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풍선 버그공략 대작전!
by. 소모
"형, 우, 우리 결혼할래?"
달콤 쌉싸름한 자몽색 석양 아래. 뻥 뚫린 고속도로를 3시간 20분 질주하여 도착한 어느 해변. 싸늘한 겨울 바다를 따라 하얀 모래 위를 다정하게 걷던 두 사람. 그곳에서 박원빈은 정성찬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1년 연애에 마침표를 찍고 청혼했다. 칼바람 속에서 박원빈이 훌쩍이며 부르는 감미로운 세레나데가 파도에 섞여드는 낭만적인 밤이었다.
"나도 이제 쫌…… 너랑 평생 같이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
박원빈이 청혼할 거라는 걸, 3시간 20분 운전하는 동안 이미 눈치챈 정성찬. 그에 대한 화답으로 멱살을 잡아당겨 거칠게 키스했다. 원빈아. 그런데 있잖아. 나 오늘 어디 운동했는지 맞출 수 있어? 눈동자를 별처럼 빛내며 노골적으로 유혹하면 운전석이 뒤로 홱 넘어간다. 거기 앉아있던 정성찬은 두 주먹을 튼튼한 가슴에 앙증맞게 모으고 꺅! 기대감 어린 소리를 내질렀다.
자석의 S극과 N극을 따로 떼어서 본 것처럼, 서로 다른 부분도 많지만 같이 있으면 너무나 재미있어서 가끔은 한 세포를 절반으로 갈라 만든 게 정성찬과 박원빈이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본 적도 있다. 잘생긴 얼굴이 취향 후려갈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워커 홀릭이라는 공통점과 운동을 좋아한다는 점, 이상한 농담에도 물개박수를 자아내는 웃음 코드마저 닮았다. 어쨌거나 천생연분. 은밀한 성적 취향은 또 얼마나 잘 맞게요? 섹스마저 스포츠처럼 하는 그들에겐 더없이 완벽한 파트너. 글러브 박스를 열면 온갖 종류의 콘돔이 쏟아진다. 오늘 간택된 건 딸기향이 첨가된 돌기형. 딱히 선호하는 질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날 낙점된 까닭은 평소 즐겨 쓰던 초박형 콘돔이 빈 상자째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게임을 하는 것처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다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웃음을 터트리고 달달한 입맞춤 한 스푼 첨가하여 힘차게 방아를 찧다가도 금세 하얀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꺼이꺼이 울었다.
일하는 것보다 힘들다. 그치만 좋아!
벅찬 환락 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습기로 뽀얘진 차 창문에 손바닥 도장을 쾅! 찍고 영화 타이타닉 마차씬을 방불케 하던 두 사람. 야생 짐승 같은 놀이는 이쯤 마치고 밤 11시가 다 되어갈 무렵에야 예약해 놓은 5성급 호텔 스위트룸에 겨우겨우 도착해서 체크 인했다.
"그런데 왜 나랑 결혼이 하고 싶어졌어?"
"정성찬이랑…… 좀 더 단단한 관계가 되고 싶어서요."
순백의 가운을 입고 누운 포근한 침대. 정성찬은 아주 감동한 눈빛으로 예비 신랑을 바라본다. 눈이 유리알처럼 빛났다. 처음 본 그날부터 박원빈은 이토록 특별하고 사랑스러웠다. 그중에 오늘이 최고로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
"나도 좋아……. 박원빈이랑 결혼하는 거. 너랑 여보 자기 남편하고 싶어."
라지 사이즈 콘돔을 내다 버리면서 정성찬은 수줍은 새색시처럼 얼굴을 붉혔다. 박원빈은 너무 수줍은 나머지, 정성찬의 딱딱한 가슴에 힘 조절 실패한 냥냥펀치를 날리면서 예쁜 표정을 짓는다. 불시에 날아온 주먹에 쿨럭……, 기침을 쏟아내고야 말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머잖아 딴딴 따단, 딴딴 따단 미성으로 결혼행진곡을 흥얼거리던 박원빈. 그 순간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웨딩홀 버진 로드에 서 있는 상상에 빠지게 된다. 상상 속 결혼식에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입장하고 있다. 다소곳한 자세로 박원빈의 팔짱을 낀 채 버진 로드를 함께 걷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186cm 거대한 햄, 정성찬이었다. 박원빈은 멋진 턱시도를, 키는 좀 많이 크고 몸은 근육 때문에 예쁜 정성찬은 홀터넥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하얀 어깨는 시원하게 드러낸 디자인이었다. 하얀 면사포를 쓴 정성찬이 부케를 던진다. 어어, 홈런이다. 상상을 끝냈을 땐 웃고 있었다.
"결혼식은 어떻게 할까요?"
이윽고 현실적인 고민도 해본다. 이 세상엔 환영 받지 못하는 결혼도 있다.
"결혼식은 비공개로 하자."
"당연하죠. 무조건 비밀. 가족들만 초대해서 해요."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았다. 닮은 구석이 있는 입술이 사랑스럽게 맞물렸다. 아무도 모르게 하는 야한 키스였다.
형, 저는 신혼집 거실이 컸으면 좋겠어요. 거기에 커다란 소파를 놓고 침대는 방마다 놓고 싶어요. 나도 침대는 진짜 크면 좋겠어. 그리고 커다란 스피커도 사자. 책장도 놓고 드레스 룸은 크게 만들 거야. 어쩐지 행복한 미래 계획. 두 사람은 서로를 지그시 바라본다. 그러면 또 사랑이 동했다.
원빈아, 어때? 우리 한 번 더…….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원빈은 이미 귀엽고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납작한 패키지에 담긴 콘돔을 고양이처럼 입에 물고 있었다.
♡ ♡ ♡
그리하여 어느 햇살 좋은 날, 가족들과 아주 가까운 지인 몇 명만 초대한 소담한 결혼식이 열렸다. 규모는 작아도 엄청나게 근사하게. 그들의 결혼식에는 웨딩드레스가 없다. 대신 턱시도를 입은 두 남성이 자리했다. 그들의 결혼식에는 부케도 없다. 다만 팽이버섯을 닮은 안개꽃 부토니에를 가슴에 꽂고, 면사포 대신 하얀색 꽃을 엮어 만든 화관을 썼다. 그들의 결혼식엔 결혼행진곡도 없었다. 다만 서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가장 행복하게 웃었다.
"참석해 주신 여러분 앞에서 맹세합니다. 사랑으로 어려움은 인내하고 즐거움은 나누며……."
"평생 서로에게 가는 길을 찾겠습니다."
박원빈의 턱을 쓸면서 여유를 보이던 게 찰나, 기어코 눈물을 터트린 정성찬. 그런 그를 ‘공주님 안기’하고 성찬아 사랑한다! 크게 외친 박원빈. 얌전히 안긴 새신랑은 눈코 빨개져선 수줍어하며 나도 사랑해! 했다. 핑크색 하트풍선이 머리 위에 두둥실 떠올랐다.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키스를 했다. 환상 같은 결혼식은 아니었지만 현실적이어서 더 아름다운 예식이었다.
♡ ♡ ♡
그랬던 게 오늘로 정확히 1년째.
달라도 너무 다른 정성찬과 박원빈.
신혼 1년 차. 서로가 좋은 건 분명한데 이상하게 자꾸만 엇나간다. 미운 건 아닌데 섭섭하다. 묘하게 시선이 엇갈리기도 했다. 사소한 걸로 지지고 볶고, 토라지고, 서운해하고, 찬바람 쌩쌩 날리다가도 서로의 잘난 얼굴만 보면 화가 누그러졌다. 역시 얼굴은 잘생기고 볼 일이에요! 저 얼굴을 보고 어떻게 화를 내나요? 이렇게 예쁘고 잘생기고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우며 섹시한 데다가 청순하기까지 한데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침대에 기어 올라가 짐승처럼 섹스하고, 싸우고, 섹스하고, 또 싸우고, 섹스하고……
그렇게 시간은 어물쩍 흘러가 버리고 기억은 가물가물해진다. 형 근데 우리 왜 싸웠지? 몰라! 그게 지금 왜 중요해! 당장 좋은데! 하며 대충 넘어가게 되었단 말이다.
그런데 이게 뜻밖에 복병이었다. 분명히 화가 나고 어긋나는 지점이 있으니까 문제점을 찾아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아야 하는데 매일 섹스하고, 섹스하고 또 섹스하다가 싸운 이유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니까 정성찬과 박원빈은 저마다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앙금 몇 덩어리씩 쌓아놓고 말았던 것.
미우니까 사랑하는 마음을 의심하게 된다. 그 와중에 섹스 궁합은 쿵떡이고 찹쌀떡이라는 걸 서로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게 의외로 제일 큰 문제. 말 몇 마디면 해결될 일인데도, 그걸 못하는 바보들이라서 섹스 몇 번 하면 자연히 풀리는 줄 알고 고추만 자꾸 세우고 또 세웠더랬다. 그렇게 점점 나락으로 치닫는다. 회복 불능의 상황.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데 소는 이미 잃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외양간은 예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을 만큼 폐허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걸 깨달았을 때…….
"형."
모처럼 쉬는 날엔 침대 누워서 정오까지 뒹굴뒹굴하며 놀고 싶었던 박원빈. 그런 여보 자기 남편 등지고 새벽부터 헬스장 달려가 근육이나 실컷 단련하고 온 정성찬. 매일 지지고 볶고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 치면서 싸우는 것도 지겨워 죽겠다. 그리하여 그 예쁘디예쁜 입술에서.
