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ART VIDEO AFTER

고양이는 산책을 하지 않는다
by. eroco


 







 

 지금 사는 오피스텔은 엘리베이터가 유독 느렸다. 호갱노노에 들어가면 분노에 찬 입주민들이 평생 관심도 없었을 엘리베이터 제조사 욕을 왕창 하면서 절대 고층 계약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놨는데, 그런걸 알아볼 정도로 섬세하지 않았던 게 잘못이었을까. 술집에서부터 전력으로 달렸던 성찬은 계단을 세 개씩 오르며 뼈저리게 반성했다. 

1701호 도착. 

온 세상이 빙글빙글, 목에서는 쇠 맛이 난다. 성찬은 가쁜 숨을 갈무리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13분......

 

 

"삔, 헉, 삐나."

 

 

도어락 잠기는 소리만 가련하게 울리는 조용한 실내. 

그러니까 이건...... 조졌다는 뜻이다.

성찬은 신발을 벗고 더듬더듬 거실 불을 밝혔다. 포옥. 쪼끄만 발이 바닥으로 하강하는 희미한 소리. 까만 비닐봉다리 같은 형체가 순식간에 거실장 밑으로 사라진다.

고양이 밥도, 사람 밥도 두고 나갔던 그대로. 갖고 놀라고 사준 강아지 인형은 죄 터져 사방에 솜뭉치가 날아다닌다. 성찬은 엉망이 된 바닥에 침울하게 볼을 대고 엎드렸다.

 

 

"삔아아..."

"......"

"화났어? 화 많이 났어? ......형이 10분 늦어서?"

 

 

원빈은 몸을 더 웅크려 얼굴을 숨기고 꼬리를 휘저었다. 여기서 집사 필수 상식 하나. 고양이는 기분이 나쁠 때 꼬리를 흔든다. 그것도 모르고 까만 꼬리가 살랑일 때마다 우리 성격 나쁜 삐니가 웬일일까~ 끌어안고 난리를 치다 절교 위기를 몇 번은 넘겼지 뭐야. 그러니까 이건, 아마 그런 뜻일걸......

 

나, 고양이 수인 박원빈, 기분 좆박았소이다. 

약속도 안 지키고, 13분 늦은 주제에 비겁하게 10분 늦은 척 하는 인간 정성찬 때문에.

 

성찬의 아랫입술이 삐쭉, 큰 눈에는 서러움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들이찼다. 형아도 억울해. 자취하는 스무살한테 통금이 어딨어. 고작 그거 늦었다고 치사하게 이러기야. 13분 지각은 출결도 인정된다구. 그리고 저거 형이 너 생각하면서 열심히 고른 인형인데 다 긁어놓기나 하고... 너무너무 서운해. 밥은 또 왜 안 먹었는데.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 반은 인간이면서.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속만 드럽게 썩이는 저체중 고양이.

..........

그래도.

 

 

"늦어서 미안해."

 

 

사실 형도 아직 앙금이 쪼끔 남았어. 그래도 형이니까 양보하는 거야. 

원빈은, 늘 그렇듯 대답하는 일 없이 천천히 눈을 깜빡일 뿐이다. 

성찬은 한 손으로 까만 등을 받치고 쭈우욱 끌어당겼다. 당황한 고양이가 영문도 모르고 어리바리 딸려온다. 짧은 팔을 앙냥냥, 양 팔과 배를 주무르며 간지럽혔다. 술을 마신 성찬이 손아귀 힘을 조절하지 못해 고양이는 평소처럼 빠져나갈 수 없었다. 원빈은 무력하게 귀여움 당하며 냐아냐아 울었다. 

 

 

"너는 왜 형을 이렇게 싫어해... 형아가 대체 왜 싫어. 형을 싫어하면 어떡해."

"......."

"우리 겨울이는 이렇게 만져주면 엄청 좋아하는데......"

 

 

쪽. 

 

???

 

펑..//

 

 

"어......?"

 

 

인간 정성찬, 드디어 인간화 박원빈과 첫 만남!

연한 갈색 눈동자와 커다래진 검은색 동공이 마주치고, 깜ㅡ빡. 고양이 키스.

 

 

 

고양이는 산책을 하지 않는다

정성찬 박원빈

eroco

 

 

 

성찬이 원빈과 함께 살기 시작한 건 3달 전쯤, 성찬의 생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9월이었다. 성찬을 끔찍이 예뻐하시던 친할머니께서 성찬의 스무살 생일과 며칠 차를 두고 영면하셨고, 가족들과 유품 정리차 할머니 댁에 갔다가 이 까만 고양이를 만났다. 

삐쩍 마른 채 쓰러져 있던 고양이는 동물병원에서 그 드물다는 수인 진단을 받았다. 발달이 빨라요. 인간화 안 한지 적어도 반년은 된 것 같네요. 네에에??? 믿기지 않아 수인 전용 병원에까지 들렀다 얼이 빠져 돌아오는 길. 혹시 이 까맣고 쪼끄만 애가 어디로 쑥 도망이라도 갈까 봐, 아니면 밤바람에 춥기라도 할까 봐, 걔를 품에 꼭 안고 생각했던 것. 할머니는 고양이가 수인이라는 걸 아셨을까? '박원빈 朴元彬', 성찬은 고양이 목걸이에 적힌 익숙한 필체를 쓰다듬으며 아니라는 걸 알았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단 걸 아셨을 텐데, 왜 무책임하게 생명을 거두셔서...... 마음이 편치 않은 가족들이 수군거렸다. 미등록 수인이었던 고양이는 정규 교육 시기도 진작 지나 이제는 수인 전문 시설로 가게 될 운명이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사회에 융화되지 못한 채 시설로 향한 수인들이 남은 생을 살아가는 방식은 모로 보나 인간답다고 할 수 없었다. 

성찬은 고양이의 이름을 가만 반추했다. 딸 둘, 아들 둘을 낳고 기르신 박수미 할머니의 성을 딴 유일한 존재. 해피도 아니고 까망이도 아니고 네로도 아닌, '박 원 빈'. 

 

불행한 운명에 귀속되기엔 너무 빛나는 이름이었다.

 

성찬은 부엌 수납장에 가득한 고양이 사료와 간식을 박스에 옮겨 담으며 입양을 선포했다. 친가 어른들과 부모님이 뒤집어지셨다. 성찬아, 얘는 또미나 겨울이가 아니야. 사람이랑 똑같다고. 종일 별만 들여다 보는 애가, 이제 대학교 들어갔으면서 한 생명을 무슨 수로 책임지려고 그래. 마음이 동한다고 이런 중요한 일을 함부로 결정하면 안 되는 거야.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니까. 할머니도 모르셨으니까 데려다 키우셨지. 인간으로 변하려고 하지도 않는다며? 혹시라도 얘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옛날부터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검은 고양이는 재수가 없어서......

고양이는 병원에서 돌아온 이후 할머니가 주무시던 침대 밑에 들어가 통 나오질 않았다. 정말 수인일까? 지금 오가는 말도 전부 알아듣고 있는 걸까? 인간 나이론 거의 성인이래요. 고양이들은 혼자 둬도 잘 있는다잖아요.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만 도와줄 거예요. 성찬은 말갛게 웃으며 고양이를 이동장에 넣었다.

너무 착해도 못써. 어휴, 어떡해...... 고모가 성찬의 어깨를 두드리며 안타까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셨다. 성찬은 딱히 긍정하지 않고 멋쩍게 눈만 굴리다 소란한 집을 나섰다. 

이제 좀 조용하네. 성찬은 한숨을 내쉬고 이동장을 번쩍 들어 고양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까만 고양이는 그새 구석에 바짝 붙어 벌벌 떨고 있었다. 추운가? 성찬은 고양이 대신 이동장을 꽉 끌어안고, 

 

 

"......원빈아."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러봤다. 

온통 깜깜한 가운데, 유일하게 선명히 빛나는 두 눈이 성찬을 향한다. 욱신. 가슴이 뻐근하게 울렸다. 

 

동정? 연민? 글쎄……

 

나를 움직이는 건 좀 더 멋진 것들이다.

 

 

˚₊* ✶⋆ (=🝦 ﻌ 🝦=)‧˚✶₊* ⋆

 

 

나...... 고양이랑 궁합이 잘 안 맞는 것 같아.

원빈을 데려오고 성찬이 매일같이 하는 생각은 대체로 이랬다: 어어 어뜨케?ㅜㅜ 얘 괜찮은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성찬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집사였다. 고양이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고, 누군가의 오롯한 보호자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스무살이었기 때문이다. 

정성찬이 세상에서 제일 친한 동물은 강아띠. 초등학생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던 또미, 올 초 또미가 하늘나라에 간 뒤 가족들이 사랑으로 기르고 있는 겨울이. 배를 까뒤집고 달려드는 강아지들을 예뻐하는 데는 익숙했으나 고양이는 뭐 그냥저냥...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정성찬 20년 인생의 유일한 고양이는 귀엽다는 것 말고는 강아지와 별 공통점이 없었다.

3달간의 동거 끝에 알아낸 내 고양이의 몇 가지 특징을 진술한다.

 

 

0. 고양이는 속을 알 수 없다

 

"원빈이 뭐해애? 뭐 구경해? 형도 알려주면 안 돼?"

"냐아. (꺼져*)" *(): 캔따개 성찬의 피해망상

 

 

공감대 좀 형성해 볼까 슬금슬금 옆에 자리를 잡으면 원빈은 성찬을 힐끗 보나 싶다가 휙 자리를 옮겨버린다.

백날천날 자리 잡고 앉아있는 거실 창문 앞 지정석. 뭐 재밌는 걸 본다고 하루종일 거기 박혀있는지, 그거 알려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치사하게. 툴툴거리며 밤새 고양이 쇼츠를 넘기다 알게 된 건데,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자기 영역에 누가 들어오면 스트레스를 받는단다. 

참나. 그럼 왜 자기는 새벽마다 내 방에 몰래 들어와서 자고, 아침만 되면 입 싹 씻는데? 형아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도 잠에서 깨거든? 니가 밤마다 침대 밑에서 쿨쿨 자다 가는 거 사실 다 알고 있다구. 

이 솔직하지 못한 짜식. 속 모를 고양이. 한 번만 깨물어 보면 소원이 없겠다. 성찬은 까만 뭉탱이 위로 어흥, 잡아먹는 시늉을 하다 이내 살금살금… 손바닥만한 담요를 덮어주었다.

 

 

0. 고양이는 스킨십을 싫어한다

 

"삐니 일루와. 슝! 어우 싫어어. 그래도 못 빠져 나가지롱."

"먀. 매옿. 먀아앟."

"어이구 귀여운 내새끼. 아구 부드러워. 악, 아야, 아파!"

