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끔뻐끔
by. 아마네
성찬의 집엔 조그만 어항이 있다. 그 속엔 금붕어 한 마리가 살고 있다. 등은 태양 볕 많이 받은 주황색이며, 배로 갈수록 노래지다 끄트머리 가서야 간신히 하얘지는 애다.
원빈은 심심하면 금붕어와 내기를 했다.
첫 번째로 한 것은 눈싸움이다. 셋, 둘, 하나. 카운트 땡과 동시에 원빈의 커다란 눈이 딱 금붕어 똥만큼 더 커진다. 이길 거야. 오늘은 꼭 이겨서 네 눈 찔러버릴 거야. 부릅뜬 눈에 기세가 대단하다. 하지만 장군과도 같은 이 아우라는 몇 초 안 가 푹 꺾여버리고야 만다. 아우, 눈 뻑뻑해. 기브업친 패배자가 눈 꽉 감고 찬장으로 달려간다.
가는 도중엔 꼭 식탁 끝에 발가락이 걸린다. 아악. 입에선 비명이 나오고 눈에선 눈물이 찔끔 흐른다. 이 찌릿한 고통은 몇 번을 겪어도 적응할 수가 없다. 눈싸움 지는 거엔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는데... 이건 언제쯤 괜찮아질는지. 다섯 개 고이 붙은 인공눈물 찾아다 뻑뻑하고도 습기 찬 눈알에 퍼부으면 원빈의 백전백패는 완성된다. 오늘도 인정이다. 그래, 내가 졌어. 하지만 다음번엔 꼭 내가 이길 거야. 속 촉촉해진 원빈의 눈꺼풀이 부들부들, 백전백승 금붕어에 대한 질투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사실 금붕어는 눈꺼풀이 없다.
두 번째로 한 것은 물속에서 숨 오래 참기다. 승부란 원래 같은 위치 같은 조건에서 행해져야 공정하다 할 수 있는 법. 원빈도 당장 금붕어 떠다니고 있는 이 어항에 얼굴 집어넣고 카운트 땡 하고 싶지만 무릎 꿇고 혼난 전적이 있어 그건 불가능했다. 대신으로 대야에다 물 가득 떠다 놓고 얼굴 다이빙하고 싶지만 손 들고 벌선 전적이 있어 그것도 불가능했다. 대야 때는 무려 카펫도 방바닥도 바지 적삼도 다 적셨기 때문에... 더구나 성찬이 얼굴도 눈물로 다 적셨기 때문에. 원빈은 얌전히 눈만 감았다. 눈꺼풀을 닫고 콧구멍을 꽈악 잡고 입을 꼬옥 막고 숨을 허업 참았다. 이길 거야. 오늘은 꼭 이겨서 네 아가미 뜯어버릴 거야. 꽉 감겨 주름 잡힌 눈에 의지가 가득하다.
하지만 장비와도 같은 이 투지는 몇 초 안 가 푸시시... 사라지고야 만다. 아우, 콜록콜록. 못 하겠다. 아웅, 공기. 아웅, 산소. 사방팔방 널린 숨 양껏 들이마시며 판판한 가슴을 콩콩 두들기면 원빈의 백전백패가 또 완성된다. 오늘도 인정이다. 그래, 내가 졌어. 하지만 다음번엔 꼭 내가 이길 거야. 어질어질 들어간 산소에 비례해 어질어질, 이산화탄소가 빠져나온다.
...원래 금붕어는 물에서 사는 생물이다.
음음, 세 번째로 한 것은 오래 헤엄치기다. 금붕어는 꼬리를 흔들고 위아래 지느러미를 흔들고 원빈은 따라 허리를 흔들흔들 조그만 엉덩이를 흔들흔들했다. 이건 하고 싶은데 얼마간 금지당했다. 무리하게 흔들다 삐끗해서... 마사지 받으며 쓴소리를 한 바가지나 들었기 때문이다. 넘실거리는 물 따라, 살랑이는 그라데이션 꼬리를 따라 원빈의 눈동자가 이리 흔들 저리 흔들거렸다. 그래도 이건 아직 십 전 십 패였다. 인정? 개나 주라지. 승부는 보류였다. 그래도 마지막 대사는 똑같다. 다음번엔 꼭 내가 이길 거야. 박박 갈리는 이가 곧 흔들릴 것만 같다.
...애초에 헤엄을 안 치면 가라앉아 죽을 거다, 금붕어는.
잠깐만. 누가 그러던데. 금붕어 기억력은 3초라며. 이기고 싶으면 금붕어랑 기억력 내기를 하면 되지 않아? 라는 소릴 듣는다면... 원빈은 당장 코부터 킁, 찰 것이다. 몇 번 폴짝폴짝 뛰어 준비한 뒤 그를 향해 잽싸게 돌주먹 죽빵을 날려버릴 것이다. 그리곤 소리치겠지. 그건 나한테 너무 유리하잖아. 나는 똑똑하고, 쟤는 멍청하고. 내가 이길 게 당연한데 어떻게 내기를 해. 너 바보야?
원빈은 간단히 이길 수 있는 거로는 결투하기 싫었다. 싱거운 건 딱 질색이었다. 비등비등하게 가다 끝에 다다라서야 겨우 이길 수 있는, 그런 아찔한 내기만 하고 싶었다. 왜냐고? 그게 쓰릴 있고, 더 성취감 있으니까 당연한 거였다. 맞다, 이참에 하나 더. 금붕어 기억력은 3초만큼 짧지도 않았다! 적어도 3개월은 이상이었다. 원빈이 나무위키에서 직접 봤다. 그러니까 3초란 뭐야. 금붕어와, 금붕어와 승부를 겨루는 나에 대한 모독이라는 거지. 응응. 원빈은절대로 인정 못 했다.
그럼 박원빈이 생각하는 비등비등한 승부란?
이제부터 소개하도록 하겠다. 바로바로...
네 번째로 한 밥 더 빨리 먹기다. 이건 아직 금붕어 쪽이 아슬아슬하게 이기고 있었다. 참고로 딱 한 번 했으니 추세랄 것도 없다. 내용은 바보 금붕어가 아직 발견치 못한 먹이 한 알이 먼저 걔 입으로 들어갈지, 주먹만 한 밥그릇 속 마지막 밥알 한 톨이 먼저 박원빈 입으로 들어갈지에 대한 것. 둘 다 볼은 빵빵. 배도 빵빵. 마지막 좁쌀을 남겨두고 열심히 헤엄치고 열심히 씹어대는 긴장감 맥스의 상황 속에서... 너 뭐해? 성찬이 원빈을 톡 치면, 원빈은 캑캑댔고 금붕어는 뻐끔댔다. 아차! 돌아보니 마지막 금붕어 밥이 이미 금붕어의 입으로 들어간 뒤였다.
분노에 가득 찬 원빈이 아악, 소리 지르며 성찬의 가슴을 퍽퍽 때린다. 너 때문에 다 망했어. 버둥거리는 발은 헤엄치듯 공중을 나부꼈다. 하지만 이미 진 승부 어쩌겠는가? 남겨진 제 몫의 한 알마저 입에 넣고 원빈은 이를 악악 움직였다. 깨끗이 비워낸 밥그릇 싱크대에 콩, 올리고 여전히 같은 대사를 외쳤다. 하지만 다음번엔 꼭 내가 이길 거야!
...그리고 그날은 단단히 체했다.
한참 주물러도 메슥거린다는 원빈에 성찬은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 안 달래주고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어디 가? 댕그란 눈 뜨고 활짝 열린 문만 바라보고 있으면... 혼자 들어갔던 성찬은 이내 바늘 하나를 달고 다시 돌아와 원빈을 놀라게 했다. 손 줘 봐. 말하는 어조엔 의지가 가득했다. 금붕어와 내기하던 원빈 저리가라였다. 손은 왜? 원빈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가 하마터면 바늘에 뚫릴 뻔했다. 마음은 놀라 졸도할 뻔했다. 뭐 하는 거야! 엄지 강탈하려던 성찬을 찢어질 듯 째리면… 성찬은 이렇게라도 해야지 너 체한 거 내려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단 말을 했다. 약은 원빈에게 듣지 않으니 민간요법이라도 써야겠다나 뭐라나.
피 보는 게 싫었던 원빈은 싫다 울며불며 지랄부터 하려고 했다. 근데 바늘 잡은 성찬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손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보는 건 못 했다. 아니, 내 손가락 뚫리는 걸 두 눈 똑바로 뜨고 어떻게 보는데! 원빈은 겨우겨우 눈을 감았고, 손이 따였고, 비명을 질렀고, 저 향해 무수히 뻐끔댔던 금붕어의 입을 떠올렸다. 짜증에 이가 까득까득 갈렸다. 금붕어. 금붕어. 금붕어. 내가 보지 않는 이 순간에도 뻐끔대고 있을 금붕어. 내 언젠간 꼭 네 멱도 따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참으로 입이 썼다. 이건 전부 금붕어의 탓이다....
밤에는 유독 잠이 오지 않았다. 뻥 뚫린 상처 위 성찬이 꼭꼭 붙여준 밴드를 한참 만지작거렸는데도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기만 했다. 하는 수 없이 원빈은 슬쩍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늘 그렇듯 어항 앞으로 가, 자지도 않고 둥둥 떠다니고 있는 놈의 눈을 마주했다. 뻐끔대는 이 주둥아리가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보지 않고는 직성도 안 풀리고, 영원히 잠도 못 잘 것 같았다. 뻐끔뻐끔. 뻐끔뻐끔. 얘는 도대체 얼마나 뻐끔댈까. 원빈은 문득 궁금해졌다.
당장 성찬의 패드를 들고 와 금붕어의 수명에 대해 검색해 봤다. 일반적으로 일 년에서 삼 년이란다. 적절한 환경이면 십 년도 더 살 수 있다는데, 성찬의 집 이 좁은 어항은 절대로 적절한 공간이 아닐 테니 바로 논외였다. 수족관산 금붕어들은 체형이 개량 당한 종이 많으므로 수명이 짧은 거란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막줄을 읽고 원빈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이 정도면 비슷하군. 좋아. 아주 좋아. 입꼬리는 이미 비싯비싯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원빈은 키득댔다. 재밌는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새로운 내기를 발견했다!
다섯번째 승부가 시작 전 마지막 종을 울린다. 스타트 라인에 선 주자는 원빈, 그리고 밖에선 헤엄도 못 치는 멍청이 금붕어 딱 둘이다. 주제는 뻐끔대기다. 룰도 간단하다. 먼저 그만두는 애가 지는 게임이다. 무엇을? 뻐끔거리는 걸!
어라라. 승부란 원래 같은 위치 같은 조건에서 행해져야 공정하다고 했던 게 누구더라. 공정하다고 하기엔 지금 배경이 너무 다른 것 같은데. 응응, 그것도 맞는 소리다. 금붕어는 여전히 물 속이고, 원빈은 여전히 공기 속이니까. 하지만 나머지 조건이 같으니 하나 정도는 좀 봐줬으면 좋겠다. 원빈도 금붕어도 개량된 삶이고 남은 수명도 거의 비슷하니까. 대충 흘겨보면 꽤 비슷하다… 하고 넘어갈 수 있지 않겠어?
앞을 보고 있는지 옆을 보고 있는지 위를 보고 있는지 뒤를 보고 있는지 아님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지. 도통 모르겠는 전방향 미소어 금붕어를 향해 원빈이 소리친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꼭 이길 거야. 서로 봐주는 건 없어. 너도 진지하게 임하도록 해. 나도 최선을 다해 이기려 할 테니까. 왜냐면 이건, 내가 늘 질투에 가득 차 말하는. 다음 번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단판 승부니까.
셋. 둘. 하나.
우리가 눈을 맞추고, 카운트가 땡 울리면
내기는 시작이야.
유리벽 속 금붕어가 답을 한다.
뻐끔뻐끔!