"우리……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단호한 말로 마침내 그걸 인정하는 단계가 성큼 다가오게 된 것.
"맞아. 우리 진짜 안 맞아."
둘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치고 너와 나의 관계를 새로 정립한다.
"그니까 우리 이제 그만 해요. 지겹다."
"……헤어지자고?"
"네. 우리 헤어져요. 아니. 우리 이혼해요."
정성찬은 들고 있던 텀블러를 툭 떨궜다. 프로틴 탄 물이 비극적으로 팍, 터졌다.
"그래. 이혼하자."
그렇게 제안은 박원빈이, 최종 판결은 정성찬이 했다.
거기서 대화 종결. 자연스럽게 안방은 박원빈이, 작은 방은 정성찬이 차지하게 된다. 각방의 시작은 그렇게나 쉬웠다.
언제나 나란히 꽂혀있던 칫솔이 헤어졌다. 이불은 두 개로 나뉘었다. 한 덩어리 같았던 베개는 영영 생이별을 한다. 거실에 밀집되어 있던 생활감이 각자의 방으로 도망쳤다. 공기는 고요해졌고 개수대에 널어놓은 식기는 늘 한 벌뿐이다.
별거 직전, 각방 기한은 집이 정리될 때까지. 화내는 법이라고는 문 세게 닫는 것밖에 못하는 두 사람. 안방 문이 쿵! 벼락처럼 닫히면 뒤이어 작은방 문이 쾅! 천둥 같은 굉음을 내며 굳게 닫히고 말았다…….
하트풍선 버그공략 대작전!
소모
세상이 무너지면 휴가도 반납하고 출근부터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이잉, 지이이잉──.
새벽 4시 58분이었다. 고요와 어둠이 먼지처럼 가라앉아있던 어두컴컴한 실내. 시계 초침만 일정하게 똑딱똑딱 울리던 이곳에 무작정 찾아와 고막을 후려갈기며 행패를 부려대는 것은 웬 전화 한 통이었다. 아침 기상 알람이 울기에 너무나 이른 시간이다. 라지 킹사이즈 침대에 홀로 엎드려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던 박원빈. 머리를 쥐어뜯으며 꿈틀댄다. 진동이 울리는 시간대가 현실감 없었다. 그러나 이건 아마도 현실이다.
"……헉!"
어릴 때부터 혹독한 훈련에 익숙한 박원빈은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들었다. 발신자 김 차장. 수신 버튼을 누르던 찰나 전화가 끊어졌다. 콜 백을 하기 직전, 도착하는 메시지 한 통.
비상 상황. 출근해.
비상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를 해야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 사태 파악을 위하여 박원빈은 곧바로 유튜브를 실행시켰다. 메인 페이지에 떠있는 실시간 라이브. 재난본부 공식 채널에서 송출 중인 영상이었다.
문제의 지점은 새벽에도 불빛이 넘실대는 서울의 상공이다. 거기에 무언가가 있다. 한강을 낀 어둑어둑한 하늘 그 어딘가. 아무것도 없어야 할 허공에 새까만 구멍이 스멀스멀 생기는 중. 그것은 마치 자그마한 블랙홀처럼 보였다. 화면 하단에 빨간색 자막이 떴다. 속보. 포탈 형성. 괴생물체 침공 중. 즉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고 외출을 자제 바랍니다.
"으악!"
침대를 벗어난 박원빈은 곧장 욕실로 뛰어들어가 짝을 잃은 채 양치 컵에 외롭게 꽂혀있던 칫솔과 치약을 집어 들었다. 치약 쭉 짜서 칫솔을 물자마자 눈과 코가 미친 듯이 아렸다.
당장 갖다 버리고 싶은 욕망을 가까스로 누르며 치약 거품을 퉤. 어째서 이런 건 써도 써도 줄어들지 않을까? 찬물을 잘생긴 얼굴에 마구마구 끼얹으며 그런 생각도 잠시. 급박한 상황에도 물 먹은 피부를 보드라운 수건으로 톡톡 부드럽게 닦아낸 박원빈은 서둘러 드레스 룸에 뛰어 들어간다. 고민할 시간은 없다.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주워 입는다. 어차피 셋업으로 맞춰두는 편이라 아무거나 입어도 괜찮았다.
"……아악!"
"……으아아악!"
비상 상황에 대처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안방 문을 연 그 순간,
훅 들어오는 충돌!
"아야........."
방문을 가로막고 있던 어떤 존재와 쿵, 하고 부딪히고 만 것이다. 힘 대 힘의 대결. 완력에서 패배한 박원빈은 그만 문짝에 이마를 박고 뒤로 발라당 넘어져 버렸다. 비명은 자연스럽다. 삶은 계란 모서리로 이마빡 내려친 것보다 더욱 강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생리적인 눈물이 핑 돈다.
그런데 비명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더랬다. 반대쪽 비명의 주인공은 뻔했다. 정성찬이었다.
이건 또 다른 비상 상황이다. 이건 거 저런 거, 건전한 거, 야한 거, 사랑스러운 거, 귀여운 거 다 하고 살았으면서 이혼을 선언한 이후로 부쩍 데면데면해졌다. 하나였던 생활 범위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진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지내길 어느덧 1달 째...... 취향 후려 갈기는 얼굴은 어디 가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가능하다면 그 잘생기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조차 최대한 마주치지 않기로 합의까지 마쳤다. 어려운 결심이 바닷물 흠뻑 뒤집어 쓴 모래성처럼 무너져서는 안되니까.
깨진 것 같은 이마를 붙잡고 상해죄로 고소할 것을 마음먹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뭔데 저 형은 이 시간에 저런 예쁜 옷을 입었지? 여전히 짜증 날 정도로 잘생긴 정성찬은 울상을 하고서 발가락을 붙잡고 있었다. 심지어 콩콩 뛰고 있었다. 정정한다. 콩콩은 아니고 쿵쿵, 에 가깝다. 아무래도 186cm에 72kg가 콩콩 뛰는 건 좀 어려운 일일 테니까. 발가락을 찧었나. 앙심을 뒤로하고 인간적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긴 한다. 진짜 아프겠다…….
"아, 뭐 하는데."
"보면 모르나. 출근 준비하잖아. 형이야말로 뭐 하는데."
"나도 출근 준비 중이거든."
아차, 이마가 너무 아픈 나머지 박원빈은 배우자가 본인과 같은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걸 잠시 잊었다. 박원빈에게 비상은 곧, 정성찬에게도 비상이란 뜻.
"조심 좀 해."
"조, 아니, 충분히 조심하고 있거든?"
정성찬과 박원빈은 같은 회사에서 만나, 비밀리에 사랑을 싹 틔웠다. 아무도 모르게 등을 쓸어주고 손을 잡다가 키스까지 하게 되었다 이 말이다. 그렇게 시작한 은밀한 사내 연애가 결혼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비록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이혼이란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한 때는 다정하게 마주치던 눈. 이제는 원망이 지극하게 실린 채 마주하고. 한때는 사랑을 숨기지 못하던 말투. 작금엔 미묘한 날을 세우고 서로를 찌를 준비를 하는.
잠시의 대립. 그런 그들을 어색한 갈등에서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김 차장의 전화였다. 지이잉, 지이이잉. 오고 있냐? 넵 지금 출발합니다. 비슷한 독촉 전화가 정성찬에게도 온다. 방정맞게 울리는 진동 2중주 덕분에 그들은 날카로운 경계심을 거두게 되었다. 당장 급한 것은 싸움이 아니라 출근이다. 세상이 무너져도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고, 그건 반드시 정성찬과 박원빈이니까.
"나 오늘 늦어. 기다리지 마."
"내가 형을 왜 기다리는데요. 내가 형보다 더 늦어. 형보다 내가 더 바빠. 그러니까 형이야 말로 나 기다리지 마요."
매정한 어조. 두 사람은 출근을 서두르며 나란히 신발을 신었다. 정성찬이 먼저 문을 열고 박원빈이 나올 때까지 문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형 제발 거실 어지른 것 좀 치우고 자라고요."
"박원빈 너야말로 드레스 룸 어지른 거 정리 좀 해."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탄 박원빈은 정성찬이 탑승할 때까지 열림 버튼을 누른다.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다. 드디어 몸이 멀어질 차례였다.
"가등가."
"응. 너도."
같은 곳으로 출근하지만, 수단은 다르게.
늘 그렇듯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순간은 비밀이어야 하니까. 출근 전 다정한 키스는 이제 더는 없다. 차에 올라타기 전까지 소소한 신경전이 팽팽했다. 불화가 실감 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내 차 문이 쿵! 쾅! 닫혔다.
♡ ♡ ♡
바야흐로 히어로의 시대다.
시속 150km로 내달렸다. 새벽의 거리는 시원하게 비어있었으므로. 이윽고 박원빈의 차가 멈추어 선 곳은 서울 한복판, 무려 100층에 달하는 건물 앞이었다.
《히어로 에이전시》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화려한 로비. 발렛 직원들에게 차키를 넘기곤 건물 안으로 질주했다. 비상 상황이 실감 나는 상황.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건물 내부는 한낮처럼 밝다. 오전 5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직원들도 바글바글했다.
