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도
by. 계피
나랑 놀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이거 비밀인데 형이랑 있을 때가 제일 재밌어요
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글자를 따라간다. 정성찬이 책장을 넘기자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고요한 병실에 가라앉았다.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과도할 정도로 친절을 가장한 목소리는 무테안경을 착용한 의사의 것이다. 의사는 자신의 환자를 돌볼 의무가 있다. 의대 졸업하면서 읊는 현대판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다 나오는 내용이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정성찬은 얌전히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무심코 눈이 마주친 간호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인위적이라는 표현이 잘 들어맞는 모양새였다. 차트를 끌어안고 있는 두 손에는 한껏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한다.
괜찮아요.
정성찬도 간호사를 따라 웃는 얼굴을 했다. 문득 이물감이 들어 고개를 숙이면 손등 위로 두드러진 굵은 핏줄에 꽂힌 카테터가 보였다. 폴대에 걸린 투명한 IV백 안에는 이름 모를 용액이 가득 차 있었다. 저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지금 뭘 맞고 있는지 정확히는 몰랐다. 그래도 저걸 얌전히 다 맞고 있으면 안될 것 같다는 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좋습니다. 그럼 몸 상태에 관해 몇 가지만 묻겠습니다.
의사는 준비된 서너 개의 질문을 의무적으로 했다. 정성찬은 착실히 대답했다. 많이 피곤하지는 않으신가요. 네. 서걱서걱. 차트에 무언가를 작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근육통이 있다거나 하는 증상은요. 괜찮습니다. 다른 데 불편하신 건 없으신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불편한 곳은 많았다. 아까부터 속이 메슥거렸다. 정성찬은 가벼운 어지럼증에 이마를 매만지면서도 그 증상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없습니다. 짤막한 한마디로 답을 대신하자 여태 들었던 수준과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네, 좋습니다.
기계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의사에게서 시선을 뗐다. 창가 너머로 계절감을 품은 풍경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 얼음이 미처 녹지 않은 길가 사이로 누렇게 말라붙은 풀들. 아직 겨울이 지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흔적들로 가득했다. 회진을 마친 의사는 알아보기 힘든 글씨가 적힌 차트를 간호사에게 건넸다. 성찬은 창문으로 새어드는 햇빛에 살짝 눈가를 찡그리며 의사를 올려다봤다. 안경에 빛이 반사되는 바람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미처 확인은 못했다. 아, 마지막으로요. 의사는 자리를 떠날 준비와 함께 입을 열었다. 오늘 던진 그 어떤 물음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기억은 나세요?
그리고 세 음절을 또렷이 발음했다.
가나도
광이 도는 세단이 강원도 정선 산허리를 따라 비포장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주홍빛으로 우거진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부스러진 낙엽들이 흩날리며 차 주변으로 소용돌이쳤다. 정돈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길 위를 달릴 때마다 차가 덜컹거렸다. 광고 메인 카피로 안락한 승차감을 내세우는 고급 세단이라 이 정도지 SUV였으면 누구 하나 토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도로 옆으로 위태롭게 세워져 있던 노란색 야생동물주의 표지판이 정성찬을 반갑게 맞이했다. 웰컴. 누가 갖다 박았는지 찌그러진 형태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구불구불 굽이진 산길 속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구간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조수석에 앉은 더 프레스티지 메디컬 센터 직원은 한참 전부터 루프 핸들을 꽉 쥐고 있었다. 마치 그게 목숨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 구간만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벌써 세 번째 듣는 말이었지만, 심지어 먼 길 오는 내내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지만 정성찬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네, 대답하며 웃었다. 그 짧은 찰나에도 자갈 가득 도로 위에서 차가 요동쳤다. 덕분에 목소리도 같이 흔들리면서 어색한 적막만 감돌게 됐다. 하하, 오늘따라 유독 길이 험하네요... 민망했는지 직원 목소리가 점점 수그러들었다.
사실 성찬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한 상태였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온통 숲과 바위뿐인 황량함. 야생동물들이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곳에 감히 발길을 들여놓는 것 같아 심란했다.
이런 데에 병원이 있다고?
오늘부로 강원도 정선 산자락에 처박힌 병원으로 파견 오게 된 신경과 레지던트 3년 차 정성찬은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믿어야 했다. 짐 한가득 때려 넣은 보스턴백이 트렁크 안을 구르며 내는 둔탁한 소리가 정신 차리라고 일러주는 것 같았기에.
이 세계 생태를 잘 모르는 누군가는 좌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명백한 기회였다. 전문의도 아니고 아직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으니까.
명망 높은 교수 추천으로 VIP 전용 병원에서 근무하게 되면 얻을 수 있는 메리트는 차고 넘쳤다. 한 번 만나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인사들과의 네트워크 형성, 부족함 없이 갖춰진 고가의 최신 의료 장비, 독립적인 환경에서 배울 수 있는 맞춤형 진료와 치료 프로토콜. 심지어 지금 근무 중인 병원과 달리 소수의 환자만 케어하면 되기 때문에 나머지 개인 시간은 학술 연구와 논문 준비에 쓸 수 있었다. 이 논문은 덴버에서 열릴 학술대회를 통해 발표하게 될 수도 있다. 아무도 찾지 않을 구석진 곳에 위치한 병원에서 근무해야 할 이유는 너무나도 많았다. 그렇기에 전날 야간 당직을 서고도 없는 시간 쪼개 운동까지 마친 정성찬은 최 교수의 파견 지시에 군말 없이 넵, 대답했다. 쪽잠 잔 사람답지 않게 초롱초롱한 눈빛이었다.
교수실을 나와 정성찬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병원 정보를 찾아보는 거였다.
더 프레스티지 메디컬 센터
이름에서부터 상류층만 이용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내뿜는 이 병원은 대한민국 최대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검색해도 안 나왔다. 심지어 구글링도 소용없어서 교수에게 받은 주소만 믿고 가야 할 판이었다. 이거 혹시... 좋은 기회로 파견 보내주는 게 아니라 강제 전출인가. 성찬은 그동안 잘못한 걸 되짚어봤다. 가장 크게 저질렀던 실수는 뇌전증 환자에게 리보트릴 용량을 잘못 처방한 거였고, 그대로 약이 나가기 전에 발견해서 이슈로 번지지는 않았다. 평소 행실을 돌아보면 반기별로 등급 매겨지는 평가 성적 역시 동기들보다 우수한 편이었다. 그럼 답이 없는데.
의미 없는 고민을 깊게 하는 재주 같은 건 없었던 성찬은 결국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님, 말씀 주신 곳 찾아봤는데 정보가 없어서... 이 주소가 맞나요? 그리고 그때 처음 알았다. VIP 전용 병원은 대부분 그렇다는 것을. 사생활 보호 명목으로 일부러 지도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평범하게 자라온 정성찬이 알 리 없었다. 재벌, 연예인, 유수의 대기업 임원과 그의 자제들까지 상류층이 암암리에 입원하고 치료받는 케이스가 대부분이라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은 가족에게도 누설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본래 의료법에도 환자의 신상 정보와 의료 정보를 직무 외 목적으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의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니 굳이 저렇게까지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어디까지?
어디까지가 공유할 수 있는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금지된 영역이라는 거지.
결국 가장 궁금했던 건 묻지도 못한 채 병원까지 안내해 줄 직원의 연락처만 받아왔다. 그게 벌써 2주 전 일이다.
고도가 높은 곳은 해가 금방 진다. 햇빛이 자취를 감추면서 산 중턱에 걸려있던 안개가 길 위로 내려앉았다. 탁해진 시야에 운전 속도는 저절로 겸손해졌다. 느릿느릿 오르는 산길의 똑같은 풍경 속에서 성찬은 차창 너머로 무언가를 발견했다. 공터였다. 두세 개의 놀이기구가 덩그러니 놓인. 놀이기구라기엔 낡고 부서진 데다가 군데군데 철근까지 드러나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보이는 형태는 놀이기구에 가까웠다. 심지어 뿌연 안개 속에 파묻혀 있어 분위기가 기묘했다. 유독 이런 거에 겁이 많았던 성찬의 표정이 금세 굳었다. 저거 놀이터인가요? 저만 보이는 거 아니죠...? 그 질문에 조수석에 앉은 직원이 비슷한 거예요, 하고 대답해주지 않았더라면 눈을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다음엔 뭘 물어보려고 했더라. 다 무너져가는 정글짐 안에서 사람이 나오는 걸 보고 성찬은 하려던 질문을 잊었다. 파이프가 빽빽하게 짜여 있어 빈틈이란 게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정글짐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는지조차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그나마 정글짐과 유사하게 생긴 그 기구는 사람이 드나들기에 적합하지 않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그곳을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도 선명했다. 하얗게 흐린 장막 가운데서, 오로지 팔 힘에만 의지한 채 미로를 벗어나다가, 튀어나온 철근에 팔뚝을 긁혀 기어코 선혈을 보고야 마는 뒷모습이.
"잠깐 차 좀 멈춰주세요."
망설일 것도 없었다. 다급하게 외치는 목소리에도 차 속도가 줄어들지 않자 정성찬이 운전석 헤드레스트를 흔들었다.
"저기요. 사람이 다쳤다고."
"알아요."
방금 전까지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조수석 루프 핸들을 쥐고 있던 직원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가볍게 들썩였다. 성찬이 마주한 표정은 너무나 태연했다.
"메디컬팀이 데려갈 겁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너 명의 의료진이 어디선가 몰려나와 다친 사람을 에워쌌다. 마치 애초부터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같았다. 차는 달리는 속도를 유지했다. 이내 묵직하게 깔린 안개 속으로 인영이 사라졌다. 됐죠? 더 프레스티지 메디컬 센터의 직원은 안심시키려는 듯 웃어 보였지만 정성찬은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문득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 누설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던 교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방금 있었던 일도 금지의 범주에 속하는 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아, 거의 도착했네요."
울창한 나무들 틈새로 더 프레스티지 메디컬 센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희미한 윤곽뿐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거대한 구조가 주는 위압감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누가 이런 곳을 굳이 찾아올까 싶을 정도로 깊숙한 산속에 고립된 건물. 그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시동이 꺼지니 소름 끼칠 정도의 고요함이 찾아왔다. 차에서 내렸을 땐 이미 주변이 어둑어둑한 상태였다. 스산한 분위기의 건물을 한눈에 담으려면 일반인보다 손바닥 한 뼘은 더 큰 성찬도 고개를 높이 들어 올려야 했다. 방금 전까지 조수석에 앉아있던 직원이 성찬의 앞에 섰다. 가면을 쓴 것처럼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린 채였다.
"생각하셨던 것보다 규모가 좀 있죠. 처음 보면 다들 놀라시더라구요."
이탈리아산 진회색 라임스톤을 외벽에 가득 두른 이 거대하고도 고급스럽기 짝이 없는 건물은 정성찬이 내일부터 근무해야 하는 직장이자,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비탈진 산자락에 숨겨진 VIP 전용 프라이빗 병원이다.
"더 프레스티지 메디컬 센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근무를 시작한 건 둘째 날부터였다. 도착한 첫날은 이미 늦은 시간이어서 개인 공간만 우선적으로 안내받았다. 앞으로 4개월 동안 지낼 방은 5성 레지던스 호텔 룸과 견주어도 손색없을만한 곳이었다. 정성찬은 트렁크에서 한참 구르며 먼지 뒤집어쓴 보스턴백을 내려놨다. 바닥엔 낙상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논슬립 타일이 깔려있었다. 편하게 쉬세요. 내일 오전 7시에 방문하겠습니다. 따로 챙긴 외투를 옷장 안에 걸고 있는데 그 말만 남기고 직원이 사라져버렸다. 덕분에 방 한가운데 성찬 혼자 남게 됐다. 누군가가 남긴 흔적 하나 없이 깔끔한 방을 둘러보고 있자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신경 쓰일 정도로 깨끗한 공간도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성찬은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욕실로 향했다.
씻고 머리를 말릴 때까지만 해도 존재하던 생활 소음은 어느샌가 사라져있었다. 막상 침대에 눕고 나니 너무 조용해서 이상했다. 억지로 눈을 감았다. 피곤에 찌들어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까 봤던 장면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희뿌옇게 서린 안개, 찢어진 상완을 타고 흐르던...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잔상들이 남아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성찬은 이불을 끌어올렸다.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더 프레스티지 메디컬 센터 직원은 서이원이라는 명찰 달린 유니폼을 입고는 정확히 오전 7시 1분에 정성찬을 찾아왔다. 잘 쉬셨나요? 네, 방이 좋던데요. 누가 봐도 잠 설친 얼굴을 하고 있는 성찬에게 서이원은 다행이네요 따위의 영혼 없는 말로 응수했다. 그러면서 정성찬 이름 석 자 자수가 새겨진 흰 가운을 내밀었다. 서프라이즈 선물이에요. 재미없는 농담이 함께 했다. 성찬은 입고 있던 셔츠 위로 가운을 걸치고는 병원 투어를 시켜주겠다는 이원을 따라나섰다.
"저희 병원에서 준수하셔야 할 특별 수칙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미 안내받으셨겠지만 저희 병원의 환자분들은 프라이버시 보호가 필수적인 분들이에요. 따라서 병원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항에 대해 외부에 발설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 대목에서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넘쳐났다. 병원 주변에 그런 시설이 있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철거하는 방향으로 얘기 나온 적은 없어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 병원만의 철칙일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그딴 철칙이 있다면 당장 없애는 게 의료인의 도리 아닌가. 공감은 안 가지만 수긍은 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새로운 장소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 넓은 공간은 끝이란 게 없어 보였다.
"자의로 입원하지 않은 분들도 일부 계십니다. 이런 외진 지역에 위치한 프라이빗 병원 특성상 흔히 있는 일인데, 환자 본인이 아닌 가족의 요청으로 입원한 케이스도 상당수고요. 이 점 감안해 주시고..."
꼭 지켜야 한다는 수칙과 함께 병원 내 시설에 대해서도 안내받았다. 식당, 카페, 피트니스 센터, 재활 센터, 회의실, 라운지, 휴게실, 옥상 정원까지 대충 둘러보는 데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얼핏 보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냥 막대한 자본 들여 세운 고급 병원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드는 이유를 되짚어보면...
그러니까 이곳은 지나치게 폐쇄적이다. 천연 대리석을 갖다 바른 병원 내부를 1시간 가까이 돌아보면서 성찬이 느낀 점이었다. 따로 소개받은 상급 의사들을 제외하면 병원 내에서 근무하는 직원들만 간간이 몇 명 마주쳤을 뿐, 환자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서이원의 말로는 특이사항이 없는 이상 모든 환자가 개인 병실 안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환자가 병실에서 생활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복도를 오가는 환자 한 명조차 보이지 않는 건 말이 안 됐다. 의문 가득한 정성찬의 표정에 서이원은 최대한 그를 이해시킬 수 있을만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아시다시피 저희 병원은 VIP 환자분들의 개인정보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보니, 보호 병동과 유사한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납득하긴 어려웠지만 추천해 준 최 교수의 얼굴을 떠올리며 성찬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다 보면 납득하기 어려워도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었고 지금이 그런 시점이었다.
병원 투어의 대미를 장식할 곳은 정성찬의 개인 진료실이었다. 인공조명이 내리쬐는 복도를 지날 때쯤에서야 서이원은 정성찬이 이곳에서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일러주었다.
"앞으로 4개월 동안 담당 환자의 주치의로서 일대일 전담 케어를 맡아주시는 거니 환자 상태를 지속적으로 체크해 주셔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이상 소견이 발견되면 지체 없이 상부에 보고 올려주세요."
