가장 자극적이고 그래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야기는 중요 멤버 하나가 다른 멤버를 매우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성찬은 어느 사람 입에서는 ‘중요 멤버’가 됐다가 또 어느 사람 입에서는 ‘다른 멤버’가 됐다.
그때만 해도 정성찬을 비롯해 그 누구도 이 불화설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신인 그룹이 데뷔할 때마다 온갖 근거 없는 루머가 따라붙고는 했으니까. 이런 건 가벼운 액땜이자 오히려 화제성의 징표였다. 설사 작은 불화가 있다손 치더라도 앨범 작업, 온갖 활동, 해외 투어 등 생고생을 함께하면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없던 정도 붙기 마련이었다. 태양이 동에서 뜨고 서로 지는 것처럼,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무엇보다 정성찬은 살면서 누군가한테 미움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보이는 호감은 날 때부터 공기 중 산소처럼 당연하였다. 덕분에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여러 사람과 원만한 관계가 유지됐다. 누군가가 성찬을 싫어한다? 그것은 오히려 삐뚤어진 애정이었다.
“하, 진짜, 도대체 뭐가 불만인데?”
성찬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털었다.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데?”
2023년 상반기는 언제든 결정이 번복될 수 있다는 불안을 견디며 보냈고, 하반기는 데뷔와 함께 몰아치는 스케줄로 정신 없는 날들을 보냈다. 그러면서 성찬의 세계에서 누구도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깨졌다.
박원빈이 정성찬을 싫어한 것이다.
“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는 없어. 받아들일 건 깔끔하게 받아들여. 마음에 안 든다고⋯⋯ 적어도 그렇게 사람들 있는 곳에서 티를 내면 안 된다고.”
성찬한테 멱살이 잡힌 건 같은 그룹 멤버인 원빈이었다. 원빈은 목을 압박하는 힘에 고통스러워 얼굴을 찌푸렸다. 데뷔 초 떠돌던 가십에 등장한 ‘중요 멤버’가 너지? 네가 날 싫어하는 거지? 왜? 네가 원하던 구성이 아니어서? 나 때문에 누군가 피해를 본 것 같아서? 그래, 그럴 수 있어.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이해해. 나도 예상했던 거야.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 작정이야?
데뷔 이후 팀의 성과는 훌륭했다. 안정적인 지지 기반이 다져졌고, 그 기반 위에서 앞으로 성취할 여러 가지 황홀한 목표를 현실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멤버들 모두 함께 노력했다. 성찬은 제 몫을 해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나 진심으로 좋아하라는 거 아니야. 연기라도 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조심이라도 하라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원빈은 성찬을 꺼리고 불편해했다. 만고불변의 진리가 도통 박원빈한테는 먹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러나 딱 달라붙어 지낸 지 몇 달이 흘러도 관계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대놓고 싸우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원빈과 성찬의 관계는 그런 건 또 아니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이유도 없이 꺼리는 관계. 그런 미묘한 대치 상태가 잔잔하게 그래서 오히려 더 짜증 나게 성찬의 신경을 긁었다.
기어코 성찬이 터져버렸다. 아이돌 팬덤에서 인기가 많은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게임과 인터뷰를 하던 중이었다. 성찬이 장난스럽게 원빈의 어깨를 붙잡았는데, 원빈이 화들짝 놀라며 불쾌한 얼굴을 한 채 몸을 뺐다. 다른 멤버가 농담으로 상황을 무마하지 않았다면 현장 분위기가 이상했을 것이다.
순간, 성찬의 내부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공식적인 스케줄을 하는 와중에도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박원빈한테 화가 났다. 팀에서 불화설이 나오는 것도, 그 불화설의 주인공이 자신인 것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분노가 치솟았다.
“박원빈, 내가 이렇게 화내는 거 봤어?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어? 제발 좀.”
“크흑⋯⋯.”
목이 졸린 원빈이 숨을 못 쉬어 컥컥거리자 성찬은 원빈의 멱살을 틀어쥔 손을 다급히 뗐다. 원빈은 자신의 목을 감싸 쥐고서 밭은기침을 해댔다.
“미안.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 없어. 근데⋯⋯ 적어도 밖에서 티는 내지 말자. 계속 이러면 팬들도 다 알아. 너도 우리 팀 소중하잖아. 잘하고 싶잖아.”
통증이 가셨는지 원빈은 더는 기침을 하지 않았다. 성찬의 말에 원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하게 땅만 쳐다봤다. 익숙한 그래서 더 치가 떨리는 답답함이었다. 성찬은 원빈을 상대하는 게 곤혹스러운 게 바로 이런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성찬은 성미가 급하고 누구한테든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하는 편이었다. 반면 원빈은 자기 영역 안에 든 사람이 아니면 자기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성찬은 원빈의 허용 범위 밖에 있는 사람이었다.
“대답해.”
“⋯⋯.”
성찬은 원빈을 몰아붙였다. 보통 때라면 원빈의 심기가 상할까 지레 포기해버렸지만, 이렇게 멱살까지 잡은 마당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했다. 오늘은 어떤 방향으로든 한 걸음 전진하고 싶었다.
“⋯⋯.”
“⋯⋯.”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성찬의 기세에 원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아래를 향하던 고개를 들어 성찬을 올려다봤다. 박원빈의 새까만 눈동자. 그 눈동자를 본 성찬은 내부에 가득 찼던 분노가 한순간에 차분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원빈의 눈동자에 비난, 분노, 경멸 등의 감정이 어렸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검고 진한 눈동자에는 아련함이 어려 있었다. 마치 성찬을⋯⋯.
“저는 형이⋯⋯.”
한참만에 원빈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지한 속내라는 걸 성찬은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긴장해서 입에 침이 고였다.
“무서워요.”
“뭐?”
어처구니가 없어서 가벼운 반문이 튀어나왔다. 원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찬을 쳐다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말은 조금 전에 한 말보다 더욱 더 성찬을 어처구니없게 했다.
“형이 날 좋아할까 봐.”
“뭐?”
“형이 날 좋아할까 봐 무섭다고요.”
“⋯⋯.”
“약속해요. 날 좋아하지 않기로.”
* * *
1994년.
올해 여름은 기록적인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 늦가을에 접어든 요즘 성찬은 한 해가 어서 끝나기를 바랐다. 이건 아마 혼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비극적인 사건 사고가 유난히 많은 해였으니까.
대학교 3학년 스물다섯 만기 전역 복학생 정성찬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동산 거래를 했다. 몇 년 동안 모친이 눈독을 들인 집이 매물로 나왔는데, 하필이면 부모님 두 분 모두 외국으로 장기 출장 중인 탓이었다. 성찬이 대신 부동산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목조 주택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것으로 한국 전쟁 이후에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지하층, 일층, 이층 구조였는데, 사실 흙을 쌓아 마당을 높여 일층을 지하층으로 만든 것이었다. 대문을 열자마자 나오는 돌계단을 오르면 아늑한 정원과 고풍스러운 2층짜리 목조 주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찬은 혼자서 이사까지 마쳤다. 전문 이삿짐센터랑 계약했지만, 의리가 좋은 친구 놈들 몇이 짐을 옮기고 정리하는 걸 돕겠다며 팔까지 걷어붙이고 나섰다. 작은 용달차 하나로 뚝딱 끝나는 자취생 이사라고 여긴 것이다.