성찬의 집엔 조그만 기계가 있다. 사람처럼 생겼고 사람 말을 하고 사람처럼 밥 먹고 사람처럼 잔다. 사람처럼 이름이 있고 사람처럼 숨을 쉬고 사람처럼 심장이 뛰고 사람처럼 달리고 넘어질 수 있다.
성찬은 원빈이라고 부른다.
세월의 힘으로, 기술의 발전으로 차곡차곡 쌓아놨던 모든 것들이… 폭발할 때. 팡팡 터져대는 광경 입 헤 벌리고 바라보다 놓은 넋을 겨우 다시 부여잡았을 때. 성찬은 하고많은 애들 중 하필 원빈의 손을 잡았더랬다. 비명인지 환호인지 모를 아우성 속을 뚫으며... 원빈과 함께 달렸다. 아무리 운동을 하고 연구원 중 톱으로 몸이 좋다지만 오래 달리니 숨이 찼다. 혼자 달리는 것도 아니라 더 쉽게 지쳤다. 얼마 못 가 주저앉은 성찬에게로 원빈은 물었다. 너른 품 부서지도록 세게 올라타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살랑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왜 나를 택했어?”
다른 말로는 왜 하필 나야? 였다.
솔직히 너는 누구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등을 물을 줄 알았는데... 아니라 김 팍 샜던 게 사실이다. 물론 이상한 질문은 아니었다. 충분히 나올 법했다. 그도 그럴 게 달려 나오기 전, 원빈의 주변엔 완벽한 애들이 좍 깔려 있었고 원빈은 곧 없어질 불량품 하나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멋이라곤 하나도 없는 꼬질꼬질 상태로 성찬은 쩝 소리부터 냈다. 왜 너를 택했냐니. 왜 하필 너냐니. 그건 정성찬도 몰랐다. 그냥 보이는 게 박원빈이었고, 그래서 보이는 박원빈을 데리고 나왔다. 정말 그게 전부였다! 애초에 원빈을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성찬은 원빈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폭발 속에서도 단번에 원빈을 찾을 수 있었고, 걔만 콕 찝었고, 당겨 미치도록 달려온 것이었다. 그니까아. 하고 많은 성공작 사이 몰래 끼워져 있던 실패작을... 굳이골라 데려온 건 정성찬의 의지라 이거다. 하지만 이 장황한 스토리를 이 힘든 순간에 조잘조잘 다 뿔고 싶지는 않았다. 얜 말해도 아마 이해도 못 할 거고.
그래서 성찬은, 진실 대신 개소리 말하기를 택했다. 후에 어떤 복수 당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왜 너냐고? 어어, 그러니까
“입술이 통통해서....”
인데.
원빈은 한동안 성찬과 대화할 때 입 사이로 입술을 쏙 집어넣고 말을 했다. 틀니 없는 할아버지 같았다.
어... 어쨌든 진실. 모든 걸 잃은 정성찬에게 남은 건 박원빈 딱 하나라는 거. 좋은 게 좋은 거고 잃은 게 잃은 거라… 성찬은 남겨진 원빈 달랑 하나만을 데리고 고향별로 돌아오는 걸 택했다. 먼지 가득 쌓인 집 문을 발칵 열며 여기가 이제부터 우리 집이야, 하고 온갖 잡동사니들과 박원빈을 상견례 시켰다.
전부 정리된 물건, 전부 새하얀 벽, 전부 소독된 것들만 보던 원빈에게 전부 정리 안 된 물건, 여기저기 노란 벽, 찌꺼기 더덕더덕 붙어있는 것들은 정말이지 충격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원빈은 아수라장 집을 빙 한번 둘러봤다. 그리고 고대로 뒤돌아 집을 나가려고 했다...가 정성찬한테 바짓가랑이가 잡혔다.
조만간 벗겨질 것 같은 천 쪼가리 붙들며 성찬은 애원했다. 지금 네가 갈 데가 어디 있어. 그냥 여기서 살아. 조금이라도 살아봐, 응?
갈 데가 어디 있어... 그 말에 원빈은 멈칫했다. 눈은 고민으로 빠져들었다. 조그만 머리 도로로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한참의 정적 끝에 원빈에게서 알았다는 대답이 나오고, 성찬은 쾌재를 불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내 말이 백번 천번은 맞았던 거지? 그렇지?
글쎄다.... 어, 어쨌든 또 진실. 앙상한 가시 다리가 그렇게 꾀죄죄한 정성찬 집으로 입성했다. 성찬은 안도에 맥도 다리 힘도 쫙 풀려 문지방 위에 주저앉았다. 아차차, 문지방 위에 앉으면 복 달아난다던데. 궁둥짝 쪼끔 옮겨 찬 바닥 위에 앉았다가 놀라 다시 일어났다. 뭐 벌레라도 봤냐고? 아니, 그냥 바닥 찬 데 앉으면 치질 걸린다는 생각이 갑작스럽게 떠올라 도로 일어난 거였다.... 놀란 성찬은 다시 문지방 위로 자기 궁둥일 컴백시켰다. 혹시 원빈이 이 헛짓거리를 보진 않았을까... 가자미눈 뜨고 거실 쪽 흘끔거렸는데 다행히 못 본 듯싶었다. 에휴휴. 천만의 다행. 박원빈 데리고 온 것만큼이나 만만의 다행.
성찬의 엉덩쑈가 진행되는 동안... 원빈은 제 자리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냥 앉기엔 바닥이 너무 더러웠다. 원빈이 입고 있던 허연 바지와는 상성이 최악이었다. 앉을 데가 없어... 진짜 없어... 누구 듣는 사람도 없는데 원빈은 한참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당장 앉지 않으면 다리가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한 다섯 번 정도 겪어봤는데 다시 느끼고 싶진 않은 고통이었다. 원빈은 하는 수 없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애초에 들은 것도 하나밖에 없었지만... 그냥 꺼내기 싫어 한참을 뭉그적거렸다. 이잉.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내 엉덩이가 더 소중하니까. 공중에 나부낀 말이 곧 하늘색 손수건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촥 펼쳐진 손수건은 거실 중앙에 놓였다. 그 위에는 원빈의 엉덩이가 놓였다. 걔는 박원빈 꼬질꼬질 얼굴에서 꼬질꼬질 숯 검댕이를 닦아냈던 하늘하늘 손수건이었다. 매일 정성찬 뒷주머니에 꽂혀 엉덩이와 뽀뽀를 했던 손수건이기도 했고, 이젠 박원빈 엉덩이와 나부끼는 먼지에 양쪽 뺨 다 내어준 손수건이기도 했다. 끄트머리엔 앙증맞게 주황색 물고기 두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덮쳐 오는 먼지 더미에 물고기들이 기침하는 것 같다. 뻐끔뻐끔. 뻐끔뻐끔. 살려줘! 원빈은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물고기 먼지 사태에 원빈의 양심이 콕콕 찔리는 동안 성찬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창문을 열고 바닥을 밀고 밥을 올리고 닦고 또 닦으며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처럼 굴었다. 그치만 도륵도륵 정성찬 움직임에 맞춰 도륵도륵 굴러가는 박원빈 눈동자가 더 바빴다. 저기. 원빈은 조그맣게 성찬을 불렀고... 다시 저기. 조금 더 크게 성찬을 불렀고... 저기이. 이번엔 더더 크게, 말꼬리까지 늘려서 성찬을 불렀다. 성찬은 저 불렀다는 걸 세 번째 저기에서야 겨우 알았다. 대답은 좀 퉁명스럽게 했다. 허리에 손까지 올린 채로... 성찬이 선포한다.
“난 저기가 아니고 성찬이야.”
...있잖아. 있잖아 말고 성찬이라고, 정성찬. 원빈은 그때 처음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아까 집 꼬락서니 보고도 눈만 굴렸지 한숨은 안 쉬었는데.... 어어? 심지어 두 번이나 쉬었다. 정성찬은 그냥 자기 이름 부르라 한 죄밖에 없는 것을! 억울해진 정성찬이 볼에 바람 한가득 불어넣은 채 뿡뿡대면 개미 똥구멍만 한 목소리가 다시 거실 가운데를 파고들었다. 그래 정... 성찬. 응. 성찬아. 응. 저거 넘치는데, 그대로 놔둬도 괜찮은 거야? 매우 안 좋은 냄새가 나. 우리가 연구소에서 나올 때랑 좀 비슷한....
울퉁불퉁 박원빈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성찬은 바로 경악했다. 새된 비명이 절로 나왔다. 꺅! 눈 깜짝할 새에 국이 넘치고 있었다. 넘치다 못해 타고 있었다! 으아앙....
그날은 국이 타고 국 담은 냄비가 타고 정성찬 속은 아주 그냥 새까맣게 타버린 날이 됐다. 맛없는 국 억지로 떠먹던 원빈이 역시 나, 나는 나갈래... 중얼거렸다. 얼마나 별로였으면 턱에 호두가 다 생겨 있었다. 성찬은 억지 세모눈 뜨고 원빈을 바짝 째렸다. 팩폭이 이어진다. 너 지금 갈 데 있어? 그 말에 원빈이 쪼그라든다. ...아니이. 그러면 그런 말 하면 돼, 안돼. 아, 안돼.... 알겠으면 얌전히 밥 먹어. 남기지 말고! ...웅. ...근데 이거는 좀 남기고 싶어. 영양식보다도 맛이 없는 것 같아. 어쭈, 너 그거 말고 다른 걸 먹어 보기는 했어? ...아니이. 그럼 그냥 주는 대로 먹어! 네에.... ...근데 나 내일도 이거 먹어? 왜, 싫어? ...응. 역시 나는, 나는 나갈래....
가 되겠냐고. 애초에 박원빈 나간다고 정성찬이 보내는 주겠냐고. 성찬은 일어나자마자 탄 냄비로 토도도 달려가 이마에 내 천자부터 만들고 보는 원빈 때문에 정말이지 골이 띵했다. 침 꼴딱꼴딱 삼키면서 저 쳐다보는데 뭐 이걸 국에 넣고 끓일 수도 없고. 결국 내려진 건 특단의 조치다. 아, 별건 아니고…
그냥 치킨 시켰다. 싱겁지? 근데 박원빈이 이걸 엄청 좋아했다. 양념 덕지덕지 묻은 떡 하나 집어먹자마자 통탄의 눈물을 펑펑 흘렸다, 원빈은. 왜 이걸 이제야 먹게 해줬냐. 불공평하다. 난 맨날 똑같은 것만 먹고 살았는데... 억울하다, 하며 성찬을 먼지 나도록 때렸다. 성찬은 이거보다 맛있는 거 더 많은데... 너 나랑 먹을 때마다 이렇게 울 거야? 주둥이를 나불댔다 기어코 몇 대를 더 맞았다. 얼마 먹지도 못할 거 작은 볼 터지도록 밀어 넣는 모습이 웃겨 킥킥대다 꼴에 엉덩이까지 까였다. 그나마 살이 있어서 좀 괜찮았지만… 그 전에 맞은 가슴은 많이 아팠다. 진짜로 멍든 것도 아닌데… 왜였을까? 쿡쿡 쑤셔오는 마음 따라 성찬은 빵빵해진 원빈의 볼을 쿡쿡 찔러댔다.
다시.
성찬의 집엔 조그만 기계가 있다. 사람처럼 생겼고 사람 말을 하고 사람처럼 밥 먹고 사람처럼 잔다.
성찬은... 뭐라고 부르지를 못했다. 그냥 야, 저기, 너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그래서 고민이 생겼다. 데리고 왔으니 책임은 져야 하는데. 성찬은 원빈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심지어 이름도 없었다. 고민이 생긴 가장 큰 이유다. 그럼 이제껏 불러왔던 원빈, 박원빈은 뭐야? 뭐기는. 차후에 지어진 이름이다. 원래는 뭐라 통칭했더라.... 에라이, 모르겠다. 기억도 안 나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어쨌든 지금 이름은 원빈이니 원빈은 원빈이 되겠다.
원빈이라는 이름은 원빈 스스로 정했다.
