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ART VIDEO AFTER

어떤 평범한 날
by. 흑임자

어떤 평범한 날


성찬의 첫 기억은 보육원 2층 침대에서 시작한다. 아마 어딘가가 아팠던 것 같다. 식은땀에 몸이 잔뜩 젖은 채로 일어난 다섯 살짜리 어린애 옆에는, 진득하고 축축한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불현듯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 음습한 어둠은 성찬의 생을 진득하게 따라다닐 것이라는 확신이. 

"성찬아 넌 매일 햄버거만 먹냐, 어째."

"상김보단 나은데요."

급하게 먹느라 발음이 질질 샜다. 성찬은 콜라로 겨우 햄버거 덩어리를 삼켰다. 어두컴컴한 사위에 익숙해진 손이 저절로 물티슈를 찾아 꺼내 닦았다. 정형사는 쯔쯧, 혀를 차며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뭐가 미안하대요. 물티슈로 손을 닦아도 여전히 찝찝했다. 너 오늘 생일이라며? 그거 진짜 생일도 아닌데요, 뭘. 퉁명스레 말을 뱉으며 뒷머리를 헤집었다. 인마, 그래도⋯⋯.

"어, 어. 저기 박성한 아니에요?"

"야, 맞네! 나 먼저 간다!"

나이스 타이밍이라고 그 당시엔 생각했다. 이 새끼만 잡으면 저녁이나 한번 먹자, 와이프가 너 오면 준다고 비싼 소고기도 사놨더라. 정형사 손에 이끌려서 그의 집에 들락날락한 지도 벌써 1년이 넘어갔다. 오빠, 오빠 하면서 손을 잡는 어린애의 따뜻한 손도 포함해서 말이다. 떠들썩한 가정집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8평짜리 원룸에서 혼자 저녁 먹는 게 더 어색해질 무렵. 끈질긴 외로움은 잊지 말라는 듯 성찬의 목덜미를 잡아채었다.

성찬이 시간이 지났음을 인식했을 때는 다른 형사의 괜찮냐는 문자를 본 후였다. 그리고 되살아난 기억들. 고여 있던 핏물, 재킷으로 누르는 데도 울컥울컥 치솟았던 선혈, 사람들의 비명, 시끄러운 앰뷸런스 소리. 장례식장에 멍하니 앉아 있던 성찬의 손을 잡아주던 따뜻한 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성찬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살면서 그렇게 많이 울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며칠 간의 긴 잠을 자고 일어나니,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났다. 처음으로 살아 있는 게 쪽팔렸다.


***


쉼 없이 현관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크 소리. 성찬 총각, 잘 지내지? 성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윗집에 거주하는 건물주는 주에 한 번은 성찬의 집 문을 두드렸다. 한 번도 대답한 적은 없었다. 오랜만에 틀어본 TV에서 청년층의 고독사 뉴스를 보았다.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구나. 어둠 속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창문 밖이 어두워졌다가 푸르스름하게 변할 때쯤, 성찬은 집 밖을 나왔다. 

뒷골목으로 가 담배 하나를 피웠다. 대학가도 오피스촌도 아닌 동네라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골목 맞은편에는 이 근처에서 유일하게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이 있었다. 취객이 씩씩거리면서 욕하며 편의점 밖을 나왔다. 창 너머로 입을 꾹 다물고 어질러진 상품들을 정리하는 알바생이 보였다.

볼 때마다 울멍울멍한 눈이면서, 절대 눈물을 안 보였다. 무의식중에 뚫어져라 바라보았는지, 알바생과 눈이 마주쳤다. 피할 타이밍을 놓쳤다. 얼마간 눈을 맞췄을까. 그쪽에서 먼저 시선을 피했다. 움직임이 부산스러웠다. 당황해하는 걸 처음 보는 것 같다.

픽,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성찬은 깨닫지도 못했다. 정형사가 죽은 지 처음으로 웃었다는 사실을. 


***


그 후 성찬은 건너편 편의점 안을 훔쳐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매번 같은 취객에 알바생은 당황해했다. 경찰을 부를 새도 없이 짧게 진상을 부리고 가는 듯했다. 성찬은 저런 새끼들을 잘 알았다. 자기 인생 꼬인 것을 만만한 사람에게 푸는 인간들. 성찬이 잡았던 대부분의 범죄자가 저랬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까. 천장을 보며 멍하니 누워 있는데 밖에서 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동네에선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평소였다면 그냥 넘겼겠지만, 마침 담배 피우러 나갈 시간이었다. 난 담배 피우러 나가는 거다⋯. 변명처럼 덧붙인 성찬은 신발 뒤축을 구겨 신은 채 집 밖을 나섰다. 

편의점 안은 이미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매일 보아 익숙해진 남자가 알바생을 향해 위험하게, 깨진 소주병을 흔들고 있었다. 계산대 위에 조각 난 청록빛 소주병이 편의점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야, 너도 내가 만만하냐?"

"아뇨, 손님."

"만만한 게 맞네. 너 오늘 아주 잘 걸렸다."

남자는 알바생의 멱살을 잡더니 목에 날카로운 소주병을 들이밀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알바생의 목에 선혈이 배어 나왔다. 그걸 본 성찬의 눈이 돌았다. 소주병을 든 손을 뒤로 끌어내어 손에 있던 흉기를 떨어뜨리게 했다. 상황 파악이 안 된 남자가 멍청하게 눈만 끔벅거릴 때, 성찬은 남자의 팔을 잡고 들어 올려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남자의 비명을 뒤로하며 성찬은 알바생을 쳐다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아⋯."

"잡고 있을 테니까 얼른 경찰 불러요."

성찬의 아래에서 남자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뱉었다. 전화를 걸던 알바생이 이내 핸드폰을 내려놓고 화면을 껐다. 성찬이 의아해 알바생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지금껏 멀리서만 보았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아⋯. 왜 멋대로 대학생이라고 생각했을까. 덜 자란 턱과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불안함에 커진 눈과 물어뜯은 입술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목에 빨간색 빗금 상처가 생긴 알바생은 많이 봐줘봤자 고2 정도로 보였다. 성찬의 다리 아래서 버둥거리던 남자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신고를 어떻게 하게? 미성년자가 야간 알바하는 걸 경찰이 뭐라고 할까? 알바생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개소리하네. 내가 얘 형인데."

"뭐, 뭐?"

"아저씨, 내가 얘 형이라고. 보호자 동의 아래 알바하는 건 가능하다는 거 아세요?"

