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ART VIDEO AFTER

꽃 태우는 사회
by. 네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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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꽃병을 안은 채 ‘여보―’라고 부른다. 엄마가 그 안에 든 꽃이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지는 십여 년이 지났다. 원빈이 일곱 살 때 일이었다. 남들은 가족과 보낸다는 크리스마스 이브, 엄마가 사라졌다. 이른 아침, 원빈의 머리맡에 선물 꾸러미를 둔 채였다.

누구도 이를 특이하게 여기진 않았다. 그분이 겉도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결혼기념일에도, 원빈의 생일에도 그랬다. 성탄절 전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아빠 역시 암실에서 사진을 보며, 스펀지로 현상할 면을 문지르고 있었다. 저러고 금방 돌아올 거라 생각했을 테다. 그러나 엄마는⋯⋯ N타워에서 추락했다는 목격담과 함께, 꽃이 되어 돌아왔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벌어진 일을 나열한 것이다. 의혹한다 해도 이해한다. 사람이 떨어졌는데 어떻게 꽃이 되겠는가? 그러나 그건, 분명히 그해부터 돈 역병이었다. 뉴스에 죽음이 대대적으로 탔다. 「성탄절 자정, N타워에서 모 여성이 추락해 꽃이 된 모습으로 발견!」 패널들이 나와 토론하기도 했다. 대체 엄마가 성탄절이 되자마자 떨어진 이유는 무엇이며, 또 꽃이 된 이유는 무엇이냐는 거였다. 이후, 비슷한 죽음이 반복되자 경찰 측에선 다음과 같은 입장을 공표했다.

최근 꽃이 되어 죽은 고인 간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인이 사용하던 전자기기를 포렌식한 결과, 누군가를 강렬히 짝사랑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부 사망자는 최초로 꽃이 된 A씨처럼 자살을 시도했고, 다른 사망자들은 일상생활 중, 특히 새벽이나 밤에 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현재 유족들의 허가를 받아, 꽃을 조사하고 있으며⋯⋯.

아빠가 엄마를 모델로 한 사진전을 준비할 즈음이었다. 매년, 그분을 뮤즈로 하던 사진전이 취소됐다. 엄마의 기일로부터 나흘째였다. 대신, 아빠는 꽃을 안은 채 경찰들을 노려봤다. 절대로 황명희 씨를 주지 않을 거라 떼를 썼다. 아, 명희 씨는 박원빈 엄마다. 경찰들이 난감한 기색을 했다. 예술하는 놈이 저리 나와봐야 무슨 힘이 있겠느냐마는, 아빤 재벌집 막내라 엄마를 지켰다. 그 뒤, 사진전을 열지 않은 채 꽃과 함께 칩거생활을 했다.

한 예술가의 기이한 몰락이었다. 당연히 친가에서는 아빠를 보며 혀를 찼다. 박원기가 사랑 때문에 미쳤다고 했다. 그런데 그 아들, 원빈은 모르겠다. 정말로 아빠가 사랑 때문에 미친 게 맞을까? 엄마가 누굴 짝사랑해서 죽었다면 대상이 아빠는 아닌 건데, 정작 아빠는 꽃병을 끌어안고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 꽃이 되지는 않잖아.

원빈이 눈을 굴렸다. 고개 숙인 채 위로 뜨자, 아빠가 한 소리 했다. 어제 속눈썹을 안 잘랐구나. 손톱이 긴 자식한테 잔소리하듯 태연한 말이었다. 원빈이 랍스터 옆에 있던 가위를 들었다. 한 손으로 속눈썹을 잡고, 끄트머리를 약간 잘랐다. 만족한 아빠가 꽃을 든 채 사라졌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빠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 건 신기하지 않았다. 의아한 점은 어째서 엄마가 아빠와 결혼했는지다. 그리고⋯⋯ 사람이 꽃이 될 만큼 사랑하고 싶어지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턱을 괸 채 고개를 들었다. 시야 끄트머리에 엄마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남들은 그럴싸한 작품을 거는 다이닝 룸이, 이 집에선 엄마를 장식하는 곳에 불과했다. 사진 속 엄마의 속눈썹이 원빈보다 확연히 짧았다.

이후, 원빈은 외할아버지에게서 엄마 얘기를 들었다. 부모님은 맞선으로 결혼했는데, 처음 만난 게 대학생 때였단다. 아빠가 우연히 엄마를 본 뒤, 계속 졸라 선을 잡은 것이 발단이었다. 외가는 친가의 하청업체라 별수가 없었다. 이에 외조부는 엄마를 억지로 맞선에 보냈다.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다며 파투를 낸 엄마에게 짐짓 으름장도 놓았단다. 하지만 그게 아빠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연거푸 거절당하자, 도리어 새로운 제안을 했다. 엄마가 그렇게 결혼이 싫다면, 일 년만 미국으로 가 함께 지내달란 것이었다. 데뷔전의 뮤즈가 되어주면, 결혼은 엄마 뜻에 따르겠다고.

엄마는 그렇게 미국으로 갔다. 원치는 않았으나, 복합적인 사정이 겹친 탓이었다. 하청업체라 친가를 거스르기 힘든 외조부, 서서히 경제적인 간극을 느끼며 멀어지던 애인⋯⋯. 상대가 ‘너를 위해 헤어지는 게 좋겠다’ 한 것이 원동력이 되었다. 엄만, 잠깐 시간을 가지자며 아빠의 뮤즈로 활동했다. 그런데, 그 사이 엄마의 중심축을 흔드는 일이 벌어졌다. 상대가 엄마를 포기하고 그 무렵 소개받은 동네 또래와 결혼한 것이다. 심지어는 아이까지 뱄다.

이걸 어떤 경로로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엄마는 알고 나서 크게 절망하다가 프러포즈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 뒤로 약 일 년 반을 잘 사는 듯 보였다. 보이는 것과 실제가 다를 수 있단 건, 조금 늦게 알았다.

아직도 외조부는 원빈을 낳은 날, 엄마에게 왔던 전화가 선명하단다. 나도 남편도 닮았는데, 정지철의 얼굴은 하나도 없다고.

지철, 정지철, 엄마의 애인. 당연한 거였다. 엄마가 결혼해서 몸 섞은 사람은 애인인 지철 씨가 아니라, 박원빈네 아빠 박원기였으니까. 그러나 엄마는 그때부터 무너졌다. 정지철에 대한 미련을 돌이켜 기어이 집으로 찾아갔다.

모르긴 몰라도 집요하게 매달렸을 테다. 원빈은 제 부모의 지독함을 알았다. 뭐든 엄마와 비슷하게 하라고 압박하는 아빠처럼, 엄마 역시 생전 ‘정지철의 아들과 닮게 굴라’ 종용한 적이 있었다. 그걸, 정지철에게도 똑같이 했다고 생각하면 말이 됐다. 하지만 그쪽에선 이걸 다 외갓집에 말했다. 외할아버지가 가슴을 쳤다.

 

“네 엄마, 명희가 12월 24일에 N타워에서 보자고 했다더라. 당신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니까, 오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나랑 네 할미는 그게 명희가 홧김에 뱉는 말인 줄 알아서 그저 박 서방한테 이해해 달라고 했다. 명희가 24일 날 외출하더라도 마음을 못 잡아서 그런 거니 한 번 눈감아 달라고⋯⋯.”

 

이다음 얘기는 원빈도 아는 거였다. 12월 24일에 N타워에 올랐던 엄마가, 12월 25일이 된 자정, 추락해서 꽃이 됐단 거. 엄마의 핸드폰엔 모든 번호가 지워지고 정지철의 번호만 있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울었다. 자기연민을 달래주기는 싫어서 감사하다고 돌아섰다. 원빈은 그렇게 감정적이지 못했다. 그냥, 집안일을 봐주는 실장에게 ‘정지철’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외출하고 온 원빈에게, 아빠가 말을 걸었다.

 

“오늘은 몸무게를 안 적고 나갔더구나.”

“네, 뭐.”

“아침밥은 한 숟가락 남겼고.”

“⋯⋯.”

“남긴 건 잘했다. 명희도 기뻐할 거야.”

 

대체 뭘요. 대학까지도 키 큰다는 남자애가 밥 한 숟가락 덜 먹은 걸요? 원빈이 돌아봤다. 여전히 아빠 품에는 꽃이 있었다. 엄마가 박원빈의 무언가에 기뻐할 리 없지만 대꾸할 이유도 없었다. 가정부에게 이끌려 체중계 앞에 섰다. 벽에 표가 그려져 있었다.

첫 열은 날짜⋯⋯. 두 번째 열은 아침 몸무게. 세 번째 열은 저녁 몸무게. 네 번째 열은 +14, +15 따위의 도배. 그리고⋯⋯ 모퉁이에 유성 매직으로 적힌 두 글자. 42. 체중계에 원빈의 몸무게가 나왔다. 가정부가 원빈에게 보드마카를 건넸다.

 

“도련님.”

 

원빈이 내려다봤다. 보드마카를 잡고는 표에다 가득 채웠다. 오늘은 2월 24일. 아침 몸무게 못 재서 작대기 표시. 저녁 몸무게 55. 마지막 네 번째 열, 55-42=13.

 

 

 

 

 

사흘쯤 지나서, 실장에게 ‘정지철’의 자료를 받았다. 그 남잔 재작년에 N타워에서 추락사했다고 한다. 엄마와 달리 꽃이 되지는 않았다. 뭐, 엄마를 두고 딴 여자랑 결혼했으니 당연할 것이다. 서류를 팔랑거렸다. 그 밖의 내용은 식구들에 대한 거였다. 아내랑, 박원빈보다 한 살 많은 아들이 있었다. 아내야 원래 남남이었을 테니 아들 쪽에만 관심이 갔다. 나머지를 태우고 관련된 걸 읽었다. 아들의 이름은 ‘정성찬’이었다. 생일은 9월 13일. 학교는 일 년 꿇었다. 정지철이 죽은 뒤, 제 엄마가 폐인이 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단다. 생각해봤다.

저라면 엄마가 폐인이든 아빠가 폐인이든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꽃을 ‘여보’라 하는 아빠가 있었지만 정정할 마음이 들진 않았다. 나보다 남이 중요해, 일 년을 꿇을 일, 할 리가 없다. 하지만 바로 그 미련함이, 엄마가 정지철을 사랑한 이유 같았다. 자기 자식보다도 정지철을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 원빈이 입술을 물었다. 충동이 들어, 저녁 식사 때 아빠한테 말했다.

 

“아빠, 전학 가게 해주세요.”

 

아빠가 흘겨봤다. 무언가 말 말고도 꼬투리를 잡을 모양이었으나, 박원빈 귀 한쪽에 달린 진주 귀걸이에 멈칫했다.

 

“명성고등학교요.”

“⋯⋯.”

“들어주시면 나머지 귀걸이도 달게요. 그리고 저기, 올라갈게.”

 

원빈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꽃이 가득한 화단에 분수대가 있었다. 아빠의 마지막 전시회였던 「살로메」의 메인이 찍힌 곳이었다. 엄마와 똑같은, 로벨리아가 잔뜩 피어있는 곳이기도 했다. ‘악의를 상징하는 꽃’과 ‘자길 봐주지 않는 남자의 잘린 머리에 키스하던 살로메’.

아빠의 눈이 가늘어졌다. 원빈이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엄마가 자주 쓰던 립스틱 빛깔이 묻어났다.

 

 

 

 

 

그다음 주에, 원빈은 명성고등학교로 전학 갔다. 반까지 콕 집어 정성찬과 마주할 수 있었다. 첫인상은 단순했다. 엄마가 정지철을 사랑한 이유가 ‘남한테 다정해서’가 아니라 ‘얼굴’ 때문이었나⋯⋯. 미리 보고 왔지만, 정성찬은 남달랐다. 누구든 꽃이 될 만큼 열렬히 짝사랑할 것 같았다. 물론, 그 안에 박원빈은 없었다. 원빈은 ‘누구’가 아니라서.

엄마한텐 정지철의 아들처럼 되란 소릴 들었고, 아빠한텐 뭐― 보시다시피였다. 박원빈이란 사람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저와 달리 이목구비를 따라가는 존재감에 입술을 내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꽃이 될 만큼 사랑할 법한 사람을 궁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삼 기분이 나빴다. 저는 단 한 번도 박원빈이었던 적이 없는데, 일 년 꿇고 시궁창에서 사는 주제에 언제나 아무나의 사랑을 받다니.

일 년 꿇은 것치곤 인기도 많았다. 여자애들이야 당연했고, 남자애들도 서열에서 밀린 짐승마냥 설설 기었다. 성찬이 딱히 뭘 하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원빈이 턱을 괴었다. 제 자리는 그 형과 한참 떨어진 문쪽이었다. 로맨스 주인공처럼 창가에 앉은 몸을 보다가 입술을 삐죽였다.

노트를 펼치고, 그날 들은 수업 대신 다른 걸 적었다. 볼펜 끄트머리가 흔들렸다.

 

 

 

 

 

정성찬이 어떤 시선을 의식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눈길을 끄는 게 일상인 탓이었다. 이번에도, 바닥에 노트가 떨어져 있지 않다면 몰랐을 것이다. 미간을 좁혔다. 겉면에 이름이 없어, 필체를 보고 찾으려 했더니만 희한한 문장이 적혀있었다.

정지철 ― 정성찬

엄마가 사랑한 남자 ― 정지철 아들, 화과자처럼 생겼다..

얘네 아빠만 아니었으면

가슴이 내려앉았다. 팔짱을 껴 오는 여자애 온도가 아득해졌다. 구길 뻔한 걸, 간신히 내려놨다. 새로 온 전학생 자리였다. 이런 걸 적을 애라곤 반에 걔밖에 없었다. 고3이 시작할 때 전학 오더니만 이런 애인 줄은 몰랐다. 그날은 종일 원빈의 자리를 흘기며 생각에 잠겼다.

눈에 익은 외모기는 했다. 저 정도 낯이 흔할 린 없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그 여자의 아들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황명희’. 성찬은, 모든 중요한 것들을 말이 아닌 글씨로 받곤 했다. 재작년 12월 25일도 그랬다. 이브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가, 품에 편지를 품은 채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성혜와 성찬에게―.

나는 성혜, 너에게 충실하고 싶었다. 우리 아들 성찬이를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 역시 여전하다. 다만 명희가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명희에게 사랑과 죽음 모두를 안겨준 사람이다. 명희가 이제는 내게도 죽음을 알리고 싶은가 보다. 미안하다. 나를 오래 기억하지 말아라.

이 일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장이 사라졌고, 어머니와 성찬이 삶을 이어나가야 했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저 편지를 읽어 진탕 돌았다. 그 무엇도 먹지 않고, 먹여 놓으면 냅다 이불이나 벽에 지리는 식이었다. 도무지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일 년 꿇었다.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닥치는 대로 했다.

그래봐야 미성년자가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손 놓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를 챙기며 입에 풀칠할 돈만 벌어갔다. 그때, 한 제안을 받게 되었다. 부잣집 딸이 우울해 죽고 싶은데, 아름답지 않게 갈 용기는 없으니 이리 해 달란 것이었다. 최선을 다해 유혹하라고. 그럼 널 짝사랑해 꽃이 될 거라고⋯⋯.

