돗가비
by. 월노
承
이매(魑魅)마을에 사는 박 씨는 어리숙한 사내였다. 관아의 땅 일부를 소작을 받아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남의 농사를 도와주느라 정작 제 것을 소홀히 하였다. 그의 순박함에 반해 옆 마을 양 씨 처녀가 시집을 왔다. 고운 부인을 얻은 그를 시샘하는 눈길도 있었지만, 박 씨의 심성을 알았기에 모두가 축하를 해주었다.
박 씨가 품앗이를 해주러 건넛산 마을까지 간 날. 해가 떨어질 때까지 일을 하느라 고개에 오를 땐 이미 달이 떠 있었다. 어둑한 산길을 걷고 있으니 마을의 전설이 슬그머니 생각나는 것이다. 예로부터 도깨비 터로 점지된 곳이라 신이한 존재를 마주칠 수 있다는 것. 만난다면 꼭 내기를 하여 소원을 말하라는 이야기들. 아랫마을 김 씨 부부가 나이 쉰에 늦둥이를 얻은 것도 다 내기 덕분이라는 소문이 떠올랐다.
인(寅)시가 막 되었을 무렵. 박 씨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달빛 하나에 의지한 길이라 사방이 컴컴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사내가 있는 곳만은 환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느릿하게 눈을 뜬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검정 태사 무늬가 들어간 하얀 도포 자락이 사내의 다리 근처에서 흔들렸다. 팔 척은 될 것 같은 몸. 나뭇가지처럼 밝은 갈빛의 눈동자. 딱 봐도 인간이 아닌 사내가 박 씨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시간에 홀로? 길을 잃은 게야?"
"아니, 아닙니다. 일이 늦어져서…."
"선한 자로구나. 제 앞가림하기 바쁜 세상에. 남을 돕는 마음이라니."
입은 옷만큼이나 하얀 얼굴이었다. 사내가 아니었다면 침을 흘렸을 게 뻔한 미인. 제게 호의적인 말에 박 씨가 긴장을 풀었다. 사내는 무료한 얼굴로 산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 혹시 도깨비님이신가요?"
"그리 부르기도 하지. 부르는 놈 마음이니."
"내기를 이기면,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게 참말입니까?"
"송장을 걷게 해달라는 것만 아니면 가능하다. 그건 염라가 싫어해서."
순박한 박 씨의 눈에 처음으로 욕심이 어리는 순간이었다. 박 씨는 고생하는 제 부인을 생각했다. 저야 구멍난 옷을 기워입고 딱딱한 밥을 먹어도 되지만, 부인은 귀한 양반댁 마님처럼 살게 해주고 싶었다. 헌데 무엇을 빌고 싶어서? 박 씨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입을 열었다. 부인을 호강시켜주고 싶다고. 사내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깨비와의 내기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데 진정으로 하겠느냐?"
"예, 예!!!"
"네가 이기면 소원대로 부자가 되게 해주마. 그 돈으로 부인에게 기와집을 사주든, 비단옷을 사주든 마음대로 하거라."
"참말이십니까?!"
"허나, 내가 이기면 네게 가장 소중한 것의 바로 다음 것을 내게 주어야 한다."
사내의 허락에 박 씨는 그의 뒷말을 흘려 들었다. 사내는 천천히 박 씨에게 다가왔다. 오묘하고 달달한 향기가 몸에서 풍겼다. 도깨비가 하는 내기는 하나였다. 씨름. 늦둥이 출산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힘이 센 도깨비를 어떻게 이겼냐는 물음에 아랫마을 김 씨는 입을 열었다. 왼쪽 다리. 거기가 약점이라 반드시 그곳을 걸어야 한다고.
사내의 힘은 장사였다. 박 씨도 힘으로는 어디서 밀려본 적이 없었는데, 인간이 아닌 것의 힘은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겨우겨우 땅을 지탱하고선 박 씨를 보며 사내가 재밌다는 얼굴을 했다. 제법이구나. 사내가 어깨를 붙여오자 박 씨가 사내의 왼쪽 다리를 감았다. 몰아치던 힘이 조금은 덜해져 박 씨는 한숨을 돌렸다.
등줄기에 땀이 흐르도록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제 버틸 힘도 없어 포기해야 하나 싶던 차 사내가 갑자기 몸을 물렸다. 씨름에 열중한 사이 동이 터올 시간이 된 것이다.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구겨진 옷을 털었다.
"둘 다 이긴 것으로 해. 내 너의 소원대로 되게 해줄 테니. 단, 내가 원한 것을 잊지 마라."
암요. 그러믄요. 박 씨는 너무 기쁜 나머지 사내에게 절을 했다. 도깨비는 사람을 좋아해 해를 끼칠 줄 모른다는 평이 맞았다. 박 씨는 사내를 업고 춤을 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남쪽으로 오십 리를 가면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박 씨는 땅바닥에 이마를 붙이고 감사 인사를 반복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땐 환한 산 풍경만이 박 씨를 반겼다. 그는 곧장 집으로 내려가 짐을 꾸렸다. 부인은 요새 속도 안 좋고 달거리가 끊겨 걱정인데 어디를 가냐며 만류했지만, 그 말을 들은 박 씨는 더 굳게 결심했다. 부인과 앞으로 태어날 자식을 위해 꼭 넉넉한 살림을 마련해야겠다고.
그렇게 남쪽으로 간 박 씨는 백만 냥을 벌었다. 도깨비의 가호 덕분인지 도적떼도 만나지 않고 무사히 마을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이웃들의 환영을 받으며 집에 들어가는데 금줄이 쳐진 게 보였다. 부인이 아이를 낳은 것이다.
곧장 방으로 들어간 박 씨는 혼자 고생했을 부인을 껴안았다. 품에 안긴 제 핏줄의 얼굴엔 어여쁜 부인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순간, 어스름한 산길에서의 대화가 스쳐 갔다.
네게 가장 소중한 것의 바로 다음 것을 내게 주어야 한다.
아뿔싸. 박 씨는 깨달았다. 제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부인, 그리고 그다음 것은 이 아이일 터. 부인은 갑자기 하얗게 질린 박 씨를 걱정했다. 무슨 일 있어요? 박 씨는 고개를 저었다. 소중한 것의 기준은 여러 가지인데, 그중에서도 핏줄일까 싶었다. 물건도 아닌데 어찌 거둬가려고. 설마 이곳까지 찾아오겠어. 불안감을 뒤로 한 채 박 씨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편히 잠들었다.
元彬
다음 날 마당에 쓰인 글씨만 없었더라면, 그 안도가 계속 유지되었을 것이다. 큼지막한 한자가 마당에 가득 차게 적혀 있었다. 정황상 아이의 이름이었다. 그것도 도깨비가 직접 지어준. 혼이 나간 얼굴로 서 있던 박 씨는 동네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산 넘고 물 건너가야 하는 아주 먼 곳. 도깨비 터를 벗어나 넓은 기와집을 사고 부인과 아이를 위한 좋은 물건들로 채워 넣었다. 아이의 이름은 붙이지 않았다. 혹여나 이름을 불러 꾀어낼까 두려워 그저 아들이라고 불렀다.
피나는 노력에도 삼월 초이틀이 되면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대청 위에 귀한 신발이 놓이기도 하고, 문방사우 꾸러미가 놓인 적도 있었다. 박 씨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출처 없는 선물들이 아이에게 딱 맞는 것이어서. 정말이지 아이가 커버리면 사내가 홀랑 채갈 것만 같아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순박했던 박 씨는 해선 아니 될 생각을 품고 말았다. 새로 정착한 마을에는 삿된 짓을 하여 쫓겨난 늙은 무당이 있었다. 박 씨는 어두운 밤 그곳을 몰래 방문했다. 무당은 박 씨를 보자마자 혀를 찼다. 아들 곧 뺏기겠네. 무당의 말에 박 씨는 기겁하며 무릎을 꿇었다. 돈을 얼마든지 주겠다며 도깨비를 없애달라는 말이 입에서 줄줄 나왔다. 무당은 탁한 눈으로 웃었다. 신(神)과 비슷한 존재라 없애는 건 못한다고. 박 씨가 절망하자 무당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빨간 손톱이 박 씨를 가리켰다. 근데 가둘 수는 있어.
"오(午)시에 도깨비를 불러내어 갓 태어난 백마의 피 뿌려. 원래의 물건으로 돌아가면 서낭당 아래 가장 음한 곳에 넣고 그 위에 부적을 넣은 뒤 그 위에 그 백마 사체를 올려 묻어라."
"그, 그러면 끝납니까?"
"네 아들 말 띠지. 그 피 조금 담아와 부적 쓰게."
박 씨는 무당의 말을 따랐다. 울면서 자는 아들의 팔을 찔러 피를 낸 뒤 무당에게 바치자 불길한 부적을 건네받았다. 귀하디 귀한 새끼 백마를 구하여 피를 내어 준비하고, 내기한 장소로 가 사내를 불러내었다. 박 씨가 거짓된 사죄를 하는 사이 노비가 백마의 피를 뿌렸다. 네 놈이 감히…! 말도 잇지 못한 도깨비는 제 모습을 잃었다. 박 씨는 손을 떨며 깊게 판 구덩이를 덮었다. 도깨비가 베푼 호의가 인간의 악의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박 씨는 가끔씩 환청에 시달렸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업은 네 핏줄이 치르게 될 것이다.
오금이 저릴 만큼 두려웠으나 눈앞에 있는 아들을 볼 때마다 꾹 삼켜내었다. 신이한 존재를 배신한 대가는 그렇게 박 씨의 혼에 새겨졌다.