당황했는지 남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알바생은 고개를 들고 그제야 성찬을 쳐다보며 입을 달싹거렸다. 쉿. 성찬이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란 표시를 했다. 진상짓을 계속해도 경찰을 안 부른 걸 보고 부모 몰래 야간 알바한다고 짐작했을 것이다. 성찬은 다리에 힘을 풀고 억지로 남자를 일으켰다. 경찰서에 가자고 이야기하니 그제야 잘못했다고 먼저 빌었다. 저 말고 얘요. 남자가 당황해하더니, 우물쭈물 미안하다고 먼저 말을 건넸다. 한 번만 더 걸리면 그땐 바로 경찰서행이라고 성찬이 낮게 읊조리니 줄행랑을 쳤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고 성찬은 간만에 움직여 뻐근해진 목덜미를 문질렀다.

"저, 저기⋯."

"아."

"감사합니다."

알바생이 고개를 깊게 숙이며 감사를 건넸다. 감사 인사를 받고 싶어서 도와주었던 건 아니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불의의 순간을 보면 못 넘어가는 직업병이 도진 것이었다. 성찬은 볼을 긁적이며 괜찮다고 말했다. 알바생은 고개를 들었다. 눈에 물기가 한가득이었다. 아닌가, 눈이 커서 그럴까. 성찬은 알바생 얼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였다. 가보겠다고 인사하고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조금 거리가 멀어져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알바생은 성찬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그 눈이, 얼굴이, 목소리가 낯설지 않아서 성찬은 하마터면 괜찮냐고 물을 뻔했다.


***


성찬은 이제 그 편의점 쪽으로는 발도 들여놓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생각은 했는데 발이 저절로 그 골목길로 향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의 습관 때문이었다. 성찬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려 애썼다. 시선이 저절로 편의점을 향하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바생은 목에 밴드 하나만 덜렁 붙인 채, 포스기 앞에 서 있었다. 손님도 몇 없건만 가만 보면 꾀부릴 줄을 몰랐다. 쓰레기통 주변을 정리하러 온 알바생과 딱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저쪽에서 먼저 고개를 숙였다. 성찬도 얼결에 마주 손을 흔들었다. 담배 하나를 더 피우려는데 돛대였는지 나오는 게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근처 다른 마트로 사러 갔을 텐데 성찬은 그 편의점으로 향했다. 

어어. 당황한 모습이 통창으로 그대로 보였다. 성찬이 문을 열기도 전에,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말했다. 성찬은 그냥 고개만 숙였다. 살 것도 없는데 냉장고 앞을 기웃거리다가 계산대 앞으로 가서 담배 이름을 말했다. 알바생은 계산대 아래를 뒤적이더니, 계산대 위에 영 다른 걸 올려놓았다. 

"이게 뭐예요?"

"바, 바나나 우유요. 담배 자주 피우시는 것 같아서."

"⋯⋯."

"맛있어요."

알바생은 성찬이 거절할 줄 알았는지, 손수 빨대까지 꽂아서 성찬 쪽으로 밀었다. 고마움의 표시일까. 뭐가 됐든 성찬은 별로 받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호의를 받는 평범한 일상이 역하게 느껴졌기에. 성찬은 거절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뻔뻔하게 건넨 줄 알았건만 알바생의 귀가 새빨개져 있었다. 성찬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손톱 거스러미를 잡아 뜯고 있었다. 성찬은 바나나우유를 가져가 한 입 쭉하고 들이켰다. 달콤한 향이 입안을 메웠다. 솔직히 너무 달아서 취향은 아니었다.

"맛있네. 고마워요."

"네에⋯."

"다친 곳은 좀 어때요?"

"아, 별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알바생이 이야기하면서 목을 매만졌다. 달랑거리던 밴드가 떼어지더니 상처 흉터가 그대로 드러났다. 연고도 안 바르고 밴드만 붙인 게 분명했다. 신경 쓰이게 하네. 성찬은 그렇게 생각하며 편의점을 나섰다. 평소 같았으면 몇 대는 더 피우고 들어갔을 텐데, 이가 썩을 것처럼 단내 나는 음료를 반 정도 비우니 담배 생각이 싹 사라졌다. 성찬은 집 대신 약국으로 향했다. 상처 연고와 흉터용 밴드를 샀다.

해가 지며 집 안이 저녁노을로 인해 연주황색으로 물드는 걸 멍하니 쳐다보았다. 책상에 놓아둔 텅 빈 바나나우유가 자꾸 눈에 거슬렸다. 어서 새벽이 왔으면 좋겠다. 성찬은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알바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


컵라면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알바생이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성찬에게 인사했다. 앙,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성찬은 지폐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잔돈을 건네주는데 손가락이 스쳤다. 그 손이 차가워서 성찬은 재빨리 손을 피했다.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라면을 먹으며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연고와 밴드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때 알바생이 성찬 쪽으로 다가오더니, 테이블 위에 삼각김밥을 올려놓았다. 성찬이 고개를 들자, 다시 웅얼웅얼 대답했다.

"라면이랑 잘 어울려요, 이거."

"제가 잘 못 먹고 다니는 것 같아요?"

시비 걸려는 건 아니었다. 단순한 궁금증에서 나온 물음이었는데, 말투가 날카롭게 나갔다. 길냥이 길들이는 것처럼 어제부터 하나씩 먹을 걸 건네는 게 좀 웃겼다.

"아, 아뇨. 그냥."

"그냥?"

"고⋯ 고마워서요."

민망한 듯 자기 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홍조 오른 볼을 보고 있다가 성찬은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리던 밴드와 연고를 꺼내 올려놓았다. 알바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뜻으로 건넨 물건인지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성찬이 목 부근을 가리켰다. 

"아! 괜찮은데요."

"나도 그냥요."

알바생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저게 뭐 별거라고. 성찬은 마저 라면을 들이마셨다. 부러 알바생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성찬은 건네준 삼각김밥을 마저 먹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것 같다. 안 넘어가던 음식이 자연스럽게 목구멍을 넘어가 위장을 따끈하게 데웠다.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은 사람을 무방비하게 만든다. 마음 한구석에 있던 오지랖이 발동한 건 단지 배가 불러서였다.

"이름, 물어봐도 돼요?"

"원빈. 박원빈이요."

"원빈⋯⋯."

성찬이 혼잣말로 원빈, 원빈 하고 중얼거렸다. 네에, 네.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원빈이 대답했다. 성찬은 정제되지 않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꾹꾹 눌러 삼켰다. 박원빈. 얼굴이랑 이름이 무척 잘 어울렸다. 

