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ART VIDEO AFTER

20세기 純情
by. candypink

낭만스럽던 캠퍼스 라이프는 이제 끝났다. 파전을 뒤집으며 원빈은 생각한다. 말이 파전이지 사실상 밀가루 떡에 가까운 모양새다. 파전 하나 더요! 한 장 부쳐내기가 무섭게 또 다른 주문이 들어온다. 선선한 바람이 코 끝을 간질이는, 바야흐로 대학 축제의 계절. 하하호호, 오순도순 모여 앉은 대학생들은 목소리를 드높인다. 달큰한 막걸리 냄새와 잔디 냄새가 뒤섞인 푸릇한 청춘의 향기는 오로지 이 계절에만 느낄 수 있다. 온 캠퍼스가 들썩였다.

 

가을 축제도 어느덧 폐막제 날이었다. 와중에 박원빈은 입술 댓발 튀어나온 채 컴공과 주점 천막 구석에서 전이나 부치고 있다. 파 이제 다 떨어졌는데. 막걸리 나르던 동기 붙잡고 이야기하자 심드렁한 대꾸가 돌아온다. 도서관 앞에서 잔디 좀 뜯어 와. 어차피 다들 취해서 몰라. 내년부터는 절대 학과 주점에서 안주 사 먹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원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마 잔디 뜯어올 만큼 양심에 털 난 놈은 아니었기에. 이제 정말 밀가루 밖에 남지 않은 희멀건한 반죽을 팬 위에 부었을 때였다.

 

"컴퓨터공학과! 박원빈 학생! 없나요? 정말?"

 

폐막제 사회자로 섭외된 무명 개그맨의 경박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렸다. 뒤집개 들고 집중하던 박원빈의 어깨를 툭 친 것은 아까 잔디나 뜯어오라 대꾸했던 동기였다. 야, 너 부르는 거 아냐? 빨리 가 봐. 그 때 다시 한 번 이름이 불렸다.

 

"박원빈 씨!"

 

그제야 지글지글 익고 있는 밀가루 반죽에 처박혀 있던 박원빈의 고개가 들렸다. 엥?

 

"저희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요 박원빈 씨!"

 

온 캠퍼스에 박원빈 이름이 쩌렁쩌렁 울렸다. 야, 이거 파전 쫌 제 때 뒤집어주라.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치던 밀가루 반죽에 대한 소임을 다한다. 원빈이 뒤집개를 내려놓고서 잽싸게 컴공과 주점 천막을 빠져 나왔다. 폐막제 무대에 선 엠씨는 벌써 네 번째로 원빈의 이름을 외치는 중이었다. 원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폐막제 무대 앞까지 달려간 원빈이 단숨에 무대 위로 올라갔다. 온종일 서서 파전만 부쳤더니, 고작 몇십미터 달렸다고 금세 숨이 턱까지 찼다. 원빈이 허리를 숙인 채 가쁘게 숨을 골랐다. 마른 등이 빠르게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사회자가 냅다 마이크 하나를 넘겼다. 자 우리 박원빈 학생 자기소개 하겠습니다. 별안간 건네 받은 마이크를 두 손으로 쥔 박원빈은 잠시 망설이다, 일단 시키는 대로 자기소개를 한다.

 

"아 예⋯⋯. 어⋯⋯. 컴퓨터공학과 95학번 박원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뭐, 뭐하는 거예요?"

 

원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좌중의 웃음이 터졌다. 무대 위에 서 있던 엠씨 또한 마이크에 대고 요란한 웃음 소리를 냈다. 지금 뭐하는지도 모르고 올라왔어요? 개그맨이 묻자 원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뺨 위로 불그스레 홍조가 올라오기 시작한 다음이었다. 엠씨가 자신의 본분을 다한다.

 

"자, 순수한 매력이 돋보이는 컴퓨터공학과 95학번, 파릇한 스물한살, 박원빈 군을 노예로 데려가실 분! 과연 오늘 밤 누가 원빈 군을 차지할 것인지! 천원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예? 원빈의 다급한 외침이 환호성과 박수 소리에 묻혔다.

 

1996년 가을 폐막제의 가장 야심찬 이벤트.

노예팅이었다.

 

박원빈은 불현듯 이틀 전의 기억을 상기했다. 학생회관 앞을 지나며 노예팅 지원자를 모집하는 상자에 제 이름을 적어 넣었던 것을. 물론 직접 넣은 건 아니었고, 같이 수업 듣는 동기 주형이가 넣었다. 혹시 알아? 수미보다 괜찮은 여자가 널 노예로 데려갈지. 그 애가 그렇게 말을 덧붙였던 기억 또한 조각난 채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 많은 노예 후보 중에 왜 하필 내가? 황당함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원빈이 두 손으로 벌어진 입을 가렸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사라지고 싶었다. 그런데 한쪽 팔이 엠씨의 손아귀에 꽉 붙들린 채였다. 하릴없이 발만 동동 구르는 와중에 호가는 점점 높아졌다. 천원에서 시작한 박원빈의 몸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삼천원, 오천원, 손쉽게 만원을 넘었다. 지금껏 최고가였던 오만원을 넘은 것도 순식간이었다. 오금이 저려오기 시작한다. 순진한 공돌이를 노리는 여자들의 목소리도 함께 높아진다. 호가가 십만원을 넘겼다. 엠씨가 호들갑을 떨었다. 과연 박원빈 군, 오늘 노예팅 최고가를 경신할 수 있을 것인지!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면 차라리 수미한테 낙찰되고 싶다. 두 눈을 꼭 감은 박원빈이 소망한다. 차라리 오수미여라. 수미를 생각하니 간절함에 눈물이 찔끔 나올 것도 같다. 오수미는 헤어진 지 오늘로 한 달 된 박원빈의 첫 여자친구 이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미는 박원빈을 낙찰 받을 수 없다. 그 시각 오수미는 여의도 KBS 앞에서 가요톱텐 생방송 마치고 나오는 에이치오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새내기 시절 오티에서 만난 95학번 동갑내기 씨씨는 일년 반 열애 끝에 96년 가을 이별했다. 그 이유가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에이치오티 때문일 거라고 박원빈은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하숙집 텔레비전으로 토토즐 보면서 와 점마들 겁나 까리뽕쌈하다. 감탄이나 했지.

 

넌, 애가 좀 재미가 없어. 이별을 고하던 수미는 원빈에게 그렇게 이야기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이후 마음 한켠이 늘 허전했던 오수미에게 에이치오티의 등장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다. 그러니까 낭만도 멋도 없이 순박하기만 한 공돌이 남자친구가 당연히 재미없게 느껴질 수밖에⋯⋯. 그게 유머 감각 없다는 말인 줄 알고 최근에 깔깔유머 모음집 사서 읽기 시작한 박원빈은 꿈에도 모를 사실이다.

 

"삼십만원."

 

꼴랑 십이만원, 십이만오천원 소리치던 여학우들 목소리가 삽시간에 찬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삼십만원이라는 액수도 충격적이었지만 그 액수를 부른 나긋나긋한 남자 목소리에 다들 놀란 듯했다. 사회자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쳤다. 이야, 삼십만원 나왔습니다! 고막을 찢을 듯이 흥분한 목소리였다. 삼십만원! 삼십만원! 더 없나요? 그럼 박원빈 군 삼십만원에 낙찰됩니다! 자, 삼십만원 부른 남학생 나오세요. 박수!

 

박원빈이 꾹 감겨 있던 두 눈을 천천히 뜬다. 무대 앞으로 모여든 인파 사이에 혼자 툭 튀어나온 머리를 본다. 그가 천천히 다가온다. 박원빈을 (노예로) 갖겠다고 만원짜리 지폐 들고 팔 흔들어 대던 여학우들이 홍해 갈라지듯 양쪽으로 갈라진다. 그 사이를 마치 예수인 양 고고하게 걸으며 등장하는 한 남자. 박원빈도 잘 아는 얼굴.

정성찬이다.

 

 

 

20세기 純情

 

 

 

정성찬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박원빈이 오수미와 연애하면서 가장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인간이다. 수미와 사귄지 얼마 되지 않았던 새내기 시절에 처음 만났다. 전공 수업이 끝난 수미를 데리러 인문대학 앞에서 죽치고 있던 날, 오수미는 박원빈을 만나자마자 인사 대신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기에 키 큰 남자 보여? 우리 단과대에서 가장 멋진 선배야. 정성찬 선배라고⋯⋯. 수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에 서 있던, 한 무리의 여학우들에게 둘러싸인 키가 큰 남자. 정성찬은 강의동 복도 한가운데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박원빈은 그 꼴을 가늘어진 눈으로 째렸다. 이후로도 인문대학 근처에서 우연히 정성찬을 마주칠 때면 그는 항상 주변에 여자들과 함께인 채였다. 얼굴도 기생오라비 마냥 반드르르하고 말투도 어디 버터 한 스푼 먹고 온 것처럼 느끼한 것이⋯⋯딱 서울 깍쟁이 바람둥이 상.