페이로는 오천만 원이 주어졌다. 성찬의 형편에 거절할 일이 아니었다. 그 뒤, 성찬은 바로 그 부잣집 딸과 데이트했다. 키스해줬고, 손을 잡아줬고, 안아주었다. 그해 말, 고객은 정말 꽃이 되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알음알음 퍼졌나 보다. 다른 고객들이 성찬을 찾기 시작한 거다. 앞선 건만큼 페이가 세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알바보다는 돈이 됐다. 노동대비 그렇다는 것이다. 몇 건만 받아주면, 어머니를 살피면서도 학교에 갈 여유가 생겼다. 어느새 그게 전업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황명희의 아들이 전학 온다고? 그것도 같은 반에―.

성찬이 눈을 내리깔았다. 근 일 년간, 꽃이 되게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쉬웠다. 그냥, 곱상한 낯짝 유지하면서, 마음은 주지 않으면 됐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다. 누군가 꽃이 될 때마다, 자기연민 멘헤라들이 찾아올 때마다, 성찬에게는 지극한 환멸이 덮쳤다. 제 피는 사람을 꽃이 될 만큼 앓게 하는 재주밖에 없나 해서였다. 어머니도 정신을 차리면 이 일에 괴로워할 것이다.

늘, 어머니가 정신을 차릴 날만 기다리며 살아왔다. 그날이 왔을 때, 그분이 제게서 정지철을 연상할까봐 쓰렸다. 성찬에게 아버지와 황명희의 이름은 저주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황명희의 아들이, 제 발로 정성찬을⋯⋯. 성찬의 눈이 침전됐다. 여느 때처럼 방과 후에 여자애들 몇몇에게 키스를 해주고, 지폐 다발을 받았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안동소주를 사 갔다.

 

“엄마.”

 

성찬의 어깨에 꽃잎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들고 온 봉지를 보던 어머니가 아이처럼 달려들었다. 철에 맞지 않는 코스모스를 치워줬다.

 

“찬이는 칠칠맞아!”

 

성찬이 침묵했다. 병따개로 소주를 까자 어머니가 박수쳤다. 이분이 미쳐버린 이유를 알았다. 죽을 만큼은 아니어도 사랑했는데, 정작 상대는 결혼도, 죽음도 황명희를 위해 해서 그럴 것이다. 고통은 사람의 이지를 앗아가곤 한다. 그저 그리 쉽게 세상까지 앗아가진 않을 뿐.

타워 꼭대기에서 추락하지 않는 한, 괴로움만을 원인으로 한 죽음은 없다. 성찬이 야윈 뺨을 만져보았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을 눌러 담았다.

 

 

 

 

 

박원빈은 그 후로, 아무리 떼려 해도 끈끈이가 남는 스티커처럼 되었다. 어떤 날은 기분이 나빠 보였고, 어떤 날은 또 괜찮아 보였다. 그러다 어떤 날은, 처음 일감을 줬던 부잣집 딸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잔잔하고 우울하고 담백했다는 뜻이다. 그걸 다 봤다, 성찬은. 의식하고 있던 건 나중에 알았다.

언젠가부터⋯⋯, 자꾸만 그 애와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걔 표정이 아주 미운 걸 보는 듯했다. 기가 막혔다. 황명희 때문에 파탄 난 건 이쪽인데⋯⋯.  심지어 계속 눈이 맞는 게 짜증 났는지 이렇게 말했더랬다.

 

“오늘 점심, 나랑 먹어.”

 

황당함의 연속이었다. 대체 왜 여기 전학 왔는지 모르겠다. 할 말이 있으면 하든가⋯⋯. 전학 오고 하는 짓이 노트에 끼적대는 것과 쳐다보는 것 두 개라니⋯⋯. 성찬이 올려다봤다. 요 며칠 쟤 덕에 날 선 탓에, 조금은 치기 어리게 뇌까렸다.

 

“난 먹는 사람 따로 있는데.”

 

원빈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F 1.4.”

“⋯⋯뭐?”

“과잉 정보라고. 아까부터 계속 나 봤잖아.”

“그건 네가⋯⋯”

“그렇게 궁금하면 점심시간에 봐. 궁금하지도 않은 거, 뭐라도된 것처럼 들려주지 말고.”

 

어이도 없었다. 자기가 정성찬을 빤히 본 건 잊은 모양이다. 먼저 본 건 박원빈이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눈이 맞았으니까, 실상 정성찬 하나만 주구장창 봤을 터였다. 그런 것치고 하는 말이 뻔뻔했다. 음울하면서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었다. 성찬은 그 얼굴에 ‘너도 봤잖아’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찡그릴 뿐이었다. 그러자 그 애가 더 희한한 소리를 했다. 샘이 나고, 서럽고, 토라진 낯으로.

 

“예쁘다⋯⋯.”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말로는 싫다 하면서 두 눈이 떨어질 줄 몰랐다. 그렇다고 점심시간에 별짓을 한 것도 아닌 게, 아까처럼 쳐다보기는커녕 밥만 먹었다. 무슨 정성찬이 벽이라 혼자 먹는 외돌토리 같았다. 결국, 성찬이 먼저 입을 떼야 했다.

 

“넌 손톱 자라는 걸 못 본 것 같네.”

 

실없는 화제였다. 알맹이가 없었고, 정도 없었다. 그래도 다른 걸 입에 올릴 생각은 없었다. 얘 꿍꿍이를 알기 전에, 황명희 아들인 걸 안다는 패를 깔 생각은 없었으니까. 원빈이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머리통이 두드러졌다. 못지않게, 땡글땡글한 눈을 치떴다.

 

“신기하네⋯⋯.”

“뭐가.”

“나 보면 보통 남자앤데 머리 길다는 소리해. 아님 눈이 쏟아질 것 같다고 하거나.”

“⋯⋯.”

“변태.”

 

입을 다물었다. 진짜 가늠이 안 되는 애였다. 둘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아, 마지막에 일어나면서 한마디 더 들었다. ‘잘 먹었습니다.’ 성찬이 눈을 날큼하게 떴다.

마침 나가는 길엔 희정이를 만났다. 키스 한 번에 오만 원을 주면서, 낭만적으로 죽고 싶다 아우성치는 멘헤라였다. 실상은 죽을 생각도 없는 걸로 안다. 그 애를 내려다보다, 손을 잡았다. 뒤로 꽂히는 원빈의 시선은 무시했다. ‘황명희의 아들’. 거창한 타이틀이 성찬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신경 쓰이는 정도’였다. 미움이든 복수든 감정이 있어야 한다. 걔보다 멘헤라 희정이가 주는 오만 원이 중요했다. 봄철, 찬 바람이 불었다.

 

 

 

 

 

집에 들어가서 ‘다녀왔습니다’ 하는 순간을 싫어한다. 하고 나면 아빠는 원빈에게 둘 중 한 가지 태도를 보인다. 무시하거나, 아니면⋯⋯.

 

“걸음. 발 각도가 안쪽으로 2도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

 

가방을 고쳐 멨다. 못 들은 척 문을 열자,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손톱 자르는 날엔 빨리 들어오거라.”

 

원빈이 벙긋거렸다. 문을 닫은 채,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이제 와 따질 것도 없었다. 아빠가 저러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그냥, 방에 틀어박혀 지적할 걸 주지 않으면 됐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자니 머리맡에 놓인 로보트가 잘 보여서⋯⋯.

입술을 깨물었다. 저건, 엄마가 처음으로 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정성찬을 닮으란 소리만 하던 엄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준 선물⋯⋯. 저걸 준 날 엄마는 죽었다. 근래 질리도록 눈에 담는 이가 떠올랐다. 내가 정성찬이었으면 엄마는 죽지 않았을까⋯⋯?

명희에게 저는 좋은 아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엄마답지 못했다. 다만⋯⋯. 머리맡의 로보트가 원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개로 파고들자, 언제 들어왔는지 가정부가 네일 파일을 내밀었다.

 

“도련님, 다듬으실 시간이에요.”

 

원빈이 꿈틀거렸다. 제게는 좋지도 않은 엄마를 잊을 수 없는 이유가 두 가지 있다. 첫째, 엄마가 박원빈의 삶을 망쳐놓은 것 같아서. 둘째, 그런 엄마만이 박원빈을 박원빈으로⋯⋯. 원빈이 베개에 더 묻혔다. 일어나지는 않고 손만 내밀었다. 가정부가 한숨을 쉬었다. 싸한 공기, 로보트, 손톱을 파일링하는 소리 속에서 원빈이 침묵했다.

 

- 넌 손톱 자라는 걸 못 본 것 같네.

 

문득 맴도는 정성찬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2

 

 

 


 그 형은 오만 원을 주면 한철을 사랑할 것처럼 키스했다. 교실을 넘어, 뒤를 밟기 시작하고 내린 결론이다. 벚나무 뒤에서, 원빈은 목격했다. 성찬이 웬 여자애와 키스하고 있었다. 상대는 늘 바뀌었고, 주는 돈은 오만 원에서부터 몇십만 원까지 다양했다. 심지어는 교사가 키스하는 경우도 있었다. 생긴 것치고 불량한 행실이었다.

뭐 저런 걸로 돈을 벌지 싶었다. 정지철이 가난 때문에 사랑을 포기했다더니, 저 형은 가난 때문에 사랑을 파나? 처음 본 날은 거슬려, 잠도 안 왔다. 그럼에도 훔쳐봤던 이유는, 성찬과 키스했던 애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너도 사람 잘 죽이겠다―.’

해괴한 소리였다. 캐묻자, 그 애가 눈을 땡그랗게 떴다. 너 ‘그 얘기’ 모르냐는 것이다. 그 뒤, 원빈은 성찬이 그러고 다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전에 짙은 우울증을 앓는 부잣집 따님이 있었다. 이 딸은 좋지 않은 시도를 했는데, 제대로 하지 못해 몸에 흠집 하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은 성찬에게 거금을 주며 부탁했단 것이다. 짝사랑이 심하면 꽃이 된다던데, 이걸 받고 널 사랑하게 해 달라고.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동안 여자애와 성찬이 데이트하는 게 수두룩하게 목격됐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여자애는 정말로 꽃이 되었다. 이 얘기가 알음알음 퍼지며, 몇몇 애들이 비슷한 걸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기행의 발단이었다.

원빈이 찡그렸다. 그럼 너도 죽고 싶냐 물으니, 알려준 애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왜? 원빈이 달싹였다.

 

“네 말은 다들 꽃이 되고 싶어서 그런다는 건데⋯⋯.”

 

이런 말을 하는 제가 멍청해 보였다. 성찬과 키스한 애 반응이 워낙, 순진한 애를 보는 듯해서였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원빈을 희롱했다.

 

“에이―. 좋아하는 걸로 다 꽃이 되면 우리나라가 꽃밭이게? 성찬 오빠한테 돈 주고 키스하거나 데이트하는 애들, 그렇게 우울하지 않아. 그냥 잘생겼으니까 전에 그 언니 핑계로 한 번 들이대는 거지.”

 

아예 원빈에게도 용돈 줄 테니, 키스해보겠냐 물었다. 돌아섰다. 손까지 흔드는 애가 명랑해 보였다.

그 후로 쭉, 원빈은 이 상태였다. 방과 후가 되면 성찬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집에 가도 아빠만 있으니 그렇게 됐다. 오늘도 가방을 멘 채 성찬을 쳐다봤다. 키스를 마친 뒤 셈하는 게 보였다. 형은 지폐 다발을 어떤 단위로 끊는가 싶더니, 몇만 원을 든 채 동네 슈퍼로 향했다.

언덕길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있는 구멍가게였다.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명물이었다. 아직도 저런 가게가 있다는 데 놀랐다. 원빈이 움찔했다. 검은 봉지에 무언가를 담는 건 더욱 이질적이었다. 성찬이⋯⋯, 어디 막걸리 비슷한 술을 담고 있었다. 증류주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더 밟다간 집까지 따라갈 것 같아 돌아갔다.

거기선 어김없이 아빠가 말을 걸었다. 박원빈―. 무언가를 지적하려는 목소리였다. 덥수룩한 머리칼이 문제였거나, 볕을 많이 봐 그을린 피부가 문제일 테다. 원빈이 건성으로 ‘네’ 했다. 머리맡에 놓인 로보트를 빤히 보다 잠이 들었다.

 

 

 

 

 

전학 오고 한 달이 지났다. 자리 바꾸기가 있었다. 이번에도 원빈은 성찬과 떨어진 자리였다. 형은 맨 앞, 저는 맨 뒤였다. 나아진 건 같은 줄이란 것뿐이었다. 손을 들었다. 선생님이 막, 눈이 안 좋은 사람이 있냐 물을 때였다. 멀쩡한 눈으로, 칠판이 보이지 않는다며 우등생 코스프레를 했다. 선생님이 의아해했다. 그녀 자신도 고3 국어 교사라 알지만, 원빈의 시력은 좋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도 깨알같이 판서된 걸 잘만 읽었다.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원빈이는 잘 보이지 않니?”

 

원빈이 뻔뻔하게 답했다.

 

“야한 거 많이 봐서요.”

 

사실 충동적이었다. 밖에서도 보는 성찬을, 안에선 뒤통수만 보는 게 짜증 난다 생각했던 것 같다. 수지타산이 안 맞았다. 저는 졸졸 따라다니는데, 전에 얼굴 좀 봤다고 꼽줬더니 진짜 안 보는 것도 짜증 나고⋯⋯. 선생님이 믿지 않자, 원빈은 제가 본 키스를 묘사했다. 치기 어렸다. 선생님 얼굴이 새빨개졌다.

물론, 그 키스를 누가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말했다간 형이 제 미행을 알아차릴 터였다. 원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야한 걸 봤단 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저 형이 벚나무 아래서 하는 키스를 본다면 누구라도 야해 빠졌다 생각할 테니까.

선생님이 고민했다. 원빈과 자리를 바꿔줄 사람이 있냐 물었다. 얄밉게도 성찬이 손을 들려 하길래 종이를 날렸다. 덕분에 타이밍을 놓친 형이 돌아봤다. 그 사이 원빈은, 손을 든 애들 중 성찬 옆자리를 골랐다. 지금 자리가 뒷자리라, 바꾸고 싶어 하는 애들이 많은 덕이었다. 결국 모든 게 뜻대로 되었다. 천진하게 성찬 옆으로 다가왔다.

 

“잘 부탁해, 형.”

 

손이 내밀어져 있었다. 성찬이 내려다봤다.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왜 전학 왔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다. 저야 복수할 명분이 있다지만, 얘한텐 그런 것도 없을 텐데. 성찬이 본 원빈은 그냥 온실에서 행복했을 애다. 어떠한 우여곡절도 없을 애였다. 정성찬은 아버지의 옛 연인 때문에 파탄 난 집에서 자랐는데, 쟤는 그럴 리가 없었단 말이다. 적어도 아버지가 저희 어머니처럼 알코올중독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어쩐지 목이 탔다.