"저도 물어봐도 돼요?"

"정성찬이요."

원빈도 성찬처럼 성찬의 이름을 입으로 되뇌었다. 이, 이름 예뻐요. 얼굴이랑 잘 어울려요. 원빈이 그렇게 말했을 때 성찬은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성찬. 그 이름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보육원에 성찬을 버리고 간 엄마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평생을 저주하고 그리워한 이름이었다. 몇 번 말을 섞어보지 않은 원빈이 남긴 순수한 감상평에 성찬은 힘이 빠져 자꾸 웃음이 헤프게 나왔다. 

그래서 옆에서 원빈의 눈이 어떻게 반짝거렸는지 성찬은 미처 보지 못했다. 그 눈을 알아챘더라면, 시작조차 안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난 박원빈을⋯.


***


성찬은 원빈과 통성명을 한 뒤로, 매일 편의점으로 향했다. 새벽에 밥을 먹으니, 성찬의 생활 리듬은 어느새 원빈과 맞춰졌다. 집주인은 새벽에 외출하는 성찬의 집 문을 더는 두들기지 않았다. 원빈과 많은 대화를 나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성찬은 밥을 한 끼 먹었을 뿐이고, 성찬이 밥 먹는 것을 계산대에 선 원빈이 쳐다볼 뿐이었다.

물론 편의점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알고 싶지 않아도 원빈에 관해 알게 되는 것들이 생겨났다. 민망할 때 손톱 거스러미를 뜯는다거나, 정확한 시간에 열 맞춰 물건을 정리한다거나, 가끔 서서 졸기도 한다는 것을. 그런 것들에 정신이 팔렸었을까.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들던 때에 문자 하나가 왔다. 정형사의 아내였다.

오랜 꿈을 꾸다 일어난 것처럼 현실의 파도가 성찬에게 밀려왔다. 성찬은 정형사의 장례식 이후로 입은 적이 없던 검은색 양복을 입고 버스를 탔다. 낮에 움직이는 게 오랜만이었다. 버스 창가로 들어온 햇빛에 눈이 부셨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지저귀는 새. 누가 죽었든 간에 세상은 이렇게도 멀쩡히 잘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내렸다. 우산을 살 생각조차 하지 않고 걸었다.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성찬의 위로 우산이 드리워졌다. 성찬은 제 위로 씌워진 우산을 한 번 봤다가 그걸 씌어준 이를 쳐다보았다. 빗물에 시야가 보이지 않아 눈을 비볐다. 원빈이었다.

"괘, 괜찮아요? 성찬 형?"

"여긴 어떻게⋯."

"알바 가는 길이었는데. 형 같아서요."

통성명한 뒤로 성찬을 부른 적도 없으면서, 잘도 친한 척 '형'이라는 호칭까지 덧붙인다. 배배 꼬여 날카로운 말이 나올 것 같았다. 형사 몇 명과 정형사의 와이프가 봉안당에 간 성찬에게 한 마디씩 말을 건넸다. 네 잘못은 없다고, 이제 다 잊고 네 인생 살라면서. 성찬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무서운 표정에 그의 어린 딸은 엄마 뒤로 몸을 숨겼다.

성찬의 시간은 그곳에서 멈추었다. 처음으로 그런 착각을 했다. 내게도 가족이 생긴 것 같다는,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던 외로움을 이제는 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 성찬은 돌아오는 길에 원빈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는 원빈을 보러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누구와도 연을 잇고 싶지 않았다. 그저 혼자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었다. 아무도 없이, 그저 혼자서. 그게 평생 성찬이 가지고 가야 할 죄의식이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요. 잠깐 편의점에라도 들어가요."

"왜요?"

"⋯⋯."

"학생이 뭔데요."

신경 쓰지 말고 갈 길 가요. 원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성찬을 쳐다보았다. 씌워져 있던 우산이 사라졌다. 원빈이 성찬을 지나쳐 빠르게 뛰어갔다. 상처받았을까? 괜히 아는 척했겠다 싶었겠지. 이제 이런 아무것도 아닌 관계도 금방 정리되겠지. 귀가 시끄러웠다. 빗소리 때문인지,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생각들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성찬은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그때, 다시 머리 위로 우산이 드리워졌다. 웃기게도 성찬은 그게 원빈이길 바랐다. 고개를 드는 순간 있었으면 하는 사람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남자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우산이라도 쓰고 가요."

"⋯⋯."

"가, 감기 걸리니깐 우산만 쓰고 가요."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거리며 원빈은 성찬의 손에 우산 손잡이를 쥐여주었다. 성찬이 우산을 받지 않자 당황해했다. 그러면서 화도 내지 않고 가만히 성찬의 대답을 기다렸다.

"뭘⋯⋯ 이렇게까지 해요?"

"?"

"그때 내가 도와준 것 때문에 그런 거면."

괜한 동정은 필요 없다고 덧붙이려 했는데, 원빈이 말을 막으며 성찬의 두 손을 감싸며 우산을 다시 쥐여주었다. 다시 보니 원빈은 우산을 쓰고 있지 않았다. 내리는 비를 모조리 맞았다. 저러고 일을 어떻게 간다고.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면 왜 이렇게까지 해요."

"그냥."

"⋯⋯."

"그냥 절 보는 것 같아서요."

"⋯⋯."

"미, 미안해요. 불쌍해서도 아니고 동정하는 것도 아니에요.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사실 모든 건 거짓말이었다. 성찬이 원빈을 가까이하지 않기로 한 것은 죄의식 같은 순수한 마음에서 기인한 게 아니었다. 어릴 때 성찬은 유난히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장난감을 빌려 쓴 친구를 때리고 반성문을 쓰던 성찬 앞에서 보육원의 원장님은 이마를 어루만지며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 이리 욕심이 많아 어찌 살래, 성찬아. 성찬은 내 것을 갖고 싶었다. 내 사람, 내 가족, 내 집. 하지만 그것들은 금방 성찬의 곁을 떠났다. 그렇게 금방 사라질 것들이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갖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수모를 당해도 덤덤히, 무슨 사정이 있는지 또래 애들처럼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지 않는 어린 남자애. 기댈 사람이 없어서 그 방법도 잊어버린 것 같은 애. 그러면서 가끔 성찬을 바라보는 눈을 보면 마음이 울렁거렸다. 바로 지금처럼. 원빈을 도와주었던 이유는, 우리가 같은 부류의 인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성찬은 원빈의 손 위에 손을 겹쳐 잡고, 어깨를 끌어왔다. 어, 어. 맹한 소리를 내며 원빈이 성찬의 가슴께에 부딪혔다. 성찬은 어깨를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어, 어디 가요?"

