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너무 바라는 게 많은가요
by. 키케로
소장 후장 딴 애가 입학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의견은 반반이다. 후장 따인 놈이다, 후장 딴 놈이다. 입학생도가 열 명밖에 되지 않는 제 342회 공군사관학교 신입생들은 그놈이 누군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평생 햇빛 볼 일 없었던 도련님들께서 삼월의 뙤약볕에 땀 뻘뻘 흘리고 있을 때 걔는 압도적으로 까만 피부를 드러내놓고 이딴 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서 있었다. 잔뜩 그을린 까만 피부를 보자마자 걔를 칭하는 수식어는 이변 없이 정해졌다. 개천용. 이것은 사어에 가깝다. 몇백 년 전 선조들이 쓰던 언어랬다.
북극이 완전히 녹아 버리고. 그 덕에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고. 패권이 바뀌고. 높아진 해수면이 인구 절반을 잠기게 하고. 녹은 얼음에서 나온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다시 또 인구를 절반으로 만들고. 밟을 땅이 없는 난민이 넘쳐나고. 서로 난민을 받지 않기 위해 전쟁하고. 역시 또 죽고. 이때 유엔은 이미 병풍 된 지 오래였다. 하루가 다르게 사람과 땅이 잠기고 우리네 삶이 잠기는데 와중에 나사는 우주선 개발에 실패했다. 우리는 그렇게 떵떵 떠들어대던 새 행성을 기어코 찾지 못한 것이다. 남아 있는 인류는 두 가지 기로에 놓였다. 자살하거나. 아득바득 살 길을 찾거나. 그 과정에서 선박이 발전했다. 밟을 땅이 없어 물 위를 부유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재 몇 남지 않은 인간은 둘로 나뉜다. 기술자와 기술자가 아닌 자. 말장난이다. 인류를 이따위로 나누라면 한없이 나눌 수 있었다. 여자인 자와 여자가 아닌 자. 배고픈 자와 배고프지 않은 자. 이건 인류 출현 이후 변함없었다. 하지만 현재 기술자와 기술자가 아닌 자가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선박과 항공기를 운용할 수 있는 자는 기득권이자 자본가이자 대물림이자 굳건한 자다. 그렇지 않은 자에 대한 수식어는 구태여 필요 없을 만큼 세계는 이분화되었다. 둘은 서로를 평생 보지 못한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무척 다르다. 마치 이십일 세기 영화 인 타임에서 구역을 나눈 것마냥 말이다. 영화에선 인위적으로 구역을 나눈 것인데 현실은 더 잔인하다. 아주 자연스레.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나뉘었다. 부유했다던 강남 골목 사이사이 사창가를 운영하며 연명하는 이들은 이제 존재할 수 없다. 완벽한 분리의 시대. 그들은 같은 병원에서 태어나고 같은 학교를 다니며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말씨를 쓴다. 전세계 계층 이동률은 영에 수렴한다.
그러니 개천이란 말은 그 애를 담지 못할 것이다. 개천이란 것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현생 인류는 사진 또는 상상에 맡겨야 하지만 그 상상 속에서도 걔는 천川보단 하수구라는 말이 적합해 보였다. 꼴랑 열 명 중 수석으로 입학한 박원빈은 단상 위에서 혼자만 눈에 띄게 꺼먼 그 애와 눈을 마주쳤다. 확실히 한평생 박원빈이 지내던 뭍과 페리에선 못 보던 눈빛이다. 굉장히 불량하고 위험한 눈빛. 무섭다. 사람에게 그런 감상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한평생 뭍 또는 페리 위를 부유하며 평화롭게 살던 박원빈 인생 최고의 이슈와 자극은 열다섯 살 때 일어난 군용기 전용 선박 침몰 사건이었다. 선박에 몰래 침입한 물밑 사람이 배 모터에 몸소 끼어 죽은 엽기적인 사건. 오토로 운영되던 선박은 사람 하나 타고 있지 않았지만 입력된 매뉴얼대로 갑판을 두르고 있는 펜스를 해제 후 군용기를 전부 바다에 빠뜨렸다. 침몰 시간을 느리게 하여 사람이 버틸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구조대가 오는 이상적인 매뉴얼이었다. 범행 의도는 그가 죽기 몇 개월 전 시위대로 활동하며 남긴 피켓에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아직도 사람이 밟고 서 있을 땅과 배가 없어 죽는데 군용기만 태우는 사치스러운 방종자들.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알루미늄 날개 한 짝.
어쩌면 은연중 피어오르는 용에 대한 적대감은 그 사건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밑 사람이 일으킨 사건이고 용은 이 학교에서 유일한 물밑 출신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은은한 적대감은 박원빈과 똑같은 인생 루트를 밟은 동기 녀석들 모두가 그랬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무서웠다. 적대의 대상이 되었다. 용은 그것을 알았다. 잘 이용했다. 조용하고 얌전하되 제멋대로 행동했다. 이를테면 핸드폰 반입 자체가 금지된 이곳에서 당당히 작은 화면에 코를 처박고 있는 것. 출외가 엄격히 통제되는 곳에서 혼자만 으슥한 밤에 사라지는 것. 밤마다 당당하게 나가는 뒷모습에 무어라 하려다가도 목적지가 소장이라고 생각하니 다들 입 하나 벙긋 못했다.
어찌 됐든 평화는 평화였다. 그 이상하고 묵시적 평화가 깨진 건 이 학년 생도들과 합동 훈련을 시작한 첫날이었다.
“너 누군데, 왜 연습 안 하고 이거에 고개 박고 있는데?”
이거에. 그렇게 말하며 정성찬이 핸드폰을 개천용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약간 색색대는 숨소리와 턱끝에 고인 땀방울 그리고 젖은 머리칼을 동반한다. 표정은 없다. 딱히 크게 궁금하지 않고 그렇다고 화나지도 않은 물음표가 문장 뒤에 찍힌다. 개천용은 갑자기 손에서 쑥 빠져나간 핸드폰에 고개를 느릿하게 들더니 대답했다.
“너. 일 학년 아닌가 보네.”
“나. 일 학년 아닌데. 왜. 이렇게 끊어 말하면 일 학년 할 수 있는 건가.”
정성찬이 생도 대원이 아닌 걸 알았으면 존댓말을 써야 했다. 생도 중대장들 중 몇몇은 이것을 지적하고 싶어 눈썹을 꿈틀하는데 정성찬은 신경 쓰지 않고 받아쳤다. 그러자 곳곳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터졌다. 정성찬과 친한 생도 중대장들은 좀 크게 웃었고 생도 대원들은 작게 눈치를 보며 입꼬릴 올렸다. 꼬시다. 안 그래도 재수없었는데. 그 정도 의미를 내포한 웃음이다. 개중 웃지 않는 건 정성찬과 박원빈 그리고 개천용뿐이다. 셋 다 이유는 같다. 이 상황이 웃기지 않았다.
“말장난 그만하고 내놔. 피곤하니까.”
“뭐가 피곤해. 지금 여기서 네가 제일 뽀송한데. 솜털까지 보인다 야.”
이십 대 초반 남자애들은 피곤할 정도로 남성성에 집착한다. 정성찬은 그걸 잘 알았고 이해했으며 덕분에 시원하게 잘 긁었다. 특히나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는 모습이 알량한 남성성 뭉개는 데 압권이라는 걸 너무 잘 알았다. 타고난 우두머리의 기백인지. 일일이 제 자존심 뭉개가며 체득한 기술인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너 뭔 배짱으로 이러나 했는데 걔구나.”
“⋯⋯⋯⋯.”
“낙하산.”
유명하더라. 낙하산인 거 상관없는데 티라도 내지 말든가. 뭐 당당하다고 애들 훈련 중인데 이러고 있어. 정성찬은 용의 핸드폰을 들고 뒤를 돌았다. 이거 압수야. 대충 손가락으로 집어 공중에 짤랑짤랑 흔들며 간다. 정성찬은 이때 네가 뭔데라는 반응이 돌아올 줄 알았다.
“낙하산?”
그때였다. 정성찬 뒤통수로 자그마한 돌이 꽂혔다. 개천용은 할 수만 있다면 큰 돌로 머릴 내려찍고 싶었다. 그러려고 했다. 급격한 기후 변화로 풍화가 빨라져 매끄럽고 앙증맞은 돌밖에 안 남은 게 한이라면 한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홍조가 오른 게 보일 정도로 화가 난 모습이었다.
“네가 할 소리야? 태어난 것부터 낙하산인 네가 할 말이냐고.”
“이거 맞아 죽으라고 던진 건 아니지? 그래도 사람한테 던지면 어떡해.”
“맞아 죽으라고 던진 건 아니고.”
개천용이 정성찬 손에 들린 자신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리고 정성찬의 머리를 팍 내려쳤다. 거센 힘에 정성찬의 정수리가 훤히 드러났다. 고개가 팍 꺾여 깍듯이 인사하는 모양새가 됐다는 거다.
“쥐어패고는 싶은데. 맞아 죽어 줄래?”
“아니.”
너 누군데, 묻던 별로 안 궁금하고 그다지 화나지 않은 아까 그 표정 그대로 고갤 들어 용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용은 지체 없이 반격했고 정성찬의 동기 몇몇이 와 주먹을 휘둘렀다. 정의감 넘치는 몇 생도 대원들이 말리려다 얻어맞았다. 개싸움의 시작이었다.
“다들 힘이 남아도는가 봅니다.”