돗가비
轉
성찬은 눈을 떴다. 기억하는 마지막 풍경에는 녹음이 무성했는데 제 입에선 입김이 나오고 있었다. 진득한 말 피가 몸에 쏟아지던 느낌이 아직 생생했다. 한낱 인간 때문에 오백여 년을 허비하다니. 무정한 세월은 봉인된 존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삐걱이는 몸을 두드리며 달라진 시야를 살피는데 소식을 들은 차사가 나타났다. 앙심을 품은 신(神)이 할 행동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꼭 죽이셔야 할까요?"
"약속을 안 지킨 벌이야."
"이미 그 핏줄은 대대로 벌을 받고 있습니다. 그 다다음대에 집안이 망하고 그 후엔 역병이 들었지요. 허락된 명도 점점 짧아져서 손도 귀해졌습니다."
"오랜만에 들은 희소식이군."
성찬은 겨울 바람보다 차가운 얼굴이었다. 소멸을 막기 위해 몸부림치느라 힘도 바닥이었다. 뻑뻑한 손을 누르며 제가 새긴 업보의 흔적을 따라 길을 나섰다. 그동안 세상은 크게 바뀌었고 간악한 마음이 많아져 일이 넘친다는 차사의 넋두리가 쏟아졌다. 도깨비의 복수가 시작되면 박 씨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자는 모두 죽을 텐데. 이건 최소 세 달 치 과로였다.
"그래서, 너 일 많으니까 하지 말라고?"
"그렇다기보단…불쌍한 먼 후손이란 이야기지요."
변호 아닌 변호를 들으며 당도한 곳은 인간들이 많이 앉아 있는 곳이었다. 차사는 그곳이 카페라는 곳이며 차를 마시는 공간이라고 말해주었다. 별 해괴한 것이 많이 생겼군. 성찬은 매서운 눈으로 인간들을 살폈다. 가장 구석에서 제일 바쁘게 움직이는 얼굴이 보였다. 한 눈에 알았다. 제가 준 이름을 쓰고 있는, 원죄의 대가.
"…저 아이구나. 내게 바쳐야 했던 아이."
"예. 아비 덕에 평생 집안에서만 살다 죽은 혼입지요. 그 혼이 그대로 환생한 거라 삼신도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왜. 내가 보자마자 해 할까봐?"
차사는 시선을 피했다. 성찬은 이마에 땀이 맺힌 존재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 핏줄을 가진 이 중 가장 천성이 선하다. 이젠 기억나지 않는 전생의 아이만큼 어여뻤고. 그런데 업보는 저 아이가 홀로 감내하고 있었다. 피에 달라 붙은 죄로 몸에 달고 있는 부정한 기운만 수십이었다. 아마 삼신이 살펴줘서 망정이지 죽을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을 터.
입맛이 썼다. 차라리 악인이 되어 있었으면 생각도 않고 처리했을 것을. 제가 부딪힘을 당해놓고 오히려 사과하는 꼴을 보니 의욕이 사라졌다. 차사는 도깨비가 흔들리는 걸 알아챈 듯 점점 입꼬리를 올렸다. 일단 복수는 나중에 하시고 밥부터 먹읍시다. 21세기의 맛을 보여드릴게.
도깨비는 술이 약했다. 모든 도깨비가 그런 건 아니었으나 성찬은 술을 못했다. 아주 오래 전 김 서방에게 탁주 한 병을 얻어먹은 뒤 다음날까지 못 일어난 후로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가뜩이나 힘이 돌아오지 않아 약골인 상태에서 차사가 주는 술을 두 잔이나 마셔버렸다. 새로운 집터를 알려주기로 한 차사는 호출이 왔다며 사라졌고, 그렇게 성찬은 길가에 버려졌다.
"저기요.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에 성찬의 눈이 힘겹게 떠졌다. 걱정 어린 눈망울, 추워서 빨개진 볼, 부은 입술. 말 거는 이의 얼굴이 익숙했다. 아. 그 혼이구나. 나를 배신하고 봉인한 이의 아들. 이물(異物)에게 바쳐진 혼. 그래서 하루하루 고달프게 사는 불쌍한 것.
"원빈…."
"저, 저를 아세요?"
"네 아비를 알지. 네 어미를 알고. 그러고 보니 너도 아는군."
잔뜩 풀린 목소리라 영락 없는 술주정이었다. 거대한 덩치라 무시하고 문을 열 수도 없었다. 이 사람도 빚 때문에 왔나. 그게 아니면 도와주러 왔나. 차사의 조언으로 현대식 양장을 입었으나 본연의 무늬를 없애지는 못하여, 꼭 연극하는 의상 같았다. 깜빡거리는 눈이 예뻐 원빈은 한참이나 이상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해를 끼칠 얼굴은 아닌 거 같은데. 설령 나쁜 이라 할지라도 한파의 날씨에 밖에 둘 순 없었기에. 원빈은 힘겹게 성찬을 부축하여 집으로 들어갔다.
원빈의 집은 서울 시내가 다 보이는 호성동이었다. 그 말은 지대가 높다는 뜻도 되었고, 백만 냥 박 씨 가문이 망한 지 오래란 뜻도 되었다. 아주 오래 전에는 부자였다는데, 신에게 미움을 받아 쫄딱 망했다는 그런 이야기. 재미도 없는 클리셰에 원빈은 입술을 삐죽였다. 조상이 돈 간수만 잘했어도 제가 지금 소년가장처럼 살고 있진 않을 거 같다고.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으나 원빈은 제 삶을 원망하진 않았다. 각자만의 힘듦이 있는 시대였다. 자신은 그게 눈에 보일 뿐이었고. 빚쟁이에게 쫓겨 가족이 흩어져서 살고 있었으나 서로 따뜻한 말은 잊지 않았다. 비록 아르바이트를 남들보다 조금 더 하고, 가고 싶던 진로를 포기했어도. 새벽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자주 다쳐 불운의 아이콘이라 불리어도. 원빈은 살아내려고 노력 중이었다.
대따 길다. 원빈은 남자를 바닥에 눕히며 중얼거렸다. 냉골이던 집은 불청객 덕분에 난방이 돌아갔다. 원빈은 제게 있는 유일한 겨울 이불을 손님에게 양보하고 매트릭스 위에 누웠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굴 돕는지. 제 오지랖에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았다.
도깨비에게 바쳐진 혼이, 그와 한 공간에 있게 되었다.
해묵은 약속의 톱니가 다시 맞춰졌다.
악몽 없는 밤은 처음이라 원빈은 아주 개운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알람을 해제하고 몸을 일으키는데 언제 깼는지 저를 빤히 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간 떨어질 뻔. 원빈은 제 비명에도 표정 변화 없는 남자를 훑었다. 낙엽처럼 밝은 머리와 눈동자. 하얀색과 검은색이 섞인 이상한 정장. TV에 나올 것 같은 얼굴.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그런 남자.
"누구신데 남의 집 앞에 계셨어요? 완전 취해가지고."
"아…술. 내 이 차사놈을."
"뭐 하시는 분이에요? 제 이름은 어떻게 알아요? 저희 부모님하고는 어떻게 알고?"
"머리가 아프다. 하나씩 물어."
주정뱅이 불청객이면서 태도가 영 불손하다. 난방을 끈 원빈은 냉장고 안에서 방치 중이던 꿀을 꺼냈다. 일 년 전 카페 사장님이 설 선물이라고 준 건데 괜찮겠지. 끓는 물에 대충 타서 건네니 기다렸다는 듯이 받는 게 뻔뻔했다.
"네 이름은 내가 지었으니 알고. 네 전생의 부모와 연이 있는 것이니 지금 부모하고도 안다고 할 수도 있겠지."
사이비인가. 원빈의 눈썹이 구겨졌다. 말투도 팔십 먹은 노인 같은데 방금 전생 어쩌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이름을 본인이 지었단다. 끽해야 나보다 한두 살 많을 것 같이 생겨서는.
"저 이름 돈 내고 지은 거예요."
"다 네 명운에 새겨진 이름이라 그렇다."
"…그럼 그쪽은 뭔데요."
"나는 표운산의 산신이자 풍요와 재물, 행운을 하사하는 존재지. 인간의 말로는 도깨비라 한다."
미친놈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드라마가 여럿을 망쳐놓은 것 같다. 원빈은 남자의 손에서 컵을 빼앗았다. 아직 다 안 마셨다! 항의 섞인 말에도 무시하고 설거지를 한다. 얼어 죽을까 봐 들였더니 대낮부터 또라이나 보고. 내 팔자야.
"일어나요. 저 나가야 해요."
"어디 가는데?"
"알바요. 여기 저희 집이니까 그쪽도 술 깼으면 집에 가세요."
성찬을 끌고 나온 원빈이 대문을 잠갔다. 재워줄 때는 언제고 매정하게 인사도 없이 간다. 성찬은 점점 제게서 멀어지는 작은 머리통만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씨. 저 사람 왜 여기까지 따라왔어.
사거리 맥도날드는 학교 근처라 언제나 바빴다. 해피밀 장난감이 새로 나오는 날이라 주문이 넘치는 와중에 괴상한 남자까지 얼쩡거린다. 남자는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매장 안을 한참 동안 살펴보았다. 들어오려는 손님과 두 번째로 부딪친 순간 원빈은 잽싸게 뛰어나와 남자를 구석으로 끌고 갔다. 왜 여기 있어요? 이거 영업 방해로 신고 당해요. 남자는 원빈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거 같았다. 집이 없는 건가. 남자의 머리 뒤로 벽시계가 보였다. 저를 따라 나왔으면 계속 밖에 있었단 소리다. 그럼 지금까지 뭘 먹지도 못했겠네.
