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태양을 한 번
by. 아바라
“아, 그때 박원빈 진짜 귀여웠는데.”
“그게 언제 적인데 형은...”
“언제 이렇게 컸지, 우리 원빈이.”
“징그럽게 진짜. 형이랑 나랑 고작 한 살 차이거든?”
정성찬이 몸을 반으로 접으며 하하 웃어댔다. 그 얄미운 꼴에 눈을 흘긴 박원빈이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후드집업 모자를 휙 뒤집어썼다. 박원빈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아직 후드만 입고 다녀? 어? 너 또 얇게 입고 다니다가 감기 걸려서 이모한테 혼나려고 그러지. 등 뒤에서 들리는 잔소리에 결국 에어팟까지 꺼내 귓구멍을 틀어막았다. 하여튼 정성찬 진짜 초딩.
너 아무것도 안 듣고 있는 거 다 알아. 정성찬이 고개를 앞으로 훅 내빼곤 박원빈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떤 박원빈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어깨에 턱 하고 얹어진 손이 그날따라 무겁게 느껴져 잔뜩 꿍얼거려도 정성찬은 그저 재밌다는 듯 웃기만 한다.
“형은 나 놀리는 재미로 살지.”
“그럼. 난 우리 원빈이 없으면 못 살지.”
“...으. 말투 느끼해.”
“오늘 이모랑 이모부 골프 치러 가셨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형은.”
“우리 엄마랑 아빠도 거기 같이 가셨거든.”
“뭐야. 그렇게 부부 동반이었어?”
“웅. 우리 오늘 오랜만에 박원비니 좋아하는 지코바 시켜 먹을까?”
아 좀... 밖에서 그렇게 부르지 마. 박원빈이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봤자 정성찬 보폭 한 번에 따라잡힐 거리라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지만. 아 같이 가아. 웃음기를 머금은 정성찬의 말투에 종종걸음을 걷던 박원빈의 보폭이 대폭 줄어든다. 정성찬이랑 있으면, 항상 이런 식으로 이끌려가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정성찬은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장난꾸러기에 형, 누나, 친구, 동생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친구. 엄마랑 제일 친한 친구가 옆집에 이사를 왔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저처럼 엄마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길래 박원빈은 눈을 반짝였다. 근데 이게 웬걸, 다음 날 놀이터에 갔더니 정성찬은 미끄럼틀 꼭대기에 올라가서 동네가 떠나가라 웃고 있었다.
그때부터 박원빈은 정성찬이 신기했다. 어제 처음 봤는데 어떻게 저렇게 놀지. 박원빈은 30분 내내 기다리던 그네를 누가 새치기해도 손만 꼼지락 대면서 한마디도 못 하고 또 내리 10분을 더 기다리는데, 정성찬은 아니었다. 고작 한 살 차이에, 그런 박원빈의 팔뚝을 붙들고 아기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며 대신 말을 해줬다.
거기에 홀딱 마음을 뺏겨버린 박원빈은 저보다 한 뼘은 더 큰 정성찬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얼떨결에 양보받은 그네에 올라탄 박원빈은 무서우면 말해, 하곤 살살 밀어 주기까지 하는 정성찬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성찬이 형이 우리 형이었으면 좋겠어. 자기 전 동화책을 읽어주는 엄마에게 박원빈은 수도 없이 그런 말을 했다. ‘나 동생 갖고 싶어.’ 같은 어린아이의 투정쯤이라고 여긴 박원빈의 엄마가 그저 웃기만 할 때도, 박원빈은 진심이었다. 그러니 초등학교 입학식 가는 형을 붙들고 나도 가겠다 엉엉 울며 붙잡았지.
그건 박원빈의 흑역사이기도 하다. 정성찬의 초등학교 입학식 날, 아침 댓바람부터 박원빈은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소리도 안 내고 아랫입술을 꾹 물어가며 우는 꼴이 얼마나 절절한지 보는 사람 마음을 이상하게 만든다. 원빈아, 성찬이 형 이제 학교 가야 된대. 원빈이가 빠빠이 해야 초등학생 형아 되는데? 난감한 듯 엉덩이를 토닥이며 말하는 엄마 말도 못 들은 척, 아주 제대로 토라진 상태다.
“... 시러. 형아 가지 마...”
“얘가 왜 이래 진짜. 언니, 미안해. 원빈이가 어젯밤부터 자꾸 이러네...”
“아냐, 아직 입학식 시작하려면 한참 남았어. 성찬아, 원빈이가 형아랑 학교 같이 가고 싶은가 봐. 어쩌지?”
“...”
나두 갈래애애... 그날은 박원빈 일곱 살 인생에서 제일 크게 의견을 피력한 날이었다. 우느라고 목소리가 염소처럼 달달 떨려도 자그마한 손등으로 눈물을 벅벅 닦아가며 꼭 잡은 엄마 손만 흔들흔들. 답지 않게 떼를 썼다.
두꺼운 눈썹을 잔뜩 아래로 내린 정성찬도 여덟 살 인생에서 제일 깊게 고민하던 날이었다. 엄마, 원빈이도 나랑 같이 가면 안 돼? 까치발을 들고 낑낑대며 엄마에게 귓속말을 하는 게 애틋하기 짝이 없었다.
“원빈이는 아직 백 밤도 더 넘게 자야 돼. 그래야 너랑 같이 학교 갈 수 있어.”
“백 밤도 넘게...? 그렇게나 많이?”
속삭이는 대화에 귀를 잔뜩 기울이던 박원빈이 꼭 잡고 있던 엄마 손도 뿌리치곤 손가락을 꼬물꼬물 접어본다. 하나, 둘, 세엣, 네엣... 아직 백 밤까지 세는 법도 모르는 박원빈은 이내 다 접혀버린 손가락을 보다 겨우 그친 울음에 다시 시동을 건다.
서럽게도 훌쩍이는 울음소리를 듣던 정성찬이 제 몸만 한 가방을 멘 상태로 박원빈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춘다. 원빈이 씩씩하게 기다리면 형이 제일 아끼는 축구공 너 줄게. 작게 소곤거리는 말에 입술을 삐죽이던 박원빈도 그걸 알았는지 놀란 눈으로 정성찬을 쳐다본다.
눈만 뜨면 축구하러 뛰쳐나가는 여덟 살에게 축구공을 준다는 건 꽤 큰 거래다. 그러니까 뚝 해, 형아가 학교 끝나자마자 원빈이 보러 올게. 박원빈의 엄마도 포기한 박원빈 달래기를 기어이 정성찬이 해낸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박원빈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엄마들의 웃음이 터졌다. 하여튼 얘네 진짜.