"네."
"오전 중엔 EMR, OCS 인터페이스 교육을 해드릴 거예요. 저희는 자체 개발한 솔루션을 쓰고 있으니 업무에 차질 없도록 숙지해 주세요. 담당 환자의 첫 진료는 오후 3시에 진행될 예정이고, 진료실로 방문할 겁니다."
새로운 병원에서 일한다는 건 그만큼 새로 익혀야 할 게 많다는 뜻이다. 특히 이런 곳에서의 VIP 케어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을 거라 더욱 정신 차려야 했다. 부담되는 한편으로는 설렜다. 성찬은 기대감과 책임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 묵직한 기분을 좋아했다. 비록 동기들은 그거 좀 변태 같은 거 아니냐 했지만.
오전 내내 전산시스템과 진료 프로토콜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정성찬은 점심을 먹는 듯 마는 듯 해결하고 나서야 담당 환자에 대한 의무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수부대 해외 파병 작전 수행 중 동료와의 경험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 (PSY con*)
군 동료가 크게 다쳐 코마 상태. 이후 두통, 기억력 저하 증상 보이기 시작
잠드는데 어려움, 수면마비 및 중간에 자주 깨는 등 수면 장애 지속
*정신건강의학과 협진
병력, 검사 결과부터 그동안의 치료 과정과 경과 관찰 내용까지 쭉 훑고 나니 그제야 환자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닐 거라는 걸 알면서 신체 반응이 먼저 일어나는 고질병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 증상에 어떤 질병코드를 붙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시선을 옮기면 생년월일이 보였다. 흔한 이름은 아니었지만 당연히 동명이인일 거라 생각했다. 반사적으로 확인한 나이가 똑같았어도 그 애일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할 거라고.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성찬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슬로우모션이라도 건 것처럼 문이 느릿느릿 열렸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오는 얼굴이 익숙해서, 아니 익숙하다 못해 한번도 잊어본 적 없는 것이라 정성찬은 저도 모르게 바보 같은 표정을 지어버렸고,
"...박원빈?"
이름을 불린 장본인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듯 얼굴을 굳혀버렸다. 왼팔에 거즈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드라마에서 그려내도 이보다 극적일 수는 없을 것 같은 10년 만의 재회였다.
정성찬은 본래 남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건 어릴 때부터 그랬다. 너 그때 옷 뭐 샀지? 매장에서 신상 재킷 걸친 친구에게 괜찮네 한마디 해줬지만 어떤 디자인이었는지는 기억이 흐릿했고. 접때 내가 얘기한 애 있잖아,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부모님이 우루스 뽑아줬다는 애. 기억 안 나? 심지어 저와 관련 없는 제3자 얘기는 대체로 흘려들어 매칭이 잘 안됐다. 그게 설령 여자친구가 했던 말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생일 헷갈린 탓에 서운해하는 친구 비싼 밥 사주며 풀어주는 것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누군가에 대한 정보를 각인시키려면 노력이 필요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는 케이스도 존재했다. 예를 들면 박원빈이 그랬다.
비어있는 음악실, 책상에 걸터앉아 연주하던 어쿠스틱 기타의 음률, 고개를 들어 마주쳐오던 나른한 눈매, 열려 있던 창문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그 애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는 것까지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한 걸 보면 첫인상이 뇌리에 어지간히도 깊이 남았던 모양이다. 정성찬은 그날 우연히 음악실에 들어간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으면 서로를 영영 모른 채 졸업할 수도 있었으니까.
"미안. 일부러 들어온 건 아니야."
눈동자만 움직여 명찰 색을 스캔하면 1학년이라는 정보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름이 박원빈이라는 것도. 박원빈은 대답 없이 고개만 까딱거렸다. 연주는 멈춰 있었다. 걔 눈엔 느닷없이 난입한 방해자 정도로 보였을 거란 걸 알면서도 손끝에서 흘러나오던 기타 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음악실에 기본적으로 세팅되어 있는 기타에서 저런 소리가 날 수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더 안 해?"
"네?"
"듣기 좋았는데."
그래서인지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했다. 무심코 열었던 음악실 문 닫고 다시 되돌아 나가면 될 것을 굳이 박원빈 앞까지 다가갔다. 박원빈의 새까만 동공은 커다란 구슬 같아서 당혹감으로 물든 게 너무나 잘 보였고,
"잘 쳐서 그런가 노래 좋더라. 뭔지 알려주면 안 돼?"
가까이서 본 앳되고 잘생긴 얼굴은 흔들리는 눈빛마저 그림 같았다. 이건데요... 음악 앱으로 찾아 보여준 노래 제목보다 동그란 뒤통수를 더 오래 눈에 담고 있었으면서 이상하다는 자각조차 못했다.
성찬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원빈이 알려준 노래를 찾아 들었다. 어떤 노래는 순간의 기억을 머금어서, 가만히 듣고 있으면 머물렀던 공간과 분위기가 재생되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노래가 유난히 좋았던 건지, 아니면 박원빈이 그 곡을 연주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건지 헷갈렸다. 한 곡 반복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손끝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는데도 말이다.
원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던 정성찬이 음악실 그 애가 소문의 전학생이라는 걸 알아차린 건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사실 그런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친구들이 해준 얘기를 귀담아듣지 않아 생긴 불상사였다.
울산에서 왔다던 박원빈은 전학을 많이 다녔다고 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랬다.
잘생긴 애. 늘 혼자 다니는 애. 매일 목에 헤드셋 걸치고 등교하는 애. 몇억짜리 외제차가 학교 앞에서 픽업 드랍 다해주는 애. 수업 시간에 책상에 엎어져있는 애. 자잘한 상처들을 달고 다니는 애.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온갖 수식어들이 박원빈을 따라다녔다. 정성찬은 괴소문들이 사실인지 궁금하지는 않았고... 그냥 피곤하겠다 싶었다. 그래봤자 다 똑같이 교복 입고 학교 다니는 건데 저런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는 게. 정성찬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게 진실인지 가려낼 시간에 박원빈이 두 눈 내리깔고 마디 살아있는 손가락으로 코드 짚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굳이 동선상 필요 없는 음악실을 끼고 빙 둘러 다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떻게 아는 거예요?"
"뭘?"
"저 여기 있는 거요."
기타줄을 퉁 쳐내던 박원빈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일부러 쉬는 시간마다 들르는 거라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하루에 두세 번은 들렀고, 그러면 일주일에 한두 번은 만날 수 있었다. 솔직하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박원빈이 부담을 느낄 것 같아 저절로 말을 아끼게 됐다. 성찬은 눈꼬리 접어가며 웃었다. 박원빈 옆 책상 위로 나란히 앉은 채였다.
"그냥 올 때마다 있던데."
"..."
"신기하지."
그 말에 박원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줄을 건드릴 때마다 나무통을 따라 울리는 소리가 음악실을 채웠다.
"저 있는 거..."
"응?"
"저 있는 거 알고 오는 건 줄 알았어요."
접혀있던 눈매가 제모습을 찾아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완연하던 웃음기가 서서히 사그라지는 동안 기타 소리는 계속해서 울렸다. 열린 창문 너머로 운동장에서 애들 떠드는 소리가 섞여들어왔다. 그럼에도 어색한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도톰한 입술을 살짝 내민 옆모습을 보고 있으면 둥둥 울리는 소리가 기타가 내는 소리인지 다른게 울리는 소리인지 가늠하기 어려웠고. 청각이 혼란한 틈을 타 연이어 후각이 곤두선다. 창 너머에서 스며드는 바람을 타고 좋은 향이 났다. 처음 듣는 곡을 연주하는 박원빈에게서 나는, 아마도 샴푸 향 같은 거.
"사실 너 보러 온 거 맞아."
연주가 멈췄다.
서로를 쳐다봤고. 시선이 마주쳤고.
그 순간, 붉게 터진 입술이 보였다.
그 길로 박원빈이 보건실로 끌려간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입술뿐만이 아니라 팔 안쪽이며 군데군데 생채기가 많았다. 어쩌다 다쳤어? 묻는 말에 박원빈은 그냥 운동하다가요 대답했다. 무슨 운동을 하면 이렇게 되는 거지. 정성찬은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 넘어갔다. 말하기 싫어하는 걸 굳이 캐물을 정도의 관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대신 박원빈이 몇 반인지 알아내서 집에 가려는 애 붙잡아놓고 하얀 약 봉투를 안겨줬다.
"...이게 다 뭐예요?"
"집에서도 연고 바르고 밴드 붙여서 감염 없게 해. 흉 져."
"뭐가 이렇게 많은데요."
정성찬은 봉투 뒤져서 하나하나 알려줬다. 용도가 다 달라. 이건 지금 상태에서 바르는 거, 항생제 성분 없어서 입술에 발라도 괜찮아. 몸 상처는 딱지 생기면 이걸로 발라. 얘는 딱지 위에 발라도 안쪽까지 흡수되니까. 이건 흉 안 지게 하는 거고 딱지 떨어진 다음부터 바르면 돼. 설명에 거침이 없었다. 그냥 후시딘 하나 바르면 되는 거 아닌가. 흔한 상처 몇 개 났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게 낯간지러워서 좋은 소리가 안 나왔다.
"제가 알아서 해요..."
"안 할 거잖아."
연고와 습윤밴드가 담긴 약 봉투가 강제로 쥐어졌다. 각종 약들로 몸집 불린 흰 봉투에 정신이 팔려, 성찬이 제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는 건 뒤늦게서야 알았다.
"다음에 확인한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박원빈은 구겨진 봉투 안을 확인했다. 연고 포장박스마다 네임펜으로 용도가 적혀있었다. 굳이 바를 필요 없었음에도, 자기 전에 씻고 나서 연고를 챙겨 바른 건 단순히 그 이유에서였다. 그 덩치에 허리 구부리고 힘주어 써 내려갔을 글자들이 정갈해서, 그걸 모른 척할 수는 없어서.
며칠 뒤 상처를 확인하러 온 정성찬은 검사라도 하듯 훑었다. 손목 붙들고 셔츠 소매 걷어올려 팔 안쪽을 확인했다. 좁은 턱을 그러쥐고 입술 상태도 확인했다. 안 바를 줄 알았는데 잘 발랐네. 턱을 잡고 있는 손이 유난히 뜨거워서 원빈은 고개를 틀었다. 이런 부류의 접촉엔 면역이 되어 있지 않았다. 얼굴에 열감이 올라왔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왜. 너 약속 잘 지켜서 기분 좋은데."
"좀 다친 걸로 누가 그렇게 약을 사 와요. 뭐 의사라도 될 거예요?"
"어떻게 알았어? 나 의사 되려구."
"..."
이 형 이게 재밌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싶어 쳐다본 얼굴은 너무나도 진심이었다. 기분 좋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환하게 웃는 저 얼굴은... 확실히 의사 관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반듯한 인상은 맞지만, 그런 건 뭐랄까 좀 더... 공부만 하게 생긴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나 싶어서.
"너 지금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지?"
"아, 아닌데요."
"맞는데? 지금 박원빈 당황했는데?"
"아, 진짜 아니라니까..."
시선 피하는 박원빈을 손으로 굳이 가리키면서, 애굣살에 지분 반 넘겨준 커다란 눈이 반달 모양이 되도록 웃는 얼굴은 누가 봐도 놀리는 게 재밌어서 그러는 모양새였다.
그날 둘은 처음으로 매점에 갔다. 팥 아이스크림 하나씩 들고 운동장 스탠드에 나란히 앉았다. 모래 먼지가 나풀거리는 운동장을 가만히 응시하던 원빈은 끄트머리 한 입 베어 물고는 물었다.
"형은 무슨 의사가 되고 싶은 거예요?"
안 어울린다면서 인정해 주기로 한 거야?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원빈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아니라고요... 햇볕 때문인지 양 볼이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성찬이 너무 환하게 웃고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절반도 먹지 못해 녹기 시작한 박원빈의 아이스크림과 달리, 얼룩만 남은 빈 막대기가 하얗고 긴 손끝에서 달랑거렸다.
"나는 소아과 가고 싶어."
자동반사적으로 상상됐다. 흰 가운 입고 어린아이들을 상냥하게 돌보는 모습이. 주사 맞기 싫어하는 아이들 저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면서 달래줄 것 같았고, 안 울고 씩씩하게 치료받은 아이한테는 어린이용 비타민이라도 하나 더 쥐여줄 것 같았다.
"형이랑 잘 어울리네."
그래서 무심결에 나온 말이었다. 고민이라는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은 목소리가 사뭇 무덤덤했다. 그 말 내뱉고는 다시금 아이스크림을 먹는 박원빈을 보다가 정성찬은 문득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 하더라도 분위기에 맞춰 예의상 궁금한 척하던 날들. 정말 그 사람이 알고 싶어서, 자의로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넌 뭐 하고 싶어?"
근데 그러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소문의 전학생이라는 타이틀이 얘를 얼마나 귀찮고 피곤하게 만드는지 대충 알았으니까 거기에 아무 것도 얹고 싶지 않았는데.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선 지키려던 배려심을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정성찬의 질문에 박원빈의 두 눈은 동그래졌다. 마치 생전 처음 듣는 질문을 마주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까만 눈동자를 굴리다가. 입술을 뗐다 붙였다 망설이다가.
"저요? 전 그냥..."
할 말을 고르고 고른 끝에 겨우 대답했다.
"하고 싶은 건 많거든요. 운동도 제대로 해보고 싶고, 기타도 치고 싶고, 배워보고 싶은 것도 많고..."
한참을 주저한 것치고, 이것저것 늘어놓기 시작하는 박원빈의 뺨이 동그랗게 솟아올라 있었다. 좋아하는 장난감 꺼내들고 소개하는 아이들처럼 한층 높아진 목소리 톤에서 설렘이 묻어났다. 지금 보여주는 상기된 표정은 분명히 초면이었다. 꿈을 얘기하는 들뜬 얼굴이 너무 예쁘게 웃고 있어서 잠자코 듣고 있던 성찬의 시선은 오도 가도 못한 채 눈앞에 고정되어버렸다. 이 대화의 시작점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중요한데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숨 쉬어야 할 타이밍조차 잊었는데 다른게 와닿을 리 없었다.
아마도 바보 같은 표정이었겠지.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게 틀림없었다. 그때부터 고질병이 시작된 걸지도 모른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는 거, 귀 끝이 햇볕에 물든 것처럼 빨개지는 거, 뇌에 산소가 부족한 사람처럼 어지러워지는 거. 멍하니 박원빈을 바라보며 원인 모를 병을 진단받는 순간.
"...근데 잘 모르겠어요."
한없이 이어지던 미래의 나열이 뚝 끊겼다. 먹는 속도가 느린 박원빈의 아이스크림은 어느덧 완전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연한 적갈색의 흔적들을 뚝뚝 떨구면서. 고개도 같이 떨궈진다. 아무 생각 없이 잘 수 있기만 해도 좋을 것 같은데. 그 말 내뱉으면서 바닥에 만들어진 자국들을 내려다보던 얼굴은 어쩐지, 그냥 조금.
"너 아직도 잠 잘 못 자?"
10년 만에 재회한 사이에서 첫 마디로 나눌만한 질문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일반적인 경우에 주로 쓰이는 상투적인 질문을 하거나. 치료 경과 봤는데 지금은 증상이 좀 어때? 직업인으로서의 본분을 지킨 질문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성찬은 그보다도 박원빈이 여전히 밤잠을 못 이루는지가 알고 싶었다. 잠드는데 어려움, 수면마비 및 중간에 자주 깨는 등 수면 장애 지속. 모니터 쪽으로 눈동자만 움직여 의무기록에 적힌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한숨이 나왔다.