원빈을 보면 으레 그랬다. 속이 뒤집혔고, 갑갑했고, 타올랐다. 늘 안동 소주를 마시며, 그게 없인 자지도 못하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리고⋯⋯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황명희 자식을 냅다 목 졸라보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참는 데 익숙해져서 그마저도 참을 수 있었을 뿐이다. 건네진 손을 찬찬히 관찰했다.

그 애 손은 생긴 게 곱다기보단 잘 가꾼 것처럼 보였다. 손톱은 늘 일정한 길이였고, 남자애답지 않게 손등이 반들반들했다. 아버지와 손잡고 데이트를 갈 거라며 핸드크림을 바르던 분이 떠올랐다. 어머니⋯⋯. 문득, 황명희도 저런 손이었을지 궁금해졌다. 손을 잡는 대신 물었다.

 

“너는 왜 이 학교에 전학 왔어?”

 

성찬은 그 애가 황명희 아들인 걸 숨길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것도 감출 수 있었다. 하지만 실체는 여전히 미성숙한 소년이었다. 도통 이유를 티 내지 않으니, 궁금증을 끝까지 숨기지 못하는 거였다. 원빈이 주춤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엄마가 꽃이 될 만큼 사랑한 사람이 궁금해서? 엄마가 저더러 닮으라 했던 정지철의 아들이 궁금해서? 그렇게 사랑했으면서 아빠와 결혼했으면, 대체 정지철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나 싶어서? 아니면⋯⋯.

원빈이 눈을 내리깔았다. 어떤 생각에 다다른 순간, 볼이 부풀고 불퉁해져 빼액 질렀다.

 

“형이 사람을 꽃으로 만든다면서!”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성찬이 멈칫했다. 이를 본 원빈이 파드득 떨다가 몸을 털었다. 꼭, 흠뻑 젖어 물기를 터는 고양이 같았다. 억울한 표정을 짓는 게 눈에 띄었다.

단언컨대 거짓말이었다. 성찬이 입매를 늘어트렸다. 그는 분명, 아버지와 저에 대해 적은 노트를 봤었다. 거기에 원빈은 정지철 이름을 적고 ‘엄마가 사랑한 남자’라 적어놓았다. 저 역시 무슨 먹을 거라도 되는 것마냥, ‘화과자처럼 생겼다’라는 품평을 받았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왔을 리 없었다. 방금 한 말도 ‘정지철 아들’을 캐다가 알아냈을 것이다. 목소리가 냉하게 나갔다.

 

“그래서 너도 꽃이 되겠단 거야?”

 

속셈을 알지 못해 나오는, 반사적인 방어 기제였다. 움찔할 때 미묘한 걸 느꼈지만, 말을 도로 주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 애도 홧김에 뱉는 게 보였다.

 

“그래, 나는 그러면 안 돼?”

“⋯⋯.”

“내가 두 배, 세 배로 줄게! 네 배로 줄게! 그러니까 나는 미나리아재비가 될 거야. 형이 만들어줘. 됐어?”

 

원빈이 지갑을 꺼냈다. 안에 든 지폐를 세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상금 십만 원만 있었다. 평소 현금을 휴대하는 일이 없어 그랬다. 나머진 전부 카드였다. 어디서든 이거면 긁을 수 있는데 성찬 앞에 내밀려니 조악했다. 이상한 데서 순한 모습이었다. 성찬이 숨을 삼켰다. 원빈을 잡아 반을 나섰다.

1교시 선생이 들어오던 참이었다. ‘야’, ‘형’  하고 불렀으나 소용없었다. 그대로 벚나무로 향했다. 원빈을 나무로 밀치고, 새침데기 같던 낯이 당혹감에 물드는 걸 감상했다. 역시⋯⋯, 세상 풍파라곤 모르는 얼굴이었다.

갇혀있을 뿐인데, 키스 같은 건 해본 적 없는 것마냥 벌게지는 뺨은 덤이었다. 가만히 보자, 그 애가 더듬거렸다.

 

“나, 카, 카드밖에 없는데⋯⋯.”

 

성찬이 헛웃음을 삼켰다. 원빈의 입술을 빨아당겼다. 도톰한 입술이, 입술에 씹히다가 이에도 씹혔다. 그 애 뺨을 감싸면서 뇌까렸다.

 

“걱정 마, 후불도 받아.”

 

혀가 압박하듯이 엉켰다. 목구멍을 막는 움직임에, 원빈이 헉헉댔다. 꼭 갓 태어난 기린 새끼가 제 목 하나 못 가누는 것 같았다. 원빈도 그랬다. 한껏 빨리자, 고개 위를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 주먹을 말아쥔 걸 보면 그 밑도 그랬던 것 같았다. 눈을 내렸을 때 성찬은, 그 애 앞이 부푼 걸 보았다. 참 예민하고 순진한 애였다.

은연중에 그 애 혀를 짓씹었다. 그날은 원빈이 내내 싱숭생숭한 게 보였다. 그걸 보면서 답지 않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냥, 객관적인 평가였다. 어머니가 떠오르는 바람에 식고 말았지만.

방과후엔 그 애를 데려가 ATM기에서 돈을 뽑았다. 원빈이 신기해했다. 돈이 그렇게 많으면서 뽑아본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걔 카드로 안 될 게 없으니 당연했다. 제멋대로 백만 원을 뽑아, 십만 원을 건넸다. 원빈이 빤히 봤다.

 

“이거 뭔데?”

 

성찬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기념품.”

 

신사임당 두 장을 보다 형을 봤다. 웃을 땐 화과자 같은데, 무표정하니 냉하기 짝이 없는 낯이었다. 왠지 혀끝이 썼다. 영영 정지철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저씨는 엄마한테 이런 표정을 지을 리 없는데, 그 아저씨가 지을 표정을 저 형이 지어줄 린 없으니까⋯⋯. 박원빈은 ‘나’를사랑해주는 얼굴을 모른다. 손을 꼼지락거렸다. 십만 원을 지갑에 넣는 대신 꼭 쥐었다.

어쩌다 보니 학교 앞 골목까지는 함께 가게 됐다. 둘은 말없이 걸었다. 그러다⋯⋯ 원빈이 한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장난감 가게였다. 안에는 대여섯 살부터 초등학생들이 놀 게 즐비했는데, 유독 로보트 하나에 시선이 머물렀다. 원빈은, 그걸 보다가 달싹였다. 먼저 가. 군말 없이 가다가 지켜보니 기어이 사 들고 나오는 게 보였다.

애가 맹하다 싶더니만 아직 어린 애 같은 구석도 있는 모양이었다. 성찬의 눈이 가라앉았다. 덕분에 조금 늦어, 어머니가 징징대는 꼴을 보았다. 술병들 사이에 드러누워 떼를 쓰셨다.

 

“찬이 미워! 못난이! 성혜만 두고 놀다 왔어! 엄마를 두고 갔어!”

 

성찬이 그분을 일으켰다. 으스러질 듯이 안았다. 불현듯, 저도 꽃이 되러 왔다며 철부지처럼 소리 지르던 원빈이 떠올랐다. 가슴에 조금, 미움이 찼다.

 

 

 

 

 

가슴에 로보트를 안고 온 날, 아빠가 말했다. 언제쯤 약속을 지킬 거냐 했다. 전학 올 때 한 약속을 이르는 것이었다. 원빈의 눈이 생기 없이 음산해졌다. 사실 한 달이나 지났으니까 재촉하지 않은 게 용했다. 그대로 방에 들어가, 엄마의 진주 귀걸이를 가져왔다. 명성고로 오면서 한 약속은⋯⋯, ‘전학시켜주면 엄마의 진주 귀걸이를 단 채 분수대에 서겠다’는 것⋯⋯. 마침 그 근처엔 로벨리아가 꽃망울을 틔우고 있었다.

원빈의 귀는 여전히 한 쪽만 뚫린 채였다. 아빠를 쳐다보며 나머지를 뚫었다. 그분 표정이 묘해졌다. 기뻐한다기보단 정색하는 것 같았다. 곧, 커다란 손이 귀걸이를 잡았다. 원빈의 귀가 옆으로 찢어졌다. 아빠의 입이 짜증을 삼켜 뒤틀려있었다.

 

“뭘 잘못했는지 알겠니?”

 

원빈은 거울 앞으로 끌려갔다. 아빠가 왜 그랬는지 알아차렸다. 귀걸이 위치가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들 만큼 옮겨져 있었다. 아마도 엄마가 뚫었을 위치였다. 모멸감 비슷한 것이 얼굴에 찼다.

그분이 핸드폰으로 촬영했다. 카메라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어떤 감각은 흐려지지 않고 태어날 때마다 선명해진다. 지금 느끼는 게 그랬다. 이튿날은 귀에다 덕지덕지 밴드를 붙인 채 등교했다. 옆자리에 앉은 성찬이 유난히 밉살스러웠다.

 

“뭐.”

 

자리를 바꾼 건 저면서 시비도 걸었다. 그냥, 눈이 마주친 게 싫었다. 그 형 눈을 무시한 채 엎어졌다. 어이없어할 거라 생각하니 짜증 났다. 적반하장이었다.

성찬도 그런 앨 가만히 놔두려고 했다. 저 역시 원빈과 얽혀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옆자리인 게 문제였다. 수업시간마다 선생님이 자는 앨 깨우라고 해서⋯⋯. 성찬이 마뜩잖게 흔들었다. 박원빈. 그때마다 원빈이 정색했다.

이건 뭐, 정성찬이 선생님 말씀 없어도 박원빈과 놀고 싶어 수작 부린다는 눈치였다. 내외하는 솜씨가 키스 한 번에 구십만 원을 뜯긴 애답지 않았다. 4교시 무렵엔 몸까지 털며 노려봤다. 꼭, 홧김에 미나리아 비로 만들어달라던 때 같았다. 몸을 턴 덕에 긴 긴머리칼이 넘어가며, 밴드로 도배된 귀가 보였다.

귀가 저렇게까지 다칠 일이 뭐가 있지? 성찬의 눈이 좁아졌다. 원빈도 시선이 닿은 곳을 느껴 움찔했다. 귀를 긁었더니 연한 딱지가 뜯어졌다. 전날 하도 혹사해서 그렇다. 아빠가 건드린 것보다 원빈 자신이 건드려 덧난 게 컸다. 밴드에 진물과 피가 묻었다. 성찬이 혀를 찼다.

정말이지 남을 거슬리게 하려고 작정한 애다. 옛 연인을 따라 죽었던 정지철의 피가, 성찬에게도 무언가를 자아냈다. 한숨 쉰 끝에, 점심 먹으러 가던 애를 잡았다.

 

“뭐.”

 

그 애가 또 모난 말을 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되물었다.

 

“너 오늘도 나랑 키스할 거야?”

“⋯⋯뭐?”

 

원빈이 멈춰 섰다.

그렇게 싫은 티를 냈는데 잡을 줄은 몰랐다. 병신같이 붙인 밴드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줄은⋯⋯. 이 형은 비위가 강한 모양이었다. 돌연 피에 젖은 밴드가 선명해지며, 그 물음이 다른 뜻으로 들렸다. 꽃이 될 거야? 죽고 싶어? 고민 끝에 고개 저었다.

 

“아니.”

 

아직은 괜찮았다. 이런 날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자극받지만 않으면 된다. 따로 밥을 먹었다. 5교시 직전 돌아와, 약국 봉투에 멈칫했다.

안에 연고가 들어있었다. 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는 아쿠아밴드도, 상처의 습기를 유지하는 습윤밴드도, 빨간약인 포비돈도⋯⋯. 별다른 메모는 없었다. 수업이 시작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란히 앉아 언제든 말할 수 있었지만,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었다. 원빈이 성찬을 물끄러미 봤다. 학교가 끝나, 제 갈 길 갈 때 충동적으로 잡았다.

빚을 지는 느낌을 싫어해서 그랬다. 성찬이 돌아보자마자 까치발로 턱 부근에 입 맞췄다. 손등을 들어 번들거리는 입술을 닦았다.

 

“약값.”

“⋯⋯.”

“형은 키스해주고 돈 받잖아. 내 약 사줬으니까 이걸로 퉁친 셈 하라고. 이해 안 돼?”

 

골 때렸다. 성찬이 내려다봤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했다. 제가 하는 키스는 ‘죽여주는 값’인데, 별 의미도 없는 뽀뽀로 값을 냈다고 하니까. 그게 값어치가 있다면 애들은 부모한테 수천 수백을 빚졌다. ⋯⋯그래서 정성찬이 매일 어머니한테 안동소주를 사다 드릴지도 모르고.

뭐라 따질 새도 없었다. 원빈이 벤치에 앉아 약봉지를 푸는 게 보였다. 바르려는 것 같았는데, 제 귀에 붙인 밴드도 떼지 못해 끙끙거렸다. 하도 덕지덕지 붙여 아픈 모양이었다. 성찬이 한숨 쉬었다. 깨진 핸드폰 속 시간을 보더니 그 애에게 다가갔다.

곧, 원빈의 귀가 잡혔다. 그 애가 놀라든 말든, 살과 밴드를 반대로 밀어 하나둘 떼어냈다. 밴드만 잡고 뗄 땐 아팠는데, 살을 살살 미니 아프지 않았다. 원빈이 낯 가리는 고양이처럼 굴었다. 아빠한테 귀가 잡혔을 때와 달랐다. 부드러웠고 섬세했다. 성찬이 그 위에 약을 발랐다.

우악스러운 대일 밴드 말고 습윤밴드를 붙여졌다. 훨씬 편했다. 크기가 적당했다. 모든 걸 마치고 나니 서로가 너무 가까웠다.

원빈이 숨을 참았다. 한번쯤 비꼴 법한 성찬도 말이 없었다. 결국,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원빈이 물어봤다. 키스할래? 헛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이 낯설고 숨 막혀서 한다는 말이 그보다 더한 키스를 하자는 거라니. 못할 거 없었다. 시니컬하게 웃은 성찬이 그 애 뺨을 감쌌다. 이번엔 얼마 줄 거냐 물었다. 느리게 입술이 빨리면서, 원빈이 웅얼거렸다.

 

“돈 안 받고 키스한 적 있어?”

 

사랑을 말하는 걸 텐데, 성찬이 부러 모른 체했다.

 

“박원빈, 돈도 많으면서 이제는 거저먹으려고 해?”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어제 로보트 사고 남은 거스름돈 어떻게 했는데.”

 

정말 그런 거 아니었다. 정성찬이 관념적인 다정처럼 구니까, 자기 아빠처럼 누굴 사랑해본 적이 있는지 궁금했던 거지⋯⋯. 로보트 산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캐묻지 않았다. 누가 지켜보고 감시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위화감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원빈은 대신,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이만 팔천 원밖에 안 남았는데. 형 키스는 구십만 원이잖아.”

 

그 애 눈이 깜빡일 적마다, 눈꺼풀에 가슴이 씹혔다. 성찬이 숨을 삼켰다. 습윤밴드를 붙인 귓가를 핥았다.

 

“너 카드 있잖아.”

 

그럼 오늘도 ATM기에 가야 하나⋯⋯? 어제 대충 봐서 헷갈리는데⋯⋯. 원빈의 속이 다 보였다. 성찬이 손을 내밀었다. 지갑을 달란 것이었다. 머뭇머뭇 건네자, 커다란 손이 장지갑을 벌려 쑤셨다. 중지와 검지가 왔다갔다했다. 지폐를 세는데 꼭, 안을 들쑤시는 것 같았다. 원빈이 빨개졌다. 가죽 아래로 몇 번 들어갔다 나온 손이 이만 팔천 원을 꺼냈다.

