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경無我境
by. tree
fade in
무서운 게 제일 싫다. 소복이 쌓인 먼지 위에 몸을 웅크리며 원빈은 생각했다.
모서리가 해진 낡은 LP들이 빼곡히 꽂힌 책장 앞, 바짝 웅크린 어깨가 잘게 떨렸다. 손등에 핏줄이 설 정도로 세게 귀를 막은 상태였다. DJ 부스 밖의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방금까지 손님이었던 '어떤 것'들이 선곡한 신청곡이 여태 흐르고 있었다. 눈꺼풀이 떨릴 정도로 강하게 눈을 감아도 사진처럼 찍힌 장면들이 선명했다. 터진 축구공처럼 반쯤 찢어진 두피, 그 안으로 보이던 시뻘건 피, 내장처럼 줄줄 흘러내리던 구불구불한 뇌.
아아아아아아. 손바닥으로 귀를 세게 때리며 소리를 질렀다. 정신을 분산하기 위한 행위였다. 밖에서는 여전히 셀 수 없이 많은 '손님'들이 문을 두드려 대고 있었다. 쿵, 쿵. 아니, 부술 듯이 처박아 대고 있었다. 레트로 느좋 카페로 입소문 났던 오래된 다방의 DJ 부스는 세월을 그대로 간직한 탓에 방범에 약했다. 낡은 나무문이 곧 부서질 듯이 삐걱거렸다. 잘생긴 DJ 알바 얼굴 자랑에 유리했던 나무문 중앙의 투명 유리는 깨진 지 오래였고, 날카로운 단면 안으로 피 묻은 손들이 허우적거리며 팔을 뻗고 있었다. 어떻게든 원빈에게 닿고 싶어 하는 게 서글퍼 보이기까지 했다.
말도 안 돼. 억울함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절대 무서워서가 아니다. (물론 맞다.) 원빈은 살아생전 공포 영화를 제 의지로 본 적이 없었다. '손님'들 같은 좀비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호러 메이즈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에버랜드에서 무슨 좀비 이벤트를 했을 때 친구들이 가자고 사정하는 것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렇게 무서운 것과 담쌓고 살았는데 하필 혼자 아르바이트를 하는 지금, 좀비 사태가 발발하는 것은 원빈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문의 삐걱거림이 심해졌다. 팔랑거리는 팔들은 마치 흔들리는 팽이버섯 같았다. 문이 따이는 건 시간문제였다. 원빈은 손바닥으로 소음을 차단하는 것을 포기하고, 두 손을 간절히 모아 기도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시기 싫으면 안 아프게 죽게 해 주세요. 그것도 싫으면 우리 가족이라도 무사하게 해 주세요. 착하게 살게요. 아니, 어차피 죽을 거니까 얌전히 죽을게요. 아니, 못 죽고 좀비 될 수도 있으니까 사람 안 물고 다닐게요. 제발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원빈은 눈을 더욱 꽉 감았다. 사람에게 물리는 건 많이 아플까. 어렸을 때 개가 덮친 적은 있는데, 물려 본 건 아니어서 아픔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짐승 앞에 혼자 놓인 기분. 다만 다른 것은 그때는 물리지 않았다는 것이고, 지금은 물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때, 소란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눈을 꽉 감은 탓에 정확한 출처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꼭 쌀이 가득 든 자루를 강하게 내리치는 소리와 비슷했다. 비명처럼 끔찍하게 들렸던 '손님'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사그라들었고, 정체 모를 소리도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사방이 고요했다. 눈을 꼭 감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던 박원빈은 그제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이 열린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무엇에게도 물리지 않은 것이었다.
눈을 뜨는 데까지는 많은 고민이 뒤따랐다. 눈 떴는데 현실이 아니라 천국이면 어떡하지. 사실 그러면 땡큐지. 하나도 안 아팠잖아. 그러다 의문이 뒤이었다. 나 차카, 착하게 살았던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면 어떡해. 박원빈 인생 나름의 가장 치열한 고민 중에 자신도 모르게 한순간 눈을 번쩍 뜨게 된 건 흐흐흑, 하는 누군가의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좁은 DJ 부스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왕 겁쟁이 박원빈이 입을 떠억 벌리고도 눈을 못 뗄 정도로. 움직이는 시체였던 '손님'들은 완벽히 죽은 시체가 되어 산처럼 쌓여 있었고, 대부분의 머리가 끔찍하게 박살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어쩌면 그들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을 야구 배트를 쥔 커다란 장정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흐흑, 소리를 내고 있었다.
웃는다고? 발끝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무리 그들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시체라고 해도 한때 사람이었을 것들의 머리를 깨면서 웃는다고? 사이코패스가 틀림없었다. 극한 상황에 굳어 버린 머리로도 빠른 계산이 섰다.
Q. 둘 중 어느 것이 더 생존 가능성이 높은지 고르시오.
1. 살아 있는 사람만 보면 물어뜯기 바쁜 좀비 떼 사이에서 살아남기.
2. 좀비들 대가리 깨는 것이 취미인 사이코패스에서 살아남기.
아무리 생각해도 전자가 더 나았다. 왜, 좀비 영화에서도 좀비한테 죽는 것보다 같은 사람에게 죽임 당하는 게 더 많지 않던가. (물론 박원빈은 좀비 영화를 본 적이 없고, 가끔 형이 거실에서 좀비 영화를 보며 욕하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 손바닥만 한 공간을 어떻게든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지키던 좀비들은 사이코패스의 손에 죽었고, 박원빈은 마르긴 했어도 실용적인 근육으로 꽉꽉 차 있었다. 싸워서 이기지는 못해도 틈만 있으면 존나 뛰어서 도망칠 수 있을지도.......
흐흐흑.
탈출 계획이 완성되어 가고 있을 때 건장한 덩치의 사내가 다시 흐흐흑 소리를 냈다. 어깨는 아까보다 더 잘게 떨리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웃긴 건데. 원빈의 미간이 좁아졌다. 두려움을 넘어 미미한 분노가 인다. 최소한의 사회마저 무너진 디스토피아라고 해도 인간이기 위해서는 인간성을 잃어서는 안 됐다. 남자의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바들거리며 흔들렸다. 인간성을 잃은 인간은 인간이 아닌 좀비나 짐승과 같은 생물일 뿐이었다.
흐흐흑.
그랬는데.
흑.......
짙은 갈색 머리가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빛 아래에서도 뽀얀 피부가 눈에 띄었다. 쏟아질 듯이 커다란 눈알은 물기를 머금어 반짝반짝. 수도를 틀어 놓은 듯 유리알 같은 눈물방울이 하얀 볼의 설산 위로 눈물길을 만들었다. 원빈은 그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입술이 헤 벌어졌다. 이유는 다양했다. 웃고 있다고 생각한 남자가 알고 보니 울고 있어서. 그것도 엄마 잃은 아기처럼 아주 서럽게 울고 있어서. 하지만 사실 다른 것보다도.
사람이 뭐 저렇게 생겼노.
덩치가 크길래 덩치에 맞게 생겼을 줄로만 알았더니 전혀 달랐다. 짙은 쌍꺼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기다란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었다. 높은 코와 동그랗고 촉촉한 입술, 가냘프게 흐르는 턱선. 하얀 얼굴과 대비되게 붉어진 눈꼬리와 코끝. 그 와중에도 배트를 쥔 단단한 손에는 여전히 흉흉한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아주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
"너 나한테 왜 이래?"
마치 모든 게 원빈의 탓이라는 듯 칭얼거리는 목소리.
"너무 무서워......."
무서운 사람치고는 때려잡은 좀비만 열댓 마리는 되는데요. 그 말은 겨우 삼켰다.
무아경無我境
원빈의 작고 소중한 구석 자리에 웬 멀대 같은 남자가 꾸역꾸역 끼어 앉았다. 남자는 원빈의 옆에 꼭 붙어 앉아 줄줄 흐르는 눈물을 벅벅 닦아 냈다. 킁. 몇 번이고 코를 훌쩍이고 나서야 겨우 진정한 남자는 조금 민망한 듯 조용해졌다. 처음 만난 사이에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는 것도 이상해서 그냥 구석에 있던 냅킨만 꺼내 건넸다. 고마워. 물먹은 목소리를 낸 남자가 냅킨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어딘가 묘하게 이상한 사람이지만 현재 원빈에게는 구세주와 같았다. 꼼짝없이 좀비 밥이 될 뻔했던 원빈을 구해 준 것도 그였고(물론 사람 민망할 정도로 울기는 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현재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곁에 있는 인간 역시 그였다. 고로 현재 원빈이 기댈 수 있는 존재는 옆에 앉아 끄응, 힉, 잉, 하고 있는 이 커다란 남자뿐이라는 것이다. 못 미덥기는 했지만 적어도 원빈보다는 용기 있어 보였다. 일전의 상황에서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던 원빈과 용감히 맞서 싸운 남자의 차이가 그것이었다.
그래서 원빈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용기를 냈다. 이제는 아예 냅킨에 얼굴을 묻고 있던 남자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이, 이름이 뭐예요."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 조금은 진정된 듯 원래의 하얀 피부 색을 되찾았다. 하지만 촉촉이 젖은 아랫입술은 여전히 파르르 떨렸다. 눈빛도 어딘가 아까보다 더 깊은 원망이 담긴 듯했다. 왜? 진짜 이 모든 게 박원빈의 탓이라도 되는 것처럼.
"박원빈."
"......."
"최근에 좀비 영화 봤어?"
내놓는 질문은 뜬금없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앞서 말했듯이 박원빈은 좀비, 공포, 스릴러 같은 장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근처에도 안 갔다. 우연히라도 마주칠까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그런 박원빈에게 좀비 영화를 봤냐고? 말이 되나. 그보다도.
"제 이름은 어떻, 어떻게 알았어요?"