"밥은 먹었어요?"
"아직."
"여기 잠깐 앉아 있어요."
성찬은 쏜살같이 사라지는 원빈을 보며 자리에 앉았다. 이게 다 차사놈 때문이었다. 아까 전 도깨비 터를 대령했다고 그 주변에서 보자더니 또 급한 호출이 왔다며 부재중이었다. 구구절절 말하기가 뭐해 아직이라 답했는데 저 아이가 저를 단단히 오해한 것 같았다.
커다란 쟁반에 무언가를 가득 들고 온 원빈은 먹고 있으라면서 다시 가버렸다. 종이에 싸진 것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손에 그것을 들고 먹고 있었다. 성찬은 근처의 인간을 따라 동그란 것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럽고, 달고.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21세기 인간들은 다 이런 맛있는 것을 먹고 사는구나. 햄버거 맛에 눈을 뜬 도깨비였다.
"그쪽 사이비예요?"
"이젠 사기꾼 취급을 하는군."
"아니 도깨비라면서 밥도 못 먹고 다니고, 나만 따라다니니까 그렇죠. 제가 어떻게 믿어요."
일이 끝나고 당연하게 성찬과 같이 걸어온 원빈은 계속 남자를 흘끔거렸다. 불우이웃 돕기라면 상관이 없는데 저를 이용하는 포교라면 사절이었다. 대문 앞에 선 성찬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원빈의 집을 훑었다. 삿된 것에 손을 댄 대가로 잡귀 몇이 달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반쪽도 안되는 힘이었으나 저정도를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저기요. 성찬은 저를 부르는 원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동글한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한 번 토닥이자 부정한 기운이 날아갔다.
"이제 악몽을 꾸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집 안에 있는 깨진 화분은 버리거라. 잡귀가 들기 쉬우니. 남이 주는 것은 웬만해선 받아오지 말고."
"…갈 데 없다면서요."
"마침 생겼다."
성찬은 차사가 오는 기척을 느끼고 원빈을 들여보냈다. 살아 있는 혼을 차사와 자주 마주치게 하는 것도 좋진 않을 터. 대문을 닫아주는데 어째 아쉬운 얼굴이다. 낯선 존재에게 이리 마음을 쉽게 열어서야 어찌하려고. 성찬은 가만히 그를 불렀다. 원빈. 제가 지어준 이름이 찬 공기 사이로 퍼진다. 대문 사이로 놀란 눈동자와 마주치자 도깨비는 처음으로 만남이란 걸 기약했다. 다음에 보자. 인간의 방에 불이 켜지는 것까지 확인한 후 고개를 돌리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차사가 보였다. 큼. 성찬은 헛기침을 했다. 내 집이나 내놔.
"복수하신다면서요. 너무 깨끗해서 제를 올려도 되겠든데?"
"다른 것이 먼저 죽일까 그리 한 것이다."
"아무렴요. 그러시죠."
어쩌다 저런 게 이곳 담당이어서는. 뺀질한 차사의 말에 반박도 못 한 성찬은 차사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마련된 도깨비 터로 들어갔다. 아야야야. 저 숨 좀! 이미 죽은 놈이 말이 많구나. 간신히 손아귀에서 벗어난 차사는 부동산업자처럼 집을 소개했다. 아주 오래전 성찬의 취향을 반영한 고풍스러운 집이었다. 박물관에나 있을 것 같은 검 세 자루가 거실 중앙에 걸려 있고, 붉은색의 꽃이 선반 위에 놓여 있다. 영물들에게 물어서 도깨비님 예전 터를 반영했습니다요. 촐싹 맞은 말을 뒤로한 채 성찬은 2층의 창을 열었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도깨비 터. 반대로 이곳에서는 지나다니는 인간이 모두 보였다. 성찬은 고개를 들어 거리를 가늠했다. 저 아래쪽에 원빈의 집이 있겠지. 아침에 봤던 원빈의 집 풍경을 떠올렸다. 제게 이불을 양보하고 자던 모습도. 심각한 표정이 된 성찬이 차사를 불렀다.
"그, 요새 아이들은 무얼 좋아하지?"
원빈은 오늘 아침도 머리를 쥐어뜯었다. 또 왔어!! 발신인불명의 선물은 사흘에 한 번씩 대문 앞에 놓여 있었다. 소고기, 과일 등 먹을 것이 한동안 오더니 이젠 물건이었다. 아이폰, 테블릿, 노트북. 먹을 것까지는 불우이웃 돕기인가 싶어 받았는데 물건부터는 뭔가 찝찝해지는 것이다. 불법적인 루트로 가져다 놓은 거 아니야? 가뜩이나 살기 팍팍한데 빨간줄 그이는 건 사절이었다.
포장도 뜯지 않고 한 데에 모아 두니 제법 양이 많았다. 대체 누구지. 원빈은 알바를 하면서도 선물빌런 생각뿐이었다. 지금까지 지나온 모든 인간관계를 다 탈락시키자 딱 한 명이 남았다. 자칭 도깨비라 주장하는 그 이상한 남자. 그 남자가 다녀간 후로 악몽도 안 꾸는 것이 고마운 사람인 것 같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장 수상했다.
취침 후부터 기상 전까지의 새벽. 원빈은 졸린 눈을 꾹꾹 누르며 대문 앞 보초를 섰다. 인기척이 들리는 순간 문을 열어서 잡을 계획이었다. 딱 30초만 눈감았다 뜨자. 그렇게 깜빡. 소스라치며 눈을 뜨니 이미 물건이 와 있다. 무려 스마트 TV. 원빈은 그 자리에서 소리를 내질렀다. 안 나타나면 이거 버린다!!!! 앞으로 주는 거 다 갖다 버릴 거야!!!! 하나!!! 둘!!!
"왜 버려."
"악! 깜짝이야."
"기껏 줬더니 쓰지는 않고 왜 모셔두는 것이냐. 마음에 안 들면 말을 하거라."
이상한 남자는 새벽에도 잘생긴 얼굴을 자랑하며 나타났다. 그보다 어디서 나타난 거지 땅에서 솟았나. 한참 남자를 쏘아보던 원빈이 쌓아놓은 물건을 가리켰다.
"가져가요. 왜 저런 걸 저한테 줘요?"
"이미 있느냐? 아님 쓰질 않는 것인가? 인기가 많은 것이라 하였는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저 불쌍하세요? 그래서 저런 거 주시는 거예요?"
"불쌍하다기보단 기특해서 주는 건데."
남자의 말이 너무 진심이라 원빈은 말을 잃었다. 뭔데 날 기특하게 여기지 싶다가도 억지로 버티는 삶을 알아주는 거 같아서 마음이 울렁거렸다. 부모님도 아닌데 그쪽이 왜요. 그럼에도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면,
"이름 지어준 몫이라 생각하거라."
하는 이상한 말만 돌아왔다. 컨셉 참 지독하다. 근데 또 고맙고 신기해서 남자의 말을 믿어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이제 선물 안 줘도 돼요. 너무 많아요. 집에 둘 곳도 없고.
"그럼 집을…"
"됐거든요. 도깨비라서 잘해주시는 거예요? 원래 인간들한테 다 이렇게 선물 줘요?"
"아니. 너한테만 주는 건데."
"…왜요?"
어여쁘니까.
태어났을 때도, 이름을 고심하던 때도, 도망친 아비의 집 안에서 무럭무럭 크는 걸 지켜봤을 때도 아이는 예뻤다. 으뜸으로 빛난다는 이름처럼 마음씨와 몸가짐 모두 고왔다. 그것을 그대로 타고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어 딱 다섯 글자만 말한 것이, 인간에게 더 큰 혼란을 줬다는 걸 모르는 성찬은 이만 자라며 사라졌다.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인간의 박동만 남기고는.
"차사. 이곳은 기별을 어떻게 해?"
"그 인간에게 연락을 하고 싶으신 거죠?"
눈치백단 차사가 작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지상에 사는 신이한 존재들을 위한 휴대폰이었다. 성찬은 의아한 표정으로 차사를 쳐다봤다. 이게 뭔데. 차사는 입을 틀어막았다. 아 맞다. 16세기 이후로 업데이트가 안 돼셨지. 여기에 번호를 입력하면 연락이 가능해요. 알맹이가 빠진 겉핥기식 설명에 성찬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설명해드리고 싶은데 제가 일이 많아서. 아! 그 인간한테 물어보면 되겠네요!"
"걔도 너만큼 바빠. 일을 많이 하든데."
"에이. 저승사자보다 바쁠까. 어차피 받을 빚도 있으니 알려 달라고 하세요. 그럼 전 이만."
붙잡을 새도 없이 사라진 차사에 성찬이 미간을 좁혔다. 이상하게 생긴 물건. 생각해보니 길거리에서 죄다 이 네모난 것을 보고 있었다.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성찬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그래도 성찬의 얼굴에 금방 미소가 생겨난 것은. 그 아이를 볼 명분을 얻었다는 것 때문에.
"사람마다 다 번호가 있어요. 그걸 저장하고 누르면 그 사람하고 연락이 가능한 거예요. 목소리도 듣고 얼굴도 볼 수 있고."
"너도 그게 있어?"
"당연히 있죠. 한국에선 이거 없으면 힘들어요."
"그럼 여기에 해 줘."