친구들이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백지장도 만들면 낫다더니 의외로 도움이 됐다. 확실히 짐을 옮기는 속도가 빨라졌고, 이삿짐센터 인부들도 공짜 인력 덕분에 여유가 생긴 탓에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돈을 더 달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으니까.
“이야, 집 진짜 좋네. 무슨 고관대작들 사는 곳 같다.”
“그러게. 일본 강점기에 지어진 집이라던데, 친일파들이 살지 않았을까?”
“여기 마당에 타임캡슐 묻어도 좋겠어.”
성찬과 친구들은 1층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서 퍼질러 앉아 중국집 요리를 먹었다. 고기 튀김, 양장피, 깐쇼새우 등 요리를 넉넉하게 시키고 사람마다 식사도 빠짐없이 시켰다. 크고 낯선 집에 친구들의 말소리와 음식 냄새가 가득하니 부쩍 마음이 놓였다.
“부모님은 언제 들어오시는 거냐?”
“출장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집이 보고 싶으신지 다음 달에는 오시겠대.”
“그럼 아예 들어오시는 건 아니구나.”
“아예 들어오시는 건 내년?”
“그럼 그때까지 이 큰 집에 혼자 살아? 야, 좀 무섭지 않겠냐?”
한 녀석의 말에 성찬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무섭긴 뭐가 무섭냐? 귀신이라도 나올까 봐?”
“참내, 무슨 정성찬 걱정을 해? 얘 겁대가리가 없잖아. 공동묘지에서도 잘만 잘 거다.”
친구 하나가 겁이 없는 성찬이 고등학생 때 무슨 짓을 했는지 떠들어댔다. 이어서 이야기의 화제는 얼마 남지 않은 중간고사로 흘러갔고, 성찬은 앞에 놓인 음식을 열심히 먹으며 어서 겨울 방학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국집 요리가 간이 셌던 걸까. 성찬은 한밤중에 잠에서 깨 1층 부엌에서 물을 한 잔 마셨다. 아직 집 구조가 낯선 탓에 부엌이나 화장실에 가려면 잠깐 방향을 헤매야 했다. 적막한 밤중에 성찬의 무게에 짓눌린 나무 계단이 신음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옅어지는 잠결을 붙잡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던 성찬이 다시 2층 거실로 나왔다.
딸깍. 2층 거실에 불을 켠 성찬은 기묘한 느낌이 드는 벽을 쳐다봤다. 그곳에 처음 보는 초상화가 하나 걸려 있었다. 초상화 속 인물은 성찬도 아는 인물이었다. 중성적이고 요묘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남자. 동그란 눈매는 청순했고, 도톰한 입술은 관능적이며, 다른 이목구비에 비해 살짝 큰 코는 야성적인 인상을 풍겼다.
박원빈.
초상화 속 주인공은 박원빈이었다.
성찬은 의문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언제부터 여기 걸려 있었던 거지? 이런 건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거지? 초상화는 집처럼 오래된 것 같았다. 초상화의 액자가 낡았고, 그림 스타일이며 그림 속 원빈이 입고 있는 셔츠며 모두 요즘 것이 아니었다.
“뭐야, 어떤 놈이 이런 장난을 친 거야.”
들켰나? 성찬은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걸 느꼈다. 설마⋯⋯ 성찬이 원빈을 남몰래 좋아하는 걸 친구 놈들 중 하나가 알아버린 건 아닐까? 그래서 이런 장난을 치는 건가? 아니, 너무 지독하게 정성스러운 장난이잖아? 어디서 이런 걸 구했단 말인가.
“흐음.”
순간, 성찬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고개를 들어 초상화 속 원빈과 눈을 맞췄다.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초상화를 너무 진짜처럼 그렸기 때문이겠지? 원래 초상화라는 게 그렇다고 하지 않는가. 어느 각도에 서든 초상화 속 인물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성찬은 자신의 방으로 다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어떤 놈이냐?”
다음 날 성찬은 학교에서 이사를 도와준 친구들을 만났다.
“너희 중에 누가 그런 장난을 친 거야?”
“뭐? 무슨 장난?”
“웬 남자 초상화를 우리 집에 걸어 놓았잖아? 너냐? 너야?”
“남자 초상화? 그런 걸 우리가 왜 걸어?”
“야, 뭐야, 귀신이라도 본 거야? 천하의 정성찬이?”
성찬의 추궁에 친구들은 헛소리를 지껄여댔다. 표정만 봐서는 누가 장난질의 진범인지 찾아내기 어려웠다. 그들과 투덕거리던 성찬은 곧 친구들과의 대화에 흥미를 잃었다. 어느덧 예술대 건물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실습 강의가 늦게 끝난 모양이었다. 예술대 측면 통로로 검은색 코트나 카디건을 입은 무용과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키가 큰 성찬은 남들보다 더 높은 눈높이로 예술대에서 빠져나오는 얼굴들을 살펴보다가 보고 싶은 얼굴을 찾아냈다.
박원빈은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대충 묶고 있었다. 코트 앞섬을 제대로 여미지 않아 목덜미와 쇄골을 훤히 드러낸 채였다. 같이 나온 누군가와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했는데, 입술이 바쁘게 뻐끔거렸다. 방금까지 몸을 써 혈액 순환이 잘된 탓인지 입술이 탐스럽게 붉었다.
“그래서 누군데?”
“뭐?”
“초상화라며. 누구 초상화인데? 아는 사람? 연예인? 심은하? 김희선?”
“못 들었어? 남자라니까.”
“에이, 남자야? 이전 집주인 가족인 거 아냐?”
초상화에 관한 친구들의 추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성찬은 점점 멀어지는 원빈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주근깨가 가득한 목뒤가 훤히 드러났다.
성찬이 원빈의 모습을 쫓기 시작한 건 2학기가 시작된 첫 주부터였다. 군 만기 전역 후 복학한 성찬은 우연히 무용과 학생들의 워크숍 공연을 보러 갔다. 단순히 머릿수를 채워주려는 마음이었는데, 뜻밖에도 신화 속 반인반수 ‘판’을 연기하는 남자의 모습에 마법에 걸린 듯 매료됐다. 천진난만하면서도 음탕하고, 야성적이면서도 성스러운 육체. 단단한 뼈대와 아름답게 붙은 근육.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욕망과 그 욕망이 좌절돼 맛보게 되는 비애.
‘만져보고 싶어.’
그때였다. 성찬의 집요한 시선을 느낀 건지 원빈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성찬의 심장이 거칠게 박동했다. 마주친 시선에서 강렬한 인력을 느꼈다. 그러나 원빈은 매정하게 몸을 돌리고서 급히 멀어졌다. 성찬이 제대로 본 게 맞는다면, 성찬과 눈이 마주친 원빈의 얼굴은 두려움에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날, 성찬은 중앙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느라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1층 욕실에서 씻고 2층으로 올라온 성찬은 2층 거실에 세워둔 초상화를 집어 들었다. 지난 밤에 초상화의 그림이 벽을 향하도록 세워둔 것이다. 그 초상화를 다시 벽에 걸고서, 성찬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감상했다.
“원래 이랬나?”
성찬은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이상한 일이었다. 초상화 속 원빈의 머리카락이 어제보다 길어져 있었다. 게다가 분명 흰 셔츠 차림이었는데, 다시 본 초상화 속 원빈은 상의를 탈의해 굵은 목과 단단한 쇄골을 다 드러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낡고 오래된 느낌도 사라졌다.
“잘못 본 건가.”