박원빈은 정성찬이 그저 좋았다. 형이 하는 건 다 따라 하고 싶었다. 초등학교에서 유소년 축구부 활동을 한다는 형을 따라 축구부에 들어가 숨이 턱 끝까지 찰 정도로 달려 보기도 하고, 전교 회장에 출마한다는 형을 따라 살면서 처음으로 반장 선거에 나가 보기도 했다. 물론 결과는 정성찬과 다 반대였지만, 박원빈은 아무렴 뭐든 좋았다. 같은 걸 하고 나면 꼭 너도 그랬지, 이때 이랬지. 하고 되물어주는 형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꼬박 십 년이 지났다. 코흘리개 정성찬과 박원빈은 어느새 훌쩍 자라 서로의 부모님을 이모, 삼촌이라고 익숙하게 부른다. 놀이터에서 그네 타고 공 차고 노는 대신 학원이며 독서실에 다니느라 바쁘고, 흙먼지가 묻어 있던 체육복 대신 적당히 사이즈를 맞춘 교복에 후드 차림, 멋 낸다고 삐죽삐죽 튀어나온 머리칼에 넣은 브릿지 대신 차분하게 내린 생머리까지. 겉으로 보기에도 세월의 흐름을 체감할 만큼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러니까 분명, 정성찬이 자랄 때 박원빈도 같이 자랐을 텐데. 왜 유독 박원빈만 아직까지 어린 티가 나는 건지, 아침마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는 정성찬을 보며 고개를 내두르면서도 여실히 느껴지는 눈높이 차이에는 적응이 안 돼 괜히 주먹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지금이라도 형처럼 흰 우유 많이 마시면 달라지려나.
이상한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초중고 내내 정성찬과 붙어 다니던 탓에 박원빈은 가끔 준비물 따위는 가볍게 건너뛰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날도 그랬다. 가방에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곱게 개어진 제 체육복을 모른 척하고 그냥 나왔던 날, 쉬는 시간 종이 땡 하고 치자마자 바로 위 층으로 올라간 박원빈이 뒷문을 조심스레 열고 엎드려 자는 정성찬을 깨웠다.
“형... 형, 자?”
“어엉...”
“혀엉, 정성찬... 나 체육복 좀 빌려줘.”
이씨, 좀 일어나지. 박원빈이 한 학년 위 선배들 교실에 올라와 말 거는 건 보통 용기로 못 한다는 걸 다 알 텐데도 정성찬은 모른 척이다. 결국 맘대로 사물함에서 체육복을 꺼낸 박원빈이 허리를 숙여 정성찬의 귓가에 속닥였다. 형 학교에서 잔다고 이모한테 다 이를 거야.
잽싸게 뒷문으로 빠져나온 박원빈이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면서 키득거렸다. 제가 속닥일 때 정성찬의 어깨가 움찔하는 걸 다 봤거든.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 액정이 연신 반짝인다. 보나 마나 약이 잔뜩 오른 정성찬이겠지 뭐. 더 얄밉게 이모티콘 하나만 보낸 박원빈은 후련한 얼굴로 체육복을 서둘러 꿰어 입었는데... 이게 원래 이렇게 컸나?
소매도 한참 내려와 손가락 끝이 겨우 보이고, 바지 허리는 또 커서 고무줄을 있는 힘껏 잡아당겨야지만 겨우 고정이 됐다. 거기다 정성찬 특유의 씁쓸한 허브 향까지. 기분이 막... 하여튼 이상했다. 심지어 조금 충격적이기까지 한 것 같기도 했다. 분명 내가 아는 정성찬은 안 이랬는데, 언제부터 이랬지? 혼자만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저를 쏙 빼놓고.
[박원비니ㅣ]
[근데 내 체육복 너한테 안 커?]
[너 옆 반 친구 누구냐]
[민성이? 걔한테 빌리지]
[ㄴㄴ 안 커]
[딱 맞음]
[그리고 민성이가 아니라 성민이임]
[아ㅎㅎ]
아 진짜 재수 없어. 박원빈이 신경질이 난 듯 액정을 뭉툭한 손끝으로 세게 두드렸다. 정성찬은 꼭 그랬다. 박원빈에 대한 건 흑역사까지 줄줄 꿰고 있으면서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기억도 못 하고, 관심도 없고. 박원빈이 그런 정성찬을 떠올리며 아득바득 사이즈가 맞다고 우겨가며 답장을 마저 보냈다. 그 와중에도 줄줄 흘러내리는 소매가 조금 민망하긴 했으나, 어쨌든 어깨는 얼추 맞으니까 맞는 거지 뭐. 그렇게 합리화를 한다. 박원빈은 그날 체육복 바지의 허리 밴드를 구겨 접고도 내려가지 않을까 내내 잡고 있어야 했다.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이 뭐 그렇게 다르다고 하겠냐만, 생각보다 정성찬과 박원빈은 학교에서는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급식도 학년 별로 따로 먹어, 교실 층도 달라. 같은 학교임에도 누군가 직접 찾아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구조다.
그렇기 때문에 박원빈은 정성찬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 턱이 없다. 매일같이 얼굴 보는 사이에 새삼스럽게 오늘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라고 물어볼 일도 없고. 그냥저냥 아침 등교할 때 마주치면 정성찬한테 얌전히 어깨나 내주면서 걷는 게 다다.
이 말인즉슨, 정성찬이 학교에서 썸 타는 애가 있어도 한 학년 위 누나한테 고백을 받아도 박원빈은 정성찬이 직접 말해 주거나 직접 목격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처럼.
어쩐지 오늘따라 이 시간에 집에 가고 싶더라니. 박원빈은 독서실에서 평소 나오던 시간보다 딱 5분 더 일찍 나온 본인을 탓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독서실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누군가의 긴 머리칼을 넘겨주며 다정하게 웃고 있는 정성찬을 보니 박원빈의 심장이 막 뛰었다. 애플워치를 차고 있었다면 경고음이 울릴지도 모를 정도였다.
저도 모르게 코너로 몸을 숨긴 박원빈이 앞으로 멘 가방을 끌어안고 주르륵 주저앉았다. 정성찬이 여자친구가 생겼다. 아니, 생겼나 보다. 여자친구가 아니라면 지금 제 눈에 보이는 다정한 저 두 인영이 말이 안 된다.
쌀쌀해진 밤공기에 코를 작게 훌쩍이면서도 정성찬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리던 박원빈은 저 멀리 걷는 형의 뒷모습이 아주 콩알만 한 크기만큼 작아질 때가 되어서야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럼 이제 등교는 같이 못 하는 건가. 어이없게도 그 생각이 먼저 들어서 잇새로 헛웃음이 샜다.