남자는 현대 문물을 처음 접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아니 휴대폰을 모를 수가 있나? 컨셉충이라기엔 너무 과도한 설정이라 원빈은 이제 그냥 남자가 도깨비라는 걸 믿어주기로 했다.
원빈은 남자의 휴대폰에 제 번호를 입력했다. 남자가 저를 부르는 것처럼 원빈 두 글자로. 일 말고는 번호 저장한 적은 없는 거 같은데. 도깨비가 인간 번호도 따는 세상이다. 통화버튼을 누르니 제 폰에도 남자의 번호가 찍혔다.
"이름이 뭐예요?"
"왜 궁금한 거지?"
"저도 저장을 해야 될 거 아니에요."
"함부로 일러주는 것이 아니다."
"됐어요. 도깨비라고 저장하지 뭐."
원빈은 입술을 삐죽이며 남자의 번호를 저장했다. 이름 하나 말하는데 더럽게 비싸게 군다. 그러면서 새삼 저답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이름도 모르는 낯선 남자를 재워주고, 밥을 사주고, 번호를 교환하는 이 모든 상황이. 도깨비는 사람을 홀리기도 한다는데. 감자튀김을 주워먹는 남자를 보며 원빈이 휴대폰을 가리켰다.
"다른 사람한테는 막 번호 물어보고 그러면 오해받아요."
"오해?"
"상대한테 관심 있다는 소리거든요. 보고 싶고, 걱정되고."
"다른 이에게 물어볼 일 없어."
뭐야…그럼 나는 왜 물어봤는데. 저번부터 마음이 붕 뜨는 기분에 원빈의 시선이 남자에게 향한다. 색이 옅은, 아주 예쁜 눈. 도깨비라 그런가 사람을 너무 빤히 본다. 꼭 꿰뚫어보는 것처럼. 큼. 헛기침을 한 원빈이 성찬의 휴대폰을 눌렀다. 저장된 번호는 딱 하나. 자신뿐이다.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건가.
"도깨비 씨는 친구 없어요?"
"있어 본 적이 없는데."
"…술은 누구랑 마셨는데요?"
"저승사자랑."
말을 말자. 믿어주기로 했지만 저런 대답을 들으니 고개를 젓게 된다. 나중엔 염라대왕이랑 여행도 가겠네. 원빈이 몸을 일으키자 성찬도 뒤따라 일어나 햄버거 쓰레기를 버렸다. 이제 가르쳐주지 않아도 곧잘 하는 걸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두 존재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집 쪽으로 걸었다. 원빈은 갑자기 나타난 이 귀가메이트가 익숙해질까 조금은 걱정이 됐다.
"저 생선 모양의 것은 뭐야? 인간들이 줄을 서 있군."
도깨비의 시선을 따라가니 붕어빵 파는 아저씨가 보인다. 가슴 속에 삼천원을 품고 다녀야 하는 계절. 주머니를 뒤져 잔돈을 꺼내는 움직임이 재빨랐다. 물가가 올라서 붕어빵 세 개에 이천원이다. 원래라면 팥붕만 취급하는데. 원빈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동지에 팥죽…도깨비 퇴치용 아닌가.
"혹시 팥 먹어요?"
"....지금 나한테 그 망할 것을 말한 거야?"
"아저씨. 슈크림으로 세 개만 주세요."
따끈한 슈붕을 받은 원빈은 곧장 하나를 성찬에게 내밀었다. 망할 것 때문에 언짢은 표정이던 얼굴이 곧바로 호기심으로 바뀐다. 달아요. 뜨거우니까 조심. 크림이 제일 많은 머리 부분이 성찬의 입으로 들어간다. 입맛에 맞는지 점점 커지는 눈에 웃음이 터졌다. 투명하다 진짜. 원빈은 하나 남은 슈붕도 내밀었다. 꼭 강아지 같네. 아주 무엄한 생각을 하면서.
원빈은 무료한 얼굴로 카페 밖을 흘끔거렸다. 도깨비 남자가 안 보인 지 벌써 일주일이었다. 무슨 일 있나. 여기 말고 다른 동네로 간 건가. 손님이 없어서 자꾸만 딴생각이 났다. 고새 정들었는지 남자가 하는 이상한 말이 듣고 싶었다. 번호가 있으니 전화를 하면 되는데, 또 막상 휴대폰을 들면 연락할 사이인가 싶은 것이다.
치사한 도깨비.
불쑥 나타났다 사라진 존재에 온 신경이 쏠리는 게, 생각할수록 불공평했다. 도깨비를 원망하며 겨우 알바 시간을 채운 원빈은 편의점에 들러 라면을 샀다. 카페 사장님이 챙겨준 비타민 박스 때문에 손이 불편했다. 한쪽은 라면 봉지, 한쪽은 가방과 박스. 귀가메이트를 대신하는 짐들이 꽤 무거웠다.
오늘따라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이 으슥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전단지와 깜빡거리는 가로등은 꼭 예전에 꾸던 악몽 속 한 장면 같았다. 탁. 타닥. 탁. 타닥. 조금 빠른 원빈의 발걸음, 그리고 한 박자 늦게 따라붙는 다른 소리. 한참을 걷던 원빈은 문득 이상함을 깨달았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 오는데 길에 비친 그림자는 제 것 하나뿐이다.
원빈은 가방을 움켜쥐었다. 한동안 잠도 잘 잤는데 왜. 커가면서 기묘하고 불운한 일이 계속 있어 왔지만, 이렇게 기이한 위협을 직접 맞닥뜨리는 건 처음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집인데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꼭 누가 잡아당기는 것 같다. 원빈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고개가 억지로 돌아간다. 다 뭉개진 발, 지저분한 옷차림. 울룩불룩 이상한 몸.
이목구비가 없는 얼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악한 기운을 풍기는 그것은 지워진 안면으로 원빈을 응시했다. 도망가야 해. 다리에 힘을 주기도 전에 곧바로 목을 조르는 손에 벽에 처박혔다. 끕, 끅. 들고 있던 소지품이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인간이 아닌 것의 힘은 당해낼 수가 없어서. 발버둥을 치는데도 숨이 점점 막혀온다.
약해빠진인간부정한박씨의핏줄주제도모르는존재같으니. 뚫린 입도 없는데 말소리가 들려온다. 수십 명의 음성이 겹쳐 지직거리는 끔찍한 소리였다. 멍청한도깨비자길죽인죄인을살리는어리석은도깨비반쪽짜리라그런지실수를반복하는구나. 악귀들의 말이 어지럽게 골목을 울린다. 팔로 밀어내는데도 끄떡없다. 이대로 죽는 걸까. 부족한 산소로 몸에 힘이 빠지는데, 갑자기 생각나는 얼굴은. 왜 엄마도 아빠도 아닌 그 도깨비 남자인지. 멍한 머릿속에 저를 바라보던 얼굴이 그려졌다. 도깨비 씨. 고통과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그를 부르자,
"남이 준 거 받지 말랬지."
하는 목소리와 함께 단단한 품이 느껴졌다. 원빈은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눈앞에 몸을 붙들었다. 저를 위협하던 악한 것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성찬은 바닥에 떨어진 원빈의 가방을 챙겨 원빈을 부축했다. 당분간 이곳은 위험하다. 성찬의 말에 원빈이 다 갈라진 목으로 물었다. 그럼 어디로 가요?
도깨비는 말 대신 눈앞에 머물 곳을 대령했다. 눈 깜짝할 사이 바뀐 시야에 원빈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성찬을 쳐다보았다. 성찬은 그런 원빈에게 친절히 문을 열어주었다. 도깨비 집에 처음으로 인간이 입성한 순간이었다.
와아. 하는 행동만 봐선 조선시대 집에 살 거 같았는데. 집은 제법 현대적이었다. 물론 가전제품의 팔 할은 손도 안 댄 새 것 같고, 곳곳에 골동품들이 있었지만 조화가 좋았다. 구경에 정신 팔린 원빈을 보며 성찬이 오른팔을 털었다. 삿된 것과 닿은 부위에 통증이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힘. 제가 없는 사이 아이를 노리는 악귀들. 성찬은 이제 이 모든 것이 내기를 허락한 자신의 죄처럼 느껴졌다.
네 봉인에 쓰였던 피와 함께 있는데, 힘이 돌아올 줄 알았느냐.
마고신의 음성이 생생했다. 도깨비는 저릿거리는 손을 꽉 쥐었다. 저를 누른 부적은 그 아이의 피로 쓰였다. 업은 곧 생이라, 몇 번을 반복해도 혼에 새겨진 대가는 따라다닐 것이다. 도깨비가 머뭇거리자 마고신은 그를 응시했다. 계속 함께 있으면요. 미련 섞인 목소리로 도깨비가 물었다.
원래의 너로 돌아가겠지. 그저 염원뿐인 물건으로. 그럼 그 아이의 업은 추가된다. 기어코 생을 건너 신을 소멸시킨 것이니.
함께 있으면 소멸이라. 성찬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제가 저 아이를 찾지 못하게 하셨어야죠. 마고신은 고개를 돌렸다. 다 네가 자초한 것이다. 상념에 빠진 도깨비에게 이층을 오르는 원빈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 말을 듣고도 집터에 원빈을 들인 제가 미친 것 같다가도,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목숨을 위협당하는 꼴을 보니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집구경을 끝낸 원빈은 배가 고프다며 라면을 끓이겠다고 했다. 차사가 넣어놓은 것들을 꺼내어 한참을 부스럭거리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를 들고 식탁에 앉는다. 도깨비 씨도 먹어요. 인간이 발명한 것 중 가장 완벽한 음식이니까. 난리 통을 겪고도 씩씩하게 먹는 원빈이 기특해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시퍼렇다 못해 까매진 목이 눈에 들어온다.
