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ART VIDEO AFTER

운명불복종
by. st

※부상 묘사 주의



  박원빈은 궤도를 이탈하는 법이 없었다.


  어릴 때 진로를 결정하는 한국 사회의 폐단에 따라 일찍이 책상에 앉는 것보다 몸 쓰는 것을 택했다. 몸 쓰는 것들은 웬만큼 다 하는 편이라 여러 운동을 병행했다. 월수금엔 수영과 육상, 화목엔 태권도와 줄넘기, 토요일엔 배드민턴 학원으로 향했다. 가끔 학교에서 방학 클래스로 축구나 농구가 열릴 때면 원빈은 제 의지가 아니었더라도 신청하곤 했다. 속칭 체능 뺑뺑이. 원빈의 모는 공부의 끈을 놓지 못해 체력이라도 길러놔야 한다며 다독였다. 공부 머리로 하는 줄 아니?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거야. 학교 숙제하다 책상에서 조는 원빈을 보면서도 그런 말을 했다. 못하는 거 알면서 왜 시키냐는 물음엔 언젠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라고 답했던가.

  개중 가장 오래 한 것은 육상이었다. 원빈이 가장 재미없어했던 달리기. 스스로도 의아한 부분이었다. 재미로만 따지자면 태권도가 가장 즐거웠다. 딱 애들 눈높이에 맞춰서 진행되는 커리큘럼에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체력을 소모했다. 그러나 제가 겨루기가 아닌 품새를 더 좋아한다는 점에서 태권도를 관두게 됐다. 품새만으로는 더 큰 미래를 꿈꾸기 어려웠다.

  12살쯤 됐을 때, 원빈은 육상 전문 체육 입시학원으로 옮기며 다른 학원을 모두 관뒀다. 그때 원빈도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 많은 체육 종목 중 육상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예측불허 즉흥의 영향을 가장 덜 받기 때문이었다. 제가 태권도에서 겨루기를 싫어했던 이유와 상통한다. 정해진 면 안에서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하고 대응하며, 예측 불가한 상황에서도 즉각적인 대처를 취해야 했으니까. 짧게 했던 축구나 농구, 배드민턴도 그와 같은 이유로 정신력을 소모했다. 그럴 바에야 정해진 선 안에서 오로지 트랙에만 집중해 제 능력치를 발휘하는 환경이 나았다.

  그렇다고 달리기가 자기와의 싸움이냐 묻는다면, 원빈은 모르는 소리라고 답할 것이다. 지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누군가 저보다 빠를 때면 울었다. 다 울면 다시 뛰었다.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철 맛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할지라도 이겨 먹고 나서야 발 뻗고 잠에 들었다. 그때부터 원빈의 교실은 체육관이었으며, 학교는 오로지 천장 없는 운동장뿐이었다. 육상을 관둔 이후에도 원빈은 습관적으로 뒤돌아보는 법 없이 앞만 보고 달렸고, 트랙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야, 키티야. 너 허튼 생각하지 마라.”


  원빈의 앞에 선 네 명의 경찰 뒤엔 원빈의 사수인 셰퍼드와 대대장이 서 있었다. 근 10여 년간 원빈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셰퍼드는 원빈의 흑석 같은 눈동자 속을 읽었다. 너 지금 하려는 거, 그거 하지 마라. 이 상황이 드라마였다면 분명 셰퍼드의 턱선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과 함께 내레이션이 들렸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아니었더라도 원빈은 셰퍼드의 경고를 이미 들었다.


  “죄송합니다.”


  허리춤에 있던 총은 1초도 채 되지 않아 장전된 채 원빈의 손아귀에 잡혔다. 총구는 문밖의 네 명의 경찰 중 하나를 향했다. 경찰들도 원빈을 향해 일제히 총을 들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총을 겨누며 대치했다.


  “이거 명령 불복종입니다, 박원빈 중사. 지금 당장 화기 해제하고 내려놓습니다.”

  “죄송합니다, 대대장님.”


  박원빈이 궤도를 이탈했다. 제 뒤에 서 있을 정성찬을 위해.






운명불복종

w. st


 




BGM. Aaron Hibell - levitation (4am version)



  민간인 구조 작전은 대체로 외교부의 협상에 달려 있긴 하지만, 때때로 원빈이 속한 부대가 개입하기도 한다. 이때 희망 같은 말랑말랑한 것에 기대는 것은 금물이다. 원빈이 첫 민간인 구조 작전에서 작전지 진입 후 본 것은 뒤통수가 터져 식별조차 되지 않는 시체였다. 훈련이야 더미 모형이나 다친 척하는 동기들이었으니, 실제로 처음 목격한 죽음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키티, 정신 안 차려! 불호령이 떨어진 것은 원빈이 자리에서 멈춘 지 딱 3초가 됐을 때였고, 시체보다 무서운 사수 셰퍼드의 말에 곧장 정신을 차리고 수색했다. 결과는 빤했다.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비장하게 헬기에서 뛰어내린 것이 무색했다. 헬기에 탄 인원은 작전지를 갈 때와 마찬가지로 5명. 물론 숨 붙은 것들만 셈했을 때의 숫자다. 헬기 중앙엔 수습된 시체가 고정되어 있었다. 영화 같은 작전 성공은 영화에나 있는 거였다는 걸, 원빈은 어깨에 SART를 달고 나서야 알았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없던 건 아니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수도 없이 많았다. 훈련이 고돼서, 상부의 명령이 이해되지 않아서, 실패한 작전이 쌓여가서, 목격한 죽음이 셀 수조차 없어져서. 이유야 차고 넘쳤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금세 순응했다. 적응이 아닌 순응이었다. 주어진 일은 그냥 했다. 육상 선수로 있을 때,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훈련을 받아들인 것처럼. 이것은 단순히 직업일 뿐이라고 그렇게 인정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이젠 그 어떤 사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언제 어디든 우리는 간다. 탐색구조비행전대, SART의 구호를 행할 뿐이었다.

  원빈에게 어쩌다 SART가 되었고, 어떻게 SART를 버텼냐 묻는다면, 그 답이 제게 있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답은 오로지 정성찬, 한 사람이 쥐고 있었다.


  정성찬. 이렇게 얽매이게 될 줄 몰랐던 사람이다.


  원빈이 처음 성찬을 보게 된 건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일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생일날 치른 입학식에서 원빈이 바랐던 소원은 단 하나, ‘패딩 입게 해 주세요.’뿐이었다. 강당에서 진행된 입학식은 사진을 남겨야 한다는 명목으로 신입생들에게 교복 위 목도리도 허용하지 않았다. 아직 겨울의 입김이 가시기 전이었다. 유달리 추위를 많이 타는 원빈은 팔을 교차해 겨드랑이에 제 손을 끼워 넣고 입학식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추위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원빈의 눈에 교복 위 롱패딩을 입은 채 강당을 요리조리 뛰어다니는 긴 인영이 포착됐다. 그냥 좀 부러웠던 것 같다. 신입생들은 패딩을 못 입는데 입학식을 돕는 재학생들은 패딩에 목도리에 가지각색으로 추위를 막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꽤 비싸 보이는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뛰면서 사진을 수백 장 찍었다. 몸집이라도 작으면 모르겠는데 하필 평균 키를 훨씬 웃도는 데다 흰색 롱패딩까지 입고 있어 더 눈에 띄었다. 중간중간 선생님들과 얘기도 하고, 단상에 선 교장과 교감을 찍기도 하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학생들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그러다 더웠는지 패딩을 벗어 강당 구석탱이에 내팽개쳤다. 아, 부러워. 덜덜 떨던 원빈은 카메라를 노려보았고, 이상하게 카메라와 자꾸 눈이 마주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상 선수인 원빈이 입학했던 서울의 한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는 체육 특기생에게도 정규 교과 과정을 보장했다. 체육 특기생들은 오전엔 수업에 참여하고, 점심 먹은 후엔 바로 체육관으로 향했다. 평생을 운동에 갖다 바쳐도 프로가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철저하게 엘리트 체육을 고집하는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운동을 관두더라도 정도껏 먹고살 수는 있도록 적절한 교육을 해주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원빈의 어머니도 평생을 울산, 화목한 가정 안에서 살았던 원빈을 서울에 홀로 보내버린 것이다. 반도의 흔한 수험생 어머니는 당시 고3인 원빈의 형을 케어하고 나중에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했지만, 원빈은 제게 주어진 9평짜리 자취방에 들어섰을 때 직감적으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이 일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애였다. 해봤자 교복만 탈바꿈한 청소년에 불과했다. 체육 특기생들은 모두 체육 관련 동아리로 신청하는데, 원빈은 대세를 거스르고 충동적으로 사진 동아리에 입부 신청서를 넣었다.


  “난 너 올 줄 알았어.”


  원빈은 성찬으로부터 그 말을 사진 동아리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다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 *




  정성찬은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반항을 다 했다. 단, 탈선하지 않는 형태로.


  이를테면 축구. 초등학생 내내 축구에 매진한 성찬은 네모난 필드에서 라이트 윙을 맡았지만, 경기 내내 필드를 휘젓고 다녔다. 가끔 감독이 딱 여기에서만 놀라고 구역을 정해줘도 초반에만 신경 쓰는 듯하다 나중엔 제멋대로 굴었다. 그런데도 공격 효율은 높게 나와서 별소리를 듣진 않았다.

  필드 안의 자유를 추구하던 성찬은 어느 날 축구를 관두기로 했다. 흥미를 미술로 옮긴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미술이 하고 싶었던 거지? 돌이켜보면 잘 생각나지도 않는 이유였다. 성찬이 별 이유 없이 축구를 한 것도, 축구를 관둔 것도, 미술을 하게 된 것도 다 집안 막내라 가능한 일이었다. 큰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의 막내아들. 어른들의 귀여움이나 받던 성찬은 언제부턴가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애당초 집안의 기대가 걸린 건 성찬이 아니었다. 육군에 투스타, 해군에 원스타가 있는 친가에서는 공군에도 제 자손이 뻗어나가길 바랐다. 공군사관학교만 간다면 집, 차, 뭐든 원하는 걸 해줄 것이며, 증여세까지 해결하겠다는 할아버지의 선언 하에 고종사촌들은 다 한 번씩 공사 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단 한 명도 공사에 합격하지 않았을 때, 성찬의 형이 입시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사춘기 때 크게 한 번 삐딱선을 타긴 했지만, 좋은 체격에 더 좋은 머리를 타고 나는 바람에 집안의 모든 기대가 형의 어깨에 걸려 있었다.

  공사의 문턱은 저보다 큰 형의 키보다 높았다. 한 번 미끄러진 형은 어떻게든 다시 해보겠다며 재수 기숙학원에 들어갔으나 성찬은 그때쯤 슬슬 제 차례가 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고2를 앞둔 명절, 친척들 모두가 성찬에게 준비 잘하고 있냐며 넌지시 물었기 때문이었다.


  시험 삼아 한 번 해보는 거고, 아님 말고. 대신 후회는 안 남게 최선을 다해보자는 게 성찬의 모토였다. 성찬은 본디 그런 사람이었다. 남이 그은 네모난 선 안을 자의로 뛰어다니는 사람. 그때 다니던 미술학원을 관뒀다. 미술 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포기하게 될 줄은 몰랐다. 네모난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게 거닐던 붓을 내려놓았고, 입시 코디네이터가 추천한 대로 과목별 학원을 늘렸다. 공사 체력 테스트 때문에 새벽마다 학교에 가서 뛰고 굴렀고,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학원으로 향했다.

  타고난 성정이 자유를 갈망했다. 코디네이터가 짜준 학생부 세부능력 특기사항에 따라 학생회를 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 성찬은 기어코 동아리 하나를 더 집어넣었다. 붓 대신 카메라를 들었고, 네모난 캔버스 대신 네모난 셔터 박스를 시야에 담았다. 사진 동아리는 성찬이 애들한테 떼쓰고, 선생님께 애교 부려 만들어졌다. 나름 만족스러웠다. 주어진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숨통을 틔워 두었다.