 

 

원빈은 수인이었지만 도통 인간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찬은 원빈이 수인이라는 걸 거의 까먹고 살았다. 귀여운 거에 환장하고 표현 많은 성찬이 거리낄 것 없이 원빈을 왕창 예뻐했다는 소리. 

우리 고양이 집 잘 지키고 이떠떠요? 밥도 잘 머거떠요? 말랑한 젤리를 흔들면서 작은 몸을 휙휙 돌려 춤을 추게 만들다, 배를 북북 긁으며 볼따구에 뽀뽀뽀. 안기기 싫어 몸을 비틀던 고양이가 간신히 커다란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곤 곧장 피의 응징. 손등과 가슴팍에 샥샥 할퀴어 놓은 상처가 꽤 아파서 성찬의 눈꼬리에 억울함의 눈물이 맺혔다.

 

 

"너어... 나빴어. 예쁘니까 안아주고 만져주고 뽀뽀해주는 거잖아. 형 마음도 모르고. 박원빈 미워."

"......"

"빨리 호 해. 호, 하고 불어. 얼른."

 

 

원빈은 평소엔 칼같이 무시하던 강아지 인형(성찬이 얼기설기 다시 꿰매놔서 거의 저주인형 비주얼이 된...)을 툭툭 건드리고 바닥을 뒹굴며 딴짓을 했다.

 

 

"너 다 알아듣지... 지금 못 알아듣는 척 하는 거지."

"먀."

"이거 호 불어줘야 나아. 삐니가 호 안 해줘서 이제 형은 영영 아플 운명이야. 밤마다 아파서 막 울다가 이 집도 눈물에 잠겨서 우리 둘 다 거기 빠져 죽게 될 거야."

"먀옹~(ㅋㅋ 지랄*)" *(): 반복. 캔따개 성찬의 피해망상

 

 

달도 별도 침묵하는 깊은 밤. 

성찬은 늘 반쯤 열어놓고 자는 문이 완전히 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원빈이 자러 오나 보네… 언제나와 같이 모르는 척 계속 눈을 감고 있는데,

손등에 따뜻한 바람이 닿았다. 

온 우주에서 가장 조그만 호흡이.

 

호......


호ㅡ 호오ㅡ

 

그리고 점프. 건너편으로 가 이번엔 가슴께에. 호오ㅡ 호오오ㅡ 호ㅡ.

왜 이러지? 코가 막 시큰해서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눈을 떴을 땐, 손등과 가슴팍이 작은 반창고로 덕지덕지 떡이 돼 있었다.

 

 

0. 고양이는 엄청 까다롭다 (성격이 나쁘다!!)

 

고양이는 일관성이 있으면서 없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루틴은 있는데 성질이 변덕스럽다는 얘기.

일단 기본적으로 자기 규칙에서 벗어나면 상대를 안 한다. 사료도 간식도 늘 똑같은 것으로 같은 시간에. 고양이 샴푸도 항상 동일한 제품으로. 하다못해 쓰다듬어 줄 때도 암묵적으로 정해진 순서를 이탈하면 팩 토라져서 무릎에서 내려가 버렸다.

그것도 모르고 처음엔 좋다는 사료나 간식들을 종류별로 샀었다. 다양하게 먹으면 질리지도 않고, 뭐든 경험해보면 좋은 거니까. 그런데 원빈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곡기를 끊어버렸다. 왜 밥을 안 먹니, 이 저체중 고양이야. 나 진짜 피말라 죽는 거 보려고 그래. 애원하고 혼내고 쌩난리를 쳐도 소용이 없던 밥투정은 처음 데려왔을 때 먹던 사료를 주니 해결됐다. 

야... 이게 제일 싼 거야. 성분도 별로 안 좋은 거. 성찬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날로 봉투도 안 뜯은 사료와 가다랑어, 연어 치즈, 게살, 별별 맛의 고급 간식들을 참치 맛만 빼고 당근으로 싹 나눔했다. 사람 밥도 별 솜씨도 없는 김치볶음밥으로 메뉴를 통일한 이후로는 접시가 깨끗이 비워지기 시작했다.

어디 먹는 것만 그럴까. 어쩌다 시트러스 향 샴푸 대신 코코넛 향을 써봤는데 그거 가지고 세상 얼마나 난리를 치던지. 고양이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성찬이었지만 냥냥대는 소리가 선명한 욕설로 들리는 것 같아 흠칫했다. 수인은 인간처럼 매일 샤워를 해야 하는데 원빈은 성찬이 씻겨주는 걸 정말정말 싫어했다. 한바탕 전쟁을 끝내고, 검은 고양이라 그런가? 이건 뭐 제대로 깨끗해진 건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으면 품 안의 고양이가 개소리 말란 듯 하악질을 했다. 노곤노곤 쓰다듬어줄 때도 언제나 같은 순서로. 등을 위아래로, 그다음엔 좌우로, 목을 슥슥, 머리를 쓰담쓰담, 다시 목, 다시 등......

일관성 있게만 까다로우면 얼마나 편해. 고양이는 혼자만의 시공간에 사는 듯 성찬을 모르는 척 하다가도 정작 조금만 방치당한다 싶으면 방문을 긁었다. 곁을 주지 않으며 매몰차게 구는 주제에 성찬이 자기 할 일에 집중하면 노트북이나 무릎 위에 올라와 귀여운 척을 하고, 그래서 오구구 쓰다듬기라도 할라 치면 싫다고 꼬리를 흔든다. 성찬이 학교에 가면 인간으로 있는 것 같은데 그 얘기는 운만 띄워도 방에 틀어 박히고, 그렇다고 아주 고양이 취급을 하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기분 나빠했다.

뭐 이래...... 나보고 어쩌라고......

울고 싶다. 온 세상 고양이들은 다 이런가? 내 고양이가 좀 희한한 고양이인가? 고양이는 너무 까다로워. 고양이 세계에서 1+1은 2도 되고 100도 되고 -50000도 돼. 고양이는 성격이 나빠. 고양이 언어는, 너무너무 어려워......

 

 

0. 고양이는 산책을 하지 않는다

 

성찬은 한참 인생이 즐거운 스무살이었다. 성인이 되자 새롭고 흥미로운 사람들이 인생에 화수분처럼 쏟아졌고, 전공인 천문학은 적성에 딱 맞았고, 가본 적 없던 모든 곳에 첫 발자국을 찍는 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주말 끼고 누나랑 제주도 다녀와야지. 겨울 방학엔 별 보러 칠레도 가고 하와이도 다녀와야지. 원빈이는 뭐 혼자 밥 챙겨 먹는 법도 다 아는데. 미리 언제 올지만 알려주고 잘 지키면 되지 않을까?

왜냐면 고양이는 혼자 있어도 괜찮으니까.

신나게 놀다 집에 들어오면 원빈은 항상 자지 않고 깨어 있었다. 그게 새벽 2시든, 5시든, 오전 10시든, 오후 11시든. 거실 지정석에 가만 앉아있다 성찬이 약속했던 시간에 돌아오면 눈을 한번 깜빡이고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갔다. 그게 성찬을 기다리고 마중하는 거였단 걸 알아채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왜냐면 원빈이는 겨울이처럼 요란하게 왕왕 짖으면서 꼬리를 흔들지 않았으니까. 안아달라고 낑낑대면서 볼을 핥지 않았으니까. 그걸 깨닫고 나니까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세계를 넓히는 동안, 혼자 이 작은 집에서, 나만을 기다리는 존재......?

 

아...... 

이건

좀……

 

그래서 무작정 고양이를 데리고 나갔다. 

알고보면 우리 애가 산책냥이일수도 있잖아? 그리고 앞으로 인간으로 살려면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당장 힘들더라도 점점 익숙해져야지.

수인은 성장 속도가 빠르다. 태어난 지 5년이면 인지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성체가 됐다. 그 후로는 고양이로 있는 시간이 길수록 고양이의 수명에 가까워지고, 인간화를 지속할수록 인간의 생애 주기와 비슷해진다. 원빈은 계속 이렇게 인간화를 하지 않고 버티다간 정말 딱 고양이 평균만큼만 살고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평생 창밖만 바라보고, 똑같은 사료랑 참치 맛 츄르만 먹다 끝나는 인생? 절대 안 돼.

좁은 세상에 틀어박혀서 끝내버리지 마. 부딪히고 널 넓혀가면서 더 큰 세상에서 살아야 돼.

 

성찬은 이동장을 들고 서울 곳곳을 걸어 다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원빈을 꺼내 품에 안았다. 원빈이 주변을 편하게 돌아다녔으면 했는데, 안에서 벌벌 떨다가 나오기만 하면 다시 들어가겠다고 이동장을 박박 긁기만 해서 어쩔 수 없었다.

여긴 형 다니는 학교야. 제일 자주 다니는 건물은 저기. 지금은 꽃도 없고 춥긴 한데 난 겨울이 더 예쁜 것 같아. 눈 쌓여도 엄청 예쁘대. 어 선배 안녕하세요. 네 고양이 키워요. 아...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리고 한강 공원. 운동하는 사람들 많다아. 원빈이는 강 처음 보려나. 저 물이 강이야. 여긴 밤에 오면 더 예뻐. 나중엔 바다도 같이 가면 좋겠다. 바다는, 어... 뭐라고 해야 되지? 음. 강이 흐르다 보면 결국 이르게 되는 더 넓은 세계야. 멋지지? 여긴 형아가 여자친구랑 데이트하러 가끔 오는 인사동이라는 동넨데, 옛날 사람들은 이런 집에서 살았대. 괜찮아 원빈아. 외국인 신기해? 형도 형이 있는데, 우리 형도 외국에 있어. 너랑 나도 이 나라 밖에서는 다 외국인이야. 그게 더 신기하지 않아? 여긴 이런 대로변 말고 골목이 찐인데. 봐봐. 저기도 고양이 지나간다. 안녕, 해. 안녀엉ㅡ. 슬슬 어둡네. 집 들어가야겠다. 어우 시끄러워. 빨리 지나가자. 다들 술취해서 정신 없나 봐. 

 

 

"원빈아. 형 천문학 전공인 거 알지? 서울은 대한민국을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대한민국은 지구를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지구는 우주를 놓고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

 

 

우주는 정말 광대하고 무한해. 무서울 만큼. 

그래서 가끔은

 

너무

슬플 만큼.

 

 

"영원히 살아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우주를 눈에 담으며 살고 싶어.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 내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한, 더 큰 세상을 알고 싶어. 성찬의 눈이 긴 하루 중 가장 밝게 반짝였다.

 

 

"와 오늘 엄청 많이 걸었다. 우리 원빈이는 어디가 제일 좋았을까아. 나중에 사람 되면 말해주기야. 얼른 씻고 밥 먹자."