박원빈의 코로 역행하는 땀이 훅 들어갔다. 정수리는 높은 각으로 세워 바닥에 꽂아두고 두 손은 뒷짐을 진 채 엎드려뻗쳐 중이었다. 연대 책임이라는 죄목이다. 단체로 머리 박은 지 삼십 분쯤 되었을까. 코로 역행하는 땀을 흡 들이켜 콜록이는 소리. 훌쩍이는 소리. 거친 숨소리를 걸쭉한 욕설이 갈랐다. 동기들 중에서도 약골로 유명하던 도련님 하나가 힘에 부치는지 엎어지면서 씨발 소리를 뱉었다. 아 씨발. 무의식적으로 나온 소리였는지 바로 입을 막았으나 이미 생도 부대장 귀에 들어가 버렸다. 군화가 아닌 새까만 구두가 우뚝 멈춘다. 곧 소리 난 쪽으로 몸을 튼다. 잠시 세상이 멈춘 것처럼 정지 후 말한다.
“전원 기립.”
땀에 젖은 훈련복 스치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났다.
“전원 엎드려.”
또.
“기립.”
그 짓을 열 번 정도 반복하니 도련님은 기절했다. 씨발 상황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고 지만 기절하면 단가. 그런 생각하는 애들 한둘이 아니었다. 척 봐도 불만 있어 보이는 표정에 생도 부대장은 기절한 애들을 그늘로 빼내라는 손짓을 한 뒤 정성찬과 개천용을 불렀다.
“기절한 생도들 보고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적당히 점잖고 적당히 거친 숨소리가 났다. 정성찬이 개천용보다 좀 더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고갤 숙였다. 그때 개천용이 대답했다.
“죄책감 느끼라고 이러십니까.”
“생도 지금 태도가 매우 불량합니다.”
“소란 일으킨 거 인정합니다. 저랑 저 새끼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기절시킨 건 부대장 대표님입니다.”
“⋯⋯⋯⋯.”
“선배님 뭍사람이라 공동체를 이토록 중요시 여기시는 건진 모르겠으나 저는 물밑 출신이라 그딴 거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죽을 때까지 누구 하나 패고 밟고 올라가는 게 편합니다.”
다들 눈을 꽉 감았다. 좆됐다. 마음 같아선 나불대는 개천용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부대장의 눈이 차게 식는다. 침 한번 꿀꺽 삼키는데 하악각이 분노로 떨리는 게 보였다. 엎드려뻗쳐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제한 시간 한 시간.”
“⋯⋯⋯⋯.”
“지금 여기서 발 떼는 순간부터 뒤에 산 정상까지 갔다 먼저 돌아오는 사람이 입학 시기 상관없이 서로에 대해 상대적 상관 지위를 점합니다.”
“부대장님!”
“더불어, 오늘 이 일을 만든 얘네가 너무 좆같아서 기필코 엿 멕이고 싶다 하는 생도들 역시 참가합니다. 누구든 먼저 돌아오는 사람은 앞으로 일 년 동안 대원과 중대장 통솔권을 가집니다.”
부대장이 개천용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 꽉 그러쥔다. 그리고 말한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무한경쟁 판 깔아 줬어. 네 친구들한테 일 년 동안 처맞아도 할 말 없는 거지. 개천용이 동문서답한다. 언제 시작합니까. 부대장 이마에 핏대가 섰다.
정성찬과 개천용을 제외하고 참여하겠다는 생도들이 더러 있었다. 대부분 중대장들이다. 싹수 뒈진 물밑 출신 새끼 죽여 버리겠단 눈빛으로 정성찬 뒤에 선다. 다만 개천용을 지지하는 대원들은 없는지라 졸지에 일대다 싸움이 되어 버렸다. 그때 박원빈이 개천용의 뒤에 섰다. 박원빈을 본 대원 몇몇도 쭈뼛 걸어 나왔다. 걸어 나오는 중에 정성찬과 박원빈의 눈이 마주친다. 정성찬의 눈은 별다른 뜻 없이 투명하게 빛났다. 박원빈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보다 앞에서 난 부대장의 외침에 고갤 돌렸다. 다른 의도는 없다. 정성찬이 이기든 개천용이 이기든 알 바 아니다. 다만 둘 중 하나가 이겨 일 년 내내 분위기 살얼음판 만들 바에 자신이 일 등을 하는 게 낫다 판단했을 뿐이다. 우위를 점한 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게 이 상황 최고의 해결책이라 판단했다.
산행길 훈련 자체가 금지된 지 좀 됐다. 어언 이십 년쯤. 그러니 공군사관학교 몇십 년 만에 이례적으로 열을 지어 뛰는 모양새였다. 애초에 요즘 시대엔 산을 타는 행위 자체가 흔하지 않았다. 나무는 무섭도록 울창하고 과거 열대우림에 살던 종들이 숲을 점하기 시작하면서 등산이라는 스포츠 자체가 퇴화했다. 결정적으로 개체 수가 급격히 늘어난 야생동물이 사람을 죽였다. 더위 때문에 털은 줄고 열을 방출하기 위해 몸집이 커진 것들이 재빨라지기까지 했으니 개체 수가 급감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었다. 물밑이 싫어 어떻게든 뭍에서 아득바득 버티려 했던 사람들이 산으로 숨지 못한 이유였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지 꽤 된 산은 진입부터 힘들었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도련님 티를 못 벗은 애들은 초입부터 포기하려 들거나 포기했고. 중대장들은 나름 일 년 훈련 더 받았다고 제법 뛰었다. 그 사이 선두를 차지한 건 셋이다. 정성찬, 박원빈 그리고 개천용까지.
개천용은 훤칠한 외관을 가졌다. 물밑에서 파도를 가르며 자라 그런지 유독 팔과 다리에 근육이 많았으며 어깨가 벌어져 위압감을 줬다. 생도 중 몇몇은 왜 소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는지 얼굴과 몸을 보고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으며 그의 피지컬을 보고 소장한테 뒤 따인 놈이 아니라 딴 놈이겠구나 판단했다. 진실은 아무도 모르지만 보이는 건 그랬다.
그러니 안타깝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먼저 지쳐 버린 건 도련님 출신 정성찬이었다. 점점 페이스가 딸리는 게 보였다. 머리카락 전체와 얼굴이 싹 젖어 목욕이라도 한 사람 같았다. 악을 쓰며 달리는데 다리가 점점 무거워진다. 이미 다른 생도들은 아래서 못 벗어나는 중이다. 아무래도 폐활량 자체로 물밑 사람을 이기긴 힘들 거다. 그건 박원빈도 마찬가지였다. 정성찬을 지나친 지 얼마 안 되어 점점 다리가 느려지는 게 느껴졌을 때 박원빈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정성찬이 고꾸라졌는지 얼굴에 흙과 나뭇잎을 잔뜩 묻힌 채 엎드려 있었다.
박원빈이 작게 탄식했다. 점이 될동말동한 거리의 개천용과 땀 때문에 흙이 제대로 얼굴에 들러붙은 정성찬을 번갈아 보다 한숨을 푹 쉬었다. 잠깐의 고민 후 정성찬을 등져 개천용을 쫓아간다. 정성찬은 그런 뒷모습을 보다 엎드린 상체를 펴 나무에 기댔다. 눈을 감고 존나 힘들단 생각만 하고 있는 와중 도처에 나뭇잎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중대장님.”
“왜 다시 왔지.”
“부축하겠습니다. 내려가시죠.”
박원빈이 한쪽 무릎을 접어 나무에 기대앉아 있는 정성찬과 눈높이를 맞췄다. 산소가 부족해 어지러운 와중에도 그 꼴은 웃겼다. 정성찬이 바람 빠지듯 웃으며 말했다. 자세 봐라. 당장 반지라도 끼울 기세다. 그렇게 말하고선 눈을 감는다. 박원빈이 당황하며 언성을 높였다. 여기서 죽으시면 곤란합니다. 정성찬이 눈을 부릅 뜬다. 안 죽어. 야 그리고 죽지 말라고 해야지. 죽으면 곤란한 게 말이냐고. 정성찬의 말투는 계급 사회를 잊게 했다. 그러니까 의도하지 않으면 강압적이지 않았다. 의도해야만 강압적인 말투를 쓰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앙탈부린다고 느껴질 법한 막내 아들 말투 같았다. 박원빈은 그게 익숙치 않아 간질거리는 기분을 안고 다시 말했다. 부축하겠습니다. 정성찬은 그런 박원빈을 빤히 보다 작게 고갤 끄덕였다.
“쟤 잘 뛰더라.”
박원빈에게 몸을 기댄 정성찬이 담담하게 말했다.
“쟤가 대빵 되면 나 개닦이겠지.”
정성찬이 시선을 아래로 해 박원빈을 쳐다봤다. 개닦인단 말에 누가 봐도 긍정의 표정을 짓고 있어 작게 웃었다. 빈말로라도 아니라고 못하네 이거.
“난 받아들였어. 까라면 까야지. 넌?”
“상관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물으시는 겁니까?”
“비슷해. 넌 쟤 감당 가능하냐고. 쟤가 까라는 대로 까기 싫어서 온 거 아니야?”
“⋯⋯⋯⋯.”
“이기려면 나 버리고 달렸어야지. 왜 날 부축해 주고 앉아 있냐 미련하게.”
돕고도 욕을 얻어먹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지탱하고 있는 힘이 살짝 빠지는 걸 느꼈는지 정성찬이 호쾌하게 웃었다. 산이 울릴 정도로 재미지고 크게 웃더니 말했다.
“미안. 바로 말하기 낯간지러워서 좀 돌렸네.”
“예?”
“고마워.”
그 뒤로는 말없이 내려갔다. 정상 찍고 돌아온 개천용이 내려오다 시비 걸기 전까진 분명 고요했다.
“기권이네.”
“어. 더 뛰면 죽을 것 같아서.”