"목 들어봐."
삿된 것이 남긴 자국에 성찬의 손이 닿는다. 악귀들이 모인 사념체는 기운이 아주 지독해서, 힘을 잃은 도깨비의 얼굴이 조금은 구겨졌다. 하얗고 커다란 손이 지나가자 원빈의 목이 말끔해졌다. 아파?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감사합니다. 인간은 뒤늦게 인사를 전했다. 조금만 지체했어도 목이 부러져 죽었거나 혼이 잡아먹혔겠지. 원빈이 젓가락을 내려놨다.
"아까 그건 뭐예요? 귀신이에요? 또 올 수도 있어요?"
"비슷하다. 다음엔 더 큰 게 올 수도 있지."
"……다음엔 죽을 수도 있겠네요."
신에게 미움을 받아서 잃은 게 재산만이 아니었나. 팔자려니 무시하고 살았는데 이런 식이면 평범하게 살 수도 없다. 원빈은 성찬이 매만졌던 목을 다시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정체 모를 것이 내뱉던 말이 생각났다. 자길 죽인 죄인을 살리는 어리석은 도깨비. 남자는 내 전생의 부모를 안다고 했다. 그럼 혹시. 미움을 내린 신이, 내 전생의 부모가 죄를 지은 신이 이 남자일까.
"그럴 일 없다."
"뭐가요."
"너 죽을 일 없다고. 내가 허락한 적 없으니."
그럼 이 신은 왜 내게 잘해주는 거지.
"잠은 이곳에서 자."
"도깨비 씨는 어디서 자요?"
"나도 이곳."
"가, 같이 자요?"
"침상이 하나밖에 없는데."
클리셰면서 다소 적극적인 전개에 원빈이 눈을 도록 굴렸다. 성찬은 그런 원빈을 보더니 작게 웃었다. 너 자거라. 그제야 저를 놀리는 말임을 안 원빈이 성찬을 째려본다. 고단했을 테니 빨리 자. 도깨비의 침대는 컸다. 사람 셋은 누울 수 있는 크기였다. 그래서였다. 겁 많은 인간이 도깨비의 옷자락을 붙잡은 것은.
"저 잘 때까지만 옆에 있으시면 안 돼요?"
"……"
"아니, 방이랑 침대랑 다 커가지고…아까 그게 자꾸 생각나요."
무섭다는 말이었다. 씩씩하게 있지만 눈만 감으면 제 목을 조르던 귀신이 찾아왔다. 성찬은 말없이 원빈의 옆에 모로 누웠다. 있어 줄 테니 자란 소리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도깨비. 남자에게선 어딘가 그윽한 풀 향이 났다.
"도깨비 씨도 사람이었어요? 원래 뭐였는지 물어봐도 돼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말해주기 싫어서 그런 거죠. 드라마는 막 다 기억하던데."
원빈은 몸을 돌려 성찬과 마주 봤다. 이불을 덮어주느라 들춰진 남자의 옆구리엔 큰 흉터가 있었다. 이 남자도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한 것일까. 불멸의 벌을 받고 있다가 나의 전생을 만난 걸까.
"눈을 뜨니 이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마 사람이었겠지. 상제의 배려인지 저주인지 기억나는 것이 없어. 바라는 게 있었을 텐데."
조용히 퍼지는 말에 원빈이 이불을 꼭 잡았다. 금방이라도 손을 뻗어 저 쓸쓸한 얼굴을 쓰다듬을 것 같았다. 도깨비 씨 뭐 좋아해요? 특별히 좋아하는 거 떠올리다 보면 옛날이 기억날 수도 있잖아요. 인간의 말에 도깨비가 생각에 잠긴다.
"잘 모르겠는데."
"그동안 괜히 신경 쓰이고 여러 번 들여다보고 그런 거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건 너밖에 없다."
"…저 만나기 전에요."
뭐래 진짜. 저번부터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 마음을 뒤흔든다. 무서움은커녕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에 손 안에 이불만 괴롭혔다. 고심하던 도깨비가 입을 열었다.
"거실에 있는 꽃."
"붉은색 그거요? 사연 있는 꽃이었어요?"
"계속 모으게 되는 것이, 기억나지 않는 순간에 함께 했던 것 같다."
보통 꽃구경은 애인이랑 가는데. 혹시 그 사람을 못 잊고 도깨비가 된 건가. 제가 떠올려 보라 했지만 어째 점점 기분이 안 좋아진다. 예쁜 꽃덤불 사이에 있는 남자와 이름 모를 그의 애인을 생각하니, 남자가 이전의 기억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저 밝은 눈이 오롯이 한 명만 향하고, 그것이 자신이 아니라면 어쩐지 슬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저 아침에 깨워주세요."
"바라는 게 많구나."
"데려온 건 도깨비 씨고요."
"다시 갈래?"
"안녕히 주무세요."
꼭 감은 눈에 웃음이 터지다가도 마고신의 말을 생각하니 착잡해진다. 봉인되었을 때 몸부림치던 것이 무심하게 이대로 힘을 잃고 사라진대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 이 인간 때문이겠지. 저와 아비 때문에 얽힌 가여운 혼. 다만 문제는 이 아이의 업이 덧붙는다는 것에 있다. 묶인 연을 끊으면 평범하게 살 수 있을까. 고른 숨을 내뱉는 원빈을, 성찬은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간밤의 일은 인간 세상 곳곳에 퍼져 어둡고 습한 존재들도 떠들어댔다. 고작 악귀들을 상대하는 데도 힘에 부친 도깨비의 터에 그 원흉인 혼이 들어갔다는 것. 이번엔 소멸을 피할 수 없을 거라며 삿된 것들이 모여 키득거렸다. 그중 하나가 그랬다. 이 기회에 도깨비를 잡아먹자고. 인간과 다를 바 없을 때 먹어 치워 신이 되자고. 어리석은 것들이 내지르는 동조의 소리에 그것은 빨간 손톱으로 길게 찢어진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점점 커지는 삿된 것들의 기운에 상제가 근심스러운 표정을 했다. 명운을 결정하는 바둑판에 돌 하나 올리면 그만인데. 두 아이 다 안쓰러운 이들이라 한숨부터 나왔다. 언제부터 감상적이셨다고, 늙으셨습니까? 건방진 월하의 말에 상제가 결국 하얀 돌을 놓았다.
"기억나게 하거라."
"누구의 기억을요."
"염원을 품게 만든 자의 것이겠지. 품게 만든 자가 놔주어야 사라질 게 아니냐."
"늙으신 거 맞네요."
"뭐가 이놈아."
"옛날이었으면 직접 지우셨을 텐데 살리는 쪽으로 가시지 않습니까."
"요새 그러면 욕 먹는다."
그간 먹은 너무하다는 욕으로 서천 꽃밭 다섯 번은 갈아엎는다. 상제의 말에 월하가 일어났다. 감상적이신 명 수행하러 갑니다.
성찬은 하루가 다르게 상태가 안 좋아졌다. 밤새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어 원빈이 자다 깬 적도 있었다. 우왕좌왕하며 제 이불을 덮어주고 기도를 했는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도깨비를 검색하여 읽은 책에는 아픈 도깨비 치료법이 나오질 않았다. 어떡하지.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실망한 얼굴로 나와 발걸음을 돌리는데 골목에 촌스러운 간판을 단 노점상이 생겼다. 원래 이런 게 있었나. 정혼점. 어딘가 유치하고 직관적인 이름. 연말이 가까워져 신년운세 광고가 많든데 비슷한 곳인 거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지나쳤을 곳. 걱정이 많아지면 안 하던 짓을 하게 되기 마련이라. 원빈은 낡은 노점상 안으로 들어갔다.
특별한 손이 오셨군. 인자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원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래, 누구와의 연이 궁금해 오셨나? 주인의 말에 원빈은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혹시 인간 아닌 존재들도 믿으시나요? 길거리 도믿남이 된 기분이라 겸연쩍었지만 할 수 없었다.
"믿지. 그 존재들과의 연이 닿은 사람도 있으니."
"…도깨비도 아세요?"
"봉인되었다 풀려난 그를 모르는 이도 있나. 그 자는 연이 닿은 이와 만나서 아픈 것일세. 그를 가둔 게 그 반쪽이라."
"그, 그럼 어떻게 해야…."
"이미 답을 아는 듯한데."
제가 들었던 모든 소리가 퍼즐처럼 맞춰졌다. 전생에 그에게 죄를 지은 저의 가족. 그 대가로 망해버린 집. 도깨비와 닿은 자신. 그리고 나를 다시 만나 아픈 그 남자. 그럼에도 자신을 지켜주려 옆에 있는 바보 같은 도깨비.
"만약, 계속 같이 있으면 어떻게 돼요?"
"본래의 물건으로 돌아가 버리겠지."
"......"
"복채는 없네. 다만 많이 원망하지 마시게."
뜻 모를 소리를 내뱉은 주인이 모습을 감추자 이내 원빈이 있던 공간도 사라졌다. 제게 알려주려고 온 것이었다. 도깨비 곁을 떠나라고.
"요새 그 인간과 잘 지내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집에도 들이시더니."
"왜, 또 뭔 말을 하려고."
"기어코 복수를 하실 작정이냐구요. 제가 명부 받고 얼마나 놀란 줄 아십니까?"