이상했다. 왼쪽 가슴팍을 확인했다. 역시나 명찰은 없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 때문에 교복도 입지 않는 날이었다. 혹시 내가 무의식적으로 이름을 말했나. 그럴 리도 없었다. 입을 벌리면 비명을 지를까 싶어 입안을 짓씹을 정도로 꽉 물고 있었다. 원빈의 물음을 듣고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게 문제야?"
문제가 아닌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 아뇨."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절대 소심해서가 아니었다.
남자는 자신을 정성찬이라고 소개했다. 이름을 말하면서 또다시 커다란 눈이 원망을 가득 담고 울먹거렸지만 무어라 덧붙이지는 않았다. 눈이 동그랗고 커서 그런가. 원망을 담아 봤자 무섭지는 않았다. 원빈은 아주 겁이 많은 편임에도, 간식을 빼앗겨 서러운 강아지 정도로만 보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한 사람은 간헐적으로 훌쩍거리고, 한 사람은 멍하니 땅만 쳐다보고 있던 시간을 지나 원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부모님한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문득 가족 생각이 났다. 좀비 사태가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가족이 무사함을 확인해야만 했다. 폰은 어디 있는 건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있어 봤자 터지지도 않았겠지. 원빈의 말에 성찬은 무언가 말하려 입을 달싹이다 이내 꾹 다물었다. 그래, 가자.
좀비 산을 지날 때는 그 커다란 몸을 구깃구깃 접어 안겨 왔다. 원빈도 무서웠는데, 정성찬은 정말 덩칫값을 못 했다. 원비나아아. 같이 가아아. 옆에서 난동을 부리니 두려움이 가시기는 했다. 바닥에 있던 좀비가 끄어억, 소리를 냈을 때는 둘이 부둥켜안고 꺄아악, 소리를 질렀다.
흔들다리 효과라는 게 정말 있기는 한 건가. 설레는 건 모르겠고, 친밀도가 높아지기는 했다. 둘은 손을 꼬옥 잡고 황량한 거리를 걸었다. 성찬은 원빈의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배트를 꽉 쥔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첫인상이 무섭다고 엉엉 울던 모습이라 의지도 하기 싫은 상태였는데, 막상 지켜 주겠다고 저러고 있으니 든든하기는 했다. 원빈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등을 쳐다보며 걸음을 옮기다 문득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몸에 열이 많을 것처럼 생겼는데 막상 잡은 손에서는 별다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온기가 아예 없는 것 같았다. 아예? 그럴 수가 있나?
손을 꼼지락거렸다. 온기가 없다. 핏줄 선 단단한 손을 쓸어 보았다. 느낌도 없었다. 꼭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형."
원빈이 성찬을 불렀다. 내뱉은 후에 깨달았다. 내가 왜 형이라고 불렀지? 정성찬은 자신을 '그냥' 정성찬이라고 소개했는데.
응? 정성찬이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것은 잠시였다. 정성찬의 맑은 눈동자가 곧 원빈의 뒤쪽을 향했다. 원빈아. 천천히, 슬로우를 건 듯한 느린 말이 귀에 닿는다. 원빈아, 뛰어!
강한 힘이 팔을 끌어당겼다. 원빈은 이유도 모른 채 성찬에게 이끌려 거리를 내달렸다. 다리를 바삐 움직이며 겨우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그건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자신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를 알기 위한 본능적인 확인이었다.
그리고 뒤를 돌았을 때, 코앞에서 마주쳤다. 초점이 없는, 영혼을 잃은 시체의 눈과.
으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씨발, 저게 뭐야. 욕을 즐기는 편이 아님에도 절로 욕이 나왔다. 원빈아, 같이 가! 정성찬의 손이고 뭐고 놓은 지 오래였다. 100m 단거리를 달리는 심정으로 뛰었다. 아마 기록을 쟀으면 선수 시절보다 몇 초는 빨랐을 것이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이렇게 달렸는데 어느 정도는 따돌렸겠지.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처럼 속도가 나오지 않았다. 꼭 무언가가 발밑에서 붙잡고 있는 것처럼 달릴수록 아래로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멀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뒤를 돌았다. 안전하다고 느껴지면 잠시 호흡을 고를 생각이었다. 그렇게 뒤를 도는 순간 거짓말처럼 발이 꼬였다. 세상이 빙글 돌았다. 생각보다 바짝 따라온 좀비 무리도, 정성찬의 얼굴도, 파란 하늘도 머리 위에 있었다. 마이너스 배속을 건 것처럼 모든 것이 느리게 원빈을 감쌌다.
겨우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것인데 신기하게도 높은 하늘 위에서 추락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이 쿵, 소리를 내며 아래로 끝없이 떨어졌다.
fade in
스타팅 블록에 발을 올렸다. 눈이 부실 정도로 쨍한 햇빛이 몸을 감쌌다. 준비 신호가 울렸다. 자세를 잡았다. 치켜뜬 눈이 결승선을 향한다. 심판이 손을 위로 뻗었다. 원빈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출발 신호에 맞춰 내달리기 시작했다. 경기장을 채우고 있는 공기가 온몸을 감싸 오는 기분이었다. 빨라지는 심장 박동, 울부짖는 듯한 근육의 울림. 모든 게 원빈이 사랑하는 것들이었다. 원빈은 육상이 좋았다. 육상이나 체육을 할 때면 몸에 오르는 열이나 한계까지 밀어붙여지는 감각들이 좋았다. 그래서 그만두게 되었을 때는 늘 현실적으로 생각하던 원빈까지도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맞다, 육상 그만뒀었지. 그런데 지금 내가 왜 달리고 있지?
속도를 유지한 채 옆을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원빈과 같은 사람이었던 선수는 어느새 한쪽 눈알이 튀어나온 좀비가 되어 있었다. 반대쪽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어깨가 달랑거리는 좀비였다. 뭐고, 이거!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눈을 꽉 감고 전속력으로 달리는데, 그어어, 옆에서 함께 달리던 좀비가 괴상한 울음소리를 냈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콱 바닥으로 처박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픽. 눈알 좀비가 쓰러졌다. 어디에선가 날아온 화살 때문이었다.
원빈의 시선이 화살이 날아온 지점으로 향했다. 경기장 트랙 바깥, 관중석의 중간 좌석에 길쭉한 인영이 서 있었다. 그는 다시 화살을 조준했고, 목표 지점은 누가 봐도 원빈의 옆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는 외팔 좀비였다. 제발, 빨리요. 알지도 못하는 양궁 선수에게 속으로 비는 순간,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은 긴 포물선을 그리며 정확히 외팔 좀비의 심장에,
가 아닌 두 팔 원빈의 팔뚝에 콱 박혔다.
"헉! 원빈아, 괜찮아?!"
원빈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악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극한의 고통에 노출되면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난생처음 깨달았다. 화살이 박힌 쪽은 손도 대지 못했다. 이제 좀비는 안중에도 없었다. 종이에 손만 살짝 베여도 엄살을 떠는 게 원빈인데, 이건 원빈이 견디지 못할 수준의 통증이었다.
누군가 원빈의 상체를 당겨 안았다. 관중석에 있던 양궁 선수가 눈 깜짝할 새 옆에 와 있었다. 짙은 갈색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렸다. 햇빛을 받아 하얀 피부. 더럽게 잘생겼네. 아파 뒤지기 직전에도 그런 감상이 뇌를 스쳤다.
"박원빈, 아파? 이거 어떡해."
남자는 마치 자신이 화살을 맞은 듯이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툭 치면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금메달리스트면서 조준을 왜 이렇게 못해요......."
원빈이 가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간 말에 스스로도 놀랐다. 이 남자가 양궁 금메달리스트구나. 나는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러자 남자가 눈꼬리를 추욱 늘어뜨렸다. 꼭 꼬리를 내린 강아지 같았다.
"금메달은 무슨. 나 오늘 활 처음 잡아 보는데."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묻어 있었으나 아주 잠시였다. 남자의 관심은 금방 원빈의 팔에 꽂힌 화살에게로 돌아갔다. 남자는 그것을 아래위, 좌우로 뜯어보다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리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원빈에게 말했다.
"안 아프다고 생각해 봐."
"팔에 화, 화살이 꽂혔는데 어떻게 안 아파요. 말이 돼요?"
"돼. 그러니까 안 아프다고 생각해 봐."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헛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워낙 확신에 차 있어 더 반박하지 못했다. 이제는 등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원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눈을 감았다. 안 아프다. 나는 안 아프다. 진짜 안 아프다. 절대 완전 네버 안 아프다.
씨발, 아프잖아!
눈물이 찔끔 났다. 이 화살을 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같은 세상에 응급실 문은 열었을까. 학교 보건실은? 아니면 그냥 힘으로 잡아서 빼? 뺐다가 팔 못 쓰게 되면? 온갖 상상에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원빈아."
금메달리스트가 원빈을 불렀다. 원빈이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여전히 아까와 같이 예쁜 얼굴이 시야에 들어찼다. 아, 금메달리스트 아니라고 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길거리에서 보기 힘들 정도의 특출난 얼굴임에도.
"너 그냥 지금 학교 가."
"......네?"
"박원빈, 너 학교 가야 된다고."
갑자기 학교는 무슨....... 잠깐, 여기 학교 운동장 아니었나?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와중에 남자의 얼굴이 서서히 가려졌다. 흐린 시야 속으로 예쁜 얼굴이 사라져 갔다. 어딘가 익숙한데. 꼭 알고 있는 것처럼. 의지와 상관없이 눈이 감겼다. 이름, 물어보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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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안으로 촉촉한 밥알이 감겼다. 정확히 320개의 밥알. 스시 장인 박원빈은 오른손으로 완벽한 계량을 한 후 마치 겜블러 같은 손목 스냅을 이용해 밥을 둥글게 굴렸다. 완벽한 모양과 길이로 잘라 놓은 연어를 밥 위에 올리자마자 딸랑, 소리를 내며 출입문이 열렸다. 이랏샤이마세-! 하루 중 박원빈의 목소리가 가장 커지는 순간이었다.