"편의점요."

"비 너무 많이 맞아서 감기 걸려요."

"그러면 우리 집?"

놀란 듯 원빈이 퍼드득 움직였다. 성찬이 작게 말했다. 고마워요. 원빈 앞에서 처음으로 내뱉은 진심이었다. 원빈은 못 들었는지, 성찬의 집에 간다는 사실에 긴장한 듯 어깨를 굳혔다. 어깨를 잡은 손에 더 꽈악 힘이 들어갔다.


***


괜찮다는 말에도 성찬은 원빈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저, 절 뭘 믿고 집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그런 웃기지도 않는 소리까지 덧붙이며 발을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성찬은 똑같이 반박했다. 그럼 넌 뭘 믿고 모르는 사람이 집에 가자는데도 의심도 안 하고 따라왔는데? 원빈이 꾹 입을 다물었다.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건네고 화장실로 들여보냈다. 아무것도 없는 집은 유난히 휑했다. 비가 내려 온도가 내려가, 바닥이 조금 찼다. 성찬은 급한 대로 온수 매트를 틀었다. 

샤워기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성찬은 집에 누군가를 들인 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만히 앉아 있기가 민망해서 부엌 쪽에서 서성거렸다. 얼마 안 있어, 욕실 문이 열리며 훈기와 함께 원빈이 나왔다. 뜨거운 물에 원래 있던 홍조가 도드라졌다. 성찬의 옷이 큰지 바짓단을 두 단 정도 접어 입었다.

"혀, 형. 씻어요."

"근데 형이라고 부르네요?"

"아⋯⋯. 안 돼요?"

"아뇨 뭐."

형 소리 듣기에는 내가 나이가 훨씬 많을 것 같은데. 성찬은 형사 시절에도 항상 막내였던 터라, 누군가에게 형 소리 들었던 기억이 오래됐다. 금방 씻고 나올게요. 온수 매트에 앉아 있어요. 성찬은 그렇게 말을 돌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다 씻고 나오니 원빈은 욕실 방향과 반대로 앉은 채,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푸흡. 예의 차린다고 하는 것 같았는데, 자세가 불편해 발가락을 꿈지럭거리는 게 애가 맞았다.

"편히 앉아요."

"편⋯해요."

그렇게 이야기하며 살며시 다리를 푼 원빈을 뒤로 하고 성찬은 전기포트에 물을 담고 끓였다. 찬장을 뒤적이니, 유통기한이 며칠 안 남은 유자차가 있었다. 컵에 탄 후 건네었다. 원빈이 감사 인사를 하고는 바로 컵에 입을 대었다. 뜨겁지도 않나 급하게 들이켰다. 아뜨. 데었는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마시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성찬이 의아해 바라보자, 원빈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알바 시간이 다 되어서요."

"아. 근데 그렇게 입고 가게요?"

성찬의 말에 원빈은 제가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커서 한껏 쪼아 묶은 트레이닝팬츠에 검은색 후드 집업 차림새는 누가 봐도 남의 옷을 훔쳐 입은 꼴이었다. 원빈의 옷은 이미 잔뜩 젖어 세탁기에 돌려지고 있었다. 

"오늘은 제가 갈게요."

"너, 너무 실례인데."

"저 때문에 비 맞았잖아요."

"오늘 물건도 들어오는데⋯."

"대학생 때 해봤어요."

하나하나 막힘없이 대답하는 성찬에 원빈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현실적으로 이 새벽에 당장 옷을 사서 편의점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 부탁할게요. 원빈이 미안한 듯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민폐 끼치는 걸 죽을 듯 싫어하는 스타일처럼 보였다. 성찬도 그랬기에 잘 알고 있었다. 성찬은 고개 숙인 원빈의 머리카락을 슬쩍 쓰다듬으면서 한숨 푹 자요, 라고 했다. 원빈은 목을 움츠리며 기다릴게요 하고 중얼거렸다.

현관 앞에서 배웅하는 원빈을 뒤로 하고, 그새 익숙해진 편의점으로 향했다. 일한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성찬의 손길은 능숙했다. 점주는 만족하는 눈빛으로 편의점을 떠났다. 사람 없는 편의점을 지키다가, 해가 밝을 때쯤 성찬은 유니폼을 벗을 수 있었다. 매일 새벽 근무를 어떻게 하는 건지, 하루 일한 건데도 온몸이 쑤셨다.

성찬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열린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원빈의 얼굴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기다리겠다고 했으면서. 거실 바닥에 깔아둔 온수 매트 위에서 원빈이 잠들어 있었다. 성찬은 가볍게 샤워를 마친 후에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거실로 나와 소파 위에 누웠다. 오랜만에 한 노동에 피로가 몰려와 저절로 눈이 감겼다. 원빈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성찬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 번도 깨지 않은 채로 열두 시간을 꼬박 잔 성찬은 입술이 3인분 된 원빈과 마주하며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


원빈이 성찬의 집에 자고 가는 날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손님처럼 앉아 있던 원빈도 성찬의 집이 편해졌는지, 가끔 아침에 성찬과 함께 잠에 곯아떨어지고는 했다. 계기는 별것 아녔다. 평소처럼 편의점에서 식사하다가 성찬은 원빈의 집이 어딘지 물어보았다. 이른 아침에 갈 때 위험하지 않은지 걱정돼서 나온 말이었다. 한데 원빈은 이곳에서 두 시간이나 떨어진 동네에서 살고 있었다.

"알바를 왜 이렇게 먼 곳에서 해요?"

"집 근처는 미성년자 야간 알바를 받아주는 곳이 없어서⋯."

합. 원빈이 말을 하다가 입을 막고는 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미 알고 있는데 대충은. 성찬은 배려심 없는 말이었다는 생각에 뒷머리를 잔뜩 헝클였다. 그리고 조금,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성찬에게 이런 것까지 얘기해도 되는지 의심하는 원빈이. 그래서 홧김에 질렀다. 

"너무 피곤한 날에는 우리 집에서 자고 가요."

"혀, 형네 집에서요?"

"네. 아무것도 안 할게요."