그럴 법했다. 지난 밤에 그림은 본 건 잠결이었으니까. 밤이었으니까. 게다가 성찬은 관찰력이나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어찌 됐든 그림 속 주인공이 박원빈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성찬은 자신이 사소한 것을 잘못 봤다고, 잘못 기억했다고 가볍게 여기며 LP 플레이어에 드뷔시의 교향곡 LP판을 올렸다. 몽환적이고 야릇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성찬은 의자에 앉아 초상화를 마주 봤다. 마치 진짜로 상대방과 마주 앉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초상화 속 원빈은 오늘 교정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긴 머리카락, 목과 쇄골을 훤히 드러낸 복장, 턱에 있는 점과 목덜미에 있는 주근깨, 방금 수업이 끝난 터라 땀에 젖은 살결과 홍조가 오른 뺨, 뜨거운 체온⋯⋯.
그림이 너무 생생했다. 성찬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초상화 속 원빈의 입술을 건드렸다. 따뜻하고 까슬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 * *
2024년.
“어허이, 박원비니. 장난 아니네.”
성찬은 어색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원빈한테 장난을 걸었다. 원빈은 그런 성찬을 짧게 노려보고 말 뿐이다. 팬들은 저 모습을 마냥 귀여운 앙탈로 여기겠지. 하지만 성찬은 원빈이 지금 이 상황을 진심으로 싫어한다는 걸 안다.
‘치, 그러거나 말거나.’
히죽 웃은 성찬은 손을 뻗어 원빈의 목덜미를 세게 주물렀다. 그 손길에 놀란 근육이 딱딱하게 수축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그 감촉이 짜릿했다. 원빈이 성찬의 손을 차갑게 쳐내는데도, 성찬은 여전히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형이 날 좋아할까 봐 무섭다고요.”
어처구니 없는 말이었다. 정말, 아주, 몹시⋯⋯.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성찬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원빈이 자신을 경계하고 꺼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한 팀으로서 자신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박원빈의 연애 대상에서 열외가 되는 것? 참내, 그런 것 따위 조금의 타격도 없다. 정성찬한테 중요한 건 한 팀으로서 가치를 인정 받는 것뿐이었다.
성찬이 원빈의 멱살을 쥔 날 이후, 그러니까 원빈이 성찬한테 어처구니없는 경고를 뱉은 날 이후, 성찬은 원빈을 상대하는 데 거침이 없어졌다. 촬영 중이건 아니건 말을 걸고 싶으면 걸었고, 평소의 자신이 하는 행동이라기엔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툭툭 거리며 장난을 쳤다. 조심하면서 몸을 사린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러면 원빈은 뭐라고 말도 못 하고 눈을 세모나게 뜨고서 째려보거나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어째서일까. 귀엽네. 박원빈, 귀엽다. 쟤가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확실히 예쁘게 생겼고. 내가 자길 좋아할까 봐 쫄다니. 왕자병 아냐? 남자한테 대시를 많이 받았나? 남자가 남자 좋아하는 게 흔한 일도 아니고⋯⋯. 혹시⋯⋯ 나 좋아하는 거 아냐?
“약속해요. 날 좋아하지 않기로.”
박원빈의 엄포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듯했다. 정성찬이 박원빈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조급함이나 불안함이 전혀 없는 눈으로. 귀여운 모습은 귀여워하고, 예쁜 모습은 예뻐하고, 노래를 하면 감탄하고, 춤을 맛깔 나게 추면 마냥 부러워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게 됐고, 툭툭 건드리게 됐고⋯⋯.
“이거 나 원빈이랑 할래.”
“원빈이랑 나!”
“원빈이, 원빈이, 원빈이!!”
성찬은 어느 시점부터 짝을 지어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무조건 원빈을 찾았다. 카메라로 촬영 중이거나 아니거나 상관이 없었다. 자컨에서 팀을 짤 때도, 투어 중에 룸메이트를 정할 때도, 휴일에 쇼핑을 할 때도, 헬스장에 갈 때도. 물론, 원빈은 순순히 성찬과 짝을 해주지 않았다. 원빈은 대개 애착 멤버 형한테, 편한 멤버 동생한테 찰싹 달라붙은 채로 성찬을 노려봤다.
“뭐지? 요즘 성찬이 형 왜 이렇게 원빈이 형한테 집착해요?”
“그러게. 원빈이는 부담스러워하는 거 같은데? 이거 직장 내 괴롭힘.”
다른 멤버들마저도 한 마디씩 거들 정도로, 성찬은 원빈한테 유난스럽게 굴었다.
그런 정성찬이 박원빈을 거들떠보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그건 무서운 상황이었다.
“아아아, 싫어. 무서워. 나 못 해. 안 돼. 제발. 으악! 살려주세요!”
왜 사람들은 여름에 납량 특집 따위를 하는 걸까? 날이 더운 거랑 무서운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귀신은 말도 안 되잖아. 말이 안 되는 걸 왜 하는 거야?
여름 시즌에 맞춰 한국민속촌을 배경으로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에피소드를 연기하는 자체 콘텐츠를 촬영하게 됐다. 성찬은 그날 내내 거의 이성을 잃었고,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원빈한테 치댈 여유가 없었다.
“형, 괜찮아요?”
촬영 중간 쉬는 시간에 성찬은 사람이 가장 많고 조명이 가장 환한 스태프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너무 격렬하게 무서워한 터라 성찬의 머리는 엉망으로 엉클어져 있었는데, 다음 화면과의 연계성을 위해 헤어를 수정하지 않은 채였다. 그 꼴로 어딘가 혼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 괜찮아.”
“목이 다 쉬었어.”
“어이, 괜찮냐?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은데?”
성찬이 걱정돼서, 또 성찬을 놀리려고 멤버들이 모두 성찬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잘하고 싶은데, 진짜 무서워. 다 공포 영화에서 하지 말라는 거잖아.”
“공포 영화요?”
“어, 몰라? 공포 영화 데드 플래그? 나 그거 공부 열심히 했잖아.”
납량 특집 자체 콘텐츠의 시나리오가 쓸데없이 고퀄이었다. 공포 영화의 클리셰를 착실하게 따랐고, 공포 영화 데드 플래그를 가장 잘 아는 성찬은 그 누구보다 먼저 격렬히 무서워하며 에너지를 소모했다.
“근데 형은 왜 이렇게 무서워하는 거예요? 형은 달리기도 잘하고, 힘도 엄청나게 세니까, 사실 이성적으로 따지고 보면 무서워할 거 없지 않아요? 여차하면 도망치면 되고, 여차하면 힘 쓰면 되고.”
동생 중 하나가 진심으로 궁금한 기색으로 물었다. 평소 성찬은 이것저것 말이 되니 안 되느니 따지고 드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말이 안 되는 귀신만큼은 심각할 정도로 무서워했다. 논리적으로 맥락이 안 맞잖아?
“그게 생존하는 데 도움이 돼서 그래.”
그 물음에 대답한 건 성찬이 아니라 원빈이었다. 성찬은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원빈이 땅만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 성찬을 쳐다봤다. 두 사람이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겁이 많은 게 살아남는 데 도움이 돼요.”
“⋯⋯.”
웬일로 원빈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걸까? 안 그래도 무서움에 벌벌 떤 성찬은 원빈의 말에 큰 감동을 하였다.
“형이 이번에는 겁이 많아서 다행이에요.”
어라? 성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빈은 메이크업 수정을 위해 멀어지고 있었다. 원빈이 자리를 뜨기 전에 뭐라고 말한 것 같은데,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헷갈렸다. 이번에는? 겁이 많아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말했나? 내가 언제 겁이 없었는데? 살면서 한 번도 겁이 없었던 적은 없다고.