로비에 걸린 화면에선 괴생물체 침공 라이브가 송출되는 중. 박원빈은 출입 카드를 찍고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닫힘 버튼을 마구마구 연타하고 있는데 승강기 속으로 비장하게 몸을 던지는 누군가. 이번에도 반드시 정성찬.
"..........."
"..........."
어색한 기류는 신혼집을 떠나서도 이어지고.
"그.........."
"어."
69층입니다. 침묵을 깨려는 시도. 그러나 하필이면 그때, 엘리베이터가 그들의 근무지에 도착하는 바람에 더욱 어색해지고 마는.
"아니야. 몸 조심 하라고."
".........어. 형도."
69층 본부에 도착한 정성찬과 박원빈. 그들이 그곳에서 맞닥뜨린 건 화면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여러 장면이 수백 개의 화면 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괴생물체가 침공하는 장면, 시민을 구조하는 장면, 구조대가 질주하는 장면. 침공 장소는 서울숲을 옆구리에 낀 한강 변이었다.
컴컴한 서울의 상공에 생긴 검은색 포탈과 그 속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괴생물체. 언제나 그것이 문제다. 피부는 회백색이고 점액질에 덮여 있어서 더욱 끔찍한 몰골. 지능이 없는 그 괴물들의 목표는 언제나 아름다운 도시를 깨부수는 것. 마구마구 부서져가는 성수대교. 정성찬과 박원빈은 중계 화면을 보며 단박에 인상을 구겼다.
상황을 진두 지휘하고 있던 상급자가 있다. 그가 때마침 뒤를 돌아 정성찬과 박원빈을 본다. 그는 《히어로 에이전시》의 김 차장이었다.
"정성찬, 박원빈 너희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
"..........네?"
"저희 이제 막.........."
"히어로들이 뭐 하는 거야! 대교 무너지기 전에 빨리 출동해!"
김 차장이 두 사람의 등을 떠민다. 건물 바깥에는 사람이 탑승 가능한 거대 드론 두 대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당장 출격해. 그건 절대 저항할 수 없는 상명. 정성찬과 박원빈은 드론 쪽으로 질질 밀리면서 가능한 많은 무기를 챙긴다. 탄창 홀더를 허리춤에 끼우고 상반신에 홀스터를 채우며.
그러는 동안 정성찬과 박원빈을 순식간에 둘러싸는 사람들. 헤메코 담당자들. 분주한 틈에 그들의 얼굴엔 파운데이션이 발렸고 삐져나온 앞머리는 잘려 나갔다. 음. 예뻐. 좋아. 합격 판정이 떨어졌다. 이제 진짜 세상을 구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곳은 69층이다. 언제든 출격할 수 있도록 특수 설계가 된 창문이 열린다. 발밑으로 펼쳐지는 까마득한 세상. 정성찬과 박원빈은 거기에 나란히 위험천만하게 선다. 그들은 히어로다.
그리고 히어로들은 늘 어깨가 무겁다.
드론에 탑승하기 위해서 69층 상공에서 점프했다.
히어로 코드네임 : 우락밤
히어로 코드네임 : 토냥덕
제3천년기를 축약하는 단어 두 가지를 고른다면 그건 아마도 ‘종말’과 ‘히어로’가 되시겠다. 세상은 종말했고 절체절명의 순간, 우리 사회엔 히어로가 등장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안타까운 <부부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세상에 찾아온 종말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세상은 한 번 망했다. 그건 초유의 사태이고, 미증유의 사건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미지의 블랙홀이 지구상에 형성된 것이 그 시초로, 그것은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괴현상으로 정의되었다. 연구를 거듭한 후에야 그것을 찢어진 시공간이라 추측하게 되었다.
그것은 가히 지옥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온갖 사악하고 무서운 것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 인간의 외양을 닮았으나, 평균 크기가 인간의 약 3배에 이르는 외계 종족들. 그것들은 블랙홀에서 우르르 떨어져 도시를 부수고 다녔다. 우리의 아름다운 행성은 그렇게 무참하게 부서져 갔다.
하지만 놀랍게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같은 시기에 지구에서 자연 발생한 종족 때문이었다. 초능력자 말이다. 그들은 절체절명의 순간, 인류를 구하기 위해 등장했다. 우리는 그들을 일컬어 《히어로》라고 불렀다.
그게 무려 100년 전의 일.
[ 성수대교로 가. ]
게임기처럼 생긴 드론 내부. 거기에 탑승한 박원빈은 레버를 올리며 김 차장의 무전을 듣는다. 좁은 내부에 명령이 웅웅 울린다. 정성찬은 어디 있지? 조이스틱을 돌리면서 시야를 확보하는 히어로 박원빈. 정성찬이 탄 드론이 저기 앞서 나가고 있다. 기어를 조작한다. 뒤처지고 싶지 않다.
[ 참, 원빈이 머리 흐트러진 거 다듬어야 돼. 그거 말곤 다 완벽해. ]
"아, 네……."
곧장 선반에 놓여있는 손거울을 꺼내서 머리를 확인한다. 머리가 긴 탓에 손이 많이 가는 편이었다.
[ 성찬이는 저번에 그거 좋았어. 밴드 붙이고 사탕 물고 있었던 거. ]
[ 아, 그게 왜요? ]
[ 그날 전체적으로 헤메코가 섹시했어. ]
그리고 섹시함이란, 오늘날 전투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박원빈은 입을 오리처럼 삐죽대며 상반에 착용한 홀스터를 조였다. 권총 두 정을 꺼내 탄창과 상태를 꼼꼼히 체크했다. 박원빈이 선호하는 총기는 콜트파이슨이다. 리볼버 일종인 콜트파이슨을 사랑하는 이유는 한 발의 위력이 크면서, 화려한 영상 연출에 아주 용이한 기종이라는 점에서.
이게 다 무슨 이야기냐고?
종말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희한한 형태로 발전했다. 최초의 히어로들은 치열한 전투를 통해 민간인의 안전을 확보했다. 그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임이 분명했다. 인류는 히어로에 열광했다. 그들은 언제나 특별한 존재였다.
포탈은 규칙과 주기와 상관 없이 발생한다. 그러나 치밀한 연구를 통해서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는 요령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괴생물체는 막연한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인류에게는 그것들에 저항할 수 있는 히어로들이 존재하니까.
그러나 히어로는 희귀하다. 고로 평범한 삶을 살기 어렵다. 그들의 전투는 언제나 전 세계로 생중계 된다. 자연스럽게 팬덤이 구축됐다. 팬들은 그들의 출격을 언제나 기다렸다. 보호받고 싶은 욕망은 점점 추종적으로 변해갔다. 시간이 흐르고 괴생물체를 다루는 데에 수많은 요령이 생긴 이 시대에, 누군가는 깨닫고 만다.
《히어로》 산업이 돈이 된다는 걸.
[ 자자....... 거의 도착했지? 잘 알겠지만, 둘이 경쟁 구도 신경 좀 써 줘. ]
"그런 건 걱정 마세요."
드론은 블랙홀이 생긴 성수대교 인근에 도착했다. 점검을 마친 콜트파이슨을 홀스터에 끼워 넣은 박원빈. 입술을 앙 깨물었다.
우리의 결혼이 세간에 알려지면 안 되는 이유.
히어로들은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기에.
그들 중에서도 유명한 히어로가 있다. 정성찬과 박원빈이다. 그들을 둘러싼 키워드는 다름 아닌 혐관. 그들은 대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다. 다소 늦게 발현한 박원빈이 데뷔하자마자 히어로 인기순 1위를 차지하고 말았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은 언제나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편이다. 평소에 훈련 양이 많기로 유명한 것도 두 사람이다. 다만 전투에 있어서 선호하는 방법이 다른 편이다. 박원빈은 요령 있게 몸을 잘 쓰고 정성찬은 힘이 세고 리치가 길다. 주로 큰 전투에 출격하는 두 사람은 침공 현장에서 자주 부딪히는 편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경쟁을 하는 듯한 모멘트를 자주 보여주곤 했더랬다. 세기의 스포츠 라이벌 같았다.
그런데 그게 팬들에게는 의미 있는 경쟁으로 비쳤다. 몸이 가까워지는 순간 묘하게 경계하는 장면,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 피하고, 같은 공간에 있기를 부러 피하는 수상한 태도, 말조차 나누지 않으려고 굳이 애쓰는 그런 느낌, 남자끼리 주고받기 어려운 제스처도 아닌데 과하게 조심하는 듯한 그런 자세, 그 텐션........ 뭇사람들은 우락밤과 토냥덕의 경쟁을 사랑했다. 에이전시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더 열광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 것이다. 분위기를 더욱 과열시켜야 한다. 추종과 사랑에 미쳐버리게 만드는 게 목표. 그런 소기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작금의 라이벌 구도는 더없이 완벽한 전략이었다.
"도착했어요."
[ 저도요. ]
무너지는 세상이 발 밑에 있었다. 그들은 몸을 내던질 준비를 마쳤다.
♡ ♡ ♡
전투에는 늘 일정한 시나리오가 존재한다.