성찬은 다른 건 다 꼴리는 대로, 원하는 대로 쉽게 쉽게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름 하나를 갖고 일주일 동안 끙끙댔다. 아침 햇살 받으며 계란 후라이를 타닥타닥 튀길 때도, 방금 건조기서 나온 빨랫감을 하나하나 접을 때도, 다 튼 원빈의 손에 쭈물쭈물 핸드크림을 발라줄 때도, 커어커어 잠들기 전 달과 인사할 때도... 원빈의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아 진짜 뭐로 하지? 뭐로 해야 잘 지었다고 천년만년 소문이 나지? 잘 굴러간다 정평이 나 있던 성찬의 머리이건만... 이런 쉬운 일에는 정작 꿈쩍도 하지 않아 괴로웠다. 바보라도 된 기분이었다.
보다 못해 답답해진 원빈이 먼저 성찬에게 운을 띄웠다. 이름이란 게 꼭 있어야 해? 그냥 원래대로 부르면 되잖아. 그 말엔 성찬이 화를 냈다.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콩알같이 생긴 게... 넌 조용히 하고 이나 닦고 나와. 내일 너 좋아하는 젤리 사러 가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빨리. ...어쭈, 빨리 안 들어가? 원빈의 엉덩일 톡톡 두드리며 화장실 입장만 재촉했다. 원빈은 마지못해 들어가며 꿍얼거렸다. ...지, 지을 거면 잘생긴 이름으로 지어주길 바라. 나 못생긴 건 싫어....
잘생긴 이름? 성찬은 듣자마자 눈을 번뜩였다.
이튿날 내민 패드엔 잘생긴 얼굴들이 한가득이었다. 아니, 잘생긴 얼굴 말고 잘생긴 이름이라니까... 원빈이 어리둥절 쳐다보건 말건 성찬은 신경도 안 쓰고 스크롤을 쓱쓱 넘겼다. 설명이 이어졌다. 이 사람은 강동원. 이 사람은 공유. 이 사람은 현빈. 이 사람은 원빈. 자기주장 강한 얼굴들이 기다란 손가락 따라 빠르게 지나갔다. 원빈은 고양이 물고기 잡아채는 듯한 잽쌈으로 하나를 콕 집었다. 성찬이 방황하던 원빈을 콕 집었던 것처럼, 이번엔 원빈이 원빈 씨를 콕 집었다. 나 이 얼굴이 좋은데. 이, 이름이 뭐라고 했지. ...원빈. 원빈? 응, 원빈. 그럼 나, 나도 똑같이.... 원빈으로? 응, 그거.
...그 결과 원빈의 이름은 원빈이 됐다.
왜... 별로야? 커다란 눈 끔뻑이며 조심스레 묻는 원빈에 성찬은 쌍 엄지 추켜세우며 아니? 최고야, 답을 해줬다. 원빈 씨도 잘생겼고 원빈이도 잘생겼고. 원빈 씨 이름도 잘생겼고 우리 원빈이 이름도 잘생길 예정이고. 그러니 딱 좋은 이름이었다. 원빈 씨의 본명이 따로 있고 그게 김도진이란 건...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원빈의 마음에 들면 그걸로 그만이니까. 어쩌다 틀린 애니메이션서 깜찍이 체리 오빠의 이름이 도진인 걸 듣고 잘생긴 이름이다... 박원빈이 중얼거린 거 정성찬은 절대 못 들었다. 뜨끔한 심장은 방 들어가 혼자 몰래 쓸어내렸다. …그냥 도진이로 할 걸 그랬나?
이름에 적응하는 건 예상외로 얼마 안 걸렸다. 정성찬이 하도 박원빈 박원빈거려서 원빈도 지가 박원빈이란 거 하나는 끝내주게 잘 알게 됐다. 아침에는 박원빈 일어나. 아침 먹기 전에는 박원빈 밥 먹어. 점심 되고 나서는 박원빈 햇빛 쐬자. 점심 먹고 나서는 박원빈 낮잠 자자. 저녁 먹기 전에는 박원빈 산책하러 가게 옷 입어. 저녁 먹고 나서는 박원빈 티비 볼 거야? 티비 보다 졸 때는 박원빈 졸려? 원빈이 고개 끄덕이면 원빈아, 자자 이제. 누워서는 잘 자, 원빈... 해줘서. 금방 외웠다, 원빈도.
여담이지만 원빈의 성 박은 성찬이 지어줬다. 김이박최정. 제일 흔한 성에 더불어 성찬의 성 정까지. 다섯 개 중 어감 가장 좋았던 게 박원빈이라 원빈은 박원빈, 세 글자 이름을 가진 기계가 됐다. 박원빈. 박원빈. 박원빈. 완전한 이름을 부여받은 날... 원빈은 몇 번이고 자기 이름을 중얼거렸다. 성찬이 박원빈, 부를 때면 종종 피식거리며 고개도 끄덕였다. 음음, 마음에 드는 게로군. 일부 지분이 생긴 성찬도 원빈을 따라 키득거렸다. 원빈의 이름은 성찬과 원빈이 함께 만든 첫 번째 작품이다.
또... 다시.
성찬의 집엔 조그만 기계가 있다. 사람처럼 생겼고 사람 말을 하고 사람처럼 밥 먹고 사람처럼 잔다.
그리고 걔보다 더 조그만 물고기도 있다.
성찬은 원빈이 된 원빈과 둘이서. 단둘이서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줄 알았다. 근데 느닷없는 불청객이 등장했다. 말도 못 하고 뻐끔만 댈 줄 아는 똥쟁이 금붕어였다.
원빈은 고집이 세다. 하지만 세기만 하지 부리는 법은 없었다. 성찬이 사준 옷마다 촌스럽다, 이게 뭐냐, 옷이 좀 무늬가 있어야지 밋밋해가지고... 멋도 없다. 늘 통통한 입술로 두툼한 불평을 말하면서도 잘만 입고 다녔다. 아침에 그냥 더 자고 싶은데 굳이 깨워다 아침밥 먹이는 성찬에게 졸려, 깨우지 마, 아이 진짜 입맛 하나도 없다 했잖아. 늘 통통한 입술로 두툼한 불평을 말하면서도 숟가락 한가득 밥 떠다 계란 후라이에 케찹 찍어다 볼따구 속으로 꼭 밀어 넣었다. 그래서 성찬은 다 괜찮을 줄 알았다. 안 된다 으름장 놓으면 원빈도 안 된다 여길 줄 알았다. 흥은 좀 하겠지만... 따라줄 줄 알았다, 전부.
근데 아니었다! 갈등은 때아닌 물고기 앞에서 빚어졌다. 제철 맞은 붕어빵 열 개를 들고, 한 손엔 붕붕 흔들리는 박원빈 손을 들고 집 돌아가던 길이었다.
원빈의 발은 붕어빵 원형 앞에서 멈췄다. 붕어...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작을 금붕어 앞에서, 박원빈은 브레이크를 밟았다. 생애 두 번째로 본 물고기에게 모든 시선을 사로잡혔다. 홀딱 반한 얼굴이었다. 벌어진 입 새로 금방이라도 침이 똑, 떨어질 것 같았다. 성찬이 뭐해, 가자... 하는데도 원빈은 고개만 저었다. 그리고 고집을 부렸다. 이거 가져가자. 집에 데려가자. 나 이거... 성찬아, 나 이거. 닿지도 않을 손가락을 금붕어 위로 쿡쿡 눌러대며 간청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들어줄 생각 하나도 없던 성찬은 꽉 잡고 있던 원빈과의 손깍지부터 풀었다. 안돼. 부러 더 세게 말하며 단단한 얼굴을 했다. 왜 안돼? 안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싫어. 데려갈래. 된다고 할 때까지 나 여기 있을 거야. 어쭈... 그럼 너 여기 있어. 나 혼자 집 갈 테니까.
그러면 성찬은 원빈이 입 삐죽이면서도 털레털레 저를 따라올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원빈이 안 따라왔다는 게 되겠지. 원빈은 성찬의 등짝을 죽일 듯 노려보다 물고기 앞에 털퍼덕 앉아버렸다. 박원빈, 뭐해. 안 와? 정성찬 말 귓등으로 다 튕겨내며 알아듣지도 못할 물고기와 대화를 시작했다. 안녕. 나, 내 이름은 박원빈이다. 너 색깔이 굉장히 예뻐. 태양 같아. 금붕어 비늘결대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거꾸로 된 삼만 꾸준히 그려 나갔다. ...정성찬 신경 쓰이라고.
그래. 진짜 신경 쓰게 하는 데 도가 텄다, 박원빈은.
하는 수 없이 성찬도 원빈 옆에 쪼그려 앉았다. 으름장이 안 통하니 설득을 하려 했다. 박원빈, 난 너 하나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그런데 집에 어떻게 새로운 걸 들여. 응? 원빈아. 내 말 듣고 얼른 일어나. 너 물고기가 좋은 거면 차라리 인형을 사 줄게.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도 원빈은 싫다고만 칭얼거렸다. 살아있는 게 좋단다. 너 그럼 내가 하는 것처럼 얘 밥도 주고 물도 갈아주고 똥도 치워줄 거야? ...성찬이 너 내 똥 안 치워주잖아. 그리고 난 물 갈아줄 필요도 없는데. 나 알아서 잘 씻어. …야이씨,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다른 거는. 다른 건 너 다 할 수 있어? 박원빈 너 다 할 거야?
원빈은 웬일로 빠르게 고갤 끄덕였다. 보통은 조그만 대가리 갖고 한참을 생각하다 답변 내는데... 오늘만큼은 유독 빨랐다. 응, 나 다 할 수 있어. 내가 다 할 거야. 부루퉁 입술 더 뽀쪽 내밀고는 성찬의 손을 만지작댔다. 내가 얘 밥도 주고 물도 갈아주고 똥도 치워 줄게. ...박원빈 너 오늘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왜기는, 얘 데려가고 싶으니까 그러지.
“성찬이 너도 나를 데려왔잖아.”
그래서 나도 무언가를 데려오고 싶어. 너랑 똑같이. 나도 너와 같은 게 하고 싶어. 이름도 지어주고 싶고, 그걸 불러주고 싶어. 네가 나한테 해줬던 것처럼.... 안돼?
......돼.
그렇게 데려온 물고기는 총 아홉 마리가 됐다. 어라라. 따져 보면 붕어빵 열 마리에, 금붕어 한 마리까지 총 열한 마리여야 하지 않아? 안타깝지만 그새 두 마리가 준 이유는 오는 도중 붕어 하나씩 나눠 먹었기 때문이다. 물론 똥쟁이 금붕어 말고 모락모락 붕어빵. 성찬은 안 먹으려고 했는데 슈크림 베어 물었던 원빈이 나 이거 말고, 하며 팥 찾아 넘기는 통에 입에 욱여넣는 팔자가 됐다. 붕어빵 먹으면서 붕어를 키우겠다니, 박원빈 완전 잔인해.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 원빈은 붕어 없는 손으로 성찬의 엉덩이를 퍽 때렸다. 어찌나 아프던지 눈물이 찔끔 났다. 아이씨, 사람도 아닌 게 주먹 힘만 더럽게 세 진짜. 아, 사람이 아니라서 센 건가? ...어쨌든. 맞은 엉덩이가 너무 아렸다.
원빈은 집 도착과 동시에 성찬을 불렀다. 성찬아. 여기가 이제부터 우리 집이야. 성찬은 외투 걸면서 그럼 우리 집이지, 누구 집이야 답해줬다. 근데 원빈이 너 말고... 하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원빈이 부른 대상은 인간 정성찬 아닌 물고기 정성찬이었다. 똥쟁이 금붕어의 이름이 어느새 정성찬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식과 동시에 성찬은 뒷목부터 잡았다. 너, 너 지금 걔보고 뭐라고 했어? 성찬이라고 했어? 원빈은 참 쉽게도 응, 목소릴 냈다. 나 참 어이가 없다 못해 하늘 뚫고 올라가겠네. 왜 나랑 똑같은데. ...설마 성도 정이야? 그러면 이, 이거 이름 진짜 정성찬이야? 나랑 얘랑 같아? 왜? 왜? 비명 급으로 절규하면 원빈이 조소를 흘리며 답했다. 왜긴 왜야.
