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ART VIDEO AFTER

에스데일데스에스데일
by. 녹라







오락실에는 여덟 개의 비트로 쪼개진 날카로운 배경 음악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소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각자 본인의 소음으로써 덮고 덮을 뿐이었다.


기울어진 판 위에서는 작고 묵직한 쇠구슬 두 개가 이리저리 부딪히며 방황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시작은 성찬의 몫이었다. 버튼을 누르면 쇠구슬이 힘차게 튕겨 올라갔다. 이어 두 사람은 핀볼 게임기의 버튼을 정신없이 두드리며 플립퍼를 열심히 움직였다. 쇠구슬은 장애물에 부딪히고, 특정 구역에 진입하며 쉼 없이 공중을 맴돌았다.


"어? 눈 온다!"


사면이 통유리로 둘러싸인 오락실은 어느새 스노볼 속 외딴집처럼 변해 있었다. 원빈의 한마디에 사람들이 일제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북적이는 소음도, 게임기에서 쏟아지던 소리도 잠시 멈춘 듯했다. 창밖에는 하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차디찬 바람이 목덜미를 스칠 때, 원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주목받을 줄 몰랐던지, 원빈은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귀여워. 성찬은 더는 속내를 감추지 않고 원빈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두터운 외투 덕에 폭신하게 맞닿은 온기가 전해졌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핀볼 게임기로부터 발걸음을 떼었다. 이미 쇠구슬 두 개는 차례로 판 아래로 빨려 들어가 버린 뒤였다.


게임 점수판은 끝을 모르고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기계음은 같은 구간을 반복하며 오싹한 잔향을 남겼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것에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락실을 빠져나와 천천히 눈 내리는 거리로 발을 내디뎠다.






두 사람은 각자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세게 불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도생 중인 듯했지만, 두 사람은 바짝 붙어 유대감을 표했다. 그 좁은 간격 안에서 나란히 발자국을 맞추는 놀이 따위를 즐기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는데, 때문에 두 사람은 멈춰 서서 몇 번이고 바싹 마른 목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웃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큼큼, 성찬이 일부러 음 이탈을 내며 기침하자 두 사람은 웃음보가 터졌다. 진짜 똑같이 따라 한다니까. 심지어 원빈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기침했다. 성찬은 만족감에 못 이겨 꼭 연극을 마친 배우처럼 우쭐한 자세를 취하더니 신사처럼 허공에 인사했다.


둘은 지난 며칠 동안 거금을 앗아간 사주 카페들을 떠올렸다. 대충 손에 꼽으라면 너덧 곳은 방문한 것 같은데, 모두 하나같이 이 둘의 운명을 점치는 데에 부정했다.






"이야, 인상부터가 아주 복잡하네."


성찬과 원빈은 서로 손을 꼭 잡고 좁디좁은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의자가 불편해 오래 앉아 있기는 힘들겠다 싶었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음력으로 된 생년월일에 태어난 시간까지 말해 주고 나니 그 역술인은 여러 책을 소란스럽게 뒤적거리며 둘의 눈치를 살폈다.


불친절하고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그가 내뱉는 말은 두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오히려 반짝거리는 두 사람의 눈빛 때문에 역술인은 말을 계속 더듬기만 했다.


"이렇게 복잡한 인연은 내가 처음 보네. 사주를 몇십 년을 보면서도 이런 건 처음이야."


성찬과 원빈은 눈길을 주고받으며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궁합을 보러 왔는데, 엉뚱한 진로 상담만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구 하나가 먼저 질문이라도 하려 치면 역술인은 곧장 말을 끊어내고는 뻔한 소리를 자꾸 늘어놨다. 감기나 조심하라잖아. 요즈음 날씨에 그런 소리를 누가 못 해? 공부에는 끝이 없으니까 자기 계발을 열심히 하라잖아. 젊은 사람한테 그런 말 못 할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


"저희...... 그렇게 어려운가요?"

"큼큼, 어렵지."