사방에 촬영용 드론이 떴다. 히어로들의 전투 장면을 생중계하기 위해서 재난 본부에서 띄운 거였다. 화려한 성수대교. 드론 문을 열고 반듯하게 선다. 발아래로 보이는 건 드넓은 한강 공원과 오늘 정성찬과 박원빈이 해치워야 할 괴물들. 징그러운 외양을 가진 그것들이 가로등이나 벤치 따위를 부수고 다닌다. 시민들은?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저 멀리 구조대 차량이 보인다. 시민 대피가 빠르게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뜻은 이곳은 히어로들이 마음껏 역량을 펼쳐도 좋은, 훌륭한 투전판이 될 것이란 말씀.
"............"
온 신경을 그러모아, 한데 집중시킨다. 초능력을 쓰기 위한 예열 단계다. 박원빈의 초능력은 남들보다 빠른 것이다. 바람을 타면 더욱 빠르게 달릴 수 있다. 빠르게 뛰면서 정확도 높은 사격을 하면 커다랗고 둔한 괴생물체는 픽픽 죽어 나간다.
"난 왼쪽으로 간다. 넌 오른쪽으로 가."
그때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 코드네임 우락밤 정성찬의 목소리.
정성찬이 왼쪽에 있는 괴생물체를 향하여 거침없이 뛴다. 186cm의 거대한 몸이 변하기 시작한다. 더욱 커다래지는 몸. 그의 능력은 힘이 센 반인반수라는 거다. 변신을 마친 정성찬은 예쁜 사슴이 되었다. 키가 근 2m에 달하는 거대 사슴 밤비로.
……저건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다.
박원빈은 잠시 흐트러진 집중을 다시 끌어모았다. 예열을 마쳤다. 이제 빠르게 뛰면서 총질할 차례였다. 왼손엔 글록을, 오른손엔 콜트파이슨을 쥔다. 정성찬이 왼쪽으로 갔으니 박원빈은 오른쪽으로 간다. 누가 더 많이 잡는지 대결하는 것처럼 괴생물체를 잡아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최초의 별명은 아기사슴 밤비였으나 벌크업을 한 후로 우락밤이라는 별명을 얻은 정성찬이 괴생물체를 향하여 치명적인 뒷발차기 및 하이킥을 했다. 사방에서 괴생물체의 멱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비교적 시시하게 끝이 난 이번 침공엔 37마리의 괴생물체가 출현했다. 둘이서 73마리를 한 번에 처리해 본 적도 있는 정성찬과 박원빈에겐 대단한 작업도 아니었다. 포탈은 적정 시간이 지난 후에 문이 닫혀버렸다. 또다시 당분간의 평화를 얻은 셈이었다.
에이전시에 돌아온 두 사람은 이번 작전 영상을 모니터링을 하기 시작했다. 필수 작업이다. 이건 전부 실제 상황이지만, 연출이라는 특성도 있기 때문이다. 히어로들의 공격력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까닭에 회의실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이번 작전에서 우락밤이 19마리, 토냥덕이 18마리의 괴생물체를 처치했습니다."
"이의, 이의 있습니다. 마지막 놈 치명상 입힌 건 전데요. 제가 19마리 잡은 거 아닌가요?"
"결국엔 내 공격에 죽었어. 그러니까 내가 19마리 잡은 게 맞아. 박원빈이. 너 그거 몰라? 원래 마무리가 중요한 거잖아."
"하……. 마무리가 중요하다고?"
커다란 회의실 테이블을 사이에 둔 정성찬과 박원빈. 이번 작전에서 거둔 성과를 따지면서 으르렁대고 있다. 회의에 참석한 본부 직원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형 기다렸다가 일부러 그 타이밍에 친 거잖아!"
"증거 있어? 니가 한 번에 못 해치우니까 도와준 거 아니야."
"누가 도와달래? 누, 누가 도와 달랬냐고!"
"거기서 불쌍한 척 눈 뜨고 있던 게 누군데?"
여기엔 정성찬과 박원빈이 결혼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당사자들을 빼면 말이다. 이혼을 앞둔 사이라는 걸 아는 사람도 당연히 없다. 남 모르게 키스하고 물고 빨고 하다가 사랑의 시효마저 종말을 맞았다는 사실은 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으니까.
"그런데 우락밤이랑 토냥덕은 왜 사이가 안 좋은 거예요?"
"몰라. 처음부터 저렇게 안 좋았어."
회의에 참석한 강모씨와 그의 사수 이모씨는 은근슬쩍 속닥거렸다. 강 씨는 <히어로 본부>의 최근에 입사한 막내 직원으로 아직 당사에 궁금한 게 많은 때였다.
"그냥 라이벌이라고 생각해."
"아아. 라이벌........ 하긴 둘 다 잘생기고 인기가 많으니까요."
강 씨와 그의 사수 이 씨는 턱을 괴고 침 튀기며 싸우고 있는 정성찬과 박원빈을 보았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화가 오가는, 엄숙한 회의실 광경을.
"원래 저런 건 질투 아니면 사랑이거든."
앗차, 목소리가 조금 컸다. 이모씨가 입을 빠르게 가렸다. 그러나 이미 박원빈은 그들의 대화를 들은 모양. 묘하게 구겨지는 미간, 앙다문 입술, 더욱 새까매진 눈동자..... 등골이 서늘하다.
"와. 진짜 귀엽고 예쁘고 섹시하다."
강모씨는 할 말과 못 할 말을 가리지 못하고 필터 없는 말을 줄줄 흘렸다. 이번엔 박원빈이 나른하고 새침한 표정을 하며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앉았다.
"그래도 사이가 저런 덕분에 인기는 더 좋아졌거든."
"맞아요. 제 친구들도 다 우락밤 토냥덕 팬이에요. 둘이 어색해 보일 때 더 흥분된대요. 아. 그렇다고 제 친구들이 다 변태인 건 아니거든요. 우락밤이랑 토냥덕이 잘 생겼는데 잘 싸워서 좋다고 했어요."
본의 아니게 화두에 오른 정성찬도 마침내 이쪽을 바라본다. 경건한 회의 시간에 잡소리가 많다. 서늘한 눈빛. 강모씨가 서둘러 입을 다물고 다이어리에 찍찍 낙서를 해대며 딴청을 피운다. 무서워...... 날 선 우락밤의 눈길을 가까스로 피하면서.
질투 아니면 사랑
우락밤 ♡ 토냥덕
막내 직원 강모씨는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 말이나 썼다.
♡ ♡ ♡
초능력을 쓰고 온 날은 유난히 지치는 법이다.
거의 기어서 신혼집에 귀가한 박원빈. 털레털레 현관에 앉아서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던졌다. 새벽 4시 58분에 기상해서 밥도 못 먹고 근 14시간 동안 본부에 잡혀있다 겨우 귀가한 참이었다. 힘들다. 씻고 밥 먹고 빨리 누워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텅 빈 집안을 둘러보게 되었다. 신발장이 비어있다. 힘세고 튼튼하고 거대한 정성찬은 아마도 그렇게 괴생물체를 때려잡고도 헬스장에서 근육에 밥이나 먹이고 있을 거였다. 운동 좋아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정성찬은 박원빈보다 정도가 심한 편이니까.
"밥은 시켜 먹어야 하나."
매운 거 시켜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관에 걸터앉아 있을 때였다. 띠릭 띠릭 띠리리릭. 도어락 비밀번호 치는 소리. 어........ 정성찬이다.
"..........거기서 뭐 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거대한 인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박원빈은 한없이, 정말 한없이 시선을 위로 올린다. 귀가하다가 멈춰 선 정성찬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하고 고개를 기웃대며 예쁘게 앉아있는 박원빈을 내려다보고 있다.
오래간만에 익숙한 시선이다. 서로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그의 손에 들린 것이 있다. 편의점 봉투였다. 투명도가 낮아도 그 봉투 안에 들어있는 건 너무나 뻔했다.
"형 술 안 먹잖아."
"그냥. 오랜만에 땡겨서."
근손실 날까 봐 걱정돼서 술을 멀리하다가 주량도 줄어든 주제에 편의점 맥주를 무려 2캔이나 사 온 것이다.
"마실래?"
그러면서 하는 자연스러운 플러팅. 오로지 우리 둘만 있을 때 가능한 것. 박원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히어로들의 밤은 뻔한 것으로 채워져 있다. 은둔과 뉴스.
서로의 존재가 나만을 향해 날아온 소행성 같던 시절이 있었다. 히어로 발현과 동시에 《히어로 에이전시》에 입사한 두 사람. 천문학적인 계약금과 억만금의 연봉에 사인을 했다. 여러 옵션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린 계약서였다. 히어로끼리 내외로 친해지지 아니하고, 경쟁하는 입지를 고수하는 것에 동의함. 그 조항은 어떻게 해석해도 연애와 결혼을 금지하는 내용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숫자 몇 개, 글자 몇 개로 조종될 리 없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을 때 나를 도와주러 오는 사람. 취향 후려갈기는 잘생기고 귀엽고 깜찍한 데다가 청순하기까지 한 얼굴. 일과 운동을 대하는 열정적인 자세. 그런 것들이 전부 마음에 들었다.
어쩌다 보니 손끝이 스쳤는데 따뜻했다. 우연히 눈이 맞았는데 사랑스러웠다. 괴생물체에게 포위당한 채 궁지에 몰렸을 때 등이 닿았다. 단단하고 듬직했다. 작은 게 궁금해지기 시작하더니 종내엔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미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그리하여 시작된 비밀 연애는 녹록지 않았다. 히어로는 정성찬과 박원빈에게 명예이자 생업이고, 《히어로 에이전시》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자 히어로 육성 업계의 최대 지주다. 연애 사실이 드러나 계약 위반 사항을 들킨다면 최소 근신 처분을 받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엔 잘릴 거였다. 평생 히어로로 살아왔는데 여기서 잘린다면, 먼 장래가 암담할 게 틀림 없었고.