나머지만 카드로 받겠다고 했다. 원빈이 이해가 안 가서 찡그렸다.

 

“그냥 다 카드로 받으면 되는 거 아니야? 그게 계산도 더 깔끔하고⋯⋯.”

 

성찬이 다시 한 번 그 애 입술을 머금었다. 한창 움직이던 혀가 빳빳하게 굳었다.

 

“야, 정성찬―.”

“현금으로 하면 현금영수증 줘. 번 것보다 많이 쓰면 나중에 돌려주고. 너도 이게 나을걸.”

 

원빈이 올려다봤다. 무슨 소린진 모르겠지만, 뭔가 키스 한 번 정도는 돈 없이도 해준다는 것 같았다. 그런 것치고 키스는 여러 번 이어졌다. 느닷없이 몇백을 출금한 것에, 아빠가 한바탕 따지고 들겠다 생각했다.

돌아오고 나서는 침대에 누웠다. 머리맡에 놓인 로보트 두 개를 쳐다봤다. 눈을 깜빡거렸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늘 ‘네가 정지철의 아들이었으면 좋겠다’던 엄마가 처음으로 선물도 주고 안아줬던 날⋯⋯.

원빈아, 엄만 나갔다 올 거야. 미안해. 잘 있어.

 

 

 


 

3

 

 

 

 

팔백만 원은 생각보다 두껍지 않다. 오백 원을 세워두면 그 정도 높이가 된다. 정확히는 약간 못 미치는데, 덜 떨어졌단 점에서 저와 어머니를 닮았다. 성찬이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ATM기 옆 봉투 세 장. 그거면 아홉 번 키스한 값을 담기 충분했다. 십만 원을 DC 해준 뒤, 남은 값을 내려다봤다.

신경 쓰이고 이상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애가 뜯으면 뜯는 대로 뜯겨서 그랬던 것 같다. 황명희와 달리 독기는 없는 애였다. 걔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그걸 어머니의 목소리가 깼다. 찬이 다녀왔어? 성찬이 고개 들었다. 조금 잠긴 목소리로 ‘네’ 했다.

여태까진 돈을 아끼려 달동네에 살았다. 이대로 호구 잡으면 투룸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는 누려도 된다. 내일 부동산에 갈까 하다가 멈칫했다. 별 시답잖은 이유들 때문이었다.

일단,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집착했다. 아버지가 있는 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 호구 잡은 박원빈도 언제 달아날지 모르고, 저녁에 부동산 보러 갔다가 집에 일이 생기면 큰일이고, 오만 원이⋯⋯ 그 애가 덕지덕지 달았던 밴드 색 같아서⋯⋯.

고갤 숙였다. 그 애가 미나리아재비로 만들어 달라 한 게 맴돌았다. 그간 꽃이 되겠다던 애들은 가짜였다. 우울을 핑계로 정성찬을 살 뿐이었다. 그 애도 그런 건지 궁금했다. 어디 조악한 우울을 가지고 패션 자해를 한 다음, 정지철의 아들을 희롱하는 건지⋯⋯.

성찬에게 그러지 않은 건 한 명뿐이었다. 맨 처음 ‘아름답게 죽고 싶다’고 오천만 원을 줬던 소녀. 걔는 처음엔 멀쩡했다가 점점 꽃을 토했다. 그러다 아예 꽃이 되었다. 이따금 원빈과 소녀가 겹쳐 보여서 신경 쓰였다. 아버지도 살아있고, 팔백만 원쯤 삥뜯겨도아무렇지 않은 앤데⋯⋯.

뭐, 그게 부잣집 애들한테 도는 역병인지도 몰랐다. 하도 곱게 자라, 별거 아닌 걸로 죽고 싶어지고 또 별거 아닌 걸로 살고 싶어질지도 모르지.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뒤를 생각할 게 없으니까. 삐걱대는 문을 열었다. 나중에 니스칠할 값을 셈하면서 가계부를 열었다.

가난은, 별 계획 없이 사는 사람도 끝없이 셈하고 계산하게 만든다. 원래 같으면 계획성이 없을 성찬이, 누구보다 철저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이번 주에 쓴 소줏값은 얼마. 공과금은 얼마. 또 수입은⋯⋯.

천천히, 떨리는 손으로 수입을 새겨넣었다. 날짜 오늘. 수입 팔백만 원. 수입원 박원빈. 아버지가 끝내 잊지 못했던 황명희의 아들⋯⋯. 성찬의 눈이 그 애 이름에 오래 머물렀다. 닫으면 그 애가 사라질 것처럼 소리 내 닫아버렸다.

 

 

 

 

 

결국,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못했다. 다른 애들한테 받은 것만 쓰고, 원빈 건 깨진 화분 밑에 놔뒀다. 이렇게 해도 도둑이 들지 않는 동네였다. 어머니가 깽판 치지 않는 한 털릴 일은 없을 것이다. 눈이 가라앉았다. 밥솥에서 밥을 꺼내 락앤락에 넣었다.

성찬이 집을 나설 때면 으레 챙기는 일이었다. 어머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밥솥을 못 다뤘다. 전에 물과 쌀만 넣고 작동시키질 않아서, 생쌀을 먹던 걸 발견하기도 했을 테다. 굶기지 않으려면 이렇게 하고 가야 했다. 다행히 여름이 아니라 밥 쉴 걱정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당부했다.

 

“두 끼 꼬박꼬박 드세요.”

 

어머닌 로보트랑 놀고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성찬에게 사다 준 것들이었다. 형편이 좋지 않아 자주 받진 않았지만, 어릴 땐 퍽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놀고 있는 어머니를 보다가 돌아섰다.

이따금 저도 꽃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를 자의로 팽개친 게 아니란 면벌부를 받고, 더는 아버지가 파탄 낸 현실 속에서 살지 않고⋯⋯. 그러나 성찬의 삶은 여기 있었다. 짝사랑 말고도 해야 할 게 많았다. 반에 도착하자마자 옆자리를 흘깃거렸다.

희한하게도, 원빈은 있는 집 애치고 일찍 왔다. 반에서 1등으로 오던 현수 말이 ‘쟤가 온 뒤 반에 불을 켠 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야, 그 정도면 엄마아빠 잔소리가 조오오온나 오지나 보다.”

 

소란에도 색색 자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집에선 잠도 안 자는 애 같았다. 그 앤, 1교시가 되어 깨우고야 일어났다. 부스스 눈 뜨는 게 새끼 새 같았다.

어쩌면 자리 바꿀 때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몰랐다. ‘야한 걸 많이 봐 눈 나빠졌다’던 거. 성찬의 눈이 늘씬해졌다. 집에서 안 자냐니까 생뚱맞은 질문이 돌아왔다.

 

“형은 나랑 키스할 때도 빤히 봐?”

 

어이없었다. 자고 일어나서 하는 말이 그거라니. 무슨 맥락에서 나온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에 들여다보자, 그 애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긴 잘 때나 키스할 때나 눈을 감는데, 그렇게 보는 걸 보니 키스할 때도 그러려나 싶었단 거다. 헛웃음이 나왔다. 성찬이 덩달아 헛소리를 뱉었다.

 

“이따가 보든가.”

 

원빈이 약간 붉어져서 하는 말이 들렸다.

 

“오늘 말고 내일 해.”

“왜?”

“맨날 같이 은행 가는 거 이상하잖아. 방과 후에 나 혼자 뽑으면 되지. 이제 혼자서도 할 수 있어.”

 

쑥스러움은 아니었다. 단지 ATM기도 못 다루던 며칠 전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보였다. 그 애의 귓불이 익어갔다. 하기 싫다는 말은 또 안 하는 게 기가 막혔다. 저게 발랑 까져가지고⋯⋯.

원빈의 귀에서 익지 않은 곳은 습윤 밴드가 붙은 곳뿐이었다. 바보 같이 갈지도 않았길래 한숨 쉬었다. 그 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줬던 밴드를 달라 하자, 귀에 붙인 밴드를 떼어 줬더랬다. 또 한 번 한숨 쉬었다. 정말 황명희랑은 다른 애였다. 새 걸 달라고 정정하자, 그 애가 머쓱해했다.

 

“아직 멀쩡한데⋯⋯.”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성찬이 연고를 발라줬다. 그 위로 새 밴드를 붙였다. 귀에 남은 끈끈이는 걔 입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말간 침으로 지웠다. 원빈이 움찔했다. 당황할 때 으레 그렇듯,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 제대로 된 조어가 아니었다. 정정하기도 전에, 선생님의 눈에 띄었다. 너희 뭐하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박원빈이랑 더 말을 섞지 않아서. 원빈도 마찬가지였는지, 애먼 교과서에 낙서했다. 실은, 저를 깨울 때 성찬이 너무 가까워 당황했다. 그 바람에 머리가 엉망이 돼서, 가장 인상 깊었던 ‘키스’와 저를 당황케 한 행동을 섞어서 뱉은 것 같았다. 체온이 닿았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나마도 성찬에게 핀잔을 들어서 멈추긴 했다. 넌 진짜 머리에 키스만 있고 공부는 없구나. 다친 귓불을 만지면 계속 흉질까봐그랬던 건 나중에 알았다. 정확히는 추측할 뿐이었다. 그냥⋯⋯ 엄마가 꽃이 될 만큼 사랑한 정지철의 아들이라면 그럴 것 같아서⋯⋯.

성찬은 제 얘기를 들어줬다. 오늘은 키스하지 않았다. 방과 후에 혼자 ATM기로 갔다. 서툴게 몇백만 원을 눌러서 출금했다. 그 뒤, 괜히 신경이 쓰여 벚나무로 가 봤다. 저와 키스하지 않는 날의 성찬이 궁금했다.

혹시 또 여자애들한테 돈 받고 키스해주고 있을까⋯⋯. 전에 봤던 여자애랑 그러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저와 상관없는 일인데, 내내 싱숭생숭하고 알고 싶었다. 혼자 있는 성찬을 보고 멈칫했다. 이미 키스한 모양이었다. 두 눈이 마주쳤다.

누가 봐도 원빈 쪽에서 스토킹한 거였다. 원빈이 머뭇거렸다. 그 형 눈이 별 감흥 없는 눈이었다. 제 허벅지로 두툼하게 차오른 주머니를 보고야 ‘아’ 했다. 좀 더 가까이 왔다.

 

“내일 하자며.”

“⋯⋯.”

“급해?”

 

시간을 보는 걸 보니 가야 하는 곳이 있는 눈치였다. 원빈이 고개 저었다. 뭔지 모를 감정에 휩싸여 돌아갔다. 그 형은 귀에다 밴드를 붙여줬는데, 아빠에게선 못이 박혔다.

 

“귀는 낫고 있니.”

“⋯⋯네, 뭐.”

“흉지지 않게 조심해라. 명희가 준 몸이잖니.”

“⋯⋯.”

“그러고 보니 요즘 평소보다 들어오는 시간이 늦더구나. 그것도 명희를 따라 하는 거냐?”

“아빠가 알 거 없잖⋯⋯.”

“잘했다. 명희에 대해 알아가는 건 중요한 일이야. 명희가 했던 행동들을 반복하면서 마음가짐을 바로잡도록 해라. 눈썹, 다듬은 라인에서 새로 나기 시작한 부분은 가정부 통해서 뽑고. 보기 흉하잖니.”

 

괴물. 괴물. 괴물. 당신이 정지철 같았으면 엄마가 꽃이 되지 않았을 거야. 나더러 정지철의 아들처럼 되라 하지 않았을 거야. 로보트도 더 많이 사 줬을 거야. 나를 사랑한다고 해 줬을 거야. 엄만⋯⋯ 적어도 그 시절 박원빈이 좋아했던 로보트가 ‘윌봇’인 걸 알았으니까. 원빈이 수그렸다. 충동적으로 집을 나왔다. 목적지는 없었다. 어쩌다 보니 성찬이 안동소주 사는 걸 본 구멍가게까지 다다랐다. 그 근처를 어슬렁거릴 때, 가게 주인이 말을 걸었다.

 

“집에 안 들어가고 뭐 하니? 누구 찾아왔다가 길이라도 잃은 거야?”

 

무어라 말하려다가 삭였다.

 

“⋯⋯아니요.”

 

이튿날, 원빈은 교실에 제일 먼저 와 성찬을 기다렸다. 그 형이 오자마자 손을 잡았다. 벚나무 아래에서 키스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래야 속에 찬 응어리가 풀릴 것 같았다. 서툴지만 폭력적으로 범해오는 혀가 느껴졌다. 

성찬이 내려다봤다. 어제 학교로 돌아오더니 오늘은 하는 투가 절박했다. 꼭, 젖을 떼지 못한 고양이 같았다. 새끼고양이가 저 살겠다고 아무 젖이나 무는 듯했다. 도저히 핀잔을 줄 수가 없었다. 이에 성찬은 그 애 허리를 감싸 안았다. 원빈이 더 바짝 붙자 혀끼리 얽히며 밀어붙였다. 성이 찰 때까지 그러도록 내버려뒀다. 원빈이 밭은 숨으로 말했다.

 

“돈, 가방에 있어. 교실 가면⋯⋯.”

 

그땐 성찬도 충동적이었다. 몇 번이고 입술을 겹친 흥분 때문인지, 평소 같으면 안 할 짓을 했다.

 

“네가 먼저 키스한 거잖아.”

“⋯⋯.”

“키스해주면 돈 받는 거고.”

 

원빈이 눈꺼풀을 떨었다. 성찬을 올려다봤다. 더, 더 하고 싶었다. 열락 때문보단 그냥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오늘 같은 마음이면 정말 꽃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 형에게 ‘아름답게 가게 해 달라던 소녀’처럼⋯⋯. 원빈이 고갤 젖혔다. 성찬이 입 안을 유린할 수 있게 했다. 두께감 있는 혀가 입천장과 볼 안, 심지어는 목구멍 언저리까지 쓸어내렸다. 반에 돌아가서도 여운이 남아있었다.

계속, 서로와 한 입맞춤이 생각났다. 원빈이 책상에 낙서를 했다. 어제는 교과서에 그러더니 습관인 모양이었다. 검은 펜이 끝도 없이 이어져 무슨 덤불 뭉치처럼 되었다.

그러고도 열기는 식지 않았다. 자꾸 입술이 먼저 눈에 띄었다. 원빈이 물었다. 점심 같이 먹을래? 거절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방과 후에도 같은 짓을 했다. 당장 저희 빼곤 모두 사라져, 좆 달린 새끼들끼리 번식이 간절한 꼴이었다. 원빈이 혀를 빼고 중얼거렸다.

 

“혹시 윌봇 좋아해?”

 

뜬금없었다. 성찬이 찌푸렸다. 윌봇이라면 그들이 예닐곱 살 때 유행했던 로봇이다. 지금 좋아하기엔 구닥다리였다. 한 살 꿇어 이미 스무 살인 성찬에겐 맞지도 않았다. 전에 원빈이 산 로봇이 그거인가 싶었다. 얹힌 느낌으로 답했다. 아니. 그 애 표정이 한결 풀렸다.