음정이 잔뜩 이탈한 소리에 두 사람은 고개를 푹 숙였다.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역술인은 이상한 외국어를 읊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말이라기보다는 존재하지 않는 외계어 같았다. 빵상 아줌마가 절로 떠오를 정도로 기묘한 순간이었다.


"큼큼, 내가 외국어를 잘하지 못해서......."


아니, 외국어가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래도 점수로 따지자면 백 점이야. 아니 백 점으로는 모자라지."


갑작스러운 역술인의 마무리에 성찬과 원빈은 서로를 힐끔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다음 사주 카페를 가서도, 그다음 사주 카페를 가서도, 마지막의 마지막 사주 카페에 가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너무나도 복잡해서 운명을 점치는 것은 제 능력으로 불가하지만, 둘은 먼 시공간을 건너 만난 것이 분명하니 그저 서로를 믿으며 살 수밖에 없다고. 마지막으로 방문한 사주 카페에서 들은 말은 더욱이 그 둘을 비통하게 만들었다.


하필 이 땅 위에서 만난 것도 참 박복한 팔자야.






저런 곳도 있었던가? 두 사람은 의아했다. 대학가의 사주 카페는 돌 만큼 돌았는데도 눈에 익지 않은 카페가 두 사람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길목 어귀에 놓인 화려한 네온 간판은 이방인처럼 그들을 초대했다. 좁고 어두운 골목 끝에 다다르고서야 두 사람은 그 간판에 적힌 문구를 읽을 수 있었다.


최면 카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스며든 이 카페는 두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카페 문밖까지 은은하게 퍼져 있던 향초와 허브의 향기는 카페 내부까지도 이어졌다. 음산하고도 신비로운 분위기가 꽤 독특했다. 최면 카페는 살면서 처음인데. 두 사람은 기대가 된다는 듯 어깨로 서로를 밀치며 장난을 걸었다. 익숙하지 않은 최면에 큰 괴리감을 느끼지 못한 것은 이미 몇몇 사람들이 체험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최면이란 VR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편안한 소파에 누워 어떤 기구에 의해 시각과 청각을 차단한 채로 움찔거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어서 오십시오."


낯선 목소리에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카운터에는 로브를 뒤집어쓴 두 남성이 그들을 반겼다. 아니, 반겼다기보다는 절차에 따라 영업을 시도했다. 두 사람은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존재 같았다. 같은 로브, 같은 움직임, 그리고 같은 톤의 목소리. 그들의 얼굴은 깊게 눌러쓴 후드 뒤로 감춰져 있어 제대로 살필 수 없었다.


"머리카락 조금이면 최면 체험이 가능합니다."


똑같이 왼손을 내밀어 가리킨 안내문에는 최면 코스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들의 말대로 금액은 따로 적혀 있지 않았고, 여러 흥미로운 항목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깊은 휴식’, ‘심리 상담’, ‘기억 회상’이라 적힌 항목들을 손가락으로 훑던 원빈은 맨 하단에 적힌 ‘탐험’이라는 항목에 눈길을 옮겼다. 아마 성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쳐다보며 눈빛으로 동의를 구했다. 하고 싶지? 하고 싶잖아. 맞지? 맞지?


"탐험은 뭐예요?"

"......."


최면은 성찬이 먼저 체험해 보기로 했다. 안내를 받은 성찬은 카페 안쪽의 조용한 방으로 들어섰다. 탐험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아무도 직접 답변하지는 않았지만, 안내문에는 ‘무의식의 무의식까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성찬이 중앙에 놓인 편안한 소파 위에 몸을 뉘었다. 불은 꺼졌고, 곳곳에 놓인 등불이 일렁이며 꽤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머리에 쓴 기구에 의해 시각과 청각을 차단당한 성찬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보고서 원빈은 그제야 진중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분위기에 압도된 탓이었을 것이다. 쌍둥이 중 한 사람은 버튼을 조작하고, 다른 한 사람은 나무 막대기로 작은 판을 내리치며 반복해서 소음을 자아냈다. 마치 스님이 내리는 목탁 소리처럼 맑고도 청아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쉽니다."