다음 날, 어쩐지 어제 봤던 장면이 조금 신경 쓰여 한숨을 길게 내뱉은 박원빈이 익숙하게 아파트 로비를 나섰다.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콧속으로 훅 스치는 찬 공기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이제 진짜 겨울이네.
“그치? 그럼 따뜻하게 입어야겠지, 박원빈.”
“아, 깜짝이야... 형이 왜 여기 있어?”
“여기 우리 집이기도 해.”
“아니, 그게 아니라... 형... 아냐.”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란 박원빈이 목을 큼큼, 하고 가다듬었다. 형 여자친구는 어쩌고 나랑 같이 가. 하고 말하려다 입을 합 다무니 고개를 갸웃거린 정성찬이 때를 놓치지 않고 박원빈을 추궁해 온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의미 없는 실랑이가 길게 늘어지자 제풀에 지친 박원빈이 결국 입을 뗐다. 형 여자친구랑 있는 거 봤어, 어제.
콩콩, 하고 심장이 또 작게 뛰었다. 제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정성찬을 기다리던 박원빈은 머릿속으로 온갖 대답을 예상하기 시작했다. 왜 봐 놓고도 아무 말이 없었냐고 다그칠까? 네가 본 대로 이제 여자친구가 생겼으니 너랑은 등교 못 한다고 얘기해 올까? 그것도 아님, 이모한테는 비밀로 해 달라고 장난스레 치대올까?
“음, 그래?”
“... 뭐?”
“왜?”
“아니... 반응이 그게 뭐야. 내가 형 여자친구랑 있는 걸 봤다니까?”
“... 응, 그래서 대답했잖아.”
“... 근데 나랑 이렇게 다녀도 돼?”
“안 될 이유가 있어? 너는 내 동생인데, 무슨 상관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원빈인데, 뭘. 정성찬은 그러면서 싱긋 웃었다. 아, 아아... 그치... 그렇지. 박원빈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하긴 나랑 형은 그냥 형 동생 사이인데 안 될 건 또 뭐야. 괜히 어림짐작해 이런저런 생각을 한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웠다. 근데, 막상 정성찬이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구니까 왜 내 기분이...
정성찬 옆에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게 싫었다. 정성찬을 제일 잘 아는 사람도, 제일 친한 사람도, 제일 가까운 사람도 다 박원빈이어야 하는 건데. 그게 맞는 건데.
박원빈은 그때야 깨달았다. 나는 성찬이 형을 좋아했구나, 10년 전 형을 처음 봤을 때부터 쭉.
그때부터 박원빈은 정성찬을 죽기 살기로 피해 다녔다. 참 신기한 게, 평상시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딱 그 마음을 먹고 나서는 안 보고 싶어도 보여서 진땀을 꽤나 흘렸다. 이럴 땐 정성찬이랑 동갑내기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같은 학년이면 피하는 게 더 어려웠을 테니까.
또 몰랐는데 정성찬은 그동안 꽤 여자친구를 사귄 모양이었다. 주말 낮에 약속이 있다며 나가는 정성찬을 보며 이모가 또 여자친구 만나러 가냐고 했을 땐, 그냥 우스갯소리인 줄 알았는데. 그 모든 말들이 진짜였다는 걸 알게 되니까 엄마와 이모 틈에 껴서 딸기나 집어 먹고 있던 제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지나간 시간을 후회한 만큼 흘러가는 시간도 빨랐다. 고1 박원빈과 고2 정성찬, 그리고 고3이었던 정성찬 여자친구는 모두 다 한 바퀴를 돌아 나란히 고2, 고3, 그리고 스물이 됐다. 바뀐 환경 탓이었는지, 아니면 중요한 시기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정성찬은 고3이 되면서 그 누나와는 헤어졌다고 했다. 박원빈은 그 소식을 듣고선 아주 오랜만에 정성찬과 밥을 같이 먹었다.
물론 정성찬이 한 살 연상 누나와 사귀었다 헤어진 것과는 별개로, 박원빈은 여전히 정성찬을 좋아하고 있었다. 다행히 ‘고3’이라는 제일 좋은 핑계가 있어서 지난해보다는 정성찬을 피하는 게 제법 수월해졌다. 가끔은 등교도 같이했다. 그리고 또 가끔은 하교도 같이했고.
이제 이 정도 거리감에는 면역이 생겼다 스스로 자부할 때쯤엔, 박원빈은 또다시 다른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정성찬이 졸업을 했기 때문이다. 정성찬도 그때 그 누나처럼 스무 살이 됐고, 정성찬보다 먼저 스무 살이 됐던 그 누나랑 다시 만나게 됐다고 전했다. 그 말을 들은 박원빈은 정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허공에 외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득바득 일 년을 겨우 따라잡았더니 결국 정성찬은 제가 따라잡지도 못할 만큼 앞서가고 있었다.
졸업식 날, 형 먼저 대학 가는데 이번엔 안 울어 주냐는 짓궂은 질문에 박원빈은 망설임 없이 정성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사심 조금 더 넣어서 세게. 내내 굳은 얼굴로 짜장면을 우물우물 씹고 있는 박원빈을 보고 어른들은 원빈이가 이제 혼자 학교 다닐 생각에 서운한가 봐. 하고 짐작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굳이 정정하자면 그건 서운한 게 아니라... 좆같은 거였다. 정말로.
어쩐지 정성찬이 공부를 유독 열심히 한다고 했더니, 실연의 아픔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해 그런 거였다. 그 누나랑 같은 학교에 들어가는 걸 목표로 했던 정성찬은 다행히 바로 옆 학교에 합격하는 것에 성공했다. 당연히 박원빈은 그때까지도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냥 정성찬의 목표 대학이 거기였겠거니 생각했었고.
그날 박원빈은 군만두를 우물우물 씹으며 다짐했다. 언제까지고 정성찬만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형이 먼저 대학에 들어갔겠다, 눈에 안 보이는 틈을 타 깔끔하게 마음 정리하고 고3 노릇이나 제대로 해야지. 대학에 들어가서 기숙사에 살든 자취를 하든, 얼른 집을 나가 정성찬 얼굴이라도 자주 안 보면 마음도 멀어질 것만 같았다.
박원빈 집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학교는 꽤 입결이 높은 곳이었다. 저길 들어가려면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박원빈은 잘만 다니던 학원 대신 과외를 시켜 달라고 엄마를 졸랐다. 얘가 갑자기 웬 과외? 성찬이 형한테 가르쳐 달라고 해. 아들 속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엄마에게 박원빈은 입술만 달싹이다 엉성한 핑계를 댔다. 형은 바쁘, 바쁘댔어...