“근데 왜 반말이지? 이제부터는 내가 상관 아닌가.”
“아직 골인 지점 통과 안 했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존댓말 듣고 싶으면 뛰어. 재깍재깍 해드릴게.”
정성찬은 한마디를 안 졌다. 그 사이에 낀 박원빈은 단숨에 피로해져 눈을 꾹 감았다. 다행히 더 피로할 일 없게 용은 박원빈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정성찬을 불렀다.
“너.”
“말 끊어 하는 건 버릇이야?”
“씨발, 됐다.”
“너.”
“같잖게 따라하지 좀 말지?”
“잘하면서 왜 훈련을 안 하냐.”
“안 해도 잘하니까.”
“되게 재수없네. 그러다 뒤처진다.”
“뒤처지게 만들어 봐.”
개천용은 재수없는 말을 해 놓은 주제에 의기양양한 표정이 아니었다. 항상 무표정이다. 더 정확히는 화가 난 표정에 가까웠다. 개천용은 정말이지 뭍사람들이 싫었다. 훈련을 왜 안 하느냐고? 한평생이 훈련이었고 산행길이었는데 그게 뚝딱 된 줄 아는 도련님적 관점이 사람 돌게 만들었다. 하나하나 반박하고 싶었다. 내 인생을 설명하게 하는 오만함이 싫어 입을 닫으면 다 안다는 듯한 눈으로 보는 것도 싫었다. 개천용은 정성찬을 쭉 훑고는 곧 자리를 떴다. 덧붙이는 말이나 비아냥거림은 없었다.
“너 나 말고 쟤가 쓰러졌어도 부축했을 거야?”
학교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정성찬이 물었다.
“예.”
“그럴 것 같아.”
“중대장님도 그러셨을 겁니다.”
정성찬이 박원빈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개천용이 말을 끊어 하는 게 버릇이라면 정성찬은 사람을 빤히 보는 게 버릇인 듯했다. 박원빈 어깨에 올려둔 제 팔을 거둔 정성찬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박원빈 머리칼에 붙은 나뭇잎을 떼며 작게 말했다. 아부는. 떼는 손길과 말투가 퍽 다정해 박원빈은 다시금 생각한다. 군대랑 안 맞는 사람인지 보기 드문 사람인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
용 같은 기세가 무서웠다. 게다가 위계질서 빡빡한 이곳에서 적법한 방법으로 권력을 쟁취했으니 살얼음판 될 것 같다는 예상과 달리 개천용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귀찮게 하지 않고 기어오르지 않는다면 일절 대응하지 않는다. 얌전한 편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생도 대원들은 핸드폰이 일 년간 전면 금지되어 있지 말입니다, 선배님.”
“야.”
“또 끊어 말씀하십니다.”
“자존심도 없냐? 나 같으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기 싫어서라도 안 건드려.”
단 한 사람. 정성찬이 유독 끈질겼다. 정성찬은 그랬다. 낙하산이든 뭐든 어쨌든 여기 있는 모두는 비행을 꿈꾼다. 하늘을 영유할 사람들이었다. 그 비행을 위해 반납하는 사 년의 시간이 이왕이면 모두에게 헛되지 않았음 했다. 거기엔 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훈련 같이 하자며 끈질기게 붙드는 정성찬과 화를 내는 개천은 이제 생도들에게 익숙한 그림이 되었다. 미운 정 드는 것 아니냐. 남자인 소장과도 자는 용인데 정성찬이랑도 그렇게 되는 것 아니냐 따위의 말이 돌았다.
다들 착각하는 것이 있다. 박원빈은 용의 눈을 본다. 정성찬을 바라보는 용의 눈은 혐오와 분노가 가득했다. 그가 소란을 귀찮아하고 지겨워하는 성정이라 다행이지 만약 정성찬 과였으면 둘 중 하나는 이미 죽었을 거다. 다음 소란은 개천용이 정성찬에게 긁혔을 때 일어날 거다. 정성찬은 자의든 타의든 개천용을 지겹도록 자극했고 이건 위태위태한 신호였다.
기상나팔 울리기 한 시간 전에 깬 박원빈은 다시 오지 않는 잠에 결국 몸을 일으켰다. 생도 수가 적은 것과 더불어 귀한 도련님들이라 독방을 쓰고 있어 주위가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핸드폰이 없어 생기는 취미들은 한정적이었다. 대체로 경쟁 스포츠 아니면 산책. 박원빈은 후자를 택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
“안녕. 원래 이 시간에 깨?”
“아, 안녕하십니까. 아뇨. 오늘은 눈이 일찍 떠졌습니다.”
그렇구나. 성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성찬은 딱 붙는 기능성 반팔 티와 오부 반바지를 입은 채 준비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 넓은 운동장에 혼자서. 아침에 맞닥뜨린 얼굴은 저번보다 좀 부어 있었고 무언가 따끈한 느낌이 났다. 대화가 끝났는데도 자리를 뜨지 않는 박원빈에 팔을 머리 위로 쭉 올려 스트레칭 중인 정성찬이 물었다. 너도 할래?
“산 탈 거야. 제한 시간은 오십구 분. 같이 할래?”
“저번에 했던 산행길 훈련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네가 나 부축해 줬던 날.”
별말 아닌데도 간질거리게 말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말을 돌렸다.
“그때부터 쭉 매일 하시는 겁니까?”
“하기 싫구나. 말 돌리네.”
“아, 아닙니다. 옷만 갈아입고─”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말하라는 거야.”
“⋯⋯⋯⋯.”
“⋯⋯⋯⋯.”
“아, 아무래도 오늘 좀 더워갖고⋯⋯⋯.”
우하학. 정성찬이 눈꼬리를 가득 휘며 산뜻하게 웃었다. 다 웃고 나서야 박원빈 물음에 대답했다. 응, 매일 하고 있어. 너도 하고 싶을 때 나와. 매일 있을 거야, 나. 그리고선 미련 없이 뒤를 돌아 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성찬이 뒤를 돌았다. 미련 없는 게 아니었나 보다.
“근데 말은 왜 더듬어. 나 무서워?”
“버릇입니다.”
“버릇?”
“예.”
버릇. 버릇이란 말을 입안에서 굴리더니 혼잣말로 ‘안 그렇게 생겨선 요상하네⋯⋯⋯.’하고 다시 뛰어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떠난 자리에서 박원빈이 헛웃음을 쳤다. 입학도 전에 봤던 싸가지없는 게 그렇게까지 얄밉지 않으면 ―‘귀엽게 느껴지면’이었으나 머릿속에서 자체적으로 순화했다― 망한 거라던 게 생각났다. 진짜 갑자기.
다행히도 그런 생각이 드는 일은 드물었다. 박원빈이 정성찬과 만나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기초 훈련 시간을 제외하면 이 학년 강의는 거의 비행기 정비 관련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정비사라는 직업 자체가 귀해지기도 했고 군수용 비행기 정비는 급할 때 개개인의 역량으로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정성찬은 어쩌다 멀리서 마주칠 때마다 정비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엔 기름인지 먼지인지 모를 것을 잔뜩 묻혀두고 동급생들과 마주보고 웃고 있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저번엔 가위바위보에 져서 실외 계류장에서 작업하느라 얼굴이 탔다며 선크림 발라달라고 하는 것까지 본의 아니게 들어 버렸다. 남자끼리 웬 선크림. 박원빈 입장에선 상상이 안 가는 모양새다. 이럴 때마다 박원빈은 먼발치에서 정성찬을 보곤 매번 비슷한 생각을 했다. 군대에 진짜 안 어울리는 사람.
박원빈은 그 사람을 가끔 쳐다봤다. 점점 더워지는 이 날에 도저히 같이 뛰어주진 못하겠고. 지켜봐 줄 순 있어서 가끔 일찍 일어나 드넓은 운동장에서 혼자 준비 운동하는 정성찬을 쳐다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친 적도 있었다. 정성찬은 시력이 좋은지 눈살 한번 안 찌푸리고 박원빈에게 웃어 주었다. 그 뒤부터는 커튼 사이로 몰래 숨어 봤다. 가끔 일찍 일어나던 건 거의 매일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까지 봐야 하는 의문이 본인에게 들었지만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정성찬은 커튼 뒤에 있는 박원빈을 안다는 듯 항상 손을 흔들고서야 출발했다.
본격적 여름에 접어들고서부턴 바깥 활동 자체가 불가했다. 날씨가 살인적이었기 때문이다. 달리기는 수영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정성찬은 그때까지도 개천용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체로 정성찬이 걸어오는 모든 말에 개천용은 대답하지 않고 무시했다. 생도들 사이에선 누가 먼저 지치는지 내기까지 할 정도였다. 정성찬은 왜 소란 일으키지 않고 얌전한 개천용을 자꾸 건드릴까. 그때 진 뒤로 꼬박꼬박 까라면 까고 선배님 호칭 붙여가며 자존심 없는 것처럼 군다.
“입학한 이유가 뭡니까?”
그리고 오늘은 개천용이 두 번째로 긁히는 날이 될 것이다.
“조종대 한번 잡아보려고 오신 것 아닙니까?”
“⋯⋯⋯⋯.”
“물밑에서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 않다는 거 누구보다 선배님께서 잘 아실 텐데.”
“대답을 안 하면 입 좀 다물지.”
“이해가 안 돼서 그럽니다. 여기까지 오는 기회를 쟁취했으면 더 열심히─”
“네가 왜 싫은지 알아?”
개천용이 일어났다. 그때 박원빈은 그 둘을 등지고 있어 개천용이 어떤 눈빛으로 정성찬을 바라보았는지 알지 못했다.