  한때나마 미학을 추구했던 성찬답게 사진에도 재능을 보였다. 뭐든 성찬은 딱 그 정도 해냈다. 특출 나게 잘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못 하는 게 있지도 않았다. 고2가 되기 직전, 성찬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 하나가 입학식 때 사진을 찍어줄 수 있겠냐는 요청을 해왔다. 교장인지, 이사장인지, 아무튼 위에서 교내에 걸린 학생들 사진을 바꾸잔 얘기가 나왔는데 예산이 한정적이라 사람을 부르긴 애매했던 것으로 보였다. 잘 찍으면 걸어두고, 못 찍으면 할 수 없고. 그래도 노력은 했다는 액션을 보이기 위한 요청이었지만, 어차피 학생회라 입학식 때 강당에 잡혀 있어야 했던 성찬은 너무 쉽게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눈동자를 만났다. 반질반질하게 잘 닦아 놓은 흑돌 같은 눈동자 두 개가 콕 저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보지 않았어도 눈에 띄는 외모였다. 딱 여자애들이 좋아하게 생긴 얼굴. 인기 많겠네. 그런 감상으로 걔의 사진을 찍었다. 언젠가 만나겠구나, 우리. 그게 우리 동아리였으면 좋겠다. 성찬은 동아리방의 붉은빛 아래에서 걔 홀로 포커스를 다 가져간 사진을 인화했다. 걔가 육상부 박원빈이라는 건 동아리방에 놀러 온 친구를 통해 들었다. 울산에서 올라왔고, 전국 고등학생 중에 걔가 뛰는 걸로는 3등 안에 든다는 얘기도 전했다. 그럼 동아리 안 들려나.


  난 너 올 줄 알았어.


  동아리방의 문을 두드린 원빈을 보자마자 사진부터 건넸다. 제 사진을 받아 든 원빈은 큰 눈을 느리게 끔뻑거리다 예의 그 흑돌 같은 눈동자를 성찬에게 고정했다.


  제, 제가 안 오면 어떡하려고⋯⋯.

  그럼 찾아갔겠지. 너 유명하잖아. 육상부 박원빈. 잘생겨서 인기 많고, 전국 고등학생 중에 뛰는 걸로는 3위 안에 든다는.


  사실 딱히 고민했던 건 아니었다. 안 오면 안 오는 거지. 그럼 사진은 내 차지였으려나. 순발력으로 대처한 답에 원빈의 얼굴이 쉽게 빨개졌다.


  저, 3위까지는 아니에요. 5등 안에는 드는데⋯⋯.


  웃기는 애네. 육상부 남자애가 운동이랑 하등 관계도 없는 사진 동아리에 든 것도 모자라, 인기 많다는 말을 반박하는 대신 사실을 정정하며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성찬은 사진을 찍는다는 명목으로 원빈을 카메라에 담았다. 가까이서 보니까 좀 날티 나게 생겼네. 흥미는 메모리 카드에 쌓였다. 동아리방에서 자고 있던 원빈의 스크래치 난 눈썹만 클로즈업해 찍은 사진도 있었다.

  생김새와는 별개로 애는 순했다. 간혹 성찬의 친구들이 1학년 부원들에게 이거저거 시켜도 원빈은 불만을 뱉진 않았다. 오동통한 아랫입술을 내놓고 하란 대로 했다. 운동부라 그런지 순종이 몸에 배어 있었다. 삐죽거리는 입술을 보다가 ‘말랑말랑’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때, 원빈은 비질하던 몸을 멈춰 세우고 고개를 꺾어 성찬을 바라봤다. 저를 부른 게 맞냐는 듯 빤히 바라보는 흑돌 같은 눈동자에 자꾸만 별명을 붙였다. 순두부, 고양이 같은 말랑한 것들로.


  빈 테두리에 난입한 박원빈을 애꿎게 꾹꾹 눌러도 보고, 짓궂게 놀려도 봤다. 테두리 안의 자유는 박원빈 하나면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가끔 수업하다 창밖에서 걔가 운동장 뛰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이나 뛰기 전엔 어깨를 팍팍 치는 행동이나. 모두 전에 없던 새로운 것들로 무장한 원빈이 재밌었다. 그러니까 성찬은 그게 그냥 호기심이자 우정인 줄로만 알았다.




* * *




  SART. Special Air force Rescue Team. 공군 산하 탐색구조비행전대. 쉽게 말하면 날아서 인명을 구조하는 특수부대다.

  원빈이 속한 SART 내 제302탐색구조비행대대의 델타 팀은 원빈을 포함하여 총 5명이 한 팀이 되어 움직였다. 17년 차 베테랑 헬기 조종사 사건웅 소령을 필두로 부조종사인 이진우 대위, 원빈과 같은 항공구조사인 강서언 상사와 부산 출신 정비사 공혁 상사까지 모이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계급상 팀장이 된 사건웅 소령은 제 성 씨가 죽을 사 자와 같은 발음이라는 이유로 사팀장이라 불리는 것을 꺼렸다. 그런 고로 서로를 콜사인으로 부르는 것이 더 익숙해져 있었다.

  이는 사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팀장은 베어, 이진우 대위는 이누, 강서언 상사는 셰퍼드, 공혁 상사는 샹크스. 딱딱한 콜사인 사이로 박원빈의 콜사인은 키티였다. 항공구조사 훈련 당시 조교였던 셰퍼드가 원빈에게 너 뭐 닮았다는 소리 안 듣냐 물었고, 원빈은 뭐라도 답해야 하는 줄 알고 고양이 닮았다고 말했다가 키티가 됐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성찬이 원빈을 볼 때마다 ‘우리 고양이’로 문장을 시작했다. 뭔 고양이, 남자끼리 남사시럽다 아이가. 입술을 삐죽거리면 성찬은 원빈이 고양이인 이유를 하나하나 짚었다. 일단 생긴 것도 고양이 같고, 하는 짓도 고양이 같고. 지금도 봐, 딱 햇빛 받는 고양이처럼 있었잖아.

  거무죽죽한 사내놈들 모아둔 곳이 으레 그러하듯 그날 델타 팀의 술자리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팀이 만들어질 때 나름 친목을 도모하고자 만든 자리였다. 이 좁은 공군 안에서 각자 과거의 연이 얽혀 있어 알음알음 다 아는 사람들뿐이었지만, 베어가 내놓은 회식의 명목은 조종사를 구조하고 서로를 구하기도 해야 하는 만큼 모두를 한데 묶어 팀워크를 다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어라, 마셔라, 적셔라, 하다 보면 하나둘씩 취해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꺼내고 있었다. 주제는 보통 여자 아니면 흑역사, 주로는 흑역사에 여자가 엮인 얘기였다. 이제 막 셰퍼드의 무려 다섯 번 까인 프러포즈 얘기가 끝났을 무렵, 모두의 눈동자가 원빈을 향했다.


  “키티 너는 뭐 연애 같은 거 안 하냐?”

  “에이, 안 할 리가. 내가 저 얼굴이면 존나 후리고 다니지.”

  “이누 햄은 그캐서 안 되는 기다. 쌍판이 그 모냥이면 마인드라도 좀 잘 빠지든가.”

  “이 미친 샹크스. 야, 술자리라고 내가 너무 풀어줬지? 서열 지켜 인마. 다나까 안 지켜?”

  “아, 맞나.”

  “하아, 이 새끼가 진짜.”


  시종일관 깝죽대는 샹크스 덕에 낄낄대는 소리가 전반에 깔린 채 고추를 비롯한 채소가 장난처럼 날아다녔다. 가벼운 공기에도 원빈은 멋쩍은 듯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연애, 해본 적 없습니다.”

  “진짜?”


  동시다발적인 목소리가 섞였다.


  “마, 우리 막내. 이 햄들한테만 솔찌 말해봐라. 니⋯⋯ 사실 고자가?”

  “아냐. 키티 아침마다 빨딱빨딱 잘 세우던데.”

  “으, 드러버라.”

  “아니, 시발, 네가 처물어보고 왜 지랄이야.”

  “햄은 와 아침부터 넘의 꼬추 보고 지랄이고.”

  “그, 그런 문제는 없고,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다.”

  “이야, 저 얼굴로도 안 넘어가는 여자가 다 있나.”


  여자 아니고 남자입니다. 원빈이 숱한 단체생활을 통해 얻은 감각 중 하나는 아무리 술에 취해도 뱉어야 할 말과 뱉으면 안 될 말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지금 이 말은 뱉으면 안 될 말에 속했다. 마초 문화의 끝을 달리는 군대에서 이런 말을 뱉었다간 바로 사회적 사형에 가까운 취급을 받을 것이 뻔했다.


  “키티야. 그거 혹시 첫사랑이냐?”

  “어떻게 아셨습니까?”

  “야, 키티야. 남자 첫사랑이 무덤까지 간다? 그거 다 좆 까는 소리야. 자칫하면 결혼이란 걸 할지도 모르거든? 접을 수 있을 때 접어라.”

  “와예. 키티가 마, 셰퍼드 햄처럼 프러포즈 다섯 번 까일까 봐 그랍니까.”

  “이 개새. 넌 뒤졌어, 오늘 임마.”

  “그래서. 예쁘냐?”


  셰퍼드가 샹크스를 쥐어박으려는 것처럼 굴다가 이누의 물음에 멈췄다. 다시 한번 모두의 시선이 원빈에게로 집중됐다.

  예쁜가. 원빈은 머릿속으로 가만히 성찬의 얼굴을 그렸다. 반듯한 이마 아래로 단정하지만 장난기가 뻗친 눈썹, 동글동글 순한 눈망울 사이를 가로지르는 곧은 콧대, 조밀한 입술이 웃을 때면 톡 튀어나오는 앞니 두 톨.


  “예쁩니다. 사, 사슴 닮았습니다.”

  “이열~ 박원빈이~”

  “키티도 고마 남자 다 됐네!”

  “어쩌다 좋아하게 된 거냐? 어떤 사람이 우리 키티의 순정을 채갔는지 궁금하다 야.”

  “입학식 때 첫눈에 반한 것 같습니다.”

  “반했으면 반했다지, 반한 것 같다는 또 뭐냐?”

  “그럼 몇 년이나 된 거냐? 10년?”

  “그쯤 됐습니다. 입학식 때부터 좀⋯⋯ 신경 쓰였습니다.”

  “그게 반한 거 아이가?”

  “야, 그게 어떻게 반한 거냐?”


  셰퍼드와 샹크스는 평소처럼 저들끼리 으르렁거렸다. 훈련소 동기일 때부터 투닥거렸다던 둘은 서로의 입에 각각 고추와 마늘을 집어넣다 못해 상추를 면상에 던지기 시작했다. 셰퍼드의 프러포즈 썰부터 잠자코 듣기만 하던 베어가 입을 열었다.


  “키티야. 그럼 언제 ‘아, 내가 얘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깨달았니.”


  중후한 음성에 좌중이 입을 다물었다. 원빈 또한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했다. 언제 성찬이 형을 좋아하는지 깨달았냐고.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이 있었다.


  너 이제 어떡할 거야?


  원빈에게 아무도 물음을 던지지 않는 때였다. 운동복이 아닌 교복으로 등교할 무렵이었다.

  평생을 내다 바친 육상을 관둬야 했다. 전국체전에 나간 원빈이 100m 개인전을 4등으로 들어오고 코치에게 곧바로 발목에 이상이 있음을 고했다. 400m 개인전은 곧장 흰 수건을 던졌지만, 계주는 후보 선수가 없었다. 대체할 인력이 없는 상황인지라 발목에 파스만 대충 뿌리고 스포츠 테이프로 감싼 원빈은 이 악물고 뛰었다. 그렇게 햇볕이 내리쬐는 트랙 위에서 고꾸라졌다. 발목이 완전히 아작 나 손으로 건드릴 수도 없을 만큼의 고통이었다.

  병원에서는 발목을 치료하면 일상생활은 가능하겠지만, 더 이상 운동은 할 수 없을 거라고 진단했다. 그때 어떤 이도 원빈에게 뭘 할 거니, 어떡할 거니, 따위의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심지어 부모조차 원빈에게 차마 묻지 못했다. 아마 원빈이 느낄 상실을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뻘뻘 흐르는 한여름, 겨드랑이를 혹사시키는 목발을 짚으며 등교하고 수업 내리 엎어져 잠만 잤다. 누구도 깨우지 않았다. 점심시간까지 자버려서 배곯은 적도 있었다. 그날도 그렇게 지나가는 하루였을 것이다. 성찬이 없었더라면.

  성찬은 그때 딱 수험생이었다. 고3이 고2의 반까지 들어온 것도 기함할 노릇인데, 성찬은 원빈을 흔들어 깨우더니 이제 어떡할 거냐 물었다. 아무도 묻지 않은 것을, 심지어 원빈 스스로도 물을 수 없던 질문을 성찬은 아주 손쉽게 해치웠다.