성찬이 손을 위로 들면서 웃으며 말했다. 아, 뭐, 뭔 그런 농담을 해요. 어 장난 아닌데?ㅋㅋ 뭔 상상했어요? 성찬은 얼굴이 빨개진 원빈에게 고개를 들이밀고는 물었다. 아, 됐어요⋯. 원빈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튿날 성찬의 집에 가도 되냐고 물었다. 짧은 시간 동안 성찬은 어느 정도 원빈을 파악했다. 한 번 더 장난치면 이 겁 많은 고양이가 도망갈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성찬 집 소파에 앉아 시켜준 요아정을 먹으면서 TV를 보는 원빈의 모습이 이제 퍽 익숙했다. 거실에 아무렇게나 어질러 놓은 원빈의 가방을 정리하던 성찬은 비어져 나온 문제집을 발견했다. 예능 프로그램에 정신이 팔린 원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검정고시 문제집이었다.

성찬은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몇 학년인지도 몰라, 왜 학교를 안 다니는지도 몰라, 부모님 허락도 안 받은 채 왜 야간 알바 뛰는지도 몰라. 원빈에 관해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을 모른 채로, 그저 현재의 안락만을 즐겼다는 사실을.

"맛있어?"

"아니⋯. 넘 단데⋯. 과일 많은 게 더 나은 것 같은데."

그동안 자연스럽게 말도 놓았으면서 원빈은 자기 얘기를 잘 하지 않았다. 물론 성찬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부러 그런 이야기를 피했다. 원빈은 달다면서 바닥을 보이는 요거트통을 아직 들고 있었다. 막 씻고 온 얼굴에 솜털이 다 보였다. 원빈아. 성찬이 목소리를 깔고 부르자, 원빈이 TV에서 고개를 돌려 성찬을 올려다보았다. 아진짜고양이같은데왜이렇게귀엽지. 성찬은 마음을 다잡았다. 듣기 싫은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훔쳐본 건 아닌데, 네 가방에 검정고시 문제집 있던데."

"아⋯."

원빈이 큰 눈을 껌뻑거렸다. 일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성찬은 묻고 싶었다. 왜 학교를 안 다니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는지, 가족들은 있는지, 매일 야간에 일하면 안 피곤한지 등⋯.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알고 싶어졌다. 

그때의 성찬은 그 이유를 그저, 유년 시절의 자기 같아서 안쓰러운 마음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했었다. 꾸벅꾸벅 졸며 일하거나 끼니를 자주 걸러서 군것질을 좋아하는 모습들을 안쓰러워하는 것도. 웃긴 이야기를 해주면 눈이 안 보이도록 환하게 웃는 모습이, 당황하면 말을 더듬는 모습들이 귀여운 것도. 그 모든 것들이 다.

"형이 공부 도와줄까?"

"혀, 형이?"

"응. 형 경찰이었어. 공부 잘해."

성찬은 겁을 한가득 집어먹은 원빈에게 먼저 가지고 있는 패를 내밀었다. 경찰 일을 그만둔 지 이제 꼬박 2년이었다. 성찬은 일을 그만둔 후로 한 번도 누군가에게 경찰이라고 밝혀본 적이 없었다. 원빈의 반응이 궁금했다. 이름 예쁘다고 했던 것처럼 잘 어울린다고 해줄까?

"겨, 경찰?"

"응. 그것도 강력계 형사."

성찬이 덧붙이자, 원빈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어, 어? 성찬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원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서 가방을 메더니 집에 가겠다고 했다.

"나, 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성찬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원빈이 도망간다는 사실을. 취객을 상대할 때는 꽤 덤덤하게 대처하는 원빈은 사실은 겁이 무척 많았다. 무서운 영화는 기본이고 처음 보는 음식도 성찬이 먼저 먹어야 안심하고 먹었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순순히 꽁무니 빼게 둘 순 없었다. 성찬은 나가려는 원빈의 손목을 붙들었다. 

"왜 또 혼자 겁을 집어먹었어."

"겁은 무슨⋯."

"네가 범죄자여도 안 잡아갈게. 말해봐."

"⋯⋯."

"말해주면 안 돼?"

성찬은 잠깐 움직임을 멈춘 원빈을 뒤에서 안았다. 정수리에 코를 비비며 샴푸 냄새를 맡았다. 원빈은 스킨십에 약했다. 처음에는 손 한 번 닿을 때마다 움츠러들어서 부러 다가가지 않았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성찬을 아직 어색해해서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빈의 바운더리에 들어간 이후로는, 소파에 앉아 온몸에 힘을 뺀 채, 성찬의 어깨에 기대는 자세를 가장 편안해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 아니야."

"응?"

"우리 아빠가⋯. 범죄자야."

그러니까 좀 떨어져. 더워. 원빈이 웅얼대면서 몸을 비틀었다. 성찬이 살짝 놓아주니 가방을 홱 거실에 던졌다. 성찬이 다시 붙잡기도 전에, 소파로 가서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 둘렀다. 후⋯. 찔끔 식은땀이 흐른 성찬은 원빈의 옆에 가서 앉았다.

"나 공부 못해."

웅얼웅얼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원빈이 그렇게 말했다.

"진짜 못해. 원래 육상하다가 그만뒀어서."

"자, 잠깐만. 너 육상했어?"

"반 꼴찌도 해봤어."

성찬의 물음은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원빈은 얼굴을 파묻은 채로 계속 이야기했다. 귀 끝이 발갰다. 돌이켜 보니, 아빠가 범죄자인 것 외에도 들키고 싶지 않은 게 많았던 듯했다. 아하하. 성찬이 못 참고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원빈아, 전교 꼴등은 아니잖아. 성찬의 말에 원빈이 눈만 들어 째려보았다. 그걸 끝으로 더 입을 열지 않아, 성찬은 그날 지코바 치킨과 과일 잔뜩 든 요아정을 사주며 무릎 꿇고 빌어야 했다.


***


오랜만이었다. 평일임에도 광화문 교보문고에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성찬은 문제집 매대에서 원빈을 위한 문제집을 둘러보고 있었다. 반강제적 과외를 시작한 이후로, 성찬은 원빈이 정말 기초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볍게 본 테스트지가 온통 빗금투성이였다. 시무룩해하는 원빈을 달래주었다. 사실 형도 꼴통이었어. 중학생 때까지 축구밖에 안 했거든. 체육계였다는 공통점을 찾은 원빈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그날은 공부도 못하고 어떤 운동을 좋아하는지 조사를 당해야만 했다.