"솔직히 아깐 내가 19마리 잡은 게 맞다. 형."
한동안 온기가 서리지 않던 거실, 소파 아래 어색한 간격을 두고 앉은 그들. 고작 한 캔씩 나눠서 든 맥주는 충분하다. 몇 모금 마시고 취한 정성찬은 웃긴 표정으로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내가 뽀렸어. 와....... 아깐 죽어도 인정 안 했으면서.
"근데 여긴 집이니까 일 얘기 말고 우리 얘기하자."
초점 다 잃어 놓고 형처럼 멋지게 하는 말. 아. 알았어. 빠르게 상황을 인지하곤 정면에서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TV 화면을 본다.
[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듭니다. 히어로 에이전시! ]
정성찬과 박원빈이 함께 찍은 캠페인 영상이 끝나자마자, 새벽에 벌어졌던 전투가 뉴스 자료 화면으로 나오고 있었다. 마지막 괴생물체를 잡는 장면이다. 박원빈이 성수대교 아래 몸을 숨기고 탄창을 갈고 있는 동안 정성찬이 두리번거리는 모습. 곧이어 우락밤과 토냥덕을 모에화 한 인형이 왼쪽 오른쪽에 달린 머리띠를 쓴 시민이 화면에 나온다. 대학생 오송빈 양. 이번 침공 때 한강 공원에 있다가 급히 대피한 시민이었다.
[ 있잖아요! 저는 우락밤과 토냥덕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있다고 생각해요! 섹텐이요! ]
벅차오른 시민이 꺼낸 사견. 인터뷰는 곧 잘려 나가고 다급하게 화면이 전환된다. 아래에 뜨는 자막. 당사의 의견이 아닙니다.
"박원빈 너 그때 그거 기억나? 우리 계약서 사인하기 전날에 그 줄 서야 들어갈 수 있는 맛집 갔던 거. 그거 저 근처였잖아."
"난 안 가고 싶었는데 형이 자꾸 가자고 그래서."
"그래서? 맛있었잖아. 솔직히."
"소올직히.........."
이렇게 다붓이 앉아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눈 게 얼마 만에 일이더라? 잠시 드는 생각은 가슴을 찌르르하게 만들고.
"한 번 더 가보고 싶긴 해."
혼자는 절대 안 가. 그치만 그게 형이라면……. 그즈음에서 박원빈은 생각을 털어내기 위하여 머리를 털었다. 옆에 앉은 정성찬의 뭉근한 시선이 느껴진다. 흡사 발가벗겨진 것처럼 부끄럽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사이가 되었다는 걸 아니까.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이미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너무 지쳐버렸어. 그걸 잊지 말아야 해. 지금 나를 흔드는 건 우리를 이루고 있던 미련이나 정 같은 거라고. 그뿐이야 단지…….
우리의 사랑은 종말이란 행성에 불시착해,
산산조각 나버렸어.
"박원빈. 내가 진짜 딱 한 번만 더 물어볼게."
무수한 침묵이란 별이 떠 있는 우리의 자그마한 우주. 넓고 공허한 거실 한복판에서 눈을 서로에게로 돌린다. 부딪힐 것처럼 아슬아슬해진다. 갈색 눈동자가 뿜어내는 눈빛과 새까만 눈동자가 뿜어내는 눈빛이 충돌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처럼 느껴진다. 잠시의 침묵은 무중력처럼 떠오르고.
소파 옆 협탁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정성찬. 얇은 종이다. 큰 글씨로 쓰인 이 종이의 이름. 이혼 신고서. 왼쪽은 빈칸 없이 전부 채워진.
"솔직히 난 너랑 이혼하기 싫어. 헤어지는 건 더 더 싫어. 우리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건 인정해. 그렇지만 노력하면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이거 당장 찢어버릴게."
".............."
"그렇지만 네 생각이 여전히 확고하다면 이거 마저 작성해."
당장 들이닥친 사사로운 기류에 흔들리면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마셨고, 오랜만에 잘생기고 귀여운 얼굴을 마주 보았지만, 우리의 결혼 생활은 대체로 뻔했으니까. 서로 좋아 죽다가도 싸우고, 섹스하고, 또 싸우고, 섹스하고........
그리고 지금도.
애매하게 취기 오른 박원빈. 분위기에 휩쓸려 정성찬의 예쁜 잠옷을 잡아당기면서 입술을 부딪혔다. 고개를 꺾으며 밀고 들어가면 정성찬이 코어로 모든 무게를 감당하며 박원빈을 받아들인다. 입술이 맞물리자 축축한 소리가 난다. 우주의 공허도 전부 무력하게 만드는 키스다. 그거 조금 먹었다고 술 냄새 풀풀 풍기는 정성찬을 잠시 본다. 심장이 무겁다. 나는 이대로 과거는 전부 모르는 척하며 겉으로만 평화를 유지하고 싶은가?
"할 거야?"
"형은 안 하고 싶어?"
"하고 싶어."
이혼 선언한 지 한 달 정도 되었으니 섹스리스가 된 것도 얼추 그 정도 되었다.
"그런데 잠옷은 왜 입었어? 원래 이런 거 안 입고 자잖아."
"솔직히 말해도 돼? 너한테 잘 보이려고.........."
형은 날 진짜 몰라. 난 형이 날 것일 때 더 사랑했는데.
그런 생각을 입술에 파묻어 버리며 답답해 보이는 잠옷 단추를 풀어주었다. 정성찬은 키스 당하며 이혼 서류 넣어두었던 협탁 서랍에서 콘돔과 젤을 꺼냈다. 굳이 침대로 이동할 필요는 없겠다. 이런 순간을 이미 오래전에 예견한 그들은 거실에 크고 폭신폭신한 소파를 두었으니까. 소파 위로 두 몸이 쏟아지자 벽에 걸어둔 액자가 크게 흔들렸다.
♡ ♡ ♡
하루의 피로를 고스란히 품고 소파에서 정성찬과 함께 잠들었다가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깨어난 건........ 새벽 2시 즈음. 박원빈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소파에 앉아 너저분한 거실 테이블을 본다. 채 비우지 못한 맥주 두 캔과 남긴 젤리와 과자, 콘돔 껍질, 그리고 이혼신고서.
"후.........."
마무리가 중요한 법이라고. 그랬다. 형이.
서늘한 새벽의 공기. 정성찬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었다. 떨어질 듯 말 듯 소파 가장자리에 매달린 커다란 몸. 박원빈은 살금살금 일어나 이혼신고서를 들고 본다. 귀여운 글씨체. 이걸 작성하는 내내 어떤 심경이었을까. 가늠할 수 없는 마음. 갈팡질팡 하다가 이내 이혼신고서의 나머지를 채우기 위해 그걸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토록 쉽게 무너질 결심이었다면 애초에 선언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 ♡ ♡
히어로들은 대개 천문학적인 보수를 받는 만큼 달달 굴려지는 편이다. 세상이 무너지면 휴가마저 반납하고 달려와야 하는 건 당연지사. 해외여행은 꿈꾸기도 어려워서 혹여나 결혼을 하더라도 신혼여행은 대체로 생략하거나 국내로 떠나는 편. 괴생물체가 침공하지 않거나 재난이 발생하지 않을 땐 잠도 못 자고 연예인 같은 업무를 쳐내기도 한다.
"안녕하세요! 토냥덕 박원빈 님! 이쪽 한 번 웃어주세요!"
대뜸 카메라가 다가와 얼굴을 훔쳐 갔다.
설문조사 <키스하고 싶은 입술을 가진 히어로>에서 압도적으로 1위에 등극한 박원빈. 오랜만에 레자 셋업이 아닌 새까맣고 단정한 수트를 입고 모 브랜드 런칭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박원빈의 하루는 너무나 빡세다. 이미 오전에 캠페인 촬영 한 개를 끝냈고, 이후에도 줄줄이 스케줄이 잡혀 있는 상황. 디너파티가 끝나는 대로 인터뷰와 광고 촬영도 예정돼 있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익숙한 사람이 거의 없는 어수선한 장내.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기자와 낯선 사람들. 이러면 박원빈은 자연스레 불안해진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아는 얼굴이 나타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차라리 세상이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 정성찬이다!"
기자들의 높은 목소리. 구석에 숨어서 와인과 핑거 푸드를 깔짝대고 있던 박원빈이 눈을 돌렸다. 구원자다! 이혼 서류 챙긴 것도 잊어버린 박원빈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오늘은 또 얼마나 근사하게 하고 왔을까.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줄은 모르고 그저 조금 홀짝댄 와인 때문이라고 핑계를 돌렸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고 싶은 히어로> 설문조사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한 정성찬 역시 수트를 입었다. 심지어 새까만 색상이었다. 본의 아니게 맞춰 입은 느낌. 막 등장한 우락밤에게 미친 듯이 몰려드는 기자들.
정성찬 얼굴을 보니까 조금 안심이 된다. 박원빈은 장내로 들어오는 히어로 코드네임 우락밤을 등지고 선다.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음이 높아졌다. 적의를 띤 반응이라고 해석한 모양. 정성찬도 굳이 이쪽으로 와서 인사하는 일은 없다. 우리는 이런 일에 익숙하니까.