절대로 성찬이 형은 안 된다는 박원빈의 성화에 결국 다른 선생님을 구해 과외를 받기 시작했다. 과대인지 뭔지, 그런 걸 맡아 하게 됐다는 정성찬은 요즘 통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 박원빈은 모의고사 기출 문제지 위로 정성찬의 얼굴이 둥둥 떠오를 때마다 샤프로 직직 그어대며 문제만 열심히 풀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을까, 시험도 끝났겠다 오랜만에 여유롭던 주말에 반찬 좀 갖다주고 오라는 엄마의 말에 박원빈이 늘어지는 몸을 일으켰다. 귀찮은데... 하고 투덜대면서도 사실 속으론 정성찬과 마주칠까 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쓸데 없는 소리 말고 얼른. 기다렸다는 듯 내려앉는 잔소리에 아 알겠어... 하곤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집 앞에 섰다. 이 시간에 설마, 당연히 자취방에 있겠지.
그런데 벨을 꾹 누르니 이모 대신 정성찬이 문을 벌컥 여는 게 아닌가. 혹시나, 하고 생각했던 박원빈은 막상 기다렸던 얼굴이 나타나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품 안에 반찬통을 턱 하고 안겨 줬다. 그런 박원빈을 보는 정성찬의 표정이 어딘가 묘했다.
“어... 형 있었네. 그... 엄마가 이모 드시라고 조금 싱겁게 했댔어. 반찬통은 안 돌려주셔도 된대.”
“... 응, 알겠어. 잘 먹을게.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줘.”
“......”
“저기, 원빈아.”
“... 응.”
“별일 없지?”
“일은 무슨, 그런 거 없어.”
거짓말 못 하는 박원빈이 정성찬의 눈을 똑바로 못 보고 곧장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빼꼼 보이는 정성찬의 슬리퍼만 내내 쳐다봤다. 예전부터 형이랑 발 크기 하나는 똑같았는데, 지금도 그러려나.
“... 그래, 그러면 됐다. 가끔 연락해. 형이 밥 사줄게.”
“... 응. 알았어.”
대충 손을 들어 올려 휘휘 흔들며 인사를 한 박원빈이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뻗친 뒷머리를 매만지며 물이라도 적시고 나올 걸 그랬나... 하고 잠시 생각했으나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마 정성찬 성격에, 박원빈이 저를 피하는 게 서운할 거다. 대놓고 물어 보고는 싶은데 예민한 시기라는 걸 알고 있으니 물어보지도 못할 거고, 그러니 저렇게 빙빙 도는 질문만 하다가 대화가 끝나지. 정성찬은 주위에 참 무관심한 것 같다가도 이러는 거 보면 은근 세심하고 다정한 면이 있었다. 그게 박원빈이 정성찬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고.
여태껏 누리고 있던 특권인 정성찬의 다정은, 이제는 박원빈의 것이 아니게 됐다. 그걸 인정하는 게 제일 어려웠다. 밤늦게까지 독서실에 있다가 집으로 가던 날, 정성찬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여자친구랑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을 그냥 멍하니 보게 될 만큼 잘 어울렸다. 빼도 박도 못하게 눈이 마주쳐 엉겁결에 인사를 꾸벅 하니 정성찬은 답지 않게 당황한 듯 보였다.
나중에 꼭 우리학교로 왔으면 좋겠다. 정성찬의 여자친구는 박원빈더러 그렇게 말했다. 박원빈은 그 짧은 한 문장을 한참이나 곱씹었다. 머리로는 정성찬의 친한 동생 포지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아는데, 마음은 자꾸 전지적 짝사랑 시점으로 전개가 돼서. 그래서 좀 힘들었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니 정성찬은 원빈이가 낯을 많이 가려서 그래. 하고 대신 상황을 무마했다.
짝사랑을 한다는 건 역시 쉽지 않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보 같아질 수 있구나, 하고 참 여러 번 깨닫는다. 어째 마음을 접기로 다짐했던 그 순간부터 점점 더 정성찬이 좋아지기만 하는 건지. 박원빈이 홧홧해지려는 눈가를 꾹꾹 눌렀다.
박원빈은 이젠 아예 학교-학원-독서실-집을 오가며 오로지 공부만 했다. 대학을 떠나서 단순히 어딘가에 집중할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고, 고등학생 신분이던 박원빈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무언가에 열심히던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매진하던 박원빈은 고대하던 수능을 치르곤 곧장 집으로 달려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내리 잠만 잤다.
수능 성적표를 받아볼 때까지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이제 난 뭘 하면서 지내야 하지. 마음이 헛헛하고 어딘가 텅 빈 것 같은 회의감이 몰려왔다. 달랑 종이 한 장으로 인생이 뒤바뀌는 경험을 다들 겪었다는 게 좀 이상했다. 형도 그랬을까. 자연스레 저보다 먼저 어른이 된 정성찬 생각이 뒤따라왔다.
박원빈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정성찬은 코트를 차려입고 차까지 끌고 나와 꽃다발을 건네줬다. 성찬이가 태워 줘서 편하게 왔다는 제 부모님들의 말에 박원빈은 목덜미를 긁적이기만 했다. 면허는 또 언제 땄대. 한참을 서서 얘기하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대는 게 느껴져 박원빈은 사람이 많다는 핑계를 삼아 정성찬의 코트 자락을 쥐고 제 쪽으로 조금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건 박원빈의 티끌만 한 용기이기도 했다. 이제 진짜로 어른이 됐으니까, 지긋지긋한 짝사랑 좀 끝내자는 염원이기도 했고.
“형 바쁘면 먼저 가 봐. 밥은 그냥 우리끼리 먹어도 되니까...”
“넌 요즘 나만 보면 자꾸 보내려고 하더라? 형 섭섭하게.”
“그게 아니라...”
“나 지금 되게 외로운 상태야. 너까지 나 내치고 그러지 마라, 박원비니.”
“... 형 설마 헤어졌어?”
“엉. 좀 됐지.”
그리고 그런 박원빈의 염원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성찬이 그 누나랑 헤어졌다. 게다가 정성찬과 같은 대학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와, 진짜 징글징글하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될까 싶었다. 집이랑 거리가 좀 떨어져 있단 핑계로 자취를 하면 안 되느냐는 박원빈의 질문에 엄마는 이모를 소환했다. 이건 아니지, 엄마.
“원빈아, 그냥 성찬이 형이랑 같이 살아. 이모가 잘 말해줄게.”