바 테이블 위로 방금 만든 연어 초밥을 올려 두자 기다란 젓가락이 재빨리 움직였다. 원빈은 젓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고객의 반응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고객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기대에 가득 찼던 까만 눈동자는 이내 방향을 잃고 덜덜 떨렸다. 원빈의 초밥을 맛있게 먹는 고객이 입이 관자놀이까지 찢어진 좀비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좀비는 굳이 벌릴 필요도 없어 보이는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이때, 거의 얼굴 반쪽이 열리다시피 했다.) 맛있게 연어 초밥을 먹었다. 붉은색의 연어가 때가 지저분하게 낀 치아에 잘게 씹혀지는 게 4K로 보였다. 대체 이게 뭐야....... 원빈은 새로운 초밥을 만드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그 광경을 주시하다 이내 제 앞의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오늘도 셰프 특선인가요?"
남자는 원빈의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하얗고 말끔한 얼굴은 그의 양옆으로 앉은 빨간 마스크 좀비, 머리에 철근이 꽂힌 좀비 덕에 더욱 대비되어 보였다. 부드러워 보이는 카멜 색의 코트. 맑은 눈동자는 머리 위의 조명에 반사되어 원래의 갈색빛을 띠었고, 높은 콧대는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어 분위기를 한껏 더했다. 정정한다. 양옆의 좀비 때문이 아니라 남자는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매일 아침 거울을 들여다본 탓에 어느 정도 미남의 얼굴에 익숙한 박원빈에게도 충격적일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마자, 맞아요. 오늘 셰프의 특선......."
원빈은 겨우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뜨는 320개의 밥알. 능숙한 손놀림으로 밥알을 굴리는 동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개를 들면 징그러운 좀비의 감사 인사를 받아야 했고, 그걸 피하면 열이 오를 정도로 잘생긴 얼굴과 눈을 마주쳐야만 했다. 이럴 때에는 조리대에 얼굴 박고 초밥이나 만드는 게 장땡이었다.
"얼굴에 요리가 없어 보였는데, 생각보다 잘하나 봐요?"
예쁘게 굴린 밥알 위로 길게 썬 흰살 생선을 올릴 때쯤, 남자가 말을 걸었다. 원빈이 접시를 테이블 위로 올리며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기다란 눈이 살짝 휘어 있었다. 장난인가? 그의 의중을 파악하는 동안 남자는 접시를 쥐고 초밥을 한입에 넣어 맛있게 씹었다.
"진짜 실력을 맛볼 수 없다는 게 아쉽네."
"......."
"내가 먹었던 초밥 중에 제일 맛있었던 초밥 맛이 나."
그는 초밥을 씹는 내내 의미 모를 말만 이었다. 원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상한 말만 늘어놓는데, 저 얼굴이 왜 익숙하게 느껴질까.
"원빈아."
원빈의 눈이 커졌다. 손은 자연스레 왼쪽 가슴으로 향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내가 오늘 명찰을 달고 있었던가. 아, 나는 학생이 아니라 스시 장인인데 명찰을 왜 달았겠어.
잠깐만, 내가 학교를 졸업했던가?
"이상하지?"
남자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니, 저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어딘가 익숙한.
"나가자. 얘네가 눈치채기 전에."
남자가 원빈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 강한 힘이 아니었음에도 원빈은 속절없이 끌려갔다. 남자의 말 대로 이상했다. 박원빈은 고등학생이었다. 기억이 맞다면 박원빈은 학교를 졸업한 적이 없다. 하고 싶은 일이 딱히 없어 일본으로 유학을 가 스시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배운 적은 없었다. 고로 박원빈은 초밥 장인이 아니었고, 스시는 무슨 살아 있는 생선은 무서워서 만지지도 못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부드러운 카멜 색 코트를 입은 뒷모습을 보았다. 시선이 한참 위로 올라갈 정도로 큰 키, 조금 말랐지만 넓은 어깨, 잘 정돈된 갈색 머리카락. 분명히 처음 보는 게 맞는데도 이상하게 익숙했다. 무엇보다 이 남자는 왜 내 이름을 알고 있지. 왜 나를 오래 전부터 알아 온 사람처럼 말하는 거지. 그에게 붙잡혀 걷는 동안 의문만 계속해서 늘어 갔다.
몇 번의 풍경이 변하는 동안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가끔 주위를 둘러보는 듯했지만 주로 앞만 보고 걸었다. 걷는 게 조금 지친다고 느껴졌을 때, 남자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등에 이마를 박을 뻔한 것을 겨우 면했다.
"기억나?"
남자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원빈이 그의 옆에 나란히 서 그가 보고 있는 풍경과 마주했다. 그것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리는 커다란 회전목마였다. 오르골처럼 꿈결 같은 음악과 함께 빙글빙글 돌고 있는 회전목마는 꼭 천국의 무언가처럼 환하게 빛이 났다.
"어릴 때 박원빈 제일 큰 꿈이 놀이공원에서 회전목마 타는 거였는데."
"......."
"그래서 우리 매일 여기에서 만났잖아."
눈이 마주쳤다. 회전목마의 불빛을 받아 함께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꼭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왜인지 믿고 싶어지는 기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해도 그저 믿어 버리고서 진실로 만들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기억 안 나면, 좀비 영화는 언제 봤는지부터 말해 줘. 언제까지 볼 건지도."
나 진짜 무서워서 못 올 것 같아서 그래. 반짝거리던 남자가 금세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칭얼댔다. 좀비 영화? 박원빈은 좀비, 공포, 스릴러 같은 장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좀비 영화를 봤을 리가...... 어? 그때,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형이 요즘 좀비 시리즈를 봐요."
박원빈의 형은 박원빈과는 다르게 무서운 영화를 꽤 잘 봤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박원빈을 속이고 영화관에 데려가 공포 영화를 억지로 보게 한 탓에 부모님께 크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 최근에는 입시 스트레스를 줄이겠다며 웬 좀비 시리즈를 정주행하고 있었다. 그것도 박원빈의 방에서 훤히 보이는 거실 TV로.
"......시리즈?"
"시즌이 11까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이 2 정도 됐나."
아악. 남자가 머리를 붙잡고 풀썩 주저앉았다. 한참 남았다는 거잖아아. 늘어진 말꼬리 끝에는 'ㅠㅠ' 표시가 붙어 있는 듯했다. 괘, 괜찮으세요? 어색하게 어깨를 두드리자, 커다란 두 손이 원빈의 손을 꼬옥 잡아 왔다. 원빈도 어디 가서 손 크기로는 뒤지지 않는데, 그런 원빈의 손마저 가뿐히 이길 만큼 압도적인 크기의 손이었다.
"너희 형한테 좀비 드라마 그만 보라고 하면 안 돼? 니가 이렇게 매번 악몽 꾸는 거 형은 모르실 거 아니야."
남자가 크고 둥근 눈으로 원빈을 올려다봤다. 그 얼굴이 꼭 장화 신은 고양이 같아서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원빈이 긍정하자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그와 함께 어두웠던 사위가 밝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가 시선을 돌려 동쪽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의 시선을 원빈이 따라갔다.
느낌이 아니었다. 어느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양손으로 원빈의 어깨를 붙잡았다. 원빈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한 번만 말할게. 박원빈, 내 이름은 정성찬이야."
정성찬. 어딘가 낯익은 이름이었다.
"기억해. 우리는 매번 만날 거고, 여기는 니 무의식이야."
아주 아득한 곳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다음 꿈에서 보자."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때림과 동시에 세상이 흰 빛으로 물들었다.
fade in
내리쬐는 조명이 눈부셨다.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려울 정도였다. 원빈은 음악을 느끼는 척 눈을 감으며 은근히 조명을 회피했다. 옆에서는 감미로운 밴드의 보컬이 흘러나왔다. 꼬부랑 영어를 내뱉는데 무슨 뜻인지는 전혀 몰랐다. 그냥 마치 오래 맞춰 본 것처럼 손이 가는 대로 기타를 연주했다. 그러다 실눈을 떠 내려다본 기타는 깁슨 레스폴. 깊, 깁슨 레스폴?! 이거 내 꿈의 기타인데?
손에 감기는 느낌은 아빠의 기타와 별다를 것 없는데, 깁슨 레스폴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황홀해졌다. 박원빈 언제 다 커서 밴드의 기타리스트가 되어 깁슨 레스폴을 연주하냐. 뿌듯한 마음에 몸짓이 활기차졌다. 격렬하게 머리를 털며 기타를 연주하던 그때, 문득 내려다본 관중석에서 좀비들 사이에 우뚝 선 멀대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이 조명을 받아 갈색이었다.
원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게, 내가 언제 이렇게 커서 밴드의 기타리스트가 됐지. 나는 겨우 고등학생이었고, 무대 공포증을 못 이겨 학교 밴드부도 들어간 적이 없는데.
기타를 내려놓았다. 원빈이 연주하지 않아도 음악은 빈 곳 없이 계속됐다. 관객들은 마치 멀뚱히 선 원빈이 보이지 않는 듯이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높이 든 채 허공을 휘젓는 팔이, 꼭 팽이버섯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건 박원빈에게도 아주 익숙한 광경이었다.
"......정성찬."
이름을 부르는 순간 심장을 울리던 드럼 소리가 아득해졌다. 어두운 공연장 안에 두 개의 핀 조명만이 두 사람을 비추는 듯했다. 원빈은 아주 천천히 걸어 무대를 내려갔다.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은 의문도 가지지 않은 채 원빈이 가야 할 길을 터 줬다. 마치 모세의 기적과 같이 원빈과 성찬의 주위만이 숨 막히게 고요했다.