애매한 표정으로 서 있던 박원빈은 진료실 문을 닫고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마주 앉아 아무 말 없이 저를 쳐다보는 사람은 몇 번을 훑어봐도 박원빈이 맞았다. 여기 와서 처음 보는 환자가 박원빈이라는 게... 말이 되나. 심지어 입고 있는 옷은 명백히 사복이었다. 어떤 병원에서도 저렇게 딱 붙는 까만 반팔 티 같은 건 환자복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질문에 대답 못 들었는데."
"..."
"진료받으러 온 거 아냐? 지금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야."
뒷목을 매만지던 박원빈은 모니터만 덩그러니 놓인 빈 책상을 쳐다봤다. 굳이 눈 마주치지 않아도 정성찬이 저를 빤히 보고 있다는 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의 시야각이라는 건 그 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되어있으니까.
"네, 뭐..."
내리 깔렸던 눈꺼풀이 느릿느릿 들어올려진다. 천천히 맞닿는 시선에 성찬은 하려던 말을 잠시 잊었다. 어릴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새까만 눈동자가 너무 오랜만이라서.
"근데 그런 걸 아직도 기억해요?"
"..."
"하긴 그 정도로 똑똑해야 의사 하는 거잖아요."
"똑똑해서 기억하는 거 아닌데."
"..."
"너라서 기억하는 거지."
10년 전에, 그러니까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던 이 관계가 끝나기 전에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게 떠올랐다. 관계라는 단어를 붙여도 되는 건지 애매했지만 어쨌든 분명히 가까웠던 시절도 있었고 멀어진 시점도 있었으니 대충 포장해도 될 것 같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식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일 성향은 되지 못해서 박원빈은 입 꾹 다물고 있었다. 대답 듣자고 한 얘긴 아닌지라 성찬은 묵언수행하는 원빈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오랜만에 보는 박원빈은 박원빈이 맞았지만 박원빈 같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물론 어깨 넓고 몸의 균형이 잘 잡혀있는 편이었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그땐 애가 좀 더 말랑한 느낌이었고. 근 10년 만에 만난 박원빈은 몸 곳곳에 근육이 붙어있어 오랜 시간 운동한 태가 났다. 정확히는 헬스장 처박혀서 쇠질만 한다고 만들 수 있는 몸은 아니었고, 훈련이든 뭐든 직접 뛰고 구르면서 만든 실전 근육에 가까웠다. 물어보지 않아도 지난날들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주는 것처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게 입원한 환자를 이렇게까지 다치게 할 만한 이유는 되지 않는다.
"여긴 어쩌다 다친 거야?"
정성찬은 거즈 붕대로 감겨 있는 박원빈의 왼팔을 붙들었다. 예고 없이 책상 너머로 뻗어온 손길에 박원빈의 어깨가 놀란 듯 움찔했다.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오랜 기간 마주한 적 없는 박원빈의, 그렇기에 더더욱 봤을 리 없는 상처인데 어디선가 맞닥뜨린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 무렵. 박원빈이 잡혀 있던 손목을 빼냈다. 그냥, 그냥 다쳤어요. 급한 나머지 대답에는 성의가 없었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잡혔던 곳에 열감이 오를 정도였다.
"형은 왜 여기 있는데요."
"..."
"소아과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
돌이켜보면 한때 그런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들이 좋았고, 아픈 아이들도 건강하게 뛰어놀 수 있도록 안 아프게 해주고 싶었다. 저 커서 아픈 애들 치료해 주고 싶어요. TV 중간광고로 나오는 유니세프 홍보 영상 보면서 눈물 그렁그렁 단 채 울먹이는 아들은 그저 마음 여리고 기특해 보였을 뿐. 성찬의 부모님은 막내아들의 아기자기한 소망을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았었다. 열정 갖고 공부 열심히 하겠다는데 굳이 소아청소년과의 어두운 단면에 대해 설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되겠다는 정성찬의 포부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됐고, 걱정이 되기 시작한 부모님이 중간중간 성찬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아픈 아이들 낫게 해주는 거 중요하지. 근데 성찬아...로 시작하는 레퍼토리가 가족 모두 모이는 저녁 식사 시간에 자주 재생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경했던 정성찬의 꿈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바뀌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잘 수 있기만 해도 좋을 것 같은데. 박원빈의 말에 그게 무슨 뜻인지 물었고, 박원빈은 별일 아니라는 듯 그냥 잠을 잘 못 잔다고 대답했다. 더 이상 말 덧붙이지 않으려는 걸 캐내고 보니 어릴 때부터 원래 잠을 잘 못 잔다고 했다. 어쩌다 잠들어도 가위에 눌리거나 악몽을 꿔서 자주 깬다고 했고, 조그만 기척에도 바로 반응한다고 했다. 그냥 제가 좀 예민한 것 같아요. 박원빈이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는 동안 정성찬은 어떻게 하면 고쳐줄 수 있을지 골몰했다. 기질이든 환경이든 바꿔주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아픈 아이들을 돌보고 싶다던 진로도 자연스레 바뀌었다.
박원빈은 몰랐겠지만, 그날 그 말 한마디로 정성찬은 훗날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되겠다는 신념을 접고 신경과 전공의 시험을 봤다. 그래서 언젠가 만나면 말해주고 싶었다. 네 말이, 한 사람의 꿈을 바꿀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적어도 나한테는 그랬다고.
"...그냥."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근데 막상 얼굴 마주하고 보니 그렇게 말해줄 수가 없었다. 박원빈이 또 도망칠까 봐, 그때처럼 사라져버릴까 봐. 그래서 하고 싶었던 수많은 말들은 의미 없는 그냥, 어쩌다 보니 따위로 대체되고 만다. 그 무의미한 단어들이 정말 수긍이라도 된다는 듯 박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성찬은 서둘러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글자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년도 학급도 다르고 공통점도 없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려면 노력이 필요했다. 심지어 둘 중에 한 명이 소문의 전학생 같은 타이틀을 달고 있다면 남들의 시선을 무시할 줄도 알아야 했다. 원래 박원빈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뭐라고 떠들든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에 정성찬이 엮이면 얘기가 달라졌다. 이 형은 나 때문에 안 들어도 되는 얘기까지 듣는 거잖아. 그건... 좀 싫었다.
"왜 밥을 같이 먹으려고 하는 건데요."
급식판에 코 박고 있던 정성찬이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오늘 급식 메뉴로 마파두부 덮밥에 해물누룽지탕이 나왔다. 거기에 탕수육까지. 이미 급식판의 절반가량이 비어있었다. 이것도 속도 조절한 거였다. 처음 밥 같이 먹었을 땐 박원빈이 이렇게까지 느리게 먹는 줄 모르고 한참 기다렸었다.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박원빈이 불편해할까 싶어 그때부턴 나름대로 속도를 맞추고 있었다, 지금처럼.
"왜? 불편해?"
"그게 아니라..."
아... 이게 태생적 차이구나. 박원빈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쪽을 향해 수많은 시선들이 쏟아지는데도 정성찬은 정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박원빈이 남들 시선 느끼면서도 무시하려고 노력하는 쪽이었다면, 정성찬은 애초에 관심이 없으니까 시선조차 못 느끼는 쪽이었다. 노력은 타고난 걸 이기지 못한다고 했던가. 타고나야만 수십 개의 눈길에도 아무렇지 않게 식판을 비울 수 있는 거였다.
"이해가 안 돼요. 굳이 시간 맞춰서 밥 먹는 거."
2학년은 1학년보다 급식 시간이 10분 빨랐다. 굳이 멀쩡한 점심시간 늦춰가며 박원빈과 같이 밥을 먹을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심지어 성찬은 원빈과 달리 친구도 많았다. 원래 같이 점심 먹고 놀던 친구들이 아쉬운 소리 하는 걸 목격한 적도 있었다. 성찬은 저를 쳐다보는 원빈을 마주한 채 소리 없이 웃었다.
"너 원래 급식 잘 안 먹잖아."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묻기도 전에 성찬이 턱짓으로 식판을 가리켰다.
"그래도 내가 밥 먹자고 하면 곧잘 먹던데."
박원빈은 내가 밥 잘 먹는 게 형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었다. 근데 보는 눈이 너무 많았고, 밥 먹다가 할 얘기가 아닌 것 같기도 했고... 그런 이유 몇 가지 쥐어짜내면 굳이 지금 시점에 분위기를 흐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원빈은 반박하는 대신 다시 밥 먹는 걸 택했다. 흐물해진 누룽지를 숟가락으로 반 쪼개는 원빈의 시선은 식판에만 가 있었다. 후식을 받은 칸 위에 포장된 과일 젤리가 하나 더 올라왔다. 너 이거 좋아하는 것 같길래. 그 말에도 결국 아무런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소문일 뿐인지 진짜인지 물어본 적은 없지만, 박원빈은 전학을 자주 다닌다는 풍문과는 달리 이 학교에 꽤 오래 붙어 있었다. 처음 만난 계절도 넘겼고, 이제 정성찬이 애써 변명 만들어 음악실에 찾아가거나 교실 앞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만날 수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둘이 엄청난 무언가를 한 건 아니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박원빈이 안 해본 게 워낙 많아서 정성찬이 하자는 거 대부분 의미가 있었다.
어떤 날은 정성찬 아니었으면 평생 발 한번 안 들였을 도서관에 가서 책 읽기도 했다. 서로 책 골라주기를 하다가 다 재미없어 하길래 평소 따로 갖고 다니던 자기계발서를 추천하면서 건넸다. 몇 장 읽지도 못하고 지루한 티 내면 성찬이 웃었다. 별로야? 이거 제 취향 아니에요. 아, 취향이 아니야? 둥글게 휜 눈매로 바라보면서 웃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제 박원빈도 대충은 알았다. 아, 쫌...
박원빈은 제가 좋아할 만한 다른 책 발굴하러 떠나는 정성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자기계발서의 두 번째 페이지를 폈다. 아무 내용 없는 속지가 두 장 있었고, 그중 마지막 장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곳을 보지 않으니까. 정성찬이 오기 전에 몰래 몇 글자 끄적였다. 형이 언제 발견할지 궁금하기도 하면서, 영원히 발견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모순적인 제 마음을 이해할 방도가 없어 괜스레 글자를 꾹꾹 눌러썼다. 하지만 결국엔 못 찾았는지 책장 속 숨겨놓은 내용에 대해선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정성찬이 보는 박원빈은 특이했다. 도서관은 그렇게 질색하면서도 같이 운동하는 건 좋아했다. 체육관에서 배드민턴 치면서 박원빈 승부욕이 엄청 강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일부러 장난치려고 발망치 굴리면서 셔틀콕을 날렸더니 쿵쾅맨이라는 별명까지 손수 붙여줬다.
낙엽 떨어지던 날은 벤치에 누워 이어폰을 나눠낀 채 서로 취향인 노래 들려줬고, 날이 쌀쌀해질 때 즈음엔 정성찬이 등굣길에 사 온 붕어빵을 품속에서 꺼냈다. 박원빈, 이거 먹어봐. 지금 먹어야 따뜻해. 아침에도 붕어빵 팔더라. 이 학교 2년을 다녔는데 처음 알았잖아, 나. 학교 다니는 내내 붕어빵 노점이 언제 여는지 관심조차 없었던 정성찬은 취향 몰라 팥, 슈크림 골고루 사면서도 식을까 싶어 후드집업 안에 봉투를 품고 오기까지 했다. 그렇게 손에 쥐어진 붕어빵에 온기가 가득해서, 하나도 안 눅눅한 그 상태가 이 형이 어떻게 들고 왔는지 알려주는 것 같아서. 박원빈은 생전 처음 겪는 이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랐다.
사람들이 두툼한 외투에 목도리까지 두르고 다니기 시작하던 어느 날, 정성찬은 처음으로 박원빈의 손을 잡았다. 코트 입은 박원빈 손이 너무 차가워 보여서, 감기 걸릴까 봐. 변명할 거리는 충분히 있었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마치 제 소유물이라도 되는 양 아무렇지 않게 손목 턱턱 잡더니, 이제 와서 손 한 번 잡는데 긴장한 게 티가 났다. 하굣길에 사람 없는 길목 걷다가 낸 용기였다. 널브러진 쓰레기봉투, 과외 전단지가 붙은 전봇대, 추위 따위 아랑곳 않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달리는 자전거,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두 눈에 담으면서 정작 박원빈 얼굴은 보지도 못했다.
제 손을 잡아 패딩 주머니 안쪽으로 이끈 정성찬의 손은 따뜻했고. 그 순간 박원빈은 결심했다.
"형."
낮게 부르는 목소리에 코끝 빨개진 하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박원빈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일 따뜻한 곳까지 끌고 왔던 손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미처 붙들지 못한 손은 제 주인을 찾아갔다. 잠깐 잡고 있었을 뿐인데 빈 공간이 허전했다.
"저 좋아하지 마세요."
정성찬은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이 대목에서 민망한 나머지 너 안 좋아하는데? 내가 언제 너 좋아한댔어? 혹은 무슨 말 하는 거야? 라며 모른 척할 수 있었다. 고백도 안 했는데 차이는 건 누가 겪어도 잔인한 일이었고, 절친들에게도 말 못 할 흑역사가 되기 쉬웠다.
"왜?"
하지만 정성찬은 흔하고 뻔한 대답을 선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박원빈의 표정이 정말 하기 싫은 말을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너 좋아하면 안 돼?"
"네, 안 돼요."
"너는 나 안 좋아해도 돼. 그냥 나 혼자 좋아하는 건데 그것도 안 돼?"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박원빈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해서 성찬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마 안 돼요 라고 했던 것 같다.
이 형은 내가 한 말이 장난 같아 보였나. 다음날 붕어빵 사들고 반에 찾아온 정성찬을 보고 박원빈이 한 생각이었다. 그 와중에 이제는 취향 좀 알았다고 팥 붕어빵 비중이 높았다. 무시하고 돌아가려는데 굳이 뜨끈한 온기 느껴지는 봉투 쥐여주고, 급식실에 안 나타난 박원빈에게 [나랑 안 먹는 건 상관없는데 밥은 굶지 마] 메시지 보내는 건 누가 봐도 차인 사람의 행동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무시했는데도 아랑곳 않고 곁을 맴돌고 있어서 이제는 원빈도 한계였다.
"형 원래 남자 좋아해요?"
"아니."
"..."
"너라서 좋아하는 건데."
박원빈의 눈빛이 방황하듯 흔들렸다. 그러기도 잠시, 깜빡이 없이 들으면 누구라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 거라며 울렁거리는 마음을 붙들었다.
"저 좋아하지 말라고 했던 거 그냥 한 말 아니었는데."
"알아."
"근데 왜 이렇게 따라다니는데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언제 이걸 그만둬야 하는지 깨닫게 된 건 사실 오래됐다. 상처에 정성찬이 챙겨준 연고 바르고 밴드 붙이는 게 습관이 됐을 때부터? 밥 다 먹을 때까지 정성찬이 기다려주는 게 익숙해졌을 때부터?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지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미뤄왔던 거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근데 이제 더는 욕심부리면 안 될 것 같아서, 박원빈은 자기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모진 표정을 했다. 그게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성찬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형 저 감당 못해요."
"..."
"전 남의 인생 망치는 거에 취미도 없고요."
"널 좋아하는데 내가 감당 못할 게 있어?"
"..."
"있다고 해도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잖아."