“그래, 엄마도 너 혼자 나가 사는 것보다 성찬이랑 있으면 좋지.”
“아... 그래도 좀... 형이 불편해할 것 같은데.”
“얘는, 형 서운하겠다. 괜찮아.”
“아 이모 그래두요... 저 그냥 기숙사 들어가도 돼요...”
박원빈이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작게 항의했다. 지금 상태에서 정성찬이랑 같이 사는 것보다 차라리 생판 모르는 남이랑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혹시, 진짜 혹시나... 성찬이 형이 나랑 같이 사는 거 싫다고 하면 어떡해. 박원빈의 기저에는 사실 그런 마음도 있었다. 지금은 일곱 살 박원빈이 아니니까.
일단 기숙사 신청부터 해 보겠단 박원빈의 고집에 어른들도 못 이기는 척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타지역 친구들을 위주로 뽑는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그 경쟁률을 뚫고 박원빈이 당첨될 수도 있으니 아직 포기하긴 일렀다. 그리고 당첨 여부를 확인하던 날, 명단을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박*빈’ 이라는 글씨를 찾아볼 수가 없는 상황에 그대로 머리를 감싸 쥐고 한숨을 푸우우 내쉬었다. 망했다...
잔뜩 고집은 부려놓고 보란 듯이 캐리어 하나에 짐을 쑤셔 넣고 정성찬의 자취방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박원빈은 몇 번이고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본가에서 통학하겠다고 할까... 휴대폰으로 의미 없이 길 찾기만 검색하길 여러 번, 갑자기 울리는 전화에 박원빈이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 여보세요.”
“어, 원빈아. 어디쯤이야?”
“아, 나... 나 거의 다 왔어. 곧 도착할 것 같애...”
“응, 알겠어.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조심히 와.”
“어어...”
정성찬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니 더 긴장되는 것 같았다. 내가 진짜 형이랑 산다고? 둘이? 박원빈이 반사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차라리 길바닥에서 자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캐리어를 질질 끌고 들어간 정성찬의 오피스텔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이모가 평소에 집안일을 자주 시킨 보람이 있겠단 생각을 하곤 몰래 웃을 만큼. 투룸이긴 한데... 실평수가 그렇게 크게 빠지진 않아서 너 쓸 방이 좀 작아. 방을 기웃거리는 박원빈의 뒤에서 정성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있던 사람 집에 대뜸 들어온 건 박원빈인데 어째 정성찬이 더 눈치를 보는 듯했다. 됐어, 뭘 그런 거 가지고... 괜찮아. 제법 심플한 대답을 툭 내뱉곤 대충 구석 자리에 캐리어를 놓았다.
정성찬이랑 같이 산다는 건, 생각보다 괜찮기도 했고 생각보다 힘들기도 했다. 전자는 아마 예전부터 가족처럼 지내왔던 덕택일 테고, 후자는 그 덕에 정성찬을 좋아해 버린 박원빈의 탓일 테다. 묘하게 어색하고 데면데면한 채로 계속 지내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던 박원빈이 그냥 다음 학기부턴 본가로 돌아가겠다고 얘기하자 그건 또 안된다고 차라리 본인이 나가겠다는 정성찬 때문에 또 입을 합 다물어야 했다.
정성찬은 정말로 박원빈을 친동생처럼 생각할 텐데, 혼자서 온갖 생각 다 하고 말도 못 하고 끙끙대는 짓은 이제 더 이상 안 하고 싶었다. 팀플 회의가 있어 늦는다는 정성찬의 톡에 답장도 하지 않고 집 앞 편의점에서 팩 소주를 들이킨 박원빈은 멍한 정신을 붙들고 집으로 향했다. 신입생이라고 술을 하도 먹어서 그런지 이젠 웬만큼 마셔도 취하지도 않았다, 진짜 짜증 나게.
오피스텔 앞에 서 있는 익숙한 태를 보고도 박원빈은 취한 척, 부러 비틀거리며 정성찬을 지나쳐 갔다. 아니나 다를까 팔뚝이 잡혀 몸이 순식간에 휙 하고 돌아갔다. 아, 이러니까 좀 어지러운 것 같기도... 눈을 부릅뜨고 초점을 맞추니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정성찬이 보인다. 박원빈의 시선이 정성찬의 입술로 향했다가, 이내 땅으로 푹 꺼진다.
뭐라고 잔소리를 하려던 것 같았는데, 정성찬은 예상외로 군말 없이 박원빈을 거의 들어다 집까지 향했다. 비밀번호 똑바로 칠 정신은 있었는데 아예 주정 부리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것 같아 박원빈도 잠자코 있었다. 정성찬은 아무렇지도 않게 박원빈의 패딩도 벗겨주고 양말도 벗겨주고... 푹신한 침대가 머리맡에 닿자 희한하게 취기가 확 오른 박원빈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불도 안 켜고 적막만 감도는 좁은 방 안에서, 서로의 숨소리만 들리는 상황이 숨이 막히도록 긴장됐다. 차라리 뭐라고 말을 꺼내 줬으면 못 이기는 척 씻으러 들어가려 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저를 내려다보고만 있는 정성찬 때문에 눈만 가만히 감고 있는 박원빈의 모든 감각들이 잔뜩 예민해졌다.
자는 척 숨만 푸우, 내쉬던 박원빈이 결국 못 참고 잠투정을 부리는 시늉을 하며 정성찬에게서 등을 돌렸다. 일정하게 숨을 내쉬면서도 들킬까 조마조마한 마음에 심장 소리가 점점 커져가던 그때, 정성찬이 나지막하게 박원빈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 봤던 날부터 지금까지 수도 없이 불렸을 이름인데, 원빈아 하는 그 세글자가 왜 이렇게 마음을 물렁물렁하게 만드는지. 박원빈이 눈을 뜨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너 자는 거 맞지, 그치.”
“......”
“있잖아, 혹시 형이 뭐 잘못한 거 있어? 오늘도 그래서 술 마신 거야?”
“......”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형은 모르겠어... 너랑 여태까지 잘 지내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왜 자꾸 네가 날 피하는 것 같지.”
“......”
“형이 뭐 잘못한 거 있으면 말해 주라, 원빈아. 형은 너랑 예전처럼 지내고 싶단 말이야...”
박원빈이 울음을 참느라 입안 여린 살을 아프게 깨물었다. 정성찬의 한탄 같은 혼잣말을 들으며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안간힘을 썼다. 정말 한마디만 더 하면 이젠 박원빈도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만 같았다. 내가 무슨 수로 참았는데, 무슨 수로 여기까지 왔는데. 단 한 순간의 감정으로 이 관계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무슨 마음으로 옆에 있었는데 어떻게... 예전처럼 지내고 싶다는 말을 꺼내, 정성찬.