"봐봐. 서로 엄청 싫어한다니까. 우락밤 오자마자 표정 굳는 거 봤어?"
"에이……. 그래도 같이 에이전시 소속된 게 몇 년인데 알고 보면 친하겠지."
"진짜 아니라니까, 어어……. 잠깐만. 저러다 사고 나는 거 아니야?"
근처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날 것으로 귓바퀴에 모여들고.
슬쩍 우락밤을 본다. 벌떼 같은 기자들에게 휩싸인 가련한 처지가 보인다.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는 상황. 기자들 말마따나 자칫하면 사고라도 날 것처럼 위험천만해 보이는. 박원빈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저 멀리에 서 있는 정성찬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더랬다.
피하면 되는데. 그러면 되는데. 언제나 그랬듯...... 그저 모르는 척하면 되는데.
왠지 그러고 싶지가 않아. 이상한 마음이 솟구쳤다. .......조금 도와줄까? 사고 나면 안 되잖아. 박원빈은 기자들이 떠나간 공간에 당당하게 선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멋있고 예쁜 표정도 지어 보였다. 어? 지금 원빈 씨 포토 타임인가? 토냥덕 포토 타임은 진귀하다. 일단 찍었다 하면 대박이 나기 때문이다. 그러자 우락밤에게 쏠렸던 기자들이 '자 마음껏 제 사진 찍어 보세요!'라고 알려주는 듯한 자세로 선 박원빈에게로 우르르 달려온다. 취재진들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 경쟁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주었다.
멋진 포즈 몇 번 취하면서 과시하듯 정성찬을 본다. 어때. 형. 좀 도움이 됐어? 그런 함의가 있는 눈빛을 보내면 웅! 박원빈아. 살려줘서 고마워. 나 너무 힘들었어……. 하는 귀여운 눈빛과 뾰족 솟은 입술이 돌아온다. 이런 건 그들만의 유구한 대화 방식이다.
"야. 봤냐? 토냥덕이 기자들 다 뺏어갔다고 우락밤 힝구 되는 거? 나 찍은 거 같은데."
그리고 취재진들은 대체로 속을 읽어낼 줄 모른다.
모델 같은 표정을 짓고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느닷없이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지이잉, 지이이잉──. 위이이잉, 위이잉! 비상 사이렌도 울리기 시작했다.
"비상 상황입니다! 포탈이 생겼어요! 당장 대피 요령을 따르십시오!"
재난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다. 안내 요원이 소리를 질러댄다. 그러잖아도 소란스러운 장내가 더욱 시끄러워진다. 하필이면 기자들이 바글바글하게 깔린 회견장.
"포탈이 또 열렸다고?"
박원빈은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서 유튜브를 켠다. 재난 본부에서 라이브를 송출하고 있다. 가만 보자. 이번 포탈이 생긴 위치는........ 음. 어디서 많이 본 곳인데?
"어?"
다행인 것은 이곳 회견장에 최근 가장 높은 주가를 올리고 있는 히어로 두 명이 있다는 것이다.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 전화를 건 이는 당연하게도 <히어로 본부>의 김 차장. 전화를 받자마자 큰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포탈이 열린 곳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이라서.
저 멀리 데면데면하게 서 있던 정성찬이 달려온다.
[ 포탈 생긴 거 확인했어?! 예상 못한 포탈이 열렸어! ]
"어, 여긴.......... 우리 집?"
네? 포탈 열리는 건 항상 예상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지금 성찬이 형이랑 같이 있어요. 여기서 바로 출동할게요. 무기랑 드론 보내주세요."
기어코 세상이 무너지고 말았다. 출격해야 할 때였다. 옆으로 다가온 정성찬을 본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근사한 차림새. 눈을 마주치면 둘이 동시에 출격을 다짐하며 끄덕끄덕.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자석의 S극과 N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는 존재니까.
♡ ♡ ♡
정성찬과 박원빈이 맞이해야 하는 광경은 무지하게 참혹한 현실이었다.
집이 무너지고 있다.......
신혼집 빌라 한쪽 벽이 와르르 무너져있다. 반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에게 익숙한 소파가 바깥에 휑하니 드러나 있다. 사랑이 넘치던 시절에 구했던 우리만의 신혼집이....... 이토록 허무하게. 보안을 최우선으로 고른 곳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생활감을 적나라하게 전국에 보여주게 될 줄은 몰랐다. 거실 벽에 걸린 커다란 액자. 거기엔 정성찬과 박원빈이 키스를 하며 달콤하게 웃고 있고. 거실 바닥은 미처 치우지 못한 콘돔 껍질과 허물처럼 나뒹구는 팬티 두 장, 그리고 맥주 캔으로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각자 드론에 탑승한 정성찬과 박원빈은 교신을 포기한 채 멍하니 세상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기만 한다. 누구 하나 먼저 나설 생각을 못하고 있다. 찢어진 허공. 새까만 포탈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흉측한 괴수들. 못해도 100마리가 넘는 수다.
[ 잠깐만 저게 뭐...... 뭐냐, 얘들아? 야! 화면 돌려! 화면 돌리라고! 액자 찍지 말라고! 콘돔은 왜 찍는데! 팬티는….. 야! ]
처참하게 부서진 신혼집은 필터링도 없이 라이브로 송출되고 있었다. 결혼은커녕, 우락밤과 토냥덕이 혐관으로 이뤄진 관계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사람들을 전부 배신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만 것이다!
"형……. 우리 어떡하지?"
[ 뭘 어떻게 해. 일단 우리가 잘하는 걸 해야지. ]
이혼을 앞두고 이런 식으로 결혼 사실을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허탈한 목소리로 무전을 보내자, 이내 돌아오는 목소리. 그 음성은 확신과 단단함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래. 박원빈은 정성찬의 그런 기둥처럼 듬직한 면모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드론에 실린 홀스터를 착용한다. 한쪽엔 콜트파이슨을, 한쪽엔 글록을 꽂아 넣었다. 그래. 지금은 우리가 가장 잘하는 걸 보여줘야 할 때였다. 드론 문을 열고 바로 섰다. 괴수들이 부수고 있는 건물을 본다. 무전으로 현상 보고가 들린다. 총 138마리라고 한다. 그 숫자는 정성찬과 박원빈이 합동으로 최다 잡아본 개체수의 2배가량 되는 수치다. 다른 히어로도 추가로 파견하겠다는 김 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가자."
"응."
정성찬이 본인의 드론을 버리고 좁은 박원빈의 드론에 뛰어들었다. 불안해 할 필요 없어. 아무도 몰랐지만 우리는 사실. 손을 잡는다. 키스하는 것처럼 눈을 맞췄다. 종말을 눈앞에 두고 출격할 준비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래. 둘이서는 승산이 없지만 결국엔 해내고 말 것이다. 시민의 안전은 우리의 손에 있으니까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여기저기서 사이렌 소리가 귀 따갑게 들려온다. 차분히 대피 요령을 따르고 있는 시민들의 동선을 확인하곤, 가만히 서서 정신을 집중한다. 예열 모드. 초능력을 가동할 준비가 완료되면 곧바로 드론에서 점프. 그 사이에 우락밤 정성찬은 이미 사슴 수인으로 변신을 해서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이럴 땐 개별 실적보다 합동 작전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뒷발차기 맞은 괴수들이 꾸엑 꾸엑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쓰러져간다. 그러면 박원빈은 총구를 겨눈다. 쓰러진 괴수들의 멱을 땄다. 도미노 넘어뜨리듯 괴생물체를 해치워 댄다. 평소보다 더욱 많은 촬영용 드론이 주위를 맴돌았다.
♡ ♡ ♡
익숙한 동네에 균열이 생겼다.
첩보 작전을 하는 것처럼 얼굴을 꽁꽁 가린 채 종종 함께 가던 편의점은 아수라장이 됐다. 아무도 없는 거리, 몰래 키스를 할 때 그들을 비춰주던 가로등은 통째로 뽑혀서 누워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은 군데군데 파여 있었고 인근 건물은 죄다 부서져 엉망이 되었다. 사상 최대의 괴생물체가 한꺼번에 출현한 까닭이었다. 괴생물체가 한번 움직이기만 해도 대형 SUV가 날아가 건물 벽에 처박히고, 걷기만 해도 아스팔트가 움푹 파였다. 가히 재앙이었다.
2m 거대 사슴이 뒷발차기를 한다. 코드네임 우락밤이었다. 그런데 다소 위력이 떨어진 공격이다. 이미 죽어버린 개체 위에 쓰러지는 괴생물체. 코드네임 토냥덕은 퍽 지친 표정으로 스퍼트를 다시 한 번 냈다. 자세가 흐트러지자 빗나가는 총알이 생긴다.
약 3시간 이상 이어진 혈투.
참혹한 상황이 이어진다. 흥미롭다 못해 세상을 뒤집어지게 만들 가십이 있었지만, 사상자가 여럿 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기에 당장엔 재난을 걱정할 수밖에. 시민들은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중계를 지켜보며 두 히어로를 응원하고 있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끔찍한 광경인데 히어로들이 지쳐가고 있다. 그게 눈에 선연히 보였다. 처참하고 절망스러웠다. 그들이 지쳐 쓰러지면 세상은 정말 많이 망가질 거였다.