  너 이제 어떡할 거냐고, 박원빈.


  창문을 투과한 밀도 높은 햇살은 떠다니는 먼지까지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러니 하물며 그 예쁜 얼굴의 한 면을 꽉 채운 빛은 그야말로 찬란이었다. 원빈은 그 순간에 웃었다. 원빈이 웃자 성찬의 눈썹이 이상하게 쭈그러들었다.


  너 어디 아파? 왜 웃어?

  저한테 이런 질문한 사람 형이 처음이에요.

  그런다고 웃어? 지금 웃음이 나?

  다들 제 눈치 본다고 안 물어보거든요. 근데 형은 겉이나 속이나, 앞이나 뒤나 똑같아서 그냥 물어보는 게 좋아요.


  성찬의 눈썹이 관자놀이를 축 삼아 미끄럼틀을 만들었다. 용맹한 강아지 같아. 가끔 공원에서 산책하다 보면 제 주인 지키겠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 작은 몸으로 으르렁 왈왈거리는 말티즈. 말티즈는 아닌가? 그러기엔 좀 큰가? 아닌데, 닮았는데. 하얗고 포슬포슬한 게.


  너 약간, 돌아있는 것 같아. 너 지금 제정신 아닌 것 같아.

  그럴 수도 있죠. ⋯⋯ 근데 형. 저 진짜 뭐 하죠?

  뭐 하긴. 군대라도 가.

  아, 무슨 군대야. 아픈 사람 놀려요, 지금?

  나는 군대 가거든.

  형 군대 가요? 언제요?

  엉. 나 공사 갈 거야. 공군사관학교. 나랑 만나자.

  학교에서만 봐도 지겨운데 군대에서 또 보자고요?

  요즘 너 나 안 봤잖아. 난 너 안 보니까 보고 싶던데.


  낯 간지러운 소리를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잘도 했다. 시선을 피한 원빈이 습관처럼 구레나룻을 매만졌다.


  내 성적에 무슨 공사예요. 공군 들어 갈래도 다리 병신이라 못 갈 텐데.

  아닌데. 너 한다면 할걸? 박원빈이, 자신 없나?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내가 공군 들어간다고 쳐요. 그래도 못 만나잖아요. 형은 장교고, 나는 일반병산데.

  음⋯⋯. 만날 수는 있을걸? 네가 부사관 지원해서 특수부대로 오면 진급 빨라져. 그럼 나랑 만나겠지. 공군이 육군도 아니고. 판 좁고 빤한 데라.


  아. 그때구나. 정성찬을 처음으로 좋아한다고 인식하던 때가. 어쩌면 그 형의 미래에 한두 걸음 들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맹목적인 애정의 시작이었다. 인간적 호의인 줄 알았던 그게, 심장께를 간질이던 그게 사실 성애적 호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그 형이 지나가는 말로 흘렸던 것들을 혼자 주워 담고, 결국 공군 특수부대까지의 길을 걷게 했다. 정작 그 형은 다 걷지도 못했던 길이었다.


  새벽까지 이어질 뻔한 자리는 별안간 울린 베어의 전화 덕에 끝을 봤다.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수화구 속 여성의 목소리는 단단히 화가 난 어투였다. 자리를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팀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현역 군인들은 해산 소리에 기막힌 반응 속도를 보였다.

  가게 밖에서 멀뚱히 얼타던 원빈은 셰퍼드의 손에 이끌려 근처 편의점으로 갔다. 원빈의 입에 빙빙바를 물려준 셰퍼드는 새 담배에서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라이터와 담뱃갑을 원빈에게 맡겼다. 와이프가 담배 피운 거 알면 죽는다면서도 셰퍼드는 공중에 희멀건 담배 연기를 뱉었다.


  “키티야. 웬만하면 짝사랑 티 내지 마라. 실패한 것처럼 굴어, 팀원들 앞에서. 더 못 묻게.”


  납득가지 않는 명령에 원빈이 우뚝 서서 눈을 깜빡였다.


  “질문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너 남고 나왔잖아.”

  “⋯⋯.”

  “군대에서 호모 새끼로 낙인찍혀 봐야 좋을 거 없다.”

  “⋯⋯.”

  “대답.”

  “넵.”


  손목에 스냅을 주며 검지로 장초를 때리자 담뱃불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야외 테이블 위 종이컵에 꽁초를 버린 셰퍼드는 원빈의 뒤통수에 제 손을 얹었다.


  “너무 아프지 마라.”


  첫사랑 너무 아프게 하지 말라는 건지, 아님 제 말을 너무 아프게 듣지 말라는 건지. 원빈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셰퍼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성찬이 형이 셰퍼드 햄보다 더 크겠지. 성찬이 형도 저런 무스탕 입으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 모르겠다. 그냥 보고 싶다.

  김해를 벗어날 수 없는 원빈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시작도 못 한 사랑의 그리움을 무릎 사이에 묻었다.




* * *




  창문 하나 없는 방에 갇힌 지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아무 때나 배식되는 식사에 성찬은 도통 며칠을 갇혀 있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밖에 비가 오고 있음은 알았다. 무릎이 뻐근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던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해 두 채의 집과 한 대의 자동차를 얻었다. 할아버지는 그 몫을 오로지 성찬의 앞으로 전했다. 용산구 배산임수 명당에 있는 고급 빌라는 세를 줬고, 새 차는 계약 후 면허를 땄다. 할아버지는 성찬을 우리 집 자랑이라고 부르며 새하얀 포르쉐 카이엔의 키를 건넸다. 공사가 있는 청주에 준 집은 덤이었다. 그 정도야 할아버지한텐 푼돈이었겠지만.

  그냥 운이 좋았다. 그 해엔 정원을 늘리기도 했고, 예년보다 시험이 조금 더 쉽기도 했고, 정석적인 생기부에 다른 동아리 활동까지 있다는 점이 면접관의 호감을 끌기도 했다. 운이 좋았다는 말을 제외하고 달리 말할 방법이 없었다. 타고난 성정대로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 놀았고, 운이 좋아 합격했을 뿐이었다.

  학교 뒷산에서 땅에 머리를 박은 채 얼차려를 받을 때에 성찬은 총량의 법칙을 생각했다. 공사에 입학할 때 생애의 가진 운을 다 써서 같잖은 얼차려를 받고 있는 건가. 호의로 가득 찬 세상만 살아왔던 성찬이 누군가의 불호를 감지한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고작 한두 살 더 먹었다는 이유로, 고작 한두 해 먼저 공사에 입학했다는 이유로 후배를 갈구는 불쌍한 새끼의 추악한 불호는 몸을 다소 고단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찬이 불호를 품지 못하는 인간도 아니었다. 싫어하는 것을 싫어해 봐야 그의 손해이지, 성찬의 손해는 아니었다. 인생 개좆같이 살아서 이딴 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자존감이 채워지지 않는 불쌍한 인간, 정도의 감상으로 쿠사리를 견뎠다. 버틸 만해서 버텼고, 견딜 만해서 견뎠다. 덕분에 맷집이 늘었고, 신체는 더 건강해졌고, 건강한 신체 덕에 더 굳건한 정신을 갖췄다.

  그렇게 1년을 견뎠을 때, 성찬의 머리카락보다 훨씬 더 짧게 깎은 새내기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추악한 불호의 본색에 새내기의 덜미가 잡혔다. 선배의 손아귀에 붙잡힌 새내기는 성찬의 앞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폭력의 역사를 대물림하고자 세운 희생양에 성찬은 그저 선배를 바라볼 뿐이었다. ‘못 한다’가 아닌 ‘안 한다’의 반항에 서 있자 선배는 성찬의 어깨를 힘주어 툭툭 쳤다.


  네가 당한 만큼 패보라니까? 너도 패고 싶었을 거 아니야.


  성찬은 그날 세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자신은 폭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폭력을 당하는 것도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폭력을 행사하는 건 더욱 저와 맞지 않았다. 그토록 치고 싶던 선배의 얼굴에 주먹을 내질렀어도 얼굴에 닿기 전 찰나에 속력을 줄였다.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진 선배가 곧장 머리를 털고 일어나 성찬을 발로 찼을 때에도 성찬은 힘을 다 쓰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인대가 끊어질 땐 소리가 들린다는 것. 선배의 발길질에 쓰러진 성찬은 본능적으로 상체를 굽히고 팔로 머리를 감쌌다. 그 덕에 무방비했던 다리를 짓밟혔고 무릎이 어긋났다. 앞뒤로 움직이는 무릎이 강제적으로 옆으로 뒤틀렸다. 딱- 고통에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으니 그것은 성찬의 입에서 나는 소리도, 뼈가 어긋나는 소리도 아니었다. 인대가 뚝 끊기는 소리였다. 아득한 고통에 귓가에 웅웅대는 소음이 점점 수그러들었다.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 깨달은 세 번째, 맞는 와중에 걔가 떠올랐다는 것. 군기에 익숙한 걔, 입술은 삐죽 대도 순종에 길들여진 걔, 그래 놓고 순한 걔. 선배들의 불합리한 말에도 금세 순응하고 따르는 박원빈, 너라면 어땠을까. 깊이 생각하진 못했다. 원빈이 폭력을 행하든 당하든, 다 열받기만 해서. 생각은 이상하게 굴러 떨어졌다. 이딴 걸 당하는 게 박원빈이 아니라 다행이다. 군대에서 보자고 했지만 발목 부상 때문에 공군은커녕 공익이나 될까 싶은 걔가 절 따라 이곳에 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정신을 잃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원빈의 말대로 아무도 성찬에게 묻지 않았다. 뭘 할 거니, 이제 어떻게 살 거니 하는 질문이 결여됐다. 청주 집은 부모님이 알아서 처분했고, 그 돈은 고스란히 성찬의 통장에 꽂혔다. 다행히 용산 집과 포르쉐는 여전히 성찬의 몫이었다. 어린애한테 준 걸 도로 빼앗을 만큼 고약한 노인네는 아니었다. 심보가 지독하긴 해도 그게 제 보물이라 불렸던 집안 막내에게 향하진 않았다. 문제를 일으켰던 선배는 원래도 없던 사람인 것처럼 조용히 삭제되어 할아버지의 힘이 쓰였음을 짐작만 했다. 다만 없는 이 취급은 성찬에게로도 향했다. 명절에 굳이 성찬이 얼굴 비출 필요 없단 선언을 하셨단 걸 나중에 사촌 형에게서 들었다.

  성찬은 집안에서 금기시되는 제 처지를 아주 단순하고 시원하게 느꼈다. 자유다.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가 십자인대가 끊어져 병상에 묶여 있는 성찬에게 찾아왔다. 무릎이 작살나자 손에 쥐어진 것은 해방이었다. 청주 집을 처분한 돈으로 미술학원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고,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는 이유로 굳어진 손을 푸는 데에만 해가 바뀌었다. 어떤 방어기제라도 있는 것처럼, 성찬은 군대고 공사고 하는 것들을 떠올리지 않고 오로지 입시에만 집중했다. 빈 캔버스에 진로를 그려 나가는 것만 몰두했다.

  그렇게 스물넷, 회화과 새내기가 된 성찬은 그제야 걔를 찾았다. 정신을 잃어가면서 어렴풋이 떠올렸던 원빈을 다시 보기 위해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을 취했다. 공사 선배한테 찍히고서 핸드폰을 검열당하는 바람에 연락처도 다 지우고 번호도 바꿨더니 동아리 친구들을 다시 모으는 데에만 한 학기가 다 지나 있었다.


  누구? 박원빈? 잘생긴 애?

  아, 걔 졸업식도 안 왔다던데. 군대 갔다더라?

  걔 아마 공군 갔을걸.

  맞다. 걔 특수부대 간댔다. 뭔 훈련만 3년 받는다고 그러던데.

  아예 말뚝 박기로 했나 보네.


  은근슬쩍 원빈의 이름을 떠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박원빈은 역시 한다면 하는 놈이었다. 진짜로 공군 특수부대를 갔다고. 되돌리긴 글렀고, 말리자니 늦었지만, 그보다 먼저 기묘한 간지러움이 울렁거렸다. 술기운 때문인가. 술기운이 이렇게 간질거리나. 남이 훈수 둔다고 따르지 않는 성찬은 애당초 타인의 인생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 따위 없었으나, 걔가 제 말 따라 공군 특수부대로 향했다고 하니 토기가 올라올 정도로 목구멍이 미친 듯이 간질거렸다.