“입술이 통통해서....”
지. 누구도 나 입술 통통해서 데려왔다 했잖아. 그니까 쌤쌤인 거야. 통통의 쌤쌤. 그치이, 성찬아?
여기서 성찬이 입 떡 벌리고 허어대는 정성찬을 부르는 건지, 아님 입 떡 벌리고 뻐끔대는 정성찬을 부르는 건지는... 원빈만 알 것이었다. 어쨌든 그라데이션 금붕어 씨 이름은 성찬이 됐다. 성찬의 본체보다는 한참 작으므로, 굳이 따지자면 작은 성찬이었다. 성찬이 우겨도 울어도 지랄해도 소용없이 정성찬이었다. 덕분에 성찬은 뼈저리게 느끼고 뼈 아리게 알게 됐다. 박원빈은 고집이 세다. 아니, 고집이 미쳤다. 뻐끔뻐끔. 공기 방울 퐁퐁 솟아내는 붕어를 노려보며 성찬은 억울함을 퐁퐁 솟아냈다. 뻐끔뻐끔. 뻐끔뻐끔. 둘 다 소리는 없는 통에 박원빈한텐 닿지 않았다.
시간을 건너... 또다시.
성찬의 집엔 조그만 기계가 있다. 그보다 더 조그만 물고기도 있다. 물고기와 같은 이름 가진 사람은 덤이다.
뭐... 덤이라고 해도. 성찬은 원빈에 대해 하나, 둘 알아가기 시작했다. 원래 알던 건 사람처럼 생겼고 사람 말을 하고 사람처럼 밥 먹고 사람처럼 잔다는 거. 근래 알게 된 건 사람처럼 이름도 생겼고 사람처럼 고집도 세고 사람처럼 뒤끝도 길다는 거.
그리고 새로운 하나. 원빈은... 매운 걸 먹으면 뿔었다. 제가 키우는 금붕어 성찬이처럼 됐다. 얼굴은 타들어 가는 노을처럼 벌게졌고, 삼 인분 입술은 오 인분이 됐다. 물을 찾아 온종일 뻐끔거렸다.
원빈과 다르게 성찬은 매운 걸 제법 잘 먹었다. 자존심이 반 있기는 하지만 어디 가서 꿀릴 정도도 아니었다. 콧물 좀 흘리고 알알한 혀 녹이느라 아이스티 몇 번 빨아 마셔야 진정하기는 하는데… 어, 어쨌든. 맵찔이들 사이서 나 매운 거 잘 먹는다 떵떵거릴 수 있는 편이라고 자부한다.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매운 라면이 땡길 때가 있는 법이다. 성찬은 그렇게 매운 라면을 먹었다. 그냥도 아니고 핵…이란 단어 크게 그려져 있던 걸 냅다 위 속으로 쑤셔 넣었다. 다음날 화장실이 좀 걱정되긴 했지만... 이런 날도 있어야 재밌으니 일상으로 넘기려 했다.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니었단 소리다. 단지 옆에 앉아있던 박원빈이... 자꾸 냄새 맡고 흘끔흘끔 대서. 그래서 조금 줬을 뿐이다. 그게 문제가 됐다. 성찬은 그날 매운맛을 제대로 봤다. 라면 때문은 아니고, 라면 먹은 박원빈 때문에. 아주 호되게 혼이 났다.
정성찬은 원빈이 매운 걸 못 먹는지… 정말 몰랐다. 아니, 당연한 거 아냐? 내가 같은 기계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아. 달라고 하도 눈치 주길래 먹을래? 물어봤고. 매운데... 주의도 줬고. 알겠어... 결국 못 이기는 척 준 죄밖에 없는데. 눈물 방울방울 달은 애한테 콩주먹으로 존나 맞을 줄은 전혀 몰랐다. 딱 한 젓가락이었는데... 순식간에 제 입으로 다 넣어버린 원빈은 젤리 씹듯 라면 씹다가 으에엑, 바로 역정을 냈고 싱크대로 달려가 부스러기들을 다 뱉어버렸다. 켈록과 원망이 연이어 쏟아졌다. 성찬이 너. 콜록. 성찬이. 너어. 콜록콜록. 원빈은 몇 번이나 기침하더니 도로 성찬에게 달려 들어와 소리쳤다. 너 이거 뭐야. 나에 대한 공격이야? 지금 내가 기계라고, 세상만사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천치라고 놀리는 거야? 빨개진 눈도 눈가도 전부 다 억울투성이였다. 말하는 얼굴 위로는 옥구슬 같은 눈물이 또르르 떨어지고 있었다.
성찬은 너무 당황해 먹던 젓가락을 바닥에 다 떨궜다. 떨리는 손은 박원빈 눈물 닦아주는 데에만 바빠졌다.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달라고 해놓고 왜 울어. 응? 원빈은 매워서 정신도 못 차리고 연이어 눈물만 쭐쭐 흘렸다. 정성찬 밉다고 또 가슴을 퍽퍽 때렸다. 아퍼어. 하고 아린 혀를 빼꼼 내밀고 공기 중에 식혔다. 눈물 닦아주다 안 되겠는지 일어선 정성찬 바지끄댕일... 꽉 붙잡고 안 놔줬다. 원빈은 그렇게 냉장고 있는 데까지 질질 끌려갔다. 기계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바지 벗겨질 위기에 처한 정성찬은… 겨우 손가락 뻗어 잡은 물컵에다 흰 우유 가득 담아 기계 입으로 투하했다. 퉁퉁 뿔은 입술 새로 허연 우유가 쉴 새 없이 들어갔다. 한참 마시니 좀 나아졌는지, 원빈은 이제 컵 부여잡고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딸꾹, 킁. 딸꾹, 크흥. 아휴, 이... 바보야. 성찬은 바지 좀 추켜올려 입고 원빈의 옆에 쪼그려 앉아 애 진정할 때까지 등을 뚜들겨줬다. 끅끅대던 게 히끅히끅으로 바뀌고, 곧 색색으로 돌아올 때까지…. 중간에 코풀라고 휴지도 쥐여주고 우유 바꿔 물도 먹이고 하니 금세 원래대로 돌아와 다행이었다.
이제 좀 괜찮아? 박원빈한테 물으면 원빈은 흥, 콧김을 뿜으며 여전히 촉촉한 눈 갖고 성찬을 노려봤다. 아니 왜 성질이야. 그니까 내가 맵다고 했잖아. 억울한 정성찬이 암만 항의해봤자 소용없었다. ...이 정도라곤 안 했잖아. 원래도 똥똥한 입술 존나 뿌 된 원빈은 성찬의 손을 잡아들어 제 입 위로 가져다 댔다. 빨리 만져봐 봐. 엄청나게 뜨거워. 불나는 것 같아. 내 입속에 연구소가 세워졌어. 거 얼마나 뜨거운지 만져나 보자... 싶어 손가락 대면 박원빈 입술은 진짜로 엄청 뜨거웠다. 눈은 촉촉했고 눈가는 빨갰고 입술은 뿔어있고 볼은 벌겠다. 진짜 개뜨거웠다.
...뜨거워졌다. 정성찬 기분도 같이.
성찬은 화들짝 놀라 그 자리서 벌떡 일어났다. 박원빈이 달려가 싱크대에 다 뱉었던 것처럼, 이번엔 정성찬이 달려가 싱크대 물을 틀고 머리에 왁왁 뿌려댔다. 정성찬이 싱크대행 박원빈에 당황해 쉴 새 없이 동공을 굴렸듯… 이번엔 박원빈이 쉬지도 못하고 눈을 도륵도륵 움직였다. 성찬아 갑자기 왜 그래?... 미쳤어? 때아닌 냉수마찰에 금방 정신 차린 정성찬이 물 후두둑 떨어지는 몰골로 뒤돌아 답했다. 매워서 그래, 매워서. 원빈아 그거 진짜 맵다. 너 다신 먹지 마, 알겠지? 한 번만 더 먹었다간 진짜 큰일 날 수도 있어. 아니, 큰일 낼 수도 있어. 너 말고 내가. 나. 정성찬이....
나 방금 너한테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진짜 존나 큰일이지, 원빈아.
…
…근데 큰일이란 말은 쉽게 입에 담으면 안 되는 것 같아. 앞으론 좀 조심해야겠는 걸?
별안간 원빈의 신호가 잡히지 않았던 날. 한 줄로 평평해 확인한 성찬이 이명을 들었던 날. 삐이이... 소리와 함께 이리 팡 저리 팡. 다 터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아버린 연구소처럼, 순간 머리가 다 터진 성찬이 뇌에 정신 차려. 걸어. 뛰어. 당장 가서 확인해... 명령을 받기도 전에. 성찬의 다리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눈은 흐릿했고 생각은 엉망이었다. 아마 이때부터 울고 있었던 것 같다. 성찬은 달리는 내내 울었고 도착해서도 계속 울었다. 집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참이란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문 열려다 구닥다리 열쇠만 두 번을 놓쳤다. 안돼. 안돼. 왜 하필 같이 있지 않을 때에. 통통하다 놀리고 놀림당했던 입술을 아플 정도로 씹었다. ...됐다! 녹슨 소리가 돌아가며 잠금장치를 풀어내고 사시나무 동공이 내부를 쏘아보면...
헉
커다란 어항에 박원빈 조그만 대가리가 푹 박혀 있었다!
까치발 들린 다리엔 미동이 없었다. 성찬은 다시 폭발했다. 몸이분해돼 자연으로 스며들 것만 같았다. 긴 다리 휘적이며 다가가 원빈을 우악스럽게 끄집어냈다. 느닷없이 삶 침략받고 놀라 비틀어졌던 금붕어가 뻐끔댔고, 꺼내진 박원빈이 뻐끔댔고, 생사 확인한 정성찬이 마지막으로 뻐끔댔다. 뭐야? 뭐야! 뭐야....
...원빈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목욕 끝난 개새끼처럼 머리 푸르르 털어대며 성찬에게 불평까지 했다. 너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좀 걸린다고 했잖아. 씨이... 나, 나 성찬이랑 내기 중이었는데 왜 방해해. 똥 뜨여진 말똥 눈 끔뻑이며 성찬을 나무랐다. 너 지금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는 거야....
성찬은 다리에 힘이 다 풀려 주저앉았다. 원빈이나 성찬이나. 턱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너 울어? 원빈의 물음은 들은 체 만 체. 성찬은 원빈을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았던 불안이 기어코 싹을 튼 순간이었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떡할까. 그때엔 오류가 아닌, 사실이라면 어떡할까. 정성찬은 어떡할까. 견딜 수 있을까?
모르겠다.
성찬은 원빈의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소리를 들으며 살아있음을 느꼈다. 세차게 펄떡이는 게 꼭 바깥 나온 물고기가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것 같았다. 뭐해. 심장 소리 처음 들어봐? ...진짜도 아닌 거 들어서 뭐가 좋다고. 입 삐쭉이며 벗어나려는 애를 도로 잡아다 더 세게 끌어안고는 아니, 이건 진짜야. 나는 알아. 나랑 같아… 말해줬다. 그럼 꿈틀대던 원빈의 손이 멈추고 얌전히 등 위로 나앉았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맞닿은 심장이 점점 비슷하게 뛰기 시작했다. 성찬은 다시 말했다. 우리는 같아. 봐봐, 점점 같아지고 있잖아. 그러니 다르다는 건 없어. 가짜도 없고. 진짜만 있는 거야.