숨 막힐 것 같은 적막은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은 뭐든 해야 했다.
정성찬은 사랑이란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고작 열일곱, 열여덟 살에 거창한 사랑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싫은 소리 하는 게 더 귀찮아질 것 같아 시작했던 연애는 소꿉놀이 같았고, 아무리 봐도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모호했다. 영화에서는 사랑 때문에 울고 마음 아파하던데.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던 성찬이 의아해하면, 같은 반 애들은 미디어에서나 그렇게 그려지는 거라고 했다. 원래 남자들은 마음보다 좆이 더 아픈 거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덧붙여가면서.
하지만 이제 누군가 첫사랑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성찬은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눈앞에 박원빈이 상처받는 게 싫어서. 좋아하지 말라고 하는 것보다 저렇게 슬픈 눈으로 보는 게 더 속상해서.
"나 싫어? 내가 좋아하는 게 싫은 거야?"
"..."
"싫다고 하면 그만할게."
박원빈이 싫어요 한 마디 하면 티 안 내고 혼자 좋아할 생각이었다. 박원빈과 지금처럼 지내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았다. 부담 주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하지만 박원빈은 끝까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 그때 박원빈은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는지, 몇 년이 지나도록 성찬은 그날이 잊히지 않았다. 안 좋아하는 척할 자신 있었는데. 그렇게 사라질 필요까진 없었는데.
박원빈은 다음날부터 자취를 감췄다. 학교에 안 나오더니 며칠 뒤에는 자퇴했다는 소식만 들렸다. 보낸 메시지엔 답장이 없었고 전화조차 할 수 없었다. 이미 사라진 번호에 연락이 닿지 않는 건 너무 당연했다. 원빈의 담임교사에게 부탁해서 겨우 얻어낸 집 주소로 찾아갔을 때 그곳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집주인이 이전부터 쭉 살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처음부터 학교에 다른 주소를 제출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지루한 고교 생활 속에서 박원빈이 아예 한국을 떠나 외국에 있다느니, 가족이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어 도망가야 했다느니 블록버스터급 낭설이 난무했다. 성찬은 뜬소문들을 모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한동안은 폐인처럼 살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안은 텅 비어있었다. 친구들 말에 방금 뭐라고 했어? 되묻는 건 흔한 일이었고, 집에 오면 살갑게 굴던 막내아들의 말수가 적어져 가족들도 걱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성찬의 일상은 조금씩 정상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마음 다잡고 공부하고 있으면 딴 생각이 좀 덜했다. 그래도 자기 전엔 늘 박원빈 생각이 났다. 어쩔 수 없었다. 첫사랑이란 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 말없이 떠난 것도 괜찮고, 좋아하지 말라고 한 것도 다 괜찮으니까 그냥 그 애가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그렇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혹시나 다시 만나는 날이 온다면, 그런 날이 정말 온다면, 그때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대신 곁에서 오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우습게도 그런 다짐을 했다.
신경계 질환은 원인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환경적, 유전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사람마다 다른 증상을 유발하는 탓도 있고, 수십억 신경세포의 상호작용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현대의 영상 기술로는 그 세밀한 영역의 변화를 모두 파악하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첫 진료가 끝난 뒤, 성찬은 그동안 진행했던 검사 결과를 다시 살펴봤다. 담당 환자가 박원빈인지 몰랐을 때 빠르게 훑었던 온갖 스캔을 하나하나 재검토했다. 디테일한 부분까지 체크하느라 들여다보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 안 찍은 게 없었다. 뇌 CT, MRI, MRA, EGG, PSG, 자율신경계 검사까지. 두드러지는 특이 소견은 보이지 않았다. 명확한 이유 없이 통증을 호소하며 병원을 방문하는 다수의 신경계 질환자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케이스였다. 눈에 띄는 부분이라면 교감신경의 과항진으로 자율신경계 밸런스가 무너져있다는 건데... 이 정도면 하루 종일 긴장 상태로 지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근데도 무덤덤한 얼굴로 괜찮다는 듯 앉아있던 모습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뭐라도 찾고 싶었다. 이유라도, 아니면 나아질 방도라도. 하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수많은 이미지와 글자들 중 해답은 없었다.
"군대에서 다치지 말라고 안 가르쳐 줘?"
이틀 만에 만난 박원빈은 못 보던 상처 몇 개를 더 달고 왔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는 표정이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정성찬은 한숨부터 나왔다. 저런 태도가 사람 신경 쓰이게 한다는 건 알까.
"맨날 다쳐서 오잖아."
"지금 군인인 건 아닌데요."
"..."
유난히 밝은 진료실 조명 아래에서는 원빈의 상처가 더 잘 보였다. 성찬은 그저 할 말을 잃은 것뿐인데, 원빈은 혹시 자신의 주치의가 못 알아들었을까 봐 친절하게 말을 덧붙였다. 좀 나아지면 다시 복귀할 거긴 한데, 어쨌든 지금은 아니니까 하는 말이에요. 정성찬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아 이마를 짚었다. 지금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잖아...
더 프레스티지 메디컬 센터에 온 이후로 어떤 의문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매일 새로운 의문들만 더해져 갔다. 교수 추천받고 들어온 프라이빗 병원에서 10년 만에 재회한 첫사랑의 주치의가 될 확률은 몇이나 될까. 이건 우연에 우연에 우연을 몇 번이고 곱해서 가능하다고 쳐도. 그럼 이 강원도 산자락에 처박힌 병원에 입원해있으면서 저렇게 다쳐서 올 확률은? 붕대 감을 정도로 깊었을 상처가 며칠 만에 저 정도로 흔적 없이 나을 확률은? 박원빈의 왼팔은 말끔해져있었다. 붉은 자국만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성찬은 책상 서랍을 뒤졌다. 상처 회복에 사용하는 각종 연고와 일반 밴드, 습윤 밴드가 들어있었다.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첫 진료 때 박원빈을 만난 이후로 혹시 몰라 챙겨 둔 거였다. 이 사실을 박원빈은 몰라야 했다.
의자를 책상 옆으로 끌고 와 앉자 원빈의 시선이 와닿았다. 손목을 붙잡아도 첫날처럼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고요한 진료실에 연고 뚜껑 여는 소리만 울렸다. 왼쪽 손목에 하나, 오른쪽 손등에 둘, 오른쪽 팔에 하나. 멸균 면봉으로 약 발라주는 동안 박원빈은 가만히 있었다. 언제 다쳤어? 묻는 말에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요. 왜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건 박원빈한테 묻는다고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연고를 얇게 펴 바르고 호빵맨 캐릭터가 그려진 밴드까지 붙여주면 치료는 끝이었다.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던 원빈의 눈이 결국 성찬을 향했다. 박원빈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얜 너무 투명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였다. 난 어린애가 아닌데 왜 이런 걸 붙여주지 하는 마음 반, 한때 소아청소년과 의사 되는 게 꿈이었던 과거를 알고 있어서 쉽게 말 못 꺼내는 마음 반이겠지 싶었다.
"이건 소아과 인턴 때 버릇 남아있어서."
"...네."
"플러팅 같은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 쫌. 그런 생각 안 해요."
그런 말 하는 박원빈은 이 형 왜 이래, 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모습이라 그제야 긴장이 풀어졌다. 웃음이 새어 나올 뻔한 걸 꾹 참았다. 어떻게든 표정관리하기 위해 아랫입술 꽉 깨물고 눈앞의 자기주장 확실한 이목구비를 바라보면 문득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힘 안 주고 있어도 커다란 눈, 그 끝에 그린 것 같은 눈꼬리, 높고 또렷한 콧대, 도톰한 입술...에 찢어진 상처. 아, 제발 원빈아... 속에서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이런 거까지 똑같을 필요는 없잖아. 성찬은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짧게 숨을 내뱉은 성찬은 이내 새 멸균 면봉을 꺼내 그 위로 약을 짜냈다.
"나 봐 봐."
"..."
"좀 더 가까이 와."
연고가 동그랗게 올라간 면봉이 입술에 닿았다. 약 바르려고 다가온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잘못하면 숨결까지 닿을 것처럼. 정성찬은 박원빈의 입술에만 시선을 고정했고, 박원빈은 면봉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그것만 의식하려 애썼다. 제 입술을 관찰하는 정성찬의 깜빡이는 속눈썹 같은 거, 앞머리 사이로 엿보이는 짙은 눈썹 같은 거... 그런 건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다지 아프거나 따갑지도 않았는데 면봉이 입술 위를 오갈 때마다 반사적으로 움찔하게 됐고... 의식하지 않으려 애쓸수록 의식됐다. 노력이 무색하게도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간이 치료를 마친 성찬이 고개를 더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숨 쉴 타이밍을 잃어버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원빈의 시선이 갈 길을 잃고 흐트러졌다. 허벅지 위로 올려둔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상황에선 어떤 말을 해도 어색할 것 같다고 느껴질 무렵, 이 불편한 기류를 끊은 건 포켓몬 캐릭터가 그려진 원형 밴드였다. 엄지손가락이 꾹 누르고 난 자리에 귀여운 밴드가 붙었다. 피카츄, 잠만보, 이브이까지 조그맣고 동그란 면적에 다양하게도 들어차있었다.
"이거 줄게. 씻고 나면 챙겨 발라."
정성찬은 방금 전까지 사용하고 남은 연고며 면봉이며 밴드까지 챙겨줬다. 기억하지? 그 말 덧붙이면서. 빈손으로 들어갔던 진료실을 나올 때 박원빈 손에는 온갖 의약품이 들려져 있었다. 아까까진 정말 아무렇지 않던 곳들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티타임 가능하세요?"
노크해도 반응이 없어 그냥 문 열고 들어왔더니 서이원의 표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러게 왜 바쁜 척을 해. 몇 번을 두드렸는데. 정성찬의 그런 속마음이라도 읽은 건지 서이원은 화면 잠금 단축키를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가시죠. 병원 안에 카페라곤 건물 1층의 브랜드 없는 카페가 유일해서 그곳을 가야 했다. 시간이 애매해서 그런 건지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용하는 손님이 단 한 명도 없는 아담한 카페였다. 카페 아틀리에 비다. 이 병원의 이름처럼 멋있어 보이는 외국어를 아무거나 가져다 붙인 모양새였다.
"비다라는 영어는 처음 봐요. 저것도 무슨 뜻이 있나요?"
"스페인어로 삶이라는 뜻이에요."
"아, 네..."
하다못해 영어와 스페인어의 끔찍한 혼종이었다. 성찬은 한국 사회에 만연해있는 보여주기식 이름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서이원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를 때 딸기 스무디를 주문했다. 손님이 둘뿐인데도 음료가 만들어지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이원은 턱을 괸 채 카페 직원 쪽을 쳐다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하시는 건 좀 어때요?"
"아직 적응 중이긴 한데... 곧 익숙해지겠죠."
"제가 보기엔 잘 적응하고 계신 것 같아서 딱히 조언해 드릴 게 없네요."
곁눈질로 카페 밖을 둘러보면 여전히 오가는 환자 한 명 없이 텅 비어 있다. 확 트인 공간에 대리석만 의미 없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성찬은 눈썹 부근을 긁적였다. 사실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티타임을 갖자고 했어요. 그 말에 이원은 입꼬리를 올렸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손이 멈췄다. 네, 물어보세요.
첫 질문은 병원에서 왜 환자들이 환자복을 입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 질문엔 마련된 환자복이 있기는 한데 환자마다 선택할 수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개인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보니 타 병원보다 규정이 유연한 편이기도 하고, 환자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개인 의복을 착용할 수 있다고 했다. 서이원은 대답 말미에 물론 금속 장식이나 끈이 달려있지 않은 옷에 한해서요, 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 성찬에게 별로 궁금한 사항은 아니었다. 굳이 이런 병원 아니어도 환자가 옷을 자주 환복해야 하는 환경의 병원에서는 종종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환자복은 그저 다음 질문을 하기 위해 깔아둔 포석 비슷한 거였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척하던 정성찬의 눈빛이 또렷해졌다.
"제 담당 환자 아시죠, 박원빈 환자요."
박원빈이라는 이름에 서이원의 눈동자가 테이블로 향했다. 뭔가 기억에서 꺼내려는 듯 골몰하는 표정이었다. 환자 이름을 떠올리는데 저렇게 오래 생각을 해야 하나. 프라이빗 병원이면 환자 이름은 다 외워야 하는 거 아닌가. 환자가 그렇게 많은 것 같지도 않은데. 물론 박원빈 외에 다른 환자를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 여기에 환자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건물 내 모든 병실이 1인실이라는 걸 감안하면 많아 봐야 100명 이내일 것 같았다. 침묵이 슬슬 민망해질 즈음이 되어서야 이원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그럼요, 알죠."
안다는 말과 대답한 시간 사이의 괴리가 기이했다. 정성찬은 눈앞을 가리는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서이원이 계속 웃는 낯을 유지할지 궁금했다.
"그럼 질문을 다르게 드려볼게요."
"..."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부상을 입을만한 일도 있나요?"
궁금증은 금세 풀렸다. 겨우 끌어올려 놓았던 서이원의 입꼬리가 오래 유지되지 않았으므로.
의무기록 보셨겠지만 정 선생님 담당 환자가 특수부대에 있었습니다. 해외 파병 중 같이 작전에 투입됐던 동료가 큰 부상을 입으면서 전역하게 된 케이스거든요. 장기간 함께했던 동료라고 하니 심리적으로 충격이 컸겠죠. 동료는 수개월째 코마라 의식 회복이 없는 상태고. 당시 경험을 포함해서 부분적으로 기억 결손 증상이 있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검사 결과도 확인하셨죠? 해마 손상 같은 특정한 외상성 병변이 보이는 것도 아니니까. 약물 치료 정도만 우선적으로 진행하면서 증상 변화를 관찰하고 있는 상황인 거죠. 지금 담당 환자가 겪는 부상도 군 복무 시절의 남은 습관으로 개인 훈련 비슷한 걸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거고... 네네. 고강도 운동도 무리해서 하면 다칠 수 있잖아요? 유사한 케이스라고 보시면 될 것 같은데요. 이런 과정이 기억 회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어서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어요. 약물로 경과 진척이 없으면 뭐라도 해봐야 하니까요. 저희도 면밀하게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주문했던 카페 음료는 오랜 질답의 시간이 끝난 후에야 나왔다. 마치 준비된 것처럼 술술 늘어놓는 서이원의 답변만으로 이 상황을 모두 이해하게 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냥 허무맹랑한 얘기도 아니어서... 성찬은 시리도록 차가운 딸기 스무디를 말없이 쭉 빨아들였다. 한 번에 절반이 없어졌다. 동시에 찌릿거리는 두통이 찾아왔다. 갑자기 찬 음료를 마셨을 때 뇌의 삼차신경이 자극을 받아 생기는 흔한 증상이다. 신경과 의사라면 하지 않을 미련한 짓이었다. 그걸 당연히 정성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박원빈 얘기를 듣는 내내 자꾸만 목이 타서 어쩔 수 없었다.
서이원과의 티타임이 끝나자마자 정성찬이 한 건 진료실로 돌아가 박원빈에게 처방된 약을 다시 확인하는 거였다. 약물 치료의 효과가 미미하다면 약의 종류나 용량을 조정하는 식으로 치료를 이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 신경계 질환의 경우에는 약물마다 신경전달물질이나 뇌 기능에 미치는 영향이 환자마다 다르기 때문에 여러 약물을 순차적으로 사용하면서 최적의 치료법을 찾는다.