 

원빈은 언젠가 수미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저 선배는 인기가 그렇게 많은데, 연애는 안 한대? 그럼 수미는 고개 갸웃하며 대답했다. 그게 글쎄, 아직 그 누구도 성찬 선배 애인을 본 적이 없대. 선배들 이야기하는 걸로는, 아주 어릴 때 집안에서 정해준 정혼자가 있다는 소문이 있다던데⋯⋯. 아니, 정혼자는 개뿔, 저 놈팡이 아마 주말마다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스포츠카 끌고 돌아다니며 여자 밥 먹듯 갈아치우는 오렌지족일걸? 원빈은 속에 든 생각을 구태여 수미에게 이야기하진 않았다. 다만 저 선배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만 일렀을 뿐이다. 두 눈 의아하게 뜨는 수미의 작은 어깨를 한 팔로 감싸며 귓가에 속삭였다. 질투 나서 그래, 수미야. 저 선배 억수로 잘생겼다 아이가. 그럼 수미는 양볼 발그레해져서는 원빈에게 귓속말하며 가슴팍을 퍽퍽 때렸다. 내 눈엔 원빈이 네가 훨씬 더 잘생겼어. 어쩌면 그런 말이 듣고 싶었는지도.

 

그런데 그런 정성찬이 무려, 삼십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박원빈을 노예팅에서 샀다. 눈에 물음표 가득 매단 채 무대 아래로 내려온 박원빈을 맞이하는 뽀얀 서울 남자. 새하얀 티셔츠 위에 레몬색깔 폴로 남방을 걸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청바지 차림이었다. 딱히 멋 부리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금지옥엽 막내 도련님 같은 귀티가 난다. 성찬은 제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혀 있던 두둑한 가죽 지갑에서 곧바로 만원짜리 지폐 삼십 장을 꺼냈다. 허풍이 아니라 진짜였구나.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지폐 삼십 장을 세어서 집행부에게 건넨다. 박원빈은 텅 빈 눈동자로 정성찬의 움직임을 멍하니 좇았다. 입은 아까부터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 원빈아."

 

삼십만원 쾌척한 정성찬이 뒤를 돌아, 여전히 입 벌린 채 서 있는 원빈의 턱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렸다. 이내 정신이 돌아온 박원빈이 방금 손가락이 닿았다 떨어진 턱을 손바닥으로 벅벅 쓸며 물었다. 말투 봐라, 빠다 냄새 난다.

 

"선배 지금 뭐하자는, 뭐하는 거예요?"

 

정성찬은 대답 대신 원빈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박원빈이 아까까지 열심히 파전 부치던 컴공과 주점 천막으로 거침없이 걸었다. 다리가 긴 만큼 걸음도 빨랐다. 원빈은 총총걸음으로 겨우 정성찬의 뒤를 좇았다.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에 가까웠지만.

 

"원빈이 내가 데려가도 되지?"

 

주점은 여전히 정신없이 성업 중이다. 정성찬은 방금 주문 받고 돌아선 컴공과 과대표의 어깨를 붙들고 물었다. 누구신데요? 반문이 돌아왔다. 정성찬이 거기에 대고 호탕하게 대답했다. 방금 노예팅에서 원빈이가 내 노예가 됐거든. 나는 영문과 94학번 정성찬. 아 그러세요? 그럼 데려가세요. 과대의 대답은 산뜻하고 간결했다. 정성찬 어깨 너머에서 고개를 파득파득 젓고 있는 박원빈과 눈 마주쳐 놓고서. 마치 못 본 듯이. 어차피 파전은 이제 다른 사람이 부치고 있었다. 정말 어디서 잔디라도 뜯어온 것인지 밀가루 일색이던 반죽이 보다 푸릇했다.

 

정성찬은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다시 박원빈의 손을 붙들고 컴공과 주점을 나섰다. 이 인간은 살면서 거절이란 걸 한 번도 당해보지 않았을 거다. 어쩐지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이번엔 박원빈이 순순하게 따라주지 않는다. 꼭 붙들려 있던 손을 거칠게 뿌리친다. 그제야 정성찬이 뒤를 돌아본다. 언젠가 마주한 적 있던, 곱게 쌍꺼풀이 진 두 눈.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그럼에도 확신을 가진 눈빛. 박원빈은 처음부터 그게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었잖아요. 뭐하는 거냐고."

"네가 본 그대로야. 원빈이 네가 노예팅에 나왔고, 나는 삼십만원을 주고 너를 하룻밤 샀어. 그게 다야."

"그러니까 제 말은, 왜 선배가 하필이면 저를⋯⋯사, 샀냐고요."

 

박원빈이 아무리 조금 무딘 편인 경상도 출신 남자애라지만 이 정도 눈치는 있다. 노예팅에서 낙찰된 사람을 정말로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게 아니라는 걸. 하룻밤 둘만의 시간을 보내든, 앞으로의 인연을 만들어 나가든, 노예팅 또한 이팔청춘 대학생들의 연애사업을 돕기 위한 이벤트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정성찬이 이 이벤트의 목적과 취지를 아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으로밖에 해석이 안 된다. 그러니까 정성찬은 헛된 짓에 삼십만원이나 태운 것이다. 박원빈은 정성찬의 진짜 노예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너랑 놀고 싶어서."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박원빈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 앞에 선 남자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가 같이 놀러나 다닐 사이였던가. 설마 정말로 나를 노예로 부리겠다는 심보인 걸까? 덜컥 겁 먹은 심장이 멋대로 세차게 박동하기 시작한다. 박원빈은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물었다.

 

"혹시 취했어요?"

"아니."

"아니면, 미치셨어요?"

"아니."

"제가 누군데요?"

"박원빈."

 

만에 하나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저를 다른 여자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싶어 물었지만 정답만이 돌아왔다. 정성찬은 착하게 생긴 눈으로 정직하게 답했다. 너 맞잖아. 컴공과 95학번 박원빈이.

 

"취하지도 않았고 미치지도 않았어. 멀쩡히 제정신이야."

"그런데 왜⋯⋯."

 

박원빈은 의외로 고리타분한 구석이 있었다. 결코 꺾이지도 구부러지지도 않을 것 같은, 잘 뻗은 직선처럼. 대학 와서 처음 사귄 여자친구 오수미와 바로 결혼하려고 마음 먹었을 만큼. 그러니까 정성찬이 무슨 꿍꿍이로 저를 삼십만원이나 주고 샀는지 그 이유를 손톱만큼도 상상할 수 없다. 어쩌면 꿍꿍이가 아니라 흑심일지도 모르는 이유를.

 

"내가 좋아하거든, 너를."

 

박원빈이 이렇게 반응할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 쐐기를 박는 낮은 음성. 원빈은 말을 잃고 저를 내려다보는 연갈색 눈동자 한쌍을 쳐다볼 뿐이다. 이내 시선을 피해 바닥으로 낮게 깔리는 눈동자 위로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나랑 놀아줘."

 

꼬장꼬장한 울산 촌놈 박원빈은, 방금의 좋아한다는 말이 제가 수미에게 느꼈던 감정과 똑같다는 걸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같은 거 달린 선배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것은 박원빈의 상식 밖 일이었다. 된통 꼬여버린 카세트 테이프처럼 생각도 재생을 멈추었다. 뒤엉킨 생각들이 도통 정리되지 않는다. 이럴 땐 말이지.

 

"잠, 잠깐만요."

 

취하는 게 상책이다. 원빈은 아까의 학과 주점 천막으로 달려 갔다. 안주 나르느라 정신 없는 동기들 사이를 뚫고 허접하게 만든 주방 뒤켠으로 향하면 커다란 아이스박스가 하나 있었다. 아이스박스를 열고 막걸리 한 병을 슬쩍 꺼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막걸리 병을 흔들지도 않고 뚜껑을 따서는 병째로 벌컥 한 모금을 들이키는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

 

 

 

선배도 한 잔 하겠냐는 원빈의 권유를 한사코 거절한 이유가 있었다. 인문대학 뒤뜰에는 정성찬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정성찬의 차에 올라타 서울 시내를 가로지르는 중이다. 원빈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뚜껑이 열리는 스포츠카였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삐까뻔쩍한 독일제 자동차. 원빈은 눈이 휘둥그레 떠지도록 놀랐지만 가타부타 묻지 않았다. 대신 활짝 열린 창턱에 몸을 기대고 바람을 맞는 중이었다. 그 사이 해가 완전히 진 하늘이 남색빛을 띄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 아래, 88대로를 따라 달리는 차창 밖에서는 한강의 비릿한 물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내가 좋아하거든, 너를.

 

성찬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는다. 문장이 음절 단위로 조각조각 부서진다. 그제야 그 의미가 커다랗게 와닿고 있었다. 지금 머리칼을 세차게 흩뜨리고 지나가는 강바람처럼, 박원빈의 명치께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정성찬이 좋아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박원빈을?