...헛소리. 고요해진 분위길 원빈의 주먹이 깨부쉈다. 햄버거 두 개 가슴으로 콩주먹이 날아들었다. 헛소리. 개소리. 뻘소리. 너 진짜 이상한 소리 많이 해. 진짜 힘이라곤 하나도 안 담긴 주먹으로 원빈은 성찬을 마구 때렸다. 성찬이 아프다며 눈물 뚝뚝 흘리고 나서야 싸나운 주먹질을 멈췄다. 얼마나 순한지... 아파? 미안해. 괜찮아? 걱정해 주며 사정없이 구타했던 정성찬 팔을 도로 쓱쓱 쓸어줬다.
성찬은 우잉... 하다말고 원빈과 눈을 마주했다. 혀가 뽀쪽 내밀어졌다. 뻥이지롱. 장난인데 이걸 믿네. 박원빈 왜 이렇게 순진해, 어? 킥킥대서 원빈을 또 성나게 했다. 꽁무니 빠져라 도망치는 성찬에 원빈은 악 지르며 따라갔다. 일로 와. 이리 안 와? 씨이... 너 들어오자마자 운 것도 다 연기지! 뭐래, 연기 아니거든? 맞잖아! 아이, 아니래도! 볼 타고 턱 타고 뚝뚝 떨어지던 물은 어느새 다 말라 있었다.
그렇게 돌아가 둘이다. 성찬은 원빈의 심장이 잘 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원빈과의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소중히 쓰기로 했다.
이건 좀 이상한데. 뒷목 긁적이며 멋쩍어하는 원빈에 성찬은 삐뚤어진 고깔모자 고쳐 씌워주며 빨리 초나 불라고 재촉했다. 후우. 바람을 타고 옹졸한 연기가 피어오르면 박원빈 말랑 볼로 생크림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생산된 날이자 눈을 뜬 날은 원빈의 이름이었다. 이름을 축하받다니, 진짜 어색했다. 왜 이런 걸 챙기는 거야? 이해할 수도 없었다. 감정이 묘해진다…. 원빈은 끈적이는 크림 아무렇게나 닦으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이거는 왜... 이거야. 두 개 뿡 꽂힌 숫자 2를 가리키며 성찬에게 물었다.
제일 커다란 딸기를 원빈의 입안에, 그보다 조금 더 작은 딸기를 제 입에 쏙 집어넣은 성찬이 웅얼웅얼 댔다. 이거? 이거 네 나이. ...그럼 난 22살이야? 응. 왜? 그냥, 나보다 한 살 어린 걸로 정했는데. ...왜? 왜냐니. 나보다 어리게 생겼으니까. 그럼 난 너한테 형이라고 해야 해? 어... 그게 그렇게도 되나? 근데 박원빈 너 맨날 나한테 너, 야, 성찬아라고 해서…
“성찬이 형.”
형소리 들은 성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씹다 만 딸기 덕에 볼도 동그래져 있었다. 커진 콧구멍도 동그랬고 갑자기 보여준 정수리 모양도 엄청 동글동글했다. 옆에 달린 귀는 유감스럽게도 안 동그랬다. 대신 벌게져 있었다. 음음, 듣기 좋았나 보다. 웃는 원빈의 마음도 성찬을 따라 동그래졌다. 성찬이 너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행복에 헤 벌려진 입이 걔들 중에 제일 동그랬다.
똑같이 개미가 들고 가는 빵 부스러기가 동그랬고 하늘에 둥둥 뜨인 구름 모양이 동그랬다.
하나 더 셋. 원빈은 햇빛 보는 걸 좋아했다. 맞는 건 더 좋아했다. 아래에 서 있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지 따뜻하다고 엉덩이를 막 빵실댔다. 물론 햇빛의 냄샐 맡는 것도 좋아했다. 바짝 말려진 빨래들을 끌어안고 원빈은 매일 킁킁댔다. 가끔 잘못 말려져 꼬리꼬리한 냄새 풍기는 것을 고르면 성찬을 바라보며 억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원빈은 햇빛 품 안에서 뛰는 걸 가장 좋아했다. 빨리 달릴수록 함께 빨라지는 심장을 너무너무 좋아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언젠가 성찬의 손이 닿았던 부분에 제 손을 겹쳐 잡고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바람을 느끼고 자유를 느끼고 가빠지는 호흡을 느끼며 성찬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는 같아. 적어도 뛰는 순간만큼은 정말로... 그런 것처럼 느끼고 행복해했다. 더운 날씨에 땀으로 옷이 다 축축해져도 상관을 안 했다. 뛰다 넘어져 무릎이 제 까져도 목소리만큼은 들떠 있었다.
헉헉대며 뒤따라온 성찬에게 원빈은 말했다. 내가 인간이었다면 늘 달리기를 했을 거야. 계속해서 달렸을 거야. 그럼 졸도 직전의 성찬이 칭얼거렸다. 야아, 지금도 달리잖아... 뭐가 달라. 너 진짜 너무 빨리 달려. 좀만 천천히 달리면 안 돼? 응? 원빈아, 내가 너 따라가기가 힘들어서 그래. ...너 그래도 결국엔 따라오잖아. 지금도 왔잖아. 그건 그렇지만....
여기서 넷. 원빈은 달리고 나서 꼭 아이스크림을 먹는 습관이 있었다. 원빈은 팥 아이스크림의 사각거리는 얼음 부분을 좋아했다. 그래서 윗부분인 연유는... 자동 성찬의 차지가 됐다. 떡볶이를 먹으면 원빈은 쌀떡을 고집했고, 따라서 성찬의 몫은 남은 오뎅이 됐다. 아침마다 삐친 머리 성찬이 튀기는 계란 후라이는 늘 흰자가 원빈의 것 노른자가 성찬의 것이었다. 원빈은 흰자 중에서도 빠삭빠삭한 부분만 자꾸 떼어먹으려 들다 성찬에게 혼난 적도 있다.
짧게 다섯. 원빈은 인공적인 냄새를 안 좋아했다. 대신 비누 냄새만 즐겼다. 그래서 비슷하게 여섯. 자기 비누 냄새가 성찬에게 배는 것을 좋아했다. 이상하게 일곱. 성찬이 포르투갈의 가로수길은? 포로수길... 따위의 이상한 개그를 치면 원빈은 두 눈을 샐쭉 접고 킥킥거렸다. 분명 실없는 말인데 마치 천 년의 개그라도 만난 것처럼 책상을 팡팡 쳐댔다. 잘 웃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덟. 반대로 원빈은 잘 울기도 했다. 한 드라마에 꽂혀 종일을 웃다가 또 종일을 울어댔다. 성찬이 어어, 너 엉덩이에 뿔났는지 좀 봐야겠는데. 말랑 엉덩이 툭툭 두드리며 시비를 걸면 원빈은 훌쩍거리며 진짜? 봐봐... 하고 제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더해서 아홉. 원빈은 성찬을 웃겨준다.
성찬은 이제 원빈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다.
...고 생각했지만 그런 정성찬이 모르는 열. 심심할 때면 원빈은 작은 성찬과 내기를 했다. 그리고 매번 졌다. 사실은 져주었다. 왜냐면 원빈은
성찬이 마음에 들었다.
원빈이 어디에 있든, 늘 찾아 달려와 주는 성찬을…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는 마음에 멋대로 들여버렸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색색깔로 물드는 폭발 광경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저를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원빈에게 말하며, 손을 잡고 달리며 성찬은 계속해서 뻐끔댔다. 원빈이 한참을 앞서 달려 나가면 숨 가빠 죽는 한이 있어도 원빈을 찾아 원빈이 있는 곳까지 끝끝내 달려 도착해줬다. 가쁜 숨이 들린다. 성찬은 계속해서 뻐끔댔다. 원빈은 그런 성찬과 함께 뻐끔거렸고 숨을 쉬었다. 날씨가 변하는 것을 느끼고 계절 냄새가 바뀌는 것을 느끼고 성찬이 준 이름을 느꼈다. 그렇게 원빈은 살아있음을 느꼈다. 성찬과 함께. 성찬에 의해.
숨이 모자라? 뻐끔대는 성찬에게로 원빈이 물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가슴 위 올려진 손을 타고 인간의 심장 소리가 전해 들려왔다. 응. 성찬은 고갤 끄덕이며 마른침을 찔끔 삼켰다. 원빈은 다시 물었다. 너른 품 부서지도록 세게 올라타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살랑 목소리로 질문했다. 도와줄까? 응,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뻐끔대는 금붕어 입술 위로, 뻐끔대는 금붕어 입술을 가져다 댔다. 꿈틀대던 성찬의 손이 원빈의 등 위로 나앉았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 박동이 점점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한참 뒤 이제 좀 괜찮으냐 물으면 정성찬은 응, 아니 대신 모자르다는 이상한 답을 했다.
조그만 기계가 있다. 사람처럼 생겼고 사람 말을 하고 사람처럼 밥 먹고 사람처럼 잔다. 사람처럼 이름이 있고 사람처럼 숨을 쉬고 사람처럼 심장이 뛰고 사람처럼 달리고 넘어질 수 있다. 사람처럼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처럼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성찬은 원빈이라고 부른다.
…
시계를 한 바퀴만 돌려서... 다시.
성찬의 집엔 고민거리 안은 기계가 있다. 그보다 더 조그만 물고기가 그 걱정을 받고 있다. 물고기와 같은 이름 가진 사람은… 걱정하는 걱정 기계를 걱정하며 같이 산다.
숨을 넘겨준 게 잘못이었던 것 같다. 같은 이름을 가져서 그런가. 기계의 인공 숨 받은 금붕어가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툭 튀어나온 눈이 금방이라도 빠져나올 것처럼 원빈을 노려보고 쳐다보고 수시로 눈싸움을 걸어왔다. 원빈은 몇 날 며칠을 어항 근처에서 떠나지 않았다.
모두가 잠든 깜깜한 밤. 금붕어 정성찬을 향해 원빈은 패드를 내밀었다. 수족관산 금붕어들은 체형이 개량 당한 종이 많으므로, 수명이 일 년에서 삼 년 정도가 대부분이란 사실이 입을 타고 공기 중에 퍼져 나갔다. 바다에서 나고 자랐다면 더 오래 살 수 있었을까. 어항이 조금이라도 더 넓었다면 병에 안 걸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금붕어는 개량 당해 태어났으며, 좁아터진 어항에서 살다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었다.
원빈과 비슷했다.
원빈은 성찬이 자는 침대로 기어들어가 가슴에 귀를 댔다. 평소보다 느려진 두근두근 소리를 오래도록, 오래도록 들었다. 손은 제 판판한 가슴 위로 고정이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같은 심장 소리가 한숨을 푹 쉬게 만들었다. 성찬은 말했다. 우리는 같다고. 원빈도 답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같다고. 하지만 같았던 우리가... 이제는 달라질 시간이 찾아왔다. 역시 숨을 넘겨준 게 잘못이었던 것 같다. 이질적인 삐걱 소리가 심장 소리와 함께 겹쳐 들리기 시작했다.
원빈은 눈을 감은 채로 성찬에게 말을 걸었다. 마음속으로 건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들을 순 없었다. 안돼. 안돼. 쉽게 죽지 마. 봐주는 거 없다고, 진지하게 임하겠다고 나와 약속했잖아. 너도 싱겁게 이기는 건 싫지? 나도 그래. 그러니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 최선을 다해 뻐끔대자. 너는 물속에서, 나는 바깥에서....
이제 성찬의 집엔 고장 난 물고기와, 자주 고장 날 기계와, 슬퍼 고장 날 사람이 같이 산다.
…
금붕어랑 내기한다고 대야에 얼굴 집어넣었다 그대로 안 나와 종말을 맞이할 뻔했다. 누가? 박원빈이지! 다행히 성찬이 꺼내다 젖은 뺨 탈탈 털어줘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성찬의 젖은 뺨은 원빈이 털어줬다. 성찬아, 너는 작은 성찬이도 아닌데 얼굴이 왜 죄다 젖어 있어….