시기상 이전 처방한 약의 남은 분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증상에 호전이 없다던 박원빈의 말을 떠올리며 일부 약은 다른 약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파견 온 레지던트 신분인 성찬은 조치 하나하나 책임자에게 보고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현재 치료 경과와 처방 계획에 대해 정리해 신경과 과장에게 가져갔을 때 그는 훑어보고는 별말 없이 승인했다. 그렇게 하세요. 흰색과 회색의 경계에 있는 머리카락이 조명에 번쩍이고 있었다.
다른 약으로 대체된 약은 이틀 뒤부터 지급됐다. 간호사가 처방된 약을 준비하고, 환자의 이름과 약 종류를 대조한 뒤 전달하는 식이다. 환자가 약을 직접 삼키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까지 간호사가 할 일이었다. 정성찬이 자신의 담당 환자가 입원해있는 병실로 찾아간 건 그로부터 약 1시간 후였다.
"안녕."
성찬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반갑게 인사했다. 어떤 의사가 이렇게 인사해요... 그렇게 말하려다 성찬과 같이 들어온 간호사를 보고 원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바꾼 약은 먹었어?"
"네."
"잘했네. 불편한 건 없었고?"
끄덕끄덕. 대답 대신 고개가 움직였다. 흰 민소매 옷을 입은 채 위를 올려다보는 박원빈은 피곤한 듯 눈이 반쯤 감겨있었다. 어제도 잘 못 잤지. 그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조금요...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마음 한구석을 툭툭 건드렸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정성찬은 이내 휠 달린 스툴 의자를 끌고 와 박원빈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간호사가 건네는 혈압계를 받아들었다. 남은 한 손으로는 자연스럽게 원빈의 손목을 쥐었다.
"혹시 부작용 있을까 봐 혈압이랑 맥박 잴 거야."
침대 옆 협탁 위에 팔을 올려두고, 손가락 하나 정도 들어갈 여유 공간만 남긴 채 커프를 타이트하게 감았다. 커프가 심장과 같은 높이에 올 수 있도록 위치를 조정하는 행위가 능숙했다. 제 팔을 조여오는 압박감을 느끼며 박원빈은 정성찬이 한평생 이것만 하고 살아온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고요한 적막이 병실 안에 가라앉았다. 비단 혈압을 잴 때 말을 하면 안 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과를 확인하고 한 번 더 잴 때까지 정성찬조차 말이 없었으니 그만큼 이 상황이 진지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혈압은 정상이고. 두 번째 측정한 수치까지 확인한 성찬은 혈압계를 간호사에게 돌려줬다. 맥박만 한 번 더 따로 잴게. 그러세요... 기껏 제자리로 당겨온 팔을 다시 협탁 위에 올릴 때까지만 해도 원빈은 따로 잰다는 의미를 잘 몰랐다. 그래서 성찬의 손가락 두 개가 목을 꾹 눌러올 때 놀란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단단한 하악각 바로 아래, 쭉 뻗은 목의 시작점에서 경동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성찬은 손끝으로 느껴지는 박동에 집중했다. 머릿속으로 규칙적으로 뛰는 맥박의 흐름결을 카운팅했다.
목을 누른 제 손끝을 쳐다보던 시선이 서서히 위로 향했다. 목에서 턱으로, 턱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눈으로. 마주친 시선 속에서 박원빈은 절망감을 느꼈다. 이렇게 재면 제대로 안 나올 것 같은데... 애써 꺼낸 목소리가 볼품없이 갈라졌다. 스스로도 심장이 엉망으로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게 고스란히 정성찬 손끝으로 전해진다고 생각하니 그대로 여길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원하는 만큼 심장 박동을 느끼고 나서야, 손은 한참 만에 제자리를 찾아갔다. 손을 뗀 성찬은 옆에 서 있던 간호사에게 수동 검사 결과를 간략하게 전달했다. 92, 정상입니다. 그러고는 멍하니 저를 보는 원빈에게도 검사 결과의 비밀을 알려줬다. 원래 1분 다 안 재. 15초만 재고 계산하는 거야. 속삭이듯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에 자꾸만 마른침이 삼켜졌다.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소리가 창피해서 그럼 왜 손을 계속 대고 있었던 거냐고 묻지도 못했다.
어느덧 마무리 진찰만 남아있었다. 정성찬은 청진기 이어피스를 귀에 꽂았다. 스마트 청진기가 보급화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감 형성을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 병원은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최첨단 의료 기기들 사이에서 청진기 홀로 시대의 흐름에 역행 중이었다. 둥근 디스크 모양의 금속판을 손등 위에 올려두고 있던 성찬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넣어도 되지?"
주어 없는 말에도 박원빈은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뭘 물어봤는지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딴짓하느라 바빴다. 한번 쿵쿵거리기 시작한 박동소리가 잦아들지를 않아서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노력 중이었다. 쪽팔린 일은 하루에 한 번이면 족했다. 정성찬이 옷 밑단을 들어 올리고 그 안으로 청진기 헤드를 집어넣고 나서야 그 질문이 무슨 의미였는지 인지할 수 있었다. 맨 살 위로 금속이 닿는 감촉에 원빈이 몸을 움츠렸다.
"차가워?"
그게 아니라 그냥 느낌이 좀 이상해서... 원빈은 침대 구석진 곳 아무 데나 찾아 시선을 떨구면서 대답했다. 차라리 차가운 게 나았을 것 같다. 박원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수없이 청진을 받아왔지만 피부에 닿는 청진기의 온도가 미지근하게 느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환자가 놀랄 수도 있으니까 미리 체온으로 따뜻하게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정성찬의 체온이 녹아든 헤드가 가슴을 눌러왔다. 입안이 말랐다. 이 와중에 다른 환자들에게도 똑같이 하는 건지, 아니면 저에게만 이렇게 하는 건지 궁금해하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데워진 금속판으로 몸 곳곳을 훑고 있는 정성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병원 사진 찍어서 보내줘봐 궁금하다]
정성찬이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메시지였다. 답장은 보내지 못했다. 여기 들어오자마자 메신저 사용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연구나 논문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웹 브라우징은 자유롭게 허용됐지만, 외부로 데이터를 전송하는 통신은 즉시 차단됐다. 이런 환경에서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거라곤 공부, 운동 그리고 박원빈과 지내기 밖에 없었다. 고급 병원답게 밥도 잘 나왔다. 대학병원의 극악 워라밸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웰니스 그런 건가. 병원 안에 마련되어 있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체스트 프레스 무게 치다가 문득 든 생각이었다.
아... 내 말 안 듣고 있었네. 그리고 이건 러닝 뛰는 박원빈을 발견하고 든 생각.
분명히 진료나 회진 때는 다친 곳이 없어서 요즘은 좀 괜찮아졌나, 약 잘 챙겨 바르나 보네 싶었는데 구석에서 러닝 뛰는 박원빈의 팔에는 못 보던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이쯤 되면 진료 스케줄 없을 때 맞춰서 저렇게 다쳐오는 건가 싶은 의구심이 든다.
"박원빈."
땀에 젖은 얼굴로 돌아보던 박원빈은 정성찬을 발견하고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여기에 한 달 넘게 있었는데 피트니스 센터에서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또 다쳤어?"
서이원이 한 말이 맘에 걸려서 이젠 왜 다쳤냐고 묻지도 못했다. 천천히 속도를 줄여가던 트레드밀 벨트가 완전히 멈췄다. 기계에서 내려온 박원빈은 숨을 몰아쉬었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은 대충 털어냈다. 운동으로 달아오른 뺨이 상기된 채였다. 빨갛게 속살이 드러난 상처는 공기 중에 방치되어 있었다. 성찬이 준 밴드를 붙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내가 준 밴드는 왜 안 붙이는데. 약 바르고 붙이라니까."
"까먹었어요."
박원빈은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쓰이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앞머리를 쓸어 넘기던 성찬이 손으로 샤워실을 가리켰다.
"지금 씻고 와. 운동 그만하고."
"..."
"땀 들어가면 염증 생겨."
잠시 망설이는 듯 한쪽 입꼬리만 실룩거리던 박원빈이 상처 난 팔을 내밀었다.
"그럼 형이 해주세요."
제 딴에는 나름 큰 용기를 낸 거였다. 그 말을 듣는 정성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원래 이런, 이런 거 의사가 해주는 거잖아요."
그러고는 작게 덧붙였다. 당연히 해줘야죠. 책임감이 없네...
말하면서도 민망했는지 눈은 절대 못 마주쳤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박원빈을 다시 만난 날부터 스스로 했던 약속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저항 없이 웃음부터 나왔다.
"아... 책임감이 없었구나, 내가."
반달 모양으로 접힌 눈을 더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박원빈은 재빨리 뒤돌았다. 씻고 올게요. 던지듯이 내뱉고선 샤워실을 향해 뛰듯이 걸어갔다. 최선을 다해 보폭을 넓혔는데도 정성찬에게 금방 따라잡혔다. 같이 가, 나도 씻어야 돼.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혹시나 부담스러워할까 봐 올릴까 말까 몇 번은 고민하다 올린 거라는 걸 박원빈은 몰랐다. 박원빈은 그저 가까이 붙어오는 정성찬이 땀 냄새라도 맡을까 싶어 온통 그 걱정뿐이었다. 한편으로는 샤워실이 개별 칸으로 나뉘어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병실로 돌아갔을 땐 둘 다 대충 말린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머리 제대로 안 말리면 감기 걸린다는 정성찬의 핀잔에 박원빈은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끝을 쥐었다. 그럼 이건 뭔데요.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침묵이 찾아왔다. 이 불편함의 이유를 정성찬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색하지 않으려 애써 노력하며 협탁 서랍을 뒤졌다. 피부를 파고든 상처 위에 약을 발라주고 캐릭터가 그려진 밴드를 붙여주는 동안 박원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대 위에 앉아 약간씩 몸을 움직일 때마다 깨끗한 비누 향 같은 게 났다. 분명 같은 샴푸를 썼을 텐데 왜 유독 이런 향이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박원빈에게서 나는 향을 맡을 때마다 귓바퀴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조금 어지러웠다. 정성찬은 아직도 이 고질병에 대한 질병코드를 찾지 못했다.
주홍빛 단풍으로 가득 물들어있던 강원도에 어느덧 겨울이 찾아왔다. 이 폐쇄적인 병원 안에서 변화하는 계절감을 느끼기란 쉽지 않았다. 일단 건물에 창문이 거의 없었고, 몇 안 되는 창문마저 밖으로 열리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탓이다. 눈이 왔다는 건 옥상에 올라갔다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병원 건물 밖으로 나가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답답할 때 할 수 있는 거라곤 옥상에 오르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환자들에겐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 바깥공기 마시러 올라온 성찬은 문득 박원빈 생각이 났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로 하얗게 눈 쌓인 설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걸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다.
"환자는 말씀드렸듯이 옥상 출입 금지입니다. 정 필요하다고 판단되시면 상부에 사전 보고하시고 메디컬팀 동행 하에 이동 절차를 밟으실 수 있습니다."
정해진 매뉴얼을 읊듯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서이원은 마치 안드로이드 같았다. 정성찬은 그 영혼 없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뒷짐 지고 서 있었다. 그냥 습관일 뿐인데 이딴 소리 들으면서 뒷짐 지고 있으니 스스로가 죄지은 사람처럼 느껴져서 약간 짜증이 났다. 더 설득해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네. 대충 대답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건 고민할 주제조차 되지 못했다. 정성찬이 고민할 때는 앞서 걷는 박원빈의 어깨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올리기 전이나 왜 진로를 바꿨냐는 박원빈의 질문에 그냥이라고 대답할 때뿐이었다.
서이원의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들른 곳은 박원빈의 병실이었다.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TV를 보고 있던 박원빈은 갑작스러운 정성찬의 등장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회진 아닌 시간에 일방적으로 찾아온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바깥은 겨울인데 이 안은 여전히 계절의 의미가 없었다. 눈처럼 새하얀 반팔 티를 입고, 캐릭터 밴드 덕지덕지 붙인 박원빈에게는 더더욱.
"원빈아, 나가자."
"어딜요?"
"밖에 눈 왔어. 엄청 예뻐."
즉흥적인 외출 제안에 당황해서 눈동자 굴리는 게 다 보였다. 어떻, 어떻게요. 박원빈도 알고 있었다. 한번 여길 나가려면 메디컬팀이 같이 동행해야 한다는 걸. 하지만 홀로 병실에 들어온 성찬은 어느 누구도 데려오지 않은 채였다.
"어떻게긴. 걸어서지."
아무도 안 웃어줄 농담에 박원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거에 웃고 있는 게 약간 자존심 상했다. 병실 안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옷장 안을 살피던 정성찬은 침대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박원빈은 내키지 않는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걸칠 거 없어? 옷장 안은 반팔과 민소매 옷뿐이었다. 영하의 날씨에 입기엔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없어요, 근데 이렇게 나가도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정성찬은 입고 있던 숏패딩을 벗어 괜찮다는 박원빈에게 입혔다. 여기 올 때 추울까 봐 챙긴 유일한 패딩이었다. 사이즈가 안 맞아 박원빈한테 크긴 한데 따뜻해 보여서 이제 좀 안심이 됐다. 안 나가려고 할까 봐 어깨를 힘주어 붙들었다. 박원빈은 어깨를 감싸오는 정성찬을 쳐다봤다. 까만 목티에 겨우 흰 가운 하나 걸친 정성찬도 박원빈 눈엔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추울걸요. 감기 걸려요."
"의사는 감기 안 걸려."
"완전 걸릴 것 같은데. 진짜 이러고 나간다고요?"
정성찬은 막무가내였다. 좋아하지 말라는 말에도 붕어빵 사들고 무작정 찾아오던 10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병실을 나가면서도 한동안 투닥거리다가 쭉 뻗은 복도가 늘어지는 구간부터는 목소리를 낮췄다. 들키면 안 된다면서 정성찬이 박원빈 입술 위로 검지를 댄 탓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위층까지 간 뒤 비상계단을 이용하면 옥상에 오를 수 있었다. 성찬은 4개월짜리 유효기간을 지닌 카드키를 옥상 출입문 리더기에 댔다.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잡이를 잡아 밀자 탁 트인 옥상 너머로 설경이 보였다. 한눈에 펼쳐지는,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풍경에 박원빈의 입이 벌어졌다. 우와. 누가 봐도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여기까지 몰래 데려온 게 뿌듯할 정도로.
"봐, 내가 예쁘다고 했잖아."
순백의 눈으로 하얗게 덮인 산봉우리와 산자락은 동화 속 한 장면과 다를 바 없었다. 하늘과 땅이 하얀 물감 덧그린듯 이어져있어 더 아름다웠다. 조금 더 자세히 보겠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박원빈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 같았다. 제 사이즈보다 훨씬 큰 하늘색 숏패딩을 입고 있어서 더 그래 보였다. 형, 저기 봐 봐요. 신나서 두 뺨 봉긋 올라온 채 뒤돌아보는 박원빈의 두 눈에 덜덜 떨고 있는 정성찬이 들어왔다. 코끝까지 빨개져서는 괜찮은 척, 어디? 어디? 하고 있다.
"지금 춥죠."
"아니, 괜찮은데."
별로 안 추워. 그 말 하면서 넓은 어깨를 안쪽으로 접고 있었다. 그것도 최대한 안 추운 척하려고 어깨 펴는데 날카롭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거였다. 목티에 얇은 의사 가운 정도로 영하의 날씨를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 정도는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도 아는 건데 정성찬만 몰랐다. 헛웃음이 났다.
"아, 그냥 형 입어라."