성찬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소음에 귀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빈의 눈에는 그저 숨을 억지로 세게 들이마시고 세게 내쉬는 성찬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상상 이상으로 엄숙한 쌍둥이의 행동 때문에 크게 웃을 수는 없었고, 홀로 입을 막은 채로 웃을 뿐이었다. 아, 오바 좀 하지 마. 작은 한마디에도 쌍둥이는 그에게 조용히 하라며 경고했다.


"가운데에 보이는 물체에 집중하십시오."

"......."

"천천히 일어나십시오."


성찬은 다시금 평화를 찾았다. 새로운 감각을 느끼며 눈을 떴지만, 동시에 갇힌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다. 주변은 희미한 안개로 가득했다. 안개가 걷히고 나면 비릿한 물 냄새가 가득했다. 연두색 빛으로 일렁거리는 호수를 바라보며 성찬은 감탄했다. 이게 뭐야? 무의식 속의 무의식이 이렇게나 아름답다고?


손을 물속에 넣자마자 그의 뇌리는 폭발적으로 수백 개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성찬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기억해 보자면 이런 세상이 존재했다. 잠깐 들어간 손을 얼어붙게 만들 만큼 차가운 세계가, 확 팽창해서 손을 터트릴 것처럼 공기의 밀도가 낮은 세계가, 흙바닥을 긁어낼 수 있을 만큼 손가락이 잔뜩 길어지는 세계가, 손가락의 윤곽을 따라 테두리가 생겨 납작한 종이 위 만화가 되는 세계가, 손가락이 붙어 버려 움직이기 어려운 세계가, 손에 털이 잔뜩 나 날카로운 발톱으로 헤엄칠 수 있는 세계가 그려졌다.


무거우면서도 동시에 가벼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정지된, 자유로우면서도 폐쇄된 모순이 연속하는 공간에서 성찬은 비로소 온전했다. 이 감각의 연속 속에서 완전히 사로잡힌 것이다.


"괜찮은 거 맞아요?"


그 시각, 원빈은 의문에 휩싸였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최면이라면 보통 질답이 오가기 마련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지금 그곳은 어디입니까? 이런 질문들이 보통은 주어지고, 최면에 걸린 사람이 무의식 속에서 답변을 건네는 것이 최면 아니었던가? 쌍둥이 안내원은 전혀 그렇게 행동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성찬은 미동 없이 누워만 있었다. 원빈은 그런 성찬을 보며 서서히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연인의 평온이 숨을 옥죄다니. 희한한 일이었다.


"와, 너무 신기해."


성찬이 호수에 두 손을 넣었다가 빼니 싱그러운 청포도 향기의 젤리가 되어 있었다. 그 젤리를 당연하게 한 입 베어 물고 나니 제 몸도 온통 녹아내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성찬은 그 어떤 인식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본인이 어디에서부터 이 공간에 오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순응이었다.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낙관적 태도. 하지만 이것이 옳은 길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잠겨 들 뿐이었다.


쌍둥이 안내원은 그대로 성찬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는 싹둑 잘라냈다. 그리고 밖으로 나서려는 때, 원빈은 그들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소 신경질적인 태도로 원빈을 밀치고서는 로브를 털어냈다. 그런데도 그 의중을 꽤 빨리 파악하고서는 시계를 확인했다.


"모든 여행에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게 무슨......."

"당신도 최면을 필요로 하는 날. 머리 한 움큼을 잘라내고 시계 위에 얹어 두세요."