뭐 때문인진 모르겠다. 다만 그 앤 눈이 흔들리다가 허락한 적도 없는 가슴으로 안겼다. 그 말이 걔한테는 퍽 괜찮았나 보다. 계산도 제대로 했다. 돈을 건네주면서, 원빈이 수더분해진 어조로 뇌까렸다.

 

“키스는 몇 번 말고 몇 초 하는지로 받는 게 좋을 것 같아. 방금 두 번밖에 안 했는데 십오 분이나 지났잖아.”

 

뭐가 걔를 그런 말까지 할 만큼 괜찮아지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키스는 아니었다. 그걸로 괜찮아질 거였으면, 아침부터 쭉 좋았어야 했다. 성찬이 뒷모습을 바라봤다. 원빈은 그날, 머리맡에 놓인 로보트 두 개를 안은 채 잠들었다. 엄마가 사라진 크리스마스 날의 꿈을 꿨다. 이번엔 엄마가 추락하지 않았고, 잘 기다리고 있던 원빈에게 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 엄마는 우리 원빈이를 사랑해. 원빈이가 뭐 좋아하는지도 다 알고 있어. 원빈이는 원빈이야. 박원기의 아들도 아니고, 정지철의 아들도 아니야.

 

여전히 아빠는 손톱이 잘 깎였나 확인하고 속눈썹 길이를 쟀다. 뷰러로 눈썹을 찝었다가 엄마가 했던 귀걸이를 이것저것 달기도 했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았다. 방에 있을 로보트를 떠올리면 그냥 또 미친 짓을 하는구나 넘길 수 있었다. 아빠가 어떤 새끼든엄마는 박원빈의 엄마였다. 정지철을 사랑해도, 원빈 역시 좋아하던 로보트를 사줄 만큼은 생각했다. 원빈이 아주 박원빈이 아닌 건 아니었다. 그 다음 날부턴 성찬에게 굳이 키스하자고 조르지도 않았다. 생각이 바뀐 건 어느 날, 필기구를 꺼내던 성찬이 익숙한 로보트 피규어를 쏟아냈을 때다. 원빈의 눈이 흔들렸다. 

 

“⋯⋯윌봇 싫어한다며.”

 

성찬이 필통에서 나온 피규어를 보고는 ‘아’ 했다.

 

“싫어한다곤 안 했어. 좋아하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했지. 어릴 때 아버지랑 아버지 친구분께서 사주신 거야.”

“⋯⋯그땐 좋아해서?”

 

성찬이 멈칫했다. 원빈의 눈이 다시 없이 떨리고 있었다. 황명희의 죽음을 들은 아버지의 눈 같았다. 망설임 끝에 대꾸했다.

 

“그 나이 땐 다⋯⋯.”

 

원빈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 엎드린 채로, 어깨가 들썩였다. 또 알 수 없는 짓거리였다. 다만 이 뒤엔 원빈이 며칠을 결석했다. 다시 등교했을 땐 좀 더 말라있었다. 귀걸이 여러 개를 쑤신 듯 귓구멍이 붉었고, 이따금 로벨리아 꽃잎이 묻어있었다. 듣자 하니, 아버지가 사진전을 준비하는데 모델이 됐다고 한다.

방과 후엔 당연한 듯 지나치려 했더니 손목이 잡혔다. 키스하고 싶다고 했다. 가방이 통째로 성찬 품에 던져졌다. 무거웠다. 열어보지 않았는데도 그 안을 채운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벚나무 밑에 다시 사람 둘이 찼다. 원빈이 가슴을 헐떡거리며 받아들였다.

입술을 가르고, 혀가 들어왔다. 점막을 진득한 혀가 훑었다. 살끼리 겹쳐지면서, 며칠 간 잊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원빈이 끙끙거렸다. 성찬의 목을 안았다. 좀 더 몸을 붙여왔다.

지금껏, 엄마가 박원빈을 조금은 사랑한 줄 알았다. 아빤 엄마를 따라 하게 염불 외는 병신이어도 엄마만은 그런 줄 알았다. 그게 미련을 자아내, 엄마가 사랑했던 정지철을 캤다. 그런데 그 모든 게 허상이었다.

로보트를 준 건 그저 정지철 아들이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박원빈 때문이 아니었다. 마지막 줄이 툭, 하고 끊어졌다. 이젠 매달릴 곳이 없었다. 이럴 바엔 꽃이 되고 싶었다. 그럼 엄마를 완벽히 따라 한 거니까 아빠를 물 먹일 수 있을 것이다. 꽃이 돼야 자유로워졌다. 꽃이 돼야 갚아줄 수 있었다. 짝사랑이 필요했다. 상대는 경멸하고, 저는 사랑해버릴수록 좋았다. 성찬을 바라봤다. 엄마가 한 건 저도 할 수 있었다. 여태껏 그렇게 자라났다. 숨겨온 걸 말했다.

 

“나, 황명희 아들이야. 형 아빠 결혼하고 나서도 구질구질하게 매달린.”

“⋯⋯.”

“정지철이 우리 엄마 따라 죽었다고. 죽이고 싶지 않아?”

 

두 눈이 열기로 흐리멍덩했다. 어쩌면, 이 형은 저를 제대로 죽여줄 수 있을 것이다. 명분이 충분했다. 내려다보는 눈길에서 시기와 경멸,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읽혔다. 확신했다. 원빈이 뇌까렸다.

 

“사랑하게 해줘.”

“⋯⋯.”

“그럼 내가 형네 엄마 앞에서 꽃이 될게. 황명희 아들인 거 알면 분명 제정신으로 돌아오실 거야.”

 

이상했다. 처음 봤을 때, 박원빈은 저런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 목적이 달라졌다.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로보트를 본 다음이었다. 거기에 뭔가가 있었다. 부쩍 마른 몸과 삭은 목소리가 가슴에 쌓였다. 아름답게 가고 싶다던 부잣집 딸을 보는 것 같았다. 성찬이 멈칫했다. 원빈이 달싹였다.

 

“뭐 많이 해 달라는 거 아니야. 싫어하지 않는 척해. 내가 황명희 아들이 아니라, 원빈이라고 생각하는 척해. 가끔 밴드 챙겨주고, ATM기에 돈도 뽑아줘. 나 잘 때 깨워줘. 가끔 밥도 같이 먹어줘. 그거면 돼.”

 

너무도 별거 아니고, 사랑에 빠지기엔 조잡한 것들⋯⋯.

원빈이 벙긋거렸다. 거절할까봐 겁내는 눈치는 아니었다. 단지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게 성찬의 눈엔 겁내고 무서워할 의욕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자꾸만 속이 불편했다. 그 애가 입술을 오물대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오천만 원. 나도 그거 걸게.”

 

불현듯, 꽃향기가 나는 듯했다. 바로 위에 있는 벚나무 향기는 아니었다. 성찬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꽃잎이 살랑거리며 그 애 어깨로 떨어졌다.

 

 

 

 

4

 

 

 

 

돌아갔을 때, 어머니는 주무시고 계셨다. 뒤통수가 통통한 브라운관 TV 앞에서였다. 쿠팡에 검색하면 흔히 나오는 십만 원짜리 TV다. 요즘은 감성템으로 쓰였는데 성찬네서는 실용성이 있었다. 다른 걸 사기엔 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부잣집 딸을 꽃으로 만들어 오천만 원을 쥐었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은 바로 그 TV가 성찬을 반겼다. 채널은 뉴스데스크. 주제는 사람이 꽃이 되는 ‘인화(人花) 현상’이었다. 어머니가 조용하니까 그것이 시끄러웠다. 패널들이 침까지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요지는, 꽃이 되는 게 죽음을 뜻하냐는 것이었다. 머리가 벗겨진 패널이 피력했다. 꽃 역시 생물이니, 사람이 꽃이 되는 건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은테안경을 쓴 말라깽이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그 발언은 인간을 너무 생리적인 존재로 보는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면 죽은 것이라 했다. 성찬이 가만히 들었다. 평소 같으면 관심이 없을 텐데 끌 수가 없었다. 원빈의 말이 맴돌아서 그랬다. 그걸 끈 건 어머니가 눈을 뜨고 나서였다. 머리가 다 엉켜서 일어나길래, 천천히 풀어줬다. 일어나셨어요?

노을이 기어들어오는 저녁이었다. 어머니가 눈을 비볐다. 입가에 밥풀이 묻은 걸 보면 한 끼는 먹은 모양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성찬이 목울대를 꿈틀거렸다. 침을 삼킬 즈음, 그분께서 말을 거셨다. 찬이 어디 다녀와?

멈칫했다. 어머닌 제가 늦은 걸 아는 눈치였다. 모든 게 변해도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았다. 모성애, 아들이 몇 시에 나가 몇 시에 오는지 아는 것, 단 일 분을 늦었어도 아는 것⋯⋯. 입을 다물었다. 원빈과 있었다고 할 순 없었다. 입 안을 씹다가 다른 말을 했다. 그게 최선이었다.

 

“뉴스에서 꽃이 된 사람들 얘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고작 그 얘기를 들은 것만으로 어머니가⋯⋯.

 

“황명희는 나쁜 년이야!”

 

성찬이 주춤했다. 그간 어머니가 백치가 됐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눈을 부릅뜨면서, 어깨까지 손톱자국이 남게 쥘 줄은⋯⋯. 마른 분의 악력이 셌다. 염불 외듯 닦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찬이는 철이처럼 되면 안 돼! 그년 얘기하지 마아―. 그년 얘기하지 마아―!”

 

모든 게 예상 밖이었다. 폐인이 된 어머니께 증오가 남아있는 줄 몰랐다. 백치답지 않고 어른다운 증오였다. 심지어는 아들을 잡고 신신당부했다. 명희를 사랑하면 불행할 거란 것이다. 그 여자가 죽었단 말엔 피눈물 같은 걸 쏟아냈다. 대신 그 여자 ‘새끼’가 남아있잖아. 성찬이 참던 숨을 토했다.

아주⋯⋯ 아름다운 꽃밭에서 나오는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거품까지 무는데, 실용성도 없는 곳에 예쁘다고 있었다. 그게 성찬이 한 짓이었다.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나지막이 뇌까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릴 망가트린 황명희에게 복수할게요. 사랑하지도 않을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러면⋯⋯.

연민할 거 없었다. 죄책감을 가질 것도 없었다. 그 애가 먼저 꽃으로 만들어 달라 했고, 그것이 죽음인지는 말이 갈리는 사회였다. 누구도 성찬을 비난할 수 없었다. 외려, 이 정도로 끝내는 건 자비에 가까울 것이다. 삭은 눈으로 달싹이던 원빈을 떠올렸다. 눈이 가라앉았다.

사랑하게 해 달라고 했다. 어머니 앞에서 꽃이 되겠다고 했다. 이건 착한 복수였다. 박원빈도, 정성찬도 무언가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종지부. 황명희와 정지철이 만든 인연의 끝.

다음날, 두 사람은 합의했다. 조건은 이 정도였다. 첫째, 박원빈이 꽃이 될 때까지 정성찬은 별도의 손님을 받지 않을 것. 둘째, 꽃이 된 후의 주검은 정성찬이 소유할 것. 셋째, 그걸 어떻게 처리하든 박원빈은 받아들일 것. 약속을 적은 종이에 사인했다.

성찬이야 그렇다 치고, 당해야 하는 원빈에게도 망설임이 없었다. 뭘 할 것 같냐 묻자, 가시 꽃 같은 답이 돌아왔다. ⋯⋯몰라, 형이 형네 엄마 앞에서 꽃점 치든 말든. 그래놓고는 아니다 싶었는지, 약해진 투로 덧붙였다. 유자차에 남은 찌꺼기 같은 목소리였다.

 

“아니면 내가 빌어볼게. 꽃잎이 홀수로 달린 꽃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그럼 형은 원하는 답부터 세면 돼. 한다, 안 한다, 한다, 안 한다, 한다.”

“⋯⋯.”

“아님 되게 비싼 꽃으로 변하게 해 달라 하거나. 형도 딴짓 그만하고 찾아봐.”

 

어떤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너는 이 상황에서도 네가 빌 신을 찾아? 들어줄 신이었으면 너더러 이런 데 싸인하게 하지도 않았겠지⋯⋯. 문득, 이 애라면 정말 꽃이 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신에 대한 외사랑이 독했다. 타고나길 사랑만 하는 애였다. 성찬이 눈을 깔았다.

원빈의 싸인 옆엔 정성찬 세 글자가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적은 것이었다. 내려다보다 펜을 쥐었다. 조르듯이 펜대를 놀렸다. 마침내, 제 이름 옆에도 서명이 새겨졌다. 오후엔 ‘세상에서 가장 비싼 꽃’을 검색하고 보냈다.

물론, 검색은 원빈이 했고 성찬은 교과서를 보다 흘깃대는 식이었다. 그 애 낯이 전보다 나아 보였다. 꽃이 된다는 희망 때문에 그랬나 보다. 사람이 꽃이 되어야 편해지는 삶을 가늠할 수 없었다. 뭐⋯⋯, 어차피 그것도 여유가 돼서 하는 자살일 테다. 성찬은 제아무리 버거워도 꽃이 될 수 없었다. 감정을 누를 무렵, 원빈이 말을 걸었다.

 

“이건 어때? 줄리엣 로즈래.”

 

성찬이 입을 벙긋댔다.

화면에 탐스러운 장미가 피어있었다. 분홍색이었고, 속은 꽃잎들로 차 귀부인의 드레스 같았다. 속살을 감추려 몇 겹이나 껴입은 드레스 말이다. 이름이 적절했다. 아래엔 하얀 꽃이 있었다. 스리랑카에 피는 카두풀 꽃이랬다. 원빈의 눈길이 성찬이 닿은 곳을 눈치챘다. 그건 일 년에 한 번, 밤에만 피어. 그 뒤, 속눈썹으로 그림자를 만들며 웅얼거렸다. 원한다면 수집가를 소개해주겠단 것이었다. 목소리가 흐리고 외로웠다.

 

“아는 분 중에 집을 식물원처럼 하고 사는 분이 있어. 며칠 전엔 아프리카에서 희귀한 풀을 수입했대. 팔 수 있을 거야. 카두풀꽃은 나도 그분한테서 본 적 없으니까 잘하면⋯⋯.”

 

눈꺼풀 아래 가려진 눈이 먹다 남은 사과 같았다. 야위었고, 갈변됐다. 보고 있기 갑갑했다. 그런 기분을 피하려, 되는 대로 뱉었다.

 

“너는 미나리아재비 될 거라며.”

 

별 뜻 없었다. 그냥 마침 기억났고, 상황을 모면하기 적절해서 뱉은 말이었다. 위로하거나 흔들려는 게 아니다. 그래서 성찬은⋯⋯ 그 애가 등을 돌리자 가책을 느꼈다. 그 애 눈이 토끼처럼 됐다가 적나라한 표정을 담아서. 그 표정이 뭔지 알아서⋯⋯.