보다 못한 박원빈이 패딩을 벗으려 들자 조금 떨어져 있던 정성찬이 달려왔다. 아, 잠시만 잠시만. 그러고는 못 벗게 패딩 여미고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줬다. 근심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박원빈 안심시키려고 눈웃음까지 쳤다.
"걱정돼?"
"바람 엄청 불잖아요. 감기 걸린다니까요..."
"그럼 나 손잡아 줘."
겨우 한 겹짜리 가운 소매 밑으로 빨개진 손끝 내밀면서 저렇게 말하는데 무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응? 그러면 괜찮아질 거 같은데. 눈꼬리 접어가며 몸 부딪혀오는 정성찬을 모른 척하는 방법 또한 배운 적조차 없었다.
박원빈은 결국 못 이기는 척 정성찬의 손을 잡았다. 10년 전 그 춥던 날, 코트 입은 네 손이 너무 차가워 보인다는 변명과 함께 손잡아오던 정성찬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정성찬이 손깍지를 껴왔다는 것이다. 너무 추우니까, 바람이 너무 많이 부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손가락을 마디 사이로 얽어왔다.
이 형 일부러 이러는 거네, 이거...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면서도 그 손을 내치지 못했던 건 정성찬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설경 보여주겠다고 하나뿐인 패딩 입혀가며 여기까지 데려온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아서. 정말 기억에 남는 장면은 죽을 때 스쳐 지나간다던데, 박원빈은 왠지 오늘이 그런 날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외상을 입은 환자는 상처가 아물어가는 게 눈에 보인다. 하지만 영상의학 검사로도 분별되지 않는 내상은 환자의 말이 아니면 증상이 호전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약을 바꿔도 눈에 띄는 변화가 없고, 여전히 상처를 달고 오고. 이럴 때 주치의는 무력감을 느낀다. 내 환자를 낫게 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박원빈에게 미안하지만 한 번 더 종합적인 검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아서 초조했다. 그 전까지 뭐라도 해야했다. 박원빈은 상관없다며 고분고분 수긍했다. 오히려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인 건 서이원이었다. 뭐, 하시는 건 상관없는데... 마지막 검사받은 게 정 선생님 오시기 직전이라 별 차이 없지 않을까 싶네요. 정성찬은 이원의 충고를 듣는 척만 했다. 혹시 몰라서요.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그렇게 대꾸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했지만 그런 시스템조차 아직까지 넘어서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바로 인간의 직감이다. 정성찬은 의료 행위에 있어 의료인의 직감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이 검사는 오로지 자신의 직감에 의거해서 진행하는 거였다. 지독하게 폐쇄적인 병원, 차도 없는 병세, 생겼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상처들. 언젠가부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백 퍼센트 믿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놀랍게도 직감은 대체로 맞는다. 직감은 살면서 겪은 경험을 기반으로 한 데이터가 내려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보고서를 작성하던 영상의학과 전문의는 일방적으로 판독실에 들이닥친 정성찬을 보고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직 확인 중이라 지금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성찬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밀치고 모니터를 확인했다. 고화질의 스캔 이미지는 자세히 볼 필요도 없었다. 솔직히 이 정도면 다른 사람의 뇌 사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단 몇 개월 만에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변하는 건 말이 안 됐다. 새로 촬영한 MRI 결과 이미지 속 뇌는 해마가 위축되어 있었다. 외상이 동반되지 않은 해마 손상의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혈액검사에서 비정상적으로 높게 나온 코르티솔 수치가 의심에 무게를 더해주고 있었다.
조용하던 병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박원빈은 예고 없이 병실로 찾아온 정성찬을 보고 놀란 눈을 했다. 침대 앞에 서 있던 간호사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은 점심 약을 복용하는 시간이었다.
"박원빈. 뱉어."
"지금 약 복용 중인데 이러시면..."
"그거 뱉어, 빨리."
새까만 동공이 흔들렸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성찬은 원빈의 양 뺨을 쥐었다. 강하게 누르지 않아도 입술 사이가 자연스레 벌어졌다. 미안하다고 사과할 겨를도 없었다. 그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감촉만으로 약을 찾았다. 뜨거운 검지와 중지가 축축한 혀 위를 더듬어댔다. 멋대로 침범해오는 손길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늘 적당한 온도로 유지되고 있던 병실이 갑자기 덥게 느껴졌다. 원빈은 침대 시트를 말아 쥐었다. 아래서부터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채 삼키지 못한 알약이 손끝에 걸렸다. 한참을 헤집던 입속에서 손가락이 빠져나갔을 때, 박원빈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뭐 하는 거냐고 차마 묻지도 못했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성찬은 젖은 손가락으로 찾아낸 알약을 살폈다. 미처 녹지 못한 알약 위에 새겨진 식별코드가 선명했다. 간호사가 들고 있는 스텐 트레이 위로는 주인을 찾아가지 못한 알약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너 계속 이 약 먹고 있었어?"
평상시보다 흥분한 목소리였다. 원빈은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커다란 눈동자가 구슬처럼 투명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읽혔다.
"...그런 거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일일이 보면서 먹는 게 아니라서..."
시선 피하며 하는 그 말은 긍정의 의미일 것이다. 박원빈은 유독 거짓말할 때 티가 많이 났다. 그걸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찬은 손을 뻗어 맨살이 드러나있는 팔을 그러쥐었다. 제 팔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가 있어도, 엄지가 팔 안쪽을 문질러와도 원빈은 피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간호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산만하게 두리번거릴 동안, 투약에 실패한 알약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침묵 속에서 접촉은 지속됐다. 생채기가 새겨진 피부는 모순적이게도 부드러웠다. 이 역설적인 상황에서 박원빈을 위해 뭘 더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강원도 산허리에 처박힌 이 병원에서, 외부로 전송되는 데이터가 모두 차단된 이 상황에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를. 당장 할 수 있는 건 방금 전 일에 당황했을 박원빈을 다독여주는 것뿐이었다.
"많이 놀랐지.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이 어쩐지 낯간지러워 원빈은 버릇처럼 뒷목을 매만졌다. 손가락이 훑고 간 자리에 햇볕을 받아 별처럼 새겨진 주근깨가 선명했다.
박원빈이 머금고 있던 약은 메틸프레드니솔론이다. 이런 종류의 글루코코르티코이드 계열 약물은 운동선수나 극한의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부상 치료나 염증 억제를 위해 사용한다. 대표적인 부작용으로는 면역 체계 약화와 불면증이 있고, 장기 복용 시에는 인지 기능 저하나 기억력 장애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건 정성찬이 처방한 약이 아니다.
"선생님이 잘못 보신 거 아닐까요?"
서이원한테는 말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 프로세스 무시하고 윗선에 바로 보고를 올린 후 받은 대답이었다. 늘어지는 말투로 되묻는 신경과 과장은 피곤하다는 듯 눈가를 문지르고 있었다. 뭘 잘못 봤다는 걸까. 말도 안 되는 검사 결과 비포 앤 애프터를? 아니면 처방한 적도 없는 좆같은 흰색 알약을? 짜증이 치밀어 오른 성찬은 습관처럼 혀로 볼 안쪽을 쓸었다.
"정확하게 봤습니다."
"워낙 약 종류가 많으니까 헷갈릴 수도 있겠죠. 정 선생님이나 약사나... 투약 담당하는 간호사가 약을 잘못 관리했을 수도 있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신경과 과장은 관자놀이에 두 손가락을 올려둔 채 눈앞의 성찬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그러더니 테이블 위에 있던 물을 한 잔 마시고는 고개를 좌우로 당기듯 움직였다. 관절 속 기포가 터지면서 뚜둑 소리가 났다.
"확인하고 조치할 테니 이만 나가봐요."
"당분간 투약 준비는 제가 하겠습니다. 약사나 간호사가 제대로 확인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동떨어진 공간처럼 보이는 백색의 사무실에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 1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를 동안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내 신경과 과장이 뒤늦은 대답을 내놓았다.
"뭐... 정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번거롭게 군다는 듯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였다.
그다음 날부터 복용약은 정성찬이 직접 챙겼다. 조제실까지 들쑤시고 다니는 모습을 약사와 약무 직원들이 반길 리 없었다. 하지만 성찬은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알 바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굴면 파견이 끝난 뒤 최 교수에게 최악의 피드백이 전달될 수도 있었다. 그것 또한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성찬은 처방한 약을 직접 챙기고, 간호사가 크로스 체크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투약 시간에 맞춰 병실을 방문하고, 조제된 약과 처방 리스트를 대조해서 확인했다. 복용 중이던 약들은 갑자기 단약할 수 없는 종류가 대부분이라 용량을 줄일 수 있는 건 최대한 줄였다. 대체할 수 있는 약들은 종류를 변경했다. 약은 처방한 내용과 동일하게 생긴 약이 나왔다. 그래서 성찬도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검사 결과도 조작하고 처방한 약과 다른 약을 환자에게 제공하는 정신 나간 병원이라면. 약의 외형을 흉내 내서 제조하는 것 따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의료인이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을 그 지경까지 불신할 수 있을까. 그딴 거에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머릿속은 이미 과부하 상태였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만큼이나 선택지도 제한적이었다. 방법이 무엇이든 방향은 하나뿐이었다. 박원빈만 괜찮아진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렸을 때 TV 채널 돌리다가 본 스릴러 영화나 공포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핵심 사건은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치는 날에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번개가 번쩍이는 순간 살인마의 모습이 비치던 장면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았다. 정성찬은 지금 어릴 적 추억을 되새기고 싶은 게 아니었다. 더 프레스티지 메디컬 센터에서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를 맞이하고 있자니 그때가 떠올랐을 뿐이었다.
뉴스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다. 이상기후 가속화. 기록적인 폭염. 역대급 한파. 전례 없는 가뭄. 지금 강원도에는 계절을 잊은 것처럼 이례적으로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굵은 빗줄기가 마치 쏟아지는 폭포처럼 건물 외벽을 강타했다. 방에 창문이 없어 섬광은 보이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천둥소리만으로도 바깥 상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건물 위로 떨어지는 세찬 빗소리가 천둥소리에 뒤섞여 자꾸만 어릴 적 본 영화들이 떠올랐다. 고립된 공간, 늦은 밤, 쏟아지는 빗줄기, 하늘을 갈라놓을 것처럼 울리는 천둥소리. 그리고...
쿵쿵쿵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와, 이건 진짜 공포인데. 정성찬은 놀란 두 눈으로 굳게 닫혀있는 방문을 쳐다봤다.
쿵쿵쿵
"...누구세요?"
몸이 저절로 굳었다. 두려움에 목소리 톤이 절로 높아졌다. 정성찬은 덩치에 맞지 않게 겁이 많은 편이었다. 근데 이건 누구라도 무서워할 상황 아닌가. 보통의 사람이라면...
쿵쿵쿵
왜 대답 없이 문만 두드리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사람이에요? 당황한 나머지 되는대로 내뱉은 질문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긴 귀신은 대답을 못하겠지... 하... 안 열어주면 이 상태로 밤새 문 두드릴 기세라 성찬은 크게 심호흡하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속으로 5초를 셌다. 5초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문을 열었고.
"..."
문 앞에는 박원빈이 서 있었다. 자기를 보호해 줄 방패라도 되는 것처럼 베개 하나 끌어안고서.
"왜 이렇게 늦게 열어요?"
"..."
"나도 겁 많은데 형 진짜 겁 많다."
아무렇지 않게 방 안으로 몸을 들이는 박원빈의 뒤통수에 대고 횡설수설 변명했다. 나 무서운 걸 진짜 싫어해. 그래서 그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성찬은 문을 닫으면서 잊지 않고 꼭 잠갔다. 두려움에 알아서 안전을 챙기게 됐다.
"근데 여긴 어떻게 왔어?"
애초에 입원 중인 환자는 야간 이동이 불가능하다. 당직 의료진이 병실을 순회하면서 확인하는데다가 병실 내부에 설치된 CCTV에 잡히기 때문이다. 물건이 거의 없는 방을 둘러보던 원빈은 조그만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끌어안고 있던 베개 끝자락에 턱을 걸친 채 성찬을 올려다봤다.
"천둥 때문에 무서워서 못 자겠다고 했더니 여기 와도 된대요."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라고 여길 그런 말을 진담처럼 하는 박원빈은 유독 말간 표정이었다. 둘 다 흰 반팔 티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어서인지 마치 여기가 진짜 집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같이 자도 돼요?"
나른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어오는데 안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천둥번개에 비도 많이 오고... 박원빈이 충분히 무서워할 만한 상황이니까, 이것도 담당 환자를 위한 조치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했다. 그렇게라도 이유를 덕지덕지 붙여야 쓸데없는 생각을 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성찬은 뒷머리를 매만지며 침대를 살폈다. 성인 남성 한 명이 자기에는 충분하지만 두 명을 수용하기에는 좁은 사이즈였다. 무엇보다 사이즈가 문제가 아니라 한 침대에서 자는 건... 그냥 말이 안 됐다. 성찬은 헛기침을 했다.
"침대에서 자."
"형은요?"
"난 소파에서 잘게."
소파의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원빈은 고개를 숙였다. 지금 앉아있는 소파는 정성찬 키로는 무릎을 한참 굽혀야 누울 수 있어 보였다. 근육통 직행열차 감이었다.
"말이 안 되는데. 못 자요, 여기."
"하면 다 돼."
정성찬은 박원빈을 침대로 보내고 바로 시연에 들어갔다. 좁은 소파에 몸 욱여넣은 정성찬은 태아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불편해 보이는데 자꾸만 아무렇지 않다고 어필했다. 봐 봐. 됐지? 괜찮잖아. 그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박원빈은 앉아 있던 침대 끄트머리에서 일어나 성찬에게 다가갔다. 타이트한 공간 속에 쭈그러진 성찬이 눈을 들어 올려 원빈을 쳐다봤다.
"하나도 안 괜찮아 보여요."
"..."
"그만하고 일어나요. 저 잠 와요."
뻗어온 손에 붙들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속절없이 끌려갔다.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치료의 일환이다. 빗소리 들으며 침대에 누운 채 정성찬이 내내 한 생각이었다. 재워야 하니까... 잠을 자야 하니까... 똑바로 누우려니 어깨가 부딪혀서, 아까부터 몸을 틀어 옆으로 누워있었다. 사실 어깨가 부딪히는 건 크게 상관없었지만 무의식중에 고개라도 돌리게 될까 봐, 그리고 숨소리가 너무 잘 들려서 일부러 옆으로 누운 거였다.
한동안 멈췄던 천둥이 다시 치기 시작했다. 하늘이 찢어지는 굉음이 났다. 성찬은 어깨를 움츠렸다. 비단 폭발음에 가까운 큰 소리가 울린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천둥소리에 놀란 듯 박원빈이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아온 탓이었다. 예고 없는 스킨십에 당황한 정성찬은 그대로 몸을 굳혔다. 공포영화 효과음으로 삽입해도 이질감이 없을 것 같은 천둥소리보다 박원빈이 안아온 게 정성찬을 더 놀라게 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면 어둠 속에서 박원빈의 얼굴이 보였다. 10년을 사랑한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쏟아지는 빗소리보다 심장 박동이 더 크게 들릴까 봐 걱정될 정도로.
의지와 달리 신체반응이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마른침이 삼켜지고 목울대가 느리게 울렁였다. 침 삼키는 소리는 빗소리에 묻히지도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선이 얽히고.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숨결마저 뒤엉키던 그 순간에. 박원빈이 입을 맞춰왔다. 허리춤을 붙든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거기까지가 낼 수 있는 용기의 한계라도 되는 듯 그대로 입술만 맞댄 채 멈춰있었다.