성찬의 걸음이 멈췄다. 마고신에게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욕을 먹으며 약을 받아오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차사가 나타났다. 또 징징거릴 게 뻔해 그저 무시할 참이었는데 명부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인간이요. 박원빈. 오늘 거둬야 할 명단에 있습니다."
"어딘데. 죽는 장소."
"지금도 이미 천기누설입니다. 설마 생사에 관여하실 건 아니죠?"
"그 아이의 생사는 내가 정해. 내게 허락된 아이이니."
다급하게 사라지는 성찬에 차사가 따라붙었다. 아니 상태도 안 좋으시면서 뭘 하겠다고. 제 입이 방정이었다.
아이의 기척을 찾아 도착한 곳은 원빈의 이전 집이었다. 골목 어귀부터 어두운 기운이 가득했다. 원빈아. 정신없이 부르며 들어가니 담벽 아래 주저앉은 형체가 보인다. 성찬은 귀를 틀어막은 원빈을 끌어 안았다. 고막을 찢을 듯이 웃는 소리가 연신 이름을 외치며 원빈을 괴롭혔다.
왔다왔다도깨비가왔다박씨혼빼다먹고도깨비도잡아먹자멍청한반쪽자리를죽여우리도신이되어보자살을발라몽땅삼켜보자
"다시 올 때까지 눈 뜨지 마. 어떤 소리가 나도 따르면 안 돼."
잡을 새도 없이 성찬의 온기가 사라졌다. 원빈은 귀를 더욱 틀어막았다. 삿된 것들의 비명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힘을잃었다더니인간과다를바가없구나깔깔깔깔깔오래묵은도깨비일수록영혼맛이좋다는데오늘에야맛보겠구나. 바람 소리, 무언가 깨지는 소리,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소리들이 계속해서 들렸다.
원빈아원빈아
아니야
네이름지어준이도못알아보는원빈아
아니라고
네가죽여놓고도리어걱정하는죄인아
시끄러워
너때문에결국하나남은도깨비가죽는구나
안 죽어
네아비처럼너도저주받아평생을괴롭겠구나
"안 죽는다고!!!"
사위가 조용해졌다. 원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집이 고요했다. 끼익 소리를 내며 달랑이는 대문만이 원빈을 반겼다. 저를 괴롭히던 소리들은 사라졌다. 숨이 막힐 때까지 누르던 기운들도 없어졌다. 그런데. 도깨비 씨는 어딜 간 거지.
원빈은 풀린 다리를 질질 끌며 담벽을 벗어났다. 나뒹구는 나뭇가지와 마른 낙엽들 사이로 이상한 물건이 보였다. 아주 낡고 바랜 비단신.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신발에는 고운 무늬도 수놓아져 있었다. 익숙했다. 처음 남자를 봤을 때, 입고 있던 옷이랑 비슷했다. 본래의 물건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가게 주인의 경고가 떠올랐다. 원빈은 떨리는 손으로 그 비단신을 집어 들었다.
선물을 이리 주고 싶진 않았는데
낯익은 음성이 들렸다. 본 주인도 잊은 아주 오래된 기억 속의 목소리였다.
起
"성골이 나타났다며? 그것도 박 씨에서."
"돌아가신 월성공주의 소생이라는군. 폐하께서 친히 궁을 하사하셨다는데."
계림(鷄林)에 성골 출신이 사라진 것도 수십 년. 첫 진골 출신 김 씨가 왕위를 차지한 이래로 그 자리는 그의 후손들이 이었으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늘이 내린 성골이 사라짐에 우려를 표하는 귀족들과 새롭게 집권한 진골 왕조에 충성을 맹세한 귀족들로 조정이 나뉜 이때, 죽은 줄 알았던 마지막 성골 출신 왕자가 나타난 것이다.
몸이 약했던 공주는 왕자를 낳고 일찍 죽었고, 혹여 아이의 목숨이 위험할까 유모가 숨어서 키웠다고 했다. 아이의 아비 역시 성골인 죽은 석륜태자의 아들이었으니 출신에 더 이상 말을 얹는 것은 불가했다. 결국 모든 왕족과 귀족이 보는 앞에서 왕자는 신분을 공인받았고, 단숨에 태자보다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이름이 뭐라고?"
"원빈이라더군. 으뜸 자를 넣었으면서 숨기다니. 김씨 왕조에 대한 도전이 아닌가."
"그 무슨 소린가. 애초에 주인이 돌아온 것인데."
"태자마마는 그럼 어찌 되는 거지."
입을 가진 모두가 태자를 입에 올렸다. 현 왕의 장남이자 가장 욕심이 많은 왕족. 민심을 얻기 위해 가야국의 후손과 손을 잡아 화랑도 전체를 제 편으로 만든 사람.
"그대가 그 왕자를 전담한다 들었네. 교육과 호위를 맡는다지."
"…예.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서라벌 생활이 어색할 테니 그대가 잘 보좌하도록 해. 내 약조는 변함이 없다는 것만 기억하면 되네."
성찬은 태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도 세력도 통하지 않는, 가야국 출신 화랑에게 주어진 약조. 왕위에 오르면 가야국의 자치권을 보장해주겠다는 말은 너무나 달콤한 것이라. 성찬은 그가 태자위를 공고히 하는데 손을 들어주었다.
태자를 진심으로 섬기는 건 아니었다. 망국이 되었으나 제 나라를 위한 전략적 제휴였달까. 태자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인간이었기에 성찬과는 결이 맞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왕위를 받기만을 버티고 있었는데 새로운 후계의 등장이라니. 게다가 왕이 직접 그를 보필하라 명까지 내렸다. 이는 왕의 마음이 그 성골 왕자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뜻도 되었다.
분명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입궁했건만, 어느새 성찬은 왕자를 신기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나 남은 성골 출신이라 으스댈 줄 알았는데, 궁인들의 일을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하사받은 비단 도포는 어디에 벗어놨는지 저고리와 바지 차림으로 궁 안을 잘도 돌아다닌다. 한참 잠자코 보던 성찬은 바닥에 떨어진 왕자의 혜(鞋)를 주워 인기척을 냈다. 담장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던 왕자가 깜짝 놀라 뛰어내리려 하자 성찬이 손을 들었다.
"거기 계십시오."
성찬은 낯선 이의 등장에 굳은 왕자에게 다가갔다. 생각보다 앳되었고, 눈이 빛났으며 순한 얼굴이었다. 경계심과 호기심이 반씩 섞인 눈꼬리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발목을 감싸 쥐었다. 풀과 나뭇잎이 묻은 걸 털자 부끄러운지 발을 내리려 하기에. 성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힘을 주어 하던 것을 마저 했다.
"제, 제가 신겠습니다."
왕자의 목소리는 떨렸으나 힘이 있었다. 억지로 꾸며내는 것이 아닌 맑은 목소리. 성찬은 왕자의 발 위로 아까 주운 혜(鞋)를 신겨주었다. 왕실을 상징하는 화려한 금실 자수와 봉황무늬의 신발. 어쩐지 이 왕자에게는 정갈하고 깨끗한 무늬가 더 잘 어울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별것 아닌 것으로 흠집 내려 하는 사람도. 그러니 불편하시더라도 행색은 갖추시는 게 좋습니다."
"…예, 스승님."
스승이라. 호칭을 정정할까 하다가 왕자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는 걸 상상하곤 그대로 두었다. 저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면 왠지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왕자를 담장 아래로 내려준 성찬은 허리를 굽혀 정식 인사를 했다. 인사 올립니다. 호성비도(護星飛徒) 화랑 정성찬. 계림의 왕자마마를 뵙습니다.
"제자 박원빈. 스승님을 뵙습니다."
담백한 인사와 함께 왕자의 고개가 숙여진다. 자신을 낮추는 데 거리낌이 없는 왕족. 서라벌에 희망과 절망을 모두 가져다 줄 이. 하늘이 낸 왕위 계승자이나 가장 그 자리에서 먼 사내. 그리고 자신의 첫 제자.
휘어지는 눈매에 시선을 떼지 못하며 성찬은 저도 모르게 턱에 힘을 주었다. 태자의 당부 따윈 까맣게 잊혔으므로.
"스승님. 팔 아픕니다."
"아직 열 번 남았습니다."
"저 손에 힘이 안 들어갑니다."
"팔관회 때 대표로 활을 잡지 않으십니까. 저는 제자가 실패하는 꼴 못 봅니다."
성찬은 호랑이 스승님이었다. 원빈의 실력이 쓸만하다는 걸 안 이후로는 더욱 더 무예 훈련에 매진했다. 낭도들과 함께 산과 들을 쏘다녔던 것처럼 원빈을 데리고 곳곳을 다녔고, 서라벌 내의 유명한 명승지도 함께 다녔다. 불쌍한 백성과 동물을 지나치지 못하는 원빈을 보며 성찬은 군주의 모습에 대해 생각했다. 하늘이 낸 왕이 태어날 때는 성스러운 별이 뜬다는데. 그게 꼭 원빈 같았다.
"스승님은 가야국에서 오셨다 들었습니다."
활을 닦던 성찬의 손이 멎었다. 가야국. 자랑스러웠으나 이곳에선 지워야 하는 제 뿌리. 처음 제게 쏟아지던 배척의 눈길들이 떠올랐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밤새 훈련에 힘쓰던 저도. 그럴 이가 아님을 알면서도, 혹여 원빈이 저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을까 하여.
"가야국 사람들은 다 스승님처럼 멋집니까?"
"…훈련하기 싫어 별소리를 다 하십니다."
"진심입니다. 가야국 중앙에 있는 호수가 그리 어여쁘다는데 한번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으면, 보면 되지요."