* * *
1994년.
확실히 이상했다. 초상화 속 원빈은 매일매일 변하고 있었다. 정해진 사각 프레임 속에서 머리카락이 자라고, 얼굴 표정이 바뀌고, 자세가 미미하게 바뀌었다. 초상화 앞에 앉아 있노라면 창 너머로 원빈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초상화 속 원빈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정성찬, 그 초상화는 어떻게 처리했어?”
“어? 무슨 초상화?”
“뭐야, 너희 집에 갑자기 나타났다던 남자 초상화 말이야.”
“너야말로 뭐야? 영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아니, 너 이사한 다음 날⋯⋯.”
“야, 당연히 장난이지. 그걸 믿었어?”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 성찬을 보며 친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느 시점 이후로 성찬은 초상화에 관해서 그 누구한테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전에 성찬이 한 말을 기억하고 확인하는 친구한테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발뺌했다가 쓸데없는 장난이었다는 말로 무마했다.
다른 사람이 초상화의 존재를 아는 게 싫었다. 초상화가 너무 소중해졌기 때문이다. 정성찬만을 위한 박원빈의 초상화. 살아 있는 초상화. 어떻게 초상화가 변할 수 있는지, 어째서 그것이 아무것도 없던 자신의 집에 나타난 것인지 등 당연히 떠올라야 할 의문은 성찬의 머릿속에 자리 잡지 못했다.
초상화는 그 자리에 존재해 마땅했다.
초상화와 마주 앉아 보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집에 도착하면 잠이 들 때까지 초상화 앞에 앉아서 초상화 속 원빈을 들여다보고 쓰다듬고 말을 걸었다. 자연스럽게 잠을 자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학교 강의도 제대로 출석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성찬의 칩거에 걱정이 된 친구들이 집까지 찾아왔지만 성찬은 기척을 죽이며 집에 없는 척했다. 성찬이 초상화에 집착하면 할수록 초상화는 더욱 더 진짜 같아졌다.
고된 연습에 지친 원빈은 눈을 감고 색색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초상화도 잠을 자는구나. 어쩜 이렇게 천사처럼 잘까? 성찬은 감탄하며 늘 그랬듯이 손을 뻗어 원빈의 살결을 더듬었다. 피부가 매끈했다. 숱이 많은 눈썹과 단단한 코뼈를 더듬거렸다. 움푹 팬 인중을 검지 손톱으로 긁고, 통통한 입술을 손가락 끝 지문으로 문질렀다. 성찬은 벌어진 입술 사이로 검지를 슬쩍 밀어 넣었다. 검지 두 마디가 다 들어갔다.
원빈의 입안은 축축하고 따뜻했다. 물렁물렁한 살덩이가 손가락 끝에 닿았다. 혀를 만진 걸까?
그림인데 어떻게⋯⋯.
“으악, 뭐야!”
벼락 같은 비명에 성찬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앞에는 잠에서 깬 원빈이 기겁한 채 벽에 등을 대고 달라붙더니 성찬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성찬은 엉거주춤하게 들고 있는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봤다. 검지가 침에 젖어 반짝거렸다.
그림이 아닌 것이다. 그림이 아니었다. 그림이 아니면?
“누, 누구세요? 자는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원빈은 벌벌 떨면서 말했다. 그러면서 좌우를 부산히 살피는 게 도망갈 길을 찾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성찬도 덩달아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다. 탁 트인 직사각형의 넓은 실내, 한쪽 벽면에 길게 늘어선 얇은 창문들, 쌓여 있는 담요와 나뒹구는 기타. 이곳은 고즈넉한 자신의 집 2층 거실이 아니라 학생 회관의 학생 휴게실이었다. 창 너머 세상이 새까만 게 깊은 밤인 모양이었다.
“미안, 미안해. 진짜 미안. 나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는데⋯⋯. 아니, 내가 뭐 어쩌려고 그런 게 아니라.”
성찬은 두 손바닥이 보이게 두 손을 들어 해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원빈은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앉은 자세 그대로 벽을 따라 계속해서 멀리 떨어졌다.
“몽유병인가. 나는 집에 있었는데, 분명 집에⋯⋯.”
성찬도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가능한 원빈한테서 멀리 물러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빈을 안심시킬 변명의 말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학생 회관에 온 기억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게 떠올랐다. 그 탓에 몽유병이라도 걸린 건가?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고, 그런 상태로 학교까지 온 건가? 그럴 수 있나?
휴게실 입구에 선 성찬은 겨우 한 마디 말을 뱉었다.
“미안해. 그림인 줄 알았어. 초상화인 줄 알고 만졌어.”
원빈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성찬을 빤히 쳐다봤다. 아직도 호흡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원빈의 갈비뼈 부분이 팽창했다가 수축하는 게 보였다. 어깨가 불안정하게 들썩거렸다. 만져보고 싶어. 저 움직임이, 진동이 궁금해. 살결이, 체온이 궁금해. 성찬은 그런 욕구는 꾹 눌러 삼키고 어둠에 잠긴 학생 회관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한 층을 거의 다 내려갔을 때였다. 머리 위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원빈이 난간에 매달려서 소리쳤다.
“저기요! 방금 뭐라고 했어요?”
성찬은 고개를 들어 원빈을 올려다봤다. 어둠 속에서 원빈의 두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방금 뭐라고 했냐고!”
“방금? 내가 뭐라고 했더라⋯⋯.”
“⋯⋯.”
“아, 초상화인 줄 알고 만졌다고요!”
그 말에 원빈의 얼굴은 헛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허옇게 질렸다.
* * *
2024년.
숙소는 텅 비어 있었다. 촬영 스케줄 하나가 밀리면서 갑자기 생긴 휴일이었다. 오랜만에, 그리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자유 시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멤버들은 모두 숙소 밖으로 빠져나갔다.
성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온종일 운수가 좋지 않아 헛고생만 하다가 일찌감치 숙소로 들어왔다. 이런 날 괜히 바깥을 배회해봤자 이상한 사진만 찍히고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기 쉬웠다. 잠깐 쉬다가 심심하면 헬스나 다녀올까 싶었다.
방에 들어가니 침대 옆에 제법 큰 액자 하나가 기대어 서 있었다. 생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이게 뭐야?”
성찬은 그 액자를 들어 올렸다. 액자 속에는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초상화의 주인공은 익숙한 사람이었다.
박원빈⋯⋯.
“팬이 그린 건가?”
그럴 법했다. 팬들은 사랑을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표현했고, 종종 그 표현물의 퀄리티가 높아 놀라고는 했으니까. 공식적으로 선물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이 초상화가 어떻게 숙소에 있는 걸까? 박원빈을 그린 초상화인데 왜 내 침대에 놓여 있지? 성찬은 기민하게 방 사위를 살피고, 방 밖으로 나가 숙소 여기저기를 살펴봤다. 혹시나 침입자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숙소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특별한 침입 흔적도 찾지 못했다. 한숨을 놓은 성찬은 그 초상화를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서 멤버들과 매니저들이 있는 단톡방에 올렸다.
[이거 누가 숙소에 갖다 놨어요?]
[내 침대 옆에 세워져 있었어요]
[원빈이 숙소 오면 찾아가라]
그렇게 톡을 보낸 뒤 성찬은 초상화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전문 화가가 그린 건지 그림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사진과는 분명히 다른 그림인데도, 마치 원빈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흐음, 근데 어느 활동 때를 그린 거지?”