 

 

집으로 돌아와 이동장을 열었는데 성찬의 까만 고양이는 축 늘어진 채 미동이 없었다.

성찬은 펄펄 끓는 작은 몸을 끌어안고 응급실로 달렸다. 쓰러져있던 원빈을 병원에 데려갔던, 처음 만난 그 날처럼. 원빈아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병원에 도착해 상황 설명을 하면서도 눈물이 우앵우앵 나왔다. 산책을 했는데요. 엉엉. 집에 와서 보니까 애가 아파요. 우리 애기 괜찮나요. 제 고양이 죽나요. 고양이 수인인데요, 제가 데리고 돌아다녀서 이렇게 된 건가요. 춥지 말라고 옷도 입혔는데 열이 너무 높아요. 우리 원빈이 살려주세요..... 

다크써클이 인중까지 내려온 의료인이 어린 보호자에게 생짜증을 냈다.

 

 

"고양이는 산책하면 안 된다는 것도 모르시면서 고양이를 키우시면 어떡합니까."

"산, 산책냥이도 있다고 해서......"

"허… 이 수인은 인간화 안 한지도 오래 돼서 더더욱 고양이 상태로는 집 밖에 나가면 안 돼요. 동물은 인간보다 스트레스에 취약해서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요. 마지막 인간화는 언제예요?"

"아직 사람 모습을 안 보여줬어요......"

 

 

그 말에는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서로 신뢰를 못 하는 거면 차라리 수인 시설로 가는게 나을 수도 있어요. 말씀드린 것처럼 동물은 사람보다 스트레스에 취약해서요. 수인은 더 그렇구요."

"......"

"앞으로도 고양이는 절대 산책 시키시면 안 됩니다."

"흐흐흑 그럼 내 고야니이 세세댱은 흑흑 영어니 이이딥편짜리..."

"......수납하시고 약 다 들어가면 퇴원하세요."

 

 

성찬은 고양이가 누워있는 작은 침대 옆에 앉아 보호자님 이제 그만 가시라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쉬지 않고 울었다. 엉엉. 엉엉. 흰 얼굴이 온통 얼룩지도록 눈물 콧물을 뺐다. 슬퍼서. 억울해서. 너무너무, 화가 나서.....

 

그럼 내 고양이의 세상은 영원히 20평짜리 오피스텔과 창문 밖 풍경이 전부인가요?

그걸 알아도 모르는 척, 바보처럼 예뻐만 하다 보내주는 게 고양이를 위한 사랑인가요?

어떻게 해야 제대로 널 사랑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빵점짜리 집사다.

 

 

˚₊* ✶⋆ (=🝦 ﻌ 🝦=)‧˚✶₊* ⋆

 

 

"이따 학교 안 가? 나 잠 와......"

"안가안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안돼애. 자지 마 원빈아아. 우리 더 얘기하자."

"잠 와......"

 

 

진짜 수인이 맞았구나. 인간 나이론 거의 성인이라고 하긴 했지만 정말 애기 고양이가 아니었네. 성찬은 원빈의 부드러운 볼을, 고양이 색과 똑같이 새까만 머리카락을, 붕어처럼 퉁퉁 부은 눈두덩이와 입술을 신기한 듯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 결국, 못 참겠어! 원빈을 꽉 끌어안았다. 

인간 박원빈. 너무너무 신기하다. 이런 얼굴이구나. 이런 목소리구나. 반가워. 반가워. 보고 싶었어. 정말 만나고 싶었어.

성찬의 품 큰 티셔츠를 허수아비처럼 걸친 원빈은 조금 어색한 듯 꼬물거리긴 했지만 저항 없이 몸을 폭 기대왔다. 원빈은 인간이 되니 고양이 특유의 새침함과 얄미움이 깎여서 훨씬 맹(순)해보였다. 어뜨케? 내 고양이... 사람일 때도 엄청 귀엽게 생겼어. 

 

 

"인터뷰 해야 돼."

"무슨 인터뷰야......"

"인터뷰가 무슨 뜻인지도 알아? 세상에, 왜 이렇게 똑똑해? 동물농장 나가야 돼. 나는 진짜 가나다라부터 가르칠 각오 하고 있었는데... 얼굴도 이렇게 이쁘고. 형 눈물날 꺼 가타아...... 근데 내가 형 맞겠지? 병원에서 너보고 '거의' 성인이랬는데. 겉으론 그냥 비슷해 보여."

"상관 없어."

 

 

원빈은 바닥에 발라당 드러누워 쭉 기지개를 켰다. 고양이일 적처럼. 성찬도 고양이에게 그랬듯 원빈의 턱을 문지르고 납작한 배를 둥그렇게 쓸어주었다.

골골대는 소리가 환청처럼 귀를 간지럽힌다. 성찬은 질문하고, 원빈은 성찬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첫번째 질문. 당신은 언제부터 박원빈이었습니까? 할머니랑은 언제부터 같이 살았어?"

"설날 끝나고...... 이름은 3월에 받았어. 그전에는 고양아, 코양아, 그러셨어."

"아아. 그래서 다들 할머니가 원빈이 키우시는 걸 몰랐구나.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땅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눈 뜨니까 할머니 집이었어."

"그랬어...? 그럼 그전에는 어디 있었어?"

"나쁜 데, 막 무서운 데. 그전에는 애기들 많은 데. 그전에는 원래 집."

"그럼 다른 보호자도 있었어? 근데 왜 헤어졌어?"

"그냥."

 

 

원빈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냥?"

"버렸어."

"뭐를?"

"나를."

 

 

성찬은 말을 얹는 대신 원빈의 입 안에 들어간 손톱을 물렸다. 

작은 뒤통수를 들어 자기 허벅지를 베게 하고, 희고 긴 손가락으로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원빈이도 많이 놀랐겠다."

"응......"

"......"

"기운이 없다고 그러셨어."

 

 

눈을 감은 원빈은, 어젯밤 꿈을 얘기하듯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잠깐 눈 좀 붙이겠다고 하셨는데...... 안 깨어나셨어. 저녁에도. 다음날 아침에도."

"......"

"할머니 휴대폰으로 119 전화했는데 누구냐고 해서...... 손자라고 했어. 근데 나는 손자가 아니니까. 다시 계속 고양이로 있었어. 집에 왔던 사람들이 고양이는 안 데려갔어."

"원빈이가 임종을 지켜드렸구나. 할머니가 외롭지 않으셨겠다. 고마워."

"나도..." 

"......"

"나도 할머니한테 가고 싶었는데. 나는 어딘지도 모르고......"

"......"

"검은 고양이는 재수가 없으니까. 혹시 할머니 천국 못 갈까 봐 집에 있었어."

"...그런 말을 전에도 누가 했었어?"

"응."

 

 

억장이 무너진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걸까?

화날 일도, 슬플 일도 아니라는 듯 말하는 원빈의 태도에 속이 상했다. 아니면서. 손을 덜덜 떨고 있으면서. 눈이 이렇게 축축한데. 누가 너한테 참으라고 그랬어? 대체 누가. 이렇게 예쁘고 착한 고양이한테......

성찬은 원빈의 두 볼을 감쌌다. 우리 고양이, 토끼 됐네. 원빈은 고개를 푹 내리깔고 그새 또 손톱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지지, 그러면 새빨개진 눈이 눈치를 보면서 손을 샥 숨겼다.

 

 

"박원빈. 형 봐. 그런 건 바보들이나 하는 말이야. 그런 거 믿으면 바보 되는 거야. 원빈이 바보야?"

"바보 아니야..."

"바보 고양이."

"바보 고양이 아니야..."

 

 

성찬은 원빈을 품에 꽉 안았다. 원빈은 성찬의 가슴 깊이 코를 박고 뜨거운 숨을 잘게 끊어 뱉었다. 성찬이 원빈의 뒷머리를 살살 빗겨주며 말을 이었다. 

 

 

"원빈아. 할머니는 너를 만나서 엄청 행복하셨을 거야. 너를 많이 사랑하셨을 거야. 그러니까 이런 멋진 이름을 지어 주셨지."

"...원빈이가 무슨 뜻인데?"

"니가 반짝반짝 빛난다는 뜻이야."

"나는 까만 고양인데?"

"그래도. 어떤 우주에선 가장 빛나는 고양이야."

"......"

 

 

달래려고 하는 거짓말 같은 게 절대 아니야.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꼭 그걸 알아주기를.

성찬이 원빈에게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장난스럽게 물었다.

 

 

"형이랑 사는 거 힘들진 않아?"

"......응."

"하고 싶은 건 없어?"

"없어.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 건 있어. 나 샤워 맨날맨날 하니까, 고양이일 때는 씻기지 마......"

 

 

아하하학. 그게 그렇게 싫었어? 응. 물도 막 이렇게 파파 뿌리고… 알겠어. 앞으론 안 할게. 근데 진짜 그렇게 못 씻겼어? 성찬이 팔뚝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는 원빈을 옆으로 돌렸다. 고양이도 얼굴이 빨개지네.

 

 

"근데 왜 계속 인간 모습 안 보여줬어?"

"......"

"알려주기 싫어? 그럼 나중에 괜찮을 땐 꼭 말해주기야."

"응."

"아 참. 너 이제 계속 인간화 하고 있어. 고양이로 너무 오래 있었어. 앞으론 안 돼. 백 살까지 살아야지."

 

 

성찬이 짐짓 엄하게 말했다. 원빈이 소파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입을 삐쭉였다. 코오코오 자는 척을 하며 답을 피했다. 

 

 

"미안. 졸리지. 그래도 우리 쪼끔만 더 얘기하다 자자아. 나 너한테 궁금한 게 너무 많단 말이야."

"귀찮은데......"

"너 숫자 셀 수 있어? 1, 2, 3, 4, 그다음 뭐야."

"......방에 갈 거야."

"알았어 알았어. 그럼 10, 100, 1000, 그다음도 알아?"

"......"

 

 

아는구나. 미안. 성찬이 쭉 째진 원빈의 눈가를 좍좍 펴주며 사과했다.

 

 

"너 그러고 보니까 한번도 날 안 부르네. 형아 해봐. 형아."

"......성찬아."

"쓰읍. 형. 형이라고 해야지이. 성찬아는 또 어디서 배웠대."

"강아지야."

"형아는 수인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밤새 떠들다 보니 창밖으로 벌써 해가 밝아왔다. 데리고 들어가서 재워야 되는데. 바닥 딱딱할텐데...... 근데 몸도 눈도 너무 무거웠다. 

 

 

"너 이따 눈 떴는데 갑자기 다시 고양이 돼 있고 그러면 안 돼."

"안 그런다고…..."

 

 

잘 자. 고마워.

그 말을 내가 했는지, 니가 했는지. 내가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니 목소리였던 것 같기도 해.