점점 말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빈이 성찬에게 익숙해진 만큼, 성찬 또한 점점 원빈에게 익숙해졌다. 이상한 관계였다. 막연히 얼굴만 알던 사이에서 언제 이렇게까지 가까워졌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성찬은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김형사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단번에 알아봤다. 그는 잠깐 차 한잔 괜찮냐고 물었다. 성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1년 전이었다면 분명 그 자리에서 도망갔을 테지만, 지금은 어쩐지 다 괜찮았다.

"얼굴 좋아 보인다, 정성찬."

"좋기는요⋯."

"수능 다시 보려고?"

"아뇨, 그냥 아는 애 과외 해주려고요."

'그냥 아는 애.' 원빈이 들었으면 서운함에 입술을 비죽였을 것 같다. 머그잔을 문지르며 성찬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불쑥불쑥 찾아드는 생각들이 다 한 사람을 향해있다. 낯설면서도 따뜻한,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이켠 김형사가 입을 열었다.

"너 복귀하는 건 어떠냐?"

"형사님. 저 경찰 일 다시 안 한다고 했잖아요."

"알아, 알지. 그런데 성찬아 들어봐."

정형사님 죽인 새끼 있잖아. 박성한. 기억하지?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실종된 그 새끼 다시 서울에서 목격됐어. 여전히 일반인들 상대로 마약 유통에 손을 댄다고 하더라. 개인적인 원한으로 잡아 처넣으라는 말 아니야. 그 새끼를 잡아야 너도 다 잊고 미래를 생각하며 나아가야지. 경찰 일 계속하라고 강요는 안 할게. 그래도 그 새끼 콩밥은 먹여야 네가 숨 쉴 수 있을 거 아니냐.

성찬은 집으로 돌아와 김형사의 말을 곱씹었다. 박성한이 서울로 돌아왔다. 정형사를 죽인 새끼가. 성찬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혼자만의 세계에 다시 갇히고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도어락 비번 치는 소리가 들렸다.

"형 있어?"

"⋯⋯."

성찬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두컴컴한 거실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가는 편의점도 가지 않았다. 걱정했겠구나. 성찬은 웃으면서 왔냐고 물으려 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서 있는 원빈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 음습한 어둠은 영원히 날 따라다닐 거야. 어릴 때의 상념이 성찬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때, 원빈이 불쑥 움직여 현관 전등이 켜졌다. 신발을 벗고 원빈은 성찬이 앉아 있는 소파 앞까지 왔다. 앉아 있는 성찬을 내려보다가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멍한 정신을 깨웠다.

"어디 아파?"

"아니, 아냐."

성찬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티 내지 말자. 일하고 들어온 애한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원빈은 까만 눈으로 성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원빈이 성찬의 볼살을 잡아챘다. 언빈아, 아파아⋯. 성찬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진짜 아파서 눈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무슨 일 있지?"

"아므일도없는데."

"거짓말하네. 내가 한두 번 속아?"

이 웃음. 거지, 거짓 웃음이야. 원빈이 성찬의 볼을 잡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입꼬리가 아팠다. 진짜 아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흡. 성찬이 신음을 내뱉자, 그제야 볼을 놓아줬다. 차가운 손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아주었다.

"우니까 진짜아 못생겼다."

"너무해."

"어차피 나한텐 얘기 안 해줄 거지?"

"⋯⋯."

"됐어. 나 안 서운해."

그래도 걱정되니까 못 오면 못 온다고 문자는 남겨줘. 원빈이 헤헤 웃으며 그랬다. 열아홉 살밖에 안 됐으면서 서른 가까이 먹은 성찬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성찬이 킁, 콧소리를 내며 원빈을 옆자리에 앉혔다. 차가운 손을 끌어와 이불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나, 나 손 안 닦았는데. 괜찮아, 형도 안 씻었어. 디럽다.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킬킬대었다. 성찬은 원빈의 어깨에 기대었다.

"완전 아기네."

"원빈이 냄새 맡으니까 살 것 같다."

"강아지인가?"

비키라 무겁다. 말은 툴툴거리게 하면서도, 손은 다정히 성찬의 앞머리를 쓸어주었다. 성찬은 원빈의 손에 얼굴을 갖다 대었다. 얼굴이 차가워지며 정신이 번뜩 들었다. 누군가의 다정에 기댄다는 건, 그 사람의 온도에 동화되는 것 아닐까. 불현듯 성찬은 깨달았다.

아, 나 원빈이를 좋아하는구나.

이건 단순한 동정심에서 기인한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원빈이 누군가를 품에 안고 저런 애정을 준다면, 그 사람을 죽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불쑥 그런 생각까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찬은 김형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원빈과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보고 싶어졌기에.


***


원빈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성찬은 자괴감이 들거나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정도로 도덕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한 번 자각하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스킨십하는데, 신경 쓰지 않았던 원빈의 반응이 눈에 들어왔다. 성찬이 어깨에 얼굴을 기대면 깜짝 놀라며 귀가 빨개진다든가, 성찬의 말 한마디에도 숨넘어갈 듯이 웃어주는 반응이라든가.

아닌가, 혹시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건가? 아닌데, 영 없는 도박에 베팅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성찬은 원빈의 눈길 한 번, 말 한마디에 심장이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 위로 올라갔다가 땅바닥에 던져졌다. 혼란스러운 나날 속에서도, 원빈과 과외하지 않는 날에는 김형사와 따로 만나 박성한을 조사했다. 수능 전에 이 모든 걸 끝내고, 원빈의 과외에 집중하고 싶었다. 잠을 줄여가며 일했다. 덕분에 한 달 만에 박성한의 거주지까지 파악을 끝냈다.

오늘이 바로 디데이였다. 새벽에 박성한이 집에 들른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김형사와 차에서 잠복 후에 바로 덮칠 계획이었다. 원빈에게는 오늘은 편의점에 못 갈 것 같다고 미리 이야기해 둔 상태였다. 원빈은 이따 보자는 연락을 남겨두었다. 이 짓거리를 또 하게 될 줄이야. 사람 형체도 안 보일 만큼 짙은 어둠이 깔린 바깥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일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성찬은 이 모든 일을 끝내고, 원빈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성찬이 바라는 것은 겨우 그 정도였다.