성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팬이 그린 초상화라면 화보 사진이나 포토 카드 사진이나 활동할 때 모습을 그리는 게 보통인데, 초상화 속 원빈은 1년이 넘게 거의 매일 얼굴을 본 성찬한테 낯설기만 했다. 상의를 탈의한 채로 땀에 젖은 긴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흩트린 채였다. 턱의 점과 목 주위의 주근깨가 섬세하게 표현돼 있었다. 빡세게 춤이라도 춘 것처럼 거친 호흡을 몰아쉬는 야성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상하네. 도통 언제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근데 잘 그렸다.”
아니, 잘 그렸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너무나 생생했다. 초상화 속 원빈이 금방이라도 살아서 움직이며 자신한테 말을 걸 것만 같았다. 말도 안 돼. 그림이 어떻게 살아서 움직여? 하지만 꼭 그럴 것만 같았다.
성찬은 초상화 속 원빈을 집요하게 들여다봤다. 현실과 다른 그림의 흔적을 찾아 너무 생생해서 느끼는 불쾌함을 지우고 싶었다. 원빈의 크고 동그랗고 강인한 눈망울이 초상화를 들여다보는 성찬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초상화와 눈싸움이라도 하는 꼴이었다.
“⋯⋯너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됐어.”
초상화와 눈싸움을 하던 성찬은 피식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문득, 원빈이 자신한테 한 엄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기를 좋아하지 말라는 엄포. 성찬은 원빈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까 자꾸 의식하게 되잖아.”
그 말 때문에 오히려 한 번 더 원빈을 쳐다보게 됐다. 그 말 때문에 오히려 한 번 더 원빈의 이름을 부르게 됐다. 자꾸만 시선을 주고,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렸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치기 가득한 어린 나이도 아닌데 말이다.
“이거 그냥 내가 가질까?”
현실의 박원빈과 달리 초상화 속 박원빈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봐 줬다. 자신의 말을 다 들어줬다. 성찬은 초상화 속 원빈과 다시 눈을 맞췄다. 현실의 박원빈도 이렇게 자신을 쳐다봐 준다면⋯⋯.
초상화를 들여다보느라 성찬은 휴대폰이 계속해서 진동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휴대폰 액정에는 단톡방의 메시지들이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뭐예요? 액자?]
[착한 사람만 보이는 그림인가?]
[성찬아, 아무것도 안 보여.]
[왜 원빈이 형한테 찾아가라는 거예요?]
[이런 장난 재미 없음]
그런 메시지에 이어서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는 원빈이었다. 1통, 2통, 3통⋯⋯ 10통. 부재중 전화가 10통이 넘어갔다. 휴대폰 액정에는 메시지 하나가 떴다.
[형, 전화 받아요. 그 초상화 보지 마, 제발.]
원빈이 보낸 것이었다.
* * *
1994년.
대문 앞에 성찬과 원빈이 나란히 섰다.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얹은 성찬은 옆에 선 원빈을 쳐다봤다. 원빈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초상화는 2층에 있어.”
그 말에 원빈은 좌우도 살피지도 않고 앞만 보며 걸었다. 돌계단을 밟아 정원으로 올라온 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2층 계단을 밟았다.
원빈의 목적지는 명확했다. 그 뒤를 따르며 성찬은 이게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성찬이 얼결에 말한 초상화라는 단어에 원빈은 막무가내로 그 초상화를 봐야겠다고 우겼다. 평소에는 성찬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원빈이 이상할 만큼 집요하게 굴었다. 조금 전까지 성찬을 변태 치한 취급을 했으면서 성찬만 사는 집에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상하고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긴 이상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어디 한두 가지인가.
성찬은 자신이 한밤중에 학생 회관 휴게실에서 잠든 원빈을 더듬고 있었던 게 이상했다. 새로 이사한 집에 박원빈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 초상화는⋯⋯.
원빈을 따라 2층으로 올라온 성찬은 눈앞의 풍경에 놀라 자리에 우뚝 섰다. 박원빈이 박원빈을 끌어안고 있었다. 성찬은 다급히 고개를 털고 눈앞의 풍경을 다시 봤다. 원빈이 두 손으로 든 초상화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초상화 속 원빈이 너무 리얼해서 마치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날 좋아해요?”
“뭐?”
원빈의 시선이 불안하게 초상화 여기저기를 훑었다. 원빈은 누구한테 묻는 걸까? 성찬한테? 그림 속 자신한테? 아니면 자기 자신한테?
“웃어주지도 않았는데, 애써 무시했는데, 왜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대체 왜 자꾸 좋아하는 거야? 그러니까⋯⋯ 초상화가 나타나잖아요. 또 이게 나타났잖아요.”
“무슨 소리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내가 이상한 거야? 그 초상화는⋯⋯.”
“가방에 유리병이 있어요. 그거 좀 꺼내줘요.”
원빈은 성찬의 말을 잘랐다. 바닥에 놓인 원빈의 가방에는 1L 짜리 투명한 유리병이 하나 있었다. 성찬은 그 병을 집어 들고서 라벨에 적힌 영문을 읽었다. TURPENTINE. 불쾌한 화학 약품 냄새에 성찬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원빈을 쳐다봤다.
“이거 시너지? 이걸 왜 갖고 온 거야?”
“그거 나한테 주세요.”
초상화 액자 프레임을 쥔 원빈의 손등은 핏줄과 힘줄로 울퉁불퉁했다. 마치 범인을 붙잡은 경찰처럼 원빈은 초상화를 꽉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성찬한테 테레빈유를 가지고 오라고 명령했다. 성찬은 두 손으로 유리병을 쥔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초상화를 어쩌려고?"
“태워야 해요.”
“뭐?”
“마당에서 태워버려요. 어서.”
박원빈은 초상화를 없애버리려고 한다. 그게 박원빈이 여기까지 따라온 목적이었다. 성찬은 심장이 철렁했다.
“싫어.”
입에서 말이 툭 튀어나왔다. 정작 성찬은 자신이 그런 말을 한 걸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원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찬을 쳐다봤다. 성찬은 유리병을 꼭 쥔 채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너는 참, 무슨 이런 위험한 걸 챙겨왔어? 이건 내가 잠시 보관해둘게. 그림 다 봤으면 인제 그만 가. 밤이 늦었네. 집에 가야지. 늦은 밤에 남의 집에 찾아오는 건 실례잖아. 어서 돌아가. 빨리 꺼져.”
“⋯⋯오래됐구나.”
“응?”
“초상화를 본 지 오래됐죠?”
“아냐, 얼마 안 됐어.”
“초상화가 언제 나타났는데요?”
글쎄, 언제였더라? 성찬은 이 집에 이사 온 날을 떠올렸다. 짐을 나르느라 송골송골 맺힌 땀을 초가을 바람이 기분 좋게 식혀주었다. 가을 초입이었던가? 중간고사를 치기 전이었다. 그런데 이미 올해가 다 끝이 나고 있었다.
아련한 표정을 한 채 시간을 더듬는 성찬을 본 원빈은 갑자기 몸을 창가로 돌리고서 초상화를 쥔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런 뒤 초상화로 2층 거실의 유리창을 내리쳤다.
“멈춰!!!”