  그 자리에서 바로 원빈의 연락처를 전달받아 메시지를 날린 건 취해서 부린 객기가 아니었다. 걔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진짜 제 말에 동요되어 자신은 중도 하차한 그 길을 걷는지, 아님 다른 뜻이 있었는지. 후자였다고 한들, 성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진로로 생각하지 않았던 미래를 그려가고 있는 걔의 인생에서 딱 한 줄,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고민할 때 무심코 핵심을 짚어버린 단역의 대사 한 줄, 그 정도면 제 역할은 충분했다.

  며칠이 지나서야 온 답장에 성찬은 계절학기 수업을 마치자마자 포르쉐를 끌고 김해로 향했다. 이럴 땐 할아버지의 아량이 감사하기만 했다. KTX를 예매하고, 열차를 기다리고, 열차에 타서 마냥 앉아있기만 해야 하는 지루한 일정은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 장거리 운전이라도 당장 할 게 있다는 건 성찬의 잡생각을 뭉갰다. 언제 올지 뻔히 알면서 일찍 도착한 주제에 잡념이 스멀스멀 기어오르자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털어버렸다.

  베레모를 쓴 사람들이 심심찮게 창밖을 지나갔지만, 카페로 들어오는 붉은 베레모를 알아챘다. 얼굴은 좀 핼쑥했고, 몸은 좋아진 듯했다. 둔탁한 군복에 가렸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색하려나 했던 짐작이 무색하게 반갑기만 했다. 여전히 잘생긴 얼굴은 베레모를 벗자 쉽게 주변의 이목을 끌었다. 안녕, 박원빈. 인사는 간단했고, 잠깐의 정적이 둘 사이를 지나쳤다.


  형 얘기 들었어요. 전역했다고.


  아. 한국은 이게 문제다. 이 좁은 땅덩이에서 소문은 발 빠르게 퍼졌다. 축구 하다가 십자인대가 끊어졌어. 즉흥으로 둘러댄 거짓말에 걔의 표정이 자취를 감췄다. 전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있는 얼굴이었던 것 같은데, 이젠 읽히지 않는다. 투명한 물에 흰 물감을 섞은 것처럼 탁한 것이 끼었다.


  너무하네. 나는 김해에 처박아두고, 형 혼자 전역하고.


  입술이 나오자 무엇보다 반가웠다. 학교에서도 종종 봤던 입술이다. 불만이 뾰로통하게 튀어나온 도톰한 입술. 미리 준비했던 문제가 시험에 나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형 혼자 전역해서 삐졌어, 우리 고양이? 자연히 광대는 산을 만들었다.

  이야기를 담는 둑이 한 번 터지자 그 뒤에 침묵이 따라올 길은 없었다. 공군 부사관 지원을 위해 엉덩이로 영어 공부했단 얘기부터 SART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티오가 나서 지원하게 됐단 이야기, 발목 치료 목적으로 했던 수영 덕에 가산점을 받았단 이야기까지 들었다. 멋있어졌네, 박원빈. 사람 죽여야 사는 곳에서 사람 구하고 있고. 순수하게 내뱉은 감탄에 구레나룻을 매만지는 원빈의 버릇이 나왔다. 이것도 아는 문제였다. 멋쩍을 때마다 원빈이 으레 하는 행동이었다.

  훈련이 고되 부대 내 괴롭힘 같은 건 없단 얘기에는 표정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안심이었을까, 탄식이었을까. 둘 다였으려나. 여하간 잠깐 마음이 복잡했다. 괴롭힘은 없단 얘기에 안심되었고, 익히 알고 있는 고된 훈련에 탄식했다.

  그 뒤로 가끔 걔가 먼저 연락하는 날에는 얼른 약속을 잡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혹시라도 마음이 혹사당할까 싶어 액셀을 밟았다. 길치인 성찬이 이제는 눈 감고도 김해로 가는 길을 달렸다. 걔의 고단한 전장에 막사가 될 수 있어 운이 좋다고 여기면서.


  보통 4년은 넘게 걸릴 대학을 3년 만에 졸업하면서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통신사에서 인턴으로 사진기자 생활을 하다 선배 기자의 눈에 띄어 해외 특파 전문 자회사로 들어가게 된 뒤로는 전쟁이 있는 곳마다 자원했다. 다들 고생 못해 안달 난 애라며 혀를 내둘렀지만, 성찬은 이렇게라도 걔의 전장에 뛰어들고 싶었다. 전장에 나가 누군가를 구해야만 하는 걔의 전쟁을 끝내려면, 누군가는 전쟁의 불합리성과 잔혹함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성찬의 캔버스는 폐허였다. 폭격으로 다 무너져 내린 건물에 밤새 작업한 골판지를 대고 스프레이를 뿌렸다. 꽃, 풍선, 고양이를 그리며 희망, 낭만, 사랑 같은 말랑한 것들을 새겼다. 걸릴까 조마조마한 마음보다 뜨거운 게 울컥 목구멍에 치미는 감각이 성찬을 지배했다. 단시간에 그라피티를 완성할 때는 오로지 제 마음의 울림에 집중했다. 전쟁 같은 게 없었으면 좋겠다, 세상이 평화로우면 좋겠다, 박원빈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제 소명임을 받아들였다는 건 그에 대한 마음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었다. 전장에 함께 서 있고 싶었던 건 걔의 짐을 덜기 위해서가 아니라 걔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그때가 돼서야 투명했던 박원빈이 읽히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혼탁했던 건 정성찬의 마음이었다. 남자가 남자 좋아하는 줄도 모르고, 그게 뜨끈한 우정이라도 되는 줄 알고. 미적지근한 애정의 시작이었는데. 지지부진하게 이 나이까지 끌고 올 사랑인 줄도 모른 채 걔 하나에 온 마음이 다 젖어 있었다.


  무릎이 쿡쿡 쑤셨다. 밖은 여전히 비가 오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 구하러 와, 박원빈.

  나는 너 믿어.


  짙은 어둠 속에서도 성찬의 눈이 빛을 향했다.




* * *




  작전을 나갈 때면 어깨에 부대 마크를 부착한다. 원빈은 습관적으로 어깨에 붙인 부대 마크를 주먹으로 툭툭 쳤다.

  분쟁 지역에 매몰된 한국인을 구출하기 위해 작전 브리핑을 짧게 듣고 나면, 헬기로 올랐다. 국군이 아닌 민간인 구출에서 원빈은 잠깐 집중력을 잃었다. 민간인 구출은 희망에 기댈 수 없다. 한숨과 함께 상념을 뱉었다. 헬기를 점검하고 있던 샹크스가 먼저 헬기에 탑승했고, 곧이어 베어와 이누가 조종석을 차지했다. 벨트를 찬 채 정자세로 대기하고 있던 원빈의 옆으로 셰퍼드가 뛰어올랐다.


  “타깃 신상 및 마지막 위치 확보했습니다.”


  두 대의 태블릿을 들고 있던 셰퍼드는 하나를 이누에게 넘겼고, 다른 하나를 원빈에게 전했다. 원빈의 옆에 앉아 단단히 벨트를 맨 셰퍼드는 원빈의 어깨너머로 태블릿을 힐끔거렸다.


  “이거⋯⋯.”

  “왜. 뭔데.”

  “이거 진짜입니까?”

  “너 혹시, 아는 사람이야?”


  정성찬.

  형이 왜⋯⋯.


  태블릿을 들고 있던 원빈의 손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사정없이 떨렸다. 헬기는 이미 이륙했다. 형이 왜 여기에⋯⋯. 구조 예정자 명단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사망자 명단이나 다름없는 태블릿에 정성찬의 이름 석 자와 사진이 박여 있었다. 마음이 아수라장으로 처박혔다.


  원빈이 어떻게 SART를 버텼는지 묻는다면, 그 답은 오로지 정성찬, 한 사람이 쥐고 있었다.

  실패한 작전이 켜켜이 쌓였다. 오로지 원빈의 기준에 의한 성패다. 구조에 실패했다는 보고서를 올리면 셰퍼드는 단어를 고쳤다. ‘구조 실패’는 어느새 ‘시신 수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쯤 원빈은 장례 예절에 익숙해져 있었다. 여전히 검은색 양복은 답답했고, 아직도 망자의 사진 앞에 두 번 꿇는 무릎이 아렸지만. 그날도 짧게 조의를 표하고 인사를 했다. 조촐한 식장에 망자의 노모만이 공허한 눈으로 원빈을 맞이했다.

  어쩐지 그날은 그 노모의 시선이 원빈을 에워쌌다. 한 시간이라도, 1분이라도, 1초라도 더 빠르게 움직였다면. 살아 있었을까, 그 사람. 봉사활동이었는지, 선교활동이었는지. 망자는 선의 편에 기대어 반전의 사명을 띠고 척박한 그 땅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식장에서 나온 원빈은 한참을 서서 제 손을 내려다봤다. 망자의 온기가 손끝에 남아 있었다.

  뭐라도 손에 쥐지 않으면 손끝의 감각이 전염되어 온몸을 덮칠 것 같아 핸드폰을 들었다. 최근 통화 목록에서 ‘성찬이 형’을 찾았다. 길게 이어진 신호음이 네 번을 넘어갈 무렵, 성찬은 전화를 받았다. 급한 숨소리가 수화구 너머 울렸다. 바쁜데 전화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끊었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와, 박원빈. 집 앞이야.


  한밤중에 침대에 누워 있으려던 제 계획을 깨부수고 성찬이 찾아왔다. 남자 둘이 집 근처 공원을 말없이 맴돌았다. 성찬을 스친 바람이 원빈의 비강으로 흐르자 꽃향기가 아른거렸다. 환영처럼 번진 온기를 찬바람이 쓸어내렸고, 허상의 피비린내 대신 꽃향기가 폐부를 고요하게 채웠다.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어 걷기만 하는데도 성찬은 내내 미소 짓고 있었다. 성찬은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원빈을 씻기고 닦았다.

  그 뒤로도 굴복하고 싶은 날이면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김해로 왔다. 어쩌다 못 오는 날이면 서로의 빈 날 중 가장 빠른 날을 잡았다. 딱 그 다정에 기대 버텼다. 성찬과 만나게 될 날을 고대하고 기다리며 견뎠다. 그 어떤 것도 솔직해질 수 없었지만, 성찬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제 목에 진득하게 붙어 있는 숨을 감사히 여겼다.

  사실 솔직함은 성찬의 특권이었다. 무엇을 얘기해도 어색하지 않고, 무엇을 고백해도 이상하지 않을 평범함 속에 사는 성찬은 원빈이 겪지 못한 생활을 가감 없이 얘기했다. 학교생활이나 동아리, 공모전이 인턴을 거쳐 직장 생활까지 이어졌다. 가만히만 있었다면 고달팠을 원빈을 구제하는 건 성찬이었다. 그러니 그 무엇도 아깝지 않았다. 김해로 달려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으니까. 그의 차가 값비싼 외제라는 걸 아는데도 원빈은 밥값이든 커피값이든 곧 죽어도 제가 결제했다. 형 돈 안 벌잖아요, 형 아직 신입이잖아요, 라고는 했지만 고마워서 둘러댄 변명이었다. 고맙다는 말은 어쩐지 너무 간지러워서. 고맙다고 말하면 어쩐지 마음까지 들키게 될까 봐.

  들키기 싫었다. 무서웠다. 사랑을 인지해버렸을 땐 이미 터진 둑과 같은 거라, 어디로 흐를지 몰라 수습하기에 급급했다. 성찬이 제 마음을 알게 된다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호모 새끼로 낙인찍고 업신여길까 두려웠다. 아니, 차라리 그게 나으려나. 고백이라도 해서 부딪혀볼까. 눈앞에서 거절당하면 마음을 접을 수 있을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성찬이 김해로 오지 않는다는 걸 상상하면 숨이 막혔다. 제가 성찬을 찾고 성찬이 김해로 와주는 지금의 관계가 최선이다. 지금의 관계를 벗어난다는 가정을 하나둘 세울 때마다 마음에 쩍쩍 금이 갔다. 달라질 관계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알아주길 바랐다. 들키기도 싫고, 고백하기도 글렀으면서, 당사자가 모르게 지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이렇게 모순 속에서 불편해질 사랑이었으면 시작도 안 했을 텐데.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원망이 앞섰다. 원래 사랑이 이렇게 어려운 건가. 앞만 보고 달려야만 하는 원빈은 꼬여버린 궤도에서 갈피를 못 잡고 멈춰 있었다.