“도련님 주제에 오지랖이 너무 넓어서. 근데 그게 나한테만 지랄이라. 그리고 그게 동정심에 기인해서 나한테만 지랄인 걸 알거든, 내가.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도련님.”
응? 이 씨발 새끼야. 넌 엄마 뱃속에서부터 배든 비행기든 마음대로 선택해서 갈 수 있었잖아. 에어컨 나오는 건물에서 태어나고 처먹고 처자고 처놀고. 깔끔하고 튼튼한 책상 위에서 햇빛 하나 안 맞으며 공부했겠지. 그리고 당연하게 여기 들어왔을 거고. 그리고 날 만났고. 날 만나기 전까지 물밑엔 관심도 없었을 거고. 아니? 넌 지금도 물밑에 관심 없어. 한낱 물밑 출신인 내가 씨발 여기 좆같이 힘들게 들어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네 눈에 또 불쌍해서 그런 거지. 내 출세길이 여기 달려 있는데 왜 안 하나 싶겠지. 이래서야 또 물밑으로 돌아가게 될 텐데 이왕 뭍으로 온 거 좀 하지 왜 열심히 안 하나 싶지. 안타깝지.
나 말고도 안 하는 애들 여기 존나 많아 도련님. 왜 나한테만 오지랖이셔 죽여 버리고 싶게.
“너 왜 이렇게 꼬였냐?”
살기 담긴 개천용의 목소리와 다르게 정성찬은 가볍게 받아쳤다.
“네가 다른 애들은 못하는 핸드폰 하는 게 짱나서 그런 건데.”
“와 씨발 진짜.”
“그리고 좀 좋게 생각할 순 없나?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고.”
개천용이 정성찬을 있는 힘껏 밀었다. 바로 뒤가 수영장이었다. 정성찬은 개천용의 팔을 붙잡았다. 첨벙. 성인 남성 두 명이 물에 빠지는 소리는 불쾌할 만큼 컸다. 여기까진 사고로 넘어갈 수 있을 텐데 그 뒤가 문제였다. 개천용이 정성찬의 정수리를 콱 잡아 있는 힘껏 물에 넣어 버렸다. 남자애들 사이에서 한 번쯤 할 법한 장난이었다. 다들 둘이 같이 빠질 만한 사이가 아닌데 빠졌다는 거에 의아해할 뿐 아무도 진심으로 담갔다고 보지 않았다. 실제로 박원빈도 많이 당한 장난이다. 하지만 박원빈은 개천용의 눈빛을 봤다. 진심이다. 의도가 담겨 있었다.
정성찬은 수영을 못했다. 용도 그걸 알았다. 달리기에서 수영으로 전환된 첫날 정성찬이 또또 그놈의 핸드폰을 뺏어가더니 넉살 떨며 말했었다. 수영 잘하십니까. 저는 못합니다. 도와주십쇼. 이번엔 저번처럼 마냥 압수 아니고 도와달라는 겁니다. 대답 한 음절 없이 싹 씹어 버렸기에 둘이 오붓하고 사이좋게 수영하는 일은 없었지만. 어쨌든 개천용은 알았다. 정성찬이 맥주병이라는 것을. 그러니 맞다. 개천용은 의도와 진심이 담긴 힘으로 정성찬을 물에 밀어넣었다.
“야.”
정성찬의 격한 움직임에 점점 힘이 빠졌다. 장난의 수위를 넘어간 것 같다, 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에 들 즈음 박원빈은 이미 물에 뛰어들어 개천용을 붙잡은 뒤였다.
“놔.”
“그만해. 힘 빼. 너 미쳤어? 애 죽일 거야?”
“놔. 너도 같이 담가버리기 전에.”
박원빈이 개천용을 힘주어 붙잡아 버리는 바람에 손에 힘이 빠졌다. 둘이 실랑이하는 사이에 올라온 정성찬이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몰아쉬었다. 씨발. 개천용은 그 넓디넓은 수영장이 울리게 욕지거리를 뱉고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을 붙잡은 박원빈을 밀쳤다. 플로어로 올라오자마자 자신을 가로막은 교수를 대놓고 무시하고 간다. 교수는 웬만하면 개천용을 건들지 않는다. 아니. 절대적으로 개천용을 건들지 못한다. 특히 군인 교수는 더 그랬다. 소장이라는 뒷배는 이곳에서 너무나 절대적이었으니까. 이번 학기부터 계급장 떼고 민간 교수가 된 그가 자신을 지나치는 개천용을 붙잡고 귀에 속삭였다. 너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것 같니. 소장님은 사고치는 장난감 안 좋아하신다.
그날 수영은 어수선하게 끝났다. 샤워실엔 아까의 일 이야기가 가득했다. 진짜 죽이려고 한 건가. 적당히 하다 들어올리지 않았을까. 여러 말이 오갔지만 박원빈은 안다. 개천용은 진심이었다.
“팍팍 먹어.”
“안녕하십니까.”
“안녕 못하겠는데. 쪽팔려서.”
그날 저녁 배식 때 정성찬이 늘 같이 먹던 생도 중대장들을 뒤로하고 박원빈 앞에 자리했다. 박원빈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대원들은 당황하며 일어나려 했다. 대충 손 휘휘 저으며 금방 간다 말하곤 애들을 앉힌 정성찬은 원래 목적대로 박원빈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쪽팔린 게 대수냐. 죽을 뻔했는데. 그치? 아까 고마워.”
정성찬이 자신의 식판에 있던 인공육을 모두 박원빈의 식판으로 넘겼다. 한입도 안 댔으니 위생 걱정 말라는 말은 덤이다.
“이걸로 부족하면 중대장 생활관으로 와.”
그리고 깔끔하게 갔다. 싱긋 웃는 건 덤이다. 박원빈은 그 후로도 몇 분을 멀뚱히 멈춰 있었다. 옆에서 동기들이 툭툭 쳤다. 너 안 먹을 거면 내가 먹어도 돼? 몇 백 년이 지나도 고기 좋아하는 건 인류 공통이었다. 닭은 부피가 작아 상대적으로 흔했지만 돼지와 소는 도련님들도 먹기 힘들었다. 애초에 땅이 귀하니 방목지와 재배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잔뜩 쌓인 해산물과 아쿠아포닉스 방식 초록 잎들 사이 인공육은 생도들이 더 많이 받으려고 안달인 음식이었다.
“너 왜 넋 나간 사람처럼 가만있냐.”
“⋯⋯⋯⋯.”
“야. 야? 박원빈.”
군대랑 진짜 안 어울리는데. 그런 생각하느라 인공육이 동기들에게 다 털리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와 뭐야. 진짜 왔네.”
무조건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본의 아니게 밥을 다 뺏겼으니 선배한테 가면 뭐라도 더 얻어먹을까 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진짜로. 그런데 생각해 보니 중대장 생활관으로만 오라고 했지 정확한 층수는 알려 준 적 없어 문 앞에서 쭈뼛대고 있을 때였다. 공용 로비에서 얼굴에 허연 크림 묻힌 정성찬이 뛰어왔다. 뒤에선 야 바르고 있는데 가면 어떡하냐 소리가 들렸다.
“진짜 올 줄은 몰랐어.”
“다시 가겠습니다.”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고. 들어와.”
정성찬은 문을 열어 주며 다른 손으론 한쪽 볼에 묻은 선크림을 문질러 발랐다. 무의식인지 자신도 모르게 인중을 늘이고 있는 정성찬이 웃겨 박원빈은 남몰래 웃었다.
공용 로비로 들어온 박원빈은 선배들의 관심을 한눈에 받았다. 개중 누가 말한다. 야 얘도 같이 데려가자. 정성찬이 여전히 볼을 문지르며 대충 대답했다. 어.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부르긴 했는데 진짜 올 줄 몰랐고. 나가긴 할 건데 너네랑 같은 의도로 부른 것도 아니고. 야! 선크림 빌려주면 같이 다녀 준다며! 그런 적 없다. 생각해 본다고 했지. 상대방이 역정을 낸다. 야 미쳤냐? 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같이 간댔다. 그래서 선크림 찍어 바른 거잖아. 와 진짜 개억울해! 박원빈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어색하게 입꼬리만 올렸다. 그런 박원빈을 알아차렸는지 정성찬이 고갤 돌려 묻는다.
“밖에 나갈래? 고기 사 줄게.”
“예?”
“너 한 번도 밖에 안 나가 봤어?”
박원빈은 한마디라고 하기도 민망한 대답 하나 내놓은 건데 정성찬 동기들이 더 난리였다. 우리는 일 학년 이맘쯤 처음 나간 것 같은데. 아직 아무도 안 나갔나 보네. 아니면 그냥 쟤가 샌님인 거 아냐? 더 들어보니 미팅 나갈 거란 소리였다. 이 학교에서 부대장 직위 달 수 있는 삼 학년이 되면 본격적으로 성적순에 따라 비행을 시작할 수 있는데 그거 시작하면 진짜 바깥으로 못 나간단다. 박원빈이 뒷머릴 긁적이며 대답했다. 일 학년은 외출 신청 못 합니다.
“바보야. 몰래 나가는 거지.”
“⋯⋯걸리면 퇴학 아닙니까?”
“겁주려고 하는 과장이지. 우릴 어떻게 퇴학시켜. 너 진짜 생긴 거랑 다르게 순진하다.”
진짜 요상해. 정성찬이 혼잣말인 듯 적당히 들리게 말하며 혼자 웃었다.
“아무튼 뭐 얘네랑 미팅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야, 정성찬 너 진짜 아까 같이 간댔잖아. 처음에 생각해 본다고 하고 아까 생각 끝났다고 같이 간다고 분명─”
“아니면 나랑 고기 먹으러 가도 되고.”