두 개의 핀 조명이 하나가 된 순간 성찬의 기다란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원빈은 그 광경을 아주 깊이 눈에 새겼다.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누구든 으레 그러듯이.
"내 이름 기억났어?"
기쁜 듯 웃는 얼굴 위로 여러 겹이 덧씌워졌다. 세밀하지 않은 조각의 기억이었다.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찬이 손을 내밀었다. 가자. 어디로 가는지 방향은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 손을 잡고 싶었다. 잡은 손에는 여전히 어떤 촉감도, 어떤 온기도 없었다.
무의식은 모든 게 모호하고 희미했다. 그곳이 무의식의 공간이라는 사실마저도 온전히 믿기 힘들었다. 원빈은 성찬이 이끄는 대로 블러 칠을 해 놓은 듯 희뿌연 길을 걸었다. 까만 눈동자가 주위를 둘러보기 바빴다. 성찬은 그 긴 다리로 겅중겅중 경쾌하게도 걸었다.
"형."
원빈은 다시 자연스럽게 성찬을 형이라 불렀다. 그렇게 불러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응?"
"어디 가능, 가는 거예요?"
앞을 향해 걷는 채로 성찬이 뒤를 돌아 눈을 마주쳐 왔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놀라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어디 가서 얼굴로 밀리지 않는 원빈이 보았을 때도 약간 기가 죽을 만큼 수려했다.
"가고 싶은 곳 있어? 여기에서는 니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갈 수 있어."
"아무 곳이나요?"
"응. 또, 뭐든 될 수 있고."
니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성찬은 꼭 방금 요술 램프에서 나온 지니처럼 말했다. 박원빈이 원하는 것이라면 정말 무엇이든 해 줄 것처럼. 원빈은 그 말을 되새겼다.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fade in
정말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둘은 가장 먼저 유럽으로 향했다. 비행기는 탈 필요 없었지만 굳이 타는 척까지 했다. 원빈은 이코노미 클래스를 고집했다. 박원빈의 세계는 현실적이어서 무의식에서도 퍼스트 클래스를 꿈꿀 수는 없었다. 그 덕에 긴 다리를 구깃구깃 접은 성찬이 불편하게 잠든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몰래 카메라에 담았다. 물론 실제로 담지는 못했다.
에펠탑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피사의 사탑을 견뎌 보았고, 콜로세움을 한 바퀴 돌았다. 융프라우에 올랐다가 런던아이를 타고 빅벤을 구경했다. 장소에 제약이 없었다. 한 걸음 내디디면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었다. 해가 지면 굴뚝 빵을 손에 쥐고 카를교를 걸었다. 주황색 불빛들이 어느새 연인이 되어 손을 잡고 걷는 좀비들을 로맨틱하게 비췄다. 너희 형 아직 좀비 시리즈 보고 계셔? 성찬이 굴뚝 빵 안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할짝대며 칭얼댔다. 코에 하얀 아이스크림이 바보처럼 콕 찍혀 있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정성찬과 박원빈은 좀비 실험에 실패한 과학자가 되었다가, 호그와트의 평범한 마법사가 되었다가(정성찬은 슬리데린이 뭔지도 몰랐다.), 절대 반지를 가지고 싸우는 사이가 되었다가(둘 중 누구도 골룸은 아니었다.), 지구를 지키는 슈퍼 히어로가 되었다. 정성찬은 큰 키와는 다르게 애 같은 면이 있어 가끔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원빈은 자신만 할 수 있는 소소한 복수를 했다. 예를 들면.
"박원빈, 너 이런 취향이야?"
확실히 부려 먹을 수 있는 위치로 강등시킨다거나, 그런 것들.
하얀 레이스가 달린 메이드 복은 누가 봐도 정성찬의 사이즈는 아니었다. 짧은 치마는 허벅지의 반을 겨우 가렸고, 뽕실하게 올라왔어야 할 어깨 뽕은 넓은 어깨를 이기지 못해 주욱 늘어나 빳빳해져 있었다. 성찬은 짧은 치마가 어색한 듯 자꾸만 밑단을 잡아당겼다. 언제나 여유롭고 당당했던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그 모습을 보고 원빈은 바닥을 구르며 깔깔거렸다.
원래라면 방이 몇 개인지 세지도 못할 고급스러운 저택에서 메이드 정성찬의 시중을 받으며 호화로운 하루를 보낼 참이었으나, 꼴을 보고 나니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매일 강아지처럼 밖을 돌아다닐 때마다 꼬리를 살랑거리다가, 웬일로 나가자는 말에도 심드렁한 성찬을 억지로 끌고 밖으로 향했다.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이 어디일까. 정성찬을 신나게 골려 줄 만한 곳이 어디에 있을까. 고민하다가 떠오른 것이 고작 출근길 서울 지하철이라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박원빈은 서울 지하철을 잘 몰랐다. 본 것이라고는 가끔 인터넷 기사에 뜨던 사진 정도가 전부였다. 때문에 어딘가 디테일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몸이 자연스레 밀착됐다. 까끌한 레이스의 메이드 복과 광택이 나는 실크 소재의 셔츠가 그대로 닿았다. 키 차이 탓인지 붙을수록 성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 꼴이 되었다. 누군가의 은밀한 B급 취향에나 속할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메이드 복에 폭 안겨 있는 기분은 실로 특별했다. 그런 감상은 원빈만 하고 있는 게 아니었는지 불편한 듯 성찬이 몸을 바르작댔다. 어느 정도 틈을 만들기 위해서였겠지만 그 와중에 사람들이 더 밀려드는 바람에 의도와는 다르게 가슴과 가슴이 더욱 바짝 붙었다. 딱딱한 가슴 근육의 촉감마저 전해지자 원빈은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커다란 메이드남과 눈이 마주쳤다.
가깝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피했다. 둘 중 누구도 이런 식으로 눈을 피하는 게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공기가 급격하게 어색해졌다. 사방에서 가해지는 압박감도 심적 압박에 대비해서는 가벼운 수준이었다. 내가 눈을 왜 피했지? 의문을 던져 봤자 남는 것은 아주 짧은 시간 가까이에서 마주한 동그랗고 붉은 빛을 띤 촉촉한 입술뿐이었다.
서울 지하철을 야매로 체험한 후에는 정처 없이 걸었다. 어딘가 가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앞서 걷는 커다란 등을 올려다보며, 원빈은 그 등을 품고 있는 주위 풍경을 살펴보았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풍경들. 실제로 존재하는 곳인지, 제가 만들어 낸 상상인지조차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 원빈은 그동안 이곳을 탐험하며 스스로 체득해 낸 지식을 정리했다.
1. 이곳은 나의 무의식이다.
2. 이곳의 모든 것들은 나를 기반한다.
3. 나는 이곳을 기억하지 못한다. 일부의 반복되는 요소들만을 희미하게 기억에 남긴다.
4.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은 나를 한계로 한다.
5. 꿈이라는 걸 인지한 후 자각몽을 시작하면, 그로부터 체감 2-3시간 이내 잠에서 깨어난다.
6. 그리고,
원빈이 다시 커다란 등을 바라보았다.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처럼 어느새 원래의 옷을 입고 있는 정성찬의 등을. 정성찬은 모든 자각의 시발점에 있었다. 현실과 이곳을 구분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매개체. 수없는 반복으로 기억을 남기고, 원빈은 기억하지 못하는 반쪽의 추억을 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
문득 궁금했다. 정성찬은 내 무의식 속에 사는 사람일까.
박원빈의 세상의 중심에 선 시계탑이 댕, 댕 소리를 내며 울렸다. 마치 열두 시를 알리는 신데렐라의 종소리 같았다.
fade in
"무죄."
흐아암. 원빈이 길게 하품을 하며 법봉을 탕탕탕 내리쳤다. 벌써 세 번째 재판이었다. 목이 달랑달랑한 좀비 죄수가 연신 감사하다며 허리를 숙였다. 턱을 괸 채 반쯤 눈이 감긴 불량 판사는 이제 좀비에게 관심도 두지 않았다. 지겨웠다. 어차피 공부에는 소질이 없어 판사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는데 대체 왜 판사 따위가 된 거지. 그것보다 업무 강도가 이렇게까지 세다고? 하루에 재판을 몇 개나 하는 건데, 대체.
박 판사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든 말든 다음 재판은 진행되었다. 문이 열리고, 깔끔하게 핏 되는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방청석에 앉은 좀비들의 시선이 남자에게 꽂혔다. 손질된 갈색 머리에 살짝 드러난 이마는 잘생긴 얼굴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원빈이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눈에는 잠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묵직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앞에 선 남자가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원빈을 올려다보았다.
"제일 중요한 재판이 남았는데 벌써 주무시면 안 되죠, 판사님."
기시감이 들기 무섭게 양팔이 붙잡혔다. 원빈은 양쪽에 선 좀비들에게 그대로 들려 판사석에서 내려갔다. 뭐, 뭐야? 소심한 반항을 해 보았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내려다본 몸에는 어느새 판사복이 아닌 죄수복이 입혀져 있었다. 앉힌 곳은 방금까지 원빈이 재판했던 죄수들의 자리. 그리고 바로 맞은편에는 높게 쌓인 서류들을 뒤적거리는 남자가 있었다. 아니, 그건 그냥 남자가 아니라.
"아직 어리둥절한 표정인 걸 보니 죄질이 아주 무겁네요?"
정성찬이었다. 정성찬은 아주 즐겁다는 얼굴로 생글거리며 길게 눈을 마주친 채 앞으로 나왔다.
"피고 박원빈은 원고의 성의를 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 법정에서조차 원고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인정하십니까?"