두 사람이 방 밖으로 나서자마자 원빈은 성찬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제 뺨에 대고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그러나 불안한 예감은 맞아떨어지는 법. 성찬의 손이 맥없이 스르르 흘렀다. 원빈은 그런 성찬의 가슴팍에 얼굴을 꼭 파묻었다. 그리고 그때, 갑작스러운 빛이 세상을 뒤덮었다. 영문을 알 수 없던 원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차가운 눈밭에 쓰러진 연인의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병실은 고요했다. 성찬은 여전히 잠든 모습으로 원빈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미세한 숨결과 일렁이는 심장 박동. 혹여 그 작은 소리라도 사라질까 원빈은 성찬의 몸에 귀를 바짝 붙이고 못내 이룬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평화도 잠시, 들이닥친 의사의 설명에 원빈은 넋을 잃고 말았다.


"원인은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항이 발견되지 않았어요. 혹시 심리적으로 충격을 줄 만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최면 때문이라고요. 최면을 받다가 이렇게 됐다니까요?"

"최면...... 이요?"


의사는 진단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갸웃거렸다. 원빈의 말을 하등 믿지 않는 모습이었다. 원빈은 답답함에 발을 얕게 동동거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사가 현실을 바꿔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도 처음 보는 상황이다 보니 파악이 늦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혹시 보호자는 따로 안 계실까요?"

"제, 제가 보호자예요."


의사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진단서에 무언가를 적어 내렸다. 당장 수술을 할 것도 없어 보였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 목 끝까지 차올라 울분을 터뜨렸다. 자존심이 강한 성향이라 눈시울을 붉히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자신이 본 것을 어느 누가 믿어 줄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이 병원에서는 절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원빈은 바람 한 결 없이 시린 길을 거닐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다. 최면 카페의 안개 자욱한 방, 쌍둥이 안내원, 그 기묘한 장치, 그리고 성찬의 머리카락을 쥐어가던 날카로운 가위질 소리. 원빈의 마음속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감각이 되살아났다.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어쩌겠어. 그래도 나는 해 봐야겠어. 나도 그 세계로 가 봐야겠다고.


"기다려. 내가 꼭 데리러 갈게."


성찬은 여전히 잠든 채였다. 원빈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병실 시계 위에 얹어 두었다. 여전히 모를 일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머리카락이 숭덩 잘려서 푹 잔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원빈은 오히려 그런 세상이 더욱 두려웠다. 성찬이 없는 지금이 훨씬 더 두려웠다.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기를 기다렸다. 힘없이 침대 밖으로 떨어진 성찬의 손을 양손으로 꼭 잡은 채 원빈은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원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두운 밤, 더는 낯설지 않은 네온 불빛이 원빈을 반겼다. 오로지 나만 존재하는 세상. 그 정면에는 저 간판만이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닿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원빈은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런데도 세상은 헛도는 것처럼 원빈의 걸음을 역행했다. 그런 사유로 조금 우스울지 몰라도 뒤로 뛰느라 애를 먹었다. 이게 맞아?


"어서 오십시오."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자 종소리가 작게 울렸다. 전과 같이 로브를 뒤집어쓴 두 남성이 카운터에 서 있었다. 원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안내문에 적힌 ‘탐험’ 항목을 가리켰다. 그 어떤 말을 하지 않고도 모든 절차가 알아서 진행되었다. 원빈은 성찬이 잠들어 있어야 마땅할 그 방으로 들어섰다. 소파 위에 몸을 눕히고 장치를 머리 위에 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빈 또한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소음에 몸부림치며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뎠다.


원빈의 뇌리에는 수백 개의 세계가 폭발적으로 살아 숨 쉬었다.






세상이 텅 비어 있었다. 하얗다 못해 눈부신 공간이 무한히 펼쳐졌다. 원빈은 움직이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저 멀리에 보이는 어떤 검은 존재. 저 존재까지 닿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충동만이 전부였다. 아주 미세한 떨림에도 세상이 요동쳤다. 원빈은 제 숨결과 심장 박동에 귀가 터질 것만 같았다. 저와 같은 모양새로 하얀 공간에 눕혀져 있는 검은 존재가 성찬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원빈은 계속해서 몸에 힘을 주었다.