상황이 너무 끔찍한 나머지, 추가 파견된 히어로들은 괴수 한 마리를 겨우 처리하거나 진입조차 못하는 상황. 우락밤의 몸 곳곳은 피투성이가 됐고 토냥덕 역시 입술이 터지거나 수트가 찢어졌다. 연출하지 않아도 섹시한 장면이었다.
"형! 이거 받아!"
한꺼번에 들이닥친 공격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두 히어로. 반쯤 와르르 무너진 그들의 신혼집 거실에 잠시 대피한다. 성찬은 지친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잠시 인간으로 변한 상태였다.
주방 선반에 쌓여있던 프로틴 바. 원빈은 그걸 발견했다. 저걸 성찬에게 주어야 한다. 에너지를 내는데 그럭저럭 훌륭한 연료가 될 테니까. 원빈은 힘겹게 스퍼트를 내서 그걸 겨우 챙겼다. 아슬아슬하게 무너진 건물. 그 언저리에 등을 대고 섰다.
성찬이 필사적으로 프로틴 바를 씹는 동안 원빈은 글록의 탄창을 갈고 무너진 거실 바깥, 세상 쪽으로 겨눈다. 드넓은 세상엔 드론과 괴생물체가 득실거렸다.
"박원빈이랑 같이 하니까 데이트 하는 것 같다. 결혼식 다시 하는 것 같아."
땀으로 흠뻑 젖어버린 둘. 괴생물체 80마리 정도는 죽어 나갔고, 남은 개체들은 끔찍한 몰골로 세상을 부숴대는 이 상황이 데이트 하는 것처럼, 하트 풍선이 사랑스럽게 날아다니던 그때 그 결혼식 같단다. 황당한데 원빈도 비슷한 걸 느꼈다. 원빈과 성찬은 순간 해사하게 웃었다. 앗. 따끔. 찢어진 입가가 따가워 잠시 미간이 일그러지지만.
"형.........."
"있잖아........."
등을 맞대고 있던 두 사람. 뒤돌아 서서 이번엔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원빈아. 키스해도 돼?"
성찬이 물었다. 먼저 물꼬를 튼 원빈의 말은 모르는 척하면서.
".........응."
"잠깐만 기다려."
성찬은 어디선가 챙긴 생수병을 털어 마시곤 입을 헹궜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성찬이 목격한 것은 이혼 신청서가 사라진 빈 테이블이었다. 쓰레기통은 비어 있었고 불에 태운 흔적 따윈 전혀 없었으니, 아마도 이혼 신청서는 원빈이 가져간 것일 테다. 우리의 사이는 끝을 달리고 있어서. 씁쓸했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도 있다. 이혼을 하게 된다면 어쩌면 이게 마지막 키스일 테다. 그런 순간을 안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싶진 않다.
어디선가 콘크리트 벽이 우르르 무너지는 굉음이 울렸다. 거실 바깥 쪽으로는 철근이 죄 튀어나와 엿가락처럼 구부러져 있고 괴생물체는 두 히어로를 잡기 위해 손을 뻗어대고 있다.
성찬은 다정하게 원빈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눈이 내리 깔렸다. 입술이 애절하게 떨렸다. 현실을 잊는 것처럼 두 사람은 눈을 꼭 감고 입을 맞췄다. 놓아주기 싫어 깊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야하게 키스하는 장면이었다. 그동안 숨긴 것이 아까울 만큼. 드론이 윙윙 날아다니는 소리는 환상에 젖어 전혀 들리지 않는, 그런 키스가 한참 이어졌다. 매운맛 치약을 바른 것처럼 눈이 시큰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종말을 막지 못할까 봐.
결국 눈물이 한 방울 쯤 흘렀다.
♡ ♡ ♡
속보! 정성찬·박원빈 비밀리에 결혼한 사이로 알려져……
속보! 히어로 우락밤과 토냥덕 알고 보니 파경?
속보! 히어로 정성찬·박원빈 합의이혼 진행 중!
단독! 정성찬·박원빈 이혼서류 입수!
……
……
우락밤·토냥덕이 선택한 n 콘돔 당일 완판!
정성찬·박원빈 사상 최대 132마리 괴생물체 처리
♡ ♡ ♡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결혼이라니! 파경이라니! 이혼이라니!"
특종이 덕지덕지 실린 신문을 집어던지는 김 차장. 소속 히어로가 종말을 막고 위대한 업적을 거두어 왔으면 마땅히 칭찬해 주고 격려하는 게 소속 회사의 소임이 아니던가. 그 앞에 선 정성찬과 박원빈은 고개를 숙이고 그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멋지게 차려입은 검은색 수트는 여기저기 찢겼다. 입술엔 피가 맺혔고 여기저기 까진 자국도 여러 군데다. 그런데 응급처치는커녕, 불려 와서 내내 혼나는 중이었다.
"너네 이거 계약 위반이야! 너희 위약금 물 수 있어?"
길길이 날뛰는 상부 임원들을 보는데 어째서 속이 후련한 건지.
"이혼 서류는 또 뭔데! 그 와중에 이혼도 하려고 했어? 니들이 뒤에서 이러면 우리 회사는, 우리 영업 방침은 뭐가 돼!"
"아........"
구겨지고 일부 찢어진 이혼 신고서가 김 차장의 손에 들려있다. 나머지 부분을 작성하고 방 안에 놔뒀던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혼 신고서가 사라진 걸 눈치챘을 정성찬이,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을 때.
"아니요. 저희 이혼 안 해요."
김 차장 손에 들린 그 종이를 빼앗아 든 박원빈.
"형. 이거 찢어버려. 우리 이혼 안 할 거잖아. 우리, 회사 아니었으면 헤어질 일도 없었잖아."
그건 곧장 정성찬의 손으로 넘어간다. 웅. 속상했던 정성찬은 이혼 신고서를 쫙쫙 시원하게 찢어버리고 마는 거다. 갈가리 찢긴 종이 쪼가리들이 바람을 타고 본부 곳곳으로 날아다녔다. 이내 웃음이 난다. 개운했다. 불시에 깨달았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건 사랑의 종말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었다.
"저희 둘, 히어로 에이전시 그만둘게요."
"잠깐만. 여보야. 자기야. 아니. 원빈아."
본부엔 구경이 제대로 났다. 야, 들었냐? 여보야 자기야...하는 거? 대놓고 숙덕거리는 본부 직원들. 일부는 환호하고 일부는 이 특종을 몰래 촬영 중이었다. 중계 화면에 떠 있는 끝없는 속보들. 찢어진 채 마구마구 휘날리는 이혼 신고서. 그리고 그 모든 의혹을 진실로 밝히는 두 손이 한 덩어리처럼 엮여서 혼인 서약처럼 묶이고.
"성찬이 형. 나 믿죠?"
"응. 나는 박원빈의 정체가 사실은 말랑말랑 순두부라도 해도 믿어."
"형, 그럼 우리 결혼 서약한 거 기억나요?"
"당연하지."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참석해 주신 여러분 앞에서 맹세합니다. 사랑으로 어려움은 인내하고 즐거움은 나누며……."
"평생 서로에게 가는 길을 찾겠습니다."
남들 모르게 올렸던 결혼식, 꼭 그날처럼 환하고 예쁘게 웃으면서.
"그러니까 형, 내가 책임질게. 우리 같이 여기 그만두자."
"애기야. 나 진짜 감동받았어......"
이번에도 눈물을 터트린 정성찬. 그런 그를 꼭 껴안고 형 사실 나 아직도 형 사랑해..... 얼굴이랑 몸만 봐도 아직 설레. 그렇게 속삭인 박원빈. 얌전히 안긴 헌신랑은 눈코 빨개져선 수줍어하며 나는 사실 너랑 헤어지고 싶었던 적 0.1초도 없어. 했다.
핑크색 하트풍선 대신 휘날리는 이혼 신고서 쪼가리들이 머리 위에 두둥실 떠올랐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키스를 했다. 환상 같은 퇴사식이었다.
♡ ♡ ♡
비록 현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잔혹한 현실일지라도.
"와......... 진짜 춥다."
달콤 쌉싸름한 자몽색 석양 아래, 뻥 뚫린 고속도로를 3시간 20분 질주하여 도착한 그때 그 해변. 겨울 바다를 따라서 하얀 모래 위를 오들오들 떨면서 걷던 두 사람.
"우리 이제 집도 없고 직장도 없네."
"웅. 괜찮아. 나한텐 박원빈 있어."
"나한테도 정성찬 있어........."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껴안은 형태가 아름다웠다. 상황은 어쨌거나 괜찮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비록 집은 부서졌고 모두가 신의 직장이라 칭송하는 회사에 제 손으로 사표 쓰고 나왔으나, 그들은 사랑을 잃지 않았고 이혼 위기도 극복했다.
그리고 그 사이, 아주 많은 일이 있었다.
그들의 신혼집이었던 빌라는 철거가 결정되었고, 정성찬과 박원빈은 정식으로 사직서를 쓰고 히어로 에이전시에서 퇴사하였다. 위약금을 면제해줄 테니 그만두지 말라 회유하는 것도 거절하고 굳건히 그만뒀다. 평생 히어로로 살아온 두 사람이다. 히어로 업계로 새 직장을 얻는 건 조금 어렵게 됐다. 업계는 좁고 이미 독과점 구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돌파구를 찾기란 어쩌면 어려운 일일 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집도 절도 없는 그들에게 날아온 건 천문학적인 금액이 적힌 계약 위반 위약금이었다.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봐도 위약금을 충당하기엔 부족했다.