"정말요??"
"팔관회에서 잘 쏘시면, 데려가 드리겠습니다."
어리석은 스승의 걱정을 깨부수는 명랑한 제자. 물론 잘 쏘지 못한데도 성찬은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에게 제 뿌리는 숨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으니. 가장 소중한 공간에서 원빈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시간은 흘러 팔관회 당일이 되었다. 원빈은 왕족으로서 불을 꺼뜨리지 않고 활을 쏴 거대한 연꽃 장식을 맞혀야 했다. 모두의 앞에서 미숙한 모습을 보이기에 딱이라 태자가 의도한 것이었다. 성찬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키만 한 활을 쥔 원빈을 쳐다보았다. 모든 화랑도와 귀족이 지켜보는 자리. 꽤나 오래 잡고 있던 시위가 당겨지고 연꽃 정중앙에 불화살이 꽂힌다. 화르륵 소리를 내며 꽃이 타기 시작하자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했다. 성공적인 팔관회 의식이었다.
바로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원빈에, 성찬은 연회 뒤편에 마련된 처소로 향했다. 숙이고 있는 까만 머리통을 발견하여 다가가는데 어딘가 이상하다. 끙끙대는 소리에 확 몸을 돌리면 피범벅이 된 손이 보여 성찬은 말을 잃었다.
"…활을 잡는 게 서툴렀던 모양입니다."
성찬의 표정에 원빈이 어색하게 말했다. 수백번을 연습했는데 서툴렀을 리가. 성찬은 곧장 나가 깨끗한 물과 천을 가져왔다. 숨기려는 팔을 꽉 잡고 살살 상처를 씻었다. 활대나 시위에 날카로운 뭔가를 바른 게 분명했다. 소인배 같은 짓을 했군. 성찬은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연고를 꺼내어 원빈의 손에 발랐다. 익숙하게 천을 묶어 고정한 뒤 멀쩡한 손에 연고를 쥐여주었다. 자기 전에도 꼭 바르십시오. 손을 꼼지락거리던 원빈은 성찬을 올려다보았다. 언짢음과 걱정이 섞인 얼굴. 웃으며 하는 칭찬을 받고 싶었는데.
"스승님. 아까 저 보셨습니까? 성공한 거?"
"예. 기특합니다."
"그럼 이전에 말한 거 들어주시는 거죠?"
"가야국 호수를 보고 싶다는 것 말입니까?"
"안 잊으셨네요."
저는 언제든 좋습니다. 내일 당장 가도 좋고, 스승님 바쁘시면 나중에 가도 좋아요. 아프다는 내색도 없이 분위기를 풀려는 행동에 성찬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감히 성골의 몸을 상처 입게 한 자를 물색해 정치적으로 이용해도 모두가 그러려니 할 것인데. 이 아이는 고작 스승의 기분이 우선이었다. 성찬은 저를 담은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곳은 동백이 필 즈음에 가야 어여쁩니다."
"스승님도 가서 꽃구경을 하셨습니까?"
"예. 가야인들은 다 합니다."
"…누구와 함께 가셨습니까?"
누구를 상상하였길래 아랫입술이 또 튀어나왔을까. 성찬이 입술을 톡 건들며 말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갔습니다. 원빈이 헛기침을 한다. 역시 효, 효심이 남다르십니다. 주먹은 왜 불끈 쥐는 것인지. 성찬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까지 훈련을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팔관회 이후로 원빈의 이름은 더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아랫것들 사이에서의 인망이야 원래 좋았으니, 실력으로 귀족들을 감화한 탓이었다. 화랑도 내에 가장 실력 있는 조직이 호성비도인데, 그 수장인 성찬을 붙여준 거면 폐하께서도 결단을 내리신 게 아니냐는 소문이 서라벌 내에 파다했다.
겨울 가뭄이 심해 백성들의 봄 농사 걱정이 커지자 왕은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로 했다. 함께 동행한 왕족은 소문에 힘을 더해주듯 원빈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은 제사가 진행되자 점점 흐려졌다.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절을 하였을까. 오후 늦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왕과 원빈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간 태자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소리였다.
원빈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오늘이 바로 성찬과 가야국 땅에 가는 날이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걸치고 궁인들에게 저 오늘 어떠냐고 다섯 번은 물어댔다. 답이 정해져 있는 이 귀여운 행위는 성찬이 도착하고 나서야 끝났다.
”이리 가면 춥습니다."
”저 두 겹이나 입었습니다!"
이미 추워 볼이 발그레해서는 무얼 입었다고 하는지. 때 이른 추위로 서라벌은 온통 눈밭이었다. 성찬은 챙겨온 볼끼를 꺼내어 원빈의 얼굴에 둘러주었다. 북쪽에서 쓰는 방한구라 합니다. 국경 지역에서 보초를 서는 벗에게 받아왔는데 가져오길 잘했다며 덧붙였다. 볼과 턱을 감싸는 부드러운 촉감에 원빈의 광대가 볼록 올라갔다.
”스승님은 괜찮으십니까?
"저는 추위를 타지 않아 괜찮습니다.”
추운 공기를 가르고 말을 타 한 시진 정도를 달리니, 거대한 호수 옆으로 붉은색의 꽃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내대장부가 무슨 꽃이냐며 외치는 장군들도 이 광경 앞에는 입을 벌렸을 게 틀림없었다. 파란 겨울 하늘을 그대로 비추는 물과 울긋불긋한 꽃나무들. 하얀 눈 사이로 보이는 빨간 꽃잎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원빈은 성찬을 잡아끌어 눈밭 위에 드러누웠다. 값비싼 비단옷이 축축해진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눈을 감으니 숨을 내쉴 때마다 꽃내음이 가득했다. 꼭 이곳이 도솔천(兜率天) 같습니다. 감탄 어린 원빈의 말에 성찬도 눈을 감았다. 시끄럽던 마음이 고요해지기도 잠시 귓가가 간질거렸다.
"무엇을 하십니까."
"역시 잘 어울리십니다."
빨간 동백 꽃잎이 성찬의 귓가에 꽂혔다. 누구보다 용맹하지만 섬세하게 생긴 스승이라 붉은색 꽃잎이 아주 잘 어울렸다. 키득거리는 제자가 괘씸한지 성찬도 바로 옆에 있는 꽃잎을 떼어 왔다. 아, 하지 마십시오. 벌입니다. 검은색 머리 아래에 붉은 동백이 피어난다. 분명 원빈을 놀리고자 한 것인데 왜 꽃잎과 비슷한 색이 되는 건 제 얼굴인지. 주위를 둘러싼 풍경 중 눈앞에 있는 광경이 가장 아름다웠다.
"스승님."
"예."
"제가 어느 곳에 있어도. 스승님께서는 제 옆에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담백하지만 가장 진심인 말이었다. 지금처럼 불완전한 왕자여도, 성골로서 다시 왕위에 올라도, 서라벌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이렇게 성찬과 나란히 있고 싶은 마음. 성찬이 태자의 세력 아래에 있음을 알고 있다. 왕명이 아니었다면 제게 올 일이 없었을 것도. 그렇지만 그가 알려주고 보여준 세상에서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제자를 버리는 스승은 없습니다."
그리 말하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폐하의 행궁에 그대가 동행해야 할 듯싶네."
"시위대가 있는데, 어찌 제가."
"그대가 화랑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나지 않나. 출신만 아니었으면 국선이었음을 모르는 이도 있을까."
네 나라를 잊지 말라는 경고에 성찬이 고개를 들었다. 입지가 좁아진 만큼 태자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원빈을 보필하는 걸 알면서도 행궁 명단에 천거했을 게 뻔했다. 기우제 이후로 시름시름 앓던 왕은 건강 회복을 위해 온천행을 결정했다. 수많은 궁인들과 군사들이 따라갈 것인데 저까지 붙이다니. 어떻게든 원빈을 고립시키고 싶은 것이 보여 성찬은 태자에게 한심함을 느꼈다.
행궁을 따를 짐을 챙기던 성찬은 보자기에 싸인 태사혜(太史鞋)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흰색과 검은색이 반반씩 입혀 있는 신발 위에는 당에서 유행한다는 태사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단아하고 기품이 있는 신발이라 화혜장인이 내놓자마자 바로 사온 게 엊그제였다. 화려한 비단신을 거추장스러워하는 아이니, 편하고 좋은 신발을 신겨주고 싶었다.
돌아오는 길에 건네면 되겠다 생각을 마친 성찬은 보자기째로 품속에 넣었다. 호성비도 낭도들 몇에게는 저 대신 원빈의 궁 호위를 맡겨 두었다. 선물을 받아들 원빈의 얼굴을 상상하니 지루한 행궁길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라벌을 떠나온 밤. 성찬은 행궁 바깥을 돌며 호위를 점검했다. 성찬님을 뵙습니다. 문 앞에 서 있는 이들만 아니었다면 끝내고 제 처소로 돌아갔을 것이다. 성찬은 왕도에 있어야 할 제 낭도들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찌 된 것이냐는 질문에 이리로 오라는 명을 하지 않았냐는 되물음이 돌아왔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 말은 원빈의 궁을 지키는 이가 아무도 없단 뜻이었다.
성찬은 곧바로 말을 잡아 부지런히 달렸다. 밤새워 꼬박 달려야 아침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위에 저를 천거한 태자, 바뀌어 내려간 명. 설마 같은 왕족을 해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제가 순진했다. 잘 다녀오라고 했던 원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성찬은 고삐를 연신 내리치며 박차를 가했다.