“이것 봐라. 내 말 안 듣네?”
정성찬은 정말 끝까지 동기들 말은 듣지 않고 박원빈을 보며 말했다. 너 미팅도 한 번도 안 해 봤겠다. 그럼 쟤네랑 같이 나가는 것도 괜찮겠네⋯⋯⋯. 그렇게 말할 땐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신발을 빤히 보더니 퍼뜩 고갤 들어 다시 말했다. 근데 미팅 그런 거 생각보다 재미없어. 그 표정이 퍽 진지하다. 어딘가 초조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박원빈이 홀린 듯 대답했다. 예, 선배랑 같이 가겠습니다. 그제야 진지했던 얼굴이 환하게 웃는다.
그리하여 다섯 명이 은밀하게 움직이게 됐다. 번화가라 할 수 있는 완전 육지대까지 같이 가고 그 이후부터 따로 행동하기로 했다. 기득권층만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된 지 꽤 됐기에 교관은 비대면 또는 로봇으로 교체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귀한 집 사람들에게 바른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 덕에 몇 년 전부터 점호는 모든 생도가 똑같은 시간에 생체 인식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선배들의 지혜로 간단한 지문 복사와 동공 인식을 설정해 두고 나오는데 박원빈의 작은 새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한평생 살면서 이런 거 해 본 적 없는 도련님인지라. 같은 인생을 살아왔을 성찬 선배도 이랬을까 그의 스무 살을 가늠해 본다.
“이게 제 4차 세계 대전 때부터 있던 지하 계단이다 이 말이야.”
개구멍이라도 넘어가는 걸까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먼지가 좀 앉았지만 딴딴한 화강암 계단이 반기고 있는 것도 의외였다. 흙도 나무판자도 아니라니. 몇백 년 전 역사책에서 보던 걸 기대해서 김이 좀 샜으나 일탈이라는 틀 안에서 심장이 뛰는 건 여전했다. 선배들의 일탈 무용담을 들으며 걸었다. 보초는 두 타입이야. 인간 조교랑 로봇. 인간 조교면 걍 존나 뛰면 되는데 로봇이면 절대 뛰지 마라. 로봇은 타이밍이 잘 맞아야 개뛰어서 도망갈 수 있는 거고 아니면 걍 차라리 잡히는 게 나아. 공기총 쏴. 맞아 봤어? 진짜 개아파. 기절해. 기절하고 깨잖아? 내 방 안이야. 그게 더 무서워.
그러니까 이제 지상에서 나는 소리로 인간인지 로봇인지 구분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사람 성격에 따라 규칙적인 발소리가 인간 조교일 때도 있었고 일탈하는 애들 낚겠다고 로봇을 그렇게 학습시킨 경우도 있어 일탈 난이도가 매번 오르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나가야 하는 건가 생각하는데 정성찬도 딱 그런 생각하고 있는 표정이라 박원빈이 씩 웃었다. 그 상태로 정성찬과 눈이 딱 마주친다.
“왜 웃어.”
“아닙니다.”
“알려 줘.”
“별것 아닙니다.”
“별거 아니니까 알려 줘. 궁금해.”
정성찬은 개천용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에게 끈질기구나. 판단이 빠른 박원빈은 더 이상의 실랑이를 피하기 위해 말했다. 잠깐 귀 좀 빌려주십쇼. 정성찬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상체를 약간 굽혀 귀를 댔다. 박원빈이 손을 입 옆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까지 해서 나가야 하는 건가 해서 그랬습니다.
“야 지금이다. 뛰어!”
무어라 말하려던 정성찬이 입을 합 다물고 동기들에게 끌려갔다. 박원빈은 다른 사람 손에 붙잡혀 얼결에 같이 뛰어 올라갔다. 다행히 오늘은 공기총 맞을 일은 없게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대체로 조교들은 뛰다 지쳐 그냥 보내고 눈감아 준다는 것인데⋯⋯⋯.
“거기 나머지 넷. 지금 당장 본 교관 앞으로 옵니다.”
하필 오늘 엄청나게 군인 정신 투철하고 달리기까지 빠른 신삥이 걸린 것이다. 이미 한 명은 붙잡혔다. 암락 기술에 걸려 팔이 뒤로 완전히 꺾여가지곤 아무 말 못하고 비명만 질렀다. 야 미안하다. 일단 버리고 뛰어. 누군가 말했다. 교관은 어찌나 끈질긴지 보통 이 정도 뛰었으면 포기하고 돌아가는데 영원히 생도들을 쫓았다. 어느새 죄 뿔뿔이 흩어져 저짝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로 아 잡혔구나 하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비좁은 골목에 쭈그려 앉아 숨을 몰아쉬던 박원빈이 진한 현타를 맞았다. 왜 이러고 있지. 걍 자수할까. 박원빈은 애초에 민간 세상에 나가는 건 바라지도 않았는 걸. 게다가 도망치는 과정에서 성찬 선배와 떨어져 잡혔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자수 쪽으로 마음이 기운 박원빈이 점점 숨을 크게 쉬었다. 들켜도 상관없단 듯이. 마침내 마음을 먹고 골목을 나오려고 할 때.
쉿.
훅 끼쳐온 정성찬이 한 손으로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에 댔다. 나머지 다른 손은 박원빈의 하관을 부드럽게 덮었다. 그리고 도로 골목으로 민다. 분명 강압적인 행위였는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에 닿은 손이 따뜻했기 때문인지. 급박한 와중에 주변을 살피지 않고 오로지 제 눈만 봐 주었기 때문인지.
“아까 대답 못 했는데.”
박원빈 혼자도 버겁게 받아들이던 골목에 정성찬까지 끼어들었다. 몸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박원빈은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뺐다.
“이렇게까지 해서 나가야지. 선배가 고기 사 준다는데.”
안 그래? 배가 불렀어 아주. 정성찬이 장난스레 웃는다. 난데없는 뜀박질에 격한 숨소리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웃는 눈꼬리가 사정없이 접혔다. 박원빈은 그때. 이거 좀 위험한데, 라고 생각했다.
몇십 분을 그러고 있었을까. 안전해졌다 싶을 즈음 둘은 골목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살핀 뒤 미친 듯이 뛰었다. 중심 육지대에 도착했을 땐 열심히 찍어 바른 선크림이 애석하게도 다 녹아내려 있었다. 정성찬이 손등으로 이마를 닦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찝찝해.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 “목욕탕⋯⋯.”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매번 뻗닿게 같이 나오던 동기들이 아니라 박원빈이 서 있다. 땡그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데, 동기들이랑은 스스럼없이 들락날락하던 목욕탕이 그 순간 왜 금기어가 됐는지 모를 일이다.
“팍팍 먹어.”
“노력하겠습니다.”
밥 먹는 데 노력까지 필요한 사람은 처음 보네. 정성찬이 황당한 눈으로 박원빈을 응시하다 음식이 버거워 보이는 모양새에 웃고 말았다. 오가는 대화에 특별한 텐션은 없었다. 이 학년이 되면 어떤 것을 배우는지. 삼 학년 때 선두 비행장으로 선발되고 싶다는 정성찬의 야망 어린 이야기. 선후배 사이에 할 법한 대화들이었다. 그리고 잠시 마가 떴다.
“원래부터 고기 사 주실 생각이셨습니까?”
그 분위기를 반전시킨 건 의외로 박원빈이었다.
“어, 뭐. 고마우니까. 근데 난 너 안 올 줄 알았어.”
“왜요?”
“아침 런닝도 안 나왔잖아.”
퍽 서운하다는 톤이다. 서운하신 건가. 박원빈이 뒷머릴 긁적였다.
“저 기다리셨습니까?”
정성찬이 고기 한가득 집은 집게를 들고 굳은 듯 멈췄다. 서로를 기다릴 만한 사이였던가. 지금은 어떻고. 잠깐 고민하다 박원빈 접시로 집게를 옮기며 대답했다.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런 것 같네.”
이것은 선후배 사이에 할 법한 대화일까. 그런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정성찬의 전화가 울렸다. 일 학년처럼 전면 금지는 아니라지만 이미 반납했어야 할 시간이었다. 정성찬은 약간 머쓱한 표정으로 잠깐, 하더니 메시지를 읽어내렸다.
“아까 다섯 중에 두 명 잡혔나 봐.”
“그럼 저희 둘 빼고 선배 한 분은⋯⋯⋯.”
“어, 걔한테 연락 왔네. 혼자 남아서 미팅 엎어졌다고. 어디냬.”
“⋯⋯⋯⋯.”
“여기로 부를까?”
정적이 이어졌다. 정성찬의 눈을 쳐다봐도 읽히는 게 없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뭔 대답을 바라는지. 재고 따지는 것이 힘들어 박원빈은 솔직히 답했다.
“아뇨.”
정성찬이 아까 골목에서 보였던 웃음을 보였다. 박원빈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그 웃음 말이다. 마지막 한 점을 털어 넣은 정성찬이 산뜻하게 말했다. 그럼 나가자. 여기 인공육 아닌 고깃집 여기밖에 없어서 찾아올 거야. 결제하는 뒷모습에서 작은 콧노래가 나왔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듯했으나.
“너 저거 찍어봤어?”
정처 없이 걷는 중 정성찬이 가리킨 건 사진 부스였다. 인생네컷이라고 쓰인 간판이 곧 쓰러질 것 같다. 저런 곳에서 찍어 봤을 리가. 평생 몸값 비싼 사진사 불러서 찍은 기억밖에 없는 박원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생각보다 잘 나와. 실물 사진도 뽑아 주고.”
“찍어 보셨습니까?”
“응, 일 학년 때. 애들이랑.”
“아.”
“찍을래?”