하루는 작아빠진 엉덩이 이리저리 흔들다 그대로 굳어 정성찬 마사지사의 무시무시한 치료를 받았다. 누가? 박원빈이지! 원빈의 비틀어진 허리는 성찬의 거센 손 힘을 받고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자아 생긴 손가락들 덕에 벌써 컵은 네 개나 깨먹었다. 누가? 박원빈이지! 있던 컵들은 모조리 단단한 재질로 바뀌었다. 뭔가 쇠 맛 나는 것 같고 별로야... 고집부리며 서랍에서 도자기 컵 꺼내다 떨궈 깨진 조각들은 성찬이 치웠다. 한 조각 두 조각 주울 때마다 성찬의 눈에서도 한 조각 두 조각이 떨어졌다. 미안해.... 개미 기어들어 가는 것 같은 사과에 성찬은 눈을 꽉 감았다. 마지막 조각을 주우면서, 또 마지막 조각을 볼로 흘려보내면서 마지막으로 훌쩍였다. 나 이거 콧물 삼키는 거야. 씨도 안 먹힐 뻥이 나왔다. 원빈은 손을 꼼질거리며 너 웃다가 울면 엉덩이에 뿔난다는 개그를 쳤다. 푹 숙인 성찬의 고개를 들게 하기 위해서…. 화, 확인해볼까. 하고 성찬과 같이 주저앉아 엉덩이를 꾹꾹 찔러댔다. 성찬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웃었다. 푹 숙인 원빈의 고개를 들게 하기 위해서. 킥킥.
와중에 연달아 한 질문 세 개는 맨 처음 것 하나만 받아들여 성찬의 골머리를 썩였다. 뒤따른 두 개는 아예 쌩 무시를 했다, 망할 박원빈. 졸려? 잘까? 우유 마실래? 물어보면 응... 단답하고 대화를 끝내버렸다. 어쨌건 정성찬은 우유 데워줬고 박원빈 먹였고 걔가 화장실에서 토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쿨쿨 잠들기 직전엔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이불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니. 굉장히 느닷없는 말이었다. 조금 있다간 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안 마실래. 아주 한참이 지나고 나서는 못 들은 척할 얘기가 나왔다. 있잖아, 내가 느려져서 미안해.... 성찬은 베개가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원빈이 성찬과 내기를 했듯, 성찬도 성찬과의 내기를 시작했다. 내용도 아주 쉬웠다. 승률이 자그마치 99%에 육박하는, 횡단보도 건널 때 흰색만 밟고 건너기였다. 빨간 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기 직전 성찬은 소리친다. 성공하면 박원빈은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괜찮을 것이다. 오래오래 정성찬과 함께할 것이다. 셋. 둘. 하나. 카운트가 땡 울리고 정성찬이 퐁당퐁당을 시작한다. 흰색 선을 밟고, 또 흰색 선을 밟고, 다시 흰색 선을 밟고 밟고 밟고 밟고 성찬은
까만 아스팔트 바닥을 밟았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자전거가 퍽 밀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발이 휘청인 탓이었다. 정신이 멍해져 미안하단 사과도 들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지만 인정하기가 싫었다. 성찬이 혼자 멋대로 내기를 해버린 것도, 때아닌 자전거가 달려와 어이없게 패배를 던져줘 버린 것도, 성찬이 원빈을 발견한 것도 데리고 온 것도 그런 박원빈이 곧 사라져 버릴 것도 전부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다. 성찬은 중얼거렸다. 계속해서 입을 뻐끔댔다. 응, 연습판이었어. 다시 하면 돼. 함께 눈도 뻐끔댔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하고.
...
왜 나를 택했어?
어느 날 밤. 원빈이 첫날의 질문을 다시 했다. 간만에 꿈이라도 꾼 건지 땀 범벅으로 깨서는 비몽사몽인 정성찬 얼굴 매만지며 왜 나를 데려왔냐니까... 물었다. 성찬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말했잖아. 박원빈 너 입술 통통해서라고. 많은 기계 속에서 순간 박원빈 입술만 보였다니까. 이게 삼 인분인지 오 인분인지 십 인분인지 내가 너무 궁금해서... 너 데리고 온 거라고 했어 안 했어. 변함없는 개소릴 해주며 원빈을 킥킥거리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이젠 원빈도 알았다. 성찬은 그딴 이상한 이유 때문에 원빈을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니 뭐... 진짜로 박원빈 통통 입술 때문에 데리고 온 걸 수도 있겠지만, 그럼 정성찬이 개쌉변태새끼인거고. 개쌉변태새끼 정성찬의 통통 입술을 만지며 원빈은 속삭였다. 거짓말. 나 기억났어. 너 그때 걔지? 하며 여태 까먹고 있다 꿈꾸고 나서야 되돌려버린 기억 속으로 성찬을 끌고 들어갔다. 원빈은 성찬의 손을 잡았고, 당겨 제 가슴 위로 올려놓았다. 이전의 성찬이 그랬던 것처럼. 훨씬 더 전의 성찬이, 박원빈 이름도 없던 원빈의 가슴에… 손을 올려놨던 것처럼.
성찬과 원빈은 이전에도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장소는 연구소다. 성찬이 있고, 원빈이 있고, 금붕어 성찬이는 없던 곳. 완전하게 태어났는지, 아니면 불완전하게 태어났는지 아무도 말해 주는 없던 곳이기도 하다. 그냥 모른 채 살아가다 갑자기 멈춰버리는 애들이 있었고, 하나둘 이상 증상 나타나며 서서히 죽어가는 애들이 있었다. 원빈은 멈추지도 않았고 증상도 없었다. 사람처럼 생기고,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처럼 밥 먹고 사람처럼 잤다. 계속. 변함없이. 늘 그랬다. 그래서 저를 온전하다고 생각해 왔다, 박원빈은. 불안하다며 떠는 애들, 싫다며 우는 애들은 부러 못 본 척하려고 노력했다. 같이 떨고 같이 울면 박원빈도 그렇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뛰어보지도 못한 채 죽기엔 하고 싶었던 게 너무너무 많았어서.
그래서 얼마 못 가 멈춰버릴 심장 가졌다는 것도... 솔직히 알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뛰다가 갑자기 헉, 하고 죽어버리는 게 나았을 것 같다. 알게 되니 그간 모른 척했던 두려움이 해일처럼 원빈을 덮쳐 들었다. 괴로워 손이 덜덜 떨려왔다. 원빈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방금 들은 말을 곱씹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멈출 것 같지? 응, 얼마 안 남았어.
수도 없이 입을 뻐끔거렸는데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서워. 무섭다고 말하면 원빈은 정말로 무서워질 것 같았고... 언제 죽을지 몰라. 죽는다는 말을 뱉으면 당장에라도 죽어버릴 것 같았다. 누가 목을 조르는 것도 아닌데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원빈은 계속해서 뻐끔거렸다. 들어오는 공기가 없어 더 열심히 뻐끔거렸다. 심장이 점점 빨리 뛰다 결국 터져 박원빈을 죽여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누가 갑자기 박원빈을 안아줬다....
품이 엄청 따뜻했다.
눈물 때문에 눈이 흐려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손이 엄청 크고, 칠해진 벽만큼이나 피부가 허옜던 것만큼은 기억이 난다. 심장 뛰는 두근두근 소리는 엄청나게 세찼었다. 순간 드는 질투심에 원빈은 잘못도 없는 가슴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아마 멍이 여럿 들었을 것이다. 한 대 때릴 때마다 눌려 나오지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죽을 거야. 참고 있던 가쁜 숨이 튀어나왔다. 그럼 버려질 거야, 다른 애들이랑 똑같이. 아직 바깥으로 나가보지도 못했는데. 아직 햇빛이란 걸 보지도 못했는데. 너희가 매일 먹는 밥도 한 번을 안 먹어봤는데.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아니야.”
안 그래. 안 그럴 거란 말이 신경을 돋운 건지 원빈의 주먹질이 세졌다. 네가 어떻게 알아. 너도 쟤네들이랑 똑같은 애면서. 그냥 지켜보기만 할 거잖아. 아무것도 안 해줄 거잖아. 원빈의 상태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던 녀석들과 한패인 것처럼, 같은 연구복을 차려 입고 있는 놈이 미워 세찬 심장 당장 멈춰버리도록 열심히도 때렸다. 요령도 없이 그냥 무식하게 쥐어 팼는데 그걸 또 무식하게 다 맞아줬다...
정성찬이….
원빈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면서 맞는 것도 아랑곳 안 하고 저 눈물 닦아주기에 바쁘던 성찬을 기억한다. 네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데. 뭘 해줄 건데. 소리치는 원빈에게 하고 싶은 게 뭐야? 물어보던 성찬을 기억하고, 나는 여기서 나가고 싶어. 그래? 그럼 나가서는, 제일 처음으로 뭐가 하고 싶어? 나는. 나는...
“뛰고 싶어....”
뛰고 싶단 말에 알았다 답해준 성찬을, 원빈은 기억한다.
얼마 뒤 원빈은 살던 곳을 잃었고, 살아갈 곳을 얻었다. 생애 처음으로 달리기도 했다. 성찬의 손을 잡고 가빠지는 숨을 느끼며 바람에 싸대길 맞고 햇볕에 잔뜩 쪼였다. 달리고 나서야 비로소 원빈은 달리는 것이 좋아졌다. 전부 성찬이 이뤄 준 것이었다.
원빈은 제 심장 위에 손을 포갠 채 두근두근. 두근두근. 소리 들으며 살아있음을 느끼던 성찬을 기억한다. 뭐해. 심장 소리 처음 들어봐? 진짜도 아닌 거, 곧 멈춰버릴 거 들어서 뭐가 좋다고. 악 지르며 저항하던 박원빈 도로 잡아다 더 세게 끌어안고 아니, 이건 진짜야. 나는 알아. 나랑 같아. 속삭이며 저와 원빈의 심장 박동을 점점 비슷하게 만들던 성찬을 기억한다. 성찬은 말했다. 우리는 같아. 봐봐, 점점 같아지고 있잖아. 그러니 다르다는 건 없어. 가짜도 없고. 진짜만 있는 거야.
...
왜 나를 택했어?
원빈이 다시 묻는다면, 성찬은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네가 하라고 했으니까. 네가 하필 나를 골랐으니까. 눈앞에 나타나 우는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악 지르며 뛰고 싶다고 했으니까. 심장 소리가 너무 세찼으니까. 나 때리는 주먹이 엄청나게 아팠으니까. 약속 꼭 지키라며 나를 노려보고, 손을 덜덜 떠는 게 너무 슬펐으니까. 내가 모든 걸 해주고 싶게 만들었으니까. 나는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너는 박원빈이니까.
안 그랬으면 내가 굳이, 하필이면 너를 데리고 왔겠어? 박원빈보다 훨씬 더 잘생기고, 입술도 통통하고, 예쁘고, 반찬 투정도 안 하고, 옷도 주는 대로 입고 붕어빵도 꼬리 몸통 다 먹는 애로 쏙 골라다 잡아왔지.
하지만 삽시간에 불안에 빠진 박원빈이 손가락 꼼질이며 정말 그랬을 거야? 물으면 맥 빠진 정성찬은 박원빈 등 위로 손가락 엑스 표시를 좍좍해준다. 원빈이 안심할 말도 함께 나간다. 당연히 거짓말이지. 그걸 믿어? 그럴 애는 이 세상에 너 빼고 절대 없을 걸. 여러 번의 손길이 원빈의 등을 간지럽혔다.
원빈이 몸을 비틀며 하지 말란 말을 남발한다. 싫은데. 더 할 건데. 계속할 건데. 성찬의 짓궂은 손가락이 등을 타고 목을 넘어 가슴을 지나 비로소 심장에 닿을 때까지. 킥킥대고 금붕어처럼 펄떡였다. 너무 웃은 탓에 배가 아팠다. 공기는 부족했다. 가쁜 숨에 뻐끔대는 원빈에게로 성찬이 물었다. 숨이 모자라? 두근두근. 두근두근. 가슴 위 올려진 손을 타고 기계의 심장 소리가 전해 들려온다.