지친 말에서 뛰어내린 성찬은 이미 열려 있는 궁 안으로 뛰어들었다. 정돈되어 있던 궁은 온통 아수라장이었고 바닥엔 핏자국이 가득했다. 원빈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저 멀리 담장 아래 기댄 인영이 보였다. 피로 물 들은 어깨를 부여잡은 원빈이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제자의 실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다른 호위들은 오지 않았습니까."
"오지 않을 겁니다. 그들 위에 누가 있는지 아시잖아요."
"…마마."
"근데 스승님이 오시면 어찌합니까."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어느 곳에 있어도 같이 있겠다고.
성찬은 제 옷 밑자락을 뜯어내어 원빈의 어깨를 감싸 묶었다. 그리곤 그를 안아 담장 위에 앉혔다. 피와 먼지로 더러워진 발을 털고 그 위에 행궁 내내 품었던 신을 신겨주었다. 다행히도, 아주 꼭 맞았다.
"선물을 이리 주고 싶진 않았는데."
"…스승님."
"이 담장 뒤로 뒷산을 넘어 꼬박 하루를 걸으면 우리가 갔던 가야국 땅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상처를 돌본 뒤에 국경을 넘으십시오. 바다로 가 다른 땅으로 가도 좋습니다."
"…싫습니다. 같이 가주십시오."
"함께 가면 가야국 땅으로 바로 추격대가 올 겁니다. 그러니 먼저 가 계십시오. 이곳을 정리한 후에, 태자가 따라붙지 못하게 한 후에 가겠습니다."
스승님. 칼날이 살을 벨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원빈의 뺨을 적셨다. 꼼짝없이 홀로 죽겠구나 싶었을 때 나타난 제 스승. 원빈은 우악스럽게 소매로 얼굴을 닦은 뒤 그의 선물 한 짝을 벗었다.
"다시 만났을 때 주십시오."
"…한 발로 먼 길을 어찌 가려고."
"꼭 직접 오셔서 주셔야 합니다."
똑부러지고, 사랑스러운 우리 제자. 태사혜 한 짝을 도로 받은 성찬이 담장 너머로 그의 다리를 올렸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달려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붙잡히지 않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원빈이 어두운 들판을 향해 사라졌다. 성찬은 몸을 돌려 원빈의 궁 문 앞에 섰다. 품 안에는 다른 한 짝을 그리워하는 신이 자리했다.
만나서 달라는 말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감히 성골의 처소를 침입했다는 것은 끝까지 가겠다는 것이기에. 태자는 원빈을 잡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성찬은 칼을 빼 들었다. 수십 명의 군사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단 한 명도 절대 제 뒤로 보낼 수 없었다.
마지막 적의 목을 벤 성찬이 쓰러졌다. 바닥에 나뒹구는 목이 태자의 최측근 장수였으니 이제 더 이상 오지 못할 것이다. 옆구리에 박힌 칼과 등을 찌른 창이 그제야 느껴지기 시작했다. 커헉. 칼에 묻은 피만큼이나 붉은 선혈이 성찬의 입에서 쏟아졌다. 어지러운 시야로 떨어진 신발이 보였다. 스승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더러워진 손이 신을 향해 뻗어진다. 제 옆에 계셔주십시오. 빛나는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꼭 오셔야 합니다.
선물을 주러 가야 하는데.
옆에 있겠다 약조하였는데.
숨이 옅어진다. 성찬의 피와 염원이 전해지지 못한 선물에 깃들었다.
다시 한번만 그를 보게 해달라고.
結
"아주 가지가지 하십니다. 마고신 아니었으면 진짜 소멸할 뻔하셨습니다."
남은 힘을 다 털어 넣은 대가가 컸다. 그렇지만 다시는 주제도 모르고 원빈을 노릴 것들이 없으니 되었다. 소멸까지 각오했기에 미리 조치를 취한 것이다. 성찬은 약을 받아오며 마고신께 부탁을 했다. 소멸 즉시 아이와 저의 모든 연을 끊어달라고. 더 이상 전생의 업으로 원빈이 고통받지 않도록.
"그 아이는 어디 있느냐."
"무사하죠. 도깨비님 덕에."
어휴. 양반은 못 되네. 집터 앞에 찾아온 원빈에 성찬이 몸을 일으켰다. 아이의 표정이 밝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햄버거 먹으러 가요. 제가 쏠게요. 처음 만난 날 그리했던 것처럼 성찬은 원빈을 따라갔다.
"오오. 이젠 주문 잘하는데."
헤매지도 않고 키오스크를 누른 성찬에 원빈이 박수를 쳤다. 놀리지 말거라. 늦은 시간이라 조용한 가게에서 마주 보고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으니 다시 일상이 돌아온 것 같았다. 역시 이 음식이 가장 맛있다는 도깨비의 햄버거 찬양도 다시 들으니 웃음이 나왔다.
"이거예요. 동백."
"이게 뭔데?"
"도깨비 씨 집에 있는 꽃이요. 겨울에 피는 꽃이래요. 동백나무."
"강인한 꽃이구나."
원빈이 보여준 화면 속에는 동백나무와 그 축제에 대한 사진이 가득했다. 설명을 보느라, 성찬은 그가 말이 없어진 걸 알지 못했다. 인간은 가만히 그를 눈에 담았다. 기억 속의 그와 남자가 자꾸만 겹쳐 보였다. 붉은 꽃이 만발한 풍경을 보여준 사내. 제게 신발을 신겨준 사내. 누구보다 강인했던 사내. 그리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던 그 사내.
"호수 옆에 만발한 꽃이라. 다음엔 이것을 같이 보면 되겠군."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도깨비의 말에도 원빈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미 선물을 건넸을 때부터 그는 마지막을 생각했구나. 나의 당부가 그에게 한을 심었구나. 그 한이 부른 만남을 인간의 죄가 망쳤고, 결국 이렇게 돌아와 만난 것이구나.
지난밤 천 년이 훌쩍 지나 주인에게 닿은 신발을 안고, 원빈은 한참을 울었다. 그의 집에 놓인 붉은 꽃이 생각났다. 기억이 없음에도 저를 그리워 한 그가 가여웠다. 첫 생에도, 다음 생에도, 이번 생에도. 어느 곳에서나 자신에게 와준 사내 생각에 마음이 미어졌다. 차사와 마고신이 나타나 제 도깨비를 데려갈 때까지 인간은 그렇게 슬픔을 토해냈다.
나는 그에게 닿아서는 안 되는 연이다. 처음엔 죽음을, 두 번째엔 봉인을, 그리고 이젠 소멸을 가져다주는 인연. 애초에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되는 운명인 것을.
이번에는 그를 잃을 수 없었다.
"나랑 내기해요. 도깨비 씨."
달도 집에 갈 정도로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좋아하는 것도 하고, 새로운 것도 한 그런 날. 괜찮냐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기에 그저 원빈이 하자는 대로 따라다닌 날.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성찬은 그 밤의 산길이 생각났다.
도깨비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았다. 너는 내가 네 옆에 있으면 아니 된다는 것을 다 안 것이로구나. 그래서 미안했고, 그렇지만 서운했으며, 그럼에도 내기를 받아들였다.
아무도 힘을 주지 않는 이상한 씨름이 시작되었다. 그저 서로의 옷을 쥐고 바라만 보는 내기. 다시 만나지 못할 테니 눈에 담기에 바빴다. 결과는 천 년 전과 똑같았다. 본디 핏줄에 꿰인 것은 운명이 되기 마련이라. 똑같이 난 무승부에, 어스름히 동이 터오는 하늘을 보던 성찬이 아이에게 말했다.
둘 다 이긴 것으로 하자. 네 소원을 들어줄게.
"떠나요. 내 옆에 있지 말고."
가서 인간 따위 잊고 건강히 오래오래 살란 말은 미처 못했다. 상냥한 말을 덧붙이는 순간 거짓임을 눈치챌까 봐서. 혹여 마음 약한 도깨비가 저를 보러 오면 안 되니까.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슬픔이 티 나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성찬은 말없이 인간을 바라보았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아이의 입에서 들으니 서글펐다. 걱정과 사랑을 담은 눈으로 이별을 고하는 원빈이 애달팠다. 작은 머리로 스스로를 탓했을까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그랬기에, 실수를 두 번 할 수는 없었다.
"…그럼 난 네게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가마."
도깨비는 알았다.
가진 것 없는 인간 아이가 유일하게 가진 하나. 겨우 가져 제일 소중하게 품은 그 하나. 그게 없어져야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여리디 여린 마음을 꾹 밟으며 소원을 빈 것일 테니.
꼭꼭 감춘 마음으로 인해 별처럼 빛나는 눈은, 애써 모른 척했다.
그렇게 두 번째 내기가 성사되었다.
서울에 도깨비 터가 사라졌다. 유일하게 허락된 연을 포기한 신의 선택이었다. 차사는 서운함을 표현했지만, 그가 소멸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니 새 정착지를 응원했다. 어디로 가냐는 물음에 그는 차사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눈 쌓인 동백나무가 가득한 호숫가가 보이는 곳이었다. 어느 인간이 알려준, 왠지 모르게 그리운 장소.
이제 도깨비와의 연이 닿은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핏줄을 타고 내려온 업 역시 사라졌다. 각자 걷게 된 인연의 실을 보며,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은 혼을 보며. 월하도, 상제도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첫눈이 내린 날. 호성동에는 붉은 꽃이 가득했다. 집 앞에 핀 꽃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인간과 그를 바라보는 도깨비가 있었다.
같이 보았으니, 그걸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