“둘이서 말입니까?”
“왜. 좀 그래?”
좀. 좀⋯⋯⋯. 좀 그렇긴 하죠. 말은 없어도 박원빈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정성찬은 굳이 후배를 불편하게 하는 선배가 아니었다. 의도하지 않는 이상 그랬다. 그래. 그럼. 정성찬이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누군가 뒤에서 옷 끝자락을 당겼다.
“저 아직 대답⋯⋯ 안 했습니다.”
왠지 모르게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 같기도 하고.
“사진 찍고 싶습니다.”
기대도 않았던 날 갑자기 달콤한 선물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찍자. 박원빈 첫 일탈 기념.”
저기 날짜도 같이 찍혀서 나와. 이상한 기분에 그럴듯한 변명도 덧붙였다. 먼저 비좁은 부스로 고개 꺾어가며 들어가는 정성찬을 보던 박원빈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가. 뭐라도 나온 걸 기념하고 싶었던 걸 수도. 생각해 보면 엄마랑도 단둘이서만 찍은 사진은 없는 것 같은데. 느낌이 묘했다.
첫 번째 샷은 둘 다 우왕좌왕하다 경직된 상태로 찍었다. 누가 보면 군부대에서 찍은 줄 알 만큼 굳은 게 우스웠다. 두 번째 사진부턴 좀 웃었다. 포즈도 취하고. 세 번째 컷에선 다시 어색해졌다. 둘의 눈이 마주친 상태에 딱 찍혔기 때문이다. 결국 마지막 컷이 되어서야 둘 다 웃는 모습으로 찍혔다.
전혀 친하지 않은 듯 머쓱하게 찍힌 두 남정네 사진 마지막에 숫자가 박혔다. 오늘이 새겨져 있었다. 날짜만 봐도 더운 여름의 달에. 사진에도 여름이 담긴 것처럼 붉은 얼굴을 달고.
*
그날 이후 개천용을 강의실에서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이때까지 출석 자체는 성실히 했는데, 이제는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다. 덕분에 더 이상 소란은 없었다. 적어도 수업 내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비극은 어쩌다, 아다리가 맞지 않아 일어나는 것이다. 하필 전날 빡세게 굴려져 곯아떨어진 박원빈이 간만에 정성찬을 배웅해 주지 못했고. 그날따라 세게 맞아 기절한 시간이 길어진 개천용의 숙소 복귀가 늦어진 것도. 정성찬이 아무리 철천지원수여도 멍이 든 얼굴을 보고 지나칠 성정이 아니었던 것도. 모든 것이 합쳐져서.
“너 어디 갔다 오는데 얼굴이─”
아침 런닝을 위해 정문을 나서자마자 마주친 개천용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정성찬이 반사적으로 팔을 붙잡자 빛의 속도로 쳐낸다. 벌레에 닿아도 이 정돈 아닐 것이다.
“방에 약은 있어?”
“⋯⋯⋯⋯.”
“있으면 치료는 할 거야?”
“⋯⋯⋯⋯.”
“야, 소독은 해야 할 거 아니야. 피 나잖아.”
개천용은 계속 무시하고 걸었다. 정성찬이 그 뒤를 쫓아 무어라 해도 무시로 일관한다. 정성찬이 멈췄다. 바닥에 있는 작은 돌을 집어 개천용의 뒤통수에 던졌다. 그제야 발걸음이 멈춘다.
“너 아직도 달리기 좀 해?”
“진짜 존나 귀찮게 구네.”
“시합할래? 이번에도 네가 이기면 안 건드릴게. 대신 내가 이기면 수업 들어와.”
“안 건드리는 걸로 안 되지.”
“그럼 뭐 해 줄까.”
“자퇴해. 내 눈앞에서 꺼져라 좀.”
이래도 할래? 이길 자신 있어? 답이 늦어질 거라는 개천용의 예상과 달리 정성찬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너 얼굴 먼저 치료하고 훈련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그렇게 대답하는 표정이 너무나 태연해 개천용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정말 당연스럽게도 그날 개천용은 정성찬에게 대차게 졌다. 속된 말로 개처발렸다. 숨이 딸려 헛구역질하는 추태까지 보이고 종내엔 정성찬에게 업혀서 나팔이 울리기 전에 복귀했다. 아무리 폐활량 좋은 물밑 사람이라도 몇 개월 동안 달리지 않은 데에 반해 정성찬은 그날 패배 이후 몇 개월을 아침마다 달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개천용보다 딱 일 분만 빨리 뛰자는 생각은 최고의 원동력이었기에 정성찬이 말했다. 야, 고맙다. 나 네 덕분에 비행단 체력 테스트 통과했어.
꼬우라고 한 말이었다. 도발 맞다. 녀석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어서 한 말도 맞았고. 우위를 선점하고 싶어서 한 말도 맞았고. 골려주고 싶어서 한 말도 맞았지만. 정말 고맙기도 했다. 개천용도 그걸 느꼈다. 모든 감정을 느껴 버렸다. 진정으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감상마저 결국 느껴 버린 것이다. 정성찬 등에 업혀 있던 개천용이 눈을 번뜩 떴다. 박원빈이 봤으면 바로 알아챘을 그 눈빛으로 생각한다.
정성찬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감사하지 않았으면 했다. 이딴 기분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
*
그때 했던 시합이 무색하게 개천용은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시합은 둘만의 일이었기 때문에 정성찬 혼자 수영장을 두리번거리다 말았다. 그렇게 수영장에 뛰어들기 전 준비 운동을 하던 중 정성찬과 박원빈은 나란히 불려갔다. 정성찬, 박원빈. 잠깐 밖으로. 먼저 이름이 불린 정성찬이 박원빈을 쳐다보았다. 박원빈 역시 영문 모르겠단 표정으로 정성찬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일이 드물어서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이 좀 깊었는데. 역시 직관적인 게 가장 낫겠지. 두 번 설명 안 하고 두 번 안 듣게.”
그래도 역시 말로 하긴 뭐 했는지 통지문 두 장을 꺼내어 잠깐의 고민 후 정성찬과 박원빈에게 쥐여 주고 말했다.
“정성찬 생도 비행단 선발에 취소되었음을 알린다. 동시에 지금부터 그 자리는 박원빈 생도가 대신한다.”
명년 이월 예정되어 있던 졸업 에어쇼 비행단에서 정성찬 생도는 선발 취소되었음을 알립니다. 때문에 금년과 내년 일 분기에 진행되는 최정예 비행단 배양 과정에서 정성찬 은(는) 제적除籍됩니다.
생도 대장으로 불리는 사 학년은 매년 이월에 졸업한다. 원래 에어쇼라 함은 졸업 예정자 중 뛰어난 생도들이 선보이는 것이었으나 입학생이 적어짐에 따라 후배들에게 그 임무를 넘기고 졸업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생도 대원부터 생도 부대장까지 지원 가능했으나 이론과 기초 훈련밖에 배우지 못한 대원이 뽑히는 일은 십 년에 한 번일 만큼 극히 드물었고 대체로 정규 교육 과정에 비행이 있는 부대장이 뽑혔다. 중대장 역시 뽑히긴 했다. 대원보다는 높은 비율과 부대장보단 적은 비율로. 성적이 우수하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높으며 단기간에 배울 수 있는 체력이 뒷받침되는 자. 금년엔 중대장 중 정성찬 포함 셋만 뽑힐 정도로 적었다. 그만큼 엄청난 기회였다. 삼 학년이나 되어서 배울 수 있는 걸 남들보다 빨리 배운다는 것.
그런데 제적이란다. 아예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졌다고. 정성찬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굳어 버렸다.
“왜요?”
발화자는 박원빈이었다. 정성찬에겐 꼬박꼬박 붙여 쓰던 다나까는 개나 준 말투로. 인간성 있는 교수는 굳이 그 말투를 지적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설명할 일은 아니라는 듯 각자 방에도 통지문이 갔을 거라는 말을 남겼다. 무성의하게 뒷모습을 보이자 박원빈이 교수를 붙잡으려 했다. 그보다 정성찬이 박원빈을 붙잡는 게 빨랐다. 욱해서 무어라 외치려는데 정성찬이 검지를 펴 입술에 닿을 듯 댔다. 얕은 떨림이 눈에 보였다. 그때와 같다. 둘의 첫 일탈이 떠오르는 제스처였다. 비록 정성찬은 그때만큼 웃고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슬퍼 보였지만.
“잘된 일이지.”
“뭐가 말입니까.”
“난 곧 있으면 삼 학년이고 짬 찼으니까 저절로 조종대에 앉게 될 건데 넌 일 학년이고─”
“그래서요?”
“그래서 잘된 일이라고. 남들보다 빨리 시작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뭐가 잘된 일인데요!”
“난 네가 화난 이유를 모르겠다 원빈아.”
박원빈이 숨을 흡 들이켰다.
“넌 기뻐야 하는 거 아니야? 대원 중 유일하게 비행단인 것 같은데. 게다가 내가 너한테 화낸 것도 아니잖아. 지금 나⋯⋯ 뭐가 됐든 축하하잖아.”
“⋯⋯⋯⋯.”
“나 대신 화낸다고 나아지는 것도 없고 기쁘지도 않아. 나 신경 안 써도 돼. 왜 이렇게 됐는지 알 것 같으니까. 이거 내가 초래한 거야. 후회 안 해.”
“화도 안 나요?”
“화내 봤자니까.”
“전 존나 화나는데. 지금. 선배한테.”
“너 말을─”
“저 비행단으로 선발되고 싶었던 적 없었어요.”
“그걸 비행단 선발되고 싶었던 내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네.”
“선배랑 같은 하늘을 날고 싶어 했던 거지.”