웃음기 섞인 목소리, 어설프게 법정물을 꾸며낸 말투, 누가 봐도 장난스러운 표정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장난으로 받아칠 수가 없었다. 원빈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성찬은 어느새 원빈의 바로 앞까지 걸어와 있었다.
눈이 마주친 찰나의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그럼 불러 줘, 내 이름."
모르겠다. 박원빈이 최초로 기억하는 정성찬은 좀비 사태가 처음 터졌을 때 DJ 부스에서의 정성찬이었다. 하지만 그게 처음이 아닐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확신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쳤다. 박원빈이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시간이 아주 많이 존재할 것만 같은 미묘한 기분. 정성찬은 정말 박원빈의 무의식 속에 사는 사람일까.
"정성찬."
무의식은 '나'를 기반한다. 박원빈은 그 의문의 조항을 되새겼다.
fade in
파도가 발끝을 적셨다. 비가 아주 많이 오는 새벽이었다. 원빈은 젖은 모래 위에 앉아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박원빈의 꿈은 언제나 꿈을 꿨다. 미래를 점치는 것처럼, 박원빈의 꿈을 점쳤다. 이런 의미 없는 시작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은 현실일지도 몰랐다.
느린 물결처럼 마음속 어딘가 요동치는 기분이었다. 원빈은 아주 천천히 가슴을 쓸어 보았다. 파도가 모래를 쓰다듬는 것과 같은 동작으로. 단단한 피부 아래 주먹만 한 근육 덩어리가 온 힘을 다해 펄떡이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느껴지는 것이 아닌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만.
멀리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듯한 수평선이 보였다. 경계가 흐릿했다. 둘은 아주 비슷해 보였다. 물구나무를 선 채 그곳을 바라본다면 하늘을 바다로, 바다를 하늘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이 꿈이 박원빈의 무의식인지, 아니면 무의식처럼 느껴지는 현실인지 자각할 수 없는 것처럼.
누군가 옆자리에 철퍼덕 앉았다. 아야야.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엄살을 부린다. 원빈은 고개를 돌려 엉덩이를 문지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은 하얀 피부가 언제나처럼 빛이 났다. 살풋 찡그린 눈썹과 내려간 눈꼬리가 짓궂은 느낌보다는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익숙해질 듯 익숙해지지 않는 얼굴에 원빈의 시선이 못 박힌 듯 머물렀다.
그는 원빈의 꿈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또 꿈이네."
일부가 찢겨 나간 듯한 목소리였다. 권태에 빠진 것처럼 나른한 목소리에 옆자리의 남자도 우뚝 멈췄다. 남자는, 아니 정성찬은 무언가를 관찰하는 것처럼 원빈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모래 속 보물을 찾는 아이 같기도, 사건의 단서를 찾는 탐정 같기도 했다. 집요한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원빈은 괜히 고개를 푹 숙였다.
"박원빈."
성찬의 목소리는 낮지 않고 부드러웠다. 산들거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 같은 목소리였다. 누군가 깃털로 간지럽히는 것처럼 어딘가 자꾸만 간지러웠다.
"사춘기야?"
평소 같았으면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며 핀잔을 줬겠지만 오늘은 왠지 쉽지 않았다. 눈앞에 바다가 있기 때문일까. 속이 울렁거렸다. 고개를 들어 바다를 바라본 순간, 파도가 높게 솟구쳤다. 하얗게 부서지며 모래를 적신 파도는 순식간에 다가와 원빈의 정강이를 적셨다. 바다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곧 있으면 다가온 바닷물에 온몸이 젖을 것 같았다.
하지만 피할 이유가 있을까. 가끔은 바다에 푹 절여져 흐물거리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모래에 등을 대고 발라당 누웠다. 어차피 젖을 거라면 흠뻑 적셔 주었으면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쓸 수 없게 젖어서 놓아 버리고 싶었다. 손에 쥔 것들을 훌훌 털어 버리면 모든 게 편안해질 것 같았다.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은 한참을 원빈의 옆얼굴에 머물다가 이내 거둬졌다. 털썩 따라 눕는 소리가 들렸다.
"형은 사춘기 다 지났어요?"
희미한 바닷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아니." 바람결 같은 목소리도 간지러웠다.
"그래도 꿈은 있을 거 아니에요."
"꿈이 뭔데? 지금 우리가 꾸는 거?"
"아니, 그거 말고. 뭐, 의사, 변호사, 그런 거요. 되고 싶은 거."
"아, 그런 거. 있지."
역시. 원빈이 눈을 깜빡거렸다. 없을 리가 없지. 누구나 꿈을 가지고 있으니까. 일곱 살 유치원생도 장래 희망 칸에 2지망까지 써서 내는 세상이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없다. 꿈은 곧 미래와도 직결되었다.
원빈은 가끔 제 미래가 도난당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건 꿈이 아니라 희망 진로 아니야?"
성찬이 가볍게 말했다. 원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성찬을 쳐다봤다. 정성찬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신기할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누가 그러던데. 꿈은 돈을 벌기 위해서 꾸는 게 아니라고."
"그럼요?"
"박원빈, 너 지금 뭐가 제일 하고 싶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원빈은 찝찝하게 축축한 바지 끝단을 만지작거리며 골몰했다. 그러다 문득,
"......지코바 먹고 싶어요."
어이없게도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기억을 더듬어 봐도 저녁에 무엇을 먹었는지 떠올릴 수는 없었다. 무의식은 이렇듯 모든 게 불투명했다. 현실과 꿈의 경계선을 흐리면서도 단단하게 갈라놓기도 했다.
정성찬은 한참을 웃었다. 지코바 나올 때까지 간절히 빌어 보라며 놀리기도 했다. 얄미웠지만 왜인지 미워지지는 않아서 적당히 흘기다 같이 웃어버렸다. 바다를 배경으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배경음처럼 흘렀다.
"어이없는 거 아니까 그만 좀 웃어요."
정성찬이 눈꼬리에 맺힌 눈물방울을 닦아 내며 말했다.
"어이없어야지, 그게 꿈인데."
철썩, 다시 파도가 쳤지만 발끝만 살짝 적신 채 물러갔다.
"꿈은 그런 거라던데. 어이없고, 말도 안 되는데 행복해지는 거."
"......."
"돈이 아니라 행복해지는 게 꿈이라고 했어."
노을을 닮은 짙은 갈색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눈에 담긴 지난 시간을 복기했다. 카페 DJ 알바, 육상 선수, 일식 셰프, 기타리스트. 그 무엇도 박원빈에게 온전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여길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앞으로의 인생을 뒷받침해 줄 여러 후보군일 뿐이었다. 원빈은 지난 시간을 오직 그것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박원빈, 그런 거 말고 니가 행복해지는 걸 찾아."
바다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원빈은 이제야 자신이 이 꿈에 온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fade in
거리가 향기로웠다. 원빈은 눈을 감고 따뜻한 봄바람을 만끽했다. 회색의 아스팔트 위로 분홍색 꽃잎이 소복이 쌓였다. 거리의 양옆은 만개한 벚꽃 나무들이 살랑거리며 꽃잎 비를 내리고 있었다. 원빈은 잡고 있던 커다란 손에 깍지를 끼었다. 쿵, 쿵.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뛰는 것만 같았다.
음?
커다란 손?
으아악. 원빈은 꼭 발이라도 밟힌 토끼처럼 요상한 소리를 내며 펄쩍 뛰어 멀어졌다. 확인한 얼굴은 역시나 정성찬이었다. 성찬은 파란색 과잠에 통이 넓은 청바지를 입은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가만 보니 제 몸에도 같은 파란색 과잠과 비슷한 청바지가 입혀져 있었다. 잠깐만, 반지도 똑같은 거 낀 것 같은데.
"뭐예요, 이게?"
잔뜩 인상을 쓴 채 묻자 성찬은 되려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꿈 주인은 넌데 왜 나한테 물어."
눈썹을 길게 내린 예쁜 얼굴 뒤로 정성찬만큼이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눈이 부시게 밝은 햇살은 조명처럼 두 사람을 비췄다. 마치 짜여진 듯 간지러운 바람이 그린 것처럼 정성찬의 앞머리를 흩트렸다. 그 위로 손톱만 한 벚꽃잎이 얌전히 내려앉았다.
그건 캠퍼스의 봄이었다. 쉽게 거부할 수 없는 류의 것이었다.
원빈은 홀린 듯이 꽃잎에 손을 뻗었다. 높이 차이로 인해 자연히 뒤꿈치가 들렸다. 그걸 보고도 정성찬은 머리를 숙여 주지 않았다. 장난스럽게 살짝 웃을 뿐이었다.
"박원빈."
커다란 두 손이 두터운 과잠 위로 허리를 붙잡았다. 원빈에 의해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꽃잎이 톡 하고 떨어졌다.
"CC 해 보는 게 꿈이었어?"
예쁘게 반짝이던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다. 그 움직임이 느릿했다. 꼭 누군가 인위적으로 시간을 늘린 것처럼 모든 장면이 느리게 흘렀다. 홀린 듯이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랬나. 내가 그런 걸 해 보고 싶었나.
"그럼 손잡고 걸을까?"
예고도 없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손, 감각하는 듯 하지 않는 듯 느껴지는 희미한 촉감. 목덜미에서부터 뜨거운 열이 올랐다. 어쩌면 정말 이런 걸 원했던 걸지도.......
눈을 떴다. 장면이 바뀌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울창한 숲. 갖가지 초록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새벽이슬을 머금은 나뭇잎들은 촉촉했고, 원빈은 누군가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니, 무언가에 탄 채였다. 그제야 원빈은 시선을 내려 자신이 탄 것을 확인했다.
아아악. 자깐, 잠깐만!