단단한 액자 프레임이 커다란 유리창을 산산조각 냈다. 유리창이 깨지는 파열음과 놀란 성찬의 고함이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성찬은 손에 쥐고 있던 유리병을 집어 던지다시피 하고서는 다급하게 원빈의 허리를 붙잡아 당겼다. 원빈은 불에 태우지 못할 거라면 유리에 긁어서라도 초상화를 망가뜨릴 작정이었다. 초상화를 사이에 두고 성찬과 원빈의 몸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성찬의 손에서 빠져나간 유리병은 2층 거실 바닥을 데구루루 굴러 계단 끄트머리에서야 겨우 멈췄다.
“무슨 짓이야, 지금!”
“정신 차려요. 이거 당장 없애야 해요.”
“망가뜨리지 마! 내 꺼야, 내 초상화라고!”
“없애지 않으면 우리 둘 다 죽어요!”
“내놔, 내 초상화, 내놓으라고!”
“으윽!”
성찬이 원빈의 몸 위에 올라탔다. 성찬의 커다란 손에 어깨를 바닥에 짓눌린 원빈은 두 발로 바닥을 밟아서 하체를 들어 올리려고 애를 썼다. 무게와 힘에 짓눌려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원빈은 손톱으로 성찬의 목덜미와 팔뚝을 거칠게 긁어댔다. 원빈의 손톱에 성찬의 피부 각질과 입고 있는 스웨터의 털실이 가득 끼었다.
성찬은 평균보다 키가 크고 체력과 근력이 좋았다. 무용을 오래 한 원빈도 보통 남자보다는 체력과 근력이 좋았지만 체급에서 성찬한테 완전히 압도됐다. 둘은 팔다리를 엉망으로 얽고서 서로를 제압하기 위해 애를 썼다. 서로가 서로를 짓뭉개는 상황이었다. 초상화는 그런 둘한테서 성인 남자 팔 하나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안 돼. 윽, 으윽!”
“흐읍.”
“윽.”
“⋯⋯.”
“⋯⋯.”
“하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성찬의 몸 아래에서 격렬하게 버둥거리던 원빈의 몸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더는 두 다리로 몸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았고, 더는 두 손으로 성찬의 몸과 옷을 긁어대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찬은 안심이 되지 않아 온몸으로 원빈의 몸을 짓누른 채 원빈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하아,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과장되게 들렸다. 뚝, 뚝. 너무나 적막해서 성찬의 턱에 맺힌 땀이 원빈의 이마에 떨어지는 소리가 다 들렸다. 적막에 한참 동안 숨을 죽이던 성찬이 몸에 힘을 풀었다. 그제야 깨진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12월 겨울 찬바람이 느껴졌다.
원빈은 거실 바닥에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곤히 잠든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성찬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너무 현실 같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꿈이지? 성찬은 몸을 일으켜 거실 바닥에 엎어진 초상화를 집어 들었다.
순간 성찬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온몸에 닭살이 삐죽삐죽 솟고, 털이 뾰족하게 일어서는 게 하나하나 고스란히 느껴졌다. 소름 끼치지는 감각이었다.
초상화가 없었다. 초상화 속 인물이 사라졌다. 액자 속에 텅 빈 공간만이 그려져 있었다.
“콜록! 콜록, 콜록!”
거칠게 터지는 기침 소리에 성찬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원빈이 기침을 하며 몸을 들썩거리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성찬이 짓누르는 바람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가슴을 크게 들썩거리며 연신 기침을 하던 원빈이 손등으로 입가에 흐른 침을 닦으며 성찬을 노려봤다.
“콜록, 죽을 뻔했잖아요.”
“미안. 미안. 나 잠깐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뭔가 정신이 없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손 좀 잡아줘요.”
원빈이 성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닥에 거의 드러누운 채로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손을 허공으로 뻗는 원빈의 모습은 성찬의 눈에 흡사 고전 명화 속 한 장면 같아 보였다. 원빈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가볍게 살랑거렸다.
손가락이 이렇게 신비로운 것인가. 제각각 길이도, 모양도 다른 다섯 개의 길쭉한 것이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와 앞뒤로 유연하게 꿈틀거렸다.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유혹적인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성찬은 그 손을 붙잡았다. 원빈은 성찬의 손을 맞잡지 않고 성찬의 손목을 움켜쥐더니 강하게 힘을 줘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무자비한 힘이었다. 성찬은 자신을 압도하는 근력에 속수무책으로 딸려갔다. 조금 전에 자신이 제압한 힘이 아니었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힘이었다. 성찬을 거실 바닥에 눕힌 원빈은 용수철처럼 빠르게 튀어 오르더니 성찬의 배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두 손으로 성찬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뭐, 뭐야.”
“날 죽일 뻔한 거, 복수예요.”
“미안해. 실수였어. 우리 이제 그만하자. 지금 뭔가 너무 이상해.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
“흐흐, 왜요? 무서워요?”
“아니, 무서울 게 없잖아. 내가 며칠 동안 잠을 못 자서 그래.”
“초상화가 그렇게 소중해요? 내 목을 조를 만큼?”
그 말에 성찬은 바닥에 엎어진 초상화를 힐끗 쳐다봤다.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처럼 불쾌해졌다. 초상화 속 원빈이 사라졌다. 어디로 간 거지? 거실 여기저기를 빠르게 방황하던 시선이 다시 자신의 위에 올라탄 원빈을 향했다.
‘뭐지⋯⋯.’
눈앞의 원빈이 지나치게 친숙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유심히 들여다본 초상화처럼.
“선배.”
원빈은 낯선 호칭으로 성찬을 불렀다. 지금까지 박원빈은 정성찬을 호칭 없이 불렀다. 원빈은 성찬의 입술을 어린아이가 흙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멋대로 만지작댔다. 그제야 성찬은 지금 이 자세가 새롭게 의식이 됐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배 위에 올라타는 자세. 그건 조금 전처럼 육탄전이 될 수도 있었고, 지금처럼 조금 다른 행위가 될 수도 있었다. 둘 다 체력과 근력을 쓴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성찬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원빈의 몸이 위에서 아래로 출렁였다.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성찬은 호흡할 때마다 몸에 열이 가득 차오르는 걸 느꼈다. 겨울밤의 매서운 찬바람이 들이닥치는데 원빈의 몸이 닿은 부분은 난로를 갖다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뜨거웠다.
원빈의 손길이 성찬의 얼굴 위에서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입술에 이어서 코끝을, 턱 끝을, 속눈썹을, 눈썹을, 구레나룻을 희롱했다.
“선배, 계속 날 지켜봤죠?”
“⋯⋯.”
“학교에서 날 훔쳐봤잖아요.”
“응.”
“왜요?”
“그냥⋯⋯.”
“솔직하게 말해봐요. 날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구레나룻을 만지던 손길이 귀로 옮겨갔다. 원빈은 성찬의 귓바퀴를 손톱으로 짓뭉개고, 귓불을 주무르고, 귓구멍을 긁어댔다.
“귀가 뜨거워요. 새빨개진 것 좀 봐.”
속삭이는 말에 성찬은 숨을 흡 들이켰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관절마다 땀이 흥건하게 고였고, 자꾸만 숨이 차올랐다. 숨을 내쉴 때마다 명치가 근질거렸다.
“잠깐만, 비켜 봐. 지금 이상해.”
“뭐가 이상해요.”
“제발.”
“선배, 키스해 본 적 있어요?”
“⋯⋯.”
“뽀뽀 말고요. 입을 벌려서 혀를 빠는 거, 내장을 핥을 듯이 깊이 빨아대는 거, 해 본 적 있어요?”
그 말에 성찬의 시선이 원빈의 붉은 입술에 떨어졌다. 관능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탐스러운 입술.