박원빈이 정성찬 눈을 이렇게 오래 안 피한 적 있던가. 이렇게 진득하게 맞춘 적이 있던가. 고백 가까운 말을 소화시키는 동안 박원빈은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우뚝 굳어 있던 정성찬도 그제야 화가 났다. 미미한 돌로 머리를 맞았을 때도. 객기로 도전했다 보기 좋게 발려서 자존심이 구겨졌을 때도. 수영장에 빠져 정수리가 꾹 눌려 숨넘어갈 뻔했을 때도. 선발 오류라는 변명조차 안 하고 제적이라는 말로 저를 치우려 해도. 교체된 걸 당사자들 앞에서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알려도 화나진 않았다.
같이 훈련하고. 그 핑계로 매일을 붙어 있고. 비행할 때 얼마나 열정적인지 얼마나 눈이 반짝이는지 옆에서 볼 수 있었는데. 같은 하늘을 영위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날렸다. 제 마음을 인지하고 나니 그제야 화가 났다. 정말로. 그리고 아쉬웠다. 너무나.
정성찬은 주먹을 꽉 쥐고 결의에 찬 눈빛으로 어딘가 향했다. 문을 두드린다. 느릿하게 나온 개천용은 정성찬의 표정을 보고 옅게 웃었다. 무슨 목적인지 묻지 않아도 알았다. 개천용이 예상한 반응은 두 가지였다. 첫째, 피떡이 될 때까지 자신을 패려고 들 것이다. 둘째, 빌 것이다. 어떤 것을 빌지는 몰라도 그게 뭐가 됐든 제게 빌 것이다. 그렇게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을 예상했다.
“너 네가 애들 사이에서 개천용이라 불리는 거 아냐?”
“알지.”
“너도 네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이게 궁금해서 왔어? 당연한 걸 묻네. 너도 물밑 출신 신기하잖아. 동물원 원숭이 보듯 봤잖아. 아니야?”
전에 없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개천용이 눈썹을 까딱였다. 그리고 그 순간 정성찬 눈에 있던 노기가 사라졌다.
“아닌데? 난 너 낙하산으로 봤지. 소장 애인이라길래 섹스 전형으로 들어왔나 보다 했는데. 그래서 섹스밖에 할 줄 모르고. 섹스밖에 할 줄 모르는 주제에 핸드폰까지 하고.”
“하고 싶은 말 알고 있으니까 괜히 긁으려고 시도하지 마라. 본론부터 얘기해.”
“근데 아니더라. 너 잘 뛰더라. 기초 체력 자체가 다르던데. 그래서 멋있게 생각했어. 이미 준비된 거였고. 일 년 먼저 입학한 나보다 나았고.”
“뭐?”
“근데 지금은 너무 불쌍하다.”
노기가 사라진 대신 다른 게 들어찼다. 무관심. 한 방 먹이고 싶다는 승부욕. 슬픔. 너무 다양한 감정이 섞였지만 거기서도 너무 확연히 드러나는 연민이 있었다.
“이 말을 하면 네가 여태 느꼈던 게 전부라고 생각하겠지. 네가 맞다고. 그니까 변명 안 하고 말한다.”
“⋯⋯⋯⋯.”
“너 존나 불쌍해.”
존나 불쌍해서 화도 안 나. 그니까 네가 맞다고 생각하고 살아. 내가 확신을 줄 테니까. 내가 주는 확신 속에 살아. 넌 불쌍해. 정말로. 개천용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꽉 쥔 주먹이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난 죽어도 네가 원하는 반응 안 해 줘.”
“⋯⋯⋯⋯.”
“그것도 참 불쌍한 일이지. 원하는 상대한테 원하는 반응을 못 받는 거.”
정성찬은 개천용을 정말 개천에서 난 용으로 생각한 적 없었다. 소장의 섹스토이. 목표점. 껄렁 보이. 까만 애. 멋있는 애. 친해지고 싶은 애. 배배 꼬인 애. 그리고 모든 것을 지나 불쌍한 애까지. 그 모든 걸 느껴 버린 개천용이 정성찬이 떠난 자리를 보다 고개를 들었다. 목을 돌려 근육을 푼다. 눈에 힘을 주어 똑바로 뜨고 정면을 응시했다. 투명한 창밖 내려앉은 밤에 자신이 비친다. 눈을 맞추며 생각한다. 그렇구나. 죽어도 네게 원하는 반응을 얻을 수 없다면.
*
그날 후로 박원빈을 볼 수 없었다. 비행단으로 선발된 이들은 다른 건물로 옮겨져 훈련을 받았고 식단도 달라져 식당에서도 마주칠 수 없었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분명 할 말이 있는데. 끝내야 할 대화가 있는데. 우리는.
“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미 마샬러 자리 다 찼지.”
“어떻게 좀 안 돼? 한 번이라도. 얼굴 가리고 내가 대신 들어가는 건? 한 번만. 진짜 한 번이라도.”
마샬러는 항공기 유도원을 뜻한다. 비행기가 정해진 지점으로 오도록 유도하는 역할인데, 봉이나 수신호로만 조종사와 소통하기 때문에 얼굴을 가려도 딱히 문제가 없긴 했다. 다만 비행단과 비행단을 돕는 크루로 선정되지 않은 생도가 비행장에 출입되는 게 엄격히 금지된 시즌이다. 에어쇼를 선보일 졸업 때까진 극비로 이루어져야 했다. 이번에 마샬러를 보조하는 윙 가드로 참여하게 된 정성찬의 친구가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마샬러를 하루나 바꿔치기하라고? 마샬러한테 그딴 부탁을 하라고, 내가?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마샬러 노릇은 할 줄 아냐? 너는 친구 곤란하게 이딴 부탁 왜 하는데 진짜 하. 정성찬이 사슴 눈으로 쳐다보자 마른세수를 다섯 번 한숨은 열 번 정도 쉬더니 답했다. 딱 하루. 일단 물어는 본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침입한 비행장은 귀가 멀 것처럼 시끄러웠다. 마샬러와 비행기 사이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워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면 곤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우려보단 순조롭게 마샬러 노릇을 하고 몇 번의 비행을 눈으로 훔쳐본 후에야 조종대에 앉은 박원빈을 볼 수 있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긴장감이겠지만 정성찬 역시 그랬다. 최신형 T-6 텍산 II에 올라탄 박원빈이 준비됐다는 사인을 주었다. 정성찬은 그의 앞으로 가 가렸던 얼굴을 내보였다. 멀지 않은 거리인지라 눈이 마주쳤다. 눈만 내놓고 있는 박원빈의 동공이 커진 게 여기서도 느껴졌다. 믿기지 않는 듯한 눈치다.
본격적인 유도 사인을 주기 전에 정성찬은 자신임을 못박고 싶었다. 우리끼리 알아볼 만한 게. 그런 게 있던가. 우리 사이에. 그런 생각을 하다 무의식적으로 검지손가락을 제 입에 대었다. 쉿. 그 상태로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눈이 휘어져라 웃었다. 우리끼리만 아는 은밀한 수신호도 아니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 만한 제스처지만서도. 어째 박원빈은 그때 그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아서.
그 후 다시 얼굴을 가린 정성찬이 본격적으로 유도 사인을 보냈다.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어 손바닥을 펼친 상태에서 유지한다. 올 클리어. 두 팔을 들어 오라는 손짓을 한다. 앞으로 이동. 박원빈은 다른 날보다 빤히 마샬러를 응시했다. 그 안에 있을 정성찬을 말이다. 정성찬 역시 그랬다. 조종대 안에 있는 박원빈을 눈으로 담았다.
그리고 마침내 비행하는 것까지. 잘 착륙하는 것까지. 그제야 정성찬이 웃었다. 막상 눈으로 보면 시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박원빈이 자랑스럽기만 해서.
“여기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잘.”
“장난하지 마십시오.”
“말투 너무 딱딱하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땐 다나까 안 썼잖아.”
“선배!”
모든 훈련이 끝나자마자 박원빈이 정성찬을 붙잡았다. 박력 있게 끌고 가 아무도 없는 건물 벽에 던지듯이 놓아 버린다. 아야야. 정성찬이 그런 추임새를 넣어도 아랑곳 않는다.
“잘하더라. 재능 있던데?”
“비꼬시는 겁니까?”
“너나 걔나 왜 그러냐. 이번에 입학한 애들 특인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좀.”
“⋯⋯⋯⋯.”
“진짜 잘했어. 네가 제일 경로 안 벗어났어. 나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거든.”
박원빈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듯 고갤 푹 숙였다. 작게 말한다. 선배님께 들을 칭찬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요. 작은 목소리였으나 정성찬은 대답해 주었다. 그른가. 그치. 지금은. 정적이 이어졌다.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에 정성찬이 장난스럽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잘해서 질투 나더라.”
“죄송합니다.”
“나도 같이 잘하고 싶고 막.”
“조종대 앉으시면 저보다 잘하실 겁니다.”
“나도 너랑 같이 연습하고 싶고.”
“⋯⋯⋯⋯.”
“너랑 같이 비행하고 싶고.”
박원빈이 고개를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자신을 숨막히게 하는 눈과 마주한다.
“너랑 같은 마음이고.”
비행장에 내려앉은 밤이 너무 까맸다. 연습이 끝나자 활주로에 켜져 있던 형형색색 불빛이 하나둘 꺼져 비로소 너무 어두워졌다. 정성찬이 박원빈의 흑진주 같은 눈을 보고 있다면 박원빈은 정성찬의 청아한 눈을 보고 있었다. 두 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기 전 박원빈이 말했다. 그때 골목에서 이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선, 선배는 왜 비행하고 싶습니까?”