추울까봐. 사람은 고양이보다 추위를 잘 타니까. 빈틈 없이 끌어안은 너의 몸에선 나와 똑같은 냄새가 나서...... 왠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 (=🝦 ﻌ 🝦=)‧˚✶₊* ⋆

 

 

하드웨어가 고양이에서 사람이 되었을 뿐 알맹이는 똑같을진대, 보호자로서 이게 공평한 처사가 맞나? 성찬은 거실에 토퍼를 깔며 고양이 원빈에게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성찬의 등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인간 원빈은 이부자리가 준비된 것 같자 고개를 빼 성찬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끄덕끄덕. 그러자 원빈이 토퍼 위로 다이빙했다. 누가 고양이 아니랄까 봐 점프 진짜 잘하네. 성찬은 원빈의 위로 새로 세탁한 이불을 휙 덮어주었다. 이불 속에서 만족스럽게 골골대는 소리가 들렸다.

요즘 성찬은 여자친구와 자주 다툰다. 동기들에게도 소홀해졌다. 학교에서도 사람말을 할 줄 아는 고양이와 연락하는 데 온 정신이 팔려있었다. 고양이와 산 3달 남짓한 기간엔 형식적으로나마 각방을 썼으면서, 원빈이 인간화 한지 한 달도 안 돼 넓지도 않은 거실이 꽉 차는 토퍼를 주문했다. 밤새 떠들다 매일같이 소파에 엉켜 잠드는 바람에 내린 결정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오늘의집에서 토퍼 고르고 결제하면서도 좀 이상하다곤 생각했다. 굳이? 그냥 내 방에서 놀다 같이 자면 되지 않나? 근데 또 이상하게 그건 좀... 아니 이상할 건 또 뭐야, 내 고양이한테. 따지고 보면 고양이일 때도 원빈이 매일 밤 숨어들었으니 한 방에서 잔거나 마찬가지인데. 지금 고양이가 사람 됐다고 내외해? 그렇게 편협한 보호자였어? 아아아니, 그건 아닌데......

 

 

"아이스크림 먹어도 돼?"

"아이스크림? 방금 양치했잖아."

"그래도..."

"......그럼 먹고 30분 있다가 양치 다시 해야 돼. 그냥 자면 안 돼."

 

 

이거 봐. 또. 왜 허락을 받아? 왜 이렇게 순순하게 굴어? 고양이 박원빈은 안 그랬잖아. 쌀쌀맞고,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할퀴고, 쫄쫄 굶기나 하고, 13분 늦었다고 얼굴도 안 보여줬잖아. 고양이일 때도 무릎냥이는 아니었던 원빈이 제 무릎을 베고 동물의 숲을 하는 걸 내려다보는 성찬의 마음이 찌르르 울렸다. 볼과 코를 콕콕 눌러도 원빈은 앞발(손)로 성찬을 줘 패는 대신 눈을 꿈뻑꿈뻑할 뿐이다.

인간이 된 내 고양이 수인은 겁이 날 정도로 순하고,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줘본 적도 없는 눈치를 본다.

그러니까 이건 앞으로도 영원히 고양이 박원빈과 인간 박원빈을 차별할 수밖에 없는 정성찬의 변명. 야옹이 원빈아, 널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야. 

 

 

˚₊* ✶⋆ (=🝦 ﻌ 🝦=)‧˚✶₊* ⋆

 

 

고양이 원빈이 그랬듯 인간 원빈도 호오가 뚜렷하다.

첫번째로는 음식. 고양이 박원빈에게 최애 사료는 완전식품이지만 인간 박원빈은 최애 음식인 김치볶음밥만 먹다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수가 있다. 성찬은 원빈을 어르고 달래가며 원빈이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늘려가고 있었다.

꽁치 통과. 한치 탈락. 닭고기 통과. 파스타 보류. 감자탕 좋아. 매운 건 잘 못 먹지만 가끔은 먹고 싶어. 하지만 큰 고춧가루는 싫어. …….잠깐 타임, 큰 고춧가루의 기준이 뭔데?

인스턴트와 잘 열어보지 않는 엄마 반찬이 유일했던 성찬의 냉장고에는 원재료와 레토르트가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성찬의 눈물겨운 정성과 인고 끝에 저체중 고양이의 볼에도 아주 미미한 양감이 생겼다. 깨작거린다 뿐이지 젓가락질도 애초에 저보다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 성찬이 두근두근 준비했던 티니핑 교정 젓가락은 서랍 깊은 곳에 진작 봉인되었다.

 

 

“근데 꽁치는 원래 까만 물고기야?" 

“......탄 데 말고 형이 발라 주는 것만 먹어."

 

 

둘째론 색깔. 원빈이 봄 옷 사야겠다. 이 후드 파란색이랑 하얀색 중에 뭐가 좋아? 아무거나. 아무거나는 없는데? 그럼 둘 다 사야겠다. …....까만색. 

주문한 옷이 도착하면 원빈은 그 자리에서 곧장 훌렁훌렁 옷을 갈아입고 성찬을 멀뚱히 쳐다본다. 막 일어나 눈도 못 뜬 성찬이 어이구 내새끼 예쁘다, 머리를 쓰다듬는 척이라도 해야 뿌듯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조금 어이없고, 많이 귀여웠다.

'까만색은 나쁜 색이라 싫어'

언젠가 원빈이 그런 말을 했었다. 

성찬은 기함했다. 검은색이 얼마나 멋있는 색인데. 너 고양이일 때 윤기 차르르해서 얼마나 귀여운데. 검은색 머리카락도 눈도 얼마나 예쁜데. 옆에 원빈을 끼고 밤새 블랙 팬서와 매트릭스를 정주행했다. 봐봐, 제일 멋있는 사람들은 다 까만색이잖아. 사이비 신도처럼 블랙이 최고의 색깔인 이유를 몇날며칠 피칭하고 나서야 원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 말이 맞았지? 성찬이 말이 맞았어. 야아 너어 진짜 형이라고 하라니까아~~ㅜㅜ

사실 얘가 제대로 납득을 한 게 맞나 벌벌 떨었는데 그 뒤로 원빈은 하다못해 책을 고를 때도 검은색 표지로 된 걸 골랐다. 어휴 다행이다. 성찬은 집 어디선가 영원히 나오는 검은색 고양이 털을 돌돌이로 밀면서 안도했다. 이거 봐. 까만색 얼마나 좋아? 잘 보여서 청소하기도 쉽고. 하.......

 

셋째론 물건. 원빈은 특정 물건들에 집착에 가까운 애착을 보인다. 예를 들면, 입을 대면 물이 입 양옆으로 줄줄 새는 찌그러진 컵만 썼다. 여자친구와 도자기 공방 원데이 클래스를 갔던 성찬이 원빈을 위해 만든 컵이었다. 성찬의 손이 워낙 커 컵보다는 밥그릇 크기인데다, 전문가의 손길로도 하자 보수가 불가능했던 졸작이었다. 하지만 원빈은 성찬이 우물쭈물 내민 컵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컵에 그려진 까만 먼지 같은 게 자기란 걸 단숨에 알아봤다. 성찬은 반만 원빈의 입으로 들어가고 반은 원빈의 옷이 마셔버린 물을 닦아주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원빈아, 그거 쓰지 말자... 형이 다른 예쁜 컵 사줄게. 고양이 그려진 걸로. 미안해서 그래 진짜."

"싫어."

"그건 기능성과 심미성 양면에서 모두 완벽하게 실패한 컵이야."

"아니야. 이건 내 컵이야. 이상한 말로 내 컵 욕하지 마."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원빈은 인간으로 변했던 첫날 성찬이 정신없이 주워 입혔던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아직도 잠옷처럼 입고 잤다. 원래 성찬이 외출복으로 입던 옷을 매일같이 입다 보니 원단이 금방 헤져서 버리려고 했더니 난리가 났다. 이게 좋으면 똑같은 걸 새로 사주겠다는 말에는 성찬을 무슨 나라 배신한 매국노 보듯 차갑게 쳐다봤다. 그래, 맘대로 해. 아무리 봐도 누더기 같지만 그냥 빈티지라 쳐... 결국 성찬이 손을 들었다. 

그러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집안 곳곳이 원빈의 특별한 애정을 받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그건 모두,

 

'우리'가 담긴 것들. 

 

그렇구나.

그걸 깨달은 순간, 크고 작은 것들로 원빈과 별 소득도 없는 입씨름을 하던 성찬은 그 모든 걸 그만두었다.

 

원빈은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한 고양이 수인. 

그의 모든 호오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애정에서 기원하고 있었다.

 

 

˚₊* ✶⋆ (=🝦 ﻌ 🝦=)‧˚✶₊* ⋆

 

 

'재밌게 놀았어? 우리 원빈이 오늘은 뭐 했어?' 

'물고기 잡았어. 사과도 땄어. 흑백 요리사도 봤어.'

 

원빈은 객관적으로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 나름대로는 수다스럽다. 종일 집에만 있었으면서 한 게 얼마나 많은지. 또 고작 몇 시간 떨어져 있던 사이 할 말이 얼마나 쌓였는지. 학교에서 돌아온 성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크지도 않은 목소리로 잠들기 전까지 쉬지 않고 쫑알거렸다. 

 

하지만 아닌 날도 있었다.

 

 

"삐나아. 형아 왔다아."

 

 

황혼이었다. 

여름이 된 후 해가 길어져 가끔 귀갓길에 해가 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불을 따로 켜지 않은 집 안이 이제 막 하루를 넘어가는 노을빛으로 온통 눈부셨다. 원빈은 늘 그렇듯 거실 창가 앞에 앉아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성찬은 익숙한 뒷모습에 대고 다시 한번 불렀다.

원빈아? 

원빈은 돌아보지 않았다. 성찬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성찬은 문득, 원빈이 자신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거나 아니면 다른 차원에 존재해 닿을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아주 멀게. 마치 모르는 것처럼. 아예 없었던 것처럼.

그러자 가슴이 쿵 떨어진다.

 

왜?

 

슬프도록 아름답게 드리워진 일몰과 이질적인 침묵이 공존하는 우리 둘의 집. 

붉기도 노랗기도 한 빛이 쏟아지는 원빈의 얼굴이 모르는 사람처럼 낯설어서, 성찬은 현관 턱을 넘지 못하고 우두커니 멈춰있었다.

나 사실은 널 잘 알지 못하는 걸까?

방금 그게 뭐였는지 널 꽉 붙들고 바닥까지 캐묻고 싶기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 불안을 꿀꺽 삼켜버리고 싶기도 한 마음.

성찬은 천천히 원빈에게 다가갔다.

 

 

"뭐 보는 거야?"

"......"

 

 

있잖아. 기억해?