응. 원빈은 고갤 끄덕이며 마른침을 찔끔 삼켰다. 성찬은 다시 물었다. 판판한 박원빈을 가볍게 끌어안고는. 늘 듣고 또 듣는 살랑 목소리로 질문했다. 도와줄까? 응,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뻐끔대는 금붕어 입술 위로 뻐끔대는 금붕어 입술을 가져다 댔다. 꿈틀대던 원빈의 손이 성찬의 등 위로 나앉는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 박동이 점점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한참 뒤 이제 좀 괜찮으냐 물으면 박원빈은 응, 아니 대신 모자르다는 이상한 답을 했다.
그럼 혹시 나중에 말이야....
정말 혹시의 혹시라도. 혹시라도 성찬아.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거야? 아니면... 나랑, 나랑 이름이 같은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거야? 원빈 씨 같은 사람이 있잖아. ...사람이 아니어도 돼. 나랑 비슷하게 태어난 기계여도 되고, 성찬이처럼 물고기여도 되고, 네가 나 닮았다고 사 온 고양이 인형이어도 돼. 어제 티비에서 본 토끼도 그렇고, 우리 얼마 전에 호수에서 본 오리도 그렇고... 산책 때 맨날 만나는 쪼꼬미 푸들이어도 돼. 나를 닮은 것들이 많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걔네들을 말이야.
좋아할 거야?
“좋아하겠지, 당연히.”
예상과 다른 답변이었는지 원빈이 입을 떡 벌렸다. 금붕어 성찬이만큼 벌어졌던 입이 서운함 잔뜩 먹은 채 도로 꾹 닫혔다. 상처받은 기계의 어깨가 추우욱 내려간다. 그치, 그렇겠지... 사실 나는 이런 말 할 자격도 없어... 중얼거리는 말은 금붕어 혈관 속 적혈구보다도 조그맸다. 나 잘게. 이 상태라면 슬픔에 밤을 꼴딱 새울 것이 분명함에도 등 보이고 자려는 원빈에 성찬은 손가락을 들어 원빈의 등을 또 간지럽혔다. 하트를 한 번, 원빈이 좋아하는 별을 한 번. 그리고 그 뒤에 거짓말, 하고 또박또박한 글씨가 한 번이었다.
잠든 척하는 원빈을 성찬의 혼잣말이 감싸 안는다. 좋아해야지. 다 박원빈이랑 닮았는데.
그치만 박원빈만큼은 안 좋아하겠지.
왜냐면 닮은 거지 같은 건 아니니까. 걔네는 내가 아는 박원빈이 아니니까. 따뜻하고, 따뜻한 햇볕을 좋아하고, 그 아래서 달리기를 좋아하고, 넘어져도 나 오기만을 기다려주고, 내 손을 잡아주고, 슬퍼도 울고 매워도 울고 짜증 난다고 나 때리다가도 좋다고 안아달라 하는 애는 너밖에 없으니까.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왜냐면 나는, 진짜 박원빈이 제일 좋단 말이야.
말끝에 물기가 가득해 원빈은 성찬이 운다는 것을 알았다. 그치만 돌아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돌아 성찬의 얼굴을 보면 원빈도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정성찬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통통 입술 깍 깨물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성찬이 등에 얼굴을 푹 묻었다. 얇은 티셔츠 위로 눈물 자국 두 개가 꾹 찍히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근래 하도 많이 뚫려 밴드투성이가 된 박원빈 손가락처럼, 정성찬 마음에도 붙여 낫게 해줄 수 있는 밴드가 있다면 참 좋겠다. 하지만 불행히도 없어서… 원빈은 결국 몸 돌려 다시 성찬을 안아 주기밖에 못 했다. 주머니에 매일 넣어놓고 다니는 손수건을 꺼내다 푹 젖은 성찬의 얼굴을 천천히 닦아줬다.
첫날 받았던 성찬의 손수건. 끄트머리엔 여전히 금붕어 두 마리가 그려져 있는 손수건. 재를 먹고, 먼지를 먹고, 때때로 원빈의 콧물을 먹고 마르며 햇빛 냄새를 먹었던 금붕어들이... 이젠 성찬의 눈물을 먹고 있었다.
움직이지도 않는 금붕어의 입이 달싹거리는 것 같다. 뻐끔뻐끔. 뻐끔뻐끔. 원빈도 함께 뻐끔거렸다. 흐르는 눈물이 입으로 들어가고 흘리는 말이 바깥에 나와 사라졌다. 미안해. 울지마. 나도 좋아해. 나도 네가 제일 좋아. 성찬이 다시 뻐끔댔다. 안 해. 울지마. 나도 좋아해. 네가 제일 좋아.
...그러니까 가지 마.
뻐끔거리던 원빈의 입이 꾹 닫혔다.
원빈은 울다 지친 성찬이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당장 원빈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요새의 정성찬에겐 박원빈 손을 꼭 붙들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 방울 맺힌 속눈썹을 간지럽혀도 성찬이 우웅, 뒤척이기만 할 때 원빈은 슬그머니 잡혔던 손을 빼냈다. 울어서 그런가,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해서 그런가. 몸이 가벼운 것 같았다. 입도 잘 움직이니 금상첨화였다. 천천히 걸어 나온 거실엔 낮에도 밤에도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성찬의 집엔 조그만 어항이 있다.
그리고 그 속엔, 금붕어 한 마리가 살고 있다. 등은 태양 볕 많이 받은 주황색이며, 배로 갈수록 노래지다 끄트머리 가서야 간신히 하얘지는 애다. 걔는 배 왼쪽쯤에 조그만 점이 하나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고는 모를 세세한 특징이었다. 같이 살고 있는 성찬도 모르고, 지금도 물에서 뻐끔대고 있는 성찬 역시 모를 원빈만의 비밀이었다.
수족관을 지나치다 금붕어 성찬이와 마주친 순간. 넋을 놓고 바라보다 검은 점을 발견한 순간... 원빈은 성찬을 데려와야겠단 생각을 했다. 같았으니까. 금붕어 정성찬은 원빈과 똑같은 곳에 점이 있었다. 똑같이 살아 숨 쉬고 똑같이 심장이 뛰고 똑같이 이름이 있고 똑같이 달리고 부딪히고 넘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원빈은 내기를 했다. 심심하면 금붕어에 말을 걸었다. 성찬아, 하고 성찬을 불렀다. 불안이 찾아올 때면, 언제 멈출지 모르는 심장이 금붕어의 입과 비슷하게 뛰고 있는 걸 느낄 때면 원빈은 금붕어와 대화를 시도했다. 오늘도 같았다. 원빈은 성찬을 불렀다. 성찬아. 정성찬. 저 부른 것을 알기라도 하는지 금붕어가 원빈쪽을 향해 열심히 헤엄쳐왔다. 먹이를 뿌린 것도 아닌데 계속해서 뻐끔댔다. 꼭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죽을 때까지 뻐끔댈 금붕어의 주둥이를 보며 원빈은 성찬과 했던 그간의 내기를 떠올렸다. 수많은 다짐을 떠올렸다. 원빈은 항상 뻐끔댔다. 물고기를 따라서... 이번엔 꼭 내가 이길 거야, 하고.
아니.
사실은 반대였다.
이번엔 꼭 내가 질 거야.
원빈은 성찬에게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왜냐면 금붕어의 이름이 정성찬과 똑같기 때문이다. 걔는 정성찬이었고, 지금 침대에서 쿨쿨 자고 있는 애도 정성찬이었다. 원빈은 성찬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성찬에게는 늘 져주고 싶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게 인간이든 금붕어든 닮은 강아지든 사슴이든 개구리든 뭐든. 박원빈은 정성찬을 너무너무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늘 져주던 원빈이... 이제는 이길 차례가 왔다. 함께 달리다 피니시 라인 전에 멈춰 져주기엔 원빈의 발이 너무 빨랐다. 원빈은 유리벽을 콕콕 두드리며 성찬에게 선언했다. 넌 내가 집어다 밖으로 안 빼낸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해. 내가 항상 너를 배려해 주고, 네가 이길 수 있게 해줬단 것에 감사해야 해.
다시 한번 성찬의 이름이 불린다. 성찬아. 정성찬.
성찬이를 잘 챙겨주도록 해.
저 부른 것을 모르는지 금붕어는 반대쪽을 향해 열심히 헤엄쳐갔다. 먹이를 뿌린 것도 아닌데, 계속해서 뻐끔대며 공기 방울 여럿을 달고 박원빈한테서 멀어져갔다. 원빈은 웃었다. 내 말 귓등으로 듣는 것도 누구랑 똑같네. 성찬아, 네 말대로 우리는 같은가 봐. 처음부터 늘, 성찬이 해줬던 말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어쩐지 졸린 것 같았다. 원빈은 그대로 잠들었다...
가 다음 날. 눈물 콧물 침 바람으로 달려 나온 성찬에게 걸려 엄청나게 혼이 났다. 원빈은 킥킥 웃다 겨우겨우 다시 눈을 감았고, 손을 접었고, 아파 비명도 못 지른 채 입만 겨우 벙긋거리다 저 향해 무수히 뻐끔댔던 금붕어의 입을 떠올렸다. 다시 웃음이 났다. 금붕어. 금붕어. 금붕어. 내가 보지 않는 이 순간에도 뻐끔대고 있을 금붕어. 이건 전부 금붕어의 탓이었다....
성찬의 집엔 많이 고장 난 기계가 있다.
...
뻐끔대는 성찬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 순간이 찾아왔다. 마주 뻐끔대어 보지만 나오는 말 한마디가 없었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 같았다.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겨우 손을 움직여 가슴 부근에 대보면 두근두근. 두근두근. 느리게 뛰고 있는 심장이 있다. 성찬과 같다. 조금 더 움직여 배 부근에 대보면 점이 있다. 역시 성찬과 같다. 원빈의 눈에서 물방울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이마저도 성찬과 같았다. 성찬의 눈에서도 물방울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어항 속 금붕어 성찬의 입에서도 방울 방울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유리벽 속 금붕어가 뻐끔댄다. 꼭 말을 거는 것 같다. 정성찬이 뻐끔댄다. 뭐라 했는지는 안 들렸다. 그래서 원빈은 둘의 입 모양이라도 읽으려 노력했다.... 아, 사랑해? 응응, 나도 그래. 나도 사랑해. 박원빈이 뻐끔댄다. 원빈은 눈을 감았고, 백기를 들었고, 완벽한 금붕어의 승리를 인정했다.
성찬의 집엔 조그만 기계가 있었다. 사람처럼 생겼었고 사람 말을 했고 사람처럼 밥을 먹었고 사람처럼 잠을 잤다. 사람처럼 이름이 있었고 사람처럼 숨을 쉬었고 사람처럼 심장이 뛰었고 사람처럼 달리고 넘어졌다. 사람처럼 사람을 좋아했고... 또 사람처럼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성찬은 원빈이라고 불렀다.
정성찬의 집엔 박원빈이 있었다.
...
마지막으로 다시.
성찬의 집엔 커다란 어항이 있다. 그 속엔 금붕어 한 마리가 살고 있다. 등은 태양 볕 많이 받은 주황색이며, 배로 갈수록 노래지다 끄트머리 가서야 간신히 하얘지는 애다.
성찬은 심심하면 금붕어와 내기를 했다.
승부란 원래 같은 위치 같은 조건에서 행해져야 공정한 법... 이지만 그런 것들은 전부 무시하기로 했다. 왜냐면 정성찬은 뭐든 이기는 게 좋았다. 완벽히 이기는 게 그중에서도 제일 좋았다. 간당간당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반드시 이길 수 있는 내기만 금붕어에게 걸었다.
첫 번째로 한 것은 초 꺼트리기 내기다. 셋, 둘, 하나. 카운트 땡과 동시에 성찬이 후... 초를 불면 물고기가 뻐끔댔고 정성찬이 뻐끔댔다.