"원빈아. 우리 또 싸우면 어떻게 하지?"
"잘 싸우고 또 화해하면 되지."
"싸우다가 지겨워지면?"
"괜찮아요. 안 지겹도록 잘 관리하면 돼. 나는 형 얼굴이랑 몸에 약하다니까. 형도 그렇잖아요."
"응. 그럼 우리 헤어질 일 없겠네."
다행이다. 순간을 고정하듯, 입술을 문진처럼 누르며 하는 키스로 사랑을 머금고.
"원빈아. 있잖아. 나한테 되게 좋은 생각이 있어."
사랑의 종말을 딛고 두 히어로는 과연 일어설 수 있을지.
♡ ♡ ♡
세상에 이보다 화려한 결혼식은 없겠다.
그건 기자들이 입을 모아서 한 소리였다.
위약금 내기에도 부족한 돈을 탈탈 털어서 박원빈과 정성찬이 연 것은 다름 아닌 공개 결혼식이었다. 무슨 공연장 혹은 운동장 수준으로 커다란 야외 결혼식장을 빌렸다. 날 좋은 어느 날. 희고 예쁜 꽃 수천 송이가 흐드러지고 하트풍선 수백 개가 허공에 넘실대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경. 가족들, 가까운 지인들, 먼 지인들, 기자들, 전 회사 동료들, 그들의 팬들까지....... 거리낄 것 없이 모두를 초청했다.
결혼식이 아니라 난장판이다.
그러나 괜찮다. 이건 전부 보여주기용이니까.
"푸핫! 저게 뭐야!"
"저...... 야, 빨리 사진 찍어!"
그들의 두 번째 결혼식엔 웨딩드레스가 있다. 186cm의 거대한 햄 정성찬이 입은 거였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삼세판으로 진 정성찬이 그걸 입게 되었다. 아무래도 보여주기 위해선 화제성이 중요하니까 한 사람은 웨딩드레스를 입자고 합의를 본 것으로, 홀터넥 청순한 스타일 웨딩드레스를 입은 정성찬이 한 손에는 부케를,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다소곳하게 박원빈의 손을 잡고 동시 입장했다. 박원빈은 꼭 그때처럼 화관을 썼다.
결혼행진곡이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초청받고 찾아온 팬들이 열광했다. 성수대교에서 운동하다가 공중파 탔던 우락밤 토냥덕의 이상기류 썰을 밀던 소녀 참석하여 눈물을 찍어 훔쳤다.
"참석해 주신 여러분 앞에서 맹세합니다. 사랑으로 어려움은 인내하고 즐거움은 나누며……."
"평생 헤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핑크색 하트풍선이 머리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격정적인 키스를 했다. 시끄러운 카메라 셔터음 때문에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이건 엄청난 화제가 될 이슈이고 특종이고 속보 감이다. 기자들이 바빴다.
정성찬과 박원빈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웃었다.
정말로 환상 같은 결혼식이었다.
♡ ♡ ♡
축하 문구가 쓰인 분홍색 리본을 매고 품에 안겨 온 화분이 있다. (리본 좌측 : 축! 개업! / 리본 우측 : 우락밤 ♡ 토냥덕)
"개업을 축하드립니다!"
조금 특이한 사무실의 전경. 그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히어로 에이전시의 막내로 입사한 강모씨와 그의 사수 이모씨였다. 어! 왔어? 반가운 낯으로 그들을 맞이한 건 이 사무실의 공동대표였다.
새 사무실이 너저분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이라 사무실에 생활용품을 일부 가져다 놓은 까닭이다. 부서진 집에서 최대한 건져낸 물건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이를테면, 살짝 부서진 스피커와 여러 종류의 아령이나, 번들로 구입한 매운맛 치약 같은 것들.........
"와...... 사무실 너무 좋은데요? 저도 히어로 에이전시 그만두면 여기 입사할까 봐요."
백수가 된 정성찬과 박원빈은 최근 사무실을 차렸다. 사설 히어로 파견 업체였다. 이미 정부에선 구원자들이 필요할 때마다 《히어로 에이전시》에서 필요 인원을 충당하고 있지만, 유닛 단위 괴생물체 최다 처치 이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인기마저 절정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정성찬과 박원빈의 조합이라면 대기업에 아주 조금은 저항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듭니다. 히어로 에이전시! ]
에이전시에서 주력하는 히어로였던 우락밤과 토냥덕이 퇴사한 이후로, 다른 히어로 모델로 교체된 캠페인 광고가 전파를 타고 있었다. 야. 채널 돌려. 누군가가 리모컨을 들었다. 화면이 바뀌자 며칠 전 인기리에 방영한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우락밤과 토냥덕의 결혼 생활을 최초로 공개한 촬영분이었다.
"요즘 우리 회사 상황 진짜 안 좋아요."
"진짜 에이전시 그만두면 저희 받아주세요."
히어로 에이전시는 한 차례 위기에 봉착했다.
내부 폭로로 인한 거였다. 히어로 에이전시의 불법 정황이 감지된 것이다. 괴생물체가 쏟아져 나오는 포탈을 여닫는 공식을 이미 오래전에 파악했음에도, 기업의 사활을 위해서 기밀에 부쳐두고 필요할 때마다 일부러 포탈을 열어 시민들을 위협하며 위기감을 조성했던 것이었다. 위험 부담이 높아질수록 히어로 에이전시의 매출은 높아지는 법이니까.
일종의 버그로 인해 예상치 않게 열린 포탈과, 퇴사자들의 증언 때문에 히어로 에이전시는 대대적인 감사까지 받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굴지의 대기업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으나, 위기론이 팽배하기는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님맞이를 끝낸 두 사람. 박원빈이 여기저기 새로 개업한 사무실을 열심히 정리할 동안, 은테 안경을 쓴 정성찬은 키보드를 조심스레 도독도독 두드리고 있다. 별로 쳐본 적 없는 듯한 어설픈 손놀림이었다. 개업을 하면서 이곳에 소속된 두 히어로를 설명할, 이력서를 홈페이지에 작성하는 중이었다.
이름 : 박원빈(토냥덕)
생일 : 3월 2일
출신지 중학교명. 성격. 히어로 이력.........
그런 신상 정보를 알아서 넣고 있다. 묻지 않아도 그만큼이나 박원빈을 꿰고 있었다.
"형은 어릴 때 뭐 했어?"
"……나는 축구만 했지?"
"에이. 사람이 어떻게 축구만 해. 다른 거 뭐 좋아했어?"
"축구……."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축구하고, 점심밥 먹고 축구하고, 간식 먹고 축구하고, 저녁 먹고 잘 씻고 잤다는 말은 생략하기로 한다. 등이 뻐근해지도록 홈페이지를 손 본 정성찬이 어둑어둑한 바깥 전경을 보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저 구석에 귀여운 뒷모습 내보인 채로 청소하고 있는 배우자가 보인다.
"원빈아……."
느닷없이 들려온 축축하고 정염에 젖은 목소리. 함의를 단박에 파악한 박원빈은 들고 있던 먼지떨이를 툭 떨궜다. 청소하던 선반에서 눈을 떼고 검은색 가죽 소파에 앉아있는 정성찬을 돌아본다. 야한 눈빛. 이건 필시...........
"여기선 안 돼요. 사무실에 CCTV 달아 놨어."
"전원을 끄면 되잖아."
"귀찮아."
"그럼 CCTV 없는 데서......."
"사각지대 없게 잘 설치했는데......."
대화는 완곡하게 거절하는 듯한데 어째 몸이 자꾸만 가까워졌다. 입술이 자석처럼 들러붙었다. 춥춥 대면서 체온을 다정하게 나누다가.
"......그럼 비상구는?"
"......."
아무리 그래도 비상구에 CCTV 설치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기뻐하는 낯. 잠깐만........ 그런데 나 오늘 무슨 색 팬티 입었더라? 생각은 금세 끝났다. 도쿄에서 며칠 전에 사 온 팬티였다. 물론,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양말부터 팬티까지 싹 다 새로 구입 하였으니 어떤 걸 입었어도 예뻤을 거다. 그럼 거기 가, 가등가. 귓바퀴에 통통한 입술을 가져다 댄 박원빈이 귀엽게 속삭였다. 응. 정성찬은 그런 박원빈을 번쩍 ‘공주님 안기’하고서 서랍 속에 들어있는 콘돔 중에 아무거나 쥐었다. 손에 걸린 것은 딸기향이 첨가된 돌기형이었다. 다른 건 이미 다 써서 없었다.
"사랑해……."
속살거리며 사랑을 확인했다. 다정하게 껴안은 두 몸이 비상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쿵. 무거운 방화문이 닫힌다.
고요가 입 맞춘 사무실의 벽면에는 포스터가 즐비해 있다. 사설 히어로 파견 사무실을 개업하면서 제작한 거였다. 직사각형 포스터 속에서 우락밤과 토냥덕이 백허그를 하고서 예쁜 표정을 짓고 있다. 히어로를 입양하세요! 볼드 처리된 캐치프레이즈가 귀엽게 넘실대는 포스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