성찬도 어릴 적 지어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께 혼나서 버려진 듯했다가, 그분이 품을 벌렸을 때의 표정이었다. 내 세상이 나를 용서해줬을 때의 표정⋯⋯. 정적이 쌓여갔다. 그러니까 이건⋯⋯ 사람 대 사람으로 예의였다. 조용히 뇌까렸다.

 

“나는 싫어, 장미 같은 거. 카두풀 꽃도 예쁜 거 모르겠어.”

 

원빈이 돌아봤다. 눈이 흔들렸다.

방과후엔 여느 때처럼 키스를 했다. 벚나무 아래서였다. 그 애가 입을 벌리면 정성찬이 갈랐다. 말캉한 살이 젖었다. 물론, 입술이 늘 맞물렸던 건 아니다. 어쩔 땐 한쪽이 숨을 쉬고, 한쪽은 입술을 무느라 타이밍이 어긋났다. 그조차 자극이었다. 더운 한숨이 깔렸다. 돌아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란히 걸었다.

맛있는 게 남지 않아 빙빙바였다. 사실 원빈은 그걸 좋아한다고 했다. 성찬도 그랬다. 거기까지 얘기한 뒤, 침묵이 이어졌다. 견디다 못한 애가 알아서 가겠다길래 뇌까렸다. 데려다 줄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차피 거래 때문에 다정해야 할 몸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사랑 안 해. 밴드 주고, 돈 뽑아주고, 키스하는 걸로는.”

 

원빈이 멈춰 섰다.

 

“그래서 엄마가 날 사랑하지 않았던 거구나.”

 

그 모습이 오래도록 남았다.

집에 돌아간 뒤엔 설거지를 하면서 곱씹었다. 그 애는 별거 아닌 걸로 감흥 받았지만, 실은 성찬 역시 감흥 받은 게 있었다. 꽃 수집가를 소개해준다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홀수 잎의 꽃이 돼서, 어떤 점을 치든 원하는 대로 되게 해주겠단 목소리도⋯⋯.

지지를 받아본 적 없었다. 늘 제가 누군가의 지지대가 되어주는 삶이었다. 아버지가 계실 때도 황명희 때문에 기둥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런 말은 처음으로 들어보는 것이었다. 손이 미끄러졌다. 싱크대로 락앤락이 굴렀다. 플라스틱이라 다행이었다. 도로 들어 주방 세제를 벅벅 묻혔다. 태어나서 처음 받은 위로가, 황명희의 아들에게서 나온 게 아닌 척했다.

 

 

 

 

 

자기 전, 줄리엣 로즈를 검색한다. 카두풀 꽃을 검색하고 미나리아재비도 검색해본다. 가격도 쳐 본다. 비교가 되질 않았다. 원빈이 눈을 깜빡거렸다. 생각보다 빠르게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장미가 싫고, 카두풀 꽃이 못났다던 사람이 떠올랐다. 손끝이 은은하게 떨렸다. 이 손을 성찬이 잡아줬었다. 박원빈이 말한 꽃을 기억했다가, 줄리엣 로즈도 카두풀도 아닌 그게 되라 했다. 어머니가 정지철을 사랑한 걸 납득한 순간이었다. 저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 핏줄은, 그들에게 뭔가가 되라 강요하지 않았다. 가슴이 울렸다.

이제 원빈은 로보트 말고 성찬 생각을 하면서 잠든다. 머리맡의 그건 형이 윌봇을 좋아했던 걸 알고 버렸다. 대신, 원빈은 줄리엣 로즈와 카두풀 꽃을 프린팅했다. 이왕 좆되는 거, 선물이나 하려는 심산이었다. 형한텐 미나리아재비 말고 그런 게 더 도움되겠지. 바람결에, 엽서처럼 달린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비싼 꽃이 되고 싶었다. 미나리아재비 말고 손안에 쥐고픈 지폐라도 되고 싶었다. 아빠와의 아침 식사도 그 생각 하나로 견딜 만했다. 어차피 그분이 하는 말은 비슷할 터였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됐다.

 

“학교 앞에 보낸 차를 타지 않더구나.”

 

그렇게 된 지 오래됐는데 이제 와서 잔소리였다. 종아리에 알이 배긴 걸 보고 불만이 생겨 그럴 테다. 원빈이 드레싱을 뿌렸다.

 

“제가 연두색을 싫어해서요.”

 

대화가 끊겼다.

원빈을 데리러 오는 차는 법인 차였다. 팔천만 원이면 흰색 말고 연두색 번호판을 단다. 방금 한 말은 그걸 가리키는 것이었다. 저를 사랑하지 않은 엄마라도, 그런 재력에 붙잡힌 걸 보면 불쌍했다. 다행히도 그 이상의 잔소리는 없었다.

그 뒤 학교에 가, 성찬을 기다렸다. 형이 오려면 멀었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카페인을 마신 것 같았다. 연애의 설렘보단 거북할 만큼 가슴이 뛰었다. 원빈이 주춤했다.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어 몸을 일으켰다. 바람이나 쐬고 와야겠다. 문앞에서 성찬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

놀라서 벽시계를 봤다. 아직 올 시간이 아닌데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 성찬이 내려다봤다. 원빈이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럴 만했다. 원래 어머니를 살피느라 지각 전에야 겨우 도착했으니까. 일찍 온 건 처음이었다. 눈앞에 애 덕에 잠을 설친 탓이다. 꿈에서 맡았던 샴푸 냄새에 숨을 고르다 대꾸했다. 코끝에서 꽃향기가 났다.

 

“매점, 아직 안 열었던데.”

 

애가 어딜 가는 것 같아 하는 말이었다. 원빈이 빨개졌다. 그러려던 것도 아니면서 대꾸했다. 그럼 편의점 가면 돼. 성찬이 같이 간다고 가방을 고쳐 멨다. 나란히 학교를 나왔다. 횡단보도 신호가 길게 느껴졌다.

우스운 일이다. 바로 맞은편 편의점에 가면서 어디 유럽이라도 가는 것처럼 길게 느끼는 건. 원빈이 이제 목까지 붉혔다. 불편하고, 가슴이 뛰어, 작위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 때문에 귀찮은 거 아니야?”

“나도 살 거 있었어.”

“아⋯⋯.”

 

서로 거짓말했단 걸 알아챈 건 이다음이다. 그러니까, 횡단보도를 건너 편의점 매대에 섰을 때⋯⋯. 눈이 마주쳤다. 입술만 뻐끔거렸다.

하도 두근대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찬에게 살 물건이 있었다면, 그냥 학교 올 때 샀으면 됐다는 걸⋯⋯. 성찬도, 원빈도, 물건을 고르지 않았다. 애초에 볼일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낯빛에 깨달은 기색이 떴다. ‘아, 그냥 둘러댄 거였구나⋯⋯.’ 원빈이 숨 막힐 듯한 긴장감에 아무 말이나 뱉었다. ⋯⋯그냥, 나갈까? 아무것도 고르지 않는 둘에, 편의점 알바가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낼 즈음이었다.

그게 낫겠다. 이러고 있다간 키스해야 할 것 같았다. 성찬이 손을 잡았다. 원빈을 데리고 나왔다. 그런데 말을 잘못 알아들었는지 학교가 아니라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거다. 원빈이 당황했다. 아연해진 얼굴에 대고, 그 형이 물었다. 어디 가고 싶은데.

손에 온기가 가득했다. 원빈이 내려다봤다. 예기치 못한 상황과 온기에 압도되어, 여과도 없이 웅얼거렸다.

 

“그럼 N타워 가 봐도 돼?”

 

성찬이 돌아봤다.

N타워라면 그들의 어머니, 아버지가 죽은 곳이다. 명희는 꽃이 됐고, 지철은 추락했었다. 데이트하기에 적격인 장소는 아니었다. 그 애도 얼결에 나온 말인지 눈치를 봤다.

 

“그, 그게 그냥 생각나서⋯⋯.”

 

갈빗대 안이 불쏘시개로 들쑤셔진다. 성찬이 대답 대신 폰을 봤다. 눈이 가라앉아 있었다. 화가 난 모양이었다. 원빈이 쭈뼛댔다. ‘좀 생각하고 말할걸’ 하며 손을 빼냈다. 그런데 형이⋯⋯.

 

“환승 두 번 해야 돼, 저거 타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언짢아서 그런 줄 알았더니 폰으로 딴짓을 한 게 아니라 지도 앱을 봤나 보다. 손도 다시 잡혔다. 원빈이, 형에게 잡힌 채 출근 인파를 비집었다. 버스비는 당연히 형 카드로 냈다.

처음 타 보는 버스였다. 시간이 시간이라 모든 좌석이 꽉 차 있었다. 잡을 데도 없었다. 원빈이 머뭇거렸다. 이를 본 성찬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하는 말이, 아무것도 잡지 않으면 힘들 거랬다. 손을 꼼지락거렸다. 버스가 덜컹― 방지턱을 넘었다. 버티려 했는데, 형에게 쏟아졌다.

가슴이 아까와 다른 느낌으로 뛰었다. 숨이 차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었다. 원빈이 웅크렸다. 그저 안고 있는데, 야한 짓을 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불온했다. 환승해서 N타워에 내리고야 숨을 쉬었다. 목을 덮은 머리칼이 떨렸다.

케이블카를 타는 곳엔 매점이 있었다. N타워의 명물, 자물쇠를 파는 곳이었다. 물가가 많이 올라 만 원이나 했다. 네임펜을 놓고 온 사람을 위해, 두 개를 세트로 묶어 파는 홍보물도 있었다. 원빈이 중얼거렸다. 우리 엄마랑 형네 아빠도 저런 거 걸었을까. 성찬이 같이 봤다.

자물쇠는 소, 중, 대가 있었다. 웬만하면 그 사랑으로 좆된 집에 묻지 않을 텐데 순진도 했다. 기이한 건, 그 애 질문이 얄밉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찬이 걸어갔다. 제일 큰 자물쇠와 네임펜을 사 왔다. 원빈에게 건넸다.

악의가 없는 걸 알기에 한 짓거리였다. 그 애 얼굴이 그저 사랑을 이해하고픈 얼굴이라서⋯⋯. 그걸 이해한 다음, 하루라도 빨리 꽃이 되고픈 얼굴이라서⋯⋯. 볼수록 제 어미와 다른 애였다. 하트 자물쇠를 내려다본 눈이 소곤댔다.

 

“진짜 사랑하는 것 같아⋯⋯.”

 

정성찬이 오해할까 겁났는지 금세 주어도 명확히 했다.

 

“형 말고 나 말이야. 엄마가 된 것 같아. 아빠가 그렇게 원해도 될 수 없었는데⋯⋯.”

 

성찬이 턱에 힘을 줬다. 속이 불편하고 숨 막혔다. 원빈을 볼 때 흔히 느끼는 증상이었다. 심화되고 있었다. 이것도 신종 질환일지 모른다. 아버지가 황명희의 이 모습에 약했던 걸까 싶었다. 더 매몰되기 전, 케이블카로 데려갔다. 내리자마자 나온, 높다란 철조망 앞에 멈춰 섰다.

들리는 말이, 비교적 최근에 높인 거랬다. 명희도 그렇고, 지철도 그렇고⋯⋯. 자꾸 타워에서 떨어지니까 그러지 못하게 높였다는 거다. 덕분에 자리가 많았다. 원빈이 자물쇠에 글을 적고는 손짓했다. 제일 높은 데에 걸어 달라고 했다.

뭐라고 적었는지는 보지 말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낯이 순했다. 성찬이 움켜쥐었다. 곧, 철조망 높은 곳에 자물쇠가 걸렸다. 그 애가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미소였다. 새침하거나 우울하기만 한 애가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줄 몰랐다. 죽을 날을 받은 환자가, 더는 고통이 없을 걸 알아 지을 수 있는 미소 같았다. 갑갑했다. 가슴 안이 솜으로 꽉 찬 것 같았다. 원빈이 달싹였다. 고마워.

목이 메었다. 나머지 시간은 벤치에서 보냈다. 할 짓도 없으면서 굳이 그랬다. 입이 심심하면 입 맞췄고, 허리가 아프면 무릎 베고 누웠다. 원빈이 구름을 올려다보면서 말을 걸었다.

 

“내가 사랑하게 아무 말이나 해 봐. 형은 예쁘게 생겨서 노력할 필요도 없잖아.”

 

그런 애한테,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뭐라 해야 할까. 네가 카두풀 꽃보다 예쁘다고 할까? 줄리엣 로즈보다 사랑스럽다고 할까? 아니면⋯⋯.

어머니께 복수를 맹세하고 하는 짓이 한심했다. 그저 이렇게 말했다. 과묵한 남자는 스테디셀러야. 원빈이 턱을 쓸어보는 바람에 얼어버렸지만.

 

“나는 말 많고 다정한 사람이 좋아. 형, 박원빈이 사랑하게 해주기로 했잖아.”

 

⋯⋯견딜 수가 없다. 못 견디겠다. 성찬이 눈을 피했다. 원빈이 그것도 모르고 나지막이 말했다.

 

“나, 형을 사랑하려고 노력 중이야. 형이 예쁘고 다정해서 쉬울 것 같아. 말만 많으면 돼. 오늘 N타워에 온 것도 좋았어.”

 

성찬이 먼 데를 봤다. 그간 너무나 오만했었다. 생각을 바꿔야겠다. 이 애가 꽃이 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꽃이 되는 현상은 격렬한 짝사랑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저와 원빈은⋯⋯.

N타워를 나왔을 땐 별이 떠 있었다. 원빈을 혼자 보내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또 데려다 주기로 했다. 그 애가 사양했지만 돌이킬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때, 이런 연락을 받았을 뿐이다.

 

[ 얘, 성찬아. 너 왜 지금 전화를 받냐! ]

“아주머니?”

[ 큰일 났어! 웬 남자들이 너희 집에 들어갔다니까? 들어간 지 한참 됐는데 나오지도 않고⋯⋯. ]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다. 열댓 통이었다. 받았더니, 옆집 아줌마가 급하게 떠들었다. 말인 즉슨, 어머니 혼자 있는 집에 낯선 사람들이 들어갔단 것이었다. 급한 빚은 갚았을 텐데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성찬이 찡그렸다. 경황이 없어져 박차려던 차, 소매를 잡는 손에 돌아봤다.

 

“⋯⋯무슨 일 있어?”

 

아⋯⋯, 박원빈.

입술을 깨물었다. 저를 이 시간까지 어머니도 잊게 만든 애가 있었다. 이 와중에 얠 팽개칠 수가 없었다. 택시를 잡았다. 걷잡을 수 없는 동요와 벅참이 밀려왔다. 원빈에겐 미안하지만 제가 먼저 내리겠다고 했다.

낯빛이 창백했다. 늘, 미나리아재비밭에 들어가지 않겠다 다짐하면서도 향에 취하는 제가 있었다.