성찬의 아래에서 박성한이 거세게 몸부림쳤다. 잡는 과정은 수월했다. 집으로 들어가려는 박성한에게 다가가자, 그가 도망쳤다. 김형사는 다른 도주로가 있을까 성찬과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여기서 잡아야 했다. 성찬과 박성한이 막다른 골목길에 다다랐다. 칼을 들고 있던 박성한 때문에 성찬은 배를 찔려 피를 흘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수월하게 잡힌 편이었다. 이제 김형사가 올 동안 수갑을 채우고 기다리면 되었다. 그때 골목길 끝에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성찬이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 한순간에 몸에서 힘이 빠졌고 그 틈을 타 박성한이 도망갔다. 원빈은 떨리는 눈동자로 성찬을 마주 보았다.

‘우리 아빠가 범죄자야.’

박성한, 박원빈. 머릿속에는 그 두 이름만 맴돌았고, 논리적으로 결론을 도출해 내지 못했다. 원빈에게 묻는 게 먼저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의 성찬에게는 현재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만을 보고 달려 나갔다. 성찬은 몸을 일으켜, 박성한을 쫓아갔다. 그를 잡고 나서 모든 걸 설명해 줄 생각이었다. 자기가 왜 형사 일을 그만뒀는지, 왜 원빈을 도와주었는지, 왜 다시 그를 잡기 위해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원빈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그 모든 걸 다⋯.

끼익, 쾅, 퍽. 

거의 다 잡았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모자랐다. 박성한은 성찬에게 잡히지 않았다. 덤프트럭이 그를 덮쳤다. 박성한이 공중으로 올라갔다 땅으로 처박혔다. 차의 엔진음만 고요한 새벽을 채웠다. 성찬의 뒤에서 원빈이 중얼거렸다.

“형, 바, 방금 무슨 소리야?”

“원빈아.”

원빈이 사고 난 현장을 보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성찬은 원빈을 막았다. 형, 비켜봐. 화, 확인, 내가 확인해 봐야지. 성찬은 원빈의 어깨를 꽉 잡고 안았다. 시야를 차단하기 위해 얼굴을 감싸고 어깨에 기대게 했다. 원빈은 성찬의 등을 치며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형 놔 봐. 잠깐만, 잠깐만.”

“원빈아, 미안해. 미안해.”

원빈은 온몸에 힘을 줘, 성찬의 어깨를 밀고 다리에 발길질했다. 아팠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원빈보다 아픈 사람이 자기여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성찬은 이를 악물고 꾹 참았다. 시끄럽게 수군거리는 소리, 앰뷸런스 소리, 어둠을 밝히는 붉은색 경고등. 그때와 똑같았다. 

어깨가 축축이 젖어 들었다. 그때처럼 성찬은 죽고 싶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


빌려 입은 양복이 원빈의 몸에 비해 컸다. 그래서 장례식장 안에서 원빈은 더 어려 보이고 어수룩해 보였다. 장례식장은 엉망진창이었다. 멀쩡한 조문객은 없고, 그저 따지고 분풀이하러 온 사람들뿐이었다. 성찬이 그들 중 몇몇을 막았다. 원빈이 성찬을 잡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나서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3일이 3년 같이 길게 느껴졌다. 원빈은 그동안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장지 가는 길에는 눈이 내렸다. 사건은 피의자가 죽음으로서 종결되었다. 장례식을 마치기 전에 끝내고 싶다고 원빈이 말해서, 간략하게 김형사가 성찬 대신 취조를 마쳤다. 원빈과는 그 이후로 어떤 말도 나누지 못했다. 성찬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 미안해? 그 말들 뒤로 이어질 무수히 많은 비참한 현실이 원빈을 쥐어 터트릴 것 같아서. 그게 성찬은 무서웠다.

“형.”

“응.”

창밖에 내리던 눈만 계속 보던 원빈이 성찬에게 말했다. 성찬은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려 했다. 어떠한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라도 그렇게.

“미안해.”

“원빈아.”

“경찰 그만둔 거, 형이 존경하는 형사님 그렇게⋯⋯.”

원빈은 말을 멈추었다. 네가 뭐가 미안해. 넌 아무것도 몰랐잖아. 내가 경찰인지도, 내가 너희 아빠 잡으려고 했던 것도. 너희 아빠가 범죄자인 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성찬은 그런 말로 원빈을 달래주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붙잡고 싶었다. 그런데 말하는 내내 원빈은 성찬을 돌아보지 않았다. 한 번의 몸짓은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많은 것을 말하고는 한다. 그건 명백한 거절이었다.

“우리 다시 보지 말아요.”

“원빈아. 형 좀 봐봐.”

“성찬 형사님. 여태껏 감사했습니다.”

성찬이 운전대를 잡지 않은 손으로 원빈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원빈은 마주 깍지를 끼지 않고 손을 뺐다. 성찬은 차마 다시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욕심을 부려, 밀어내는 원빈의 곁에 진득하게 붙어 지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지내는 내내, 원빈은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내가 미움받는 건 상관없었지만, 원빈은 분명 성찬에게 죄책감을 가질 것이다. 너는 나를 닮았으니까. 우리의 미래에 서로가 없는 게 더 행복할 거라는 사실은 원빈과 성찬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이리 욕심이 많아서 어찌 살래, 성찬아. 

아아, 원장님 당신 말은 전부 틀렸어요. 정말로 소중한 사람 앞에서는 욕심이고 뭐고 아무것도 챙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놓아주기로 했어요. 그 아이가 행복해질 방법은 제가 떠나는 것밖에 없으니까요.


***

           

원빈이 떠났어도 성찬의 삶은 그럭저럭 이어졌다. 경찰 일에도 복귀했다. 성찬은 일상을 살고 싶었다. 원빈도 성찬이 정형사를 잃었을 때처럼 지내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었기에. 밤새 잠복 수사를 하고, 피의자에게 깽판 부리며 조사도 하고, 형사들과 쓸데없는 말을 나누며 담배를 피우며 당구를 치고, 자질구레한 상처를 입은 채로. 예전과 다름없이, 전부 일상으로.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시간은 다시 1년 전으로 돌아갔다. 원빈이 쓰던 칫솔, 걔가 즐겨 입던 후드티, 풀다 만 문제집까지. 성찬은 단 하나도 버리거나 정리하지 못했다. 모든 걸 그대로 두고 나간 원빈이 미웠다가, 그 애의 유일한 가족을 죽인 내가 죽을 만큼 미웠다가, 우리가 왜 이렇게 지독한 악연으로 묶인 건지 운명을 저주하다가. 결론은.

원빈이 보고 싶었다. 사진 찍기 싫어하는 걔 몰래 찍은 사진들을 누워서 한참을 보았다. 초점이 잡히지 않아 흔들리는 사진 속 원빈을 보면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멀리서라도 걔를 볼 수 있다면 성찬은 한평생 외롭게 살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럭저럭이라는 말은 죄다 거짓말이었다.