박원빈이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박원빈의 행동에 짐짓 놀란 듯 정성찬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창문 틈으로 새어 나와 두 사람의 얼굴을 밝혔고,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박원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원빈아, 너 울어? 왜, 왜... 어디 아파? 잠시만 내 폰이...”
“형.”
“어어, 원빈아.”
“나 형이랑 예전처럼 못 지내. 아니, 예전처럼 지내기 싫어. 이 집에서 형이랑 같이 사는 것도 다 싫어 죽겠어.”
“... 뭐라고?”
“형은, 형은... 하나도 모르잖아. 내가 언제부터 형 좋아했는지, 마음 접으려고 나 혼자 얼마나... 아무것도 모르잖아, 형.”
“......”
쪽팔린 것도 모르고 박원빈은 정성찬 앞에서 엉엉 울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그간 속상했던 걸 다 토해내기라도 하듯, 술기운을 빌려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쏟아붓고도 모자라 종국엔 온 얼굴이 축축해졌다. 그러니까 나 좀 가만히 놔둬... 멀쩡히 여자친구 잘 만나던 사람 망치기 싫어 나... 박원빈은 본인이 한 말에도 상처받을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다음 날부터 박원빈은 정성찬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박원빈의 짝사랑 계획 중 가장 마지막 단계였다. 최후의 통첩과도 같은. 억지로 미소를 띠고 말을 걸고, 밥을 챙기던 정성찬도 며칠 내내 이어지는 박원빈의 일정한 태도에 포기한 듯 돌아섰다. 저를 흘깃 보고서도 아무 말 없이 도어락을 여는 정성찬의 뒷모습을 보던 박원빈은, 정성찬이 사 둔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 먹다 말고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참았다. 생각보다 더 힘드네, 이거.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박원빈의 고백으로 정성찬이 흔들리기라도 해서 호기심에 저를 만나게 된다면? 그렇게 연애라는 걸 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가 평화로울 수 있을까. 어차피 결국 헤어져서 남이 될 관계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맞다. 늘 그랬던 것처럼 가족 같은 사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저 하나만 정리하면 될 마음, 정성찬에게까지 짊어지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박원빈은 정성찬이 나가면 집에 들어오고, 정성찬이 들어오면 밖을 나가거나 방 안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안 나갔다. 정성찬의 패턴에 맞추려니 꽤 힘들어서 종강한 다음인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안팎으로 신경을 너무 써서 그랬는지, 어쩌면 당연한 수순처럼 박원빈이 감기 몸살에 걸렸다. 새벽부터 으슬으슬 떨리는 몸에 박원빈이 이불을 한 아름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와 추운데 덥고 더운데 추워... 저도 모르게 온기를 찾아 구석으로 꾸물꾸물 몸을 옮기는데,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정성찬이 들어왔다.
박원빈. 일어나, 병원 가자. 차키가 짤랑이는 소리를 듣자 하니 이 아침 댓바람부터 큰 병원이라도 갈 기세라 박원빈이 겨우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 정도 아니야, 오바하지 마... 어릴때부터 이렇게 갑작스럽게 크게 아프곤 하던 터라 자연스레 정성찬이 그런 박원빈을 챙겨주곤 했었다. 사이가 이렇게 돼도 여전하구나 정성찬은.
“고집 피우지 말고, 얼른 병원부터 가.”
“아 괜찮다고... 좀 자고 일어나면 돼...”
“넌 이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와?”
“... 그러는 형은, 이 상황에서도 날 챙기고 싶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욱하듯 튀어나온 말에 박원빈은 속으로 살짝 후회했다. 이렇게까지 얘기할 생각은 없었는데. 금방이라도 터질 풍선처럼 위태로운 분위기 속에, 대치하듯 한참을 보고만 있던 정성찬이 집 안 어디를 마구 뒤지더니 갈아입을 옷이랑 쿨시트를 챙겨 왔다. 그런 정성찬 고집은 박원빈도 못 꺾어서, 체념하듯 옷을 받아 들고 훌렁 갈아입었더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린다.
“형한테 나는 진짜 그냥 동생이야?”
“......”
“아무리 그래도 이 나이에 쿨시트가 뭐냐, 애도 아니고.”
“......”
“근데 이제 이렇게까지 나 안 챙겨도 돼. 나 더 이상 착각하기 싫어, 형.”
박원빈이 쿨시트 포장을 힘없이 죽 뜯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하라는 대로 하고 정성찬을 빨리 이 방에서 내보내고 싶었다. 기력이 빠져서 그런가, 이런 공기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애써 웃으며 자조하듯 말한 마지막 문장에도 정성찬은 무언갈 참고 있다는 듯 가만히 박원빈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박원빈은 본인이 예측한 대로 움직인 적 없는 정성찬이 이번엔 또 무슨 말을 꺼낼지 두려웠다.
“못 들었어? 거기 가만히 서서 왜...”
“그게 왜 착각이라고 생각해, 박원빈.”
“... 뭐?”
“왜 너 혼자 맘대로 단정 지어 버리냐고.”
순간 아파서 정신이 나가 버린 건가, 아님 꿈을 꾸는 건가 생각했다. 멍한 얼굴을 하고 정성찬을 쳐다보면 마른세수를 몇 번 하더니 그대로 제 침대 끝에 풀썩 앉는다. 너 아픈데 이런 얘기 안 하고 싶어, 일단 열 내리면 그때 얘기해. 정성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다 저를 향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뜨끈한 이마며 볼을 쓸어주는 미지근한 손에 박원빈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형 그게 무슨 말인데, 똑바로 얘기해. 초조한 마음에 목소리 끝이 볼품없이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찬의 말을 지금 당장 끝까지 듣고 싶었다. 대체 뭐가 내 착각이냐고, 형.
“... 원빈아. 우리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가족처럼 지내 왔잖아, 서로.”
“... 그게 왜, 뭐가 어때서...”
“근데, 우리가 그런 허술한 핑계로 같이 살기엔... 사실 그냥 남이잖아, 너랑 나는.”
“......”
박원빈이 덮고 있는 이불 무늬를 손으로 따라 내려가며 한 마디 한 마디 꾹꾹 눌러 내뱉던 정성찬이 평소처럼 다정히 눈을 맞추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솔직히, 나도 내 마음을 잘 몰랐다고. 정성찬이 그렇게 말해왔다. 박원빈에게.