 

 

"너 고양이었을 때...... 형이 뭐 보냐고, 여기 옆에 오기만 하면 도망갔잖아."

"......"

"뭐가 좋았어? 뭘 보느라 매일 여기 앉아있는 거야?"

 

 

지금은 알려주면 안 될까?

 

 

"......지켜주는 거야."

 

 

원빈이 대답했다. 익숙한 목소리를 듣자 울컥하고 목이 메었다. 너 여기 있구나. 

 

 

"누구를?"

"애기들. 저기."

 

 

원빈의 손가락 끝이 오피스텔 앞 놀이터로 향했다. 듬성듬성 유치원 가방을 멘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성찬이."

"......"

"성찬이가 이 길로 오잖아."

 

 

씻고 나온 원빈은 여느 때와 같이 따끈따끈한 몸으로 품에 안겨 왔다. 코로 성찬과 같은 시트러스 바디워시 향기가 스몄다. 성찬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원빈을 끌어안았다.

말 없이 원빈의 콧대에 쪽쪽 뽀뽀하던 성찬은 볼을 웅냥냥 깨물다 실수로 강도 조절을 못 해서 깜짝 놀라 떨어졌다. 원빈은 몸을 물리지 않은 채 눈만 꽉 감고 있었다. 

미안해,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걸 보자 말이 쏙 들어갔다. 왜 가만히 있어? 소리질러야지. 피해야지 바보야... 괜찮아. 뭐가 괜찮아? 코가 매워서 이를 악물고 원빈을 고쳐 안았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

원빈은 순하게 웃었다. 괜찮은데. 성찬이는 바보 같다.

 

 

"오늘은 혼자 잘래."

"......"

"잘 자."

 

 

달칵. 방 안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린다. 

혹시 깨져버리기라도 할까 봐, 그게 너든 이 평화든. 끝내 묻지 못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왱왱 울렸다.

 

원빈아. 너 대체 언제부터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어? 혹시 집에 혼자 있을 때는 계속 그런 얼굴이었어? 

이런 날엔 

무슨 꿈을 꿔?

 

슬픈 널 두고 나 홀로 달게 잠들 수 있는 밤 같은 게 어디 있겠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밤새 원빈을 생각했다. 이토록 지나치게 애틋하고, 안타까워서...... 마음이 닳아버릴 듯 사랑스러운 존재를. 

 

 

˚₊* ✶⋆ (=🝦 ﻌ 🝦=)‧˚✶₊* ⋆

 

 

"진짜 안 가?"

"안 가."

"도착해서 고양이로 있으면..."

"안 가."

 

 

성찬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현관을 서성였다. 작은 얼굴은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내내 TV에만 못 박혀 있었다. 그 뒷모습이 야속해 아랫입술이 절로 튀어나왔다. 

성찬은 오늘만 스무 번째인 잔소리를 다시 한번 읊었다. 햇반은 식탁 위에, 반찬은 냉장고에, 불은 위험하니까 되도록 전자레인지만 쓰고, 아이스크림은 하루에 딱 한 개만, 먹기 싫으면 절대 굶지 말고 형이 등록해준 배달 앱에서 주문할 것. 그리고 형 잘 갔다 오라고 안아줘......

야속한 고양이는 끝까지 대답이 없었다. 앞으로 이틀은 못 보는데, 형 진짜 안 안아줄 거야? 성찬은 까만 뒤통수만 하염없이 쳐다보다 언제 도착하냐는 부모님 전화를 받고서야 집을 나섰다. 1층에서 17층으로 느릿느릿 올라온 엘리베이터가 다시 1층으로 느릿느릿 하강하고, 오피스텔을 나와 지하철에 몸을 실을 때까지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바깥 공기가 제법 쌀쌀하다. 바로 내일이 추석이었다. 원빈과 함께 산 지도 벌써 1년이  흘렀다. 

성찬은 추석을 맞아 오랜만에 본가에서 이틀 밤을 보내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가족 행사는 밥만 먹고 쌩. 원래는 늘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생일도 패스. 아무리 밖으로 도는 게 대학생 본분이라지만 큰아들도 외국에 있는데 소홀해도 너무 소홀한 막내아들 때문에 부모님의 서운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원빈이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겨울이도 만나고. 사실 궁금하면서.

 

집 앞에 선 성찬은 약간 어색해진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지문 하나 가져다 댔을 뿐인데 벌써 문 건너편에서 와다다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겨울아아."

 

 

현관에 발을 채 딛기도 전에 겨울이가 달려들었다. 어이구. 어이구 그래쪄. 오빠 보고 싶었어? 왕왕왕. 망망망. 겨울이를 안아 든 성찬의 볼이 순식간에 침투성이가 됐다. 악. 겨울아 잠깐만. 잠깐만. 신발 벗고. 으악. 성찬은 정신이 혼미한 채 겨우 외쳤다. 저 왔어요!

 

 

"겨울이가 둘째 오빠 엄청 보고 싶었나 보네."

"너희 오빠는 고양이한테 홀라당 빠져서 얼굴도 안 보여주는데, 그래도 그렇게 좋아?"

 

 

겨울이는 털실 같은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오랜만에 안아보는 따뜻한 눈뭉치. 내리는 눈처럼 하얀, 온 겨울 중 가장 예쁜 우리 강아지. 또미가 떠나고 모두 슬픔에 빠졌을 때 축복처럼 찾아왔던 우리 집의 복덩이. 정말 소홀했던 것에 대한 서운함도 야속함도 없는지, 아니면 그런 것쯤은 아무 상관 없다는 건지. 품 안에 꼭 안긴 겨울이가 미처 숨 고를 틈도 없이 사랑을 흩뿌린다. 

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 보고 싶었어. 안아줘. 쓰다듬어줘. 칭찬해줘. 만져줘. 예뻐해줘. 애정을 숨기는 법도, 숨길 필요도 못 느끼는 천진한 사랑스러움.

뒤에서 엄마가 장난스레 물으셨다. 그래도 고양이보다는 강아지가 좋지? 손 씻고 와. 우리 큰 강아지. 얼른 밥 먹자.

고양이보다는 강아지? 음...... 아무래도 그렇지. 고양이보다는 강아지지.

 

 

"고양이, 원빈이는 잘 지내니?"

"응. 아직 밖에 나가는 건 좀 힘든가 봐요."

"그래? 같이 사는 건 좀 괜찮아?"

"학대당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 미등록 수인들한텐 그런 일이 흔하니까."

"......같이 사는 건 좋아요. 재밌어요. 귀엽고. 착하고."

"앞으론 뭘 하고 싶대? 뭐라도 배워야 할 텐데."

“수인 대상 재사회화 교육 같은 것도 있다더라. 걔도 자립해서 잘 살아야지."

 

 

성찬의 젓가락질이 느려졌다.

막내아들 온다고 빈틈없이 꽉 채워진 식탁에서 명절 식사를 마치고 따뜻한 물로 샤워한 성찬은 익숙한 침대에 노곤노곤 누웠다. 밀린 디엠을 보다 여자친구와의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하고, 결국 답장하지 않은 채 휴대폰을 내려놨다. 침대에서 내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자기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이상하네. 이제 나한테는 다른 냄새가 나는 건가……

문 틈을 비집고 도도도 들어온 겨울이가 성찬의 침대에 파고들었다. 성찬은 팔 옆으로 자리를 잡는 겨울이를 쓰다듬었다. 겨울이가 성찬의 손바닥을 핥았다. 촉촉한 코를 콕콕. 먕! 그리고 다시 할짝. 성찬이 간지러워 웃었다. 

우리 겨울이.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형에게도, 성찬에게도, 처음 보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는 겨울이. 사랑해달라고 하는 게 수치스럽지도 미안하지도 않은 겨울이. 도둑이 들어도 좋다고 안길 겨울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누가 자길 예뻐하지 않는 건, 미워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겨울이.

……..

성찬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깽.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막 잠에 들려던 겨울이가 울었다. 헉. 미안. 겨울아 미안해.

부엌으로 나와 수능 날 썼던 보온병에 소고기뭇국을, 락앤락에 전과 잡채를 옮겨 담았다. 원빈이는 고기를 좋아하니까 육전은 아예 통째로. 갈비는 어떻게 담아가야 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뭐가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에 놀라 나온 엄마가 말을 걸었다.

 

 

"깜짝이야. 너 안 자고 뭐해? 이 새벽에."

"도둑질..."

"뭐어?"

"엄마. 나 가야 돼요. 원빈이한테."

 

 

뭐라고? 엄마가 어이가 없단 듯 잠시 멈췄다 이내 한숨같은 웃음을 터트리셨다. 그러다 부엌으로 와 엉망진창으로 담긴 전을 꺼내 호일을 깔아 그 위로 다시 올리고, 미리 준비해 둔 반찬 더미와 과일을 봉투에 꽉꽉 눌러 담으시며 말했다.

 

 

"아들내미 키워봤자 소용 없다더니. 아들 둘은 목메달이라더니. 그래서 막내아들을 딸처럼 키웠더니만."

"엄마... 갈비도."

"넣었어. 이 웬수야."

"아싸."

 

 

카택을 부른 성찬은 잽싸게 나가려다가 멈칫하고 뒤를 돌았다. 왜? 다정히 되묻는 표정이 미묘하게 외로워 보였다. 

엄마 사랑해요. 진짜, 진짜진짜. 

엄마가 됐다는 듯 등짝을 내리치셨다. 성찬은 문을 열고 나서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새벽 공기가 차가워 코 끝이 찡했다. 겨울아, 오빠 금방 다시 올게. 아빠 죄송해요. 아침 해 뜨자마자 전화 드릴게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온 세상에 나뿐인 고양이가, 원빈이가 나만을 기다리니까.

 

징글징글한 엘리베이터. 이 새벽에도 한 번에 오는 법이 없다. 성찬은 다리를 달달 떨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결국 무거운 종이봉투를 고쳐 들고 계단으로 향했다. 내가 진짜 다음 집은 절대 고층으로 안 간다. 꼭 엘리베이터 네 대인 데로 간다. 봉투를 짊어진 팔뚝 위로 빨간 선이 죽죽 그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왜냐면, 으아, 1701호 문을 열면......

 

 

"형...?"

 

 

원빈이 성찬 방에서 나왔다. 눈가가 온통 새빨갛게 물러 있었다.

성찬은 현관 턱에 봉투를 내려놓고 무릎을 짚었다. 원빈아... 형 거짓말 아니고 진짜 폐가 터질 것 같아.

 

 

"늦어서 미안해."

"......"

"형 안아줘......"

 

 

고양이는 혼자 있어도 된다고. 혼자도 잘 있는다고. 전에는 왜 그딴 생각을 했지.