코끝이 스치고, 흐트러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익숙한 샴푸 향이 스며 나왔다.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정성찬은 그대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마주보는 자세로 박원빈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어지러웠다. 정신이 몽롱했다. 공기가 부족한 걸지도 몰랐다. 모자란 숨을 채우기 위해 몇 번이고 입술을 머금었다. 이 시간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조급해졌다. 박원빈의 뒷목을 붙들고 빈틈없이 몸을 맞붙이면 입술 사이로 달뜬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흥분감에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열 오른 두 뺨보다 맞닿은 혀가 더 뜨거웠다. 어떻게든 더 하고 싶어 입을 맞추기에 급급했다. 서로를 갈망하는 혀가 뒤섞였다. 공유하는 숨결마저 더웠다. 밀착된 하체가 불편했다. 그걸 인지한 순간 한참을 맞붙어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빗물이 후드득 건물 외벽을 두드리는 소리 사이로 벅찬 호흡소리가 스며들었다. 뺨을 감싸던 손은 갈 길을 잃었다. 묘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대로 팔을 내려 허리에 둘렀다. 힘 풀린 까만 동공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더 기분 좋게 하는 방법은 없어요?"
"..."
"의사면 알아야 되는 거 아닌가..."
뭘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기분 좋게 하는 방법 같은 건 의사가 아니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거였다. 이 정도로 빠듯하게 느껴지는 거라면 해결책은 너무나 명확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 건 안 배웠는데."
허리를 감은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성찬은 정신을 똑바로 붙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빈이 몸을 더 가까이 붙여왔다.
"저 아픈 거 잘 참아요."
"..."
"그러니까 아프게 해도... 상관없어요."
뭐든 괜찮으니까...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여기서 멈추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입을 다시 맞부딪히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도톰한 입술을 물어당기고, 뜨거운 혀로 입안을 헤집는 동안 내내. 타액을 나누는 감각이 황홀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서로의 혀를 한참 동안 어루만지다가 문득 시선이 마주 닿았다. 성찬이 눈에 담기는 길을 따라 서서히 자취를 남겼다. 입술이 조심스레 붙었다 떨어지며 자리를 옮겨갔다. 입술에서 뺨으로, 뺨에서 턱에 박힌 점으로, 그리고...
정성찬은 아랫배가 저릿하게 당겨오는 이 상황을 빠르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 대신 박원빈을 끌어안는 걸 택했다. 알려주고 싶었다. 꼭 그런 방식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서로를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는 것을. 준비되지 않은 단계를 충동적으로 넘어갈 거였으면 10년 동안 기다리지도 않았을 거라.
"너무 좋아서 그런가. 떨려서 못하겠어."
그 말에 박원빈이 저항 없이 웃었다. 왜 웃어, 진심인데.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애쓰는 얼굴로 저런 말을 하는 게 하나도 안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마주 닿은 아래가 아까부터 난리 난 게 느껴지는데 괜찮은 척하는 게 조금 귀엽다고도 생각했지만. 정말 이것만으로도 좋다는 듯 덧붙이는 말조차 형답다 싶어서. 그래서 그냥 저를 마주안은 정성찬의 품에 파고들었다. 가슴팍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체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힘껏 안아줄 때 느껴지는 가벼운 압박감이 오히려 숨통을 트이게 만들었다. 정성찬의 품은 포근했다. 겨울에 덮는 이불처럼 따스했다. 어쩌면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왔을지도 모른다. 이제야 제 집을 찾은 것 같은 평온함과 안정감이 몰려왔다. 박원빈은 정성찬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눈을 감았다.
"있잖아요."
"응."
졸음이 쏟아지는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형이랑 있을 때 내가 나 같아요..."
온기는 전염된다. 가슴께에 파묻은 얼굴로부터, 그러안은 두 팔로부터, 한 겹짜리 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닿은 몸으로부터. 한겨울에 나누는 체온은 사람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정성찬은 대답 대신 박원빈의 등을 다독였다.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오래도록 기다렸던 잠이 찾아온다. 어느덧 비가 그쳤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은 고요함만이 부유한다. 그날 박원빈은 단 한 번도 깨지 않은 채 깊이 잠들었다. 아주 어릴 적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익숙한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이곳으로 파견 오기 전까지는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햇빛을 받아 알람 없이도 기상했지만 창문 없는 방에서의 생체 리듬이 교란된 삶은 핸드폰 알람이 필수였다. 정성찬은 한쪽 눈을 비비며 옆을 바라봤다. 박원빈에게 내어준 공간이 비어있었다. 밤새 박원빈을 끌어안았던 팔만 허전하게 놓여있었다. 아무래도 거짓말하고 몰래 이 방으로 왔을 테니까... 아침에 간호사들이 병실을 돌면서 확인하기 전에 돌아갔을 확률이 높았다.
평소보다 서둘러 씻은 뒤 니트 위에 가운을 걸친 정성찬은 곧바로 병실로 향했다. 회진 시간이 아닌 이른 아침이라 나중에 한소리 들을 법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프라이빗 병원이라면서, 일대일 전담 케어라면서. 그럼 이 정도는 용인해 줄 수 있는 수준 아닌가.
"원빈아."
갑자기 들어가면 놀랄 것 같아 병실 앞에 서서 이름부터 불렀다. 얼굴을 보게 되면 물어볼 생각이었다. 잘 잤어? 하고.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병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문 옆에 붙어있던 이름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박원빈.
가지런히 개어진 이불,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닦인 협탁.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정리되어 있는 병실을 맞닥뜨리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트라우마처럼 남은 10년 전 어느 날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갑자기 그 애가 곁에서 사라졌을 때. 아무리 찾아봐도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을 때. 심장이 정지되기라도 한 것처럼 호흡이 멎었다가 이내 거세게 쿵쿵거렸다.
정성찬은 닥치는 대로 병실 안을 뒤졌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협탁 서랍 한편에 넣어둔, 꼭 챙겨 바르라며 쥐여줬던 연고와 밴드마저 사라진 걸 인지한 순간. 멈출 수가 없게 됐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 폭우가 모든 걸 쓸어가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 공간 안에서, 성찬은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옷장 안 금고까지 손을 댔다. 뭐라도 찾고 싶었으니까. 뭐라도 찾아야 하니까. 텅 빈 옷장 안에는 금고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새까만 잠금장치의 문이 열려있었다. 그 사이로 흐트러진 문서 몇 장이 보였다.
가나도 프로젝트
문서번호: GN-PJT-00108
기밀 등급: 1급 (TOP SECRET)
배포 제한: 프로젝트 관련자 외 열람 금지
프로젝트명: 가나도 프로젝트 (GANADO PROJECT)
1. 목적
가나도 프로젝트는 현대 전쟁 및 특수 작전 수행의 효율성 극대화를 위해, 인간을 병기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실전에서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간병기는 기존 무기체계와 달리 민첩성과 유연성을 갖추고, 복잡한 환경에서도 높은 적응력을 발휘하며, 감정을 배제한 전략적 판단과 수행 능력을 지니도록 설계된다.
2. 운영 목표
- 전술적 정밀성과 신속성을 갖춘 인간 병기의 육성
- 감정 및 정서적 반응의 억제
- 특정 타겟 제거 및 정보 수집
- 전투 중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신체적 회복력 강화
3. 육성 프로세스
1단계: 초기 평가 및 선발 (5-10세)
- 유전자 분석 및 심리적 내구성 평가
- 기존 성장 환경에서 분리 후, 시설 내 육성 시작
- 신체 능력 기초 훈련 (근력, 지구력, 반사 신경 등)
2단계: 기본 훈련 (11-15세)
- 전투 기초 기술 훈련 (격투, 사격, 생존 기술)
- 언어 및 암호 해독 교육
- 감정 통제 훈련
- 체력 강화 및 감정 억제 목적의 정기적인 약물 투여
3단계: 고강도 훈련 (16-20세)
- 라포 형성을 통한 인간관계 학습
- 전술 훈련, 근접 전투 훈련 및 위기 대처 능력 향상 목적의 스트레스 컨트롤 훈련 강화
- 소규모 교전 투입 통한 초기 실전 경험 확보
- 신체 회복 약물 투입 강화 및 감정 둔화 물질의 주입
4단계: 완성 단계 (21세-)
- 특수부대 및 전투 팀에 고위 임무 수행 투입
- 대규모 작전 내 메인 타겟 제거
- 장기적인 감정 말소를 위해 약물 주입 비율 상향 조정
- 실패 사례 발생 시, 제거 또는 재조정
4. 대상자 개별 분석 보고(Case Study)
- 대상 코드네임: 가나도 S07
- 본명: 박원빈
- 성별: 남성
- 생년월일: 2002년 3월 2일
[개체 S07 육성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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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자는 전국 보육원을 통해 진행한 체력 테스트에서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뛰어난 신체 능력과 높은 학습 흡수력을 보임. 프로젝트 발굴 요원에 의해 초기 선발되어 유전자 분석 진행. 분석 결과, 근육 발달 유전자 및 스트레스 내성 관련 유전자가 일반 대비 우수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는 장기적 신체 훈련 및 극한 상황에서의 적응 능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판단
─
초기 신체 강화 훈련 및 기본 전술 교육 시작. 감정 통제 실험을 위해 극한 상황에서의 스트레스 반응 테스트 실시. 대상자는 평균 대비 뛰어난 감정 억제력과 침착성을 보여 가나도 프로젝트 적합 대상자로 판정
─
주 3회 특수 체력 훈련과 외국어 학습 시작. 연령 대비 높은 수준의 암기력과 전략적 사고력을 발휘하며 팀 훈련에서도 두각을 나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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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적 한계 강화를 위한 약물 주입 실험 1단계 완료. 이후 대상자의 근지구력과 신체 회복 속도가 증가한 것으로 관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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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능력 평균 대비 130% 기록. 약물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나며, 초기 감정 통제 훈련에서 우수 성과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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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고등학교에서 위장 활동 중 상급생 정성찬과 깊은 인간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확인. 라포 형성 과정에서 관찰된 감정적 교류는 추후 후속 훈련 활용을 위한 주요 데이터로 판단됨. 감정적 연결 방지를 위해 전학 수속 진행
─
U특수임무대대 입대. 체력 및 정신적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특수훈련에 참여. 전투 상황에서 잠재적인 정신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심리 훈련 강화
─
국제 밀수 조직 은닉처 급습 및 해상 작전에 참여, 1급 타겟 제거 임무 성공. 교전 중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판단으로 위험 지역에 남아 단독으로 임무 수행. 작전 능력은 입증했으나 감정적 판단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상부의 평가를 받음. 임무 도중 발생한 심각한 부상은 투입된 약물로 48시간 내 완전 회복. 감정 둔화와 신체 재생 약물 주입량 증가로 후유증 없는 회복 기록
─
레바논 파병 중 대규모 전투 지원 및 은밀 타겟 제거. 서브제로 작전 중 타겟 제거 과정에서 민간인 어린이 타겟 제거 실패. 이로 인해 가나도 A34가 노출된 위치 방어 과정에서 중상을 입고 현재 코마 상태. 작전 실패의 원인을 감정적 동요로 판단, 감정 둔화 물질 추가 투여
─
과거 라포 대상자였던 정성찬의 활용 가능성 평가. S병원 통한 파견 요청 진행. 가나도 S07의 감정 둔화 효과 확인을 위한 라포 형성 과정 관찰. 파견 종료 2주 전 라포 대상자 정성찬 제거 임무 별도 하달
※참고사항
모든 프로젝트 대상자는 감정적 상호작용이 실험 및 훈련 효과에 중요한 요소로, 이를 통해 임무 완수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보일 경우 즉각적 제거 혹은 대체 방안을 시행할 것
작성자: 프로젝트 책임자 I.W
승인자: 최고 관리 책임자 E.H
"가나도 S07은 실패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자들의 나열로 혼란스러운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20년을 훈련시켰는데도... 잔정이 너무 많아요. 안타까운 일이죠."
서이원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진심으로 속상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머리에 왁스까지 꼼꼼하게 처바르고 온 티가 났다. 그 꼴마저도 인위적이라 정성찬은 마음 같아선 여길 다 부숴버리고 싶었다.
"좆같은 소리 좀 제발 그만하고..."
머릿속에서 방금 본 온갖 이미지와 글자들이 뒤섞였다. 억누르고 있던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손에 들려있던 문서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적어도 정성찬이 보기엔 그랬다.
"박원빈 어딨어?"
분노에 가득 찬 얼굴을 멱살 잡힌 채 올려다보고 있어도, 서이원은 평온한 모습이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예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이 돌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화가 많이 나신 것 같네요. 이 정도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는데요. 하긴 뭐, 의사라고 해서 살인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짜인 스크립트를 읽는 것처럼 감정이라곤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곧이어 병실 밖에서 직원 몇 명이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정성찬의 몸을 붙들고 서이원에게서 떨어뜨렸다. 운동까지 하는 장신의 남성을 통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역할을 나누기라도 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어젯밤 가나도 S07에게 마지막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다른 가나도와 비교했을 때 신체 능력과 전투 역량이 뛰어난 만큼 지속적으로 발목을 잡아 온 감정 통제 리스크만 해소하면 된다고 판단했죠. 일이 이렇게 돼서 유감입니다만, 어쨌든."
"지랄하지마."
"..."
"걔는 박원빈인데."
"..."
"그렇게 오래 지내면서 이름 하나 제대로 몰랐어?"
서이원은 여러 명에게 붙들린 채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는 정성찬을 쳐다봤다. 슬퍼 보이기도, 화나 보이기도 했다. 한 가지로 형용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얼굴에 서려있었다. 이원은 고개를 돌려 성찬의 오른팔을 붙들고 있는 직원을 향해 턱짓을 했다. 명백하게 뭔가를 지시하는 행동이었다. 지체 없이 경정맥에 주삿바늘이 꽂혔다. 마취제가 효과를 발휘하는 데는 통상적으로 30초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박원빈. 정성찬은 짧은 시간 동안 그 세 글자를 잊지 않으려고 몇 번이고 되새겼다. 불현듯 하고 싶은 게 많다던 그 애의 말이 떠올랐다. 운동도 배우고 싶고, 기타도 치고 싶다던 박원빈의 말이. 이내 눈가가 뜨거워졌다.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천장. 낯선 목소리.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통증. 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성찬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목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무리하지 마세요. 누운 상태로 대답하셔도 괜찮습니다. 무테안경을 착용한 의사는 너그러운 태도로 일관했다. 성찬은 눈을 떴을 때부터 정체 모를 용액을 맞고 있었다. 머리가 터질 듯 아픈 걸 보면 환자를 낫게 하는 용도가 아니라 고통스럽게 하는 용도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컨디션이요?"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솔직히. 별론데요."
갈라진 목소리를 겨우 내뱉자 의사가 말했다. 좋습니다. 컨디션이 별로라는 환자의 말에 적절한 대답은 아닌 것 같았다. 아파 죽을 정도라고 호소해도 개의치 않는다는 말투로 좋습니다 한 마디 내뱉을 것처럼 굴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아시겠어요?"
"병원이겠죠..."
"그럼 왜 오셨는지는요?"
환자와 스무고개를 하는 의사라니. 대형병원에서 근무하면 가끔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기억력에 문제가 있어 병원을 찾아온 환자들에게 하는 단골 질문이다. 본인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해 경찰이 인계해서 데리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성찬은 머리카락을 대충 헝클어트렸다. 묽은 농도의 물감이라도 퍼뜨린 것처럼 머릿속이 희뿌옇게 흐렸다.