 

 

 

 

5

 

 

 

 

형은 ‘술독에 든 뱀’을 닮았다. 알코올로 인생을 말아먹은 점이 그랬다. 뱀이 뱀술에 묻히는 동안, 형은 안동 소주에 묻혔다. 그게 없인 어머니가 잠도 못 자는 탓이었다. 학교를 일 년 꿇었고, 돈을 모으는 시작점도 달랐다. 남들 적금할 돈, 어머니 술에 다 부은 업보였다. 느릴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그게 몸에 배어, 말을 걸거나 키스할 때조차 그랬다. 숨을 삼키고, 뱉고, 그 뒤에야 한 번 저지르는 식이었다. 덕분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형은, 전화를 받고 나서 성급해졌다.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그 얼굴을 훔쳐봤다.

낯이 뜬 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집에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심지어는 먼저 내리겠다 한 터라, 의심이 확신이 됐다.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원빈이 꼼지락거렸다. 이건 다 저 때문이었다. 형에게 폐인 어머니가 있는 걸 알면서, 여덟 시가 되도록 그 형 다릴 베개 삼다니⋯⋯. 나이브했던 머리가 돌아갔다. 황명희 아들이 형한테 접근하고, 우울을 말하고, 사랑을 하면 안 됐다고⋯⋯. 저야 하나 남은 부모에 미련이 없다지만, 형은 아니지 않은가. 그분 때문에 느리게 살았으면, 그만큼 사랑한 거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천치같이 군 게 원망스러웠다.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차창에 가득 잡혔다. 성찬이 돌아봤다. 자책하는 것 같아서, 손을 잡았다. 네가 이 좆같은 상황에 유일한 위안이란 뜻이었다. 그 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꽉 잡았다. 정말로, 그거 하나로 위로가 됐다.

그 애와 택시에 탄 지금은, 정성찬이 처음으로 '같이 버텨본 순간'이었다. 파리하고 순수한 얼굴에 묻고 싶었다. 왜? 키스하고 싶어? 원빈이 이제 막 나오던 날숨을 삼켰다.

입 맞출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 짓거리 때문에 좆됐단 걸 알아야 했다. 그런데도 형을 보면 숨이 차고,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었다. 눈을 돌렸다. 싫다고 했다간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 묵음으로 피력했다. 단지, 형이 박원빈보다 박원빈을 잘 알았을 뿐이다.

본인 손에 키스한 형이 손을 잡았다. 가슴이 부풀었다. 손금끼리 비벼지고, 온몸이 홧홧했다. 기사 아저씨가 앞에 있는 것도 잊어버렸다. 방금, 천치같이 군 걸 후회한 박원빈은 도로 그렇게 됐다. 눈동자가 그렁그렁해졌다.

손바닥 금들은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잘 느껴졌다. 뼈마디에 닿았다가, 언덕 같은 데에 닿았다가, 정말 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우묵한 데에 닿는 식이었다. 아주 오래, 민감한 데가 닿은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모르게 간절히 불렀다.

 

“아, 형⋯⋯.”

 

눈에 열기인지, 물기인지 모를 것이 담겼다. 습했다. 떨어진 건, 형네 집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너는 이거 타고 쭉 집 가.”

 

원빈이 손바닥을 만지작거렸다. 안으로 들어가는 형을 봤다. 그냥 형 말대로 하는 게 나을 것이다. 형한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을 게 있었다. 황명희의 아들이 끼어들 군번도 아니었다. 하지만⋯⋯.

쉬이 돌아서지 못한 건 자꾸만 형의 낯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창백하고 조급해 보였다. 혼자서는 괜찮지 않을 것 같았다. 택시 기사가 목적지를 묻는 걸 한 귀로 흘렸다. 학생―. 가는 데가 여기 맞아? 알아들은 건 그분이 네 번이나 물은 뒤였다. 입을 벌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죄송해요. 여기서 내려요.

어설프게나마 형이 줬던 지폐도 줬다. 기사 쪽에선 ‘목적지를 확인했을 뿐, 이미 카카오로 결제됐다’고 돌려줬지만 말이다. 원빈이 노란 돈을 쥐었다. 주는 걸 받지 않는 기사를 보며, 또 한 번 형을 떠올렸다. 형만이 제게 무언가를 주고 무언가를 받았다. 역시, 놔둘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발을 들인 집은 의외로 멀끔했다. 물건들이 낡긴 했어도 뒤엎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분명 급하게 연락을 받았는데 이럴 수가 있나⋯⋯? 좀 더 깊이 가 봤다. 그러다 원빈은 발견했다. 옥색 의자에 앉은 아빠와 그 앞에 무너진 아주머니, 아주머니를 품에 안은 형을⋯⋯.

발각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제야 알았다. 왜 아버지가 제게 ‘차를 타지 않는구나’ 읊조렸는지⋯⋯. 카메라 같은 눈이 꽂혔다. 초점이 원빈에게 있었다. 곧, 떠지껄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먹먹했다.

 

“요즘 네가 명희로 보였다. 암만 널 명희로 만들려 해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아빠⋯⋯.”

“레플리카가 진품이 된 거야⋯⋯. 근래 늦게 들어와 뭔가를 숨기는가 싶더라니 이럴 줄은 몰랐구나.”

 

아빠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있었다. 뒤를 밟힌 것보다 그게 더 소름 끼쳤다. 입술을 감쳐물었다. 일단 죄송하다고 했다. 속이야 어떻든, 지금은 형과 형네 어머니가 걱정돼서였다. 그런데⋯⋯.

 

“잘했다, 원빈아!”

“⋯⋯네?”

“네가 명희가 됐잖니! 정지철의 아들을 사랑해서! 이거였어! 너한테 부족한 게 이거였어! 이거였다고!”

 

원빈의 눈이 흔들렸다. 저분이 뭐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반면, 아빠는 전에 없이 환하게 웃었다. 처음으로 박원빈을 사랑하는 얼굴을 했다.

 

“그래, 이거야⋯⋯. 명희는 애타게 사랑하는 눈을 가졌는데 너는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네가 그 눈을 가지게 된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지철의 아들을 사랑한다니 이 얼마나 명희 같은 짓이냐!”

“⋯⋯.”

“드디어 새 전시회를 열 수 있겠다. 돌아가면 당장 진주 귀걸이를 해라. 그대로 로벨리아가 핀 분수대에 올라가서⋯⋯.”

 

멍했다. 매일 듣는 소리가 오늘은 다르게 들렸다. 그 안에 형이 끼워져있었기 때문이다. 저를 엄마로 보는 건 참아도, 형을 정지철로 보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과호흡이 왔다. 불과 한 달 전, 그 형을 통해 지철을 보던 사람은 없었다. 원빈에게 성찬은 유일한 존재였다. 엄마나 아저씨처럼 뮤즈나 장애물 따위가 아니었다. 아빠를 노려봤다. 성찬이 멈칫했다.

그간, 이 애에게 모자란 게 없는 줄 알았다. 온실 속 도련님이 무슨 이유로 꽃에 집착하나 의아하기도 했었다. 이제야 알겠다. 이 앤, 주위 누구도 ‘박원빈’을 보지 않는 삶을 살아온 거다. 가슴이 벌어지고 소금물을 부은 것 같았다. 박원빈이 태어나자마자 어떻게 버려졌을지 보여서. 어떠한 혀끝도 ‘박원빈’은 달가워하지 않은 것 같아서⋯⋯. 너는⋯⋯ 어쩌면 네 이름보다 다른 이름을 더 많이 들었겠구나⋯⋯. 그래서 죽고 싶었구나⋯⋯. 꽃이 되고 싶었구나⋯⋯.

경황없는 얼굴이 마음에 박혔다. 원빈이 제 아비에게 끌려갔다. 잡으려고 했지만, 저 역시 어머니에게 잡혔다. 그분의 백치 같던 눈에 불길이 가득했다.

 

“찬이.”

“⋯⋯어머니.”

“내가 철이처럼 되면 안 된다고 했지! 어떻게 그 여자 새끼를 좋아해. 어떻게 찬이가 그래! 어떻게 찬이가 그래!”

 

그렇게 굴면 높은 데서 떨어질 거라 했다. 성찬도 지철처럼 될 거라 했다. 어머니가 N타워를 말하고 있었다. 성찬이 젖어들었다. 이분의 분노는 온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 분노가 정지철이랑 황명희 말고, ‘정성찬’이랑 ‘박원빈’한테 가면 안 되는 거잖아요⋯⋯.

울음 같은 한숨을 토했다. 아니, 울었다. 속이 갑갑했다. 어머니 편을 들어야 하는데, 원빈이 아른거렸다. 제 편을 들어준 원빈 편을 들고 싶었다. 도축장의 송아지 같은 눈으로 말했다.

 

“잘못했어요.”

“⋯⋯.”

“그런데 박원빈이 나빠요?”

 

그 애에게 마음 쓰인 이유를 알겠다. 그 애는, 저처럼 ‘자기 자신’이랄 게 없었다. 성찬이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한 동안, 그 애 역시 황명희의 자리를 대신했다. 의지할 사람이 없었고, 이해해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 애는 홀수 잎이 달린 꽃이 되어, 원하는 점을 쳐준다는 헛소리를 했던 거다. 도무지⋯⋯ 그 애를 방관할 수 없었다. 반면, 그 애는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무덤을 파헤쳐서 꺼낸 낯으로 뇌까렸다.

 

“나는⋯⋯ 내가 우리 둘 모두한테 좋은 제안을 했다고 생각했어. 잘못 생각했나봐. 이제 형 없이도 할 수 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박원빈.”

“나한테 다정하지 마. 입 맞추지 마. 그럴 필요 없어. 나, 그렇게 하지 않아도 꽃이 될 것 같아. 형이 나한테 해준 걸 곱씹다 보면 그렇게 될 테니까. 그냥 나중에 내가 꽃이 되면 그 꽃만⋯⋯.”

 

못 참겠다. 성찬이 다시 젖었다. 처음 받은 로보트가 작별 인사인 걸 안 애처럼, 어리고 외롭게 울었다. 부정하고, 참아내고, 마침내 깨달은 것을 떠들었다.

 

“네가 개새끼야?”

“형⋯⋯.”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다쳐서 밴드 붙여주고, 시간 늦어서 집 바래다주고, 네 돈 받아먹으면서 키스해주고. 남다르게 대한 것도 없는데 너는 그걸로 사랑이 돼?”

“⋯⋯.”

“원빈아⋯⋯. 그런 걸론 개새끼들이나 사랑해. 넌 개새끼 아니잖아. 박원빈이잖아.”

 

원빈이 얼었다. 속이 어떻든 담담했는데, 저 말을 듣자마자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도, 저도 울고 있었다. 지금 저 말이 말이 안 돼서⋯⋯. 정지철의 아들이 황명희의 아들한테 이러는 게 말이 안 돼서⋯⋯.

성찬이 입술을 물었다. 화과자 같던 낯을 다 적셨다.

 

“나도 내가 이상한 거 알아. 그런데 신경 쓰여. 너를 꽃이나 개 같은 걸로 만들 수 없어. 박원빈, 너 이미 그렇게 못 돼.”

 

떨궈져있던 손을 잡았다. 그대로 끌어당겨 안았다. 닿은 가슴이 신경을 기울일 필요도 없이 존재를 피력했다. 서로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원빈이 결국 소리 내 울음을 터트렸다. 성찬이 꽉 안았다. 지금껏 느낀 모든 것의 정체가 동질감에서 비롯된 사랑임을 안 순간이었다.

 

 

 

 

 

모텔을 잡았다. 성찬이 한 살 꿇은 성인이라 대실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관계를 하러 간 건 아니었다. 둘은 그냥 누웠다. 단둘이 있을 곳이 필요했다. 쥐 오줌이 묻은 천장을 보며, 원빈이 물었다.

 

“이제 어떡하지⋯⋯.”

 

원래 계획은 꽃이 돼서 아빠만 남겨두는 거였다. 박원빈을 뮤즈로 써먹을 수 없게 복수하는 거다. 형도 꽃이 된 저를 분지른다면 앙갚음하는 거니까, 손해 보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 모든 게 비틀렸다. 아빠는, 박원빈이 그렇게 되면 그것마저 써먹을 사람이었다. 꽃이 되는 순간을 박제해, 새 전시회를 여는 그분이 떠올랐다. 뭣보다, 꽃이 되려면 격렬한 짝사랑을 해야 하는데 이젠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서로가 사랑하는 순간 달아날 곳이 사라졌다. 대신인 듯, 성찬 품에 파고들었다.

 

“나 많이 좋아?”

 

성찬이 내려다봤다. 원빈이 품에서 꼼질거렸다.

 

“난 밴드 붙여준 적도 없고, 집까지 바래다준 적도 없는데⋯⋯.”

 

웅얼거리는 물음이, 벅찰 만큼 가슴을 간지럽혔다. 그것도 모르고 그 애는 물었다. 별로 잘해준 것도 없는 제가 뭐가 그렇게 좋냐는 것이다. 여전히 순진한 애였다. 자기 엄마 때문에 길렀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줬다.

 

“너도 나 데려다 준 적 있는데.”

“언제? 설마 우리 아빠 온 날?”

“응.”

“개새끼도 그런 걸론 사랑 안 한다면서.”

“나는 개새끼라서 그래. 짖으면 깜짝 놀랄걸.”

 

터무니없는 우기기였다.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형이 좋았다. 설렜고, 따듯했다. 이 안에 영영 묻혀있고 싶었다. 형이 내 무덤이면 좋을 텐데⋯⋯. 원빈이 중얼거렸다. 형을 있는 힘껏 안았다. 그것만으로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원빈은 성찬의 품에서 처음으로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된다. 사랑이 충만했다. 실은 그대로 있고 싶었으면서, 눈치를 봤다. 어머니한테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형이 침묵했다.

‘박원빈’이 나쁘냐 물었을 때, 눈물을 본 어머니는 숙였다. 내내 미쳐 사셨는데 그때만은 옛 어머니로 돌아온 것 같았다. 뭐라고 말을 뱉으려다 돌아서신 게 선명했다. 그 뒤로는 전처럼 징징대거나 어리숙하게 굴지 않았다. 성찬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하교했을 때, 설거지통 밥그릇이 따듯한 걸 보고 눈치챘다. 이젠 락앤락에다 밥을 담지 않아도 되겠구나. 정성찬도 정성찬이다. 누군가의 아들이란 이유로 온전히 그 사람만을 위해 살 순 없었다. 걱정하는 애한테 대답했다.

 

“박원빈은 사랑을 아주 많이 배워야 할 것 같아.”

 

원빈이 큼지막한 눈을 치떴다.

 

“⋯⋯그 소리가 갑자기 왜 나와?”

 

눈동자가 커서, 삐죽거린다기보단 말 그대로 궁금해하는 느낌이었다. 성찬이 머리칼에 키스했다.

 

“오늘이 1일인데 남친더러 엄마 안 보러 가냐 묻는 애가 어디 있어.”

 

원빈이 발개졌다. 그 사이, 이마에도, 콧잔등에도, 뺨에도 입맞춤이 떨어졌다. 민망해서 눈을 내리깔았다. 형이 그 마음을 아는지 ‘쉬이―’ 얼렀다. 고개를 들게 해 입술도 머금었다. 나지막이 말했다.

 

“넌 박원빈이니까 박원빈의 삶을 살아.”

“형.”

“같이 도망치자. 너 어차피 그러려고 했잖아. 꽃이 아니라 사람으로 도망치면 돼. 네 발로 가. 네 발로 도망쳐.”