축축하고 뜨끈한 체온이 어깨에 스민다. 성찬은 팔에 힘을 더 주어 품 속의 원빈을 꽉 끌어안았다.

 

 

˚₊* ✶⋆ (=🝦 ﻌ 🝦=)‧˚✶₊* ⋆

 

 

나란히 누운 성찬의 침대 위. 

성찬의 팔을 베고 누운 원빈이 작게 속삭였다. 겨울이 냄새.

 

 

"겨울이가 원빈이 보고 싶대."

"나는 겨울이 안 보고 싶어."

"왜애. 사이좋게 지내. 겨울이는 보나마나 너 엄청 좋아할 텐데."

"......성찬이는 겨울이가 더 좋지."

 

 

원빈이 콧물 나온다. …….훌쩍. 성찬은 협탁 위의 휴지를 뽑아 원빈의 코에 가져다 댔다. 

 

 

"흥, 해." 

"흥?"

"흥! 하고 풀어." 

"흥!" 

"아니, 소리를 내지 말고 코를 풀라는 건데..."

 

 

어쨌든 코를 풀게 한 성찬은 서러워서 메기 입이 된 원빈을 토닥이며 말했다. 확실히 고양이보다는 강아지가 좋은 것 같아. 원빈이 성찬의 손을 내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성찬이 킥킥 웃으며 울상이 된 원빈을 껴안았다.

 

 

"강아지보다는 고양이 수인 박원빈이 좋고."

"......"

"겨울이는 우리 겨울이지만 박원빈은 내 박원빈이니까."

 

 

원빈이 축축한 눈으로 성찬을 올려다본다. 

솔직히 말할까. 이런 맹목적인 눈을 보면 조금 겁이 나는 것 같아.

내가 너를 정말 책임질 수 있을까? 이렇게 겁이 많고, 서러운 것도 많고, 아무것도 아닌 내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대단한 힘이라도 가진 것처럼 무조건적으로 여겨주는 너를. 나는 사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다고,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전부 틀릴지도 모른다고 말하면 너는 실망할까. 

 

성찬이 품 안의 원빈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원빈은...... 예감이라도 한 듯 가만 눈을 감았다.

시간도 숨도 멈춰버린 순간. 어떤 진실이 척추를 타고 흐른다.

굳어있던 성찬은 내렸던 고개를 느릿하게 올려 눈꺼풀 위에 입술을 맞췄다. 두 눈을 꽉 감은 원빈의 속눈썹이 아기새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성찬은 쓸쓸히 웃으며 원빈의 부드러운 볼을 살살 매만졌다.

 

......

원빈아.

 

푹 자고 일어나서 갈비 먹자. 

응. 

송편도 가져왔어. 애플파이도 훔쳐 왔어. 그것도 먹자. 많이 먹자.

응. 응.

 

 

˚₊* ✶⋆ (=🝦 ﻌ 🝦=)‧˚✶₊* ⋆

 

 

성찬은 여자친구와 헤어졌고, 학회에 들어가게 되면서 눈코뜰 새 없이 바빠졌다. 아무리 바빠도 원빈과 아침마다 약속하는 귀가 시간은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피치 못하게 늦어버리는 날도 늘었다. 늦어서 미안해. 진짜 미안. 성찬이 늦어도 원빈은 고양이일 적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거나 밥을 굶으며 시위하지 않았다. 괜찮아. 평온한 얼굴, 고저 없는 목소리에 번번이 심장이 조였다.

니가 혼자인 게 싫어. 

이 세상에 니가 좋아하는 게 더 많았으면 좋겠어.

휴일을 집에서 보내는 대신 성찬은 외출을 제안했다. 원빈은 같이 사는 동안 자발적으로 집 밖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침묵하던 원빈은 예상 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얘가 과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줄은 알까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원빈은 성찬의 생각보다 훨씬 바깥 생활에 익숙해 보였다. 자연광 아래를 걷는 새침한 얼굴은 약간 가라앉아 보였지만 행동거지는 자연스러웠다. 사람들이 보는 건 앳되고 잘생긴 남자애. 전혀 칩거 전문 히키코모리 고양이같지 않았다.

 

감격스러웠던 첫 외출 이후 성찬은 바쁜 와중에도 틈이 나는 대로 원빈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원빈은 시끄럽고 인파가 많은 곳에선 조금 굳는가 싶었으나 성찬이 옆에서 손을 꽉 잡으면 안정을 찾았다. 

무리하면 안 돼. 힘들면 바로 말하는 거야. 원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 번도 싫다는 말이 없었다.

둘은 집 앞 영화관에서 재개봉한 클래식 영화를 봤다. 날씨가 좋은 날엔 타지 않은 꽁치가 나오는 한정식 집에서 점심을 먹고 집 앞 공원을 돌았다. 어떤 날은 카페 옥상 라운지에 앉아 함께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런 일상이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엔 차를 빌려 강릉에 가서 고대하던 원빈의 첫 바다를 눈에 담았다.

이건 어때? 저건 어때? 여긴 어때? 맛있어? 재미있어? 신기해? 예뻐?

원빈은 호기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신이 나 정신 없이 떠들던 성찬이 고개를 돌리면, 까만 두 눈은 언제나 영화나 사람이나 바다가 아니라 저를 향해 있었다.

 

외출 후 원빈은 언제나 자기 방으로 들어가 꼼짝 않고 누웠다. 불도 켜지 않고, 묻는 말에 대답도 않고, 마치 소진된 것처럼.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고 나서야 몸을 일으켜 씻고 밥을 깨작였다.

원빈이는 이 모든 게 별로 즐겁지 않구나.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걸까. 마음이 조급해진다.

성찬은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토퍼를 뒹굴며 철이 지난 동물의 숲을 여전히 열심히 플레이하는 원빈을 지켜봤다. 거실장 안에는 몇 번 써보지도 않은 다른 칩들이 굴러다니지만 원빈은 오늘도 마을을 멋지게 꾸미고 물고기를 잡고 사과를 따고 미첼이에게 말을 건다. 

젖은 머리를 넘겨주자 원빈이 커다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높은 콧대와 촉촉한 입술이 성찬의 여린 피부와 마찰한다. 입술이 손금과 스칠때마다 뜨거운 숨이 닿았다.

눈맞춤이 길어졌다. 성찬이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원빈아. 혹시 배우고 싶은 거 있어?"

"아니…?"

"가고 싶은 데는? 새 친구. 보고 싶은 거. 해보고 싶은 거."

"없어."

"하나도 없어? 이제 너 수인 등록도 돼 있어서 배우고 싶은 거 뭐든 정식으로 배울 수 있어. 원하면 교육 과정 이수해서 형처럼 대학교도 갈 수 있고. 밖에 나가서 세상 구경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운동도 해야 좋지. 천천히 생각해보자. 이제부터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

 

 

원빈은 흠칫하더니 스위치를 내려놓고 물었다.

 

 

"이제 나 버릴 거야?"

"......뭐?"

"앞으로 몇 밤 더 같이 있을 수 있어?"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귀로 들은 말이 인식되지 않고 그대로 튕겨 나간다. 충격으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성찬을 눈사람처럼 꽁꽁 얼려놓고선, 고양이는 꾸물거리더니 이내 잠들어 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원빈을 데려오던 날 어른들께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자립할 때까지만 도와줄 거예요. 그 말이 혹시 마음에 박혀 있던걸까. 아냐. 그런 게 아닌데. 일어나면 말해줘야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난 그저 니가 저 밖에 있는 좋은 것들을 더 알았으면 한다고. 모두 누렸으면 한다고.

 

먹을 수 있는 게 많아졌어도, 어떤 맛있는 걸 먹고 눈을 반짝여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김치볶음밥. 옷장이 새 옷으로 꽉 찼어도 매일 잠들기 전 찾는 건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 성찬과 딱 붙어 모르는 길을 걷는 것보다 1701호에서 한 뼘 거리를 두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은 박원빈. 

사실 니가 더 알아야 할 건 처음부터 하나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너는 언제나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고양이는 산책을 하지 않는다. 내 고양이는 더 그렇다. 너를 전부 아는 척 해놓고, 아직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원빈은 집을 나가버렸다.

 

 

˚₊* ✶⋆ (=🝦 ﻌ 🝦=)‧˚✶₊* ⋆

 

 

언젠가, 창가 앞에서 나를 지켜주고 있는 거라던 너의 말이 진짜였나 봐.

원빈이 사라진 지 오늘로 일주일째. 

검은 고양이의 극진한 비호에서 벗어난 성찬은 씻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주룩주룩 울고만 있었다. 학교도 못 갔다. 실종신고를 한 서 담당 경찰관과 수인 보호 센터 직원 말고는 누구의 전화도 안 받았다. 

이제야 모든 것들이 바로 보인다. 

왜 어떤 것들은 기어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걸까.

 

어딨어? 원빈아. 어딨어. 어딨어.

 

원빈을 찾으러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스무살 쯤 되는 남자애와 검은 고양이를 동시에 찾아다녔다. 성찬이 다니는 대학교, 반포 한강공원, 인사동, 서울숲, 넓지도 않은 우리 동네, 방파제가 쌓인 강릉 바다, 네가 늘 아이들을 지켜주던 놀이터. 무릎을 꿇고 미끄럼틀 아래를 들여다볼 때는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죽었을까 봐. 니가 죽기라도 했을까 봐. 까만 밤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까만 고양이라. 언제든 꺼져도 좋을 것처럼 체념하고 포기하는 게 익숙한 애라서. 까만 고양이는 재수가 없다고, 그래서 감히 사랑한다고, 사랑해 달라고 말할 생각조차 못하는 애라...... 그런 널 모른 척한 대가로 나는 온 우주에 단 하나뿐인 걸 영영 잃어버릴 것 같아서. 

 

'성찬이는 내 주인이야?'

'아니? 원빈이 주인은 원빈이지.'

'그럼 아빠야?'

'야아, 그건 딱 보기에도 좀…'

'......그럼 뭔데?'

'......'

'......'

'형, 형이라니까. 불러주지도 않으면서……'

 

기르는 고양이를 예뻐하는 집사의 마음으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아빠의 마음으로. 그렇게 깨끗하고 다정하기만 한 애정은 줄 수 없어. 난 내 방식으로만 세상을 보는 이기적인 어린애야. 그런 나를 지켜주고 있는 건 너였는데, 내 세계가 더 작은 줄도 모르고 널 놓쳐버렸어.

 

 

"원빈아......."

 

 

사랑해.

 

너 어디에 있어.

 

 

˚₊* ✶⋆ (=🝦 ﻌ 🝦=)‧˚✶₊* ⋆

 

 

새벽녘 겨울바람이 창문을 뚫고 체온을 잔인하게 앗아간다.