밖에서 술 마시고 빨개진 볼을 하고 들어오는 박원빈을 볼 때마다 누구랑 마셨는지, 왜 이렇게까지 마셨는지, 그게 혹시 나 때문인 건지... 정성찬은 누구보다도 박원빈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실수로라도 박원빈의 샴푸 냄새가 코끝에 스치면 심장이 뛰어서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고, 조금이라도 꾸미고 약속을 나갈 때면 누구랑 만나는지 내심 궁금했었다. 그치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원빈한테 이런 마음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혼란스럽고 죄책감이 들어 둘 사이에 달라진 기류를 대충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처음엔 여자친구랑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건가, 싶었다. 외로움을 못 이겨 스스로 감정을 착각하는 게 아닐까 하고.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정성찬도 다른 누군가를 만나면 이런 마음이 좀 가라앉을까 하기도 했다. 그치만 아무리 노력해 봐도 박원빈 말고는 신경 쓰이는 사람이 없었다. 박원빈의 세상이 온통 정성찬이었던 것만큼, 정성찬의 세상도 조금씩 박원빈으로 채워지고 있던 거였다.
근데 그 타이밍에 박원빈이 엉엉 울면서 고백을 한 거다. 이미 마음을 접어가는 것 같은 그 얼굴이 너무 힘들고 괴로워 보여서 어떻게든 다시 원래대로 돌리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그런 상황임에도 박원빈을 가만히 못 두고 보는 저 자신을 보니 그냥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라도 말해 보고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런 타이밍에 말하게 될 줄은 몰랐지.
“... 형, 형이 헷갈리는 거 아니야...? 내가... 내가 형 좋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호기심에 그냥...”
“있잖아, 원빈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네가 내 옆에 없다는 걸 상상할 수가 없더라. 너 옆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게 싫어.”
“거짓, 거짓말... 이제 와서 그러는 게 어딨어, 정성찬...”
아이고... 너 울까 봐 지금 말하기 싫었는데, 일로 와. 정성찬이 코가 빨개져 입술을 삐죽이는 박원빈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큰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는데도 퐁퐁 솟아나는 눈물에 정성찬의 눈꼬리가 같이 내려간다. 그만 울어어... 너 열 오른다, 응? 애가 타는지 애를 안았다가 토닥였다가 쓰다듬었다가. 빙빙 둘러 늦게서야 도착한 마음이 오늘만큼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양손에 들어차는 조그만 얼굴을 하염없이 보다가 울어서 퉁퉁 부은 입술을 놀렸다가. 안쓰럽고 짠한 마음과는 별개로 사랑스럽단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와서, 일곱 살 박원빈을 달래주던 그때처럼 못 참고 발간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흐어엉... 울지 말라고 그런 건데 이젠 소리 내어 우는 박원빈 때문에 결국 정성찬의 입가로 웃음이 샌다.
아픈 데다 그간의 서러움이 몰려와서 그런지 박원빈은 자꾸 정성찬 목에 매달려 따끈한 볼을 폭 기댔다. 열기가 훅 끼치는 몸을 한참이나 토닥여 주니 훌쩍이던 게 멈추고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린다. 울다 지쳐 잠든 얼굴을 보다 눈물 자국을 마저 닦아 준 정성찬이 이마, 눈가, 볼에 차례로 소리 없이 입술을 내렸다.
감기 옮는다고 좀 나가라는 박원빈의 만류에도 정성찬은 열이 다 떨어질 때까지 옆에 꼭 달라붙어 있었다. 형 그 누나한테도 맨날 이렇게 했냐고 가자미눈을 뜨고 흘겨보는 박원빈에게 대답 대신 입술을 쭈욱 내밀면 도톰한 입술이 아닌 손바닥에 가로막힌다. 짜증 나, 열 받아. 그럼 툴툴대는 박원빈을 달래느라 정성찬 등줄기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다행인지 박원빈은 한 차례 아프고 나니 컨디션이 배로 좋아졌다. 물론 이제 괜찮다고 기세등등하게 말하는 박원빈을 보고 정성찬은 집 앞 편의점에 갈 때도 애를 꽁꽁 싸맸다. 모자까지 푹 눌러 시야가 좁아질 지경이 되어서야 만족한 듯 웃는 얼굴에 박원빈도 혀를 찬다. 형 진짜 이거 과보호야. 말과는 다르게 입꼬리는 꾸물꾸물 올라간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다가도 둘은 못다 한 얘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언제부터 나 좋아했냐는 정성찬의 물음에 박원빈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 처음부터. 라는 간단명료한 대답을 내놓았다. 에이, 그게 뭐야. 정성찬이 웃음을 흘리며 대꾸하자 박원빈은 발끈한 듯 말을 이어갔다. 진짜야. 나는 형 처음 봤을 때부터 쭉 좋아했어. 까만 눈동자가 결백을 주장하는 듯 정성찬을 빤히 바라봤다. 아아, 이건 반칙이지. 정성찬은 늘 박원빈의 그 눈동자에 약했다.
어쩌다 보니 연애보다 동거를 먼저 시작한 꼴이 된 터라 별다른 데이트 없이 집에서만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둘은, 내일은 진짜 나가자. 다짐해 놓고서도 막상 다음 날이 되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집에 콕 붙어 있었다. 사실은, 영화니 전시니 하는 걸로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컸다. 게다가 잘 꾸며 놓은 본인 방 멀쩡히 놔두고 밤만 되면 밍숭맹숭한 얼굴로 베개를 들고 찾아오는 박원빈을 보면... 그냥 얘랑 이러고 평생 있고 싶단 생각밖에 안 들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어릴 때부터 유독 천둥번개를 무서워하던 박원빈이 떠올라 장난 반 농담 반으로 원빈이 오늘은 형이랑 같이 잘까? 하고 어깨를 감싸안았던 게 화근이었다. 귀 끝이 빨개진 채로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박원빈은 그날 정성찬의 품에서 입술이 팅팅 불도록 깊게 잠을 자고는 그 뒤로 계속 이렇게 찾아오는 게 아닌가. 형이랑 있으니까 잠이 잘 오는 것 같아. 정작 정성찬은 너른 품에 쏙 들어오는 박원빈을 한가득 끌어안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데.