원빈의 생일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집으로 웬 박스가 하나 배달됐었다. 보나 마나 박원빈 저거 또 옷 시킨 거겠지. 칼로 북, 테이프 찢어발긴 성찬이 개봉식을 시작하면 그 안엔 패턴 화려한 원빈의 락스타 후드 대신 숫자 초 세트가 하나 둘 세 개나 있었다. 제 옷 배달된 줄 알고 한달음에 달려 나왔던 원빈도 정성찬 손에 들린 거 보자마자 한숨부터 푹 쉬었다. 뭐야아, 아니잖아. 칭얼대며 도로 들어가려는 박원빈 붙잡고 정성찬은 잔소리 폭격을 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이건 왜 시켰어. 이거 다 어디에 쓰려고.
따발총 같은 목소리가 귓등에 닿았다 퉁 하고 튕겨 나가면 원빈이 입술 죽 내민 채로 개미 콧구멍만 한 소리를 냈다. 너 기분 좋으라고 시켰지.... 이해가 안 된 정성찬이 눈알을 도르르 굴리고, 지 동그란 머리도 함께 도르르 굴렸다.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보다 못해 답답해진 원빈이 다시 운을 띄웠다. 아니이... 왜 내 이름이었던 날 있잖아. 성찬이 네가 나한테 그거 해줬었잖아. 나도 너한테 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시켰어. 왜, 별로야? 나는 기분 좋았는데.... 성찬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시켰어. 숫자는 365일이 지나야지만 딱 하나 바뀌는데, 이건 너무 많잖아. 굳이 안 해도 될 불평 쥐어짜 하니 원빈이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름이었던 날은 계속 찾아올 거잖아. 많이 시키면 많이 할 수 있고. 내가 없어도... 성찬이 너는 계속 기분 좋아야지. …바보야, 박원빈 너 없는데 내가 이걸 누구랑 다 해. 바보는 네가 바보지, 바보야. 나 없으면 저기, 저 성찬이랑 해....
그렇게 또 한 해가 갔다. 성찬은 원빈의 말대로 박원빈 없는 생일을 정성찬과 함께 보내게 됐다. 우우, 완전 최악. 한 해가 갈 때마다 성찬은 불평했다. 뻐끔대는 놈과 함께 뻐끔대며 초의 불을 꺼트리면서 툭 뛰어나온 금붕어의 눈을 죽일 듯이 째려보았다. 3이 4가 되고, 4가 5가 되고, 5가 6이 됐는데도 놈은 여전히 뻐끔대며 정성찬과 함께 이름이었던 날을 보냈다. 퉁퉁한 입술이 후우... 하고 불렸다. 성찬은 이러다 정말 원빈이 남기고 간 초를 저놈과 모조리 쓰게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러다 내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겠는데? 아, 안 되는데... 생각 들 무렵에서 딱 일주일 뒨가. 성찬은 갑자기 승리를 쟁취했다. 금붕어 정성찬이 다시는 초를 불 수 없게 된 것이다!
…별로 기쁘지는 않았다.
원래 금붕어의 수명은 보통 일 년에서 삼 년이다. 금붕어 정성찬은 천수를 다 누리고 머나먼 용궁 여행을 혼자 떠나버렸다. 정성찬만 남겨 둔 채로 말이다. 박원빈을 먼저 따라나섰다. 부러운 자식.
아차차, 그 이전에. 두 번째로 한 것은 도망치기다. 먼저 물러나는 놈이 지는 게임이다. 성찬도 당장 금붕어 떠다니고 있는 이 어항 손바닥으로 짝 때려 놈이 꽁무니 빠져라 도망가는 꼴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전에 금붕어 미워 한번 그렇게 했다 무릎 꿇고 혼난 전적이 있어 그건 불가능했다. 성찬에게는 딱 손가락 하나만 허용이 됐다. 옹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성찬은 그 옹졸한 집게손가락 하나를 든 채 다가오는 물고기 쪽으로 선다. 얼굴엔 비장한 표정을 장착한다. 손가락이 물고기의 눈 부근 톡, 하고 건드리면 놀란 물고기가 꽁무니 빠져라 반대쪽으로 도망 헤엄을 치며 내기가 끝이 난다. 싱겁다. 또 성찬의 승리다. 별로 기쁘지는 않았다.
…저보다 한참이나 큰 걸리버 인간이 꿰뚫듯 어항을 쳐 오는데 안 도망가고 배길 금붕어는 없다.
음음, 세 번째로 한 것은 빨리 먹기다. 금붕어가 뻐끔뻐끔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밥알들을 삼켜 먹을 때 정성찬은 박원빈이 좋아하던 팥 아이스크림을 와구와구 베어먹었다. 가끔은 팥가루가 목에 걸려 캑캑댔고, 금붕어는 뻐끔댔다. 하지만 승부는 늘 정성찬의 승리로 끝이 났다. 애초에 손가락만 한 아이스크림... 정성찬한텐 두 입 거리였다. 바보 금붕어가 아직 발견치 못한 먹이 한 알이 걔 입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성찬은 벌써 입 안에 남아 있는 얼음 알갱이들만 까득까득 씹어 넘기고 있었다. 원래 원빈이 먹어야 하는 부분인데... 마지막 조각까지 부숴 삼키며 성찬은 원빈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삼켜 넘겼다.
자꾸 금붕어한테 불공평한 내기만 하는 것 같다고? 비등비등하게 가다 끝에 다다라서야 겨우 이길 수 있는, 그런 아찔한 내기가 좋다고? 왜? 그게 스릴 있고, 더 성취감 있으니까 당연한 거라고? 글쎄다... 일단 알았어. 그럼 이번엔, 정성찬한테 불리한 내기를 하자.
그렇게 네 번째로 한 먼저 울기는… 성찬의 패배 확률이 백에 구십구 정도였다. 성찬에겐 매일 밤 수도꼭지처럼 우는 버릇이 있으므로, 이기기 정말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아아, 말하자마자 위기가 찾아왔다. 소파 뒤쪽에 떨어져 있던 종이 쪼가리를 발견하자마자 성찬은 가슴을 콩콩 두들겼다. 점 하나 덜렁 찍힌 물고기 표지를 펼쳐보면 삐뚤삐뚤한 원빈의 글씨가 성찬을 반기고 있었다. 성찬아. 성찬이를 잘 챙겨주도록 해. 심심하면 성찬이 짝도 데려와 주고. 분명 혼자는 외로울 테니까. 늘 함께 있어야 해. 오래오래. 꼭 오래오래여야 해. 성찬이 할아버지 될 때까지.
성찬은 정말 툭 치면 빵 하고 울 상태가 됐다....
근데 그러면 승부가 너무 쉽게 끝나버리잖아. 그럼 금붕어 자식이 또 엄청 뻐끔거리면서 불평하겠지. 너랑 더 이상 내기하기 싫다고 떠나갈지도 모르고. 그래서 성찬은 울지 않기 위해... 허벅지를 꽈악 꼬집었다. 손톱 거스러미를 뜯고 뜯다 기어코 피를 봤다. 동그랗게 맺힌 핏방울은 하늘색 손수건 속 금붕어들의 입으로 들어갔다. 움직이지도 않는 금붕어의 입이 달싹거리는 것 같다. 뻐끔뻐끔. 뻐끔뻐끔.
...하지만 그 어려운 확률을 뚫고 성찬은 또 이겼다! 젠장…. 울지 않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가 대단한 걸 하늘도 알아줬던 것 같다. 함께 초를 불고 먼저 도망을 치고 밥을 느리게 먹고 물속에서 전혀 울지 않던 금붕어가 멈췄을 때, 성찬은 울었다. 박원빈 옆 고른 흙에다 금붕어 정성찬을 동그랗게 묻어주며 굵은 물방울을 뚝뚝 흘렸다. 팻말엔 정성찬과 같은 정성찬 이름이 적혔다. 성찬은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꿍얼거렸다. 너도 정성찬이고 나도 정성찬인데 왜 너만 박원빈 만나러 가고 나는 못 가는데. 원빈이 성찬에게 질투했던 것처럼 성찬도 성찬에게 질투를 했다. 성찬도 원빈을 만나고 싶었다.
...만나고 싶으면, 만나면 되지 않을까?
…
그렇게 여전히.
성찬의 집엔 커다란 어항이 있다. 그 속엔 금붕어 한 마리가 살고 있다. 등은 태양 볕 많이 받아 다 타버린 검은색이며, 배로 가도 끄트머리까지 다다라도 계속해서 검은색인 검댕 먼지다.
제철 맞은 붕어빵 열 개를 들고, 한 손엔 붕붕 흔들리는 박원빈 손수건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저를 향해 무수히 뻐끔대던 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성찬은 냅다 걔를 건져 올려 집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색깔 같은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데리고 와 보니 그냥 몸이 까맸다. 원빈의 머리카락 색과 비슷했다.... 헤엄칠 때마다 흔들리는 지느러미는 마치 박원빈 머리칼 같았다. 뛰면서, 바람에 흔들리면서 탈탈 털어대던 원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입 바로 아래쪽엔 하얀 점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고는 모를 세세한 특징이었다. 같이 살았던 원빈도 모르고, 지금도 물에서 뻐끔대고 있는 물고기 역시 모를 성찬만의 비밀이었다. 금붕어는 박원빈과 똑같은 곳에 점이 있었다. 걔는 원빈처럼 매일 밥을 먹고 매일 똥을 싸고 매일 매 순간을 뻐끔거렸다. 매일 숨을 쉬었다. 그래서
성찬은 원빈이라고 불렀다.
원빈의 반응을 예상해 본다. 너, 너 지금 걔보고 뭐라고 했어? 원빈이라고 했어? 성찬이 참 쉽게도 응, 목소릴 내면 원빈은 기가 차 길길이 날뛸 것이다. ...설마 성도 박이야? 그러면 이, 이거 이름 진짜 박원빈이야? 나랑 얘랑 같아? 왜? 왜? 비명 지르며 절규할 것이다. 그럼 정성찬이 조소 흘리며 대답하겠지. 왜긴 왜야.
“입술이 통통해서....”
지. 그니까 쌤쌤인 거야. 통통의 쌤쌤. 그치이, 원빈아.
원빈의 통통한 입술이 뻐끔거린다. 꼭 대답을 하는 것 같다. 뻐끔대는 이 주둥아리에 정성찬은 시선을 사로잡히고야 만다. 뻐끔뻐끔. 뻐끔뻐끔. 얘는 도대체 얼마나 뻐끔댈까. 성찬은 문득 궁금해졌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생각이 떠올랐다.
새로운 내기다.
다섯번째 승부가 시작 전 마지막 종을 울린다. 스타트 라인에 선 주자는 성찬, 그리고 밖에선 헤엄도 못 치는 멍청이 금붕어 딱 둘이다. 주제는 여전히 뻐끔대기다. 룰도 간단하다. 먼저 그만두는 애가 지는 게임이다. 어라라. 승부란 원래 같은 위치 같은 조건에서 행해져야 공정하다고 했던 게 누구더라. 공정하다고 하기엔 지금 배경이 너무 다른 것 같은데. 응응, 그것도 맞는 소리다. 금붕어는 여전히 물 속이고 성찬은 여전히 공기 속이니까. 하지만 좀 봐줬으면 좋겠다. 성찬과 원빈은 수명도 다르지만... 그냥. 그냥 좀 봐줬으면 좋겠다. 왜냐면 박원빈은 늘 정성찬한테 져줬거든. 정성찬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다 져줬거든. 대충 흘겨보면 다 비슷한 박원빈이잖아. 또 나한테 져줄 거잖아. 그러니 넘어가도 괜찮지 않겠어?
앞을 보고 있는지 옆을 보고 있는지 위를 보고 있는지 뒤를 보고 있는지 아님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지. 도통 모르겠는 전방향 미소어 금붕어를 향해 성찬이 소리친다.
셋. 둘. 하나.
우리가 눈을 맞추고, 카운트가 땡 울리면
내기는 또 시작이야.
유리벽 속 금붕어가 답을 한다.
뻐끔뻐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