자신이 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몇 분이나 걸렸을까. 지금 원빈은 영겁의 시간을 달리는 하얀 종이 위의 점이었다. 이 하얀 세상에 우리는 단 두 개의 점으로 존재했다.


물에 잠겨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답답함을 호소하는 방법으로도 결국은 사지를 이리저리 뻗어 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성찬을 향해서 가고 싶어도 움직이고 있는 게 맞는지 확신하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저 검은 존재를 만나야겠다는 집념은 천천히 잉크를 번지게 만들었다. 서서히 한 방향으로 온 힘을 싣고 나니 그의 존재를 따라 공간이 넓어졌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아니, 발자국이 아닌 점의 연속이 성찬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저 멀리에 있는 검은 존재로부터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혹시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원빈의 기대와는 다르게 성찬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선이 되어 나아가는 모습은 하얀 종이 위에 원을 그려내고 있었다. 두 점은 서로를 향해 점점 더 가깝게 움직였으나, 동시에 서로와 멀어졌다. 곡선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간격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서로가 가장 처음에 머물러 있던 공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두 사람은 그 흔적에 닿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공간에 서로가 존재하지 않음에 좌절했지만, 온 힘을 다해 그 공간에 닿으려 애를 썼다.


공간에 닿는 순간 물방울이 한데 뭉치듯 빨려 들어갔다. 원빈은 이제 더는 힘을 더하지 않아도 되었다. 공간은 더 넓어졌고, 움직이기에는 훨씬 더 수월했다. 원빈은 그렇게 성찬이 그려 놓은 흔적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이어 놓은 선을 기점으로 공간이 검게 변했다. 원빈은 느낄 수 있었다. 성찬 또한 제가 처음 움직이기 시작한 지점까지 닿은 게 분명했다. 드디어 우리가 이어진 것이다. 어둠이 뒤덮은 우리의 공간과 대비된 저 너머의 공간은 여전히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빛났다.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점으로, 점에서 하나의 공간으로. 두 사람은 이제야 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안도했다. 두 사람은 서로 테두리 삼아 이어가던 공간에서 벗어나 점의 중심으로 뛰었다. 그러나 그런 희망도 잠시. 둘이 만나 검게 물든 이 거대한 점은 곧이어 마구 흔들리더니 일렁였다. 이 세계를 구성하던 모든 공간이 종잇장 찢어지듯 갈기갈기 날리기 시작했다.


조각난 세상은 콘페티가 되어 구름 가득한 파란 하늘에 흩날렸다.


모든 규칙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원빈과 성찬은 하나의 작은 조각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팔랑거리며 공중에서 춤추는 조각은 알량하게 나팔거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더 깊게 서로를 느꼈다. 억겁의 시간이 조각 안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가 이런 추상적인 공간에서야 온전함을 느끼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큼큼, 우리는 만점짜리 인연이잖아. 조각 안에는 그들이 스쳤던 모든 세계의 모든 우리가 존재했다.


"원빈아, 혹시 의아했던 적 없어?"

"뭐가?"

"우리는 우리라서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 같은 거...... 해 본 적 없어?"


고요하고도 혼란스러운 세상. 조각은 흩날리며 우리의 기억과 감정을 동시에 보여 주었다. 성찬과 원빈은 콘페티 조각을 하나하나 살피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 수많은 콘페티를 헤치고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 거지? 두 사람은 간절한 마음에 낙하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거센 바람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수많은 조각에 의해 차단되어 있던 시야가 밝고 희미한 빛과 함께 열렸다. 그리고 원빈은 그 너머로 본 장면에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원빈의 위로 울부짖는 성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러게.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사랑하고 있잖아."

"그러게. 이 활자로 된 세상에서도 우리는 당연하게 사랑하고 있더라고."

"그런데도 나는 너를 사랑해."

"그래서 나도 형을 사랑해."


우리는 스피릿과 오퍼튜니티.

끝없는 굴레 속에 무한한 사랑을 찾아 헤매다.


그리고 점점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