 

원빈이 주춤했다. 형의 말이 맞다. 꽃이 돼서 도망치려 했었다. 도피가 예정에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치만 그럼 형네 엄마는 어떡해? 두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성찬이 헛웃음을 흘렸다.

 

“너, 형 말 제대로 안 들을래?”

“그치만⋯⋯.”

“박원빈, 우리 엄마 말고 나랑 1일이야. 내 생각만 해야지. 너네 형 질투 나.”

 

순한 눈이 갈피를 못 잡고 수그러들었다. 성찬이 사랑하는 모습이었다. 망설이지 말라고, 더 꽉 안았다. 원빈이 움츠렸다. 입술을 말아 물었다.

형이랑 떠나는 게 싫다는 거 아니다. 저 때문에 어머니를 방치하는 나쁜 사람이 될까봐 그런다. 제가 아는 형은 좋은 사람이었다. 저 때문에 염치도 모르고 그런 사람이 되는 거 싫었다. 그럼에도 형은 그러겠다고 했다. 질릴 정도로 사진이 찍혀, 푸석해진 뺨을 만지며 말했다.

 

“내일 학교 말고 서울역에서 보자. 택시 못 잡겠으면 연락해. 알려줄게.”

 

어머니께는 돌아가서 건넸다. 원빈과 ‘약속’할 때 받은 오천만 원이었다. 오랜만에 말 거는 목소리가 남몰래 연습한 덕에 담담했다.

 

“그거, 그 애한테 받은 거예요.”

“⋯⋯.”

“그걸 줄 테니까 자길 꽃으로 만들어 달라 했어요. 황명희와 아버지가 우리만 다치게 한 게 아니에요. 박원빈은 죽고 싶어 했어요.”

“⋯⋯.”

“이게 그 애 목숨 값이니까 용서해주세요. 저, 그 애가 좋아요. 윌봇이 유행할 때도 사 달라 조른 적 없었는데, 그 애는 갖고 싶어요. 그래야 돼요. 절대로 그런 사람 밑에 둘 순 없어요.”

 

어머니는 등을 돌린 채 말이 없었다. 성찬이 단전부터 올라온 숨을 뱉었다. 외갓집에도 연락했다. 근 삼 년만이었다. 빚이 있고, 어머니가 폐인이라 격조했지만, 이젠 이분을 맡겨야 했다. 빈털터리도 아니고 빚도 거의 갚았으니, 팽개치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저처럼 사랑에 눈이 멀어 떠날 일은 없었다. 조용히 지껄였다. 어머니한테 오천만 원이 있어요. 그걸로 남은 빚 갚고, 어머니 좀 보살펴주세요.

원빈은 원빈대로 머리맡에 걸린 꽃 사진을 봤다. 갈등됐다. 형 말대로 하고 싶지만, 형네 어머니가 생선 가시처럼 걸렸다. 결국, 버스에 탔다. 제 동네에선 한참을 가야 탈 수 있는 버스지만, 한 번 더 형을 보고픈 탓이었다. 물론, 염치없이 집으로 가려던 건 아니고 그쪽 동네를 서성거릴 생각이었다. 운이 좋으면 안동소주를 사러 온 형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만난 건 예상 밖이었다.

 

“찬이랑 떠나?”

 

아주머니. 형네 어머니.

원빈이 당황했다. 눈에 띄게 놀라, 무어라 변명하려 했다. 어떡하지⋯⋯? 아직 마음을 정한 것도 아닌데 다 아셨나 보다. 이런 말이 떨어질 줄은 몰랐다.

 

“찬이랑 떠나.”

 

흠칫했다. 아까와 같은 말인데 뉘앙스가 달라졌다. 꼭⋯⋯, 허락이라도 한 것 같았다. 놀란 원빈이 여과도 없이 물어봤다. ⋯⋯미치신 거 아니었어요? 그분이 그 모습에 중얼댔다. 그년 새끼 맞네.

말이 험했다. 뭐, 저도 미치신 거 아니냐 했으니까 피장파장이었다. 원빈이 말을 붙이려 했다. 저어⋯⋯. 형의 어머니가 노려봤다. 대답도 말라는 눈치였다. 여전히 울분이 풀리지 않은 낯으로 박원빈을 질질 끌고 갔다.

그때 원빈은, 그분깨서 저를 N타워나 낭떠러지로 데려가는 줄 알았다. 황명희 새끼인 주제에 뻔뻔하게 왔으니 그분 딴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도착한 곳이 집이었다.  절벽은커녕 정성찬품으로 떨구기까지 했다. 기이했다. 심지어는 그대로 나가시기에 형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는 것이다. 원빈이 쭈뼛거리다 답했다.

 

“형이 보고 싶어서 동네까지 왔는데 아주머니랑 마주쳤어⋯⋯. 아, 그리고 형이랑 떠나냐고도 물으셨는데⋯⋯.”

 

허락한 것 같다 하진 않았다. 말을 연거푸 할 때의 뉘앙스가 달랐지만, 어디까지나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제가 형이랑 떠나고 싶어서 멋대로 곡해한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형은 그마저도 알아챈 낯이었다. 갑자기 락앤락에다 밥을 넣기 시작했다. 뭘 하냐고 묻자, 나지막한 대꾸가 돌아왔다.

 

“너 밥 안 먹고 나온 거잖아.”

“어?”

“챙겨야지. 멀리 가려면.”

 

밥만 챙기는 게 아니라, 나박김치와 눅눅해진 감자볶음도 챙겼다. 알았던 탓이다. 어머니가 얘를 만나고도 내버려뒀다면, 떠날 거냐고 물었으면서 데려왔다면 그들을 보내주겠단 뜻이었음을⋯⋯. 원빈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유는 몰라도, 형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한 듯싶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찬장에서 라면과 김을 꺼냈다. 눈이 마주치자, 훔치다 걸린 애처럼 뇌까렸다.

 

“나 그런 거 안 먹어봤어. 김 먹을래.”

 

성찬이 실소를 터트렸다.

다행히도 평일이라, 깊은 밤 KTX 표는 남아돌았다. 서울역까지 가는 전철도 끊이지 않고 있었다. 둘은 대합실에서 기다렸다. 막연히 제일 먼 부산까지 가, 해운대를 보자고 했다. 손에 쥐는 스파클로 불꽃놀이를 할 계획이었다. 그다음엔 모텔을 잡았다가 새벽에 BIFF 거리로 가, 거기서 유명하다는 국밥을 먹고⋯⋯.

원빈은 그 사이에도 국밥 같은 건 먹어본 적이 없다며 긴장했다. 블로그 글들을 찾아보는 눈이 동그랬다. 그 모든 게 한 통의 문자로 깨졌다. 원빈이 멈칫했다. 형네 어머니가, 아빠의 암실에 묶여있는 사진⋯⋯.

MMS로 온 건 틀림없는 아주머니 사진이었다. 성찬도 화면을 흘깃거렸다. 애가 굳어있길래 곁눈질했는데, 뜻밖의 것을 보고 말았다. 낯이 파리하게 얼어붙었다.

두 사람은 그제야 그분이 어디로 갔는지 알았다. 둘을 보내는 게 힘겨워서 사라진 게 아니라, 눈가림을 하려고 사라진 거다. 박원기의 신경을 쏠리게 해, 떠날 시간을 벌어주려고⋯⋯. 성찬이 숨을 토했다. 사납고, 창백한 숨이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원빈이었다. 짐도 내버려둔 채 형을 끌고 달렸다. 일단, 집으로 가야 했다. 역 앞에 선 택시를 잡았다.

예약손님이 있다지만 상관없었다. 그 사람이 저희라고 우겼다. 목적지를 바꾸느라 돈도 두 배로 줬다. 성찬은 그 뒤에야 정신 차렸다. 원빈이 뺨에 손을 얹었다. 미안해⋯⋯. 눈망울이 흐려져 있었다.

딱 보니 모든 게 제 잘못인 줄 알았나 보다. 정성찬이 떠날 생각에 빠져 미련했을 뿐인데⋯⋯. 이를 악물었다. 그 애 손을 강하게 쥐었다. 아직,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박원기의 목적은 ‘뮤즈’고, 이 앨 돌려받을 때까지 인질을 훼손할 리 없으니까⋯⋯.

가서 어떻게든 하면 된다. 손목에 쇠가 감길지언정 상관없었다. 그냥, 원빈과 어머니만 무사하면 된다. 그 애가 단단히 각오한 낯을 올려다봤다.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형과 암실로 가면서 생각했다. 집이 이상하게 고요했다. 형 말대로 그분을 해쳤을 린 없는데 걸음을 뗄수록 단두대로 가는 기분이었다. 집에는 가정부도, 정원사도, 아빠 일을 봐주는 실장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암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뿐이었다.

꼭, 홍등가나 정육점, 심해로 가라앉은 잠수정의 마지막 불빛 같은 빛이었다. 새빨갛고, 소름 끼쳤다. 암실뿐만 아니라, 아빠도 눈 안에 같은 빛을 내고 있었다.

 

“박원빈.”

 

원빈이 부름에 멈춰 섰다. 저를 고깃덩이,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지 않는 목소리가 꿰뚫었다.

 

“감히 네가 명희가 되지 않고 떠나려 해?”

 

그래, 사람이 아니라 오브제가 맞다. 그러지 않곤 이럴 수가 없었다. 씨발 개좆같은 예술병이었다. 저 말이 성찬에게는 또렷하게 풀렸다. 황명희의 뒤를 이어 작품이 되거나, 그도 아니면 꽃이 되라고. 떠나게끔 용납할 수 없다고. 박원빈으로 살 바엔 그간 찍은 작품에 서사라도 주게 죽어버리라고⋯⋯.

어머니가 입이 막힌 채 읍읍거렸다. 비로소 상황이 파악됐다. 저분이 황명희와 정지철 얘기를 해 박원기를 잡았다. 거기서 눈치챈 박원기가 벌인 사단이었다.

암실 안에는 모든 악이 선명했다. 줄마다 무수한 사진이 걸려있었다. 대개는 황명희였지만, 로벨리아 꽃에 던져진 원빈이 있었다. 넘어지고, 노려보고, 꽃이 될 뻔한 순간들이었다. 그 모든 순간에 그 애 귀에는 두드러지는 진주 귀걸이가 있었다.

이가 바득 갈렸다. 저게 원빈의 귀를 찢었다. 원빈을 황명희로만들며 유린해왔다. 그 애의 혼을 겁간했고, 마침내 자기를 포기한 채 꽃이 되게 종용했다. 치가 떨렸다. 진절머리가 났다. 죽여야겠다. 박원기를 죽여야겠다. 그 모습을 본 사내가 어머니 머리에 총을 갖다 댔다. 성찬의 속을 안다는 듯 선수 쳤다.

 

“지금 그 생각, 머리에만 담는 게 좋을 거야.”

 

곧, 방아쇠가 당겨질락 말락 했다. 가을철, 꿩 사냥에 쓰이는 총이었다. 박원기가 입을 비죽였다.

 

“네 어미와 그 애를 교환하지. 너는 정지철이 아니니까 어미를 같은 방식으로 버릴 순 없잖냐. 나는 너와 네 어미한테는 앙심이 없다. 어미를 받고, 내 ‘명희’를 떠나.”

 

이제는 원빈을 아들이라 부르지도 않았다. 그자에게 그 애는 그저 레플리카였다. 원빈이 성찬을 봤다. 성찬의 어머니도 바라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이대로 형이 저를 놓으면 다행일 테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형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아빠가 뭔가 하기 전에 나서야 했다. 눈 돌아버린 그분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원빈도 십수 년을 겪은 만큼 아빠의 합리화에는 이골이 났다. 예컨대 아주머니를 죽여, 형이 온전히 사랑만 하지 못하게 하겠단 생각. 불순물을 만든 다음, 제 아들이 더 사랑해 꽃이 되면 박제하겠다는 생각⋯⋯.

아빠는 황명희를 원했지만, 황명희가 벌인 짓까지 원하진 않았다. 엄마 때문에 강제로 은퇴했으니, 이번엔 제 뜻대로 은퇴한다고 합리화할 것이다. 끔찍했다. 모두의 관심이 멀어진 사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발견했다, 코닥 상표가 찍힌 통은. 그건 ‘수적 방지제(Photo Flo)’란 것이었다. 흔히 사진에서 정전기 및 말림 방지를 할 때 쓰이는데, 안에는 기름 성분이 들어있었다. 이거였다. 원빈이 성찬을 뿌리쳤다. 수적 방지제를 흘리고, 덮개 씌운 촛불을 엎질렀다. 뭘 하냐는 물음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속, 수적 방지제 뚜껑을 땄다.

곧, 미약했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빠가 일그러졌다. 그럴 만했다. 여기엔 황명희의 사진 전부가 있었다. 사본이야 밖에도 있지만, 고질병에 원본만큼 중요한 건 없을 터였다. 당연히 아주머니를 겨눈 총구도 내려갔다. 틈을 타, 원빈이 그분을 잡았다. 밖으로 탈출했다. 화재가 삽시간에 번졌다. 그들 셋을 제외하곤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빠는 절대 그 사진들을 갖고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엔 수가 많았다. 아빠가 사진을 떼는 속도보다 불길의 속도가 빨랐다. 다 끝이다. 성찬이 원빈을 봤다. 해방감, 슬픔, 죄책감이 담겨있었다. 그 애가 주저앉았다. 불길을 보다가 울음을 삼켰다.

정원의 로벨리아가 눈에 든 건 그즈음이다. 택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로가 있었다. 그중 하나를 택했다. 꽃을 꺾고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다녀올 데가 있어요. 원빈이 좀 봐주세요.”

 

그리고 이튿날, 아침 뉴스의 앵커는 떠든다. 몇 개월 만에 서른 번째 인화 현상이 일어났단 것이었다. 뒤가 통통한 브라운관 TV가 내보냈다.

[ 오늘 새벽, N타워 케이블카 건물 앞에서 꽃이 발견됐습니다. CCTV가 망가져 확인할 수 없으나, 사람이 꽃이 되는 ‘인화 현상’이란 것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꼭대기에서 발견된 유류품은 유명 사진작가인 박 씨의 것으로,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내가 인화 현상을 겪은 뒤 크게 상심하여⋯⋯. ]

어스름 속에서, 소년들이 침묵했다. 한 소년이 어깨에 머리통을 기댔다. 다른 소년은 그 소년의 손을 잡아줬다. 낯이 TV가 명멸할 때마다 파랗게 되었다가 또 하얗게 되었다.

사람이 깊은 짝사랑을 하면 꽃이 되는 세계였다. 뉴스에 대한 중론은 이랬다. 뮤즈였던 와이프가 죽어, 박원기가 꽃이 되는 건 당연하다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그저 박 씨라고만 했지만 사람들은 다 알아들었다.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엄말 따라 귀를 뚫고 화장하던 소년에겐 인터뷰가 쇄도했다. 장례를 어떻게 할 거냔 것이었다. 기댄 채로, 느린 문자를 보냈다.

[ 화장할게요. 아빠가 그걸 좋아하셨어. ]

바야흐로 꽃 태우는 사회였다. 깊은 봄, 서울 하늘에 꽃가루가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