  잔뜩 뭉친 마음을 풀어헤친 것은 편지였다. 관계가 달라지지 않을 시기에 전해질 편지. 작전 전, 신변을 정리할 때 늘 같은 편지를 남겼다. 그런데도 부끄러워서 마음을 다듬고 집약하여 고백하는 글자를 꾹꾹 눌러 담았다.


  작전 나가면 유서 같은 것도 써?

  아, 뭐 그런 걸 물어요.

  왜? 특수부대의 낭만이잖아, 유서.

  ⋯⋯ 쓰긴 하죠.

  그럼 내 이름으로도 하나 써주라. 내가 너 못 잊게.


  언젠가 성찬과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군에 대해 함구하는 것은 서로에게 있어 불문율이었지만, 그날 성찬은 이상하리만큼 비장한 눈빛을 하고선 예의 그 장난스러운 말투로 유서에 대해 물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태도를 바꿨다.


  아니다. 쓰지 마라.

  갑자기 왜요?

  네가 쓰는 거라고 하면 받아보고 싶긴 한데, 유서면 받기 싫어졌어. 너 죽었단 뜻이잖아.

  ⋯⋯.

  나한테 유서 써도 줄 일 없었으면 좋겠다. 난 네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거든.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흰 편지지를 샀다. 오랜만에 펜을 쥔 손이 어색해 글자가 삐뚜름하게 적혔다. 손에 들어간 힘만큼 예쁘게 써지면 좋겠는데, 원빈의 마음처럼 되는 게 없었다. 애초에 마음처럼 됐다면, 좋아하는 마음부터 접었겠지만.

  죽으면 고백이 좀 덜 창피할까. 죽어서 귀신이 되는 바람에 창피해지면 어떡해. 원빈의 고백은 원빈이 죽고 나서야 유효했다. 원빈이 죽고 나면 전해질 편지, 즉 유서나 되어야 원빈의 고백을 품었다.

  필연적으로 죽음을 가까이 둔 원빈은 항상 제 죽음을 상상해 왔다. 제가 죽고 나서 제 유서를 받아 든 성찬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가 눈물을 흘릴지, 아니면 의아해할지, 머릿속엔 수많은 추측이 난무했다. 그 모든 상상의 전제는 동일했다. 박원빈이 정성찬보다 먼저 죽는다는 것.


  그런 원빈의 눈앞에 별안간 성찬의 죽음이 찾아왔다. 형이 왜, 형의 죽음은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원빈의 손에서 태블릿을 앗아간 셰퍼드가 주먹으로 원빈의 허벅지를 있는 힘껏 쳤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였다. 흐트러진 정신을 다잡았다. 제발. 살아있어. 살아있기만 해. 희망보다 간절하고 지독한 것에 매달렸다. 사랑이었다.


  총격전이 벌어진 도심에서 다소 동떨어진 곳에 뜻 모를 건물 하나가 놓여 있었다. 6층짜리 건물 위에 헬기가 정지비행하며 머물렀다. 주변에 적으로 보이는 자들은 없었으나 근방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어 헬기가 착륙할 수는 없었다.

  패스트로프가 헬기로부터 허공에 떨어졌다. 로프가 건물 옥상까지 떨어지는 데에는 딱 3초가 걸렸다. 장갑을 매만지자 셰퍼드가 먼저 하강했다. 인이어에서 클리어라는 단어가 들리자마자 원빈은 로프를 잡고 뛰어내렸다. 키티, 너무 급하다. 아래에서 셰퍼드가 쿠사리를 놓았지만 원빈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하강 속도를 조절하는 발에 힘을 뺐다. 20킬로짜리 군장을 메지 않아 다행이었다. 군장이 있었다면 더 빠르게 착지해 발목이 뒤틀렸을 테니까.

  원빈이 옥상에 발을 디디자마자 로프를 거둬들인 헬기가 떠났다. 작전은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셰퍼드 송신. 내부 진입합니다.”


  3, 2, 1. 굳게 닫힌 문을 뚫고 들어갔다. 셰퍼드가 좌측을 살피면, 원빈은 우측을 살폈다. 전력은 없으나 창문이 있어 건물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리를 죽이고 계단을 내려가 6층부터 진입했다. 

  6층 클리어. 수상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5층 클리어.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4층 클리어. 수색에 속도가 붙었다. 3층 클리어. 심장이 쿵쾅대고 숨이 가빴다. 2층 클리어. 셰퍼드가 원빈의 앞에 손등을 보이다 검지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접었다. 퇴로가 확보되는 1층에 남은 인원이 숨었을지 모르니 은밀히 움직이자는 의미였다. 파지 자세를 고친 원빈은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흡을 조절해 숨소리조차 죽인 두 사람이 1층을 함께 돌았다. 모든 곳은 공실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셰퍼드 송신. 올 클리어입니다. 이 새끼들 이미 내뺀 것 같습니다.”


  굽었던 등을 핀 셰퍼드에 반해 원빈은 여전히 긴장을 유지한 채 움직였다. 복귀를 위해 헬기를 돌리겠다는 무전을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멈췄다. 왔던 곳을 밟았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같은 자리를 배회했다.


  “왜 그래?”

  “바닥이 이상합니다.”


  원빈의 말에 셰퍼드의 표정이 굳었다. 너 일단 사주경계하고 있어. 셰퍼드의 명령에 원빈은 내렸던 총구를 들어 올리며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원빈을 마주한 셰퍼드는 K2 소총을 수직으로 들어 개머리판으로 나무로 된 바닥을 찍었다. 툭. 툭툭. 막힌 소리가 나다가 어느 순간, 퉁- 빈 소리가 났다.

  셰퍼드와 원빈의 시선이 교환됐다. 바닥을 더듬던 셰퍼드가 품에서 칼을 꺼내 나무 틈을 찍어 들어 올렸다. 연결된 나무 데크가 열리며 지하에 숨어 있던 계단이 드러났다.


  “셰퍼드 송신. 지하 발견했습니다.”

  - 이누 송신. 현장까지 8분입니다. 그 안에 수색하는 건 무리입니다.

  “키티 송신. 지하 진입하겠습니다.”

  - 베어 송신. 키티야.


  무거운 베어의 목소리가 인이어에 울리자 지하로 진입하기 위해 몸을 굽히던 원빈이 멈췄다. 팀장인 베어가 멈추라고 하면 멈춰야 했다. 지하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는 원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10분 준다. 그 안에 해결해.

  “알겠습니다.”


  헬멧에 얹었던 야간 투시경을 눈두덩이 위로 내렸다. 셰퍼드가 엄지로 제 뒤를 가리켰고, 원빈은 셰퍼드 대신 작게 속삭였다.


  “키티 송신. 지하 진입합니다. 3, 2, 1.”


  발소리를 죽이고 지하에 진입하자 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야간 투시경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암흑이었다.

  계단 바로 왼쪽엔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앞에서 셰퍼드는 제 뒤에 서 있을 원빈에게 검지와 중지를 들어 보였다. 책상 안쪽에 적이 숨어 있을 수 있으니 살피겠다는 뜻이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책상 안쪽 공간을 살피자 더플백 하나만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 더플백을 올리고 지퍼를 열자 쓰잘머리 없는 노트와 두꺼운 종이, 스프레이가 들어 있었다. 책상 위로 가방을 엎으려는 셰퍼드를 막아선 원빈이 더플백 안에 손을 넣자 작은 노트가 잡혔다.

  여권이었다. 정성찬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진.


  성찬의 여권을 보여주자 셰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권을 도로 집어넣은 원빈이 지퍼를 단단히 채우고 어깨 한쪽에 걸쳤다. 유류품일지 소지품일지 모르는 것들을 챙겨야 했다.

  이곳에 있었다는 증명이 확인되자 셰퍼드와 원빈은 책상을 지나쳐 더 깊은 어둠으로 걸음을 옮겼다. 양옆으로는 철창이 늘어져 있었다. 우측을 살피는 셰퍼드의 뒤를 따른 원빈은 좌측과 후방을 경계했다.

  빈 철창 여섯 개를 지나 마지막 철창 앞에서 원빈이 멈췄다. 철창 안에 쓰러져 있는 인영이 보였다.


  “형.”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경계를 놓지 않은 셰퍼드가 원빈의 옆에 섰다. 셰퍼드 송신. 타깃 추정 인물 신원 확인 중입니다.


  “성찬이 형.”


  철창 안에 있는 사람이 움찔거렸다. 길게 늘어진 인영이 들썩이자 셰퍼드는 우선 소총을 겨눴다. 총구를 내리고 야간 투시경을 벗은 원빈이 차가운 창살을 손에 쥐었다. 칠흑같이 뒤덮인 흑암 속에서도 한 사람은 분명했다.


  “형. 나야.”

  “⋯⋯ 박원빈?”


  잔뜩 새된 목소리가 튀었다. 몸을 일으키는 것도 어려운지 느릿하게 돌아눕자 얼굴이 보였다. 반듯한 이마 아래 잔뜩 찡그린 눈썹, 천천히 끔뻑거리는 눈망울 사이를 가로지르는 곧은 콧대, 퍼석하게 마른 입술 사이로 톡 튀어나오는 앞니 두 톨.

  눈물부터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은 원빈이 어금니를 맞부딪쳤다.


  “키티 송신. 타깃 확인되었습니다.”

  “셰퍼드 송신. 구출하겠습니다.”

  - 이누 송신. 작전지 도착까지 1분 20초 예상합니다.


  개머리판으로 문고리를 깨부수려던 셰퍼드가 한숨을 쉬었다. 야, 나와. 셰퍼드의 명에도 원빈이 가만히 있자 셰퍼드는 결국 원빈의 목덜미를 끌어다 제 뒤로 던졌다. 한숨을 다시 길게 내쉰 셰퍼드가 자물쇠로 총구를 겨눴다.

  탕- 둔탁한 소리가 지하를 울렸다. 남은 자물쇠를 잡아 뜯어낸 셰퍼드를 따라 철창 안으로 들어가 성찬을 살폈다. 사지는 힘이 없었고 목을 가누기도 어려운 것으로 보였다.


  “셰퍼드 송신. 타깃 확보했습니다. 서맥, 탈수, 영양결핍 증상 확인됩니다. 골절이나 열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 이누 송신. 작전지 도착까지 30초입니다.

  “제가 업겠습니다.”


  일순간 셰퍼드가 멈췄지만, 이내 원빈의 어깨에서 가방을 앗아갔다. 셰퍼드가 성찬의 등을 받쳐 상체를 들어 올리자 원빈이 성찬의 두 팔을 각각 제 어깨에 얹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원빈은 몸을 한 번 들썩여 성찬을 제대로 업었다. 지상을 향해 계단을 오를 때에도 전투복 위의 무게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창밖으로 하늘에서 줄이 길게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건물 밖으로 나가기 전 원빈은 울컥 엉긴 목을 가다듬었다.


  “눈 뜨지 마십쇼. 햇빛에 실명될 수 있습니다.”

  “원빈아.”

  “⋯⋯.”

  “난 너 올 줄 알았어.”


  정성찬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박원빈의 등에서 의식을 잃었다.




* * *




  씻고 싶다. 눈꺼풀을 들어 흰 천장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성찬이 의식을 되찾았을 땐 수액과 영양제를 다 맞은 후였다.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간호장교는 성찬의 회복 속도를 보고 젊은 게 좋다며 한마디 얹었다. 넉살 좋게 건강함을 과시한 성찬은 주삿바늘을 빼자마자 먼지 구덩이인 몸부터 씻었다. 머리에 물을 맞는 순간 기억을 더듬었다. 몸에 물이 닿는 감각을 여실히 실감했다. 꿈이 아니야. 박원빈이 나타난 건 꿈이 아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맞다. 마지막 기억을 되짚어보자면 그랬다.

  철창에 갇히기 전 성찬은 몸을 숨기고 있었다. 현대의 전쟁은 불필요한 피를 희생시켰고, 성찬은 그를 사진으로 담아 전송했다. 폭격이 예정된 지역에서 대기했고, 건물이 무너지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카메라에 연결된 핸드폰을 통해 사진은 자동으로 회사 공용 클라우드에 저장되었을 것이다.