성찬과 원빈의 몸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기울고, 두 입술이 조심스럽게 맞물렸다. 원빈의 입술은 뜨거웠다. 마냥 부드럽기보다는 살짝 거칠었다. 초상화 속 입술을 만졌을 때처럼. 그 감촉을 쫓아 입술을 비비자 어째서인지 유두에 찌릿한 전기가 올랐다.
원빈이 얼굴을 옆으로 살짝 틀었는데, 성찬은 원빈이 얼굴을 떼는 줄 알고 두 팔로 원빈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둘의 마른 가슴이 강하게 부딪히고 성찬은 입을 크게 벌려 원빈의 윗입술을 머금고 빨았다. 작은 혀를 희롱하자 원빈은 성찬의 혀를 깨물었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센 통증이었는데 오히려 아랫도리는 묵직해졌다.
“하아⋯⋯.”
“흐읍.”
한참 입을 맞췄다. 겨우 떨어진 두 입술 사이에서는 아쉬움이 진득하게 묻은 숨결이 쏟아졌다. 숨을 들이쉰 성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원빈한테서 역겨운 기름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냄새였다. 예술대에서, 물감 냄새? 근데 어째서 갑자기 이런 냄새가 나는 거지? 학생 회관에서도, 집 앞에서도 맡지 못한 냄새였다. 그 냄새 때문에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딴생각하지 마요. 어서 안아줘요.”
원빈은 성찬을 질책하면서 동시에 애정을 보챘다. 성찬은 원빈의 명령에 따라 고분고분 다시 또 원빈의 입술을 찾았다. 젖을 뗀 이후로 이렇게 집요하고 게걸스럽게 다른 사람의 살덩이를 빨고 깨문 적이 있을까? 성찬은 굶주린 아기처럼 원빈의 입술과 혀와 살을 빨았다.
원빈의 타액은 꿀처럼 달콤했다. 원빈의 숨결은 환상적일 정도로 뜨겁고 황홀했다. 성찬은 원빈과의 입맞춤으로 지금까지 자신도 모르게 갈구해온 양분을 흡수하는 것만 같았다. 원빈의 타액이 자신의 목구멍으로 넘어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왜 자꾸 반하는 거예요?”
“⋯⋯.”
“응? 말해 봐요.”
“예뻐서.”
“어디가요?”
“그냥 다.”
성찬은 지난 늦여름을 떠올렸다. 올해는 여름 무더위가 너무 지독했어. 다 쪄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 더위의 끝물에서 반라로 춤을 추는 원빈을 봤다. [⋯⋯<목신의 오후>는 님프의 육체를 탐내는 반인반수 목신의 한낮의 몽상을 표현하는 작품으로⋯⋯.] 팸플릿에 공연에 관한 설명이 적혀 있었지만,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난해한 공연이었다. 그런데도 성찬은 원빈이 무대 위에 등장한 뒤부터 퇴장할 때까지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집중했다.
“아름다워서.”
“나도 선배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예전부터 쭉.”
“내 몸?”
“언제 봐도 그랬어요. 흰 피부가 천사의 속살처럼 뽀얗잖아요. 거기다 크죠. 그건 아름다운 거예요.”
“내 몸을 본 적 있어?”
성찬의 물음에 원빈이 웃었다. 야한 웃음이었다.
“이제 보여줄 거잖아요. 나한테 보여줘요. 숨기지 말고 전부. 내가 다 먹어 치울게요.”
순식간이었다. 둘은 전라가 된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새하얀 성찬의 살결은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몽환적으로 반짝거렸다. 원빈은 성찬의 발그레한 살빛에 감탄하며 넋을 놓았는데, 성찬은 그런 원빈을 눕히고서 한 군데도 빠뜨릴 수 없다는 듯 원빈의 살결을 손끝으로 문지르고, 입술로 뽀뽀하고, 이로 깨물고, 혀로 핥았다. 성찬의 입술과 치열이 닿을 때마다 원빈은 간지럽다며 아이처럼 웃거나 앓는 사람처럼 흐느꼈다. 젖은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두 개의 입에서 쏟아지는 교성이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뜨거운 열기가 자꾸만 차올랐다. 하체로, 심장과 폐로, 정수리 끝까지. 성찬은 자신의 몸이 쾌감으로 부풀다 못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쾌감이 지독해서, 이대로 몸이 터져버려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밤을 꼬박 새웠다. 다시 떠오른 태양이 목조 주택의 2층 거실 안으로 햇살을 길게 늘어뜨렸다. 검은 쾌락에 잠겨서 보이지 않던 풍경이 서서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그때까지도 성찬은 원빈의 몸에 파묻혀서 헐떡거리고 있었다.
“헉, 허억⋯⋯. 이상해.”
거의 탈진해 거실 바닥에 드러누운 성찬은 혼잣말을 했다. 원빈은 곧장 성찬의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들어 안기며 손으로 성찬의 넓은 가슴을 쓰다듬었다. 성찬의 새하얀 살결에는 원빈의 입 모양대로, 원빈의 치열대로 자국이 엉망으로 남았다.
“뭐가 이상해요?”
체액에 흠뻑 젖은 아름다운 나신이 성찬의 배 위에 올라탔다. 성스러운 아침 햇살이 원빈의 몸을 그림자 없이 비추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원빈의 육체만 제외하고. 성찬의 몸을 두 눈으로 차분하게 훑던 원빈은 두 손을 들어 성찬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지난 밤과 똑같은 자세였다. 여전히 원빈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고, 목덜미를 붙잡은 손에는 힘이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성찬은 지난 밤과는 다른 예감이 들었다. 죽음이 목 끝에 도달해 있었다.
“⋯⋯아니야.”
“뭐?”
“너는 박원빈이 아니야. 그렇지?”
“흐흐흐, 왜 조금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야? 일부러 뒷북을 치는 건가? 늘 이런 식이잖아.”
“원빈이는? 원빈이는 어디 있어?”
성찬은 고개를 돌려 바닥에 엎어진 초상화를 쳐다보려고 했다. 그쪽을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다. 그러나 고개와 손가락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공기가 무겁게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목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던 손아귀에 점점 힘이 실렸다. 숨통이 꽉 막혔다.
“나를 태워버리려고 하다니. 뭐, 제법이었어.”
“읍, 으윽.”
“우리는 다음에 또 재미있게 놀아요.”
“읏.”
“어차피 또 반복될 테니까.”
“⋯윽.”
“또 ⋯⋯을 사랑해버릴 거잖아?”
숨을 마실 수 없었다. 몸속 산소가 부족해졌다. 의식이 드문드문 끊겼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정신을 잃을 때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배경으로 선명한 이미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정성찬과 박원빈. 두 사람이 마주하는 무수히 많은 장면들. 그건 지금 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럼? 이전의 삶, 이이전의 삶, 미래의 삶, 미래의 미래의 삶. 정성찬의 모든 삶에 박원빈이 있었다. 박원빈의 모든 삶에 정성찬이 있었다.
그리고 초상화도.
정성찬과 박원빈, 그리고 초상화.
마치 끝이 나지 않는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무서워요.”
“뭐?”
“형이 날 좋아할까 봐.”
“뭐?”
“형이 날 좋아할까 봐 무섭다고요.”
“⋯⋯.”
“약속해요. 날 좋아하지 않기로.”