마음을 확인한 둘은 탁 트인 활주로를 배경 삼아 바닥에 앉았다. 궁금한 게 많은지 이것저것 종알대던 박원빈이 열 시 전까진 돌아가야 한다는 정성찬에 말을 빨리했다. 말을 빨리하려고 할 때마다 말을 더듬는구나 싶어 정성찬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구름 위로 올라가서 별 구경하려고.”
“예?”
“어릴 때 사진으로만 봤어. 밤하늘에 별 있는 거. 예쁘던데. 이왕 파일럿 도전하는 김에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보고 싶어.”
일 학년은 이론과 기초 체력 훈련을 하고 이 학년은 정비 관련 업무를 주야장천 배우다 삼 학년 준비를 시작할 즈음에 시뮬레이터 훈련을 했다. 실제 비행과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가상 비행 장치인데, 비행 단계는 착륙, 통과 고도는 구름, 불규칙한 바람 20m/s, 활주로 시정 100m 등 자신이 원하는 대로 환경을 설정할 수 있었다. 바다에 착륙하는 시뮬레이션. 엔진이 꺼지는 비상 상황도 구현 가능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밤하늘에 별이 가득하다는 설정은 없어서 정성찬은 항상 진짜 비행을 꿈꿨다.
밤 비행 해 본 적 없고 아직 높은 고도까지 닿아본 적 없는 박원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비행 중 별구경이라니. 담력 엄청 좋아야 할 것 같은데. 박원빈에겐 그저 엄청 무서웠던 기억밖에 없다. 바닥에 처박히거나 바다에 빠지면 어떡하지 같은 감상들.
“너는?”
“전쟁 나면 다른 땅으로 빨리 도망가려고 지원했습니다. 보통 파일럿은 귀해서 어느 땅이나 잘 받아 주잖습니까.”
“뭐?”
정성찬이 어처구니없단 듯 푸학 웃었다. 이런 이유는 처음 들어본다. 그래. 그럼. 전쟁 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자. 네가 나 태우고 운전해. 장난으로 한 말에 박원빈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성찬이 미소 지었다.
“나도 빨리 배우고 싶다. 너랑 같이 튀려면 빨리 배워놔야 하는데, 그치.”
“저도 선배님께서 비행하는 거 보고 싶습니다.”
정성찬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몇 세기 동안 사람이 여럿 죽고 산업 활동이 줄어들어 하늘이 맑을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수증기의 증가와 빛 공해로 하늘은 밤낮없이 뿌옇다. 구름 위를 올라가야만 뭐라도 좀 보일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것은 파일럿의 특권 아니던가. 평생 비행기를 타 볼 일 없는 이들은 뿌연 하늘만 볼 건데. 정성찬은 살면서 본 적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별을 상상하며 올려다 본다.
“원빈아 네가 먼저 별 보게 되면 꼭 어땠는지 얘기해 줘야 돼. 지금은 네가 좀 더 유력한 것 같다.”
“예. 약속합니다.”
“나도 전쟁 나면 너 먼저 들고 튈게.”
둘은 마주보고 푸핫 웃었다. 자기도 호탕하게 웃은 주제에 정성찬이 묻는다. 너 왜 웃어. 장난 같아? 나 진지해. 박원빈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저도 진지합니다. 그냥 꿈이 서로 바뀐 것 같아서 웃었습니다. 저는 별 보고 싶은 적 없는데 이제부터 보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웃음기 섞인 문장 주제에 이렇게 로맨틱해도 되는가. 정성찬이 마음을 못 참고 박원빈을 당겨 다시 입을 맞추었다.
별 따다 주겠다는 말. 알았으면 이때 해 줬을 거다.
*
빨리 에어쇼가 끝나야 본 생활관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요즘 박원빈은 온통 그 생각뿐이다. 일 학년인지라 핸드폰도 사용 못 한다. 졸지에 정성찬을 곰신 만들어 버린 것이다. 수차례 이어진 전쟁이 끝나고 징병제가 사라진 지 백 몇 년쯤 됐으니 곰신도 개천용과 마찬가지로 사어에 가까웠다. 처음 들었을 땐 곰이 그 덩치 큰 동물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고무신이란다. 고무신도 사진으로만 봤다. 그런 걸 정성찬이 신었다고? 곱게 자란 정성찬이 고무신을 신어 봤을 리 만무한데. 정성찬이 진짜 그 예쁘지도 않고 발만 아플 것 같은 고무신을 신고 생활하는 것도 아닌데 빨리 고무신 벗겨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훈련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일월이다. 졸업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만 춥진 않았다. 더우면 섭씨 십오 도 정도 날씨였다. 일월 하면 떠오르는 눈은 비로 대체된 지 오래되었건만 어째 하늘이 뿌옇고 습하기만 할 뿐 비는 며칠째 내리지 않는 나날이었다. 박원빈이 제일 비행하기 싫어하는 날씨다. 차라리 비가 시원하게 내리면 맞으면서 비행하면 되건만 이렇게 꾸룩꾸룩한 구름은 기분을 처지게 했다. 꼭 뭔 일이 날 것처럼 으스스하기도 했고. 박원빈이 을씨년스러운 하늘을 넋 놓고 보고 있을 때 관제탑의 허가가 떨어졌다. 클리어드 포 테이크오프. 간결한 음성과 함께 ECAM 화면이 변했다. 박원빈 역시 짧게 대답했다. 테이크오프 체크리스트 컴플리트. 다만 말을 하면서도 뭔가. 뭔가 좀 놓고 온 기분이었다. 박원빈이 말하는 컴플리트 뒤에 한없이 점이 찍혔다.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됐다. 박원빈은 활주로 끝에 있을 바다를 향해 달려야 했음에도.
“정지. 오늘은 여기까지 한다.”
박원빈이 착륙하자마자 떨어진 명령이다. 박원빈은 선두를 차지하기에도, 그렇다고 꼬리를 차지하기에도 짬도 뭣도 없는 유일한 생도 대원이었기에 항상 중간이었다. 뒤에 대기하고 있어야 할 생도 부대장들이 죄 사라져 버렸다. 대기석에 사람이 없어 헬멧 마스크를 다 벗지도 못한 채 두리번거리다 어정쩡하게 내렸다. 땀에 젖은 머리칼과 플라이트 슈트를 본 교수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생도, 환복 후 본 생활관으로 복귀한다. 박원빈이 멍청한 소릴 냈다. 예?
“생도 생활관에 불이 났다. 사상자가 확인됐으니 장례식이 준비되고 끝날 때까진 훈련 없이 묵념한다.”
“⋯⋯⋯⋯.”
“애도복이 없을 경우 군복을 착용한다. 지금은 본 생활관으로 복귀 후 대기.”
교수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박원빈은 우뚝 굳어 있었다. 턱끝과 코끝에 매달린 땀방울이 다 마를 때까지. 평소보다 빨리 말랐다. 날이 추운가. 오늘 몇 도지. 십 도쯤일까. 아니 그것보다 낮은 것 같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으니까. 죄 회피적인 생각이었다. 땀도 다 말랐고 뛰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너무 빨리 뛴다. 박원빈은 환복하라는 교수의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명령을 무시하고 뛰었다. 뛰면서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남들은 모르겠고. 남들 어떻게 됐는지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니었고.
선배는 아닐 거야. 형은 아닐 거야. 성찬이 형은 안 된다. 정성찬은 아닐 거다. 정성찬 너는 아니어야 했다.
박원빈은 입으로도 생각으로도 정성찬을 형이라고 부른 적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때가 처음이었다. 형이라는 말.
*
선배들의 졸업식을 위해 준비했던 에어쇼는 추모 비행이 되어 버렸다. 새까맣게 타 버린 중대장 생활관은 아직도 복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일 학년은 이론과 기초 훈련으로만 일 년을 보낸다. 때문에 박원빈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 일의 주도면밀함을 모를 수 없었다. 항공 가솔린은 휘발성이 높고 발화점이 매우 낮아서 불꽃이나 스파크에 쉽게 반응한다는 것. 때문에 강한 화재와 폭발성을 가진다는 것. 평지에 뿌린다 쳐도 연료가 빠르게 기화되어 공기와 혼합하기 때문에 즉시 불이 붙을 수 있다는 것. 주로 소형 항공기나 고속 비행기의 엔진에 사용되기 때문에 연료 시스템은 대개 비와 습기에 강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 비 오는 날에도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연료를 고른 것. 항공 연료는 압력과 온도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에 특수 금속이나 내부 처리된 합성 물질로 만들어진 탱크에 담긴다는 것.
그러니까. 걔는. 걘. 그 비싼 금속으로 만들어져 무거운 이동식 연료 탱크를 끌고 가면서 걔는.
개천용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반 가솔린으로 타죽는 게 더 아플까. 항공 가솔린으로 타죽는 게 더 아플까. 어떻게 해야 정성찬을 더 고통스럽게 죽일까.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렇다면 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오늘 비행에서 신기한 걸 봤습니다.
형.
별이 떨어지기도 하나요?
*
답이 없어 직접 알아봤는데 너무 어려운 말만 있어서 핵심만 가져왔습니다.
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된대요.
그래서 인생네컷이 바래지지 말라고 빌었습니다.
너무 거창한 건 또 안 이루어질 것 같아서.
*
근데 사실 거창한 거 빌었습니다.
일단 저는 형의 시간만 되돌릴 겁니다.
그리고 나보다 훨씬 어려진 형을 혼낼 겁니다. 아주 많이요.
당신에게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잡도리할 겁니다.
저는 잘빠진 공군복을 입고 말할 거예요.
군대 근처 얼씬대지 말고 썩 꺼지라고.
형 진짜 군대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