그 덕에 해가 뜰 때쯤이면 이미 정성찬은 몸이 근질근질했다. 박원빈이야 어릴 적 앨범만 봐도 맨날 내복 차림에 잠옷만 입고 있을 정도로 집돌이라지만, 정성찬은 얼굴과 무릎에 상처 하나씩은 꼭 달고 있는 개구쟁이였으니까. 새근새근 잘 자는 얼굴을 보는 것도 좋긴 했으나... 움직여야 에너지를 얻는 정성찬에게 그건 좀 힘든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몇 분에 걸쳐서 제 허리며 다리에 감긴 팔다리를 조심스레 떼어내고 일어났더니 박원빈은 또 귀신같이 잠에서 깼다. 형 어디 가는데... 발음도 다 풀려서 흐물흐물. 눈도 못 뜨고 저를 찾는 게 귀여워서 운동 갔다 올게. 하고 볼을 가만가만 쓸어주면 웅... 갔다 와... 하고 다시 까무룩 잠에 든다. 차디찬 아침 공기를 실컷 맡으면서도 입술을 오물거리는 박원빈 얼굴만 생각하던 정성찬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고개를 내젓고 왔던 길을 다시 세차게 뛰어간다.
그 와중에도 편의점에 들러 패딩 양 주머니에 젤리를 가득 채워 넣고는 급하게 집에 들어가면 아직 자고 있는지 조용한 공기가 맴돌았다. 찬 기운을 빼려고 서둘러 패딩부터 벗어 던지고 따뜻한 물로 손을 씻은 정성찬이 곧장 방으로 들어가 이불에 폭 파묻혀 있는 얼굴을 잡아다 연신 뽀뽀부터 한다. 장난기를 못 숨기고 뜨끈뜨끈한 박원빈 목덜미에 손을 대면 아 차가워... 하는 볼멘소리와 함께 힘 하나도 안 들어간 손으로 정성찬 팔뚝을 죽죽 밀어낸다.
아무튼 이젠 정말로 손잡고, 안고, 뽀뽀하는 단계는 자연스럽게 지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잘게 입을 맞추고 어딘가 한 군데는 꼭 붙어서 체온을 나누는 건 익숙했다. 근데, 문제는 그 이상이란 말이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성찬과 박원빈은 친한 형 동생 사이에서 오랜 시간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시간을 쌓아왔는데, 이제는 연인으로서의 감정을 느끼고 공유하는 게 너무 달라서 낯설었다. 뽀뽀는 그래도 어릴 때도 종종 싸우고 나면 했었으니까, 아주 이상하지는 않았는데...
박원빈이랑 같이 드라마 정주행을 하다가도 키스신만 나오면 둘 다 침만 꼴깍 삼키고 티 나게 굳어서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얼른 그 장면이 지나가길 빌었다. 그렇다고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하면 더 했지. 그치만... 순간적으로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자꾸 멈칫하게 됐다. 좋은 것과 별개로... 이건 다른 문제였다.
그런 생각을 한번 하기 시작하니까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이젠 뭐만 하면 그 통통한 입술부터 보이는 바람에 정성찬은 하루에 몇 번이고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박원빈이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박원빈은 저를 만나기 이전에 여자친구가 있었던 것도 알고, 할 거 다 해봤을 거라는 것도 다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정작 스킨십이 조금이라도 진해지려고 하면 눈에 띄게 피하는 정성찬을 보면 마음이 좀... 그랬다. 막상 사귀고 나니까 이 정도는 아닌가, 아직 그런 단계까지 가기엔 싫은가.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먼저 입술부터 들이밀까 싶다가도, 만약 박원빈의 예상이 맞다면 뒤에 벌어질 정성찬의 표정, 말투, 행동까지... 그 모든 걸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닌 척 농담으로 진심을 숨겨가며 박원빈도 그런 상황을 피했던 건데, 그동안 의식하지 않았던 작은 터치에도 분위기가 자꾸 미묘하게 흘러가니까 당혹스럽기만 했다. 분명 정성찬 품에 안겨서 잘만 자 놓고, 이젠 막상 안기려니까 심장이 너무 뛰어서 얼른 눈부터 감아버려야만 그 분위기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오늘은 왜 형 안 봐줘, 박원빈?”
“... 내가 뭘,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그래도 잘 자라고 인사는 해 줘야지. 그것도 안 해줄 거야?”
“아, 형이 애야... 얼른 자...”
근데 오늘따라 정성찬이 왜 이렇게 보채냐고. 이젠 아예 제 볼에 입술을 내리는 정성찬의 행동에 박원빈이 어쩔 줄 몰라 가슴팍에 안기는 척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겨댔다. 나름 잘 대처했다고 생각했는데, 저 못지않게 쿵쿵거리며 세차게도 울리는 정성찬의 심장 박동을 들으니 박원빈의 머릿속이 온통 하얘졌다. 이건 예상 밖이었다.
짠 듯이 침묵에 빠지게 되고, 무어라 말하려고 박원빈이 고개를 든 찰나 언제부터였는지 저를 내려다보고 있던 정성찬과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다급히 시선을 내렸더니 이젠 아예 정성찬의 입술로 눈길이 가서 망했다 생각한 박원빈이 눈을 꾹 감아버리던 그때, 크고 따뜻한 손이 볼을 감싸더니 순식간에 입술이 닿아온다.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의 점막이 달래듯 천천히 머금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숨을 턱 끝까지 참고 있던 박원빈이 더운 숨을 내뱉었을 때, 정성찬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비틀어 깊게 입술을 맞물린다. 물기 어린 소리가 방 안을 울리는 게 짜릿할 정도로 자극적이라 발가락이 절로 곱아들었다. 귓가로 들어오는 마찰음이 민망할 만큼 간지럽게 느껴져 박원빈이 고개를 뒤로 물리고 입술을 먼저 떼어냈다.
정성찬도, 박원빈도 엉킨 호흡만 고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침묵이 아까와는 다른 공기를 자아냈다. 장난스럽고 가벼운 입맞춤이 아닌 키스 한 번에 진짜 연인으로 넘어온 것 같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크게 변화했다는 게 몸소 느껴졌다.
“나 형 진짜 좋아하나 봐...”
“......”
“좋아해, 형.”
“... 박원빈.”
“그냥, 지금 말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나도... 나도 좋아해, 원빈아.”
정성찬이 벅찬 듯 박원빈을 가득 차게 끌어안았다. 사랑을 눈에 가득 담고, 망설임 없이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애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정성찬이야말로 박원빈이 저를 졸졸 쫓아다녔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좋아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걸 깨달은 순간, 마음 한구석 깊은 곳 기저에서부터 확신이 생겼다. 그 어떤 말로도 완벽히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관계는 분명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빙빙 돌아 만난 만큼 앞으로 다시는 이 거리가 멀어지지 않게 할 거란 다짐을 마음속으로 묵묵히 새겼다.
앞으로도 정성찬과 박원빈은 늘 그랬듯이 서로를 치열하게 부딪쳐가며 함께 자라고, 꿈꾸고, 사랑할 것이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처럼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