춥다. 배고프다. 원빈은 기침을 뱉으며 몸을 더 웅크렸다.

 

내게도 부모가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둘 다 사람이었지만 나는 두 '사람'이 존재조차 몰랐던 어느 조상 탓에 수인으로 태어났다. 어머. 너무 예쁘다. 몇 살이에요? 그들은 늘 애매하게 웃으며 머뭇거렸다. 두 살이라기엔 일곱살처럼 컸고, 일곱 살이라기엔 너무 어눌했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이 얻은 두 번째 생명은 사람이었다. 그 아이는 원래 내 것이었던 이름을 받았다. 몇 번 불려보지도 못한 이름이라 그랬나, 뺏긴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안녕. 행복하게 살아. 오래오래 살아. 아빠 손에 이끌려 집을 나서며 눈도 못 뜬 동생에게 인사했다. 마지막인 것 정도는 알았으니까, 한번쯤은 안아보고 싶었다. 목이 찢어지게 우는 엄마 말고, 저 따뜻하고 말랑한 아기를.

절대 고양이로 변하면 안 돼. 고양이인 걸 들키면 안 돼.

미안해. 미안해. 아빠는 날 끌어안고 울었다. 뭐가 미안해? 때린 거? 굶긴 거?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할 자신이 없었던 거? 날 버리는 거? 그런 것에 앞서 궁금한 게 있었다. 

나는 이름도 없고 사람도 아닌데. 그럼 남은 건 고양이밖에 없는데. 고양이도 되지 못하면 무엇이 되는 걸까.

 

이름이 뭐니? 왜 여기 서 있어? 엄마는? 아빠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같은 말만 메아리처럼 반복했다. 아빠가 여기 놓고 갔어요……

귀엽게 생겼네. 보육원에서는 어른이든 아이든 한 번씩 내 볼을 만지고 지나갔다. 영혼 깊이 애정으로 허기진 아이들이 지천인 보육원에서 눈에 띄는 외모와 서투른 말투는 특권이었다. 원장님이 떡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좀 크긴 하지만 곧 입양될 수 있을 거야. 사람들은 아주 못된 구석이 있어서, 예쁘게 생겼는데 불쌍한 애들을 좋아하거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고양이인 걸 들키고 말았다. 꾀죄죄한 옷더미 위로 꾸물거리는 까만 고양이를 본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냥 몇 대 더 맞을 걸. 조금만 더 참을 걸. 맞는 것도 아픈 것도 익숙한 일인데, 그 익숙한 게 매일 처음처럼 무서워서 모두 망쳐놓고 말았다.

친절했던 어른들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너무 빨리 자란다 싶더니, 수인이었구나. 살갑게 웃어주던 누나들의 눈에도 경멸이 어렸다. 하필 검은 고양이래. 저주받는대. 사람이 동물이 된다니 진짜 역겹다. 징그러워. 무서워. 괴물이잖아. 

그렇구나. 오랫동안 궁금해만 해오던 답을 드디어 구한 기분이었다. 사람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닌, 이상하고 아무것도 아닌 나.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괴물이었다.

 

떠밀리듯 보내진 수인 전문 시설은 겉보기엔 갈 곳 없는 수인들을 보호하는 용역 업체였지만 들여다보면 괴물들이 끔찍한 일을 벌이는 곳이었다. 물론 나도 괴물이었기 때문에, 괴물로서 마땅한 처분을 받았다.

매일 매일 아팠다. 매일 매일 나쁜 일이 생겼다. 매일 매일, 죽고 싶었다. 

나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필사적으로 고양이로 살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인간보다 빨리 죽으니까. 스스로 죽을 용기는 없는 내가 빨리 죽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검은 고양이는 재수가 없다며 얻어맞는 게 일상이었지만 인간으로 있다가 험한 꼴을 당하는 것 보다는 나았다. 

고양이의 삶은 인간의 삶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편했다. 고양이는 인간보다 심장이 작으니까...... 같은 고통이라도 작게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 기적처럼 시설에서도 수인들이 입양되어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대부분 개 수인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은 내게 밤하늘의 별처럼 닿을 수 없는 '꿈' 같았다. 나는 고양이, 그것도 재수 없는 검은 고양이니까. 저주와 재앙과 불운에서 태어났으니까. 나를 지나치는 모두가 불행해지니까.

시설의 수인들은 보통 인간들이 '인간답지 않다'고 여기는 일들을 했다. 어느 날엔 차에 짐짝처럼 실려 전국 곳곳을 다니고, 어느 날엔 혼자 도심을 걸어다니기도 했다. 학교는 가본 적도 없고, 고양이로 있는 시간은 점점 길어져 말이 잘 안 늘었다. 다들 날 백치라고 생각했다. 나로서는 나쁜 것들로 점칠될 바에야 바보가 되는 편이 나았다. 

도망가고 싶어? 가. 가봐. 반푼이 새끼야. 관리인이 원빈의 머리와 뺨을 퍽퍽 내리치며 이죽였다. 내가 도망칠 배짱도 없는 애란 걸 알아서 그랬겠지. 사실이 그랬다. 이 넓은 세상에 마음 둘 곳 하나 없어서, 나는 눈부시고 불가사의한 천국보다는 익숙한 지옥에 눕기를 선택하는 애였다. 태양 아래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보다 어두운 밤을 별처럼 수놓는 가정집의 불빛을 더 동경했다. 

 

할머니를 만난 건 죽으리라고 생각한 어느 날 밤이었다.

배를 걷어차이며 느꼈다. 나 오늘 죽게 되겠구나. 그렇다면 여기서 처리하는 또 하나의 고깃덩이가 되는 것만은 인간으로도 고양이로도 절대 싫었다. 온 힘을 다해 관리인을 밀쳤다. 바닥을 기며 손에 잡히는 기물이란 기물은 죄다 엎었다. 뭐 어쩌게? 이리와 이 새끼야. 이 더러운 짐승 새끼. 

질질 도망치던 목덜미가 붙잡혔다. 숨이 순식간에 뒤로 넘어간다. 억센 팔뚝을 떨쳐내는 대신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던 라이터를 더듬어 꺼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둘은 동시에 출입문 위에 부착된 주의 문구를 떠올린다. 화기엄금.

이러게. 이러게. 이러게, 이 씨발새끼야. 니가 사람새끼야? 더러운 건 너야. 짐승 새끼는 너야. 내가 대체 뭘 잘못했어.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을 당해야 해. 나도 수인으로 태어나기 싫었어. 나도 검은 고양이같은 걸로 태어나기 싫었어. 나도. 나도. 나도…… 

엄지가 찢어지도록 부싯돌을 돌렸다. 얼마나 바라왔던 순간이었는지, 피가 팽팽 돌아 칼로 찔려도 전혀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고양이로 변해 정신없이 달렸다. 눈을 떴을 땐 낯선 곳에 쓰러져 있었다. 

 

펑펑 내리는 하얀 눈이 까만 몸 위로 쌓인다.

나는 그 새하얀 이불이 나를 덮어 이 세상에서 거두어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춥다. 배고프다. 드디어 죽는구나. 그토록 기다려온 죽음인데 기대처럼 기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면 초연해진다던데 반대로 미련해서 눈물이 비죽비죽 났다.

다음 생 따위는 없어야 한다. 그래도 만약 태어나야 한다면 돌아갈 수 있는 따뜻한 집이 있는 사람이나 동물이었으면 좋겠다. 수인은 절대 싫어. 반푼이, 괴물, 수인만은 절대 싫어.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감각은 따뜻한 바닥의 온도였다. 그 다음엔 몸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 그 다음은 나긋한 목소리. 목소리가 말했다. 우리 강아지. 내새끼. 우리 아가, 우리 성찬이. 성찬이가 누구? 강아지가 있나? 귀가 절로 쫑긋했다. 이윽고 조금 멀리서 똑같이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건강히 지내고 계셔야 해요. 또 뵈러 갈게요. 사람이구나. 강아지를 닮았을까...... 궁금해하다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할머니는 평생의 설움이 씻겨나가는 사랑을 주셨다. 나만의 이름을 가져본 적 없던 내게 무려 당신의 성을 딴 이름도 지어 주셨다. 원빈아, 원빈아. 그렇게 불릴 때마다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절대로 수인인 걸 들키지 말아야지. 늘 그랬듯 고양이 수인의 삶보다는 고양이의 삶이 역시 훨씬 쉽고 안온했다.

그날도 평화롭고 조용한 날이었다. 어김없이 챙겨주셨던 고양이 밥. 따뜻한 체온. 다정하고 편안한 냄새. 창 틈새로 들어오는 밝은 빛...... 나는 그날 죽어 이미 천국에 와 있는 건 아닐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할머니의 고양이로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건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검은 고양이 주제에 감히 소원 같은 걸 빌어서, 할머니가 나 때문에 부정을 타셔서 돌아가셨다고. 

 

오래오래 살아야 되니까 인간으로 있어. 빛에서 태어난 형은 어둠 속에 손을 쑥 넣어 나를 건져낸다. 검은 고양이의 저주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란 듯 태연하게. 검은 고양이가 반짝일 수 있는 우주가 정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냐아냐아. 형에게는 다 같은 소리로 울리겠지만 사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몽땅 했었어. 고마워. 재밌어. 귀여워. 따뜻해. 기분 좋아. 서운해. 부끄러우니까 만지지 마. 늦게 들어오지 마. 혼자 두지 마. 하나도 안 미워. 하나도 안 싫어. 좋아해. 사랑해. 많이많이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 미안해. 사랑해. 미안해. 사랑해. 미안. 너무 미안. 

형에게는 할머니와 같은 냄새가 났다. 다정하고, 따뜻하고, 깨끗하고, 그래서 눈물이 날 것 같은...... '형'이라고 부르는 대신 고집스럽게 할머니를 따라했다. 성찬아. 강아지야. 그럼 내가 그런 밝은 사랑을 흉내내기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눈을 꽉 감으면 형도 나를 못 보지 않을까, 내가 모르는 척 하면 형도 영영 모르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보 고양이라서.

 

형, 사실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어. 계속 고양이로 살고 싶었어. 사람이 되면 심장도 커져서 느낄 수 있는 게 많아. 고양이일 때가 그리워. 

 

나를 들어올려 저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형에게

이미 나는 내 우주를 찾았다고, 여기서 모두 볼 수 있다고, 더 알아야 할 게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내가 

너무

너무 더럽고 끔찍해서

 

엄마, 아빠를 슬프게 해 놓고. 사람들을 배신해 놓고. 할머니를 죽여놓고. 세상에 태어나서 온통 나쁜 짓만 했는데. 형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사라져야 하는 걸 사실 알고 있는데.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걸 주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적어도 버리는 고통은 주지 말아야지. 엄마도 아빠도 사실 엄청 슬펐던 걸 알아. 미안했던 걸 알아. 형은 그러지 마. 겨우 나 같은 거 때문에 슬프고 미안해하지 마. 그런 걸 주고 싶었던 게 아니야.