 

 

 

-

 

 

 

정성찬이 처음으로 말을 걸었던 날을 기억한다.

박원빈은 점심시간마다 꼬박꼬박 공학관에서 인문대까지 걸어 내려왔다. 여자친구 오수미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여느 날과 같이 인문대 앞 커다란 느티나무가 심어진 뜰에 우두커니 서서 수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루함에 하릴없이 스니커즈 앞코로 흙바닥을 툭툭 치는 중이었는데, 별안간 커다란 그림자가 원빈의 스니커즈 위로 드리워졌다. 원빈이 고개를 들었다.

 

"안녕."

 

기다리던 수미가 아니었다. 얼마 전 인문대 복도에서 수미가 가리켰던 남자. 이름이 뭐랬더라⋯⋯.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더 훤칠했다.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제일 잘생긴 것 같다. 배용준맹키로 잘생겼다. 남자는 눈매가 휘어지도록 웃어 보였다. 기본적으로 선한 인상이었다. 왼팔에는 두꺼운 영어 원서들을 끼운 채였다.

 

그 때 마침 수업이 끝났는지 인문대 건물에서 한 무더기의 학생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개중엔 원빈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오수미도 있었다. 수미는 제 남자친구인 원빈보다, 그 앞에 선 제 학과 선배를 먼저 알아보았다.

 

"성찬 선배?"

 

원빈은 일그러진 얼굴로 수미의 손을 얼른 낚아챘다. 수미의 가느다란 몸뚱이가 힘 없이 원빈이 있는 쪽으로 끌려 왔다. 금세 양 볼이 발그레해진 수미가 원빈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지난 주에 이야기했던 우리 과 선배. 기억 나지? 원빈은 수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미의 손에 깍지를 끼워 꽉 잡은 후 등을 돌렸다. 방금 인사를 건넨 정성찬이 투명 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등 뒤에서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불편했다. 위기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수미가 너무 예뻐서 큰일이다.

 

학생회관까지 정신없이 걸었다. 경주마처럼 앞만 봤다. 빠른 속도로 걷는 원빈에게 붙들린 수미가 가쁜 숨을 헥헥거리고 내뱉었다. 배가 많이 고파? 물었지만 원빈은 묵묵부답. 대신 쥐고 있던 손을 더 꽉 쥐었다. 식권을 사려고 길게 늘어선 줄에 합류하자 아까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다리가 길어서인지 빠른 걸음을 금세도 따라잡은 듯했다. 밥 같이 먹을래? 정성찬이 식권 세 장을 흔들어 보였다. 식권 판매대의 대기줄이 끝을 모르고 늘어서 있었다.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수미 남자친구는 이름이 뭐야?"

 

그렇게 불편한 점심 식사를 하게 됐다. 수미는 원빈의 왼쪽에 나란히 앉았다. 정성찬은 굳이 과 후배인 수미를 두고 원빈의 맞은 편에 식판을 내려놓았다. 밥알이 몇 개인지 셀 것처럼 아래를 향해 있던 시선은 정성찬이 이름을 물을 때에서야 마주 앉은 사람에게 향했다. 동그랗게 뜬 두 눈에 경계심이 그득했다. 정성찬이 또 웃음을 피식 흘렸다.

 

"바, 박원, 박원빈이요."

 

낯가림이 심한 원빈은 오늘 처음 말 섞은 상대와 겸상해야 하는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다. 얼굴 근육이 굳었는지 말도 더듬었다. 바짝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구는 것이 맞은 편의 남자를 낯설게 느낀다는 뜻이기도 했다.

 

"제가 수미 남자친구인 건 어떻게 아셨는데요."

"어떻게 몰라. 매일 오전 수업 끝나면 인문대 건물 앞에서 수미 기다리고 있잖아."

"아⋯⋯."

"잘생겨서 눈에 띄던데."

"네?"

"수미야, 원빈이가 잘해주니?"

 

정성찬이 말을 돌렸다. 왼쪽에 앉은 수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부끄러운 듯 젓가락을 들고 있던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는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원빈은 서울 말씨로 묻는 말이 퍽 간지럽다 느꼈다. 잘생겼다는 칭찬도 입에 발린 말처럼 들렸다.

 

"너무 잘생겨서, 바람둥이일 것 같은데."

"아니, 아니거든요. 저 평생 수미만 보면서 살 건데요. 수미랑 결, 결혼할 겁니다."

 

좀 오바했나. (그런데 결혼하겠단 말은 진심이었다.) 성찬이 웃음을 터뜨렸다. 들고 있던 젓가락도 내려놓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원빈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경상도 출신이야?"

"네? 네⋯⋯."

"어디? 부산?"

"울산인데요."

"사투리 쓰는 거 귀엽다."

 

원빈은 달리 대꾸할 말이 없어 숟가락으로 밥을 크게 퍼서 입안에 욱여 넣었다. 얼굴에 열이 좀 오른 것 같기도 하고. 뭐? 사투리가 귀여워? 게다가 빠다 한 사발 먹은 것 같은 낯간지러운 말투로다가? 서울 놈들은 다 이렇게 입 발린 말로 여자 꼬시고 다니나? 그 때 수미가 박원빈에게 팔짱을 꼈다. 선배, 말했잖아요. 제 남자친구 진짜 좋은 애라니까요. 원빈이 사투리 쓰는 거 진짜 귀엽죠. 수미가 쉬지 않고 종알거렸다. 원빈의 왼쪽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성찬 선배가 계속 너 궁금해 했어, 내 남자친구 어떤 앤지 보고 싶다나.

 

수미는 신이 나서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박원빈이 얼마나 좋은 남자친구인지에 대해 떠들었다. 그런데 정성찬은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수미가 떠드는 내내 정성찬의 시선은 곧게 박원빈만을 향하고 있었다. 정성찬의 또렷한 눈망울이 원빈의 두 눈동자를 응시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몇 초 동안 시선이 얽히는가 싶더니 정성찬이 먼저 시선을 내리깔았다. 박원빈은 그게 영 꼬롬하게 느껴졌다. 여초 학과인 영문과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예쁘게 생긴 오수미를 이 느끼한 선배가 노리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 때의 박원빈은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눈이 너무 잘생겨서 질투심이 일었다. 답답할 정도로 단순하기 그지 없었다.

 

 

 

-

 

 

 

정성찬은 강남 어딘가에 위치한 호텔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먼저 차에서 내린 정성찬이 차 뒤편으로 반바퀴를 빙 돌아 박원빈이 앉아 있는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잡으라는 듯 손까지 내밀었다. 박원빈은 그 손을 못 본 체하고 차에서 내렸다. 내밀어진 손이 멋쩍어졌는데도 정성찬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일방적으로 끌려 왔는데도, 하자는 대로 다 따라오는 박원빈의 불퉁한 얼굴이 웃기고 또⋯⋯사랑스러워서.

 

차에서 내린 원빈이 의심 품은 눈초리로 사방을 살폈다. 내미는 손을 애써 모른 척했는데 정성찬은 굴하지 않고 박원빈의 손을 잡아 쥐고 앞장 섰다. 박원빈은 얌전히 그 등을 따라 걸었다. 으리으리한 건축물의 위용에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박원빈이 아무리 남중남고 나와 공대 다니는 숙맥일지라도 호텔이라는 공간에 담긴 함의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박원빈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대체 여긴 왜 데려온 걸까. 설마⋯⋯.

 

엘리베이터에는 이미 여자 한 명이 타고 있었다. 여자가 물었다. 몇 층으로 가십니까 손님? 박원빈은 빛 바랜 핑크색 유니폼을 입은 여자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말로만 들어본 엘리베이터 걸이었다. 십오층 부탁합니다. 흰 장갑을 낀 안내양의 검지 손가락이 숫자 십오를 눌렀다. 정성찬이 손을 고쳐잡았다. 꼴깍. 누가 낸 것인지도 모를, 침 넘어가는 소리가 고요한 엘리베이터 안에 선명히 울렸다.

 

호텔 십오층은 객실이 아니라 레스토랑이었다. 십오층을 빠르게 둘러 본 박원빈이 안도했다. 예약을 해둔 것 같았다. 정성찬이 이름 석 자를 대자 서버가 바로 자리를 안내했다. 통유리창으로 한강의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새하얀 리넨이 깔린 동그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머지 않아 테이블 위로 스테이크 접시가 서빙되었다. 제 앞에 놓인 접시를 가만히 내려다 보던 박원빈이 허탈한 듯, 안도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성찬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기를 써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자. 이거 먹어."

 

나이프로 정갈하게 썰린 스테이크 접시를 박원빈 쪽으로 밀었다. 그리곤 손도 대지 않은 박원빈의 접시를 제쪽으로 가져간다. 이런 거 드라마에서나 보던 건데. 진짜 지가 드라마 주인공인 줄 아나. 그럼 나는⋯⋯뭐 여자주인공이야? 박원빈이 미간을 팍 구겼다. 순간 눈이 돌아갈 정도로 고급스럽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눈 앞에 놓였다. 그런데 좋다고 고기 받아 먹기에 마음 한켠이 아직 영 찜찜했다. 애초에 일련의 상황에 대하여 납득이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뭐예요 이게?"