  건물이 무너지고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성찬은 몸을 움직였다. 무너진 건물의 벽은 더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건물을 빙 둘러보던 성찬은 수도가 터져 물이 흐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가방에 접어뒀던 골판지를 펼쳐 건물 벽에 붙였고, 스프레이를 뿌려 그라피티를 새겼다. 골판지를 떼자 물이 흐르는 곳에 혀를 내어 목을 축이는 고양이가 생겼다. 성찬은 그렇게 조용히 전쟁에 반대했다.

  그때였다. 조용한 공간에 누군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옅은 말소리와 모래가 짓밟히는 소리가 엮였다. 몸을 움츠린 성찬은 조심스레 골판지와 스프레이를 챙기고 폐허를 벗어났다. 벗어나려고 했다. 목덜미를 강타당해 정신을 잃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차 안이었다. 손발이 묶여 있었고, 머리엔 천 같은 것을 씌운 듯했다. 바퀴가 구르며 덜덜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다 들리진 않지만 급하게 배운 현지어가 귓전을 때렸다. 외국인은 돈이 돼. 카메라는 팔자. 성찬을 데려간 일당은 인질 협상으로 돈을 벌 생각인 듯했다. 성찬은 발가락을 꼼지락댔다. 다행히 핸드폰을 뺏기진 않았다. 이런 상황이 올 것 같아서 핸드폰을 신발에 넣는 습관을 들여뒀다.

  물론 철창 안에 들어갈 때 핸드폰을 뺏겼다. 이제 와서 몸수색을 하는 게 얼마나 체계 없이 굴러가는 집단인지 훤히 보여서 좀 웃었다가 몇 대 맞기도 했다. 그마저도 잘 맞는 방법을 학습한 바 있어 최대한 고통이 덜한 부위만 노출했다.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니까.

  핸드폰은 이곳에서 종료되었지만, 신호가 이곳에서 끊겼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저 성찬이 해야 할 일은 잘 버티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마따나 협상이 되든, 아님 군인들의 구조를 기다리든.

  딱히 걱정되진 않았다.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박원빈이 올 것이라는 어떤 직감 말이다. 와줄 거잖아, 빈 테두리에 난입한 그때처럼. 터무니없을 정도의 믿음이었다. 사랑은 안 그래도 무모한 사람을 꼭 이렇게 겁 없이 만들었다.


  얼마나 갇혔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철창 밖이 어수선하더니 그곳을 지키고 있던 이가 큰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세면대 뒤에 숨어 부러 숨죽이고 있던 성찬은 전력이 끊겨 전구가 꺼지고 나서야 슬그머니 몸을 움직였다. 암전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는 계속 땅이 울렸다. 근처에서 전투라도 벌어진 듯했다. 천장에선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이미 먼지투성이였지만 성찬은 소매로 코를 가리고 최대한 먼지를 피했다. 눈을 뜨는가 하면 어느새 까무룩 잠들어 있었다. 배고픔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성찬은 몸을 웅크려 모로 누웠다.

  미세하게 발소리가 들렸다. 아주 미세한 소리라 환영처럼 느껴졌다. 죽음의 문턱에 선 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만든 환영. 천사인가? 천사가 발이 있나? 그럼 저승사자? 저승사자가 외국으로도 나와주나? 어렴풋이 저승사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그럼 박원빈이 와주려나. 웃음이 샜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더니, 이렇게 오나.


  형.


  이건 좀 진짜 같다. 저승사자가 외양만 원빈의 모습을 한 건 아닌 모양이다. 음성도 복사가 되네.


  성찬이 형.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남은 에너지라곤 0에 수렴해서 몸을 돌릴 뿐이었다. 어둠에 적응한 눈은 흐릿하게 어떤 이를 비췄다.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었고, 빛을 좇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


  형, 나야.


  본능에 따라, 그렇게 당연하게 사랑해버린 이름을 입에 담았다. 박원빈? 이윽고 문이 열렸다. 원빈이 제게 다가올 땐 원빈의 뒤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아, 천사였나 보다. 박원빈의 모습을 한 천사. 저승사자라기엔 너무도 찬란해서.

  어느새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었다. 온기가 느껴지고 나서야 실감했다. 박원빈이네. 진짜 박원빈이었네. 원빈아. 난 너 올 줄 알았어.


  지난 일을 더듬던 성찬은 종료된 기억과 함께 헤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을 잠갔다. 개운하게 씻고 나와 보니 거짓말처럼 원빈이 서 있었다. 반가움에 뻗은 손이 무안할 정도로 원빈은 표정을 지우고 있었다. 일하는 곳이라 저런 얼굴인가 짐작하기엔 어딘지 시려서 괜히 눈치를 봤다.

  입술을 말아 앞니로 꾹꾹 누르다 시선을 아래로 깔아 보면 원빈이 손에 든 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종이 다발과 함께 제 가방을 쥐고 있었다. 더플백은 성찬이 처음 이 나라에 가져왔을 때보다 훨씬 빈약했다. 원래는 카메라가 있을 공간이었겠지. 카메라는 진즉에 팔아넘겼나 보다. 그 값은 어차피 회사에서 부담할 거고, 설령 그게 아니래도 목숨값 정도로 치부하면 된다. 그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그런 것쯤이야 사소한 문제였다. 눈앞에 무서울 정도로 가만히 저를 쳐다보고 있는 원빈에 비하면.

  가로로도, 세로로도 큰 원빈의 눈은 맑은 흑돌 같은 눈동자를 보였다. 투명하긴 얼마나 투명한지,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도 어떤 생각인지 다 보였다. 입을 굳게 다문 원빈은 두 눈동자로 제게 질문을 던졌다. 형이 왜 거기 있었어?


  “원빈아, 그게⋯⋯.”


  성찬이 입을 열려는 순간 간호장교가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곧바로 그를 향해 경례한 원빈이 또다시 눈으로 제게 명령했다. 아무런 얘기도 하지 말라고.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말라고.

  혈압을 체크한 간호장교는 원빈에게 성찬을 인계했다. 깍듯이 윗사람을 대하던 원빈이 다시 서늘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장교가 자리를 뜨자마자 원빈은 성찬의 손목을 붙들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뛰는 건 아니었지만 갈 길을 모르던 발이 몇 번 꼬였다. 그때마다 원빈이 잠깐 행동을 멈추고 한숨을 내뱉었다. 공연히 주눅이 들었다.

  막사로 성찬을 끌고 들어온 원빈은 양옆을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문을 굳게 잠갔다. 그리고 제 앞에 가방을 던졌다. 스프레이가 가방에서 삐져나왔다. 그 위로 원빈이 던진 종이 뭉치는 제 작품에 대한 기사였다.


  “해명해요.”


  원빈이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성찬에겐 죽음보다 더 두려운 순간이었다.




* * *




  반드시 구조한다.

  한때는 SART의 구호가 낭만이라고 생각했다.


  훈련을 받을 때면 비석을 꼭 지나쳐야 했다. 비석에 새겨진 ‘내 목숨은 버려도 조종사 목숨은 살린다’는 글귀는 같은 군인을 구조하는 군인으로서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마련이었다. 목에선 피 맛이 올라오고 폐는 터질 것처럼 부풀었어도, 고된 훈련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건 직업적 사명이었다. 원빈은 그걸 간지 내지는 가오라고 불렀지만.

  처음부터 직업적 사명이 없었던 게 아니란 얘기다. 성찬의 말마따나 죽여야 사는 곳에서 구하는 사람이라는 점은 원빈을 충분히 매료시켰다. 그러나 제가 구한 조종사가 다시는 조종을 하지 못하고, 제가 구한 특작 요원이 명예제대 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 와중에 민간인을 살려서 구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으로 구한 민간인, 그것도 사지 멀쩡히 잘 붙어 있는 구조자가 성찬이 형이라니. 기쁨이나 보람, 안심보다 먼저 의구심이 들었다. 형이 왜 그 자리에 있지? 확보된 신상에 의하면 기자라고 기재되어 있었지만, 왜 폭격 지역에 그 시간까지 머물렀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다 설명할게, 원빈아.”

  “어떤 것부터 설명할 건데요.”

  “⋯⋯.”

  “형이 전쟁터에 나가서 사진 찍는 기자라는 거? 아니면, 형이 전쟁터에 그림을 그려서 반전 운동을 하고 있다는 거?”


  이미 다 알아보고 왔다. 성찬이 뭘 하느라 그곳에 남아 있던 건지.

  명문대 회화과를 나온 성찬은 붓 대신 카메라를 들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사진 찍는 재능은 타고난 덕에 사진기자를 업으로 하게 되었다. 사진을 찍고 육하원칙에 의해 정리만 해서 데스크에 보내는 게 업무라는데, 아직도 글을 쓰는 건 어려워서 많이 배워야 한다며 부루퉁한 입술을 내놨었다. 해외 출장이 잦은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도 성찬의 직업이 사진기자였기 때문이었다.

  그 해외 출장이 전장이라면, 원빈에게 있어 다른 문제가 되었다. 셰퍼드가 확보한 신상에서 성찬이 종군기자라는 걸 확인했을 땐 뒤통수가 얼얼했다. 성찬이 형이 여태껏 전쟁터에 사진을 찍으러 다닌 거라고? 나한테 그 어떤 언질도 주지 않고? 그러나 배신감은 잠시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찍힌 사진 전송 시각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다는 건 제게 다른 길을 안내했다.

  원빈은 뒤돌아보는 법 없이 앞만 보고 달렸고, 눈앞의 단서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성찬의 가방 속 스프레이가 결정적으로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일에 필요하지도 않고, 호신용 무기도 아닌 스프레이. 벽에 낙서할 때나 쓰는 스프레이를 왜 성찬이 가지고 있었을까.

  스프레이 제품명을 검색했던 원빈은 곧바로 다른 키워드를 찾았다. 전쟁 벽화만 검색해도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가장 최근의 기사는 폭격으로 인해 터진 수도가 만든 물길에 목을 축이는 듯한 고양이 그림에 대한 것이었다. 수도로부터 엉망으로 오염된 물이 흘러 진창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아무 죄 없는 생명이 희생되는 전쟁의 실상이라며 그림을 칭송했다. 그 그림이 새겨진 곳은 성찬의 직장 클라우드에 찍힌 마지막 위치였다.

  폭격이 일어난 시각은 10시 30분경, 성찬의 마지막 사진 전송 시각은 16시 27분. 비어 있는 6시간에 고양이 그림 위치를 더해 퍼즐을 맞췄다. 추론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성찬이 그 그림을 새겼거나, 그 그림을 새기는 것을 도왔거나. 가방 속의 스프레이는 위 가정의 전자에 해당하는 단서가 됐다. 다시 말해, 성찬이 그 그림의 주인이다.


  올 것이 왔다는 듯 표정을 굳힌 성찬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이미 다 알고 온 것 같은데⋯⋯. 그래도 설명하자면, 나는 전쟁 사진을 찍는 기자야. 그리고 전쟁을 반대해서 전쟁터에 그림을 그린 것도 맞아.”

  “전쟁을 반대해서 전쟁터에 그림을 그렸다고요?”

  “어.”

  “그럼 뭐가 달라져요?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형은 진짜, 고작 그림으로 전쟁을 멈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형 똑똑하잖아요. 이런 그림으로 멈출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지금 당장 달라질 수는 없겠지. 그러니까 알려야지. 이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


  답답한 소리. 숨을 구했음에도 속이 턱 막혔다. 전쟁은 민간인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다 위에서 결정 나는 것이다. 자국민이든 외국인이든 피를 바쳐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필요한 이권을 찬탈하는 게 바로 전쟁이다. 일개 시민이 전쟁을 반대한다고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이다.

  그런데 정성찬은 일부러 전장을 찾아다녔다. 전쟁 사진을 찍어 실상을 알리고, 전쟁을 반대하는 그림을 그려 넣기 위해.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면 차라리 다행인 지옥에 성찬이 제 발로 뛰어들었다. 사지의 끝부터 피가 식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성찬은 이 일을 하고 있던 걸까. 언제부터 제게 숨기는 게 생겼나. 솔직할 수 있는 건 성찬의 특권이라고 여겼다. 제게 사심도 없고, 숨길 것도 없는 사람이니까. 그런 그 형은 언제부터 제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되었나. 언제부터 그 형은 제게 거짓말을 덧씌우고 있었나. 그렇다면 저는 언제부터, 그 형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넘어가게 되었나.