세상에 막 태어나 깨끗한 채로 처음 만난 사람이 형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겨울이가 부럽다. 겨울이가 밉다. 미워해서 미안. 그래도 미워. 다음 생 같은 건 없어야 된다고 한 말 취소할게요. 다시 태어나도 좋으니까, 대신 꼭 겨울이로 태어나게 해 주세요.

하얗고 밝고 깨끗하고 사랑스러운. 

형의 사랑을 시험하고 넓은 세계를 좁히는, 끝까지 형의 강아지가 되고 싶다고 거짓말이나 하는 까만 고양이 수인이 아니라

주는 사랑에 만족하고 산책을 좋아하는……. 천사 같은 강아지로요. 

 

 

˚₊* ✶⋆ (=🝦 ﻌ 🝦=)‧˚✶₊* ⋆

 

 

"저희도 소식 들어오면 바로 연락 드릴게요. 힘드시겠지만 조금이라도 주무세요...... 정말 몸 상해요."

 

 

성찬은 고개를 푹 숙였다.

시체처럼 누워있다가 수인 보호 센터 직원에게 연락을 받았다. 최근 구조한 수인에게 성찬의 묘사와 비슷한 검은 고양이 수인 얘기를 들었다는 거였다. 포털에 장소 등록이 된 수인 전문 시설은 전국에 여섯 군데.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시설'은 그런 곳이 아니라고 했다. 성찬은 보호 센터 직원과 서리가 낀 폐공장이며 타는 냄새가 나는 컨테이너 단지를 돌았다. 거진 범죄 단체죠. 피싱같은 허접한 것도 있고, 진짜 인신매매도 하고, 마약 유통도 하고, 성매매도 해요. 수인들은 다 써먹다 버리는 거예요. 미등록 수인은 도망갈 곳도 없는데 얘들 입장에서 써먹기 얼마나 편하겠어요.

원빈아. 원빈아. 성찬은 겁도 없이 눈이 돌아 폐공장을 정신없이 들쑤시고 다니다 한 남자에게 멱살을 잡혔다. 직원이 신분을 밝히고 보호자가 있는 검은 고양이 수인을 찾는다고 말하자 남자가 가슴을 팍 밀쳤다. 별, 씹. 이름이 뭔데. 이름이 뭐냐니. 당연히...... 성찬은 분통이 터져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박원빈'은 우리 할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인데. 

박원빈 전에 그 애의 이름은 뭐였지. 사람들이 헛웃음을 치자 성찬이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매달렸다. 눈이 엄청 크고, 삐쩍 말랐어요. 키는 175cm정도. 새까맣고 귀 밑까지 오는 머리에, 말을 천천히 하고.......

끌어안을 땐 매달리듯 빈틈 없이 몸을 맞댄다. 통잠을 자지 못한다. 몸에 알 수 없는 상처 자국이 많다. 불안할 땐 눈을 감고 손톱을 물어뜯는다. 김치볶음밥을 좋아한다. 동물의 숲을 좋아한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물이 줄줄 새는 컵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좋아한다. 온 우주에서 나를 가장 믿고 사랑한다.

나 진짜 병신새끼네. 성찬은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쥐었다.

 

하루종일 서울경기 외곽을 돌아다니다 보니 정말 몇 명의 검은 고양이 수인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수인이 맞나요? 하나같이 검은 머리에 눈이 크고 삐쩍 말랐지만 내 고양이는 아니었다. 성찬은 눈이 빨개져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이제야 원빈을 검은 고양이로 환원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고양이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고양이니까. 고양이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건 사실 모두 였다고.

집에 돌아온 성찬은 거실 바닥에 엎드려 헐떡였다. 없어. 없어. 온 세상을 뒤져도 없을 것 같아. 이 넓은 세상 어디를 뒤져도........ 

잠깐.

세상 어디를 뒤져도?

성찬은 번쩍하고 다시 눈을 떴다.

 

제발. 제발.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달렸다. 이가 달달 떨리며 서로 부딪힌다.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왜 여길 와볼 생각을 안 했지.

 

눈이 내린다. 시리도록 처절하게 하얀 12월의 눈이었다. 몸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성찬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뿌연 입김이 안개처럼 허공으로 퍼졌다.

할머니께서 사시던 2층짜리 주택은 큰아빠께서 상속받으셨다. 팔려고 내놓은 게 도통 나가질 않는다고 했었다. 성찬은 안광이 형형한 채로 높은 대문 담을 뛰어넘었다. 마른 몸이 눈이 얼은 돌바닥에 부딪혔다. 곧장 몸을 일으킨 성찬은 성큼성큼 현관문 앞으로 다가가 기억 속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린다. 아...... 손가락 끝이 찌릿찌릿했다. 

 

그래. 바깥 세상을 아무리 뒤져도 널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신발을 신은 채 가구가 전부 빠져버린 1층 곳곳의 문을 열어젖혔다. 집 안은 늘 따뜻했던 온기가 무색하게 소름끼치는 냉골이었다. 성찬은 입김을 뱉으며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왜냐면 내 고양이의 영역은

 

 

"원빈아......"

 

 

세상에 딱 두 곳뿐이니까.

 

성찬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찾았다. 내 고양이.

 

원빈은 티셔츠 차림으로 거실 맨바닥에 누워있었다. 성찬은 고개를 숙여 얼음장 같은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온 세상이 이렇게 추운데, 이 집도 이렇게 차갑게 변했는데, 너도 이렇게 얼어버렸는데…….

 

 

"고양이로 있지. 고양이로 있지. 바보야. 춥잖아. 배고팠을 거 아냐. 고양이로 있지. 고양이로 있지......"

 

 

창백하게 굳어있던 원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겨우겨우 숨을 내쉴때마다 저 깊은 안에서 무언가 텅텅거리면서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마치 나인줄 알았던.

나 그 자체인줄만 알았던.

파편같이 날카롭고 깊이 박힌 것들이, 영원처럼 삶에 머물 줄 알았던 것들이 녹아내린다.

 

 

“약, 약속……"

 

 

약속했으니까. 사람으로 살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리고 또, 내가 그새 늙어버릴까봐. 형보다 훌쩍 나이가 든 채로 죽게 될까봐. 고양이의 시간은 인간보다 빨리 흘러버리니까. 

성찬은 흐느끼며 원빈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늦어서 미안해. 그래도 이제 더는 늦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길을 헤매봤자 니가 지켜주고 있는 우주고 세상이잖아.

 

 

"사랑해......."

 

 

두 입술이 포개졌다. 그러자 비로소 모든 게 완전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평생을 기다려온 꿈을 만난 것처럼.

 

 

˚₊* ✶⋆ (=🝦 ﻌ 🝦=)‧˚✶₊* ⋆

 

 

"무서워?"

 

 

원빈의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물었다. 원빈이 고개를 저었다. 공들여 말렸는데도 원빈의 머리끝엔 아직 물기가 남아있었다. 성찬의 머리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얀 얼굴 위로 누군가 정성스럽게 그려놓은 눈, 코, 입술이 죄다 새빨갰다. 

원빈이 두 팔을 뻗어 성찬의 목을 끌어안았다. 성찬은 더 말라버린 원빈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게 못내 속상해서 결국 또 어깨가 들썩인다. 울지 마. 원빈이 웃었다. 그리고 다시 짠 맛이 나는 입맞춤. 성찬의 혀가 원빈의 입 안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미 열려있는 문이라, 두드려 달라고 노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약속해. 아프면..."

"......"

"아프면 참지 말고 아프다고 말하는 거야. 좋으면 좋다고 말하는 거야. 아무것도 안 참는 거야. 많이 안아주는 거야. 예쁘면 예쁘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을 땐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거야."

"응......"

 

 

내가 너에게 알려주고 싶은 사랑. 내가 너와 하고 싶은 사랑. 내가 너에게 주고 싶은 사랑. 

원빈은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원빈은 성찬이 말하면 그게 뭐든 진짜라고 믿어버린다. 그게 천성인지 의지인지는 모른다. 뭐가 옳고 그른지, 어떤 게 버릇 없는 행동이고 칭찬받을 일인지, 수치스러운 것은 또 부끄러운 것은 무엇인지, 무엇이 좋고 사랑스러운 것인지. 모든 기준점을 한 사람에게 온전히 일임하는 우주. 

그래. 어떤 사랑은 우주가 되는 일이다. 

 

 

원빈아.

 

네가 산책하고 싶지 않다면, 너의 하나뿐인 세계인 내가 더 커질게.

 

온 세상이 너의 영역이 될 수 있도록. 니가 지켜 마땅한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널 닮아 예쁘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것들로만 채울게. 

 

사랑은 날 바꾸는 게 아니라 더 넓어지게 하는 것 같아. 나의 치졸함과 오만과 편협은 더 큰 우주에 잡아먹힌다. 

 

 

"아......"

 

 

마른 몸은 손대는 대로 자국이 남았다. 성찬은 출처 모를 흉터들 위로 꼼꼼히 입술을 내렸다. 원빈이 더운 숨을 뱉으며 몸을 뒤척인다. 성찬은 원빈의 양손에 깍지를 끼고 원빈과 눈을 맞췄다. 원빈의 날숨을, 심장 소리를, 바스락대는 몸짓과 눈물을, 온 생에 걸친 기다림의 해방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이토록 뜨거운 고양. 그리고 이토록 다정한 하강.

원빈은 성찬을 꽉 끌어안고 생각했다. 형을 안으면 우주를 끌어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기쁘기도 외롭기도 황홀하기도 따뜻하기도 슬프기도 한 느낌. 나의 하나뿐인 우주가 형이라 다행이야.

 

 

"사랑해."

"응…...."

"사랑해."

"나도 사랑해…..."

 

 

혀가 다시 얽혔다. 성찬은 원빈의 볼을 감싸고 속삭였다. 못 알아들을 수 없도록. 오해할 수 없도록. 더는 눈 감을 필요 없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우주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까맣고 반짝이는 눈이 성찬을 담았다. 사랑에 찬란히 젖은 눈이었다.

 

 

검은 고양이는 부정과 저주와 액운을 상징하지만 사실 생명을 수호하고 운명을 관장하는 영적인 존재다.

그러니까, 온 우주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쯤은 헷갈리지 않고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박원빈은 정성찬의 우주에 사는 유일한 고양이. 

 

 

 

내 고양이는 산책을 하지 않고

 

 

 

마치 우주를 보는 것처럼 나를 본다.

 

 

 

 

 

 

 

 

고양이는 산책을 하지 않는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