"얼른 먹어. 고기 식겠다."

"혹시 제가 사야 하는 거예요?"

"⋯⋯."

"제가, 제가 선배 노예⋯⋯니까?"

 

정성찬이 푸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마음 놓고 먹어. 그 말에 박원빈은 일단 포크를 하나 집어들었다. 우선 배가 너무 고팠거든. 테이블 위에는 포크도 나이프도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뭐가 뭔지 몰라 가장 큰 포크를 집어 들어, 정성찬이 잘 썰어둔 고기 한 점을 푹 찍어 입에 넣었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고급스러운 식당에 온 것이 처음이기도 했고. 입 안에 넣자마자 고기가 살살 녹았다.

 

"아까 얘기했잖아. 내가 너 좋아한다고."

 

그래, 그 말이 문제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해독이 안 된다고. 원빈이 솔직하게 물었다.

 

"대체 그게 무슨 뜻인데요?"

"원빈이 네가 오수미를 좋아했던 것처럼."

"⋯⋯."

"나도 그렇게 너를 좋아해."

"글, 그럼⋯⋯."

"응. 내가 너를 짝사랑해."

"저는 남자인데요."

"알아."

"선배가 수미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요."

"수미가 아니고 너였어."

"언제부터였는데요?"

"처음부터."

 

그제야 복잡하게 꼬여 있던 머릿속 실타래가 한 올씩 풀려 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래서⋯⋯. 그런데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눈 앞에 마주 앉은 이 근사한 선배가 인문대 예쁜 여학우들 두고 하필 박원빈을 짝사랑했다는 건 납득이 안 된다. 남자가 남자를 성애적으로 마음에 품는다는 건 박원빈의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너였어."

"⋯⋯."

"난 너만 좋아했어, 원빈아."

 

테이블 가운데에 놓인 촛대 끝에서 촛불이 일렁거렸다. 성찬의 연갈색 눈동자에 아롱아롱 흔들리는 촛불이 그대로 비쳤다. 그 투명한 눈을 마주하니, 푹신한 의자에 미동 없이 앉아 있는데도 멀미가 날 것 같았다.

 

 

 

-

 

 

 

원빈은 수미에게 정성찬 선배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 신신당부를 했지만 소용 없었다. 영문과에 몇 안 되는 남자 선배, 그것도 왕자님처럼 무지 잘생긴 선배와의 친분을 마다할 여학우는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정성찬은 수미를 마주칠 때마다 요즘 연애사업은 잘 진행되고 있냐고 물었고 수미는 항상 속없이 작금의 연애 상황을 미주알고주알 털어 놓았다. 박원빈이 없는 곳에서, 박원빈은 모르게, 박원빈의 동선과 취향과 성격 그리고 기타 등등이 낱낱이 밝혀지고 있었다. 이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박원빈은 순진하게도, 저를 둘러싼 상황들이 이따금씩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 예컨대 정성찬 선배와 안면을 튼 이후로 그 선배를 너무 자주 마주치게 된다든가.

 

"어, 원빈이다. 안녕?"

"안녕⋯⋯하세요."

 

갑작스레 불린 이름에 원빈이 떨떠름하게 응했다. 아니, 떨떠름하다기보다는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맞닥뜨려 당황한 것에 가까웠다. 그야 인문대생인 정성찬 선배가 공학관 건물 앞에서 알은체 해 왔기 때문이다. 인문대에서 공대까지의 거리가 멀기도 멀었지만 굳이 영문과 학생이 공학관 건물 앞에서 서성일 이유가 마땅하지 않았다. 여기엔 교양 수업도 잘 없는데. 공대 다니는 친구가 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 원빈이 구색만 갖춰 인사한 후 스쳐 지나가려고 할 때.

 

"혹시 공대 간이식당이 어딘지 알아?"

 

돌아서는 발걸음을 붙잡는 물음.

 

"네? 네. 여기서 저 건물 뒤로 넘어가면 있어요."

"나 좀 데려다 줄래?"

 

원빈은 대답 대신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정성찬이 눈이 휘어지도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어마어마한 길치라서. 원빈의 이마에는 여전히 '굳이?'라는 두 글자가 쓰인 듯했지만, 어차피 오전 수업은 모두 끝났기에 따라오세요, 라고 겨우 입을 뗀 뒤 앞장섰다.

 

공대 간이식당 앞에 다다르기까지는 성인 남성 걸음으로 채 오 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것도 못 찾는 길치라고? 이거 허우대만 멀쩡하지 영 속 빈 강정이구만. 박원빈이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여기예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또 다시 붙들렸다. 이번엔 정성찬의 커다란 손아귀에.

 

"혹시 밥 먹었어?"

"⋯⋯아뇨."

"그럼 점심 같이 먹을래?"

"저랑요?"

 

왜요? 라고 첨언하고 싶었지만 잘 모르는 타과 선배에게 묻기엔 다소 당돌해 보일 것 같아 관두었다. 대신 얼굴에 고대로 티가 났다. 정작 말을 던진 정성찬도 멋쩍은지 뒷머리를 연신 만져댔다.

 

"그게, 사실 같이 밥 먹기로 한 친구가 약속을 파투냈거든."

"아⋯⋯."

 

바람 맞았다며 쑥스럽게 웃는 얼굴이 조금 불쌍해 보일 건 또 뭐람. 마침 원빈도 점심을 먹어야 했다. 게다가 그 날은 수미에게 연달아 강의가 있어 함께 점심을 먹지 못하는 유일한 날이기도 했고. 하필 이런 날 마주쳐서는⋯⋯. 이 선배가 오늘 운이 유독 좋은 건지 내 운수가 영 꽝인건지. 딱 한 번 말 섞어본 사이면서 퍽 다정스레 미소 짓는 얼굴에 차마 거절은 못했다. 결국 정성찬과 단둘이 밥을 먹었다. 그 날의 조우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박원빈만 모른 채.

 

 

 

-

 

 

 

"선배."

"응."

"그럼 혹시⋯⋯."

"맞아. 일부러 계속 너랑 마주쳤어."

 

원빈의 속내 정도는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다. 그제서야 일년하고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정성찬의 행적이 퍼즐 맞추듯 짜맞춰지기 시작한다. 오수미는 미끼였을 뿐, 곤경에 처했을 때마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별로 친하지 않은 여자친구의 선배. 그런데 우연히도 자주 마주치고, 그 때마다 맛있는 걸 사주겠다며 저를 데리고 학교 밖으로 나가던 영문과 왕자님.

 

"수미랑 친하게 지냈던 것도 너 때문이야."

"⋯⋯."

"처음부터 너랑 친해지고 싶었어."

 

정성찬의 얼굴이 한결 후련해보였다. 언젠가 참 의뭉스럽고 속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표정이 지금은 그렇게 투명할 수가 없다. 정성찬의 깊은 눈망울이 오롯하게 원빈을 응시했다. 마주치면 언제나 먼저 피하던 시선이 지금은 곧게 박원빈을 향하고 있다. 줄곧 가증스럽다 여겨 왔던 미소에서,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사슴 같은 눈망울에서, 당장 감당하기 버거운 진심이 밀려왔다. 이번엔 박원빈이 먼저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칫하면 마음의 파도에 떠밀려 질식해 버릴 것만 같다.

 

"이제 와서 저랑 뭘 하고 싶은 건데요?"

 

고기를 썰던 정성찬의 손이 움직임을 멈춘다. 원빈은 마음을 굳게 먹고 정성찬의 연갈색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동공이 흔들릴세라 부러 눈에 힘을 잔뜩 준 채였다. 내내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고 있던 성찬이 웃음기를 거두고 퍽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연애라도 하자는 거예요?"

"뭘 어떻게 하고 싶은 마음 없어. 그냥 너랑 같이 있고 싶었어."

"그럼 평소처럼 후문 앞에서 삼겹살에 소주나 먹을 것이지, 이런 덴 왜 데려와요?"

"⋯⋯."

"처음부터 날 좋아했다느니 그런 말은 왜 하는 건데요. 사람 심란하구로."

"심란해?"

 

힘을 준 게 무색하도록 원빈의 눈이 멋대로 흔들렸다. 쥐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정성찬이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기다랗고 하얀 섬섬옥수가 고운 얼굴 위로 덮였다. 두 손바닥 사이로 옅은 한숨이 흩어졌다.

 

"미안. 내가 너무 조급했어.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어. 원빈이 네가 너무 좋아서, 도저히 나 혼자서 간직만 할 수가 없었어. 너한테 말해주고 싶었어. 내가 이만큼 널 좋아한다고."

"⋯⋯."

"그게 다야. 오늘 내가 너를 낙찰받은 이유."