"아프니까 와 있는 거 아닐까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옆에 서 있는 간호사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차트에 무언가 끄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찬은 통증이 느껴지는 손등과 폴대에 걸린 IV백을 번갈아 쳐다봤다.
"근데 어디가 아픈 거예요?"
정성찬은 눈가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물었다. 피로에 절어 평소보다 쌍꺼풀이 짙었다. 환자가 던질 수 있는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정말 스무고개라도 할 셈인지 눈앞에 있는 의사는 딱히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정도는 저도 알 권리가 있지 않나요."
그래서 네,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다행히 아니오 라는 대답 대신 천천히 말씀드리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천천히가 퇴원 직전을 뜻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회진 시간은 짧았고 정성찬 홀로 병실에 남는 시간이 많았다. 이렇게 입원해야 할 정도로 몸이 크게 아픈 것 같지도 않았다. 스스로 느끼기엔 그랬다. 두통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증상은 다른 방향으로 변질됐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의사가 하는 질문의 양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컨디션이 어떤지 묻기만 하다가, 언젠가부터는 몸 상태에 대한 질문이 하나씩 추가됐다. 그리고 회진 말미에는 항상 이런 질문이 따라붙었다.
기억은 어느 정도 돌아온 것 같으세요?
가나도 기억나세요?
한두 번 들을 때야 그게 뭔데요? 했지, 계속 들으니까 지겨웠다. 죄송한데 전 언제 퇴원할 수 있을까요. 별로 아픈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럴 때면 어김없이 의사와 간호사는 눈빛 교환을 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지루했다.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었다. 성찬은 침대 옆에 놓아두었던 책을 펼쳤다. 어렸을 때부터 가끔씩 생각 정리하고 싶을 때 읽던 자기계발서였다. 강원도 산자락에 있는 병원으로 파견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혹시라도 할 게 없을까 싶어 챙긴 책이었다. 이젠 너덜거리는 그 책을 몇 번이고 읽다가... 아마 한 번도 펼쳐본 적 없는, 첫 페이지에 가려져 있던 속지에서 생경한 문장을 발견했다.
나랑 놀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이거 비밀인데 형이랑 있을 때가 제일 재밌어요
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글자를 따라간다. 꾹꾹 눌러쓴 글씨가 어쩐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손가락으로 글자 위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아무리 더듬어봐도 문신처럼 새겨진 두 문장은 너무나 선명했다. 구겨지고 오래되어 때 탄 책에서 그 페이지만 유독 새것 같았다. 이상하게 눈이 따가웠다. 그래서였다. 소매로 눈가를 문지른 건. 이유 없이 따끔거려서. 눈앞이 흐릿해서. 거울 보면 빨개져있을 게 틀림없어서.
성찬이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다가 책장을 넘겼을 때, 여느 때처럼 친절로 점철된 목소리가 병실의 고요를 깨뜨렸다.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이젠 익숙해진 얼굴이었다. 괜찮아요 하고 대답하자 그때부턴 똑같은 질문의 연속이었다. 많이 피곤하지는 않으신가요. 근육통이 있다거나 하는 증상은요. 다른 데 불편하신 건 없으신가요. 아프다고 해도 좋다고 할 거면서 왜 묻는지 모를 질문의 나열이 계속됐다. 속이 울렁거리는 걸 참고 다 괜찮다고 하면 회진을 마무리하는 질문이 뒤따라왔다.
"기억은 나세요?"
"..."
"가나도."
정성찬은 창문으로 새어들어온 햇빛에 눈가를 찡그리며 대답했다.
"너무 많이 얘기하셔서... 이젠 제가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헷갈려요."
"..."
"이 정도 들었으면 안다고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안경 렌즈에 빛이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의사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할 일을 마쳐 후련한 표정이었다.
"계속 궁금해하셨죠? 정성찬씨는 병원 근무 중에 사고가 있어 입원하셨던 겁니다."
참 빨리도 알려준다고 생각할 무렵.
"완전히 회복된 걸로 보이네요. 내일부터는 근무지로 복귀하시면 되겠습니다."
명백하게 기억을 못 하는 듯한 답변을 했음에도 의사는 병세가 안정된 것 같다며 퇴원을 권했다. 그날 정성찬은 병실을 떠나기 위한 짐을 쌌다. 짐이랄 것도 없었다. 애초에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입원을 한 거라 보스턴백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마저도 누군가가 짐을 옮기기만 한 거여서 성찬 역시 그대로 들고나가면 되는 수준이었다. 입고 있던 환자복을 벗고, 옷장 안에 걸려있던 니트로 갈아입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면 창가 너머로 서늘한 풍경이 보였다. 나뭇가지 끝에 얼음이 맺혀있었다. 아직 겨울이 지나지 않았다는 게 실감이 났다.
다음날 정성찬에게 진료실을 안내해준 사람은 서이원이라는 명찰을 단 더 프레스티지 메디컬 센터 직원이었다. 그는 이동하는 길에 병원에서 지켜야 할 특별 수칙에 대해 몇 번이고 강조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혹시나 잊으신 부분이 있을까 싶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는 동안 성찬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조명을 흡수한 대리석 광택이 번들거렸다.
"마지막으로... 저희 병원은 VIP 환자분들의 개인정보 보호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본명 대신 개별 코드네임으로 환자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발걸음이 진료실 앞에서 멈췄다. 정성찬 선생님이라는 글자가 반듯하게 적혀있었다. 서이원은 글자 대신 실물 정성찬을 응시한 채로 세 음절을 또렷하게 발음했다.
"가나도."
"..."
"여기선 환자들을 가나도라는 이름으로 지칭해 주시면 됩니다."
입원해있는 동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이름이어서 새롭지도 않았다. 병실 생활만큼이나 지긋지긋했다. 정성찬은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목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네, 뭐 가나도인지 가나다인지 그건 계속 들었어요. 서이원은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언짢은 시선을 보냈다. 환자를 부르는 명칭인데 그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아, 네...
진료실 내부는 데스크탑과 필수 사무용품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랬다. 분명 여기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사람의 온기라곤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근무 중에 필요한 사항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마치 준비된 것처럼 모니터가 켜져 있었다. 성찬은 빼곡히 문자로 채워진 화면을 내려다봤다. 이미 열려있는 EMR 창에는 담당 환자의 데이터가 기록되어 있는 상태였다. 환자 이름 가나도 S07.
"담당하실 환자가 왔네요."
서이원의 말에 정성찬은 고개를 들었다. 진료실에 머뭇거리며 들어오는 모습은 한 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로 잘생겼고,
"편하게 인사 나누세요."
얼굴을 제외하면 목이며 팔이며 거즈 붕대를 감지 않은 곳이 없었다. 까만 민소매로 가려진 부위에도 드레싱 폼이 덕지덕지 붙어있을 게 뻔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어도 되나 싶은 비주얼을 목도하고 정성찬은 잠시 멈칫했다.
"...여기가 아니라 외과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서이원은 굳어있는 정성찬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본 치료는 다 마친 거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문득 크게 아픈 곳도 없이 병실에 입원해있던 자신이 떠올랐다. 진짜 아픈 사람도 구분하지 못하는 이 병원이 머저리같이 느껴졌다.
살면서 환자 주선이라는 건 듣도 보도 못했지만, 서이원은 담당 환자를 소개하자마자 할 일을 다 끝낸 것처럼 자리를 떠났다. 진료실 안은 적막만 감돌았다. 둘 사이에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과 지금의 고요한 상황이 묘하게 대조적이었다. 정성찬은 책상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손으로 정중하게 가리켰다. 앉으세요. 그 말에 주저하던 담당 환자 박원빈이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몇 번 정성찬을 힐끗거리던 것도 잠시, 박원빈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한 채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게 새하얀 키보드인지, 책상 위로 놓인 정성찬의 불거진 손마디인지, 더 프레스티지 메디컬 센터에 온 이후로 한 번도 울리는 걸 본 적 없는 전화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선이 어긋났다. 정성찬은 마주 닿지 않는 눈길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박원빈을 보고 있었다. 반쯤 내리깔린 눈꺼풀 아래로 속눈썹이 그린 것처럼 촘촘했다.
"잠을 잘 못 자요?"
너 아직도 잠 잘 못 자? 낯설지 않은 그 질문을 듣고 나서야 원빈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까만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혹시나 하는 작은 기대의 눈빛. 그러면서도 실망하고 싶지 않아 애써 억누르려는 표정. 착각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성찬이 웃으면서 손으로 모니터를 톡톡 건드렸다.
"여기 그렇게 쓰여있길래."
"아, 네. 그냥 좀..."
잠긴 목소리는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금세 끊겼다. 한없이 가라앉는 침묵이 처음보다는 덜 어색하게 느껴졌다. 정성찬은 더 이상 모니터 화면에는 관심이 없었다. 거기 있는 내용들은 필요할 때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지금은 데이터 몇 줄보다 앞에 앉아있는 박원빈이 더 중요했다.
정성찬은 박원빈을 눈에 담았다. 얼굴에서부터 상체까지, 아주 천천히. 그러면서 멸균 처리된 몇 겹의 천으로 둘러싸인, 보이지 않는 상처를 상상했다. 부상을 입기까지의 과정과 상처가 회복되기까지의 고통을 떠올렸다. 상처는 언젠가 아물어도 상흔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과정을 대체 몇 번이나 겪어야 했던 걸까. 감히 떠올리기도 버거워 해줄 수 있는 말이 제한적이었다.
"많이 아팠겠다."
박원빈은 어쩐지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한참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참을 만했어요."
담담한 어투로 괜찮다는 듯 말한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닌데. 세상 사람들은 다 아는 걸 박원빈만 모르는 것처럼 굴어서.
"그건 그냥 견딘 거지. 안 아픈 게 아니라."
"..."
"아팠을 거잖아, 엄청."
정성찬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박원빈은 두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정성찬이 저런 식으로 나오는 이유를 이해해 보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원래 알던 형은 누구에게나 적당히 친절했고, 초면인 사람에게 정돈된 말투로 말할 줄 알았고.
"..."
이렇게 자기 거 대하듯이 구는 건, 잃어버린 기억 속에나 존재할 저한테만 그러는 거라고 줄곧 생각했기에.
정성찬은 양해도 구하지 않고 팔을 뻗어 박원빈의 손목을 낚아챘다. 손등 위로 주황색 캐릭터 밴드가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최대한 괜찮아 보일 수 있는 표정을 골라 장착하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접착력이 떨어진 밴드를 떼어내자 옅게 파인 상처가 붉게 남아있었다. 망설임 없이 책상 서랍을 뒤지면 익숙한 자리에 연고와 밴드가 있었다. 상처 위로 약을 발라주고 새 밴드를 붙여주는 동안 박원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새 밴드 위로 정성찬이 엄지를 문지르는 걸 눈으로만 쫓다가, 이상하게 마른침이 삼켜질 무렵.
"원빈아."
눈이 마주쳤을 때 정성찬이 이름을 불렀으므로.
"박원빈."
영원히 기억 못 할 거라고 생각했던 이름을 불리는 순간, 박원빈은 처음으로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메스꺼움과 어지럼증은 약물 대사 억제제를 복용했을 때 나타나는 흔한 부작용이다. 간 손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간부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명색이 전공의인데 정성찬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이것뿐이었다. 박원빈을 잊지 않을 방법. 그 애를 기억할 방법.
헛웃음밖에 안 나오는 검사 결과를 마주했을 때, 처방한 적 없는 약이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성찬은 사전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조제실을 들락날락하면서 약들을 구했다. 다른 이들은 몰라야 했다. 어렴풋이 이 병원이 비정상적이라고 느끼게 된 이후부터, 언젠가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약들이었다. 업무를 마치면 방으로 돌아와 보스턴백 깊숙한 곳에 그것들을 쑤셔 넣는 게 하루 일과의 마무리였다. 힘겹게 얻은 그 약들을 실제로 사용하게 됐을 때 정성찬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반복할 생각이었다. 그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을 거란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박원빈."
바라는 게 하나뿐이라.
나는 그냥 네가 잘 잤으면 좋겠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밥도 맛있는 걸로 잘 챙겨 먹고. 너 하고 싶었던 것들도 하나씩 다 해보고. 그러다가 버거울 땐 쉬어가고. 어떻게든 버티는 게 아니라 힘들 땐 기대는 연습도 하고. 울고 싶을 땐 울더라도 많이 웃고. 왜냐하면 웃는 게 더 예쁘니까. 평범한 남들처럼만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게 내가 너한테 바라는 유일한 거야.
데스크탑 팬이 돌아가는 소음 속에서도 낮은 목소리가 선명했다.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의심조차 되지 않는 그 말에, 박원빈은 애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할 줄 아는 게 오로지 마주 앉은 사람을 쳐다보는 것뿐인 고장난 로봇 같았다. 억지로 붙잡혀 내어줄 때까지만 해도, 새 캐릭터 밴드를 붙여줄 때까지만 해도 얌전하던 오른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건 하나가 아닌데."
너무 많은데요, 바라는 게... 새까만 동공은 축축했다. 어느덧 물기가 서려 마치 반짝이는 보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잠긴 목소리로 드문드문 말하는 박원빈의 얼굴을 정성찬은 공들여 바라봤다. 한번도 잊은 적 없는 얼굴이었다.
"이제 너로 살아."
줄곧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래도 된다고, 그럴 자격 있다고 꼭 한 번은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자, 우리."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정성찬은 기꺼이 곁에서 함께하고 싶었다. 이제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말이, 한 사람의 꿈을 바꿀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적어도 나한테는 그랬다고.
한참 매만지던 손을 잠시 놓았다. 이내 모니터 케이블이 뽑혔다. 하얗게 불빛이 들어온 화면에 둥둥 떠다니던 같잖은 코드네임이 사라졌다. 암전된 화면 위에는 더 이상 그 무엇도 표시되지 않았다. 코드만 제거해도 먼지처럼 사라질, 의미 없는 데이터일 뿐인데. 그게 뭐라고 누군가의 삶을 이렇게 옭아맬 수 있었는지. 곧이어 파열음과 함께 천장에 달려있던 CCTV 렌즈가 산산조각났다. 모니터의 파편들이 바닥으로 쏟아져내렸다.
박원빈의 시선이 엉망이 된 바닥으로부터 끝내 정성찬에게로 닿았을 때, 앞에 선 정성찬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애굣살이 접히고 눈꼬리가 호선을 그릴 때까지.
"나 손잡아 주면 안 돼?"
웃음에도 전염성이 있던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박원빈은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 앞에 있는 형이 몸만 큰 어린애처럼 행동하는 게 웃겨서, 여태 좋아하던 모습 그대로여서 웃은 것뿐이라고.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변명부터 떠올리면서.
박원빈이 웃는 얼굴은 10년 전 어느 날처럼 맑고 눈부셨다. 그 모습을 마주한 성찬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다시금 사르르 접혔다. 코끝이 어쩐지 시큰했다. 이제 질병코드 따위 궁금하지 않은 고질병이 제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듯, 맥박이 크게 뛰었다. 정성찬은 알 수 있었다. 이게 병이 아니라는 것도. 그래서 이상한 게 아니라는 것도. 박원빈 앞에서는 이 모든 게 당연한 거라는 것도.
주저 없이 뻗은 손이 정성찬의 손을 마주잡았다. 저절로 몸이 일으켜졌다. 깨진 조각들이 흐트러진 공간을 벗어나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선명한 발자국이 새하얗게 펼쳐진 설원 위를 자유로이 가로질렀다.
그제야 비로소 숨이 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