그리고 그대로 낙마할 뻔했다. 원빈이 필사적으로 말의 목을 끌어안았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제 위에서 원빈이 그러고 있든지 말든지 우아한 흰 갈퀴를 가진 하얀 말은 고고한 걸음걸이를 유지했다. 말을 꼭 끌어안은 채 떨어질까 봐 덜덜 떨고 있던 원빈은 문득 탑승감이 굉장히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원빈은 단 한 번도 승마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진짜 말을 탄 느낌이라기보다...... 조금 더 익숙한.......
아, 회전목마. 회전목마와 흡사한 탑승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가 탄 말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생긴 게 회전목마의 말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좀 쓸데없이 화려하다고 해야 하나. 무엇보다 이렇게 새하얀 말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원빈은 슬쩍 말의 귀에 대고 "성찬이 형......?" 하고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쪽은 아닌 듯한데, 정성찬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회전목마 탑승감에 점차 익숙해질 때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작은 오두막집이 나타났다. 통나무로 만들어진 낡고 낮은 집은 꼭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모양새였다. 조그마한 굴뚝에서는 그림 같은 동그란 모양의 연기가 뽕뽕 솟아나고 있었고, 집의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원빈이 타고 있던 말은 마치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듯이 집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내려서 집을 살펴보고 싶었으나 말의 등이 생각보다 높아 내려가기가 무서웠다. 말의 갈퀴를 쓰다듬으며 "야, 임마, 다, 다리 좀 접어 봐." 부탁했으나 고고한 백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혼자 내려갈 방법을 이리저리 강구 중일 때, 오두막집의 문에서 무엇인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여러 마리였는데, 키가 원빈의 허벅지까지는 올까 싶을 정도로 아주 작은 난쟁이들이었다.
"공주님이 깨어나실까?"
"마녀의 독은 힘이 강한 거 몰라? 절대 못 깨어나실 거야."
"너, 너 그렇게 무서,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난쟁이들은 자기들끼리 심각하게 이야기하느라 앞에 원빈이 있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원빈은 말의 갈퀴를 꼬옥 붙잡은 채 어딘가 기괴하게 생긴 난쟁이들을 탐색했다. 한 마리는 사슴뿔이 달린 것을 보아 사슴인가 했는데 직립 보행을 하고 있었고, 팔 근육이 이상할 정도로 튼튼했다. 배에는 누군가 그려 놓은 듯한 왕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옆에는 까만 토끼, 아니, 까만 토끼 귀와 고양이 귀를 한 쪽씩 가진 요상한 난쟁이였는데, 등에는 노란 오리를 달고 있었다. 다른 난쟁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딘가 하나씩 이상한 난쟁이들이 총 여섯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던 난쟁이들이 원빈을 발견한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분홍색 곰돌이처럼 생긴 난쟁이가 손가락 두 개로 원빈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백마 탄 왕자님이다!"
나? 내가? 원빈이 어리둥절한 채 대답해도 난쟁이들은 신경 쓰지 않고 원빈의 백마 밑에 와글거리며 몰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 옷차림이 이상하긴 했다. 군인들이나 입을 법한 각 잡힌 제복에 색은 또 새하얬다. 왼쪽 가슴에 달린 수많은 배지들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해군 체험인 줄 알았는데, 듣고 보니 왕자님에 더 가까운 의복이었다.
"왕자님, 저희 공주님을 구해 주세요. 공주님은 정말 선량한 마음씨를 가진 아름다운 분이랍니다."
한 난쟁이가 간청했다. 말하는 투가 왜인지 모르게 동화 톤이었지만 배경 자체가 동화스러워서인지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원빈은 큼큼, 근엄하게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그럿, 그렇게 하지. 그리고는 말에서 내려오다 살짝 넘어질 뻔했으나 금세 중심을 잡고 오두막집으로 향했다. 난쟁이들이 와아, 와아 소리를 내며 그 뒤를 따랐다.
공주는 낡은 오두막집의 중심에 누워 있었다. 난쟁이들이 소중히 꾸며 놓은 듯한 아름다운 꽃 침대였다. 샛노란 치마 위로 파란색의 드레스는 이 동화의 배경을 짐작하게 했다. 난쟁이들이 지키고 있었던 게 백설 공주였구나. 그리고 침대에 가까이 다가선 왕자 박원빈은 그곳에 잠든 백설 공주를 보고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성찬이 형!"
원빈이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모습은 마치 백설 공주에게 첫눈에 반한 백마 탄 왕자 같았다. 난쟁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소곤거렸다. 왕자님이 키스를 해 줄까? 왕자님의 키스가 있어야 깨어나실 수 있어. 원빈은 그 목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하고 성찬의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형, 이러나, 일어나요."
하지만 성찬은 아무리 깨워도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얌전히 감은 눈으로 기다란 속눈썹이 내려앉았고, 하얀 얼굴은 까만 머리카락과 대비되어 더욱 창백해 보였다. 몸을 감싸고 있는 색색의 이름 모를 꽃들도 지금의 성찬보다 아름답지 않았다. 성찬은 넓은 어깨 탓에 드레스도 꽉 끼는 주제에 부정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말 그대로 백설 공주 같은 얼굴이었다.
하얀 볼을 쓰다듬어 보았다. 온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의식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눈조차 뜨지 않은 채 누워 있으니 정말 독 사과를 먹은 공주 같았다. 덜컥 겁이 났다. 정성찬이 이대로 깨어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난쟁이들의 오두막에 누운 채로 더 이상 내 무의식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왕자님이 공주님을 깨워 주시겠지? 난쟁이들이 속삭이듯 말했다. 공주님은 아름다우시니까 꼭 키스를 해 주실 거야. 그건 주문과도 같았다. 원빈은 홀린 듯이 엄지손가락으로 적당히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쓰다듬었다. 왕자님의 키스가 없으면 공주님은 일어나실 수 없어. 천천히 그 입술에 다가갔다. 숨결이 섞일 만큼의 거리가 되었다. 난쟁이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왕자가 공주에게 키스하는 순간.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원빈이 침대에 던지듯 눕혀졌다. 탄탄한 매트리스의 반동을 느끼기도 전에 입술이 부딪혔다. 가벼운 입맞춤이 아니었다. 두 개의 혀가 질척하게 섞였다. 남자는 자연스레 원빈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축축한 입술의 촉감이 익숙했다. 이것은 꼭 현실에서 했던 첫 키스의 느낌과 비슷했다.
눈을 떠 둘러보지 않아도 방의 풍경이 그려졌다. 호텔이나 모텔 같은 숙박업소는 아니었다. 생활감이 있는 적당한 크기의 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왜인지 모르게 불안했다. 하체가 맞닿았다. 명백한 의도가 있는 몸짓이 이어졌다. 원빈은 단단한 어깨를 약하게 밀어냈다. 남자는 거칠게 밀어붙일 때는 언제고, 작은 힘에도 쉽게 밀려났다.
"밖에 멤버들도 있는데......."
멤버들? 원빈은 제 입에서 나온 말에 의문했다. 그리고 정성찬의 풀린 눈과 마주했다.
"끝까지 안 할게."
다정하게 웃는 정성찬은 지금까지의 정성찬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몸의 골격도, 얼굴의 분위기도 어딘가 더 성숙한 느낌이 났다. 소리가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곧 깨어나려는 건가. 그런 예상을 하면서도 먹먹해진 귓가로 제 심장 박동이 크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무언가 상상해 본 적 없던 새로운 감정이었다.
"형, 이거 혹시...... 몽정이에요?"
진심을 더해 물었다. 감각의 밀도가 현실보다 현저히 낮은 꿈속임에도 원빈의 아래는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원빈의 말에 반쯤 풀려 있던 눈이 가볍게 휘어졌다. 터지듯 나오는 웃음소리마저 예쁘게 들렸다.
"오늘 너무 힘들었어? 지금 자는 중인 거야?"
촉, 촉. 입술에 참새 같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원빈은 알 수 없는 깊은 애정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역시나 오늘의 정성찬은 무언가 이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걸 놓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무의식이 박원빈에게 말하고 있는 건.
"아니, 계속해요."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박원빈의 무의식이 박원빈이 원한 것이 이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fade out
알람 소리도 없이 눈을 뜬 원빈은 한동안 침대 위에 그대로 누워 천장과의 눈싸움을 이어 갔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잠옷 바지 속을 손으로 확인했다. 축축하게 젖은 섬유의 감촉이 선명했다.
몽정이었다.
fade out
최근의 원빈은 가끔 무언가를 잃은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일상은 평소와 같이 무료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족들과 밥을 먹고, 교복을 입은 채 학교로 향했다. 영 집중이 안 되는 수업을 몽롱한 상태로 듣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엎드려 잠을 청했다.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장난을 칠 때는 잠시 잊었다가 혼자 남겨지는 시간이 되면 사색에 잠겼다.
이상한 일이었다. 잠을 자도 숙면을 못 취해 학교만 오면 병든 닭처럼 꾸벅거렸던 때도 지났는데. 최근의 원빈은 가장 큰 인생의 고민 중 하나가 사라진 상태였다. 물론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으니 이제 스스로 노력할 일만 남은 상태였다. 그 덕에 지난 며칠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그럼에도 자꾸만 잠에 들어야 할 것만 같은 미묘한 확신이 들었다.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창밖의 교정에 팝콘 같은 벚꽃잎이 흩날렸다. 원빈은 그 모습을 아주 길게 바라보았다.
fade in
흐린 무의식 속을 뛰어다녔다. 실로 오랜만의 자각몽이었다. 선명하지 않은 배경들이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방향도, 목적도 없었다.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무엇을 찾아야 할까.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기억을 헤집었다. 그것이 나의 기억인지, 또 다른 무의식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리에는 감각이 없었다. 너무 오래 달린 탓인지, 무의식이기 때문에 감각조차 없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고 느꼈을 때, 원빈은 어느 장소에 당도했다. 화려한 색색의 불빛들이 원빈마저 물들이는 듯했다. 그곳은 언젠가 와 봤던 회전목마 앞이었다.