"고작 그거 때문에 삼십만원을 썼다고요?"

"⋯⋯."

"선배 뭐, 재벌이에요? 고작 저 하나 때문에 그 돈을 태워요?"

 

고작이라니⋯⋯. 정성찬이 작게 중얼거렸다. 원빈의 귀에는 미처 닿지 못한다. 정성찬이 오늘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는지, 그 깊이를 언젠가 박원빈이 알아줄 날이 올까. 지금 보여준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인데. 꼿꼿하고 단단한 박원빈에게까지 마음이 가 닿으려면 얼마나 더 먼 길을 달려야 할까. 내내 한 방향을 꾸준히 바라보며 내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박원빈은 여전히 저멀리 있는 것만 같다. 영영 닿을 수 없을 것처럼.

 

 

 

-

 

 

 

결국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박원빈은 정성찬이 이끄는 대로 다시 매끈한 스포츠카 조수석에 올라탔다. 러시 아워가 지난 도로는 보다 한산했다. 원빈은 어디로 가는지 따져 묻지 않았다. 반포대교를 넘어간 정성찬의 스포츠카는 남산타워 케이블카 정류장에 멈춰섰다.

 

남산타워라. 언젠가 수미가 꼭 가보고 싶다고 했던 곳이다. 원빈은 그제야 수미 생각이 났다. 분명 오늘 노예팅 무대 위에서만 해도 오수미가 나를 노예로 데려가 주길 간절히 바랐는데. 지금 제 옆에서 걷고 있는 어떤 선배 덕분에 수미는 완전히 뒷전으로 물러났다.

 

"손 잡아도 돼?"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 온 성찬이 물었다. 여태 잘만 잡아놓고 이제 와서 묻는 건 또 뭐람⋯⋯. 원빈이 입술을 한 번 비죽인다. 성찬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희고 고운 손바닥. 그 위로 원빈의 손이 조심스레 겹쳐진다. 오늘만이에요. 원빈의 말에 성찬이 응했다. 당연하지. 오늘만. 손바닥이 겹치자 자연스럽게 손가락 사이사이가 얽힌다. 차마 뿌리칠 수도 없게 꽉 붙들렸다.

 

평일 저녁이라 케이블카를 타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케이블카 안에는 성찬과 원빈을 포함하여 두 쌍의 연인이 더 탔을 뿐이다. 주말에는 만원 버스마냥 사람을 꽉꽉 채워 넣는다던데. 노예로 낙찰되는 바람에 이런 호사도 누려본다. 원빈이 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여전히 제 손을 잡고 있는 옆 사람을 올려다봤다.

 

성찬의 투명한 눈동자에 서울 시내 야경이 그대로 비쳤다. 케이블카가 남산타워를 향해 올라가는 동안, 유리창 밖으로 시내 풍경을 내려다보는 데 집중하고 있는 옆얼굴을 박원빈은 한참 바라보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느릿하게 따라 움직였다. 곧게 뻗은 콧대 아래로 웃음기를 머금은 입술이 달싹였다.

 

"나는 이 풍경을 서울에서 가장 사랑해."

 

그 말에 번뜩 정신 차린 박원빈이 얼굴을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까 호텔 레스토랑에서 봤던 풍경이랑은 또 다른 장관이 발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케이블카는 난생 처음이었다. 육중한 케이블카 차체를 매단 줄이 끊어지지는 않을까 덜컥 겁이 났지만, 그런 생각이 들면 잡고 있는 손을 더 꽉 쥐었다. 제 손에 감겨오는 타인의 체온, 아니 정성찬의 온기에 이상하게 안도가 되었다.

 

"그래서 너한테도 보여주고 싶었어."

"⋯⋯네."

 

원빈은 부러 앞만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엔 정성찬이 제 옆얼굴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걸 알아서 그랬다. 기분이 오묘했다. 아까부터 자꾸 멀미가 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뱃속에서 피어난 아지랑이가 눈 앞에서까지 어지러이 나부꼈다. 백미터를 전력으로 질주한 것처럼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다. 이게 높은 곳에 올라와 긴장해서인지 옆에서 손을 잡고 놔주지 않는 어떤 사람 때문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마주 잡은 손바닥에서는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케이블카는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늘 멀리서만 보던 남산타워는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크고 웅장했다. 아무리 고개를 높이 쳐들어도 끝까지 눈에 담아지지 않았다. 우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은 원빈의 얼굴을 성찬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타워 주변을 따라 올라가니 전망대가 나왔다. 케이블카에서 봤던 것과는 또다른 서울시내의 장관이 발밑에 시원스레 펼쳐졌다. 청명한 가을의 밤하늘이 뻥 뚫려 있었다. 저 멀리 여의도 63빌딩도 보였다. 참으로 서울스러운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학생들 바글거리는 잔디밭에서 파전이나 부치고 있었는데 지금 이곳에 발을 딛고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크게 숨을 들이켜자 한가을 무르익은 시원한 공기가 폐부에 가득 들어찼다. 이 가을 바람이 어질러진 마음 속까지 싹 쓸어가면 좋으련만.

 

"선배. 이제 손 좀⋯⋯."

 

손가락에 피가 안 통할 지경이 된 박원빈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전망대를 뒤로 하고 반대 방향으로 타워를 돌아 인적이 드문 숲속에 다다랐을 때였다. 아. 응. 좀 앉을래? 그제야 원빈의 손이 해방되었다. 정성찬이 먼저 기다란 벤치 위에 털썩 앉았다. 박원빈은 괜스레 쭈뼛거리며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비로소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벌어졌다. 그 빈틈으로 정적만이 흘렀다. 내내 잡고 있던 손이 땀으로 번들거렸다. 정성찬은 무르팍을 손바닥으로 연신 문질렀다.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나 초조해 보이는 정성찬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고마워."

"뭐가요."

"여기까지 같이 와 줘서."

"하⋯⋯."

 

원빈이 허탈하게 웃음을 내뱉었다. 깊은 숲의 공기가 정말로 마음까지 한 번 휩쓸고 갔는지, 머리가 한결 맑아진 느낌이었다.

 

"이왕 노예로 산 거 선배가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나름대로 비장하게 각오를 다지고 꺼낸 말이었는데 성찬은 쉬이 답을 하지 않았다. 밤새의 울음소리와 찌르르거리는 벌레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렸다. 분명 저 아래는 시끄러운 자동차 배기음과 경적음으로 가득한 대도시 한복판이었는데 별세계에라도 떨어진 것처럼. 어둑해진 시야에는 울창하게 우거진 숲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성찬이 입을 뗀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럼 오늘은 선배 말고, 형이라고 불러줘."

"⋯⋯그게 다예요?"

"응."

"생각보다 소박하시네요."

"⋯⋯."

"성찬이 형."

 

성찬이 활짝 웃어보였다.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 양쪽 송곳니가 훤히 드러났다. 박원빈은 종종 저렇게 미소짓는 정성찬을 보며 의외로 허당 같은 면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 얼굴은 저만 볼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박원빈도 따라 웃었다. 가로등 불빛이 미소 위로 희미하게 부서졌다. 의미 없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한참 등을 구부려 큭큭거리다 고개를 들었을 때.

 

"어⋯⋯."

 

두 쌍의 눈동자가 마주친다. 멀찍했던 사이가 어느 틈에 좁혀졌는지. 서로의 눈이 시야에 가득 들어찬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비친 가로등 불빛이 어룽어룽 미동하는 것이 다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 내뿜는 콧김이 볼을 간지럽히고. 성찬이 몸을 점점 앞으로 숙이면. 얼굴이 더 가까워진다. 박원빈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두 입술이 맞닿으려던 찰나. 정성찬이 겨우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속삭였다. 미안. 몸을 쭉 뒤로 빼면서.

 

그러나 박원빈의 손이 목덜미에 감기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몸을 물리려는 성찬을 잡아 채고 그대로 입술을 갖다 대는 대담한 움직임은 예상 밖의 일이다. 연한 살갗에 닿은 보드랍고 폭신한 감촉. 내내 꽉 붙들어 맸던 이성의 끝이 놓아지던 순간. 놀라서 토끼눈이 된 것도 잠시, 정성찬은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손바닥으로 박원빈의 뒤통수를 감싼다.

 

서툴고 조급한 입맞춤이다. 입술 사이를 급히 비집고 들어가다 앞니가 부딪쳤다. 통통하고 뜨끈한 혓바닥이 원빈의 입 안에서 뱀처럼 유영한다. 그 안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듯. 구석구석 남김 없이 다 핥아 먹을 기세로. 민감한 점막에 닿는 생경한 촉감에 머리털이 바짝 섰다. 뒤통수를 쥔 손이 단단하다. 내 것인지 네 것인지 모를 타액이 뒤섞여 입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기다렸다는 듯 아랫입술을 물 때는 언제고 먼저 정신을 차린 것도 정성찬이다. 황급히 몸을 뒤로 물린 성찬이 숨을 몰아 쉬었다. 원빈의 입가에 번들거리는 타액을 제 엄지손가락으로 훑는다. 잡아 먹기라도 할 것처럼 입술을 물었던 건 다른 사람이었는지, 수줍은 듯 몸을 돌려 앉는다. 여전히 숨이 가쁘다. 가슴께가 크게 오르락 내리락거렸다. 또다시 정적이 내려앉는다.