그런 말을 하는 원빈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이건 언제일까? 셀 수 없이 많은 과거 중 하나일까? 아니면 앞으로 이어질 미래 중 하나일까? 이 술래잡기를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지? 어떻게 하면 끝을 낼 수 있을까? 박원빈을 좋아하지 않으면, 끝이 나는 걸까? 그게 가능할까? 그게⋯⋯.
무대 위 조명이 꺼진다. 목신은 잠에서 깬다. 이번 공연은 이렇게 끝.
[ ⋯⋯용산구 한남동 목조 주택에서 화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난로가 과열돼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집 내부에 유화용보조제가 있어 더 큰 화재로 이어졌으며⋯⋯ OO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정모군과 무용학과 박모군이 2층 거실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돼⋯⋯.]
* * *
2024년.
“헉, 헉.”
원빈은 심장과 폐가 터질 것만 같았다. 옆구리 근육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고, 기도로 쇠 맛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단톡방에 성찬이 보낸 메시지를 보자마자 패닉 상태에 빠졌다. 스스로도 영문을 모르겠지만 당장 성찬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견딜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온몸을 거칠게 휘저었다.
“형!!! 성찬이 형!!!”
숙소 문을 벌컥 열고 애타게 성찬의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몸이 덜덜 떨렸다.
“정성찬!”
넘어지듯이 집 안으로 들어온 원빈은 눈에 보이는 모든 방문을 닥치는 대로 열어젖혔다.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매니저 형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화장실 문에 이어서 성찬의 방문을 열자⋯⋯.
“형?”
“⋯⋯.”
“정성찬.”
“어?”
성찬이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두 손을 자신의 배 위에 얌전히 겹쳐 얹고서 눈을 감고 있었다. 헤드셋을 낀 채로. 음악 소리에 원빈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원빈이 헤드셋을 잡아당기자 성찬은 깜짝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원빈은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성찬의 얼굴을 꼭 붙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어디 긁히거나 다친 흔적도, 놀라서 운 흔적도 없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헉, 헉, 괜, 괜찮아요?”
“응? 응. 나 잠깐 졸았나 봐. 지금 몇 시야?”
“목은? 목은 괜찮고요?”
원빈은 성찬의 옷을 잡아 당겨 목덜미를 살폈다. 무슨 흔적을 찾는 건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성찬의 새하얀 목덜미에 다른 흔적이 없는 걸 확인한 원빈은 긴장이 풀려 그대로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박원빈. 왜 이래? 뭐야? 보이스피싱이라도 당했어? 누가 나 납치했대? 그럼 울 엄마한테 연락하지 왜 너한테 연락했대?”
“그림은요?”
“뭐?”
“내 초상화를 봤다면서요.”
성찬이 원빈을 데리고 온 곳은 숙소 밖 아파트 계단이었다. 초상화는 그림이 보이지 않게 벽에 세워져 있었다.
성찬은 부끄러워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그림이 좀 오싹한 거야. 너무 잘 그렸더라고. 그림이 너무 진짜 같으면 좀 무섭지 않아? 집에 단둘이 있기 무서워서 여기 뒀어. 계속 보면 안 될 것 같더라고.”
성찬은 한 쪽 손으로 팔뚝을 벅벅 긁었다. 소름이 돋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깐 망설이더니.
“공포 영화를 보면 출처가 불분명한 초상화는 진짜 조심해야 하거든. 근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함부로 했다가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성찬은 매우 진지했다. 하지만 초상화에 겁을 먹은 게 창피한지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번 생의 정성찬은 겁이 지나치게 너무 많았다. 너무 겁이 많아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원빈은 성찬을 꽉 끌어안았다.
“다행이에요. 진짜 다행이야.”
“어?”
성찬은 원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다가 얼결에 원빈을 안았다. 자신의 품에 쏙 안겨 오는 원빈의 몸을 끌어안으며, 두 손으로 원빈의 머리통과 등을 연신 쓰다듬으면서, 성찬은 이상하게 아주 오래전부터 꼭 이렇게 원빈을 끌어안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적이 드문 공터, 두 사람은 초상화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성냥을 던졌다. 순식간에 불길이 붙었다.
“⋯⋯이렇게 태워도 될까?”
“태워야 해요.”
“⋯⋯어떻게 확신해?”
“그냥⋯⋯. 저도 몰라요. 그냥 이렇게 태워버려야 해요.”
그 말을 하며 원빈은 몸을 움츠렸다. 도무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거운 두려움이 아직도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성찬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원빈을 살펴보다가 손을 뻗었다. 원빈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천천히 다가가 큰 외투처럼 원빈의 몸을 뒤에서 감싸 안았다. 덜덜 떠는 작은 몸이 성찬의 품 안에서 점차 안정을 찾았다.
“나 아까 꿈을 꿨어. 내가 대학생인 것 같은데, 널 졸졸 쫓아다녔어.”
“꿈이요?”
“응. 옛날 배경이었는데⋯⋯.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어. 근데 니가 날 엄청 경계하고 싫어하는 거야.”
“⋯⋯.”
“갑자기 너를 그린 초상화가 생겼어. 어떻게 생긴 건지는 몰라. 꿈이 원래 그렇잖아. 나는 그걸 무척 소중하게 여겼어. 매일 매일 쳐다보고 말을 걸고 만지고⋯⋯ 그러다가 그 초상화가.”
거기까지 말한 성찬이 말을 멈췄다. 그 초상화가 원빈을 집어삼키고 자신과 몸을 섞었다는 건 어떻게 설명해도 불쾌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성찬이 형.”
“응?”
“나는 형 안 싫어해요.”
“⋯⋯.”
“그때도 안 싫어했어요. 나는 그냥 형을⋯⋯.”
“응.”
성찬은 원빈이 말한 그때가 언제인지, 미처 말하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입을 다문 두 사람은 키보다 높이 치솟는 불길을 쳐다봤다.
성찬과 원빈과 초상화. 셋은 생을 거듭하며 술래잡기를 한다. 새로운 생이 시작될 때마다 이전 생의 기억은 사라지지만, 무수히 많은 반복을 거치면서 영혼에 아주 미세한 흔적이 남는다.
그래서 원빈은 성찬이 자신을 좋아할까 두려워하고,
이번 생애 성찬은 지나치게 겁이 많아졌다.
그게 영혼에 새겨진,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이대로 끝일까요? 아니면 다음에도 또 반복될까요?”
“아마도⋯⋯.”
이제 초상화는 흔적도 남지 않았고, 불은 기름마저도 다 태워버렸다. 남은 건 시꺼먼 연기와 매캐한 냄새 그리고 검게 타버린 흙이었다.
“다시 또 반복되겠지.”
성찬의 말에 원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성찬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다시 또 원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것을. 그렇다면 이 술래잡기는 다시 시작된다. 그래도 어찌할 수 없었다.
“형.”
원빈이 낮은 목소리로 성찬을 불렀다.
“저 이제 안 무서워요.”
“⋯⋯.”
“앞으로도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성찬은 대답 대신 두 팔을 벌려 원빈을 꼭 끌어안았다. 생을 거듭하면서 영혼에 아주 미세한 흔적을 남긴다면, 이번 생도 흔적을 남길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내는 데 성공한 방법을.
원빈은 성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차분히 숨을 쉬었다. 성찬의 체향이 몸속에 가득 차올랐다. 말로 다 할 수 없이 황홀했다. 성찬의 가슴에서 얼굴을 뗀 원빈이 발갛게 익은 얼굴로 말했다.
“정말 다행이에요. 형이 이번에는⋯⋯.”
<겁이 많아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