'어릴 때 박원빈은 제일 큰 꿈이 놀이공원에서 회전목마 타는 거였는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 매일 여기에서 만났잖아.'
기억나? 그렇게 묻던 얼굴. 언제나 박원빈의 무의식 속에 살았던 얼굴.
정성찬.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fade out
잠을 자야 했다.
원빈은 매일 아침 숨이 찬 상태로 깨어났다. 꼭 백 미터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땀에 흠뻑 젖은 채였다.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았다. 다시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학교에서 최대한 잠을 보충하려 해도 그뿐이었다. 잠을 자야 한다는 집착적인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해야 더 깊은 잠을 잘 수 있지?
fade in
눅눅한 풀숲을 걸었다. 오랜만에 다시 온 숲은 어딘가 음산해져 있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바지가 젖는 듯한 환상이 일었다. 그래, 이 모든 건 환상이었다. 박원빈에 의한.
한참을 숲을 헤치고서야 익숙한 오두막집에 다다랐다. 그곳은 여전히 따뜻한 연기를 내뿜으며 활짝 열려 있었다. 안에서는 난쟁이들이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원빈은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원빈이 마지막으로 본 정성찬은 독 사과를 먹은 채 쓰러져 있던 모습이었으니까. 어쩌면 이곳에 여전히 누워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한 내부에는 난쟁이들만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 완쟈, 왕자님이다!"
그때, 토끼 귀와 고양이 귀를 한 쪽씩 가진 난쟁이가 원빈에게 다가왔다. 원빈은 그와 눈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접어 쪼그려 앉았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공주님 찾으러 왔어. 혹시 본 적 있어?"
'공주님'이라고 말하며 약간 소름이 돋았지만 꾹 참았다. 난쟁이는 토끼 귀를 쫑긋거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꿈은 이미 끝났어요. 끝난 꿈은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에나 다시 재생할 수 있어요."
기대를 가득 담았던 눈이 추욱 처졌다. 힘이 빠졌다. 이미 잠들어 있음에도 더 깊이 잠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처음 만났던 DJ 부스, 일본식 식당, 회전목마, 캠퍼스. 그 어디에서도 정성찬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못 본 것이 벌써 몇 주째였다. 아니, 사실 정확한 시간은 몰랐다. 박원빈은 꿈을 꿀 때에만 정성찬을 기억했고, 눈을 뜬 이후에는 모든 걸 잊었으니까. 이마저도 언제까지일지 몰랐다. 꿈에서는 반복되지 않는 것을 금방 잊었다.
그때, 동그랗고 까만 손이 원빈을 콕콕 찔렀다.
"하지만 우울의 바다에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우울의 바다?"
"네. 사람들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꼭 그 바다에 잠겨 있거든요."
귀가 먹먹했다. 난쟁이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원빈은 그가 말한 것을 무의식에 남기려 몇 번이고 반복했다.
우울의 바다. 그곳은 원빈도 간 적이 있었던 곳이었다.
fade in
잔잔한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배경에 깔렸다. 정성찬은 푸른 바다를 바라본 채 모래사장에 앉아 있었다. 평범한 옷차림의 그는 오랜만이었다. 매번 백설 공주의 드레스나 법복 따위를 걸친 것만 보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확실히 마지막 꿈의 정성찬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앳되었고, 키도 더 작은 듯해 보였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바다를 찾느라 자각의 시간을 허비한 탓이었다. 원빈은 당장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그의 옆에 앉았다. 성찬은 원빈을 보고 잠깐 놀란 듯하다가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야? 다시 못 보는 줄 알았는데."
해맑게 반갑다는 투에 괜히 속이 끓었다. 찾아다닌 것은 저뿐인 듯했다. 참은 것이 무색하게 날카로운 말이 튀어 나갔다. 물론 타인이 보기에는 웅얼대는 투정 정도로만 보였지만.
"왜 갑자기 사라졌어요?"
"내가?"
"매일 꿈에 나타났으면서 이젠 나타나지도 않고, 말도 없이 사라졌잖아요."
"사라진 건 내가 아니야. 너지."
정성찬은 차분히 대답했다. 마치 이런 말을 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 같았다.
"이제 더 이상 꿈을 꿔야 할 이유가 사라진 거야. 누구나 다 그런 시기를 겪어."
"......."
"아마 이렇게 만나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일 거야."
처음이 아닌 것처럼 담담했다. 정성찬은 이런 이별을 경험해 본 것일까.
"그런 말 들어 봤어? 꿈은 또 다른 평행 우주래."
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꿈이 끝나가는 신호였다. 원빈은 그 꿈을 붙잡고 싶어서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무거운 눈꺼풀은 힘없이 아래로 처지기만 할 뿐이었다.
"니가 꿈속에서 만나는 건 다른 우주에 속한 너라고."
정성찬이 서서히 흐려졌다. 몸이 추를 단 듯 무거웠다. 입술을 떼기가 어려워서, 나의 모든 우주에는 내가 아닌 정성찬이 존재했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fade out
투명한 약봉지를 하나씩 뜯었다. 평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던 어머니의 것이었다. 원빈은 손바닥 위에 놓인 몇 개의 알약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잠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fade in
자각하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우울의 바다를 찾았다. 정성찬은 여전히 그곳에 앉아 있었다. 다짜고짜 그를 잡아 일으켰다. 깜짝 놀란 정성찬이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다.
"박원빈? 너 어떻게 된, 읍!"
그리고 그대로 박원빈의 손에 의해 막혔다.
"쓸,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입 좀 다물어요."
실랑이를 벌일 시간이 없었다.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원빈은 오늘 마지막일지도 모를 시간을 최대한 아껴 쓸 작정이었다. 입이 막힌 채 동그란 눈을 한껏 키우던 정성찬은 이내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그리고는 손바닥에 촉, 촉. 입술을 찍어 댔다. 뭐, 뭐하는데....... 귀끝이 붉어진 원빈이 괜히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입술에서 손바닥을 내리지는 않았다.
둘은 손을 꼭 잡은 채 걸었다. 원빈이 아까부터 성찬이 어디론가 증발이라도 할까 불안해했기 때문이었다. 흐릿한 무의식의 공간들을 지나 도착한 곳은 화려한 놀이공원 앞이었다. 언젠가 와 본 적이 있는 듯한 익숙한 모양새였다. 그 안에는 이제야 좀 사람다워진 모습의 좀비들이 마치 놀이공원에 놀러 온 입장객들처럼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정성찬은 어딘가 촉촉해진 눈빛으로 놀이공원 입구를 올려다보았다. 박원빈은 그런 정성찬을 눈에 담다가 그의 손을 이끌었다.
자유 이용권을 끊을 필요도 없었다. 둘은 당당히 입장해 놀이공원을 즐겼다. 난쟁이들을 닮은 머리띠를 나눠 끼고, 놀이공원도 식후경이라는 정성찬의 인생관에 따라 매점으로 직행해 소시지와 추로스를 먹었다. 무의식에서는 아는 맛이 가장 무서웠다. 실제로 먹고 있지 않음에도 탱글한 소시지의 식감과 새콤한 케첩의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추로스를 든 정성찬은 박원빈의 소시지를 한참이나 노리다 박원빈이 배불러서 막대를 놓을 쯤에야 남은 소시지를 가져갔다.
T 익스프레스는 성찬 혼자 탔다. 꿈이니까 타도 무섭지 않을 거라며 끝까지 꼬시는 말에도 원빈은 넘어가지 않았다. 좀비들과 함께 팔을 높이 들고 소리를 지르는 성찬을 보며 원빈은 제가 탄 것마냥 무서워했다. T 익스프레스를 탄 후에는 같이 피터 팬을 탔다. 놀이기구 근처에만 가도 기겁을 하던 박원빈은 피터 팬을 타는 내내 텐션이 올라 웃어 댔다. 정성찬은 그 얼굴을 보겠다고 내내 뒤를 돌아보다가 좀비 캐스트에게 경고를 먹었다.
피터팬에서 내린 후에는 그 옆에서 판매하고 있던 솜사탕을 나눠 먹었다. 박원빈은 손톱만큼 몇 번 뜯어 먹다 단맛에 물려 손을 놨고, 정성찬은 남은 솜사탕을 접고 접어 한입에 욱여넣었다. 원빈의 미간이 좁아지다 이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먹, 먹으면 안 달아요?"
입 안에 남은 솜사탕을 녹여 먹던 정성찬이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확인해 볼래?"
얼굴이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코끝이 닿을 것만 같다. 지척에서 설탕의 단내가 나는 듯했다. 느껴질 리 없는 숨결이 입술을 간지럽혔다. 원빈은 깊은 물 속에 들어온 것처럼 숨을 집어삼켰다. 숨을 쉬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마저 무의식에서는 잊어버리기 쉬웠다.
정성찬은 기억할까. 원빈은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정성찬의 하얀 얼굴을 떠올렸다. 살포시 닿았던 폭신한 입술의 촉감을 떠올렸다. 아니, 사실은 정성찬의 촉감이 아닐, 무의식이 만들어 냈을 감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평소와 달라 보이는 정성찬과 했던 진한 스킨십까지.
자꾸만 열이 오르는 듯했다. 진짜 열이 오르는 건지, 착각인지 알 수 없었다. 원빈은 그저 홀린 듯 그 눈과 마주했고, 그 속은 이곳만큼이나 깊고 어지러웠다.
"아."
그리고 강아지풀처럼 간지러운 것이 입가에 닿았다. 정성찬이 남은 솜사탕을 원빈의 입가에 가져다 댄 것이었다.
"돼, 됐거든요."