 

큼큼.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몇 번 한 성찬이 말을 꺼냈다. 내려갈까. 그럼 아까의 자세 그대로 돌처럼 굳어 있던 원빈이 한 박자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

 

 

 

박원빈은 정성찬의 차가 제 하숙집 앞에서 멈출 때까지 말이 없었다. 고요함을 견디다 못한 정성찬이 라디오를 틀었을 때에서야 사근거리는 디제이의 목소리로 둘 사이의 빈 공간이 채워졌다. 디제이가 차분하게 다음 곡을 소개했다. 이 가을밤에 잘 어울리는 노래 들려드립니다. 어쩐지 가슴이 시큰해지는 짝사랑 노래입니다. 일기예보의 『인형의 꿈』.

 

"그럼 들어가."

"네."

"덕분에 행복했어, 오늘."

"네."

"그, 원빈아, 있지⋯⋯."

 

말 끝을 흐리던 성찬이 뇌까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봐도 돼? 원빈은 그 말을 듣고도 얌전히 앉아만 있었다. 성찬은 섣불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아직 오늘 밤 안 지났잖아요."

"⋯⋯."

"형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럼 키스 한 번만 더 해도 돼?"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성찬이 다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피식, 하고 웃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까는 너무 놀라서⋯⋯."

 

제대로 못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가보다. 보기보다 영 허술하고 맹탕인 형이다. 박원빈이 운전석 쪽으로 몸을 돌린다. 어디 마음껏 하고 싶은 걸 해 보라는 뜻이다. 설마 이런 눈치까지 없진 않겠지. 다행히 성찬이 바로 알아챘다. 순식간에 입술이 맞붙었다.

 

아까 한 번 해봤다고, 익숙해진 촉감에 금세 입술이 열렸다. 서툴도 조급했던 남산에서의 키스와 달리 움직임이 한결 부드러웠다. 우는 애를 어르고 달래 듯, 혀 끝으로 살살 원빈을 건드렸다. 혀 끝이 서로 닿을 때마다 손 끝에서 스파크가 튀는 것 같았다. 여전히 라디오에서는 일기예보의 『인형의 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걸음 뒤에 항상

내가 있었는데 그대

영원히 내 모습 볼 수 없나요

 

키스는 다음 노래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누구도 먼저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찬 박원빈이 정성찬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몇 번 두드리고 나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덥혀진 체온 덕에 차창 밖으로 김이 서렸다.

 

위험하다.

박원빈은 직감한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학, 학교에서 봐요."

 

운전석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작별 인사를 술술 내뱉는다. 빠르게 정성찬의 차에서 빠져 나온다. 차에서 내리면 바로 눈 앞에 하숙집이 있다. 소담스런 단독주택이다. 빠른 움직임으로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다. 지금은 하숙집 식구들 대부분이 잠에 들었을 시간이다. 얼마 안 있어 건물 2층에 위치한 박원빈의 방에 불이 들어왔다. 그 불이 꺼질 때까지 문 앞에 주차된 차에는 시동이 들어오지 않았다.

 

 

 

-

 

 

 

그 날 박원빈은 꼴딱 날을 새웠다. 어디 그 날 뿐이랴, 주말이 될 때까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강렬했던 그 날 밤의 일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니 문득문득 정성찬의 얼굴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일장춘몽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었던가? 지금은 가을이니까 일장추몽? 한가을밤의 꿈?

 

사랑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던 정성찬에게서 되려 사랑 고백을 들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을 좋아해 왔다는 진심 어린 고백이었다. 애초에 남자가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게 말이 되나? 박원빈은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다. 그런데 정성찬의 두 눈엔 거짓이 없었다. 그 정도는 박원빈도 감으로 알 수 있다. 오롯한 애정이었다. 그 애정이 박원빈의 온 몸을 감쌌다. 자칫 잠겨 죽을 수 있을 만큼.

 

되돌아보면 모를 수가 없다. 정성찬이 지독한 외사랑 중이었다는 걸. 박원빈은 주말 내내 하숙집에 처박혀 정성찬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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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정성찬은 이따금 박원빈의 등굣길에 느닷없이 나타났다. 일학년 때 박원빈은 학교 기숙사에 살았다. 기숙사는 후문 근처의 언덕배기에 있었다. 매일 아침 등굣길이 등산에 가까웠다. 고바위 언덕이 싫어 부러 버스를 타고 다니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박원빈은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매일 그 언덕길을 걸어 올랐다. 올라가면 공학관까지 또 한세월인데도 말이다.

 

여기서 또 만나네. 정성찬은 아침 등굣길에 불쑥 나타난 이방인이었다. 꾀죄죄한 기숙사생들과 달리 누가 봐도 멀끔한 꼴을 하고 박원빈 앞에 등장했다. 원빈은 대충 고개를 까닥여 인사한 뒤 앞만 보며 걸었다. 그러면 정성찬은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나 하며 그 뒤를 좇는 식이었다.

 

"이번 학기 수미랑 교양 수업 같이 듣는다며?"

"⋯⋯."

"수미한테 들었어. 심리학과 교양 수업 듣는다고. 그거 신청하기 무지 어려운데 둘 다 운이 좋았구나."

 

대꾸도 없는데 정성찬은 청산유수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그거 작년에 들었었거든. 그 교수님 자기 족보에서만 시험 문제 내는 거 알지?"

"⋯⋯."

"우리 과에 88학번 때부터 전해져 내려 오는 족집게 족보가 있는데 혹시 필요해?"

"⋯⋯네. 필요해요."

 

내내 등만 보이던 원빈이 드디어 뒤를 돌았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눈이 부셔서 손바닥으로 얼굴 앞을 황급히 가렸다. 정성찬이 등 뒤에서 부서지는 햇살처럼 웃고 있었다. 이제야 돌아 봐주네. 정성찬이 중얼거리는 말의 의미를 그 때는 모르고.

 

 

 

수미와 싸워서 데이트 약속이 파투가 나기라도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 같이 정성찬에게서 연락이 왔다. 하숙집에 콕 박혀 있는 원빈을 항상 후문 앞 삼거리의 냉동 삼겹살 집으로 불러냈다. 어쩐지 들뜬 목소리로다가.

 

"대체 뭐 땜에 싸운 거야? 수미가 화가 많이 났더라."

"선배가 알 바 아니잖아요."

 

그 삼겹살 집은 수미가 싫어해서 자주 가지 못했지만 원빈이 학교 근처에서 제일 좋아하는 식당이었다. 돌이켜보니 그 집에서 삼겹살을 먹었던 날들 중 십중팔구가 정성찬과 함께였다. 수미와 싸운 박원빈에게 위로주를 사주기 위해서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밥값은 백이면 백 정성찬의 뒷주머니에 꽂힌 가죽지갑에서 나왔다. 신나 있는 표정이 어찌나 보기 싫던지. 오수미에게 더러운 흑심이나 품고 있는 주제에. 싸웠다니까 쪼르르 달려 와서 위로해주는 척. 가증스럽다 가증스러워. 삼겹살 집 이모에게 빳빳한 지폐를 내미는 커다란 등짝을 흘기며 더러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은 박원빈과 둘만 있을 기회를 낚아챈 뿌듯함의 미소라는 건 역시나 알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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삑. 삐빅. 삑. 삐비빅.

 

책상 위에 놓아둔 삐삐가 요란스레 울린다. 주말 내내 침대 위에 누워 어떤 선배 생각만 하던 박원빈이 용수철처럼 튕겨져 일어났다. 점멸하는 삐삐 화면에 네 자리 숫자가 떠 있다. [0114] 감으로 알 수 있다. 이건 분명 정성찬에게서 온 연락이다. 오수미에게 숱하게 삐삐로 사랑 고백 날리던 경험에 의하면 정성찬으로부터의 사랑 고백일 것이 분명하다. 영원빈을 랑한다는 그런 내용의⋯⋯. 주섬주섬 옷을 껴 입고 집 앞 공중전화를 찾는다. 하숙집 전화를 썼다간 같은 집 사는 고시생 형한테 무슨 놀림을 당할지 몰라서.

 

집 밖으로 뛰쳐 나가 좌우를 살핀다. 평소에 수미와 자주 통화하던 공중전화 부스가 눈에 띈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부스에 들어가 수화기를 들고 잔뜩 집어 온 동전을 미친 듯이 집어 넣는다. 음성사서함에 도착한 미확인 메시지 한 통. 역시나 익숙한 목소리다.