  김해에서 재회했던 날, 성찬이 축구 하다 십자인대가 끊어져 전역하게 된 거라고 했을 때부터 성찬은 줄곧 거짓말하는 티를 내왔다. 숨기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제게 숨기고 싶은 게 있다면 굳이 알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물었어야 했다. 집요하게 묻고 따졌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 험한 길을 성찬이 굳이 걷지 않았을 텐데.

  질문을 던진 건 원빈이었으나, 화살을 맞은 것도 원빈 자신이었다. 대개의 외사랑이 그러하듯, 원빈은 사랑도 상처도 홀로 감내해야 했다.


  “난 형 같은 사람이 제일 싫어요. 신념이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목숨 귀한 줄도 모르고 무작정 전장에 뛰어드는 사람이 제일 싫어. 싸울 줄도 모르면서, 여기가 얼마나 험한 곳인지도 모르면서.”

  “⋯⋯.”

  “형은 모르겠죠, 형이 살 수 있던 것도 천운이 따랐다는 거. 보통 민간인은 피랍되면 시체로 나와요. 걔네들은 도망칠 때 인질들 다 죽이고 도망친다고요. 하, 씨발, 진짜⋯⋯.”

  “원빈아.”

  “형 진짜 싫다⋯⋯.”


  거짓이다. 싫어하고 싶어도 멋대로 싫어할 수 없으며, 미워하고 싶어도 맘대로 미워할 수 없다. 거짓을 말한 마음이 발끝으로 내려앉는 건 불가항력이다. 마음의 중력이 이끄는 대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일렁이는 울음을 참기 위해 연신 깊게 내뱉은 한숨이 텁텁했다. 그럴수록 이성은 마음과 엉켰다. 성찬이 어떤 대의를 향하는지 알아서, 성찬이 하는 일은 결국 옳아서, 성찬은 언제나 그렇게 눈부시게 찬란해서, 그런 성찬을 응원하고 싶어져서. 사랑은 이래서 문제였다. 그가 어떤 일을 하든 다 이해하고 품고 싶어지게 했다. 설령 그 길의 끝이 죽음일지라도 그게 그의 선택이라면, 그걸 받아들이는 것도 짝사랑하는 자의 몫이었다.

  그래도 싫었다. 김해로 오지 못하는 정성찬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바에야 김해로 오지 않는 정성찬을 그리는 게 나았다. 살아는 있어 달라고, 제발 숨은 붙어 있어 달라고 빌던 기도가 다시 원빈을 뒤덮었다. 감정에 휘말린 자리에 솔직해질 수밖에 없는 시간이 도래했다. 고개를 든 원빈은 성찬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형, 나는⋯⋯.”

  “⋯⋯.”

  “나는 사람을 구한 적이 없어요.”

  “⋯⋯.”

  “내가 구한 건 시신이었어요.”


  눈에 가득 찬 물기 때문에 시야가 일렁거려 성찬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제 몫을 다 하지 못한 직업이 창피하지도 않았다. 성찬을 멈추고 살릴 수만 있다면, 원빈은 지금 당장 뭐라도 할 수 있었다. 설령 그게 정성찬을 다시는 못 보는 방법이라고 할지라도.


  “저는 형이 다치지도, 죽지도 않았으면 좋겠어요.”

  “⋯⋯.”

  “형은 제가 처음으로 구한 사람이고.”

  “⋯⋯.”

  “제 첫사랑이거든요.”


  거짓 없는 고백이 눈물을 타고 새어 나왔다. 아마 이제 다시는 성찬이 형을 보지 못하겠지. 그럼 눈에 제대로 담아두기라도 해야 하는데 눈물이 눈치도 없이 자꾸 고이는 바람에 성찬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것조차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든, 그것은 오롯이 원빈이 감당해야 할 것이니까.

  한동안 말이 없던 성찬은 원빈의 두 손을 끌어와 맞잡았다. 맞잡은 손이 따뜻했다. 그의 타고난 성정과 마찬가지로.


  “원빈아, 넌 사람을 구하지 않은 적이 없어.”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예요. 시체밖에 못 구했다니까⋯⋯.”

  “네가 구한 건 시신이 아니야.”

  “⋯⋯.”

  “유족이지.”

  “⋯⋯.”

  “네가 그 시신을 구하지 않았으면 장례도 못 치렀을 거고, 유족들도 마음 편히 보내주지 못했을 거야.”


  눈물을 가둔 둑이 터졌다. 얼마 만에 소리 내어 우는지도 모르겠다. 제가 듣기에도 이상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울고만 있는 원빈이 타의에 의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맞잡은 두 손을 잡아당긴 성찬은 제게 바싹 붙은 원빈을 품에 가둬 토닥였다. 끌어안은 폼은 서툴러도 성찬은 옷이 젖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원빈을 제 가슴에 기대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성찬의 가슴에 기대 눈물을 쏟아냈다.


  눈물을 다 쏟아내 감정이 가라앉고 나서부터는 한동안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따뜻한 품이나 머리 위에서 흩어지는 숨, 등을 거듭 토닥이는 손바닥. 온통 다 간지러운 것들 뿐이었다. 게다가 방금 제가 성찬을 첫사랑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원빈아.”

  “⋯⋯ 네.”

  “너 귀 빨개졌다.”


  주먹으로 성찬의 가슴을 아프지 않게 밀었지만, 성찬은 꿈쩍도 하지 않고 외려 더 꼭 끌어안았다. 숨, 숨 막혀요. 가슴 안에서 작게 속삭이자 성찬의 굳건했던 팔이 살짝 풀렸다. 품에 갇힌 채로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성찬의 가슴에 눈물을 벅벅 닦았다. 으아아, 간지러워. 목을 짧게 움츠린 성찬이 날숨에 웃음을 섞어 공중에 퍼뜨렸다.


  똑똑- 두 번의 노크가 들렸다. 정성찬 씨, 여기 계십니까? 잔잔히 늘어졌던 공기가 순식간에 압축되었다. 표정을 거둔 원빈이 급하게 품에서 벗어나 성찬의 입을 검지로 막았다. 그 자리에서 성찬이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굳어있자 원빈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성찬의 소지품을 조심스레 제 관물대에 처박고 성찬을 제 등 뒤에 숨긴 채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셰퍼드는 원빈과 눈을 마주하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원빈에게 비키라는 듯 턱짓으로 옆을 가리켰지만 원빈은 그 자리에서 꿋꿋하게 버티며 경례했다. 셰퍼드의 앞에는 현지 경찰복을 입은 네 명의 경찰이 나란히 원빈을 마주했고, 그 옆으로는 대대장이 있었다. 대대장이 고개를 기울이자 원빈은 하는 수 없이 걸음을 비켜 성찬의 옆에 섰다. 한 발 앞선 대대장이 성찬에게 태블릿을 건넸다. 화면엔 무너진 건물 벽에 새겨진 고양이 그림이 떠 있었다.


  “현지 경찰이 수사 협조 요청했습니다. 이 건물 낙서에 대해 아는 바 있습니까.”

  “혹시 뭐 때문에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공공기물 손괴로 이 낙서한 사람을 잡아야 한다고 합니다. 정성찬 씨가 그곳에 있던 걸로 확인돼서 경찰서에서 따로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머리가 재빠르게 굴러갔다. 이 전쟁을 시작하게 된 건 현재 이 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지도부였다. 그 지도부의 편에 서 있는 경찰이 그림의 주인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는 건 공공기물 파손 같은 어쭙잖은 이유가 아닐 것이다. 그림은 전쟁에 반대하는 걸 내포하고 있고, 그 그림은 국제 사회에서 끝없이 화제 되고 있는 것이니까. 게다가 제 아무리 분쟁 지역이라고는 해도 이 시간에, 다른 일로도 바쁠 경찰이 찾아왔다는 건⋯⋯.

  직감이 끼어들었다. 이대로 성찬을 보내게 되면, 다시는 못 보게 될 것이라는 동물적인 감이 뒤통수를 스쳤다. 이 나라 지도부는 이미 그 그림에 유감이 있고, 그 그림을 그린 성찬을 무사히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성찬이 머뭇거리자 원빈은 슬쩍 걸음을 성찬의 앞으로 옮겼다. 그 꼴을 지켜보던 셰퍼드가 낮게 속삭였다.


  “야, 키티야. 너 허튼 생각하지 마라.”

  “죄송합니다.”


  허리춤에 있던 총은 1초도 채 되지 않아 장전된 채 원빈의 손아귀에 잡혔다. 총구는 문밖의 네 명의 경찰 중 하나를 향했다. 경찰들도 원빈을 향해 일제히 총을 들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총을 겨누며 대치했다.


  “이거 명령 불복종입니다, 박원빈 중사. 지금 당장 화기 해제하고 내려놓습니다.”

  “죄송합니다, 대대장님. 외교부 올 때까지만 버티겠습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총 안 내려? 너 이거 그냥 징계도 아니고 징역 감이야, 알아?!”

  “자국민 보호가 우선입니다. 이대로 가면 보호받지 못할 겁니다.”


  맹렬히 화를 낸 셰퍼드는 삿대질하던 손을 제 허리로 거뒀지만, 원빈은 셰퍼드의 손이 보조화기를 짚고 있음을 파악했다. 오른손잡이인 셰퍼드가 권총을 꺼내 들게 될 경우, 원빈의 기준에서 왼쪽에 있는 경찰을 쏠 확률이 높았다. 한두 발씩 뒤로 물러서 성찬과 경찰 사이 간격을 넓힌 원빈은 제 오른쪽에 있는 경찰에게 총구를 겨눴다. 오른쪽을 먼저 쏜 다음, 제게 겨눠진 중앙의 총을 쳐낸다. 여차하면 왼팔은 버린다. 고작 몇 초 안에 해야 하지만, 못 해낼 것도 없었다.


  “박원빈 중사.”

  “네, 대대장님.”

  “원하는 게 정성찬 씨의 안전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럼 외교부 직원과 우리 군을 붙여 정성찬 씨와 함께 보내면 되겠습니까.”

  “⋯⋯ 네, 그렇습니다.”


  원빈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으나 합리적인 제안에 수긍했다. 차분하게 원빈을 설득한 대대장은 멀리서 구경이나 하고 있던 부사관들을 손짓으로 불렀다. 그들이 오기 전 셰퍼드에게 성찬의 안위를 맡겼다.


  “강서언 상사.”

  “예, 대대장님.”

  “휴게실에서 정성찬 씨와 대기한 후 외교부 직원이 오면 함께 경찰서에 다녀옵니다.”

  “예, 알겠습니다.”


  셰퍼드는 성찬에게 향하기 전 먼저 원빈의 총을 덮었다. 위에서 찍어 누른 셰퍼드의 힘에 원빈은 곧게 펴고 있던 제 팔을 내리고 장전을 풀었다. 그대로 셰퍼드에게 뺏긴 총기는 분해되어 다른 부사관에게 전해졌다. 클립을 풀고 부무장을 해제한 원빈은 덤덤히 처분을 기다렸다. 그 사이 성찬은 원빈을 지나쳐 셰퍼드를 따라 걸었다.


  “박원빈 중사는 이 시간부로 보직 해임하고 구금합니다. 추후 군사 재판에 회부될 수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대대장이 떠나갈 때까지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원빈은 성찬의 뒷모습을 힐끗댔다. 자꾸 저를 향해 돌아보던 성찬은 기어코 입 모양으로 말을 걸었다. 난 괜찮아.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원빈이 표정을 고치고 부사관을 따라 구금될 곳으로 나아갔다.

  징계 장소가 따로 없는 파병지라 부식 창고에 갇힌 원빈은 괜히 제 손을 쥐었다 폈다. 방금 성찬이 저를 지나칠 때 꼭 잡았던 손힘과 온기를 기억하기 위해.




* * *




  외교부 직원 하나와 군인과 함께 경찰서를 나온 성찬은 단전에서 끌어올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내뱉는 대로 입김이 생기는 추위에 목에선 헛기침이 맴돌았다.

  경찰들은 전쟁터에 벽화를 그린 게 성찬인지 묻지 않았다. 그저 목격 여부를 물었다. 성찬은 적당히 둘러댔고, 외교부 직원이 적당한 뉘앙스로 통역했다. 경찰들이 더 캐묻고 싶어 하는 게 보였지만, 옆에 단단히 서 있는 군인의 눈치를 보다 취조를 접었다.