고개를 휙 돌렸다. 원빈이 생각했을 때도 과한 반응이었다. 아하하. 솜사탕만큼이나 단 웃음소리가 원빈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토라진 마음으로도 고개를 들었다. 잔뜩 접힌 눈과 예쁘게 휘어진 눈꼬리, 모습을 드러낸 앞니가 귀여웠다.
기억할 수 있을까. 아무리 눈에 담으려 노력해도 그대로 휘발되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반복되지 않는 꿈은 쉽게 잊힌다. 게다가 이곳은 박원빈이 주인인 무의식이었다. 일부일 뿐인 정성찬은 영원히 머물 수 없었다. 차라리 무아경에 들어 꿈이라는 현실마저 잊은 채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긴 밤이 이어졌다. 색색의 조명들이 두 사람을 비췄다. 신나서 바이킹을 타는 정성찬을 구경했다. 꿈에서는 배가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또 매점에 들러 핫도그를 사 먹었다. 호러 메이즈의 입구까지 갔다가 부둥켜안고 뒤돌아 나왔다. 피터 팬을 한 번 더 탔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음을 되짚듯이 불러 보았다. 퍼레이드를 구경했다. 하얀 피부 위로 여러 색깔의 조명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다가 정성찬의 꿈을 가늠해 봤다. 정성찬은 왜 아직도 꿈을 꿀까. 궁금해해 봤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회전목마였다. 신이 나서 들어가려던 정성찬을 붙잡았다. 꼭 물어봐야 할 게 있었다.
"형이 그랬잖아요, 어렸을 때 내가 회전목마 좋아했다고."
"......."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언제예요?"
듣고서도 기억하지 못할 조각의 기억이라도 찰나에 쥐고 싶었다. 정성찬만 기억하는 순간들을 상상으로라도 그려 보고 싶었다. 정성찬은 소매를 붙잡힌 채로 아주 잔잔하게 눈을 맞춰 왔다. 정성찬이 한참을 앉아 있던 바다가 그곳에서 물결치는 것 같았다.
"들어도 어차피 기억 못 할 거야."
그리고 내려진 답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도 기억 못 하니까."
정성찬이 웃었다. 발등을 덮을 듯 말 듯 끝에서 찰랑이는 파도처럼 얕고도 울렁이는 웃음이었다.
이제 타자. 정성찬에 손에 이끌려 회전목마에 올라탔다. 우리는 각자의 말 위에 마주 보고 앉았다. 스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느린 속도에도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어린이들의 동심을 자극할 발랄한 음악이 회전목마가 돌아가는 동안 내내 흘러나왔다. 아래위로 움직이는 회전목마를 따라 몸을 흔들다 정성찬과 눈이 마주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꿈은 언제나 제멋대로였다. 감정마저 쉽게 가지고 놀았다.
출구를 향해 걸었다. 둘의 옆으로 즐거워 보이는 좀비들이 풍선이나 솜사탕 따위를 들고 지나갔다. 원빈은 형의 좀비 시리즈가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세어 보다 이내 그만뒀다. 결국 시리즈가 끝나기 전에 성찬과의 마지막이 돌아왔다.
출구에서 희미한 빛이 샜다. 일반적인 놀이공원과는 다르게 무의식의 놀이공원은 하나의 문으로 통했다. 빛이 가까워졌을 때 성찬이 원빈의 손을 잡아 왔다. 캠퍼스를 걸었던 그때처럼, 마치 연인이라도 되는 듯이 다정하게 깍지를 끼었다.
"이제 다시는 그러지 마."
단호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마주친 눈이 다정했다.
"뭘요?"
"오래 잠들고 싶어 하는 거."
원빈이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었구나. 꿈이 길어지고 있다는 걸.
귀가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오래 잠드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조금 더 정성찬의 말을 듣고 싶어 감기려는 눈에 힘을 줬다. 어차피 깨어나면 기억하지 못할 이야기더라도 그 목소리를 조금만 더 담아 보고 싶었다.
"이제 못 보는 거예요?"
거짓말처럼 눈물이 차올랐다. 자고 있음에도 자꾸만 잠이 왔다. 잠들고 싶지 않아서 고인 눈물을 흘려 냈다. 볼을 타고 흐르는 촉감도, 눈물의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호흡이 자꾸만 가빠졌다. 약하게 고개를 끄덕인 정성찬이 아주 조심스럽게 볼과 턱을 닦아 주었다. 여전히 어떤 감각도 닿지 않아 그곳에 눈물이 흘렀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다.
"이 꿈은 쉽게 잊힐 거야."
"......."
"나도 너를 아주 오랫동안 잊었거든."
정성찬은 웃고 있었다. 어쩌면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졸음과 눈물로 눈앞이 흐려서 분간이 어려웠다. 이상했다. 박원빈은 정성찬을 자주 잊었지만 정성찬은 박원빈을 잊은 적이 없었는데. 잃은 기억의 조각에서는 정성찬이 박원빈을 잊었다고 했다.
"이제 자, 원빈아."
단단한 팔이 어깨를 당겨 안았다. 아니, 쓰러지듯 기댔다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이었다.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더 이상 꿈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언제나 니 무의식 속에 있을게."
온기 없는 품 안의 무의식 속에서 눈을 감았다.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fade out
박원빈은 다시 눈을 뜬다. 어느 카페의 DJ 부스도, 육상 트랙도, 재판장도 아닌 울산의 자신의 방 침대 위에서.
이곳은 또 다른 무아경일까.
아니면.
fade out
징크스, 머피의 법칙. 잘못될 일은 결국 잘못되기 마련이라는 말을 원빈은 철석같이 믿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ktx 예매하는 것을 잊어 2배는 더 오래 걸리는 고속버스를 타야 했고, 일기 예보를 서울이 아닌 울산의 것으로만 확인하는 바람에 비가 올 것을 대비하지 못해 내구성이 약한 일회용 우산을 사야 했다. 크기는 얼마나 작은지 혼자 쓰는데도 커다란 백팩이 다 젖었다. 그렇게 잡아 탄 택시는 택시비만 오만 원이 넘게 나왔다. 서울이라 그런가 뭐가 이렇게 비싸노....... 한순간에 거덜 난 일주일 용돈에 허망해하며 청담 초등학교에서 내렸는데,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회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그때 직원 누나랑 청담 초등학교에서 내렸던 것 같은데. 원빈은 그 일대를 한 시간 넘게 걸어 다녔다. 비는 금방 그쳤지만, 미아가 된 기분으로 모르는 거리를 혼자 걸으니 진이 쭉 빠졌다. 어찌저찌 도착한 회사에서는 직원 누나가 걱정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왜 전화를 안 했냐는 물음에는 그냥 웃고 말았다.
회사는 세 번째 방문이었다. 첫 번째는 디엠을 받은 직후 오디션을 보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연습생이 되기 위한 절차를 거치기 위해서였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레슨을 받고 연습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원빈은 사무실 한쪽에서 누나가 준 따뜻한 차를 받아 홀짝거리다가 그녀가 소개해 주는 직원들과 어색하게 인사했다.
연습생들을 소개해 준다고 했을 때는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원빈은 입고 온 교복을 괜히 한 번 툭툭 털고, 머리를 만졌다.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엔터사의 연습생들은 두말할 것 없이 잘났을 게 뻔했다.
하지만 오늘은 머피의 법칙이 적용되는 날이었다. 하필이면 ktx 예매 실패로 강제 버스행을 택해야 했던 박원빈은 울산에서 서울까지 4시간이 넘는 강행군에 지쳐 눈깔 관리도 어려운 상태였다. 신경 써 착한 표정을 짓지 않으면 처음 보는 사람들은 으레 박원빈을 오해했기 때문에, 첫인상을 보이기에 앞서 눈꼬리 내리기는 필수였지만 그것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회사 직원을 따라 연습실을 다니며 인사를 나눠 본 결과, 그곳의 연습생들은 새로 온 박원빈에게 딱히 우호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심을 눈에 띄게 보이는 경우도 허다했다. 반기지 않는 인사를 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대문자 I인 박원빈의 새로운 사람 허용 임계치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새로운 연습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여러 남자 연습생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두 명이었다. 순한 얼굴 보일 힘도 없어 세모난 눈 뜨고 인사를 건네는데, 시야 안에 들어오는 얼굴들이 심하게 잘생겼다. 질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히려 힘이 죽 빠져 무력감이 들 정도로 오목조목 예쁜 얼굴과 빚어 놓은 듯 입체적으로 잘생긴 얼굴. 그중, 예쁜 얼굴의 연습생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이름이 원빈이야?"
"네, 안녕, 안녕하세...... 제 이름은 어떻게."
"명찰에 있는데? 이름값 한다, 너. 학교에서 인기 많겠다."
오늘 만난 여러 서울 사람들 중에서도 단연 가장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간지럽게 말하며 참 예쁘게도 웃었다. 뭐, 뭐 저렇게 생겼노.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했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있을 것 같았으면 미리 말을 해야지. 아이돌 같은 건 꿈도 안 꾸게. 손끝, 발끝, 시선 끝. 모든 말단이 간지러웠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원빈은 제 왼쪽 가슴에 달려 있을 명찰을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명찰이 있으니까 이름을 아는 게 당연한데도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꼭 먼저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 이런 걸 데자뷰라고 했던 것 같은데.
다시 눈이 마주쳤다. 크고 기다란 눈이 예쁘게 휘어진다. 두 개의 시선이 평행하게 마주했다.
무아경 속을 기억의 조각들이 스쳤다. DJ 부스와, 육상 트랙과, 팔에 꽂힌 화살과, 320개의 밥알과, 좀비와, 피터 팬과, 흰 갈퀴를 가진 백마와, 여섯 명의 난쟁이와, 따뜻한 불빛의 회전목마와, 그리고.
꿈을 이룬 현실로 다시 돌아온다.
원빈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낯선 이가 대답했다.
"나는 정성찬이야. 잘 부탁해."