 

[원빈아, 나야. 정성찬. 네가 이 메시지를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서 남겨 봐. 그 날 내가 막무가내로 너를 끌고 나와서, 불편하게 만들었을텐데도 끝까지 같이 있어줘서 고마웠어. 내가 너 좋다고 했는데 때리지 않은 것도 고마워.]

 

정성찬 웃음 소리가 하하, 하고 들렸다. 마치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앞으로는 이런 일 다신 없을 거야. 그런데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쉽게 정리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예전처럼 지내는 건 못할지도 몰라.]

 

예전처럼 지내는 게 뭔데? 어쩐지 싸한 느낌이 뒷목에 어린다.

 

[밥 잘 챙겨먹어. 이미 알겠지만 하숙집 아주머니 나랑 어렸을 때부터 친한 친구 어머니셔. 요리솜씨 좋으시니까 챙겨 주시는 밥 거르지 말고 잘 먹고 다니고⋯⋯. 알았지?]

 

하여간 밥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정성찬은 어쩌다 마주치면 늘 밥을 먹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밥 얘기.

 

[공대 애들 술 많이 먹던데 술자리 너무 열심히 나가지 말고. 너랑 술 몇 번 먹어보니까 술 먹으면 자꾸 잠들어서 위험하겠더라.]

 

이번 학기 개강 맞이를 빙자한 컴공과 단체 회식 날. 마침 오수미와 헤어졌던 박원빈은 홧김에 술 잔 보이는 족족 입에 털어 넣었고 그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하숙집 형의 증언에 의하면 인사불성이 된 채 정성찬의 등에 업혀 귀가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묻지도 못할 정도로 사나이 쪽이 너무 팔렸다. 며칠 동안만이라도 정성찬을 우연히 마주치지 않길 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다녔다. 그 바람이 무색하게도 정성찬은 또 눈 앞에 나타났지만.

 

[너를 알게 돼서, 그리고 너를 좋아하게 돼서 나한테는 무지 행복한 시간이었어. 부디 건강하고 잘 지내.]

 

메시지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내심 기다리던 내용이 아니었다. 혹시나 못 들은 말이 있을지 몰라 원빈은 정성찬의 음성메시지를 몇 번이고 다시 들었다. 가지고 나온 동전이 다 떨어질 때까지. 십원짜리까지 탈탈 털어 넣고 나서야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덜컥 불안감이 엄습했다.

 

부디 건강하고 잘 지내.

 

어디론가 영영 떠나버릴 사람 같아서.

 

박원빈은 손바닥에 적어 둔 성찬의 삐삐 번호를 전화기에 대고 눌렀다. 이내 성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성찬 삐삐입니다. 음성메시지 녹음을 시작하는 안내음이 한 번 울렸다. 원빈이 입술을 오물거리며 수화기에 대고 속삭였다.

 

"성찬 선배, 아니, 성찬이 형. 원빈이에요. 월요일에 학교에서 봐요. 오전 9시에 인문대 앞뜰에서 기다릴게요."

 

그 메시지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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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이 밝자마자 박원빈은 공학관이 아닌 인문대학 건물로 직행했다. 약속했던 아홉시보다 삼십분이나 일찍 도착해 앞뜰에 뿌리내린 커다란 느티나무 주위를 서성였다. 1교시 수업을 들으러 가는 학생들이 하나 둘 건물로 들어갔다. 그러나 개중엔 정성찬이 없었다. 박원빈을 향해 느끼한 미소 지으며 어슬렁 어슬렁 다가오는 인간이 없었다. 혹 약속 장소를 헷갈렸을까봐 몸소 인문대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강의동 복도까지 샅샅이 뒤졌는데도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미남자가 눈에 띄지 않았다.

 

약속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 넘게 지나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박원빈은 끝내 수업을 마치고 나온 오수미의 옷소매를 붙들기에 이르렀다. 수미는 당황한 표정으로 원빈의 손을 떼어냈다. 눈썹 사이를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우물쭈물 망설이던 박원빈이 입을 열었다.

 

"성찬이 형, 아니, 성찬 선배 어딨는지 알아?"

 

수미가 코웃음을 쳤다.

 

"너는 헤어진 여자친구를 대뜸 찾아와서는 다른 사람 안부나 묻고 있니?"

"말 돌리지 말고, 빨, 빨리 알려줘."

"얘, 한 발 늦었어."

"뭐?"

"선배, 영장 나와서 지난 주에 휴학했어."

 

영문과 왕자님 정성찬의 입대 소식에 이미 인문대 여학우들 사이에 한바탕 눈물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이었다. 두 다리에 힘이 풀린 박원빈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수미는 그 꼴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성찬 선배를 좀 싫어하는 게 아닌 눈치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애타게 찾을 일은 또 뭐람. 혹시 성찬 선배가 돈이라도 꿔 갔나? 오수미가 측은지심을 발휘한다.

 

"내일이 입대랬으니 아마 집에 있을 거야, 선배."

"선배 집이 어딘데?"

 

쪼그려 앉아 있던 원빈이 고개만 들어 묻는다. 수미가 기가 찬 듯 웃었다.

 

"낸들 알겠니?"

 

오수미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고 강의동 복도를 유유히 걸어갔다. 나 원 참, 미련이라도 남아서 찾아온 줄 알았더니 뜬금 없이 성찬 선배? 박원빈 진짜 웃기는 놈이야. 안 그래도 성찬 선배의 입대 소식에 영문과가 뒤집어졌는데, 수미의 속도 다시 뒤숭숭해진다.

 

박원빈은 힘이 다 빠져버린 다리로 겨우 일어나, 인문대학 앞 공중전화로 달려 갔다. 연락할 일들이 많은지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발을 동동 굴렀다. 돈이 얼마나 있더라. 아뿔싸. 집을 나오며 잔돈을 챙겨 나오지 않았다. 짤짤거리는 소리가 들려야 할 바지 주머니가 고요했다. 등 뒤로 식은 땀이 흘렀다. 초조해진 원빈은 인문대 건물로 뛰어 들어가 학과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조교 선생님들이 점심 식사를 하러 떠나기 직전이었다.

 

"저⋯⋯죄송한데 전화 한 통만 써도 됩니까? 저 이상한 사람 아이고요, 컴, 컴퓨터공학과 95학번 박원, 박원빈이라고 합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물으려 노력했으나 급한 마음에 말이 자꾸 빨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까이에 있던 한 직원이 심드렁한 얼굴로 전화기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원빈은 전화기를 향해 쿠당탕 달리면서도 꾸벅 고개 숙여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 쉬던 원빈이 익숙한 전화번호를 꾹꾹 누른다. 하숙집 전화번호다. 아마 이 시간이면, 하숙집 형이 분명 집에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금 살고 있는 하숙집도 정성찬이 아니었으면 구하지 못했을 곳이다. 2학년이 되면서 기숙사 추첨에 떨어진 원빈은 당장 길바닥에 나앉을 상황이었다. 학교 근처의 월셋방은 다 너무 비쌌고, 웬만한 하숙집은 이미 정원이 다 찼기 마련이었다. 그 때 원빈에게 지금의 하숙집을 소개해준 사람도 다름아닌 정성찬이었다.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친구네 집에서 하숙을 치는데, 마침 방이 하나 빈다나 뭐라나.

 

돌아보니 정말로, 정성찬은 늘 박원빈에게 주기만 했다. 제대로 고맙다고 말해준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여보세요.]

 

통화연결음이 몇 번 이어지더니, 기다리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반가움에 원빈의 목소리가 커졌다.

 

"은석이 행님!"

[누구?]

"저 원빈이요."

[아. 근데 이 시간엔 왜?]

"그⋯⋯혹시 성찬이 형 집 주소 아십니까?"

[정성찬? 걔네 집은 왜?]

"그게, 어, 그러니까, 제, 제가 그 형한테 줄 게 있어서 그래요."

[수상한데.]

"그냥 알려주시면 안 돼요?"

[흠. 개포동 913-32번지. 두 번은 안 알려준다.]

"감사합니다!"

 

영문과 사무실이 떠나가라 감사 인사를 전한 원빈이 수화기를 쿵 내려놓았다. 곧 점심 시간이라 몇 남지 않은 직원들의 시선이 원빈에게 향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선을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사과의 뜻으로 대강 고개를 숙였다. 개포동 구백십삼 다시 삼십이번지. 개포동 구백십삼 다시 삼십이번지. 주소를 까먹지 않기 위해 속으로 계속 되뇌이며 원빈이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그곳에 제발 정성찬이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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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포동 일대 주공 아파트 단지를 지나자 고즈넉한 주택 단지가 나왔다. 원빈은 연신 두리번거리며 제가 가야할 곳을 찾았다. 913-28번지, 913-29번지를 지나쳐⋯⋯마침내 913-32번지 앞에 멈춰섰다. 원빈이 사는 하숙집보다 훨씬 큰 삼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그 앞에서 원빈은 심호흡을 했다. 택시비가 모자라 근처에서 내려 뛰어 왔더니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이 한 줄기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913-32번지 대문 앞에는 정성찬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명패가 달려 있었다. 정석주. 윤미희. 그걸 보고 있자니 근원적인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여기까지 대체 왜 왔지?