***


“트리 예쁘지?”

“네.”

“근처 대학생들이 지난주에 와서 꾸며주고 갔어. 애들이 참 귀여워.”

벤치에 앉아 멍하니 트리를 바라보던 성찬의 옆에 와 앉은 원장님은 성찬에게 머그잔을 건넸다. 뜨거운 코코아였다. 제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런 걸 주세요. 먹기 싫으면 다시 주든가. 성찬은 모른 척 다시 머그잔에 입을 대었다. 투덜대었지만 어릴 적 생각이 나는 맛이었다. 올겨울은 유난히 추운 것 같았다. 허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었다. 주머니에 있나 뒤져보다가, 춥지도 않은지 밖에서 날뛰는 애들을 보다가 곧 그만두었다.

“쟤네는 기운도 좋네.”

“네가 유난히 없는 거겠지. 젊은 놈이 인생 다 산 얼굴을 해서는. 크리스마스에 보육원을 오는 사람은 너밖에 없겠다.”

“아 와도 난리, 안 와도 난리.”

“성인 되자마자 다시는 안 돌아올 것처럼 연락도 싹 끊더니만. 갑자기 연락해 와서는.”

성찬은 양심에 찔려 입을 다물었다. 원장님 말대로 성찬은 성인이 되자마자 보육원과 관련된 사람들과 죄다 연락을 끊었다. 외로운 기억밖에 없는 그곳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에. 하지만 원빈과 헤어진 이후로, 이상하게 보육원에서 지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크리스마스나 어린이날에 받았던 선물들, 또래 아이들이 많아서 매일매일 축구를 하던 것, 원장님이 잠이 오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읽어주던 동화책들까지. 괴롭고 끔찍한 기억들 사이에서 빛이 나는 순간들이. 그걸 기억하게 해준 사람이 바로 원빈이었음을 성찬은 걔가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저기 오네. 크리스마스에 칙칙하게 보육원으로 봉사하러 오는 특이한 사람.”

성찬은 원장님의 손끝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성찬과 같이 묶여 욕먹은 인물을 보았다. 아. 성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뛰어놀던 아이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성찬을 놀란 듯 바라보았다. 추운지 바라클라바를 쓰고 목도리를 칭칭 두른 원빈도 성찬을 보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꿈을 꾸나 싶었다. 성찬은 신기루처럼 원빈이 사라질까, 그 애의 모습을 샅샅이 눈으로 담았다. 평생 잊지 않기 위해. 그때 멈추었던 원빈이 발을 움직였다. 성찬의 코앞까지 온 원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형사님.”

어색한 호칭에 성찬은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어른답게 반갑다며 대답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왜 그렇게 부르냐면서 서운한 듯이 굴어야 할까. 성찬은 원빈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둘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원빈이 하는 말을 듣고 둘 사이로 모여들었다. 헐, 삼촌 형사예요? 총 있어요, 총? 범인도 잡아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래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형사를 직접 봐서 모두 흥분한 것 같았다. 그때 여자애 한 명이 당당하게 외쳤다.

“근데 TV에서 보던 형사님들이랑은 너무 다른데. 너무 예쁘게 생겼잖아! 거짓말이죠?”

그 말을 들은 성찬의 귀 끝이 달아올랐다. 예쁘게, 뭐? 재회의 순간이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풋. 그 말을 들은 원빈이 웃었다. 눈꼬리가 다 접힐 만큼 환하게. 성찬이 제일 좋아하는 원빈의 모습 그대로였다. 뭘 고민하고 있었을까. 그딴 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원빈이 지금 성찬 앞에 있다는 사실인데.

“안녕, 원빈아.”

성찬이 원빈을 마주 보며 그렇게 말했다. 평소에 하던 것처럼 살며시 손깍지를 꼈다.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성찬은 잘 알았다. 이 손을 조금만 어루만지면 금세 뜨거워진다는 사실을.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이 이상한 광경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원빈이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보다가 마주 깍지를 꼈다. 엄지손가락으로 원빈의 손을 쓸었다. 그제야 정말 원빈이 이곳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안녕, 형.”

원빈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성찬의 일상에서 공기처럼 녹아있던 원빈의 모습 그대로였다. 원빈을 품에 안았다. 원빈이 머뭇거리더니 마주 안아 주었다. 멈춰있던 시계가 그제야 움직였다. 성찬은 원빈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불행이나 외로움을 상상할 틈도 없는 평범한 날 중 하나였다. 


***


성찬을 떠나보내고 나서, 원빈은 매일 영화를 보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 <어바웃타임>, <노트북>, <라라랜드> 하나같이 눈물 찔끔 나는 로맨스 영화였다. 원빈은 그것을 보며 매일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 형이 로맨스 영화 볼 때마다, T답지 않다고 놀렸는데. 과거를 후회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친해진 친구 한 명이 원빈에게 왜 매일 이별하는 사람 같은 표정으로 다니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집으로 돌아온 원빈은 거울 속 자신을 쳐다보았다. 충혈되고 부은 눈, 하도 코를 풀어서 살갗이 벗겨진 코, 부르튼 입술. 진짜 어제 막 이별한 사람 같네. 원빈은 세면대에 찬물을 받고 얼굴을 박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성찬과는 헤어지는 게 맞았다. 김형사에게서 일련의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들었다. 애초에 우리는 만나지 말아야 했을 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헤어졌다. 성찬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그래, 딱 이 영화 한 편만 보고 성찬과 완벽하게 이별하는 거다. 원빈은 다짐하며, <어바웃타임>을 틀었다. 몇십 번을 들은 대사가, 유난히 원빈의 마음 한구석을 파고들었다. 

특별한 내 삶의 마지막 날, 평범한 하루인 것처럼 살기.

원빈의 평범하디 평범한 하루 속에 언제부터 성찬이 끼어든 것인지,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잿빛에 가까웠던 세계가 점점 아름다운 색채를 갖는 것처럼. 성찬이 편입한 원빈의 세상도 특별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특별함은 곧 일상이 되었다. 성찬의 다정함이 익숙해져서 원빈은 잊고 있었다. 이제 잿빛 세계에 사는 방법을 잊게 되었다는 사실을. 원빈은 김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이 보고 싶어.

마지막 순간에 놓아버렸던 손을 다시 마주 잡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이제 내 삶에 완전히 들어와 버렸다고.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