  다 원빈의 덕이었다. 박원빈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경찰들에게 총을 들고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정성찬은 무사히 나올 수 있던 것이다.

  군법대로라면, 원빈이 군복을 벗어야 할 수도 있다. 명령 불복종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아직도 외우고 있는 군형법 제8장 ‘항명의 죄’는 징역부터 시작이었다. 상명하복의 세계에서 하극상은 그런 취급을 받았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원빈이 저를 위해 반기를 들었다.

  원빈이 징계받을 걸 아는데도, 미친놈 같지만 자꾸 웃음이 샜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원빈은 단 한 번도 반항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선배나 상급자가 정해준 길을 벗어난 적이 없던 원빈이, 계급이 명확한 체육계와 군부대에 차례로 몸을 담갔던 원빈이 저를 위해 모든 것을 거슬렀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선사했다.

  그러니까 이거 사랑인 거잖아. 그렇잖아, 박원빈. 사랑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일이잖아.


  앞질러 가던 강서언 상사는 성찬을 돌아보더니 잠시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막사 앞에서 얌전히 기다린 성찬의 앞에 다시 나타난 서언은 흰색 편지 봉투를 들고 있었다. 급하게 돌아와 숨을 고른 서언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장착했다.


  “키티는 제가 아끼는 앱니다. 저희 팀 모두가 아낍니다. 어린 게 힘든 내색도 안 하고, 명령에 잘 따르니 예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별일 없는 한, 아마 이곳에 오래 버틸 겁니다.”

  “⋯⋯.”

  “그런 키티가 당신 때문에 명령을 어겼습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애가, 당신 때문에. 보직 해임되고 부식 창고에 갇혔다고요.”


  아직 화가 나 있는 듯한 강서언 상사는 부식 창고를 딱딱 찍어 말했다. 꼭 지금 원빈의 위치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처럼. 예상이 어긋나지는 않은 모양인지 강서언 상사의 눈길이 제 오른쪽 뒤로 꽂혔다. 그쪽으로 가야 부식 창고가 나오는 듯했다.

  짧게 한숨을 뱉은 서언이 아무도 없는 사위를 둘러보다 성찬의 손에 슬쩍 편지를 찔러 넣었다. 누가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편지를 몰래 주머니에 집어넣은 성찬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기⋯⋯.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했습니다.”

  “나중에 키티 보면 베어 팀장님이 많이 애쓰셨단 얘기나 전해주십쇼.”


  가뿐하게 돌아선 서언이 막사로 들어가고, 성찬은 근방에서 가장 밝은 가로등을 찾았다.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암야에 한 줄기 빛 아래에서 꺼낸 흰 봉투에는 단정한 글씨체로 ‘성찬이 형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흰 봉투를 보자마자 알아챘다. 언젠가 제가 원빈에게 써달라고 졸랐던 유서였다. 써달라고 떼썼으면서 받긴 싫다고 했었다. 원빈이 죽기 전까지 제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서 제 이름으로 된 유서를 써달라고 고집부렸다. 그러나 영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았으면 해서 유서가 제게 올 일이 없길 바랐다. 이렇게 두 사람 다 숨 붙어 있을 때 읽게 될 줄은 몰랐지만.

  서언이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게 떨리는 손으로 봉투에 갇혔던 편지지를 꺼냈다. 작전 때마다 같은 내용으로 하나씩 쌓여 관물대에 항상 여분이 있다는 사실을 성찬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안녕, 성찬이 형. 저 원빈이에요. 이 편지가 형한테 가면 형이랑 했던 약속 하나는 지킨 거예요. 유서 꼭 형 이름으로 해달라고 했던 거요. 잘 다녀오라고 했던 약속은 못 지켰지만.

형, 저⋯. 사실 거짓말 했어요. 사람 많이 구한다고 했던 거 다 뻥이에요. 저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을 더 많이 옮겨요. 이젠 하도 많이 봐서 감흥도 없어요. 저도 그냥 그렇게 돌아온 거겠죠. 아예 없을 수도 있고요. 상태 깨끗했으면 좋겠는데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나 입관하는 거 보지 마요.

형은 저 보고 맨날 말랑말랑 박원빈이라고 하지만, 저는 형만큼 물렁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형이 기대는 건 사랑, 평화, 희망 이런 물렁물렁한 것들이잖아요. 십자인대 끊어진 건 안타깝지만 형이 이 꼴 안 봐서 다행이란 생각은 들어요. 애초에 형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거, 저는 알고 있었거든요.

형과 제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더 어울리고 싶었고, 더 어울리기 싫었던 날도 있었어요.

근데 형은 문 걸어 잠그면 꼭 그걸 부수고 들어오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고마웠어요. 가끔 좀 성가시긴 했지만⋯. 혼자 좀 우울해지려고 했는데, 형이 그 틈을 안 줬어요. 안 줘서 제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어요. 형이 물렁해서 제가 좀 기댔어요. 덕분에 따뜻했고, 덕분에 어둠에만 있지 않았어요.

이제 형은 김해로 올 일이 없겠죠? 그러다 점점 잊어갈 거예요. 제 죽음이 너무 슬퍼지지 않는 날이 오면, 아, 맞다, 그런 애도 있었는데, 하는 날이 오면 꼭 꽃 주러 와주세요. 국화 말고 장미요. 형한테서 나는 향이 장미 향이라는 걸 알게 되고 나서부터는 장미가 좋아졌거든요. 그럼 형이 왔구나 하고 알아볼게요.

죽은 마당에 무책임한 말이지만, 지금이 아니면 못 할 것 같아요. 좋아했어요. 진심이에요.

 



  한 자 한 자 소중히 아껴먹던 성찬은 성미를 못 이기고 속도감을 붙여 읽어나가는 글자들을 옅게 읊었다. 남은 글자가 줄어들 때마다 심장의 고동이 그 어떤 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바로 귓가에 심장이 뛰는 듯했다. 이제 온몸이 심장이 된 것만 같았다. 편지를 쥔 손끝도, 편지를 읊조리던 목구멍도, 편지를 한 글자씩 소화하던 뱃속도 두근거렸다. 심장의 달음박질에 호흡이 밭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혈류가 흐르는 감각이 선연했다.

  벅찬 감정은 발을 공중으로 띄웠다. 땅을 딛는 발에 힘이 들어갔다. 셰퍼드가 알려준 방향으로 뛰다 보니 금세 부식 창고가 보였다. 이 와중에 저를 향한 고백이 구겨지지 않도록 유서를 쥔 손은 약하게 힘을 조절했다.

  다만 너무 대책 없이 뛰는 바람에 그 앞을 사람이 지키고 서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 당장 박원빈을 봐야 한다는 마음으로 날뛰던 속도가 점점 가라앉았다. 모랫바닥과 성찬의 발이 맞닿은 소리가 점점 창고에 가까이 가자 보초를 맡고 있던 이도 성찬을 인식했다. 원빈과 잠시만 이야기하겠다고, 아주 잠깐이면 된다고 설득하려던 차에 보초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정성찬 씨, 맞습니까?”

  “네, 제가 정성찬인데, 누구세요?”

  “델타 팀 팀장 사건웅입니다.”


  아, 베어 팀장님. 성찬은 창고 앞을 지키고 있던 이가 아까 서언이 말한 베어 팀장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성찬이 설득의 말을 고르고 있을 때, 베어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제가 정성찬 씨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은 10분입니다.”


  10분이면 충분하다. 베어가 먼저 제안한 10분에 성찬은 곧바로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재차 허리를 굽히자 베어는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를 받아들였다. 문으로 한 발 내딛는 동시에 베어는 성찬의 앞을 제 팔로 가로막았다.


  “문은 잠가뒀으니 창문으로 가십시오.”

  “아, 감사합니다.”


  그대로 뒤로 돌아선 성찬은 창고를 빙 둘러 창문을 찾았다. 정성찬 씨. 등 뒤에서 베어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베어는 바른 자세로 서서 성찬을 똑바로 바라봤다.


  “정성찬 씨는 저를 모르겠지만, 저는 정성찬 씨를 압니다.”

  “⋯⋯.”

  “늦었지만, 공사 선배로서 미안합니다.”


  지긋한 어른이 건넨 뜻밖의 사과에 성찬의 몸이 굳었다. 정자세에서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 진심으로 사과한 베어는 느릿하게 허리를 다시 펴고 그곳을 떠났다. 약 10년 전 고장 났던 무릎이 다시 멀쩡해진 느낌이 들었다. 아무런 사과도 받지 못한 성찬의 해묵은 세월이 씻겨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박원빈,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구나. 제가 겪은 부조리로 인해 은연중에 내재하던 원빈을 향한 걱정도 함께 해소되었다. 지금껏 흐릿하게 저의 무릎을 감싸고 있던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진정한 자유이자 해방이었다.


  감동을 안은 성찬이 창문을 두 번 두드렸다. 안쪽에서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재차 창문을 두드린 성찬이 창문 틈새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원빈아, 안에 있어?”

  - ⋯⋯ 성찬이 형?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에 성찬의 심장이 다시금 뜀박질 쳤다. 발소리가 점점 성찬을 향했을 때, 성찬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너 혹시 나 아직 좋아해?”


  발소리가 우뚝 멈췄다. 왜 대답이 없지, 초조하게. 그렇다면 확인 대신 제가 먼저 고백하면 그만이다.


  “나는 너 좋아해. 고등학생 때부터 쭉.”

  - ⋯⋯ 형이 절, 좋아한다고요?

  “나 너 좋아해. 한 번도 변한 적 없어.”


  은은하게 들리는 발자국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제 고백에도 원빈은 망설이는 모양인지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두렵고도 설렜다. 오늘의 담화든, 어제의 유서든, 원빈은 저를 놓을 생각으로 마음을 고백한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창문 바로 앞에서 걸음 소리가 멈췄다. 원빈이 입을 다문 몇 초가 성찬에겐 억겁과도 같았다.


  - 형은 저랑 같은 마음이 아닐 거예요. 저는 형이랑⋯⋯.

  “나 너 좋아해. 같이 있으면 손잡고 싶고,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


  벌컥 창문이 열렸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땡그랗게 뜨고 목까지 새빨개진 원빈의 얼굴이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무슨 그런, 그런 말을⋯⋯. 밖에서, 사람들 다 있는데⋯⋯.”

  “여기 우리밖에 없어.”


  저 때문에 징계받느라 창고 안에 갇혔다는 걸 알면서도 원빈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소부터 튀어나왔다. 저 하나 때문에 오늘 원빈은 몇 번을 궤도에서 벗어났는가. 징계 중인 원빈이 열어젖힌 창틀 바로 앞까지 전진했다. 뒷걸음질 치며 피할 줄 알았던 원빈도 몸을 잠깐 움츠릴 뿐,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너 아직 대답 안 했어. 지금도 나 좋아해?”


  이제는 확신에 가까운 질문을 던졌다. 마주 본 눈동자에 서로만이 담겼다. 잘게 흔들리는 동공과 일렁이던 빛이 어느 순간 멈췄다. 시야에 담긴 모든 것들이 슬로 모션처럼 보였고, 그 모든 프레임이 뇌리에 박혔다. 성찬은 직감했다. 이 순간을 머릿속에 인화해 평생 간직하게 될 것이라고.


  “네, 좋아해요.”

  “⋯⋯.”

  “저도, 한 번도 변한 적 없어요.”


  성찬의 상체가 네모난 창문 테두리를 넘었다. 말랑한 입술에 더 말캉한 입술이 닿았다. 겹친 입술의 온기가 같았다. 마치 서로의 마음이 같다는 걸 증명하듯 누구 하나 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살짝 고개를 비틀자 입술이 더없이 맞물렸고, 맞물린 입술 사이로 마음을 나눴다. 한 품 가득 원빈을 끌어안자, 원빈 또한 바라던 바였다는 듯 고개를 위로 젖히며 두 손으로 성찬의 하악을 붙잡았다. 누구랄 것 없이 얼굴 위로 흩어지는 숨이 가빴다. 곧 뱉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뛰는 심장이 맞닿은 가슴 안에서도 똑같은 박자로 뛰고 있었다. 잇새를 가른 혀가 서로의 것을 감고 타액을 섞었다. 단단히 맺은 마음이 달콤하고 달가웠다.


  사랑이 맞닿았다.

  박원빈이 궤도를 이탈하고, 정성찬이 테두리를 넘어서야 비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