 

머릿속이 또다시 뒤죽박죽 엉켜갔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원빈이 떨리는 손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맑은 종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인터폰 너머 중년 여자 목소리가 묻는다. 아마도 성찬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저⋯⋯성찬이 형, 만나러 왔는데요."

[누구신데요?]

“어, 그⋯⋯학교 후배입니다."

 

스피커로 성찬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이윽고 인터폰이 뚝 소리를 내며 끊겼다. 숨은 잦아든지 오래였는데 한 번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은 좀처럼 제 속도를 찾을 생각이 없었다.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세차게 박동해댔다. 대문 안쪽에서 철컹,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대문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원빈은 가슴이 이대로 터져버릴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육중한 대문이 끼이익 열린다. 키가 큰 남자가 대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지난 며칠 박원빈을 가장 괴롭게 했던 사람.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던 얼굴.

정성찬이다.

 

"네가⋯⋯여긴 무슨 일이야?"

 

성찬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야구 모자를 쓴 성찬의 뒤통수가 휑했다. 이미 입대를 위해 머리를 민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정말 당장 내일 군대로 가 버릴 사람이라는 게 실감 났다. 박원빈의 시야가 갑자기 흐려졌다.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원빈은 지금 눈물이 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화가 나서 차오르는 눈물인지,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이 그리워질까봐 미리 흘리는 눈물인지.

 

"형⋯⋯군대 가요?"

 

박원빈이 씩씩거리며 묻는다. 성찬은 그제야 뭔가 알아챈 표정으로 탄식했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빈이에겐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사람 속 다 뒤집어놓고 홀랑 군대로 도망가버리면 끝이에요?"

 

답지 않게 박원빈의 말이 빨라졌다. 왼쪽 눈에 고여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유리구슬처럼 또르르. 성찬이 다급하게 제 손으로 그 눈물을 훔쳤다. 원빈은 그 다정한 손길을 쳐 냈다.

 

"형 그렇게 비겁한 사람이었어요? 저랑 한 번, 아니, 두 번 키스했으니까 이제 볼장 다 봤다 이거예요?"

 

정성찬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제껏 본 중에 가장 빠른 속도로 말을 내뱉는 박원빈의 입술이 너무 귀여운데. 눈물 맺힌 눈이 안쓰럽기도 하다. 변명하자면, 한사코 정성찬은 박원빈이 이렇게 나올 줄 예상 못했다.

 

"그, 원빈아,"

"이렇게 가 버리면 언제 다시 나 보려고요?"

"그게 아니라,"

"이 년 뒤에나 보려고요?"

"아니 원빈아. 내 말 좀 들어봐."

 

정성찬이 두 손으로 원빈의 양 어깨를 붙들었다. 남의 마음 냅다 휘저어놓고 토끼려고 했으면서 퍽 난처한 얼굴을 한다. 일말의 양심은 아직 있나 보지?

 

"나 공익이야 원빈아⋯⋯."

“⋯⋯예?"

"방위라고. 한 달 뒤면 훈련소에서 나올 거야."

 

그렁그렁하던 박원빈의 눈동자가 금세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근데 무슨 삐삐를, 영영 떠나는 사람처럼 쳐요?"

 

한 꼬집 원망이 섞인 새카만 눈빛을 본다. 진심이 그득그득한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멍하니 선 성찬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다 끝내려고 했으니까."

"뭐를요."

"너 좋아하는 거."

 

정성찬은 이 짝사랑을 마무리할 작정이었다. 어쩌면 평생 박원빈을 다시 마주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는 선배에서 아는 척도 하기 싫은 호모새끼로 낙인 찍혀 버릴지도 모르지만.

 

잃을 확률이 백퍼센트인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걸 다 잃을 자신으로 정성찬은 그 도박에 올인했다. 설령 박원빈마저 잃게 되더라도. 어차피 마지막을 마음 먹었으니까.

 

"누구 맘대로요."

"⋯⋯."

"저요, 하루종일 형 생각만 나요. 형이 그동안 저한테 잘해준 게 너무 많은데, 내가, 내가 그걸 하나도 보답을 못해서 미안해 죽겠어요. 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에요. 그러니까,“

“⋯⋯.”

“그러니까 저 이대로 형 못 보는 거 싫어요."

 

사뭇 진지하고 비장하게 이야기하는 애 앞에서 웃고 싶지 않은데 자꾸 피식거리며 웃음이 샌다. 다급하게 말을 쏟아 낸 박원빈이 턱 끝까지 받쳐오른 숨을 색색 내쉬었다.

 

"긋, 그치만⋯⋯."

"⋯⋯."

"형을 좋아한다는 건 아니에요."

 

박원빈은 아직 잘 모르겠다. 스스로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 온 이유를. 하지만 지금 제 눈 앞에 서 있는, 왕자님맹키로 태가 나고 잘생겼지만 어딘가 허술하고 맹탕인 이 형과 영영 헤어지는 것은 싫었다. 눈 앞에 나타나면 거슬리고 영 재수없게 굴 때도 많지만, 다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했다. 이 마음이 어떤 건지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건 이기적인 마음이란 거다. 정성찬에게 못할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박원빈은 말을 멈추지 못했다.

 

"그런데 형은, 저 계속 좋아해주시면 안 돼요?"

"너 진짜⋯⋯."

 

성찬이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구겼다.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기 때문에. 굳게 힘을 준 박원빈의 당돌한 두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골 때리는 애다."

 

그래서 내가 너를 좋아해.

 

"안아도 돼?"

 

박원빈의 눈썹 사이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더한, 더한 것도 했으면서 뭘 그런 걸 묻고 그런답니까."

 

성찬은 더 이상 웃음을 참지 않았다. 앞니가 훤히 드러나도록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긴 팔을 양쪽으로 벌려 한품에 까만 머리통을 끌어 안았다. 불퉁한 얼굴이던 박원빈은 얌전히 그 품에 안겼다. 저도 팔을 벌려 정성찬을 안아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진 건 비밀이다. 박원빈의 두 팔은 허공을 잠시 떠다니다 이내 원래의 차렷 자세로 돌아갔다. 아직은⋯⋯잘 모르겠으니까.

 

"삐삐쳐도 돼?"

 

정성찬이 물었다. 원빈의 어깨에 고개를 박은 채였다. 더운 숨이 목덜미에 묻어났다. 간지러웠다. 순간 어깨를 움츠리자 단단한 두 팔이 온 몸을 더 꽉 끌어 안았다.

 

"마음, 마음대로 해요⋯⋯."

 

군대 간다는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왔으면서 말은 여전히 삐죽하다. 성찬은 댓발 튀어나왔을 게 뻔한 원빈의 입술을 떠올리며 피식거렸다.

 

"훈련소에서 편지 쓸게. 은석이네 집으로."

"그러시든가요."

"나오면 바로 삐삐칠게. 너한테 제일 먼저."

"그건 쫌⋯⋯. 제일 먼저 안 쳐도 돼요. 가족들한테 연락해야죠."

"마음대로 하라며."

"아⋯⋯맞네."

 

박원빈은 항상 이랬다. 영원히 다른 곳만 바라볼 것처럼 꼿꼿하게 서 있다가도, 지칠 만하면 가끔씩 정성찬을 돌아봐 주었다. 그래서 부단히도 그 곁을 맴돌았다. 간헐적으로 박원빈의 시선이 제게로 향하는 순간이 소중했다. 그런데 무려 박원빈을 제 품에 안은 지금 이 순간은⋯⋯더할 나위 없다. 정성찬이 양팔에 힘을 준다.

 

"형 저 숨⋯⋯숨 막혀요."

 

박원빈이 마른 몸을 정성찬의 품 안에서 꼼지락댔다. 정성찬은 박원빈이 그대로 품을 빠져나갈세라 더 세게 끌어 안았다. 원빈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 나왔다. 아마도, 형 마음대로 하라는 무언의 의사표현일 것이다.

 

단언컨대 정성찬은 이제껏 짝사랑에 욕심 낸 적 없었다. 틈만 나면 박원빈의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일쑤였지만, 평생 닿을 수 없는 저 먼 곳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나란히 길을 걷는 것 이상을 바라는 게 사치처럼 느껴졌다. 영원히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는 인형처럼. 평생 닿지 못하더라도 눈 앞에 존재하는 것에 감사했다.

 

"연락할게. 기다려 줄래?"

 

그랬던 정성찬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욕심을 부려본다. 착하디 착한 박원빈은 그 욕심에 기꺼이 응한다. 품 안에 안긴 고개가 작게 끄덕끄덕 움직였다.

 

끝내 정성찬의 짝사랑이 이루어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한낮의 태양만큼 지글거리는 이 남자의 순정이 언젠가 보답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